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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비디오의 발전

계급 투쟁이 미국 노동

비디오 사용을 강화한다.

Steve Zeltzer

Producer, Labor Video Project, Labornet Steering Committee

Recording Secretary UPPNET

미국 노동 계급과 미국 법인 사이의 대립 증가는 더 많은 노동 비디오와 라디오 제작업체를 필요로 하게 된다. 비록 매체를 통제하는 회사들에게서는 이런 투쟁의 거의 일어나지 않지만 UPS 국내 트럭 운전수사들의 파업에서 GM의 파업에 이르기까지 많은 싸움들이 맹위를 떨치고 있다.

사유화에 반대하는 싸움을 포함하여 이런 교전들은 지방 단위에서 노동 비디오의 사용이 증가하는 이유중의 하나이다. 칼 브라이언트는 UPPNET 준비위원회의 회원이자 'TV214'라 불리는 지방 214 텔레비전에서 매달 방영되는 "국내 집배원 연합" 텔레비젼 쇼의 창시자이다. 그의 공로 덕택에 오늘날 코네티컷주와 코롤라도주에서 두 가지 다른 집배원 쇼가 생겨났고 더 많은 쇼들이 추진중이다. 그의 쇼중 많은 것들이 우편 서비스에 대한 사유화 및 하도급계약에 반대하는 투쟁들이 초점을 맞추고 있다.

비디오와 오디오를 확대하기 위한 인터넷 사용은 늘어나는 노동 TV쇼들이 지역적으로 또 국제적으로 웹상에서 사용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카고에 있는 레이버비트는 그들의 쇼를 웹상에 띄우고 있으며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노동 비디오 프로젝트는 최근 웹상에(http://brighpathvideo.com/html/default_KPFA_protests.htm) 노동, 파시피아, 매체 등에 대한 발언대를 구축했다.

올해 노동 비디오 및 교육에 대한 가장 역사적인 공헌 가운데 하나는 캘리포니아 교사 연합의 통신 부장 프레드 글래스에 의해 제작된 캘리포니아의 노동 계급의 역사에 대한 "황금의 땅, 일하는 손"이다.

지방과 지역의 성장 및 노동 비디오 사용에도 불구하고 국내 AFL-CIO와 대부분의 국제 노동자 동맹은 지방 노동 비디오 훈련과 제작 지원에 대한 자금지원을 거절했다. 최근 로스앤젤러스에서 열린 AFL-CIO 회의에서 오레곤주 AFL-CIO, 매디슨 및 위스콘신 노동 협의회, 그리고 기타 기관들의 결의문은 집행위원회에서 중재되었고 회의에서 의결되지 않았다. 이렇게 UPPNET가 발의한 결의문들은 AFL-CIO에게 더 많은 노동 프로그램이 제공될 때까지 PBS/NPR 뿐 아니라 모든 상업 텔레비전 및 라디오 방송국에 대한 인가에 이의를 제기하도록 요구했다.

노동 비디오 그래퍼 및 프로그래머, 라디오 프로그래머들에 대한 정기적 노동 매체 교육은 꼭 필요하다. 노동 및 환경, 여성 및 소수자에 대한 검열에 반대하는 노동운동을 결집시키려는 정치적 필요는 다양한 지지를 구축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매체의 독점은 독점의 증가와 민주적 의사소통에 대한 공격을 드러낸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이런 발전의 위험성에 대해 교육받아야만 한다.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정기적인 노동 프로그램을 차단하는 것이 지역 레벨에서의 독립적인 노동 비디오 프로그램의 성장을 막지는 못했다. 포트랜드, 보스턴 그리고 다른 도시에서 새로운 노동관련 텔레비전 쇼들이 개설되고 있다.

Pacifia 라디오 네트워크의 대기업화에 반대하는 투쟁은 단위 노조들 내부에서 독립적인 노동 매체의 필요성에 대한 토론을 증폭시켰다. Pacifia는 버클리, 로스 앤젤러스, 뉴욕에서 유일하게 정규 노동 라디오 쇼를 방송한다.

인구 20%에게 해당되는 이런 네트워크에 대한 잠재적 파괴는 그들의 목소리를 밖으로 외치려는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한 큰 위협으로 비쳐졌다. 많은 경우, Pacifia 라디오 네트워크는 노동자 투쟁에 대한 유일한 정규 라디오 방송이다. UPPNET가 많은 시간과 노동력을 Pacifia 투쟁을 파악하는데 쏟는 것도 이런 위협의 결과이다.

고로 방송국이 닫히고 노동자들이 내몰렸을 때 항만 지역의 노동운동은 통합되었다. 1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항의 시위에 가담했고 노동자를 대표하는 CWA9415와 함께 항만 지역 노동 협의회는 이 시위를 지지했다. 이것은 미국에서 독립 매체를 보호하기 위한 첫 번째 대규모 투쟁이었고 또한 많은 노조들이 노동 비디오, 라디오, 또 다른 신기술 사용의 중요성에 대하여 새로운 토론을 벌이는 장이 되었다.

이런 투쟁에 대한 최고의 비디오중 하나는 존 파울라와 동업자, Brightpath 비디오의 비디오 제작자에 의해 만들어졌다. www.brightpathvideo.com에 위치한 그의 사이트는 비디오, 오디오, 다른 웹 페이지와의 링크를 이용한 투쟁에 대한 여러 매체의 흥미진진한 접근을 담고 있다.

웹에서 이동하는 비디오/오디오의 멀티미디어 사용은 미국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노동비디오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마이크로 라디오의 사용은 KPFA 및 Pacifica 네트워크에 대한 기업의 양도를 반대하는데 있어 가치 있는 자산이었다.

연합 제작자들과 프로그래머들의 네트워크(UPPNET)는 또한 반 WTO 투쟁에 대한 합동 제작 뿐 아니라 나라 전역의 지역사회 (접근) 센터에서 테잎들을 교환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프로그램을 발전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수 백 수 천명의 노동자들에게 비디오를 어떻게 사용하고 발전시키는지 알려주는 것이다. 전국적으로 많은 노동 시위현장과 파업현장에서 노동자들은 비디오를 찍었으나 이들 대부분은 빛을 보지 못했다.

이런 노동자 비디오 그래퍼들을 찾아내서 어떻게 편집하고 텔레비전에 방영하는지 훈련하는 것은 증가하는 노동 비디오 그래퍼들의 책임이다. 노동 미디어 센터가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원들이 편집, 웹 사이트 등록, 노동 통신 기술을 향상에 대한 훈련을 받을 수 있는 곳에 설립되어야 한다는 것도 또한 중요하다.

동시에 사유화, 규제완화, WTO, 주거, 보건, 노동법 등에 대한 프로그램들이 제작되어야 한다. 이런 형태의 노동 비디오 다큐멘터리는 PBS/NPR과 상업 네트워크에서 제작되지 않는다. 이는 이런 다큐멘터리가 방영될 수 있는 독립적인 노동 비디오/라디오 제작자를 필요로 한다.

비디오는 또한 미국 노동 운동에 내재한 문제들을 드러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수 천명의 항만 지역 목수들이 면허 계약에 대해 파업을 감행했을 때, 노동 비디오 기획은 그들의 파업과 조합 민주주의의 필요성에 대한 "연장을 내려놓아라"라는 작품을 제작하였다. 이것은 전국의 목수들에게 방영되었고 이 다큐멘터리는 보기 드문 행사에 대한 새로운 텔레비전 방송을 포함시켰다. 마지막으로 이런 무모한 파업이 일어난 것은 1974년도였다.

또한 미국의 노동 비디오 그래퍼들은 전세계의 노동 비디오 그래퍼들과 강력한 연대를 구축하고 있다. 부분적으로 미국 비디오 그래퍼들의 노력을 통해 터키 노동 비디오 네트워크가 발전하고 있다.

사실 노동 비디오의 발전은 국제적인 임무이다. 세계의 다국적 기업들에 대항하는 전지구적 투쟁에서 노동 비디오 및 전달자들의 전세계적인 협동은 매우 필요하다.

노동 비디오 및 라디오를 노동 문화 및 예술과 결합시키고 통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노동 비디오 프로젝트는 이제 웹 상에서 노동 문화 및 노동 예술을 구현하기 위해 LabotFest와 함께 매년 7월 5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하는 노동문화제를 추진중이다. 감동적인 노동 벽화 뿐 아니라 노동 시, 음악, 그리고 노래를 웹 상에 올리기 위해 그들의 사이트(www.laborfest.net)를 사용하려는 계획이 구상중이다. 예술과 노동 비디오 및 오디오의 통합은 관점을 정립하는 것 뿐 아니라 노동자들의 의식 수준을 높이는데도 큰 역할을 한다.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노동 비디오 그래퍼들과 노동 전달자들은 이런 투쟁들을 감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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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랑-도시의 경계, 인간과 늑대 사이

인랑(人狼:1999)은 도시에 관한 영화다. 허나 화면은 도시의 양지를 비추지 않는다. 패전 후 고도 경제성장과 더불어 그 부작용으로 버림받은 이들의 저항에 부딪치게 된 일본 사회의 단면이 정지된 사진과 나레이션으로 깔린다. 음지를 포착하며 전개되는 이야기 자체는 가상의 역사지만, 여기서 한때 일본을 뒤흔들었던 전공투 세대를 떠올리는 건 무리가 아니다. 아마 이 작품이 70, 80년대에 상영되었다면 공전의 흥행을 기록했을 것이다. 음울한 색조를 띠는 영상과 함께 우리는 스스로에 대한 두려움과 회의감에 깊게 빠져든다. 늑대의 삶을 강요하는 도시의 비인간성, 가려진 그림자를 비추는 잔혹한 동화다.

 

자치경의 능력으로는 저항세력을 제압할 수 없게 된 정부는 강력한 전투력을 보유한 준 군사집단 '특기대'를 창설한다. 2차 대전 당시의 독일군의 것과 비슷한 철모나 MG42 중기관총, 정부의 개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특기대의 별명 '케르베로스'는 파시스트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저항세력의 힘이 시민들의 지원과 참여에 힘입어 치안 유지에 혼선을 일으켰을 때 '특기대'의 유용성은 충분히 입증되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시위 조직이 온건한 조치로 해체되고 숙적인 소수의 정예 '섹트'만이 남자 그토록 필요했던 '특기대'의 존재의의도 의심받는다. 경제 발전의 국물에 안정을 찾은 시민들은 '섹트'와 '특기대'양쪽을 사라져야할 '비정상'으로 규정한다. 양쪽 모두 도시의 어둠으로 고립되어가는 시점에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데모대와 자치경의 무력 충돌이다. 화염병과 돌이 날아들고 곳곳에 부상자들이 속출한다. 소란스러운 가운데 한 소녀가 길을 재촉하고 있다. 선물이라며 동료인 듯한 남자에게 가방을 건네준다. 남자는 진압대 앞으로 가방을 던지고 가방은 강렬한 폭염을 일으키며 폭발한다. 진압대의 최루탄 발사와 동시에 본격적인 시위대 검거가 시작되고 소녀는 다시 누군가에게서 가방을 받아 들고는 어둠속을 걷는다. 우리는 예쁜 소녀가 '섹트'의 멤버임을 충분히 짐작하게 된다. 하수도를 통해 이동하는 섹트의 멤버들, 하지만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듯이 만난 특기대의 화력에 산산이 박살나고 만다. 하수도 저편에서 울리는 소리를 들은 소녀는 불안감에 차 길을 달린다. 잠시 숨을 돌리려는 사이, 한 명의 특기대원이 기관총을 들이댄다. 놀란 소녀는 가방에 든 폭탄의 뇌관을 조금씩 당긴다.

 

 

'왜?' 특기대원이 묻는다. 전투복이 얼굴을 가려 인간다운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움에도 이 '왜?'라는 말이 주는 인간적인 진폭은 크다. '어째서? 나이 어린 네가 스스로를 그렇게 죽음으로 몰아세우려는 이유는 대체 뭐지?'라고 말하는 듯하다. 어조에도 떨리는 기색도 있는 듯이 느껴진다. 다른 대원들이 발포를 독촉함에도 그는 방아쇠를 당기지 않고 소녀는 끝내 자폭한다. 도시는 정전되고 거리에서 한창이던 시위대와 진압대의 싸움도 멈춘다. 이 영화는 이데올로기의 정당성을 부르짖는 프로파간다 영화가 아니다. 어디에도 이념적 선전성의 자취는 없다. 탄압을 받으며 동정심을 자아내는 시위대의 모습 역시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후세 카즈키 경사. 소녀를 쏘지 못했던 특기대원의 이름이자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죽은 소녀의 이름은 아가와 나나미, 암호명 '단발 머리'. 초반부에 죽음을 맞이한  단발 머리 소녀의 환영은 이제 살아있는 '긴 머리' 케이의 모습과 겹치며 영화 곳곳에 비치게 될 것이다. 군사 재판에 회부된 후세는 신병양성소에서의 재훈련 처분을 받는다. 급히 엎드려 경미한 부상만 입은 그는 훈련을 거듭하는 나날을 보낸다. 죄책감에 소녀의 유골이 놓인 납골당을 찾는 후세, 그곳에는 소녀의 언니라 하는 케이가 와있다. 후세와 만난 케이는 당신의 잘못은 아니라며 한 권의 책을 선물한다. '빨간 두건 이야기',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진 이 동화가 새삼 낮설게 느껴진다. 이 동화는 이제 슬픈 사랑 이야기의 결말을 암시하는 복선이자 이야기의 플롯으로 작용할 것이다. 점차 후세의 목소리는 늑대의 목소리, 케이의 목소리는 소녀의 목소리로 바뀌며 현실과 동화가 교차한다. 

 

 

'옛날 한 소녀가 있었는데 7년간 엄마와 떨어져 살았어요. 소녀는 쇠 옷을 입은 채 늘 이런 말을 들었더랬죠. 옷이 다 닳으면 엄마를 보러 갈 수 있단다. 소녀는 열심히 벽에 옷을 문질러 닳게 했어요.'

 

실전을 방불케 하는 모의 훈련. 감시 카메라가 주변을 탐색하는 모습이 잡힌다. 미셀 푸코의 말처럼 전근대적 사회에서 집행되던 직접적인 죽음의 권력은 거기에 수반되는 저항에 의해 사라졌지만 근대 국가는 이를 감시와 규제라는 수단으로 대체했다. 정해진 길에서 이탈하지 못하도록 끝없이 감시하고 규제한다. 이 무언의 폭력, 실체가 보이지 않는 압력 아래에서는 반항할 수도, 거기서 빠져나올 수도 없다. 파놉티콘(원형 감옥)은 거미줄같이 촘촘히 짜여져 수감된 먹이감은 빠져나올 수 없다. 빠져나온다 해도 그 안에서의 역할을 잃음으로 인해 존재의의를 상실하게 되는 기묘한 상황이 연출될 것이다. 훈련 도중 벽을 부수고 상대를 제압할 기회를 잡은 후세의 눈에 케이의 얼굴이 비친다. 순간 당황스러움에 역으로 제압당한 후세. 훈련이 끝나고 교관들은 특수복 사용 수칙을 지킬 것을 강요하며 악을 쓴다.

 

멀리서 지켜보는 두 사람이 있다. 교관인 '한다'와 후세의 특기대 동기였지만 공안부로 전직한 '헨미'다. '총 맞는 것보다 쏘는게 낫다', '알때까지 훈련시켜야지'라는 말에서 근대 인간의 운명을 보는 듯한 착잡한 사념에 잡히게 된다. 조직의 일원이 된 이상, 개체의 존재 의의는 소속집단의 성격에 따라 규정되며 행동양식 역시 거기에 따라 결정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기대에 들어온 이상 특기대의 훈련 방식을 몸에 박히도록 익혀야 한다. 약해진 짐승은 오래 살 수 없다. '인간과 인연을 맺은 짐승의 이야기는 반드시 불행한 결말로 끝나지, 짐승에겐 짐승만의 이야기가 있어.'

 

 

거리를 돌아다니며 함께 시간을 보내는 후세와 케이. 철거되는 건물과 바뀐 주변 풍경에서 케이는 자신의 위태로운 삶을 예감한다. 도시에서 필요를 잃은, 가치를 잃은 건 폐기된다. 유원지에서 케이는 철조망 저편의 풍경을 응시하며 말한다. '꽤 멀리까지 보이죠? 여기 이렇게 서 있으면, 나도 언젠가 여길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딘가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다른 사람이 되는 거죠.' 그리고 후세에게 묻는다. '당신은 왜 특기대가 됐어요?' 후세는 답한다. '설명하긴 힘들지만 내가 있을 곳을 찾은 것 같아.' 뛰놀던 아이가 손에 든 풍선을 놓치자 풍선은 하늘 높이 떠오른다. 후세는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을 향해서 갈 풍선을 바라본다. 케이는 무언가의 안에서 속박받는 자신의 처지를 두려워하고 자유롭기를 원한다. 그에 반해 후세는 자기 무리의 늑대로 있을 것인가, 아니면 케이를 따라 인간의 편으로 갈 것인가를 두고 딜레마에 빠진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 것인가? 내가 있을 곳은 어디인가? 집단을 떠나 어디로?

 

 

순간 보이는 환상. '단발 머리' 소녀는 후세에게 '당신은 올 수 없어요'라 내밷으며 달아난다. 소녀를 따라가는 후세. 뒤에 한 두 마리씩 늑대들이 따른다.'기다려! 묻고 싶은게 있어!' 하수도 길을 달려 이른 막다른 곳엔 창살로 된 문이 경계를 이룬다. 이 영화의 중요한 모티브 중 하나는 바로 경계다. 경계는 철조망과 벽, 철문의 형태로 나타나 변주를 거듭한다. 비정상의 경계를 넘어 '정상'의 양지로 나갈 수 없었던 이들의 외로운 이야기는 이렇게 경계를 사이에 두는 추격전의 양상을 이룬다. 나가려는 자와 잡으려는 자 사이의 경계. 문의 저편에서 멈추고 돌아보는 소녀는 어느새 케이로 바뀌어 있다. '당신은 올 수 없어요. 오면 안돼요' 문이 열리고 케이에게 달려드는 늑대들. 영화 전체를 통해 차마 보기 괴로운 장면이 이어愎? '멈춰!'라는 후세의 말에도 늑대들은 케이의 살을 뜯고 피를 핧는다. 자신의 총에 난자당하는 또 다른 케이의 모습이 여기에 겹치고, 달리던 하수도는 눈 보라치는 설원으로 변한다. 늑대 무리 한 가운데 앉은 후세. 그는 늑대 무리의 일원이기 때문에 인간의 편으로, 양지로 나갈 수 없다. 짐승이 된 이상 무리를 떠날 수 없다.

 

 

도심에서 떨어진 외곽의 쓰레기 처리장. 도시에서 양산되는 쓰레기들은 중심부에서 효용성을 잃고 축출된다. 페기물들을 처리하는 인적없는 장소에서 특기대 제거를 노리는 모종의 음모가 꾸며진다. 공안부의 무로토와 헨미를 비롯한 이들의 계략은 특기대 대원을 표적으로 한 스캔들을 일으켜 특기대 해체의 명분을 만드는 것이다. '단발 머리'의 언니라 믿어졌던 케이도 사실은 공안부의 각본에 따라 계획적으로 후세에게 접근한 일종의 첩자였다. '섹트의 멤버와 내통한 특기대 대원'을 구속하기 위한 행동이 전개되고 케이의 전화에 후세가 달려온다. 동물들의 박제를 전시해놓은 박물관에서 매복조를 먼저 처리한 후세는 차를 탈취해 케이와 어디론가를 향한다.

 

'이젠 어디에 가나요?', '어두운 숲', '어두운 숲을 지나면 어디로 가죠?', '누군가가 기다리는 집으로', '누가 기다려요?', '엄마, 할머니 아니면...' 어두운 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깔려진 레일을 따라가는 전차, 길거리의 취객과 단속하는 경관들, 좁은 골목에 드러누운 노숙자들. 도시의 뒷편, 쓸쓸한 풍경이다. 로고스적 분류표에 의해 '정상'이 아닌 '비정상'이라 분류된 것들은 규제와 소외의 대상이다. 전에 왔었던 유원지에서 케이는 후세에게 사실과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자신이 '빨간 두건' 섹트의 일원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공안부에 가담한 일과 함께, 위태로운 자신의 삶에 보이는 희미한 희망을 말한다. 도시에서, 자신들이 속한 조직에서, 그것들이 주는 억압에서 빠져나가는 것. 유원지에서 말했던 그 얘기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면, 속박의 고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만일 특기대를 그만 둔다면 특기대원으로서의 자신의 위치와 필요성이 없어질 것이기에 후세는 주저한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입을 맞춘다. 억압를 뿌리치려는 몸부림과 망설이는 몸부림의 결합.

 

 

결말을 향해가는 극의 무대는 다시 하수도로 옮겨간다. 후세와 케이가 서 있는 곳을 향해 한 둘씩 누군가가 모여든다. 훈련교관인 '한다'를 중심으로 한 비밀 속의 반첩보기구 '인랑'의 조직원들이다. 후세는 신병 시절부터 '인랑'의 조직원이었고 이미 공안부의 계략을 눈치채고 있던 '한다'는 케이를 역이용해 공안부를 함정에 빠뜨린 것이다. 첩보전은 먼저 내다보는 놈이 이긴다. 주저앉는 케이는 싸우러 가는 후세의 뒤에서 울부짖는다.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싶었어요'라고... 케이의 가방 속에 단 추적장치를 따라 '헨미'가 이끄는 공안부 요원들이 돌입해온다. 철저히 대비해 두었던 반첩보부대 '인랑'. 암흑 속에서 한 바탕의 총격전이 벌어진다. 총격전의 사실적인 묘사는 극의 잔인한 분위기를 더욱 실감케 해준다. 공안부의 요원들은 후세의 총에 살코기처럼 난자당한다. 도망치다 막다른 곳에 이른 '헨미'는 친구인 후세에게 '너도 인간이잖아!'라는 말과 함께 유탄을 겨누지만 불발로 그치고 사살된다.

 

도심 외곽의 페허. 날이 밝아오고 '인랑'의 조직원들은 상황을 수습해 돌아갈 채비를 한다. 리더인 '한다'는 후세의 손에 모젤 C96 권총(2차 대전 당시 구 독일군의 권총)을 쥐어주며 케이를 죽일 것을 명한다. 케이는 공안부를 누를 비장의 카드지만 그들이 케이가 우리 편에 있다고 믿게 하는게 중요할 뿐 그녀의 생사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빼앗길 위험을 없애려면 남은 방법은 이 뿐이다. '인간과 인연을 맺은 짐승 이야기의 결말을 지어라, 네가 늑대로 남아있을 동안에...' 후세의 뒤에서 케이는 동화의 마지막 구절을 담담한 어조로 읊는다. '소녀가 옷을 벗고 침대에 다가가 보니 엄마는 두건을 얼굴까지 내려쓰고 이상한 모습으로 자고 있었죠.' 후세의 품에 안기는 케이는 울음을 터뜨리면서 뒷 구절을 잇는다. 괴로움에 일그러지는 후세의 얼굴.

 

'엄마, 왜 귀가 이렇게 커요?'

'엄마, 왜 눈가 이렇게 커요?'

'엄마, 왜 손톱가 이렇게 커요?'

'엄마, 왜 이가 이렇게 커요?'

 

한 방의 총성이 울리고 케이는 쓰러진다. 허탈해 하는 후세의 표정. 무언가 자신이 기댈 곳, 의지하고 싶은 것, 소중한 것을 상실한 자의 그것일까. 아니, 인간이 되고 싶었지만 짐승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인간과 짐승사이에 있는 자의 그 것일까? 조직의 논리에 따라 개인의 것을, 스스로의 것을 버릴 수 밖에 없었던 한 소시민의 모습인가. 친구도 연인도 배반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무리의 일원인 한 마리의 늑대이고 무리 전체의 뜻을 따른다. 그러지 않으면 무리에서 쫓겨나고 무리에서 쫓겨나면 생존할 수 없다. 그것이 전체주의의 논리다. '한다'는 마지막 구절을 책 읽듯이 말한다. '그리고 늑대는 빨간 두건을 잡아먹었다.' 물 웅덩이에 버려진 빨간 두건 이야기의 독일어 판본.

 

 

인랑을 보고 나서는 한동안 망연히 앉아있게 된다. 나는 자유로운가. 나에게 소중한 것은, 내가 있을 곳은 어디인가. 지금 있는 이 장소를 벗어나면 어디로 가야 할까? 인랑이 주는 여운의 바탕은 두려움이다. 그 두려움은 영화가 보여주는 배경인 1960년대 자체가 주는 두려움이 아니다. 잊혀진 가상의 과거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며 머잖아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직감에 기반한 두려움이다. 그리고 관객 자신이 인간 아닌, 짐승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근대 국가의 성립이래 인간은 도시라는 구조의 정형속을 흐르는 모나드(단자)로서 살아가게 되었다. 더 이상 개인은 독자적 개체로 존재 할 수 없게 되었으며, 국가, 사회, 단체 등의 집단을 통해 번호, 이름을 부여받는다. 그런 통과 의례를 거쳐 '정상'으로 선별되면 한 덩어리 집단의 일원으로 인정받으며 존재 의의를 갖는다. 규정 이외의 행위는 현상 유지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반드시 제재를 받게 된다.

 

니부어가 '도덕적 개인과 비도덕적 국가'에서 말했듯 개인의 선한 노력은 전체의 비도덕성에 의해 와해되기 쉽다. 사회라는 것은 한 사람의 미약한 힘만으로 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개인이 바뀌면 세상이 바뀌는 게 아니라 돌아가는 구조라는 것이 있다. 전체의 질서, 구조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렵고, 설령 명시된 질서가 인간성을 말살할 여지가 있는 것이라도 따를 수 밖에 없다. '비정상'을 도시의 음지로 축출하는 메커니즘은 무리에서의 추방에 대한 공포로 작동한다. 순진한, 천진난만한 빨간 두건이 엄마를 만나기 위해 쇠옷을 문지르는 행위는 도시 시스템을 탈출하려는 개체의 몸부림이자 이단이며 늑대(인랑 - 후세)는 시스템의 이단을 처리하기 위한 직,간접적 권력의 작동이다. 본질적으론 엄연히 파시즘에 속한다.

 

흔한 말로 '세상이 사람을 악하게 만든다'고 한다. 인간에게는 선한 기질이 얼마든지 있는데, 사회가 이를 악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거짓말하지 않으면 승진하지 못하거나, 사기치지 않으면 많은 이득을 볼 수 없다는 풍조가 널리 퍼진 상태에서 어떻게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결국 그러한 믿음을 사회에서 삶 속에서 실천하려면, 자신을 찾고 싶으면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 도시라는 구조의 본질이 바뀌어야 하며 여기엔 모순을 해결하자는 뜻에 공감대가 형성된 새로운 대안 집단이 필수적이다. 케이는 자유를 위한 투쟁이나 이탈을 위한 동료를 만들지 못했기에 실패했고, 후세는 소속된 곳을 극복하지 못했기에 인간 늑대(人狼)가 되어야 했다. 우리는 인간인가, 늑대인가? 도시에서 인간의 얼굴을 되찾기 위한 회의, 이 괴로운 문제의 해답을 찾는 여정은 이제 막을 올렸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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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천사의 시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

인간을 사랑한 한 천사의 여정

  지구 위에 서서는 지구가 둥글다는 걸 느낄 수 없듯이 자신이 선 자리에서만 진리를 구한다는 건 무모한 짓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런 사실을 느끼는 순간 인간은 진리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나곤 했다.
  오래 전 성현들이 ‘고행(苦行)’ 그 자체가 진리를 얻는 길이라고 했던 것처럼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구원을 얻고자 길을 떠났다. 아마도 출발과 다다름 그 사이의 모든 것이 답이고 진리이고, 여행은 존재에 대한 회피라기보단 ‘도전’일 것이다.

  영화인들에게도 ‘존재 속에 숨쉬는 갈망’을 ‘길’과 ‘길을 따라 가는 여행’ 속에서 풀어 보려는 노력이 계속되어 왔다. 고대 신화 속의 숨가쁜 여정들은 1940~50년대 흔했던 모험활극 영화에서 펼쳐지고 이후 ‘길’과 ‘여행’은 작품의 보조적인 소재가 아니라 그 자체가 이야기되는 ‘길’의 시대가 도래하여 ‘로드 무비(Road Movie)’라는 새로운 영화 장르가 형성된다.
  독일의 거장 빔 벤더스는 꾸준히 ‘길 위에서’ 인간의 문제를 탐구해온 로드 무비의 대표적인 주자이다.

길 위에서 인간을 탐구하는 로드 무비
  1987년 작 ‘베를린 천사의 시’는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관심을 끌었던 빔 벤더스의 대표작이다. 한 천사의 천상에서 인간 세계로의 여정을 담아낸 이 영화의 원제는 ‘베를린의 하늘(Der Himmel Ueber Berlin)’이며, 그 ‘하늘’은 구원에 대한 ‘희망’을 의미한다.
  줄거리는 이렇다. 천사 다미엘과 카시엘은 베를린의 하늘에서 사람들을 살펴보고 기록하는 임무가 있었다. 다미엘은 그렇게 베를린 시민들 사이에서, 때론 그들의 마음도 어루만지며 그냥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다미엘은 서커스에서 가짜 날개를 달고 공중곡예를 하는 여인을 발견하곤 깊은 연민과 사랑을 시작한다. 이 여인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천사’같은 인간 마리온이었다. 천사 다미엘은 천사였다가 인간으로 환생한 영화배우 피터 포크를 만나게 되고, 결국 다미엘은 천사로서의 생명을 끝내고 한 인간으로서 마리온을 찾아간다.
  이 영화는 독일의 수도이자 분단의 상징이었던 ‘베를린’을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다. 감독 빔 벤더스가 바로 머리 위 베를린 하늘에 구원을 바라는 침묵의 기도를 보내듯 천사 다미엘 역시 그 하늘에서 이 음습한 잿빛 도시를 사랑했다.
  영화 속의 그 우울함과 그늘은 빔 벤더스 감독에게도, 천사 다미엘에게도 헤어나기 힘든 굴레인 것만 같다. 신은 베를린 하늘의 천사들이 수 차례의 사악한 전쟁을 막지 못한 이유로 그들을 불신한다. 독일인들은 신이 그들의 조국을 얼마나 미워하는지 두렵다. 베를린 하늘을 배경으로 다미엘이 올라서 있던 ‘승리의 여신상’은 독일의 많은 전쟁을 기리는 ‘전승기념탑’이었다.
  수차례의 전쟁과 2차 대전의 패배가 개개인에게 준 현실적인 고통은 심각했다. ‘천사’인 다미엘이 고통 받는 베를린 시민을 어루만질 때 그것은 그저 아무도 듣지 못하는 무의미한 독백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 되어 그들 속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이처럼 진심을 드러내고 진정한 위로를 주기 위해선 희생이 필요하다.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 천사가 불멸도 버리는데 인간이 인간을 해치고 죽이는 것에는 과연 어떤 명분이 있겠는가.
  천사이기를 저버리고 인간이 된 다미엘이 패전의 상흔 같은 베를린 장벽을 따라 걷는 것은 그가 앞으로 ‘인간’으로서 가야 할 길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불멸을 포기하게 한 인간애
  ‘베를린 천사의 시’는 베를린이라는 도시 자체를 드라마로 느껴지게 한다. 젊은 시절 빔 벤더스 감독은 로드 무비만 찍는 감독으로 알려질 만큼 그는 여행자와 길, 여정, 도착지와 출발지 그 자체를 영화 속에 담아냈다.
  이 영화에선 천사의 발걸음(?)을 따라 베를린이란 도시와 그 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베를린 시민들을 그렸다. 통일 전의 베를린은 독일국민에게 그리 편한 장소가 아니었고, 감독에게도 심각한 고민이 담겨 있는 곳이었을 것이다. 군국주의, 나치, 전쟁, 분단, 이념대립 등등.
  감독은 시공을 초월한 천사가 그 초월성을 포기하고 인간 세계에 구속되면서 베를린을 해방하는 모습을 그리고 싶어했던 것 같다. 안주할 수 있는 세계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사랑하는 과정, 그것이 바로 ‘구원’에 이르는 길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감독은 이 영화에서 ‘나’ 아닌 다른 사람, 더 나아가 인류에 대한 사랑을 구현하는 과정으로서의 ‘여행’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베를린은 영화 속과 또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브란데부르크 문’은 프러시아 군국주의 시대의 개선문이었고, 독일 통일 후 지금은 동서 화합의 문으로 다시 태어났다. 좀 억지스럽긴 해도 말이다.

과거를 극복하고 진보하는 베를린
  이런 독일 역사의 상징인 베를린은 문명화된 문화 도시로의 의미도 지니고 있다. 국립박물관, 독일역사 박물관, 페르가본 박물관, 보데미술관 등, 그 다종다양한 독일 역사의 ‘실재(實在)’를 품고 있다.
  또 현대의 역동성 역시 같은 곳에서 숨쉰다. 포츠담 광장을 중심으로 우람한 소니 센터를 비롯해 시네마 쿠프, 비즈니스 센터, 그리고 메르세데스 센터 등의 현대적 문명이 함께 어울린다. 빔 벤더스 감독이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표현한 베를린을 어떻게 받아들이던 현재는 또 다른 진보와 발전의 그림을 확실히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나오던 기차역과 다리 등 많은 장소가 사라지고 현대적인 건물이 들어선 걸 가지고 ‘옛날이 좋았다’고 운운하는 건 감상이다. 이 곳의 현대화가 인간의 욕심이 만들어낸 결과이긴 하지만 그걸 마땅치 않게 보는 건 ‘보는 이’의 더 못난 욕심이 아닐까. 어쨌든 천사 다미엘이 안타까이 바라보던 그 때에 비해 발전된 희망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분단의 장벽을 허물고 통일의 성지(聖地)가 된 베를린의 하늘 아래에서 인간 다미엘은 또 어떤 구원을 꿈꾸며 기나긴 여행을 계속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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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 時

 

 

권력                             

옛날에는
호박꽃도 아름다운 꽃이라고
말했던 친구가
패랭이꽃이나 민들레꽃도
진짜 아름다운 꽃이라고
말했던 친구가
갑자기 장미나 백합을 들먹이며
나머지 꽃들은 뽑아
없애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워커와 방패에 기름을 먹이며
자신이 끌려갔던 닭장차와
오랫동안 증오했던
최루탄발사기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아 참 단맛이구나
아 참 꿀맛이구나
적어도 5년은 그렇게
입맛을 쩝쩝일 것이었습니다.

 

 

 

동 해                                


서태지에게

꿈을 위해선
사랑을 버려도 좋지

보리순 파랗게 돋은
갓 스무살

그냥 보고만 있어도
싱싱해지는 거친 파도들이지

반역을 위해선
이 세상 제일 치밀한 함정도
두려워하지 않지

그래
두려움은 세상의 끝이지
보이지 않는 안개의 속살보다는
보다 명징한 삶의 목소리를 원하지

꿈을 위해선
청춘을 불태워도 좋지

그래
꿈을 위해서
청춘을 불태웠던 시절이
우리에게 있었지

보리순 파랗게 돋은
갓 스무살

우리에겐 반역의 꿈이 있지
우리에겐 불타는 청춘의 칼날이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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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나라의 장난

팽이가 돈다
어린아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아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이들도 아름다웁듯이
노는 아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손님으로 온 나는 이 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또 한 번 팽이를 돌려 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이다.
도회(都會) 안에서 쫓겨다니는 듯이 사는
나의 일이며
어느 소설(小說)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生活)이며
모두 다 내던지고
점잖이 앉은 나의 나이와 나이가 준 나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정말 속임 없는 눈으로
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
그러면 팽이가 까맣게 변하여 서서 있는 것이다
누구 집을 가 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餘裕)가 있고
바쁘지도 않으니
마치 별세계(別世界)같이 보인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팽이 밑바닥에 끈을 돌려 매이니 이상하고
손가락 사이에 끈을 한끝 잡고 방바닥에 내어던지니
소리없이 회색빛으로 도는 것이
오래 보지 못한 달나라의 장난 같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機) 벽화(壁畵)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運命)과 사명(使命)에 놓여 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放心)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는 팽이가 기억(記憶)이 멀고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수천 년 전의 성인(聖人)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시집 <달나라의 장난>, 金洙暎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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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uble Life of Veronique

베로니카의 이중생활(The Double Life of Veronique)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을 때. 혹은 아무런 이유없이 한없이 슬퍼질 때 우리는 가끔 이런 질문을 하게됩니다.

이 세상에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닐까?
누구나 한번쯤은 가져봤을 이러한 질문을 바탕으로 이 영화는 전개됩니다.
같은날 같은때에 서로 다른 국가에서 태어난 두 사람 베로니카와 베로니크. 서로 자라온 환경은 다르지만 
둘은 자라면서 본능적으로 또하나의 자신이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음악회에서의 뜻하지 않게 베로니카는 죽게되고 베로니크는 알 수 없는 상실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근원 모를 빛이 자신의 주위에서 멤돌고 있다는 것을 본 후에는 항상 자신과 함께하는 베로니카의 영혼을 느끼게 되고 그녀는 더 이상 외롭지 않게 됩니다.하나 둘씩 자신에게 배달되는 베로니카의 유품을 통해 베로니카는 다시 현실로 다가와 베로니크와 함께 합니다. 그리고 인형극을 하는 알렉상드르를 통해 베로니크는 베로니카의 실존을 알 게 됩니다만...






누구나 한번쯤은 가벼봤음직한 단순한 질문을 통해 크쥐쉬도프 키에슬롭스키는
동화같은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갑니다.

갈색톤의 무채색 화면, 유리구슬을 통해 왜곡되어진 아름다운 주위풍경, 자연스런 영상을
일으키는 단조의 음악과 영상의 완벽한 조화.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한편의 아름다운 영상시로 우리의 마음속에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글:주하의 영화이야기중에서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은 동구와 서구의 베로니카란 이름을 지닌 두 여성의 삶을 평행으로 이어붙여 개인의 정체성과 동구와 유럽의 현실, 그리고 삶을 재현하는 영화매체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놀라운 표현의 깊이를 담은 작품이었다. 그러나 <베로니카으 이중생활>의 섬세하고 화려한 형식미에 매혹당했던 사람들은 <세가지 색>연작에서 키에슬로프스키의 운명론적인 도식이 너무 지루하게 남용되고 있다고 불평했다. 키에슬로프스키는 본질적으로 비관적인 운명론자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근대적인 이상을 모티브로 한 <세가지 색>은 인간의 본성이 그런 이상들과 충돌하는 게 아닌가라는 우울한 진단으로 가득 차 있다. <세가지 색> 연작의 첫 번째 편인 <블루 Blue>(1993)는 자유를 상징하는 블루를 화면의 기조로 깔고 죽은 남편에 대한 기억 때문에 방황하는 여성의 이야기로, 자유를 얻기 위해 사랑의 감정을 버리려고 노력하다가 마침내 사랑을 택한다는 내용이며 <화이트 White(1994)는 평등을 상징하는 흰색의 의미대로 사랑하기 위해 평등해지려고 노력하는 동구와 서구의 남녀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더 많은 소유를 전제로 한 터에 평등에 기초한 사랑이 가능한 것인가라는 것을 오히려 의심쩍게 묻는다. 박애를 상징하는 빨간색을 모티브로 한 <세가지 색>의 완결편 <레드 Red>(1994)는 더 많은 소유가 답이 아니라면 더 많은 사랑이 진정한 해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물음을 탐색하지만 우연의 운명에서 자유롭지 않은 인간의 조건을 차갑게 바라볼 뿐이다.


출처:영화연대



키에슬로프스키의 신비스럽고 시적인 새로운 영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에 대한 모든 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유혹을 뿌리치기가 힘들다. 그러나 곧 좌절을 맛보게 된다. 모든 부분들은 완전히 딱 아귀가 맞지 않는다. 어쨋는 이는 모아서 맞추어야 하는 퍼즐은 아니다. 이는 일종의 로맨스이다. 우리 모두가 언제 한번 쯤 생각해 보았을 순간에 관한; 또 다른 내가 어디 다른 곳에 있지 않을까, 만나적은 있을까... 왜 나는 나- 혹은 내가 아는 누군가와 똑 닮은 얼굴을 가진 초상화를 전시회에서 한번도 본적이 없을까? 만약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시카고 선 타임즈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은 에로티시즘과 멜랑콜리 사이의 어딘가를 떠도는 연약하고 최면에 걸린 듯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이는 헨리 제임스의 무시무시하고 결론이 없는 괴기 소설 같은 혹은 Borges의 시적인 미궁같은 분위기를 가진 고요하고 우울한 퍼즐같은 영화이다. 당신이 완전한 존재가 아닌 무언가 부족한 존재처럼, 혹은 뿌연 유리를 통해 일식을 보는 것처럼, 또는 시간에 대한 감각이 붕괴되어 심장이 한번 뛰는 사이에 모든 것이 당신의 눈 앞에 전광석화처럼 지나가는 것을 느낀다.


키에슬로프스키는 결코 그의 이야기에 결론을 내지 않는다. 그리고.. 그래야 할 것 같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의 음악은 으시으시한 단조 음계로 작곡된 매혹적이며 시적인 작품이다. 관객에게 주는 효과는 미묘하나 매우 현실적이다. 음악을 통해 이 영화는 우리를 완전히 그들의 세계로 끌어 당기며 현실로 돌아온 후에도 우리 자신의 세계에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이 영화는 상상한 것보다 훨씬 풍요로우며 놀라운 작품이다.


워싱턴 포스트



. 첫장면 - 베로니카의 노래 오프닝 크레딧이 올라가고 페이드인 되면 한 아름다운 여성이 노래 부르는 모습이 클로즈업 됩니다. 그녀는 바로 폴란드에 살고 있는 베로니카입니다. 노래를 공부하는 학생인 그녀는 길가에서 친구들과 함께 노래를 부릅니다. 베로니카는 비를 맞으며 혼자서 끝까지 노래를 하는데 베로니카의 목소리(실제로는 Elzbieta Towarnicka라는 여성이 부릅니다.)는 얇은 미성이라기보다는 다소 굵은 목소리로 영혼을 울리는 듯한 깊은 음색


이 곡은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의 스코어 중 유일하게 단조가 아닌 장조로 다른 곡에 비해 밝은 느낌을 줍니다. 이 곡은 그녀가 다른 장소에 다른 이름으로 살고 있지만 공통점을 지닌, 또 다른 자아라 할 수 있는 베로니끄를 만날 것이라는 암시를 줍니다. 그대는 오리라(Tu viendras)는 제목처럼





베로니카와 베로니끄를 이어주는 끈 친구를 따라갔다 우연히 지휘자의 눈에 띄어 발탁이 된 베로니카는 공연에서 폴란드 작곡가 반 덴 부덴마이어의 E 단조를 위한 협주곡을 노래하게 됩니다. 심장에 문제가 있던 베로니카는 이 노래를 부르다 무대에서 숨을 거둡니다.





인형, 또는 베로니카의 죽음 어느날, 베로니끄는 인형극 공연을 보게됩니다. 이 때 흘러나오는

피아노곡이 바로 인형(Les Marionnettes)입니다. 다른 곡과 마찬가지로 역시 단조인 이 곡은

어둡고 슬픈 곡조를 특징으로 합니다.


인형이 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다가 숨을 거두는데 이것은 바로 노래공연을 하다 숨을 거두는 베로니카의 모습에 대한 상징이며 이 때 흘러나오는 인형이라는 피아노곡은 줄에 매달려 조정이 되는 인형이라는 측면에서 서로 다른 곳에 살고 있는 분신의 존재를 나타냅니다.





인형, 또는 베로니카의 부활 발레를 하다 숨을 거두었던 인형은 날개를 달고 천사로 부활합니다. 이 때 피아노곡이 멈추고 E 단조를 위한 협주곡이 흘러나옵니다. 베로니카와 베로니끄를 연결해 주는 끈의 역할을 하는 이 음악이 흘러나오면서 인형이 부활하는 장면은 죽었던 베로니카가 베로니끄로 환생하는 동시에 이 인형극을 바라보는 베로니끄가 또 다른 자아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자아에 눈을 뜨는 드라마틱한 장면입니다.






Zbignew Preisner


촘촘하게 짜여진 상징으로 이루어진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에서 즈비그뉴 프라이즈너의 음악은 감독과의 긴밀한 관계만큼이나 영화의 표현방식과 주제에 완전히 녹아들어 기능하고 있습니다. 복화술사란 말처럼 프라이즈너는 음악으로 키에슬롭스키의 얘기를 해주고 있는 것이죠. 앞서 살펴보았던 <파워 오브 원>에서 한스 짐머의 음악은 파워풀한 느낌으로 영화의 주제를 부각시키는 역할을 주로 떠맡고 있었던데 반해, 이 영화에서는 풀롯과 표현방식,주제의 구현에서 음악과 영화가 거의 하나라 할 정도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특히 위 3번에서 살펴본 인형극 장면에서 두드러집니다. 저는 이 영화를 꼼꼼히 살펴보면서 음악과 영화가 얼마나 치밀하게 융합할 수 있는지에 놀랄 정도였습니다. 그것은 85년부터 서로 친구로서 함께 일하는 동료로서 긴밀한 그 둘이 서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거의 완전하게 이해했기 때문이겠지요. 그런 점에서 이 둘은 단순히 많은 영화에서 같이 작업한다기보다 음악과 영화라는 서로 다른 표현수단을 가지고 같은 것을 표현한 아주 드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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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zysztof Kieslowski

Krzysztof Kieslowski







68년 우츠 국립영화학교를 졸업하고 <사진 From the City of Ludz>(1969)이란 기록영화는 데뷔한 후 영화감독 키에슬로프스키는 68년 3월의 학생봉기, 70년 12월의 자유화 운동, 76년 노동자 시위사태, 80년 레흐 바웬사가 이끄는 연대노조 운동, 그리고 81년 야루젤루스키 정권의 계엄령 선포에 이르기 까지 격동의 시대를 살았다. 폴란드사회가 그렇게 혼란을 겪는 동안 폴란드영화는 부흥기를 맞았다. 70년대 중반 아그네츠카 홀란드, 안토니 크라우즈, 리자드 부가예스키, 마르셀 로진스키등의 감독이 이른바 도덕적 불안의 영화로 정의되는 폴란드영화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 안제이 바이다 감독 등이 이끌었던 폴란드 유파가 폴란드영화의 현대적인 어법을 발굴해냈다면, 도덕적 불안의 영화 세대는 긍적적인 전망이 보이지 않는 폴란드 현실을 불안하게 짚어냈다. 케에슬로프스키는 물론 도덕적 불안의 영화 경향을 띤 감독 중 한 사람이었다. 이 시기에 만든 가장 뛰어난 작품은 <노동자들 71>로 71년 슈체친에서 일어난 노동자 파업사태를 찍은 것이다.


키에슬로프스키의 첫 극영화는 <어느 당원의 이력서 Personel>(1975). 50분짜리 중편이며 원래 텔레비젼 방영용으로 만든 작품인데, 독일 만하임영화제 대상을 받았다. 지하 폴란드 공산당원이 징계문제로 당 조사위원회에 호출되어 심문받는 과정을 기록영화 형식으로 담았고 50분 동안 심문관과 피심문자의 얼굴 클로즈업만으로 계속 이어가면서도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 놀라운 작품이다. 키에슬로프스키의 본격적인 장편 극영화 데뷔작 <상처 Spokoj>(1976)는 모스크바영화제 대상을 받았다. 이 작품으로 키에슬로프스키는 도덕적 불안의 영화세대의 리더로 국내외에서 확실한 주목을 받았다. 현실을 혼란한 마음으로 통찰하던 이 폴란드 감독은 곧 유럽영화계의 자본과 줄이 닿았고 그 계기가 된 것은 바르샤바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십계>연작이다. 84년에 <결말없음 Dlugi Dzien>이란 영화를 만들면서 같이 각본을 쓴 변호사 출신의 크쥐시토프 피시비츠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만든 <십계> 연작은 큰 성공을 거뒀다. <십계>가 극장판으로 개봉되는 과정에서 서유럽의 자본이 들어 왓고, 이런 공동작업 시스템은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세가지 색> 연작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피시비츠의 조력을 받으면서 키에슬로프스키는 전 유럽을 대표하는 감독으로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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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렌느야곱과 키에슬롭스키

이렌느 야곱이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를 만났을 때

2004.05.22 / 최은영(영화 칼럼리스트)

성경의 십계명을 토대로 만든 연작 <십계>의 한 에피소드를 장편으로 옮긴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이 1988년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았을 때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는 20세기 후반 가장 주목할 만한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폴란드의 공산 정권이 무너진 1989년,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한 키에슬롭스키는 프랑스에서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을 제작하기로 했다. 같은 외모와 재능을 지녔으며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한 채 폴란드와 프랑스에서 각각 살아가는 여성 베로니카와 베로니크라는 신비스러운 캐릭터는 이 영화의 모두를 좌우할 핵심 배역이었다. 신선한 얼굴을 찾던 키에슬롭스키의 눈에 띈 사람은 루이 말의 <굿바이 칠드런>에서 피아노 선생으로 출연한 이렌느 야곱이었다. 스물다섯의 이렌느 야곱은 영화 출연 경험이 거의 전무하다시피한 배우인데다 데뷔작 <굿바이 칠드런>에서도 단역에 불과했지만 신비스러운 외모와 지적인 분위기가 마음을 끌었다.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은 이렌느 야곱의 첫 번째 주연작이 되었고 키에슬롭스키는 촬영하면서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녀는 매혹적인 외모를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난해하고 신비스러운 주제를 지닌 이 영화의 본질을 온전히 이해할 만큼 명민한 배우였다. “이 영화는 다른 공간에서 살아가는 분신과도 같은 두 여인의 삶을 다루고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키에슬롭스키는 그 두 사람이 지닌 공통적인 삶의 방식에 주목하고 있다. 그녀들은 모두 재능과 열정을 지녔지만 삶에서 뭔가 빠진 게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것은 세상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씩 느끼는 공허함이 아닐까.”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은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고 이렌느 야곱은 첫 번째 주연작으로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키에슬롭스키는 삶이 만들어내는 아이러니에 관심이 많은 감독이었다. 이별이나 고독감, 감정적 충돌은 그의 영화에서 단골 소재였다. 키에슬롭스키는 개별 캐릭터보다는 캐릭터 사이에서 생성되는 관계를 이미지로 담아내는 데 주력하면서 관계의 한계 또한 직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영화 주인공들은 결코 온전한 만남을 갖지 못한다.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에서 서로 닮은꼴인 베로니카와 베로니크는 결코 직접 대면하지 않으며 그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은 우연하게 찍힌 사진 한 장일 뿐이다. 삼색 연작에서도 키에슬롭스키는 감정적 평행선을 달리는 인물들을 그리고 있다. 삼색 연작의 토대를 이루는 자유, 평등, 박애라는 테마를 통해 이 세 단어가 지닌 이상적인 뉘앙스와 복잡한 감정적 현실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혼란과 깨달음의 과정을 보여 주는 것이다.

삼색 연작의 마지막 영화 <레드>에서 키에슬롭스키는 이렌느 야곱을 다시 캐스팅했다. 그녀가 연기한 발렌틴이라는 패션 모델은 전작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의 베로니카와 거의 흡사한 인물이다. 겉으로 보기에 모든 것을 지니고 있는 듯 보이지만 고독감에 시달리는 아름다운 여성 발렌틴은 상대역을 맡은 퇴역 판사 장 루이 트랭티냥의 비관적인 시선에 대항하며 서서히 자신의 본질을 발견해간다. “키에슬롭스키는 인생이 가져다 주는 놀라움에 흥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살면서 온갖 종류의 경험을 겪으며 조금씩 변화한다. 연기란 어떤 면에서 인생과도 같다. 연기를 하면서 배우는 변화를 꿈꾼다. 그리고 새로운 스토리, 혹은 감독, 상대역과의 관계를 통해 스스로를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키에슬롭스키와 함께하는 작업의 본질이며 <레드>의 주제이기도 하다.”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는 <레드>를 만든 직후 은퇴를 선언했다. 그의 나이 52세에 불과했지만 그의 마음은 매우 염세적으로 기울었다. 그는 삼색 연작을 한꺼번에 만드는 과정에서 많이 지쳐 있었고 더 이상 영화를 만드는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심정을 밝혔다. 그러나 당시에도 이미 새로운 영화의 각본은 쓰고 있었다. 천국, 지옥, 연옥이라는 주제로 이루어진 삼부작을 구상하던 그는 1996년 심장 절개 수술을 받은 후 예기치 않게 세상을 떠났다. 키에슬롭스키의 죽음 이후에도 이렌느 야곱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와 빔 벤더스의 합작 영화 <구름 저편에>에 출연하는 등 활동을 계속했으며 더러는 함량 미달의 미국영화에서 재능을 낭비하기도 했다. 수많은 그녀의 출연작 중에서도 키에슬롭스키와 함께한 두 편의 영화만큼 그녀의 존재를 각인시킨 영화는 없었다.

TIP: 키에슬롭스키는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의 주인공으로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의 앤디 맥도웰을 점찍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그가 두 번째로 염두에 둔 배우는 줄리엣 비노시였지만 그녀 역시 레오 카락스와 <퐁네프의 연인들>을 촬영하고 있었다. 그때 운명처럼 다가온 배우가 신성 이렌느 야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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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하라

늘 취해 있어야 한다.

언제나 너희는 취해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이 거기에 있다. 그것이 유일한 핵심이다.
어깨를 억눌러 당신을 땅으로 짓누르는
시간이라는 끔찍한 짐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는
너희는 어김없이 취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에?
술로 또는 시로, 또는 당신의 미덕으로,
그건 당신 뜻대로. 다만 취하기만 하라.

 

그러다가, 궁전의 계단에서나, 도랑의 푸른 풀 위에서나,
당신의 음침한 고독 속에서, 당신이 깨어나 취기가
이미 가셨거든 물어보라,
바람에게, 물결에게, 별에게, 새에게, 시계에게,
지나가는 모든 것에게, 울부짖는 모든 것에게,
말하는 모든 것에게 몇시냐고 물어보라.

그러면 바람이, 물결이, 별이, 새가. 시계가 대답해 주겠지.

 

"취할 시간이다! 시간의 구박받는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취하라.
노상 취해 있으라! 술에건, 시에건, 미덕에건, 당신 뜻대로."

 

-보들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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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치 않아

성공이냐 실패냐는 중요치 않아.

모험 자체가 우리에겐 즐거운 도전이야.

 

전철 안에서 무가지 신문을 펼치니 리니지 게임 광고가 경쾌하게 내뱉는 말.

가끔씩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도 용납이 되지않을까 제멋대로 결론내린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인터넷을 띄우고 울산으로 공간이동을 해보니

빗줄기 한가운데 서서 열사의 영정을 들고 반투명 우비에 가려 눈물인지 비인지 고개숙인 비정규직 활동가들이 계속 뭔가를 쏟아낸다.

거기서 '모험'이고 '도전'은 귀가 삐죽한 여신의 주문일 뿐이고.

 

현실은 어떠냐면

어제 다녀온 분향소 없는 민주노총 사무실은 여전히 살아있는 사람들의 숟가락 젓가락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고, 한 구석에서는 이수호 위원장을 점잖게 밀어내고는 답답한 듯 눈을 가늘게 뜬 동지들이, 구사대와의 결투로 벌금 500만원와 폭력난동꾼이라는 타이틀을 얻은 한 동지의 어이없는 웃음을 같이 나눈다. 울지 못하니 웃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한 사람이 들여다보며 열사가 난 이런 시기에 점거농성이 왠말이냐고 타박하고 한 동지는 절절하게 설득한다.

열사가 이 장면을 보면 뭐라고 할까.

운동을 가로막는 것들, 투쟁을 잠재우는 것들. 부르조아나 노동관료들이나 이제는 돈 갖고 지랄이다.

 

나는 어제, 이른바 '열사국면'이 투쟁의 시기가 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게 분통해도 투쟁하는 이들의 의지박약이 문제가 아니라면 숨겨진 진실, 정당성을 조합원들의 기억 속에 남기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은가.

새롭고 결정적인 상황을 조성하는 것은 이제 한사람의 값진 희생만으로, 그 자체로는 계기가 될 수 있을 지언정 대중의 혁명적 본능에 기대어 전부를 대체할 수 없음을 지난 최남선 동지의 분신에 이어 또 한번 절실히 느끼는 것이다.

패배의 책임은 노동자들에게 있지 않다. 무력함의 원인은 그들에게 있지 않다.

그렇게 끊임없이 설명해야 한다. 어느 쇠약한 혁명가가 강조했듯이.

 

전반적인 환멸이 극에 이르렀을 때

변함없이 굳건한 심장을 지니는 사람, 칼처럼 날카로운 의지를 갖는 사람만이 노동계급의 전사로 여겨질 수 있으며 혁명가로 불릴 수 있다.

 

성공이냐 실패냐는 중요치 않다.

현실에서는 모험도 없고, 도전도 없고 그것은 더더욱 즐겁지도 않다.

 

근데 울산은 비가 한없이 쏟아진다는데, 여기는 땅이 너무 말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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