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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복싱의 진화 혹은 멸종

“링 위에 오르면 심장이 뛴다. 이 기분을 돈으로 따질 수 있을 것 같은가?”

 운동을 복싱처럼 할 수 있을까?

 

 

프로복싱의 진화 혹은 멸종

[스포츠2.0 2006-09-01 17:31]
동양태평양복싱연맹(OPBF) 슈퍼라이트급 챔피언 김정범. 아직 세계챔피언으로 가는 길은 멀기만 하다.(사진 한상무)

“세계챔피언이요.” 1986년 한국갤럽이 전국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장래의 꿈을 조사했을 때 대부분의 사내아이들은 서슴지 않고 ‘세계챔피언’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 보다 구체적으로 닮고 싶은 사람을 물었을 때는 아이들의 입에서 ‘박종팔’ ‘유명우’ ‘장정구’ 등의 이름이 흘러 나왔다. 전혀 이상할 게 없는 답변이었다. 그렇게 대답하는 사내아이들에게 주변 사람들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뿌듯한 표정을 짓기까지 했다.

아이들과 거의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청소년들도 꽤 많았다. 그들 중에 김종성(38,회사원)씨도 있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지만 가족의 미래에 관해서는 대학교 4학년생만큼이나 고민이 많았던 김씨는 세계챔피언이 돼 병석에 누운 아버지와 좌판에서 생선을 팔던 어머니께 큰 집을 선물하고 싶었다. “당시 프로복싱은 지금의 로또와 같았다. 한 방에 인생역전이 가능했으니까.” 김씨의 말대로 당시 프로복싱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들이 부를 쌓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지름길이었다. 이 지름길에 들어서고자 많은 청년들이 복싱에 입문했고 복싱체육관은 그들이 토해내는 열기로 뜨거웠다. 결과도 좋았다.

1966년 김기수가 니노 벤베누티(이탈리아)를 15회 판정으로 이기며 WBA 주니어미들급 챔피언에 오른 이후 한국은 유제두, 홍수환, 김태식, 박찬희 등 수많은 세계챔피언을 배출했다. 비단 세계챔피언만이 아니었다. 동양챔피언은 세계챔피언보다 훨씬 더 많았다.

1986년 세계복싱평의회(WBC)산하 동양태평양복싱연맹(OPBF)챔피언은 모두 15명. 그 가운데 한국인챔피언이 무려 10명이었다. 한국을 비롯한 일본, 태국, 필리핀에서는 웬만한 세계챔피언에 비해 더 후한 대접을 받곤 했다. 슈퍼웰터급 동양챔피언 백인철같은 선수는 WBA밴텀급 챔피언 박찬영 보다 더 많은 인기를 끌면서 상당한 액수의 파이트머니를 받았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국은 아시아복싱의 맹주였으며 세계복싱계에서 무시할 수 없는 강호였다. 다른 나라 복서들에게 존경을 요구하고 두려움을 주던 존재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2006년.

 

복싱을 모르는 세대

“세계챔피언? 이탈리아요.” 김씨의 큰 아들 재연(11)은 세계챔피언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탈리아’라고 대답했다. 아이는 ‘현재 세계챔피언이 누군지 아느냐’는 기자의 질문을 ‘이번 월드컵 우승국이 어딘지 아느냐’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이에게 세계챔피언이라는 단어는 복싱이 아니라 축구에 쓰여야 제격이었다. 게다가 복싱이 어떤 스포츠인지 조차도 모르는 눈치였다.

“요즘 아이들은 복싱이 뭔지도 몰라요. 20년 전과는 천지차이죠.” 김씨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정작 20년 전과 비교해 천지차이로 바뀐 건 복싱을 모르는 아이들만이 아니다. 바로 복싱 자체가 천지차이로 변했다.

한때 세계챔피언을 동시에 5명까지 보유했던 한국프로복싱은 단 한명의 세계챔피언도 보유하지 못한 무관의 제왕이 된 지 오래다. 김씨가 가족들의 미래를 책임져 줄 유일한 희망으로 믿었던 복싱은 이제 어느 누구에게도 희망의 지름길로 작용하지 않는다. 복싱은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 미국에서도 내리막길을 달리고 있다.

“챔피언 한명 없으니 당연한 일이죠.” 복싱마니아라고 자처하는 김씨가 아쉬운 듯 길게 한숨을 쉬었다. 김씨의 진단은 옳았다. 가뜩이나 인기 없는 복싱에 챔피언 한명 없으니 그 인기가 회복될 리 만무하다. 그러나 김씨가 모르는 게 있었다. 아직 한국에는 챔피언이 있다는 사실을. 비록 세계챔피언은 아니지만 벌써 3차 방어전까지 치른 동양챔피언이 있었던 것이다. 동양태평양복싱연맹(OPBF) 슈퍼라이트급 챔피언 김정범(류명우 범진체육관)이 그 주인공이다.

 

유일한 동양챔피언, 김정범

8월 20일 김정범을 만나기 위해 서울 구로구에 있는 ‘류명우 범진체육관’을 찾았다. 그러나 체육관을 찾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동양챔피언을 보유하고 있는 체육관 정도라면, 게다가 22년째 같은 건물에 있다면 인근 주민들 사이에선 그 위치가 꽤 알려졌을 법도 한데 어느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체육관으로 몇번이나 전화를 건 후에야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었다.

체육관은 얼핏 보기에도 지은 지 30년은 더 돼 보이는 4층 건물의 3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계단에 설치된 전등은 숨이 끊길 듯 작은 빛만을 토해 내고 있어 조심스레 발을 내딛지 않으면 복도를 가득 적시고 있는 물 때문에 넘어지기 십상이었다.

조심스럽게 4층까지 올라가 체육관 문을 열었지만 요란한 줄넘기 소리와 거친 숨소리를 예상했던 기대와 달리 안은 매우 조용했다. 게다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거대한 청소기가 그 모든 소리와 사람들을 빨아들이고 사라진 느낌이었다.

그때 두 사내가 다가왔다. 한 사내는 40대 후반의 머리가 반쯤 벗겨진 중년이었고 그 옆에 있는 선글라스로 눈을 가린 사내는 20대 중반의 건장한 청년이었다.

“김정범을 찾아온 사람들인가?” 기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중년의 사내가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그가 류명우 범진체육관의 관장 김정표(48)씨였다. 김관장은 옆에 있는 청년의 어깨를 툭 치며 이렇게 말했다. “이 선수가 김정범이다.” 김관장의 소개를 받은 청년이 예의를 갖추려는 듯 선글라스를 벗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는 눈두덩이 상처에 꿰맨자국이 선명하게 보였다.

“경기 끝난 지 얼마 안돼서….” 김정범은 멋쩍은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었다. 김정범은 8월 13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동양타이틀 3차 방어전에서 도전자 야마모토 다이고로(29)를 7회 1분49초에 TKO로 이겼다. 고작 일주일이 지났을 뿐이니 멍이 남아 있을 만도 했다.

“정범이는 일본킬러다.” 김관장이 전적표에 빨간색 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정범이는 2004년에 당시 챔피언이었던 사다케 마사가즈(일본)를 오사카에서 2회 KO로 이기면서 동양챔피언이 됐다. 그 후로 일본 시즈오카에서 가시와기를 상대로 1차 방어에 성공했고 이번 3차 방어전에서 다시 일본에서 일본선수를 때려눕혔다. 역대 챔피언들을 봐도 이런 경우는 없었다.”

김관장의 말은 사실이었다. 복싱은 실력도 중요하지만 홈어드벤티지가 승부를 크게 좌우하는 스포츠다. 복싱인들은 ‘안방에서 경기하면 잽만으로도 이길 수 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원정경기는 그 반대다. 1975년 유제두와 와지마 고이치전 이후 일본 원정경기는 39전 13승1무25패를 기록하고 있다. 기록에서 보듯 완벽한 열세다. 하지만 김정범에게 이같은 기록은 낡은 표어와 같은 것일 뿐이었다.

“이걸 보라. 거기다 지금까지 모두 KO로 이겼다.” 김관장이 다시 한번 전적표에 동그라미를 쳤다. 김정범의 통산전적은 29전 25승 1무 3패. 25승 가운데 KO승이 21차례다. 사다케를 KO로 꺾고 챔피언 벨트를 따낸 뒤 3차 방어전까지 모두 KO승을 거뒀다. 역대 동양챔피언과 비교해 볼 때 최상의 기록이다. 이상호 MBC 복싱 해설가는 “김정범은 화려한 테크닉과 가공할 펀치력도 돋보이지만 프로복서로서 쇼맨십도 갖춘 선수다. 상품성이 충분한 선수”라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상품성이 좋은 동양챔피언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과거 동양챔피언이라면 웬만한 사람들 사이에선 입에 오르내리지 않았던가. 어째서 복싱인들 조차도 그의 이름을 모르는 것일까?

“이유야 간단하다. TV에 나온 적이 거의 없으니까.” 김관장은 여기서부터 한국프로복싱의 암담한 현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무명의 동양챔피언

과거 프로복싱 중계는 스포츠 종목 가운데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효자 프로그램이었다. 광고도 많이 붙었다. 세계타이틀전뿐만 아니라 동양타이틀전만 열려도 방송국들은 중계권을 따내기 위해 치열한 로비를 벌이곤 했다. “프로복싱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었던 1970~80년대에도 타이틀전만으로 흥행에 성공한 적은 거의 없었다. 정작 수익을 안겨준 건 방송이었다. 당시 중계권료가 1억 원에 이를 정도였다.” 한보영 MBC-ESPN 해설위원의 회고다.

프로복싱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이른바 ‘김현치 시절(트레이너였던 김현치가 프로모터로 나서 활동하던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방송사들도 타이틀전을 중계하기 위해 경쟁을 벌였지만 경기를 유치하려는 지방간 경쟁도 치열했다. 각 지방에서는 서로 타이틀전을 끌어오기 위해 로비를 벌였고 경기를 주관하는 프로모터들은 지역안배까지 고려해야 했다. 타이틀전만 열리면 스폰서는 쉽게 붙었다.

“하지만 이제는 오히려 방송국에 돈을 줘야 하는 시대다” 한위원의 설명이다. 방송국에 돈을 줘야 한다니? 시청률이 나오지 않는 복싱을 누가 방송해 주겠는가. 세상은 변했다. 세계챔피언이 많은 태국에서조차 방송국에 돈을 주고 방송을 부탁하는 실정이다. 한국도 별반 다르지 않다.

복싱에서 공격하다 지치면 1분 안에 회복한다. 그러나 맞다 지치면 10분이 지나도 회복되지 않는다. 그래서 김정범의 훈련은 실전보다 치열하다.(사진 한상무)

사실 지상파 방송사에서 프로복싱을 중계하지 않은 건 꽤 오래 전의 일이다. 세계타이틀전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프로복싱경기는 스포츠 케이블방송을 통해 중계되든지 아니면 그마저도 기대할 수 없는 형편이 됐다. 세계타이틀전 역시 공중파 방송사로서는 달가운 프로그램이 아니다. “2000년 들어 세계타이틀전의 시청률은 거의 바닥이다. 이를 방송하느니 차라리 주말연속극을 재방송하는 게 시청률 면에서 낫다.” 한 지상파 방송편성자는 예전의 프로복싱 열기는 잊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상파 방송사에서 실제로 세계타이틀 매치를 심야에 녹화방송 하려고 한 적이 있다. 열렬 복싱팬들의 항의가 빗발쳐 계획을 철회했지만 국내 유일의 세계 챔피언이었던 지인진(34,대원체육관)이 지난 1월 29일 일본 후쿠오카에서 도전자 고시모토 다게시와(일본)에게 타이틀을 빼앗긴 이후 자연스럽게 프로복싱 중계를 하지 않게 됐다.

세계타이틀전도 중계를 마다하는 상황에 동양타이틀전을 중계하겠다는 방송사가 있을 리 없다. 따라서 한국 유일의 동양챔피언 김정범을 복싱팬들 조차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방송중계의 문제는 팬들이 김종범을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다. “방송 중계가 되지 않는 마당에 어느 지역에서 타이틀전을 유치하겠다고 나서고 누가 스폰서가 돼주겠다고 손을 들겠는가. 이런 상황에 어디서 대전료를 만들 수 있겠나. 그러니까 국내선수들이 질 각오를 하고 해외로 나가 타이틀전을 벌이는 것이다.” 이위원은 덧붙여 “지인진이 일본에서 경기에 이기고도 판정패한 것은 다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스파링 파트너가 없다

김정범은 1979년생이다. 1996년에 프로에 데뷔했으니 올해로 복싱경력 11년 째다. 과거의 잣대로 평가한다면 김정범은 백전노장이다. 대개의 선배 복서들은 15전 안에 동양챔피언에 오르고 20전 안에 세계챔피언이 됐다. 2004년 26전 만에 동양챔피언에 오른 김정범은 선배 챔피언들에 비해 늦어도 한참 늦은 경우다. 게다가 현재 WBC 세계랭킹 14위라 언제 세계타이틀전을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인 상황이다.

가장 다급한 사람은 김관장이다. “나이도 있으니까 2년 안에 세계타이틀에 도전시키려고 노력 중이다.” 그러나 시급한 문제는 세계타이틀전이 아니다. 세계타이틀에 도전하려면 그 만큼 많은 스파링을 벌이며 훈련에 매진해야 하는데 그게 여의치 않다.

“선수가 없다. 정범이의 경우 스파링 파트너를 구하지 못해 국군체육부대에 들어가 번번이 신세를 지고 있다. 거기 가서도 2~3명씩 묶어서 스파링을 해야 한다. 4회전 이상 뛰어 본 선수가 없기 때문이다. 3분 3회전씩 3명의 선수를 상대로 스파링을 하는 것도 다행이라 생각한다.”

과거 같으면 체육관 안에서 스파링파트너 조달이 가능했고 다양한 선수들을 상대로 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국군체육부대가 유일하다. 아마추어복서들이 있는 대학은 스파링파트너로 응해 주지 않는다. 그나마 국내 최고의 복싱체육관으로 불리는 ‘유명우 범진체육관’에서조차 실제 선수로 뛰는 복서는 5명에 불과하다.

이 중 복싱 특기생으로 대학에 입학하려는 고등학생을 제외하고 김관장의 말대로 4회전 이상을 뛴 선수를 꼽으라면 김정범을 제외하고 2명뿐이다. 하지만 이들도 운동을 열심히 하지 않아 김정범이 유일한 프로복서다. 국군체육부대가 아니었으면 김정범의 유일한 스파링 파트너는 거울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실제 프로 복서가 있는 체육관은 전국에서 5개 가량이다. 그런데 그 체육관에서도 선수가 없다고 걱정이다.” 김관장의 한숨이 짙어지고 있었다. 실제로 한국프로복싱은 6월부터 8월까지 3개월 동안 단 한 경기도 치르지 못한 채 개점휴업 중이다. 12회전 경기는 고사하고 4회전 경기도 전무한 실정이다.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게 한국프로복싱의 현실이다. 초보선수들은 4회전부터 착실히 경험을 쌓고 올라와야 한다. 그러나 경기가 없으니 좋은 선수들이 나올 리 없다.”

그러나 다소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취재 전 조사해 본 결과 김관장의 말과는 달리 현재 복싱계는 부흥기를 맞고 있다는 것이었다. 서울 강남에 있는 어느 복싱체육관은 밀려드는 수강생들로 만원을 이루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실제 1986년 3,543명이던 아마추어 등록선수가 한때 1,824명으로 떨어졌다가 최근 들어 2,500명대로 증가한 것을 봐도 복싱의 침체와는 동떨어져 보인다. 한국권투위원회(KBC) 등록선수 가운데 10회 이상 경기를 할 수 있는 A급 선수가 2005년 26명으로 줄었다가 올해 다시 31명으로 증가한 것도 김관장의 말과는 다르다. 지나친 우려가 아닌가?

“현재 복싱은 헝그리스포츠에서 생활스포츠로 바뀌고 있는 중이다.” 김관장의 평가다.

 

생활스포츠로 변신중인 복싱

서울시 성북구에 있는 ‘변정일 복싱클럽(관장 변정일)’은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복싱체육관이다. 300평의 체육관 규모도 입이 벌어질 정도지만 회원수가 400명이 넘는다. 체계적인 훈련법과 세계챔피언 출신의 관장이 운영한다는 소문 때문에 요즘에도 신입회원이 끊이지 않는다.

‘변정일 복싱클럽’의 박진환 코치에 따르면 유사 체육관이 하루에도 두 세개씩 증가하고 있다고. 그러나 이 복싱클럽은 엄밀한 의미에서 과거의 복싱체육관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피트니스클럽에 가깝다.

“회원수 400여명 가운데 여자회원이 40%에 이른다. 운동 목적도 다이어트와 건강 증진에 쏠려 있다. 남자회원들도 마찬가지다. 프로복서는 한 사람도 없다.”

출산 후 살을 빼기 위해 6개월 전부터 운동을 시작했다는 김관(26,주부)씨는 “8㎏정도 다이어트를 했다”며 “진짜 복서들처럼 원투스트레이트 뻗으면서 신나게 땀을 흘리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이는 ‘유명우 범진체육관’도 다르지 않다. 김관장은 하루에 30~40명 가량의 관원들이 나오지만 복싱을 단순 취미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절대다수라고 밝혔다.

박코치는 “1990년대 후반부터 불기 시작한 복싱다이어트 열풍은 앞으로도 지속 될 것으로 보인다”며 “대신 프로복싱은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전망했다.

 

살아있는 스포츠 ‘복싱’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 김정범은 자신이 처한 외부환경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희망에 부푼 표정을 지었다. 동양챔피언에 오르며 자비로 만든 50만 원짜리 챔피언벨트를 만지작거리며 세계챔피언의 꿈만을 이야기했다.

한국권투위원회 부회장을 겸하고 있는 한위원은 “구태를 벗지 못하고 파벌 싸움으로 일관하던 한국권투위원회도 새로운 회장단이 구성되면서 점차 변해가고 있다. 한국프로복싱이 사양길에 접어든 것은 확실하지만 모든 구성원들이 노력한다면 예전의 영광까지는 아니더라도 지성과 야성을 겸비한 유일한 스포츠인 복싱의 명맥은 어어갈 수 있을 것이다”라며 “장래성이 있는 선수들을 집중 육성하고 이들을 슈퍼스타로 만들어야 한다. 김종범이야말로 가장 적절한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김종범에게 물었다. 일년에 한,두번 벌어지는 동양타이틀전으로 손에 쥐는 돈은 2천만 원에 불과한데 어째서 복싱을 고집하느냐고. 먹고 싶은 것 억누르고 가고 싶은 곳 참으면서 하루 종일 복싱에 전념해도 미래가 불투명한데 무엇 때문에 글러브를 손에서 놓지 않느냐고. 과거의 헝그리스포츠 복싱이 21세기에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남들처럼 차라리 인기도 좋고 대우도 좋은 ‘K-1’이나 ‘프라이드FC’와 같은 이종격투기로 진출하지 그러느냐고.

김정범은 링 위에 오르기 전 붕대로 손을 감으며 이렇게 말했다.

“일년에 한,두번 정도 하는 이종격투기 뛰어 봤자 얼마 벌지 못한다. 그러나 프로복싱은 아직 죽지 않았다. 세계챔피언만 돼도 몇 십억 원을 벌 수 있다.”

고작 그것 때문인가? 김정범은 잠시 침묵하다 링 위에 오르며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링 위에 오르면 심장이 뛴다. 이 기분을 돈으로 따질 수 있을 것 같은가?” 아마도 김정범의 심장이 왼쪽에서 뛰는 한 그가 링 아래로 내려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그처럼.

 

박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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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



♪ 임진강 ♪

 

임진강 맑은 물은 흘러 흘러 내리고
뭇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건만
내고향 남쪽땅 가고파도 못가니
임진강 흐름아 원한싣고 흐르느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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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adeo Bordiga

1. 혁명적 목적에 선거행위를 복속시킨다

2. 당 활동에 조합활동을 복속시킨다

 

파시즘은 중간계급과 부르주아지의 산물이 아니다. 또한 봉건적 반동이 아니다. 파시즘은 민주주의에 반대하지 않는다. 국가가 부르주아지의 권력을 더 이상 방어할 수 없을 때의 필수불가결한 보조물이다.

 

1) 맑스주의는 복잡한 상황을 통하여 풍부해진다

2) 당은 소규모 인자의 소수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객관적 상황에 대한 반응이다

3) 당은 다른 당과 독립적으로 계급투쟁에 참여한다

 

 

이 시간의 임무는 배반하지 않는다. 고립의 미덕, 이 말을 만족해서가 아니라 비참한 심정으로 지킨다. 끔찍한 고립은 모든 혁명인자의 삶과 생존의 전제조건이다.     

 

 



♪ Jean de Florette OST / Sigmund Groven ♪

 

프랑스 공산당원이자 배우였던 이브몽땅.

이탈리아 농노출신의 공산주의자  지오반니 리비의 셋째 아이로  소련 헝가리 침공 이후 스탈린주의에 반대하며 공산당 탈당, 칠레 민주세력 지원과 폴란드 연대노조 지원 등 정치활동과 사회적 발언으로 유명했던  배우...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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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머프

"개구쟁이 스머프"에 나타난 사회-정치학적인 논제
Socio-political Themes in The Smurfs :: J. Marc Schmidt


1) 서론

다음은 80년대 대부분의 시기동안 방송되었던 Peyo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관한 논설적인 분석이다. 즉, 내가 "개구쟁이 스머프-이하 스머프-"라는 프로그램에서 알아챈 사회-정치학적인 경향을 분석한 글이다.

"스머프"는 독특한 프로그램이다. 우선 이 프로그램은 만화이고 어린이들을 위해 제작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다른 만화나 티비 프로그램과는 달리 논쟁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스머프"는 몇몇 등장인물들의 모험보다는 한 사회집단과 사회 내의 구성원들 사이의 상호작용, 사회와 외부인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따라서 나는 "The Lion, the Witch and the Wardrobe"가 기독교에 대한 우화이듯이 "스머프"는 정치적인 우화라고 믿는다. "스머프"는 마르크스주의(Marxism)에 대한 우화이다.

그러나 나는 "스머프"를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전복적인 선전물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설사 그렇다 할 지라도 당시의 단지 플라스틱 완구류의 판매를 위해 제작되었었던 캐릭터 만화('toyetic' cartoons)의 범람보다 더 나쁘다고 할 수 있을까? 어떻든, 이 에세이는 "스머프"에 대한 굉장한 찬양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어떤 어린이 대상 프로그램이 냉전의 시대에 이런 식으로 마르크스주의의 논쟁을 보여주었는가? "스머프"는 은유(metaphor)와 동화라는 형식을 사용하여 어린이들에게 정치적인 주제를 소개했다는 점에서 찬양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만약 Peyo가 사회주의자였다면, 그는 소련연방(the Soviet Union)과 동구의 경찰 국가권에서 실행되던 형태의 사회주의를 추종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는 이상주의자(utopian)였다. 따라서 스머프 마을에는 경찰도 군대도 존재하지 않는다. 필요한 경우에는 드물게 그들 스스로 적과 싸울 시민 의용군을 결성한다. 경찰 국가와는 명백히 대치된다.

"스머프"에 나타난 마르크스주의을 짧게 분석한 후, 페미니즘과 동성애의 관점 또한 다뤄보려고 한다. 그러나 에세이의 주된 관심은 "스머프"가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한 우화라는 것이다.


2)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유토피아(Marxist Utopia)인 스머프 마을

스머프 마을은 그 자체가 사회주의자들이 꿈꾼 공동 생활체의 완벽한 전형이다. 완전히 독립적이며 토지는 개인이 아닌 전공동체의 ('소유하다'는 단어가 '사유하다'는 개념일 경우) 소유이다.

파파 스머프는 칼 막스(Karl Marx)를 나타낸다. 그는 스머프들의 지도자라기 보다는 그들과 평등한 관계로 다만 그의 나이와 지혜 때문에 존경을 받는다. 그는 칼 막스처럼 수염을 길렀다. 파파 스머프는 칼 막스의 캐리커쳐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그는 관습적으로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붉은 색 옷을 입고 있다. 똘똘이 스머프는 트로츠키(Trotsky)를 상징한다. 그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파파 스머프와 지혜를 겨룰 수 있는 인물이며, 사색가이다. 둥근 테의 안경을 쓴 그의 모습은 트로츠키의 캐리커쳐인 것이다. 똘똘이 스머프는 자신의 생각 때문에 종종 스머프 마을 공동체로부터 고립되고 조롱당하고 심지어 배척당하기도 한다. 물론 트로츠키 또한 USSR(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에서 추방당했다.

스머프들은 자신들의 각기 다른 직업/특징에도 불구하고 모두는 완벽하게 평등하다. 따라서 농부 스머프, 편리 스머프, 요리사 스머프가 게으름이 스머프, 투덜이 스머프, 수선이 스머프에 비해 그 역할면에서 더욱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에 앞서 궁극적으로 그들 모두는 '스머프'이므로 직업이나 기술의 정도 때문에 더 우수하다거나 열등하다는 감정은 그들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스머프 마을은 폐쇄 시장의 성격을 띈다. 돈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소유물은 공공의 소유 즉 집단의 재산이다. 모두는 노동자이며 동시에 주인이다. 스머프는 자유 시장 경제와 그에 따르는 탐욕과 불공정을 거부하며, 집단은 개인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통일체는 그 성분들의 집합보다 더 위대하다. 존 레논(John Lennon)은 우리에게 '사유 재산이 없는 것을 상상하도록(imagine no possessions)' 요구한다. 스머프 마을은 그 목적을 달성했다. 그곳에는 하나의 자본이 생산 수단을 생산한다. 그리고 그것은 전체 집단이 소유하고 조정하며 고친다. 스머프들은 자신들의 명칭에 모두 '스머프'를 붙인다. 예를 들면, 똘똘이 스머프, 목수 스머프, 익살이 스머프, 게으름이 스머프, 파파 스머프, 이것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다른 사람을 지시할 때 좀 더 선별된 호칭이 아닌 '동무(comrade)'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연상시킨다.

집단 내의 완벽한 평등이라는 개념에 더하여 대부분의 스머프들은 똑같은 종류와 색깔의 옷을 입는다. 그것은 공통적인 노동 유니폼으로 독특한 모자와 스머프들의 파란 피부색과 결합하여 공산 중국에서 일반적으로 입는 마오 제복을 떠오르게 한다. 순수한 마르크스주의의 관습에 따라 스머프 마을은 무신론을 표방한다. 스머프 마을에는 신(神)도 사제 스머프(Priest Smurf)도 도 없다. 자연 어머니(Mother Nature)와 시간 아버지(Father Time)를 통해 은유적으로 상징되는 자연과 물리적 현상의 '실재하는' 힘만이 존재할 뿐이다. 물론 파파 스머프, 가가멜, 발타자르 등의 인물들이 실행하는 마법 또한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많은 종교에서 그러하듯 초현실적인 기호 속에서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은 아니며, 단순한 수단일 뿐이다.

시리즈 중에서 '대왕 스머프'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탐욕스런 왕들(그리고 자본가들)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인민을 착취하는 사악하고 압제적인 정부와 마르크스가 공식화한 선하고 인류 평등주의에 입각한 정치 모형 간의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충돌에 대한 예시이다. 이 이야기에서 파파 스머프가 없는 사이에 왕이 된 똘똘이 스머프를 전복시키기 위해 스머프들은 시민군을 결성하고, 파파 스머프가 돌아오자 유토피아의 질서는 회복된다. 마르크스를 나타내는 파파 스머프는 또한 마르크스주의의 이상적인 형태를 나타낸다.

사악한 마법사 가가멜(Gargamel)은 자본주의를 상징한다. 그는 자본주의의 모든 부정적인 면을 구현하고 있다. 그는 탐욕스럽고 무자비하며 유일한 관심사는 자신의 개인적인 욕구충족이다. 가가멜은 개인이 자신이 속한 사회보다 자신을 더 중요하게 여길 때 나타나는 인간의 모습이다. 또한 그는 현실적인 친구가 없는 미치고 늙은 운둔자이다.

가가멜이 스머프를 가지고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그는 두 가지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스머프를 잡아 먹는 것이다. 그러나 스머프는 작고 희귀하며 이를테면 사슴과 같이 먹기 좋은 음식이 되지는 못할 것이므로 이러한 가가멜의 욕구는 비정상적이다. 그것은 실베스타(Sylvester)가 골프공 크기의 트위티(Tweety Bird)를 잡아먹고자 하는 강박관념과 유사하다. 이것에 대해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로 은유적으로 가가멜이 스머프로 대변되는 사회주의를 멸망시키기를 원한다고 보는 것이다. 냉전 기간 동안 서구 사회가 소비에트 연방과 그 위성국들에게 포위 정책을 통해 사회주의의 멸망을 획책했던 것처럼 말이다. 둘째로 완전한 자본가인 가가멜은 사람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상품으로 바꾸기를 원한다. 바로 가가멜이 스머프를 잡아서 하고자 했던 두 번째 계획 역시 그들을 황금으로 바꾸는 것이다. 궁극적인 초자본가인 그는 평등이나 선 보다는 자신의 부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아담 스미스식의 자본가와 마찬가지로 가가멜에게 자신이 얻을 수 있는 만큼의 많은 돈을 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가가멜은 차갑고 신랄하며 근본적으로 공허한 인간이다. 그의 삶은 부와 재산에 대한 맹목적인 추구 외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는 실리적인 합리주의의 반사회적 효과에 대한 확증적인 실례이다.

가가멜이 기르는 붉은 색 고양이 아즈라엘(Azrael)은 가가멜의 집으로 나타나는 무자비한 자유 시장 속에서의 노동자를 상징한다. 아즈라엘은 소리를 낼 수 없으므로 불평할 수가 없다. 이것은 불평할 수 없는 노동자의 상황을 은유적으로 나타낸다. 그는 그의 임금을 교섭할 수도 없다. 아즈라엘은 주인이 주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먹을 수밖에 없다. 가가멜보다 작고 덜 때깔이 난다는 사실은 가가멜이 부르주아인 반면 그는 프롤레타리아라는 것은 은유한다. 아즈라엘은 착취당하고 억압받는다. 그는 그의 주인을 위해 사냥을 하고 싸우며 목숨의 위협을 감수한다. 그러나 아즈라엘은 자신의 상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만한 지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수세기 동안 노동자들이 교육의 기회에서 소외된 채 자신의 고용주를 위해 일하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운명 속에서 고통받아 왔던 것과 유사하다.

가가멜은 자신의 집과 그 안의 연금술 도구라는 자본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스머프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소유한다. 가가멜의 집에 스머프들과 같은 정치적 구조가 존재한다면, 가가멜의 더 우수한 신체, 지식, 기술에도 불구하고 가가멜과 아즈라엘은 동등한 소유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아즈라엘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했다.

80년대 시리즈의 후반에 새롭게 등장한 스머플링(Smurflings)과 같은 다양성을 보여주는 캐릭터는 오래된 방송 프로그램의 인기와 판매력을 증가시키려는 현실 세계의 상업적인 이해 관계의 유입으로 볼 수 있다. 80년대 중반부터 후반에 걸친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 개혁이 소련 연방의 궁극적인 종언을 예고했듯이, 방송에서 그들은 은유적으로 스머프 마을의 유토피아적인 조화를 위협하는 서구의 침입을 나타낸다.


3) 페미니즘과 스머프

모니크 위티그(Monique Wittig)에 의하면 남성은 그의 직업에 의해 그의 정체성이 규정되는 반면 여성은 '여성'으로 규정된다고 한다. 예를 들면, 사고가 발생할 경우 그 희생자 명단은 종종 "교사 한 명, 배관공 한 명, 여성 한 명" 하는 식으로 작성된다. 스머페트(Smurfette)는 스머프 마을에서 유일하게 남성 또는 진짜 스머프들처럼 직업이나 개성에 의해서가 아닌 성(性)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에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그녀의 성(性) 때문에 사회의 실재적인 구성원이 아니다. 이러한 사실은 만화 속에서 그녀가 가가멜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통해 은유적으로 드러난다.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인 접미사 'ette' 또한 스머페트가 남성들과 동등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녀는 두 번째 성(性)인 것이다.

앞서 나는 마을의 모든 스머프들은 평등하다고 단언했었다. 어느 정도까지 이것은 여전히 사실이다. 처음에는 모두 남성 뿐이었고, 스머페트의 개입으로 가부장적인 질서가 위협받지도 않았다. 따라서 스머페트는 정치적으로는 여타의 스머프들과 평등한 관계지만, 사회적으로는 그렇지 못하다.

이상적인 성차별적인 가부장제에서 여성은 공동체의 일부가 아니다. 그들은 노동과 외부 사회의 '공적인 영역'에 종사하지 않으며, 물론 노동도 하지 않는다. 스머페트는 제작자가 고맙게도 그녀를 머리가 텅 빈 허튼 계집애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유일한 일은 예쁘게 보이며 주위에 서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확실히 파파 스머프를 제외한 나머지 스머프들 보다는 다소 똑똑하다.

스머페트는 확실히 남성의 시선 속에 존재하는 '대상(object)'이다. 그녀는 대상이며, 남성들은 주체이다. 그들은 능동적이지만, 그녀는 수동적이다.

스머페트에게는 유방이 없다. 스머페트가 어떻게 창조되었는지를 고려할 때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녀는 가가멜의 거의 프랑켄슈타인적인 창조물로 삶을 시작했다. 자본가인 가가멜은 당연히 그녀를 만들고 사용하고 처분할 수 있으며 그에게 돈을 벌게 해줄 상품으로 취급했다. 여성이 남성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생각은 출산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부정한다. 스머페트에게 유방이 없다는 사실은 이러한 자연의 부정, 여성을 가부장적인 체제에 의해 부과된 사회 규범에 순응하게 만들어 그들을 제어하려는 남성들의 시도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스머페트는 남성 스머프들을 본따서 만들었다는 점에서 부차적인 창조물이다. 그녀는 돌로 된 심장을 가지고 있으며, 기술적으로 부자연스럽다. 물리적이고 은유적으로 그녀는 '진짜' 스머프가 아니다. 곧 그녀는 가부장적인 문화가 오랜 세월 동안 여성을 바라봐온 관점과 마찬가지로 사악하고 잘못된 존재이다.

어떻게 해야 보다 훌륭한 여성을 만들 수 있을까? 즉 어떻게 해야 여성을 사회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로 만들 수 있을까? 하나는 그녀의 모든 투지를 빼앗는 것이다. 그녀를 고분고분하게 만들고 남성 지배 사회 구조가 만들어 내고 유지시키는 규칙에 따르게 만들어라. 이에 대한 하나의 가시적인 사례로 그녀가 검은 머리라면 금발로 변화시켜라. 서구 사회는 관습적으로 짙은 모발의 여성은 머리가 좋은 반면, 금발 머리의 여성은 머리는 나쁘지만 더 아름답고 매력적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더 훌륭한 여성을 만들기 위한 다른 방법은 그녀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다. 파파 스머프가 스머페트를 '진짜' 스머프로 만들기 위해 마법을 걸자, 그녀의 외모는 아름다워졌다. 그전에는 추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이것을 여성에게 적용될 때, 못생긴 것은 나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은 좋은 것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정도 현실적이다. 그러나 왜 하나는 아름답고 다른 것은 그렇지 못한가? 누가 그래? 그것은 가부장적 질서이다. 남성 대 여성의 비율이 99 : 1인 스머프 마을은 완전히 가부장제 사회이다. 이것은 여성은 상품이라는 사고에 더해진다. 그녀는 남성에 의해 만들어지고 변화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기준에 맞춰 아름다워졌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에 대해 고마워한다.

글로리아 스테이넘(Gloria Steinem)은 예전에 '여성은 역사상 최초의 드렉 퀸(drag queen; 여장한 게이를 일컬음)'이라고 했다. 즉 여성의 아름다움의 이상은 전부 가부장제에 의해 강요된 것이며 여성이 성(性)들 간의 구별을 위해서가 아닌 단지 '여성처럼' 보이기 위해 애쓰거나, 남성들의 시선의 포착물, 단순한 대상인 여성에 대한 개념을 강화시킬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상적인 가부장제 사회에는 여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스머프 마을의 성비가 50 : 50이라면 어떨지 상상할 수 있는가? 한 가지는 확실하다. 우리가 방송에서 본 바와 같은 유토피아는 분명 아닐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이상적인 마르크스주의 국가는 성(性)까지도 포함하여 모든 것이 평등할 때만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여성인 스머프 마을은 거의 상상할 수 없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 깊이 내재하는 성차별주의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스머프들에게 여성이 '자연스러운' 성(性)이라면 왜 그들이 모두 스머페트처럼 생겨야 하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아름다움의 개념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어떤 근거나 '금발의 귀여운' 같은 표현으로 등식화된 외연의 틀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4) 동성연애자 천국인 스머프 마을

스머프 마을은 스머페트가 오기 전에는 항상 전부 남성 뿐이었다. 그리고 그 후에도 절대다수가 여전히 남성이다. 이것은 그들이 일반적인 방법(여성에 의한 출산)에 의해 탄생한 것이 아니며, 그들 사회에서는 '이성애(heterosexuality)'가 규범이 아닐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존재했던 어느 사회보다도 순수한 민주주의에 가까웠다고 믿고 있는 아테네와 같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정부는 모든 사람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란 남성만을 가리킨다. 여성은 공적인 행사에 참여하도록 허용되지 않았다. 아테네에서 동성애는 드문 것이 아니었으며 특별히 눈살을 찌푸릴 만한 것도 아니었다.

어떤 스머프도 스머페트와 관계를 형성하지는 않는다. 그녀가 덩치 스머프와 편리 스머프의 어린애 같은 연애 경쟁의 초점이 되기는 하지만, 마을 안 어디서도 진짜 이성애의 긴장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연적인 덩치 스머프와 편리 스머프는 스머페트 보다는 서로에게 인상을 주는 것에 더 흥미를 느끼는 듯이 보인다.

스머프 마을에 오랫동안 여성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스머프들은 스머페트라는 존재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확실히 자연은 스머프들에게 남녀간의 접촉의 경우를 보여줬을 것이고 그들은 그것을 관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여성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고 이성애 또한 없었다. 따라서 어떻게 스머페트가 다른 스머프를 유혹할 수 있겠는가? 제작자들은 이성애가 존재하지도 않고 이성애의 매력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언급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성애는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말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인가? 이런 점에 대해서, 나는 제작자들은 제외시키기로 했다. 우리 사회에서 이성애는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므로 그들은 아마도 그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덩치 스머프, 편리 스머프, 허영이 스머프가 남성동성연애자의 전형이라고 믿는다. 허영이 스머프는 영국의 시트콤인 "Are you being served?"와 같은 인습적인 연예 산업에서 보편적으로 보여지는 종류의 동성연애자이다. 반면 편리 스머프와 덩치 스머프는 "Village People"과 같은 맥락에서 극도의 인습적인 남성성으로 과장된 동성연애자의 전형이다. 게다가 주책이 스머프와 똘똘이 스머프는 동성연애자 커플의 전형을 보여 준다.


5) 결론

나는 Peyo가 우화적인 동화의 형식을 빌어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을 재현하고자 시도했다고 믿는다. "스머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실제 세계를 조명함으로서 뛰어난 판타지 문학으로 성공하고 있다. "스머프"가 이상적인 사회주의를 보여주는 우화라는 증거는 매우 많다. 나는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매력은 이 유토피아적인 이상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비록 현실 세계에서 이뤄지기엔 너무 개연성이 없을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상상할 수는 있다.


written by J. Marc Schmidt 번역 이덕진
(출처 : '스머프와 공산주의와 비슷한 점은?' - 네이버 지식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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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쉽에 관하여

런던탑에 끌려간 스물한살 처녀,

25세에 즉위한

엘리자베스 1세의 리더쉽 다섯 덕목

 

1. 포기하지 말고, 절망하지 말고, 끝까지 생존하라

 

2. 과거에 매달리거나 복수에 목숨 걸지 말고 미래로 향하라

 

3. 자기만의 이미지 파워를 창출하라

 

4. 감수성과 강인함의 균형감각을 확보하라

 

5. 어려운 문제에 봉착할수록 일관된 원칙을 지속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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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훈 <광장> 中- 아카시아가 있는 그림

                                                                      

아카시아

우거진 언덕을

우리는 단둘이

늘 걸어가곤 했다

푸른 싹이

향긋한 버러지처럼

움터나오는 철에

벗은 오히려

하늘을 보면서

말했다

멋있는 서막이

바로 눈앞에

다가 있는 성싶어

아카시아 새싹 같은 말이여

응?

 

아무도 나빠할 리 없는

꽃 피는 철이 되더니

벗은 또 멋지게 꽃잎을

코끝에 대면서

말한 것이다

아 참 삶은 멋있어

아카시아 꽃내음처럼

기막혀

 

이리하여

하늘이

저렇게 높아가는

이 무렵

 

벗은 이윽이

가지에 눈을 주며 말하는 거다

삶은 섬뜩한 것이야

이 아카시아 가지처럼

단단해

 

그래도 나는

아주 아무렇지 않은 낯빛으로

천천히 한 대 피워물면

그도 하릴없이

담배를 꺼내물고

 

아카시아

우거진 언덕을

우리는 또 말없이

걸어가는 것이었다

 

 

중학생 아이 독후감 숙제를 내주다 다시 집어든 <광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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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했니? 너는.

" ... 뭘했니? 여기 이렇게 있는 너는,

  울고만 있는 너는.

 

말해봐, 뭘했니? 여기 이렇게 있는 너는,

네 젊음을 가지고 뭘 했니?"

 

- 베를렌느, 예지(Sages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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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으로 인간적인

'당신은 인간적'이라는 말을 나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나 외에 무관심 한 듯 보이는 사람은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없다.  

 

사물을 차분하게 바라보는 예민하지만 다정한 눈.

 

호기심은 너저분하고 천박한 참견이 아니라,

건강하고 영민한, 인간적인 삶의 에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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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집

기억의 집

 

 

그 많은 좌측과 우측을 돌아

나는 약속의 땅에 다다르지 못했다.

 

도처에서 물과 바람이 새는

허공의 방에 누워, "내게 다오.

그 증오의 손길을, 복수의 꽃잎을"

노래하던 그 여자도 오래 전에 재가 되어 부스러져내렸다.

 

그리하여, 이것은 무엇인가.

내 운명인가, 나의 꿈인가,

운명이란 스스로 꾸는 꿈의 다른 이름인가.

 

기억의 집에는 늘 불안한 바람이 삐걱이고

기억의 집에는 늘 불요불급한

슬픔의 세간살이들이 넘치고,

 

살아 있음의 내 나날 위에 무엇을 쓸 것인가.

무엇을 더 보태고 무엇을 더 빼야 할 것인가.

자세히 보면 고요히 흔들리는 벽,

더 자세히 보면 고요히 갈라지는 벽,

그 속에서 소리 없이 살고 있는 이들의 그림자,

혹은 긴 한숨 소리.

 

무엇을 더 보태고 무엇을 더 빼야 할 것인가.

일찍이 나 그들 중의 하나였으며

지금도 하나이지만,

잠시 눈 감으면 다시 닫히는 벽,

다시 갇히는 사람들,

갇히는 것은 나이지만,

벽의 안쪽도 벽, 벽의 바깥도 벽이지만.

 

내가 바라보는 이 세계.

벽이 꾸는 꿈.

 

저무는 어디선가

굶주린 그리운 눈동자들이 피어나고

한평생의 꿈이 먼 별처럼

결빙해가는 창가에서

나는 다시 한번

 

아버지의 나라

그 물빛 흔들리는 강가에 다다르고 싶다.

 

 

최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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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의 매체 이론

아우라 개념을 중심으로 한 벤야민의 매체 이론

―문화정치와 매체 유토피아 사이에서―


윤   미  애



1. 들어가는 말

매체이론가로서의 벤야민의 면모는 30년대 이후의 논문들인 「생산자로서의 작가」, 「브레히트」, 「사진의 작은 역사」 및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이하 ‘예술작품’ 논문으로 축약)에 드러난다. 당대의 문화 정치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한 의도에서 쓰여진 ‘예술작품’ 논문에서 벤야민은 사진이나 영화와 같은 기술매체를 통해 예술의 총체적 성격 뿐 아니라 인간의 지각양식 자체가 획기적으로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벤야민은 기술매체에 의해 야기된 모든 문화적 변화를 신비주의 전통에 기원을 둔 아우라 개념을 빌어 설명한다. “대상을 그것을 감싸고 있는 껍질로부터 벗겨내는 일, 다시 말해 아우라를 파괴하는 일은 현대의 지각방식이 지닌 특징이다”(I, 479f).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먼 곳의 일회적 현상”(I, 480)으로 나타나는 아우라와는 달리 현대의 지각 방식은 가까움, 동일성, 반복성, 촉각성의 원리를 특징으로 한다.

아우라에 비해 현대의 지각방식은 경험의 빈곤으로 보일지 모르나 벤야민은 예술 및 문화 개념의 일대 변혁을 이러한 변화로부터 도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점에서 그의 매체이론은 1920년대 진보적 아방가르드 운동과 같은 선상에 있다. 벤야민은 기술적 생산조건의 변화로부터 해방적 예술실천을 도출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를 예술의 정치화라는 테제로 요약한다. 그러나 이 테제는 서구 자본주의 영화 산업의 현실에 대한 비판보다는 기술매체 자체의 고유한 가능성에 대한 논의에 집중한다. 따라서 벤야민은 기존 문화 매카니즘의 인식과 거기에 대항하는 실천에 더 역점을 두는 브레히트와 비교된다. 예술 혁명은 사회 혁명을 전제로 한다는 입장에서 영화 이론을 전개한 브레히트와는 달리 벤야민은 현재의 사용논리에 의해 왜곡된 기술의 비억압적 가능성에 초점을 맞춘다. 나아가 그의 논의는 자연, 인간, 기술의 관계에 대한 보편사적 차원으로 확장된다.

특기할 것은 ‘예술작품’ 논문은 기술 매체에 걸었던 모든 아방가르드적 희망이 파시즘의 문화정책에 의해 좌초된 뒤인 30년대 중반에 발표되었다는 사실이다. 거기에 담긴 벤야민의 매체이론적 테제들은 시대의 절박한 위기상황에 비추어 비현실적, 유포피아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기술 낙관주의, 기술 물신주의라는 비난은 벤야민의 서술의도를 간과한다. 벤야민의 매체이론에는 파시즘의 대중조작에서 보듯이 기술의 왜곡이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현재의 상황에 대한 위기의식이 깔려있다. 벤야민은 시계 톱니바퀴의 구조를 자세히 설명하다가 갑자기 시계를 돌려 지금의 시각을 보여주는 시계공처럼 기술의 잠재적 기능들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역사적 시간이 촉박함을 알려주고자 했던 것이다.

70년대 독일의 벤야민 연구는 ‘예술작품’ 논문에서 제시된 벤야민의 테제들을 자본주의 문화에 대한 대안문화의 프로그램으로 환영하거나 혹은 자본주의적 문화산업의 부정성을 과소평가한 기술유토피아로 비판했다. 국내의 수용은 여전히 이러한 연구 시각에 머물러 있는 듯 하다. ‘예술작품’ 논문을 해방적 예술실천을 위한 문화정치 프로그램으로만 읽는 독서방식은 벤야민의 매체이론적 성찰이 그의 다른 사상적 모티브와 관계에 대한 문제를 간과한다. 매체이론에서 벤야민은 전통적 경험양식으로서의 아우라의 붕괴를 역설한다. 그러나 이러한 아우라 비판적 태도는 벤야민의 독특한 경험이론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예술작품’ 논문을 읽고난 브레히트의 다음과 같은 소감은 아우라 소멸 테제를 벤야민의 사상체계 전반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를 암시한다: “모든 것이 신비주의일 따름이다. 유물론이 그런 식으로 소화될 수 있다니 놀랍다”. 여기서 브레히트는 예술의 역사적 변화를 아우라처럼 모호한 개념을 빌어 설명하는 주된 동기는 잃어버린 것을 향한 상실감이 아니겠는냐는 의구심을 표현하고 있다. 나아가 이는 아우라에 대한 벤야민의 이율배반적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벤야민의 매체이론을 정당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이를 벤야민 사상의 본질적인 다른 계기들과의 연관 속에서 고찰해야 한다. 아우라 개념에 대한 다양한 규정들에 그의 언어철학적, 역사이론적 모티브들이 함축되어 있다는 사실은 아우라 개념의 애매모호성을 암시한다. 이러한 애매모호성을 억지로 해소시킬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벤야민의 사상적 특징과도 관련되기 때문이다. 아우라 개념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벤야민의 매체이론은 탈아우라 과정을 지지하는 문화정치 프로그램인가 아니면 변형된 새로운 아우라를 지향하는 매체 유토피아 구상인가? 다음에서는 우선 아우라 개념에 대한 다양한 규정들을 중심으로 현대의 아우라 소멸을 벤야민이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2. 아우라와 탈 아우라


2. 1. 유일무이성


벤야민의 아우라 정의에 따르면 어떤 대상에서 독특한 시, 공간적 거리감을 느낄때 우리는 그 대상이 아우라를 지녔다고 말한다. 무언가 근접할 수 없게 만드는 신비적 분위기, 설명하기 어려운 지각현상, 유일무이한 경험, 자아와 타자의 경계가 해체되는 경험,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순간의 갑작스러움 등 아우라는 여러 각도로 규정될 수 있다. 예술작품 논문에서 벤야민은 아우라를 종교적 의식 가치(Kultwert)와 관련시키면서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먼 곳의 일회적 현상” 이라고 정의한다. 이른바 종교 의식의 숭배 대상에서 경험하는 이러한 현상은 예술작품에도 적용된다. 근대 이전의 종교적 예술과 근대 이후의 자율적 예술을 구분하지 않으면서 벤야민은 예술의 종교적 기원을 강조한다. 종교의식에 기원을 둔 예술작품은 감히 근접할 수 없게 하는 어떤 분위기를 지니는데 이를 벤야민은 아우라라고 부른다. 예술작품이 종교적 의식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유일무이한 작품이어야 한다. 아우라는 “지금, 여기”로 표현되는 원본의 현존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르네상스 이후 예술이 점차로 종교적 기원에서 벗어나 세속화되면서 예술작품의 유일무이한 가치는 예술가 혹은 에술가적 업적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바뀐다. 근대의 세속적 예술은 중세의 종교적 권위로부터는 해방되었지만 과거의 종교적 숭배는 미의 숭배로 대치된다.

예술의 이러한 아우라적 존재방식에 결정적으로 의문이 제기된 것은 19세기 중반 이후 사진과 같은 새로운 복제기술에서 비롯된다. 아무리 완벽한 복제품이라 하더라도 거기에는 시, 공간에서 원본이 지니는 유일무이한 현존성, 즉 진품성이 결여된다. 원본의 유일무이성이 아우라를 경험하기 위한 객관적 조건인 한에서 복제품과 아우라는 결합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복제가능성이라는 예술생산의 조건은 수용 조건의 변화와 맞물린다. 즉 복제기술을 통해 대량생산된 복제품은 “사물을 공간적으로나 인간적으로 가까이 두고 싶어하는”(I, 477) 대중의 욕구에 부합한다. 유일무이한 존재이면서 시, 공간적 지속성을 지니는 원본에 대해서는 성찰과 침잠의 여유가 주어지는 반면, 관찰자에게 반복적, 일시적으로 다가오는 복제품(라디오 음악, 모나리자 사진판 등)에 대해서 관조적 거리를 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상의 설명에서 벤야민은 아우라를 원본성, 진품성이라는 객관적 조건을 충족할 때 비로소 가능한 현상으로 보고 있다. 벤야민의 이러한 설명에 대해 그동안 제기된 반박은 대중적 복제품에서도 아우라 경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박에 따르면 벤야민이 기술매체에 의해 복제되는 영상의 아우라를 부인한 것은 사진이나 영화의 영상미학을 일방적으로 해석하고 나아가 아우라를 대상의 물질적 조건에 좌우되는 객관적 현상으로 환원시켰기 때문이다. 1930년 하시시 체험에 대한 기록에서 벤야민은 ‘에술작품’ 논문에서와는 달리 아우라를 주관적 조건에 기인하는 미적 경험의 일종으로 아주 사소한 대상에서도 경험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에 비해 예술작품 논문은 주로 에술작품의 수용을 중심으로 아우라가 소멸하게 된 객관적 조건에 대한 유물론적 설명을 제시한다. 이러한 관점 변화가 일어난 이유는 에술작품 논문의 역사적 배경을 참조할 때 비로소 밝혀진다. 


2. 2. 시선의 미메시스


벤야민은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브에 관하여」에서 아우라를 다음과 같이 시각적 경험으로 정의한다. “어떤 현상의 아우라를 경험한다는 것은 시선을 되돌려주는 능력을 그 현상에 부여하는 것이다”(I, 646). 이 정의에 따르면 아우라의 경험에서 중요한 것은 대상 자체가 아니라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시선의 경험으로 규정되는 아우라는 예술작품 뿐 아니라 자연, 인간, 심지어 단어를 바라보는 시선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 어떤 대상을 바라보면서 그 대상이 우리의 시선에 응답하리라는 “기대가 충족되는 곳에서 우리의 시선에는 아우라의 경험이 풍요롭게 주어진다”. 시선의 교환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30년대 초에 구상된 벤야민의 미메시스 이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벤야민에 의하면 미메시스는 “비감각적 유사성을 인식하거나 생산하는”(II, 211) 능력을 말한다. 미메시스 논문에 관련된 메모집에서 벤야민은 “먼 곳에서 우리를 쳐다보는 별”이 “아우라의 원초현상”이라면, 시선이야말로 인류가 미메시스 능력을 배운 최초의 지각작용이라고 적고 있다. 시선의 미메시스는 순간적으로 발휘된다. 이렇게 보면 “순간”과 “시선”의 이중적 뜻을 지닌 독일어 단어 “Augenblick”는 미메시스를 가장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단어이다. 아우라 시선은 별자리를 보는 것처럼 “꿈꾸듯 먼 곳으로 빠져드는 듯한” 시선 (가까우면서도 멀어짐의 경험)이면서 동시에 나와 너의 경계가 해체되는 상호주관성, 즉 미메시스적 유사성이 성립하는 시선이다.

현대에 이르러 인류의 미메시스 능력은 상당히 퇴화한 것처럼 보인다. 또한 옛날 사람들의 지각세계를 채웠던 유사성 혹은 마술적 교감은 현대인의 지각작용에서 극히 일부만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벤야민의 미메시스 이론에 따르면 퇴화된 것처럼 보이는 인간의 미메시스 능력은 실은 퇴화된 것이 아니라 변형된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언어라는 매체로 외화된다. 언어는 “비감각적 유사성이 결집된 완벽한 서고”(II, 213)가 된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언어의 도구적 기능이 표현적 기능보다 우세해짐에 따라 언어의 미메시스적 능력은 회의에 부딪힌다. 벤야민을 비롯한 언어비판적 학자들이 제스처와 같은 비언어적 미메시스 능력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언어 위기에 대한 의식에서 비롯된다. 벤야민이 사진이나 영화와 같은 영상매체의 중요성에 주목하게 된 것도 미메시스의 매체 변화에 대한 인식과 관련된다.

자본주의적 도시화, 산업화로 인해 경험 및 지각양식의 획기적 변화를 겪은 현대인에게 “먼 곳을 바라보는 능력”은 점차로 사라진다. 벤야민은 “먼 곳의 매력이 꺼져버린 눈”(V, 396)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현대인의 눈은 물밀듯이 밀려오는 충격적 영상에 대한 방어적 기능에 익숙해 있다. 사회적 필요에 따라 조직화된 이러한 눈들은 상대방의 시선에 응답하는 대신 상대방의 상을 단지 거울처럼 반영한다. 이러한 시선은 더이상  미메시스적 유사성의 매체가 되지 못하고 자기동일성을 고수한다.


2. 3. 아우라와 기억


벤야민의 아우라 이론은 그의 미메시스 이론 뿐 아니라 기억이론과도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 다음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아우라에 대한 제반 정의들은 기억의 본질에 대한 통찰에 근거한다. “한 현상의 아우라를 경험한다는 것은 그 현상에 눈을 뜨는 능력을 부여하는 것과 동일하다. 이러한 경험은 무의지적 기억의 자료들과 일치한다. 또한 무의지적 기억의 자료들은 일회적인데, 다시 말해 이러한 자료들은 그것을 붙잡아 두려는 기억으로부터 빠져나간다. 따라서 무의지적 기억의 자료들은 기억 속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의 일회적 나타남이라는 아우라의 개념을 뒷받침하고 있다”(I, 647). 여기서 시각적 경험으로서의 아우라는 시각적으로 현존하는 대상이 불러 일으키는 기억의 이미지와 관계한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지적되고 있다. 따라서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먼 곳”이라는 정의에서 먼 곳이라는 공간적 개념은 시간적 차원을 나타내는 비유이기도 하다. 벤야민은 아우라를 “시간과 공간이 교묘하게 얽혀있는 거미줄”(II, 378)이라고 정의한다. 아우라 개념의 본질적 규정은 복합적 시간성, 기억에 있다. 아우라 경험에서 기억은 기억하는 주체의 의식적 노력과 무관하게 우연한 계기에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기억, 즉 무의지적 기억과 동일하다. 벤야민은 무의지적 기억이라는 프루스트의 개념을 통해 아우라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우리는 무의지적 기억에 자리잡고 있는 지각대상의 주위에 모여드는 표상들을 그 대상의 아우라라고 부른다”(I, 644) 우리에 의해 눈을 뜨게된 현상이 우리에게 보내는 시선은 무의지적 기억의 자료들로 충만해 있는 시선이다.

벤야민에 의하면 프루스트는 아우라 경험에 정통한 작가로서 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아우라 경험의 거의 완벽한 모음집이라 할 수 있다. 프루스트는 현대 기술 문명의 시대에서도 아우라 경험이 가능함을 보여준 증인이다. 그러나 벤야민은 “잃어버린 시간의 바다에 내던져진 그물을 걷어올리려는 이루 말할 수없는 엄청난 노력”(II, 324)을 기울이는 프루스트에게 감탄하면서도 이러한 노력이 전적으로 개인의 사적 영역에 국한되고 있음을 비판한다. 벤야민은 무의지적 기억이라는 양식 자체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기억의 무의도성, 우연성, 감각성을 강조하게 된 것은 기존의 문자 매체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단적 체험과 분리된 개인적 기억은 진정한 기억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없다. 벤야민은 집단적 기억과 개인적 기억의 분리는 근대 이후 경험구조의 변화로 보면서 양자의 분리를 극복하는 과제를 역사인식에 설정한다. 따라서 「역사의 개념에 관하여」를 위한 메모집에서 벤야민은 무의지적 기억의 모델을 역사인식에 다음과 같이 적용한다. “인식의 순간에 휙 스쳐 지나가는 과거의 이미지는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기억의 이미지에 해당한다. 이 이미지는 위험의 순간에 처한 사람들에게 떠오른 그들 자신의 고유한 과거의 이미지들과 유사하다. 알다시피 이 이미지들은 무의지적으로 나타난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역사 또한 무의지적 회상에서 출현한 이미지이다”(I, 1243). 역사의식에 무의지적 회상의 범주를 적용하는 것은 모든 역사가 전적으로 의식적으로 수행될 수도, 의식적으로 체험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역사는 의식적으로 행동하는 주체에게 귀속되지 않는 무의식적 차원을 포함한다. 어떠한 역사의 논리에 의해서도 수렴되지 않는 무의식적 차원이 인식될 수 있는 유일한 지각양식은 무의지적 회상이다. 벤야민이 󰡔빠싸쥐 작품 Passagenwerk󰡕에서 사용한 “집단적 무의식”(V, 47)이라는 개념도 그와 연관된다.

기억에 있어 의도성과 무의도성의 구분은 정보가 지배적인 의사소통형식이 된 현대사회에 대두된 문제이다. 역설적으로 문화적 기억의 위기는 뛰어난 저장능력을 발휘하고 동시에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정보를 유통시키는 새로운 매체의 압력을 받으면서 더욱 첨예해졌다고 볼 수 있다. 통신제도에 의해 단순한 정보의 형태로 전달되는 사건은 센세이션에 대한 대중의 욕구에 부합할 뿐 경험의 내용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진정한 의미의 경험이란 “기억 속에 엄격히 고정되어 기록된 개개의 사실들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종종 의식조차 하지 않은 자료들로 이루어진 종합적 기억의 산물”(I, 608)이기 때문이다. 사건이 정보의 형식으로 전달되고 상품 또는 대중적 소비품이 될수록 그것은 무의지적 기억의 내용이 될 수 없고 단지 의식적 체험의 자료가 될 뿐이다. 다시 말해 안전하게 저장되고 확실하게 해독가능한 자료가 된다.

벤야민은 엄청난 이미지 홍수를 쉴새없이 내보내는 TV나 어마어마한 저장능력과 통신기술을 지닌 컴퓨터를 알지 못했지만 기술매체로 인해 야기된 문화적 기억의 문제를 이미 사진에서 간파했다. 벤야민은 사진을 의도적 기억의 매체로 사진을 평가하면서 ”아우라 붕괴 현상에 결정적 몫” (I, 646)을 사진에서 찾는다. 이러한 그의 주장에는 문자 매체를 대체할 새로운 영상매체에 대한 기대감 뿐 아니라 사라진 것, 즉 아우라를 향한 상실감이 엿보인다. 이러한 이율배반성에서 보면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가 낡은 것과의 단절을 의미한다고 단정짓기 어렵다.



3. 매체 유토피아와 아우라


앞장에서 드러났듯이 아우라에 대한 규정들이 벤야민 사상의 중요한 계기들을 함축한다는 사실은 아우라에 대한 벤야민 태도의 이율배반성을 암시한다. 아우라 경험을 극복되어야 할 구시대의 유물로 본 것인지 아니면 다시 회복해야 할 인류학적 경험포텐셜로 본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영화의 기능에 대한 벤야민의 매체이론적 성찰에서 다시 한번 제기된다. ‘예술작품’ 논문에서 기술복제 매체와 대중의 기능적 유사성에서 출발한 벤야민은 영화를 대중운동의 가장 강력한 매체로 파악했다. 영화는 개개인의 고독한 관조가 아니라 수용태도의 집단적 조직화가 가능한 곳이다. “영화관에서 관객의 비판적 태도와 감상적 태도는 일치한다. 영화관에서 중요한 것은 관객 개개인의 반응이 (...) 그 어느 곳에서보다 처음부터 집단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I, 497). 벤야민은 대중이 이처럼 스스로를 조직하고 통제할 가능성을 지니게 된 것은 예술사에서 처음있는 일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벤야민은 이상적인 영화관객에게 비판적 태도만을 요구한 것이 아님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앞의 인용문에서 드러나듯이 벤야민은 수용자의 비판적 태도와 감상적 태도를 일치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매체로 영화를 파악한다. 따라서 여기에는 비합리성과 합리성, 도취과 명철함, 상상력과 이성이라는 추상적 대립 모델을 적용할 수 없다. 그렇다면 카메라에 의해 형성된 이미지 공간과 관걕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벤야민이 사용한 “시각적 무의식”이라는 용어를 통해 주어진다.

벤야민은 일반적으로 육안으로는 포착되지 않고 우리가 의식하는 세계의 모습과는 다른 이미지 세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기술매체에 의해 형성된 이미지 공간에 프로이트의 용어인 무의식 범주를 적용한다. 전통적인 화가의 시각과는 다른 카메라의 반(反)물리적 시각에 의해 열린 “시각적 무의식의 세계”는 일상적인 것과 비밀스러운 것의 이율배반성을 지닌다. 지금까지 은폐되어있고 의식되지 못했던 영역이 기술의 영역으로 전환하게 된다는 점에서 사진은 “마법의 청산”(II, 213)이라는 미메시스의 목표를 실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메시스의 궁극적 목표는 세속적 기능에 의한 마법적 기능의 소멸이 아니라 이 양자의 구분 자체의 소멸에 있다. 따라서 고도의 학문적, 정보적 가치를 지닌 사진의 영상이 동시에 신비 체험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벤야민의 언급은 이상적 미메시스를 상기시킨다. 그러나 벤야민은 이미지의 환상적 성격을 인위적으로 확대시키기 위해 이미지의 매체성을 은폐하는 기법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이는 영화라는 기술매체에 내재한 형식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매체이론이란 “기술적 도구로부터 그 자연적 결과를 도출하도록 하는 지침”(II, 1506)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벤야민의 매체이론적 성찰은 매체의 현실적 발전상황보다는 기술에 내재한 자연적 형식에 대한 질문에 집중하는 경향을 지닌다. 사회비판적이기 보다는 유토피아적 경향을 띤 벤야민의 매체이론에서 영화는 ”새로운 집단의 제 2의 기술“로 파악된다. 또한 미메시스의 관점에서 영화는 더이상 자연 지배의 수단이 아니라 자연과의 유희적 관계에 있는 기술, 즉 “제 2의 기술”에 속한다. 여기서 영화 혹은 사진의 이미지 공간은 현실의 가상 공간이 아니라 유희 공간이다. 다시 말해 영화는 현실과 닮으면서 동시에(확대, 축소, 저속,고속 촬영 등을 통해) 현실을 변형시키는 유희 공간을 창출한다. 새로운 기술매체는 종교적 가상이나 미학적 가상이 물러난 자리에 엄청난 유희공간을 확보해준다.

영화에서 창출된 유희공간에 부합하는 수용태도는 관조적 침잠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브레히트가 서사극의 관객에게 요구하는 비판적 태도와도 다르다. 그것은 산만함 속에서의 충격체험이다. 충격이란 자본주의적 도시화와 산업화의 결과로 일어난 현대인의 대표적 경험방식으로서 과도한 자극으로 인해 심리적 기관의 평형이 깨어질때 일어난다. 충격체험의 특징인 불연속성, 순간성은 바로 영화의 몽타주 기법에 상응한다. 충격체험은 아무런 의미 연관을 세울 수 없는 불연속적 순간들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경험 빈곤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충격은 심리적 방어기제를 작동시키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주요 모멘트로 작용한다. 벤야민의 역사 인식 방법론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벤야민은 브레히트 연극의 제스처에 대한 분석에서 충격과 순간성을 특징으로 하는 변증법을 도출하고 이를 역사 경험의 방법론으로 확대했다. 연속성 보다는 불연속성, 운동보다는 정지에 더 비중을 두는 벤야민의 변증법적 사고에서 충격은 인식에 도달하는 중요한 계기에 해당된다. 이렇게 보면 벤야민이 영화를 충격체험과 관련시킨 것은 의미심장하다.    

벤야민은 사진이나 영화가 제공하는 영상의 충격효과를 강조한다. 충격적으로 밀려오는 영상은 마치 관찰자의 눈 표면에 직접 부딪히는 것과도 같은 효과를 지니기 때문에 충격체험에 익숙해진 눈은 촉각과도 같은 기능을 지니게 된다. 사진의 영상은 전통적 미술작품처럼 총체적 이미지로서가 아니라 단편화된 상으로 그 상은 마치 탄알처럼 관객을 습격하는 효과를 낳는다. 이와 같은 영상적 충격에 대해 관객은 더이상 관조적 태도로 임할 수 없다. 영화가 현실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심화시키는데 기여한다면 관객에게 필요한 것은 충격적 이미지를 재빠르게 정복하는 자발성이다. 관객은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갑작스러운 현상을 포착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바이올리니스트가 번개처럼 빠른 솜씨로 현을 골라 잡는 순간처럼 사진사는 대상과, 관찰자는 사진의 영상을 마주 대하고 있다.

영화의 혁명적 포텐셜은 단지 충격효과의 형식적 복구가 아니라 충격효과를 일으키는 요소들의 미메시스적 능력에 달려있다. 사진과 영화의 이미지 공간을 구성하는 이 요소들은 현실의 단편적 이미지들이다. 이는 문자 텍스트에 국한되지 않는 자취, 아직 코드화되지 않은 삶의 흔적들에 해당된다. “건축이나 일시적 유행에 이르기까지 삶의 수많은 형태들”(V, 47)에서 지난 시대의 자취를 찾는 거리 산보자 혹은 문화사가처럼 영화의 관객에게도 시대의 무의지적 자취를 찾아나서는 역할이 주어질 수 있다. 지금까지 코드화될 수 없었기 때문에 고착될 수 없었던 것, 즉 어떤 논리로 환원될 수 없는 사소한 것의 의미를 발견하는 순간, 집중적 현실접촉의 이 순간은 무의지적 기억이 활성화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프루스트에서 무의지적 기억을 촉발하는 계기가 사소하고 우연한 대상이듯이 영화의 한 장면, 사진 한 장에서 영화의 관객은 지나간 집단적 삶의 자취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을 통해 미메시스와 무의지적 기억, 다시 말해 변형된 아우라 경험이 영화의 잠재적 포텐셜로 인정된다.  

변형된 아우라가 귀환하는 곳에서 영화는 문화정치적 맥락을 떠나 매체유토피아적 기능을 담당한다. 물론 벤야민은 영화수용에서 비판적 태도와 감상적 태도를 결합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영화의 정치적 기능과 유토피아적 기능도 서로 매개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매개가 성공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영화에 대해 변형된 아우라 경험을 인정할 수 있는가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결국 벤야민의 이율배반적 사상에 관한 질문으로 귀착된다.



4. 나오는 말


오늘날의 독자에게는 벤야민의 매체이론보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문화산업 이론이 더 설득력을 지닐지 모른다. 벤야민이 예상하지 못했던 현실적 매체 발전은 벤야민의 매체이론적 기대를 반증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벤야민이 매체에 걸었던 기대는 다분히 유토피아적 성격을 지녔던 것은 사실이다. 또한 그의 매체이론은 오늘날 상당한 수준으로 세분화, 전문화된 매체이론적 논의에 비추어 투박하게 보일 수 있다. 그렇다면 벤야민의 매체이론적 성찰의 현실성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벤야민의 심오한 매체 철학에서 찾을 수 있다. 벤야민은 기술의 궁극적 목표는 인간과 자연의 화해에 있다는 근본적 입장에서 매체의 혁명적 가능성을 탐구했다. 여기에 따르면 매체는 단순히 오락의 도구나 정치적 계몽의 수단이 아니라 자연과의 미메시스적 유사성이 실현되는 공간이다. 인류학적 경험 포텐셜의 관점에서 매체에 접근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벤야민의 매체이론은 우리에게 여전히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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