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그 동안의 일이 마무리되어 오랜만에 여유도 생기고 해서 가끔 들르는 술집에 갔다. 술이 한잔 하고 싶었다. 허전함을 메우는 데는 술이 최고다. 화장실에서 배를 비우건, 강의를 하건 머릿속에 던 것을 밖으로 끄집어내건 어떻든 허전한 건 매 한 가지인 모양이다. 그곳에서 우연히 알고 지내는 의사 선생을 만났는데, 물론 그 의사 선생은 거의 매일이다시피 그곳을 들르는 형편이니 내가 그 날 그를 만난 건 우연이 아닌 셈이다. 여하튼 지난 번 만남에서 서로가 약간 좋지 않게 헤어졌던 터라, 나는 다시 만나면 오해를 풀어야 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의사 선생은 조금 "보수적"이다. 그런데, 내가 그를 보수적이라고 생각하는 건 순전히 내가 당파적이기 때문이지 그는 자신이 절대 보수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현실의 정치나 이와 관련된 것들에 흥미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내가 보수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의사로서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고(그는 아주 약간 그렇다고 말했다) 좀 더 경제적으로 안정되면 고용의사를 두면서 진료시간을 줄이고 자신은 다른 일을 하고 싶어 한다. 사실 그는 성실한 의시이기 때문에 저녁에 술을 늦게까지 마시더라도 반드시 일찍 일어나 운동을 하고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까지 환자들을 진료한다.

지난번 만남에서 그의 이런 무관심과 정치적 무의식을 비판했던 터라 그는 나와 대화하는 것이 불편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보면 이 의사 선생은 참 좋은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많이 베풀고 도움을 주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속이거나 해코지하지 않는다. 그와 나는 단지 세계관이 조금 달랐을 뿐이다. 나는 그의 그런 점을 이해하고 있었고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었는데, 아마 지난번에는 내가 조금 과했던 모양이다.

나는 그에게 무슨 신문을 주로 보시냐고 물었다. 그는 병원에서 조선일보를 구독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는 조선일보를 보면 스포츠조선을 공짜로 "끼워" 준다고 말하면서 가볍게 웃었다. 알고 보니 그는 스포츠에 굉장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넌지시 하는 말이 돈을 많이 벌면 프로농구 구단을 하나 창단할 생각도 가지고 있단다. 나는 그가 부러웠다. 나는 이때껏 한 번도 농구를 해본 적이 없다. 나는 스포츠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보는 것도 즐기는 것도 그런 셈이다. 물론 나도 어릴 때 동네에서 아이들과 야구도 하고 축구도 하고 그랬지만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더는 그런 놀이를 하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서는 지난 2002년 한일월드컵 때 약간 흥분하긴 했다.

나는 그에게 경향신문을 한 번 구독해 보시는 것도 괜찮지 않겠느냐고 넌지시 말을 건넸다. 조선일보가 너무 오른쪽에 있으니 경향신문을 읽으면 그나마 균형을 유지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게 나의 요지였다. 사실 경향신문이 왼쪽에 있는 건 아닌데 조선일보 쪽에서 보면 경향신문이 왼쪽에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는 이야기를 했다.(나는 경향신문이 오른쪽과 왼쪽의 중간쯤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조선일보를 보는 이유가 앞서 말한 것처럼 스포츠조선을 공짜로 볼 수 있기 때문이고 문화면이나 토요일의 책소개 등의 코너가 좋아서 본다는 말을 덧 붙였다. 그는 내 말을 듣고는 한 번 생각해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책이야기를 하면서 술을 마셨다. 그는 나와 마찬가지로 SF를 좋아한다. 나는 생명의 진화와 관련해서, 주로 생물학에 관한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게 즐거웠다.

내가 그에게 덧붙인 이야기는 경향신문이 어떤 면에서 독서를 대신할 수도 있다는 거였다. 사실 나는 하루에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어떤 경우는 두 시간 가까이 경향신문을 읽는다. 경향신문은 신문치고는 읽을 내용이 너무 많다. 그것도 너무 좋은 글들이라 혼자 읽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리고 경향신문에 실리는 칼럼이나 기획기사는 재미있다. 나는 그 재미의 근거를 한 번 따져봤다. 그것은 분명한 시각과 명쾌한 논리 때문이다. 경향신문은 외부필자들 마저 분명하고 명쾌한 논리로 읽는 사람에게 글맛을 전해준다. 한 동안 바빠서 옮기지 못했던 글을 여기 옮겨본다.

아래의 김택근 논설위원과 하응백 문학평론가의 글은 다음에 따로 한 번 글을 쓰고 싶다. 두 분의 글은 정말 아름답다.

[여적]봄비 /경향신문 2008년 03월 25일 17:46:54

봄비는 가늘다. 그래서 세상 구석구석을 가만가만 닦아낸다. 봄비가 내리면 어디선가 옷고름을 풀어헤친 녹색 바람이 불어온다. 대지는 풀어지고, 땅에서는 수많은 눈웃음들이 피어난다. 새싹은 싱긋, 새순은 찡긋. 사람들 마음에도, 생각에도 무엇인가 돋아난다. 기억들도 붉은 옷을 입는다. 그리고 유년의 뜰로, 추억의 강가로 달려간다. 환장하게 맑고 고왔지만, 또 서럽고 허기졌던 시절.

“이 비 그치면/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푸르른 보리밭길/맑은 하늘에/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이 비 그치면/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임 앞에 타오르는/향연(香煙)과 같이/땅에선 또 아지랭이 타오르것다.”(이수복의 시 ‘봄비’)

봄비는 차갑다. 그래서 아프고 시린, 이런저런 것들을 건드린다. 봄비 소리는 가슴을 헤집는다. 박인수가 온 몸으로 불렀던 대중음악 ‘봄비’를 요즘은 장사익이 가슴으로 부른다. “이슬비 내리는 길을 걸으면/봄비에 젖어서 길을 걸으면/나혼자 쓸쓸히 빗방울 소리에/마음을 달래도/외로운 가슴을 달랠 길 없네/한없이 적시는 내 눈 위에는/빗방울 떨어져 눈물이 되었나/한없이 흐르네/봄비 나를 울려주는 봄비.” 맞다, 봄비에는 일인칭 고독이 흐른다. 봄비에 젖은 거리에 서면 문득 잊혀진 얼굴들이 다가온다. 보고 싶다. 하지만 멀리 있거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찾을수록 현실은 남루하다. 봄비는 맞을수록 목마르다.

며칠 동안 봄비가 넉넉하게 내렸다. 목련이 희게 웃고 개나리가 노랗게 지저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봄도 여름도 가을도 빗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것 같다. 머잖아 남녘에는 마을마다 꽃잔치를 벌이고, 푸른 들에는 노래가 번질 것이다. 하지만 꽃 속에 묻히면 우리 모습이 오히려 남루하다. 꽃대궐 속에 들어가 술잔에 꽃잎 떨구면 술이 곧 봄이고, 봄이 곧 아픔이다. 우리 살아있기에 봄밤에는 쉽게 잠들지 못한다. 저 봄날에 섞이려면 무엇을 마셔야 하나. 함께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소중한, 이 땅의 사람들에게 뻐꾸기 울음을 타서 술 한 잔 권하고 싶다. 다시 봄비 한 모금 마시고 싶다.〈 김택근 논설위원 〉

[판]‘용강긴아리’ / 경향신문 2008년 03월 27일 17:42:47

평안도 민요 중에 ‘긴아리’라는 것이 있다. ‘아리’는 아리랑과 거의 어원이 같은 것으로 보여지니, 평안도 아리랑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평안도 용강 강서 지방의 민요로서 일명 ‘용강긴아리’라고도 한다. 일종의 푸념과도 같으며 이 고장의 노동요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노래는 김맬 때 혹은 조개를 캘 때 불렀던 노래로 여겨진다. 목청을 뽑아 부르면 우아하면서도 매력적이다.

가사는 민요가 대개 그렇듯이 지은이가 알려져 있지 않고 상황에 따라서 보태기도 하고 새롭게 창작되기도 한다. 그런데 알려져 있는 일부 가사는 기가 막히게 시적(詩的)이다. 그중 몇몇 가사를 음미해 보자.

“뒷문 밖에야 시라리 타레, 바람만 불어도 날 속이누나.”

‘시라리’는 ‘시래기’의 평안도 방언이다. 뒷문 밖에 시래기를 말리려고 매달아 놓은 것이 ‘시라리 타레’이다. 그런데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이것이 사각사각거린다. 그 소리는 마치 임 오시는 소리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니 ‘나를 속이누나’라고 표현한 것이다. 임을 기다리는 애절한 마음이 절묘하게 표현되어 있다. 김소월의 유명한 시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라는 구절과 비교해 보면 이 긴아리가 김소월 시의 원본임을 단번에 알 수 있다. 김소월의 고향이 평안도 영변이니, 아마도 김소월도 이 소리를 듣고 자랐을 것이다.

“물 위에 계시기 물 아래 살지, 할레도 두 번씩 들셀물 있구나.”

‘할레도’는 ‘하루에도’의 평안도 방언, ‘들셀물’은 들물(밀물)과 썰물을 말한다. 이 가사에서 임은 물 위에 있고, (나는) 물 아래에 있다. 그러니 만날 수 없다. 만날 수 없기에 하루에도 두 번씩 밀물과 썰물이 교차한다. 아득한 그리움이고 영겁의 사랑이다. 한 편의 현대시로도 손색이 없는 아니 오히려 어떤 현대시도 구사하기 힘든 압축미가 있다.

“비야 뭐 올래면 소낙비 좋지, 실실이 늘여서 내 속을 왜 얽나.” 아마도 가는 비가 실실이 오는 모양이다. 확 소나기가 오면 차라리 시원할 텐데, 왜 가는 비가 청승맞게도 오나. 그러니 심사가 뒤집어지지. 못다 한 사랑을 해 본 사람은 이 가사에서의 화자의 마음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내 심어 놨는데 나팔꽃 심사(心思), 담 넘어 남의 집 뜰 안에 피네.”

(내가) 나팔꽃을 우리 집 뜰에 심었다. 그런데 이놈의 나팔꽃이 담을 넘어 이웃집 뜰 안에 핀다. 이 무슨 경우인가. 해학적이면서 비틀린 심사를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없는 정(情) 있는 척 웃어 달라네, 울지도 못하는 이 맘인 것을.”

이 가사는 해설이 필요없다. 들으면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해설을 하려니 오히려 사족(蛇足) 같이 느껴진다. 이런 가사는 너무 절대적이어서 그냥 외워버리면 언젠가는 자신의 마음을 달랠 수 있다.

“꽃이란 혼자도 떨어지는 걸, 구태여 보시락 비가 웬말가.”

이 가사도 재미있다. 꽃이란 혼자서도 언젠가는 떨어진다. 그런데 보시락 비는 왜 또 내려 (나를) 울리나. 참 절절하다. 우리 민요 속에 이런 보석이 숨어 있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다.〈 하응백|문학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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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9 12:57 2012/01/09 12:57

얼마 전 알고 지내는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아니, 요즘은 블로그가 어째 노조 이야기밖에 없습니까?" 그러고 보니 한 동안 블로그를 선전선동의 무기로만 사용한 셈이다. 이 분 덧붙이길, "근데, 요즘은 새 글도 없더만...." "인터넷 선을 끊었습니다." "와요?" "예, 제가 좀 바쁜데, 중독이라서 당분간만 좀 끊었습니다." "와? 야동보요?" "...."

얼마 전에는 故 한경선 비정규교수의 자살이 사회적 문제로 등장하고, 이러저러하게 학교 학보사 학생기자와 간단하게 인터뷰한 내용이 실렸다. 이 친구와 한 시간 가량 질문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실린 내용을 보니 거두절미하고 알맹이만 거칠게 실렸다. 내 입에서 나온 이야기니 내가 한 말은 맞는데, 주술관계에 비쳐보면 꼭 내 말을 그 대로 옮긴 것도 아니어서 거칠기 그지없었다.

학보사 기자는 나에게 현재 해결되어야 할 비정규교수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당연하게 전임교수들에 비해 터무니없이 낮은 강의료다. 현재 수준으로 보면 노조가 없는 사립대와 국립대는 시간당 25,000원에서 45,000원 수준이다. 전임교수들에 비하면 작게는 다섯 배 정도 차이가 난다. 물론 사립대는 그 이상이다. 노조가 있는 전남대와 경북대, 영남대를 예로 들면 이들 대학은 평균 5만 원 이상이지만 6만 원 선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고용문제(교원지위 회복)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강의하고 있는 전국의 7만여 비정규교수의 지위는 여전히 불안하고 위태롭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선생님들이 지난 해 9월부터 국회 교육위 국회의원 사무실 앞에서 일인시위와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천막 농성에 들어갔다. 천막을 뜯기고 다시 설치하기를 수번 반복해오고 있다. 국회의원 선거가 며칠 남지 않았다. 이번 회기 내에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또 장기전으로 돌입하게 될지도 모른다. 마침 며칠 전 대학의 비정규교수의 문제를 적절하게 언급한 글이 있어 여기 옮긴다.


선생을 선생이라 부르기 위해 / 박구용(한겨레신문)

구별이 성장의 상징적 기호라면, 분리는 지배의 오래된 술책이다. 지배를 위한 분리는 두 단계를 거친다. 1단계가 지배자와 피지배 집단을 분할하는 것이라면, 2단계는 피지배 집단을 다시 여러 갈래로 쪼개는 것이다. 왕과 백성의 분리가 1단계라면, 양반과 평민, 그리고 천민의 분할은 2단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현대사회에서 분리의 기준은 알 수 없을 만큼 세분화되었다. 그렇다고 지배와 예속의 관계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공공성·실용성·현실성의 이름으로 정당화되거나 능력·노력·실력 차이로 치장되었을 뿐이다.

남북과 동서 분열, 성별과 학벌에 따른 계급분할이 특권층의 권력 독점을 은폐·확장하듯,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리 혹은 하청업체들의 등급화는 대기업 자본의 지배권을 은밀하게 강화한다. 특히 분리가 섬세해질수록 지배권력은 공고해진다. 그 때문에 지배자는 일제고사와 같은 시험을 통해 피지배자들을 일렬로 줄세우려 한다. 피지배자들은 한 계단을 오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 그러나 승리는 언제나 지배자의 몫이다. 이런 방식으로 이들에 의해 지배받지 않으려면 분할통치에 저항하며 연대하는 것이 유일한 길이다.

한국의 대학은 가장 철저하게 분할통치가 관철되는 조직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계급처럼 분리하고, 다시 비정규직을 계약교수·연구교수·기금교수·강의교수·전임연구원, 순수 시간강사 등으로 계층을 분류한다. 이들 모두 숙련된 지식 노동자로서 연구와 교육이라는 동일업무를 수행하지만, 이들 중 50%에 해당하는 비정규직은 교육자, 곧 교원이 아니다. 교육을 하지만 교육자라 부를 수 없는, 그래서 ‘아무도 아닌 자’가 되어 버린 이들은 한번 사용하고 버리는 일회용품 취급을 받는다. 더구나 이들은 동일노동을 하는 정규직의 3분의 1 혹은 5분의 1의 임금만을 받는다.

이 나라가 호부호형을 금지하는 부도덕한 사회가 아니라면 무엇보다 먼저 모든 교육자를 교원으로 인정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국회는 핵심 당사자인 교육과학기술부, 대학, 그리고 비정규직 교수들의 의견을 모아 교육위에 상정된 고등교육법 개정안을 반드시 통과시켜야 한다. 현재 정부와 대학은 예산문제를 근거로 모든 비전임에게 교원 자격을 부여하는 법안에 반대하고 있다. 더구나 교원으로서 신분보장이 법제화되면 차후 학문 후속세대의 대학 진입을 근본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한다. 이런 현실적 이유를 근거로 ‘선별적 교원화’라는 절충안들이 제안되고 있다. 그 중에는 ‘우수 시간강사를 국가교수로 임명하자’(<한겨레> 3월20일치 33면)는 의견처럼 비전임 교수가 직접 제시한 안도 있다.

그러나 어떤 형태의 선별적 교원화도 바른 해결책이 아니다. 이런 절충안은 그것이 제시하는 선별의 기준이 아무리 객관적이라고 할지라도 시간강사 분할 지배를 위한 전략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서로 다른 이해관계에 따라 비전임 강사들을 분리시키는 것은 쉽다. 예를 들어 국립과 사립, 순수학문과 응용학문, 학벌과 나이, 혹은 연구능력에 따라 수없이 많은 갈래로 찢어놓을 수 있다. 이런 방식은 결국 비도덕적 지배를 강화할 뿐이다.

최소한 법은 선생을 선생이라 부를 수 있게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요구가 설득력을 가지려면 관련 당사자들이 낮은 단계의 교원 자격 부여에 합의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낮은 단계란 모든 교육자를 교원으로 인정하되 고용의 안정성 정도는 대학 자율성에 맡기는 것이다. 대신 다른 분야의 비정규직처럼 비전임 교수도 전임 교수가 받는 임금의 50%를 보장해야 한다. 이를 위해 시간당 강의료가 최소 8만원은 돼야 한다. 나무 심고 건물 짓는 것보다 교육 바로세우기가 대학과 정부의 의무라면 예산은 그들이 마련해야 한다.

박구용/전남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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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9 12:53 2012/01/09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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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집을 나설 때 혹시나 하여 우산을 챙겨 가방에 넣었다. 언뜻 잠에서 깬 것은 차창으로 하얗게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 때문이었다. 서울의 하늘은 말의 의미 그대로 무척이나 맑고 깨끗했다. 서울에서 이렇게 맑은 하늘을 본 적이 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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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8 23:43 2012/01/08 23: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