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21/03

[코뮤니스트 12호] 자본주의, 전쟁, 그리고 전염병

자본주의, 전쟁, 그리고 전염병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기고문의 두 번째 부분(자본주의, 전쟁, 그리고 전염병Ⅱ)은 16세기 전환기 이래 자본주의 초기 팽창 시기부터 전쟁과 전염병들에 대한 역사적 스케치로 시작한다. 유럽의 초기 식민주의에 의한 ‘서인도제도’의 발견과 뒤이은 아메리카 대륙의 정복, 그리고 아프리카와 ‘동인도’로 유럽의 팽창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현대 제국주의 시대까지) 스케치한다. 이 글은 그때까지 물리적으로 분리되어 있던 인구들이, 노예와 강제 노동의 무자비한 착취라는 조건 아래에서, 대륙을 가로질러 접촉한 결과 치명적인 질병과 전염병의 ‘자연적인’ 확산에 초점을 맞춘다.

 

  이 글은 계속해서, 경쟁하는 모든 주요 열강들에 의한 현대 제국주의 환경에서, 화학전과 나란히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핵전쟁에 덧붙여서, 체계적으로 개발되었을 따름인 생물학전으로 나아간다. 다양한 생물학 물질(보기를 들어 탄저균, 보툴리누스균, 페스트 또는 에볼라 같은 박테리아와 바이러스)의 ‘무기화’를 위한 군사-과학 프로그램들과, 일본의 옴진리교파(공식적인 비국가 세력) 사례를 포함하여, 그것들을 전시 분쟁에 ‘시험’하고 ‘적용’하려는 아직은 제한된 시도를 간략하게 고찰할 것이다.

 

  이 글은 토론을 위한 몇 가지 논제를 제시하고 현재의 코로나19 대유행이 중국의 군사 실험에서 비롯했다는 추측을 거부하면서 마무리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자본주의, 제국주의 그리고 미생물 전쟁

 

1913년, 전쟁 직전에,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의 발흥은 전 세계적 규모로 진행된 자본주의의 범죄와 폭력의 역사에 지나지 않으며, 그로써 자본주의는 돌이킬 수 없는 격동에 빠져든다고 지적했다.

 

“[자본]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모든 구멍으로 피와 쓰레기를 분비하며’ 태어났을 뿐 아니라, 이렇게 하여 단계적으로 세계에 자신을 각인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훨씬 더 폭력적인 격동 속에서, 자신의 몰락을 준비한다.”1)

 

 

화폐라는 인간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 신(몰록)

 

자본주의 발전은, 먼저 그 상업적인 형태에서, 첫 번째 세계화를 동반했다. 이것은 대체로 대륙들 전체를 규모로 한 팽창, 군사 정복, 식민화 그리고 착취 정책이었다. 콜럼버스에 의한 아메리카의 ‘발견’은 미생물의 세계화의 막을 올렸다. 유럽-아시아 대륙에서 번성하던 박테리아와 바이러스들이 정복이 이루어지는 내내 모든 곳으로 확산하였다. 홍역, 천연두, 콜레라, 결핵 같은 전염병들이 전체 인구를 파괴했다. 멕시코에서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인구가 1519년 2천5백만에서 1580년에 1백5십만 명으로 급감했고, 페루에서도 감소는 급격했는데. 1530년 즈음에 1천만 명이 감소했다.2)  동일한 종말론적 관측이 북아메리카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었다. 중앙·남아메리카의 전염병은 16세기 초 오늘날의 아메리카 합중국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프랑스 정착민들은 캐나다에 정착했고, 인디언 공동체들과 (상업적인 형태와 군사적인 형태로) 접촉한 결과로 즉각 인구 감소가 시작되었으며, 외국 선박들이 그들이 사는 해안에 도착했다는 것을 인식하기도 전에 많은 공동체가 사라져버렸다.3) 대유행병의 이러한 치명적인 행진은 19세기까지 지속하였다. 1880년대 초에, 자본이 서스캐처원(Saskatchewan) 내부 지역을 관통하는 캐나다 태평양 철도 노선을 건설했을 때, 그때까지는 백인들의 병균들로부터 보호되었던 그 지역 토착민들은 매년 9%의 비율로 죽어 나갔다.4)

 

가축들과 가까이서 실제로 면역력을 지닌 채 살고 있던 유럽인 정착민들의, 대량으로 수입된 육종 시스템도 아메리카에서는 알려지지 않았던 전염병이 출현하는 데 알맞은 환경을 제공했다는 점을 덧붙이자.

 

그것은 승자가 고의로 미생물 무기를 사용한 계획적인 대량학살은 아니었지만, 대규모로 수행된 여타의 군사 정복처럼 콩키스타(Conquista)는 돌이킬 수 없는 인간 재앙이었음이 분명하다.5) 도미니크회 수사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Bartolomé de Las Casas)는 이 치명적인 전염병에 대해서 절대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그는 철과 불에 의한 카리브해와 아메리카 대륙의 정복에 대해서 빼어나게 묘사를 했다.

 

“40년 만에, 기독교인들의 폭정과 극악무도하고 부정의 한 행위 결과로, 1천2백만의 남녀노소가 죽었다. 진실을 말하자면, 그리고 내가 오류를 범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1천5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고 믿는다. …… 이 12년(1518~1530년) 동안에 뉴스페인의 4백50 리그(거리 단위)에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4백만 명 이상의 사람을 칼과 창으로 죽이거나 산 채로 태워죽였다.”6)

 

그러나 미생물에 의해 이미 엄청난 충격을 받은 인구에 결정타를 날린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식민 당국에 의한 강요 노동이었다. 금과 은을 갈망한 에스파냐 제국은 (자유롭든 그렇지 않든) 원주민들을 광산의 사실상의 노예제도뿐 아니라, 거대한 농업용 토지의 농노 상태로 몰아넣었다. 아즈텍의 권력을 더 쉽게 쓰러뜨리고 그들의 신분적 특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에스파냐 의회를 지원한 토착 귀족(추장)에 의존하면서, 에스파냐 하급 귀족들의 귀족정은 임금 노예제, 즉 식민 국가에 의해 정해진 비참한 임금을 강제함으로써 번성했다.

 

1542년 이후, 토착민 노예화 금지는 그들이 노동 상태에 처하는 것을 공식화했을 따름이다. 그것은 또한 번성하는 흑인 노예무역을 수반했는데, 흑인 노예는 이미 카나리아 제도(Canary Islands)의 플랜테이션에서 이용되고 있었다. 라스카사스는 처음에는 가내 이용을 위해 흑인 노예 수입을 수용했지만, 이내 후회했다. ‘부주의에 대해 자책하면서,’ 도미니크회 수사는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흑인 노예제는 인디언 노예제만큼이나 부당하다.”7)

 

아메리카 대륙에서 노예제도라는 재앙의 발전은 또한 그 대륙에 존재하지 않았던 또 다른 미생물 재앙을 수입하는 사악한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아프리카 원숭이들이 옮겨온 ‘황열병 바이러스’의 도입은 아메리카 대륙의 원숭이들과 토착민들을 대규모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노예제도와 같은 칭호로서,8) 강제 노동은 아시아9)와 아프리카 양쪽에서 자본주의 체제가 한창일 때 확산하였을 따름이다. 레오폴드 2세 치하에서, 벨기에의 콩고는 왕의 개인적인 재산이었는데, 국왕과 막대한 수익을 공유한 대규모 광산 회사들과 거대 대농장 주인들에 부과한 흉포한 농노제를 경험했다. 또한, 식민지 정부는 앙골라와 북로디지아에서 44,000명 이상의 노동자를 들여왔다. 이 노동자들은 진드기 열병, 독감, 폐렴, 과로 또는 되풀이되는 광산 ‘재난’으로 사망했다.

 

우리는, 알버트 런던(Albert London)과 앙드레 지드(André Gide)의 증언을 통해서, 프랑스 자본에 의한 콩고-해양 철도(Congo-Ocean railway) 건설이 낳은 인간 재앙에 대해서 알고 있다. 그 공사는 23,000명 이상의 희생자를 낳았다.

 

역사가 엘리키아 음보콜로(Elikia M’Bokolo)는 자본주의 체제의 야만적인 도입으로 야기된 생태, 인구 그리고 보건 재앙을 아주 잘 요약했는데, 자본주의는 인간을 이윤을 위한 살코기나 총알받이로 변형시켰다.

 

“두 콩고 지역의 특권 양여 회사 시스템에 의해 야기된 생태적 재앙과 인구 파국은 거의 모든 식민화된 지역을 덮쳤던 훨씬 더 일반적인 현상의 극단적인 형태일 뿐이었다: 세네갈(황열병, 페스트)이나 아이보리 코스트(황열병)에서처럼 마다가스카르(페스트)의 극적이거나 치명적인 전염병, 사하라 사막 지역과 앙골라처럼 상이한 지역의 가뭄과 기근, 그리고 전염병, 가축 돌림병, 전쟁, 초과 사망률이 중·동부 아프리카에 지옥 같은 주기로 뒤섞여 나타났다.”10)

 

따라서 전체 인구가 16세기 이래로 성장하는 자본주의의 멍에에 매여 있었다. 죽도록 착취당하고, 강제 노동이나 노예제도에 의해 쇠약해지고, 바다와 육지로 이어지는 무역 루트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유행병을 견뎌낼 수 없어서, 그들은 전 세계로 영향력을 확장한 위대한 몰록(Moloch: 인간을 제물로 바쳐 섬기는 신), 맘몬(Mammon: 부나 금전의 신), 돈의 신에 희생되어야 했다.

 

“돈은 모든 것의 사형 집행자이고, 모든 것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

몰록이다.……

사실상 돈은 진정한 재산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 몰록이다.“11)

 

“자본은 전 세계를 제물로 바칠 것을 요구하는 몰록처럼 보인다.”12)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자본 괴사의 시기에 생물학 무기

 

생물학 무기(박테리아와 바이러스)의 사용은 전쟁만큼이나 오래되었다. 고대의 병사들은 화살에 썩은 고기나 부패한 피를 살짝 묻힘으로써, 다시 말해 화살에 독성을 입혀 그만큼 잘 감염되도록 만들어, 화살의 파괴력을 강화했다. 스키티콘(Skythikon: 비잔틴의 기마 궁수들), 스키타이 궁수들의 전문 독은 똥거름에서 부글부글 끓는 유기물 세균뿐 아니라 여러 독성 물질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혼합물은 중독뿐 아니라 가스괴저, 파상풍, 또는 여타의 수포 감염증을 일으켰다.13)

 

자본주의 팽창의 초기에, 우리는 상업적·식민지 전쟁을 벌이는 동안 생물학 무기의 첫 번째 사용에 주목한다. 천연두가 북아메리카 영국 군대의 총사령관 제프리 애머스트(Jeffery Amherst) 장군에 의해 사용된 것은 7년 전쟁(1756~1763년) 시기였다. 그는 1763년 7월에, 토착민들의 반란이 맹렬했던 폰티액 전쟁(Pontiac War) 동안에, 아래와 같이 썼다. 생물학 무기의 사용은 ‘인종 청소’, 즉 그 용어가 만들어지기 전의 진정한 종족 집단 학살 계획의 일부였다.

 

“이 불만 가득한 인디언 부족들 사이에 천연두를 확산시킬 방법을 찾을 수 없는가? 이 기회에 우리는 우리가 지닌 모든 술책을 사용하여 그들을 패배시켜야만 한다.”14)

 

그리고 이 ‘의문’ 뒤에, 천연두로 오염된 담요들을 사용함으로써 신속한 적용이 이루어졌다. 이 멋진 작업으로 그는 결국 명예로운 영국의 귀족원(일반적으로 상원이라고 번역) 의석을 얻었다.

 

토착민들을 전멸시키는 이 기술은 지난 두 세기 동안에 잊히지 않았다. 그것은 이런 종류의 ‘고전’으로 남아 있다. 다른 사례로 브라질의 경우를 보자. 대지주들과 그들의 측근들은, 천연두나 마을들을 파괴하기에 적절한 다른 질병으로 토착민들을 오염시키기 위하여, 병원에서 나온 의복을 토착 인디언들에게 ‘제공’했다.15)

 

자본주의의 완전한 발전과 전 세계적 규모로 제국주의의 치명적인 대립이 ‘군사화’될 수 있는, 다시 말해서 화학 무기(그리고 1945년 이래로는 핵무기)와 같은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생물학 물질들에 관한 과학적 연구를 이끌었다. 그것의 치사율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생물학 무기는 몇 가지 기준 — 테어도어 로즈베리(Theodor Rosebury, 1904~1976)의 기준으로 알려진 것 — 을 만족해야 한다. 직접적인 전염성, 최소 감염량, 감염이나 중독 경로, 잠복 기간이나 첫 번째 징후 지속 기간, 자연환경에서 생존, 생산과 보관의 용이함, 저장된 생산물의 안정성, (가능한) 치료법 같은 것이 그것이다.16)

 

극비리에 수행된 연구 과정에서, 군사 전략가들 — 미국, 영국, 일본, 소련, 프랑스, 이탈리아 등 — 은, 자연환경, 분말, 또는 스프레이 형태에서 안정적이고, 제1차 세계대전 동안에 이미 사용되었던 탄저균의 ‘엄청난 효과’에 주목했다.17) 하지만 페스트균, 야토병(감염된 동물과 접촉하거나 진드기 같은 매개체를 통해서 인간에게 전파되는 질병) 효과에도 주목했다. 또한 죽음의 과학자들은 바이러스들의 “경이로움”에 주목했는데, 그것들의 미세한 크기는 매우 흥미로운 것이었다. 그것들은 필터 소자들의 봉쇄와 개인 마스크를 통과할 수 있다. 그리고 백신에 의한 예방 범위 밖에 있으며 효과적인 치료법도 없다.

 

군사적 ‘총아’는 이제 실험실에서 부활하여, 그것을 멈출 백신이 없는 상태에서 확산할 수 있는 천연두 바이러스 — 1980년 5월 8일에 WHO가 박멸되었다고 선언했다 — 일 것이다.18) 이것에 절지동물에 의해 전염되는 뇌염(진드기를 매개체로 하는 뇌염, 치쿤구니야, 뎅기열,19) 황열병, 베네수엘라 말 뇌염)을 유발하는 바이러스들을 추가할 수 있다. 그런데 박쥐에 의해 전염되는 바이러스들은 깊이 연구되었는데, 특히 중국 실험실에 많이 연구되었다. 마르부르그바이러스, 오스트레일리아의 리사 바이러스, 니파 바이러스(말레이시아, 인도, 방글라데시) 등이 박쥐가 옮기는 바이러스이다. 곤충의 경우에는, 군사 프로그램(곤충학전)20)에 사용되는 것들은 페스트, 콜레라 같은 것의 생물학적 전달자로 쓰일 수 있다.

 

극비 군사 실험실에서 수행된 이 모든 프로그램은 장래의 생물학 전쟁을 대비하는 것인데, 전면적인 집단 학살과 유사하다. 과거에 ‘실험적으로’ 사용되었을 때, 그것들은 소량에도 치명적인 효과를 나타냈다.

 

일본 제국 군대가 점령했던 만주(1932~1945년)는 세균전의 시험장으로 사용되었다. 핑팡(하얼빈)에 위치한 주 연구센터(731부대)는 150개 이상의 건물, 5개 위성 캠프를 포함하고, 적어도 3천 명의 과학자와 기술자를 고용하고 있었다. 이 범죄 과학자들은 콜레라, 페스트, 탄저병 약품을 중국인 전쟁 포로에게 대규모로 실험했다. 거의 3천 명의 포로들이 끔찍한 고통 속에 목숨을 잃었다. 중국 도시들에 대해 12번의 생물학 공격이 이루어졌는데, 식수와 식료품을 콜레라, 페스트, 탄저균으로 오염시켰다. 사망자 수는 수천 명이었다.

 

에티오피아 전쟁(1935~1936년) 동안에, 무솔리니는 세균 무기 — 에티오피아 주민과 군대에 광범위하게 사용한 [화학] 가스와 함께 — 를 실험할 뻔했다. 바돌리오 장군(Marshal Badoglio)이 그를 말렸는데, 물론 ‘인도주의’에서 벗어나서가 아니라 전략적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이유였다. 일본이 패배하고 731부대가 해체된 후에, 이 모든 ‘실험’은 소련과 미국의 ‘세균 공학’의 ‘모델’로 사용되었다.

 

미국은 1942년부터 1960년대 말까지 연구를 수행했다. 치명적인 물질들이 주민들을 대상으로 실험되었는데, 특히 수감자와 양심적 병력 거부자들을 대상으로 삼았다. 한국 전쟁(1950~1953년) 동안에, 탄저병, 페스트, 콜레라의 균들이 북한군과 중국군들 사이에서 확산하였다. 분무제뿐 아니라 파리와 벼룩 같은 것들이 이용되었다. 분무제의 경우에, 미군이 항공기를 이용해 적에게 살포했다.21) 결과들이 뒤섞이고, 여러 사고(세균과 바이러스의 ‘유출’)가 이어지면서, 미국의 생물학 무기 비축물은 1971년 5월에서 1973년 2월 사이에 (공식적으로는) 파괴되었다.

 

소비에트 국가 자본주의 — 그 지배 계급에 의해 ‘현실 사회주의’라고 불렸다 — 는, 스탈린에서 코르바쵸프까지, 이 생물학 무기 경쟁에서 뒤지지 않았다. 한 다스의 병원균 군사화가 실험실 프로그램으로 들어갔다. 탄저병, 야토병, 브루셀라병, 페스트, 베네수엘라 말 뇌염, 발진티푸스, Q열,22) 박테리아에 의해 생산된 보툴리눔 독 등이 그것이다. 생물학 무기에 관한 모든 연구를 금지하는 국제 조약23)이 체결되고 몇 개월이 지난 1973년에, 국가 법령으로 세균 무기를 위한 40개 연구 센터와 생산기지를 복합시설(BIOPREPARAT(바이오프레파라트) = 생물학제 제조)을 설립했다. 특별한 목적의 미사일, 로켓, 폭탄의 제조는 병원균을 퍼뜨리는 것을 목적으로 했을 것이다. 그 프로그램은 1992년에 공식적으로 중단되었다.

 

그러한 프로그램은 소수인 지배 자본가 계급이 대량 인종 학살을 계획하고 있는 국가에서 주민을 대상으로 수행될 수도 있다. 아파르트헤이트의 ‘백인’ 남아프리카에서, 일급 비밀 프로젝트 — 1985년에 ‘닥터 데스’ 바테르 바손(Wouter Basson)에 의해 수행되었다 — 가 시행되었다. 그것은 흑인을 목표로 삼아서 극단적인 수단 — 탄저균, 에볼라, 에이즈, 콜레라, 대규모 불임화, 인종적으로 선별한 화학 독물 — 을 사용했다.24)

 

이라크의 경우는 ‘내부의 적들’에 대한 화학, 생물학, 방사선, 핵(CBRN) 전쟁의 교과서적인 사례이다.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는 인상적인 생물학 병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쿠르드인들에 대해서 화학 무기만 사용하는 것으로 스스로 제한했다. 1988년 3월 16일에서 19일까지 쿠르드 마을 할랍자에 이라크군 미그(러시아제)와 미라주(프랑스제) 전투·폭격기들이 살상용 가스들 — 머스터드 가스, 사린, 그리고 타분 — 을 살포했다. 희생자 수는 5,000명이었다. 특히 이 무기들은 주로 프랑스, 벨기에, 독일 회사들로부터 공급받은 것으로, 이 회사들의 기술자와 화학자들은 사담이 결정하려는 일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 여러 해 동안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머스터드 가스와 신경가스의 사용에 대해서 사담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라는 국제적인 캠페인들을 차단했다.25)

 

(중국과 러시아를 포함하여) 주요 자본주의 열강은 자신들의 생물학 무기 프로그램을 중단할 의도가 없었다. 사고로 인한 생물학 그리고/또는 화학 물질들의 누출들에 대한 증거가 많이 있다. 더그웨이(유타)에서 1968년에 일어난 사고는 양 6,000마리의 목숨을 앗아갔다. 1969년 4월에 스베르들로프스크(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일어난 사고는 훨씬 더 심각했다. 전염병이 50㎞나 떨어진 곳의 가축에게까지 퍼졌다. 에카테린부르크(스베르들로프스크의 옛 명칭)의 변두리에 있는 군사 연구 센터가 누출 사고의 중심이었다.

 

그러한 ‘누출’은 종교적 분파 또는 극단주의 세력 — 가끔 은밀하게 테러 집단을 무장시키는 국가들로부터 나온다 — 이 연루된, 생물학 무기를 이용한 다양한 형태의 테러로 일어난 고의적일 수도 있다. 몇 가지 사실을 상기해보자. 1984년 9월에 오리건 주의 와스코 카운티에 기반을 둔 라즈네쉬(Rajneeshees) 교파가 오리건 주의 댈러스에 위치한 레스토랑들에서 제공되는 샐러드와 생채소에 살모넬라균을 살포하여, 45명이 입원하는 사태를 일으켰다. 가장 잘 알려진 사례는 1995년 3월 19일 도쿄 지하철에서 옴진리교에 의해 자행된 사린가스 공격인데, 이 사태로 (치명상을 입은 12명을 포함하여) 5,500명이 상해를 입었다. 5만 명의 신도를 지니고 10억 달러의 수익을 올렸던 이 교파는 진보된 생물학 무기 연구 프로그램을 갖추고 있었다. 이 종교 집단은 탄저균과 Q열 균 그리고 보툴리눔 독을 입수하여 저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발생 시 90%의 사망률을 지니는 에볼라 바이러스를 구하려는 시도도 있었다.26)

 

기고문 두 번째 부분 말미에,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다.

 

1. 미생물(박테리아와 바이러스)의 확산은 세계 인구의 극단적인 집중 현상(50%가 도시, 종종 최악의 공중위생 상태이며, 그곳의 미세한 입자들이 호흡기를 공격하는 전염병의 급속한 확산을 진척시키는 오염된 도시에서 살고 있다)으로 더 쉽게 촉진된다.

 

2. 자본의 과도한 상업화(hyper-commercialization)와 과도한 생산의 길을 따르고 있는 미생물은 매우 갑작스러운 인구 폭발(1960년에 30억 명, 2020년에 77억 명)에 따른 병원균처럼 급증하고 있다. 이 미생물들은 항공 운송에서 자유로운 장소를 발견했다. 전 세계 모든 노선으로 2013년에 30억 명의 승객, 2017년에는 40억 명의 승객이 이동했다. 더 느리긴 했지만, 바다를 통해서도 가차 없이 이동하고 있었다. 세계 무역의 90%를 차지하는 상선과 그 종사자들은 세계화의 매혹적인 모습을 보아왔다. 선박 — 오늘날 고급 “대탈출”(super-”Exodus”) 선박으로 변형된 크루즈 선 같은, 여객선을 포함하여 — 의 수는 2013년에 거의 52,000대에서 2018년에 58,000대로 증가했다.

 

3. 거대 자본주의 국가에, 전쟁 준비와 참전은, 전면화된 충돌에서 CBRN(화학, 생물학, 방사선, 핵)를 사용하는 것을 포함하여, 모든 군사적 수단을 정당화한다. 소규모로 그리고 실험적으로 수행되어 온(만주와 한국 전쟁) 생물학 무기의 사용은 국제적인 충돌이 일어난다면 가공할 만한 현실이 될 수 있다. 그러면 생물학 무기를 이용한 테러가 주요 제국주의 열강들에 의해, 용병들에게 하청을 주는 방식을 통해서 수행되게 될 것이다.

 

몇몇 전문적인 음모론자들이 코로나19가 중국의 군사 실험실에서 나왔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어쩌면 그들 국가의 부르주아지로부터 평상시의 태평함을 제거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그것 — 진지한 과학적 조사를 결여하고 있다 — 에 대해서, 우리는 이렇게 답해주어야 한다. 바이러스는 ‘주권론자들(sovereignists)’의 이기적인 창작물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해서 돌연변이를 일으킨다고.

 

이러한 불가피한 돌연변이는 다윈의 법칙에 따르는 자연 선택의 결과이다.27) 그 결과가 불확실한(새로운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이다), 유전 공학을 통한 의도적이거나 우연한 사고에 의한 조작물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가장 위험한 바이러스의 최고의 동인은 추상적인 ‘인간’이 아니라 자본 그 자체이다.

 

자본은 전 지구적 범위로 ‘바이러스처럼’ 확산함으로써, 세계적인 유행병을 악화시키고 그것을 점점 더 통제 불가능하게 하는데, 종종 보건 시스템 붕괴로 그리고 목전의 이윤에 목마른 흡혈귀 자본에 의한 전체 생태계의 체계적인 파괴를 가져온다.

 

 

 

첨언: 마르크스로부터 인용

 

1. 부아기유베르(Boisguillebert, 경제학자)와 관련하여 화폐에 대한 마르크스 글, 「그룬트리세」 II. The chapter on money (note 11)

 

“[상품의] 가격으로 표현된 교환가치는, 이처럼 특별하게 화폐로 변형될 필요가 생기자마자, 희생되어야만 한다. 그리하여 부아기유베르에 의한 다음과 같은 불평이 나온다. 예를 들어 화폐는 모든 사물의 사형 집행인이며, 모든 것이 그에 희생되어야 하는 ‘몰록’이며, 모든 상품들의 전제군주이다. 모든 세금이 화폐로 납부하는 세금으로 변형되면서 절대군주제가 출현하는 시대에, 화폐는 사실상 실제의 부를 그에게 바쳐야 하는 ‘몰록’처럼 보였다.”

 

2. Marx on compound interest bearing capital in ‘Theorien über den Mehrwert’, : 복리가 붙는 자본에 대한 마르크스의 글, 「잉여가치 학설사」, Vol. III (note 12)

 

“자본의 완전한 객관화, 전도, 그리고 혼란은 복리를 산출하는 지본이다. …… 그것은 당연한 권리로서 전체 세계를 희생물로 요구하지만, 그의 본성에서 나오는 그의 정당한 요구는 결코 만족되지 않고 항상 신비로운 운명에 의해 좌절되고 마는, ‘몰록’처럼 보인다.”

 

July 4, 2020

A Free Retriever

옮긴이 | 김종원

 

 

 

<주> 는 아래 링크를 참고해 주세요. (진보넷 블로그에 올리지 못하는 언어가 있으므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파리코뮨 150년] 혁명적 코뮨Ⅱ

[파리코뮨 150혁명적 코뮨Ⅱ

 

  pariscommune3jpg.jpg

 

혁명적 코뮨

 

만일 파리 노동자의 혁명적 코뮨이 갖는 현실적 의미와 관련하여 후기 맑스의 입장을 이해하고자 한다면그 출발점으로서 현대 프롤레타리아의 조직 형태와 부르주아 계급투쟁 초기의 조직 형태 간의 역사적 관계에 대한 맑스의 독창적인 구상을 이해해야 한다코뮨은 착취계급에 대항하는 생산계급의 투쟁으로부터 발생했으며혁명적 행동을 통해 지배적인 부르주아 국가 장치를 파괴했다맑스가 이 새로운 코뮨이 노동해방을 위해 마침내 발견된 형식이라고 칭송했을 때 그가 절대 바라지 않았던 것은― 이후 그의 추종자 일부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 혁명적 코뮨이든 혁명적 평의회 체제든 어떤 확정된 형식의 정치 조직이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에 독보적으로 적합한 잠재적 형식으로 지정되거나 지명되는 것이었다바로 앞 문장에서 그는 코뮨 및 코뮨 내에서 나타나는 이해관계의 다양성을 지속시키는 해석의 다양성에 대해 분명히 지적하고 있으며또한 그는 이미 수립된 이 새로운 정부 형식의 성격을 철저하게 발전 가능한 정치 형식이라고 표현했다파리코뮨 가담자들이 전쟁의 포화 속에서 창조해낸 새로운 형식의 정치권력이 지니는 바로 이 무한한 발전 가능성이야말로 코뮨을 부르주아 정부의 고전적 발전”, 즉 현대 의회제 공화국의 중앙집권적 국가권력과 구별되도록 하는 것이다맑스의 근본적인 전제는 노동계급의 현실적 이익을 강력하게 추구할 때 이러한 형식이 결국 계급과 계급 지배국가라는 존재를 형성하는 경제적 토대를 전복시킬 지렛대로써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혁명적 코뮨 체제란 따라서 특정한 역사적 조건 하에 있는 발전 과정의 정치 형식이 된다좀 더 분명히 말하면 이는 혁명적 행동의 정치 형식으로서이때 그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목표는 더는 어떤 하나의 형식을 지닌 국가지배를 유지하거나 또는 심지어 보다 새롭고 보다 고차적인 국가유형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모든 국가가 완전히 사라지도록” 하는 물질적 조건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마지막 조건이 없이는 코뮨 체제는 불가능하며 환상에 불과하다고 맑스는 이 맥락에서 그가 할 수 있는 한 분명하게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혼란스러운 모순이 남아 있다맑스가 한편으로는 파리코뮨을 노동계급이 경제적·사회적 자기해방을 달성하기 위하여 마침내 발견한 정치 형식으로 특징지으면서도 동시에또 한편으로는 파리코뮨이 이러한 목적에 적합한 이유가 주로 형식이 없다는 점즉 비규정적이며 다양한 해석에 대해 개방적이라는 점에 있다고 강조하기 때문이다맑스의 입장이 완전히 명료하게 드러나는 지점은 단 한 군데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당시 그의 주장은 그동안 그가 부딪쳐 오면서 이 독창적인 정치적 구상에 통합해 낸 특정한 정치 이론들의 영향 아래 있었을 뿐적어도 파리코뮨이라는 엄청난 경험 자체의 실질적인 감동 속에서 제기된 것은 아니다. 1847~1848년 코뮤니스트 선언에서도또 1864년 인터내셔널 노동자 대회 개회사에서도 늘 그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권력을 장악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말해 오긴 했지만이제 파리코뮨이라는 경험은 그에게 노동계급은 이미 주어진 국가장치를 전용하여 그 자신의 그 목적을 위해 작동시킬 수 있어야 할 뿐 아니라혁명적인 방식으로 기존의 부르주아 국가 장치를 분쇄해야만 한다는 점을 입증해 주었던 것이다이후 이 문장은 특히 1917년 레닌이 국가에 대한 완전한 맑스의 이론을 이론적으로는 자신의 저작 국가와 혁명에서 부활시키고 또 실천적으로는 그 집행자로서 10월 혁명을 완수하여 현실화시킨 이래맑스주의 정치이론 전체의 본질적인 주요명제이자 핵심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단지 국가권력이 노동계급을 위해” 기존 부르주아 국가의 국가 장치를 전용하여“ ”노동계급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작동시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이러한 소극적 규정만으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새로운 혁명적 최고 국가권력의 형식적 특성에 대하여 아직 그 어떤 것도 적극적으로 말해진 바 없음이 명백하다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야만 한다왜 하필 특히 코뮨이라는 규정된 형식이 노동계급을 위해 마침내 발견된 정치형식이 되어야 하는가왜 맑스는 프랑스 내전에서 그렇게 주장했으며또 왜 20년 후 엥겔스는 프랑스 내전」 3판 서문에서 다시 한번 매우 상세하게 코뮨의 특징을 서술했는가맑스와 엥겔스는그러니까 프랑스 대혁명으로 실현된 혁명적 부르주아의 중앙집권적 독재체제에 대한 저 열렬한 찬양자들은 도대체 왜정확히 코뮨이 부르주아 체제와 완전히 대립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만 한다면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정치 형식으로서 간주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과학적 사회주의의 두 창립자인 맑스와 엥겔스가 제시한 바에 따르는 정치적 강령과 목표들을 좀 더 정확히 분석해 보면사실상 파리코뮨 반란 이전뿐 아니라 그 이후에서도 이 정치이론들과 1871년 파리코뮨으로 실현된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형식이 어떤 특정한 의미에서 합치된다는 주장은 유지될 수가 없다실은 제인터내셔널에서 맑스의 강력한 반대자였던 미하일 바쿠닌은 이 점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 역사적 진실을 알고 있었다맑스가 소급적으로 파리코뮨을 추가한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냉소적으로 말했던 것이다. “코뮨주의 반란의 영향은 매우 강력해서 맑스주의자들조차 자신들의 사상을 전부 잊어버리고 그에 경의를 표하도록 만들었다맑스주의자들은 그보다 더한 일도 했다모든 논리나 자신의 가장 깊숙한 감정과는 반대로 이들은 코뮨 및 코뮨의 목표를 자신들의 강령으로 채택한 것이다이들은 그렇게 해야만 했다그렇지 않으면 이들은 모두에게 거부당하거나 버려질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혁명이 전 세계에 불러일으킨 열정은 그토록 강력했다.” 

 

1871년 파리코뮨 가담자들의 혁명적 이념 중 일부는 바쿠닌과 프루동의 연방주의적 강령으로부터또 일부는 블랑키주의 및 아주 약간의 맑스주의가 남아 있는 혁명적 자코뱅파의 사상적 조류로부터 유래했다. 20년 후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주장에 따르면파리코뮨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었던 블랑키주의자는 새로운 혁명정부 수중의 모든 권력을 엄격한 독재로 집중시킨다는 자신들의 강령 대신 그와 정반대되는 강령즉 파리코뮨과 프랑스 모든 코뮨의 자유로운 연방이라는 강령을 선언했다는 사실의 엄청난 무게에 짓눌려 있었다바로 이 주제에 관해서 동일한 모순이 지금까지 확인된 맑스 및 엥겔스의 정치이론과 이들이 코뮨을 노동계급 정부의 마침내 발견된 정치형식으로 무조건 승인했다는 현재의 지배적인 이론 사이에 발생한다이 오류는 레닌이 1917년의 저작 국가와 혁명에서 맑스 국가이론의 전개에 대해 서술했을 때 생겨났다레닌은 마치 맑스가 1852년까지의 전환기에 이미 (1847~1848년에 코뮤니스트 선언에서 제시했던 것처럼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과제에 대한 이론적 정식화를 계획했고그 취지는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가 기존 부르주아 국가의 최고권력을 파괴하고 전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는 듯이 서술했다이에 반해 레닌의 테제는 맑스와 엥겔스의 증언을 있는 그대로 담고 있다맑스와 엥겔스는 모두바로 1871년 파리코뮨의 경험이 최초로 노동계급은 단순히 이미 주어진 국가 장치를 전용하여 이를 그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작동시킬 수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효과적으로 입증했다고 반복적으로 밝혔다는 것이다즉 논리적 간극을 제공한 것은 레닌 자신이었다다른 곳에서 그는 국가에 대한 맑스와 엥겔스의 언급을 그렇게나 역사적으로 정확하고 철학적으로 정밀하게 재생산해냈음에도 불구하고혁명적 맑스주의 국가이론의 전개를 설명할 때는 이 지점에서 20년이라는 기간을 단숨에 건너뛰었던 것이다레닌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1852)에서 곧장 프랑스 내전(1871)으로 건너갔으며그러는 가운데 그가 간과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맑스가 <인터내셔널 개회사>에서 다음과 같은 정교한 한 문장으로 노동계급의 정치적 강령” 전체를 요약해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제 노동계급의 중대한 과제는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다.

 

맑스가 파리코뮨의 경험에 근거하여 그 이전보다 훨씬 더 분명하고 명백한 방식으로 부르주아 국가 장치의 분쇄 및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 건설의 불가피한 필연성을 주장하던 1871년 이후 시기에도 아직그는 혁명적 파리코뮨을 모델로 한 정부형식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정치형식으로서 선전하는 일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역사적인 한순간 ― 승리한 반동 세력에 맞선 코뮨의 영웅적 투사들 및 희생자들을 대표하여 맑스가 무조건 주저 없이 앞으로 나섰던 바로 그 순간 ― 그가 이러한 입장을 지지했거나 또는 지지한 것처럼 보였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나는 그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첫 번째 국제조직을 대표하여 피와 열정으로 써 내려 간프랑스 내전에 대한 인터내셔널 노동자대회 총평의회 연설에 주목하고자 한다파리코뮨의 혁명적 본질을 지키기 위하여맑스는 자신의 입장에서는 실제로 역사에 출현한 이 특별한 형식을 이용했어야 한다는 비판을 내놓기를 자제했다만일 그가 이를 넘어 한 걸음 더 나아가 혁명적 코뮨 체제라는 정치형식을 곧장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마침내 발견된 형식으로서 축하했다면그 이유는 더는 단지 파리의 혁명적 노동자들과의 자연스러운 연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어떤 특수한 부차적 목적에도 있게 된다인터내셔널 총평의회 연설을 쓰면서 파리코뮨 가담자들의 영예로운 전투 및 그 패배 직후 맑스는 코뮨의 맑스주의를 추가하고자 했을 뿐 아니라 동시에 맑스주의에 코뮨을 추가하고자 했다만일 우리가 이 주목할 만한 문건의 의미 및 중요성의 범위를 정확히 파악하고자 한다면즉 이 문건을 그저 마치 영웅 서사시나 죽음의 애도처럼 보이는 고전적인 역사적 기록으로서만 이해하고 말 것이 아니라면우리는 이 문건을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해야만 한다오히려 저 모든 것을 넘어서서 이 문건은당시 이미 시작되어 이후 곧 제인터내셔널의 붕괴로 이어지게 될 씁쓸한 투쟁 속에서 맑스가 그 가장 내부의 반대자들에 맞서 내놓은 단편적인 반론으로 보일 수도 있다이 단편적이고 부차적인 목적은 맑스가 1870년 리옹과 마르세유 코뮨의 반란으로 시작되어 1871년 파리 코뮨의 반란으로 절정에 달했던 프랑스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운동 간의 상호연관성을 역사적으로 정확하고 완전한 방식으로 평가하지 못하게 만들었다또한 이는 맑스가 혁명적 코뮨 체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의 마침내 발견된 정치형식으로서또한 중앙집권적인 정부로서 환영받았다고 ― 비록 이것이 그 실제 본질과는 반한다고 하더라도 ― 설명하도록 만들었다.

 

이미 칼 맑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스스로파리코뮨이 본질적으로 연방주의적 성격을 지녔다는 혐의를 레닌보다도 더 부정한 바 있다만일 맑스가 파리코뮨으로 생겨난 프랑스 모든 코뮨 체제의 역사를 짧게 서술하면서 그 명백히 연방주의적인 양상을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면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여전히 목적 의식적으로 이러한 코뮨 체제를 통해 국민의 동맹은 깨어지지 않았으며 반대로 조직되었다는 (프루동이나 바쿠닌과 같은 연방주의자들이 당연히 거부하지 않았던바로 그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그는 이러한 코뮨 체제 내에서 중앙 정부가 처리해야 할 것으로 여전히 남아 있는 작지만 중요한 기능들을 강조했다그가 주목한 것은 코뮨의 계획에 따르면 이러한 기능들이 ― 일부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것처럼 ― 폐지될 수 없으며코뮨의 (철저하게 책임을 지는시민 봉사자들에게 양도되어야 한다는 점이었다이를 기초로 이후 레닌은 코뮨의 사례에 대한 맑스의 저작에서 연방주의의 흔적은 발견될 수 없다, ”맑스는 중앙집권주의자이고여기 인용된 그의 설명에서는 중앙집권주의에서 벗어나는 어떠한 일탈도 발견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국가와 혁명이는 상당히 정확하지만그러나 레닌은 이 지점에서 파리코뮨에 대한 맑스의 해설이 파리코뮨 가담자들의 열망으로 그 첫 시작에 실현되었던 이 혁명적 코뮨 체제를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특징짓는 것만은 제외시켰다는 점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빠트려 버렸다.

 

파리코뮨의 연방적이고 반()중앙집권적 성격으로부터 가능한 한 벗어나기 위하여 맑스 및 엥겔스와 마찬가지로 레닌다른 무엇보다도 지배적인 부르주아 국가 장치의 파괴 등과 같은 것으로 나타나는 부정적 양상을 강조했다이 점에 대해서는 혁명가들 사이에 어떠한 논란도 없다맑스와 엥겔스그리고 레닌이 정확하게 강조했던 것은파리코뮨에 의해 공표된 정치적 최고 권력의 형식이 지니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적 성격의 결정적 토대가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의 실현이라는 그 사회적 실재 속에서 발견되어야 한다는 점이다이들은 자신들의 연방주의적인” 반대자들에게 분권화된 연방국가 형식은 그 자체로 현대 부르주아 국가의 중앙집권적 정부 형식과 다름없이 전적으로 부르주아적이라는 점을 매우 신랄하게 지적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강력하게 대립했던 반대자들과 같은 오류를 저질렀다코뮨 체제의 연방주의적” 성격에 집중해서가 아니라오히려 의회주의나 그 밖의 부르주아 국가 체제의 지양된 형식으로부터 파리코뮨을 구별 짓는 다른 형식적 차이들을 (예를 들어시민군을 통한 상비군의 대체에 관하여집행부 권력과 입법부 권력의 통합에 관하여, “코뮨” 공무원을 해임할 책임과 권리에 관하여지나치게 많이 강조했기 때문이다그래서 이들은 적지 않은 개념상의 혼란을 만들어냈으며이는 파리코뮨에 대한 맑스주의의 입장과 관련해서뿐 아니라또한 이후 혁명적 평의회 체제라는 새로운 역사적 현상에 대한 혁명적 맑스주의의 방향 설정에서도 해로운 결과를 초래했다. “연방” 형식으로 부르주아 국가를 극복한다는 프루동이나 바쿠닌에 동의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은 것처럼마찬가지로 오늘날 일부 맑스주의적인 혁명적 코뮨의 신봉자들이 혁명적 평의회 체제에 관하여 맑스와 엥겔스레닌의 그러한 잘못된 설명을 토대로 언제든지 취소될 수 있는 위임에 매여 있는 단기적인 의회의 대표들이나 또는 평균 임금을 위해 사적인 계약으로 고용된 정부 공무원들은 선출된 의회정치가에 비해 보다 덜 부르주아적인 방식일 것이라고 믿는다면 이는 전혀 타당하지 않다이들이 만약 어떤 코뮨의” 체제 형식 또는 평의회와 유사한” 체제 형식을 도입함으로써 결국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정당이 통치하는 국가가 모든 국가에 달라붙어 있는 저 계급억압의 수단이라는 성격을 완전히 포기하도록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면이는 완전히 틀렸다최종적으로 코뮨주의 사회 속에서 국가를 사멸시킨다는 이론즉 맑스와 엥겔스가 유토피아 사회주의의 전통으로부터 이어받아 당대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실천적 경험을 토대로 더욱 발전시킨 그 이론 전체가 그 혁명적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 것은우리가 레닌과 함께 더는 소수가 다수를 억압하는 국가가 아니라 인민 그 자체라는 다수가 자신들의 억압자를 억압하는” 국가가 존재한다고 선언한 그 순간또한 이때 참된 민주주의 또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실현자로서의 능력을 갖추는 그러한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는 이미 사멸 중인 국가이다.” (국가와 혁명)라고 선언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참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이론의 두 기초이론1871년 파리코뮨 반란이나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과 같은 투쟁의 특정 국면에서 현실적 요구들에 일시적으로 순응함으로써 결국 폐지될 위험에 이르렀던 그 이론들을다시 충분히 명료하게 정립할 때가 왔다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본질적인 최종목적은 어떤 하나의 국가가 아니다. “민주주의” 국가도, “코뮨” 국가도또는 심지어 평의회와 유사한” 국가도그 어떤 국가도 아니다그 최종목적은 계급도 없고 국가도 없는 코뮨주의 사회이며그 종합적인 형식은 더는 어떤 종류의 정치권력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그러한 연합(코뮤니스트 선언)이다.

 

맑스주의적 개량주의자들의 환상에 따라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아무런 변화 없이 지양된 국가 장치를 장악해내든또는 혁명적 맑스주의 이론에 따라 급진적으로 그 지양된 형식을 분쇄하고 또 자발적으로 창조되는 새로운 형식을 통해 대체함으로써 그러한 형식을 전용하든둘 중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다― 그렇게 될 때까지 어떤 경우가 됐든 이러한 국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코뮌주의 사회로 변화하는 혁명적 기간을 거치면서 그 정치형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 계급적 성격 및 사회적 기능을 통해 부르주아 국가와는 달라질 것이다혁명적 코뮨과 혁명적 평의회 체제또는 역사적으로 출현하는 다른 모든 노동계급 정부의 진짜 비밀은 이러한 사회적 내용에 담겨 있을 뿐다른 어떤 인위적으로 고안된 정치형식이나 또는 일부 특수한 역사적 환경에서 언젠가 한 번 실현된 적이 있었던 그러한 특수한 제도 속에 감춰져 있는 것이 아니다.

 

2013년 코뮤니스트 2, ‘혁명적 코뮌칼 코르쉬’ - 남궁원

2021년 파리코뮨 150년 재발행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파리코뮨 150년] 혁명적 코뮨Ⅰ

[파리코뮨 150혁명적 코뮨

 

pariscommune2jpg.jpg

 

 

 

<>

그래적어도 새로운 시간은 준엄하다.

승리를 손에 넣었다고 말할 수 있기에이를 갈아대던 일도불같던 기적 소리들도악취 나던 한숨들도 가라앉는다모든 더러웠던 추억들도 사라진다내 마지막 회한들도 달아나니, - 거지강도죽음의 벗온갖 낙오자들에 대한 질투도. - 저주받은 것들응징할 수 있다면!

절대적으로 현대적이어야 한다.

찬송가 따위는 없다그러니 의기양양하게 발걸음을 옮겨라힘든 밤이여메마른 피가 얼굴 위에서 먼지처럼 일어나고나의 배후에는 끔찍한 관목만이 있을 뿐!…… 영혼의 전투는 인간들의 싸움처럼 야만적이다정의에 대한 환시(幻視)는 신이 홀로 누리는 즐거움.

하지만 지금은 전야(前夜)흐르는 모든 생기와 실제의 애정을 받아들이자그리고 새벽에열렬한 인내로 무장하고우리는 빛나는 저 도시로 들어갈 것이다.” (랭보, 1873)

 

  pariscommune3jpg.jpg

 

<소개>

파리코뮨은 1871년 3월 18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붉은 깃발을 올렸고, 72일간 이 깃발을 휘날리며 잘 무장된 적대적인 세계의 공격에 맞서 맹렬한 전투를 벌였다이것이 1871년 파리 노동자의 혁명적 코뮨이다이에 대해 칼 맑스는 1871년 5월 30일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의 프랑스 내전에 관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파리코뮨의 진정한 비밀은 이것이 본질적으로 노동계급의 정부였으며, 생산계급이 유산계급에 맞서 벌인 투쟁의 결과였으며노동의 경제적 해방이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마침내 발견된 정치형태였다는 사실에 있다. 20년 후직접적인 국제적 대중행동의 첫 번째 형태로서 인터내셔널이 결성되고 프롤레타리아 메이데이 기념일이 제정되었던 그때다시 한번 유산계급이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라는 놀라운 말이 울려 퍼질 때마다 지독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깜짝 놀란 속물들의 면전에 긍지에 찬 문장을 들이댔다. “그렇다면 여러분이러한 독재는 어떤 모습일지 알고 싶습니까파리코뮨을 보십시오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였습니다.

 

코르쉬는 일평생 혁명적 실천 및 사회주의 모델의 발전에 관심을 쏟았다초기의 코르쉬는 노동자평의회 또는 소비에트를 진정한 사회주의적 기관으로서 지지했다레닌주의 시기의 코르쉬는 잠시 정당과 국가에 대한 레닌주의의 테제를 혁명적 실천의 결정적 수단으로서 수용하기도 했지만그러나 이 기간에조차도 독일코뮤니스트당 내의 레닌주의 강경파로서였다그는 노동계급의 자주적 행동과 노동자평의회를 강력하게 강조했다레닌주의에 대한 신념이 무너지면서 코르쉬는 새로운 혁명적 역량을또한 혁명적 변화를 위한 새로운 가능성 및 그 모델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1920년대 후반 좌익반대파 기간의 코르쉬는 코뮤니스트당과 소비에트 국가의 정책을 혹독하게 비판했으며혁명적 노동조합의 투쟁을 지지했다.

 

코르쉬는 역사적 현실에 뿌리내리지 않은 추상적 이론에는 결코 매달리지 않았다따라서 그는 맑스주의 혁명 이론을 재검토하며 파리코뮨과 러시아 소비에트독일 노동자평의회에서의 혁명 모델에 대한 역사적 탐구의 단계를 밟아나갔다.

 

파리코뮨에 관한 두 개의 에서 코르쉬는 혁명적 정치의 성격에 대하여 진지하게 몰두했다첫 번째 글은 1929년 좌파 저널인 행동(Die Aktion)에 실렸으며, 1931년 같은 저널에 실린 두 번째 글은 첫 번째 글에 관한 논의 및 비판에 대한 응답이었다. 여기서 코르쉬는 파리코뮨을 혁명적 실천 모델로서 중요하게 만드는 것은 그 사회적·경제적 내용이지 정치적 형식이 아니라는 점을 논증하고자 했다파리코뮨에서 본보기가 되는 점은 민중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하기 위해 투쟁했으며 또한 정부 및 사회적 삶의 새로운 형태를 스스로 창조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것이다코르쉬의 지적에 따르면슬프리만치 짧았던 파리코뮨 시대의 정치 형식은 그것이 어떤 것이었는지조차도 실은 명백하지 않다맑스는 파리코뮨의 뚜렷한 특징으로서 개방성과 잠재된 발전 가능성을 강조했고이에 동의하면서 코르쉬는 파리코뮨이 비극적으로 짧아 보일 수는 있지만자치정부 및 급진적 사회 변화에 대한 영웅적인 실험이었다고 말한다.

 

파리코뮨을 연구하는 데 있어 코르쉬의 정치적 전략은 맑스가 프랑스 내전이라는 위대한 글에서 사용한 전략과 대응한다왜냐하면 코르쉬가 지적하듯이, “맑스는 파리코뮨 속에 맑시즘을 결합하고자 했을 뿐 아니라 동시에 파리코뮨을 맑시즘에 결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맑스의 글과 유사하게 코르쉬의 연구는 사회적·경제적 투쟁의 우선성을 강조하는 데 관심이 있었으며모든 투쟁을 정치 권력과 국가에 종속시키려는 사람들따라서 정당이 노동계급 조직의 중심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맞서 단편적인 논박을 벌였다첫 번째 글의 말미에서 코르쉬는 노동계급 조직의 중심적 역할을 노동조합이 맡아야 한다고 보았으며또한 혁명적 투쟁의 가장 중요한 초점은 노동계급의 해방을 위한 사회적·경제적 투쟁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혁명적 코뮨의 두 번째 글 끝부분에서 코르쉬가 논쟁을 벌이는 것은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 국가의 역할을 과장하는 사람들이다이를 위해 코르쉬는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본질적인 최종목적은 결코 하나의 국가가 아니다그 국가가 아무리 민주적이든 코뮨적이든 또는 심지어 평의회와 유사하든 마찬가지이다정확히 그 최종목적은 계급도 없고 국가도 없는 코뮤니스트의 사회이다그 사회의 종합적 형식은 이제 어떤 종류의 정치권력이 아니라, ‘모든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전체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그러한 연합(코뮤니스트 선언>이 된다.”

 

  pariscommune1jpg.jpg

 

혁명적 코뮨

 

혁명적 코뮨이라는 의제를 기반으로 노동계급이 자본주의적 속박에서 벗어나 혁명적으로 스스로를 해방하는 현재이 역사적 시점에서 모든 계급의식적 노동자는 혁명적 코뮨에 관하여 과연 무엇을 알아야만 하는가또한 오늘날 정치적으로 완전히 계몽되고 그리하여 스스로 자각한 프롤레타리아트 계층이 혁명적 코뮨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이 그에 대한 맑스와 엥겔스레닌의 적절한 몇몇 논평과 더불어 존재한다이는 1차 대전에 앞서 사회민주주의의 선전이 이루어진 지 반세기 만에또한 최근 15년간의 강력하고 새로운 경험 이후로 현재이미 프롤레타리아 의식의 본질적인 부분이 되어버렸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세계사의 한 조각을 다루는 유파는 과거 카이저 제국의 군주정에서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적” (바이마르공화국 내에도 대체로 거의 없다나는 지금 영광스러운 파리코뮨의 역사와 그 의미에 대해 말하고 있다파리코뮨은 1871년 3월 18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붉은 깃발을 올렸고, 72일간 이 깃발을 휘날리며 잘 무장된 적대적인 세계의 공격에 맞서 맹렬한 전투를 벌였다이것이 1871년 파리 노동자의 혁명적 코뮨이다이에 대해 칼 맑스는 1871년 5월 30일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의 프랑스 내전에 관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파리코뮨의 진정한 비밀은 이것이 본질적으로 노동계급의 정부였으며, 생산계급이 유산계급에 맞서 벌인 투쟁의 결과였으며노동의 경제적 해방이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마침내 발견된 정치형태였다는 사실에 있다. 20년 후직접적인 국제적 대중행동의 첫 번째 형태로서 인터내셔널이 결성되고 프롤레타리아 메이데이 기념일이 제정되었던 그때다시 한번 유산계급이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라는 놀라운 말이 울려 퍼질 때마다 지독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깜짝 놀란 속물들의 면전에 긍지에 찬 문장을 들이댔다. “그렇다면 여러분이러한 독재는 어떤 모습일지 알고 싶습니까파리코뮨을 보십시오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한번, 20년도 더 지난 후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혁명적 정치가 레닌은 그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저술 국가와 혁명」 주요부에서 파리코뮨 및 기회주의자의 쇠퇴와 혼란에 맞선 투쟁의 경험을 맑스와 엥겔스의 이론과 관련지어 정확하고 상세하게 분석했다그로부터 몇 주 후 1917년 2민족 혁명이자 부르주아 혁명으로 시작되었던 러시아 혁명이 그 민족적이고 부르주아적인 장벽을 돌파하고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세계혁명으로 확대되고 심화되어 나갔다서구 유럽의 노동자 대중은 (그리고 전 세계 노동계급의 진보적 분파는레닌 및 트로츠키와 더불어 혁명적 평의회 체제라는 이 새로운 정부 형태를 환영했으며파리 노동자들이 반세기 전 창조했던 혁명적 코뮨을 직접 계승하는 것으로서 기꺼이 받아들였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모든 권력을 평의회로라는 공식 아래 모든 혁명적 노동자들을 하나로 단결시킨다는 그 이상은 불명확한 것이었을지도 모르지만, 4년간의 전쟁이라는 경제적·정치적 격변 이후 유럽 도처에 퍼져 있던 동요와 압력으로 인해 혁명적 시기가 뒤따랐다그러나 이미 그 무렵 이러한 이상과 새로운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평의회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전면화되었던 저 현실 사이에는 깊은 간극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간에 있어 평의회에 대한 요구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계급 의지를 달성하고자 끓어오르는 긍정적인 발전 형식이었다당시 오직 시무룩한 속물들만이 완전히 실현되지 못한 모든 이상과 마찬가지로 평의회 개념은 모호하다고 개탄할 수 있었으며오직 무기력한 공론가들만이 도이미히(Däumig) 리처드 뮐러(Richard Müller)의 악명 높은 작은 상자들의 체계처럼 인위적으로 설계된 체계를 통해 이러한 결점을 완화하고자 시도할 수 있었다이 즈음 프롤레타리아트는 1919년 헝가리와 바이에른에서 일시적으로 그랬던 것처럼그 혁명적 계급독재를 확립하는 곳 어디에서나 노동계급의 정부라는 이름으로 혁명적 평의회 정부를 조직했다이는 유산계급에 맞선 생산계급의 투쟁의 결과였고이들의 결연한 목적은 노동의 경제적 해방을 달성하는 것이었다만일 이 당시 프롤레타리아트가 좀 더 큰 산업국가 중 하나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면그러니까 혹시 만일 1919년 봄 독일의 대규모 경제파업 중에또는 1920년 카프 반란을 저지하던 중에또는 1923년 루르 점령 및 인플레이션의 기간 중 이른바 쿠노 파업 과정에서아니면 1920년 10월 이탈리아의 공장점거 시기에 승리를 거뒀더라면그랬다면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은 평의회 공화국이라는 형식 속에서 확립될 수 있었을 것이며또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미 존재하던 러시아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들의 연방과 함께 혁명적 평의회 공화국들의 세계연방 속에서 통합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조건 하에서 평의회 개념은 상당히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다이는 소위 사회주의적이고 혁명적인” 평의회 정부라는 존재도 마찬가지이다. 1921년 세계적 경제 위기가 극복되고 이와 관련하여 독일폴란드이탈리아 노동자들이 패배한 이후 ― 또한 영국의 1926년 총파업과 광산노동자 파업 등에서도 잇따라 프롤레타리아가 패배한 이후 ― 이러한 노동계급 패배의 결과로 현재유럽 자본주의는 그 독재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처럼 변화된 객관적 조건 하에서 우리 전 세계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사들은 더는 우리의 낡은 신념즉 평의회 개념이 혁명적 의의를 지니고 평의회 정부가 혁명적 성격을 지니는 것은 파리코뮌 가담자들이 반세기 전에 발견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정치형식이 직접적으로 발전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이 검증되지 않은 불변의 신념에 주관적으로 매달릴 수만은 없게 되었다.

 

러시아의 사회주의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이라는 명칭과 그 현실적 조건 사이에 오늘날 존재하는 명백한 모순을 바라보면서우리 스스로를 만족시키기 위해 현재 러시아에서 권력을 쥔 사람들이 그 원래의 혁명적” 평의회 원칙을 배신한” 것은 독일에서 샤이데만(Scheidemann)과 뮐러(Müller), 라이파르트(Leipart)가 전쟁 직전 자신들의 혁명적” 사회주의 원칙을 배신했던” 것과 똑같은 것일 뿐이라고 말해버린다면이는 피상적이고 거짓된 만족일 뿐이다의심할 여지 없이 두 주장은 모두 사실이다샤이데만과 뮐러라이파르트는 자신들의 사회주의적 원칙을 배신한 자들이다또한현재 러시아에서 극단적으로 배타적인 정부-정당 기구의 최고 정점이 무수한 사람들로 구성된 관료제를 통해 프롤레타리아트와 소비에트 러시아 전체 위에 군림하면서 이용하고 있는 독재는 ― 그 이름만으로는 여전히 코뮤니즘과 볼셰비키의 정당을 연상시키지만 ― 1917년과 1918년의 혁명적 평의회 개념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저 독재는 차라리 과거 이탈리아의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였던 무솔리니(Mussolini)의 파시스트 정당 독재와 유사하다그러나 이 두 경우 모두, “배신에 관해서는 설명되는 것이 거의 없다오히려 배신이라는 사실 자체가 설명을 요구하고 있다.

 

모든 권력을 평의회로라는 과거의 혁명적 슬로건이 오늘날 소위 사회주의 소비에트 국가의 자본주의적이고 파시스트적인 체제로 발전했다는 이 모순은 우리 계급의식적인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현실적 과제를 제기한다그 과제란 정확히 말해혁명적 자기비판이라는 과제이다우리가 반드시 인정해야 하는 점은 혁명의 변증법이 봉건적 과거와 부르주아적 과거의 이념 및 제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마찬가지로 노동계급이 지금까지 해방을 위한 역사적 투쟁에서 지배적 국면마다 스스로 이미 들고나왔던 모든 사유와 조직 형태에도 적용된다는 것이다이는 ―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했던 말처럼 ― 어제의 선한 행위가 오늘의 고통을 만드는 그러한 변증법이며또한 칼 맑스의 보다 명료하고 확실한 표현에 따르면역사적인 모든 형식은 그 발전의 특정 지점에서 혁명적 생산력과 혁명적 행동발전하는 의식이라는 발전형식으로부터 그 발전형식의 족쇄로 전화된다는 그러한 변증법이다그리고 이러한 혁명적 발전의 변증법적 안티테제는 다른 모든 역사적 이념과 형성과정에도 적용되며이들이 혁명적 계급투쟁의 특정한 역사적 단계에서 철학적이고 조직적으로 산출하는 결과에도 마찬가지로 동일하게 적용된다이를 예증하는 것이 바로 약 60년 전 혁명적 코뮨의 모습을 띤 마침내 발견된” 노동계급의 정부라는 정치 형식 한가운데 있었던 파리코뮨의 가담자들이다그에 뒤이은 투쟁의 새로운 역사적 국면으로서, “혁명적 평의회 권력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들고나온 러시아 노동자와 농민그리고 국제적 노동계급의 혁명적 운동에도 동일한 것이 적용할 수 있다.

 

평의회 개념에 대한 배신과 평의회 권력의 타락을 비통해하는 대신우리는 환상에서 벗어나 냉정하게객관적인 역사적 관찰을 통해 이러한 운동 전체의 그 시작과 중간끝을 총체적인 역사의 파노라마 안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또 우리는 다음과 같은 비판적인 의문을 제기해야만 한다. 1871년 처음으로 혁명적 코뮨을 달성해냈으며비록 그 발전은 72일 만에 강압적으로 중단되었지만다음에는 더욱 결정적으로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을 구체적인 모습으로 달성해낸 ― 이러한 총체적인 역사적 경험 이후에 ― 이 새로운 정치 형식의 정부가 갖는 진정한 역사적 의미그 계급지향적 의미는 무엇인가?

 

혁명적 코뮨 및 그 발전태인 혁명적 평의회 체제의 역사적이고 계급지향적인 성격을 문제 삼을 때 오히려 필요한 것은 다시 한 번 근본적으로 우리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다왜냐하면 오늘날 혁명가들 사이에는 의회를 그 기원과 목적 때문에 부르주아적 기관으로 간주하여 이론적으로는 거부하고 실천적으로는 파괴하고자 하지만그러나 또한 동시에 소위 평의회 체제와 그 전신인 혁명적 코뮨을 프롤레타리아 정부의 본질적 형식으로 바라보고 그 완전한 본질은 부르주아 국가의 본질과 양립 불가능한 대립관계에 있다고 여기는 그러한 생각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데이러한 생각이 전혀 근거가 없다는 점은 심지어 가장 날것 그대로의 역사적 비판에서조차도 드러나기 때문이다현실에서 코뮨은 거의 천 년에 걸친 그 역사적 발전에 있어서 의회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즉 부르주아 정부 형식으로서 출현했다. 11세기에 시작되어 1789년 및 1793년의 프랑스 혁명에서 부르주아지의 혁명적 운동이 도달한 그 정점에 이르기까지코뮌은 대부분 순수하게 계급지향적인 투쟁의 표현으로서 형성되었다즉 코뮌은 이러한 역사적 시기 전체에 걸쳐 당시의 혁명적 부르주아 계급이 기존의 봉건적 사회질서 전체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고 새로운 부르주아 사회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다양한 형식으로 형성되었다.

 

맑스가 ― 앞에서 그의 프랑스 내전을 인용한 문장에서 드러나듯이 ― 1871년 파리 노동자들의 혁명적 코뮨을 노동의 경제적 해방이 완성될 수 있도록 하는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태라고 칭송했을 때동시에 그는 코뮨이 이러한 새로운 성격을 띨 수 있으려면 이전의 그 본성 전체가 ― 부르주아가 자유를 위해 투쟁하던 수백 년 동안에 걸쳐 전해 내려온 그 전통적 형태가 ― 급진적으로 변화해야 할 것이라는 점을 의식하고 있었다그가 당시 이러한 현대의 국가권력을 분쇄하는 새로운 코뮨을 국가권력에 우선하고 또 그로부터 자신의 토대를 형성하는 중세적 코뮨의 부활로 여기고자 했던 사람들의 오해를 염려했다는 점은 분명하다또한 그는 코뮨 체제라는 정치 형식 그 자체가 ― 확고하게 프롤레타리아 계급지향적인 내용과 분리된 채로는즉 그의 생각에 따르면 파리의 노동자들이 역사적인 어떤 순간에 이러한 정치 형식을 채웠고투쟁을 통해 성취했으며자신들의 경제적 자기해방에 착수할 수 있도록 한 그러한 내용과 분리된 채로는 ―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을 위한 놀라운 효과를 일으킬 것이라고는 거의 기대하지 않았다맑스가 볼 때 파리 노동자들이 코뮨이라는 전통적 형식을 원래 자신들이 역사적으로 결정했던 목표와는 완전히 대립하는 목적을 지닌 기구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가능했던 결정적 이유는 오히려 거꾸로코뮨이 상대적으로 미발달된 상태였고 비규정적이었다는 점에 있었다프랑스에서 특히 고전적인 형태로 발전했던 것처럼 충분히 형성된 부르주아 국가에서는 (현대의 중앙집권적 대의제 국가에서는국가의 최고권력이란 코뮤니스트 선언의 유명한 문구에 따르면 부르주아 계급의 공동업무를 전체 업무로써 관리하는 집행위원회에 지나지 않으며따라서 그 계급적 성격이 부르주아적이라는 점은 쉽게 드러난다그러나 중세의 자유로운 코뮨까지 포함하여 부르주아 국가 체제가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던 초기의 역사적 형식에서는 본질적으로 모든 국가에 따라붙는 이러한 부르주아적인 계급적 성격이 상당히 다른 형식으로 드러난다이후 부르주아 국가권력의 성격이 노동계급을 억압하기 위한 최고의 공공권력즉 계급지배 장치”(맑스)로서 점점 더 명백하게 드러나고 점점 더 순수하게 발전했던 것과는 반대로발전의 이러한 초기 국면에서는 부르주아 계급 기구의 본래 규정된 목적이 중세의 봉건적 지배로 억압받던 부르주아 계급의 혁명적 해방투쟁 기관이었다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다비록 중세 부르주아지의 이러한 투쟁이 현재라는 역사적 시대의 프롤레타리아 해방투쟁과 공통점을 거의 갖지 않는다 하더라도이 투쟁은 아직 역사적인 계급투쟁으로서 남아 있다그리고 이때 부르주아지가 자신들의 혁명적 투쟁의 필요에 따라 창조한 저 기구들은 특정한 범위에서 ― 그러나 단지 특정한 범위로만 ― 오늘날 또 다른 토대 위에서 또 다른 조건 아래 또 다른 목적을 가지고 투쟁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이어가고 있는 혁명적 해방투쟁의 형성과 특정한 형식적 연관을 갖는다.

 

칼 맑스가 이미 초기에 지적한바― 중세시대 혁명적 부르주아 코뮨 발전의 다양한 국면 속에서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표현을 발견했던 ― 이러한 부르주아 계급투쟁 초기의 경험과 성취는 현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의식 및 계급투쟁의 형성과 관련하여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다사실상 맑스가 이 점을 지적한 것은 1871년 파리코뮨 반란이라는 위대한 역사적 사건즉 그가 파리 노동자들의 이 새로운 혁명적 코뮨을 노동의 경제적 해방을 위해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식이라고 칭송할 수 있게 만든 그 사건보다 훨씬 앞서서이다그는 중세 봉건국가에서 억압당하던 계급으로서 자유를 위해 투쟁하던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발전과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발전 사이에 존재하는 역사적 유사성을 논했다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노동조합 및 노동조합 투쟁의 중요성에 관한 그 고유한 변증법적 혁명이론의 주된 이론적 토대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중 어떤 이론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수많은 맑스주의자 좌파와 우파 양쪽 모두에게 완전하고 정확하게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또한 그는 현대 노동자들의 연대와 중세 부르주아지의 코뮨을 비교함으로써부르주아계급 역시 마찬가지로 연대의 형성을 통해 봉건적 사회 질서에 대항하는 투쟁을 시작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강조하게 되었다이 점과 관련하여 우리는 이미 프루동에 대한 반론에서 오늘날 고전으로 남아 있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발견할 수 있다.

 

부르주아지는 서로 구별되는 두 개의 단계를 거쳤다봉건제와 전제군주제하에서 하나의 계급으로서 자신을 구성해나갔던 단계가 그 하나이고이미 구성된 하나의 계급으로서 사회를 부르주아 사회로 만들기 위하여 봉건제와 군주제를 전복했던 단계가 다른 하나이다이중 첫 번째 단계는 좀 더 길었고보다 큰 노력을 필요로 했다이 단계 역시 봉건 군주에 대항하는 부분적 연대를 통해 시작되었다.

 

부르주아지가 코뮨으로부터 시작하여 자신을 하나의 계급으로써 구성하게 되기까지 거쳐 간 여러 역사적 단계들을 추적하기 위해 수많은 탐구가 수행되었다.

 

그러나 그 탐구가 파업이나 연대또는 우리 눈앞에서 프롤레타리아가 하나의 계급으로 자신들을 조직하게 만드는 또 다른 형식들에 관한 정밀한 연구를 필요로 할 때일부는 현실적인 공포에 사로잡히고나머지는 터무니없는 멸시를 드러낸다.” (맑스철학의 빈곤, chater 2, # 5) <계속>

 

 

2013년 코뮤니스트 2, ‘혁명적 코뮌칼 코르쉬’ - 남궁원

2021년 파리코뮨 150년 재발행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1919년 3월 :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창설

1919년 3월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창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우리가 기념해야 할 수많은 기념일 가운데 매체와 역사가들이 짧게 언급하고 그 의미를 의도적으로 왜곡하면서 제대로 다루지 않는 기념일이 있다. 1919년 3월 열린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이하 코민테른)>의 창립대회가 그것이다.

     

    코민테른 창설의 기념은 계급투쟁이 오늘날 위기로 고통받는 자본주의의 현실이며, 프롤레타리아트가 착취 받는 계급일 뿐 아니라 혁명계급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이는 부르주아지 자체의 종말을 예고하고 있다는 점을 현재의 부르주아지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1. 1919년 국제적인 혁명 물결

     

     코민테른의 창설은 전체 자본가계급과 그들의 열광적 하수인들에게는 불쾌한 기억을 일깨우고 있다. 특히 그들에게는 국제적인 혁명 물결의 솟구치고 피할 수 없는 조류에 직면한 1차 세계대전 말의 공포를 상기시키고 있다. 그것은 1917년 10월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 참호에서의 반란, 독일에서 빌헬름 황제의 퇴위와 노동계급의 반란과 폭동에 직면한 휴전 서명, 그리고 독일 노동자들의 봉기, 러시아 노선에 따른 바바리아와 헝가리에서의 노동자평의회 공화국 건설, 영국과 이탈리아에서 노동자 대중 사이의 파업,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적대적 개입을 거부한 몇몇 영국 군대뿐만 아니라 프랑스 함대와 군대의 반란 등이었다.

     

    그 당시 영국 정부의 수상인 로이드 조지는 만일 그가 러시아 정복을 돕기 위해 천 명의 영국 군대를 파견한다면 그 군대는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만약 영국의 군사점령이 볼셰비키에 맞서 이루어진다면 영국은 볼셰비키가 되고 런던에 소비에트가 건설될 것이라고 1919년 1월 선언했다. 그것은 러시아 노동자평의회 권력에 대한 국제 부르주아지의 경악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었다.

     

    “유럽 전체는 혁명정신으로 가득 찼다. 노동자들 사이에는 전쟁 조건에 반대하는 불만감뿐만 아니라 분노와 반항감이 깊이 쌓여 있다. 정치적·사회경제적 측면에서 모든 기존 질서에 대해 유럽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모든 인민대중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E. H. 카의 「볼셰비키 혁명」 3권, 135쪽에서 인용)

     

     우리는 오늘날 코민테른의 창설이 1917년으로부터 적어도 1923년 말까지, 유럽으로부터 아시아(중국)로, 그리고 캐나다(위니페그)와 미국(시애틀)의 ‘신’세계로부터 라틴아메리카에 이르는 전 세계의 혁명 물결에서 정점이었다고 알고 있다. 이러한 혁명 물결은 세계를 자본주의 국가 사이의 분할로 이끈 1차 세계대전, 4년간의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응답이었다. 1914년 전쟁이 꿀꺽 삼킨 제2 인터내셔널 사회민주주의의당들과 개별 투사들이 제국주의 전쟁에 대해 취한 태도는 그들이 혁명과 코민테른을 맞아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를 결정했다.

     

    “코민테른은 각기 다른 나라의 제국주의 부르주아지가 2천만 명을 희생시킨 1914~18년의 제국주의 전쟁이 끝난 후 만들어졌다. ‘제국주의 전쟁을 기억하라’ 이 말은 코민테른이 모든 남성 노동자와 모든 여성 노동자에게 한 첫 번째 말이다. 그들이 어디에 살건 어떤 언어로 말하든지 그들에게 한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존재하기 때문에 한 줌의 제국주의자들이 4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각기 다른 나라의 노동자들이 서로의 목을 베도록 강제했다는 점을 기억하라. 부르주아지의 전쟁이 유럽과 전 세계에서 가장 가공할 기근과 가장 소름 끼치는 참상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을 기억하라. 자본주의를 전복하지 않고는 이러한 강도 같은 전쟁의 반복이 가능할 뿐 아니라 불가피함을 기억하라” (2차 대회에서 채택한 코민테른의 문건, 제인 데그라스, 「코민테른 1919-43: 문헌집」)

     

     

    2. 코민테른의 제2 인터내셔널과의 연속성

     

    (1) 제2 인터내셔널과 제국주의 전쟁

     

     1848년 「코뮤니스트 선언」에서 칼 맑스는 “노동자는 조국이 없다”라고 자본주의에 맞서는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의 근본적 원칙 하나를 정립했다. 이 원칙은 노동자들이 민족 국가의 문제에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반대로 민족문제와 그들 역사적 투쟁 하나의 기능으로서 민족 전쟁 문제에 대해 노동자의 입장과 태도를 규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전쟁의 문제와 프롤레타리아트의 태도는 제1 인터내셔널(1864~73)과 제2 인터내셔널(1889~1914)에서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19세기 동안 프롤레타리아트는 특히 러시아 차르 체제와 같은 봉건적이고 군주적 반동에 맞서는 민족해방 전쟁에 무관심할 수 없었다.

     

    제2 인터내셔널 내에서 레닌과 로자 룩셈부르크는 선두에 서서 20세기 벽두에 발생한 자본주의의 시기 변화를 인식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정점에 다다랐으며 전 지구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제 레닌이 말한 것처럼 “자본주의의 가장 높은 단계인 제국주의”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다가올 유럽전쟁은 식민지의 분할과 그 영향력을 둘러싼 자본주의 국가 사이의 제국주의 세계 전쟁일 것이었다. 날이 갈수록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원칙을 저버렸던 기회주의 진영에 맞서서, 이러한 새로운 상황에서 인터내셔널과 프롤레타리아트가 무장하는 전투로 이끈 것은 제2 인터내셔널의 좌익이었다. 이 투쟁의 중대한 순간에 러시아 1905년 대대적파업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이끌어낸 로자 룩셈부르크가 제국주의 전쟁을 대대적파업과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연결시킨 1907년 슈투트가르트의 인터내셔널 대회가 있었다.

     

    “나는 이 문제[러시아에서의 대대적파업과 전쟁(편집자)]에 대해서 우리가 위대한 러시아 혁명[1905년(편집자)]의 교훈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것을 여러 동지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을 러시아와 폴란드 대표들의 이름으로 말하라고 요청받았습니다. … 러시아 혁명은 전쟁의 결과로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그 전쟁을 끝내려고 일어났습니다. 혁명이 없었다면 차르 체제는 의심할 여지 없이 전쟁을 지속시켰을 것입니다.” (로자 룩셈부르크, BD 울프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에서 인용)

     

    좌파는 룩셈부르크와 레닌이 제출한 대회의 중대한 수정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래도 전쟁이 일어난다면, 사회주의자들은 가능한 한 빨리 그 전쟁을 끝내고 전쟁이 촉발한 경제적·정치적 위기를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인민에게 일깨우고, 그럼으로써 자본주의 지배의 몰락을 서두를 의무가 있다.” (코민테른 1차 대회에서 채택한 「사회주의 경향들과 그들의 베른대회에 대한 결의문」에서 인용)

     

    1912년 제2 인터내셔널의 바젤 대회는 유럽에서 점증하는 제국주의 전쟁의 위협에 맞서는 위와 같은 입장을 다시 확인했다.

     

    “프랑스-프러시아 전쟁이 코뮨의 혁명적 반란을 탄생시켰고, 러일전쟁이 러시아에서 혁명세력을 움직였다는 것을 부르주아 정부들이 잊지 않게 하자. 노동자계급의 눈으로 볼 때, 자본가들의 이익, 왕조의 경쟁, 그리고 외교 협정의 남발을 위해 노동계급이 자신을 학살하는 것은 범죄다.” (앞글)

     

    (2) 제2 인터내셔널의 배반과 죽음

     

     1914년 8월 4일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기회주의 때문에 구멍이 숭숭 뚫리고 애국주의 홍수와 전쟁열에 쓸려 제2 인터내셔널은 깨어져 부끄럽게 목숨을 다했다. 주요 당들은 (특히 누구보다 기회주의자들 수중에 있었던 프랑스와 독일 사민당과 영국의 노동당은) ‘조국 방어’와 ‘외세침략’에 맞서기 위한 부르주아지와의 ‘신성한 동맹’을 요구하며 전쟁채권에 찬성표를 던졌다. 프랑스에서는 계급투쟁을 포기하면서 장관직을 보상으로 받기까지 했다. 그들은 '맑스주의의 황제'라고 불렸던 카우츠키가 계급투쟁은 '평화 시기'에만 가능하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불가능하다고 선언하면서 전쟁과 계급투쟁을 구분했을 때, '중도주의'(인터내셔널의 좌파와 우파 사이의 중간)로부터 이론적 지원을 받았다.

     

    “계급의식이 있는 노동자들은 인터내셔널 붕괴에 대해 슈투트가르트와 바젤에서 열린 인터내셔널 대회의 발언과 결의문 속에 담긴 가장 거룩한 선언, 그리고 그들의 신념을 공식 사민당의 다수가 명백하게 배신한 것으로 이해한다.” (레닌, 「제2 인터내셔널의 몰락」)

     

     소수의 당만이 이러한 폭풍 속에서 우뚝 섰다. 특히 이탈리아,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고 러시아의 당이 그랬다. 다른 곳에서는 고립된 혁명가들과 혁명 그룹이 있었는데, 로자 룩셈부르크와 호르터와 판네쿡 주위의 네덜란드 '트리뷴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 계급투쟁에 충실했으며 재조직화를 시도했다.

    제2 인터내셔널의 죽음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심대한 패배였다. 이는 그들이 참호 속에서 피를 흘리게 했다. 수많은 혁명적 노동자들이 살육당했다.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그들의 국제 조직을 잃어버렸다. 그것은 재건해야 했다.

     

    “제2 인터내셔널은 기회주의에 패배해 죽었다. 기회주의자를 타도하자. 변절자뿐 아니라 기회주의로부터 해방된 제3 인터내셔널 만세!” (레닌,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정세와 임무」, 1914. 1. 10)

     

    (3) 침머발트와 키엔탈 대회 :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건설을 향한 발걸음

     

     1915년 9월 '국제사회주의자들의 침머발트 대회'가 열렸다. 이어서 스위스의 키엔탈에서 1916년 4월 2차 대회가 열렸다. 전쟁과 억압이라는 어려운 조건에도 불구하고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를 포함한 11개국의 대표들이 참여했다. 침머발트 대회는 전쟁을 제국주의 전쟁으로 인식했다. 대회의 다수파는 ‘거룩한 동맹’의 진영으로 넘어갔거나 그들과 분리되어 관망하는 사민당들의 기회주의 우파를 비난하기를 거부했다. 이러한 중도주의 다수파는 '평화'라는 표어를 방어하는 평화주의자였다.

     

    볼셰비키 분파의 대표인 레닌과 지노비예프의 주도 아래 통일된 '침머발트 좌파'는 분립의 필요성과 제3 인터내셔널의 건설을 주창했다. 평화주의에 맞서 그들은 "혁명적 행동 없는 평화 투쟁은 공허하고 기만적인 문구”(레닌)라고 선언하고,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자”는 슬로건으로 중도주의를 반대했다. “이 슬로건은 구체적으로 슈투트가르트와 바젤대회의 결의문으로 나타난다.”(레닌)

     

    이들 대회를 통해 '좌파'는 힘을 얻었지만, 다른 대표들을 깨닫게 할 수 없어 소수파로 남았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이었다.

     

    “두 번째 침머발트 대회(키엔탈)는 의심할 여지 없이 한 걸음 진전이다. (…) 그러면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앞으로 우리는 우리의 결의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제3 인터내셔널을 위한 투쟁을 지속해야 한다. 침머발트와 키엔탈 대회는 우리의 길이 올바르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지노비예프, 1916. 10. 6)

     

    지노비예프가 1918년 3월에 말했듯이, 각기 다른 나라 좌파 사이의 회의와 그들 사이의 공동투쟁을 통해 “형성 중인 제3 인터내셔널의 첫 번째 핵”을 만들 수 있었다.

     

    (4) 프롤레타리아트가 슈투트가르트와 바젤 대회의 결의문을 수행하다

     

     1917년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유럽 전역에 혁명적 물결을 열어젖혔다. 프롤레타리아의 위협은 제국주의 대학살이 종지부를 찍었다는 점을 국제 부르주아지에게 확인시켰다. 레닌의 슬로건은 현실이 되었다. 러시아 그리고 국제 프롤레타리아트가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시켰다. 이처럼 프롤레타리아트는 유명한 슈투트가르트 결의를 적용함으로써 제2 인터내셔널 좌파의 명예를 드높였다.

     

    1차 세계대전은 사회민주당의 의회주의적 우파를 부르주아지 진영으로 결정적으로 몰아넣었다. 혁명적 물결은 중도주의의 평화주의자들이 부르주아지에 맞서 싸우도록 했지만 그들의 다수는 특히 카우츠키 같은 지도자들은 부르주아지 진영으로 뛰어들었다. 더 이상 인터내셔널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회민주주의로부터 분리된 분리파들이 만든 새로운 당은 '코뮤니스트'당 이라는 이름을 채택하기 시작했다.

    혁명적 물결은 고무되었으며 프롤레타리아트의 세계당, 제3 인터내셔널의 건설을 요구했다.

     

    (5) 코민테른의 건설 : 제2 인터내셔널의 정치와 원칙과의 연속성

     

     코민테른[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이라는 이름을 채택한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이미 죽은 제2 인터내셔널 당의 우파로부터 조직적으로 분리하는 것을 기반으로 1919년 3월에 건설되었다. 그러나 제2 인터내셔널의 원칙과 그 공헌을 거부하지 않았다.

     

    “이에 생명을 다한 공식적 사회주의당의 냉담, 거짓 그리고 부패를 쓸어버리면서, 우리 코뮤니스트들은 제3 인터내셔널에서 하나가 되어 바베프로부터 칼 리프크네히트, 그리고 로자 룩셈부르크로 기다랗게 이어지는 혁명 세대들의 영웅적 노력과 순교의 직접적 계승자라고 우리를 생각한다.

    제1 인터내셔널이 발전의 미래 경로를 미리 비추고 그 도정을 가리켰다면, 그리고 제2 인터내셔널이 수백만의 노동자들을 모으고 조직했다면, 제3 인터내셔널은 열린 대중행동의 인터내셔널이고 혁명적 실현의 인터내셔널이며, 행위[실천]의 인터내셔널이다.” (코민테른의 선언)

     

    코민테른의 기반을 이룬 흐름, 분파, 전통 그리고 입장은 제2 인터내셔널의 좌파가 발전시키고 방어한 것들이었다.

     

    “1차 대전 이전에 프롤레타리아트가 발전시킨 제2 인터내셔널이라는 역사적 대열로부터 선발해 재편한 그룹을 통해서만, 제국주의 전쟁에 맞서는 프롤레타리아 투쟁을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음을 우리의 경험은 증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그룹만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선진적 강령을 만들 수 있고 그래서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기초를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빌랑 [코뮤니스트 좌파의 이탈리아 분파의 이론지], 1936년 8월, 34호, 1128쪽)

     

     레닌, 로자 룩셈부르크, 안톤 판네쿡 같은 개인은 물론이고 볼셰비키,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좌파 같은 사회민주당의 그룹과 분파를 보더라도, 제2 인터내셔널과 침머발트의 좌파와 제3 인터내셔널의 좌파 사이에는 정치적이고 유기적인 연속성이 있다. 코민테른의 첫 번째 대회는 제2 인터내셔널의 부분이었던 러시아 코뮤니스트당(볼셰비키)(이전의 러시아 노동자 사회민주주의당[볼셰비키])과 독일 코뮤니스트당(이전의 스파르타쿠스)의 주도로 소집되었다. 볼셰비키는 침머발트 좌파의 주도 세력이었다. 침머발트 좌파는 제2 인터내셔널과 제3 인터내셔널 사이의 진정한 유기적·정치적 연결고리였는데, 그들은 제2 인터내셔널의 좌익으로서 과거에 벌였던 투쟁을 평가하면서 그 시대의 요구를 다음과 같이 정립했다.

     

    “침머발트와 키엔탈 대회는 제국주의 살육에 항의하기 위해, 결의가 있는 모든 프롤레타리아 세력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통일시키는 것이 필요했던 상황에서 열린 매우 중요한 대회였다. (…) 침머발트 그룹은 자기 전성기를 가졌다. 침머발트에 모인 진실로 혁명적인 세력은 모두 더 전진해 코민테른에 합류한다.” (침머발트 대회 참가자 선언)

     

     우리는 두 인터내셔널 사이의 연속성을 강력히 주장한다. 우리가 계통적 측면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코민테른은 느닷없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 강령과 정치적 원칙도 마찬가지다. 두 인터내셔널 사이의 역사적 연결고리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역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아나키스트에 굴복하는 것이다. 또한 코민테른을 단지 노동자 대중의 혁명운동 산물로만 바라보는 것이다.

     

    이러한 연속성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코민테른이 왜 그리고 어떻게 제2 인터내셔널과 결별했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슈투트가르트 결의에 표현된 두 인터내셔널 사이의 연속성이 있지만, 두 인터내셔널 사이에는 단절도 있기 때문이다. 그 단절은 코민테른의 정치 강령 속에, 그 정치적 입장에, 그리고 '세계 코뮤니스트당'으로서의 조직적이고 전투적인 실천 속에 구체화되었다. 사실 단절은 물리적인 유혈 탄압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것은 제2 인터내셔널의 성원인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참여한 케렌스키 정부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와 볼셰비키를 억압하고, 독일에서는 노스케-샤히드만 사민주의 정부가 프롤레타리아트와 코뮤니스트당을 억압해서 단절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연속성 속의 단절'을 인식하지 않으면, 1920년대의 코민테른의 퇴행, 그리고 그 내부의 투쟁, 그리고 1930년대 ‘이탈리아’, ‘독일’ 및 ‘네덜란드’ 코뮤니스트 좌파의 외부투쟁 및 그들 세력의 배제를 이해할 수 없다. 오늘날 코뮤니스트 그룹과 그들이 방어하는 입장은 이런 좌파들이 코뮤니스트 원칙을 지키고, 코민테른 및 1917~23년의 혁명적 물결을 비판적으로 재평가했던 그들의 노력의 산물이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유산인 제2 인터내셔널의 유산을 인식하지 않으면, 코민테른의 기반, 오늘날까지 중요한 몇몇 기반의 타당성, 1930년대 코뮤니스트 좌파의 공헌을 이해할 수 없다. 다른 말로 그것은 오늘날 혁명적 입장을 지속해서, 확신과 결단을 가지고 방어할 수 없음을 뜻한다.

     

     

    3. 코민테른의 제2 인터내셔널과의 단절

     

    (1) 코민테른의 정치 강령

     

     1919년 1월 말 트로츠키는 코민테른 창립대회의 초대장을 썼다. 그 대회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이 채택할 정치 강령의 원칙을 결정했다. 사실 이 편지는 제안된 ‘코민테른 강령’이고 그를 잘 요약하고 있다. 그것은 두 개의 주요 코뮤니스트당의 강령에 기초하고 있다.

     

    “우리 의견으로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여기서 강령으로 제시했고, 독일 스파르타쿠스 동맹과 러시아 코뮤니스트당(볼셰비키)의 강령에 기초해서 구성된 다음의 제안에 기초해야만 한다.” (데그라스, 앞글)

     

     사실 스파르타쿠스 동맹은 1918년 12월 29일 독일 코뮤니스트당이 창설된 이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1919년 1월 베를린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끔찍한 탄압기 동안에, 사민주의 세력이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를 죽여 독일 코뮤니스트당은 두 명의 주요 지도자를 잃었다. 이처럼 바로 창립 순간에 코민테른은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와 함께 첫 번째 패배의 고통을 겪었다. 창립 두 달 전 코민테른은 그의 명성, 힘 그리고 이론적 능력에서 레닌과 트로츠키에 필적할 두 명의 지도자를 잃었다. 지난 세기말 자신의 저작에서 코민테른의 정치 강령의 기초가 될 핵심을 가장 많이 발전시킨 사람은 로자 룩셈부르크였다.

     

    (2) 돌이킬 수 없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쇠퇴

     

     로자 룩셈부르크에게는 1914년 전쟁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쇠퇴기를 열어 놓았다는 점이 명백했다. 제국주의 살육 이후 이러한 입장은 더는 논쟁의 여지가 없었다.

     

    “오늘날 인류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 혼돈 속에서 멸망하느냐 아니면 사회주의에서 구원을 발견하느냐” (독일 코뮤니스트당 창립대회에서 강령에 대한 연설)

     

    이러한 입장은 코민테른에서 강력하게 재확인되었다.

     

    “1. 현시대는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을 지닌 자본주의가 파괴되지 않는다면, 그와 함께 유럽 문명의 전체를 끌어내릴, 전체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몰락과 해체의 시대이다.” (「초청장」, 데그라스, 앞글)

     

    “새로운 시대가 태어난다! 자본주의 소멸과 내부 해체의 시대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코뮤니스트 혁명의 시대가!” (코민테른 강령, 앞글)

     

    (3) 자본주의 쇠퇴 시대의 정치적 함의

     

     코민테른의 지형 위에 서 있는 모든 사람에게 자본주의의 쇠퇴는 삶의 조건과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에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보기를 들어 카우츠키와 같은 중도주의 평화주의의 사상과는 반대로 전쟁의 끝은 전쟁 전 시기의 삶과 강령으로 회귀하는 걸 의미할 수 없었다. 이는 죽은 제2 인터내셔널과 코민테른 사이의 단절의 한 지점이었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세계대전은 세상의 전환점이다. (…) 우리의 투쟁을 위한 조건과 우리 자신은 세계대전으로 발본적으로 변화되었다.” (룩셈부르크, 「유니우스 팜플렛」으로 알려진 「사회민주주의의 위기」, 1915)

     

    제국주의 전쟁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쇠퇴기가 열렸다는 것은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삶과 투쟁의 새로운 조건을 의미했다. 1905년 러시아 대대적파업, 그리고 노동대중 단일 조직의 새로운 형태인 소비에트가 최초로 등장한 것이 자본주의 쇠퇴기의 개막을 예고했다. 룩셈부르크(「대대적파업, 당 그리고 노동조합」, 1906)와 트로츠키(1905년 그의 책)는 이러한 대중운동의 본질적 교훈을 끌어냈다. 룩셈부르크와 함께 모든 좌파는 제2 인터내셔널 내에서 대대적파업에 대한 논쟁을 이끌었으며 노동조합과 사민당 지도부의 기회주의에 맞서서 그리고 사회주의로의 평화적이고 점진적 진화라는 그들의 전망에 맞서서 정치 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 사민주의적 실천과 결별하면서 코민테른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기본적인 투쟁방법은 자본의 정치 권력에 맞서 공개적인 무장투쟁으로 나아가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중행동이다” (「초청장」, 데그라스, 윗글)

     

    (4) 혁명과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

     

     노동대중의 행동은 부르주아 국가와의 충돌로 나아간다. 코민테른의 가장 소중한 공헌은 국가에 대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태도에 대한 것이다. 사민주의의 '개량주의'와 결별하고 파리코뮨과 1905년 러시아 그리고 무엇보다 자본주의 국가를 파괴하고 노동자평의회로 권력을 행사한 1917년 10월 혁명의 역사적 경험의 교훈과 맑스주의 방법을 새롭게 함으로써, 코민테른은 스스로 명쾌하게 그리고 어떠한 모호함도 없이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 노동자평의회 안에 조직된 노동대중의 독재를 선언했다.

     

    “2.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는 지금 즉각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다. 국가권력의 장악은 부르주아지의 국가기구의 파괴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권력 기구의 조직을 의미한다.

     

    3. 이러한 새로운 권력 기구는 노동계급의 독재를 구현해야 하고 몇몇 곳에서는 농촌의 반(半)프롤레타리아트, 빈민의 독재를 구현해야 한다. (…) 소비에트 및 그와 비슷한 기구의 권력을 통해 그 구체적 형식을 확인할 수 있다.

     

    4.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자본의 즉각적 전유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의 폐지와 국가 재산으로의 전환을 위한 지렛대여야 한다.” (윗글)

     

    이 문제는 레닌이 제안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테제'를 채택했던 창립대회에서 본질적인 문제였다.

     

    (5)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에 대한 테제

     

     이 테제는 민주주의와 독재 사이의 그릇된 대립을 비난하면서 시작한다.

     

    “어떤 문명화된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추상 속의 민주주의’는 없다. 오직 부르주아 민주주의만 있을 뿐이다” (윗글)

     

    파리코뮨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독재적 성격을 드러냈다. 자본주의에서 ‘순수한’ 민주주의를 방어하는 것은 사실 기껏해야 자본의 독재의 형식인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방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집회의 자유나 출판의 자유는 노동자들에게 무엇인가?

     

    “‘출판의 자유’는 ‘순수 민주주의’의 또 다른 대표적 슬로건이다. 여기에서도 또 가장 좋은 인쇄소와 막대한 종이 더미를 자본가가 장악하고 있는 한, 또 자본이 신문·잡지에 대한 권력을 유지하고 있는 한, 그리고 이 권력은 세계에서, 예를 들어 미국처럼 민주주의와 공화제도가 발전하면 할수록, 더 명확하게, 더 첨예하게, 더 냉소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런 조건이 계속되는 한 이 자유가 기만이라는 것을 … 노동자는 알고 있다. 노동자를 위한,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참된 평등과 진정한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우선 먼저 문필가를 고용하거나 출판소를 사들이거나 신문을 매수할 가능성을 자본으로부터 박탈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본의 멍에를 뒤집어버리고, 착취자를 타도하고 그들의 반항을 분쇄할 필요가 있다.” (「테제」, 윗글)

     

     전쟁과 혁명을 경험한 후 카우츠키주의자들이 한 것처럼 순수한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방어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서는 범죄라고 「테제」는 계속 말하고 있다. 각기 다른 제국주의와 소수 자본가들의 이해 때문에 수백만의 인민이 참호에서 학살당했고 ‘부르주아지의 군사독재’는 민주적이건 아니건 간에 모든 나라에 세워졌다. 사민주의 정부가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를 체포하고 투옥한 것처럼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그들을 학살했다.

     

    “이러한 사태 아래에서는 프롤레타리아의 독재가 착취자를 압도하고, 그들의 저항을 극복하는 수단으로서 완전히 정당할 뿐만 아니라, 전쟁을 일으켰고 지금도 새로운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부르주아 독재에 대한 유일한 방위수단으로서 노동대중 전체에게 절대로 필요하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다른 계급의 독재 사이의 근본적 차이는 (…) 이를 포함한다. 즉 (…)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는 착취자 즉 주민 중에서 극소수인 대지주와 자본가의 반항을 무력으로 억누르는 것이다. (…)

     

    사실, 이미 실제로 창출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여러 형태, 즉 러시아 소비에트 권력, 독일의 노동자평의회, 직장위원회, 이와 유사한 다른 나라의 또 다른 소비에트적 제도, 이 모두는 다름 아닌 노동계급, 즉 주민 대다수에게 민주적 권리와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한다. 그것은 가장 민주적인 부르주아 공화국조차 전혀 보장할 수 없었던 또 그와 유사한 것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민주적 권리와 자유가 실제로 가능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윗글)

     

     오직 세계적 차원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만이 자본주의를 파괴하고, 계급을 폐지하며 코뮤니즘으로 가는 길을 보증할 수 있다.

     

    “국가권력의 폐지는 맑스를 포함해서 모든 사회주의자들의 목표다. 이러한 목표가 달성되지 않으면 자유와 평등의 진정한 민주주의는 달성될 수 없다. 그러나 오직 소비에트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만이 실제로 이 목표로 나아가게 한다. 왜냐하면 노동인민의 대중조직을 국가행정에 지속적이고 제한 없이 참여하게 함으로써 어떤 종류의 국가도 완전히 소멸시킬 준비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윗글)

     

    국가의 문제는 혁명적 물결이 유럽을 휩쓸고 모든 나라의 부르주아지가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서 내전을 벌일 때, 그리고 자본과 노동,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적대감이 극에 달할 때 중요한 문제였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와 혁명의 확장, 즉 소비에트 권력을 유럽에 국제적으로 확장할 필요성은 혁명가들에게 구체적으로 제기되었다. 그것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국가와 혁명적 물결의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그에 맞설 것인가의 문제였다. ‘[프롤레타리아 독재]편에 선다는 것’은 코민테른에 가입해 사회민주주의와는 체계적으로 정치적으로 단절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맞선다는 것’은 부르주아 국가를 방어하고 결정적으로 반혁명 진영을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둘 사이에서 머뭇거렸던 중도주의 흐름에게는 그것이 단절과 소멸을 뜻했다. 혁명 시기는 ‘중도 기반’의 멍청한 정책을 가질 어떤 틈도 남겨두지 않았다.

  • 사용자 삽입 이미지

     

  • 4. 오늘과 내일 : 코민테른의 과업을 지속하기

     

     1914~18년 전쟁이 결정적으로 보여준 시기 변화는 제2 인터내셔널과 제3 인터내셔널 사이의 단절을 결정짓는다. 우리는 이를 국가의 문제에서 살펴보았다. 자본주의의 쇠퇴, 그것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삶과 투쟁 조건에 미친 결과는 일련의 새로운 문제를 제기했다. 즉, 아직도 선거 참여와 의회의 활용이 가능한가, 노동자평의회가 출현했는데도, 자본가들과 ‘성스러운 동맹’에 참여했던 노동조합이 아직도 노동계급의 조직인가, 제국주의 전쟁의 시대에 민족해방투쟁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가 그런 문제들이었다.

     

    코민테른은 이러한 새로운 문제에 응답할 수 없었다. 그것은 1917년 10월 혁명 1년여 뒤, 그리고 베를린 프롤레타리아트가 겪은 첫 번째 패배로부터 두 달 뒤에 창설되었다. 그 뒤를 이은 여러 해 동안 국제 혁명의 물결은 패배하고 쇠퇴했으며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점점 고립되었다. 이러한 고립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의 퇴행에서 결정적 요인이었다. 이러한 사태들 때문에 코민테른은 기회주의의 성장에 저항할 수 없었다. 반대로 코민테른은 죽었다.

     

     

     코민테른을 평가할 때, 우리는 그것이 <국제코뮤니스트당>이었다고 명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것의 실질적 퇴행 때문에 그것을 부르주아 조직으로만 보려는 사람은 그걸 제대로 평가할 수 없고, 그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끌어낼 수도 없다. 트로츠키주의는 초기 4차 대회를 계승해야 한다고 무비판적으로 주장한다. 창립대회가 제2 인터내셔널과 단절했던 지점에서, 그 후속 대회는 퇴행했다는 점을 그들은 결코 보지 못했다. 1차 대회는 사회민주주의로부터 분리했다. 그런데 3차 대회는 그에 반대해 ‘통일전선’ 속에서 사회민주주의와 함께할 것을 제안했다. 사회민주주의가 부르주아 진영으로 결정적으로 넘어갔다는 것을 인식한 후인데도, 코민테른은 3차 대회에서 사회민주주의를 부활시켰다. 사민주의당과의 동맹정책은 1930년대에 트로츠키주의가 ‘입당주의’ 정책을 채택하게 했다. 입당주의란 곧 코민테른 1차 대회의 원칙을 정면으로 무시하면서, 사민주의당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레닌이 말한 것처럼 이러한 동맹 또는 항복의 정책은 스페인 내전에서 부르주아 공화 정부를 지지하고, 침머발트와 인터내셔널을 배신하고 제국주의 2차 세계대전에 참여하는 반혁명으로 트로츠키 흐름을 빠져들게 만들었다.

     

     이미 1920년대에 코민테른 내부에서 이러한 퇴행에 맞서 투쟁하려는 새로운 좌파가 만들어졌다. 그들은 특히 이탈리아, 네덜란드 그리고 독일 좌파였다. 1920년대 동안 배제된 이러한 좌익 분파들은 코민테른과 혁명적 물결을 비판적으로 재평가함으로써 죽어가는 코민테른과 ‘미래의 당’ 사이에서 연속성을 보증할 정치투쟁을 지속했다. 1930년대에 코뮤니스트 좌파의 이탈리아 분파의 잡지가 「빌랑(Bilan)」('평가')이었다는 것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인터내셔널의 원칙과 연속성을 갖고, 이들 그룹은 제2 인터내셔널과 단절하는 데에서 나타난 약점을 비판했다. 1930년대 동안의 반혁명과 2차 제국주의 전쟁의 암흑기 속에서 그들이 펼쳤던 이름 없는 노력 덕분에 오늘날 코뮤니스트 그룹이 부활해서 존재할 수 있게 됐다. 그들은 코민테른과 조직적 연속성을 지니지 않지만, 정치적 연속성은 지니고 있다. 이들 그룹이 만들어내고 방어한 입장들은 자본주의 쇠퇴의 새로운 시기를 맞아 코민테른 안에서 제기된 문제들에 답을 주고 있다.

     

    따라서 ‘코뮤니스트 좌파 분파들’이 이루어낸 비판적 재평가의 기초 위에서 코민테른은 오늘날 살아 있고, 미래의 <세계코뮤니스트당>에서 살아있게 될 것이다.

     

    오늘날 점증하는 착취와 가난에 직면해 프롤레타리아트는 다음과 같은 <침머발트 좌파>의 입장과 같은 입장을 채택해야 한다.

     

    경제 전쟁에서 부르주아지와는 어떠한 신성한 동맹도 없다!

    민족 경제를 구하기 위한 어떤 희생도 반대한다!

    계급투쟁 만세!

    경제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라!

     

    경제적 파국, 사회적 해체 그리고 제국주의 전쟁의 전망에 직면해 1919년처럼 오늘날도 역사적 대안은 똑같다. 그것은 자본주의 파괴와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수립인가 아니면 인간성의 파괴인가, 사회주의인가 아니면 야만인가다.

     

    미래는 코뮤니즘의 것이다.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RL (IR57 2nd quarter 1989로부터 재발행,  2021년 3월  재발행)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사진] 뉴딜 시기 사진에 나타난 실업자 이미지

뉴딜 시기 사진에 나타난 실업자 이미지  

 

 

사진은 객관적이다사진은 실체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아마 이를 그대로 믿는 이는 없을 것이다사진은 아주 정치적이다우리는 대공황기 국가가 주도한 기록 관리를 통해 이를 알아볼 수 있다.

 

대공황은 미국 사회의 많은 부문에 정부가 개입하게 된 하나의 계기였다정부는 1935년에서 1942년까지 있었던 경제 위기의 해 동안 미국인들의 경험을 문서화하는 사진 기획을 지원했다그 가운데 몇 편의 사진을 소개해본다수집된 사진은 어떤 이미지를 담고 있을까.

 

 

1. ‘잊혀 진 사람(?)’

   

<사진 1> 하릴없이 떠돌고 있는 실업자들  

 

<사진 2> 뉴딜의 단면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파산한 레스토랑임대합니다.” 그 레스토랑을 등지고 서 있는 농부.

 

<사진 3> 고통스러운 기다림사회에서 배제당한 모습.   

   

<사진 4>  

 <사진 5>

 <사진 6>

 

위의 사진에 나오는 실업자 이미지는 하나같이 파편화된 개인이다그들은 하나같이 정돈되지 않은 모습당당하지 못한 모습무언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무기력감 등을 보여주고 있다그들에게 남아도는 것은 시간뿐이다이런 구도가 전달하는 것은 개인적’ 절망일 뿐이다대공황이라는 구조가 구조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을 희생시켰음에도오로지 책임은 개인의 몫이다.

 

개별화된’ 실업자 이미지는 구경꾼의 처지에서 보면 사회의 낙오자에 지나지 않는다. <사진 3>을 보면그것이 뚜렷이 드러난다광장에 하릴없이 앉아 있는 실업자들그들은 분수대에 있는 거북이보다 못하다그럼에도 파산한사회적으로 고립된 실업자의 이미지는 사회적 모델에 도전하고 정부 지원의 증대를 요구하는 데 적극적으로 가담한 노동 운동의 일부로서 실업자를 재현한 것이다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뉴딜 개혁을 거부하게 만들었던 이미지다대공황은 실업에 대한 사회적 태도가 크게 달라졌던 시기였다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게 됨으로써 실업은 모든 공동체에 영향을 미쳤다이것은 실업자에 대한 훨씬 더 커다란 사회적 공감을 생기게 했다특히 50 퍼센트가 넘는 실업이 생긴 공동체(광부 공동체에서는 더욱 그러했다그래서인가 다음의 사진에는 광부들이 전투적인 실업자 노동운동으로 조직되었음을 보여주는 사진들이 나온다.

 

 

2. “전투적 실업자 노동 운동

 

 <사진 7>

<사진 8>

<사진 9>

<사진 10>

<사진 11>

<사진 12>뉴딜흑인에게도 완전한 사회적경제적정치적 평등을 위해단결하라전쟁과 파시즘에 반대하라.”

   

 

 

3. 그리고 다른 사진들

 

 

 

 

 

 

 

 

웨스트버지니아 주에 있는 광산도시 스코트 런에는 이주자들의 도시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사진에 나타난 그곳의 분위기는 마치 라스폰 트리에 감독이 만든 영화 <도그빌>에 나온 것처럼 스산하다스코트 런에는 <오두막 공동체 센터>(The Shack Community Center)가 있다이 공동체는 처음에 스코트 런에 있는 다양한 이주자 공동체를 미국화하고” 앞으로 있을 수도 있는 광부들의 급진화를 미리 내다보고 모건타운의 제1장로교회(Morgantown First Presbyterian Church)가 세운 것이다그러나 미국사회가 대공황으로 휘청거리자이 <오두막 공동체 센터>는 오히려 실직당한 노동자를 조직할 수 있는 중심이 되었다. <노동자 연맹>이 이 공동체에서 실직당한 광부들을 열심히 조직하고 있다.

 

실천, 2008년 9월호사회실천연구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코뮤니스트 12호] 자본주의 위기 : 코로나19 팬데믹과 계급투쟁 전망

자본주의 위기 코로나19 팬데믹과 계급투쟁 전망

 

ghfhfghfg.JPG  

 

자본주의 위기는 지금 여기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가 있는 모든 곳에 있다코로나19 팬데믹 위기가 폭발한 지 채 몇 개월이 되지도 않아 자본주의 체제의 분열과 무능력이 확인되었고이 재앙을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도 더는 의심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이제 자본주의 세계는 온갖 종류의 사회적 반란과 전쟁 위협이 고조되고 있고세계 곳곳에서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올 초부터 전개되고 있는 이 위기는 계급 대결의 새롭고 전례 없는 가능성과 경로를 열어주었다.

 

자본주의가 알고 있는 유일한 해결책

 

자본주의 쇠퇴기의 경제 위기는 더욱 심화하고 악화될 수밖에 없다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그토록 많이 논의했던 'V'나 'L'자 형태의 회복은 보이지 않는다코로나19 팬데믹으로 세계 생산의 절반 이상이 폐쇄되고 마비된 상황은 일단 폐쇄되고 나서 다시 이전으로 되돌아가기를 바라는 정상적인 경기 회복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그것은 자본주의 위기가 2020년 팬데믹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단지 위기를 촉진시켰기 때문이기도 하다부르주아들이 바라는 대로 회복과 부흥이 가능하면 좋겠지만현실은 경제 위기는 시작에 불과하다.

 

이 위기는 코로나 팬데믹 이전부터 존재했다자본주의는 1970년대 이후 구조적 위기를 겪고 있다그동안 자본주의는 산업 구조조정과 생산 부문 이전 등으로 위기 때마다 다양하게 대응 해왔다이는 유선에서 인터넷과 최신 스마트폰에 이르기까지 정보기술 및 통신의 디지털 혁명과 함께 경제의 금융화로 공공과 민간 부채의 붐을 일으켰다이 모든 것은 점점 더 불안정해지는 고용 조건과 직간접적 임금(연금)에 대한 공격에 기반을 두고 있다경제 위기를 해결하려는 시도로 촉발된 이른바 세 번째 산업 혁명은 이전의 두 산업 혁명보다 훨씬 더 인간의 존재를 심오하게 변화시켰지만위기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그것은 단순히 하나의 붕괴에서 다른 붕괴로그리고 또 다른 전쟁으로 옮겨갔다이러한 사건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가 알고 있는 위기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일반화된 전쟁이다.

 

이러한 변화는 동시에 생태계 전체를 황폐화했고지구 온난화에 기여했고세계 인구 최소 1/3의 생활 수준과 보건의료 수준을 대폭 하락시켰다이것은 바이러스 확산의 전제조건이 되어버렸다인류의 모든 역사는 우리에게 위기와 전염병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코로나19는 머지않은 미래에 유행할 새로운 전염병과 교차할 가능성이 크다이는 장기적으로 경제사회환경 위기 해결을 위한 자본주의 체제의 본질적인 무능력을 보건의료 부문에도 적용시킨다.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시장의 붕괴로 위기가 촉발되었다그 뒤로는 12년간의 감축불안정가시적인 경제 회복의 부재가 뒤따랐다그리고 이번에 방아쇠를 당긴 것은 코로나19 팬데믹이었다그것은 들불처럼 번져 세계 자본주의 경제 회복의 꿈(10년마다 꿈은 유토피아적으로 변한다)을 다시 한번 파괴했다. 2020년 2분기 GDP의 붕괴는 거의 모든 주요 자본주의 국가에서 두 자릿 수를 기록했다독일 -11.7%, 미국 -32.9 %, 이탈리아 -12.4% ... 유일한 예외는 중국의 3.2% 미미한 성장이다.

 

자본가계급은 이 경제-보건 위기에 중단기적으로는 그들이 잃은 이윤의 일부를 보충하기 위해 엄청난 대출을 이용하면서 대처하고 있지만장기적으로는 새로운 감축더 불안정한 노동조건그리고 더 많은 착취를 통해 노동계급에게서 이윤을 보충할 것이다.

74ba6a8eab95af116ec88a47c1e65850.jpg

 

이윤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가 바이러스다

 

바이러스가 확산되기 시작한 2020년 초지배계급의 반응은 이윤의 톱니바퀴를 계속 돌리기 위한 초기의 부정적 반응에서 확산을 막기 위한 다양한 조치로 다소 빠르게 전환했다지배계급은 초기에 바이러스를 억제하고 보건 문제에 대한 연구를 촉진하는 정책을 통해 사람들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기보다는 우유부단한 정책으로 보건의료 시스템의 전반적인 안정성을 보호하려고 노력했다지배계급은 곧 바이러스의 확산이 심각한 위협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한편으로 시장 경제(자본주의 활력소)를 정상적으로 돌리려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 시스템의 안전성(작업장 감염 및 보건의료 시스템의 잠재적 붕괴로 인한 문제)을 보호하려는 것 사이의 모순에 직면했다노동자들은 계속 생산해야 했고감염 예방 비용을 제한해야 했다하지만감염 확산을 막아야 했기 때문에 감염 예방과 보건의료 분야에 많은 투자가 필요했다이는 시장과 이윤 측면에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이다하지만이것은 이윤이 아닌 인간의 필요를 위해 생산하는 다른 코뮤니스트 사회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1547fc6ab010c0b2f896375893b6326d.jpg  

 

노동자의 눈을 흐리게 하는 것들

 

바이러스의 존재와 위험에 대해 포퓰리스트-음모론의 관점으로 보면 이 사태에 대해 신뢰할 만한 것은 별로 없다물론 우리가 현실에서 종종 접하게 되는 수많은 음모론은 대부분 근거가 없다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에 대한 통제력을 높이기 위해 바이러스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지만현재의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의 위험을 막기 위해 새로운 바이러스를 퍼트릴 필요가 없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사실이다더구나 그 바이러스는 자본주의의 심장을 강타했기 때문에 만일 그것이 자본가계급의 발명품이었다면 분명히 자기 학대적인 것이었을 것이다한마디로 우리 노동계급의 상대는 역사에서 지워질 운명이기는 하지만그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다음모론은 포퓰리스트와 극우 반동들의 방책을 대신해 외치고 항의하는 일부 지배계급 분파와 소부르주아의 위기만을 반영한다.

 

소부르주아지와 중산층은 이번 위기에서 고통을 과장하는 경향이 일부 있지만그들은 실제로 위기에 처해 있다그들은 자본주의 위기로부터 자본주의를 구함으로써 국가를 부흥하려는 계획과 동시에 자신의 작은 특권을 잃지 않기 위한 불가능한 개혁에 열광하고 있다하지만 그들의 저항은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한에서만 유효하다이와 다르게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러한 불만과 분노를 자신의 주변으로 모아 자본주의에 맞선 저항의 중심을 조직할 수 있다.

 bannon-madrid.jpg

 

위기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노동자계급에서 나왔다

 

이번 코로나19 위기에 대한 가장 건강하고 의미 있는 반응은 노동계급으로부터 나왔다우리는 지난 3월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파업의 세계적인 물결에서 "우리는 도살장의 양이 아니다!"라는 외침을 보았다미국에서 조지 플로이드 살해 이후 계속되어 온 프롤레타리아 반란과 벨로루시에의 총파업까지이란에서 레바논에 이르는 중동의 시위와 파업의 물결까지...

 

이러한 투쟁을 통해 세계 노동계급은 비록 섬광처럼 순간적으로 보이지만중요한 투쟁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으며그중 일부는 최근에 발생했다그것은 또한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이전 투쟁 경험과 다른 나라의 경험으로부터 자신의 계급적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배우고, 3, 4월의 파업에서처럼 공동의 이해관계를 방어하기 위해 어떻게 단결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벌어지고 있을 때자신을 ()자본주의자라고 주장하는 정치 세력들은 여전히 헛발질만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그들은 이 가혹한 위기에 대한 대응에서 더듬거리고머뭇거리고심지어 민족주의적 포퓰리즘을 흉내 내기까지 했다그들은 전혀 반()자본주의적이지 않은 개혁 프로그램을 급진적 요구라면서 과거를 반복하고 있다그들이 주장하는 보건의료 시스템 재정 확대국유화 요구 등은 자본주의 체제 유지가 아닌 체제 전복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코뮤니스트는 국유화와 같이 노동계급의 정치권력 장악이 전제되지 않은 이른바 '과도기적요구를 내 거는 전술을 사용하지 않는다그것은 혁명에 더 가까워진다는 착각 속에서 개혁주의의 영향을 강화할 뿐이다진정 위기의 대가를 자본가들이 치르게’ 하기 위해서는 부르주아 국가를 통해서가 아니라 노동계급이 권력을 가져야 가능하다.

 huelga-general-tataouine.jpg

 

()자본주의가 아닌 코뮤니즘을 대안으로 투쟁하자

 

이 고통스럽고 험난한 위기의 시대에 노동계급은 반()자본주의만을 주장하는 모호한 대안이 아니라 자본주의 전복과 코뮤니즘이라는 명확한 강령적 원칙을 중심으로 조직화해야 한다.

 

이 위기에 대한 가장 확실한 해결책을 가진 계급은 다른 사회계급에는 존재하지 않는 계급투쟁의 파괴력과 새로운 사회에 대한 통제력을 가진 계급이다그들은 바로 다양하고 복잡한 관계 속에서도 동일한 착취와 동일한 반()자본주의-코뮤니즘 이해관계에 따라 연합한 노동계급이다.

 

노동계급은 자본주의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다그들은 자본주의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전복할 수 있는 파괴력을 가진 유일한 계급이다따라서 노동계급에게는 부르주아 국가기구의 파괴를 위해 투쟁하면서도 국가 자체에 대한 코뮤니스트 대안을 신속하게 구축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실제로 새로운 세계 정부(노동자평의회 국제 권력)는 가능하다코뮤니스트 강령은 노동자의 자기 권력즉 노동계급이 집단적으로 사회를 통제하는 정치권력을 가져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며이는 노동계급이 본질적으로 생산의 주체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노동계급은 혁명(과정)을 통해 전체 계급을 포괄 할 수 있고가장 기초적인 단위에서부터 시작하여 전체 생산을 통제할 수 있고생산수단의 사회화와 노동자 평의회 권력을 통해 체제를 장악 할 수 있다.

 

노동계급의 주적은 부르주아 국가에 있고 진정한 바이러스는 자본주의 체제다그 적은 코로나19 팬데믹 위기 상황에서도 노동자를 착취하고 노동자에게 위기를 전가하는 자본가와 그 대리인들이다노동계급이 자본주의 위기와 고통바이러스 대유행의 치명적인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한 가지밖에 없다모든 민족주의애국주의 이데올로기를 거부하고 국제적으로 연대하여노동계급 공동의 이해관계를 위해 국제적으로 투쟁하는 것이다생산수단이 더는 자본가나 국가의 손에 있지 않고 사회화된 사회를 위해이윤을 위한 생산이 아닌 인간의 필요를 위해 생산하는 사회생산과 분배가 인류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사회를 위해자본주의를 혁명적으로 전복하고 새로운 체제를 만드는 것이다.

 key_workers.jpg

코로나19 팬데믹과 2차 대유행자본주의 위기는 시작에 불과하다앞으로 닥쳐올 감원정리 해고불안정한 일자리생존권 위협에 맞선 저항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건강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투쟁이 세계 도처에서 지금보다 훨씬 자주치열하게 벌어질 것이다물론 세계의 계급투쟁은 균등하지 않고 앞선 곳과 뒤처진 곳의 격차가 쉽게 좁혀지지 않을 것이다하지만세계 노동계급의 이해관계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전망은 동일하다.

 

이에 코뮤니스트와 노동자투사들은 코뮤니스트 강령을 전면에 내걸고, ‘계급적이고 국제주의적 원칙을 가진 모든 프롤레타리아트와 함께 자본주의에 맞서 투쟁할 것이다.

 

2020년 11

국제코뮤니스트전망 이형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미얀마 항쟁

미얀마 항쟁

 

20210310_114834468.jpg

 

<편집자 주>

코뮤니스트 노동자는 미얀마 노동자민중의 투쟁을 지지하고 연대한다.

더불어 미얀마 투쟁이 "쿠데타 세력과 동전의 양면인 아웅산 수치(민족민주연맹정권의 복귀를 넘어 노동자민중의 자기권력 쟁취 투쟁으로 발전해야 한다.” 는 국제주의 메시지를 전한다.

 

      

1월 1일 이후 버마로 알려지던 거리는 거의 매일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낙타의 등을 부러뜨린 마지막 지푸라기는 아웅산 수치를 전복시키고 그녀의 정당(민족민주동맹)을 파괴한 군부 쿠데타였다쿠데타 세력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위대를 잔인하게 탄압하고 있다(“미얀마에서는 2월 28일 최소 18명의 시민이 숨졌고그 이전에도 3명이 시위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이날 사망자 38명까지 모두 합치면 59명에 이른다이는 유엔 등에 의해 집계된 숫자이며미얀마 시민들은 실제 사망자 수가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유엔은 쿠데타 이후 구금된 이들은 1,700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편집자>)

 

이것은 군대가 항상 정치경제계를 장악해 온 나라에서 여러 번 연출된 대본이다수치는 12월 14일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2015년에 비해 낮은 득표율을 기록했지만엄청난 인기를 끌었다그녀는 민주화 과정을 시작하려 했지만헌법상 25%의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군부 세력의 저항에 맞서 싸워야 했다군의 최고 간부들은 국내 최강의 경제력과 금융 권력을 갖고 있으며 은행과 산업을 소유하고 있다그리고 최대 규모의 상업 네트워크 또한 관리하고 있다그들은 민주주의자와 야심에 찬 개혁주의자가 정치 체제를 정면으로 공격했을지라도 군부의 철옹성 세력에 흠집을 내려는 수치의 개혁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녀는 항상 군부계급을 자극하는 행동을 피했고게다가 자국의 소수 민족과 종교적 소수에 대해서는 항상 철권통치를 해 왔다대표적인 예는 이슬람교도 소수민족인 로힝야족에 대한 탄압이며그들은 도망치거나 강제 수용소에서 생활해야 했다.

 

그렇다면쿠데타는 왜 일어났을까노벨 평화상 수상자는 혁명가처럼 행동하지 않았다그리고 미얀마 자본주의의 자본주의 빈곤의 법칙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도 않았으며게다가 군부에 대한 저항에 철권을 행사했다오히려그녀는 자치권이나 종교의 자유를 요구하는 로힝야족의 주장을 짓밟는 "더러운 일"을 했고그 나라의 북쪽 국경에서도 비슷한 행위를 했다그동안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했으며이런 태도 때문에 개인 신뢰도가 떨어졌지만아주 높은 지지율을 유지해 왔다.

 

쿠데타의 이유는지구상의 이런 곳에서 종종 일어나듯이군부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주의를 찬양하는 가두시위가 더 급진적인 무언가로 번질 수 있다는 지배계급의 두려움에서 비롯되었다.

 

게다가이미 위태로운 미얀마의 경제 상황은 전염병 대유행과 함께 극적으로 악화되었다미얀마는 제조업이 거의 없고 농업의 절반은 초보적이다그리고 외국인 투자가 거의 없으며 군 위계질서에 의해 통제되는 경직된 재정 구조를 가지고 있다감염병 대유행은 상황을 훨씬 더 악화시켰다. GNP는 30% 하락하였으며이미 높았던 실업률은 사회적 문제 수준에 이르렀다.

 

투자 부족과 낮은 생산성으로 인해 투기와 부패가 증가하고 있다얼마 되지 않는 토착 자본이 해외로 도피하고 빈곤화(정부가 발표하기를 꺼리는 통계)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IMF에 따르면 미얀마에는 심각한 인도주의적보건 위기가 조성되고 있으며이로 인해 이미 수십만 명의 미얀마인들이 방글라데시나 태국으로 이주했다고 한다군부 엘리트들에게 있어서 아웅산 수치는 심각한 내부 상황을 통제할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그래서 그들은 그녀를 가택 연금에 처하게 했고심지어 우스꽝스러운 혐의로 그녀가 중요한 순간에 행동할 수 있는 수단을 빼앗았다한편 그들은 민주적 요구에 초점을 맞추면서 군부 반란 세력들에게 훨씬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다른 잠재적인 경제적정치적 요구로부터 대중을 분리시키는 방향으로 시위에 대응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미얀마가 경제적으로 매우 약하고 쿠데타 정부에 대한 정치적 반대 물결에 휩싸여 있지만미얀마의 전략적 입장은 가장 탐욕스러운 국제 제국주의자들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추가해야 한다.

 

군사 쿠데타 직후 퇴임하는 트럼프 행정부 하의 미국은 유엔에 미얀마 규탄과 금수조치 결의안을 채택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러시아와 중국의 반대표로 통과되지 못했다.

 

미국에 위협적인 것은 남중국해대만 섬벵골만의 통제였고모두 중국에 반대하는 곳이다여전히 미국의 금수 조치를 받는 러시아는 노르드 스트림(Nord Stream)2와 모든 국제 전략 지역에서 워싱턴과 싸우고 있었지만미 제국주의의 수레바퀴 안에서 발언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한편중국에게 미얀마는 새로운 실크로드’ 계획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보증이다우리가 여러 차례 비판한 적이 있었던 이 프로젝트는 '전통적인' 1차 상품에서 첨단 장비에 이르기까지 아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수출 흐름을 창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무기 판매에서 자본 수출전기 자동차에서 최신식 굴착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고 있다중국 정부는 또 중국 외에서 생산되는 잉여가치의 투기적 수확물중국 금융자산의 외자 유치 등에 다른 국제통화를 대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자국 재화와 기술의 교환 통화로 위안화가 담당하게 하려고 한다중국은 확실히 달러와 미 제국주의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제국주의 세력이다.

 

이를 위해 베이징은 실크로드를 따라 기지와 정치적 기준점이 필요하다중세에 카라반들이 이 길을 따라 있었을 때처럼 오늘날에는 군사 기지수용 국가지원하거나 부패시킬 정부그리고 금융에서 외교에 이르기까지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유지할 수 있는 폭넓은 동맹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카타르이란과의 동맹과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한 접근은 이런 관점에서 봐야 한다아시아에서는 이미 베이징의 '관대한 손'을 잡은 방글라데시에 이어 미국과 서방 동맹국들의 금수 조치에 대한 외교적 방어 형태로 미얀마와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지고 있다.

 

이것이 군부가 감염병이 대유행하는 상황에서 쿠데타가 자신들의 경제적정치적 이익을 구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 될 것이라고 결정한 이유이다군부는 시위대가 권력의 궁전을 그냥 지나쳐서 구호만 외치면서 체제 안에 머무르는 한 민주주의를 위한 시위를 용인할’ 수도 있다그러나 그들이 더 나아가면탄압이 거세질 것이고탄압이 더 거세질수록 저항은 더 격렬해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미국이 요구하는 군사정권 제재에 중국이 즉시 반대한 이유이다.

 

이 엄청나게 많은 역사적 증거로부터 우리는 독재 정권과 '민주주의정권이 같은 동전의 양면이며그들의 정권 교체가 경제 주기와 그들이 만드는 위기와 사회적 긴장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적대감이 비록 단호하고 폭력적이더라도 자본주의 체제의 대안을 지향하는 전술전략그리고 실질적인 조직이 없다면그들을 낳은 시스템에 다시 흡수되거나 시스템 자체에 의해 잔인하게 억압당하게 될 것이다그뿐만 아니라 어쩌면 군대를 대신할 수도 있는 민간 복장을 한 부르주아계급의 파벌들결국 제국주의 분쟁에 휘말리게 된다그들의 정치적 약점은 그들이 외부의 경제 및 금융 지배의 도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자본주의 세계이기 때문에 현재의 감염병 대유행과 같은 심각한 위기는 제국주의 중심을 치열한 경쟁에 몰아넣고 있다가장 강한 자는 가장 약한 자에게 자신을 강요하고가장 강력한 쇠사슬로 프롤레타리아를 묶어둔다가능한 한 위기는 복종과 부패를 통해 관리되고이를 위한 공간이 좁아지면 국지전과 대리 충돌로 관리된다이 세계가 무너지고 다음 단계의 자본주의 재건에 필요한 세계적인 도살장으로 변하기 전에 극단적인 야만성을 종식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 운동에서 노동자프롤레타리아트는 파시즘(군부독재)에 대항하는 민주주의 투쟁에 국한되지 않고차악의 방어(아웅산 수치 복귀)를 승리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정말로 필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의 주요 원인인 자본주의 체제에 대항하는 투쟁이다그것은 코뮤니즘을 위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는 투쟁이다.

 

FD

2021년 219

 

국제코뮤니스트경향(ICT)

 

<출처>

http://www.leftcom.org/en/articles/2021-02-22/revolts-in-myanmar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코뮤니스트 12호] 민주노조운동을 넘어선 코뮤니스트 노동자운동을 위하여

[전태일 열사 50주기]

 

402050_51076_5039.jpg



민주노조운동을 넘어선

코뮤니스트 노동자운동을 위하여

 

 

자본주의 쇠퇴기에 자본은 파괴적 본성을 지구 전체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한 방울의 잉여가치라도 더 뽑아내려는 자본은 지구생태계마저 멸종의 위협에 빠뜨리고 있다이윤 착취를 위한 무분별한 개발로 환경 파괴기후 위기바이러스 대유행을 자초하고 있다임노동 없이 존재할 수 없는 자본은 노동계급의 생활수준을 지속해서 공격할 뿐만 아니라 코로나 팬데믹 상황을 이용하여 노동자의 삶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 K-방역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한국 사회의 노동 지표는 암울함 그 자체이다. ‘1,000만 비정규직 노동자, 100만 조직 노동자, OECD 최장 노동시간최대 산재 사망자살률 1교사·공무원 노동기본권 부정청년 실업 증가’ 게다가 부르주아 정부는 ILO 핵심 협약 비준을 빌미로 자본의 요구를 대폭 수용한 노동법 개악까지 밀어붙이고 있다최근 택배 노동자들의 연이은 과로사에서 보듯이 노동시간과 강도는 증가했지만이윤과 임금의 격차는 더욱 커지고 실업 상태이거나 실업 단념이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50년 전 전태일 열사의 외침은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현재진행형이다열사의 외침은 노동운동에서는 민주노조운동으로 이어진 계기가 되었다전노협연대회의업종회의현총련 등 그룹별 노조연합체조선노협 등 업종별 노조연합체 등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마침내 1995년 노동자들의 열망과 투쟁의 힘을 바탕으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이 출범했다. 197080년대에는 국가노조어용 집단인 대한노총한국노총을 넘어서지 않고는 평범한 노동조합 결성조차 꿈도 꿀 수 없었다그래서 민주노조운동의 태동은 기존 질서와 어용세력을 넘어서기 위한 싸움으로부터 시작되었다자본의 이윤이 아니라 어용노조에 맞선 민주노조운동은 노동자의 이해와 요구를 반영하였다노동계급의 경제사회정치적 요구를 대변하며 자본과 어용세력에 맞서 싸우는 조직을 건설하기 위한 내용을 집약하여 표현한 것이었다하지만 이제 민주노조는 노동자의 이해와 요구 대신 조합원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는 것으로 바뀌었다그렇다면 민주노조운동의 위기 원인은 무엇인가?

 

 402050_51085_5141.jpg

 

민주노조(?), 계급투쟁 전망의 상실

 

자주성민주성계급성을 원칙으로 해서 등장한 민주노총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민주노조운동이 위축되면서 아직도 위기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여러 가지가 원인이 있겠지만 근본적인 것은 계급운동의 전망 상실에 따른 계급투쟁의 부재이다계급투쟁에 대한 전망 상실은 한편으로는 노동계급에 대한 자본의 분할 통치 이데올로기에 쉽게 포섭되어 노동계급 분열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다른 한편으로는 조합주의와 관료주의가 득세하며 노동자 민주주의를 질식시키고 있다거기에 부르주아 선거 때는 노동자정치 세력화야권연대비판적 지지로 이어지고 있다이것은 계급모순을 은폐하고 노동자 투쟁에 찬물을 끼얹으며 걸림돌 정도가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 유지에 한 축을 담당할 정도이다.

 

자본의 분할 통치

 

19961997년 노동법 개악저지 총파업 투쟁 당시 민주노총 내부에서는 근로자 파견제나 변형시간 근로제를 내주는 대신에 정리해고제는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 다수를 이루었다이는 정규직의 최대 관심사를 중심으로 사고한 결과였고계급투쟁의 전제인 노동계급 연대에 치명타가 되었다그 이후 지금까지 노동운동 내부에서도 정규직이 양보하여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는 대자본 투쟁을 가로막는 장치로 기여지배계급의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되었다자본과 대립을 정규직 비정규직 대립 등으로 치환함으로써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로 정착되었다.1)

 

관료주의

 

계급투쟁의 전망 상실은 민주노조운동을 관료주의조합주의로 전락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민주노조운동은 퇴조를 거듭하면서 계급 연대와 계급 해방 전망은 사라지기 시작했다대신 절차적형식적 민주주의를 오용하며 자신들의 권익을 우선하는 어용세력이 민주노조 진영에 굳건하게 자리를 잡아갔다그러나 자본주의 쇠퇴기에 자본의 공격은 갈수록 노동계급의 약점을 향해 공세적이고 치명적으로 계속되고 있다노동조합의 개량주의는 조그만 타협의 여지마저도 불가능하다그 결과 많은 경우 합의로 포장된 공간은 사실상 노동계급에 대한 학살에 협력한 대가로 소수 노조관료들의 지위와 특권을 보장해주는 밀실협상의 장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노동조합 민주주의는 오히려 온갖 양보와 타협후퇴에 동원됐다그리고 어용세력은 다시 이를 통해 조직적체계적으로 든든한 기반을 구축해 나갔다이들은 노동조합 관료기구의 절차적형식적 민주주의규약 혹은 다수결에 의한 결정 등으로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열망에 찬물을 끼얹었다심지어 이들은 노동조합 각급 단위에서 노동자 민주주의와 한참 동떨어진 결정을 하는 주체이기도 했다결국 노동조합 어용세력의 특권은 노동자 희생을 바탕으로 유지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 유지와 노동조합

 

아직도 노동운동 내 다수는 노동조합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데 핵심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그러나 이미 민주노조운동은 급속도로 체제 안으로 통합되고 관료화되면서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변질하였다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점진적 개량과 의회주의에 몰입된 노동운동 상층 관료는 노동자 대중의 계급의식을 왜곡하고 있다계급운동에 대한 전망과 투쟁은 더는 노동조합 내부에 존재하지 않는다계급투쟁에 대한 전망 상실은 급진적 노동운동 세력이 후퇴한 계급의식에 영합해 코뮤니즘에 대한 어떤 전망도 갖지 못하고 막연한 반()자본주의만 주장하게 했다노동조합은 더는 혁명적 기구가 아닌데도 노동조합 개선으로 혁명적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시각은 노동운동에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았다이러한 시각은 노동계급의 혁명적 열기를 잠재우는 부르주아 선거에 대한 환상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고, (최근에만 있었던 일은 아니지만올해 여름 논란이 되었던 민주노총의 노사정위 참가 여부노사정 협의 등으로도 나타났다이것은 진보 대 보수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로 계급모순에 대한 진실을 감추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체제에 포섭된 노동조합은 노동계급의 투쟁이 아니라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타협으로 살아남게 되었다일부 노동조합과 관료들은 이제 자본주의 착취 경제를 합리화하고노동력 판매를 조정하며 착취를 강화하려는 자본주의 국가의 노력에 협력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또한노동계급 내부에서 투쟁을 방해하고 계급투쟁이 자주적으로 발전하고 급진화를 막는 역할을 하고 있다이렇게 현재의 노동조합은 자신의 계급적 성격을 잃어버렸기 때문에노동계급이 다시 장악할 수 없고혁명적인 소수가 혁명적인 활동을 할 영역을 제공하지도 못하게 되었다.

 

 1250x500.crop.jpg

  

 노동조합의 한계

 

조합주의로 일어나는 최근 현상도 한국만의 현상도 아니다노동조합 형식은 자본주의 상승기인 19세기의 구조적 조건뿐만 아니라 국가-계급-노동조합 관계에서도 노동계급 투쟁의 실제 표현이었다또한프롤레타리아의 가치곧 조직된 투쟁 정신인 노동자 연대를 배우는 최초의 학교였다노동조합은 처음에 산업 자본주의가 최초로 발전한 영국에서 등장했다이것이 다른 나라로 널리 퍼진 후에자본주의 산업에 자연스럽게 경쟁자로서 기능하게 되었다하지만 20세기 초 노동조합은 그러한 형태의 특성을 상실했는데이러저러한 노동조합 지도자의 실수 혹은 배신 때문만이 아니라 노동조합 본질 때문에 제도화된 노동조합이 되었다몇 가지 역사적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그것은 세계 분할을 위해 제국주의 강대국이 일으킨 제1차 세계대전이다일부를 제외한 사회주의당사회민주주의자개량주의자 모두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전쟁에 끌어들이는 데 도움을 주면서 민족 부르주아지를 지원하기 위해 줄을 섰다사회민주당에 의해 지도되었던 노동조합은 자국의 민족 부르주아지를 지지했다이것은 민족국가 체제를 지키기 위한 상황에 있는 노동조합 최초의 분명한 사례였다노동조합은 부르주아 국가인 조국 방어자 역할만이 아니라자본주의 착취 구조 안에서 효과적인 부역자 역할을 하게 된다.

 

한국에서도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조합은 계급투쟁의 학교사회주의 훈련소 역할도 했다하지만 이제는 계급투쟁과 사회주의 운동에 해악적인 요소가 더 많아졌다극소수의 정파활동가나 초보 사회주의자를 양성하고 공급받을 수는 있겠으나대중행동의 자발성과 혁명의식과 대중이 직접 만나는 것을 가로막는 역할을 하고 있다더욱이 정치조직과 노조운동의 잘못된 결합즉 정치조직의 노조운동 지도-피지도 관계에서 나타난 대리주의 경향은 계급행동의 수동성과 상층부의 관료주의를 양산했을 뿐 아니라노동자조직 전반에서 노동자 민주주의를 계속 축소해왔다물론 노동조합의 이런 한계를 극복하고자 그간 많은 시도가 있었다하지만 결론적으로 모두 실패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노동조합 상층 관료세력은 자신들이 노동계급에 대한 공격과 노동자 투쟁 방해를 반복하는 것이 불신으로 이어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그들은 노동조합 지도부에 대한 이러한 불신을 노동자들로부터 너무 멀리 있다라거나 너무 개량주의적이라거나 너무 관료적인 것에 관한 관심으로 돌리려 한다그래서 그들은 노동자들에게 노동자 이해를 대변할 수 있는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그것은 노동조합의 급진화라는 형태를 취할 수 있는데보다 좌익 지도부를 선출하고더 높은 임금 인상이나 정부 정책의 변화 등 급진적인 요구를 추진하는 것이다그것은 또한 비판적’, ‘()지도부’ 또는 ()노동조합의 경향을 보일 수도 있다이들은 다양한 형식과 이름을 갖고 있다그러나 그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노동조합을 넘어선 급진적 계급투쟁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타협에 충실한 기본적인 노동조합 형식(질서)을 방어하는 것이다그들은 노동조합 자기방어의 가장 해로운 형식이다.

 

 12233.jpg

 

코뮤니스트 노동자 운동 전망

 

2020년 민주노총은 전태일 3법 청원운동 및 노동개악 저지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전태일 3법은 5인 미만 사업장에 대한 근로기준법 적용과특수고용 노동자간접고용 노동자도 노동자로서 노동기본권을 온전히 행사할 수 있게 하는 노동법 2조 개정안전한 일터와 사회를 위한 중대재해기업 처벌법 제정 운동이다민주노총은 기존 노동체제 속에서 일정한 보호기제를 갖춘 것으로 간주하는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라는 틀을 넘어 가장 열악한 처지의 노동자들과 적극적인 연대에 나선 것을 의미한다.’라고 의의를 두고 있다하지만 전태일 3법의 입법화는 계급 분열의 핵심인 관료주의조합주의를 넘어서 계급의 단결과 투쟁으로만 쟁취할 수 있다그리고 전태일 3법을 입법화했더라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여전히 이윤 착취의 대상이다즉 코뮤니스트 혁명에 대한 어떠한 전망도 없는 현재의 노동조합 운동은 전태일 3법을 입법화할 능력도 없지만노동에 대한 자본의 착취를 근절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

 

혁명적 노동조합은 불가능하다이것은 노동조합 지도부가 부패했고오늘날 노동자들의 전투 속에서 더는 차지할 자리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반대로주요한 경제법 개정 투쟁을 주장하는 노동조합주의가 자본주의 쇠퇴의 시기에 비효과적이고시대착오적이기 때문이다아직도 노동운동 내부의 다수는 사회주의 투쟁에서 노동조합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하지만 노동조합은 더는 혁명적 조직도 일상적인 노동조건도 방어하지 못한다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조합의 재편강화혁신 등은 결코 해법이 될 수 없다전체 노동자의 90%가 노동조합의 밖에 존재한다노동조합만이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투쟁하며 계급성을 고양하는 기구라는 생각은 낡은 것이 되어 버렸다.

 

낡은 조합주의 운동의 쇄신이 아니라 그것과 철저하게 단절하고 새로운 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그 주체는 소수라도 현실에서 원칙을 지키며 투쟁하는 노동자계급의식을 갖고 실천하는 노동자일 수밖에 없다현재 자본주의 위기상황에서 분출하는 새로운 노동자 운동은 노동조합 수준에 갇혀서는 안 된다정치적으로도 운동 주체와 최종목표가 불분명한 반자본주의 운동이 아니라 노동계급 자기해방의 최종목표코뮤니스트 혁명의 목표를 분명히 밝히는 코뮤니스트 노동자운동이어야 한다그것은 진정한 노동자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노동조합주의와 전면적인 투쟁을 벌일 노동자 투사/코뮤니스트 노동자들의 내부 투쟁에서 시작되어야 한다이러한 노동운동 내 계급적 소수파 투쟁은 계급투쟁을 부활시키고 새로운 주체를 형성할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직접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50년 전 전태일 열사의 항거가 민주노조운동으로 이어졌듯이계급적 소수파의 투쟁과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직접행동만이 민주노조운동을 넘어 자본주의 체제와 맞설 코뮤니스트 노동자 운동당 건설의 기반이 될 것이다.

 

2020년 11

국제코뮤니스트전망 윤태상

 

<주>

1) ‘정규직이 먼저 양보를 해서 비정규직의 처지를 개선하는 데 앞장서고 이를 바탕으로 자본에도 양보를 요구해서 사회공헌 기금의 형태로 비정규직 문제를 개선해 나가자는 것이다. ... 비정규직과의 계급 내부의 연대를 끌어내고 나아가서는 전 사회적 연대로 발전해 나가는 길을 여는 것 같이 보이나, 실제로는 정규직은 자신의 몫을 빼앗길 것에 대해 반발하고 이러한 정규직을 비정규직은 비난하는 형태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대립이 생겨났다.’(배성인, ‘민주노총 25년 그 영욕의 세월과 역사’, <진보평론 85호>)

 

 

<관련 기사 더 보기>

 

노동조합을 넘어서는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운동으로 나아가자.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292648

 

노동조합과 노동자평의회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19755

 

로자 룩셈부르크  「대대적 파업, 당 그리고 노동조합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36601

 

노동조합주의 - 안톤 판네쿡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291884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심층인터뷰] ‘영원한 사회주의자’ 오세철 동지

[심층인터뷰] ‘영원한 사회주의자’ 오세철 동지
 
 
<1회> “자본주의는 노동-자본 ‘적대’ 조정하지 않아... 국가는 자본과 동맹하는 기구에 불과”
 
 
 
[위클리서울=최규재 기자] “이 수업을 듣는 대부분은 졸업해도 경영자가 되기 힘들 겁니다. 남의 밑에서 일하는 임노동자가 되겠죠. 그래도 어떤 회사가 어떻게 경영되는지는 알아야겠죠. 억울하게 당하지 않으려면 말이죠. 임노동자의 입장에서 수업을 진행할 것입니다.”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79)가 재직시절 새학기 첫수업 신입생들에게 늘 던진 말이었다. 학생들은 경영학을 공부하며 마르크스를 읽었다. ‘경영자 이건희’도 마르크스를 읽었다고 한다. 임노동자들의 입장을 헤아리기 위해서였다는 블랙코미디 같은 우스갯소리가 나온다. 대기업 회장들과 임원들이 마르크스를 읽으면 읽을수록 노동탄압은 더욱 흉포해져갔다.
 
백골단이 기승을 부리던 1987년 어느 날은 오 교수 인생의 큰 전환기였다. 6월 항쟁 당시 이한열이 연세대 앞에서 최루탄에 맞아 숨지면서다. ‘강단 맑스주의자’였던 오 교수는 자신의 수업을 듣던 제자가 숨지자 이때부터 거리로 나서기 시작했다.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밝힌 후 이명박 정부 때는 사회주의노동자연합 사건으로 국가보안법에 연루되었고, 용산참사-쌍용차 사태 등 각종 시국사건 변론에 앞섰다,
 
오 교수의 입장은 분명하다. 이 모든 게 자본주의가 낳은 폐해라는 것. 지구상에 사회주의가 제대로 정착된 적도 없다고 덧붙인다. 사회주의를 표방한 북한도, 중국도, 러시아도 ‘사이비 사회주의 독재 국가’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북한 체제 역시 붕괴될 대상이라고 늘 주장해온 그다.
 
“과거 많은 사람들은 러시아를 비롯 북한, 중국, 쿠바 등을 사회주의 국가로 오해했다. 일국 사회주의 건설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실제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들 국가가 보여주었다. 진정한 사회주의 국가는 자본주의 내에서 완성될 수 없다.”
 
자본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국가들도 비판의 대상이다. 실제 자본주의는 스스로를 지탱할 수 있는 능력을 점차 상실하고 있으며, 계급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노동자들 앞에서 100년 전과 비슷한 이데올로기로 겨우 버티고 있다는 게 중론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혁명을 향한 어떠한 투쟁도 없었고 자본주의의 일시적 번영의 착시와 사회민주주의의 외피를 쓴 복지국가 모델, 케인즈주의의 일시적 위기 극복 그리고 이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신자유주의의 공격과 또 다른 형태의 케인즈주의의 활용 등이 지금의 자본주의의 위기를 넘기려 하고 있다. 전쟁의 위험 역시 도사리고 있다. 트럼프를 비롯한 민족주의, 국가 제일주의, 좌우를 막론한 포퓰리즘, 인종주의 그리고 크고 작은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긴장과 충돌은 지속되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노동 현실에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비노동’이 아니라 오히려 ‘반노동’에 가깝다는 것. 노동, 자본, 국가의 통합구조를 안착시키려는 시도가 민주노총의 불참으로 미완성이기는 하나 장기적으로는 형성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오 교수는 “국가는 노동과 자본의 적대와 대립을 조정하거나 중재하는 기구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는 자본가 국가이고 자본계급과의 동맹하는 기구”라며 “여기에 노동계급마저 자본 계급 편에 선다면 그 기구는 자본계급의 단일기구이다. 계급의 대립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와 정부는 노동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없는 반민주주의 국가임을 문 정부 스스로 천명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얼마전엔 오 교수와 늘 함께 거리에서 싸워온 원로 사회운동가인 백기완 선생이 영면했다. 백 선생이 199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당시 오 교수는 선거대책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노선은 달랐지만 백 선생과도 인연이 깊었던 오 교수는 여전히 착잡한 심정. 원로로서 바통을 이어받아야 하지 않느냐 묻자 “내가 왜 원로야, 원로라는 표현은 빼달라”며 멋쩍게 웃는다. 원로라는 표현을 ‘극 혐오’ 하는 오 교수. 영원한 ‘청년 맑스주의자’ 오세철 교수와의 인터뷰 전문이다. (오 교수의 요청대로 외국어 발음은 되도록 그대로 싣기로 했다. 이를테면 코뮤니즘의 경우 우리말로 ‘공산주의’라는 용어로 잘못 번역 되고 있고, 이는 특히 스탈린주의, 마오주의, 김일성주의, 남미 등의 민중주의와 구분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 요즘 근황이 어떤가.
 
▲ 여전히 맑스주의에 대한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사회주의 국가를 자처하는 북한, 중국, 러시아 등도 다 가짜다. 역사 이래 진정한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한 적 없었다. 그러니 사회주의자로서 예나지금이나 입장변화가 없다.
 
 
- 문재인 정부, 출범 당시 분위기와 달리 과거 정권과 별반 차이 없다는 비판 등이 제기되고 있다. 현 정권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 국제적으로는 국제 부르주아지(자본 계급) 사이의 경쟁·갈등이 제국주의 전쟁의 길을 열어놓고, 국내적으로는 역시 자본 계급 분파들의 담합과 쟁투가 계속되고 있다. 과거 문재인 대통령은 몇 가지 표어를 내걸었다. 첫째는 ‘함께 잘살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함께 잘살 수 없다. 자본주의가 이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이 말하는 사회는 억압, 착취가 사라지고 상품, 화폐. 시장, 계급 그리고 국가가 소멸하는 코뮤니스트 사회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평화’다. 남북이든 북미이든 간에 제국주의 사이에 진정한 평화가 있을 수 없다. 계급전쟁이 항존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평화는 위장일 뿐이다. 셋째는 ‘공정한 사회’다. 차별을 극복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과 차별 자체를 넘어서자는 말은 다르다. 이 역시 자본주의를 폐절하지 않는 한 진정으로 ‘공정한’ 사회를 만들 수 없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맑스주의의 진정한 복원에서 찾을 수 있다. 국내외 자본 계급의 현란한 수사나 ‘사이비 사회주의’에서는 진정한 답을 찾을 수 없다. 다시 시작하는 길밖에 없다. 맑스주의 이론과 실천으로부터 혁명을 통해 평화로 나아가야 한다. 자유로운 개인들이 연합하는 코뮤니스트 사회를 건설하는 길이 인류의 유일한 길이라고 말하고 싶다.
 
 
- 정권이 바뀌어도 근본적인 문제가 바뀌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다. 대한민국 과거와 현실을 진단하자면.
 
▲ 정치권력은 입법, 사법, 행정이라는 삼권 분립으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영역의 분리, 기능의 독립성으로 체제의 견제와 균형을 이룬다고 보는 견해가 자본 중심의 민주주의의 골격이다. 코뮤니스트는 이러한 분리를 반대하고 평의회에 기반을 둔 대중(노동자, 병사 등)과 지역의 선출된 권력을 노동계급 민주권력이라고 부른다. 여기서는 자본계급 선거와 의회를 둘러싼 자본계급 정치세력을 다루지 않는다. 여야를 불문하고 자유주의, 보수주의를 불문하고 그 권력의 본질이 같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386세력은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에 결합한 민주화운동세력으로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의 군사독재와 싸울 세력으로 우리사회 자본계급 민주주의의 정착에 공헌한 세력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특히 문재인 정부에 결합한 세력은 앞으로 자본계급 의회에 진출할 예비세력으로 그들의 전임자들과 유사하다. 이들의 부류는 대학, 언론, 사법부, 노동 등에 몸담았다가 자유주의 민족주의 자본계급 이데올로기의 동질성을 기반으로 사적, 개인적 인간관계로 문재인 정부에 가담했다고 본다. 이들은 보수주의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것 같지만 사회주의나 코뮤니즘에는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소부르주아(낮은 의미에서의 자본 계급)에 속한다. 그러면서도 보수주의가 기반하고 있는 자본 권력에 편입되기를 갈망하고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을 활용하는 기회주의적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지금까지 청와대, 정부, 의회, 법원, 언론기관 등에서 보이는 이른바 엘리트(교수, 판사, 정부관료, 청와대, 언론가, 시민운동 활동가, 노동조합 관료)들이 문재인 정부를 떠받드는 소부르주아 세력의 실체이다. 앞으로 이들의 적나라한 모습을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자유주의 민족주의 자본계급 세력이 보수주의 자본계급 세력과 언제, 어디서나 연대하고 연합할 수 있는 세력임을 알게 될 것이다.
 
 
 
<2회> “어느 정권이든 집권 1년이면 실체 드러났고 노동계급은 정권퇴진운동 벌여”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 ⓒ위클리서울/ 오세철 교수 제공
 
- 코로나 문제를 떠나 전 세계는 경제위기를 수차례 겪었다. 어디서부터 문제를 들여다봐야 하는지.

▲ 19세기 마지막 수십 년 동안의 커다란 제국주의의 팽창은 극적인 성장률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 시기는 무엇보다 노동계급의 생활표준이 개선되면서 예기지 못한 번영과 진보의 시기로 기억되고 있다. 이는 유리한 객관적 조건뿐만 아니라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으로 조직된 노동자 운동의 영향력 증가의 덕이었고 개량주의의 출현의 기반이기도 했다. 이는 다른 형태로 수정주의, 개량주의에 대한 맑스주의 혁명가들의 자본주의 몰락 이론으로 나타났다. 위기 극복과는 거리가 멀게 카르텔과 신용을 통한 자본의 ‘조직’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반응이며 이는 더 크고 많은 파괴적 수단으로 자본주의 모순을 증가시킨다고 지적한 것이다.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과학적 이론은 잉여가치의 추출과 그 실현과정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고, 잉여가치 추출의 과정에서는 이윤율 저하의 법칙이, 그리고 잉여가치 실현의 과정에서는 시장 포화의 한계 법칙이 위기의 기본이 된다. 이 두 가지를 대립적으로 보지 않고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틀이 요구된다. 지금의 위기는 잉여가치 실현의 막다른 골목임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 한편으로는 위기라는 말이 와 닿지 않는 것도 현실이다.

▲ 자본주의 쇠퇴와 위기는 독립적이지만 상호의존적이다. 따라서 쇠퇴에 대한 인식은 대공황 시절과 같은 위기의 순간과 위기를 지금의 자본주의가 겪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가 1914년 이래 쇠퇴의 상태에 있음과 자본주의가 자랑하는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의 괄목할 성장률이 사실은 자체 재생산의 조건 창출이 점점 더 불가능해진 체제의 죽음의 고통을 숨기고 있다는 것이다.


- 지구상에 진정한 사회주의가 태동된 적 없다는 입장을 늘 고수해왔다. 수정주의 때문에 사회주의의 본질이 흐려졌다는 지적인데.

▲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혁명을 향한 어떠한 투쟁도 없었고 자본주의의 일시적 번영의 착시와 사회민주주의의 외피를 쓴 복지국가 모델, 케인즈주의의 일시적 위기 극복 그리고 이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신자유주의의 공격과 또 다른 형태의 케인즈주의의 활용 등이 지금의 자본주의의 위기를 넘기려 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스스로를 지탱할 수 있는 능력을 점차 상실하고 있으며, 계급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노동자들 앞에서 100년 전과 비슷한 이데올로기로 겨우 버티고 있다. 트럼프를 비롯한 민족주의, 국가 제일주의, 좌우를 막론한 포퓰리즘, 인종주의 그리고 크고 작은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긴장과 충돌이 지속되고 있다. 세계자본주의 체제에서 크든 작든 제국주의가 아닌 국가는 없다. 이 때문에 전쟁의 위험 역시 늘 도사리고 있다.


-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북한, 무엇이 문제인가.

▲ 핵 폐기를 대가로 한 식량원조와 물질적 보상을 통해 북한 경제를 산업자본 중심의 자본주의 체제로 세우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결국 중국자본주의에의 의존과 미국 및 한국자본주의에서의 의존이라는 다른 선택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면서 김정은 권력이 유지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북한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독재국가다. 동시에 낮은 단계의 자본주의 국가로 읽어야 한다. 북한 자본주의를 파멸시키는 역사적 책무는 북한 주민들에게 일차적으로 주어져 있으나 이는 남북한을 비롯 동아시아의 노동계급의 단결과 세계노동계급의 단결을 통한 혁명투쟁에 달려있다.


- 한국사회는 여전히 노동 문제, 평등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자면.

▲ 문재인 정부의 노동과 노동계급에 대한 태도와 정책은 ‘비노동’이 아니라 오히려 ‘반노동’에 가깝다. 노동, 자본, 국가의 통합구조를 안착시키려는 시도가 민주노총의 불참으로 미완성이기는 하나 장기적으로는 형성될 전망이다. 국가는 노동과 자본의 적대와 대립을 조정하거나 중재하는 기구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는 자본가 국가이고 노동계급과 동맹하는 기구이다. 여기에 노동계급마저 자본 계급 편에 선다면 그 기구는 자본계급의 단일기구이다. 계급의 대립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와 정부는 노동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없는 반민주주의 국가임을 문 정부 스스로 천명하고 있다. 경제정책의 구체적 모습은 최저임금과 노동시간에 대한 법제화에서 드러난다. 절대적 잉여가치와 상대적 잉여가치의 착취를 기반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계급의 투쟁은 이 착취체제와 이를 규정하는 법을 반대하고 없애려는 투쟁을 몇 백 년 해오고 있다. 메이데이가 노동시간의 단축 투쟁임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최저임금 인상의 원칙을 계층사이의 이해로 조정하고 노동시간을 변형근로제로 후퇴시키는 문재인 정부의 모습을 보며 노동계급은 어떻게 대응하는가?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 노동자들은 어떠했는가? 반노동으로 나아가는 정부를 가만히 보고 있지 않았다. 집권한 지 1년이 되자 그 실체가 드러났고 노동계급은 정권퇴진운동을 벌였다. 어느 정권도 예외는 없었다. 문재인 정부도 마찬가지다. 노동자는 어디 있는가? 노동운동은 여전히 운동인가?


- 남북관계 문제는 사회주의자로서 난감한 과제일 수 있다. 통일 문제를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 촛불이 매개 되어 10년의 이른바 ‘적폐’가 정권교체의 문을 열었지만 가장 핵심적인 변화는 남북관계 개선이다. 끊임없이 지속되는 다양한 형태의 제국주의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떤 국가와 민족도 자유로울 수가 없고 남과 북도 예외일 수 없다. 남, 북, 미 그리고 세계의 공통화두는 평화와 번영이다. 평화는 계급전쟁을 종식시키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며 번영은 이윤과 계급불평등을 사라지게 하는 자본주의의 지속적 성장일 뿐이다. 갈라진 남, 북이 표면적이고 가시적 적대를 넘어 세계자본주의 체제 속에 부분 집합으로 나아가는 다른 형태의 제국주의를 상상할 수 있다. 시간이 걸리고 우여곡절의 과정을 겪어도 이 과정은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통합과정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볼 때 북한은 개혁, 개방을 통해 점진적으로 국가자본주의로 공고해지고 미국뿐만 아니라 중국, 러시아,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과 연합, 연대할 것이다. 아직도 사회주의 건설을 말하는 형용모순이 존재하지만 사회주의 국가는 세계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음을 삼척동자도 알게 될 것이다. 이 효과는 남쪽의 우리에게도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아직도 보수주의 자본가들이 자유주의-민족주의 자본계급(특히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세력을 ‘좌파’, ‘빨갱이’, ‘친북’이라는 딱지를 붙여 이념 논쟁을 벌이는 것은 그러한 대립이 허위이며 지금이 그런 대립을 주장할 마지막 기회임을 알기 때문이다. 두 가지 형태의 자본 세력은 자본주의의 양면이며 보완적 관계임을 깨닫게 될 날이 멀지 않았고 이는 세계 노동자 투쟁과 혁명적 실천이 보여줄 것이다. 물론 이념적 재편 과정에서 지금까지 우리사회에 존재했던 ‘진보’, ‘자유주의’, ‘부르주아 사회주의’ 등의 개념이 정리되면서 자본에 맞서는 노동계급의 코뮤니스트 이념과 실천이 성숙될 것이기 때문이다.
 
 
 
<3회> “민중 심리와 의식 왜곡시켜 자본계급의 함정에 빠뜨리는 것 항상 경계해야”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 ⓒ위클리서울/ 오세철 교수 제공
 
- 백기완 선생이 얼마전 영면했다. 노선은 달랐지만, 많은 시간을 함께 했었다. 어떤 생각이 드나.

▲ 백 선생은 통일운동가이면서 노동운동에도 깊이 관여했다. 하지만 통일운동을 한다는 이유로 pd(민중민주주의) 계열에선 민족주의자라는 비판을 하기도 했다. 노선이 다르다는 이유로 그런 비판을 일삼았다. 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운동 진영은 서로를 그렇게 비판하는 조건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게 사실이다. 백 선생은 늘 ‘사회주의적 민족주의자’라고 자처했는데, 농담반 진담반 식으로 “백 선생은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자”라고 받아치곤 했다. 백 선생은 문익환 목사 등과 함께 사회운동을 했고, 백 선생의 영면으로 이제 그 운동의 마지막 세대가 마감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우리 노선에서는 애초 민중통일 운동보다는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이 더 중요한 것이었다. 한 시대가 저물고 다른 시대가 오고 있다. 백 선생의 시대가 어떻게 마감되고 있느냐, 앞으로의 시대와 과제는 무엇이어야 하느냐, 그것이 관건이다.


- 전쟁 위기를 종식시킬 대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 한국도 제국주의 국가다. 중심과 주변의 차이밖에 없다. 한국과 일본의 긴장과 충돌은 제국주의 사이의 필연적 과정이다. 이 대결을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로 활용하는 것 역시 제국주의의 본질이다. 세계전쟁의 가능성은 100년 전보다 훨씬 커지고 있고 이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은 자본계급에게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전쟁의 화약고는 늘 수면 아래 있다. 전쟁을 막아내고 진정한 계급의 평화를 혁명을 통해 이루어내고 인류를 구원할 대안은 오직 자본주의를 대체한 코뮤니즘밖에 없다. 전 세계의 코뮤니스트들과 노동자들은 100년 만에 다시 한번 혁명을 통해 평화를 이루자는 코민테른의 교훈을 상기하고, 100년의 ‘사이비 사회주의·공산주의’를 청산하고 자본주의의 질곡과 재앙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할 혁명적 무기, 세계 혁명당 건설을 함께 선언하고 그 구체적인 역사적 과업에 나서야 한다.


- 지금까지 얘기를 들어보면, 현재 자본주의 체제의 기본 특성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 있겠다.

▲ 인간의 필요가 아닌 이윤을 위한 생산, 노동계급 착취를 대가로 한 비용효과의 영원한 추구, 피착취자 삶의 조건에 대한 폭력적 공격, 국가와 기업 사이의 치열한 경쟁 등이다. 프랑스에서 ‘자본주의는 바이러스’다, ‘혁명은 백신’이라는 구호가 일반인 입에 오르고 있다고 한다. 몇 개월 동안 세계 사람들은 코로나에 대한 자본주의 국가들의 대응 방식을 지켜보고 있다. 지역봉쇄, 이동금지, 거리 두기, 재정지원, 실업급여 등의 재정금융 지원, 그리고 삶의 조건 향상을 위한 노동자, 민중 행동에 대한 공권력의 억압과 폭력, 인종주의, 민족주의를 이용한 적과 희생양 만들기 등등 100년 동안 자본주의 위기 시기마다 자본주의 국가와 자본계급이 활용한 방식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노동계급을 포함한 모두는 알고 있다.


- 대안은 무엇인가.

▲ 지금은 노동계급의 광범위한 투쟁이 건강, 삶, 안전, 공장폐쇄 등의 방어적 투쟁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그 투쟁이 지구적 규모로 확장되고 있고 계급영역 내의 기본투쟁으로 진전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자본계급의 이데올로기 공세가 인종주의, 민족주의 외피를 쓰고 노동계급을 포함한 민중의 심리와 의식을 왜곡시켜 자본계급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 여기에 코뮤니스트들과 그들 세력의 역할이 중요하다. 저항, 혁명운동의 방향을 제시하고, 세계 노동계급과 함께 전쟁, 억압, 착취의 고리를 끊어내고, 자유로운 개인들이 연합하는 코뮤니스트 세상을 세계혁명을 통해 만드는 길이 코로나 이후 시대의 역사적 임무일 것이다.


- 끝으로, 앞으로 과제가 있다면.

▲ 옛 노동운동에서는 사회주의가 어느 정도 민족 선구자 뒤에서 실현될 수 있고 세계 공동체는 ‘사회주의 경제’의 점진적 융합 과정으로 창조될 수 있다는 혼란스런 생각이 가능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경험처럼 일국 사회주의 건설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실제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코뮤니즘이 결정적으로 만들어지기 전에 자본주의는 모든 곳에서 결정적으로 파괴되어야만 한다. 코뮤니즘은 자본주의 내에서 건설될 수 없다. 한편에서는 자본주의의 위기를 ‘순환적 위기’로 규정하고 조용히 참고 기다리면 비바람이 그치고 순수한 항해를 할 수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특히 이러한 입장이 이른바 ‘사회주의 진영’에까지 파고들어와 계급투쟁을 희석시키고 ‘건강한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로 작동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나 이는 19세기 자본주의에서 일어났던 광경이며 20세기와 21세기 자본주의 위기에 더 이상 적용될 수 없는 논리가 되어버렸다. 이는 상승기에 있고 무한히 확장되는 19세기 자본주의의 위기였고 맑스는 ‘코뮤니스트 선언’에서 이 위기를 과잉생산의 전염병으로 불렀다. 그런데 과잉생산의 경향은 기아, 가난, 실업을 가져왔지만 상품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너무 많은 상품, 너무 많은 산업, 너무 많은 자원 때문이었다. 또 하나의 자본주의 위기의 원인은 경쟁을 통해 무정부체제로 끌고 가는 자본주의의 기능인데 새로운 임노동과 상품을 찾아 새로운 지역을 정복함으로써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확장하고 심화시킬 수 있었다. 따라서 19세기는 위기의 순간을 건강한 심장이 뛰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렇다면 21세기를 열어갈 노동자 국제주의에 입각한 노동계급의 과제는 무엇일까. 우선은 비타협적인 자발적 계급투쟁을 전개하는 일이다. 계급의 투쟁을 엇나가게 하고 자본의 분파와 연결시키는 모든 세력(노동조합, 좌파당, 민족해방전선 등)으로부터 독립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세력들과 치열하게 투쟁해야 한다. 자본주의의 위기가 국제적인 것처럼 노동계급의 투쟁도 국제적이어야 한다. 나아가 세계의 인류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운동이 계속되어야 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크론슈타트의 교훈들 : 반혁명의 100년

크론슈타트의 교훈들 : 반혁명의 100년

 

<편집자 주> 

'크론슈타트 반란 진압' 100주년을 맞아 다시 한번 크론슈타트의 비극을 상기하고자 합니다. 크론슈타트의 교훈은 혁명과 반혁명, 당과 소비에트의 관계, 이행기 프롤레타리아계급 내부의 폭력 문제로써 오늘날 역사적 비극으로부터 교훈을 끌어내 혁명적 원칙을 세워야 할 중요한 과제입니다. 이 글은 그동안 크론슈타트 문제에서  ICP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진 코뮤니스트 좌파 경향의 입장이며, 곧 발행될 코뮤니스트」 13호에서  더  자세하게 소개할 예정입니다.

 

 e0019270_46fb9c7f5dbe6.jpg

 

1921년 3월 크론슈타트 반란 진압 : 노동자 운동에서 비극적인 실수

 

1921년 3월, 1917년 10월 혁명으로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은 지 4년이 채 못 되어, 볼셰비키는 무력으로 페트로그라드에서 30km 떨어진 작은 코틀린섬에 있는 크론슈타트 수비대의 봉기를 진압했다.

 

수년 동안 소비에트 러시아는 여러 해외 열강들의 지원을 받는 백군의 반혁명 책동에 맞선 내전에서 피의 투쟁을 벌여야 했다. 그럼에도, 크론슈타트 수비대의 반란은 이러한 반혁명 시도의 일부가 아니었다. 그것은 10월 혁명의 선두에 섰던 소비에트 정부 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같은 노동계급 당파의 반란이었다. 이 노동자들은 새로운 집권세력의 수많은 권력남용과 참을 수 없는 탈선을 교정하려는 목적으로 반란에 앞장섰다. 크론슈타트에 대한 유혈진압은 전반적으로 노동자 운동에 커다란 비극을 일으켰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은 프롤레타리아혁명이었다. 그것은 1914~1918년 사이에 벌어진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국제 노동계급의 응답이었던 세계 프롤레타리아혁명의 발전 도상에서 최초의 승리였다. 10월 봉기는 부르주아 국가의 파괴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수립 과정의 일부였다. 볼셰비키는 이 사건을 열정적으로 두둔했다. 봉기의 중요한 의미는 그것이 세계 프롤레타리아혁명, 즉 부르주아지에 맞선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전쟁에서 최초의 결정적인 순간을 기록했다는 것이었다.

 

고립은 러시아 혁명의 퇴보의 진정한 원인이다.

 

1917년 러시아에서 처음 일어난 혁명은 전(全)유럽과 다른 곳으로 투쟁을 확산시키려는 노동계급의 여러 노력에도 국제적 차원에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러시아 그 자체는 기나긴 피의 내전에 의해서 찢겨나가서 경제는 황폐해졌고, 소비에트 권력을 떠받드는 기둥인 산업 프롤레타리아트는 해체되었다.

 

공장위원회가 제거되고, 점차 소비에트가 국가기구에 종속되었으며, 노동자 민병대가 파괴되었다. 내전 동안 긴장된 시기가 이어지면서 점차 사회 전반이 군사화되었고, 이와 함께 여러 관료적 위원회들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것들 전반이 러시아혁명이 타락하고 있다는 매우 중요한 증거가 되었다. 이러한 요인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내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할지라도, 타락이 만개하여 진행된 것은 그 이후의 시기였다. 차츰 “당-국가”의 지도부는 노동계급의 자기조직화가 기본적으로 올바르지만, 현재 당면한 시기에는 반혁명 세력에 맞서서 군사적 투쟁을 하는 데 모든 노력을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을 발전시켰다. “효율성”의 원칙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원칙들을 약화시키기 시작했다. 효율성의 원칙이 지배하면서 국가는 노동의 군사화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감시와 극단적인 착취의 방식으로 노동자들을 복종시켰다. 공장위원회를 이미 약화시켰기 때문에 국가가 “일인관리”와 테일러주의 착취 시스템을 현장에 도입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과거에 레닌은 테일러주의 시스템을 인간을 기계의 노예로 만드는 방식이라고 비난한 바 있었다. 전쟁경제의 혼란은 국제적인 고립으로 더욱 증폭되어 국가 전체를 기근의 위기에 빠뜨렸다. 노동자들은 점점 더 부족해지는 배급에 의존해야만 했으며, 그조차도 종종 불규칙하게 이루어졌다. 많은 공업지대들이 전반적으로 조업을 중단했고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자기 소유의 자원에 의존해야 했다. 많은 노동자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은 시골에서 생계수단을 찾기 위해서 함께 도시를 떠나는 것이었다.

 

내전이 격렬하게 진행되는 동안, 소비에트 국가는 주민 다수의 지지를 유지했다. 왜냐하면, 소비에트 국가는 구(舊)소유계급에 대항한 투쟁으로 자신을 검증받았기 때문이다. 노동자, 미숙련공, 소농 등 각 부문에 따라서 내전의 고통을 견뎌내는 의지는 상대적이었다. 그러나 백군을 물리치면서, 많은 사람들이 생활 조건이 앞으로 덜 가혹해질 것이며, 경제와 사회생활에 대한 정부의 통제가 느슨해질 것이라고 기대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 지도부는 항상 전쟁으로 야기된 생산의 파괴에 직면하여, 사회생활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느슨하게 하는 어떠한 조치를 하는 것도 다소 내키지 않아 했다.

 

크론슈타트 봉기

 

1920년 말, 탐보프주, 중부 볼가, 우크라이나, 서부 시베리아와 다른 지역들을 가로질러 농민봉기가 퍼져나갔다. 군복 입은 농민인 적군이 빠르게 무장을 해제하면서 그들은 자신의 마을로 돌아와 반란의 불길을 부채질했다. 이 반란의 주요 요구는 곡물 징발 중단과 농민 스스로 자신의 생산물 처분 결정권을 갖게 하라는 것이었다. 1921년 초, 반란의 기운은 10월 봉기의 선두에 섰던 페트로그라드, 모스크바, 크론슈타트 등 도시의 노동자들에게도 퍼져나갔다.

 

페트로그라드에서는 일련의 중요한 자발적인 파업들이 일어났다. 공장 집회와 거리 시위에서 식량과 의복 배급 증가를 요구하는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다수의 노동자들이 추위와 배고픔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제적 불만들과 결합되어 다른 좀 더 정치적인 요구들 또한 나타났다. 노동자들은 도시 바깥으로 나가는 것에 대한 제한 조치를 중단하고, 투옥된 노동자들을 석방하며,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는 등의 조치들을 원했다. 틀림없이 몇몇 반혁명 분자들, 즉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이러한 사건들에서 일정한 역할을 했다. 그럼에도, 페트로그라드의 파업운동은 본질적으로 가혹한 생활조건에 대한 자발적인 프롤레타리아의 반응이었다. 그러나 볼셰비키 당국은 노동자들이 봉기 이후의 국가, 그들에 의하면 “노동자 국가”에 맞서서 파업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어서 파업 노동자들을 선동자, 게으름뱅이, 개인주의자로 비난했다.

 

이러한 것들이 크론슈타트에서 수병 반란을 일으켰던, 러시아, 그리고 무엇보다도 크론슈타트의 사회적 문제들이었다. 페트로그라드에서 파업이 일어나기 전에조차, 트로츠키가 “혁명의 영광과 명예”라고 묘사했던 크론슈타트 수병들은 이미 관료적 경향과 붉은 함대 내에서의 군사적 규율 강화에 맞서서 저항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페트로그라드의 반란 소식이 도달하고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수병들은 즉시 결집하기 시작했다. 2월 28일에 그들은 페트로그라드 공장들에 대표를 보냈다. 같은 날 순양함 “페트로파블로프스크”의 선원들은 회합을 하고 크론슈타트 반란자들의 강령이 될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 결의안은 경제적∙정치적 요구안들을 제출했다. 특히 요구안에는 가혹한 “전시 공산주의” 방책들의 중단과 연설의 자유, 출판의 자유, 그리고 모든 정당 활동의 권리를 보장하는 속에서 소비에트 권력을 재선출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3월 1일 두 명의 볼셰비키 대표들은 페트로파블롭스크 승무원들과 만나서 그들의 결의안을 규탄하고 만약 수병들이 그들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는다면 즉각 진압에 나설 것이라고 위협했다. 이 건방지고 자극적인 볼셰비키 지도부의 태도는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으로 수병들의 분노를 더욱 불러일으켰다. 3월 2일에는 크론슈타트 소비에트 재선거를 하였으며, 300명의 대표들이 페트로파블롭스크 결의안에 찬성투표하고 “소비에트 정부의 평화로운 재편”을 위한 동의안을 채택했다. 대표들은 시행 정부를 떠맡는 “지역 혁명위원회”와 어떠한 정부의 무장개입에라도 맞서기 위한 방어조직을 만들었다. 이렇게 크론슈타트 코뮌이 탄생했다. 크론슈타트 코뮌은 그 자신의 『이즈베스티야』(정부 기관지, 역자)를 발행하기 시작해서 첫 호에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이 나라의 지배자인 코뮤니스트당은 혼란으로부터 나라를 구출하는데 무능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최근에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에서 발생한 셀 수 없는 사건들은 코뮤니스트당이 노동대중의 신뢰를 상실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코뮤니스트당은 노동계급의 요구들을 무시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불만들이 반혁명 행위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으로 코뮤니스트당은 심각한 실책을 저지르고 있다.”

 

그러나 크론슈타트 코뮨의 반란은 완전히 고립된 채로 남았다. 그들이 “세 번째 혁명”이라고 부른 반란을 확대하기 위한 반란자들의 소집 요청에 응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페트로그라드의 공장들에 대표를 파견했음에도, 소책자들과 페트로파블로프스크 결의안을 배포했음에도, 붉은 함대의 요청은 전체 러시아 노동계급을 결집하는데 실패했다. 러시아 노동계급은 반란자들의 강령에 공감했을 수도 있으며 그 반란을 완전히 지지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은 그들의 파업 투쟁을 중단했으며 계엄령 하의 일터로 돌아갔다. 내전의 혼란은 러시아 노동계급을 파괴하고 사기를 꺾어놓았으며 분해해버렸다.

 

크론슈타트 코뮨의 분쇄

 

반란에 대한 볼셰비키 정부의 즉각적인 반응은 반란을 소비에트 권력에 맞선 반혁명 음모의 일부로 비난하는 것이었다. 분명히 백군에서 사회혁명당에 이르기까지 모든 반혁명 세력들은 반란을 그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고 시도했으며 “원조”를 제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명객들이 통제하는 러시아 적십자 채널을 통해 제공된 인도적 지원을 제외하고 혁명위원회는 반혁명세력의 모든 제의를 거절했다. 혁명위원회는 자신들이 전제 정부의 복귀 또는 제헌의회-1918년 초에 혁명의 적들에 의해서 소집된 적이 있다-의 복귀가 아니라 관료적 지배로부터 해방된 소비에트의 재선출을 위해서 투쟁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노동자의 성벽은 소비에트이지 제헌의회가 아니다. 크론슈타트에서 권력은 수병과 적군 병사, 혁명적 노동자들의 손에 있다. 모스크바 라디오가 기만적으로 주장하듯이 권력은 코즐로프스키가 이끄는 백군의 수중에 있지 않다.”라고 크론슈타트 『이즈베스티야』는 선언했다.

 

해군과 육군 병사의 계급구성뿐만 아니라 반란자들의 강령과 이데올로기에도 소부르주아적 요소들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사실상 이 반란은 볼셰비키가 1917년 혁명의 선봉에 섰기 때문에 그들을 혐오하는 자들이 그들의 경멸감을 드러낼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의 존재가 운동 그 자체의 근본적인 성격을 바꾸지는 못한다.

 

볼셰비키 지도부는 크론슈타트 반란에 대해서 극도로 완고한 태도로 대응했다. 볼셰비키의 완고한 태도 때문에 토론이나 타협의 가능성은 빠르게 사라졌다. 요새에 대한 군사적 공격을 하는 동안, 반란을 분쇄하기 위해서 파견된 적군 부대들은 항상 사기가 바닥을 때렸다. 몇몇 부대들은 반란자들에게 동조했다. 군대의 충성심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걸출한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그 당시 모스크바에서 열리던 10차 당 대회에서 급파되었다. 동시에, 체카의 소총부대들이 어떠한 사기저하도 퍼져나갈 수 없게 하려고 병사들의 뒤에서 그들을 겨누었다. 요새가 완전히 함락되었을 때, 체카는 약식재판을 실시하여 처형하거나 빠르게 사형을 선고하는 방식을 일부 반란자들을 학살했다. 다른 사람들은 강제수용소에 보내졌다. 진압은 체계적이었고 무자비했다.

 

이 사건 당시에 백군이 볼셰비키의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서 크론슈타트 반란을 이용할 위험성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 때문에 볼셰비키 권력 내부의 가장 비판적인 분파들조차도 반란을 분쇄하는데 협력하게 되었다.

 

전체 노동자 운동의 오류

 

크론슈타트 반란에 대해서 모든 반(反)레닌주의 조류들이 계속해서 숨기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있다면, 그 당시에 볼셰비키의 오류를 전체 노동자 운동이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코민테른으로부터 추방된 코뮤니스트좌파 분파들과 조류들도 포함된다.

 

그러므로 볼셰비키 지도부에 대한 반대 분파인 노동자 반대파는 반란 진압에 대한 열렬한 지지를 표명했다. 그리고 이 분파를 이끌었던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그녀의 분파 성원들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출병에 앞장서서 지원해야 한다고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독일-네덜란드 좌파는 심지어 그들의 입장이 콜론타이처럼 반란의 진압을 열렬히 지지하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지만, 볼셰비키의 정책을 비난하거나 비판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그때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1) 크론슈타트 반란이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반혁명 음모라는 주장을 두둔했으며 진압을 비난하지 않았다. 네덜란드 좌파의 투사인 헤르만 호르터는 볼셰비키의 방책이 크론슈타트 반란에 직면하여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그는 크론슈타트 반란이 농민들에 의해서 일어난 반혁명 봉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볼셰비키 내에서, 빅토르 세르쥬는, 비록 그가 크론슈타트 수병들에 맞서서 무장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당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진압에 맞서서 저항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이 비극적인 오류는 볼셰비키 당과 그 지도부만의 문제가 아니었음이 명백하다. 사실상 볼셰비키는 단지 비극적으로 잘못된 정책을 수행했을 뿐이다. 다만 이 정책은 당시 전체 노동자 운동이 반혁명은 봉기 이후에 국가 그 자체로부터 자라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함으로부터 발생한 당연한 결과였다. 이는 아나키스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1917년에 “구더기는 이미 과일 안에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에 의하면 계급정당의 존재가 언제라도 그 안에 반혁명의 씨앗을 담고 있다.) 그것은 러시아 혁명의 국제적인 고립 때문에 볼셰비키가 국가로 흡수되고, 국가 그 자체가 자신을 노동계급에 맞선 국가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 당시의 전체 노동자 운동의 오류는 1917년 10월 혁명 이후 출현한 제도장치가 “프롤레타리아 국가”라는 생각을 둘러싸고 일반적인 혼란으로 나타났다.

 

 Internationalism, Vol. 123, 2002년 가을,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1921년 크론슈타트 이해하기

 

 

1917년 러시아에서 노동계급이 10월 혁명을 통해 권력을 잡고 난 뒤 4년째, 지금(2001년)으로부터 80년 전인 1921년 3월, 볼셰비키당은 페트로그라드에서 30km 떨어진 곳에 있는 핀란드 만의 작은 섬 코틀린에 주둔하고 있는 발트 함대의 크론슈타트 수비대가 일으킨 봉기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볼셰비키당은 러시아와 외국 부르주아지의 반혁명 군대에 맞선 몇 년 동안 피로 물든 내전을 치러온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크론슈타트 수비대의 봉기는 새롭고 달랐다. 이는 소비에트 정권의 노동계급 지지자가 내부로부터 일으킨 봉기였다. 그들은 10월 혁명의 전위였고, 이제 여러 가지 참을 수 없는 왜곡과 새로운 권력의 남용을 바로잡으려는 계급의 요구를 들고 나왔다.

 

볼셰비키가 이 투쟁을 무력으로 짓누른 것은 그때부터 줄곧 혁명적인 프로젝트가 지닌 뜻을 이해하는 데서 하나의 기준점을 제공해왔다. 부르주아지가 노동계급에 맑스와 레닌을 스탈린과 굴락(gulag)에 연결하는 끊어질 수 없는 고리가 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게 모든 것을 하는 오늘날, 크론슈타트 사건에 대한 이해는 더욱더 중요하다.

 

우리의 의도는 모든 세세한 내용을 검토하려는 게 아니다. 『국제평론』(International Review)에 실린 이전의 논문들은(“크론슈타트의 교훈들,” International Review n°3과 “1921: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이행기 계급,” International Review n°100) 이미 상세하게 그 사건을 다루어왔다.

 

그와 달리 우리는 이번 기념일을 기회로 서로 논쟁을 벌이고 있는 크론슈타트 봉기에 대한 두 가지 종류의 주장에 집중하려고 한다. 첫 번째로 아나키스트는 크론슈타트 사건을 맑스주의자와 맑스주의의 이름으로 행동한 당이 지닌 권위주의적 반혁명의 본질을 입증하는 데 사용한다. 두 번째로 오늘날 프롤레타리아 진영에 여전히 있는 생각, 즉 반란을 짓누른 것은 10월 혁명의 성과물을 방어하려는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아나키스트 견해

 

아나키스트 역사학자 볼리네(Voline)에 따르면:

 

레닌은 크론슈타트 운동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거나, 또는 차라리 그 어떤 것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와 그의 당에 꼭 필요한 것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

 

맑스주의자, 권위주의자, 국가주의자로서, 볼셰비키는 대중에게 어떠한 자유 또는 독자적인 행동을 허용할 수 없었다. 볼셰비키는 자유로운 대중을 믿지 않았다. 볼셰비키는 그들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자신들의 독재가 무너지는 것이 지금까지 해 왔던 모든 일을 무너트리고 혁명을 위험에 빠트린다고 믿었다. ……

 

크론슈타트는 모든 멍에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사회 혁명을 이루려고 하는 인민이 처음으로 혼자의 힘으로 일으킨 시도였다. 그 시도는 정치적 지도자나 교사 없이 노동계급 자신에 의해서 직접, 단호하게, 대담하게 이루어졌다. 그것은 제3의 혁명, 사회 혁명으로 향하는 첫걸음이었다.

 

크론슈타트는 무너졌지만, 크론슈타트에서 봉기한 사람들은 과업을 해냈다. 바로 그 점이 중요한 것이다. 봉기에 참여한 대중 앞에 펼쳐진 복잡하고 흐릿한 미로에서, 크론슈타트는 올바른 길을 밝혀주는 밝은 횃불이었다. 봉기한 사람들이 스스로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알고 있는 환경에서 그들이 권력이라는 말과 생각을 모두 없애지 않고 그 대신에 협력과 조직화, 관리를 말하면서 여전히 권력(소비에트 권력)에 대해 말했다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은 과거에 바친 마지막 찬사였다. 노동계급 스스로가 토론과 조직화와 행동의 완전한 자유를 얻어낸다면, 대중이 독자적인 행동에서 참된 길을 찾아낸다면, 나머지는 자동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이다..(2)

 

아나키스트들은 볼리네(Voline)가 간단명료하게 표현한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들에게 크론슈타트 봉기에 대한 진압은 볼셰비키가 지닌 맑스주의 사상의 당연하고 논리적인 결과였다. 당의 대리주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독재를 당의 독재와 같은 것으로 보는 것, 그리고 이행기 국가의 형성은 볼셰비키가 믿지 않았던 대중에 대한 지나친 권력과 권위 욕구를 표현한 것이었다. 볼리네에 따르면, 볼셰비즘은 억압의 한 형태를 다른 형태로 대체한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볼리네는 크론슈타트를 그저 봉기였다고만 여기지 않았다. 그에게 크론슈타트는 미래를 위한 모델이었다. 만일 크론슈타트 소비에트가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과업(협력, 조직화, 관리)에 몰두한 나머지 정치적 과업에 대해 잊었다면(소비에트의 권력에 대한 발언), 그것을 교훈 삼아 우리는 진정한 사회혁명이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그림, 이를테면 지도자 없고, 당이 없는, 국가가 없는, 그리고 어떤 종류의 권력도 없는 사회, 즉각적이고 완전한 자유의 사회를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불행히도, 아나키스트가 끌어낸 첫 번째 교훈은 혁명이 새로운 형태의 폭정으로 이끌 수 있다고 한 세계 부르주아지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와 매우 밀접하게 일치한다.

 

아나키스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이러한 견해의 일치는 우연이 아니다. 양쪽 모두 위계제도와 폭정과 독재에 맞서는 평등과 연대와 우애라는 추상적 개념에 따라 역사를 평가한다. 부르주아지는 1918년에서 1920년 사이에 러시아에 맞서 무력으로 개입하고 경제 봉쇄를 이끌었던 반혁명 세력의 잔인성을 정당화하려고 10월 혁명에 반하는 이러한 도덕적 원리를 냉소적이고 위선적으로 이용했다. 다른 한편 아나키스트가 볼셰비즘에 대한 실천적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부딪혀야만 했던 역사적 어려움을 이해할 수 없게 녹여 없애는 순진한 유토피아이다.

 

그러나 1936년 스페인에서 일어난 사건이 확증한 것처럼, 아나키스트가 지닌 순진성 때문에, 그들은 맑스가 세운 혁명에 대한 역사 개념을 거부하고 나서 부르주아 진영이 일으킨 실제 반혁명 앞에 어쩔 수 없이 투항하게 되었다.

 

만일 볼셰비키가 볼리네가 주장하는 것처럼 전적으로 권력욕 때문에 근본적으로 혁명을 일으키게 되었다 하더라도, 아나키즘은 그와 견주어 볼 때 역사의 진실에서 제기되는 일련의 물음에 대답할 수 없다. 만일 볼셰비키가 끝내 권력만을 탐했다면, 왜 그들은 사회민주당의 다수와는 달리, 제국주의 전쟁을 규탄하고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화되도록 요구함으로써 1914년과 1917년 사이에 추방당할 운명을 지웠는가? 왜 볼셰비키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과는 달리, 1917년 2월 혁명이 성공하고 난 뒤 러시아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와 함께 임시 정부를 꾸리는 데 참여하지 않고 그 대신에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전할 것을 요구했을까?

 

왜 볼셰비키는 노동계급이 아주 뒤떨어졌고 부르주아지를 뒤엎기에는 수적으로도 모자라다고 여긴 대부분의 국제 사회민주주의자들과는 달리, 10월에 세계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시작할 수 있는 러시아 노동계급의 역량을 믿었는가?

 

왜 볼셰비키는 노동계급이 모든 희생을 해서라도 연합국의 봉쇄를 이겨내고 반혁명 군대에 맞서 무기를 들고 저항할 것이라고 믿었는가, 그리고 그러한 노동계급의 지지를 얻고 유지할 수 있었는가?

 

왜 볼셰비키는 유럽과 나머지 세계 전체에서 일어난 혁명의 시도에서 러시아의 지도를 따르도록 세계 노동계급을 고취시켰는가? 어떻게 볼셰비키당은 세계적 규모에서 새로운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의 창건을 주도할 수 있었는가?

 

마지막으로 왜 당을 국가 기구로 통합하는 과정과, 소비에트와 공장위원회와 같은 노동자 권력의 대중 조직에 대한 권리 침탈, 그리고 마지막으로 계급투쟁에 맞서 무력의 사용은 하룻밤 새에 일어난 게 아니라, 그저 질질 끌다 일어난 것인가?

 

볼셰비키가 태어날 때부터 그런 더러운 속성을 지녔다는 이론으로는 일반적으로 러시아 혁명의 타락을 또는 구체적으로 크론슈타트를 설명하지 못한다.

 

1921년쯤 러시아에서 혁명, 그리고 그것을 이끌었던 볼셰비키 당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독일과 다른 국가로 혁명의 확산은 1919년과 견주어 볼 때 훨씬 가망 없는 것으로 보였다. 세계 경제는 상대적으로 안정되었고 독일에서 스파르타쿠스동맹이 일으킨 봉기는 실패했다. 러시아 안에서 내전을 이겨냈지만, 반혁명 군대의 거듭된 공격과 국제 부르주아지가 의식적으로 조직한 경제적 질식 때문에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공업 기반은 무너져 버렸고, 노동계급은 제1차 세계대전과 내전에서 희생되었거나 살아남으려고 어쩔 수 없이 도시를 떠나 시골로 떼 지어 몰려갔기 때문에 크게 줄어들었다. 볼셰비키 정권은 지방에서 일련의 폭동을 일으킨 농민층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또한 무엇보다도 1921년 2월 중순에 페트로그라드에서 파업을 일으켰던 노동계급 사이에서도 점점 더 인기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그때 크론슈타트가 일어났다.

 

어떻게 러시아는 다른 국가들, 특히 유럽의 노동계급 혁명에서 지연된 도움을 기다리면서 세계 혁명의 요새로 남고 노동계급의 불만과 경제적 붕괴를 이겨낼 수 있는가? 아나키스트는 혁명이 어떻게 타락했는가에 대해 전혀 설명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로지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대한 정치적 우위, 권력의 집중화, 혁명의 국제적 팽창, 그리고 코뮤니스트 사회로 이행기의 문제에만 집중했다. 이것은 볼셰비키가 크론슈타트 봉기를 군사적으로 해결하게 하고 노동계급의 저항을 배반과 반혁명 행위로 다루게 한 재앙과도 같은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바꾸어 놓지 못한다. 그러나 볼셰비키당은 오늘날 혁명가들이 지닐 필요가 있는 것처럼 가늠자를 갖지도 못했다. 그들은 그때 그저 노동자 운동의 이득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 노동자 운동은 결코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적대적인 자본주의 세계에서 권력을 보유하는 몹시 어려운 과업에 부딪혀야만 했다. 성공적인 권력 장악 뒤 볼셰비키는 노동계급의 당에 대한 소비에트의 관계도, 부르주아 국가를 필연적으로 분쇄하게 될 이행기 국가에 대한 이러한 두 계급 조직의 관계도 이해하지 못했다.

 

정권을 잡고, 차츰 노동자평의회와 공장위원회를 국가에 통합하면서, 볼셰비키당은 어둠 속에서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노동자 운동 안에서 지배적인 의견에 따르면, 혁명에 대한 주요한 위험은 새로운 국가 기구 밖에서, 즉 국제 부르주아지와 추방된 소작농과 러시아 부르주아지에서 나왔다. 비록 볼셰비키당 내부에 그때 정권의 관료화에 맞서 경고했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코뮤니스트 운동에서 어떠한 경향들도, 심지어 좌파도 대안의 전망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처방은 제한되어 있었고 다른 위험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콜론타이와 쉴라프니코프의 노동자 반대파는 노동자평의회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중 조직으로서 국가를 초월했다는 것을 잊어버린 국가의 과도함에 맞서 노동자를 방어할 것을 노동조합에 요구했다.

 

볼셰비키당 내부에는 봉기를 분쇄하는 데 반대했던 몇몇 사람들이 있다. 운동에 결합했던 크론슈타트 당원들도 있고 훗날 노동자 그룹을 조직하고 군사적 해결을 반대했던 가브릴 미아니스코프(Gavriil Miasnikov)와 같은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당과 코민테른 내 있는 좌파 경향은 볼셰비키 정권을 비판했지만, 폭력의 사용을 도왔다. 심지어 노동자 반대파도 진압 세력에 자원했다. 당의 독재에 반대했던 독일 코뮤니스트당은 크론슈타트 반란에 맞선 군사적 행동에 동의했다.

 

마지막으로 크론슈타트 소비에트의 요구는, 볼리네의 의견과는 달리 대안의 전망을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즉각적이고 지역적인 맥락 안에서 주로 틀지어졌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요새(보루)와 세계적 상황에 대한 더 폭넓은 내포(함의)들을 취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그러한 요구들은 전위당의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답변하지 못했다.(3)

 

러시아 혁명의 패배와 그것을 주도했던 혁명적 흐름에서 모든 교훈을 끌어내려고 애쓴 혁명가들이 이 비극적 사건의 진정한 교훈들을 지적할 수 있었던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어떤 환경에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 그리고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적들에 의한 책략의 희생자일 수도 있다는 것을 심지어 인정할 것이다. - 프롤레타리아 국가에 맞서 투쟁할 수도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사회주의가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에 폭력과 강압에 의해 강요될 수 없다는 원칙에서 시작해야만 한다. 크론슈타트를 잃어버리는 편이 지리적 관점에서 그것을 지키는 것보다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러한 승리가 실질적으로 한 가지 결과만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바로 그 바탕, 프롤레타리아트가 수행했던 행동의 내용을 바꾸는 결과이다. 

Octobre」, 1938년, Italian Fraction of the Communist Left에 의해 편찬됨

 

코뮤니스트 좌파는 본질적인 문제를 정확히 지적했다. 즉 국가가 노동계급에 맞서 폭력을 쓰는 데서 볼셰비키당은 자신을 반혁명의 수장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크론슈타트에서 거둔 승리는 볼셰비키당이 노동계급에 맞서 러시아 국가의 도구로 되었다는 경향을 가속화시켰다. 이러한 견지에서, 코뮤니스트 좌파는 또 다른 대담한 결론을 끌어낼 수 있었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전위로 남으려는 코뮤니스트 좌파는 현상을 유지하고 혁명의 과정에 대한 진보를 막으려는 필연적인 경향을 반영하는 혁명 뒤에 들어선 국가에서부터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자율성을 지켜야만 한다.

 

보르디가주의자(Bordigist)의 견해

 

그러나 오늘날 코뮤니스트 좌파에서 이러한 결론은 전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사실, 좌파의 몇몇 부분은, 특히 보르디가주의자(Bordigist)는 1938년 이탈리아 분파(Italian fraction)의 태도와는 완전히 모순되게, 레닌과 트로츠키가 크론슈타트를 탄압한 것을 정당화했다.

 

볼셰비키가 어쩔 수 없이 크론슈타트를 진압하게 한 끔찍한 상황을 프롤레타리아 권력이 탄생이나 강화의 과정에서 노동자를 향해 발포할 수 있다는 원칙을 거부하는 몇몇 사람들과 함께 토론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할 수도 있다.

프롤레타리아 국가가 부닥쳐야만 한 끔찍한 문제의 제거는 장밋빛이 감도는 안경과, 이러한 반란에 대한 진압이, 트로츠키에 따르면, “비극적 필요”였지만 필요이고 심지어 의무였다는 이해를 통해 혁명의 비전에 대한 비판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크론슈타트 :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일" ,Programme Communiste n°88, 국제코뮤니스트당의 이론적 기구, 1982년 5월

 

그들이 속해 있다고 주장하는 전통을 회피한, 보르디가주의 경향은 볼셰비키당의 비타협적인 국제주의를 방어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경향은 또한 볼셰비키의 실수를 열정적으로 방어하고, 당과 혁명이 왜 타락했는지 하는 문제에서 배울 수 없게 한다.(4)

 

그들에 따르면, 혁명 과정에서 계급과 혁명 뒤에 들어선 국가에 대한 당의 관계는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 편의주의의 문제, 즉 어떻게 각각의 상황에서 혁명적 전위가 자신의 기능을 가장 잘 수행할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이 커다란 투쟁은 그저 프롤레타리아계급 안에서 끔찍한 긴장을 일으킬 수 있을 뿐이다. 사실상, 당이 혁명을 만들 수 없거나 대중없이 또는 대중에 반하여 독재를 지도할 수 없다는 것은 틀림없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의 혁명의 의지는 ‘수적 다수’ 또는 심지어 더 모순되는 것으로서 만장일치 합의를 찾기 위해 선거 협의체나 의견 투표(여론 조사)에 의해 나타내지 않는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의 혁명 의지는 투쟁의 등장과 좀 더 정확한 투쟁 방향을 통해 표현된다. 그러한 투쟁은 가장 중요한 분파가 머뭇거리고 우유부단하고, 필요하다면 자신의 반대파를 제거하는 것이다. 내전과 독재의 변화 과정에서, 서로 다른 층위의 태도와 관계는 바뀔 수도 있다. 그리고 몇몇 ‘소비에트 민주주의’에 의해 노동자, 준-노동자 또는 쁘띠 부르주아지의 모든 계층에 대한 똑같은 무게와 똑같은 중요성이 받아들여지기는커녕, 트로츠키는 자신의 책 『테러리즘 또는 코뮤니즘』에서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기구인 소비에트에 참가할 권리가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의 태도에 따라 달려있다고 설명한다.

 

어떠한 ‘헌법상의 규칙’도 어떠한 ‘민주주의 원칙’도 프롤레타리아트 계급 내부의 관계를 조화시킬 수 없다. 어떠한 비책도 지역적 필요와 국제적 혁명의 요구 사이의, 직접적 필요와 역사적 계급투쟁의 요구 사이에 있는 모순,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다양한 분파들의 반대 속에서 드러났던 모순을 풀 수 없다. 어떠한 형식주의도 계급의 가장 진보적인 분파와 계급의 혁명적 투쟁 조직인 당과, 지역적이고 직접적인 조건들의 압력을 통해 서로 다른 정도로 영향을 받는 대중 사이의 관계를 분류할 수 없다. 레닌이 말했듯이, ‘대중의 정신을 관찰하고 대중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당도 때때로 대중에게서 불가능한 것을 요구해야 한다. 좀 더 정확히, 당은 오로지 앞으로 나아가려고 애쓰는 것을 통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한계’를 찾고 있다(같은 글)

 

1921년에 볼셰비키당은 그들을 지도할 이전의 경험이나 요소 없이 잘못된 길을 선택했다. 오늘날 보르디가주의자들은, 불합리하게도 볼셰비키의 실수에서부터 장점을 끌어오고 "원칙은 없다."고 선언한다. 보르디가주의자들은 모든 계급의 공통된 지위에 도달하기 위한 형식주의적이고 추상적인 방법을 비웃음으로써 프롤레타리아 권력을 실행하는 문제를 마술로 쫓아버린다.

 

아주 유동적인 상황에서 합의를 세울 수 있는 결코 완벽한 수단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지만, 노동자평의회 또는 소비에트가 전체로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 의지를 담아내고 발전하게 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수단으로 여겨졌다. 비록 1918년의 독일과 다른 지역에서 드러난 경험이 노동자평의회나 소비에트가 부르주아지에 의한 회복에 취약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긴 했다. 하지만, 보르디가주의자들은 당이 대중없이 혁명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일 만큼 너그러웠지만, 당을 통해 그리고 당의 허락하는 것을 빼고는 대중은 전체 계급으로서 그들의 혁명적 의지를 표현할 수단을 지니지 못했다. 그리고 당은 필요하다면 크론슈타트에서처럼 기관총으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바로잡을 수 있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두 가지 모순적인 표어(슬로건)를 갖는다. 즉 혁명 전에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 혁명 후에는 : “모든 권력은 당으로.”

 

Octobre의 편집진과 달리, 보르디가주의자들은 부르주아지 혁명과는 대조적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과업이 소수집단에 대표될 수 없지만, 자기 의식적인 다수를 통해 수행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잊었다. 노동자의 해방은 노동계급 스스로의 과업이다.

 

보르디가주의자들은 둘 다 마치 기만인 것처럼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노동자 민주주의를 모두 거부한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자본주의의 전복을 위해 스스로를 동원하는 수단인 소비에트와 노동자평의회는 프롤레타리아계급 내의 긴장과 차이를 담아내고 조절하는, 그리고 이행기 국가를 통한 무장 권력을 유지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조직이어야만 한다. 당은, 특정 시기에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나머지보다 명확히 앞서 있는, 없어서는 안 될 전위는, 이러한 권력을 노동계급 자체와 대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실제로, 비록 “원칙적이지” 않지만, 당이 노동자를 쏠 수 있는 권리를 입증하면서, 보르디가주의자들은, 마치 이러한 결론의 끔찍함에서 피하려는 것처럼, 크론슈타트 봉기가 어쨌든 프롤레타리아의 특성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그때 레닌의 규정 가운데 하나에 따르면, 크론슈타트는 백군 반동세력을 위해 문을 열어주는 “쁘띠 부르주아적 반()혁명”이었다.

 

모든 종류의 혼란되고 심지어 반동적 생각들이 크론슈타트의 모반자들에 의해 표현되었다는 것은 확실히 진실이다, 그리고 몇몇 내용은 강령에 반영되어 있기도 했다. 반혁명 세력의 조직된 군대가 그들 자신의 목적을 위해 반란을 이용하려고 애썼다는 것도 진실이다. 그러나 크론슈타트의 노동자는 그들 자신을 1917년 혁명과 연속성을 지니고 있고 세계적 규모에서 프롤레타리아계급 운동의 통합 부분으로서 계속 생각해왔다:

 

전 세계 노동자에게 소비에트의 권력의 방어자인 우리가, 사회 혁명의 획득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자.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대의를 위해 투쟁하면서 크론슈타트의 폐허 속에서 이기거나 죽을 것이다. (the Kronstadt Pravda, p. 82)

 

크론슈타트 반란자들이 아무리 혼동을 표현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내건 요구는 또한 비참한 생활조건, 국가 관료제의 점점 늘어나는 억압과 쇠퇴한 소비에트에서 정치적 권력의 손실에 부닥쳤던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이해들을 반영하고 있었다는 것을 절대로 부인할 수 없다. 그때 볼셰비키가 반란자를 쁘띠 부르주아지와 반혁명 세력의 정치적 대리인으로서 낙인을 찍은 시도는 물론 힘으로 프롤레타리아계급 안에 있던 끔찍한 위험과 복잡성의 상황을 해결하고자 하는 핑계였다.

 

코뮤니스트 좌파가 역사적으로 뒤늦게 알게 된 지혜와 이론적 작업 때문에, 우리는 일련의 추론이 지닌 기본적 오류를 볼 수 있다. 즉 볼셰비키가 크론슈타트 반란을 진압했고 반(反)프롤레타리아 독재, 즉 자본주의 관료주의의 절대 권력인 스탈린주의가 코뮤니스트를 대량으로 학살했다는 것이다. 사실, 소비에트를 다시 세우려는 크론슈타트 노동자의 노력들을 진압하고, 그들 자신을 국가와 동일시하면서, 볼셰비키는 알지도 못한 채 스탈린주의로 가는 길을 닦고 있었다. 볼셰비키는 백군의 복원보다 노동계급에 훨씬 더 끔찍하고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된 반혁명 과정의 가속화를 도왔다. 러시아에서 반혁명 세력은 자신을 코뮤니스트로 선언하면서 승리했다. 스탈린주의 러시아가 살아있는 사회주의의 체현이며 10월 혁명과 직접적인 연결 선상에 있다는 생각은, 전 세계에 있는 모든 노동계급 대중에게 끔찍한 혼동과 막대한 혼란을 낳았다. 우리는 여전히 1989년 이래로 부르주아지가 코뮤니즘의 죽음과 스탈린주의의 사망을 같다고 하는 것처럼 실재에 대한 이러한 왜곡의 결과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보르디가주의자들은 이런 경험을 했지만, 여전히 1921년의 비극적인 실수와 동일시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에게 거의 “비극적” 필요가 아니라, 되풀이되어야만 할 코뮤니스트의 의무이다!

 

아나키스트들과 같이, 보르디가주의자들은 소비에트에서 조직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무장된 의지를 이끌기도 하고 연기하기도 하고 의지하기도 한 1917년 볼셰비키당과, 소비에트를 그들의 이전 권력의 그림자로 축소시키고 노동계급에 맞선 국가의 폭력으로 전환시켰던 1921년의 볼셰비키당 사이에 있는 모든 모순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들이 그들의 현재 캠페인들에서 볼셰비키를 마키아벨리적인 압제자들로서 묘사함으로써 부르주아지를 돕지만, 보르디가주의자들은 이러한 부정적 이미지를 혁명적 비타협의 극치로서 찬양한다.

 

그러나 코뮤니스트좌파는 볼셰비키 유산에 관계하면서도 그 이름에 걸맞게 실수를 비판할 수 있어야만 한다. 크론슈타트 반란의 진압은 가장 해롭고 끔찍한 것들 가운데 하나였다.

 

International Review, 2001, vol. 104,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혁명의 변질과 볼셰비키 당의 오류

 

프롤레타리아혁명은 자신의 특권을 시키기 위해 죽을 때까지 싸우는 이전 지배계급에 대항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폭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폭력은 지배 계급의 국가 폭력과 같은 방식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 폭력은 무엇보다도 사회관계를 목표로 해야 하며, 개인을 향해서는 안 된다. 그 폭력은 복수의 정신을 혐오한다. 그 폭력은 항상 노동자 평의회의 전체적인 통제 아래 종속되어야만 한다. 그 폭력은 프롤레타리아 도덕성의 기본 원칙 – 목적을 이루는 수단은 반드시 사람들 간의 연대에 기초한 사회의 창조라는 목적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이는 부르주아지의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방식에 반대이다 – 으로 인도되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의 적색 테러 반대는 절대적으로 옳았다. 비록 구 지배계급의 반혁명 음모에 대해 단호하게 대응하고, 그들의 억압을 목표로 하는 체카와 같은 특수한 조직의 건설이 필연적인 것이었을지라도, 이 조직은 빠른 속도로 소비에트의 통제에서 벗어나 구사회 질서의 정신적, 물질적 타락에 오염되어갔다. 무엇보다도, 그 폭력은 곧 지배계급에 대한 반대만이 아니라 내전 동안의 실제 경제적 비참함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파업, 볼셰비키 정책에 비판적인 아나키스트들과 같은 이들의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적 조직 등 노동계급 내의 다른 의견을 가진 분파들에까지 향해졌다. 이 과정의 절정은 1921년 크론슈타트 노동자 선원 진압이었다. 이들은 세계 혁명과 소비에트 부활의 깃발을 들었음에도 반혁명 분자들로 비난받았다. 이것은 ‘그 자신의 아이들을 파멸시킨 혁명’의 진정한 표현으로, 소비에트 권력이 내적으로 파괴되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이러한 폭력이 러시아 노동계급에 주었던 심각한 파괴적 충격은 노동계급 내의 폭력 관계가 반드시, 언제나 거부해야 함을 강조한다.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 선언, 2017. 10,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주>

 

 1)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 그들은 1920년에 코민테른의 입장들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고, 특히 “공동전선” 정책에 반대했기 때문에 코민테른에서 축출되었다. 

 

 2) Voline, 『알려지지 않은 혁명』(The Unknown Revolution), Black Rose Books, 1975, p. 534-538.

 

 3) 크론슈타트 반란이 내건 강령(platform)에 대해서 알고 싶으면 International Review 3, 51쪽을 참조하시오.

 

 4) 코뮤니스트 좌파의 또 다른 부분인, IBRP(혁명당 국제서기국 *현재는 ICT - 국제코뮤니스트경향)는 크론슈타트에 대한 모호한 태도를 갖고 있다. 혁명적 전망(Revolutionary perspectives No 23, 1986)에 출판된 논문은 10월 혁명과 볼셰비키 당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재확인하고, 크론슈타트 반란이 깊이 불리한 조건들을 반영했고, 그것이 많은 혼란스럽고 반동적인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크론슈타트 반란의 아나키스트적 이상화를 거부한다. 동시에 그 논문은 크론슈타트에 대한 진압이 당의 독재를 지키기 위한 불가피성이었다고 하는 보르디가주의자의 생각을 비판한다. 그것은 크론슈타트의 기본적인 교훈 중 하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그 계급 자체에 의해서 즉, 당에 의해서가 아니라 노동자 평의회를 통해서 수행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또한 프롤레타리아 요새의 고립이라는 전체적 정황에서, 당과 소비에트 당국 모두의 내부적 타락을 가속화시켰던, 당과 계급 사이의 관계에 관한 볼셰비키 세력의 실책들을 보여준다. 그 논문이 그 반란을 프롤레타리아적인 것으로 특징화 짓지 않고 근본적인 물음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노동계급의 불만에 대항하여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답하지 않음에도, 그들은 그것이 노동자 운동에서 느린 고투의 장으로 열릴지라도 그것을 반혁명의 조종 결과로서, 그 반란의 진압은 더욱 정당화된다고 심지어 말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