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적인 것들

알라딘 2011/10/03 14:54
그리운 것들은 대체로 구체적이다.
그리운 것들 중 너무 그리워서 그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대개 추상적인 거라고 애써 외면 하는 거다. 그건 너무 생생해서 눈 감고도 알수 있는 아주 구체적인 것인데도 말이다.

억지를 쓰지 않는 한 실현하기 힘든 경우가 있는데, 바로 이 구체성을 눈앞에서 실현하는 것이다. 우연이란 참 희한하게도 엉뚱한 곳 엉뚱한 상황에서 느닷없이 실현된다. 그래서 마치 현실같지 않고 속으로는 이게 아닌데, 이건 아냐, 하면서 애써 구체적인 것의 실현을 부정하려고 하는 것이다. 나는 준비가 안되어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을 매번 준비할 수는 없다. 어리둥절하고 쩔쩔매고, 허튼 소리를 지껄이고 벗어나고 싶어면서도 벗어날 수 없고,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길 바라지만 어쩔 수 없이 바로 스쳐지나가야 하고. 이런게 세상만사구나 하면서.

그래도 구체적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그게 우연일지라도 실현될 수 있기 때문에 그리움을 간직하는 건 좋은 거다. 그 그리움이 구름처럼 이리저리 흘러가서 결국 흩어져버린다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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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03 14:54 2011/10/03 14:54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지금 나보다 18살이 많은 늙은 시인의 시를 읽다 불현듯 그의 얼굴이 보고싶어졌다. 기억이 나진 않지만 아주 오래전에 푸른 색 기운이 도는 사진을 그의 시집에서 본 듯하다. 지금 펼쳐본 그의 얼굴은 아직 젊어보이지만 무언가를 후회하는 듯한 우울한 인상이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이 시집이 나온지 거의 10여년.
나는 이제야 겨우 그의 시를 읽는다.
어딘지 어둡고 차갑고 안개가 가득끼여 있는 우울한 호반의 도시처럼.
젊은 날 내가 찾아갔던 그 외롭고 쓸쓸하던 도시의 이미지가 바로 이거구나. 잊지 못하는 것도 큰 병이다. 아이가 둘이라고 했던가.

 

 

 

 

 

 

 

 

 허허바다

허허바다에 가면
밀물이 썰물이 되어 떠난 자리에
내가 쓰레기가 되어 버려져 있다
어린 게 한 마리
썩어 문드러진 나를 톡톡 건드리다가
썰물을 끌고 재빨리 모랫구멍 속으로 들어가고
나는 팬티를 벗어 수평선에 걸어놓고
축 늘어진 내 남근을 바라본다
내가 사랑에 실패한 까닭은 무엇인가
내가 나그네가 되지 못한 까닭은 무엇인가
어린 게 한 마리
다시 썰물을 끌고 구멍 밖으로 나와
내 남근을 톡톡 친다
그래 알았다 어린 참게여
나도 이제 옆으로 기어가마 기어가마

사랑에도 실패하고 나그네도 되지 못하였으니 얼마나 괴로울까. 그래서 정호승은 똑바로 걸어갈 자신이 없는 건지도 모른다.
외침도 자조도 아닌 이건 도대체 뭐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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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03 14:48 2011/10/03 14:48

우연히, 잊고 있었던 시인 기형도의 시집을 보았다.
그렇군. 여전히 기형도는 기형도고, 기형도의 시는 여전하다.
89년 나는 스물 둘이었다.
시인이 죽은 그해 3월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분명 절망하고 있었을 것이다.
스무 살, 스물 하나, 스물 둘 나는 온통 절망뿐이었다.
시인은 사라지고 나는 덧없이 마흔이 되었다.


빈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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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03 14:43 2011/10/03 14: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