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종이 향기

좋은글 2011/11/03 20:39

작년까지만 해도, 그러니까 아이팟을 가지고 놀기 전까지만 해도 경향신문을 읽기 위해 하루에 1시간 정도 시간을 냈다. 경향신문은 기획기사에서 오피니언까지 참으로 읽을 거리가 많은 신문이다. 경향신문이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게 시간을 내서 읽지 못/안 한다. 아이팟과 아이패드로 글을 읽다 보니 어느새 신문종이에 인쇄된 문자를 읽기가 영 이상해졌다. 이상해졌다는 표현은 물론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다른 표현을 찾기가 힘들다. 이건 궁색한 말이 아니다. 분명 책을 읽기는 하지만 책을 읽는 건 주로 공부고 마음 편하게 책을 읽는 경우는 소설이 아니면 힘들기 때문에 책에 인쇄된 문자와 신문에 인쇄된 문자는 대하는 마음에서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아이팟이나 아이패드에 익숙하다 보니 느긋하게 마음을 편히 먹고 글을 읽는 여유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렇다. 아이팟과 아이패드를 멀리해야 한다. 종이 향기 맡으며 읽는 글이라야 진짜 글이다. 그러나 미래를 위한 기록은 디지털로 남기기로 한다.

[녹색세상]군식구와 상상력

이문재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slownslow@naver.com

은행잎 구르고, 어깨가 움츠러들 때면 생각난다. 봄이면 바람처럼 나갔다가, 가을이 깊어지면 또 바람처럼 깃들이던 노총각. 서른이 훨씬 넘은 나이였는데 집도 절도 없었다. 10촌형님이었다. 우리는 ‘열춘성’이라고 불렀다. 두 눈이 움푹 들어간 데다 얼굴이 길었다. 말수가 없었고, 키는 컸지만 등이 구부정했다. 결정적인 흠은 게으른 데다 밥을 많이 먹는다는 것이었다. 방 안에 있을 때 열춘성은 가구 같았다. 하지만 부모님은 군식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간섭을 하지 않았다.

김장철이면 또 다른 식구가 생겼다. 덕적도에서 굴장수 아주머니가 다녀가면, 며칠 뒤 김천에서 꿀장수 할머니가 왔다. 두 분은 이고 온 굴과 꿀을 다 팔 때까지 너댓새 우리집에서 묵었다.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우리 동네에는 숙박시설이 없었다. 마을 초입에 있는 우리집이 ‘민박집’이었다. 숙박비는 따로 없었다. 굴 두어 사발, 꿀 한 대접이면 그만이었다. 늦가을 손님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겨울 밤에도 헛기침을 하며, 하룻밤 재워달라는 나그네가 있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군말없이 낯선 사람을 방으로 들였고, 어머니는 서둘러 밥상을 차렸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환대의 문화’가 살아 있었다. 환대하는 문화가 없었다면 나그네, 장사꾼, 순례자, 탁발승은 없었을 것이다. 낯선 사람을 아무 조건 없이 받아들이는 문화는 보편적이고 유구한 전통이었다. 언어와 지역, 종교와 신분을 가리지 않았다. 초기 기독교 가정에서는 ‘세 가지 보물’을 상비하고 있었다. 양초, 마른 빵, 담요. 늦은 밤, 낯선 여행자가 문을 두드리면 양초를 켜 문지방을 넘게 하고, 빵으로 허기를 달래준 다음, 담요를 덮고 잠자리에 들게 한 것이다.

이슬람 문명에도 환대가 엄연했다. 13세기 페르시아 신비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루미의 시에는 여행자가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든다고 할지라도 “문밖까지 나가 웃으며 맞이하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방인이 “앞길을 밝혀주기 위해 미래에서 온 안내자”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근대문명의 세례를 받지 않은 토착사회에서는 낯선 여행자를 반갑게 맞이하는 문화가 고스란히 유지되고 있다. 저 환대의 문화를 추방한 것은 근대였고, 자본주의였다. 도시화와 산업화가 이방인을 적대시하게 만들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참외 서리가 절도로 규정되고, 무전여행이 무전취식으로 지탄받으면서 환대의 문화는 소멸됐다. 집 앞을 어슬렁거리는 낯선 사람은 ‘무단 침입’ 가능성이 있는 예비 범죄자가 되고 말았다. 환대는 죽었다.

세계 인구가 70억명을 넘어섰다. 이주와 디아스포라(離散)가 지구적 현상으로 확대되고 있다. 우리나라만 해도 체류 외국인이 114만명을 넘어섰다. 낯선 사람들이 도처에 있다. 우리도 누군가에게는 이방인이다. 하지만 ‘차이의 공동체’는 요원하다.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만으로 대중목욕탕에 들어가지 못한다. 내국인과 외국인은 물론,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인과 젊은이, 장애인과 비장애인, 강북과 강남 등 국경 안에서도 수많은 차이가 수시로 부딪친다. 하지만 차이는 여전히 차별의 근거다. 환대를 초대해야 한다. 환대가 차이를 다양성의 원천으로 끌어올리기 때문이다.

첫서리 내리면 ‘열춘성’의 희멀건 웃음이 떠오른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은 서울 변두리에서 홀로 눈을 감았다. 아무도 그의 마지막을 지켜주지 못했다. 고향집도 사라진 지 오래다. 겨울이면 고향집으로 돌아가 한철을 나야 할 비정규직, 이주노동자들이 원룸과 고시원, 옥탑방, 반지하방, 지하도에서 웅크리고 있다. 추방당한 삶들이 생존의 극지로 몰려 가 있다. 환대의 문화를 현재화하는 첫 걸음은, 도정일 교수가 말한 대로 문학적 상상력을 복원하는 것이다.

문학적 상상력이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능력’이다. 감정이입을 통해 나그네와 이방인을 맞아들이지 못한다면, 의인화를 통해 물과 나무, 땅과 별을 반기지 못한다면, 미래는 우리를 비켜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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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3 20:39 2011/11/03 20:39

나는 어른같은 아이를 싫어한다. 나는 아이를 좋아하는 편인데, 아마 내가 살아있는 동안 자식을 가질 수 없을 거라는 생각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남여를 불문하고 예쁘고 귀여운 아이를 좋아한다.(하긴 예쁘고 귀엽지 않은 아이가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예쁘고 귀엽지 않은 아이를 싫어한다.) 대중 목욕탕에 아이를 데리고 온 사람들을 보면 부러워서 어떨 때는 눈물이 나려고 할 정도다. 그래도 나는 어른 같은 애들은 싫어한다. 간혹 영화를 보다 분명 어린 애인데 말이나 행동이 성인 같은 아이를 보면 구역질이 나기도 한다. 심하면 보지 않고 중간에 나오거나 모니터로 볼 경우 그냥 끈다.

[여적]어른 그늘 속의 아이들

  김철웅 논설실장

롤링 스톤스가 부른 ‘눈물은 흐르는데(As Tears Go By)’에서 ‘나’는 어느 저녁 아이들이 노는 것을 지켜본다. “아이들은 웃고 있지만 날 위해 웃는 건 아니었다. 아이들이 노래 부르는 걸 듣고 싶었지만, 들리는 건 땅에 떨어지는 빗소리뿐. 아이들은 내가 예전에 자주 했던 놀이를 하고 있었고, 지켜보는 내 눈에선 눈물이 흐른다….” 듣는 사람마다 해석이 다르겠지만, 그 눈물엔 아마도 돌아갈 수 없는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이 뒤섞여 있었을 거다. 그렇다, 어린 시절은 어른에게 그리움이며 회한이다. 워즈워스가 시 ‘무지개’에서 “하늘에 걸린 무지개를 바라보면 내 마음은 마냥 뛰누나”라며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결론 내린 건 순수에 대한 무한한 동경의 표현이었다.

한 시골학교에서 성탄절 연극 공연이 있었다. 선생님은 머리가 조금 모자라는 빌리에게도 역할 하나를 맡기기로 했다. 그래서 요셉이 “빈 방 있습니까” 물을 때 “없어요”라고 딱 한마디만 하면 되는 여관 주인역을 맡겼다. 막이 올라 만삭의 마리아를 데리고 온 요셉이 방이 있냐고 묻자 빌리는 뜻밖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과 선생님까지 나서 작은 목소리로 “없어요”라고 대답하라고 재촉했다. 그래도 한참 서 있던 빌리가 마침내 따뜻한 목소리로 꺼낸 말은 “내 방 쓰세요”였다.

가수나 시인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아이들이 아무것도 안 그려진 백지이며 빚는 대로 빚어지는 찰흙 같은 존재임을 안다. 아이는 수정처럼 맑은 거울도, 일그러진 거울도 될 수 있다. 그건 거의 전적으로 어른 하기에 달렸다.

무상급식이 전학년으로 확대된 엊그제 서울 초등학교에서 여러 정경들이 펼쳐졌다고 한다. 새로 무상급식을 받게 된 5·6학년 아이들은 대부분 즐거운 얼굴로 식사를 했다. 그런데 분위기에 약간씩 온도차가 있었나 보다. 가령 강남의 한 어린이는 “무상급식을 하면 세금이 필요 없는 데까지 들어가는 거라 안 좋은 것 같다”는 반응을 보였다. 다른 아이는 “이것 때문에 다른 쪽 예산이 깎였다고 하더라”고 했다. 이 학교 교사는 “애들에게 무상급식 토론을 시켜봤는데, 어른들 하는 말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 같아 중단시켰다”고 말했다. 무상급식에 대한 아이들의 태도마저 그 무슨 ‘사회경제적’ 여건에 따라 달라진다는 분석을 해보지만 이 또한 살풍경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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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3 19:52 2011/11/03 19:52

FTA, 농사 안짓고 살 수 있다는 환상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황금빛으로 물결치는 벼들이 익어가는 논 가운데로 5대의 APC 전차대가 마구잡이로 진격하고 있었다. 베기를 기다리는 익은 벼들은 종횡으로 질주해 들어오는 무한궤도 전차에 유린되고 짓이겨졌다. 앞의 전차가 지나간 자리를 다음 전차가 통과하는 식의 배려도 없었다. 묘판도, 모심기가 막 끝난 논도 무시되었다. 스포츠카라도 된 듯이 전차들은 제멋대로 논에 새로운 길들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아메리카 병사들의 심중에는 아시아 농경민족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는 공통인자가 결여돼 있었다.” 이것은 1967년 아사히신문에 연재된 베트남전쟁 르포기사 중의 한 대목이다. 당시 큰 주목을 받은 이 르포의 필자는 혼다 가쓰이치(本多勝一)라는 젊은 기자였다. 그는 이후 일본의 양심적 저널리즘을 대표하는 대기자로 성장, 지금도 현역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기어이 성사시키려고 기를 쓰는 사람들을 보며 문득 생각난 게 이 르포기사였다. 예전에 읽다가 노트에 적어둔 기억이 있어서 한참 뒤적여 찾아 읽어보니 새삼 충격적이다. 전쟁 중의 베트남 농촌에 관한 이 강렬한 묘사는 그대로 오늘의 한국 농촌상황에 대한 비유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미군 전차대’는 물론 농산물 개방을 강요하는 ‘자유무역’ 논리다. 그러나 한·미 FTA가 아니더라도,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의 농촌은 절망 속에서 신음해왔다. 이제 한·미 FTA가 통과·발효되면, 한국의 농업, 농민, 농촌을 결정적으로 끝장낼 쓰나미가 밀어닥칠 것이다.

따져보면, ‘아시아 농경민족’에 대한 몰이해는 ‘아메리카 병사들’만의 것이 아니다. 언제나 경제논리를 내세워 농촌 따위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대한민국의 자본가, 정부 책임자, 관료, 어용언론, 어용학자, 그리고 선거 때마다 ‘가난한 농민의 자식’임을 참칭해온 이른바 선량(選良)들도 거의 대부분 ‘아메리카 병사들’보다 하등 나을 게 없다.

지금 국회에서는 주로 ‘투자자-국가소송제(ISD)’라는 조항을 두고, 이것을 한·미 FTA에서 삭제하도록 재협상을 해야 된다, 안된다 하는 입씨름이 계속되고 있다. 조금이라도 상식이 통하는 사회라면, 국가의 주권행사를 근본적으로 제약할 게 분명한 이 독소조항을 용납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ISD 조항이 아니더라도, 한·미 FTA 자체가 이미 나라의 주권 포기를 전제로 한 조약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한·미 FTA가 한국의 농업과 농민을 희생시키기로 작정을 하고 맺어진 통상조약인 이상, 농업을 방기한 국가가 진정한 주권국가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미 FTA의 내용을 보면, 국내 농업의 중요성은 철저히 무시되어 있다. 모든 정황으로 볼 때, 협상 개시 때부터 이미 정부는 사실상 이 나라에서 농업은 더 이상 필요없다는 판단을 내렸을 가능성이 크다. 쌀만은 지킨다고 공언했지만, 그것은 무의미한 말이었다. 2004년의 세계무역기구(WTO) 다자간 교섭에서 10년간의 최소수입의무(MA) 기간 경과 후에 관세화로 간다는 게 이미 결정되었기 때문에 쌀 문제는 한·미 양자 교섭에서 별반 정책적 의미를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농사를 대하는 근본 자세에서는 현 정부나 지난 정부나 별로 다른 게 없다. 한·미 FTA의 후속협상 과정에서 ‘참여정부’의 원래 의도가 어느 정도 왜곡된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조약에 참여정부의 기본적 농업관이 반영되어 있음은 결코 부정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현 정부가 한·미 FTA를 지난 정부의 작품이라고 선전하는 것도 야비하지만, 이에 대해 참여정부 관계자들이 크게 반발하고 있는 것도 별로 설득력이 없다. 그들도 노무현 정부가 국내 농업을 무시 혹은 적어도 경시한 것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과 관련해서는 한명숙 전 총리가 솔직한 발언을 한 바가 있다. 그는 연전의 어떤 시민모임에서 ‘노무현 정권 동안 우리나라 농민이 500만명에서 350만명으로 줄어든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청중의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당장 경제성장을 중시하는 현재의 구도 속에서 농업에 대한 관심을 가질 여유가 국정 속에서는 존재할 수가 없었다”고 말한 것이다(경향신문 2009년 11월9일자 보도).

‘국정’ 속에 농업의 자리가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은, 결국 농업이 국가 전체의 경제효율성과 경쟁력을 떨어뜨린다는 그릇된 신념의 소유자들이 계속해서 이 나라를 운영해왔기 때문이다. 또한, 값싼 식품을 선호할 수밖에 없는 서민층의 여유없는 생활형편도 해외 농산물 수입을 확대하고, 국내 농산물을 등한시하는 구조가 지속되는 것을 도왔다고 할 수 있다. 당장의 경제논리로만 본다면, 이런 셈법이 틀린 것은 아니다. 말할 것도 없지만, 농사는 통상적인 산업의 일부가 아니고, 단순한 화폐증식 수단일 수도 없다. 농사는 인간공동체가 성립·존속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회적 공통자본’이며, 특히 독립 자영농민은 장기적 지속이 가능한 유일한 생활방식, 즉 지역순환경제 시스템의 근본 토대이다. 단지 식량안보 문제 때문에 농사가 중요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지구 전역에 걸친 급속한 사막화, 농지의 쇠퇴와 축소, 기후변화로 인해 세계의 식량생산 능력이 갈수록 감퇴되고 있는 지금 식량안보 역시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현재 대부분의 산업국가에서 식량자급률은 100%가 넘지만, 한국은 겨우 25%이다. 이것은 심히 두려운 사태이다. 이미 ‘피크오일’이 지났다는 유력한 설도 나오고 있지만, 모든 징후로 보아서 값싼 석유시대는 이제 끝났거나 조만간 끝날 것임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수십년간 값싼 석유에 의존해 경제성장을 하면서 공산품 수출, 농산물 수입이라는 구조를 유지·확대해온 한국 경제와 사회는 어떻게 될까. 대량 기아 사태라는 파국에 직면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여러분은 식량을 자급할 수 없는 나라를 상상할 수 있는가? 그런 국가는 국제적 압력에 노출되어 주권을 상실할 위기에 처한다.” 이것은 세계 각국에 끊임없이 ‘자유무역’을 강요함으로써 자립적 농사기반을 박탈해온 미국의 전 대통령 조지 W 부시가 어느 해 시정연설에서 했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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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3 19:34 2011/11/03 19: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