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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적 촛불투쟁, 주체 그리고 자극

대대적 촛불투쟁, 주체 그리고 자극
 
2017년 '촛불투쟁' 관련하여 투쟁의 주체와 계급의식을 중심으로 서술한 글인데, 2024년 '탄핵투쟁'과 비교할 필요가 있어 다시 게재한다.
(박근혜→윤석열, 촛불→응원봉, 50대→20~30대, 민중총궐기→남태령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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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대적 촛불투쟁의 배경
 
촛불투쟁이 사상 초유의 규모로 분출한 계기는 박근혜 정권의 추악한 민낯이 밝혀지면서이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늘 감춰져 있었다. 바로 박근혜 정권 이전부터 곪아 터진 자본주의 위기가 문제의 본질이다. 위기를 해결할 능력이 없는 자본가정권은 자신들의 연명을 위해 모든 희생과 고통을 노동자민중에게 떠넘겼다. 이 때문에 분노는 언제든 계기만 주어지면 터져 나올 수 있었다. 1,000만 비정규직, 사상 최대의 가계부채, 급증하는 실업, 몰락하는 자영업, 생존권 위기에 몰린 빈민과 노인, 철저한 계급사회임을 증명하는 구조화된 빈부 격차, 그리고 이러한 불평등하고 불안정한 사회에서 희망을 품을 수 없는 수많은 사람의 분노가 촛불 투쟁의 배경이었다.
 
정치적으로 박근혜 정권은 콘크리트 지지층이라는 강력한 지지 기반을 갖추고 있었지만, 국정원 동원 부정선거 문제와 세월호 참사 책임이라는 치명적인 약점과 최순실 사태에서 드러났듯이 특정 세력의 권력 독점-남용 문제로 내부 균열 위험성을 항상 안고 있었다.
 
이에 박근혜는 자신의 약점을 덮기 위해 반대세력에 대한 무차별 공격과 지지층 결집만을 위한 독선적 통치로 일관해왔다. 집권 초기부터 공안탄압으로 시작하여,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 투쟁을 온갖 추악한 방법을 동원해 막았다. 다음에는 노동자민중의 생존권 투쟁인 민중총궐기를 국가폭력으로 막고 물대포로 백남기 농민을 사경에 빠뜨려 끝내 사망에 이르게 했고,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을 구속하며 탄압의 고삐를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거칠 것 없이 공격에 매진하던 박근혜 정권은 내부 균열과 함께 무너지기 시작해 박근혜 게이트를 정점으로 급격하게 추락했다.
 
박근혜 정권 내내 밀리기만 하던 저항 세력에게 촛불투쟁의 힘은 새로운 공간과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요구가 어느 때보다 높아졌고, 재벌의 정경유착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성과연봉제 반대, 사드 배치 반대 투쟁, 국정교과서 추진 중단 등의 투쟁도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가장 절박한 투쟁사업장 노동자들의 현안은 차가운 농성장과 한편에 묻혀있다. 문화예술계의 블랙리스트 사태로 ‘표현의 자유’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었음에도 국가보안법 탄압은 멈추지 않고 있다. 이것은 아직 노동계급에 적대적인 체제가 건재하며, 보다 근본적이고 강력한 투쟁 없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루어낼 수 없음을 보여준다.
 
 
2. 촛불 투쟁의 주체와 의식
 
1) 조직노동자
 
조직노동자운동은 촛불항쟁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파업 중이던 철도노동자들이 초기 동력을 형성했고, 평일 촛불의 경우 철도노동자와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오롯이 끌고 갔다. 그래서 광화문 광장의 중심을 차지할 수 있었고, 촛불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수백만의 대중이 거리에 모이는 동안에도 민주노총은 총파업을 통해 운동의 조직적, 정치적 주도권을 쥐는데 주저했고, 거대한 사회적 압력에 떠밀려 실행한 총파업도 사실상 초라하게 끝나버렸다. 그러는 사이 ‘즉각 퇴진’을 외친 수백만 촛불항쟁의 정치적 주도권은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의 '탄핵' 중심으로 넘어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퇴진행동’ 내에서 시민단체와 야권연대 세력들은 야당과의 공조를 중요하게 부각했고, ‘즉각 퇴진’ 요구가 국회 탄핵과 특검, 헌재를 압박하는 것으로 제한되었다.
 
민주노총으로 상징되는 ‘조직노동자 운동’은 촛불투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대규모 집회에서 중심이 되어 왔다. 그만큼 조직력과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촛불집회 초기에도 조직노동자들은 집회의 중심을 유지했고 거리행진에서도 버팀목 역할을 했다. 하지만, 오랜 기간 후퇴를 거듭한 조직노동자 운동은 촛불 투쟁에서도 ‘조직적으로 참가하는 단체 참가자’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동안 유력한 대공장 정규직 노동조합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외면하거나 방해했다. 박근혜 정권의 노동개악에 맞선 총파업 투쟁도 회피하거나 무력화시켰다. 또한, 크고 작은 노조를 가리지 않고 관성처럼 자리 잡은 어용세력과 조합주의자들은 계급적 원칙을 훼손하고 수많은 투쟁을 교란했다.
 
이러한 현실에서 예상치 않게 맞닥뜨린 촛불 집회의 위세에 조직노동자들은 자극받고 고무되기도 했다. 하지만 일상적인 노동조합 투쟁에서 그래왔듯이 자신의 이해관계와 직접 관련이 없는 정치, 사회적인 투쟁 물결에 자신이 가진 노동자 고유의 무기로 투쟁에 힘을 싣기보다는 형식적으로만 대응했다. 책임과 희생이 따르는 ‘계급적 투쟁’보다는 편하고 이익이 되는 ‘조직적 집회 참가자’의 길을 택했다. 조직노동자들은 대대적인 촛불투쟁을 만나 박근혜 정권의 공범인 ‘재벌(대자본)에 맞선 투쟁’에 전면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촛불이 100배로 커지는 동안 자신들의 동료인 ‘투쟁사업장 현안 해결을 위한 연대 투쟁’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조직노동자 운동은 촛불 집회에서 유의미한 동력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노동자 고유의 투쟁으로 촛불투쟁과 결합할 때 자본가 정권과 지배계급에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그동안 거대한 촛불 뒤에 숨어 형식적으로만 박근혜 퇴진을 외치고, 그것에 만족했던 조직노동자 운동은 이제 탄핵 인용 결정 이후 대선 국면을 맞고 있다. 선거만큼 조직노동자들이 긴밀하게 움직이고 동원되는 운동은 없다. 그래서 노동조합은 투쟁보다 선거를 위한 조직이 되었다.
 
촛불투쟁이 만들어 준 반전의 기회를 자신들의 투쟁을 강화하고 확산시켜 현안을 해결하는 무기로 삼기보다는, 적당한 정치세력과 손을 잡고 선거를 통해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것에 관심이 쏠려있다. 하지만 노동자 투쟁의 역사는 자신의 위치에서 사소한 경제적 투쟁도 제대로 못 하는 세력은 사회적(혁명적) 투쟁에서도 발목을 잡는 역할만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 투쟁하지 않으면 내일은 적들에게 구걸하게 될 것이다.”
 
2) 자발적 참여자
 
연인원 1,000만 명의 촛불 집회 참가가 다수는 노동조합, 정당, 시민단체 등의 조직적 참가자가 아닌 개별 단위(가족, 친구, 혼자)로 자발적으로 참가한 사람들이다. 개별 참가자들의 직업과 정치성향을 구체적으로 분석할 수는 없지만, 경제 위기와 사회적 안전에 대한 위협 상황이 계속되면서 (자기방어적인) 보수적인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늘었다. 또한, 비정규직-실업 문제에 직면한 20~30대의 참여가 광우병 촛불보다 줄어든 반면, 50세 이상의 참가가 늘었다. 이는 촛불 행동에 나선 사람들이 정치 성향을 넘어 현실에 대한 분노가 크고 절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발적 참가자들은 조직화 된 세력에 거리를 두기도 하고, 조직되기를 바라기도 하고, 스스로 조직하기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거대한 촛불 대중이 어느 정당이나 단체에 대규모로 가입하는 차원이 아니라 촛불 대중의 가장 명료한 부분이 자신을 정치(의식)적으로 조직하는 일이다.
 
자발적 참가자들은 10여 차례 이상의 촛불 집회를 거치면서 다양한 목소리를 내고 촛불투쟁의 활력소가 되고 있다. 촛불 대중의 분노가 ‘급진적 투쟁’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시도조차 못하고 막혔지만, 촛불 집회에서 나타난 ‘저항 문화의 정서적 충격과 창의력’은 또 다른 투쟁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하지만, 촛불 대중 다수가 여전히 미조직-개별 참가자로 남아 있는 이유는 촛불 집회의 대형 무대와 긴장감 없는 행진으로 인해 집회 참가자들이 주체가 아닌 관객이 되기 때문이다.
 
이제 촛불투쟁이 열어 놓은 광장을 제한 없이 넓혀야 한다. 거리, 일상, 지역, 공동체에서 다양한 형식과 열정적인 내용으로 수백, 수천, 수만 개의 토론 광장과 대중총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곳에서 토론하고 결정된 것을 함께 실천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바로 광장을 정치적으로 ‘조직화’하는 것이다. 조직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자발적 참여자들도 아직은 촛불 광장의 열린 정치와 직접 민주주의 요구를 일터, 생활공간, 지역 사회로 확산하지 못하고 있다. 자신의 삶의 공간에서 토론과 투쟁을 통해, 크고 작은 권리를 찾고, 공동체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는 촛불투쟁이 아직 집회 참가자들의 삶과 현실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작은 의미에서도 촛불투쟁을 ‘혁명’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이다.
 
 
3. 촛불투쟁과 자극
 
역사적 투쟁과 자극
 
1871년 ‘파리코뮌’은 노동자 스스로 사회조직을 건설하려는 최초의 시도였다. 도시구역에 따라 구성된 무장한 노동자들이 지키는 위원회가 지도자를 선출했으며 노동자 민병대를 창설했다. 이것이 최초의 ‘평의회’ 형태이다.
 
그리고 1905년 러시아에서 홍수처럼 터져 나온 ‘대대적 파업’의 물결은 전대미문의 폭발이었다.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상상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을 깨고 나온 것이었다. 서로 다른 직업군들 사이의 구별이 무너졌다. 정치투쟁과 경제투쟁 사이의 구별이 무너졌다. 즉각적인 요구들과 혁명투쟁 사이의 구분도 낡은 것이었다. 이에 자극을 받은 노동자 대중은 파리코뮌에 이어 스스로 ‘소비에트(노동자평의회)’를 탄생시킨다.
 
대대적 파업의 비밀은 프롤레타리아트가 다시 전인적인 인간으로 되려는 노력이다. 대대적 파업에서는 직업, 산업 부분, 국가 등의 구분이 없어진다. 경쟁을 부추기는 (사고와 감정 사이에서) 이러한 분리들이 의문시될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러시아에서 투쟁하는 이들이 어떻게 웃고 노래했는지를 묘사하며 기쁨을 표현했다.
 
"그들은 서로 얼싸안았고, 밤이 되어도 각자 자기 집으로 들어가서 개별화될 필요가 없도록 거리에 남아있었다. 이전까지 알지 못했던 깊은 집단적인 이상주의가 준비되었다. 그러나 혁명 시기의 폭풍 속에서 바로 노동자는 (노동조합의) 도움을 청하는 신중한 가장에서, 혁명의 낭만주의자'로 변하고, 그에게 있어서 물질적인 행복은 말할 것도 없고 가장 최고의 재산 즉, 자신의 목숨마저도 투쟁의 이상에 비해서는 하찮게 보인다."
 
소비에트(노동자평의회)는 1905년에 소비에트는 갑자기 자발적으로 출현한다. 소비에트의 본질은 노동계급의 집단적 노력의 결과물이다. 다양한 계획들, 토론들, 여기저기에서 쏟아져 나온 제안들, 모든 사건의 발전, 그리고 혁명가들의 적극적인 개입이 소비에트를 탄생시켰다. 이 과정을 세밀히 관찰하면, '대규모 토론과 투쟁의 급격한 급진화'라는 두 가지 결정적 요인을 확인할 수 있다. 1905년 9월부터 대중 내부에 생겨난 주목할 만한 '의식의 성숙'은 토론에 대한 엄청난 욕구의 발전을 나타냈다. 공장, 대학, 지방으로 퍼진 격론은 9월 한 달 동안 발전했던 ‘새로운’ 현상이었다.
 
"트레포프의 무한한 테러가 거리를 지배하고 있었음에도 대학 담장에서 생겨나고 있는 완전히 자유로운 대중들의 모임은 1905년 가을의 가장 놀라운 정치적 역설 가운데 하나였다. 사람들은 복도, 강당 그리고 홀을 가득 채웠다.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곧장 대학으로 갔다. 블라디미르대학 강당에 모인 청중을 보고 깜짝 놀란 공식 전신기관은 다음과 같이 전했다. 대학생들 외에도 군중은 ‘다수의 관련 없는 모든 남녀, 중․고등학교 학생들, 도시 사립학교 학생들, 노동자들, 그리고 잡다한 무리’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이 모임은 잡다한 무리가 아니라 '엄격한 규율과 성숙함을 유지하면서 질서 있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토론하고 심사숙고하는 집단적 그룹이었다.
 
소비에트 회의는 부르주아 의회 또는 탁상공론적인 학자들 내의 논쟁과는 정반대였다.
 
"소비에트 회의에는 대의제도의 궤양인 어떠한 과장과 허풍도 존재하지 않았다! 논의 중인 문제(파업의 확산 및 두마 앞으로 보낼 요구)는 전적으로 현실적이었고 토론은 간결하고, 활기차며, 효율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누군가는 쥐꼬리만 한 매시간이 설명된다고 생각했다. 전체 회의에 엄격한 승인을 가진 의장은 미사여구로 흐르는 최소한의 흐름도 꼼꼼히 살폈다."
 
활기 넘치고 현실적이며 동시에 심오하고 구체적인 토론은 노동자들의 의식과 사회심리에 변화를 나타냈고, 이 두 가지의 발전에 있어서 강력한 요인이었다. 의식은 사회 정세와 그 전망에 대한, 대중 행동에서 생겨나는 진정한 힘에 대한, 그리고 동지와 적을 구분하고, 미래 세계의 목표를 정교히 하는 경로 설정의 필요성에 대한 집단적인 이해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사회심리는 의식과 다르지만, 그것과 함께 실재하는 요인이다. 그리고 이 심리는 노동자의 도덕과 생활태도를, 그들의 확산하는 연대를, 그들의 다른 노동자들과의 공감을, 그들의 열린 마음 및 학습을 그리고 공동의 목적에 대한 그들의 이타적인 헌신을 나타내는 요인이다.
 
그리고 1905년의 ‘기억과 자극’은 1917년 소비에트가 모든 권력을 가지면서 러시아에서 재탄생한다. 러시아혁명의 자극과 1920년대 혁명적 물결은 독일과 헝가리에서 노동계급에 생동하는 힘과 넘치는 생각들을 강하게 분출하게 했다. 투쟁이 발전함과 동시에, 모든 장소에서 ‘노동자평의회’와 ‘노동자총회’가 나타났다.
 
1920년대 혁명적 물결 속에서는 계급의식의 뛰어나고, 실천적이고, 생동하는 특질이 확인되었다. 모든 곳에서 즉흥적 화합과 진실한 토론, 생각과 제안들의 무수한 교류가 발생했다. 어제의 노동자들은 자본주의가 그들에게 부과한 심각한 무지 속에 침체하여 있었지만, 오늘의 노동자들은 실천적인 지성과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대담함을 보여주는 연설자가 된다. 자본의 지배에 침묵하며 속박되어 있던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별안간 연설하기 시작하여, 모든 곳에서 수많은 생각과 사상들을 교환하고 정보를 모으며, 함께 정치 토론을 함으로써 자신들의 주도성과 창의력을 생생하게 증명한다. 정치적인 환경은 열정적인 음조를 띠고, 교류와 성찰을 위한 수많은 통로가 창조된다. 계급의식이 집단적이고 실천적으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암흑과도 같았던 기나긴 반(反)혁명의 시기가 지나가고, 1960년대 말 ‘프롤레타리아트’는 1968년 5월 프랑스에서 총파업과 그에 이은 전 세계에 걸친 노동자 투쟁의 폭발과 함께 역사의 무대 위에 재등장한다. 이러한 역사적 부활은 ‘상상력’의 해방과 함께 더 큰 자극이 되어 ‘급진적인 행동’과 ‘혁명적인 운동’에 새로운 세대를 낳았다. 1968년 프랑스와 1969년 이탈리아 노동자 집회의 특징인 ‘폭넓고 심도 있는 토론’ 문화를 만들었다.
 
1987년 한국의 6월항쟁은 그해 여름 노동자대투쟁에 영향을 주었다. 2011년 국제적인 차원의 ‘분노’ 물결은 ‘광장을 점거하자!’는 공통의 구호로 전 세계를 휩쓸었다. ‘광장’의 정치는 앞선 모든 ‘역사적 자극’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진정한 연대’, ‘대중총회’, ‘토론문화’로 재현되었다.
 
2011년 폭발적인 '진정한 연대'가 있었는데, 이는 지배계급이 설교하는 위선적이고 이기적인 '연대'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보기를 들어, 마드리드에서는 체포된 사람들의 방면을 위하거나 경찰이 난민들을 체포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시위들이 있었다. 또한, 스페인과 그리스 그리고 미국에서는 주거지로부터의 강제이주를 막기 위한 대대적인 집회가 있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오클랜드에서는, 파업집회에서 다른 작업장들로 '파업파괴 저지단' 파견을 결정했고, 11월 2일 총파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직원이나 학생을 처벌한 작업장이나 대학을 점거할 것을 결정했다. 이것은 비록 아주 간헐적이고 짧게 지속하였지만,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는 동지들에 의해 지지가 되고 보호된다는 느낌을 함께 느끼게 했다. 이는 불안감과 무방비 상태와 가망 없음이 지배적인 이 사회의 '정상적인 상태'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위와 같은 혁명적 사건이 준 자극과 촛불투쟁이 준 영향은 분명히 다르다. 우리가 토론해야 할 것은 눈앞의 정세를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촛불투쟁에서 근본적으로 부족한 것을 찾아내고 실현 가능한 것을 실천하는 일이다. 촛불투쟁은 ‘박근혜 탄핵 인용 결정’으로 막을 내렸고, 대선을 통해 ‘정권교체’를 이루는 것으로 마무리하려는 세력이 노동자 운동 내의 다수이다. 한편 촛불 정세를 무사히? 넘긴 부르주아 정치세력들은 촛불에 자극받아 보다 세련된 통치 체제를 만드는 것으로 계급투쟁을 잠재울 것이다.
 
 
4. 글을 마치며
 
촛불투쟁 다음의 투쟁은 무엇이고,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2017년 봄, 우리가 맞고 있는 ‘자본주의 위기’의 결과는 생각보다 훨씬 혹독해서 아직 한겨울이다. 박근혜 게이트가 터지기 전부터 노동자민중의 생활조건은 악화했다. 실업은 점점 더 커져 일상이 되었고, 비정규직 확대는 이 사회를 점점 더 깊이 잠식하고 있다. 최소한의 생활 조건도 기대할 수 없는 가난과 굶주림마저 만연하다. 촛불투쟁은 이렇게 비참한 현실과 박근혜에 대한 분노가 결합한 결과이다.
 
이에 수십, 수백만의 분노한 사람들이 ‘박근혜 퇴진’과 함께 마음속으로 ‘안정적이고 정상적인’ 삶을 염원하며 거리에 나섰다. 이러한 분노와 염원은 그동안의 수동성을 넘어 광장과 거리를 ‘거대한 인파’라는 물리력으로 점거했다. 광장에서는 지난 수년 동안 막혀있던 분노와 현재의 위기에 대한 문제들을 주장하고 토론하기 시작했다. 수백만의 대중이 이 사회를 바꾸기 위해 가져야 할 ‘필수적인 의식’은 단상에 선 지도자의 말을 귀 기울여 듣거나 그의 지침을 따른다고 얻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대대적인 토론을 통해 스스로 판단하고, 그러한 토론을 이끌어내는 투쟁을 경험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촛불투쟁의 미래는 여기에 있다.
 
역사적인 투쟁의 자극은 계급의식을 발전시켰다. 특히 '다수계급을 위한 다수의 의식적이고 독자적인 운동'이 그러했다. 의식적인 토론과 결정, 그리고 노동자 대중이 선출하고 대중에게 책임지는 독자적 운동은 역사적으로 노동자평의회를 통해 실현되었다. 이러한 노동자평의회는 현실 투쟁에서는 노동자 스스로 투쟁을 통제하는 아래로부터의 파업위원회, 노동자총회 등으로 나타났다. 우리가 촛불투쟁을 통해 자극해야 할 일을 바로 여기서 찾아야 한다. 
 
아무리 노동자 운동이 후퇴하고 전투력이 약해졌어도, 노동계급은 자신의 고유한 방식으로 투쟁해야만, 자본가계급에 밀려있는 교착상태를 깨고 정세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다. 그것의 첫걸음은 생존권 투쟁의 전면화와 아래로부터의 실질적인 총파업 투쟁이다.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탄핵 이후 선거유세용 집회나 이벤트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정치광장을 열어야 한다. 노동자 정치광장을 통해 노동계급이 정치적 의사표현과 투쟁의지를 제한 없이 표출하고 행동하는 ‘직접행동’, ‘직접정치’를 실현해야 한다. 그동안 투쟁과 조직화 모두에서 소외되었던 비정규 중소 영세사업장 노동자, 이주노동자, 장애인, 빈민, 소수자들과 계급적으로 연대하여 투쟁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총회를 건설해야 한다. 노동자 투쟁과 미조직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결합만이 계급 운동의 위기를 돌파할 수 있다.
 
이 체제는 박근혜와 같은 대표자를 언제든 갈아치울 수 있다. 이 체제의 실질적인 지배자인 ‘자본가계급’의 이윤추구를 보장하고 이 사회의 크고 작은 권력을 가진 ‘지배계급’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새로운 정부를 세울 것이다. 그 배후에 ‘국가’라는 폭력기구가 환상(국민의 재산과 안전을 지켜주는 곳)으로 자리 잡고 있다. ‘실질적인 지배자들’이 기대는 곳이 바로 국가기구이다. 그들은 한 몸이다. 그래서 우리가 자본가계급의 국가를 지키고 강화할수록 그들도 강해지는 것이다.
 
우리가 촛불투쟁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자 한다면, 한 줌 안 되는 지배계급의 착취와 불평등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국가(통치)기구의 일부인 정부를 야당으로 교체하는 것으로는 불가능하다. 지배계급의 특권을 그대로 유지해주고 노동계급에 불리한 ‘선거제도’로는 더욱 불가능하다. 그것은 오로지 이 체제의 실질적인 지배권력을 무너뜨리고, 다수계급이 직접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세상을 건설해야 가능하다.
 
그 희망은 비록 지금 소수이긴 하지만, 선거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생산과 일상을 직접민주주의로 조직해, 자신의 삶을 조절하고 다수가 사회를 통제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려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삶을 위선과 불평등의 부르주아 민주주의-법 제도에 맡기지 않고 투쟁으로 돌파하면서 스스로 조직하고 민주주의를 창조하는 사람들이다. 모두에게 평등하고 모두가 참여하는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즉 ‘자기 권력’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제야 박근혜 파면이라는 작은 승리를 이루어냈다. 하지만 탄핵당하고 감옥에 간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대로이다. 특히 노동계급의 생존현장과 일상에서는 아무것도 바꾸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가 박근혜 퇴진을 위한 촛불투쟁에서 멈추지 않고 노동계급의 삶과 투쟁이 있는 모든 곳으로 투쟁을 확산시킨다면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이다. 노동계급이 '자기 권력'을 위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그 자체로 첫 번째 승리를 가져다줄 것이다.
 
우리는 촛불투쟁을 너무 과도하게 평가하거나 기대해도 안 되지만, 촛불투쟁이 가져다준 긍정적인 자극을 축소해도 안 된다. 우리는 촛불을 주도하지도 넘어서지도 못했지만, 냉철하고 끈질기게 촛불 이후를 준비해야 한다. 이를 위해 최대한 한 넓고 깊게 토론해야 한다. 토론의 결과는 반드시 실천으로 옮겨야 한다. 근본적이고 새로운 투쟁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조직해야 한다. 오직 이러한 시도와 실천만이 전쟁과 야만의 체제인 자본주의를 전복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기초가 될 수 있다. 그 길은 험난하고 길어서 꾸준히 가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다. 우리가 천천히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갈 길이 먼 것이다.
 
2017년 3월
국제코뮤니스트전망(ICP)│이형로
 
<출처 > 「코뮤니스트」 5호, 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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