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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 김경주

도시인 / 박종윤


리뷰,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 김경주


외로운 날엔 살을 만진다.


내 몸의 내륙을 다 돌아다녀 본 음악이 피부 속에 아직 살고 있는지 궁금한 것이다.


열두 살이 되는 밤부터 라디오 속에 푸른 모닥불을 피운다 아주 사소한 바람에도 음악들은 꺼질 듯 꺼질 듯 흔들리지만 눅눅한 불빛을 흘리고 있는 낮은 스탠드 아래서 나는 지금 지구의 반대편으로 날아가고 있는 메아리 하나를 생각한다.

나의 가장 반대편에서 날아오고 있는 영혼이라는 엽서 한 장을 기다린다.


오늘 밤 불가능한 감수성에 대해서 말한 어느 예술가의 말을 떠올리며 스무 마리의 담배를 사오는 골목에서 나는 이 골목을 서성거리곤 했을 붓다의 찬 눈을 생각했는지 모른다 고향을 기억해낼 수 없어 벽에 기대 떨곤 했을, 붓다의 속눈썹 하나가 어딘가에 떨어져 있을 것 같다는 생각만으로 나는 겨우 음악이 된다.


나는 붓다의 수행 중 방랑을 가장 사랑했다 방랑이란 그런 것이다 쭈그려 앉아서 한 생을 떠는 것 사랑으로 가슴으로 무너지는 날에도 나는 깨어서 골방 속에 떨곤 했다 이런 생각을 할 때 내 두 눈은 강물 냄새가 난다.


워크맨은 귓속에 몇 천 년의 갠지스를 감고 돌리고 창틈으로 죽은 자들이 강물 속에서 꾸고 있는 꿈 냄새가 올라온다 혹은 그들이 살아서 미처 꾸지 못한 꿈 냄새가 도시의 창문마다 흘러내리고 있다 그런데 여관의 말뚝에 매인 산양은 왜 밤새 우는 것일까.


외로움이라는 인간의 표정 하나를 배우기 위해 산양은 그토록 많은 별자리를 기억하고 있는지 모른다 바바게스트 하우스 창턱에 걸터앉은 젊은 붓다가 비린 손가락을 물고 검은 물 안을 내려다보는 밤, 내 몸의 이역들은 울음들이었다고 쓰고 싶어지는 생이 있다 눈물은 눈 속에서 가늘게 떨고 있는 한 점 열이었다.


                                              - 김경주「내 워크맨 속 갠지스」전문


여기서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 하나, 2006년 한국에서 개봉한 영화 중 최고의 영화는?


사람에 따라서는 열이 받을 정도로 쓸 데 없는 질문이라는 것은 나도 알고있다. 어떠한 예술품을 이야기 할 때 어느 것의 미학적 가치가 높은가, 라는 답변에는 그나마 대답을 줄 수 잇겠지만 그래서 무엇이 가장 나은가라는 질문에는 여전히 대답하기 힘들다. 그 것은 주관이기 때문이다. 미학은 객관적일 필요성이 있지만 주관의 영역을 배제하는 것은 관념에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영화는 순수한 예술품으로만 기능하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 누벨바그의 선두에 섰던 장 뤽 고다르는 '영화는 자본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영화를 찍는 데는 돈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에.‘라 자조했다 한다.(물론 현재는 technology의 발전으로 자본의 제약에서 많이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기술의 진보란 얼마나 이중적인가!) 즉, 영화는 그 태생부터 상품으로서 기능함을 뜻한다.


여기서 다시 한번 물어보자. 2006년 한국에서 개봉한 영화 중 최고의 영화는? 답은 괴물.


괴물에 대해서 이것저것 이야기하는 것은 평론가들의 몫일 것이다. 나는 그저 괴물의 거친 장면들 중 하나를 길어올리고자 한다. 강두 역을 맡았던 송강호가 말한다. “근데- 사망- 사망잔데요- 사망은 안했어요-”


이는 영화 속 불편한 진실로서 기능한다. 조직과 시스템화에 대한 불신을 기저에 깔고 있는 괴물 속에서 한 거대한 조직 속에서 그런 진실은 마치 ‘없는 일’처럼 위장된다. 즉, 실재에 대하여 부정한다. 존재하는 것에 대한 부정, 그러한 일들은 작금의 시대에서는 이미 흔하게 반복되는 일이다.


시 동인 ‘불편’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경주의 시는 그렇기에 ‘불편’하다. 시의 모티브는 현실에 강하게 기반하고 있지만 그 수사에 있어서는 대중이 없다. 어디로 갈지 모른다, 는 이유로 우리는 짐짓 초현실주의의 세례를 떠올릴 수도 있지만, 그렇기에 젊은 시인의 시는 또한 지극히 현실적이다.


사족을 하나 띄워보자. 같은 시 동인 불편에서 활동하는 김민정 시인의 글들은 원초적인 폭력성을 띄고 있다. 김민정 시인의 첫 시집 ‘날으는 고슴도치 아저씨’에 수록되어 있는 짧은 시 ‘내가 날 잘라 굽고 있는 밤 풍경’ 부분을 본다.


소금을 듬뿍 두른 변기솔로 내가 날 구석구석 닦는다 한 입에 한 배꼽에 한 음핵에,  두 눈에 두 귀에 두 콧구멍에 두 젖꼭지에 두 난소에, 꽃삽을 쑤셔박아 내가 날 데코레이션한다 늑막이 터지도록 허리를 졸라매고 고기걸이용 쇠걸이에 목을 찍어 내가 날 옷걸이에 건다 터진 수도관에 입이 물린 고무장갑처럼 살이 불 때까지 내가 날 꼬집어 뜯는다 하키스틱만 한 낫을 갈아 뒤통수부터 엉덩이까지 내가 날 자로 댄 일자로 찍어내린다 폐 한가운데에 식칼을 대고 살 껍질을 훌러덩 뒤집어 내가 날 까버린다 서둘러 군불을 지피고 그 위에 석쇠를 달궈 내가 날 통째로 얹는다 지글지글 내가 날 굽는 냄새가 피어오르자 해골들과 부위 모를 뼈다귀들이 앞다투어 모여든다 석쇠 위에 고여 있던 핏물이 선지로 돌돌 말아 빚은 완자처럼 지져져 더욱 쫀쫀해진 내가 날 엿가위로 한 입 두 입 잘라 굽는다 따각따각 아귀 터지게 턱 벌리는 해골들에게 내가 날 잘라 구운 살점을 바싹 태워 먹여준다 오일 바른 상아 같이 매끈매끈한 뼈다귀들이 몸에 내가 날 잘라 구운 살점을 파스처럼 붙여준다 불가에 모여 앉은 해골들과 뼈다귀들이 내가 날 잘라 구운 살점을 먹고 입고 점점 나로 살쪄간다 일곱의, 스물의, 스물일곱의 제각각의 내가 날 쳐다보며 나야 나야 손을 흔든다 내가 날 잘라 구운 살점들을 다 트림하고 나로 자란 그대들이 방방마다 걸린 액자 속으로 걸어들어가 찰칵찰칵 기념촬영을 한다 내가 날 잘라 구워 먹고 난 달궈진 석쇠 위에는 열세 개의 꽃삽만이 꽃게처럼 익어가고 있다


                                   - 김민정「내가 날 잘라 굽고 있는 밤 풍경」부분

 

그로테스크한 이미지. 극단적인 폭력과 허무의 미학으로 점철된 김민정 시인의 시는 주로 반여성적인 기호를 적극적으로 사용함으로서 남성중심적인 사회에 일침을 놓는, 그런 사회의 실체를 해부하고 접근한다. 말하자면 불편한 진실을 공격적인 어휘로 까발림으로서 그 안으로 과감히 진입을 시도하는 것이다. 물론 그 방법론은 마치 악몽같이 묘사된다. 20세기 초 초기의 초현실주의에서는 정신병자가 거침없이 내뱉는 일반적이지 않은 서사를 가진 언어의 조합을 진지하게 연구하였는데, 어떠한 이성이 제거된 병자만이 실재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믿었기 때문이다. 김민정의 시는 그러한 정신병, 혹은 편집증 환자의 것처럼 재현되기도 한다.


역겨운 사회에서 살아가는 자신에 대한 혐오로 가득찬 김민정 시인과는 달리 같은 ‘불편’ 동인에서 활동하는 김경주 시인은 그 내면으로 침잠한다. 또한 어법 역시 지극히 현실에 기반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소재들은 밖에서 찾아지지만 그 주체는 종국에는 자신에게 돌아온다. 이를테면 서정시의 다른 한 단면이라 볼 수 있다.


시를 위한 여러 가지 장치들을 제거해보면, 뜻밖에 김경주 시인의 끝은 존재론적인 외로움에 닿아있다. 마치 유화로 그린 그림을 그린듯, 섬세하게 덧칠된 시어들은 그 본연의 결핍을 간절한 색을 입힌다. 근대화 된 사회, 인간의 작용이 없어도 자본과 자본만의 교류로서 존재할 수 있는 현실에서 인간의 소외, 그리고 그러한 결핍을 채우기 위한 욕망은 초월한 세계로의 몽상으로 이끈다. 여기저기 붕붕 날아다니는 이미지, 시인은 그 이미지를 담기만 하면 된다. 김경주 시인의 시 모음을 읽으면서, 문득 우리가 어떠한 미학적 가치를 지닌 예술품을 만드는 근원적인 이유에 대하여 생각했다. 김경주 시인이 그 중에서도 특별한 것은 기호화된 현실과 실재의 경계에서, 어느 곳으로도 쉽사리 미끄러지지 않고 중심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에 사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 관조하지 않으며 잠식당하지도 않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도전이다.


속칭 ‘미래파’라 불리며 문단에 등장하고 있는 젊은 시인들의 약진은 놀랍다.(물론 김민정, 김경주 등 그 흐름의 주축에 있는 시인들은 평론가 들의 이러한 장르화에 대하여 완강히 부정한다.) 시인 권혁웅이 시집 뒷 표지에 실었던 ‘이 시집은 한국어로 씌어진 가장 중요한 시집 가운데 한 권이 될 것이다.’이란 문장이 정말로 실현될까는 답을 아직은 할 수 없다. 그 것은 시집을 몇 번 더 읽어보고, 그리고 또 시간이 좀 더 지나가면 판단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김경주 등의 시인이 현대 시문학 계에서 이끌어가고 있는 그러한 흐름이 훗날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문학을 더 풍요롭게 해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해보인다. 아니, 현재로서도 그렇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뜬금없는 질문 하나. 진짜로 2006년 한국에서 개봉한 영화 중 최고의 영화는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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