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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을 설명해줄 수 없는 것

"일반적으로 역사는, 그 중에서도 특히 혁명의 역사는 항상 가장 우수한 정당과 또 가장 선구적인 계급이, 가장 계급의식이 투철한 전위들이 상상하는 것 보다도 그 내용이 더 풍성하고 더욱 다채로우며 더욱 다면적이고 더욱 활기차고 '미묘한' 법이다. 이런 점을 납득할 수 있는 것은 가장 뛰어난 전위들이 표출시키는 계급의식과 의지, 열정, 환상에 의해 인간의 온갖 역량이 그 절정으로 치솟아 발휘되는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레닌, 좌익소아병 中-

 

***

 

지금 누가 혁명사업-혁명을 위한 사업이다-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갈수록 심화되는 박탈의 경험, 새로운 기대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지 못하는 주체의 혼란. 

낡은 것에 대한 취급과 그에 대한 비판에서 한 걸음 나아가기가 어.렵.다. 

역설적이게도 다행인 것은 잃어버릴 대중의 지지라는게 없다는 것. 그러한 현상을 핑계삼자고 그 누구도 얘기한 적은 없다. 그런데 인텔리들의 고질적인 '내향화'가 극복되지 않고 있다.    

역사의 기록장에 아주 적은부분, 별 의미없는 페이지를 차지할 '한 시기'의 주인공이 아니려면, 무엇을?    

우리의 사업. 그 시작종을 울리면서 겪게되는 복잡한 갈등.   

 

***

 

실망과 논쟁과 오해를 거듭하는 속에서도 "건강한 아기의 출산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잡지발간을 기대하고 있다며, 나이든 한 동지가 "시간이 걸리더라도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함께 하고자 하는 의지와 흔들림없는 전망을 공유하자"고 메일을 보내왔다.

그 동지는 일산에서 중단된 현장조직을 복구하기 위한 사업을 시작했다고 했다.

어딘가에서 다들 실천에 착수했다. 공상으로 대체될 수 없는 그 전망이라는 것과 결합되는 것이 문제다.

...그래도 모두가 열정을 갖고, 혁명사업에 매진하고 또 나름대로의 창조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믿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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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1] 후반부에서는

 

노동현장에서 학출이란 꼬리표가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던 90년대 초,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던 '희'와 차차 적응해가던 '수'가 재회하여 2중창을 한다.

 

내가 달려간 곳에 너는 없었다

네가 달려온 곳에 나는 없었다 너는

가을햇빛 쓸쓸한 빌딩 스카이라인 황혼녘 나는

첫눈 내리는 변두리 아직은 질척한 공장지대

네가 떠난 후에 내가 갔고 네가 도착하기 전

나는 떠났지만

기억하라 우리가 사랑한 것은

인간이었고 역사였다

마침내 밤은 찬란하고

우리가 없다면 아름다운

이별도 없다

 

...소설이 삭막한 정세글보다, 호소력없는 선동문보다 나은 것은 

그것은 때때로 이유없이 다시 손에 집히고, 가슴에 뭔가를 새로이 심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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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

/바람부는 저녁의 거리, 사방이 트인 노점상 구석에 앉아있으니 지나가는 사람들 풍경이 그림같다. 한쪽에서는 두 시인이 구소련 사회의 성격에 관하여 논쟁을 벌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다른 한 시인이 족발을 능숙하게 썬다.

바로 이런 것에서 위로를 받는 것이다. 힘들지는 않지만 어려운 운동의 과정에서 행복이란 건 결코 특별한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발로 뛰고 마음으로 시를 쓰는, 사회주의를 갈구하지만 소시민의 삶을 사는, 나만 한 딸을 둔 한 동지 그리고 사모님의 말 하나하나가 가슴에 와닿는다.

"꽃보다 뿌리가 되자" 지금은 열매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줄기가 충실하게 자랄 수 있도록 부단하게 뿌리를 내리고 뻗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대중의 언어로 쓸 수 있어야 한다.

새삼스럽지 않지만 늘 망각하는 것들. 그들이 일깨워 준다.

 

/올 여름 먹어본 콩국수 중에서 제일 맛있는 콩국수. 가시가 별 같이 반짝이는 선인장.  미지근한 술을 마시고 일어선 시각은 자정. 용기내어 전화하려다 버스를 타고는 곧 잊는다. 이런 것이다. 건조한 이념에 서정성을 불어넣는 시인같은 재주는 없어도 내 안에서 어느새 감성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것을 가끔씩 느낀다. 또 공평하게도 현실이 그것을 마치 없었던 것처럼 곧 뒤덮어 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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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라르카의 칸소네 Italia mia 중

"분노보다는 재능으로

무기를 들것이며, 그리하여 전투는 짧게 끝날 것이다.

......."

 

반디앤루니스 행사코너에서 우연히 집어든 군주론, 우연히 펼쳐진 페이지에서.

전하의 가문이 아니라 계급의 이익을 위해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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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성의 노래

각성의 노래

- 노래공장

찢겨진 깃발 아래서 생각하라
단결투쟁 승리의 약속 지키고 있는가
적들이 몰아칠수록 침착하라
더이상 물러설수도 없는 우리가 아닌가
적들은 세월이 갈 수록 폭풍으로 몰아치는데
우리는 자욱한 안개 속에 사분 오열 흩어질 순 없다
동지여 이제 조그만 자리 투쟁으로 날려버리고 
뜨거운 사랑으로 일치단결 하나로

동지여 노동 해방 투쟁의 전선에서
기필코 넘어야 할 또하나의 벽이 있다
우리 내부에 도사린 동지에 대한 불신 분열의 싹
아집과 관념의 몽상
동지여 과학 속에 철저한  반성과 각성을 딛고
뜨거운 사랑으로 노동해방 전선으로 일치 단결하라

적들은 세월이 갈 수록 온누리에 몰아치는데
우리는 관념의 의문 속에 동상이몽 갈라질 순 없다
*파업에 당찬 머리를 모아 빈틈없는 전투 속에서
노동해방 전선으로 일치단결 하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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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직된 해고자를 보면서

9시 뉴스를 귀로 흘려듣고 있는데 "8년 만에 근로사업장으로 돌아가게 된" 이란 아나운서 말에 고개를 들어보니 환하게 웃는 김석진 해고자의 얼굴이 화면을 메우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김석진 동지의 흥분된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들려왔다. 나는 "축하드린다"라는 애매한 표현 외에는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 어떤 말이라도 그에게는 상관없었을 것이다. 울산으로 내려오면 꼭 연락달라는 말에 그러겠노라고 하고 전화를 끊는 순간 통신에 올라온 두 따님의 사진-이마에 투쟁머리띠를 두른-과 그 귀여운 얼굴들이 스쳐지나갔다.

 

***

 

박은영의 <거리에서>를 우연히 들으며  '노동을 잃은 손이 허공에서 흔들리며 나와 함께 걷고있는' 풍경을 다소 낭만적인 인상으로 갖고 있었던 부끄럽고, 철 없던 새내기 시절이 있었다. 구로 오트론 투쟁에 결합하고 있을 때였건만 해고를 당해보지 않은 내가 그 참담함을 알 리 없었다.

 

그 이후로 가차없이 자신을 내던지는 외로운 복직투쟁을 지켜보면서...어떻게 해고자 투쟁의 '원칙'과 '방도'가 있을 수 있는지 그리고 자본과의 투쟁에서 최전선에 섰던 투사들의 헌신과 희생의 댓가가 왜 피폐하고 곤궁한 삶, 공장 안 대중과 절단 된 경험일 수 밖에 없는지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벤처기업에서 해고된 한 여성노동자의 다리에 덕지덕지 붙어있던 파스, 마지막으로 전하문 앞에서 본 청산된 현대중공업 해고자들의 덩그란 콘테이너, 건강보험공단 앞 너른 해방광장 중앙에 대열정비하고 선 해고자들의 굳은 어깨, 경찰청 고용직 조합원들의 때 탄 상복... 내가 기억하고 있는 이 모든 것이 해고자 투쟁의 상징이다. 일상적이고 노골적인 탄압을 마주하고서도 버티고 있는 것은 돌아갈 곳이 일하던 곳 밖에 없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해고자들이 싸움에서 지고 굴복하는 순간 민주노조 운동도 한발짝 뒷걸음친다는 것을 그들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우리는 해고자들에게 언제나 싸움에서 최선봉에 설 것을 요구했지만 투쟁이 끝나면 연대책임은 오간데 없었다. 현장 안 조합원들과 함께할 것을 강조하고 그렇지 않으면 해고자 투쟁은 말그대로 '복직'투쟁에 그칠뿐이라고 강조하지만, 현장과 연계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조합원들이 해고자 문제를 자신의 문제와 요구로 받아안을 수 있도록 교육하고 설득하고 작업은 부차화되었고 투쟁 속에서 단련된 해고자들이 운동의 소중한 자원이 될 수 있도록 참여시키고 조직해야 한다는 목적의식은 망각되었다.     

 

김석진 해고자는 현장 조합원들의 힘과 압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법적 투쟁으로 승리했다. 이것을 김석진 해고자는 한편으로는 수치스러워했지만 그러할 수 밖에 없는 불가피한 현실조건이 존재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현장과 결합이 여전히 해고자 투쟁의 '원칙'과 방향이 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부딪히는 현실적 어려움-자본의 회유와 노조의 회피, 대중들의 무관심, 생계적 열악함-은 모든 활동가들이 감당해야할 몫일 밖에 없다.  

 

"적들이 바라는 것은 “물 떠난 물고기”다. 그래서 이 물고기가 숨을 쉬지 못하고 하고 말라 비틀어 죽게 만드는 것이다. 대중들의 고통, 울분, 분노를 느끼지 못하게 만들고 고된 노동에서 벗어난 상태를 즐기게 하며 또는 잔인한 고통(조합원들과의 분리, 극심한 생활고)을 겪게 만들어 자연스럽게 투쟁전선에서 떨어져 나가게 하거나 조금씩 마모시켜 투쟁정신을 거세하는 것이다. 해고자들은 이런 악조건에서 벗어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은 모든 활동의 초점을 대중과의 밀착에 맞추는 것이다. 대중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대중의 환희를 자신의 환희로 삼고 아무리 고난한 시기에 처하더라도 대중과 함께 있으며 대중의 선두에 서고 있다는 것을 실천적 행동을 통해서 입증해야 한다. 모든 문제에서 그렇듯이, 해고자 투쟁에서도 가장 중요한 기초는 대중과 밀착하고 대중의 다수를 획득하는 데에 있다.  해고자로서 활동해야 하는 시기는 고난의 시기다. 하지만 이 고난의 시기야말로 대중과의 밀착이 수천배나 더 강렬히 요청되는 것이다. “사람은 가장 고난한 때에 진실한 동료를 안다! ” 대중과의 결합을 통해, 그리고 선두에 선 투쟁을 통해 “가장 진실한 동료”로 자신을 입증한다면 대중들은 과감한 반격으로 응답할 것이다! 자본가의 해고를 투쟁의 불화살로 돌려줄 것이다! 그때 우리 해고자들은 이 불화살을 타고 현장에 승리자로 입성하면 된다!"

 

"...다수의 해고자들이 복직하거나 아니면 오랜 인내의 시절을 견디지 못하고 투쟁에서 멀어짐으로써 지금 해고자 투쟁은 과거에 비해 작은 힘만을 발휘하고 있다. 그럼에도 해고자 투쟁의 중요성은 지금도 분명하다. 해고자 투쟁은 우리 노동운동의 전통과 정신을 사수하면서 앞길을 열어나가는 가장 단호한 투쟁으로 항상 기록되어야 한다. 그리고 다음을 명심해야 한다. “운동의 선두에서 가장 가혹하게 탄압당하고 있는 해고자들이 이 난관을 뚫고 더 멀리 전진하고 단호하게 투쟁한다면, 이것이 미칠 효과는 거대하다. 왜냐하면 그 어떤 탄압도 노동운동을 가로막을 수 없다는 점이 바로 이 해고자 투쟁을 통해 적과 우리 모두에게 가장 선명하게 증명되기 때문이다. 조합원대중이 전진하고 노동자의 투쟁 정신을 발전시키며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민주노조에 충실한 투사로 성장하는 것은 오직 이와 같은 선진투사들의 헌신과 삶을 통한 증명을 통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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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여성운동

사회주의 여성주의란 무엇인가? (What Is Socialist Feminism?)
바버라 에런리치 (Barbara Ehrenreich)

이 글은 1976년 잡지 윈에 처음 실렸으며 저자의 동의를 얻어 다시 싣는다. 이 글은 사회주의 여성주의 사상의 고전이다. 이와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수십년동안 토론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지만, 우리가 보기에 이 글의 중요성은 변함없다. - 먼슬리 리뷰 편집진


어떤 수준에서, 아마도 너무나 분명하게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사회주의 여성주의는 오랫동안 많은 걸 겪었다. 당신은 자본주의 사회의 여성이다. 당신은 화난다. 일에 대해, 월급봉투에 대해, 남편(또는 전 남편)에 대해, 아이들의 학교, 집안일에 대해, 예쁜 것에 대해, 예쁘지 않은 것에 대해, 남들이 쳐다보는 것에 대해, 남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것에 대해 (그리고 어떤 쪽이든, 남들이 말을 들어주지 않는 것에 대해) 등등. 당신이 이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들이 어떻게 서로 맞아떨어지는 지를 생각하고, 무엇이 바뀌어야 할지 생각한다면, 당신은 이 모든 생각들을 축약된 형태에 담는 어떤 단어를 찾게 될 것이다. 그러면 거의 '사회주의 여성주의'를 제안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 상당수는 바로 이런 식으로 여성주의 사회주의에 도달했다. 우린 우리의 관심사 전체와 원칙 모두를 '사회주의적'이지도 '여성주의적'이지도 않은 듯한 방식으로 표현하기 시작할 단어/용어/문구를 찾았다. 내가 아는 거의 대부분의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은 '사회주의 여성주의'라는 말에 아주 만족하지는 않는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 용어가 너무 길고(나는 하이픈으로 이어 표현되는 대중운동엔 별 기대를 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이 용어는 그것이 진짜 지칭하는 것을 표현하기에는 너무 짧다. 이것이 지칭하는 건 결국 진정으로 사회주의 국제주의 반인종차별적, 반이성애적 여성주의다.

어떤 종류건 새로운 딱지를 취하는 것의 문제는, 이것이 즉각적인 분파주의 분위기를 만든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여성주의'는 본질적으로 그리고 자연히 도전이 되고, 신비가 되고, 쟁점이 된다. '사회주의'와 '여성주의'는 분별있는 연설, 회의, 글 등의 주제가 되기에는 너무 넓고 포괄적이라는 걸 우리가 완벽하리만치 잘 알지만, '사회주의 여성주의'를 논하는 연설가들, 회의들, 글들이 있다.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라고 고백하는 이들을 포함해서 사람들은 “사회주의 여성주의가 뭐지?”라고 불안하게 자문한다. 이것이 세계사적 규모의 놀라운 종합, 곧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와 월스톤크래프트를 넘어서는 진화론적 도약이기를 (또는 어떤 순간에, 아마도 다음번 연설, 회의, 글에서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기대감 같은 것이 있다. 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확인되기를, 소수의 불만있는 여성주의자들과 여성 사회주의자들이 집착한 변덕, 일시적인 기분전환으로 확인되기를 바라는 기대감 같은 것이 있다.

나는 사회주의 여성주의 주변에서 자라난 어떤 신비를 지나 나아가려 시도하고 싶다. 논리적인 출발 방법은 사회주의와 여성주의를 나눠서 각각 따져보는 것이다. 사회주의가, 더 정확하게 말해 마르크스주의자는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여성주의자는 또 어떻게 보는가? 우선 첫째로, 마르크스주의와 여성주의는 중요한 것을 공유한다. 세상을 보는 비판적인 방법이 그것이다. 둘 모두 대중적 신화와 '상식' 지혜를 뜯어내고 경험은 새로운 방식으로 보도록 강요한다. 둘 모두 세상을 이해하려 시도하는데, (전통적인 사회 과학이 하듯) 정적인 균형과 대칭 측면에서가 아니라 적대의 측면에서 이해하려 한다. 둘은 또 자신들이 해방시킨다는 거슬리는 동시에 불편한 결론에 도달한다. 마르크스주의자나 여성주의자의 전망을 지니면서 관찰자로 남아있을 수는 없다. 이 둘의 분석으로 발가벗겨진 현실을 이해하는 것은 곧 현실을 바꾸려는 행동에 돌입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 역학에 대해 발언한다. 모든 사회 과학자는 자본주의 사회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가혹한 체계적 불평등을 특징으로 한다는 걸 안다. 마르크스주의는 이 불평등이 경제 체제로서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과정들로부터 유발된다고 이해한다. 소수의 사람들(자본가 계급)이, 나머지 사람들이 살기 위해 의존하는 공장/에너지원/자원 등을 모두 소유하고 있다. 대다수(노동자 계급)는 자본가들이 설정한 조건 아래서 자본가들이 주는 임금을 받아야 할 전적인 필요성에서 일해야 한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실제래 생산하는 것의 가치보다 적은 임금을 지불함으로써 이윤을 창출하기 때문에, 이 두 계급의 관계는 불가피하게 화해할 수 없는 적대 관계다. 자본가 계급의 존재 근거는 노동계급에 대한 지속적인 착취에 있다. 이 계급 지배 체제를 유지하는 것은 결국 힘(force)이다. 자본가 계급은 경찰이나 감옥 등등의 국가로 표현되는 조직적 폭력 수단을 (직접 또는 간접) 통제한다. 국가 권력 장악을 목표로 한 혁명적 투쟁을 벌임으로써만, 노동 계급은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을 해방시킨다.

여성주의는 또 하나의 익숙한 불평등에 대해 발언한다. 모든 인간 사회는 성별간의 일정한 불평등으로 특징지어진다. 우리가 인간 사회를 역사적으로 훑어보고 여러 대륙의 인간 사회를 훑어보면, 공통적으로 몇가지 특징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가족 내부에서와 지역사회에서 여성의 남성 권위에 대한 예속, 여성을 자산의 형태로 대상화하는 것, 여성의 일을 아이 키우기, 성인 남성을 위한 개인적 서비스 제공, 특정한 (보통은 지위가 낮은) 생산 노동 형태에 한정함으로써 노동의 성별 구분 등이 그 특징이다.

이런 것들의 거의 보편적인 성향에 충격을 받은 여성주의자들은, 모든 인간 사회 존재의 근거가 되는 생물학적 '주어진 것들'에서 설명을 찾으려 해왔다. 남성은 평균적으로 여성보다 육체적으로 강하다. 특히 임신한 여성 또는 아이를 젖 먹여 키우는 여성과 비교할 때 그렇다. 게다가 남성은 여성을 임신시킬 힘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성별 불평등이 취하는 형식들은, 그것이 문화에 따라 아무리 다를지언정, 결국 남성이 여성에 대해서 지니는 분명한 육체적 장점에 의지한다. 말하자면, 궁극적으로 폭력 또는 폭력의 위협에 의존하는 것이다.

남성 우위의 고대, 생물학적 뿌리 곧 남성 폭력은, 어디서나 공통적으로 특정 문화에서 남녀의 성별 관계를 규제하는 법과 관습으로 인해 모호해진다. 그러나 여성주의적 분석을 따르면 이는 존재한다. 남성의 공격 가능성은 '나쁜'(반항적이고, 공격적인) 여성에 대한 지속적인 경고를 뜻하고, '착한' 여성들을 남성 우위에 공모하도록 유도한다. '착한'('예쁜', 순종적인) 태도의 대가는 무작위적인 남성 폭력에서 보호를 받는 것이고 어떤 경우는 경제적 안정이다.

마르크스주의는 강제적인 착취에 의존하는 계급지배 체제를 드러내기 위해 '민주주의'와 민주주의의 '다원론'에 관한 신화들을 폭로한다. 여성주의는 남성 지배를 힘의 지배로 드러내기 위해 '본능'과 낭만적 사랑에 대한 신화를 뚫고 지나간다. 이 두가지 분석 모두 우리에게 근본적인 불공평(부정)을 볼 것을 강요한다. 선택할 것은, 신화들이 주는 위안에 도달할 것인가, 아니면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지탱을 위해 신화를 필요하지 않는 사회 질서를 위해 일할 것인가다.

마르크스주의와 여성주의를 더해서 그 값을 '사회주의 여성주의'라고 부르는 게 가능하다. 사실, 사회주의자인 여성주의자들 대부분이 보통 보는 방식이 아마 이런 것이리라. 그러니까, 우리의 여성주의를 사회주의자 범위안으로 그리고 우리의 사회주의 여성주의자 범위안으로 밀어넣는 일종의 잡종으로 말이다. 사물들을 이렇게 두는 데서 생기는 문제 하나는, “그럼, 그이는 진짜로는 뭐야?”라고 의문을 품거나 아니면 “주요 모순이 뭐야?”라고 묻게 만든다는 것이다. 억제하기 어렵고 정당한 것처럼 들리는 이런 질문들은 종종 우리를 멈춰서게 한다. “선택하라!” “이쪽 아니면 저쪽이 되라!” 그러나 우리는 사회주의 여성주의에 정치적 일관성이 있음을 안다. 우리는 잡종도 아니고 형세 관망자(기회주의자)도 아니다.

이 정치적 일관성을 얻으려면, 우리를 다른 부류의 여성주의자들과 구별되는 여성주의자로, 다른 부류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구별되는 마르크스주의자로 차별화해야 한다.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류의 여성주의,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류의 사회주의를 구획지어야 한다. (이 용어를 양해해 주시길) 이럴 때만, 사물들이 불편한 병치 이상의 어떤 것으로 '더해질' 것이다.

대부분의 급진 여성주의가들과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은 이에 관한 한 나의 이런 간단한 특징화에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주의 여성주의자 시각에서 볼 때, 급진 여성주의의 문제는 더 나아가지 않는다는 데 있다. 급진 여성주의는 남성 지배의 보편성에 묶여 꼼짝하지 못하고 있다. 사물은 결코 진정으로 변하지 않았다, 모든 사회 체제는 가부장제다,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와 자본주의는 모두 단지 타고난 남성 공격성의 표현일 뿐이다 등등의 생각에 말이다.

사회주의 여성주의자 관점에서 볼 때, 이런 태도의 문제는 남성 (그리고 진정으로 인간적이고 평등한 기반에서 그들과 화해할 가능성) 뿐 아니라 여성에 관한 많은 것들까지 빠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급진 여성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중국 같은 사회주의 나라를 '가부장제 사회'로 얕보는 것은, 수백만의 여성들이 벌인 진정한 투쟁과 성과를 무시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은, 여성 억압에는 영원하고 보편적인 어떤 것이 있음에 동의하면서도 그것이 서로 다른 상황에서 다른 형식을 띠며 이 차이는 아주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여성 차별이 여아 살해로 표현되는 사회와 중앙위원회의 불균등한 대표 구성으로 나타나는 사회는 다르다. 그리고 이 차이는, 쟁취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가치가 있는 것이다.

모든 여성주의자들이 우려하는 게 마땅한 성 차별이라는 주제의 역사적 변주 가운데 하나가, 농경 사회에서 산업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하면서 나타나는 한 묶음의 변화다. 이는 학문적 쟁점이 아니다 산업 자본주의가 대체한 사회 체제는 사실 가부장적인 것이었다. 이 가부장적이라는 용어를 나는 본래 뜻으로 쓰는 것이다. 그러니까 생산이 가정 중심으로 이뤄지고 가장 나이 많은 남성이 지배하는 체제를 뜻한다. 사실, 산업 자본주의는 가부장제로부터 나와서 그것을 망치면서 앞질렀다. 생산은 공장으로 옮겨갔고 개인들은 '자유' 임금 근로자가 되기 위해 가정에서 뛰쳐나왔다. 자본주의가 생산과 가족 생활의 가부장적 조직을 붕괴시켰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 자본주의가 남성 우위를 폐지시켰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날 겪고 있는 특정 성 억압 형태는 상당 부분 최근에 만들어졌다고 말하는 것이긴 하다. 거대한 역사적 불연속성이 우리와 진짜 가부장제 사이에 놓여있다. 오늘날 여성인 우리가 겪는 경험을 이해하려고 하면, 자본주의를 하나의 체제로 고려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바로 이 지점까지 도달하기 위해 내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이 분명 이외에 여러가지가 있다. 단지, 여성주의자들로서 우리는 가난한 노동계급 여성, 제3세계 여성 등 가장 억압받는 여성들에 가장 주목하며 그 때문에 자본주의를 이해하고 그에 맞설 필요를 느끼게 된다고 말하고 말 수도 있었다. 단지 여성도 계급의 일원이라는 이유 때문에 계급 체제에 대해 발언할 필요가 있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여성주의자인 우리의 전망에 대한 어떤 또 다른 것을 명백히 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우리 삶에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서 성 차별은 자본주의의 역사적 맥락 안에 위치짓지 않고는 이해할 길이 없다는 점이 바로 내가 명백히 하려는 그것이다.

사회주의 여성주의자 대부분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관한 한 내가 간단한 요약한 것에 역시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다시, 더 나아가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나는 그들을 '기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런 이들에게,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유일하게 '진짜'이며 중요한 것들은 생산 과정 또는 전통적인 정치 영역과 관련되는 것들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경험과 사회적 존재의 다른 부분들 곧 교육, 성, 여가, 가족, 예술, 음악, 가정 일 등과 관련된 것들은 사회 변화의 중심 동력의 주변부일 뿐이다. '상부구조' 또는 '문화'의 부분인 것이다.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은 내가 '기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라고 부르는 이들과는 아주 다른 진영에 있다. (여성주의자가 아닌 많고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본주의를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총체성으로 본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시장을 찾는 과정에서 사회적 존재의 모든 구석구석을 침투하도록 이끌린다고 이해한다. 특히 독점 자본주의 단계에서는, 소비 영역이 경제적 관점에서 생산 영역 만큼 중요하다. 그래서 계급 투쟁을 임금과 노동시간 관련 쟁점에 한정된 것 또는 일터 관련 쟁점들에 한정된 것으로 이해할 수 없다. 계급 투쟁은 계급들의 이해가 충돌하는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며, 이런 영역에는 교육, 건강, 예술, 음악 등도 포함된다. 우리는 단지 생산 수단의 소유권뿐 아니라 사회적 존재의 총체를 변혁하는 게 목표다.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우리는 기계적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완전히 다른 영역에서 출발해 여성주의에 도달했다. 우리가 독점 자본주의를 정치적, 경계적, 문화적 총체성으로 보기 때문에, 생산 또는 '정치'와 표면상 아무 관계가 없는 여성주의 쟁점들, 가족과 건강관리와 '사적' 생활에 관련된 쟁점들을 위한 공간을 우리의 마르크스주의 구조 안에서 확보한다.

게다가, 마르크스주의라는 우리의 표지(브랜드)에는 '여성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맨먼저 여성들을 '상부구조' 또는 다른 어떤 영역에 구획지어 넣지 않기 때문이다. 기계적 성향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임금을 받지 않는 여성(주부)의 문제를 계속적으로 곰곰 생각한다. 진짜 노동계급의 일원인가? 말하자면, 진정 잉여 가치를 생산하는가? 물론 우리는 주부들이 노동계급의 일원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들이 진정 잉영 가치를 생산하다는 사실을 정교하게 증명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인민으로 이뤄진 계급이며 자본가가 지배하는 생산 영역과 상당히 떨어진 사회적 존재를 지닌 계급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계급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가장 주변부에 있는 듯한 여성들 곧 주부들이 사실은 계급의 심장부에 위치함을 알게 된다. 그들은 아이를 키우고, 가족을 결속시키고 공동체의 문화적, 사회적 관계망을 유지하는 일을 한다.

우리는 두가지의 관심이 상당히 자연스럽게 함께 흐르는 일종의 여성주의와 일종의 마르크스주의로부터 등장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사회주의 여성주의가 그동안 그렇게 신비화됐는지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주의가 진정 내가 '기계적 마르크스주의'라고 부른 것을 뜻하고 여성주의가 비역사적인 성격의 급진 여성주의를 뜻하는 것인 한에서, 사회주의 여성주의라는 이념은 거대한 신비 또는 역설이다. 이런 것들은 합쳐질 수 없는 것들이다. 공통점이라고는 전혀 없다.

그러나 내가 규정하려고 시도했던 바대로 다른 종류의 사회주의와 다른 종류의 여성주의를 합친다면, 공통의 기반을 갖게 되며 그것이 오늘날 사회주의 여성주의에 관한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다. 이 공간은 꼭데기 잘린 여성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제약에서 자유롭고, 독점 자본주의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총체성을 말하는 정치론을 개발할 수 있는 공간이다. 기존 여성주의와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로 갈 수 있는 데까지 가서는, 세계관에서 제약이 없으며 불완전하지 않은 어떤 것으로 깨고 나가야 했다. 우리의 경험 전체를 이해하고 이 이해의 총체성을 반영하는 정치론을 만들어내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회주의 여성주의'라는 새로운 이름을 취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사회주의 여성주의 이론을 하나의 '공간' 또는 공통의 바탕로 남겨두고 싶지 않다. 이 '바탕'에서 사물들이자라나기 시작한다. 우리는 성, 계급, 자본주의, 남성 지배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의 종합에 몇년전보다 더 가까이 있다. 여기선 이런 사고의 노선을 아주 간략하게만 제시하겠다.

1. 계급과 성 지배는 궁극적으로 힘에 의존한다는 마르크스주의적/여성주의적 이해는 옳다. 그리고 이는 여전히 성 차별적/자본주의적 사회에 대한 가장 타격이 큰 비판이다. 그러나 이 '궁극적으로'라는 것에는 많은 게 있다. 매일 매일 생활이라는 의미에서는, 많은 사람들은 폭력의 위협에 억제당하지 않는 가운데 그리고 종종 심지어는 물질적 박탈의 위협이 없는 가운데 성과 계급의 지배에 순응한다.

2. 그렇다면 사물들이 계속 유지되게 하는 게 힘의 직접적인 사용이 아니라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게 아주 중요하다. 계급의 경우, 이미 아메리카의 노동계급이 전투적인 계급의식을 잃은 이유에 대해 많이 논의됐다. 분명 민족적 분리, 특히 흑백의 분리가 해답의 핵심 부분이다. 그러나 나는 노동계급이 나뉜 데 더해서 사회적으로 원자화하기도 했음을 주장하려 한다. 노동계급의 이웃관계는 파괴됐으며 이제 부패했음이 인정된다. 생활은 날로 사적이 되어가고 내향적이 됐다. 한 때 노동계급이 지녔던 숙련기술은 자본계급에게 강탈당했다. 그리고 자본가가 통제하는 '대중 문화'은 거의 모든 고유 노동계급 문화와 관습을 시나브로 몰아냈다. 계급으로서의 집단성과 자립 대신 상호 고립과 자본가 계급에 대한 집단적 의존이 존재한다.

3. 여성들의 예속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적인 방식으로 이 계급 원자화 과정의 열쇠였다. 다른 식으로 표현한다면, 노동계급의 삶을 원자화하고 자본가 계급에 대한 문화적/물질적 종속을 촉진한 힘들은, 여성들의 예속을 영구화하는 데 복무한 바로 그 힘들이다. 점점 더 사적인 가족적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 집단에서 가장 고립된 이들이 바로 여성이다.(심지어 집밖에서 일할 때도 그렇다.) 많은 핵심 사례들에서 다름 아니라 여성의 숙련기술이 (생산 기술, 치유, 태아 받아내기 등등) 상품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기 위해 금지되거나 불신당해왔다.사생활에 대한 광범한 자본주의적 침투에 대해 완전히 수동적이고 무비판적이고 의존적인 (곧 '여성적인') 태도가 되도록 부추김당한 이들이 누구보다 여성이다. 역사적으로, 노동계급 생활에 대한 후기 자본주의적 침투는 제압/'여성화'의 주된 목표로 여성을 선택했다. 왜냐하면 여성이 노동계급의 문화-담지자이기 때문이다.

4. 당연히 여성들의 투쟁과 전통적으로 계급투쟁으로 인식된 것 사이에는 근본적인 상호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이 이어진다. 여성들의 모든 투쟁이 본질적으로 반자본주의적 공세인 것은 아니지만 (특히 특정 여성집단의 권력과 부를 신장시키는 것만 추구하는 이들의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여성들 사이에서 집단성과 집단적 확신을 형성하는 모든 투쟁은 계급의식 형성에 아주 중요하다. 거꾸로, 모든 계급투쟁이 본질적으로 반자본주의적 공세인 것은 아니지만 (특히 산업사회 이전의 가부장적 가치에 집착하는 이들의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사회적, 문화적 자율성을 형성하려고 하는 모든 투쟁은 불가피하게 여성 해방을 위한 투쟁과 연결된다.

아주 거칠게 요약한 이것이, 사회주의 여성주의적 분석이 취하는 한가지 방향이다. 사회주의자와 여성주의자의 투쟁이 무너져내려 같은 것이 되게 할 종합이 등장하기를 누구도 기대하지 않고 있다. 위에서 제시한 간략한 요약들은 그 나름의 '궁극적인' 진리를 담고 있다. (인종적 억압처럼) 순수히 여성주의적인 전망으로는 기괴한 왜곡 없인 설명하거나 다룰 수 없는 자본주의 지배의 중요한 측면들이 있다. (가정내 남성 폭력처럼) 상당한 확대 해석과 왜곡 없인 사회주의 사상으로는 거의 간파할 수 없는 성 억압의 중요한 측면들이 있다. 그러므로, 계속 사회주의자들이자 여성주의자들일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서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라는 자신확신에 찬 정체성을 우리가 지니기 시작하는 종합이 충분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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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Violin Muse&quot;

우울한 거리


 

.....마치 사무직원 같이 앉아있다. 울고싶다.

 

20세기 초 제네바에서 유인물 수송을 맡은 코스타야를 보고 레닌은 그것이 진정한 노동이었다고 되풀이해서 말햇다. 나태한 자판 두드리기와 입놀림이 아니라 진정한 노동으로 기여하며 지칠줄 모르는 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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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의 향기

내가 사는 곳의 반대편, 남미는 당연히 낯설다. 언제부턴가 체 게바라의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가 거리에서 팔리고 라틴 아메리카 노래에 대해 음반사의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작년 겨울, 울산으로 내려가는 차안에서 잠결에 한 동지 입에서 흘러나오는 <칠레전투>의 스토리와 남미의 정치적 상황을 들어 넘겼다. 선배 집에서 <모터싸이클 다이어리>를 보다가 중간에 잠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의 시를 읽을 때 별로 염두하지 않았지만 네루다는 칠레시인이다. 오늘 아침에는 우연히 빅토르 하라의 구슬픈 노랫가락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종로의 한 서점에서 이책저책 뒤적이다 발견한 <소외>...

 

 남미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독특한 성향에 대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이렇게 정리한다.

 '고독'solitude의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

 사랑과 열정에 관한 추상적이고도 강렬한 언어로 이루어진, 또 다분히 이데올로기적인 파블로 네루다의 시(그렇다. 시인은 일차적으로 '시'의 관점에서 평가받는 것이 맞다. "때때로 그녀도 나를 사랑했다"라니...)

그리고 루이스 세풀베다. 그의 정치적 성향때문에 요즘 방한한 세풀베다에 대해 한국의 진보진영에서 관심도 많고 또 그에게 따라붙는 수식어도 많다. 윤리 미학의 시인, 열린 좌파, 그린피스의 활동가...

 

예전과 달리 요즘에는 단편모음이 좋다. 빠르고 강한 인상을 하나의 이미지로 심어주는, 여운이 짙게 남지 않고 생각들이 헝클어지게 내버려두지 않고 바로 다른 주제와 이야기로 건너뛰어 관심을 이동시키는 그런 ....

 

 

            루이스 세풀베다/ 열린책들/ 2000

    

     <<목차>>

소외된 이야기들
검은 머리 여인과 금발 여인
로셀라, 가장 아름다운 여인
사랑과 죽음
스탈린그라드의 백장미
타노
카바토리
비달이란 사나이
라우펜부르크의 세관원
아타카마 장미
페르난도
두아르테 집안의 쌍둥이
미스터 심파
연인
가스피터
메리 크리스마스!
아구아루나 밀림의 밤
잃어버린 섬
피츠카랄도의 흔적을 찾아서
시인이여, 살롬!
엘베 강의 해적
콤파
침묵의 목소리
갈베스 선생님, 건배!
추추와 발보아에 대한 기억
순록의 나라
지중해의 고래
살가리
루카스라는 사람

천사의 방문을 받은 파파 헤밍웨이
후안파
아스투리아스
페데리코 아무개
콜로아네

 

 

 잊히고 소외된 것들에 대한 매력을 불러일으키는 서른다섯 편의 이야기. 아마존의 환경 파괴, 유대인 수용소, 세르비아 민족주의, 소시민의 일상 등 다양한 장소와 시대를 배경으로 여러 가지 사회 불의에 맞선 인간의 삶과 그 존재의 존엄성을 말하는 이 단편 모음집은 현대 사회에서 소외되어 살아가는 우리 자신에게 아릿한 감동을 던져 준다.

루이스 세풀베다는 『연애 소설 읽는 노인』(1989)으로 일약 세계적인 작가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아마존 밀림이라는 거대한 자연에 동화되어 살아가는 인간을 그렸고, 같은 해에 발표한 『지구 끝의 사람들』에서는 고래를 보호하는 환경 운동가들의 이야기를 했다.이외에도 동화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 준 고양이』(1996), 자전적 여행 소설 『파타고니아 특급 열차』(1995), 『귀향』(1994), 『감상적 킬러의 고백』(1996), 『악어』(1997), 중?단편 소설집 『외면』(1997)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발표하면서, 작가는 자기 목소리를 갖지 못한 자들을 위한 대변인이 되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대체적으로 사회·정치적 메시지가 강하게 깔려 있고, 소외된 자들과 고통받고 억압받는 자들이 주로 등장한다.
 이번에 나온 두 작품 역시 역사에 길이 남을 요란한 영웅보다는 제도권 밖에서 진한 인간미를 풍기는 일상생활 속의 영웅들을 그려 내고 있다.
 세풀베다가 2000년에 발표한 단편집 『소외』는, 잊힌 것들에 대한 매력을 불러일으키는, 또는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각별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서른다섯 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책은 역사에 기록될 만한 화려함 뒤에 숨겨진 묵묵한 진실이 담긴 소시민의 일상, 유대인 수용소, 아마존의 환경 파괴, 비이성적인 세르비아 민족주의 등 다양한 장소와 시대를 배경으로 여러 가지 사회 불의에 맞선 인간의 삶과 그 존재의 존엄성을 다루고 있다. 그의 작품 세계 전체를 관통하며 그의 문학관을 전반적으로 충실하게 반영하는 이 단편집은, 현대 사회에서 소외되어 살아가는 우리로 하여금 정치, 사회, 환경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게 한다.
『핫 라인』은 세풀베다가 2002년에 발표한 소설로, 누아르 영화 기법과 추리 소설 기법으로 칠레에서 일상화된 사회악을 고발한 작품이다. 언뜻 들으면 제목이 선정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 이 작품은, 현대인의 비뚤어지고 왜곡된 성 문화를 질책하면서도 가볍게만 흐르지 않고 그를 통해 칠레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를 짚고 넘어간다.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언급했듯이 <과거의 잘못은 잊어서도 안 되고, 용서해서도 안 된다>며 칠레 역사가 안고 있는 비리와 폭력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다.
이 작품은 2002년에 상영된, 정치적 탄압으로 사라진 실종자들과 가족들의 아픔을 다룬 영화 「어디에도 없다」에 이어 작가가 두 번째로 감독을 맡아 곧 영화로 만들어질 계획이다.

 지금까지 다양한 장르를 섭렵해 온 세풀베다의 작품들은, 칠레가 안고 있는 과거 청산 작업 문제와 환경·생태 문제, 인류애라는 무거운 사회·정치적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무엇보다 <공식적인 역사 이면에 숨겨진 진짜 주인공들의 진정한 역사는 작가가 써야 한다>는, 작가의 사회적 기능을 간과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모두 맥을 같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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