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내가 속해 있는 학과에 중국인 교수가 교환교수로 온 적이 있다. 우연히 학과 사무실에서 그 교환교수와 함께 온 학과장 교수와 마주치게 되었는데, 서로 인사를 나누는 중에 학과장 교수의 통역으로 몇 마디 나눌 수 있었다. 특별한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나는 그에게 중국이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발전이 더딘데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 자본주의화가 심화되어가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중국은 사회주의 사회이며 자본주의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학과장 교수는 그에게 웃으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기에 무슨 말씀을 하신 거냐고 물으니, “*선생이 맑스주의자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사람도 중국에서 맑스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자 그 중국인 교환교수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중국 사회를 맑스의 관점으로만 볼 수 없다.” 아마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이런 취지의 말이었다. 중국은 중국식 사회주의를 발전시키고 있다는 뜻일 게다. 마찬가지로 북한 정권도 북한이 사회주의 공화국이며, 북한의 체제를 북한식 사회주의라고 주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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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사회주의라는 개념이 자본주의라는 개념에 비해 그렇게 순수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개념이 내포와 외연의 통일이라고 했을 때, “자본주의”라는 개념이 오히려 그와 대비되는 사회주의에 비해 훨씬 더 순수해 보인다. 맑스는 아마 이 점을 잘 깨닫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맑스는 <독일이데올로기>에서 “공산주의는 조성되어야 할 하나의 상태(Zustand), 혹은 현실이 따라야 할 하나의 이상(Ideal)이 아니라 오늘날의 상태를 지양하는 현실적인 운동”이라고 이야기했다. 사실 모든 개념이 다 그렇듯이 사회주의라는 개념의 내포와 외연 또한 고정된 어떤 것이 아니라 현실의 실천을 통해 내용을 보태고 의미를 다듬어나가면서 계속 발전하는 것이다. 그 개념의 내포와 외연을 다듬고 확장하는 것은 활동하는 살아있는 인간의 몫이자, 더 엄밀히 말한다면 사회주의자들의 혁명적 실천의 과정 그 자체를 통해 이루어진다.

사회주의자들의 정치조직인 노동해방실천연대(준)[해방연대]는 (가칭)진보신당연대회의에 반대하고 이에 불참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그 이유는 홈페이지에 게시되어 있는 것처럼 “이들이 민주노동당과 대선투쟁 참패에 대한 진정성 있는 평가에 기초하지 않고 주로 반종북주의 정치공세와 선동에 기초하여 창당동력을 확보해왔기 때문이고 이들이 지향하는 정치기조가 현재의 민주노동당보다도 우경화한 우파사민주의적인 것이기 때문”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나는 해방연대의 이 주장은 조직의 무기력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남한에 사회주의자들은 많지 않다.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이 여러 부문에 뿌리내리고 있거나 대중을 이끌지도 못하고 있다. 여전히 선명성 경쟁에 목을 걸고 있거나 나홀로 식의 활동에 매몰되어 있다.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은 노동현장에 직접 개입하거나 현장 노동자들과의 연대투쟁에 국한되지 않는다. 고유한 의미에서 사회주의 활동은 선전과 선동이며, 현장 투쟁이 아니라 선진 활동가들을 사회주의 조직으로 조직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주의자들의 활동 대상은 현장이 아니라 현장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들이다. 활동가를 조직하지 못하고 선전과 선동을 통해 이끌지 못한다면 사회주의 활동이라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사회주의자들이 새로 건설되고 있는 진보정당에 참여하지 못할 이유란 없다.

현실에서 사회주의란 단지 하나의 구호가 아니라 실현해야할 보편적 이념이자 구체적 실천의 과정을 함축하는 개념이다. 현실에서 구체적인 실천은 어떤 형태로 표현되는가? 사회주의를 현실에서 실현하자는 투쟁이 노동자, 인민의 삶을 지배하는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등등의 양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자는 슬로건으로 표현되어야 하는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이념은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정책으로 표현된다. 정책은 이념의 정수를 표현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정책은 개량적일 수밖에 없다. 언젠가 지적한 것처럼 인민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구체적인 정책은 현실에서 언제나 사민주의의 옷을 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민주의에 개량주의라는 딱지를 붙이고 돌아서는 건 검은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밝은 하늘만 쳐다보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회주의자들은 정책을 만들고 실현하는 활동가들을 조직하고 정책이 궁극적으로 어떤 목적을 위해 실현되어야 하는가를 선전하고 선동해야 한다.

어떤 보편적 이념은 다양한 방식으로 현실의 질서와 관계를 맺으면서 그 의미의 진정성을 획득해 나간다. 어떤 이념이건 삶의 구체적 맥락에서 표현됨으로써 수용/배제의 과정을 통해 검증된다. 그러므로 현실은 다양하고 상이한 이념들이 투쟁하는 무대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부르주아의 이념이건 프롤레타리아의 이념이건 현실에서는 경합하는 이념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어떤 이념도 절대적 가치를 가진다고 말할 수 없다.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당파성을 이념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가칭)진보신당연대회의는 그들이 건설하는 진보정당의 지향점을 “자본주의 극복의 원칙을 분명히 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자본주의의 극복이 사회주의가 아니라고 거부한다면 얼마나 유아적인 발상인가? 해방연대와 진보신당은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현재 각자의 어떤 차이는 전혀 핵심이 아니다. 나는 사회주의자는 조타수가 아니라 등대지기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주의자는 스스로 고립을 선택할 것이 아니라 새로 건설되는 진보정당에 참여하여 당 내부에서 다양한 이념들과 경쟁해야 한다. 이를 외면해야할 이유가 있는가?

(물론 사회주의자 정당을 건설하고 이후에 결합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사회주의 정당 건설이 가능한가? 반드시 사회주의자들만의 정당이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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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9 14:26 2012/01/09 14:26

진중권 씨가 민노당 주사파에 대해 비판한 글을 읽으면 우선 재미있다. 그런데 몇 번 읽다보면 안타까운 생각도 든다. 진중권 씨의 열정과 무관하게 인간은 논리보다 감정에 더 약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민노당 당원 중에는 사회주의나 노동자, 민중이라는 개념에 의미를 두지 않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단지 선량하고 양심적인 마음만으로 당원이 된 사람들에게 민노당의 현 사태는 안타까울 뿐이다.

나는 어떤 면에서 그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언젠가 그들에게 당원 가입을 권유하며 당원 가입이야말로 양심을 가진 사람들과 동참하는 길이라고 지껄이지 않았던가. 마치 횡당보도에서 "예수불신 지옥"이라는 어깨띠를 두르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확성기를 들이대며 구원을 외쳐대는 부류와 얼마나 차이가 있었을까?

그런 사람들 중에는 아주 어린 학생도 있었는데, 어느 날 그 학생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이야기 때문은 아니지만 어쨌든 민주노동당에 가입했는데, 학생위원회라는 사람들이 자꾸 전화해서 귀찮아 죽겠어요." 그 학생은 모임에 참석하라는 전화를 거절하기가 아주 힘들고 귀찮고 나중에는 짜증도 났던 모양이다. 그냥 단지 당비만 내는 것으로 양심의 짐을 들고 싶었던 것인데.

며칠 전 소위, 자주파에 속한 학생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자신은 당이 종북주의라는 평등파의 비판을 인정할 수 없단다. 특히 진중권 씨의 견해는 있을 수 없는 왜곡이라고 비판했다. 나는 진중권 씨가 인용하고 있는 글들은 그가 사례로 들고 있는 홈페이지에 가면 실제로 볼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했더니, 자신은 북한을 그다지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우리와 동포가 아니냐고 그는 말한다. 동포라......

나는 물론 그 학생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안다. 그리고 그 말에 굳이 반박할 필요도 없다. 나는 르귄의 "빼앗긴 자들"에서 쉐벡이 우라스의 별에서 우라스의 부르주아들에게 행한 연설이 떠올랐다. 아나키스트들의 별, 아나레스에 사는 사람들의 자유와 평등과 정의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그리고 우라스의 착취와 타락에 대해 비판할 때 그 수많은 청중들의 공감의 탄성과 박수 소리에 그는 사실 공허한 마음을 달랠 수 없었다.

부유하고 지식인들이며 그 별의 지배자들인 쉐벡의 청중들은 또한 양심적이고 정의롭고 높은 도덕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단지 그들의 부와 자유를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인민들의 삶에 가까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착취하는 노동자와 인민의 삶을 자연의 질서처럼 받아들이고 그들의 타락과 빈곤이 그들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우리는 때로, 아니 자주 논리가 비논리를 이길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합리적인 근거와 설득을 통해서 인간의 비논리적인 우둔함을 타파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여전히 우리는 계몽주의의 후손들이며 계몽과 무지몽매를 단순하게 대비시키려고 하는 의지를 품고 있다. 사실 사회주의자이면서 계몽주의를 부정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지와 그 실천의 힘이야말로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합리적으로 파악하여 재구성할 수 있다는 신념이 이념의 핵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루소의 말대로 인간 자체를 알지 못하면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불평등의 기원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 자체를 알 수 있을까?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이기 때문에 사회적 관계를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인간을 속속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맑스는 아무리 생각해도 낙천적인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하긴 낙천적이지 않은 사람이 미래를 낙관할 수 있겠는가?

나는 나와 잠시 대화를 나누었던 그 학생에게 그냥, 열심히 하세요, 라는 하나마나한 공허하고 추상적이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아무래도 인간은 논리보다 감정에 치우치기 마련이다. 사람은 어떤 과정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 흐름을 전체로서 조망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흐름을 주도한다고 생각되거나 흐름의 방향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이나 단체를 따르는 경우가 많다. 한 사람이 전체를 총체적으로 통합해내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직을 만들고 조직에 합류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사실 종교인과 별반 다르지 않다.

나는 점점 회의주의자가 되고 있는 것 같다. 그 흐름에 합류할 수도, 흐름에 몸을 맡길 수도 없다. 불가능한 위치에서 흐름을 관망하면서 흐름에서 벗어나 있다고 착각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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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9 14:21 2012/01/09 14:21

오늘이 발렌타인데이라는 걸 일어나서야 알았다. 뭐 이런 말을 블로그에 올리면 사람들이 날 보고, 참 세상 힘들게 사네,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어제 늦게까지 과음을 한 탓에 늦게 일어났다. 나처럼 태평스런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 남들은 새벽부터 출근해서 열심히 일하는 데, 새벽까지 술 퍼마시고 늦게까지 자빠져 자고 오전도 아니고 오후에 TV채널 이리저리 돌리며 아침도 아니도 더구나 점심도 아닌 밥을 먹겠다고 앉아있다니.(이건 다른 누구의 말도 아니고 내가 나에게 항상 하는 잔소리다)

TV를 켜고 YTN으로 채널을 돌리니 이멍박 씨 이야기가 튀어나오기에 얼른 채널을 돌렸다. 마치 예전의 땡전 뉴스처럼 생각되어 이젠 뉴스 채널을 기피한다. 분명 낯익은, 어디서 본 듯한 여성이 나오는데, 이름이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군. "이프 온리"라는 제목을 보니 "제니퍼 러브 휴잇"이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그렇게 미인은 아닌데, 묘하게 귀여운 얼굴과 작은 몸매를 가진 여배우. 이 영화는 현대적 의미의 "사랑의 이념"을 보여준다. 뭐 당연하게도 사랑의 이념을 가장 완전하게 구현하고 있는 작품은 누가 뭐래도 "로미오와 쥴리엣"이다.

"이념" "Ideal" "Idee" "Idée". 이념을 갓 대학에 들어온 학생들에게 정확하게 개념적으로 설명하는 건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종종 비유를 드는 데, 이를테면 사랑의 이념이 있다면 아마 그건 "로미오와 쥴리엣"의 사랑이 아니겠느냐는 식이다. 그런데, 또 쉽지가 않다. 이유는 요즘 학생들은 고전을 제대로 읽지 않는다는 거다. 읽지 않는 게 아니라 읽을 시간이 없다고 하는 편이 더 옳을 수도 있고, 사실 요즘 세상에는 책보다 흥미를 끄는 게 더 많다. 그럼에도 "로미오와 쥴리엣"의 내용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중학생이 되면 부모들은 "중고생을 위한" 세계명작전집을 한 질씩 사다 집에 갖춰 놓는다. 그런데, 이 중고생을 위한 전집이라는 게 펼쳐보면 글자도 큼지막하고 행간도 넓고 더러 군데군데 컬러풀한 그림도 곁들여 읽기가 여간 좋은 게 아니다. 그러나 이런 다이제스트 판은 내용 파악에는 좋은데 문학 작품만이 가질 수 있는 문자 표현의 묘미를 그대로 살리지는 못한다.

하나 더, 우리나라 중고등학생은 몸과 정신의 발전이 불균형하게 이루어진다. 몇몇 특수한 학생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사춘기가 훨씬 지났는데도 이성 친구가 없다. 중학생의 경우 이런 불균형 상태는 너무 심각하고 어떤 경우에는 왜곡되어 있기도 하다. 고등학생이라고 다를까? 수입을 위해 매년 특정한 시기에 집중적으로 고3학생들을 아주 가까이에서 접하게 되는데, 이들도 예외 없이 이성친구가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들은 이성친구가 없다는 사실을 아주 당연한 것처럼 생각한다. 안을 들여다보면 입시 공부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이 피가 끓고 살이 타는 젊은이들은 이성을 만나고 이성과 청춘을 즐길 여유도 없고 그럴 환경도 조성되어 있지 않다.

우리나라 중고등학교가 어느 새 빠른 속도로 남녀공학으로 바뀌었다. 중학교는 대다수의 학교는 아니지만 남학생 반과 여학생 반이 구분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고등학교는 대다수의 학교가 그렇다. 심지어 고등학교는 층간으로 남녀 반이 구분되어 있는 경우도 많다. 남녀공학은 말 그대로 남녀 학생들이 단지 동일한 학교를 다닌다는 의미 이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렇게 남녀 학생들을 인위적으로 떼어놓은 데는 여학생들이 남학생보다 성적이 뛰어나기 때문에 내신 성적의 형평성을 위해서라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 사실이 아니기를.

사정이 이런데 어떻게 강의시간에, 그것도 수강생의 반 이상이 신입생인 교양 과목 강의에서 사랑의 이념을 논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건 어디 까지나 그들 문제고 나는 어떤가? 나는 그들보다 형편이 나은가? 그런가? 나는 요즘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 살아가면서 그렇게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행운일까. 나는 아직도 무슨 무슨 ‘데이’에 선물을 줘본 적이 없다. 그런 건 단지 허식일 뿐이라고 외면하면서. 나는 얼마나 선물에 인색한 놈이었던가. 나도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고 싶다. 아, 이젠 정말,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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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9 14:20 2012/01/09 1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