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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에 맞서 싸웠던 여성들 / 투쟁하는 여성들이 말한다

다함께 50 호

억압에 맞서 싸웠던 여성들 / 투쟁하는 여성들이 말한다  

http://www.alltogether.or.kr/

 

억압에 맞서 싸웠던 여성들 - 다함께

 

3월 8일은 국제 여성의 날이다. 이 날을 경축하며, 급진적 운동을 이끌었거나 여성해방과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해 온 여성들의 말을 소개한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1759-1797)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불만의 먹이가 되어 인생을 허비하고 있는가. 그들은 의사가 되거나, 농장을 경영하거나, 상점을 운영하거나, 독자적인 사업을 이용해 독립할 수도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연약한 감수성에 짓눌린 채 풀이 죽어 있다. 한때 그들의 아름다움을 눈부시게 만들었던 바로 그 감수성이 이제는 그들의 아름다움을 좀먹고 있는 것이다.

여성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적인 존재로 만들어졌고 여성이 얻는 모든 힘은 그들의 매력과 연약함에서 생긴다는 지배적인 견해 때문에 여성들은 한없이 초라해지고 온갖 종류의 근심 걱정과 슬픔에 빠진다. 그런 것들을 추적하다 보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우리 여성들은 도대체 왜 창조됐을까? 누군가는 순결한 상태로 남아 있기 위해서라고 한다. 즉, 여성들은 늘 어린아이와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태어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울스턴크래프트의 유명한 저서 ≪여성의 권리 옹호≫에서. 최초의 페미니스트 중 한 사람인 울스턴크래프트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보며 깊은 영감을 얻었다.
 
소저너 트루스 (1797-1883)

“남자들은 여자들이 마차를 탈 때 도와 줘야 하고, 도랑을 건널 때 부축해 줘야 하며, 어디서나 제일 좋은 자리를 여자들에게 내줘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마차를 타거나 진흙 웅덩이를 건널 때 나를 도와 주거나 나에게 제일 좋은 자리를 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여자가 아닌가? 나를 보라! 내 팔을 보라! 나는 밭을 갈고, 씨 뿌리고, 수확한 것을 곳간에 채웠고, 어떤 남자도 내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었다! 그러면 나는 여자가 아닌가? 나는 남자만큼 일할 수 있고 (먹을 것을 얻을 수 있을 때는) 남자만큼 먹을 수 있고 남자만큼 채찍질도 견딜 수 있었다! 그러면 나는 여자가 아닌가? 나는 열세 명의 아이들을 낳았는데, 거의 다 노예로 팔려 갔다. 내가 어머니로서 슬피 울부짖을 때, 예수님을 빼고는 아무도 내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 그러면 나는 여자가 아닌가?”

 

노예 출신의 소저너 트루쓰는 여성을 대하는 사회의 위선과 이중 잣대를 비판했다.

 

엘리자베스 드미트리에프 (1851-1910)

“파리가 봉쇄됐다. 파리가 포격당하고 있다. 대포의 굉음이 들리는가, 무장하라는 신성한 호소가 울려 퍼지는 것이 들리는가! 파리 시민들이여, 프랑스 대혁명기 여성의 후예들이여, 민중과 정의의 이름으로 베르사유로 행진했고, 국왕 루이를 포로로 잡았던 여성들이여 ― 프랑스 민중의 어머니이며 아내이자 누이인 우리들이 가난과 무지가 우리 아이들을 적으로 삼도록 놔둬야 하는가? 압제자들의 변덕 때문에 우리 아이들이 서로 죽이도록 놔둬야 하는가? 시민들이여, 결투가 시작됐다. 우리는 승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뿐이다.”

 

드미트리에프는 1871년 파리에서 이 선언을 발표했다. 노동자들은 파리를 장악하고 파리 코뮌을 건설했다. 그녀는 파리의 여성들을 조직하는 데서 핵심적인 구실을 했다. 그들은 바리케이드에서 코뮌을 방어하며 모든 구습에 도전했다.

 

클라라 체트킨 (1857-1933)

“우리가 전쟁을 계속하는 것은 그것이 남성과 여성 사이의 투쟁이 아니라, 유산 계급들의 정치 권력에 대항하는 전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온 힘을 다해 투쟁을 계속할 것이다.

그 투쟁의 목표는 언젠가는 프롤레타리아트 전체가 남녀 구분 없이 자본주의 사회 질서에 이렇게 외치며 도전하는 것이다. ‘당신들은 우리에게 의지하고 있다, 당신들은 우리를 억압하고 있다, 그리고 당신들이 세운 건물이 어떻게 무너져 내리는지 보라.’”

 

체트킨은 독일의 지도적 사회주의자였다. 그녀는 국제 여성의 날을 제정하자는 호소를 이끌었다.

 

엘리자베스 걸리 플린 (1890-1961)

“‘응접실의 여왕’은 ‘부엌의 하녀’와 어떤 공통점도 없다. 백화점 소유주의 아내는, 주당 5달러를 받는 점원에게 유일하게 열려 있는 출구가 성매매라는 것을 깨달은 17살 소녀에게 자매 같은 관심을 전혀 보여 주지 않는다.

남성들의 형제애와 마찬가지로, 여성들의 자매애도 노동자들에게는 공허한 속임수일 뿐이다. 그 모든 잘난 체하는 위선과 역겨운 감상주의 이면에는 계급 전쟁의 사악한 모습이 숨어 있다.”

 

플린은 전통을 깨고 남성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 모두를 조직한 전투적 노조인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의 지도적 조직자였다. 매카시의 마녀사냥이 절정에 달했던 1951년, 그녀는 2년 동안 투옥됐다.

 

실비아 팽커스트 (1882-1960)

“내가 이스트 엔드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들은 쇠약해진 아이들을 데리고 내게 다가왔다. 나는 환자의 눈에서 굶주림을 봤다. 그 때 나는 다시는 이전의 내 직업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여성 참정권 활동을 한 죄로 몸서리칠 만큼 야만적인 투옥과 강제 급식을 당하는 것을 여러 차례 목도해 왔다. 나 또한 투쟁을 벌여 왔고, 내 수명은 그 때문에 단축될 것이다. 

당신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굶주리고 있는데 당신 같은 사람들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잘못됐다.

자본주의는 잘못된 사회 체제이고 없어져야 한다. 나는 자본주의를 없애는 데 내 삶을 바칠 것이다.”

 

1920년 선동죄로 기소돼 법정에서 한 연설. 예술가이자 전투적 여성 참정권론자였던 팽커스트는 런던의 빈민가 이스트 엔드에서 여성들을 조직했다. 러시아 혁명에 고무받은 그녀는 가족[어머니를 포함해 팽커스트 집안의 여성들은 영국의 유명한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들이다 ― 편집자]과 결별하고 자신이 “볼셰비키임이 자랑스럽다”고 선언했다.   

 

로자 룩셈부르크 (1871-1919)

“배반, 부도덕, 피바다, 탐욕 ―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모습이다. 

문화, 철학, 윤리, 질서, 평화, 그리고 법치의 가식을 쓴 깨끗함과 단정함과 도덕이 아니라 게걸스러운 야수, 무질서한 악마의 연회, 문화와 인간성을 위협하는 역병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것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독일·프랑스·러시아·영국의 노동자들이 취중 몽상에서 깨어나 형제애 속에서 서로의 손을 굳게 잡고, 전쟁광들의 괴성과 자본주의 하이에나들의 소란스런 울음을 노동자들의 우렁찬 함성으로 압도하기 전까지 광기는 멈추지 않을 것이고 유혈낭자한 지옥의 악몽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룩셈부르크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혁명가 중 한 사람이고, 독일 사회주의 운동의 좌파를 이끌었다. 그녀는 이 글을 제1차세계대전 동안에 썼다.

 

아룬다티 로이 (1961- )

“우리가 모두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에 정말로 반대한다면, 그렇다면 우리의 시선을 이라크로 돌립시다. 우리는 점령에 반대하는 세계적 저항이 돼야 합니다. 우리의 저항은 미국의 이라크 점령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은 제국이 그 목표를 달성하는 것을 실제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행동을 뜻합니다. 그것은 병사들이 전투를 거부해야 한다는 것, 예비군들이 복무를 거부해야 한다는 것, 노동자들이 배와 비행기에 무기 싣기를 거부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지금 전쟁중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아룬다티 로이는 [영국 최고의 문학상인 부커상] 수상 경력이 있는 인도 소설가이며 자본주의와 전쟁에 반대하는 전 세계 운동의 지도적 인물이다. 이 연설은 2004년 1월 세계사회포럼에서 한 것이다.

 

투쟁하는 여성들이 말한다  - 다함께

 

● 박덕준  (전교조 여성위원장)

 

대부분의 여성 교사 노동자들은 맞벌이 부부인 경우가 많습니다. 직장인 학교도 다녀야 하지만 가정에서 살림도 해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어요.
전교조 조합원 가운데 약 60퍼센트가 여성(전체 교사들 가운데 여성 비율은 훨씬 높아요)이지만, 전교조 간부 중 여성 비율은 훨씬 떨어져요. 이것은 여성의 능력이 부족해서 생기는 현상이 아니에요.
예를 들면, 교장이나 교감은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근무평점에서 남성에 비해 여성을 낮게 평가해요. 여성들이 집안일 등을 이유로 ‘칼퇴근’하는 것이 나쁘게 평가받는 이유가 되곤 하죠.
또 각 학교에 시간강사, 기간제 교사 같은 비정규직 교사 노동자들이 있고, 영양사, 행정실 회계보조사, 조리사, 전산보조 직원 등과 같은 분들이 학교 비정규직노동조합을 결성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비정규직 교사와 학교 비정규직노조의 구성원들도 대체로 여성이 훨씬 많아요.
따라서 대학의 경우 학교 내에, 중고등학교 내에서는 지역 내에 탁아방을 설치해 줄 것을 교육부에 요구하고 있어요. 여성의 권리를 위한 이런 요구들을 “역차별”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것은 역차별이 아니라 그 동안 여성들이 얼마나 억압적이고 열악한 현실에서 일해 왔는지를 반증해 주는 것일 뿐입니다.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여성 억압은 여전히 존재하므로, 오늘날 국제 여성의 날을 기념하는 것은 당연히 의미가 있어요. 남성을 이기고 억누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엄연히 존재하는 여성에 대한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서죠. 평등한 세상으로 가는 길에 여성들도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해야 합니다.

 

● 김경숙 (전국학습지산업노동조합 대교지부 서울지회 준비팀장 )

 

저는 학습지 교사한 지 굉장히 오래됐어요. 1990년에 입사해서 16년 간 일해 왔어요. 근속연수로 치자면 회사에서 탑10에 들 정도인데 월급이 오히려 줄었어요. 지난 10년 간 정규직 임금이 10배 인상됐다면, 학습지 교사들은 오히려 10년 간 월급이 5분의 1로 줄어들었어요. 어떠한 보장(4대보험 같은)도 없고, 월급도 권리보장도 없고 회사가 시키는 대로 모든 일을 해야 하는 억압적인 분위기에서 일하고 있어요.
우리는 90퍼센트 이상이 여성이에요. 그런데도 모성보호는 하나도 안 되고 있어요. 회사는 그냥 우리를 소모품으로밖에 취급하지 않아요. 임신하면 그냥 그 날로 계약해지돼요. 애낳고 다시 돌아오면 그 동안의 경력은 하나도 인정받지 못해요. 
이런 일들은 여성노동을 비하시키는 일이에요. 출산율 저하가 사회적 문제라고 하지만 애 낳을 조건부터 사회가 만들어줘야 합니다.
노동조합을 하면서 노동자라는 인식을 많이 느끼게 됐어요. 2003년에 학습지 업계에서 현장투쟁이 많이 폭발했어요. 노동청 앞에서 1년 동안 매주 한 번씩 시위했어요.
학습지 교사들은 평균 근무기간이 8개월밖에 안 되기 때문에 연속성을 갖기가 어려워요. 자본을 상대로 한번 파업해 보는 게 투쟁의 목표입니다. 그러기 위해 현장투쟁이 한 차례 끝난 후에도 조합원을 꾸준히 관리하자는 목표를 세우고 있습니다.


● 라디카  (네팔 출신 이주 노동자)

 

1992년에 한국에 올 때는 TV에서 본 것처럼 크고 깨끗하고 안전한 공장에서 일하게 될 줄 알았어요. 와 보니 우리가 일하는 공장은 매우 작고 대부분 지하에 있었어요. 네팔에서 대학 다니다 왔는데 여기 와서 아침 7시부터 새벽 2시까지 일하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그렇게 힘들게 일했는데 사장이 월급도 안 주고 도망갔어요.
공장에서 일하다 보면 남자나 여자나 똑같이 일하는데 여자라고 차별해요. 우리는 이주 여성 노동자니까 차별이 더 심하죠. 한국 여성들에게는 생리 휴가도 있는데 우리는 그런 거 전혀 없어요. 한국 사람들이 일 끝나고 가도 우리는 남아서 일하고, 쉬는 날도 나와서 일했어요.
추석 때 사장이 또 우리에게만 일을 시켰어요. 저와 한 남성 이주노동자가 일을 하지 않겠다고 버텼죠. 근데 그 공장은 제가 일을 하지 않으면 그 라인 전체가 멈추는 곳이어서 결국 사장은 다음부터 반드시 야간·휴일 근무를 하면 수당을 주겠다고 약속을 했어요. 처음에 동료들은 제 말을 믿지 않았는데, 진짜 돈이 나왔어요. 모두 깜짝 놀랐죠.
2003년 10월 정부가 이주노동자를 단속해 추방하겠다고 발표한 다음부터 농성을 시작해 1년 가까이 했어요. 농성 처음 할 때는 너무 추웠어요. 우리는 세수도 못하고, 샤워도 못하고 그렇게 지냈어요.
우리 권리를 찾아야 하니까 힘들어도 버텼어요. 앞으로도 이주노동자들 계속 올 테니까, 내가 이 활동하다 잡혀도 지금 자리를 만들면 그 사람들은 지금보다 잘 지낼 수 있잖아요.
작년에 처음으로 여성의 날 집회에 갔어요. 여성의 날은 여성들의 날, 여성들의 축제였어요. 이 집회에서 우리는 이주 여성들의 상황을 알릴 수 있었어요. 또 한국의 여러 여성 노동자들의 상태와 문제도 알게 됐어요.
여성과 남성은 똑같은 노동자이니 함께 싸워야 해요. 그래야 여성들의 문제도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여성의 날에 한국 여성들과 이주 여성들이 함께 모일 거예요. 여기에 한국 남성 노동자들도 많은 관심 가져 줬으면 좋겠어요.

 

● 정금자 (서울대병원 간병인지부)

 

여성들이 많이 활동한다고 하지만 활동할 때 남녀 차별도 심하고 또 주부들이 일하는 일터가 너무 좁아요. 간병인 일터는 40·50·60대 여자 주부들이 마지막 갖는 일터인데, 급여가 너무 적어요. 최저임금도 안 돼요. 시급 1천6백60원, 8시간 일해서는 40~50만 원도 못 돼 이것으로 가정을 일굴 수 없으니까 자기 몸을 다 불태워서라도 24시간 일해야만 가정을 일굴 수 있어요.
여성들은 나약하다, 순종적이라는 얘기가 많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저는 지금 우리 여성 노동자들이 자랑스럽고 당당하다고 느껴요. 제 주변 우리 조합원들 80명이 다 여성이지만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그걸 기쁨으로 해 내요.
2003년 8월 31일에 병원이 폐쇄된 뒤 다음 날 부터 투쟁을 시작했어요. 병원 현관 앞에서 단식 투쟁도 하고 2층 로비에서 철야 농성도 하다가 12월에 출입금지가처분을 당했어요. 우리는 12월 2일 인권위원회 점거농성을 했어요. 그 때 ‘다함께’랑 함께한 거 같아요.
2004년 2월에 노동청 점거 농성에 또 들어갔죠. 25일에 점거농성 들어갔다가 27일에 경찰력 투입으로 쫓겨났다가 4월 26일에 서울대병원 노조하고 (사측이) 교섭해서 이겼어요. 서울대병원처럼 온몸을 던져서 [비정규직 투쟁을] 하는 데가 없어요. 서울대병원 노조가 없으면 저희는 지탱 못해요. 우리는 특수고용직이라 노동 3권이 없어 교섭도 못해요.
간병인은 가장 힘없는 자들이었어요. 20년, 30년 직장에 다녀도 ‘없는 사람’이었어요. 전국에 20만 명이라는 거대한 숫자를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올려놓은 게 노동조합이에요. 노동조합은 이 땅의 가장 열악하고 힘없는 자들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조직이기 때문에 그에 동참하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자랑스럽고 당당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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