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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lodies of life(Asalama alaiku)

 
 

 

                          Alone for a while I've been searching through the dark,
                          For traces of the love you left inside my lonely heart,
                          To weave by picking up the pieces that remain, Melodies of life... 
                          love's lost refrain...

 

                          Our paths they did cross, though I cannot say just why. 
                          We met, we laughed, we held on fast, and then we said goodbye.
                          And who'll hear the echoes of stories never told 
                          Let them ring out loud till they unfold.

 

                          In my dearest memories,
                          I see you reaching out to me.
                          Though you're gone,
                          I still believe that you can call out my name...


                          A voice from the past, joining yours and mine.
                          Adding up the layers of harmony...

                          And so it goes, on and on...
                          Melodies of life, To the sky beyond the flying birds...
                          forever and beyond.


                          So far and away, see the birds as it flies by.
                          Gliding through the shadows of the clouds up in the sky.
                          I've laid my memories and dreams upon those wings.
                          Leave them now and see what tomorrow brings.

  

                          In your dearest memories...
                          do you remember loving me 
                          Was it fate that brought us close and now
                          leave me behind...

 

                          A voice from the past, joining yours and mine.
                          Adding up the layers of harmony...

                          And so it goes, on and on...
                          Melodies of life, To the sky beyond the flying birds...
                          forever and beyond

 

                          If I should leave this lonely world behind,
                          Your voice will still remember our melody.
                          Now I know we'll carry on.
                          Melodies of life, Come circle round and grow deep in our hearts...
                          as long as we remem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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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폴라니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칼 폴라니 지음/ 홍기빈 옮김/ 책세상/ 2002년 7월)

 

 

 

   19세기 러시아의 혁명적 민주주의자이자 문학가였던 체르니셰프스키의 대표작인 《무엇을 할 것인가?》에는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 나라의 문학을 알기 위해 모든 작품을 읽을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러시아의 문학을 알기 위해서는 고골리를 읽으면 된다.'  물론 이는 훗날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가 19세기 러시아의 문학을 대표하기 이전의 말일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그가 쓴 모든 글을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40여권이 넘는 맑스나 레닌의 진집을 죄다 읽어야만 맑스나 레닌을 이해했다고 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칼 폴라니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대표작인 《거대한 변형 The Great Transformation》에는 그의 사상의 정수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절판된 지 오래라 도서관이나 헌책방에서만 구경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칼 폴라니에게 쉽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여기 홍기빈 님이 간편한 시추공을 하나 뚫어 놓았습니다. 아쉽지만 이를 통해서나마 그에게 직접 접근하는 것도 괜찮을 겁니다. 이 작업이 끝나면 몇년 전에 재판이 발간된 《사람의 살림살이 Ⅰ, Ⅱ》(칼 폴라니 지음/ 박현수 옮김/ 풀빛/ 1983)나 간접적인 통로이긴 하지만 《칼 폴라니의 경제사상》(J. R. 스탠필드 지음/ 원용찬 옮김/ 한울아카데미/ 1997)으로 나아가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이 책은 크게 6개의 장과 옮긴이의 해제로 되어 있습니다. 1장 <낡은 것이 된 우리의 시장적 사고방식>은 폴라니가 1947년 《Commentary》에 기고한 논문으로, 시장 신화를 비판하는 그의 연구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2장은 《거대한 변형》의 6장과 11장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이중적 운동과 자기 조정 시장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3장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노트>는 폴라니의 강연 개요나 개인 노트 가운데 뽑은 글들로, '다시 쓰는 마르크스주의'를 제외하면 출간된 적이 없는 글들이라고 합니다.

 

   4장 <우리의 이론과 실천에 대한 몇 가지 의견들>은  폴라니가 1925년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기관지에 발표한 글입니다. 여기서 그는 중앙 계획에 의존하는 국가 사회주의 혹은 '관치 경제 모델'을 비판하는 가운데 자신이 생각하는 사회주의 경제 모델의 단초를 밝히고 있습니다. 경제 문제에 있어서 '외부적 조망'과 대비되는 '내면적 조망'에 착목해야 한다는 그의 견해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이 곳에서 옮긴이가 산별노조를 '산업 결사체'로 번역한 것은 조그만 티로 보입니다.

 

   5장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는 1945년 영국에 머물고 있던 폴라니가 전후 자유주의적 세계 시장 체제의 복구를 추진하려는 미국의 움직임에 대해 영국이 반대해야 한다는 여론을 환기하려고 쓴 글입니다. 이를테면 폴라니는 자유주의적 세계 시장 질서의 보편주의에 맞서 지역주의를 옹호하고 있는 것인데,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실천적인 쟁점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글만으로는 오늘날의 쟁점과 관련해 더 구체적인 고민으로 나아가기 힘들다는 것이 조금 아쉽습니다. 한편, 글 가운데 소련과 스탈린주의에 대한 다소간의 옹호는 현재 시점에서는 다소 거슬리는 부분입니다.

 

   6장 <칼 폴라니 약전>은 폴라니의 딸 등이 그의 삶과 사상을 개관하고 있는 글입니다. 마지막으로 홍기빈 님이 쓴 <해제 - 칼 폴라니의 시장 자본주의 비판>은 폴라니의 사상을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하고 있어서 도움이 됩니다.

 

   이 책의 3장에 있는 <마르크스주의의 기독교적 관점 : 비판>은 1930년대 초반에 쓰여진 글입니다. 그 가운데에서 매우 인상적인 대목을 여기에 옮겨 봅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이처럼 통렬한 비판은 현재에도 그리 흔치 않습니다. 여러번 곱씹어 볼만한 글입니다.

 

                                                                                    

       "이 체제의 논리는 스스로 목을 졸라댄다. 더 효율적인 자본주의를 향한 무자비한 충동.

       보조금과 관세를 요구하며 정부에 퍼붓는 압력. '눈물 없는 자본주의'는 끝났다.

       이 단계의 유효성은 지나갔다는 말이다. 자본주의는 이제 식인주의를 뜻한다.

       인간의 노동은 이제 골치 아픈 조건들이 모조리 떨어져나가고

       생활이라는 속성이 제거된 상품이 되었다.

       인간으로 희생을 치러야 이윤이 계속 늘어난다. 더 많은 사이비 인간이 필요하다.

       자본주의는 이제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민주주의'라는 변장 따위는 찢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벗어던지고 있다.

       학생들은 '자유에 침을 뱉고', 투표는 코미디가 된다.

       소리 높여 이견을 말하는 사람들이 국회의원으로 선출된다 해도 곧 위험 인물로 몰려 투옥된다.

       인간들이 사이비 인간이 되듯, 공동체도 사이비 공동체가 된다.

       항상 사이비 인간들의 공동체를 지지해온 조직들은 이를 환영하고 합리화한다.

       보편적 공동체를 지향하는 공동체는 완전히 사라지고,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인격적 자아의 실현을 추구하려 들면

       공산주의 또는 '국가'에 대한 반역으로 낙인찍힌다.

       인체의 욕구 가운데 호흡 중추보다 위에 있는 부분의 욕구는 아무것도 충족되지 못한다.

       두뇌 피질은 여기에 순응하지 못하고 미쳐간다.

       원래 멀쩡하던 모든 이들이 이제 제정신이 아니다. 전 세계가 정신병원 같은 분위기다.

       하지만 더 심각한 신경증 환자들이 나서서 덜 미친 대중을 이끈다.

       자기뿐만 아니라 이웃들도 미쳤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유쾌한 안도감이 온 나라에 퍼진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이 사실은 전혀 미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정작 미친 것은 세상이다.

       지구 곳곳에서 사악한 괴물들을 무찌르기 위해 십자군을 조직한다.

       보탄Wotan 숭배가 국가적 종교가 된다."(pp. 9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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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능과 사고의 결합

  "마르크스주의는 스스로를 무의식적인 역사 과정의 의식적 표현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심리학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역사 철학적인 의미에서의 '무의식적인' 과정이 그 의식적 표현과 일치하는 것은, 그것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즉 대중이 순전히 자연 발생적인 압력에 의해 사회적 인습의 문을 때려 부수고 역사 발전의 가장 깊은 요구에 승리의 표현을 부여할 때 뿐이다. 이런 순간에는 시대의 최고의 이론적 의식이 이론과 가장 거리가 먼 최저변의 피억압 대중의 직접적인 행동과 융합한다. 의식과 무의식적인 것의 이런 창조적인 결합이 바로 보통 영감이라 불리는 것이다. 혁명은 영감을 받은 역사의 광란 상태이다.

   진짜 저술가라면 누구나 자신보다 강한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손을 인도하는 듯한 창조의 순간을 알고 있다. 또한 진짜 웅변가라면 누구나 평소의 자기 자신보다 강한 뭔가가 자신의 입을 이용해 말하는 순간을 경험한다. 이것이 '영감'이다. 그것은 온 힘이 다 기울여진 최고의 창조적인 노력에서 태어난다. 무의식적인 것이 깊은 우물 속에서 솟아올라 의식적인 정신을 자신의 의지에 종속시키고, 그것을 어떤 보다 큰 종합 속에서 자신과 융합시킨다.

   그와 마찬가지로 고도의 정신력이 이따금 대중 운동과 결합된 모든 개인적인 활동에 주입된다. 10월 혁명 기간 동안에 '지도자들'에게 바로 이와 같은 일이 발생했다. 유기체의 잠재적인 힘, 더없이 깊은 뿌리내린 그 본능, 동물이었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직감 - 이 모든 것이 솟아올라 심리적인 인습의 문을 때려 부수고, 혁명에 봉사하며 보다 높은 역사 철학적인 추상 개념들과 힘을 합친다. 개인과 대중에 영향을 미치는 이 두 가지 과정은 의식과 무의식의 결합, 즉 의지의 원동력을 이루는 본능과 보다 높은 사고의 이론의 결합에 바탕을 두고 있다."

- <나의 생애(하)>(트로츠키, 박광순 옮김, 범우사, 2001), pp.7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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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맑스가 생각한 '직업'

 "직업을 선택할 때 주요한 기준은 인류의 행복과 자기완성이다. 두 가지는 서로 엇갈리거나 적대적이어서 한쪽이 다른 쪽을 배제한다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람은 자신과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향상시키고 그들의 행복을 위해 일해야 비로소 자기완성을 이룰 수 있다. 그것이 사람의 본성이다.

 

   만일 사람이 자신만을 위해 일한다면 설령 저명한 학자나 훌륭한 현자 혹은 뛰어난 시인이 되 수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결코 진정으로 완성된 위대한 인간이 될 수는 없을 터이다. 역사는 이 세상 전체를 위해 일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을 높여가는 사람을 위인으로 인정한다. 최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준 사람을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기린다. 종교도 가르쳐준다. 모든 사람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인물은 인류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이런 생각을 섬멸할 용기가 있는 사람이 있을까?

 

   만일 우리가 많은 사람을 위해 헌신적으로 살아가기로 삶의 방향을 설정한다면, 어떠한 시련도 우리를 굴복시킬 수 없을 것이다. 시련이란 그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잠시 동안의 희생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사소하고 한정적이며 이기적인 기쁨을 향유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공유하는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죽어도 우리의 삶의 자취는 조용히, 그러나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며, 타고 남은 재는 고귀한 인간들의 반짝이는 눈물로 젹셔질 것이다."

 

- K. Marx, <직업 선택을 앞둔 한 젊은이의 성찰> 중에서

 

 

 

   1835년 8월 12일, 독일 모젤(Mosel) 강변 트리어(Trier)에 위치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김나지움 졸업반 학생들은 긴장하고 있었다. 그 날은 서른 두 명의 학생들이 졸업시험 과목 중 논문 시험을 치르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변호사이자 법률 고문관인 하인리히 맑스의 아들 칼 맑스도 그 서른 두 명의 학생들 가운데 하나였다. 이제 막 17세가 된 젊은 청년이었던 그는 <직업 선택을 앞둔 한 젊은이의 성찰(Betrachtung eines Jünglings bei der Wahl eines Berufes)>이라는 제목의 인상적인 논문을 작성했다. 이 논문 가운데 묻어나는 결기는 그의 평생의 나침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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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nin과 Gorky의 Chess 대결

Lenin과 Gorky의 Chess 대결  

 

 

                레닌(왼쪽)이 고리끼(오른쪽)와 함께 체스를 두고 있다.

                레닌은 망명지에서 종종 동지들과 함께 체스를 즐겼다.

                러시아 사람들은 체스를 즐긴다.

                체스세계챔피언도 러시아 사람들이 가장 많다.

                러시아어로 "샤흐마띠"로 불리는 체스.

                언제 한 번 배워보고 싶다.

                레닌은 체스를 두며 무념에 빠졌었을까?

                아니면 체스판을 혁명의 지도로 생각했을까?

 


              " 체스는 왕과 왕이 싸우는 게임이다.

                빛의 영과 암흑의 영의 갈등, 선한 영과 악한 영,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서 벌이는 천사와 악마의 싸움,

                적대적인 힘이 서로 겨루고 있는 싸움터로서의 현실세계를 뜻한다.

                현현顯現과 비현현非顯現으로의 회귀이다.

                흑색과 백색이나, 홍색과 백색으로 이루어진 체크 무늬 판은

                현현 세계에 존재하는 기본적인 이원 요소나 상보적 요소

                - 음과 양, 밤과 낮, 태양과 달, 남자와 여자, 모호함과 명확함,

                달의 어두운 부분과 밝은 부분, 시간과 공간 등 - 가 서로 밀어냄을 상징한다.

                흑백, 홍백의 체크 무늬 판은 또한 선과 악,

                행운과 불운이 뒤바뀌며 펼쳐지는 인생의 교착 상태를 뜻한다.
                체크 무늬 판에 그려진 64개의 칸은 시바신이 변신한 모습의

                만다라(MANDALA)이며, 사원이나 도시의 기본적인 형태인 8*8 이라는

                4배수의 상징에 근거를 둔것으로

                우주의 모든 가능성과 우주와 인간을 움직이는 지배력을 나타낸다.

                그래서 체크 무늬 판에는 우주의 완전함이라는 의미도 있다.

                인도의 둥근 체스판은 <무한 無限>과 <생사生死의 순환>을 상징한다.

                체스의 한번의 승부는 한 시대를 뜻하고, 말을 치우는 것은 비현현의

                시기를 상징한다.

                말의 움직임은 현현의 세계와

                그 속에서 개인이 가지는 모든 가능성의 실현을 상징한다.

                어떤 말을 움직일 것인지 선택은 자유이지만,

                말을 움직임으로써 생기는 일련의 피할 수 없는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한다.

                즉 여기에서는 자유의지와 운명이 모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영혼만의 진리이며, 인간은 영혼 안에서만 자유롭고,

                영혼 밖에서는 운명의 노예가 된다."

                - 출처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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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울의 움직이는 성




제목: 미야자키 최초의 러브 스토리

전문: 미야자키 하야오의 신작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11월 20일 일본 현지 개봉을 앞두고 있다. 미야자키의 새로운 판타지 로맨스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세운 거대한 기록들을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인지 전세계의 관심이 쏠려 있는 가운데, <하울의 움직이는 성> 도쿄 시사회에 다녀왔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초대형 블록버스터도 아기자기한 소품도 아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처럼 미야자키 애니메이션의 집대성도 아니고, <붉은 돼지>처럼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에 근거해 빚어진 작품도 아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는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미야자키 애니메이션, 그것도 올해 63세가 된 미야자키 하야오가 사랑에 빠진 소녀의 마음으로 내놓은 한 편의 판타지이자 유쾌한 러브 스토리다.
어찌된 영문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미 5년 전 영국의 아동 문학가 다이애나 윈 존스의 동명 판타지 동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이 동화에서 상식적으로는 절대 움직일 수 없는 성이 움직인다는 것과 소녀가 할머니가 된다는 두 가지 설정은 특히 미야자키를 매료시켰다. "이걸로 충분히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겠어!"라고 프로듀서인 스즈키 토시오에게 외쳤다니 거의 '심봤다'는 심정이었던 듯하다. 그 자신부터가 만만찮은 노인네인 미야자키는 90세 노파의 사랑을 무척 건강하고 밝게 그린다. 젊음이 세상의 중심인 요즘 시대의 흐름과 달리 '나이 듦'이라는 인생의 경로 속에서 색다른 즐거움을 찾아내고 있다. 원작의 기본 설정만 남겨두고 이야기 자체를 대폭 수정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애니메이션 사상 처음으로 할머니를 여주인공 삼는다는 전례 없는 시도와 더불어 한번쯤 '전쟁 속에서 꽃피는 사랑'을 그려보고 싶었다는 미야자키의 소망이 반영돼 있다.

중제: 청소부 할머니와 꽃미남 마법사의 동거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모자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18세의 소피는 사는 게 별로 재미없다. 앞으로도 모자 가게를 계속하고 싶은 건지 아닌지도 확실치 않다. 무표정한 얼굴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소피는 골목길을 걷다가 군인들에게 희롱을 당한다. 그 순간 누군가 나타나 궁지에 빠진 소피를 안고 하늘로 훌쩍 날아오른다. 그가 바로 뭇 사람들은 두려워하지만 여자들은 보는 순간 빠져든다는 마법사 하울이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이 도입부를 보고 있으면 정말 두근거린다. 황무지 마녀의 부하들에게 쫓기고 있던 하울이 마침 군인들에게 놀림을 당하던 소피를 안고 훌쩍 하늘로 날아올라 함께 공중을 걷는 장면은 특히 10대에서 30대 중반까지의 여성 관객들의 가슴에 강력히 꽂힐 만하다. 두 주인공의 캐릭터를 소개하며 관객들을 일상에서 판타지의 세계로 단숨에 빨아들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날의 아찔한 경험에 마음을 빼앗긴 소피에게 곧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난다. 하울을 짝사랑하는 황야의 마녀가 소피를 질투해 저주를 건 때문이다. 눈 깜짝할 사이 주름투성이의 90세 할머니로 변해버린 소피는 주변 사람들이 걱정할까봐 스스로 가출하고, 황야를 헤매다 하울의 성에 들어간다. 그렇게 할머니 소피와 '꽃미남' 마법사 하울의 기이한 동거가 시작된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그동안의 미야자키 애니메이션과 꽤 달라 보이는 것은 이 두 주인공 캐릭터의 힘이 크다. 카리스마 넘치는 마법사 하울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천공의 성 라퓨타> <모노노케 히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이르기까지 늘 모범적이었던 미야자키 애니메이션의 남자 주인공들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일본의 막강 아이돌 그룹 'SMAP'의 멤버 기무라 타쿠야가 목소리를 맡아 화제가 된 하울은 그야말로 어쩔 수 없는 캐릭터다. 평상시 별로 하는 일도 없이 놀고먹는 귀차니스트에 소심남이지만 그 때문에 여자들에게 인기 많은 꽃미남의 전형이랄까. 기무라 타쿠야가 "하울 캐릭터의 원화를 받았을 때 그걸 떨어뜨릴 뻔했다. 너무 좋아서"라고 했을 정도니, 외모는 확실히 수준급이다. 여러 왕국의 왕들이 러브 콜을 보내는 능력 있는 마법사면서도 치솟는 인기가 부담스러운 그는 성을 움직여 자유롭게 떠돌아다니기를 원할 뿐이다.
그런 하울에게 반한 우울 소녀 소피는 할머니가 된 뒤로 무진장 건강해진다. 무미건조하던 일상에서 자신이 할머니가 된 일대 사건을 즐겁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하울의 성에서 청소부로 살게 된 후부터는 구부정하던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하울과 그의 견습생 마이클, 하울과 계약을 맺고 움직이는 성의 화덕에 살고 있는 불의 악마 캘시퍼를 보살피며 살림을 도맡는다. 나이 드는 것은 쉽지 않지만 그리 나쁜 것도 아니라는 삶의 통찰은 명랑 할머니 소피를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리고 그 속을 알 수 없는 미야자키의 연출력은 90세 할머니와 꽃미남 마법사 사이에 흐르는 기묘한 감정의 교류를 세심하게 포착한다. 규모나 스케일, 전체 완성도를 떠나서 소피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한 컷만으로도 마음의 두근거림과 기발한 유머가 느껴지게 하는 것, 그건 역시 아무나 지닐 수 있는 재능은 아니다.
그리하여,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전해주는 지축을 울리는 것 같은 장대함과 박력과는 종류가 다른 감동이 존재한다. 소피가 하울의 과거와 비밀을 알게 되는 후반부의 클라이맥스는 가슴을 먹먹하게 할 만큼 슬프기도 하다. 삶의 변화를 받아들이며 건강하게 살아가는 소피에게서 흘러나오는 감동은 이 특별한 주인공들을 둘러싼 중세의 풍경과 이어진다.

중제 : 일본인이 동경하는 이상의 세계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배경은 마법과 과학이 공존하는 19세기 말이다. 마을에 흐르는 강 옆으로 증기 기관차가 지나가고, 하늘에는 동물의 날개가 달린 비행선들이 떠다닌다. 사람들은 거리를 가로지르는 전차를 타고 다니며, 바다에는 증기 여객선이 떠 있다. 왕국과 왕국 사이에는 전쟁이 벌어지고 폭탄을 실은 함선 모양의 비행기들이 하늘에서 격전을 벌인다. 근미래 화가들이 '20세기는 아마도 이럴 것'이라고 공상했을 만한 풍경들이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가득 채우고 있다. 스즈키 토시오 프로듀서는 "이상하다고 여길 것이다. 비행 물체가 등장하는데, 거리에 자동차는 없고, 집안에 TV는 보이지 않는다. 미야자키가 기계와 인간의 사이가 좋았던 시대는 그러했을 거라고 상상하고 그렸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시대적 배경이야말로 병기광이자 비행 마니아로서의 미야자키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온갖 고철들을 모아놓은 덩어리 같은 기괴한 하울의 성이 있다.
마을 사람들은 증기를 내뿜으며 쿵쿵 안개 속을 가로질러가는 하울의 성을 집 안에서 보며 마법사 하울에 대한 공상을 키워간다. 마법과 과학이 한데 뭉쳐 있는 하울의 성은 미야자키의 상상력으로 닭다리를 연상시키는 독특한 네 개의 다리(원작에는 없는 것으로 원작자 윈 존스의 감탄을 자아내게 한 설정이다)를 얻게 됐다. 미야자키의 독특한 비주얼 스케치로 탄생한 성은 3D 기술력에 의해 입체감이 있는 회화 그림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이 새로운 비주얼의 메카닉은 분명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거신병이나 <천공의 성 라퓨타>의 로봇 병정만큼 오래 사랑받을 만하다.
미야자키의 상상력이 총동원된 마법과 과학의 시대는 정확히 어느 나라인지 알 수 없는 유럽의 한 마을 안에 담겨 있다. 아늑하게 펼쳐진 초록색 초원과 언덕, 투명하게 푸른 하늘과 지중해를 연상시키는 바다, 그리고 그림 같은 골목길과 항구, 시장통의 풍경은 지브리 애니메이터들이 프랑스 알자스 지방에 배경 조사를 다녀온 뒤 만들어진 것이며 미야자키가 오랜 시간 동경하고 있던 마음속 풍경을 담아낸 것이기도 하다. 소피의 아늑한 모자 가게나 왕실 마법사 술리만이 기거하는 왕궁 거리 등의 배경은 지브리만의 고급스런 색채 감각이 반영돼 감탄을 자아낼 만큼 아름답다. 그런데 이 알 수 없는 과거 시대의 유럽 풍경은 바로 미야자키 하야오를 비롯한 일본인들이 바라보는 서양, 일상의 유토피아에 대한 총체적인 반영이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 <엄마 찾아 삼만리> <루팡 3세> <붉은 돼지>에서 유럽의 도시와 마을, 거리를 그려냈던 미야자키의 내면 풍경이 또다시 화면 위로 드러난 것이다. 스즈키 토시오 프로듀서는 "미야자키와 나를 비롯, 60대 이상의 일본인들에겐 서양에 대한 동경이 있다. 그래서 애니메이션 속에서도 현실의 서양이 아닌 동경하는 서양의 모습을 그리게 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쇄국 정책에서 해방된 후 100년간 급속하게 서구 문명을 흡수해온 일본인들이 이상적으로 여겼던 유럽 문화가 미야자키와 지브리가 만든 애니메이션에 담겨 있다. 이 애니메이션들이 다시 유럽과 아시아에 수출됐고 유럽의 이삼십대 애니메이션 팬들이 이를 자국의 애니메이션으로만 알고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처럼 아이로니컬한 일도 없지 않나 싶다. 평화보다는 전쟁을, 자연보다는 문명을 추구한 탓에 지금은 이상향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서구 문명을 바라보는 거장 미야자키의 안타까운 시선은 화면 곳곳에 입혀져 있다. 그래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하늘은 더 맑고 공기는 투명하고 초원은 더 푸르다. 늘 미야자키 애니메이션의 음악을 도맡아온 히사이시 조가 작곡한 테마 음악은 왈츠풍의 리듬으로 소피와 하울이 겪어야 하는 전쟁의 와중에 스며들어 슬픔과 기쁨을 대변하듯 울린다. 폭탄을 떨어뜨리는 비행선이 불의 전투를 일으키고 그 사이를 매처럼 날아다니며 싸우는 마법사 하울, 그리고 상처 입은 하울을 감싸안는 소피의 사랑은 이상향을 그리워하는 미야자키의 복합적인 세계관 위에 안착한다.

중제 : 새로운 신화에의 도전

지난 11월 8일 도쿄 유락조의 스카라좌극장에서 <하울의 움직이는 성> VIP 시사회가 열렸다. 기무라 타쿠야 등 출연진이 무대 인사를 가졌고, 일본 내 무수한 취재진들이 몰려들었다. 현재 일본 언론들의 찬사를 받고 있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지금까지 일본영화로서는 사상 최다인 전국 450여 개 스크린을 확보하고 있다. 온갖 잡지들이 <하울의 움직이는 성> 관련 기사를 내보내고 있고 TV를 통해 예고편은 숱하게 방영 중이다. 그만큼 개봉을 앞둔 현지의 분위기는 뜨겁다. 이건 마치 일본에서만 2천4백만 명 이상을 동원한 미야자키의 전작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후 3년 만에 다시 신화에 도전하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언론과 관객이 전국민적으로 성원하는 분위기다.
그 와중에 기존의 미야자키 애니메이션과 달리 화제가 됐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목소리 캐스팅이 성공적이라는 것은 꽤 좋은 조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미야자키의 광팬인 아내와 아이를 위해 먼저 지브리 쪽에 출연 의사를 밝힌 기무라 타쿠야는 더빙을 하며 "이렇게 긴장해 본 적이 없었다"고 고백했다지만 그의 목소리는 우려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하울의 역할에 썩 잘 어울린다. 일본의 장수 시리즈 드라마 <남자는 괴로워>로 사랑받아온 중년 여배우 바에쇼 치에코가 무뚝뚝한 소녀 소피와 사랑스런 할머니 소피의 목소리를 동시에 연기하고, 황무지 마녀 역은 <모노노케 히메>에서 늑대신 '모로'를 연기했던 일본의 유명한 여장 남자 배우 미와 아키히로가 맡아 독특한 음색을 들려준다. 배우들의 호흡은 안심해도 좋을 수준이지만 문제는 홍보다.
미야자키와 스튜디오 지브리의 성공 신화를 이끈 배후 인물 스즈키 토시오 프로듀서는 6개월간 대대적으로 홍보를 했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때와는 달리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대한 프로모션을 개봉 한 달 전부터 시작했다. 지난 10월 말부터 일본 내 언론에 슬슬 실체를 공개하기 시작했고 스폰서인 니혼 TV와 더불어 전국적인 이벤트도 마련했다. 물론 이 한 달 새에 집중적으로 몰려 있다. 도쿄 시오도매 니혼TV 플라자 1층에서는 11월 3일부터 28까지 열리고 있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 관련 전시회도 이 일환이다. 하울의 성 내부를 2층으로 만들어 놓은 것으로 불의 악마 캘시파가 기거하는 화덕, 거실, 소피가 음식을 하는 부엌과 하울의 목욕탕, 그리고 성이 공간 이동을 할 때 사용하는 문 손잡이까지 세세하게 재현돼 있다. 소피, 하울, 마이클 등의 모습을 한 캐릭터 인형들과의 기념 촬영도 가능하다. 모든 물건들의 재질이 스티로폼류와 가죽, 천으로 되어 아이들이 아무리 만져도 부숴지지 않고 다치지 않도록 고안돼 있는 이 전시장에는 개장 5일 만에 이미 3만4천 명이 다녀갔다. 과연 파죽지세의 홍보 열기 속에 개봉될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일본 관객은 물론 전세계 애니메이션 팬들의 마음을 얼마나 매료시킬 수 있을지 궁금하기 그지없다. 올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기술공헌상을 수상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12월 말 국내에도 개봉 예정이다. 이번엔 거의 시차 없이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을 접할 수 있는 셈이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지금까지 미야자키 애니메이션에서 볼 수 없었던 캐릭터와 설정, 그리고 스튜디오 지브리와 미야자키 애니메이션이라는 브랜드가 지닌 기존의 성향이 적절히 혼합돼 있는 작품이다. 자연친화주의와 판타지, 기계에 대한 반성과 희망은 지난 30년간 꾸준히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온 미야자키의 마음속에서 자라났고, 또다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진작부터 사는 게 지루했던 18세 소녀 소피는 90세 할머니가 되어서 자기 인생의 전환기를 맞고, 삶의 의미를 되찾는다. 방법은 다르지만 가는 길은 같다. 스즈키 프로듀서는 "어린아이들이 좋아할 작품"이라고 말하지만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사실상 조금 큰 아이들의 꿈을 자극할 로맨틱한 판타지다. 올해 63세인 "흰머리 소년" 미야자키는 여전히 넘치는 에너지로 가득하다. 참, 보너스로 미야자키 애니메이션 최초의 키스 신도 등장하니 끝까지 눈을 떼지 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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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다 이사오와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특집 3 | 다카하다 이사오의 애니리얼리즘

제목: 무엇을 상상하든 현실을 그린다

전문: 미야자키 하야오와 더불어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큰어른으로 존경받는 다카하다 이사오는 애니메이션계의 전무후무한 다큐멘터리스트다. 국내 개봉하는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을 통해 그의 작품들이 추구해온 극사실주의를 만날 수 있다.

1989년. 스튜디오 지브리가 한창 <마녀 배달부 키키>를 만드느라 분주하던 시기였다. 다카하다 이사오 감독은 문득 '왜 너구리를 주인공으로 한 애니메이션은 없는 걸까?'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간 지브리 작품 대다수의 프로듀서로 일해온 스즈키 도시오는 다카하다의 생각을 듣고는 영 감이 오질 않아 대답을 꾸물댔다. "좋기는 한데..." 며칠 뒤 미야자키 하야오가 평소 만화가 스기야마 시게루의 작품 <팔백팔 너구리>를 좋아했던 터라 '토토로와 팔백팔 너구리'라는 제목의 애니메이션을 만들겠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별 진전이 없었다. 1992년 너구리 얘기가 다시 불거졌지만 미야자키는 한창 <붉은 돼지>를 진행하고 있었고 누군가 대신 할 사람이 필요했다. 생각난 사람은 뻔했다. "너구리에게 경의를 표하고, 관객을 박장대소하게 해줄 것"이라는 단서 조항을 달아 미야자키가 프로젝트를 넘긴 석 달 후 다카하다는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의 시나리오를 써왔다. '너구리'라는 한마디에 자극받고 일로매진, 2년 후인 1994년엔 제작까지 마쳤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다카하다는 "왜 하필 이 시대에 너구리인가?"라는 질문을 수도 없이 들었고 매번 이렇게 대답해 왔다. "너구리도 지금 이 땅에서 인간과 함께 살아가고 있으니까."

중제: 가장 일본적인 애니메이터

1935년 생인 다카하다 이사오는 특이하게도 도쿄대 불문학과를 나왔다. 중학생 시절 폴 그리모의 애니메이션 <왕과 새>를 보고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에 매료됐던 이 전후 세대의 모범생은 대학 졸업 후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 회사였던 도에이동화에 입사했다. 5년간의 조수 생활을 거친 후 맡은 첫 연출작은 <늑대 소년 켄>이라는 TV 애니메이션 시리즈. 이후 다카하다는 야심 차게 준비한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으로 감독 데뷔를 했다. 태양의 검을 지닌 소년 호루스가 아버지 유언에 따라 마을 사람들과 함께 악마의 재앙을 물리친다는 내용은 그때까지 유아적 성향의 애니메이션이 지배적이었던 일본 애니메이션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하지만 열악한 제작 과정을 극복하고 3년 만에 완성한 이 작품은 아쉽게도 인간 내면의 선과 악을 다루는 다소 무거운 줄거리 때문인지 무참하게 흥행 실패했다. 다행히 이 작품을 통해 평생 친구이자 동료가 된 후배 애니메이터를 건졌으니 그가 바로 미야자키 하야오다. 그 후 도에이에서 퇴사해 A 프로덕션, 즈이요 영상, 니폰 애니메이션사를 돌아다닌 9년간 다카하다는 지금까지 감동의 명작으로 손꼽히고 있는 TV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다수 연출했다.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 <엄마 찾아 삼만리> <빨강머리 앤> 등 지금껏 한국의 중년들에게 유년 시절의 행복한 추억이 된 작품들이 바로 다카하다의 대표적인 TV 애니메이션 시리즈다.
다카하다는 수더분한 외모에서 연상하기 어렵게 꽤 현실 참여적이고 정치적인 면이 있다. 미야자키가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를 만들 당시 프로듀서로 참여한 다카하다는 이런 성향을 숨기지 않았다. 미야자키와 함께 제작사인 도쿠마 서점 측에 "애니메이터를 일회용 취급하지 않는 책임 있는 제작 시스템"을 제안했고 그로 인해 스튜디오 지브리가 탄생됐다. 다카하다는 미야자키와 지브리를 꾸려가는 한편, 80년대에 본격적으로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루키 에츠미의 인기 만화를 원작으로 한 두 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자린코 치에>(1981)는 오사카가 배경으로, 순정파 야쿠자인 아버지와 그의 불행한 어린 딸 치에의 이야기다. 일본의 국민 작가 미야자와 겐지의 유명한 동화가 원작인 <첼리스트 고슈>(1982)는 지방 교향악단에 소속된 어느 첼리스트의 음악 세계를 다룬다. 클래식광이기도 한 다카하다의 취향이 물씬 묻어나는 이 작품과 전작 <자린코 치에> 모두 결국은 일본과 일본인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애니메이션이었다. 이후에 만들어진 <반딧불의 묘>(1988), <추억은 방울방울>(1991),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1994), <이웃의 야마다군>(1999)에 이르기까지 다카하다 리얼리즘이 보여 준 격조는 상당했다. 일본의 현재와 과거를 다루면서도 냉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그의 작품들은 수많은 팬들에게 신뢰와 감동을 안겨줬다. 서양적인 소재를 주로 다루던 여타의 일본 애니메이션들과 멀찌감치 떨어져 자신이 속한 사회와 문화를 깊이 이해하는 다카하다의 작품 속엔 탁월한 현실 감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카하다의 작품 가운데 처음으로 국내 정식 개봉하는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은 이런 다카하다 애니메이션의 요소들과 다양한 의미들을 함축하고 있는 종합판이다.

중제: 변신 너구리가 대변하는 인간사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은 1994년 일본 개봉 당시 디즈니 <라이온 킹> 흥행을 누르고 그해 일본영화 흥행 1위를 차지한 다카하다 이사오 최고의 흥행작이다. 제작 당시 일본 곳곳에서 너구리들의 시체가 증가하고 그 가운데 80%가 먹이를 찾으러 도로변에 나왔다 교통사고를 당해 죽어갔던 실제 상황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작품이다. 도쿄 근교의 타마 구릉 지대. 인간들이 인구 분산을 위해 주택을 늘리려고 '뉴타운 프로젝트'를 추진하자 이 지역 너구리들은 생존권을 박탈당할 위기에 처한다. 살아야겠기에 너구리들이 일어선다. 그간 인간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금지돼 왔던 변신술을 부활시키고 '인간 연구 5개년 계획'을 추진해 인간이라는 위험한 동물을 제대로 연구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너구리 원로들은 우선 외부에 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전설의 세 장로를 찾는 사자를 급파하고 나머지 너구리들은 변신술을 익힌 후 나름의 게릴라 작전으로 인간들의 공사장을 급습한다. 하지만 투쟁은 그리 쉽게 먹혀들지 않고 공사는 중지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때마침 멀리 시코쿠 지방에서 전철을 타고 도착한 전설의 너구리 장로 세 명이 나타나 변신술의 집대성이라 할 만한 '요괴 대작전'을 주도한다. 변신 너구리들이 갖은 기를 모아모아 도심 주택가에서 벌이는 '요괴 대작전'은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의 백미다.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에 담긴 기발함의 원천은 결국 너구리 사회에 대한 세밀한 설정과 묘사에서 비롯된다. 너구리 공동체는 사실 인간 사회와 매우 유사하다. 위기 시에 원로 너구리들이 무리의 미래를 위해 회의를 거듭한다. 인간과의 투쟁을 외치는 강경파와 인간들에 대한 자세한 공부가 선결 조건이라는 온건파도 존재한다. 그런데 인간들의 동정을 살핀다는 취지로 숲 속 산사에 TV를 구해놓곤 하루종일 TV를 보며 놀기 바쁜 낙천적인 성격의 너구리들이 변신술을 감행한다니 어딘가 아슬아슬하다. 과연, 그들의 변신은 거의 장난 수준이다. 변신하는 대상이 어처구니없게도 고양이나 여우, 돌부처상 아니면 밥솥, 냄비 같은 단순한 것들이고 어쩌다 인간으로 변신해 도시 적응 훈련을 나가면 금세 기운이 딸려 눈 밑에 다크 서클이 생길 지경이다. 땀을 뻘뻘 흘리며 변신술 유지를 위한 건강 드링크제를 마시는 너구리들을 보고 있으면 귀엽다 못해 안쓰럽다. "인간들을 전부 다 쫓아버려야 해요? 그럼 튀김은 누가 줘요? 꽁치 조림은?"이라며 반문하는 천진난만한 너구리들을 보고 있으면 이래서야 어찌 험난한 세상을 버텨내겠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다카하다 이사오는 이런 요절복통 너구리들의 일상 속에 생태계 파괴라는 심각한 메시지를 슬쩍 끼워 넣는다. 지나치게 강압적이거나 교훈적이지 않게 교묘한 선을 유지하는 다카하다의 연출은 대가다운 공력이 느껴진다. 다카하다는 위기에 몰린 너구리들이야말로 사실상 중요한 것을 잃어가고 있는 현대 일본인들임을 어렵지 않게 은유하며 자연과 인간의 공존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중제: 날카롭고 풍성한 현실 감각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에서 보여지듯 "무엇을 하든 현실을 반영한다"는 다카하다의 강한 신념은 물론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TV 시리즈를 만들던 시절부터 내면 깊숙이 자리한 현실 감각이 날카로우면서도 풍성하게 커나가도록 스스로 애써온 것이다. 그 때문에 다카하다 이사오는 일본 애니메이션계에서 판타지에 집중해온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와 가장 대척점에 서 있는 감독으로 평가받는다. 그가 표현하는 이미지와 내용은 모두 현실을 아우르는 리얼리즘에 기반한다. 공상과학, 미소년과 미소녀 이야기, 로봇, 마법의 세계 등 수많은 일본 상업 애니메이션 작가들이 지향하는 길에서 벗어나 그가 걷는 외길은 특별하다. '일본' 그 자체를 애니메이션의 중심에 두는 방법을 취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속한 문화와 사회를 애니메이션 속에 반영하는 세밀한 현실 감각 때문에 다카하다는 세계 애니메이션계에서 일가를 이룬 리얼리스트로 통한다. 1985년 연출한 그의 실사 다큐멘터리 <야나가와의 운하 이야기>에도 다카하다 세계의 이런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미야자키와 함께 현장 취재에 나선 이 다큐멘터리는 한 사람의 행정 직원이 오염된 야나가와 강을 정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마침내 그 지역 사람들의 공동체 의식을 회복시킨다는 내용이다. 이런 상황은 실제 환경 오염이 극심하던 당시 일본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다카하다 애니메이션 세계와 일맥상통한다. 애니메이션으로선 보기 드물게 태평양 전쟁을 다룬 <반딧불의 묘> 또한 다카하다가 노사카 아키유키의 원작을 바탕으로 자신의 세계관을 구현한 작품이다. 전쟁 고아가 된 어린 남매를 통해 전쟁의 참상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다카하다의 시선이 드러난다. 1985년 일본 개봉 당시 평단에선 "굳이 애니메이션으로 이런 전후의 이미지를 봐야 하느냐"는 혹평과 "가슴 아프게 리얼한 반전 영화"라는 평가가 오갔다. 하지만 다카하다의 연출 속엔 단순히 참혹함이 불러온 슬픔에 대한 묘사뿐 아니라 참혹함에 묻혀버린 순수함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스며 있다. <반딧불의 묘>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웃의 토토로>와 동시에 개봉했다는 사실은 자못 흥미롭다. 두 감독이 자신들이 속한 세계를 다루는 방식은 판이하게 다르지만 결국 일본의 과거를 돌아보며 잃어버린 것에 대한 가치를 일깨우려는 의도는 같은 것이다.
20대 후반의 직장 여성 다에코가 자아를 찾아 시골로 떠나는 여행을 다룬 <추억은 방울방울>도 다카하다의 비상한 현실 감각이 녹아 있다. 초등학교 5학년 시절의 과거를 떠올리며 미래를 고민하는 20대 여성의 진심을 끌어내는 드라마인 동시에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인간을 격려하는 애니메이션이다. 게다가 자세히 들여다보면 더 많은 것들이 보인다. 다에코가 찾아간 시골 풍경 속엔 사실상 80년대 초기 방황하는 일본 젊은 세대들의 모습, 당시 농가 젊은 세대들 사이에 붐이 일었던 유기 농업에 대한 이야기 등 현대 일본의 여러 단면들을 목격할 수 있다.

중제: 세계 애니메이션계의 냉정한 리얼리스트

다카하다 애니메이션이 지닌 독보적인 일상성의 바탕은 매번 작품을 만들 때마다 현지 취재를 반영하는 부지런함과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TV 시리즈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를 제작할 땐 알프스의 풍경을 그려내기 위해 스위스 현지 로케이션 헌팅을 감행했을 정도다. 이뿐 아니라 <엄마 찾아 삼만리>의 아르헨티나, <빨강머리 앤>의 무대가 되는 캐나다의 프린스 에드워드 섬, <자린코 치에>의 오사카 등 자기 작품의 무대로 삼을 지역에 무조건 사전 로케이션을 강행해 치밀한 취재를 하는 다카하다의 작업 방식은 대단히 도전적인 것이었다.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들 때도 이런 작업 방식은 지속됐다. <추억은 방울방울>은 실제 존재하는 야마가타 현의 잇꽃 재배 농가가 배경이다. 다카하다는 그곳에 사는 가정을 직접 방문해 비디오 촬영하고 그림으로 재현한 덕에 <추억은 방울방울>에 등장하는 농촌의 싱그러운 햇살과 푸근한 정취, 산등성이의 붉은 노을 빛은 예사롭지 않다.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만이 아니라 생활감 넘치는 풍경"을 원했던 다카하다는 너구리가 출몰하고 있는 도쿄 근교의 타마 구릉지를 방문해 너구리 보호와 자연 환경 보전을 실천하는 단체를 취재했다. 미야자키의 작품인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에도 거대한 오무를 피하기 위한 탑 등 공동체 생활을 반영하는 여러 공간이 묘사돼 있다. 이것 역시 프로듀서로 참여했던 다카하다의 조언과 작업 방식의 영향이다.
현지 로케이션 취재를 통한 사실적인 배경과 철저한 일상 묘사에 관한 한 다카하다는 거의 타협을 모른다. 그로 인해 생겨난 다카하다 애니메이션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이 포토 리얼리즘에 가까운 화면이다. 다카하다는 "어떤 하나의 세계를 믿게 하려면 아무리 가상 세계라도 강한 현실감이 뒷받침돼야 한다. 사람들은 그렇다면 실사 영화를 만들라고 했지만 나는 애니메이션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를 딱 잘라 설명하긴 어렵다"고 말한다. 무의식을 설명할 순 없을지라도 다카하다 이사오가 다큐멘터리스트이자 애니메이터로서의 자질과 덕목을 갖추고 꾸준히 작업해온 사실주의자라는 점만은 부인할 수는 없을 듯하다.
다카하다의 최신작인 <이웃의 야마다군>(1999)은 제목이 말해주듯 이웃처럼 친근한 일본인 가족의 일상을 그린다. 아사히 신문에 연재되었던 이시이 히사이치의 동명 네 컷 만화가 원작이다. ""네 칸 만화는 갑자기 끝난다. 하지만 삶은 계속된다. 그것을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다. 내용도 그림도 단순함을 지향한다"고 말한 다카하다는 그동안 수작업을 해온 것과 달리 이 작품의 제작 과정 전 부문에 컴퓨터 작업을 시도했다. 하지만 다카하다의 이전 작품이 그렇듯 <이웃의 야마다군>의 모든 것은 잔잔한 일상에서부터 출발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 의해 발견된다. 삶을 표현하는 방법은 바뀔 수 있다. 하지만 오랜 세월 다져진 다카하다의 이상은 변하지 않는다. 막 결혼해 인생의 항해를 시작한 신혼부부가 봅슬레이를 타고 세상을 질주하고 그들이 질주하는 장소가 5단짜리 웨딩 케이크 위임을 발견하게 될 때 다카하다가 만든 소우주는 유쾌하고 현명한 일상으로 우리에게 성큼 다가온다.

산이 뭉텅뭉텅 파이고 아름다운 위성 도시 '뉴타운'이 건설된다. 이 풍경을 보던 너구리가 한마디 한다. "야, 인간은 대단한 것이군요. 여태 우리 같은 동물인 줄로만 알았는데." 인간과의 한판 승부에서 너구리들이 승리를 거뒀으면 좋으련만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에 그런 통쾌함은 없다. 모처럼 작정하고 벌인 요괴 대작전은 인간들에게 별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다. 너구리들은 마지막 남은 기를 모아 환상적인 옛 도쿄의 풍경을 만들어내지만 그건 곧 아스라한 기운 속에 사라지고 만다. 여기서 너구리와 인간은 결국 대화할 수 없지만 두 존재 모두 어쩔 수 없이 골치 아픈 세상에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생물들이라는 사실만큼은 동등하게 묘사된다. 다카하다 이사오는 말한다. "나는 현실과 환상 사이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정신적 질환을 겪는 사람들이 때때로 많다는 사실에 넌더리가 난다. 기분 전환을 위해 술에 취하듯 애니메이션을 보는 사람들의 태도가 안타깝다." 일본 애니메이션계뿐 아니라 세계 애니메이션계를 통틀어 다카하다 이사오 같은 리얼리스트의 존재는 희귀하다. 진정 아낌받을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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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e Than Paradise

(You Are) More Than Paradise 

 

Port of Notes-



I heard it at midnight

난 이것을 자정에 들었어


It's a song that I used to love and dream

이 노래는 지나간 사랑과 꿈에 관한거였어


Don't go away ..Don't leave me ..alone,

tender lullaby I can feel my heart's beat

멀리가지마.. 날떠나지마 ..혼자서 감미롭게 내 심장 박동을 느낄수가 있어


 

The sky above me turns into a sand hill

내 위의 태양이 모래언덕으로 잠기네


And a river passes through me

그리고 강은 나를 통과해 흘러


Life goes on like a passing car's head lights

인생은 지나가는 차의 헤드라이트 처럼 지나가

I saw a dream of a southern paradise

나는 남쪽 낙원의 꿈을 본적이 있어

Over the mountains and in the sunshine

산 위와 태양빛 안으로

Red flower sunset wrapped around me

빨간 꽃같은 노을빛이 내 주위를 감싸


I felt so free

나는 자유를 느껴

 

But there was no one to hold my hand I was alone..

그러나 내가 혼자있었을때 내 손 잡아주는이없었네..

And after I woke up

그리고 내가 잠에서 깨고난 후..


Still that dream expands with my body

아직도 꿈은 나의 몸에 영향을 미쳐.


I was thinking so long

나는 꽤 오래 생각하고 있었어


On this land, is there something more than love for me?

이땅위에, 사랑보다 더한게 나에게 있을까?


I know that you are more than paradise..

난 알어 니가 낙원보다 더 좋다는것을..

When your arms are around me

너의 팔이 나를 감쌀때


I realize everything is beautiful, just like a storm..

폭풍처럼 나는 모든것들이 아름답다고 느껴..


Though I take a plane to go somewhere far away

비록 나는 어딘가 멀리 떠날 계획을 세우지만


But I can't fly away my hert..

그러나 나는 나의 심장으로부터 도망갈수가 없어..

I saw a dream of a southern paradise

나는 남쪽 낙원의 꿈을 보았네


Over the mountains and in the sunshine

산위그리고 태양빛안에


Red flower sunset wrapped around me

붉은 꽃의 저녁놀이 내 주위를 감싸네


I felt so free

나는 자유를 느꼈어 

 

But I know that you are more than paradise..

그러나 나는 알아 니가 낙원보다 좋다는걸..


When your arms are around me

너의 팔이 나를 감쌀때


I realize everything is beautiful, just like a storm..

폭풍처럼 모든것들이 아름답다고 느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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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68운동과 영화예술의 변화 : 투쟁영화의 부상

출처 : 프랑스문화예술학회

 

프랑스 68운동과 영화예술의 변화 : 투쟁영화의 부상

프랑스문화예술연구 제10집 (2004) pp.1~21

 

안  영  현

김  지  혜


 

< 차  례 >

 

 

 

 

 

    1. 서론: 문화혁명으로서의 68운동

    2. 랑글루아 해임과 칸영화제 중단

    3. ‘영화 삼부회’와 영화계의 정치화

4. 투쟁영화와 상업적인 정치영화

5. 결론 : 영화계의정치화와투쟁영화

             부상의문화적의미



1. 서론 : 문화혁명으로서의 68운동


“엿먹어라 위계제, 권위, 차가운 엘리트주의적 논리를 가진 이 사회

 엿먹어라 꼭대기에 있는 비열한 우두머리들과 관료들

 엿먹어라 자신이 창출한 비참함, 가난, 불평등, 불의를 애써 못 본척하며 사람들을 출신과 숙련기술에 따라 나누는 이 꿈쩍도 하지 않는 사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

“내 마음속의 경찰서를 없애자”

“모든 권력을 상상력에로”

“자유로이 즐겨라”

“우리는 굶어죽을 가능성이 있는 세계일지라도 권태로움으로 죽을 가능성이 있는 세계와는 바꾸지 않겠다”

“더 많이 혁명할수록 더 많이 사랑한다, 더 많이 사랑할수록 더 많이 혁명한다”

“나는 내 욕망의 현실성을 믿기 때문에 내 욕망을 현실이라 여긴다”


이 구호들은 1968년 5월 프랑스에서 대대적인 변혁운동이 전개될 당시 학생운동 집단들로부터 나온 젊은이들의 열망과 거부의 외침들이다.

프랑스의 ‘68운동’은 학생시위로부터 촉발되어 짧은 시기에 사회 전반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온 변혁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위의 구호들이 상징적으로 암시하듯 모든 형태의 금기와 억압, 소외로부터 해방된 열린 사회의 구현을 위해 기성의 체제와 질서에 항의하는 변혁의 시도였다. 어떠한 사전 준비도 계획도 없이 발발한 학생들의 항의시위가 사회의 모든 영역에 걸친 대대적인 변혁운동으로 전화된 데에는 대학당국의 안일한 태도와 정부당국의 강경 노선이 그 도화선이었다. 일례로 5월 운동의 시발점이 된 3월 22일 낭테르 Nanterre 대학에서의 학생시위는 학생과 공권력간의 갈등과 대립이 대규모의 항의투쟁으로 전화된 단적인 예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다니엘 콘베디트 D. Cohn-Bendit를 위시한 좌파 학생들이 체포된 베트남전쟁 반대시위 참가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대 항의집회를 벌이면서 강의실과 총장실을 점거하고 폐쇄적이고 비효율적인 학교운영방침에 대한 비판 또한 가하게 된다. 낭테르의 질서 유지를 명목으로 한 대학당국의 즉각적인 경찰지원 요청, 경찰의 학내진입, 학생들의 수업거부와 학생대중집회, 경찰 재출동 등의 일련의 사건과 특히 3월 28일과 29일 양일간에 걸친 대학폐쇄조치는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당국의 강경 대응책은 결국 다양한 분파의 학생조직들의 가세를 불러오면서 파리 지역으로 파급된다. 5월 소르본느대학으로 거점을 옮긴 학생들의 항의투쟁이 제국주의 전쟁과 교육제도를 넘어 보수적, 권위적, 관료적인 모든 기존의 사회 시스템으로 전환되면서 본격화되자, 정부당국은 대학폐쇄 조치와 함께 낭테르의 경우에서보다 강경한 대응책으로 맞선다. 5월 운동의 전개과정에서 특히 10일과 11일에 있었던 이른바 ‘바리게이트의 밤’에 벌어진 학생시위대와 진압경찰대간의 격렬한 유혈사태는, 학생운동에 미온적 태도를 보였던 노동자들을 투쟁에 참여시키는 한편 ‘전국고등교육 교원노조 SNEsup’의 지지와 일반 대중의 호응까지 얻게 되면서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기존의 체제와 질서에 전면적으로 이의제기하는 전국민적 변혁운동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된다.

정치적, 사회적 이념을 초월하여 자발적으로 결집한 다양한 학생운동집단들을 주축으로 하여 전개된 프랑스의 68운동은 이로부터 촉발된 다른 여러 유럽 국가들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사회에 잠재해 있던 변혁의 욕구가 폭발적으로 드러난 사건이었다. 그 변혁의 대상은 단지 정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문화, 예술을 포함한 사회의 여러 하위 시스템 모두에도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특히 60년대부터 서구사회의 변혁주체로 부상한 학생과 지식인들의 기존의 국가, 정당, 가족, 교육제도와 같은 거대 시스템에 대한 비판작업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이들은 이러한 거대구조를 인간의 개인성을 말살하고 억압과 소외를 동반하는 전체주의로 규정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이러한 거대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자율성과 자발성에 근거한 대안구조들의 확립을 목표로 삼았다. 이들이 모색한 새로운 대안적 질서는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비판적 공공성의 확립, 토론과 자유로운 의사소통 문화의 정착, 자유로운 자기발전을 실현시킬 수 있는 사회 시스템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68운동의 참여자들 역시 경제발전과 냉전구도라는 제도와 틀에 구속되어 점차 보수화되어 가는 사회를 공격하면서 일체의 국가 권력기관과 그 하위조직을 시대착오적이고 완고한 폐쇄적 구조로 거부하였다. 예컨대 ‘가족제도’는 성적인 금욕과 물질적인 부, 미래의 사회적 성공만을 최대의 가치로 여기고 이를 강요한다는 점에서, ‘제도권 대학’은 비판의식을 차단하는 권위적 교육과 폐쇄적 학사행정구조, 경쟁위주의 시험제도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문화와 예술’은 일반 대중의 접근을 어렵게 만드는 엘리트주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비판과 거부의 대상이었다. 결국 이 모든 기존구조들은 평등한 인간관계가 아니라 차별과 배제를 양산하고, 위계와 권위, 구속력과 관료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국가 지배이데올로기의 주입과 증식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변혁의 대상이었다. 68운동이 지향한 세계는 정치적, 사회적, 성적 금기와 같은 모든 형태의 금기와 억압, 소외로부터 해방된 세계였으며, 그것은 무한한 상상력과 자유, 유희를 기반으로 한 삶의 시스템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또한 미래가 아닌 현재, 즉 ‘지금 여기에서’의 삶, 일상생활의 차원에서의 구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68운동은 문화와 정치를 융합한 문화혁명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하겠다.

68운동은 5월 말, 강력한 지지기반인 노동자들이 최저임금인상과 자유로운 노조활동을 보장받은 노조의 영향력에 의해 파업을 중단하게 됨으로써, 그리고 드골 정권이 국회를 해산함으로써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6월 말 총선에서 우파가 압도적 승리를 거둔 데 뒤이어 70년대에는 우파 대통령이 탄생함으로써 이 운동은 분명 정치적으로는 실패한 혁명이 되었다. 그러나 68운동은 다른 측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즉 68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비록 스스로를 당장 정치 세력화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향후 프랑스 정치, 사회, 문화, 예술의 각 부문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 제기되었던 대안적 제안들은 점진적으로 제도화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사회 시스템 변화의 초석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특히 68운동은 이 운동의 세례를 받았던 사람들의 의식과 사고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침으로써 프랑스문화의 지형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성공한 문화혁명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이런 점에 착안하여 우리는 문화혁명으로서의 68운동을 이후의 프랑스 문화예술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핵심적인 코드로 보고, 이 운동을 전후하여 영화예술 분야에 나타난 변화의 양상과 그 문화적 의미를 5월 학생운동과의 관련성 속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본고에서는 첫째 68운동 직전 영화인들의 정치 의식을 보여주는 랑글루아 해임과 칸영화제 중단 사건을 소개하고, 둘째 학생운동과 같은 맥락에서 영화를 통해 사회변혁의지를 실천하는 ‘영화 삼부회’와 영화계의 정치화를 소개할 것이다. 세째 혁명 수단으로서 투쟁영화를 만드는 비상업적인 공동제작집단과 감독 개인들 그리고 상업적인 정치영화들을 두루 살펴봄으로써 68운동에서부터 7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투쟁(정치)영화가 부상한 전모를 밝힐 것이다. 마지막 결론에서는 영화계의 정치화와 투쟁영화 부상의 문화적 의미를 찾아볼 것이다.



2. 랑글루아 해임과 칸영화제 중단


68년 5월 사회 변혁을 위해 기성 체제와 질서에 도전하는 학생들의 대대적인 항의 시위가 폭발적으로 분출하기 몇 달 전, 영화계 전체를 잇단 시위로 들끓게 하는 ‘랑글루아 사건’이 터진다. 문제의 발단은 2월 9일, ‘시네마테크 Cinémathèque Francaise’의 설립자이자 사무국장인 앙리 랑글루아 Henri Langlois를 전격 해임한다는 드골 정부측의 일방적인 결정이었다. 영화인들에게 랑글루아 해임은 프랑스 영화 발전의 공로자인 한 개인에 대한 보수적인 관료들의 부당한 처사를 넘어 문화를 지배하려는 그들의 권위적인 방식이 문제였다. 이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시네마테크와 랑글루아 수호위원회가 영화인들을 중심으로 즉각적으로 결성되어, 장-뤽 고다르 J.-L. Godard, 프랑수아 트뤼포 F. Truffaut, 로베르 브레송 R. Bresson, 찰리 채플린 C. Chapelin, 로베르토 로셀리니 R. Rossellini, 오슨 웰즈 O. Welles 등의 국내외 신․구세대 감독과 마를렌 디트리히 M. Dietrich, 잔 모로 J. Moreau, 시몬 시뇨레 S. Signoret 등의 배우를 비롯하여 롤랑 바르트 R. Barthes, 클로드 모리악 C. Mauriac과 같은 사회의 유명인사들이 대거 “상상력의 자유”를 위한 가두 시위를 벌인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정부가 마침내 4월 중순 해임 취소 결정을 내리고 랑글루아가 복직됨으로써 이 사건은 권위적인 정부에 대한 영화계의 승리로 일단 마무리된다.

이미 점화가 된 학생운동이 라탱 지구에서 첫 ‘바리게이트의 밤’을 보내게 되는 5월 10일, 이날 개막된 제21회 칸영화제는 프랑스 영화계를 양 진영으로 분열시키는 사건으로 발전한다. 즉 영화제 속행 여부를 놓고 찬성과 반대 진영이 첨예하게 대립한다. 시위대 학생들에 의해 소르본느 대학이 점거되면서 학생운동이 전국적, 전국민적 규모로 확대되는 심각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영화제 위원회는 5월 13일 24시간의 잠정적인 중단 후 예정대로의 진행을 결정한다. 이에 트뤼포와 고다르가 반대 운동에 앞장서고, 웰즈와 세 명의 영화제 심사위원(루이 말 L. Malle, 모니카 비티 M. Vitti와 로만 폴란스키 R. Polanski)이 이들에 가세한다. 첫 시사회가 열리는 18일 10시 30분, 고다르와 트뤼포가 영화인들과 비평가들에게 영화제 중단을 촉구하고, 정오에 이들의 지지자들이 시사회장을 점거한다. 그러나 암전과 함께 개막식 커튼이 오르려하자 루이 세갱 L. Séguin과 고다르를 비롯한 영화상영 반대자들이 커튼에 매달려 시사회를 저지함으로써 일대 소동이 벌어진다. 양 진영간의 열띤 토론 후, 다음날 아침 제작자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영화제는 결국 취소된다. 이 ‘커튼 사건’은 현장에 있던 외신 기자들을 통해 전 세계로 알려지게 됨으로써 이후 68운동에 대한 세계의 이목을 프랑스로 집중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랑글루아 해임 사건과 칸영화제 중단 사건은 일화의 차원을 넘어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의 영화예술의 위치에 관한 영화인들의 자각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시대의 흐름과 생각을 같이 해야 한다는 영화인들의 자각은 68년 5월 학생․노동자 운동에 의해 더욱 촉발되어 영화 자체뿐 아니라 사회 제도의 개혁을 위한 행동으로까지 이어진다. 68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정치, 사회적 의식을 가진 영화인들은 혁명적 영화단체를 결성하여 영화를 통한 사회 변혁운동을 몸소 실천한다.



3. ‘영화 삼부회’와 영화계의 정치화


영화인들의 현실 참여와 사회 변혁 의지는 68운동이 폭발적으로 분출되는 5월부터 ‘영화 삼부회 les Etats Généraux du Cinéma francais(EGC)’라는 전문 영화인들의 결성단체를 통해 본격화된다. EGC는 5월 17일 약 1000여명의 영화 배우, 감독, 비평가와 기술자들에 의해 결성된 단체로, 학생․노동자 운동과의 연대감을 표명하는 한편, 프랑스 영화의 변화와 쇄신의 일환으로 기존의 국가제도와 구조들의 혁명적 개혁을 목적으로 탄생된다. 영화 노동자들의 파업과 칸영화제 중단 지지 결정을 내리면서 EGC가 결성 당일 천명한 다음의 입장표명은 그들의 설립 목적을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것이었다. 첫째 농성 중인 학생과 근로자들과의 연대감을 보여주고, 둘째 경찰 탄압에 항의하고, 셋째 이를 통해 드골 정권과 영화산업의 현행 구조들에 이의를 제기하기 위함이 그 골자였다.

이 때부터 EGC를 중심으로 ‘영화에 의한’, ‘영화를 위한’ 혁명적 운동이 전문, 비전문 영화인들의 공동 활동을 통해 전개된다. EGC는 기술자 노조와 프랑스 국영라디오․TV방송국 ORTF의 감독들, 고등영화학원 IDHEC과 영화․사진학교 EPC의 학생들로 각각 구성된 ‘노동위원회’들과, 파업 중에도 영화 촬영을 허용하는 ‘특례 위원회 la Commission de Dérogation’를 창설한다. 각각의 노동위원회들은 의장을 두지 않고 모든 구성원들 각자의 자율권을 인정하는 개방적인 운용방식을 취하였으며, 파업을 주도하고 “부문별 세분화로 영화를 억압해온 관료제와 직업구획, 단편적인 경쟁을 피하기 위한” 제도 마련을 주요 목적으로 삼았다. 한편 영화인들의 혁명적 역할과 혁명을 위한 영화의 활용을 강조하는 특례 위원회는 학생, 노동자 운동이나 베트남 협상 등과 같은 진행중인 시대적 사건들의 촬영과 보급을 담당하였다. 그 목적은 파업이나 농성 현장에 모인 노동자나 학생들에게 그들의 운동 상황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고, 그럼으로써 그들의 혁명적 의식을 고취시키는 동시에 그들을 통한 혁명의 대중적 확산을 꾀하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영화 상영은 상업적 구역과 무관한 각 운동 분파들의 지엽적인 공간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두 위원회를 기반으로 1968년-1969년 동안 EGC는 무엇보다 정치영화 제작의 활성화에 주력한다. 즉 진행중인 사건들의 즉각적인 촬영을 위해 제한된 제작 수단을 갖춘 소규모의 팀들을 파리를 비롯한 지방 곳곳의 운동 현장에 급파하고, 뒤이어 그 필름들을 때로는 강제적으로 상업 구역의 영화관에 보급케 함으로써 68운동의 대중적 확산에 박차를 가한다. 이 기간 동안 EGC의 후원을 통해 제작된 영화는 약 60편 정도로, 대부분은 개인이 아닌 공동 제작과 익명 발표를 원칙으로 하였으며, 길이는 ‘전단영화 Ciné-tracts’와 같은 2분에서부터 2시간 30분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영화의 유형은 16밀리나 슈퍼 8 super-8 또는 비디오로 촬영된 작은 영화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 영화들의 진정한 보급은 68사태가 진정된 이후에야 제작자와 감독, 배급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EGC의 중재로 시작되며 프랑스뿐만 아니라 외국으로도 보급된다. 그런데 이 영화들 중 어떤 것도 국가 산하 기관인 검열 위원회에 회부되지 않았기 때문에 EGC의 모든 영화는 드골 체제에 몰려 ‘금지영화’로 지정된다. 따라서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고 정치 영화에 대한 검열제도가 폐지되는 1974년 이전까지 일반 대중은 이 영화들을 접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영화를 통한 대중적 혁명의식의 고취라는 EGC의 명목은 사실상 큰 성과 없이 유토피아적인 희망으로만 머물게 된다.

한편 영화 개혁을 위한 새로운 제도 마련은 EGC 총회 Assemblée Générale에 의해 추진된다. 총회의 운영 방침은 “구성원 모두가 대표자이며 각자는 다른 이와 동등한 자신의 목소리를 갖는다”는 평등주의를 원칙으로 삼았다. 따라서 각각의 개혁안은 참여자 각 개인의 이름으로 제출되었고 안건 채택은 총회의 토론을 거쳐 이루어지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상업) 영화의 새로운 구조를 위한 19개의 계획안에는 각 항목별로 1300명의 참가자들 각 개인의 이름이 수록된다. 이러한 운영방식은 사실 각기 다른 이념을 지닌 구성원들간에 잦은 의견대립을 초래함으로써 전체 의견을 수렴한 종합 개혁안 구성에 많은 어려움을 유발한다. 결국 하나의 종합 개혁안을 만들려는 총회의 취지는 무산되고, 6월 5일 EGC에 제출된 총 19개의 개혁안 중 4개의 안만을 채택한 간단한 동의안이 나온다. 그 동의안은 다음의 6가지 내용을 골자로 하는 것이었다. 1. 공공 영화 구역의 설립, 2. 언론 배급사와 같은 진정한 영화 배급사 설립(사설 배급사의 구속력으로부터 벗어나 감독 자신에게 영화상영 보장을 해주기 위한 목적), 3. 영화인의 자주관리, 4. 아동보호를 위한 통제를 제외한 모든 형태의 검열 폐지, 5. 초, 중, 고, 대학에서의 시청각 매체 교육의 통합, 6. 자주 관리되는 TV와 영화의 통합. 이 개혁안 중 ‘자주 제작’, ‘자주 관리’, ‘자주 보급’은 정치색이 짙은 ‘투쟁영화’를 만드는 그룹들에 의해 실천되며, 검열제도는 68운동 이후 국가정보국이 폐지되고(1969) 문화부로 이양됨으로써 상당부분 완화되다 1974년 정치 검열 완전 폐지라는 성과를 올린다.

새로운 영화제도의 마련은 무엇보다 정치적, 사회적인 모든 현실과 단절된 프랑스 영화의 폐쇄성을 허물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일환으로 EGC는 영화가 갇혀 있고 영화에 구속력을 행사하는 국가 기구, 특히 국립영화소 Centre National de Cinémathèque의 구조를 “반동적인”인 것으로 규정하고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도 한다. 예컨대 비평가인 장-루이 코몰리 J.-L. Commoli와 감독인 자크 리베트 J. Rivette, 루이 말, 알랭 레네 A. Resnais 등의 이름으로 EGC에 제출된 “일반 노선 La ligne générale”이라는 제목의 개혁안은 이러한 국가 기구를 해체하려는 분명한 의지를 보여준다. 즉 이들은 한편으로 자본주의 체제의 특징인 이윤 추구로 인해 상품의 차원으로만 축소된 영화의 현실을 비판하면서 다른 한편 국립영화소나 위니프랑스 Unifrance같은 기관을 통해 그 천박한 공모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드골 정부를 공격한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이익 산업에 대한 대응책으로 자주적으로 관리되는 경제와, 영화 종사자 모두가 동등한 급여를 받는 완전 평등주의 급여원칙을 제안함으로써 분명한 혁명적 노선을 드러내기도 한다.

좌파 학생들의 노동자 집단과의 협력 실패로 68의 급진적 변혁운동이 그 통일성을 상실하면서 ‘미시정치’로 대체되듯이, 정부의 5월 사태 수습이후 EGC의 활동 역시 비슷한 경로를 밟는다. 즉, EGC는 구체적인 대책을 원하는 조합소속 전문 영화인들과 대개는 영화 지망생들인 ‘과격파’들로 양분되어 결국은 반쯤 실패하여 분산되고 만다. 아주 다른 경향들의 결합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었고 일시적일 뿐이었음을 EGC 역시 한계로서 드러낸다. 따라서 68년 9월에 EGC를 표방하는 사람들은 150명에 불과했고 영화 보급 그룹들의 운영을 맡은 집단은 1970년 초 자발적으로 활동을 중단한다. 그러나 68운동의 좌절 이후에도 EGC의 많은 구성원들은 “다른 영화의 구축을 통해 국가 제도의 밖에서 그리고 그 제도에 대항해 지속적인 투쟁을 한다”는 혁명적 노선을 고수해 나간다. 이들은 각자의 이념에 따라 소규모의 독립 제작 집단을 형성하고, 국가 제도나 사회에 가장 급진적이고도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 정치색이 짙은 이른바 ‘투쟁영화’라는 장르를 통해 68정신을 계승해 나간다.

68운동 동안의 EGC의 활동은 많은 영화인들에게 새로운 정치, 사회적 의식을 불어넣음으로써 그들을 더욱 현실 참여적인 영화로 향하게 한다. 이후 프랑스 영화는 상업적이든 비상업적이든 동시대의 문제를 반영하면서 이전보다 강한 비판 의식을 보여주는 이른바 정치 영화를 급부상시킨다. 특히 60년대 말부터 70년대 말까지 약 10년 동안 혁명적 노선의 집단이나 이의제기적인 감독 개인이 제작한 투쟁영화들의 현저한 증가는 낭만적 혹은 비현실적인 허구를 바탕으로 하는 상업 영화들이 주류를 이루는 프랑스 영화의 지형도를 바꾸어 놓는다.



4. 투쟁영화와 상업적인 정치영화


허구가 아닌 현실을 즉 시대의 문제와 관심사를 영화에 반영하는 참여 혹은 정치 영화는 물론 68년 이전부터 존재해 온 장르이다. 그러나 68년경부터 혁명적인 사회변화를 목표로 하는 행동파들이나 그 지지자들에게 단순히 관조적이고 기록적인 측면이 돋보이는 이러한 아방가르드 영화는 혁명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자, 억압받는 인간들의 현실적 모순을 해결해 나가는 도구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수행해내지 못하는 것으로 비쳐진다. 이들이 지향하는 영화는 당연히, “허구와 우화들을 통해 노동자 계급을 유혹하고 기만하는 부르주아 대중영화”(수평영화 le cinéma parallèle)가 아니라 직접적, 적극적으로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고 억압과 저항을 보여줄 수 있는 투쟁영화(수직영화 le cinéma perpendiculaire)가 된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영화와는 달리 정치, 사회적 문제를 전면에 내세워 비판적으로 ‘설명하는’ 투쟁영화는 68운동 이후 변화하는 사회의 요청(여성 조건의 자유화 및 성의 평등, 성적 일탈과 일탈적 행동의 자유, 노동의 자유 선택 등)과 조화를 이루며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투쟁영화들은 68년 5월 이후부터 상업적인 경로 밖에서 구축된 공동 제작이나 배급 단체들의 지속적인 증가로 팽창한다. “디나디아 Dynadia”(공산주의), “프로레타리아 혁명주의 영화인 CRP”, 고다르를 중심으로 한 “지가베르토프 Dziga-Vertov”(마오이스트), “슬롱 SLON” (개방주의), “붉은 영화 Cinéma rouge”(트로츠키스트), “아프리카 혁명 Révolution- Afique”(국제주의) 등과 같이 EGC를 계승한 다양한 이념의 소집단들이 이 시기에 대거 등장한다. 이 집단들은 68운동이 그랬듯이 전문 영화인들만이 아니라 카메라를 든 비전문 개인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형성되었으며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 ‘반개량주의’, ‘반수정자본주의’를 표방하였다. 1970년부터 지역성 옹호(“시네 옥시탕 Ciné Oc” 1970, “시네마 브르타뉴 Cinéma-Bretagne” 1972 등)나 사회 그룹(“농민 전선 Front Paysan” 1972), 페미니즘(“국제여성영화 Ciné-Femme International”) 옹호 등과 같이 분명한 하나의 목적으로 방향 설정된 새로운 조직들이 가세하면서 이 장르는 더욱 활기를 띠게 된다. 이 집단들은 모두 자본주의 상업망을 거부하고 개인이 아닌 공동이 참여하는 ‘자주 제작’과 ‘자주 보급’의 원칙을 실천하였다.

투쟁영화들은 크게 두 경향으로 분류된다. 모택동의 문화 혁명론에서 권장하는 바와 같이 “민중을 각성, 고양시키고, [...] 그들에게 단결과 투쟁을 촉구할 수 있는 작품” 제작을 목적으로 하는 집단이 그 하나이다. 이들의 영화는 메시지의 효율적인 민중적 침투를 위해 스펙터클 영화들의 허구적 장식을 배제한, 전통적인 서술-재현 방식을 취하며 다큐멘터리 방식을 선호하였다. 고다르의 지가베르토프 그룹을 제외한 위에 제시된 나머지 모든 그룹이 이 경향에 속한다. 이 영화들은 선전적이고 교훈적인 측면에 치중한 반면 독창적인 표현 방식이나 구성에 소홀함으로써 그들의 이상과는 달리 때때로 대중 침투력을 상실하기도 하였다. 노동자들의 파업과 공장 점거를 주제로 한 투쟁영화들의 양적인 팽창에도 불구하고 특히 68년 5월에 촬영된 몇몇의 영화들만이 전투적인 영화의 전형이면서도 무미건조함을 벗어난 영화로 평가받는다. 예를 들어 68년 5-6월 르노-플랭 Renault-Flins공장에서 벌어진 한 달간의 노동자 파업에 관한 내용을 담은 «투쟁과 정복 감행 Oser Lutter, oser vaincre»은 소비에트 무성영화의 표현기법을 차용함으로써, 그리고 가혹한 노동 착취의 현장인 공장에 항의하는 한 여성 노동자와 그녀에게 작업 재개를 권고하는 노동총동맹 CGT의 두 조합원에 관한 이야기 «원더 공장에서의 작업 재개 La reprise du travail chez Wonder»는 강한 현장감과 사실성에 의해 같은 장르의 다른 영화들과 뚜렷이 구분되었다.

투쟁영화의 문제점 중의 하나는 ‘자주 보급’ 방식에 있었다. 영화 보급은 종종 부차적인 문제로 간주되고 때때로 방치됨으로써 많은 영화들이 사장되거나 일회성 상영에 그치고 만다. 이러한 배급상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몇몇 영화들은 상업적 경로의 예술․실험관 상영을 시도하기도 하였는데, 이 방법은 잠재적인 대중의 수를 직접적으로 늘리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미디어의 파급효과를 통해 주변부 배급망에 그들 영화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가장 성공한 영화가 바로 비밀 낙태의 위험과 추문을 고발하는 «A의 이야기 Histoire d’A»(1973)이다. 완전 금지 판정을 받은 이 영화는 매스컴을 통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따라서 프랑스 전역에 분산되어 있는 약 100 개의 ‘낙태피임자유운동 MLAC’ 그룹들에 의해 불법적으로 상연됨으로써 약 20만 명의 관객 동원이라는 엄청난 결과를 낳는다.

투쟁영화의 또 하나의 경향으로는 메시지(내용) 자체만큼 메시지의 형식을 탐구하는 지가베르토프 그룹이 있다. 이 그룹은 혁신적인 양식과 형식을 좌파적 정치성과 결합시키는 급진적인 미학 창조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예를 들어 이 그룹의 지도자인 고다르는 할리우드 영화의 잘 짜인 내러티브 구조를 미국 제국주의의 반영으로 보았으며, 현실을 마치 있는 그대로인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기법들의 모든 영화를 부르주아적 가치에 부합하는 영화로서 비판하였다. 고다르 집단은 전통적인 기법의 상업영화나 수평영화, 재현-서술적인 수직영화 모두를 관객들을 영화에 몰입시켜 현실을 잊게 하는 부르주아 영화로 단정하고 이를 거부하였다. 이러한 부르주아 영화의 문제점은 지배이데올로기의 주입에 있었다. 즉 관객이 영화를 보며 마치 현실을 대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는 것을 틈타 감독 혹은 제작자의 이데올로기 및 가치관을 의도적이건 무의도적이건 관객에게 주입한다는 데 있었다. 관객의 이러한 무의식적 몰입을 막기 위해 고다르는 브레히트가 말하는 ‘거리 두기 효과 effets à distance’라는 방식을 사용한다. 즉 ‘점프 컷 Jump cut’,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고 말하기’, ‘평면적 몽타주’, ‘평면적 미장센’ 등의 형식과 다큐멘터리적인 양식인 핸드 핼드 카메라의 사용, 거리 로케이션 촬영, 르포르타주적인 성격의 인터뷰 장면 삽입 등을 접목시킨다. 그 목적은 이러한 반부르주아적 카메라 스타일을 통해 영화가 주는 현실감의 환상을 파괴하고 관객이 영화(이야기의 줄거리나 주인공들)에 동화됨이 없이 능동적으로 작품을 해석하고 작품의 의미작용에 함께 참여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고다르의 이러한 미학을 바탕으로 지가베르토프 그룹은 “정치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정치 영화를 정치적으로 만드는 방법” 즉 ‘영화의 정치학’에 치중한다. 따라서 이 그룹의 영화들은 미학적인 질문들에 경도된 나머지 정치적 현실들에는 상대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함으로써 혁명적 영화의 중요한 측면인 현실을 결여하게 된다. 이들 영화의 지나치게 난해한 점과 정치영화인들을 겨냥한 제작 방법론의 제시는 노동자뿐 아니라 일반 대중의 접근조차 어렵게 만듦으로써 소수의 지적 관객만을 위한 영화가 되고 만다. 예를 들어 지가베르토프 영화들 중 가장 성공적인 작품으로 평가되는 «만사쾌조 Tout va bien»(1972)는 파업 중인 노동자들에 의해 사주와 함께 감금된 미국의 한 여자 특파원(Jane Fonda)과 한 광고영화 감독(Yves Montand)의 의식의 변화를 주요 내용으로 담고 있다. 이 영화는 학생들로부터 노동자들, 여성해방에 이르기까지 전투적인 정치 활동에 몰입하고 있는 사회의 다양한 요소들을 파노라마적으로(컨텍스트와 무관하게 군데군데 삽입되는 콜라주 기법을 통해) 조사함으로써 동의와 갈등의 다양한 영역들을 지적해 보인다. 그러나, 정치적 토론을 자극하고 관객을 생산적인 분석으로 이끌기 위한 브레히트적 효과의 사용은 사실 전체 줄거리의 이해를 어렵게 만들었다. 따라서 혁명적 행동에 관한 긴 정치적 담론과 실험적 영상들로 가득 채워진 이 영화 역시 고다르 추종자들과 일반 대중들의 호응을 얻지 못한다.

공동 제작의 세력권 내에 감독 개인의 비판의식을 담은 영화들도 투쟁 영화의 한 지류로서 존재한다. 예컨대 메드 옹도 Med Hondo의 «오 태양이여 Soleil Õ» (1970)와 «비코 흑인 가족 les Bicots-nègres nos voisins»(1974), 그리고 알리 갈렘 Ali Ghalem의 «멕투 Mektoub»(1969)와 «또 다른 프랑스 l’Autre France»(1976), 롤 뤼즈 Raul Ruiz의 «추방자들의 대화 Dialogues d’exilés»(1974)는 프랑스 거주 외국인들의 상황을 겨냥한다. 이 영화들에서는 불법노동자 혹은 정치 망명자로서의 이방인들의 비참하고 절망적인 상황과 정부 정책의 실책이 비판적으로 그려진다. 장 슈미트 Jean Schmidt 역시 «타락한 천사들 les Anges déchus de la planète Saint-Michel»(1978)에서 파리를 방황하는 변두리 지역 주민과 마약 중독자, 극빈자들의 절망적 삶을 통해 하층 계급의 소외의 문제에 천착한다.

투쟁 영화가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는 68년 5월부터 70년대 중반까지만 보더라도 이 장르에 속하는 영화들의 수는 대략 500편 가량에 이른다. 이러한 양적 팽창은 사회 변화를 위한 행동파적인 실천이 자본주의 체제 밖의 주변부 영화 집단들에서 지속적으로 펼쳐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실례로 1978년 표준 영화(film)를 활용하는 전문적인 사회운동그룹이 약 30개 그리고 비디오를 사용하는 약 6개 정도의 그룹이 68운동 이후의 사회변혁 활동을 계승해 나간다.


68이후 영화의 정치화 현상은 상업영화들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상업영화는 새롭게 등장한 ‘정치적 문화’에 영향받으면서 점점 더 사회에 대한 이의제기에 참여하는 정치적 경향을 보인다. 사회적 변화를 위한 실천을 전위에서 담당함으로써 비상업적인 투쟁영화가 진정으로 사회 변화의 동인이자 선도자의 역할을 수행한다면, 상업적인 정치영화는 그 후위에서 수동적인 행위자 역할을 한다. 엄밀히 말해 상업영화의 정치화는 68이후 변화한 사회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는 비상업적인 투쟁영화가 접근할 수 없는 일반 관객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보다 큰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녔다. 상업적인 투쟁영화의 감독 코스타-가브라 Costa-Gavra가 강조하는 바 “확고하게 그리고 의식적으로 정치를 극적 제재로 다루고 분명한 방식으로 시사 문제와 관련된 내용”을 펼치는 정치영화는 70년대에 현저하게 증가한다. 그러나 그들을 구속하는 경제적, 법적 장치 안에서 상당수는 허용 가능한 이의제기의 입장을 취하며, 확립된 이념적 해석들에 의거해 작용하며, 진정한 사회적 단절의 태도는 자제한다.

상업적인 정치영화 역시 대부분의 투쟁영화들처럼 메시지 전달을 중요시하나 표현 방법상에 차이를 보인다. 일반 관객에게 접근할 수 있고, 따라서 많은 관객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기 위한 방법으로 상업영화는 고전적인 허구를 매개로 스펙터클의 모든 요소들과 고전적인 재현-서술 기법을 활용하며 형식적으로는 영화 장르들의 원칙을 준수한다. 같은 기법을 채택하는 68이전의 주류 영화들과 다른 점은 정치, 사회적 이의제기를 암시가 아니라 영화 전면에 공공연하게 내세운다는 데 있었다. 비판적 관점을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소위 ‘문제 à thèse’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의 검토 대상은 주로 사회와 사회의 불의, 제도적 폭력, 모든 범주의 제국주의 등이었다.

코스타-가브라는 상업영화를 지향하면서도 행동파적인 비판의식을 보여줌으로써 그의 영화들은 자주 투쟁영화의 범주로 분류되었다. 예컨대 상업적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둔 «Z»(1968)는 관객을 토론의 장으로 이끌음으로써 진정한 사회적 현상이 된다. 이 영화는 잠재적인 파시즘, 대중들 속으로의 경찰 잠입, 사법 기관과 정부의 유착, 극우파와 공모하는 권력 등을 허구의 방식을 통해 가차없이 분석하면서 1967년 그리스에 정착한 장군들의 독재를 설명한다. 이 감독은 뒤이은 영화들에서 그의 주제를 확장하여 정의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다. 1951년의 프라하 숙청을 통해 스탈린주의의 억압을 고발하면서(«고백 l’Aveu», 1969) 좌파를, 남아메리카에서의 미국의 제국주의를 비판하면서(«계엄령 Etat de siège», 1972) 우파를, 비시체제 동안의 프랑스의 대독협력을 회상시키면서(«특수징계부대 Section spéciale», 1974) 과거를 단죄한다. 인간의 존엄성의 이름으로 모든 전체주의를 고발하면서 코스타-가브라는 섬세한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영화의 교육적인 기능에 주력한다. 그의 영화들은 오락적, 대중적, 상업적일 뿐만 아니라 시민 정보와 비판적 성찰을 제공하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내는 영화로 평가받는다. 이 영화들은 상업 영화 감독들에게 하나의 모델이 되어, 그의 아류작이라 할 수 있는 정치 영화들이 70년대에 대거 등장한다.

그 한 예로 이브 부와세 Yves Boisset를 볼 것 같으면, 그의 모든 정치 영화들은 금지와 압박과 협박을 촉발시킨다. 사람을 죽인 파렴치하고 잔인한 한 경찰서장이 상사들의 보호를 받고 악당들과 음모를 꾸미고 고문도 서슴지 않는다는 이야기의 «경찰 서장 Un condé»(1970)은 다섯 달 가량의 금지 후 3분 삭제와 한 장면 완전 재촬영으로 상영 허가를 받는다. 고문의 제도와 방법, 기능에 관한 질문을 제기하면서 부와세는 많은 영화적 터부를 일소하고 돌파구를 연다. 예컨대 파란 많은 마르세이유 지방의 선거에 관한 «천사의 추락 le Saut de l’ange»(1971)이 약간의 소요를 일으킨다면, 벤 바르카 Ben Barka 사건에 관한 «테러 l’Attentat»(1972)는 촬영 허가를 받지 못한다. 부와세는 실제 사건에 허구적 요소를 상당 부분 덧칠함으로써 촬영을 재개한다. 즉 벤 바르카의 시체는 파리가 아닌 모로코로 옮겨져 사막 어느 모퉁이에 매장된다. 또한 갑작스런 정부 지원 중단으로 제작의 어려움을 겪었던 «우두머리 Ras»(1973)에서 부와세는 인간적인 평화주의를 가미해 여전히 금기시 되는 주제인 알제리 전쟁을 다루며 탈영을 옹호한다. «뒤퐁 Dupont Lajoie»(1975)에서는 강간당한 아랍 여인과 경찰 당국의 은폐 명령, 편파적인 사법 기관의 이야기를 통해 70년대의 프랑스에 영향을 미치는 잠재하는 인종차별주의를 고발하는데, 보수파들로부터 아주 신랄한 공격을 받는다.

이처럼 비상업적인 투쟁영화와 나란히 정치적 색채를 띤 상업영화들이 70년대에 대거 등장함으로써 68년부터 7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영화계는 정치영화가 주류를 이루는 이른바 영화의 정치화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5. 결론: 영화계의 정치화와 투쟁영화 부상의 문화적 의미


68운동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결성되었던 영화 삼부회는 영화 내적으로는 영화를 허구로부터 현실로 복귀시켜 영화의 폐쇄성을 허물고 시대와 함께 호흡하려는 것이고, 외적으로는 감독/기술인, 전문인/비전문인과 같은 직업구획의 경계, 위계질서를 허물고 평등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권위적인 국가 기구의 구속력으로부터 벗어나 ‘상상력의 자유’를 획득하려는 한편, 영화인들 자신이 만드는 자율적인 영화기구와 제도마련을 통해 창작의 자유를 그들 자신에게 보장하고, 그럼으로써 혁명적인 사회 변화를 도모할 수 있는 영화제작의 기반을 조성하려는 의미 또한 담고 있다.

68운동의 좌절은 이후 영화와 같은 대중문화들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논의를 진행시켰다. 예컨대 알튀세르 L. Althusser는 그 좌절원인을 억압적인 국가기구의 탄압 이전에 대중문화와 교육, 종교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들의 위력 때문으로 보았다. 극좌파 경향의 진보주의 영화인들 역시 이 기구들이 나름대로의 자율성을 지니면서 하나의 억압으로서 작용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자각하였다. 68년을 전후로 마오이즘과 같은 극좌파 계열의 분명한 정치적 노선을 취한 영화전문잡지 «카이에 Cahiers du Cinéma» 또한 같은 맥락에서 ‘혁명’이 좌절된 원인을 영화 자체가 표상하는 허위의식 때문으로 보았다. 즉, 호르크하이머 M. Horkheimer와 아도르노 Adorno가 대중문화들의 문제점으로 문화산업을 통한 ‘허위의식’의 유포를 지적했듯이, 영화가 보여주는 현실은 실제적인 현실과 유리되어 있으며, 거짓현실과 허위욕구로 인해 변화와 저항의 힘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자리하게 된다. 이러한 비판적 통찰은 무엇보다 현실을 왜곡시키는 영화를 문제로 지적하게 한다. 그것은 영화가 지배 이데올로기의 입장에서 환상을 조작하기 때문이고(보니체 Pascal Bonitzer), 지배 이데올로기와 이윤동기가 결합된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이미 이데올로기적이기 때문(코몰리)이라는 것이다. «카이에»의 이러한 급진적인 정치적 입장은 현실의 재현으로서의 영화에 대한 비판을 거쳐 70년대에는 프랑스와 세계가 처한 현실의 문제, 즉 영화가 담아내는 세계 자체의 문제에 더욱 접근하기 위한 노력으로 이어진다.

68년 이후 프랑스 영화계에 나타난 투쟁영화의 부상은 이러한 맥락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영화는 이제 확실히 현실을 반영하는 영화가 주목을 받게 된다. 그러나 ‘어떻게’가 중요해진다. 우선, 현실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창조하는, 다시 말해 허위의식을 유포, 조장하는 영화가 아니라 비판적 시각에서, 이의제기의 차원에서 현실을 드러내는 영화에 강조점이 주어진다. 이러한 영화 제작의 효율적인 한 방법은 동시대의 문제를 영화 전면에 내세우되 그것을 표상, 즉 표현이나 상징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설명적인 차원에서 지적해 보이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방식이 투쟁영화가 추구한 것이었고, 그것은 사회변혁을 도모하기 위한 대중적 각성의 한 수단으로 인식되어졌다. 수동적인 관객을 능동적으로 만듦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비판적 의식을 갖게 하려는 고다르의 지가베르토프 그룹이든, 용이한 메시지 전달을 통해 대중 관객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드는 그룹이나 감독 개인들이든 이들 모두에게 영화는 무엇보다 변화와 혁명의 한 수단이었다. 즉 이들 영화의 목적은 착취-피착취, 억압-복종과 그것이 은폐되는 사회적 모순들을 드러냄으로써 대중들에게 혁명적 의식을 고취시키고 더 나아가 사회의 변화를 꾀하려는 것이었다. 이것이 68운동이 실현하려 했던 바이며, 따라서 투쟁영화와 더 포괄적으로는 상업적인 정치영화가 그 미완의 실현을 계승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투쟁영화에는 또한 68정신이 다양하게 녹아들어 있다. 이 영화들이 취한 ‘공동 제작’과 ‘자주 관리’, ‘자주 보급’의 방식은 68년 5월 운동 중 노동자평의회가 공장 관료들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공동체의 자율성을 실천했던 바이며, 비상업적인 제작집단들은 사회 계층들간의 격차와 소외를 동반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거부와 그로부터의 독립이라는 68이념을 실천했던 것이다. 이 집단들 역시 학생․노동자 운동 집단들처럼 자발적으로 형성되었으며, 이들 영화가 주제로 삼은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 또한 68이념의 내용에 다름 아니다. 또한 당시로서는 금기시 된 알제리 전쟁과 고문의 문제 그리고 검열의 제재를 받는, 관료와 정치인, 경찰들의 비리에 대한 강도 높은 폭로는 “금지된 것을 금지한다”는 68구호의 직접적인 반영이다. 투쟁영화는 이런 점에서 68운동과 깊은 관련성을 맺고 있으며, 따라서 영화를 통한 제2의 68운동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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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아라공 - 죽음이 오는 데에는

죽음이 오는 데에는


루이 아라공
(Louis Aragon, 1897 - 1982)


죽음이 오는 데에는
거의 일순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마침 그때
알몸의 손이 와서
나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 손은 되돌려주었다
내 손이 잃었던 색깔을
내 손의 진짜 모습을
다가오는 매일 매달
광활한 여름의
인간들의 사건에로 업무에로

뭐가 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에
항상 몸을 떨고 있었던
나에게 나의 생활에
바람과 같은 커다란 목도리를 두르고
나를 가라앉히는 데는
두 개의 팔이면 족했던 것이다

그렇다 족했던 것이다
다만 하나의 몸짓만으로
잠결에 갑자기 나를 만지는

저 가벼운 동작만으로
내 어깨에 걸린 잠 속의 숨결이나
또는 한 방울의 이슬만으로

밤 속에서 하나의 이마가
내 가슴에 기대며
커다란 두 눈을 뜬다
그러면 이 우주 속의
모든 것이 나에게 보이기 시작한다
황금빛의 보리밭처럼

아름다운 정원의 풀 속에서
그러면 죽어 있는 것과 같았던
나의 마음은 숨을 되찾아
향긋한 향기가 감돈다
상쾌한 그림자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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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아라공 그의 "미래의 노래" 첫번째 연은 이렇다.

인간만이 사랑을 가진 자이기에
자기가 품었던 꿈이 다른 사람의 손으로
자기가 불렀던 노래가 다른 사람의 입술로
자기가 걸었던 길이 다른 사람의 길로
자기의 사랑마저 다른 사람의 팔로 성취되고
자기가 뿌렸던 씨를 다른 사람들이
따게 하도록 사람들은 죽음까지도 불사한다
인간만이 내일을 위해 사는 것이다

이런 대책없는 낙관주의의 배경에는 엘자가 있다.

한 순간에 다가오는 죽음조차
그녀의 두 팔이 다가와
안아주기만 한다면 이겨낼 수 있는 ...

루이 아라공은 아내 엘자의 이름을 건 두 권의 시집을 냈다.
<엘자의 눈> <나에게는 엘자의 파리밖에 없다>

 

...어떤 인간은 둘이되 결코 둘이지 않아야만 살아갈 수 있다.

 

(나도 인간임므로 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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