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쇠고기를 먹지 않는다. 아니다. 전혀 안 먹는 건 아니니, 거의 먹지 않는다는 표현이 옳겠다. 무슨 모임에서건 다들 먹겠다는데 나만 안 먹겠다고 버티는 것도 좀 그렇고, 생일날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밥상에 올라온 쇠고기를 넣은 미역국을 마다할 수 없으니 일 년에 한두 번은 쇠고기를 안 먹을 수 없다. 그래도 나는 애써 찾아서 쇠고기를 먹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누가 오늘은 설렁탕을 먹자 그러면 나는 오히려 돼지국밥을 먹자고 하는 식이다.

나는 채식주의자도 아니고 돼지고기는 또 잘 먹는 편이니 고기에 대해 분명 모순적인 잣대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사실 나처럼 어린 시절을 시골 촌구석에서 보낸 사람은 소와 어떤 식으로든 특별한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다. 시골집에서 누렁소는 친구이자 가족이었다. 그 때만 해도 소는 쟁기를 메고 논을 갈았다. 소가 없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나는 아주 어린 시절 학교에서 돌아오면 자주 마구간에서 소를 몰고 꼴을 먹이러 뒷산으로 나가곤 했다. 소의 뿔을 잡고 장난도 치고 한 번쯤은 소등에 타려다가 굴러 떨어지기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지낸 소를 장에 내 놓기 위해 송아지만 남겨놓고 마구간에서 끌어내면 이놈도 자기가 팔려가는 줄 알고 음매음매 울며 마구간에서 버티며 나오지 않으려고 목을 자꾸 돌려 댔다. 나는 지금도 그 어미 소의 크고 둥글고 눈꼽이 끼긴 했지만 맑은 눈을 잊을 수 없다. 내가 개고기와 쇠고기를 먹지 않는 건 한 때 개와 소는 나의 친구이자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여전히 육식을 외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기만 하다.


[작가회의 ‘촛불집회’ 릴레이기고] 이문재(경향신문 입력: 2008년 06월 13일 17:47:53)

-촛불은 시, 강력한 시였다-

결국 인터넷에서 보았다. 광화문(사실은 세종로다) 네거리와 청계 광장, 시청 앞 서울광장에서도, 서대문으로, 안국동으로 행진하면서도 찾지 못했던 구호를 블로그에서 만났다. 아스팔트 바닥을 찍은 한 장의 사진. 거기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소를 생명으로 존중할 때 광우병은 사라진다.”

촛불시위는 충격의 연속이었다. 여전히 레드 콤플렉스와 지역감정에 휘둘리는 전쟁세대만 놀란 것이 아니었다. 권위와 중심을 중시하는 기성세대만 경악한 것이 아니다. 유신세대와 386 사이에 끼여있는 나는 ‘한 시대가 갔다’며 시원섭섭해했다. 디지털 게릴라들도 스스로에게 놀랐을 것이다. 40여일 촛불이 타오르면서,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우리가 ‘우리’에게 놀랐다.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똑똑하단 말인가, 우리 시민들에게 이런 자발성과 창의력과 실천력이 있었단 말인가, 대중들 안에 이렇게 다양한 ‘다중’이 있었단 말인가.

하지만 나는 조금 의아해했다. 지난해 하반기 국제 곡물가격이 폭등할 때, 우리 사회가 내놓은 최종적 대안은 외국에 식량기지를 건설하자는 것이었다. 쌀을 제외하면 식량 자급률이 5%도 안 되는 나라인데, 농업을 되살려야 한다는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5월 이후 주말마다 서울 한복판이 ‘촛불의 바다’로 변했지만, 축산업에 대한 반성은 주요 이슈가 되지 못했다. 먹거리 전반에 대한 성찰은 눈에 띄지 않았다. 인간 중심주의가 문제의 핵심이라는 근원적 지적에는 ‘댓글’이 거의 달리지 않았다.

광우병이 의심되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대운하 반대, 공기업 및 의료보험 민영화 반대, 교육의 시장화 반대…. 나 역시 반대한다. 그러나 내가 반대하는 이유는 조금 다르다. 이명박 정부를 탄생시킨 것은 경제 논리였다. 이명박 정부로 하여금 인수위를 꾸리자마자 가속 페달을 밟게 한 ‘배후 세력’도 경제 논리였다. “이명박은 물러가라”고 외치는 촛불들의 근거와 논리가 이명박 정부에 견주어 훨씬 합리적이지만, 그렇다고 촛불들이 경제 논리를 벗어난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촛불 정국을 단순화하면, 가진 자의 무자비한 경제논리와 가지지 못한 자의 합리적 경제논리가 대결하는 구도다. 경제논리가 공통분모인 것이다.

십수 년 전부터 나는 식탁이 문명사적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믿어왔다. 광우병 사태의 한 본질은 여전히 식탁이다. 미국산 쇠고기가 들어오지 않는다고 해도 먹거리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만에 하나 정권이 퇴진한다고 해도 현재 수준의 경제 논리가 지속하는 한, 먹거리의 위험성은 해결되지 않는다. 현재 수준의 경제 논리란, 한 마디로 지구를 과도하게 사용하는 논리, 즉 산업 자본주의 문명을 작동시키는 논리를 말한다. 곡식이나 가축을 생명이 아니라 ‘공산품’으로 보는 시각, 지구를 무한히 사용할 수 있는 투자 대상으로 여기는 인식이 사라지지 않는 한 식탁은 안전해지지 않는다. 우리 몸이 중금속 저장고가 된다면, 다른 부문의 눈부신 풍요와 편리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직시한 것 가운데 하나가 경제 논리의 묵시록적 미래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고민해야 할 주제는 경제 논리의 다음이다. 지구적 차원에서 보면, 경제 논리는 인간중심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반인간적이고 반생명적인 경제논리를 넘어서는 새로운 논리가 바로 생명 논리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생명이 서로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상을 건설하는 새로운 에너지가 생명 논리다.

촛불의 바다 한 가운데에서 나는 보았다. 세종로 네거리를 가로막은 컨테이너의 정면에다 “경축 명박산성”이라는 현수막을 내거는 ‘집단지성’의 창의력과 실천력을. 그것은 시, 사태의 본질을 꿰뚫는 강력한 시였다. 언어는 살아 있었다. 한 마디 언어가 세상을 움직였다. 여기에 ‘소를 생명으로 존중’하는 생명 논리가 가세한다면, 촛불은 우리의 식탁을 밝힐 것이다. 그때의 촛불은 정권 퇴진 차원을 넘어, 지금과는 다른 민주주의를 넘어, 문명사적 전환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것이다.

<이문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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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9 13:07 2012/01/09 13:07

한국은 경제 규모 면에서 세계 11위, 12위 정도 된단다. 실물 경제에 능하지 않아 어떤 측면에서 이 정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여기 저기 통계를 보니 대충 그 정도 된다니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쯤 되면 박정희, 전두환을 칭송하는 사람들이나 박정희, 전두환 시대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그 사람들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말한다. 나라가 잘 살아야 한다. 부잣집이 많아야 한다. 그래야 주워 먹을 떡고물이라도 생긴다.

그런데 나라가 잘 살면 그 나라의 인민들도 잘 살 수 있을까? 대다수의 인민들의 삶은 아직도 부잣집 떡고물 주워 먹는 거지 수준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가? 도대체 잘 산다는 건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며칠 전 전남대에 무슨 발표회가 있어서 갔다 왔는데, 함께 발표자로 참석한 황광우 씨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5,18 정신, 5,18 정신 하는데 도대체 지금 광주 시장이 내세우고 있는 '기업하기 좋은 도시, 1등 광주' 이게 5,18 정신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말이었다.

경제가 살면 사람도 사는가 (경향신문 입력: 2008년 05월 25일 17:54:27)

경제가 살면 당연히 일자리가 늘고 사람도 살지 웬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고? 최근 경제단체의 ‘경제 살리기를 위한 규제완화 요구’를 보면 문득 경제가 살면 사람이 사는지 의심스럽다. 그래서 자다가 벌떡 일어나 봉창을 뜯어 본다.


경제단체 무리한 규제완화 요구

경제단체의 규제완화 요구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산업재해(이하 산재) 규제 완화이다. 산재유해요인 조사, 작업환경측정 및 사업주 벌칙조항, 위험기계기구 검사 등등 산업재해 예방 및 보호 모두가 규제이며 경제살리기에 해악적이니 완화하거나 없애자고 한다. 한해 산재로 인한 손실이 16조원이며 하루 7명꼴로 산재로 죽어가는데 이것도 규제이니 풀어야 한다면 사람이 더 죽어야 경제가 사는 것인지 당혹스럽다.

남녀고용평등 규정, 직장보육시설 설치 의무 및 육아휴직 규제, 심지어 성희롱 벌칙규정마저 규제이고 경제살리기에 도움이 안되니 풀자는 주장도 비슷하다. 현행 제도 아래서도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이 50%대에 머물고 결혼, 임신, 출산, 육아로 인해 여성이 퇴직하는 경력단절 현상이 수십년째 변함이 없다. 일본을 제외하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다른 국가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이 현상 때문에 한국의 알파걸은 알파우먼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다시 한번 묻는다. 고용이 평등해야 생산성과 일자리가 늘어난다는 그동안의 연구결과는 거짓인가, 성희롱을 더 하면 생산성이 느는가. 생산성이 높은 선진국에서는 성희롱 수준도 높은가.

다음으로 눈에 띄는 것이 해고의 자유, 비정규직 활용범위 확대 및 사용기간 연장, 차별금지 규정 완화이다. 2003년 조사에 따르면 기업의 68.8%가 정규직 구조조정을 통해 일자리의 유연성을 확보한다. 여기에 비정규직 활용 비율까지 포함하면 한국의 일자리는 매우 유연하다. 그런데도 부당해고는 과태료를 무는 것으로 끝내고 비정규직도 마음대로 쓰자면 당연히 의심스러워진다. 사람의 밥줄이 거리에 침뱉어 과태료를 물거나 교통법규를 위반하여 과태료를 무는 것과 같은가. 84%의 대학진학률을 자랑하는 한국의 청년과 부모가 16년간 교육비에 쏟아부어 찾을 수 있는 일자리가 더 유연하고 더 나쁜 일자리여야 하는가.

성희롱 벌칙마저 해악이라니…

이것이 끝이 아니다. 장애인 의무고용제도 및 의무고용 적용 완화에 퇴직급여제도 규정 완화까지 이어진다. 결국 장시간 저임금 노동만이 한국의 경쟁력이다. 또 파업을 제한하고 노동조합을 죽여야 경제가 살고 광우병이 우려되는 소도 적당히 먹어줘야 경제가 산다. 공기업을 민영화하여 재벌 대기업에 몰아주고 외국인 주주에게 이익배당을 많이 해줘야 경제가 살고 외주화를 많이 해야 경제가 산다. 의료보험까지 민영화하면 경제가 더 산다.

이쯤 되면 어쩔 수 없이 “사람살려!” 비명이 목구멍까지 차오르지만 한번 더 참아 보려 해본다. 우리가 누구인가. 외환위기 때 내 동료를 자르고 나도 잘려야만 경제회복이 된다 해서 그렇게 한 국민이다. 경제를 위하고 나라를 위한다는데 한번 더 못하랴마는 내가 죽으면 내 자식, 내 이웃, 내 친구는 사는지 이제는 알 수가 없다. 광화문 촛불집회에 나간 사람들은 아니라고 도리질하는데 그래도 한번 더, 끈질기게 믿어 보아야 하는가. 자다 말고 일어나 봉창을 흔들어 보는 사연이 이것이다. <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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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9 13:03 2012/01/09 13:03

고등학교 시절 나는 유독 주위에 시를 쓴다는 친구들을 많이 보았는데, 사실 나는 그 친구들을 그렇게 좋게 생각했던 것 같지 않다. 아마 니들이 쓰는 시가 시냐, 는 식의 빈정거림에는 약간의 질투심도 섞여 있었을 것이다. 지금 그 친구들이 시인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지금 생각하면 그 친구들에게 미안하다. 나는 그들이 쓴 시를 진지하게 읽어준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굉장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아주 우연히 같은 대학에서 만났다. 지금도 시를 쓰느냐고 물었더니, 그 친구는 무슨 소리하느냐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 친구를 심하게 질투한 적도 있었는데, 확실히 그 친구의 시는 어딘지 학생다운 티가 전혀 나지 않는 그런 시였다고 기억한다. 주민등록증을 만들기 위해 동사무소에 가서 열손가락 지문을 찍는 행위를 냉소적으로 비웃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렇게 반항적이지도, 세상 물정에 영특한 아이도 아니었기 때문에 주민등록증을 만들기 위해 동사무소에 가는 걸 약간 귀찮아하는 정도였다. 같은 반 친구들 중에는 자기도 드디어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았다는 사실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상각하는 아이도 있었다. 요즘 아이들도 예외는 아닌 모양이다. 태어나자마자 평생 따라다닐 주민번호를 부여받고 일정한 나이가 되면 사진과 오른 쪽 엄지손가락 지문이 들어간 주민등록증을 발급받는다. 별 대수롭지 않게, 더러는 호기심에, 또 더러는 자부심으로 한 국가의 일원이 되었다는 인정을 받아들인다. 너무나 당연한 과정이고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기 때문에 별 다른 생각 없이 그저 그런 갑다고 생각한다.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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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9 13:01 2012/01/09 1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