좋은 글이 꼭 읽기에 즐겁고 유쾌한 것만은 아니다. 읽기가 힘들고 문장 하나 하나가 가슴을 쳐도 읽을 수 밖에 없는 글도 있다. 한국의 많은 학생들이 자살을 생각한다고 한다. 더구나 아이들은 부모에게 저항하기 위해 자살을 심각하게 고려한다고 한다. 죽음으로써만 자신의 존재 의미를 드러낼 수 밖에 없는 아이들에게 삶이란 고역이다. 마치 노동자에게 노동이 고역이고 노예노동인 것처럼 아이들에게 학교 생활은 노예 신분을 비자발적으로, 혹은 자발적으로 감내하는 곳이다. 아이들은 타율을 자율이라 내면화하고 억압을 의지로, 복종을 도덕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곳, 학교란 그런 곳이다. 어디 한국 뿐이겠는가.

[경향시평] 자살 중학생 “아이팟을 함께 묻어주세요”

정희준 | 동아대 교수·문화연구 chunghj@dau.ac.kr

번듯한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가족이 식사를 한다. 조금 비싸기는 해도 ‘우리 집도 행복한 중산층’이라는 것을 입증하려면 가끔씩 함께 가야 한다. 그런데 식사하는 모습이 전혀 ‘행복한 가족’ 같아 보이지 않는다. 대화가 보이지 않는다. 중·고등학생인 아이들은 머리를 꺾은 채 ‘문자질’에 열중이고 엄마는 밥 좀 먹으라고 채근하는 정도다. 아빠는 두리번거리며 밥을 먹다가 가끔 엄마랑 짧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는데 사실 혼자 먹는 거랑 별 다를 바 없다. 소가 여물 먹는 것 같기도 하다. 충분히 이해가 된다. 평소에 안 하던 대화가 갑자기 양식 먹는다고 터지겠는가.

옛날엔 그래도 거실에 있는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 모이기라도 했다. 그러나 요즘은 ‘각 방’ 생활이 대세다. 컴퓨터에 스마트폰까지 등장했으니 방에서 나올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온라인에 ‘접속’된 채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가정이라는 물리적 공간은 부차적인 것이다. 사실 가정은 ‘화만 내는 아빠’ ‘잔소리하는 엄마’가 지배하는 공간이기에 아이들에게 가정이란 그들 표현대로 ‘짱나’는 곳일 뿐이다.

이런 와중에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완전히 파국으로 몰고 가는 게 있으니 바로 학교성적이다. 성적이 좋지 않으면 부모는 아이들에게 화내고 욕하고 때리기도 한다. 깊은 마음의 상처를 주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부모 자식 간은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고 저주하는 사이가 된다. 그 어리고 소중한 아이들에게 “나가 죽어”라는 말을 우리처럼 쉽게 하는 사회가 또 있을까. 동물의 왕국이 차라리 인간적이다.

정신과 전문의 이시형 박사는 중학생이 겪게 되는 혼란과 방황을 ‘정상적 정신분열증’이라고 칭한다. 누구나 겪게 되는, 성장과정의 한 단계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부모들은 청소년기 자녀들을 사랑으로 보듬어 주어야 함에도 성적을 가지고 자식들의 숨통을 조른다. 방황하는 청소년들은 의지할 곳을 찾게 마련인데 부모는 상처를 주고 등을 돌려버리는 것이다. 자식이 부모에게 배신당한 것이다.

지난주 부산의 중학교 2학년 학생이 20층 베란다에서 몸을 던졌다. “이번 시험 정말 잘 치려고 엄청 노력했지만 뜻대로 안됐다. 성적 때문에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는 이 세상을 떠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스마트폰을 갖고 싶었던 그 아이는 중간고사 성적이 오르면 사 주겠다는 부모의 약속에 나름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 스마트폰도 얻지 못하고 부모에게 꾸지람까지 들은 그는 “성적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이 사회를 떠나고 싶다. 한국이 왜 자살률 1위인지 잘 생각해보라”며 우리 어른들을 일갈한다. 그런데 그 아이가 남긴 마지막 부탁이 나의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아이팟을 함께 묻어달라.”

가족 대신 그 아이가 함께하고자 했던 마지막 하나는 바로 음악을 들려주는 손가락만한 기계였다. 그렇다. 이 아이들에게 소비는 욕망의 충족이 아니라 결핍을 메우는 것이다. MP3플레이어와 스마트폰은 외로움과 싸우기 위해 없어서는 안되는 물건이자 친구인 것이다. 그것이 없으면 상처 받은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던 것이다. 이제야 이해가 될 것 같다. 아이들이 왜 PC방에서 같이 밤을 새우고 왜 노스페이스를 입고 몰려다니는 것인지. 그들은 그렇게 서로를 의지하며 지내는 것이다.

인터넷에는 자살을 고민하는 아이들로 넘쳐난다. 모두 부모에게 배신당한 아이들이다. “너만 없으면 잘 살겠다”는 엄마의 말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다는 아이, 칼로 손목을 그었던 아이, 휴대폰 충전기로 목을 졸랐던 아이, 고층아파트 난간에 매달려 본 아이, 약을 한 통 먹었는데 부모가 살려내 다시 자살을 준비하는 아이도 있다. 중학생이 글을 올리면 초등학생까지 쫓아와 달래주고 자기 이야기 같다며 같이 울어준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지금 죽지 말라며 뭐라 하는지 아는가. “부모님이 너무 불쌍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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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31 18:59 2011/10/31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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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서 녹색당을 시작합니다

오늘 우리는 생명, 그리고 평화를 드높이 외칩니다.

우리는 풀뿌리 민주주의와 정의가 실현되고 자립과 자치가 가능한 ‘녹색사회’로의 전환을 위해 여기에 함께 모였습니다. 우리의 노력에 따라 충분히 행복하고, 뭇 생명과 공존하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우리는 새만금과 4대강에서 자행된 대규모 토건사업으로, 아름답던 생태계가 파괴되고, 우리 삶의 뿌리가 상처 입고 병드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더욱이 지난 3월 11일, 일본 후쿠시마의 핵발전소 사고는 생명을 파괴하고 삶의 기반을 송두리 채 앗아갈 수 있는 반생명, 비윤리의 결과를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성장 지상주의와 개발 만능주의의 태도를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상처는 곯을 만큼 곯아 기후변화, 핵사고 등에서, 빈부격차를 조장하는 금융위기 등으로, 우리의 ‘공동체’를 지리멸렬의 위기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아토피와 같은 환경병의 증가, 모래놀이터가 우레탄으로 바뀌어 흙을 만지지 못한 채 크는 아이들, 밤 12시를 넘어서까지 학습에 시달리는 청소년들, 세계최고의 자살율, 만연한 성희롱과 성폭력은 우리 사회에 짙게 드리운 절망의 그늘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제는 성장이 아니라 성숙이고 행복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부터, 그리고 나 자신부터 변화를 위한 행동이 필요합니다.

정치의 바깥에서는 이미 녹색전환을 위한 노력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환경운동, 생명운동, 풀뿌리운동, 여성운동, 인권운동, 평화운동 등 여러 이름의 운동들이 지평을 넓혀 왔습니다. 대안에너지, 대안경제, 대안교육 등 대안사회의 모습들도 만들어져 왔습니다. 협동조합, 귀농ㆍ귀촌운동, 도시농업 등 대안적 삶을 찾으려는 시도들도 이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아름다운 시도는 아름다운 것으로 끝맺음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노력을 막아서는 거대한 장벽이 존재한다는 것을 단 한 순간도 잊을 수 없습니다. 끝 모를 토건사업, 핵발전소 확대, 날로 심각해지는 빈부격차, 위협받는 평화.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정치적 역량을 확보하지 못하면 막아낼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았습니다. 우리의 장벽은 정치입니다. 여기에 ‘녹색당’의 창당이유가 있습니다.

녹색당은 단지 환경분야에 국한된 정당이 아니고, 국가의 틀에 갇힌 정당도 아닙니다. 기존 정치의 울타리를 넘어서면, 녹색정치를 위한 전 지구적, 범시민적 열망이 벅차게 밀려듭니다. 이에 우리는 2001년 캔버라에서 합의한 ‘지구녹색당헌장’의 생태적 지혜, 사회정의, 참여민주주의, 비폭력, 지속가능한 발전, 그리고 다양성의 존중이라는 가치를 녹색전환의 원칙으로 삼습니다. 이러한 가치가 파괴되지 않고 다음 세대가 이어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우리가 회피해서는 안 되는 최우선의 과제입니다.

우리는 엘리트가 아니라 풀뿌리사람들의 힘으로 정치의 변화를 이뤄내고자 합니다. 그동안 중앙집권적이고 기득권 중심의 사회에서 소외된 지역, 여성, 청년, 청소년, 소수자, 비정규직 그리고 모든 평범한 사람들의 힘으로 변화를 만들어내고자 합니다. 소수의 부유층과 특권층을 위한 정치는 더 이상 용납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 사회 곳곳에서 녹색전환을 꿈꾸며 실천해 온 사람들과 연대하여 녹색전환을 위한 정치적 행동을 시작합니다. 변화를 바라는 모든 사람들의 연대가 우리의 평화적 무기입니다. 녹색의 가치가 더 이상 미루어지거나 부차적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신념은 우리의 연대를 더욱 강하게 할 것입니다. 녹색전환을 위한 실천과 행동은 우리를 춤추게 할 것입니다.

녹색전환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절실한 미래이며, 미래의 시간은 녹색의 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전환을 기획하고, 실천하면서 우리의 우정과 믿음을 키워, 끝내 멈출 수 없는 환희로 서로를 북돋을 것이며, 즐거움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2011년 10월 30일

녹색당 창당발기인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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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28 20:51 2011/10/28 20:51

리눅스를 서버가 아니라 개인용 OS로 사용한지 3달 정도 된다. 그 사이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리눅스를 100번 정도 깔고 지운 것 같다. 처음에는 Debian, 다음에는 openSUSE, 그리고 마지막으로 fedora에 안착했다. fedora 15를 사용하고 나서 딱 한 번 openSUSE 11.4를 다시 사용해 본적이 있는데, 도저히 적응도 안 되고 영 이상해서 결국 fedora 15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fedora에 익숙해 질 즈음 6년전에 구입한 구형 노트북이 여러가지 면에서 거슬리기 시작했다. 좀더 좋은 컴으로 fedora를 쌩쌩 돌리고 싶었다. 결국 좀 저가인 ThinkPad E420 1141-RU8을 사서 fedora 15를 깔았다. 물론 fedora 15 32비트와 64비트를 번갈아 깔다가 fedora 16 테스트 버전을 또 각각 번갈아 깔아보다 최종적으로 fedora 15를 선택했다. 물론 fedora 16은 굉장히 좋았지만 아직 멀티부팅이 안 된다.

그런데 ThinkPad E420에서 무선랜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구글을 뒤지다 아래의 포스팅을 만났다. 역시 어디가나 멋진 놈들을 만나기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은 모양이다.


Enabling wireless lan on Thinkpad E420 with Fedora 15

Have installed Fedora 15 on my new notebook, Thinkpad E420. After powering on first time, I found that wireless network is not working. In the system messages, it seems that it is blocked by rfkill signal though I tried to turn on wireless lan adaptor.
After hours of investigation, I have found that "acer_wmi" kernel module which I think I don't require is loaded and sending blocking signal. "modprobe -r acer_wmi" command removes acer_wmi module and it works. To apply "modeprobe -r acer_wmi" command permanently, I plased the command in rc.local startup script.
Now wireless network works fine. It's great.


내가 인용한 글을 작성하신 분이 이렇게 댓글을 달고 가셨다.
 

- How nice to be called a smart guy. I don't know '멋진 놈' really means a smart guy, but anyway it's not bad. If my post helped you, it's my pleasure t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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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26 14:40 2011/10/26 14: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