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경제발전에 대한 환상 - 추가

지난번에 대충 토닥거렸던 '경제발전에 대한 환상' 이라는 잡문에 대해, 여러곳에서 많은 분들이 다양한 문제제기와 반론을 해주셨다. 좀 더 깊게 생각할 수 있도록 해준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몇가지 덧붙이고자 한다.


이번에 확인하게 된 것은 '어쨌든 그 시절에 박정희가 수출지향적인 정책을 썼으니 박정희에게 경제성장의 공이 있지 않은가? 가난을 벗어나게 해준것은 잘 한 일이다' 하는 인식을 가진 분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었다. 우선 분명히 해둘것이 있는데, '경제성장' 그 자체에 대해서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박정희가 노동착취를 했으니 경제발전은 안 하느니만 못한 일이었다' 하는 종류의 주장은 현실적이지도 않고 그다지 목적에 부합하는 주장도 아니다.


그러나 박정희 시절에 경제성장이 되었다는 '사실' 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박정희의 '공' 으로 연결지을 수 있는것은 아니다. 이런 주장은 두가지 문제가 있는데 하나는 관점의 문제다. 독일출신의 사회주의 극작가로 유명한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누가 일곱 개의 성문이 있는 테베를 세웠는가? 책에서 그대는 왕들의 이름을 발견한다네. 왕들이 바위 덩어리를 끌어 날랐는가?' 하고 묻는다. 경제발전의 '공' 이 박정희에게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브레히트의 문제제기에 답할수 있겠는가? 가난을 벗어나게 해준 사람은 박정희가 아니라 노동계급 자신 이라는 이야기다. 또 한가지는 의도야 어찌했든 그러한 주장은 결과적으로 박정희의 '개발독재' 를 옹호하는 결과로 귀착된다는 것이다. 경제발전은 노동착취를 전제조건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박정희의 '공' 이 경제발전 이라면 노동착취도 자동적으로 '박정희의 공' 이 된다. 무엇을 위한 '공' 인가? 국가인가, 아니면 평범한 사람들인가?


또 한가지 반론은 생존의 문제에 이념과 주의를 적용시킬수는 없으며 현실과 이상의 괴리는 크다. 고 말하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잊고 있는 한가지는 '현실' 의 자본주의 역시 '이념과 주의' 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미 사람들은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에 있어서 자본주의 라는 이념에 적용당하고 있다. 종종 그러한 사람들은 자신이 대단히 현실적이라고 생각하곤 하지만, 실은 현실의 권력구조에 충실한 것이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전망이나 대안을 제시할수는 없다. 이 경우에 결론은 '그러니까 현재의 권력구조에 순응하자' 는 것이 될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지배계급의 이익에 충실할지언정, 자기 자신을 포함한 평범한 사람들의 이익은 될수 없다.


또 기계적으로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크다' 고 말하는것은 현실의 한쪽측면만을 바라보는것으로, 이런 사람들은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반전, 반자본주의 운동의 역동성에 대해서는 그 의미를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한다면 이미 다른 세계는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수 있을것이다. 프란시스 후꾸야마가 이데올로기의 종말을 고한지 10 년 남짓한 시간이 흐른뒤에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거대한 도전이 일어났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경제 성장을 말하는 자들이 자본가의 이익만을 생각한다 고 말하는 것은 단순한 이분법적 사고방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분도 있다. 이런 주장은 현재의 권력구조와 국가에 대한 순진한 착각이다. 지금 정치.경제.사회 구조에서 권력을 가지고 결정하는 자들이 누구인가? 자본가 계급은 자신의 이윤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며, 이윤을 극대화 하는것이 그 목적의 전부이기 때문에 그것에 도움이 된다면 노동자 민중의 '경제' 는 언제든지 짓밟을수 있다. 자본주의 국가가 양자 사이를 '이분법적으로 보지 않고' 공정하게 중재해줄수 있을까? 자본주의 국가를 움직이는 진정한 힘은 경제권력을 가진 자본가들에게서 나온다. 의회를 비롯한 '선출' 된 자들이 국가의 전반적인 정책을 결정하는것처럼 보이겠지만 그 정책을 결정하는 방향이 언제나 자본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 될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렇게 할때만이 자신의 '권력' 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국가가, 대한민국이 당신의 힘이되고 당신의 편이 되어줄수 있을까? 현 체제에서 경제발전을 말할때 우선적으로 고려되는것은 자본의 이익이며, 그러한 경향은 갈수록 더 심화될 것이다.


박정희식 재벌위주의 경제구조는 '투명성을 요구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적대적일까? 그렇다면 먼저 재벌이 아닌 신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기업의 투명성' 이란것이 무엇인가를 따져봐야 한다. 무엇을 위한 투명성인가? 지극히 당연하게도 그들 역시 회계장부 등 기업의 이익을 기록한 문서는 공개하지 않는다. 임금명세표를 공개하며 노동자들의 고 임금을 비난하는 자본이, 자신의 이윤에 대해서는 절대 함구하는 것이다. 대신 저들이 말하는 투명성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그 하나가 금융시장의 활성화를 위한, 더 정확히 말해서 금융자본의 활성화를 위한 주식시장 에서의 투명성이고 다른 하나는 CEO 등 전문경영인의 도입이다. 그런 조치들이 보다 더 새롭고 '세련되게' 보일수는 있지만, 여전히 노동자 민중의 경제와는 거리가 먼, 더 많은 이윤창출을 위한 새로운 방법일 뿐이다. 재벌역시 자본의 일부로서, 실제로 많은 재벌들이 '세련된' 방법을 채택하고 있는것은 투명성을 확보하라는 국민의 요구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것이 그들에게 더 많은 이윤을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경제발전이 지배계급의 이익에만 부합하기 때문에 문제라고 말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주장도 있다. 경제발전은 투자와 내수시장 진작에서 나온는데 지금은 '모럴해자드' 때문에 자본가들이 그렇게 하지 않고 있으며 바로 그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반기업정서 때문에 자본가들이 투자를 하지 않으려 한다' 는 지배층의 선전에 대한 '동전의 반대편' 밖에 되지 않는다. 자본은 도덕적 가치나 국민정서 같은 비물질적인 요소가 아니라 철저하게 이윤논리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라는 점을 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 '도덕적 해이분자' 들이 기업을 경영하고 있어서 고용이나 투자가 안되고 내수시장이 침체기란 말인가? 도덕성의 유무와 관계없이, 경기불황의 시기에는 자본이 투자한 량 그 이상의 이윤을 창출할수 없기 때문에 투자하려고 하지 않으며, 당연히 고용도 줄어들기 마련이다.


투자와 내수시장 진작이 경제발전의 중요한 요소임에는 틀림없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할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도덕적 해이분자를 처단하고 그 자리에 도덕적으로 고귀한 자본가를 경영진으로 앉혀두면 문제가 해결될까? 천만에. 그 고귀한 분 역시 마찬가지로 이윤을 위해 투자도 고용도 최대한 제한하려고 할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업이 살아남을수 없기 때문이다. 자본에게 이윤논리는 말 그대로 생명줄이기 때문에 도덕성의 유무는 거의 영향을 끼칠수 없다. 그것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본의 이익에 충실할수 밖에 없는 자본주의 국가의 정치인들도 마찬가지다.


현재 자본의 세계화는 의식이나 국가정책에 따른것이라기 보다는 시장경제의 발현과 극대화에 따른 하나의 현상으로 보는것이 옳지 않겠느냐고 하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오히려 '강한 국가'를 배후로 하여 시장경쟁 질서를 권력의 힘으로 강화하려고 한는 사조다. 물론 그러한 강한 국가를 요구할때는 '시장의 이익' 즉, 자본가의 이익에 도움이 될때에 한해서 적용되는 것으로서 에를들면 복지정책과 같이 자본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않는 방면에서의 국가권력의 개입은 철저히 배재되어야 할 대상인 반면에, 노동문제에 있어서의 시장원칙의 보호를 위한 국가권력의 개입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신자유주의의 원칙중 하나이다. 따라서 그 경제논리는 국가정책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영향을 끼치게 되며, 미국의 이라크 침략등에서 보이듯이 제국주의적 형태를 보일때도 있다.


어쨌든 중요한 문제는 대안이 무엇이냐고 하는 것이다. 극소수의 지배계급만을 위한 경제정책 때문에 평범한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는다면 그에 대항해서 어떤 대안을 세울수 있을까? 미디어몹 '난조' 님이 지적했듯이 국제 비정부기구(INGO)의 활성화와 생산수단의 점진적 국유화, 마지막으로 주권국가의 초국가기구로의 권한 이양을 통한 국제적 거버넌스 수립 등의 대안모색들은 분명 의미있는 것들이지만 저마다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근본적인 대안은 되지 못하고 있다. 부유세 신설, 사회복지정책의 적극적 실현, 공공부문 투자 확대 등의 방법도 일시적인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현재처럼 경제사정이 좋지 않을때는 지배계급은 이것마져도 양보하지 않으려고 할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다른 세상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사회 전체가 생산에 투입되며 생산된 가치역시 사회전체가 균등하게 소비하는 사회주의 체제가 되지 않는다면 극히 일부의 지배계급을 위한 경제는 계속 지속될수 밖에 없다.


물론 여기에도 반론은 존재한다. 대표적인 관점은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 우월의식, 그리고 생산의 효율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사회주의는 불가능하다고 보는 시각이다. 우선적으로, 사회주의는 인간의 욕망을 억압하는 체제라고 보는것은 소련이나 북한등의 국가자본주의가 '현실사회주의' 라는 외피를 뒤집어 쓰면서 나타난 대표적인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현재 소수의 사람들만이 누리고 있는 물질적 풍요와 여유를 다수 대중에게 돌리고자 하는 체제이며, 때문에 사회주의로의 전환을 위한 객관적 (경제적) 조건중에 하나는 생산성의 발전정도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세계시장에서 자국의 물품이 팔리지 않을것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타격을 받고 효율성이 저하될 것이라고 보는것도 오류다. 물론 사회주의 체제가 하나의 나라나 공동체에 한정되어 실현된다면 그렇게 되겠지만, 진정한 사회주의는 일국의 혁명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억압받는 사람들의 손에 의한 전 세계적인 혁명이 될때 가능할 것이다.


문제의 본질을 인간본성의 탓으로 돌리는것은 체제에 도전하지 않고 개인의 도덕성에 전가시키려는 비겁한 태도다. 일부 비관주의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인간은 그렇게 자신의 이기심만 내세우는 존재는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재해를 당한 사람들을 위해 성금이나 구호품을 전달하거나 자원봉사를 자청하는 모습들에서 확인할수 있다. 그런것들을 모두 '위선' 이라고 매도할지도 모르지만, 그런 단서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인간이 그토록 이기적이고 무시무시한 존재라면 경제적인 이유로 인간의 욕망을 스스로 제한하게 하는 자본주의 체제도 역시 유지될리가 없다. 그런 주장에 따른다면 끊임없는 폭동과 약탈이 일어나야 정상 아니겠는가?


잘못된 현실에 맞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하는 사람들중에 일부는 투쟁이 아니라 훌륭한 정책을 가지고 지배계급과의 협상이나 타협을 통해서 세상을 바꿀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투쟁 없는 대안은 없는법이다. 부유세나 사회복지제도의 강화와 같은 사소한 개혁조치들 조차도 강력한 투쟁이 없다면 이루어 지지 않는다. 민주노동당의 부유세 정책이 표류하고 있는것은 정책이 부족하기 때문인 이유도 있겠지만 주된 이유는 지배계급의 권력을 뺏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서구유럽의 잘 발달된 복지정책을 부러워 하는데, 그런것이 가능했던것 또한 노동계급의 강력한 투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유럽 사민주의 정당들의 성장과 집권이 가능했던 것은 그 이전에 일어났던 준 혁명적인 상황들에 힘입은 것이다. 민주노동당 당내에서도 '우리는 운동권 정당이 아니다, 투쟁보다는 의회내에서의 활동에 주력해야 한다' 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의회내에서의 역활은 제한적인 것이 될수 밖에 없다.


사회 변혁의 원동력은 여전히 의회밖의 노동자 민중들에게 있다. 지배계급만의 경제가 아니라 일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가능하게 하는 힘 도 마찬가지다. 모든 인류가 기아와 가난과 질병과 전쟁의 공포에서 해방되게 하기위해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중요하며, 무엇을 향해 전진해야 하는지 관점과 방향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