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학부 학생일 때는 주위 사람들과 금방 친구처럼 친하게 지냈거나 곧 친구가 되기도 했다. 물론 주위 사람들이 대부분 학과의 학생들이고 선배들이거나 후배, 동기들이었는데, 대학을 조금 늦게 들어간 탓에 선후배를 깍듯이 따지는 나이어린 선배들과는 잘 지내지 못했다. 그래서 학과보다는 동아리 방에서 같은 나이의 여자 선배들과 친구처럼 친하게 지냈는데, 나와 성이 다른 탓이었던지 친구처럼 지내도 친구가 되진 못했다. 오히려 나이가 같은 남자 선배들과 친구가 되기도 했다. 물론 지금 그들이 어디서 무얼 하며 살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학부 학생도 아니고 대학원 과정생도 아닌 지금 사람들과 친하게 지낸다는 게 어떤 걸까, 하고 새삼 고민해 본다. 전 누구누구와 친하게 지내요. 요즘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누굽니까? 그런데 어떤 관계가 친한 관계라고 할 수 있을까? 매일은 아니지만 자주 함께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덕담을 주고받는 그런 관계를 말하는 걸까? 내가 너무 엄격하게 말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수록 어느 정도 적당한 거리를 두고 형식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게 더 편하고 그런 관계에 쉽게 익숙해진다. 서로에게 불필요한 관심과 기대를 가질 필요도 없고 서로의 감정에 개입할 필요도 없다. 나는 타자로서 타자를 마주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고립이 아니라 연대를 외치면서 정작 나 자신은 고립을 선택하는 모순적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가.

 

얼마 전부터 나는 친하게 지낸다는 말의 정확한 의미를 무시하기로 했다. 이러나저러나 어떤 관계이든 상처를 주고받지 않는 관계는 없다. 한동안 친하게 지내던, 뭐 굳이 따지자면 매일은 아니지만 자주 벤치에 앉아 커피 한잔 들고 서로의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공부하는 내용을 공유하기도 했던, 여선생님이 지난 해 프랑스로 떠났다. 늦은 나이에 남편과 아이를 두고 떠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저라면 절대로 공부하러 가지는 않겠어요. 놀러가지. 나는 농담삼아 이런 말을 했다.

 

요즘 그녀의 블로그가 화려하다. 여기저기 여행을 하며 찍은 사진들이 이채롭다. 부럽기도 하고 그녀의 고독과 정서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녀의 글에 눈물자국이 보인다. 그녀는 무척 슬픈 모양이다. 나는 그녀의 글에 이렇게 댓글을 달았다.

 

“요즘 그는 좀 울고 싶은 모양입니다. 언제나 슬픈 노래만 귀에서 맴돌고 마음은 울어도 눈에는 눈물이 흐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도 어딘가로 휑하니 떠나고 싶어합니다....”

 

여하튼 주위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 건 나쁘지 않다. 어떤 점에서 나도 그렇게 썩 상황이 나쁜 건 아니다. 뭐 그럭저럭 지낸다는 표현만큼 무책임한 말도 없다. ‘그럭저럭’이란 표현은 그다지 중립적인 표현이 아니다. 자신의 삶에서도 이런 표현은 무책임하고 방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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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02 18:58 2011/10/02 18:58

2010/02/27 21:31

알라딘 2011/10/02 18:48

처음 시작한 블로그가 알라딘이었는데, 이 글은 알라딘에서 티스토리로, 다시 이곳으로 옮긴다. 그런데 알라딘에서 작성한 날짜가 없다. 아뭏튼 과거 어느 때의 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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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은 영혼의 죽음입니다. 인간은 다른 인간과 더불어 있을 때라야 인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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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는 어느 날 초청도 하지 않았는데 그에게 왔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녀는 같은 방법으로 다시금 가버렸다. 그녀는 무거운 트렁크를 하나 들고 그녀는 다시금 여행길을 떠났다. 그는 식비를 지불하고 식당에서 나와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우울한 감정에 흠뻑 젖어 있었고 그 감정은 점점 더 아름다워졌다. 테레사와 함께 산 7년의 세월이 그의 뒤에 놓여 있었다. 이 세월이 실제에 있어서보다 회상에서 훨씬 더 아름답다는 것을 지금 그는 확인 했다. 그와 테레사 간의 사랑은 아름다웠지만 힘겨웠다. 그는 계속 무엇인가를 비밀로 해야 했고, 은폐해야 했고, 거짓말하고 보상해야만 했다. 그는 그녀를 기분 좋게 해주어야  했고 그녀를 진정시키고 그녀에게 계속 자기의 사랑을 증명해야 했다. 그는 그녀의 질투, 그녀의 고통, 그녀의 꿈의 탄식을 참아내야 했고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그는 변명해야 했고 그녀에게 용서를 빌어야 했다. 이제 이 모든 부담이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오직 아름다움만이 남았다." 
 

나는 토마스를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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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02 18:48 2011/10/02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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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01 20:08 2011/10/01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