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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루다 탄생 100주년

민중과 자연을 향한 위대한 사랑 노래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며  
 
고대신문

 

피노체트의 쿠데타가 발발한 1973년의 칠레. 가택수색의 긴박한 상황이 연출된 가운데 그 집의 주인이었던 한 사람은 병사들에게 조용히 말한다. “이 집에서 당신들에게 위험한 것은 하나밖에 없네.” “그게 뭡니까?" 순간 손을 권총으로 가져가는 장교에게 들려온 대답. “시(詩)라네.”

 

이 유명한 일화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다. 서정의 시인, 사랑의 시인, 민중의 시인, 혁명의 시인. 모두 그를 일컫는 표현이다. 개인적 사랑의 묘사에서부터 혁명의 불꽃을 제시하기까지 네루다 시의 진폭이 큰 것은 그것이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의 고백처럼 시란 영혼을 뒤흔들던 무언가를 그만의 방식대로 표현해낸 전부였다.

 

현실주의자가 아닌 시인은 죽은 시인이요, 오직 현실주의적이기만 한 시인도 죽은 시인이라고 했던 네루다. 전자와 후자의 전쟁에서 둘은 번갈아 승리하지만 결코 시 자체는 지지 않는다던 한 시인의 외침은 탄생 100주년을 맞은 지금도 세상을 울리고 있다.
 
시(詩)의 제왕들은 죽어서까지도 고된 삶을 살아가는가 보다. 끝자리 숫자가 아라비아 숫자 5로 끝나는 당해 년도 기념일마다 가혹하리만치 휴식을 방해받아야 하니 말이다. 그들이 운명을 달리한 연도가 인디언 신화 속에서 생명력을 의미하는, 이 미신의 숫자 오각형의 모서리에 닿을 때마다 우리는 그들을 곳곳에서 경건한 분위기 속에 기억하곤 하는 것이다.

 

파블로 네루다는 1904년 7월 12일 라틴아메리카의 빠랄(Parral)에서 태어났다. 묘하게도 칠레의 주목할만한 시인들이 많이 태어난 이 피폐한 촌락에서 네루다는 온 생을 통틀어서 정녕 다함이 없는 시적 에너지의 원천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물론 말이 없고 엄격할 대로 엄격하기만 할뿐, 시적 재능과는 무관한 아버지의 이 좁은 성(城)은 그의 어린 시절에 뼈아픈 추억으로 남아있다.

    
네루다에 대한 관심은 비단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다 준 연시집 <스무 개의 사랑 노래와 절망 속의 작은 읊조림>에서 연유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구사하는 언어의 시적 힘이 오직 풍요롭고도 다채롭게 확장하는 서정시적 에로스에서 기원한다고 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시에 관한 한 그의 정력적인 호기심이 특별히 극복해야 했던 한계는 주제의 측면에서나 기교적인 측면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다. 그의 시세계는 처음부터 끝이 예비돼 있지 않았다고나 할까. 네루다에게 그리스 신화 속의 마이더스 왕에 관한 이야기가 더는 신화 속의 이야기만은 아닐 터, 그가 손을 대는 찰나, 만물은 시로 화(化)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네루다의 시는 어찌 보면 거의 본능에 가깝게 그러나 시적 긴장감을 늦추는 법 없이 요람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인생에 대한 물음을 대담하게 밀어붙인다. 그에게 삶의 진실은 아스라한 현기증을 유발한다. 착오가 없을 수도 없지만 이에 여념하지 않고 배우는 자의 겸손한 자세를 잃어 본적이 없는 그였다. 네루다에게 창조를 향한 전진은 절망과 좌절의 희생을 감내하고도 남을 만큼 절실한 것이었다. 


그의 시가 원숙미를 더해가던 시기에, 그의 시적 주제는 미학적 에테르의 천체와 농후한 정치적 성향으로 가장한 지상의 공동묘지 사이를 큰 폭으로 진동한다. 한편, 그 스스로는 내면으로부터 울려오는 한 고독한 동성애자의 광포한 자기부정의 절규에 귀기울여야만 했으며, 동시에 극단적인 냉전시대의 상황에서 정치선전에 희생되었다는 자괴감을 떨칠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그는 가장 단순한 사물의 세계를 가벼운 마음으로 추구하곤 한다.

 

그가 처음으로 출판한 작품집 <지상에 체류하는 동안>이 이끌던 잿빛 성공의 그늘이 가셔가던 무렵 그를 훈계하던 것은 시적 미학의 정점에서 축포처럼 터져 오르는 자기소멸과도, 불모의 모래사장에서 순간 반짝이는 순수시의 촉촉함과도 거리가 멀다. 게다가 그는 그의 앞길을 확장하고자하는 욕망에 눈이 멀어서 그의 시세계를 안내하는 친절한 혹은 불필요하게 말이 많은 교사를 자청한 적도 없다. 설령 그의 목소리가 일관된 것처럼 보일지라도 동일한 시가 경우에 따라서는 만화경의 세계 마냥 다채롭게 읽힌다는 점 역시 주목할 만 한데, 대체로 고전적인 작품들이 가진 보편성과 영속성은 이런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에 빚지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반 백년동안 네루다는 칠레 시단의 거인이었으며 넓게는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지간에 라틴아메리카 전역에 군림하던 시의 독재자였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본심은 분명히 아니었다. 네루다는 이미 일찍부터 어떠한 문학적 조류와도 거리를 유지했으며 자신의 초상을 담은 시적 유파를 만들기 위한 초석을 다져본 적도 없다. 한결같이 이러한 독재자의 언어 속에서는 “정상의 왕좌에 앉지 않으면 멍텅구리지!”라는 따분한 모토는 찾아볼 길이 없다. 오직 획일적인 작품세계만을 고집하는 현대의 시인들이 네루다 곁에서 그의 진언을 경청하기를 원한다면 상당한 인내심을 필요로 하리라. 또한 우리는 네루다에게 진정으로 감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왕관을 둘러싼 쟁탈전으로 인해 많은 칠레의 새로운 시인들이 등장할 수 있었고, 그들 중 몇몇은 세계의 시단에서 그 역할을 톡톡히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네루다는 큰 시인이었다. 그러나,…….
네루다학(學)에서 이 틈새를 비집고 끼어드는 이 ‘그러나’라는 개념도 무시할 수는 없다. 이 개념의 공간은 오늘날 점점 더 팽창해 가고 있다. 그래서 네루다에 관한 글들을 모두 짜깁기하면 별 어려움 없이 지구의 적도를 한바퀴 빙 두를 수 있다고 어느 네루다 연구가는 서슴치 않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의 적들 중 일부는 같이 시를 쓰던 동료들이었다. 그들의 공격에 대해 네루다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극단적인 조치에 대해서도 역시 일관된 자세를 잃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그의 적들과는 비교조차 안될 정도로 월등히 많은 친구들을 가졌었다. 프레테리꼬 가르시아 로르까, 죠르주 아마도, 루이 아라공, 파블로 피카소, 아나 지게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 그리고 살바도르 알렌데가 그들이다.

 

늦어도 1936년 이후부터는 정치적 앙가쥬망이 그의 삶과 작품에 있어서 큰 비중을 차지하던 활력소였다. 스페인 정부를 위해서 또 전체주의에 맞서기 위해 네루다는 입당을 결정한다. 물론 그의 이 탁월한 선택은 논쟁의 불씨가 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에게는 창작의 한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1945년 그는 공식적으로 칠레 공산당에 입당한다. 차이는 있겠지만 그는 여기서 죽는 그 순간까지 참을성 있게 충성을 다하여 일했고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해 후회한 적도 없다. 스페인 내전의 비극이, 또 아우슈비츠에 대한 불온한 기억이 아물지 않던, 게다가 그 이후 지속되던 납빛의 냉전시대 상황에서 그의 행보는 당시 여러 지성인의 태도와는 남다른 것이었다.

 

한낱 ‘지상에서 소외된 자’에 대한 불타는 그의 연대감은 이들의 삶에 대한 폭넓은 동감과 감동에서 비롯한 것이지 단지 특정한 실존적 사회문제를 타개하기 위한 임시방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네루다가 불순한 의도로 몇몇 당을 위한 찬양곡을 작곡했음도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는 생의 마지막까지 이 기억에서 벗어나고자 괴롭게 몸부림친다. “물론 나는 잘 알고 있다. 혁명과 혁명가도 종종 오류와 부조리에 봉착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 인간에 대한 불문율은 우파에게서처럼 좌파에게도 동일한 효력을 발휘한다. 그 누구도 오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물론 그의 이 고백을 다음과 같이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즉, 인류의 연대의식과 인간적 기품에 바탕을 둔 정의의 하얀 깃발이, 그러나 커다란 과오로 구멍 뚫린 이 깃발을 개종자가 열심히 참회기도를 하는 와중에 착용하는 흰옷과 맞바꾸겠다는 말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네루다에 대한 공격은 그저 품위 있는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내심 그에 대한 사무친 적대감을 버릴 수 없던 동료들이나 비평가들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그의 그 정의에 불타는 시학도 스스로를 1949년의 탈출과 망명을 부추기던 시대의 횡포로부터 보호할 수는 없었다. 구태의연한 민주주의 정치질서를 유지하고자 당시 이탈리아와 프랑스 정부는 국가의 안보를 명목으로 네루다의 그 위험한 시들을 싸잡아 맹비난한다. FBI가 작업한 그에 대한 세부신상기록카드는 어떤 종류의 단행본 출판물보다도 훨신 두껍고 치밀하다. 좋은 친구들 가운데 치명적인 적들이 은폐돼 있다는 사실은 저 악명 높은 ‘쿠바인의 편지’사건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나중에 네루다는 라틴아메리카 혁명의 단두대에 세워져 공개적으로 심판 받는 오욕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이 사건의 발단이 되었던 시낭독 순회여행 중 미국 펜클럽의 초청과 페루정부의 표창 수여는 그가 평생을 두고 용서할 수 없었던 그에 대한 철저한 조롱이었다.


투병 중이던 네루다는 1973년 9월 피노체트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나서도 열흘을 더 살아 있어야 했다. 마지막 혼미한 정신착란의 순간에 그는 반복해서 외쳤다고 전해진다. “당신들은 모두 죽어요. 모두가 모두가 죽는다니까요.” 얼마 뒤 산티아고에 있던 그의 아름다운 집 ‘라 카스코나(La Chasocona)’ 는 용맹스런 칠레의 군인들에 의해서 깨끗이 파괴된다. 그리고 그날 이 집에서 시작된 장례행렬은 중무장한 군대의 삼엄한 경계 속에 묘지로 향했다. 그의 장례에는 수백의 군중이 운집했다. 이들 중 스웨덴 대사와 멕시코 대사만이 외부세계의 유일한 대표자였다. 장례행렬은 조금은 떨렸지만 그러나 침착하게 <인터내셔널가>를 불렀다. 이것은 이 독재정권에 대한 첫 번째 공식적인 시위였다. 피노체트 장군은 이 시인의 죽음을 위해 3일간을 국가차원의 애도일로 지정한다. 그리고 그는 네루다를 7년 동안 칠레에서 파문시킨다. 

 

1950년 칠레에서 <거대한 노래>가 불법인쇄 되었다. 내 아버지는 그 원본 복사본을 갖고 있다는 데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나중에 이 복사본에는 “깜빠네로 네루다(스페인어: 친구 네루다)”라는 네루다의 파란색 자필서명이 화려하게 장식되기도 한다. 이 책은 내 인생의 첫 번째 독본(讀本)이다. 내 어머니는 이 책과 함께 내게 읽기를 가르쳤다. 지나치게 과장된 주장이 되려나, 만약에 내 전생애를 걸쳐 이 독서의 시간이 언제나 함께 하고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 주옥과도 같은 순간을 잊을 수 없다. 그러한 유년시절로부터 24년 후, 피노체트 장군의 비밀경찰이 나의 아버지를 추적하고 있었다. 항상 그렇듯이 그들은 내 집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고, 우리가 기르던 암캐의 작은 오두막과 그 너무나도 비정치적인 암캐까지 빠지지 않고 수색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들은 내 아버지를 찾지 못하자, 마치 분을 삭이기 위한 듯이 우리의 작은 가족도서관에서 소위 반동적이라고 하는 도서들을 질질 끌어냈다. 그 가운데서 내 첫 번째 독본을 발견하고는 마음 한구석에 서서히 저며오던 슬픔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가슴 아팠던 순간도 오늘 100번째 생일을 맞이하는 내 첫 번째 스승에 대한 기억의 한 부분임을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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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RUDA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네루다(Pablo Neruda)

본명은 Neftali Ricardo Reyes Basoalto. 1904. 7. 12 칠레 파랄~1973. 9. 23 산티아고. 칠레의 시인·외교관·마르크스주의자.

1971년 노벨 문학상, 1953년 레닌 평화상을 받았다. 그는 철도노동자인 아버지 호세 델 카르멘 레예스와 어머니 로사 바소알토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그가 태어난 지 한 달도 되기 전에 죽었으며, 2년 뒤 가족은 남부의 '새로운 땅'으로 이주해 테무코에 자리잡았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재혼했으며, 네루다는 계모를 친어머니처럼 사랑하였다. 뒤에 그는 그 당시를 회고하여 "조국의 개척지인 '머나먼 서부'에서 나는 삶과 대지, 시, 비 속에서 태어났다"고 썼다.

그는 1910년 테무코 남자국민학교에 들어가 1920년 중등과정을 마쳤다. 10세에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 일부는 나중에 학생잡지에 실렸으며 처음에는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지 않으려고 가명을 썼다. 1920년부터 파블로 네루다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으며, 1946년에는 법적으로 이름을 바꿨다. 12세 때 칠레의 저명한 시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을 만나 위대한 고전작가들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이들은 그가 진로를 선택하고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전투적 무정부주의자가 되어,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무정부주의적 공산주의'에 대한 탁월한 이론가 장 그라브의 저서를 번역했다.

1921년 테무코를 떠나 수도인 산티아고로 갔다. 현실적인 목표는 사범대학에서 불문학 학위를 받는 것이었지만, 공부보다는 시를 쓰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지방 출신의 이 낭만적인 학생은 어깨에 시인의 망토(아버지가 쓰던 철도노동자 망토)를 두르고 챙 넓은 솜브레로 모자를 쓴 차림으로 칠레 수도의 문학계를 뒤흔들어놓았다. 그해 10월 〈제가(祭歌) La cancion de la fiesta〉라는 시로 칠레 학생연맹이 주최한 백일장에서 1등상을 탔으며, 이 연맹이 펴내는 잡지 〈클라리다드 Claridad〉에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23년 갖고 있던 가구와 아버지에게 받은 시계를 팔아 마련한 돈으로 처녀시집 〈황혼의 노래 Crepusculario〉를 출판했다. 이듬해에는 책을 내주겠다는 출판업자를 만나 〈 스무 편의 사랑시와 한 편의 절망노래 Veinte poemas de amor y una cancion deseperada〉(1924)를 냈는데, 이것은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널리 읽혔다. 이 책은 나오자마자 성공을 거두었고, 그뒤로도 꾸준히 인기를 얻었다. 네루다는 그토록 고통스럽게 쓴 이 시들이 새 시대의 연인들에게 위안을 주었다는 사실에 놀라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기적에 의해서, 이 고통스럽게 씌어진 책은 수많은 사람들을 행복에 이르는 길로 안내했다"고 말했다.

이미 20세에 2권의 시집을 출간하였던 네루다는 칠레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이 되었다. 불문학 공부를 그만두고 시에만 몰두해 〈조물주의 시도 Tentativa del hombre infinito〉, 토마스 라고와 함께 쓴 〈반지 Anillos〉ㆍ〈고무줄새총에 미친 사람 El hondero entusiasta〉을 발표했다.

네루다는 1927년 버마 랑군 주재 명예영사로 임명받아 그뒤 5년 동안 아시아에서 외교관 생활을 했다. 랑군에서 콜롬보·실론·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자바·싱가포르로 옮겨다녔으며, 자바에서 네덜란드 출신의 마리아 하게나르와 첫 결혼을 했다. 캘커타에서 열린 '범힌두인 회의'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러한 여행들을 회고하는 책들은 감동적이지만 때로는 가슴아픈 일화들로 가득 차 있다. 당시 그의 생활은 외로웠으며, 버마 처녀 조시 블리스와의 연애가 유일한 위안이었다. 〈대지에 살다 Residencia en la tierra〉를 쓴 것은 남아시아에서 지낸 이 무렵이었다. 1933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재 칠레 영사로 발령받았으며, 그곳에서 당시 그 도시를 방문중이던 스페인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와 친구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바르셀로나로, 그뒤에는 마드리드로 전출되어 그곳에서 델리아 델 카릴과 재혼했다.

칠레의 문단에 충격을 주었던 것처럼, 유럽 문학계에도 그의 시는 신선한 충격을 던지며 빠른 속도로 알려졌다. 스페인 시인들은 스페인의 대표적 지성인들이 서명한 〈파블로 네루다에게 바침 Homenaje a Pablo Neruda〉을 출간하여 그를 반갑게 맞아들였다. 시인으로서 발전을 거듭하던 이 시기는 1936년 스페인 내전이 터짐으로써 중단되었다. 친구 가르시아 로르카의 처형과 미겔 에르난데스의 투옥을 비롯한 '거리의 유혈사태'는 이 칠레 시인의 정치적 태도를 성숙시켰다. 뒷날 "세계는 변했고 나의 시도 변했다. 시구 위에 떨어지는 피 한 방울은 그 속에서 숨쉬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내 가슴 속의 스페인 Espana en el corazon〉은 내전중 공화군 전선에서 출판되었다.

그는 1938년 스페인 망명객들을 이끌고 칠레로 돌아왔으나 칠레 정부는 곧 그를 멕시코로 보냈다. 이곳에서 왕성한 창작기에 접어들었으며, 이때 쓴 시의 대부분은 유럽에서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과 특히 독일군의 맹공격에 맞서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하려는 영웅적 활약상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 이당시 멕시코의 벽화도 그의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

1943년 태평양 연안의 모든 나라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배를 타고 칠레로 돌아왔다. 1945년 상원의원으로 뽑혔고 3년 동안 조국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문학에 바쳤던 것만큼이나 많은 열정을 바쳤다. 그러나 칠레에 우익정부가 들어서면서 정치활동은 끝나게 되었다. 공산주의자인 네루다는 다른 좌익 인사들과 함께 몸을 숨겨야만 했다. 숨어 살던 이 시기는 작품을 쓰기에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 시기에 아메리카 대륙에서 쓴 가장 위대한 서사시 가운데 하나인 〈모든 이를 위한 노래 Canto general〉가 탄생했다. 그는 1948년 2월 칠레를 떠나 말을 타고 안데스 산맥 남부를 가로질러 4월에 파리에서 열린 평화지지자회의에 참가했다. 또 1949년에는 알렉산드르 푸슈킨 탄생 150주년 기념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했다. 그뒤 유럽의 다른 지역을 돌아보고 다시 멕시코를 방문했다. 1952년 좌익작가와 정치인에 대한 검거령이 철회되자 칠레로 돌아왔으며 칠레 출신의 마틸데 우루티아와 3번째로 결혼했다.

그는 계속 태평양 연안의 이슬라네그라에서 살았지만, 1960년 쿠바, 1966년 미국 방문을 비롯해 끊임없이 이곳저곳을 여행했다. 그의 시는 거의 모든 언어로 번역되었다. 산티아고의 산크리스토발 언덕 기슭에 '라차스코나'라는 이름의 집을 짓고, 발파라이소에도 '라세바스티아나'라는 집을 지었다. 이 집들은 그가 여행하면서 모은 배의 선수상(船首像)과 그밖의 갖가지 기념물을 진열한 심미적 분위기로 이름난 명소가 되었다.

본질적으로 네루다의 시는 인간이면 누구나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끊임없는 변화를 대변한다. 젊은 시절에는 서정적이고 관능적인 작품인 〈황혼의 노래〉와 〈스무 편의 사랑시와 한 편의 절망노래〉를 썼으며 뒤이어 좀더 영적인 작품 〈조물주의 시도〉·〈고무줄새총에 미친 사람〉을 쓰게 되었다. 외부세계와 이러한 세계가 주는 창조적 자극에서 내적 자아의 영역으로 침잠하게 되면서 독보적이고 신비로운 작품 〈대지에 살다〉가 탄생되었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전통적인 시형식에서 벗어나 '네루디스모'(nerudismo)라는 매우 개성적인 시적 기법을 창조해냈다. 그가 스페인 내전 기간에 쓴 시들은 더 사실성이 강하고 외부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더 많이 깨닫게 되었음을 나타내준다. 이러한 현실지향적이며 고발조의 시에 이어 장엄한 서사시 〈모든 이를 위한 노래〉가 나왔다. 그러나 이 웅장한 문체는 곧 사라지고 좀더 단순한 주제를 다룬 사회비평시가 등장하게 된다.

그의 주제와 기교의 다양함은 나이를 먹어도 여전했다. 〈100편의 사랑 노래 Cien sonetos de amor〉에서는 사랑이, 〈Estravagario〉에서는 해학이 다시 주제로 다루어졌으며, 〈이슬라 네그라의 회고록 Memorial de Isla Negra〉은 향수 어린 자서전이다. 네루다는 "나는 장대한 연작시를 계속해서 써나갈 계획이다. 왜냐하면 이 시는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의 말로써만 끝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고백했으며, 실제로 그 마지막 순간은 1973년 9월에 왔다.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네루다의 시세계

 네루다는 초기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1924)에서 관능적 표현의 서정시를 주로 써서 당시 전통적이던 완곡한 애정 표현에 도전했다. 다음 단계에는 시집 '지상에서 살기'(1935)까지를 통해 초현실주의 기법의 시들을 썼으며, 스페인 내전(1936)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현실 참여의 시들을 썼다. 그는 문학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예술과 문학은 단순히 존재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필수 불가결한 그 무엇이 되어야만 한다. 시는 개인적 삶의 솔직한 기록에 그쳐서는 안 된다. 그것은 모든 인류를 향한 발언이어야 한다. 시의 목적은 고백이 아니라 설득에 있는 것이다."(출처 : 김윤식·김종철 저 문학교과서)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네루다의 다른 시

오늘밤 나는 쓸 수 있다 

오늘밤 나는 쓸 수 있다 제일 슬픈 구절을.

예컨대 이렇게 쓴다. "밤은 산산이 부서지고

푸른 별들은 멀리서 떨고 있다"

밤바람은 공중에서 선회하며 노래한다.

오늘밤 나는 제일 슬픈 구절을 쓸 수 있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고, 때때로 그녀도 나를 사랑했다.

이런 밤이면 나는 그녀를 품에 안고 있었다.

끝없는 하늘 아래서 나는 연거푸 그녀와 키스했다.

그녀는 나를 사랑했고, 때때로 나도 그녀를 사랑했다.

누가 그녀의 그 크고 조용한 눈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늘밤 나는 제일 슬픈 구절을 쓸 수 있다.

나한테 이제 그녀가 없다는 생각을 하며. 그녀를 잃어버렸다는

느낌에 잠겨.

 

광대한 밤을 듣거니, 그녀 없어 더욱 광막하구나.

그리고 詩가 영혼에 떨어진다 목장에 내리는 이슬처럼.

내 사랑이 그녀를 붙들어놓지 못한 게 뭐 어떠랴.

밤은 산산이 부서지고 그녀는 내 옆에 없다.

그게 전부다. 멀리서 누가 노래하고 있다. 멀리서.

내 영혼은 그녀를 잃은 게 못마땅하다.

내 눈길은 마치 그녀한테 가려는 듯이 그녀를 찾는다.

내 가슴은 그녀를 찾고, 그녀는 내 곁에 없다.

같은 밤이 같은 나무를 희게 물들인다.

그때를 지나온 우리는 이제 똑같지가 않다.

나는 이제 그녀를 사랑하지 않고, 그건 그렇지만, 허나 나는 얼마

나 그녀를 사랑했던가.

내 목소리는 그녀의 귀에 가서 닿을 바람을 찾기도 했다.

다른 사람 거. 그녀는 다른 사람 것이 되겠지. 지난날의 키스처럼.

 

그 목소리. 그 빛나는 몸. 그 무한한 두 눈.

나는 이제 그녀를 사랑하지 않고, 그건 그렇지만, 허나 나는 그녀를

사랑하는지도 몰라.

사랑은 그다지도 짧고, 잊음은 그렇게도 길다.

이런 밤이면 나는 그녀를 품에 안았으므로

내 영혼은 그녀를 잃어버린 게 못마땅하다.

비록 이게 그녀가 나한테 주는 마지막 고통일지라도

그리고 그게 그녀를 위해 쓰는 내 마지막 시일지라도.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여자, 대지, 민중에의 사랑  ( 김경범/ 세종대 겸임교수/서문학 )

 중남미 시인들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네루다에게는 사랑의 시인, 민중의 시인, 그리고 가끔씩은 자연의 시인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니고 비평가들은 그의 시세계를 둘이나 셋으로 혹은 다섯으로 나누며 불연속적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훌륭한 시들이 그렇듯이 그의 시는 무엇보다도 언어의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언어의 대지 위에 아주 다양한 무늬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의 첫 작품은 아니지만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준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1924)의 첫 번 째 사랑의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여자의 육체, 하얀 구릉, 눈부신 허벅지,/ 몸을 내맡기는 그대의 자태는 세상을 닮았구나./ 내 우악스런 농부의 몸뚱이가 그대를 파헤쳐/ 땅 속 깊은 곳에서 아이 하나 튀어나오게 한다…”여자의 육체 - 대지라는 다소 전통적인 도식이 보이지만 3천5백쪽에 달하는 그의 시 전집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여자는 관념적이 아니라 감각적이고 시인은 ‘봄이 벗나무와 하는 행위’에 목말라한다. 그러나 짧은 사랑은 절망과 고통스런 망각이 되고 시인은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 왔다’고 선언하며 절망의 노래를 끝맺는다. 그러나 이 시집이 실연의 상처를 노래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고통은 수동적이면서 능동적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대지로 이어지고 대지는 시라는 생명을 잉태한다. ‘잘록한 허리를 가진 아름다운 여인’이 된 아메리카 대륙 그리고 ‘바짝 마른’ 그의 조국의 바다, 바람, 비, 나무는 생명과 죽음 사이를 배회하며 빛나는 언어로 재생산된다.

 이때 가끔씩 삶에 대한 염증을 내비치기도 한다. 다음은 『지상의 거처』에 수록된 「산책」의 한 부분이다.

“산다는 게 지긋지긋할 때가 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무감각하게, 양복점이나 영화관에 들어갈 때가 있다./ 이발소의 냄새는 나를 소리쳐 울게 한다. 난 오직 돌이나 양털의 휴식을 원할 뿐/ 다만 건물도 정원도, 상품도, 안경도, 승강기도 눈에 띄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발에, 내 손톱이, 내 머리칼이, 내 그림자가 꼴보기 싫을 때가 있다./ 산다는 게 지긋지긋할 때가 있다…”

그러나 대지의 생명력은 스페인 내란(1936-39년)이라는 계기를 통해 인간에 대한 애정을 회복시킨다. 내란 중에 반파시스트 진영에서 열정적으로 활동을 하던 그는 내란이 끝나자 아메리카 대륙의 민중에게로 눈을 돌린다. 그 시적 승화가 『총가요집』 이며 특히 『마추피추의 산정』 연작시들은 대지 위에서 억압받는 민중을 위해 절규하고 있다.

“나와 함께 올라 다시 태어나라 형제여./ 네 고통이 뿌려진 그 깊은 곳에서 내게 손을 다오./ 이 생명의 잔에 땅에 묻힌 그대들의 오랜 고통을 가져오라./ 그리고 밑바닥부터 얘기해 다오, 이 긴긴 밤이 다하도록/ 내가 닻을 내리고 그대들과 함께 있으니 내게 모두 말해다오, 한땀 한땀,/ 한구절 한구절, 차근차근. 품고 있던 칼을 갈아 내 가슴에 내 손에 쥐어다오./ 나의 핏줄과 나의 입으로 달려오라./ 나의 말과 피로 말하라.”

민중에 대한 희망, 열정, 사랑은 계속 된다. 다만 거대한 자연을 통해서가 아니라 일상의 사물을 통해 여과될 뿐이다. 즉 그는 몸을 낮추고 민중의 언어와 삶 속으로 들어간다. 고양된 감정은 양말, 수박, 소금, 질산염, 밤, 책, 새, 나뭇잎, 양파, 과일, 엉겅퀴 속으로 투영되어 차분해지지만 의식은 여전히 투철해진다. 그리고 삶을 돌아보면서 죽음의 징조와 함께 사랑도 다시 시 속에 나타난다.

빠블로 네루다는 1904년에 태어나 1973년에 죽은 칠레의 시인이다. 노벨상(1971년)을 받은 적도 있고 민중의 대변자로 상원의원이 되었다가 나중에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적도 있다. 칠레 민주화를 위한 자신의 무기는 오직 시라고 말한 적도 있다. 그러나 그는 술꾼에게 모욕당한 인어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을 향해, 죽음을 향해 헤엄쳐’가지 않았다. 그는 ‘시’ 와 함께 ‘사람’도 같이 남아 있어야 할 시인이다. 그의 시는 그의 몸 구석구석에서 솟아났기 때문이다.(출처 : http://210.217.248.140/woodway/poem/neruda/neruda-poem.htm)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규보의 '시벽(詩癖)'

나이 이미 칠십을 넘었고
지위 또한 정승에 올랐네.

이제는 시 짓는 일 벗을 만하건만

어찌해서 그만두지 못하는가.

아침에 귀뚜라미처럼 읊조리고

저녁엔 올빼미인양 노래하네.

어찌할 수 없는 시마(詩魔)란 놈

아침저녁으로 몰래 따라다니며

한번 붙으면 잠시도 놓아 주지 않아

나를 이 지경에 이르게 했네.

날이면 날마다 심간(心肝)을 깎아 내

몇 편의 시를 쥐어짜내니

기름기와 진액은 다 빠지고

살도 또한 남아 있지 않다오.

뼈만 남아 괴롭게 읊조리니

이 모양 참으로 우습건만

깜짝 놀랄 만한 시를 지어서

천 년 뒤에 남길 것도 없다네.

손바닥 부비며 혼자 크게 웃다가

웃음 그치고는 다시 읊조려 본다.

살고 죽는 것이 여기에 달려으니

이 병은 의원도 고치기 어려워라.

 

- 시벽(詩癖 : 시를 짓지 않고는 못 배기는 병)

작자는 이규보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빠블로 네루다 연보 - 시, 사랑, 혁명

(정리 : 권  미  선)

1904년 7월 12일 칠레의 빠랄(Parral)에서 출생. 아버지는 철도 노동자. 성명은 호세 델 까르멘 레예스 모랄레스(Jos  del Carmen Reyes Morales). 어머니 성명은 로사 네프딸리 바소알또(Rosa Neftal  Basoalto). 네루다의 본명은 네프딸리 리까르도 레예스 바소알또(Neftal  Ricardo Reyes Basoalto). 8월 어머니 사망.

 1906년 아버지는 떼무꼬(Temuco. 칠레 남부의 작은 도시)로 이사. 재혼. 몇 년 후 네루다를 데려감. 네루다는 1921년까지 떼무꼬에서 생활.

 1910년 떼무꼬 남학교(Liceo de Hombres) 입학. 1920년 중등과정 수료. 조숙한 네루다는 10살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함.

 1917년 7월 일간지 《아침》(La Ma ana)에 「열중과 끈기」(Entusiasmo y perseverancia) 를 발표함으로써 시인으로 첫 발을 내디딤.

 1918년 떼무꼬의 잡지에도 시를 발표.

 1919년 잡지 《질주와 비상》(Corre-Vuela)에 시 13편을 발표. 아버지는 시인이 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으므로 여러 가지 가명을 사용함. 마울레(Maule) 백일장에서 3등으로 입상.

 1920년 당시 떼무꼬 여학교 교장으로 근무하던 가브리엘라 미스뜨랄(Gabriela Mistral. 중남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여류 시인)을 알게 됨. 가브리엘라는 외롭고 수줍음 많은 청년 네루다에게 시인의 길을 가도록 북돋아 주었음. 당시 가브리엘라는 31살이고 네루다는 16살이었으나 두 사람은 시에 대한 열정으로 지속적인 우정을 나눔. 10월 빠블로 네루다(Pablo Neruda)라는 필명을 사용하기로 결정함. 19세기 체코 시인 얀 네루다(Jan Neruda)의 시를 읽고 감명을 받아 이런 필명을 만들었다는 설도 있음. 떼무꼬 백일장에서 1등으로 입상.

 1921년 불어 선생님이 되려고 수도 산티아고로 유학. 사법학교에 입학. 외롭고 배고픈 학생시절을 겪으면서 보헤미안적인 삶을 영위. 10월 시 「축제의 노래」(La canci n de la fiesta)로 칠레 학생연맹 콩쿠르에서 1등상 수상.

 1922년 문학단체 브레미야(Vremia)에서 처음으로 자작시를 낭송. 우루과이 몬떼비데오에서 발간되는 잡지 《시대》(Los Tiempos)에 시가 게재됨.

 1923년 8월 첫 시집 『황혼』(Crepusculario) 출판. 사츠카(Sachka)라는 필명으로 학생연맹 기관지 《끌라리닷》(Claridad)에 문학평론 등을 기고.

 1924년 6월 자신의 연애 경험을 살려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Veinte poemas de amor y una canci n desesperada)출판. 섬세한 감성, 독창적인 이미지와 은유가 돋보이는 이 시집으로 네루다는 문명(文名)과 대중의 사랑을 한꺼번에 얻음. 지금도 가장 널리 읽히는 시집. 사범학교를 중퇴하고 시 창작에 전념. 시집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생계가 어려워 아나톨 프랑스 시선집을 번역하는 등 여기저기에 글을 기고. 산티아고 일간지에 『스무 편의 사랑의 시...』 창작과정을 기술한 글을 발표. 네루다는 1974년 사후 출판된 『회고록』(Confieso que he vivido)에서 "청년 시절의 불타는 정열을 담고 있으며 [...] 흥건한 애상마져도 삶의 기쁨 속에 녹아있으므로 애착이 가는 시집이다"고 함.

 1925년 문학지 《까바요 데 바스또스》(Caballo de Bastos)를 주관. 시집 『무한한 인간의 시도』(Tentativa del hombre infinito) 발표. 이 시집의 인쇄일은 1925년이고 출판일은 1926년.

 1926년 또마스 라고(Tom s Lago)와 공저한 산문집 『반지』(Anillos) 출판. 단편소설 형식의 문집, 『삶과 희망』(El habitante y su esperanza) 출판.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를 불어판에서 중역.

 1927년 여전히 수입은 적고 생계는 어려움. 6월 14일 미얀마 양군 주재 명예 영사로 임명. 부에노스아이레스, 리스본, 마드리드, 파리, 마르세이유를 경유하여 랑군에 도착. 월급이 없는 명예직이었으므로 가난과 외로움에 시달림. 조시에 블리스(Josie Bliss)를 만나 동거함.

 1928년 스리랑카 콜롬보 주재 영사. 조시에가 찾아왔으나 영원히 헤어짐. 이 시기 네루다는 빈곤, 식민잔재, 정치적 탄압으로 질곡받는 동남아 민중들의 고난한 삶이 라틴아메리카 민중의 삶과 같아서 동질감을 느낌. 네루다의 유명한 여성 편력이 고독과 가난의 산물이라면 반독재, 반제국주의 등 좌파적 성향은 이러한 현실 세계의 체험에서 유래함.

 1929년 인도 캘커타에서 개최된 범힌두교 회의에 참석. 네루와 면담.    

 1930년 자카르타(당시 네델란드령 서인도제도의 수도)주재 영사. 이곳에서 마리아 안또니에따(Mar a Antonieta Hagenaar Vogelzanz)와 사랑에 빠져 12월 결혼. 이 여자는 네델란드 출신으로 스페인어는 한 마디도 하지 못했음.

 1931년 싱가포르 주재 영사.

 1932년 두 달간의 여행 끝에 귀국.

 1933년 그동안 발표했던 시를 모아 1월에는 『열심히 돌을 던지는 사람』(El hondero entusiasta)을 출판하고 4월에는 또 하나의 명시집 『지상의 거처 (1925-1931)』(Residencia en la tierra)를 발간. 초현실주의의 영향은 받은 이 시집은 전통적인 리듬과 시형식을 거부하고 문장 구조마져 파괴한 실험적인 작품. 네루다는 이러한 형식을 통해 무질서, 부패, 소외, 불안을 표현하려고 함. 8월 부에노스아이레스 영사로 부임. 그 때 남아메리카를 여행하던 스페인 시인이자 극작가 페데리꼬 가르시아 로르까(Federico Garc a Lorca)와 친분을 맺음. 이후 가르시아 로르까는 네루다의 시를 소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함.

 1934년 5월 스페인 바르셀로나 영사로 임명. 10월 마드리드에서 딸 말바 마리나(Malva Marina) 출생. 12월 6일 가르시아 로르까의 주선으로 마드리드 대학에서 시 낭송회개최.

 1935년 2월 마드리드 주재 영사로 부임. 라파엘 알베르띠(Rafael Alberti), 미겔 에르난데스(Miguel Hern ndez) 같은 스페인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공산당에 가입. 4월 『스페인 시인들이 빠블로 네루다에게 바치는 시집』이 출판됨. 네루다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스페인 바로크 시인 께베도(Quvedo)의 시집 『죽음의 소네트』(Sonetos de la muerte)와 비야메디아나(Villamediana) 백작의 시집이 호화 양장판으로 출판됨. 9월 『지상의 거처』(1925-1935)를 두 권으로 발간.

 1936년 7월 18일 스페인 내전 발발. 네루다는 공개적으로 공화파를 지지함. 수많은 시인, 작가, 문인들 또한 공화파를 위해 투쟁. 8월 프랑코(Franco) 장군 지지파는 그라나다에서 가르시아 로르까를 암살함. 폭격으로 마드리드 영사관 폐쇄. 네루다는 파리로 건너가서 낸시 큐나드(Nancy Cunard)와 함께 잡지 《세계의 시인들은 스페인 민중을 지지한다》(Los poetas del mundo defienden al pueblo espa ol) 발간. 마리아 안또니에따와 결별. 아르헨티나 출신의 델리아 델 까릴(Delia del Carril)을 만나 결혼.

 1937년 4월 세사르 바예호(C sar Vallejo)와 함께 〈대스페인 원조 중남미 단체〉(Grupo Hispanoamericano a Ayuda a Espa a) 설립. 10월 칠레로 귀국하여 〈문화 창달을 위한 칠레 지식인동맹〉창설. 11월 시집 『가슴 속의 스페인』(Espa a en el coraz n) 발표.

 1938년 〈스페인 공화국 지지 작가회의〉가 스페인 현지에서 개최됨. 아버지와 양어머니 별세. 8월 잡지 《칠레의 여명》(Aurora de Chile) 주간. 10월 칠레 인민전선(Frente Popular) 후보 뻬드로 아기레 세르다(Pedro Aguirre Cerda)가 대통령에 피선되자 모임을 개최하고 행사시를 낭송함으로써 적극적으로 지원. 바르셀로나 전선에서 마누에르 알똘라기레(Manuer Altolaguirre)가 『가슴 속의 스페인』을 발간. 공화파 군인들은 이 시집을 읽고 가슴이 에이고 목이 메었다고 함.

 1939년 파리에 본부를 둔 스페인 망명단체 특별 영사로 임명. 연말에는 스페인 망명자들과 함께 위니펙(Winnipeg) 호에 승선, 칠레를 향해 출발.

 1940년 1월 2일 칠레 도착. 스페인 비평가  아마도 알론소(Amado Alonso)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빠블로 네루다의 시와 문체』(Poes a y estilo de Pablo Neruda) 출판. 이 에세이는 빠블로 네루다 연구의 고전. 8월 16일 멕시코 시티 주재 총영사로 부임. 환영 리셉션장에서 옥따비오 빠스(Octavio Paz)의 하얀 와이셔츠 깃을 붙들고 토를 달았던 일화는 유명함. 네루다는 이즈음 다음 세대를 이끌 시인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고 "중남미 대륙에 촉망받는 시인이 한 사람 있는데 안타깝게도 옥따비오 빠스"라고 대답. 빠스의 재능을 인정하고 높이 평가하지만 자신과 정치적 견해가 다른 게 유감이라는 뜻이다.

 1941년 멕시코 국립대학(UNAM)에서 『시몬 볼리바르에게 바치는 헌시』(Un canto para Bol bar) 출판. 이 작품은 훗날 『지상의 거처 3권』에 수록됨. 과테말라를 여행하면서 미겔 앙헬 아스뚜리아스를 사귐. 10월 멕시코 시티 근처의 꾸에르나바까에서 나치 추종자들에게 피습.

 1942년 4월 쿠바 여행. 시 「스탈린그라드 찬가」(Canto de amor a Stalingrado)를 포스터로 제작하여 멕시코 전역에 부착. 네델란드에 살던 딸 말바 마리나 사망.

 1943년 『칠레 총가요집』(Canto general de Chile)을 비매품으로 출판. 콜롬비아, 페루, 칠레에서 시선집이 출판. 2월 미국 뉴욕에서 개최된 집단 시 낭송회 아메리카의 목소리(La voz de las Am ricas)에 참석. 멕시코, 파나마, 콜롬비아, 페루를 거쳐 칠레로 귀국. 가는 곳마다 정부와 독자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음. 페루의 꾸스꼬에 들러 마추피추(Macchu-Picchu) 유적을 둘러보고 깊이 감동함.

 1944년 산티아고 시문학상 수상. 뉴욕에서 비매품으로 시선집 발간.

 1945년 타라삐까(Tarapac ) 지역구 공화당 상원에 당선. 칠레 국가문학상 수상. 7월 8일 공산당 가입. 사웅파울루, 부에노스아이레스, 몬테비데오에서 시 낭송회와 강연회 개최. 9월 『마추피추 산정』(Alturas de Macchu-Picchu) 집필. 나중에 『총가요집』에 수록됨. 가브리엘라 미스뜨랄 노벨문학상 수상.

 1946년 1월 18일 멕시코 정부는 훈장(Orden Aguila Azteca)을 수여함. 칠레 대통령 선거전에서 가브리엘 곤살레스 비델라(Gabriel Gonz lez Videla) 후보진영의 홍보책임자로 임명됨. 체코슬로바키아, 네델란드, 미국, 브라질에서 시집이 번역, 출판됨. 12월 28일 법원은 빠블로 네루다로 개명을 선고함.   

 1947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로사다 출판사에서 『지상의 거처 3권』(Tercera residencia) 출판(이후 로사다 출판사는 네루다 시집을 도맡아 발간). 이 시집은 『분노와 아픔』Las furias y las penas, 『가슴 속의 스페인』를 비롯하여 여러 작품을 수록. 네루다의 정치적 성향이 잘 드러난 시집. 10월 4일부터 검열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발간되는 일간지 《엘나시오날》(El Nacional) 에 '만인에게 보내는 호소문'(Carta  ntima para millones de hombres)을 게재. 이 글에서 네루다는 좌파와 협약을 준수하지 않는 비델라 대통령을 비난함으로써 정치적 시련을 겪게됨.

 1948년 1월 6일 상원 연설. 이 연설문을 『나는 고발한다』(Yo acuso)라는 제목으로 출판. 2월 3일 대법원은 상원의원직 박탈. 2월 5일 체포영장 발급. 국내에 은신하면서 『총가요집』을 저술하고 대정부투쟁을 함. 런던에서 발행되는 잡지 《아담》(Adam)은 네루다 특집호를 발행.

 1949년 2월 24일 한밤중에 말을 타고 안데스 산맥을 넘어 아르헨티나로 탈출. 배낭 속에는 『총가요집』 원고가 들어 있었음. 4월 25일 파리에서 개최된 제1차 세계 평화 당원 대회에 참석. 6월 소비에트 연방을 방문하여 푸쉬킨 탄생 150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 7월 폴란드와 헝가리 방문. 8월 폴 엘뤼아르와 함께 멕시코를 방문했다가 병석에 누워 1연말까지 체류. 마띨데 우루띠아(Matilde Urrutia)와 재회. 독일, 중국, 체코, 덴마크, 미국, 소련, 쿠바, 과테말라, 멕시코, 콜롬비아, 아르헨티나에서 시집 출판.

 1950년 멕시코에서 『총가요집』(Canto general) 출판. 라틴아메리카의 자연과 역사, 스페인 식민지배로부터 해방과 자유와 사회정의를 위한 민중의 투쟁을 그린 대 서사시로 네루다의 대표작. 멕시코 벽화가 다비드 시께이로스와 디에고 리베라가 삽화를 그림. 칠레에서도 지하 출판됨. 과테말라를 방문, 정부와 의회의 지원 아래 시낭송회와 강연회를 개최. 이어 프라하와 파리 방문. 10월 파리에서 프랑스 판 『총가요집』 출판을 승인. 로마를 거쳐 뉴델리를 방문하여 네루를 만남. 힌두어와 뱅갈어 등으로 시집 출판. 11월 마띨데 울띠이와 함께 바르사바에서 개최된 제2차 세계 평화 동지대회에 참석. 11월 22일 「깨어나라 나뭇꾼아」(Que despierte el le ador)로 국제평화상 수상. 이 때 피카소도 이 상을 수상했음. 멕시코에서 『총가요집』 보급판 출판. 미국, 소련, 중국, 시리아, 팔레스타인, 폴란드, 체코, 루마니아, 인도, 스웨덴에서 시집 출판.

 1951년 이탈리아 전역을 순회하면서 로마, 밀라노, 제노바 등지에서 낭송회와 강연회 개최. 살바토레 콰지모도(Salvattore Quasimodo) 등을 주축으로 네루다 시세계에 대한 좌담회가 열림. 5월 모스크바 방문.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몽골을 거쳐 북경에 도착. 불가리아, 헝가리, 아일랜드, 베트남. 터키, 일본, 한국에서 시집 출판. 이디쉬어, 히브리어, 아랍어, 우즈베크어, 우크라이나어, 아르메니아어 등으로도 출판.

 1952년 이탈리아에 거주. 『포도와 바람』(Las uvas y el viento) 집필 시작. 『대장의 노래』(Los versos del Capit n)를 익명, 비매품으로 출판. 이 시집은 마띨데 우르띠아에게 바침. 8월 체포영장이 취소됨. 8월 13일 귀국. 국민들은 대대적인 환영행사로 대시인을 맞이함. 부와 명예를 얻은 네루다는 태평양 연안에 위치한 이슬라 네그라(Isla negra. 영화 〈일포스티노〉의 원작 소설 『빠블로 네루다와 우편배달부』의 무대)에 별장을 건축. 12월 국제평화상 심사위원 자격으로 모스크바 방문.

 1953년 소련에서 귀국한 후 4월에는 산티아고에서 라틴아메리카 대륙 문화회의(Congreso Continental de la Cultura)를 개최. 디에고 리베라, 니콜라스 기옌, 조르쥬 아마두 등 쟁쟁한 인사들이 참석함. 산티아고에서 시선집 『모든 사랑』(Todo el amor)와 『정치시』(Poes a Pol tica) 출판.

 1954년 1월 칠레 대학교에서 5회에 걸친 강연회 개최. 7월 『일상적인 송가』(Odas elementales)와 『포도와 바람』 출판. 7월 12일 탄생 50주년 기념행사가 대규모로 열리고 전세계의 문인들과 예술가들이 참여하여 축하함. 칠레대학교에 장서를 기증. 칠레대학교는 네루다 재단을 후원하기로 약속함. 페르낭 레게의 삽화가 든 프랑스판 『총가요집』 출판.

 1955년 델리아 델 까릴(Delia del Carril)과 이혼. 마띨데 우르띠아를 데리고 산띠아고에 새로 성주한 집(저택명 La Chascona)으로 이사. 년 3회 발행되는《칠레 소식》지 창간. 강연문등을 수록한 산문집 『여행』(Viajes) 출판. 소련, 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 여행. 이탈리아, 프랑스, 브라질, 우루과이를 거쳐 아르헨티나 꼬르도바 지방에서 잠시 체류.

 1956년 1월 『신 일상적인 송가』(Nuevas odas elementales) 출판. 2월 귀국. 9월 『인쇄술에 바치는 송가』(Oda a la tipograf a) 출판.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위대한 대양』(El gran oc ano) 출판.

 1957년 1월 『전집』 발간. 4월 1일 아르헨티나로 여행. 4월 11일 아르헨티나 당국은 시인을 체포하여 하루 반나절 동안 감금. 칠레 영사의 항의로 석방. 네루다는 시낭송회를 포기하고 아르헨티나를 출국. 랑군 등 동양을 방문. 칠레 작가협회 회장에 피선. 12월 『송가 3집』(Tercer libro de las odas) 출판.

 1958년 칠레 대통령 선거전에 참여. 8월 『에스뜨라바가리오』(Estravagario) 출판. 이 책에서 전 해 동양을 방문했던 인상이 투영됨.

 1959년 5개월에 걸쳐 베네수엘라 여행. 카라카스 주재 쿠바 대사관에서 피델 까스뜨로(Fidel Castro)를 만남. 11월 송가집 『항해 그리고 귀환』(Navegaciones y regresos) 출판. 12월 마띨데에게 바치는 시집 『사랑의 소네트 100편』(Cien sonetos de amor)를 비매품으로 출판.

 1960년 4월 12일 유럽으로 향하는 선상에서 『무훈 찬가』(Canci n de gesta) 탈고. 소련과 동구권을 거쳐 파리에서 한동안 체류. 피카소는 프랑스어판 시집에 동판화를 그려줌. 이탈리아에서 쿠바행 배에 승선. 아바나에서 쿠바 혁명을 축하하는 시집 『무훈 찬가』 1만 2천부 인쇄.

 1961년 2월 귀국. 7월 『칠레의 돌』(Las piedras de Chile) 출판. 10월 『행사시』(Cantos ceremoniales) 출판. 예일대학교 로망스어 연구소 비상근 회원으로 임명됨. 『스무 편의 사랑의 노래...』 백만부 재판. 미국에서 『네루다 시선집』(Selected Poems of Pablo Neruda) 출판.

 1962년 3월 칠레대학교 문과대학 교수로 임명. 니까노르 빠라가 환영 연설을 함. 이 연설은 『네루다와 빠라의 연설문』(Discursos de Pablo Neruda y Nicanor Parra)으로 출판됨. 4월 출국하여 소련, 불가리아, 이탈리아, 프랑스를 여행. 9월 『충만한 힘』(Plenos poderes) 출판. 여행에서 돌아온 네루다는 발빠라이소(Valpara so) 소재의 저택으로 직행.

 1963년 이탈리아에서 『요약』(Sumario) 출판. 이 책은 나중에 『이슬라 네그라의 추억』에 포함됨. 스웨덴 한림원 회원 룬트크비스트(Arthur Lundkvist) 는 「네루다」라는 긴 논문을 발표. 노벨문학상이 가까워졌음을 예고.

 1964년 칠레 국립도서관 주최로 탄생 60주년 기념행사가 열림. 7월 『이슬라 네그라의 추억』(Memorial de Isla Negra) 5권 발간. 9월 세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 번역 출판. 네루다는 칠레 전역을 다니며 대통령 선거전에 열중함.

 1965년 2월 유럽 여행. 6월 옥스포드대학교는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수여. 파리를 거쳐 헝가리로 여행. 헝가리에서 아스뚜리아스(Miguel Angel Asturias)와 공동으로 『헝가리에서 식사하며』(Comiendo en Hungr a) 집필. 유고슬라비아 블레드에서 열린 펜클럽 회의에 참석. 레닌상 심사위원 자격으로 소련방문, 스페인 시인 라파엘 알베르띠(Rafael Alberti) 수상. 12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거쳐 귀국.

 1966년 6월 펜클럽 특별 초청인사 자격으로 미국 방문. 뉴욕, 워싱턴, 버클리에서 시낭송회 개최. 멕시코와 페루에서도 시낭송회 개최. 페루 문인협회의 추천을 받은 페루 정부는 훈장(Sol del Per )을 수여. 10월 외국에서 식을 올린 마띨데 우르띠아와 결혼이 합법화됨.

 1967년 유럽 여행. 이탈리아에서 비아레죠(Viareggio) 국제문학상 수상. 극형식의 칸타타 『호아낀 무리에따의 치열한 생애』(Fulgor y muerte de Joaquin Murieta) 출판. 이 작품은 이 해 산티아고에서 초연됨.

 1968년 『한낮의 손』(Las manos del d a)출판. 2월 우루과이 방문 강연회 개최. 4월 프랑스 정부는 퀴리(Joliot-Curie) 훈장 수여. 미국 문학예술 아카데미 명예회원으로 임명됨. 베네수엘라 카라카스 대학에서 낭송회 개최. 귀국. 잡지 《에르시야》(Ercilla)에 칼럼 기고.

 1969년 부다페스트와 바르셀로나에서 『헝가리에서 식사하며』 동시 출판. 5개국어로 번역됨. 『세상의 끝』(Fin de mundo) 출판. 5월 칠레 어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임명. 킬레 카톨릭대학은 명예박사학위 수여. 칠레 상원은 훈장(은메달) 수여. 7월 3일 칠레 공산당 대통령 예비후보로 지명됨.

 1970년 민중연합 단일 후보로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박사를 추천하고 대통령 후보 사퇴. 유럽 여행. 소르본느 대학에서 강연회 개최. 『불타는 칼』(La espada encendida)과 『해양 지진』(Maremoto) 그리고 『하늘의 돌』(Las piedras del cielo) 출판.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아예데 대통령은 파리 주재 칠레 대사로 임명. 아옌데 정권은 세계 최초로 선거를 통해 집권한 공산 정부.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 지성인들은 1960년 쿠바 혁명과 더불어 아옌데 정권의 등장에서 서구의 제국주의적 지배와 간섭으로부터 라틴아메리카가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보고 적극적으로 지원함. 한편, 남미의 도미노 현상을 우려한 미국은 경제봉쇄 등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아옌데 정권의 붕괴를 시도함.

 1971년 1월 7일 빠스꾸아 섬(Isla de Pascua) 여행. 칠레 텔레비젼방송국은 도큐멘터리로 촬영. 1월 21일 칠레 상원 프랑스 대사직 승인. 3월 파리로 부임. 10월 21일 노벨문학상 수상자 선정, 12월 13일 노벨문학상 수상. 네루다는 수상 연설에서 1949년 안데스 산맥을 넘어 칠레를 탈출할 때 도와주었던 사람들을 추억하고 기림. 그러나 스톡홀름에서 병이 깊어져 침대에 누운채 귀국.

 1972년 소련 방문. 『무익한 지도』(Geograf a infructuosa) 출판. 10월 유네스코 집행위원으로 선임. 암으로 투병하던 네루다는 두 차례에 걸친 수술을 받고 귀국. 국립경기장에서 대규모 환영행사가 열림.

 1973년 네루다는 이슬라 네그라에서 투병생활. 아예데 대통령이 이슬라 네그라를 방문하려고 준비하던 2월 5일 파리 대사직 사임. 2월 『닉슨 암살 선동과 칠레 혁명 만세』(Incitaci n al nixonicidio y alabanza de la revoluci n chilena) 출판. 9월 11일 피노체트 장군은 미국을 등에 업고 군부 쿠데타를 일으킴. 대통령 관저(일명 모네다 궁)에서 저항하던 아옌데 대통령은 치열한 공방전 끝에 피살됨. 이날 산띠아고는 맑은 날이었으나 어느 라디오 방송은 "산띠아고에 비가 내린다"는 멘트로 쿠데타 사실을 간접적으로 타전했다고 함. 네루다, 9월 23일 산따 마리아 병원에서 영면.

 1974년 『회고록』(Confieso que he vivido)이 사후 출판됨. 『노란 심장』(Coraz n amarrillo), 『질문』(Libros de las preguntas), 『비가』(Eglogas), 『간추린 결점』(Defectos escogidas) 출판. 『스무 편의 사랑의 시...』의 모델이 되었던 알베르띠나 로사 아소까르(Abertina Rosa Az car)와 네루다 사이에 오간 편지가 『빠블로 네루다의 연애편지』(Cartas de amor de Pablo Neruda)라는 제목으로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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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라는 말 속에 숨겨진 무책임성

 

 오늘 저는 교회에서 한 모임을 가졌는데 사람들의 말 속에서 '은혜'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단어를 계속해서 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어찌나 저에게 언어폭력으로 다가오던지요. 사람들은 자신의 지난 일들을 회상하면서 자신이 잘못한 것과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충실하지 못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이렇게 인도하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연신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들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성스러운 언어로 자신들의 무책임성을 폭로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에서 소위 개혁주의 적인 '은혜'는, 카톨릭의 비인간적 폭력성과 비성경적 구원론에 맞서 싸우며 '근원으로 돌아가려는 자세(ad fontes)'라기 보다 차라리 자신의 오류와 불성실함을 합리화시키는 소위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기합리화', '자기 방어'기제의 전형 같습니다. 한국교회 대부분의 성도들은 은혜와 심리적 방어기제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고 자신의 행위를 은혜라고 간증하며 자신의 무책임함과 불성실함을 반성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본회퍼가 당시 개신교를 향해 비판했던 '값싼 은혜'의 모습이 이런 것이  아닐는지요.

 "값싼은혜는 하나님의 산 말씀의 부정이며 하나님 말씀이 사람 되셨다는 것에 대한 부정이다. 값싼은혜는 죄의 의인(義認)이요 죄인의 의인이 아니라 했다."

한국교회 성도들은 본회퍼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죄는 철저하게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지 그것을 은혜라는 거룩한 말로 포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철저히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해주시는 은혜를 사모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은혜가 아닙니까?

 요즘들어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호이징가는 '중세의 가을'에서 중세 시대를 평가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종교적 개념들과 형식들로 포화 상태가 되어 질릴 대로 질려버린 삶 속에서 결정적으로 결핍된 것은 종교적 긴장감이다." 우리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면 마치 중세시대를 보는 것 같습니다. 호이징가의 말처럼 종교적 개념들과 형식들로 가득찼지만 종교적 긴장감은 없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나 손양원 목사님과 같은 분들의 순교자적 자세를 본받자고 입술로는 부르짖지만 그분들의 종교적 개념들과 형식들만 억지로 가지고 왔지 그분들이 추구했던 신앙의 본질인 '순교자적 제자도'는 철저하게 지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삶에 긴장감 없이 종교적인 껍데기로만 사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이제 변해야 합니다. 더이상 값싼 은혜보다 귀중한 은혜를 종교적 개념들과 형식을 추구하기 보다 신앙의 본질을 찾아가는 구도자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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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에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혁명가인 것만으로는, 사회주의의 당원 혹은 공산주의자인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사슬 전체를 장악하고, 다음 고리로의 이행을 확실히 준비하기 위하여 전력을 다해 붙들어야만 하는 사슬의 특별한 고리를 매순간마다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

 

***

 

탁월한 한 명이 평범한 열 명보다 낫다는 것은 어느 경우에도 옳다.

'탁월한 한 명의 혁명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새기고 또 새겨도 일시적 좌절 앞에서는 단지 미래지향적 문구로 떨어뜨려버린다....그제께 읽던 책에 실린, 레닌이 스물네살되던 1894년에 최초로 소책자를 저술했다는 연보의 기록이 그냥 기록같지 않다.

한 사람의 연보가 역사의 혁명적 한시기를 관통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서는 안된다.

그러나 연보가 너무 길어서 놀란 것은 사실이다.  

 

일천한 경험이지만 우리의 고민과 실천의 산물, 사업의 성과와 운동의 과정에서 겪은 모든 시행착오와 시도들을 기록하고 전파하는 것 또한 다만 후대의 몫으로 남겨둬서는 안될 우리의 임무이다. 

역사적 현상 속에 때로는 그 바깥에 존재하면서도 역사가, 운동이 자신을 배반한다고 느꼈던 때가 있노라고, 누군가 그런 말을 해던 것이 기억난다. 그 정도로 나는 열심히 살 수 있을까?

 

현실과 무관한 두가지 바램이 있다.

첫째, 시대를 잘 탔으면 싶고  

둘째, 마음같은 건 없었으면 좋겠다.

 

어쩔때는 나에게 요구되는 것들을 감당하기 너무 벅차서 혹시 나에게 인간이 아닐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심이 들때가 있다.  

머리가 해야 할 것을 마음이 대신하는 경우도 있다.

 

문득 '혁명적 감수성'에 대해, 그것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진다. 그걸 삶 속에서 체현해내는 사람이 진짜 탁월한 혁명가다.  

 

 

 

이순화 화백의 그림.....내 두눈이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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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쏟아지는 집회장에서

고 김태환 열사의 영정을 들고 고개숙인 젊은 노동자와

우비와 밀집모자에 떨어지는 빗물은 아랑곳 하지않고 시선을 멀리 던지는 나이든 노동자

"반드시 갚아주자"    

-7.3 국회 앞 특수고용노동자 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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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를 흘려 보내며

1/  그저께는 '차라리 솔직하게 실력이 없다고 하지'라는 말에 화가 솟구쳐서 또 목소리가 높아질뻔 했다. 언제부터 실력이 있고없음이 첨예한 정치적 차이를 간단하게 뒤엎는 논리가 되어버렸는가? 동일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왜 그런식으로 논쟁의 폭을 좁혀놓는 건지, 왜 다양한 모색의 길과 가능성을 닫고 '구체적인 대안'에만 집착하는 건지, 의도의 진정성을 먼저 발견하려 하지 않고 왜 혐의부터 두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왜?라는 물음은 던지기 쉽고 지적도 불만을 내뱉는 것도 쉽다.

그러나 나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다.  

  

2/ 어제 사람들과 뒷담화를 나누면서... 활동가들 사이에 존재하는 사소한 감정대립과 정치적 불신, 이런 모든 것들이 현재 운동의 난맥과 기묘하게 얽혀져 있는 것 같아 웃음이 픽픽 나왔다.

       

3/ 자극과 회초리가 없으면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 금새 잊어버린다. 머릿속도 일도 엉망인채로. 그리고 사소한 계기를 통해 원위치를 찾는다. 

꽃포장지에 쌓여있는 레닌의 추억을 다시 읽어야겠다. 빈약한 이론에 감성마저 잃는 것은 정말 끔찍하지 않은가

 

4/ 몇차례 대면한 사람의 인상에서 오는 부담감과 기대감 반반.

알아 갈수록 신선한 사람이 더러 있다. 나 스스로 또한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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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해문의 탄생

진보적 사회를 향한 금지된 열정

- 월간 『노동해방문학』의 탄생

조 정 환

월간 『노동해방문학』은 지금부터 13년 전인 1989년 3월, 지금은 호프집, 분식집, 숯불갈비집으로 빼곡히 들어찬 연세대 앞 먹자골목, 옛 <오늘의 책> 서점 바로 뒷골목에 있는 한 상가건물 5층에서 태어났다. 나는 창간호가 나오도록 되어 있는 3월 하순으로부터 약 보름 전인 3월 8일에 아이를 가진 아내를 혼자 두고 집에서 나와 홍대앞의 한 하숙집에 짐을 풀었다. '노동해방'이라는 대중투쟁의 언어를 그대로 사용했지만 그것에 우리는 '사회주의'라는 이념적 지향성을 부여했고 그것이 국가보안법과 갈등하리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간으로 선임된 나의 자진(自進) 지하생활은 도피가 아니라 정보경찰에 의한 검거를 피하면서 월간 『노동해방문학』을 계속 발간하기 위한 '투쟁의 방식'으로 선택된 것이었다. 하숙집 주인에게는 곧 고시에 응시할 사람인데 집에서 공부가 방해되어 몇 개월만 조용히 공부하기 위해 집을 나왔다고 말해 두었다.

'가라 자본가 세상, 쟁취하자 노동해방!'이라는 구호가 박힌 창간 예고 광고가 <한겨레신문>에 5단 통광고로 실리고 나서 마침내 창간호가 나왔을 때 독자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상승하는 투쟁과 맞물린 창간호는 약 2만부를 찍어 거의 전 권이 유무가로 소화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것은 '우리'의 기대와 상상을 훨씬 넘어서는 반응이었다. 격려의 전화가 빗발쳤고 어떤 노동자들은 집회에 참석한 자신의 사진이 책에 나왔다고 좋아했다. 창간호가 나올 무렵 신촌 노동문학사 사무실에는 30∼40여명의 시인, 소설가, 평론가, 대학생문예활동가, 노동운동가 등에 영업사원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득실대고 있었다. 나 자신도 이 잡지가 어디로 나아갈지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고 역동적이며 예측불가능한 구성이었다. 대체 이 복잡한 구성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색깔이 선명한 하나의 월간지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일까?



김사인 형이 나에게 박노해 시인을 만나볼 의향이 없느냐고 물었던 것은 계간 『실천문학』 편집위원회가 끝난 뒤인 1988년 8월초 어느 월요일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1987년 노동자투쟁의 영향을 받아 1988년 1월 실천문학사에서 창간한 부정기간행물 『노동문학』은 당시 서노련 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박노해 시인을 제 1회 노동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하지만 1988년 중반에 『노동문학』의 월간지로의 재창간이 논의되어 갈 때 실천문학사는 그것을 평범한 노동자를 위한 생활문예지로 만들어 나갈 계획을 세워 가고 있었다. 당시 운동권의 용어를 빌면 NL의 대중노선이 이 재창간 작업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던 셈이다. 그것은 나의 기대와 배치되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노동자계급의 '당파성'의 확보가 위대한 문학 창조의 전제조건이라는 민주주의민족문학론을 제창한 직후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박노해의 시를 민주주의민족문학론의 한 전형으로 제시하고 있던 터였기 때문에 박노해 시인과의 만남은 극히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1988년 8월 18일로 기억되는 날 밤에 명동의 어느 다방에서 만난 박노해 시인은 투박한 노동자적 전투성을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예상과는 달리 매우 세련되고 지적이었다. 그는 자신을 혁명적 사회주의자라고 소개하면서 사회주의 정파운동의 현황과 정파들의 차이에 대해 상세하게 이야기했다. 노동자해방투쟁동맹의 기관지 『선봉』을 지지해 왔던 내가 『선봉』 편집부의 일원으로서 그 기관지의 많은 기사를 써왔다고 자신을 소개한 박노해와 견해를 같이 하게 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실천문학』이 준비하고 있는 노동자 대중 생활문예지와는 다른 노동문학지가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 동의가 이루어진 김사인, 박노해 그리고 나, 세 사람은 당파적 노동문학지 발간을 위한 준비모임을 만들었고 매주 한번씩 화곡동에 있는 나의 전세방에서 아내가 없는 시간에 모임을 가졌다. 이 일에 집중하기 위해 나는 『실천문학』 편집위원직을 사퇴했고 출소한 이태복씨의 제안으로 이진경, 문승현과 함께 시작했던 노동문학 무크지 편집준비모임을 사퇴했다. 나는 레닌의 당문학 이념을 남한 문예운동의 현재적 맥락 속에서 재해석하면서 노동계급 해방운동의 일환으로서 문예운동이 취해야 할 이념, 창작방법론, 문예조직론 등에 관한 초안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 이론의 수립에는 박노해와 혁명적 사회주의자 조직의 실천적 전망이 큰 도움이 되었다. 당 건설 운동의 일환으로서의 문예운동이라는 생각이 노동문학지 창간의 지향으로 좀더 선명해지기 시작한 10월 말 무렵부터 김사인 형이 모임에 불참하는 횟수가 늘어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것은 문학을 정치에 종속시키는 당문학론의 경향성에 대한 '암묵적 거부'였던 것 같다.

창간이 다가오면서 우리는 잡지의 성격을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 '노동문학' 대신 '노동해방문학'을 제호로 삼기로 하고 노동해방문학운동의 조직화를 맡아줄 인물로 문학예술연구회의 김형철을, 그리고 노동해방예술의 관점에서 잡지 제작의 미술적 필요를 담당해줄 인물로 민중문화운동연합의 신은주를 영입했다. 1988년 11월 경 노동해방문예운동의 취지문인 「노동해방문학론을 제창한다」(이것은 월간 『노동해방문학』 창간호에 「민주주의민족문학론에 대한 자기비판과 <노동해방문학론>의 제창」이라는 제목으로 수정되어 수록되었다)가 완성된 후 각자는 자신이 소속된 단체와 주변 관계에서 이 취지에 동의하고 참여할 사람들을 물색하러 나섰다.

이 활동에 결합하려는 의사를 가진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애초에 무크지를 내려던 우리의 소극적 계획은 계간지로 수정되고 최종적으로는 월간지로 변경되었다. 이 무렵 월간 『노동해방문학』 창간을 위한 준비모임은 이원화되었다. 박노해와 나는 월간 『노동해방문학』의 창간기획을 위한 정기모임을 가졌고 나는 여기에서의 결정을 바탕으로 월간 『노동해방문학』 창간준비위원회(약칭 <창준위>)를 만들었다. 주 1회 모이는 <창준위>는 추가 인원 확보 외에 수천만원에서 1억원에 달할 필요경비를 조달하기 위한 활동을 벌였다.

1988년 12월 신촌 사무실에서 약 20여명이 모인 가운데 노동문학사 창립대회가 열렸다. 시인 오철수는 출판사 입구에서 곰곰이 생각하다가 좀더 지켜 본 후 참여를 결정하겠다며 돌아갔다. 이 대회에서 김사인을 발행인으로 선출하고 백무산, 정인화, 정남영, 임규찬, 임홍배, 조정환 등을 포함한 편집위원회가 꾸려졌으며 편집국, 미술부, 사무국, 출판국, 영업국으로 된 부서체계가 짜여졌다. 창립대회 이후 사원들의 노력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결합했다.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진보적 시인들(백무산, 정인화, 강형철, 김명환, 이재무, 조태진, 이원규, 표광소, 이강혁 등)과 작가들(김하경, 이남희, 김한수, 최인석, 정지아 등)이, 문학예술연구회에서 마르크스주의 미학자, 평론가, 연구자들(정남영, 임홍배, 이강은, 임규찬, 서경석, 손지태, 정나원, 임수근 등)이, 대학의 진보적 문예활동가들(장민성, 오은주, 김민수, 윤동수 등)이, 민문련과 민미협 혹은 지역예술조직에서 진보적 예술활동가들(김신명, 조미아, 정진영, 이성욱, 이태직, 양동혁 등)이 결합되었다. 창간예고 홍보물과 신문에 실린 창간예고 광고를 보고 결합하러 온 활동가들 혹은 <혁명적 사회주의 그룹>, <노동계급> 그룹 혹은 다른 정파그룹에서 파견된 사람들도 있었다.

영문학을 공부해 온 정나원은 현대중공업 투쟁을 취재하기 위해 울산으로 내려갔고 문학평론가 손지태는 가석방된 김남주 시인을 만나러 나섰으며 꽹과리를 치던 이재륜은 배일도 노조위원장의 공판을 취재하러 법정으로 갔고 백무산, 정인화, 김명환, 조태진, 이재무는 열정 넘치는 시들을 썼다. 당국의 추적을 받고 있던 박노해의 시와 선동문은 유입경로를 숨기기 위해 사원들조차 알 수 없는 인편으로 투고를 했다.

우리는 내용에서 뿐만 아니라 디자인까지 노동해방사상을 관철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따라 선진 노동자의 '전형'을 표지에 담으려 노력했다. 김신명이 현장 사진을 참조하여 그린 표지그림을 놓고 이것이 선진 노동자의 전형에 얼마나 가까운가를 둘러싼 토론이 벌어졌다. 조미아가 여러개의 안으로 제출하여 벽에 걸어 놓은 로고들을 대상으로 더 역동적이고 더 가독성 있는 로고를 선택하기 위한 회의와 투표가 진행되었다. '문학'이라는 글자는 '노동해방'이라는 글자보다 작게 그려졌는데 이것이 당시 우리의 강한 이념 지향성을 말해준다. 시인 정우영은 시쓰기를 일시 중단한 채 원고 수정과 본문 레이아웃, 그리고 대지작업에 여러 밤을 새웠다. 고등학교 3학년을 마치자마자 경리사원으로 입사한 최미정도 선배들이 어떤 보상도 받지 않고 밤낮 없이 일하는데 자신만 월급을 받을 수는 없다며 월급 수령을 거부했다.

사원들이 창간을 어떤 느낌으로 맞이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이미 나는 노동문학사 주변을 가서는 안되는 처지에 놓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누군가로부터 전달받은 창간호를 전달하기 위해 대학로에서 박노해 시인을 만났을 때 그가 몇 번이나 책에 입을 맞추는 모습이었다. 이것이 김사인 발행인의 구속을 시작으로 거의 모든 사원의 구속 혹은 수배, 정간과 복간 등으로 통권 10권을 발행하면서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킨 월간 『노동해방문학』 2년의 시작이었다. 나는 이 사건으로 인해 박노해 시인이 7년이 훨씬 넘는 수감생활에서 가석방으로 풀려난 다음해인 1999년 12월 말, 정확히 11년 8개월 만에 비로소 수배에서 풀린 걸음으로 거리를 거닐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월간 『노동해방문학』에는 우리의 열정과 기쁨, 고통과 상처가 어려 있다. 그것은 어떤 의미를 지녔던 것일까? 그것은 이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냉정하게 묻고 답해야할 역사적 문제로 던져져 있다.

* 조정환 : 문학평론가, 도서출판 갈무리 상임편집인. 1956년생. 저서 『21세기 스파르타쿠스』 『지구 제국』 『노동해방문학의 논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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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일

"사람에게 욕망을 없애려는 것은 바다에서 파도를 없애려는 것처럼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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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거도 편지

 

한 바다가 있었네

햇살은 한없이 맑고 투명하여

천길 바다의 속살을 드리우고

 

그 바다 한가운데

삶이 그리운 사람들 모여 살았네

더러는 후박나무 숲그늘 새

순금빛 새 울음 소리를 엮기도 하고

더러는 먼 바다에 나가

멸치잡이 노래로 한세상 시름을 달래기도 하다가

밤이 되면 사랑하는 사람들 한 몸 되어

눈부신 바다의 아이를 낳았네

 

수평선 멀리 반짝인다는

네온사인 불빛 같은 건 몰라

누가 국회의원이 되고

누가 골프장의 주인이 되고

누가 벤츠 자동차를 타고

그런 신기루 같은 이야기는 정녕 몰라

 

지아비는 지어미의

물질 휘파람 소리에 가슴이 더워지고

 

지어미는 지아비의

고기 그물 끌어올리는 튼튼한 근육을

일곱물 달빛 하나하나에

새길 수 있다네

 

길 떠난 세상의 새들이

한번은 머물러 새끼를 치고 싶은 곳

자유보다 소중한 사랑을 꿈꾸는 곳

그곳에서 사람들이 살아간다네

수수천 년 옛이야기처럼 철썩철썩 살아간다네.

 

-곽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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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정아 作

그녀는 이제 겨우 서른의 반을 넘겼다.

서울 아니면 부산 그 어디에서 마주쳐도 생경할 모습. 

나리와 나의 중간쯤에 서있는 사람이랄까...

 

 

 

길을 잘못 들었다
녹기 시작한 눈이 등산길을 온통 진흙밭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다시 돌아 가는 것은 계속 이대로 가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세상에는
다시 힘들게 되돌아 가는 사람들과
그냥 계속 진흙길을 가는 사람들
그 둘이 있다

 



 

복귀

 

 


 

그녀에게 왜 삶은 고통이었을까

 

 


 

아침버스를 기다리는 공단의 여성들

 

학생들은 강단이 아니라 강단 밖에서 리얼리즘에 몰두했다

대학 갓 졸업 후 나름의 리얼리즘에 대한 고민의 와중에 만들어진 그림
이 그림을 위해 새벽의 구로공단을 가 보기도 했다

 



 

사계

 

마음이 많이 쓸쓸하던 시절에 그린 그림

 

 


 

먹다 남긴 짜장면은 부르튼 채
화실 안 모든 풍경은 정지되어 있다
하지만 창밖은 빠른 속도로 흘러가고 있다
땅으로 곤두박칠 치듯
하강하는 검은 새와
이미 어두워지고 있는 하늘
그녀는 그 모든 흐름을 거부한 채
내심 불안해지는 마음을
감추려한다

그리고 꿈을 꾸겠지

불안한 공기를 감지하는
예리한 촉수를 가진
그리고 너무 익어버린 참외처럼 농하지 않은
그래서 언제나 낯설은...

어떤 시간이 필요할 것이고
비어있던 캔바스는 메워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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