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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21/09

아프가니스탄 : 미국과 동맹국의 철수

아프가니스탄 : 미국과 동맹국의 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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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0월 7일, 조지 W. 부시가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발표한 지 거의 20년이 지났다. 탈레반이 미국 9/11 테러의 설계자 오사마 빈 라덴의 인도를 거부한 뒤, 그의 "대국민 연설"은 다음과 같은 말로 끝났다:

 

“그 전투는 현재 여러 전선에서 합류하고 있다. 우리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지치지 않을 것이다; 비틀거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평화와 자유가 승리할 것이다.”

 

오늘 그 미사여구가 얼마나 공허해 보이는지. 그리고 미 제국주의의 이 중대한 패배를 해명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공허한가...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는 것에 대해 되풀이되는 유명한 이야기는 미국이 세계 경찰 역할을 하면서, 세계 곳곳에서 자국 군인들이 살해되고, 나토 작전 자금 조달을 위해 수조 달러를 지출하는 것에 지쳤다는 바로 그 이야기다. 그 어떤 것도 이보다 더 진실일 수는 없다. 미국이 철수하는 것은, 바이든의 말대로, 목표를 달성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패배했기 때문이다. 20년간의 전쟁, 2,000명의 사망자와 2,000억 달러의 군사비 지출로 제국주의의 최소한의 이익도 얻지 못한 채, 국내 전선에서는 탈레반에, 국제무대에서는 중국, 러시아, 터키에 자유로운 마당을 남겨두고 철수했다.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의 "출구 전략" 계획을 포함하여 "정당한" 미국의 철수가 중국에 대한 전술적 해결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크게 착각하고 있다. 중국이 당장과 미래를 위한 전략적 목표 1순위를 상징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미 국방부는 더는 수십 년 전과 같은 힘을 갖고 있지 못하다. 미국 경제는 더는 예전처럼 세계 시장을 지배하지 못하며, 무역수지가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이윤율 저하 위기, 또는 생산에 투자된 자본의 가치증식은 금융 투기를 부추기고, 실물 경제를 침체시켰다. 그래서 세계의 경찰이 되는 비용, 또는 계속해서 세계에서 제국주의 제1의 국가가 되는 비용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해지기 시작했다. 따라서 패배가 유일한 결과일 수 있는 위험지역(이라크, 시리아,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는 것이 더 제한적이지만, 전략적으로 더 중요한 중국과 같은 목표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전의 민담(民譚)과는 상당히 다르다. 그러나 미국이 떠나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철수는 중국이 탈레반과 다음과 같은 합의를 할 수 있게 해주었다: 30년간의 전쟁 끝에 아프가니스탄 재건을 위한 정치적 인정과 "후한" 자금 지원의 대가로 그들은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무슬림과의 싸움에 더는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러시아 에너지 제품은 이제 중국과 인도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고, 터키는 이스탄불에서 탈레반과 그들의 적들과 회의를 개최함으로써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협상 강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되었다. 아프간 국민들, 특히 여성들에게 일어날 일에 대해 바이든은 관심이 없다. 동맹국이자 꼭두각시 정부를 지원하는 데 실패한 미국 대통령은 이 수치스러운 마지막 아프간 캠페인에 수천 명의 군인을 동원하면서 도망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프가니스탄 - 비인간적인 탈레반 민족주의와 야만적인 미 제국주의 사이의 아프가니스탄 비극)

 

카불 함락 직전에 「코뮤니스트 투사」( Battaglia Comunista)의 이탈리아 동지들도 위와 같이 썼다.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는 완전히 동의한다. 여기서 우리의 목적은 그 이후로 떠도는 모든 논평과 선전 속에서 최신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특히 미국의 언론은 바이든의 역할을 강조해 왔다. 트럼프는 그동안 바이든의 능력을 공격하기 위해 카불 공항의 혼란에 대해 소란스럽게 선전을 해왔지만, 이것은 핵심에서 벗어난 것이다. 우리가 10여 년 전 “아프가니스탄 - 제국주의 야망의 묘지”에서 언급했듯이, "자유를 지속시키는 작전" 프로젝트는 이미 끝났다(오바마는 그것이 분명히 실패했기 때문에 2014년에 끝났다고 발표했다). 그 무렵 미국의 침공은 단지 여러 부족의 파벌들로 이루어진 일련의 부패한 정부를 탄생시켰을 뿐이라는 것이 이미 분명해졌다. 그들은 탈레반에 저항하기 위한 군대를 증강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으로 갔어야 할 돈으로 바쁘게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고 있다. 탈레반은 현재 마자리샤리프, 카불 등 도시 외곽에 있는 고급 주택(주인들이 도망간 곳)의 내부 동영상을 올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부패가 아프간 군대의 규모를 크게 과장했다는 사실이다. 관리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이른바 "유령 병사" 10만 명의 급여를 요구했다.

 

이것은 1975년 사이공 철수의 반복이 아니다. 당시 미군은 이미 2년 전에 그 나라를 떠난 상태였다. 이 후퇴는 훨씬 더 절망적이고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다. 미군은 이달 말까지 완전히 철수할 예정이었지만, 탈레반의 접수 속도에 압도되고 또한 깜짝 놀랐다. 그러나 현재 그의 모든 소란스러운 허풍에도 불구하고, 병든 꼭두각시 정권을 지탱하지 못한 미국의 두 번째 수치스러운 실패로 가는 길은 트럼프와 함께 시작되었다. 트럼프 행정부는 2018년 많은 탈레반 수감자(2010년 이후 억류된 탈레반 4인방 중 한 명인 압둘 가니 바라다르(Abdul Ghani Baradur)처럼)를 석방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의 '거래'를 촉진하기 위해서 주도면밀하게 진행했다. 이것은 2020년 2월 마이크 폼페이오(Mike Pompeo) 미국 국무장관과 물라 압둘 하킴(Mullah Abdul Hakeem) 그리고 압둘 가니 바라다르가 이끄는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에미리트(일명 탈레반)가 체결한 도하(카타르) 협정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협정에는 세 가지 필수 조건이 있었다. 우리는 그 내용을 그대로 다시 소개한다:

 

“1. 미국은 이 협정 발표 이후 14개월 이내에 모든 비외교 민간 인력, 민간 보안 계약자, 교관, 자문관과 지원 서비스 요원 등 미국 동맹국과 연합군의 모든 군대를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할 것을 약속한다.

2. 미국과 (미국이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탈레반으로 알려진)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에미리트는 서로 긍정적인 관계를 추구하며, 아프가니스탄 내 대화와 협상으로 결정되는 미국과 새로운 이슬람 에미리트 정부 간의 관계를 기대한다.

3.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내부 대화와 협상에서 결정된 바와 같이 아프가니스탄의 새로운 정착 후 이슬람 정부와 재건을 위한 경제 협력을 모색할 것이며, 자국의 내정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아프가니스탄 문제에 발언권을 가질 수 있는 미국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당시 가니 대통령의 카불 정부가 사후(포스트-미국) 아프가니스탄 정착에서 많은 역할을 할 것이라는 생각조차 포기한 것이 분명하다. 다른 모든 조건은 그저 희망 사항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탈레반이 인수하는 것은 백지 수표였다. 바이든과 트럼프는 미국이 '영원한 전쟁'을 중단해야 한다는 데 사실상 동의했고, 이에 바이든은 이전 행정부의 정책을 흔쾌히 따랐다. 그는 실제로 아프가니스탄에서 이 협정보다 두 달 더 버텼지만, 철수 방식은 거의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무능했다. 미군은 아프간 동맹국들을 모욕하여 아무런 경고도 없이 바그람 공군기지를 포기했다. 아프간 정부군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그곳은 약탈당했고, 탈레반은 그곳과 다른 곳에서 강력하고 정교한 무기를 물려받았다

 

한편, 탈레반은 카타르에서 이 협정이 체결된 이후 지난 18개월 동안 현지 협상을 통해 가능한 한 적은 전투로 인수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주요 동맹국에 의해 버림받은 아프간 군대는 부패한 정권(과거에 탈레반을 저지했지만, 가니 대통령이 경멸했던 여러 부족 군벌을 끌어들이려는 시도는 거의 하지 않았다)을 위해 싸우다가 죽게 내버려 두었다. 그들은 자신에게 미래가 없는 합의를 지지하라는 요청을 받았고, 따라서 간단히 무너져 내렸다. 싸울 일이 없었다.

 

아프가니스탄 자체에 관한 한, 주요 추측은 탈레반 통치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운명과 시아파 하자라(Shia Hazara)와 같은 여성과 "소수자"의 미래에 대한 것이다. 이들의 주요 시민은 20년 동안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서 탈레반과 다른 살라피스트들(Salafists)에 의해서 정기적으로 살해되었다. 탈레반은 파슈툰어(Pashtun) 사용자가 지배하지만, 파슈툰어는 인구의 절반 미만이 사용하고 있으며, 2001년 이전에 탈레반은 (아프간 역사상 누구라도 그랬던 것처럼) 국가 전체를 완전히 장악한 적이 없었다. 그들은 지난번 카불에서 통치했을 때보다 더 기민한 홍보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이전의 적들에게 사면이 제공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정부 관리들에게 그들의 직책을 재개할 것을 촉구하고, 여성이 권리를 가질 것이라고 선언한다(불길하게 “이슬람법과 지역 관습을 준수하는 사람들”로 자격이 부여됨). 현지의 실상은 이것이 단지 세계 언론만을 위한 공허한 말일 뿐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탈레반 지도자들은 언론과 정부에 알려진 반대자들을 체포하라고 명령했고, 탈레반 전사들은 그들을 찾기 위해 집집마다 뒤지고 다니고 있다. 반대자들의 탈출이 발각되면 그들은 친척들을 죽인다. 마을 소녀들은 이미 탈레반 전사들과 "결혼"을 강요받았고, 일부 여성들은 단지 밖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미 채찍을 맞았다.

 

그러나 임박한 이 인도주의적 재앙을 한탄하기 전에 우리는 지난 20년 동안 일어난 일에 대해 기억해야 한다. "민주주의와 자유"(미국과 나토 동맹국의 제국주의 이익이라고도 함)의 이름으로:

 

“2001년 이후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전쟁 지역에서 약 241,000명이 사망했다. 사망자 중 71,000명 이상이 민간인이었다.”(1)

 

2019년에만 42,00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고(2) 아프가니스탄을 세계에서 가장 치명적인 분쟁지역으로 만들었다. 미국 브라운대 윗슨연구소의 발표를 인용한 이 보고서는, 민간인 사상자의 대규모 증가는 주로 2017년 아프가니스탄 공습에 대한 미국의 교전 규칙 완화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탈레반과 다른 살라피스트들이 설치한 급조폭발 장치도 한몫했지만). 동시에 그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했다.

 

“CIA는 심각한 인권 유린과 민간인 살해에 연루된 아프간 민병대를 무장시키고 자금을 지원해왔다.“

 

여기에는 아프간 지역 경찰이 포함된다.

 

“미국이 동원한 3만 명의 강력한 친정부 민병대 - 민간인을 살해하고, 사기를 치고, 절도, 강간, 납치, 마약 밀매와 갈취에 가담했다.“ (3)

 

국제사면위원회는 아프가니스탄 2020년 보고서에서 훨씬 더 암울한 상황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민간인 사망자의 약 절반이 탈레반과 다른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에 기인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아프간 사람들의 생활은 지난 20년 동안 악화되었다:

 

“아이들은 전투를 위해 특히 무장 단체와 아프간 보안군(친정부 민병대와 지역 경찰)이 계속해서 모집했고, 그들은 성적 학대를 포함한 여러 가지 학대에 직면했다. 아프가니스탄은 계속해서... "아이들에는 세계에서 가장 치명적인 국가 중 하나"이며, 친정부와 반정부 세력 모두 각각 700명 이상의 어린이 사상자를 낸 것에 책임이 있다. 지난 10월, 아므룰라 살레(Amrullah Saleh) 제1 부통령은 12명의 어린이를 죽게 한 학교에 대한 아프간 정부의 공습으로 다친 민간인 사상자를 신고한 사람의 체포를 명령했다고 발표했다. 이후. 타카르(Takhar)주지사의 대변인은 아프간 보안군에 의한 아동 인명 피해를 보고했다는 이유로 직위에서 해임되었다고 발표했다.“(4)

 

보고서는 계속된다:

 

“아동 성 학대가 널리 알려지고, 2018년에 ”바차 바지“(남성 아동이 나이 든 남성에게 성적 학대를 받는 일)라는 학대 행위가 범죄로 규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당국은 학대 종식과 가해자의 책임을 묻기 위한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성을 억압하는 것은 탈레반만이 아니다. 아프간 정부의 "진보적인" 국제적 얼굴은 실제로 의회의 60석 정도의 여성을 위한 의석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정부에서 소수의 여성은 협박과 괴롭힘, 그리고 차별을 당했다. 그들은 남성 동료들과 동등한 조건으로 사무자원에 접근할 수 없었고, 초과근무와 수당을 거부당하는 일이 많았다."

 

2백만 명의 소녀들이 여전히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있지만, 탈레반은 여성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이들을 공격하는 유일한 세력이 아니다:

 

"인권운동가들은 협박, 폭력, 살인에 직면하면서 계속해서 공격을 받았다. 지난 3월, 헬만드(Helmand)주의 정부 관계자들은 부패 혐의를 받는 인권운동가들을 물리적으로 폭행했다. 그들은 부상당해 병원 치료가 필요했다. 지난 5월, 시민사회 공동실무단의 조력자 모하마드 이브라트(Mohammad Ibrait)는 자불주에서 정체불명의 무장괴한들의 공격으로 부상당했다. 그 후 그는 부상으로 사망했다. 지난 6월, 아프가니스탄 독립인권위원회의 직원 파티마 칼릴(Fatima Khalil)과 자와드 폴라드(Jawad Folad) 두 명이 카불에서 차량 공격으로 사망했다."

 

전반적으로 전쟁은 아프가니스탄을 "불발탄으로 오염 시켜, 수만 명의 아프간인, 특히 어린이들이 일상적인 집안일을 하며 목숨을 잃고 다친다."고 말했다. 또한 빈곤, 영양실조, 열악한 위생, 보건의료에 대한 접근 부족, 환경악화가 아프간인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악화시켰다.(5)

 

서방세계가 약속했던 "자유"의 혜택은 이렇게 셀 수 없이 많다. 이제 탈레반이 총격을 가하는 상황에서 이 상황은 더 나아지지 않을 것이며, 카불 공항에서 미 수송기 아래에 매달리는 대부분의 사람은 그것을 알고 있고, 그 이상을 알고 있다. 미국과 나토 회원국들이 그들이 고용한 사람들의 안전조차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은 아마도 비참한 제국주의 모험에 대한 가장 부끄러운 결말일 것이다. 미국과 나토 회원국들은 아프가니스탄이 자신의 야망의 무덤이라는 것을 발견한 최초의 제국주의자는 아니다.

 

 

오래전 1857년에 엥겔스는 제1차 아프간 전쟁(1839-42)에서 영국이 통치권을 확립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것에 관해 썼다.(6) 레오니트 브레즈네프(Leonid Brezhnev)는 제국주의 세력으로서 소련의 쇠퇴를 강조하고 가속화시킨 붉은 군대의 점령(1979-89)에 착수하기 전에 그의 작품을 읽었어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러시아의 통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파키스탄의 군사 정보기관인 ISI(Inter-Services Intelligence)를 통한 미국의 재정 및 군사적 지원이 결국 탈레반이 부상하게 되는 길을 열었다. (사담 후세인의 타도가 다에시(Daesh)나 ISIS의 중추가 된 수니파 저항 세력의 탄생으로 이어졌듯이), 추가된 모순은 탈레반이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의 이슬람 근본주의 와하비파(Wahhabist)의 영향을 받고 있던 파키스탄의 마드라사(madrassas)로부터 발생했다는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소련 철수 후 내전에서 탈레반을 무장시키고, 심지어 지원 병력까지 제공했다. 9/11 자살폭탄 테러범 대부분은(오사마 빈 라덴처럼) 사우디 시민이었지만, 미국은 1945년 사우디아라비아와 악마적 조약(미국 안보를 위한 석유)을 체결했기 때문에 그들의 역할은 경시되었다. 이것과 다른 많은 긴장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편의적인 동맹은 계속해서 유지된다. 석유는 필요하다면 자급자족할 수 있는 미국에는 덜 중요하다. 사우디-미국 관계의 공고함은 이제 이란에 대한 공동의 싸움이 되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미국과 나토 동맹국들의 최근 제국주의적 붕괴의 중요성을 알려준다. 파키스탄의 총리 임란 칸(Imran Khan)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해 기쁨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아프간 사람들이 노예제의 족쇄를 풀었다고 말했다. 임란 칸은 파키스탄 군대의 꼭두각시이며, 탈레반이 파키스탄에서 은신처를 찾고 사업을 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ISI(파키스탄 정보기관)가 (원래 CIA로부터 받은) 돈을 탈레반에게 흘려보낸 것은 비밀이 아니다. 하미드 굴(Hamid Gul) 전 ISI 국장은 2014년 TV에서 "역사가 기록될 때, ISI가 미국의 도움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을 물리쳤다고 진술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렇다면 또 다른 문장이 나올 것이다. ISI는 미국의 도움으로 미국을 물리쳤다.”(7) 미래의 제국주의 노선에 대해 임란 칸은 미국이 (가니 정부 시절 카불에서 영향력이 커진) 모디(Modi)의 인도와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파키스탄의 중국과의 동맹 관계가 더욱 공고해졌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따라서 인도가 카슈미르와 히말라야에서 파키스탄과 중국과 국경 분쟁을 계속하고 있는 것을 고려할 때 중앙아시아에서의 투쟁은 더욱 확산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모든 국가는 핵보유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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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8월 13일 파키스탄 퀘타에서 파키스탄 정당 지도자들이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 주요 도시 점령을 축하하며 과자를 나눠주고 있다.

(Fayyaz Ahmad/EPA-EFE/Shutterstock)

 

이란의 입장은 더 모호하다. 이란의 지도자들은 미국의 최근의 굴욕에 기뻐하고 있지만, 탈레반의 시아파 무슬림에 대한 비(非)관용적인 태도로 수천 명의 사람이 이란으로 도망쳤고, 따라서 이미 절박한 경제 위기에 압박이 더해지고 있다. 지난해 이란은 70만 명의 난민을 아프가니스탄으로 돌려보냈지만, 현재는 중국 일대일로 전략의 일환인 만큼 최근 중국과 맺은 25년 조약(8)을 고려할 때 탈레반과 협력할 수 있는 카드가 있을 수도 있다. 이는 아프간 중앙은행의 자금이 뉴욕에 예치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가능성이 높다. 이것들(그리고 IMF 자금 지원 보류 가능성)은 탈레반에 대한 미국의 마지막 수단으로 남아 있다. 따라서 후자는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어딘가에서 재정적인 지원이 필요할 것이고, 재정 지원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은 중국이다. 우리 동지들(코뮤니스트 투사)이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탈레반은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공동종교인들에 대한 처우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중국은 거의 20년 동안 아프가니스탄의 희토류와 같은 리튬, 구리 및 기타 광물자원에 주목해 왔고 추출할 수단을 가지고 있다. 이것들은 풍부하게 존재하며 그들의 군사력과 산업 능력을 모두 증강시킬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탈레반의 경우 이에 대한 수익이 돌아오는 데 다소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라시아 전역에 걸쳐 중국이 발전할 가능성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이를 보여주는 한 가지 징후는 파키스탄, 중국, 러시아가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한 이후 카불에 대사관을 유지하는 유일한 국가라는 점이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할 날짜를 발표하기 전에 나토 동맹국들과 거의 상의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인해서 재난이 가중되고 있다. 이에 영국과 독일과 같은 다른 강대국들은 전적으로 미국에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고, 그들과 함께 갈 수밖에 없었다. “미국 우선주의”가 동맹국에 후순위를 의미했던 트럼프 집권 4년 후 '서방 동맹'은 큰 피해를 보았다. 바이든은 집무실에 도착해 "미국이 돌아왔다"고 밝혔지만,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그의 행동은 동맹국들에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납득시키는 데 실패했다. 제국주의 진영의 전개 방식에 비추어 볼 때 미국이 결코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은 그 자체의 불화이다.

 

한편, 중국은 미사일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이 대유행을 이용했으며, 탈레반이 장악한 주(週) 동안, 의도적으로 대만의 영공에 전투기를 띄웠다; 이것은 일련의 도발 행위 중 가장 최근의 것이었지만, 미국의 약점에 대한 인식에 힘입은 행동이었다. 이미 야만적인 갈등으로 가득 찬 세계는 더욱더 위험한 곳이 되었다. 노동계급은 어디에서나 분열되고 조직화되지 않는 한 희생자가 될 것이다. 맑스가 이야기한 것처럼 노동자에게 조국이 없다. 그들은 싸워서 지켜야할 부(富)가 없고, 확실히 지지해야 할 제국주의 세력도 없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반(反)제국주의"에 대한 지지 선언을 자본주의 좌파와 우파의 다양한 파벌에 맡긴다. 유일하고도 진정한 반(反)제국주의 투쟁은 모든 형태의 자본주의를 끝내기 위한 노동계급의 투쟁이다. 이것이 구체화될 때까지 자본주의는 우리를 더 큰 갈등으로 이어지는 길고도 느린 길로 인도할 것이다.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으로!

 

2021년 8월 22일

조크(Jock)

국제코뮤니스트경향(ICT)

 

 

<주>

 

(1)  watson.brown.edu 참조

 

(2) sipri.org 참조

 

(3) theguardian.com 참조

 

(4) amnesty.org 참조

 

(5) 이것과 앞의 인용문 : watson.brown.edu

 

(6) marxists.org. 참조. 엥겔스의 설명에서 놀라운 것은 그 침공과 후대의 침공 사이에 유사성이 많다는 것이다. 1857년에 쓴 글에서 그는 "아프간 사람들은 여러 족장이 봉건적 패권을 행사하는 씨족들로 나뉘어 있다. 통치에 대한 불굴의 증오와 개인의 독립에 대한 사랑만으로도 강대국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불규칙성과 불확실성은 그들을 위험한 이웃으로 만들고, 변덕의 바람에 날려버리거나, 그들의 열정을 교묘하게 자극하는 정치적 음모자들에 의해 선동되기 쉽다." 제2차 아프간 전쟁 후에 영국은 아프간 사람들을 듀랜드 라인(Durand Line)으로, 또는 (영국령 인도 제국) 북서 국경으로 역사에 유명해질 수 있도록 하는 데 성공했고, 그 너머에 있는 아프간 사람들은 서로 싸우게 되었다.

 

(7) washingtonpost.com 참조

 

(8) 「혁명적 전망」 18호, 시리즈 4. leftcom.org의 최근 기사 "중국 -이란 협정, 실크로드와 여타의 제국주의 움직임"을 참조.

 

 

<원문 출처>http://www.leftcom.org/en/articles/2021-08-24/afghanistan-the-usa-and-its-allies-retre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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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주의 코뮤니스트 포럼 "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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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주의 코뮤니스트 포럼 "1회"


■토론주제 :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 최근 내부 논쟁 (발제ㅣ오세철)


■일시 : 2021년 10월 8일(금) 오후 7시 (장소는 추후 공지)

 

<포럼 자료>

「코뮤니스트」 10호, 107쪽~116쪽
「코뮤니스트」 11호, 145쪽~167쪽
「코뮤니스트」 12호, 172쪽~192쪽
「코뮤니스트」 13호, 238쪽~240쪽(요약)


*자료(PDF) 요청 및 포럼참가 문의 : communistlef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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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4호] 지구를 구하라 - 자본주의를 파괴하라!

지구를 구하라 - 자본주의를 파괴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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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캐나다 서부와 미국 상공의 열돔 현상, 그리고 독일과 중국에서의 홍수로 수백 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캘리포니아에서 그리스, 터키 그리고 시베리아까지 산불이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이러한 재앙들은 분명히 지구 온난화가 기후 패턴을 교란한 결과이다. 온실가스 배출이 현재와 같이 계속된다면, 이번 일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비해 어느 성직자의 다과회처럼 한가롭게 보일 것이다. 수백만 명이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인류는 이른바 기후 틈새(climate niche)라고 불리는 평균 기온(MAT)의 좁은 범위에서 생존해 왔다. 이 범위는 대략 11~15℃이며 농작물과 가축을 성공적으로 재배하기 위한 범위이기도 하다. 산업화 이전의 평균 온도는 약 13.75°C였으며 지금까지 평균 기온은 산업화 이전 온도보다 1.1°C 상승하여 이미 인간 생존을 위한 최적 온도의 한계에 도달했다. 2010년 이후 평균 기온이 0.4°C가 증가한 이래로 금세기 말이 아니라, 향후 5~10년 이내에 파리 기후 회의에서 합의된 유명한 1.5°C에 도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040년까지 2°C가 상승하면, 지구상 인구의 3분의 1이 기후 틈새 지역 밖에 놓이게 된다. 1.5도에도 불구하고 생산되는 식품이 크게 감소할 것이며, 2°C에서는 미국 중서부 및 인도와 같은 지역에서 수확량이 절반으로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기후 틈새 지역이 위도가 높은 곳으로 이동함에 따라 수백만, 어쩌면 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이주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사회적 붕괴와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다.

 

많은 온난화 과정이 이미 인간의 행동으로 되돌릴 수 없는 임계점을 넘어섰다. 북극 얼음이 녹고, 남극 서부 대륙빙하가 녹고, 산호초가 백화(白化)되는 등 세 가지 중요한 임계점이 교차되어서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린란드 대륙빙하가 녹고, 남극 동부 대륙빙하가 녹고, 멕시코만류의 붕괴 등 추가로 세 가지 과정이 임계점에 근접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더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동안 그것들을 흡수하는 자연의 능력 또한 파괴하고 있다. 보기를 들어 아마존 유역은 화재와 산림 벌채로 인해 이산화탄소의 순흡수체(純吸收體)에서 순배출체(純排出體)로 바뀌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파리 회의 목표인 2050년까지 순배출(純排出) 제로 달성을 위한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은 경우에만 이를 달성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개발 승인을 받은 새로운 유전 및 가스전이 없고 새로운 탄광이 없는”

 

물론 우리의 지배자들은 이에 대해 조금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새로운 에너지 투자의 대부분은 화석 연료에 투입되고 있다. G7은 2020~2021년 석유, 가스 및 석탄을 지원하기 위해 총 1,890억 달러를 지출했는데, 이는 재생 에너지에 지출한 비용보다 29%나 많은 금액이며, 파리 회의 이후 6년 동안 G20은 화석 연료에 3조 3천억 달러의 보조금을 지급했다. 국제에너지기구는 대유행 복구에 할당된 16조 달러 중 2%만이 청정에너지로 전환될 것이며, 2023년까지 이산화탄소(CO2) 배출량이 새로운 최고치로 치솟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했다.

 

왜 우리의 지배자들은 그들의 과학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과는 달리 정반대의 행동을 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그들은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대로 하기 때문이다. 첫째, 자본주의 체제는 단지 이윤을 목적으로 생산하며, 화석 연료는 여전히 매우 수익성이 높고, 둘째, 자본주의 체제는 지속적인 자본 축적을 필요로 하며, 이는 에너지 성장으로 이어진다. 자본주의 체제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동안, 이윤과 성장의 필요성은 이것이 미래에 호모 사피엔스의 멸종으로 이어질지라도 우리의 지배자들은 그에 따라 무엇을 할지 결정할 것이다.

 

온실가스 생산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은 바로 지구를 약탈한다는 것이다. 자연의 재생 가능한 자원을 자본주의가 사용하는 것은 이제 매년 자연이 대체할 수 있는 것의 1.6배가 된다. 이것은 단순히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오늘날 우리는 두 가지 대안을 제시받고 있다; 탈(脫)탄소화에 동의하는 세계 자본주의 지도자들의 세계 회의, 또는 정부의 탈(脫)탄소화 강제를 위한 체제 교란 직접 행동이 그것이다. 둘 다 효과가 없을 것이다.

 

첫 번째는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을 중단하는 것을 동의하는 세계 자본주의 지도자들에게 의존한다. 유엔 기후변화 회의(COP)는 아마도 이것을 위한 포럼일 것이고, 최근의 COP26(당사국 총회 : 유엔기후변화협약의 최고 의사결정회의)은 11월에 글래스고에서 열릴 예정이다. COP회의는 1995년 이후 매년 열렸지만, 이전의 모든 COP회의에서는 아무것도 실현하지 못했다. 지구 온난화는 꾸준히 증가해왔다. 파리 회담은 법적 구속력을 갖기로 약속이 되었지만, 그러한 약속은 시행할 수 없었다! 분명히, 100여 개의 후진국이 그들이 참여하지 못했던 파리 COP21 공약을 이행하기 위해 선진국들로부터 돈을 요구하기 위해서 글래스고 회의에 올 것이다! 또 하나의 쓸모없는 결과가 도출될 것이고, 참가자들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그들이 이행할 의도도 능력도 없는 약속을 한 것에 대해 자신을 다독거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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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대안은 세계 자본주의가 분열과 대중 불복종으로 경제를 탈탄소화시킬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이것은 멸종 반란(XR)과 그들의 분파인 버닝 핑크(Burning Pink)가 지지하는 전략이다. 그들은 국회에 선출된 의원들과 탈탄소화를 통제하는 시민 집회를 통한 "평화로운" 혁명을 제안한다. 탈탄소화 비용은 인구의 가장 부유한 10%의 자산의 90%를 몰수해서 지불해야 한다. 이 모든 환상에 대한 진정한 비판은 멸종 반란에 따르면, 이윤과 성장에 대한 지속적인 요구를 가진 자본주의 체제가 그대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를 재앙으로 이끄는 모든 세력은 온전하게 남아 있다는 것이다.

 

단순한 사실은 자본주의가 세계 생산 체제로 남아 있는 동안 환경 위기에 대한 해결책이 없다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지구상에 가한 끔찍한 피해를 되돌려 놓으려면 임금노동과 이윤을 위한 생산의 종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환경문제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필요를 위한 협력적 생산을 기반으로 하는 세계 체제가 구축되어야 한다.

 

 

2021년 9월 2일

국제코뮤니스트경향(ICT)

 

 

(위 기사는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의 간행물 <오로라> 최신 호(56호)에서 발췌한 것이다.)

 

<원문 출처>

http://www.leftcom.org/en/articles/2021-09-02/save-the-planet-destroy-capit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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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하반기 투쟁 힘모으기 <아사히 수요문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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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하반기 투쟁 힘모으기
아사히 수요문화제

 

 

2021. 09. 29(수) 늦은 7시
구미 AGC화인테크노 코리아 아사히농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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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3호] 30년 뒤, 러시아혁명이 품은 이상과 현실(Ⅴ~Ⅶ)

30년 뒤, 러시아혁명이 품은 이상과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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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중앙위원회가 권력 독점을 유지하고 강화하도록 동기를 부여했던 좀 더 깊은 까닭은 무엇이었나?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시기 동안 볼셰비키는 자신들 말고는 그 누구도 믿지 못했다. 크론슈타트 사건에 의해 악화한 무거운 책임을 지닌 그들은 멘셰비키 사회민주주의자와 좌익 사회혁명적 ‘농민’당의 경쟁에 정치 무대를 열어놓길 두려워했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볼셰비키는 세계혁명, 유럽에서 곧 닥쳐올 혁명, 특히 중유럽에서 혁명을 믿었다. 러시아에서 연립 정부는 다가올 혁명을 안내하고 지시할 운명을 지녔던 코민테른을 약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여기서 우리는 레닌과 트로츠키 당의 가장 크고 무거운 잘못을 건드릴 것이다. 여기에는 언제나 창조적 사고, 진실, 잘못, 바람직한 사고, 주체적 직관 등 모두가 뒤섞여 있었다. 그 어떤 것도 기업에 대한 믿음 없이, 실체적인 당연한 일을 평가하지 않고, 성공을 바라지 않고, 문제가 있고 불확실한 영역으로 들어서지 않고는 착수되지 않았다. 모든 행동은 알지 못하는 미래로 실질적이고/현재 순간에서부터 투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 태도에서, 정당한 행동은 맹목적으로 앞으로 내던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처지에서 본다면, 유럽혁명의 교의는 정당한 것이었는가? 나는 우리가 그 문제에 만족스럽게 대응할 처지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지닌 하나의 의도는 그것의 범위를 정하는 것이다.

 

안정적이고 점증하는, 상대적으로 평화적인 자본주의 시기가 제1차 세계대전으로 끝났다는 것은 틀림없다. 전지구적 혁명 시기의 개막을 알렸던 맑스주의 혁명가들은 ─ 사회주의가 적어도 유럽 강대국에서 스스로 세워지지 않는다면 또 다른 야만의 시기와 “전쟁과 혁명의 순환”(엥겔스를 인용해서 레닌이 지적했던 것처럼)이 뒤따라올 수 있다고 하는 ─ 옳았다. 미래의 부르주아 유럽에 대해 믿는 쪽을 선택했던 보수주의자, 진화론자, 개량주의자들은 ─ 베르사유에서 조심스럽게 칼로 조각을 내었고, 로카르노에서 완패했으며, 국제연합에서 밝혀졌던 문구로 진저리를 나게 했던 ─ 오늘날 맹목적 정치의 정치인으로 기억되었다. 사회관계, 생산 관계의 지구적 전환이 아니라면,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국제 관계, 권력 관계, 사상과 관습에 대해서. 줄이면 세계혁명이 유럽에서는 시기상조였고 불확실했을 때 인도네시아에서 결정적이고 첨예한 것이었다. 이 모든 것에도, 거대한 기술적 조류, 결정적인 국제적 책임, 모순적인 사회운동을 지닌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잘 조직된 공업국에 어울리게 특별한 지위를 지녔다. 다른 한편으로 일본이나 그리스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 절대 비밀로 소련의 시베리아 불모지에 세워지고 있는 것, 트리에스터나 마드리드에서 일어나고 있거나 몰려들고 있는 것은 이러한 혁명의 겉모습이다. 볼셰비키 학파의 맑스주의 혁명가들은 노동대중의 자각과 새로운 사회의 합리적이고 공정한 재조직화를 통한 유럽과 세계의 사회적 전환을 기다리면서 활동했다. 그들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운명을 통제할 수 있게 될 때를 기다리면서 계속 활동했다. 그때 그들은 잘못했고, 그들은 패배했다. 그 대신 세계의 전환은 제도, 운동, 믿음의 무서운 혼동한 가운데서 기다리던 비전의 명쾌함 없이, 회복된 인간주의에 대한 의식 없이, 그리고 사람의 가치와 희망 모두를 위태롭게 하는 방식으로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도 전반적 조류는 집단화와 경제의 계획화, 세계의 국제화, 억압당하고 식민화된 사람들의 해방, 그리고 새로운 종류의 대중에 바탕을 둔 민주주의의 형성을 향해 1917~20년의 사회주의자들이 규정했던 경향이다. 사회주의자들은 또한 대안을 내다보았다. 즉 야만주의와 전쟁, 전쟁과 야만주의는 두 개의 머리를 지닌 괴물이다.

 

볼셰비키는 예상한 독일혁명에서 러시아혁명의 구원을 보았다. 이 점에서 그들이 잘못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사회주의 정권 아래 농업 러시아와 공업 독일은 틀림없이 평화롭고 풍부한 발전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테제 하에서, 러시아는 발전하고 있는 내부 관료제에 의한 교살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은 나치즘의 어두운 밤과 재앙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확실히 세계는 다른 투쟁을 알 수 있었을 것이지만,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그러한 투쟁이 히틀러주의와 스탈린주의라는 소름 끼치는 기계를 생산했을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하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그와 달리 모든 지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 갈 때 승리한 독일혁명이 전체로서 인류의 사회적 진보를 풍부하게 해주었을 것이라는 결론으로 이끈다. 여러 가지 있을 수 있는 역사의 가설에 대한 추론은 만일 우리가 과거를 이해하고 지금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알길 바란다면 적법하고 필요하다. 그런 추론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역사가 시간의 흐름에서 인간의 삶의 전개가 아니라 일련의 숙명론적이고 기계적인 발생 사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혁명을 위해 싸우면서 독일 스파르타쿠스단, 러시아 볼셰비키, 그리고 모든 그들의 전 세계 동지들은 지구 전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정치적 대변동을 막으려고 투쟁하고 있었다. 그들은 무엇이 다가오고 있었는지를 알았다. 그들은 해방에 대한 커다란 의지를 통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한 혁명가와 어깨를 맞대고 싸웠던 사람은 누구든지 그 점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역사에서 그 어떤 사람도 전체로서 인간의 대의에 그처럼 헌신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1917~27년의 혁명가들에게 헤게모니와 세계 정복 열망을 귀속시키려 하는 것이 유행하고 있지만, 어떠한 종류의 비참함과 이해관계가 역사적 진실이 지닌 특성을 빼앗으려는 그런 시도의 뿌리에 놓여 있는지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때 볼셰비즘이 잘못한 것도 틀림없다. 유럽은 불안정했고, 사회주의 혁명이 이론적으로 가능하고 이성적으로 필요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서구에서 노동자계급의 압도적인 다수는 투쟁을 뒷받침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들은 그 대신에 전쟁 전 시기의 사회적 진보로 돌아가는 것을 믿었다. 그들은 위험에 연루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복지에 대한 감정을 간신히 생각해내었다. 온건하고 평범한 지도자들이 이끌었던 독일 사회민주당은 1918년 11월에 쉽게 일어날 수 있었던 혁명이 치를 희생을 두려워했다. 그 대신에 그들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주의적인 길을 따르는 것을 선택했다. 우리가 볼셰비즘을 폭력을 통한 혁명과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불러왔다고 꾸짖었을 때, 역사적 대안, 즉 독일에서 개량주의적이고, 온건한 사회주의의 길을 고려하는 것은 오직 올바른 것일 수 있을 것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다 써버리려고 시도하는 가운데 그러한 대안은 히틀러주의의 승리로 직접 이끌었다.

 

볼셰비키는 서구, 주로 독일 노동계급의 정치적 이해와 에너지를 잘못 보았다. 볼셰비키가 지닌 전투적 이상주의 때문에 생겨났던 이러한 실수는 가장 심각할 수도 있는 결과를 생기게 했다. 그들은 서구 노동계급과 접촉을 잃었다. 코민테른은 소비에트 당-국가의 창조물로 되었다. 마지막으로 “일국 사회주의”라는 그릇된 교의는 속임수에서 생겨났다. 스탈린주의화한 코민테른의 바보스럽기도 하고 형편없는 전술은 독일에서 나치즘의 승리를 촉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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Ⅵ.

 

러시아혁명에 대한 첫 설명은 1927년쯤에 나올 수밖에 없었다. 10년이 흘렀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1920~21년 이래 코뮤니스트당의 독재, 즉 그 자체로 ‘볼셰비키 친위대’(Bolshevik old-guard)의 독재로 되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이러한 ‘친위대’는 오히려 뛰어난, 즉 지적이고 이타적이며, 적극적이고 완고한 엘리트로 이루어진다. 그것이 성취한 결과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해외에서 소련은 인정받았고 존경과 흔히 감탄의 대상이었다. 국내에서, 전쟁 시기에 파괴로 경제는 이용할 수 있는 재원이 거의 없었지만 대중의 에너지를 통해 되살아났다. 집단화한 생산의 새로운 체제는 낡은 자본주의 생산을 대체했고 꽤 잘 작동하고 있었다. 러시아 노동계급은 투쟁에서 승리하고 조직하며, 생산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다. 노동자에 대한 새로운 믿음과 존엄감을 심어주었다. 부르주아 철학에서 인간에 내재 되었다고 생각한 사유재산에 대한 본능은 자연스럽게 멸종하는 길에 있었다. 농업은 평균 수준으로 재건되었고 1913년 수준을 뛰어넘기 시작하고 있다. 노동자의 봉급은 1913년보다 아주 높았다. 프롤레타리아혁명에 대한 평가는 틀림없이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이제 문제는 ‘재건설’이 아니라 공업(자동차, 항공, 화학, 알루미늄···.)의 진전과 새로운 발전을 건설하는 것이다. 이제 활력을 되찾은 농업 부문과 상대적으로 약한 공업 부문 사이의 불균형을 고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소련은 고립되었고 위협을 받고 있다. 소련의 방어를 생각하는 것은 중요하다. 맑스주의자는 전쟁을 ‘금지한’ 브리앙-켈로그 조약에 환상을 갖지 않았다. 정권은 갈림길에 있다. 당은 권력 투쟁으로 갈기갈기 찢어졌고 예전 권력이 세워놓은 강령을 둘러싸고 ‘구(舊)볼셰비키’를 서로서로 경쟁시킨 투쟁으로 찢어졌다. ‘영웅적 시기’의 후계자 가운데 가장 명석한 사람들은 트로츠키 주위에 몰려 재그룹화되었다. 그들은 전술적 실수를 할 여지도 있고, 완전하지 못한 이론을 지닐 수도 있으며, 머뭇거릴 여지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이 지닌 용기와 장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공업화와 계획화의 필요, 그뿐만 아니라 반동 세력, 무엇보다 관료제와 싸울 필요를 이해하고 있다. 그들은 전투적 국제주의와 정권 민주화의 명백한 필요를 알고 있다. 그들은 서기들의 위계제에 패배했다.

 

사회주의 이상에 대한 헌신을 뚜렷이 보여준 소련의 몇천 명의 설립자는 권력에서 쫓겨나 감옥에 갇히거나 추방되었다. 그들이 비난당했던 것은 모순적이고 아무런 뜻도 없었다. 중요하고 지배적인 사실은 1927~1928년에 당내에서 ‘쿠데타 세력’ 때문에 혁명적 당-국가가 관료주의적 경찰국가로 되었다는 것이다. 그 국가는 혁명의 이상에 대해서는 모든 중요한 점에서 반동적이었다. 이데올로기 변화는 야만스럽게 빠르게 일어났다. 공직에서 태어난 죽은 슬로건인 맑스주의는 생각하는 사람의 비판적 맑스주의에 자리 빼앗으며, 지도자 숭배가 시작되었다. ‘일국사회주의’는 지도자 숭배를 통해 자신들이 지닌 새로운 특권을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은 신참자들의 표어가 되었다. 정권의 반대자들이 고뇌에 찬 짧은 생각에 동의했던 것은 새로이 나타나고 있는 국가, 전체주의 정권의 단면이다. 트로츠키주의 반대파를 적대한 많은 구 볼셰비키, 즉 부하린, 릐코프, 톰스키, 류틴은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보자마자 소름 끼쳤고 저항할 시기를 놓쳐버렸다. 너무 늦었다.

 

전체주의에 맞선 혁명 세대의 투쟁은 1927년에서 1937년까지 10년 동안 지속하였다. 이러한 투쟁이 취한 혼란스럽고 때때로 일치하지 않은 방법은 투쟁이 지닌 실질적인 중요성을 우리에게 비밀로 해서는 안 된다. 투쟁을 이끈 지도적인 인물은 서로서로 반목했고, 싸웠으며, 화해하기도 했고, 심지어 배반했다. 그들은 길을 잃었고, 독재 앞에서 굴욕감을 느꼈으며 폭력배의 허를 찌르려고 애썼고 자신을 지치게 했으며, 죽기 살기로 반란을 일으켰다. 전체주의 정권은 그들을 서로 대항하는 데 이용했다. 이 모든 것은 그들 정신에 영향을 남겼기 때문에 훨씬 더 효과가 있었다. 화석화된 당과 혁명에 대한 애국심, 헌신, 실질적 결과, 위대한 미래에 대한 커다란 비전, 공통의 위험 의식, 이 모든 것은 심지어 가장 명석한 정신 속에도 현실감각을 없애버렸다. 이 모든 것에도, 구사회주의 볼셰비키가 대표했던 혁명 세대의 저항은 참 완고했고, 그러한 저항은 1936~38년(모스크바 재판 시기)에 새로운 정권이 자신을 굳히려고 제거되어야 할 운명인 전체 세대에 필요한 것이었다. 이것은 역사에서 가장 피로 더럽혀진 탈취였다. 볼셰비키는 첫 10년의 업적 때문에 망했다. 유기체와 사회의 순환적 발전을 연구한 두 명의 미국 사상가가 그러한 업적을 바라보면서 “1917~18년에, 러시아가 팽창과 성장의 시기에 들어섰고, 그 때문에 지금(1940년대) 러시아가 지구의 강력한 국가 가운데 가장 젊은 국가로 서게 했다”(Edward R. Dewey & Edwin F. Dakin, Cycles, New York, 1947)고 지적했을 만큼, 그러한 업적은 실질적이었다. 우리는 스탈린주의적 전체주의가 러시아의 새로운 활기를 어떻게 약하게 만들었는지를 알고 싶어 한다. 이와 관련해서, 달린(David J. Dallin)은 우리에게 하나의 지표를 준다. 1차 세계대전 동안, 러시아는 연합국의 30%에 맞먹는 주민을 잃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는 1,200~1,600명이나 연합국의 80%에 이르는 사람의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전장에서 붉은 군대는 침략국 병사들의 죽음보다 4배 많은 병사를 잃었다.

 

러시아혁명이 터졌을 때, 모든 혁명 정당이 이용할 수 있는 실질적으로 조직된 당원은 제국 주민의 1%도 못 되었다. 이러한 1% 가운데 볼셰비키는 오직 하나의 분파를 이루었다. 이러한 아주 적은 사람은 자신의 목적에 이바지했고 탈진해버렸다. 1917년 10월~11월 혁명은 젊은 사람의 당에 의해 인도되었다. 그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레닌은 47살이었다. 트로츠키는 38살, 부하린은 29살,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는 34살이었다. 10년에서 20년 뒤, 전체주의에 대한 저항은 나이 든 세대가 했다. 그리고 이 세대는 권력의 특권에 매수된 젊은 경찰-관료제의 무게에 굴복하지 않았지만, 대중의 수동성 때문에 무너지기 직전에 지쳐 떨어졌다. 대중은 테러주의 정권 때문에 영양 부족 상태에 있었고 불구가 되었으며, 선전에 취해 있었다. 게다가 나이 든 세대는 외부세계에서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했다. 그들이 소련 안에서 저항하고 있는 동안 전 세계의 반동 세력은 끊임없이 늘어나고 있었다. 위대한 민주주의자들은 히틀러와 무솔리니와 화해했거나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인민전선의 수명, 서구 노동계급의 후위 투쟁은 나치즘, 파시즘, 프랑코의 동맹을 통해 스페인에서 박살 났다. 바로 그 순간에 스탈린의 폭력배는 러시아에서 볼셰비즘을 청산하려고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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Ⅶ.

 

승리하여 의기양양한 첫 10년과 뒤이은 암흑의 10년 뒤에 우리가 러시아혁명에서 방어할 것은 무엇인가? 아주 중요한 역사적 경험, 아주 당당한 회고록 ―이것들은 이미 행운이 될 것이다. 그러나 볼셰비즘의 교의와 전술은 비판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나는 연구실이 현장에 대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생산 체제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가 저절로 나타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일 도덕적이고 정치적 방식으로 헤게모니의 포기를 뜻하는 게 아니라면. 나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다시 나타날 것이고 미래의 투쟁에서 확실하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틀림없이 미래에는 이런저런 종류의 혁명적 독재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이 경우에 노동자 운동의 역할이 이러한 정부의 민주적인 성격을 보증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프롤레타리아트 단독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노동자와 심지어 민족들을 위해서. 이런 뜻에서 프롤레타리아혁명은 더는 우리의 목적일 수 없다. 우리가 이바지하려고 기다리고 있는 혁명은 오직 사회주의적― 그 말의 인간주의적 뜻에서―, 또는 좀 더 정확히 민주주의적이고 자유의지적인 수단을 통한 사회화한(socializing) 것일 수 있다. 러시아의 국경을 넘어, 당에 대한 볼셰비키 이념은 완전히 실패했다. 다양한 이해관계와 심리적 배경은 불쌍한 부하린이 그렇게 당당하게 칭찬했던 이상에 헌신했던 동질적인 전투가 집단의 그룹화를 불가능하게 했다. 중앙집중주의, 규율, 그리고 지도된 이데올로기는 비록 우리가 조직적 틀이 필요로 하는 것이 나쁘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건강한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모든 이것에서 러시아인들이 지지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역사의 저항할 수 없는 아이러니를 통해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사슬 말고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누군가 달린과 보리스 니콜라예프스키(Boris I Nikolaevski)가 쓴 객관적이고 타협하지 않은 저작 『소련에서 강제노동』(Forced Labor in the Soviet Union)을 곧 프랑스어로 번역해주길 바란다. 그 책은 우리에게 1928년, 즉 소련의 테르미도르 동안 GPU 강제노동수용소에는 약 3,000이 못 되는 사람이 갇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오늘날 스탈린의 강제노동수용소에서 몇백만의 노예가 갇혔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가장 적절한 평가는 1,000 또는 1,200만 명이다. 즉 이들 저자에 따르면, 적어도 성인 남성 인구의 16%(그리고 아주 낮은 비율의 여성)이다. 최근에 『대중』(Masses)에서 나는 이러한 수치가 지닌 결정적인 중요성을 낮게 보았다. 주민의 15%에 달하는 사람들이 유럽인의 생활 수준과 같은 것을 누리는 특권을 지녔다고 보면서, 나는 ‘7% 특권 노동자, 15% 천민, 78%가 비참과 가난에 착취당한 사람들’이었음을 알았다. 사람들은 그러한 사회체제에 대해 뭐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방어할 가치가 있는가?

 

러시아의 국경을 넘어, 이러한 ‘강제 노동수용소 소우주’의 영향은 유럽에서 사회주의와 사회적 재조직화의 발전을 봉쇄하게 되었다. 따라서 비극은 러시아 하나에만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보편적이다. 이러한 과정의 논리적 결론은 제3차 세계대전일 것으로 보인다. 다른 가능성이 가까워 있는 한, 우리는 체념하고 재앙적 결과에 맡겨서는 안 된다. 국제 사건에서 스탈린주의 정권의 공격성은 내부 상황의 중력을 통해 결정된다. 이러한 정권에 맞서 러시아와 비(非)러시아 대중이 반란을 일으킬 잠재적 경향은 공격(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소련 침공-옮긴이)이 시작될 때 그들의 패배주의와 그들이 침략자(독일군-옮긴이)를 해방자로 환영했던 방법을 통해 입증되었다. 그것은 또한 승리에 뒤따랐던 ‘곤경’, 그리고 블라소프(Vlasov) 군대의 운동을 통해 입증되었다. 그것은 독일군의 포로가 된 2~3십만 명을 통해, 그리고 강제노동수용소가 꽉 들어찬 것을 통해 입증되었다. 나는 전체주의 정권이 반란의 훌륭한 공장이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것은 러시아 사람들이 지닌 혁명적 전통 때문에 훨씬 더 그럴 것이다.

 

러시아 대중의 사기에 대한 문서자료는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정권의 철의 장악 속에서, 누군가 러시아를 알고 있는 사람을 알고 있듯이, 여전히 중요한 생명력(활기)이 있다. 일하고 건설하고 발명하고 관리하는 사람의 9/10는 비록 그들의 사슬이 부서졌지만, 노동자 민주주의에서 적극적인 시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전쟁을 막으려고 사회주의 러시아를 위해 제때 그들의 사슬을 부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스탈린주의 정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회주의에 대한 공포와 혐오감을 지닌 억압받는 대중을 얼마나 설득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반동의 강력한 세력은 러시아에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리고 심지어 비(非)러시아 사람들 사이에서 훨씬 더 쉽게 반동 세력이 나타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오랫동안 범이슬람주의의 영향에 배여 있었던 중앙아시아 무슬림들 사이에서. 그런데도 나는 억압이 가장 잔인하게 이루어지고 있던 시기 동안 소련에서 실행한 나의 관찰을 바탕으로 삼아 커다란 다수가 틀림없이 공식 사회주의(official socialism)의 사기 행각을 알고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구체제로 돌아가는 것도 심지어 자본주의로 돌아가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러시아에서 일어난 국가가 통제한 생산으로 인한 발전이 아주 높은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유럽 전체에서 국유화와 계획화 바람이 일어났다) 진짜 러시아 민주주의는 생산자의 이익에서 사회화된 생산을 재조직하는 데서 건강과 효율성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생산의 기술적 명령은 사회정의에 대한 열망과 공동체의 이익에 따라 경제를 또다시 세울 수 있는 새로 발견된 자유와 결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현실적이고 깊이 느낀 희망이 우리에게 남아 있기에, 우리는 모든 것을 잃지 않았다.

 

 

멕시코,

1947년 7~8월

빅토르 세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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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el Bolsey가 불어본을 영어로 옮기다.

 

<한국어 출처> 「실천」 2007년 10월호

 

 

 

<이전 글>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40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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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3호] 30년 뒤, 러시아혁명이 품은 이상과 현실(Ⅰ~Ⅳ)

30년 뒤, 러시아혁명이 품은 이상과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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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우리가 여행하려고 하는 지난 30년은 얼마나 끔찍한 길이 될까. 우리 시대에서 가장 커다란 사건, 가장 많은 희망을 안겨준 사건은 우리에게 달린 듯 보인다. 이제 1917년을 휩쓸었던 잊지 못할 열광주의가 남긴 것은 무엇인가. 코뮤니스트 활동가의 첫 성원이었던 우리 세대의 많은 사람에게 남아 있는 것은 러시아혁명에 대한 비참함뿐이다. 혁명에 가담했던 사람과 목격자 가운데 그 누구도 거의 살아남지 못했다. 레닌과 트로츠키가 만든 당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총살당했다. 문서는 모조리 파괴되었거나, 감춰졌거나 혹은 왜곡되었다. 많은 사람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혁명에 늘 반대했던 망명자뿐이다. 그들은 책을 썼고, 가르쳤으며, 여전히 보수주의의 강력한 세력의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지구적 봉기 시기에 그 세력은 모든 진실한 객관성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스탈린주의 러시아에 대한 어두운 광경에 비난의 칼날을 들이댄 이름뿐인 볼품없는 논리는 볼셰비즘 실패와 더 나아가 맑스주의와 사회주의 실패를 입증하려고 시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얕은 술수는 세계를 감싸고 있는 모든 문제에 부닥쳐서 쉽게 이어졌고 내다볼 수 있는 미래에 자신의 지배력을 느슨하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 당신은 다른 실패를 잊고 있는가? 사회 재앙의 시기 동안 기독교는 어디에 있었는가? 자유주의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계몽의 형태이거나 반동의 형식이거나 보수주의가 낳았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에게 무솔리니, 히틀러, 살라자르, 그리고 프랑코를 주지 않았던가? 만일 그것이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의 많은 실패를 솔직하게 생각하는 문제라면, 우리는 오랫동안 막혀 있던 우리의 작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끝난 게 아니다.

 

모든 사건은 한정적이고 이행기적이다. 흔히 잊히곤 하지만, 모든 사건은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된 시대적 맥락에서 발전한다. 러시아혁명에 대한 견해를 세우기 전에, 프랑스혁명에 대한 견해와 전망에서 생긴 많은 변화를 회상해보자. 칸트가 바스티유가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열광했던 모습, 테러, 테르미도르, 집정부, 나폴레옹. 1789년과 1802년 사이에 자유와 우애, 평등의 공화국은 완전히 선회했고 그 자신의 기원을 부정한 모습을 드러냈다. 새로운 질서의 창조자인 나폴레옹의 정복은 히틀러가 만들어낸 것과 비슷하다는 점 때문에 두드러진 것이다. 황제는 괴물이 되었다. 문명화된 세계는 그에 맞서 힘을 합했다. 그리고 신성 동맹은 유럽 전체에서 낡은 정권을 다시 세우려고 싸웠다. 그런데도 우리는 부르주아지에 권력을 안겨 준 프랑스혁명, 공업의 정신, 과학적 문의는 19세기를 실제로 살찌우게 했다는 것을 이제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사건이 터지고 난 뒤 30년째, 즉 1819년, 루이 18세와 차르 알렉산드르가 지배하던 시기는 역사에서 가장 비싼 대가를 치른 실수로 생각되지 않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길로틴에서 죽었고, 수많은 전쟁과 투쟁이 어떻게 군주제를 가증스럽게 복구시켰는가.

 

Ⅱ.

 

역사 왜곡은 으레 그때의 질서로 될 수밖에 없었다. 부정확한 과학 사이에서, 역사는 물질적이고 심리적으로 대부분의 관심을 위협한 오직 하나의 것이다. 비록 사실이 쉽게 이용될 수 있지만, 러시아혁명에 대한 신화, 실수, 목적이 있는 해석은 난무했다. 틀림없이 먼저 자신을 알리지 않고 말하고 쓰는 것은 훨씬 더 단순하고 매력적이다.

 

“1917년 10월과 11월에 볼셰비키가 일으켰던 폭력적인 쿠데타가 민주주의의 싹을 뽑아버렸다”라는 주장이 있다. 그 어떤 것도 사실과 아주 다르다. 그 어떤 공화국도 러시아에서 선언되지 않았고 소비에트와 노동자ㆍ농민ㆍ병사 위원회 말고 그 어떤 단일한 민주주의 제도도 없었다. 케렌스키가 이끈 임시정부는 농업 개혁을 거부했고, 대중이 요구했던 평화 협상을 여는 것을 거부했으며, 반동 세력에 맞서 효율적 조치를 거부했다. 이행기적이고 단명한 국가는 두 개의 커다랗고 앞서 나아가고 있는 집단, 즉 장군들의 집단과 혁명적 대중 집단 사이에 끼어있었다. 그 어떤 것도 사회주의적 경향을 띤 민주주의 발전을 지시하지 않았다. 1917년 9월쯤에 오직 하나의 대안은 반동적 장군들의 독재냐 또는 소비에트 독재냐였다. 그러한 쟁점에 서로 반대되는 쪽에 있는 두 역사가, 트로츠키와 우익-자유주의적 정치가인 밀류코프는 이 문제에 똑똑히 동의했다. 소비에트 또는 볼셰비키 혁명은 전제정이 무너지고 난 뒤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와 기회주의적인 사회주의 정당이 이끌었던 불안전하고 비효율적인 온건 민주주의 혁명이 실패한 결과였다.

 

또한, 11월 7일(옛 달력에 따르면 10월 25일)의 봉기가 한 줌 밖에 안되는 음모가, 즉 볼셰비키당 작품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것보다 실제 사실에 훨씬 더 모순되는 것은 없다. 1917년은 대중 행동의 시기였다. 그러한 행동은 변화, 다양성, 힘에서, 그리고 갈증을 느낀 대중의 주도가 뚜렷이 볼셰비즘 쪽으로 나아갔던 끈기에서 놀라웠다. 농민 소요는 러시아 전체로 퍼졌다. 군인들 사이에 있는 낡은 규율은 폭넓은 반항으로 무너져 버렸다. 크론슈타트와 발트 함대는 임시정부에 대한 복종을 딱 잘라 거부했다. 트로츠키만이 해군 기지에서 일어난 무장 갈등을 소비에트와 만나 막을 수 있었다. 투르게스탄에서 타쉬겐트 소비에트는 그 자신의 이름으로 권력을 잡았다. 케렌스키는 칼루가 소비에트를 그의 포병으로 위협하고 있었고 볼가에서 50만 병사가 케렌스키의 명령을 거부했다.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 주변 지역에서, 노동자 적위대가 세워졌다. 페트로그라드 요새는 소비에트의 권위로 자신을 위치 지었다. 소비에트 사이에서, 다수파는 평화적이고 합법적으로 온건한 사회주의자와 볼셰비키의 손아귀로 넘어갔다. 온건한 사회주의자는 케렌스키에게 등을 돌렸다. 페트로그라드에서 봉기가 열광주의의 커다란 물결 속에서 거의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성공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 존 리드와 자크 사둘이 쓴 책을 다시 읽어보자. 그 사람 모두 그 열광주의의 장면을 목격한 사람 아닌가! 그렇다, 볼셰비키 ‘음모’라고 하는 것은 대중적 정서의 커다랗게 떠오르는 물결에 의해 권력을 실행했다.

 

제국이 페트로그라드 교외 무장되지 않은 주민의 압력 아래 1917년 2~3월에 무너졌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가치 있다. 요새의 군대와 시위하고 있는 노동자 사이에 자발적인 친교는 전제정의 운명을 정해버렸다. 나중에 이러한 친교를 부추겼던 잘 알려지지 않은 개인들을 동질화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몇몇은 이름이 있었지만, 다수는 이름 없는 상태로 남았다. 모든 혁명정당의 지도자와 가장 능력 있는 전투가는 그 순간에 감옥에 있거나, 또는 외국에 있었다. 페트로그라드에서 활동한 소규모 집단은 볼셰비키가 노동자를 공장으로 복귀하라는 호소를 내걸려 계획했던 사건 전환 때문에 얼마나 놀랐는가! 4개월 뒤,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와 온건한 사회주의자들이 잡고 있는 연립 정부의 경험은 7월 초에 요새와 교외 주민이 소비에트로 권력 이전을 요구하는 슬로건을 들고 일어난 커다란 시위를 조직했던 깊은 분노를 낳았다. 볼셰비키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자가 이끌었던 이러한 조치를 받아들였고 고통스럽고 위험한 결론으로 끝난 시위에 마음 내키지 않았지만 결합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나라의 나머지가 수도에서 일어난 사건을 절대 따르지 않을 것을 느꼈다. 으레 그들은 희생양이 되었다. 그들은 중상(“독일 간첩”)과 박해를 받았다. 그들은 압박당했다. 그 순간부터 볼셰비키는 만일 그들이 이러한 대중 운동을 장악하지 못한다면, 장군들은 힘으로 권력을 잡는 데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917년 9월에 코르닐로프 장군은 케렌스키 정부에 있는 공개적인 공범과 함께 전투에 들어섰다. 레닌과 지노비예프는 잠적했고, 트로츠키는 감옥에 갇혔고, 볼셰비키는 지하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코르닐로프 군대는 철도 노동자와 다른 전투적 노동자와 접촉 결과로 저절로 흩어졌다.

 

전제정의 문관은 또렷이 다가올 혁명을 보았다. 그들은 그것을 막을 수단을 지니지 않았다. 혁명정당은 혁명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은 혁명할 수도 없었고 혁명을 불러일으킬 수도 없었다. 사건이 그러한 과정을 밟았고 봉기가 그들에게 다가왔을 때, 누구에게든 남겨진 것은 의지와 비전을 갖고 참여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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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볼셰비키는 권력을 잡았다. 혁명정당 사이에서 일어났던 자연도태의 과정에서 볼셰비키가 힘을 모은 대중의 열망을 일관되고 현명하게, 그리고 결정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에 가장 정통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권력을 장악했고 내전에서 이겼다. 왜냐하면, 많은 주저와 갈등이 있었지만, 대중은 발트해에서 태평양 연안까지 볼셰비키를 편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커다란 역사적 사실은 러시아에 있는 많은 볼셰비즘의 적이 받아들였다. 망명한 자유주의 출판업자인 헬레나 쿠스코바(Helena Kuskova)는 얼마 전에 이렇게 썼다. “사람들이 백군도 ……제헌의회를 위한 투쟁도 밀지 않았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백군은 군주제적 반혁명, 입헌주의, 민주적인 반-볼셰비즘을 대변했다. 그러므로 1920~1921년에 내전이 끝날 때까지, 러시아혁명은 볼셰비키가 지도자와 중견 요원의 형식으로 두뇌와 신경 조직을 제공했던 커다란 대중 운동의 양상을 띠었다.

 

볼셰비키가 지닌 직접적인 목표가 국가권력을 독점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것도 또 다른 신화이다! 사실 그들은 권력이 고립될 수 있다는 위험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은 일찍이 연립 사회주의 정권의 수립을 열렬히 지지한 사람들이었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원칙적으로는 온건 사회주의정당과 연립을 거절했다. 왜냐하면, 온건 사회주의정당은 3월 혁명(옮긴이: 2월 혁명)을 실패로 이끌었고 소비에트를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그러나 볼셰비키당은 전반적으로 맑스주의에 적대적인 이상주의자이자 지식인이 이끈 농촌을 바탕으로 삼은 사회혁명당 좌파의 협력을 구했고 얻었다. 1917년 11월에서 1918년 7월 6일까지, 사회혁명당 좌파는 정부에 참여했다. 그들은 볼셰비키 가운데 잘 알려진 몇몇 사람들(1/3)처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918년 7월 6일에 그들은 볼셰비키가 ‘혼자서 통치하려는’ 의도를 지녔고 ‘독일 제국주의에 맞서 전쟁을 다시 해야’ 한다고 선언하면서 모스크바에서 폭동에 가까운 반란을 시작했다. 그때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던 그들의 성명서는 혼자서 통치하려는 의도를 지닌 어떤 당이 한 첫 선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패배했고 볼셰비키가 혼자서 통치하도록 남겨 놓았다. 그 순간부터 볼셰비키의 책임은 늘어났고 그들의 정서는 바뀌었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다수파(볼셰비키)와 소수파(멘셰비키)로 분열되기 전에 그들은 다른 러시아 혁명정당과 바탕부터 달랐는가? 볼셰비키가 권위주의적 특성, 수단의 선택에서 편협성과 비도덕성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관료주의적 국가주의의 싹을 포함하고 있는 중앙집중화되고 아주 규율적인 조직, 독재적이고 비인간적인 특성. 잘난 체하는 작가와 뭘 모르고 떠드는 작가는 이와 관련해서 레닌의 ‘비도덕주의’, 즉 그의 ‘프롤레타리아적 자코뱅주의’와 ‘직업적 혁명주의’를 인용하는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다.

 

1870~80년부터 모든 러시아 혁명정당은 그들이 처한 조건에서 비합법적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고, 이런 비합법적 활동 때문에 실제로 권위주의적이고 아주 중앙집중화되었고 규율에 의존했다. 모든 사람은 ‘직업적 혁명가’로 훈련받았다. 다시 말해 그들은 자신의 삶을 투쟁에 모두 바친 사람이었다. 모든 사람은 그때 감히 ‘실천적’ 비도덕성을 지닌 유형의 사람이 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게다가 비록 우리가 그들을 열렬하고 이타적인 이상주의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 것이 공평하긴 했지만. 프롤레타리아트이든 아니든 간에 거의 모든 사람은 자코뱅적 정서가 있었다. 모든 것은 영웅과 광신자를 낳았다. 멘셰비키를 빼고 모든 사람은 독재를 열망했고 그루지야 멘셰비키도 빈번히 독재의 방법을 이용했다. 모든 커다란 정당은 그들의 구조상 그들 자신에게 할당한 목표 때문에 ‘국가주의적’이었다. 실제로 그들이 지닌 교의에서 중요한 차이가 있지만, 거기에는 하나의 혁명적 정서가 있었다.

 

우리는 아나키스트 바쿠닌이 지닌 권위주의 정서와 그가 제1 인터내셔널에 쓴 비밀 조직 방법을 잊었는가? 그가 쓴 『고백』에서 바쿠닌은 계몽된 독재를 두둔했다. 그러나 그가 사람들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독재를 썼다는 점은 매정한 것이다. 공화주의 이상을 지니고 있고 사회주의자들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었던 사회혁명당은 아주 중앙 집중적이고 규율 잡혔고 권위주의적 ‘기구’를 발전시켰다. 그 기구는 테러주의적으로 독재와 싸울 것을 목표로 했다. 바로 그것은 경찰이 도발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이 되기도 했다. 전체로서 러시아 사회-민주 세력은 국가권력에 대한 정복을 목표로 했다. 그 누구도 그들의 지도자인 플레하노프보다 훨씬 더 ‘자코뱅’적 말로 다가올 혁명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지배 세력이었던 케렌스키 정부는 사실 비효율적이긴 했지만, 독재적 색채를 띠었다. 네스토르 마흐노의 검은 군대가 점령했던 지역에서 아나키스트들조차도 몰수, 징발, 체포, 처형을 갖춘 진짜 독재를 실행했다. 그리고 마흐노는 그 독재의 ‘두목’이자 ‘대부’ 또는 ‘주인’이었다.

 

단과 체레텔리 같은 멘셰비키 우파도 권위주의의 통치를 바랐다. 체레텔리는 더 늦기 전에 볼셰비즘을 탄압할 것을 편들었다. 마르토프 같은 멘셰비키 좌파는 아마 민주주의 혁명 이상을 진지하게 붙잡았던 하나의 그룹이었을 것이다.

 

볼셰비즘이 갖는 뚜렷한 특성은 공동의 견해를 함께 지닌 그들의 경쟁 정당에 대한 타고난 우위였다. 그 특성은 맑스주의 신념, 혁명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 교의, 고집스러운 국제주의, 사상과 행동의 통일이었다. 많은 개인 속에 이러한 사상과 행동의 통일은 그들 자신의 견해에 대한 강력한 신념과 함께 있었다.

 

1917년 맑스주의의 이상주의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느 정도 지나치게 단순한 것으로 보인다. 세계는 달라졌고 사회 투쟁은 그들이 그때로 돌아와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게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혁명 동안 역사적ㆍ경제적 현실에 대한 강한 인식에 중점을 두었던 이러한 이상주의는 그때와 환경에 적합했다. 그것은 그때의 자유주의적 표현, 이중거래, 자기 강화하는 미루는 짓, 책임성의 포기에 대한 해결방법을 포함한 것이었다. 온건 사회주의자들은 나라가 자본주의로 나아갈 수 있게 한 “부르주아혁명”을 진행하고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치 구조의 발전으로 반드시 이끌게 된다. 볼셰비키는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이러한 ‘부르주아’혁명을 해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사회주의가 그런 뒤떨어진 무대에서 일어날 수 없지만, 사회주의 발전의 길에 들어선 러시아가 궁극적으로 유럽 노동계급을 위한 본보기가 될 것이라 믿었다. 1917년에 레닌은 모든 생산 수단에 대한 국유화를 계획하지 않았으나 그 대신 생산에 대한 노동자통제를 마음에 그리고 있었다. 나중에 레닌은 자본주의와 국가 통제로 이루어진 혼합 체제에 관한 생각으로 돌아섰다. 1918년 7월에 비로소 내전의 발발은 수세적 필요로서 완전한 국유화를 강제하게 되었다. 볼셰비키가 지닌 타협하지 않은 국제주의는 러시아에서 혁명보다 훨씬 더 발전되고 훨씬 더 기름진 것으로 될 다가올 유럽 혁명에 대한 그들의 믿음에 의존했다. 앞날에 대한 이런 비전은 그들의 것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유럽 사회주의가 함께 지닌 토대의 일부였다. 비록 실제로 거대 정당이 전체 혁명이라고 하는 이러한 구상을 이미 포기해버렸지만. 맑스의 독일 후계자인 칼 카우츠키는 1908년까지 이러한 혁명의 주요 이론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로자 룩셈부르크, 프란츠 메링, 칼 리프크네히트 모두는 같은 믿음을 지녔다. 볼셰비키가 다른 사회주의자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점은 혁명적 인텔리겐치아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발전했던 특수한 환경 때문에 생긴 심리적인 것으로 보였다. 차르 제국에는 의회주의적 기회주의와 일상적 타협이 자리할 공간이 없었다. 잔인하고 단순한 사회적 현실은 적극적이기도 하고 아울러 전체적이기도 한 신념을 생기게 했다. 이 점에서 볼셰비키는 좀 더 러시아적이었고 혁명적 사회주의자나 멘셰비키보다 러시아 대중의 기질에 훨씬 더 잘 어울렸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나 멘셰비키는 발전된 자본주의 나라의 뜻에서 서구적이고, 진화론적 정서, 민주주의적인 특성을 몸에 익힌 당원을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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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이제 잘못과 실수라는 다른 문제로 넘어가 보자. 이런 짧은 연구에서 볼셰비키-사회주의 혁명에 대항해 싸웠던 권력과 정당이 저지른 결점, 잘못, 범죄를 똑같이 헤아릴 수 없다는 사실이 참으로 유감스럽다. 그와 같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맥락이 빠진 가운데, 우리는 일방적인 견해와 똑똑히 싸워야 할 것이다.

 

1939년에 나는 파리에서 펴낸 『스탈린 초상』(Portrait de Staline)에서 이렇게 썼다. “……정확히 그들의 역사에 대한 인식 때문에 사회주의자(볼셰비키)가 저질렀다는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잘못은 반혁명, 투기, 간첩 활동, 의무 불이행에 대한 탄압을 위한 비상 위원회의 창설이었다. 나중에 그 위원회는 ‘체카’로 짧게 줄여 불렸다. 그 위원회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즉 적어도 방어할 여지도 없는 피의자, 단순한 수상쩍은 사람에게 판결을 내렸다. 그들은 비밀리에 선고를 받았고 비밀리에 처형되었다. 심문이 아니라면, 이것은 무엇이었는가? 틀림없이 포위 상태는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고 처참한 내전은 예외적인 조치를 강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사회주의자는 공개 재판이 독단적이고 부패한 행동에 맞선 하나의 보증임을 잊었다. 어떻게 푸키에탕빌(Fouquier-Tinville)이 쓴 임시변통 수단보다 훨씬 더 처진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이것은 틀림없이 실수이고 비난받아야 한다. 그 탓에 소름 끼치는 결과가 나왔다. 체카의 훨씬 더 힘 있는 계승자인 GPU도 볼셰비키에서 모든 혁명 세대를 뿌리 뽑았다. 어쨌든 사회학자의 눈으로 볼 때 그러한 환경은 실질적인 중요성을 띠었다. 젊은 공화국은 치명적인 곤경에서 살았다. 크라스노프와 코르닐로프와 같은 장군에 대한 공화국의 관대함은 피의 강으로 물들이게 하는 희생을 치렀다. 옛 정권은 또다시 테러의 이용에 호소했다. 1917년 11월에 백군은 크렘린 병기고 노동자를 대량 학살함으로써 내전에서 테러를 이용하는 주도권을 잡았다. 1918년 첫 몇 개월 동안 핀란드 반혁명세력은 러시아에서 ‘적색 테러’가 선언되기 전에 테러를 이용했다. 1848년 6월의 날들에서 시작한 19세기 사회 전쟁과 1871년 파리코뮨은 정복당한 프롤레타리아계급을 대규모로 없애버렸다는 것으로 특징지어졌다. 러시아 혁명가들은 자신들이 졌을 때 그들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그런데도 체카는 처음부터 1918년 여름까지 상대적으로 너그러웠다. 반혁명 봉기가 터진 뒤, 볼셰비키 볼로다르스키와 우리츠키가 암살당하고 난 뒤, 그리고 레닌을 암살하려는 두 번의 시도가 있고 나서, 체카가 ‘적색 테러’를 시작하고 인질과 수상쩍은 사람들, 적들을 총살하기 시작하자, 그것은 대중의 분노를 통제하고 다른 데로 돌리는 수단이 되었다. 제르진스키는 지역 체카의 지나침에 대해 걱정했다. 체키스트 자체의 통계는 이러한 공세가 매우 교훈적일 것으로 어림짐작한 것이다. 최근에 나는 이 주제에 관한 작은 책, 사회혁명당 좌파인 스타인베르그가 쓴 『어느 인민위원의 회고』를 다시 펴 보았다. 그 책에서 나는 두 개의 의미 있는 이야기가 자세히 서술되어 있음을 알았다. 1917년 말에, 총알 두 발이 레닌에게 발사되었다. 레닌을 암살하려 한 것이다. 이 일이 일어난 뒤, 노동자 대표가 레닌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반혁명가들이 당신의 피 한 방울을 흘리게 한다면, 페트로그라드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백배로 보복할 것이다. 스타인베르그는 이 구상(암살)에 따라 레닌을 어떻게 없앨 것인지를 꼼꼼히 적었다. 비극적 결과를 막으려고 사건은 특별히 비밀에 부쳤다. 나는 다른 자료를 통해 총을 쏘았던 두 명의 사회혁명당원이 체포되었지만, 곧 풀려났다는 것을 알았다. 나중에 그들은 볼셰비키 지지자가 되었다. 두 명의 자유주의자인 전직 장관, 쉰가레프와 코코쉬킨은 감옥에 있는 동안 병을 앓았다. 그들을 병원으로 옮기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병원에서 그들은 자신의 침대에서 암살당했다. 레닌이 그 범죄에 대해 들었을 때, 그는 아주 충격을 받았다. 정부가 조사를 지시했고, 범인은 많은 동지의 지지를 받고 보호를 받았던 혁명적 수병이었음이 발견되었다. 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려는 생각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수병들은 테러리즘의 행동에 대해 스스로 행동을 취했다. 사실 함대의 병사들은 암살자를 넘겨주길 거부했고 인민위원은 사건 전체를 ‘잊어버리’라는 강요를 받았다. 수병의 지지가 혁명에 아주 중요한 문제였을 때에, 그들은 자발적인 테러리즘 행동을 둘러싸고 갈등을 일으킬 수 있었겠는가?

 

1920년에 중요한 처벌은 러시아에서 폐지되었다. 그것은 내전이 거의 끝났다는 것을 알리는 조짐이었다. 나는 당내 모든 사람이 정권의 정상화, 포위 상태 종식, 소비에트 민주주의로 선회, 폐지가 아니지만 체카 권력에 대한 제한을 바랐다는 것을 느꼈다. 이 모든 것은 가능했다. 그리고 그것은 혁명 그 자체가 안전하게 보호될 수 있다는 것을 뜻했다. 피폐화된 나라는 재건을 시작하기만을 바랐다. 그 나라는 여전히 신념과 열광의 커다란 저수지였다. 1920년 여름은 혁명의 역사에서 중대한 순간이었다. 모든 러시아 사람이 상황이 평화스러워지길 바랐던 때에, 필수드스키는 폴란드 군대를 우크라이나에 맞선 전장으로 몰아넣었다. 틀림없이 정복에 대한 열망 때문에 빚어진 이러한 공격은 영국과 프랑스가 크림 지방을 점령하고 있던 브랑겔 장군을 승인했던 것과 일치했다. 그것이 혁명에 끼친 나쁜 영향은 즉시 나타났다. 폴란드를 패배시킨 중앙위원회는 폴란드에서 소비에트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고 믿었다. 레닌의 이러한 계획은 바르샤바 문 앞에서 붉은 군대가 패배함으로써 실패했다. 훨씬 더 나쁜 것은 고통스럽고 피로 더럽혀진 전쟁이 끝났음에도 나라가 황폐해졌고 파괴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거기에는 더는 주요 처벌을 폐지하거나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밑바탕으로 삼아 국가를 다시 세우는 일을 시작하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비참과 위험은 주민을 참을 수 없게 하는 경제체제에서 당-국가를 불구로 만들었고 그것으로 ‘전시 코뮤니즘’(War Communism)라고 하는 체제 운명이 정해졌다.

 

1921년 초에 크론슈타트 수병 봉기는 정확히 이러한 경제체제와 당 독재에 대항한 저항이었다. 봉기가 지닌 실질적 의도가 무엇이든지 간에, 당은 굶주린 국가를 통치할 수 없었고 그것의 인기를 지탱할 수 없었다. 대중의 자발적인 열광은 사라져 버렸다. 희생과 결핍은 혁명 안에서 여전히 적극적인 소수를 지치게 만들고 있었다. 지독히 추운 겨울, 불충분한 배급, 전염병, 농촌에 대한 끊임없는 징발 등 이 모든 것은 곳곳에 비참함, 일종의 절망, 빵과 반(反)혁명 사이 이데올로기의 혼동을 퍼트렸다. 이런 상황에서 볼셰비키가 권력을 고삐를 놓아버린다면, 그들의 자리를 누가 차지할 것인가? 볼셰비키가 자신의 의무를 계속하지 않았다면? 사실 그들이 계속하는 것이 옳았다. 그들의 잘못은 크론슈타트 반란에 부딪혀 제정신을 잃었던 것이었다. 볼셰비키는 페트로그라드에 있었던 우리가 잘 알았듯이 크론슈타트 반란을 갖가지 방식으로 다룰 수 있었다.

 

권력의 잘못과 실수는 1921년 크론슈타트와 모두 연결되어 있었다. 수병들은 칼리닌이 냉정하게 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반란을 일으켰다. 설득과 이해가 필요했던 곳에,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의장은 위협과 모욕을 썼을 뿐이었다. 형제로 받아들이는 대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로 간 크론슈타트 대표들은 체카에 의해 모두 체포되었다. 갈등에 대한 진실은 당과 나라 전체에서 언론을 통해 숨겨졌다. 크론슈타트를 책임지고 있던 백군 장군 코즐로프스키가 말했듯이, 그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미국 아나키스트인 엠마 골드만과 알렉산더 버크만이 선의에서 한 중재 시도는 거절당했다. 그 대신 대포가 동포들끼리 전투에 쓰였다. 체카는 나중에 죄수를 쏘았다. 만일 트로츠키가 말했듯이, 수병이 1918년 이래 바뀌었고 이제 후진적인 농민층의 열망 말고는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았다면, 지배집단도 바뀌었다고 말해야 한다.

 

‘전시 코뮤니즘’의 폐지와 ‘신경제정책(NEP)’의 시작을 알리면서, 레닌은 전투와 대량학살이 끝난 뒤 크론슈타트 반란자가 내건 경제적 요구를 만족시켰다. 그럼으로써 그는 정권, 그리고 그 자신이 지킬 수 없는 처지에 빠졌음을 인정했다. 신경제정책이 실시되자 농촌에서 징발이 폐지되었다. 그 대신 일종의 현물세가 들어섰다. 그것은 상업과 소규모 기업의 자유를 다시 세웠다. 다른 말로 하면, 신경제정책은 생산과 교환에 대한 완전한 국가 통제를 통해 나라 전체에 대한 지배력을 누그러뜨렸다. 그와 함께, 인내와 화해를 통해 소비에트 헌법의 권위를 받아들이기로 했던 다른 사회주의자와 자유의지적 요소에 대한 정부 정책을 자유화하는 것도 정상으로 되었다. 라파엘 아브라모비치는 올바르게 1921년에 이러한 노선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볼셰비키를 꾸짖었다. 그 대신 중앙위원회는 멘셰비키와 아나키스트를 불법화했다. 연립 정부가 이때 세워졌다면, 그것은 확실한 위험을 국제화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잘 입증되었다. 그들은 결코 이러한 권력 독점을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사실 당과 노동계급 안에서 불만이 퍼지자, 중앙위원회는 그 순간부터 포위 상태임을 어쩔 수 없이 선언했다. 이러한 포위 상태가 당 그 자체에 미친 영향은 너그러웠던 점은 사실이다. 그러나 노동계급 반대파는 비난당했고 숙청당했으며 추방당했다.   <계속>

 

 

멕시코,

1947년 7~8월

빅토르 세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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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el Bolsey가 불어본을 영어로 옮기다.

 

<한국어 출처> 「실천」 2007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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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2호] 1940년, 레온 트로츠키 암살 - 우리가 잊지 못하는 날

1940년: 레온 트로츠키 암살 - 우리가 잊지 못하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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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아래의 추모글과 연대기는 트로츠키 암살 80주년인 작년(2020년)에 작성되었으며, 트로츠키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코뮤니스트 좌파의 입장글로  "트로츠키를 인간으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트로츠키와 노동자 운동 모두를 둘러싼 주요 역사적 사건들을 이해할 필요를 인식하기 위해" 쓴 글임을 밝혀둔다. 

 

 

지금으로부터 80년 전인 1940년 8월 21일 저녁 7시 25분, 붉은 군대의 영웅적 조직자이자 코뮤니스트 혁명의 열렬한 설교자였던 레온 트로츠키가 멕시코시티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

 

그가 죽기 26시간 전, 스탈린주의자 게페우(GPU, 국가정치보안부) 요원 암살자가 레닌의 오랜 동지를 도끼로 내리쳐서 두개골을 박살 냈다.

 

그의 부인이자 신실한 동지였던 나탈리아 세도바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의 머리맡에서 밤을 새웠다. 그가 다시 살아나기를 기다렸다. 그의 눈은 감겨 있었고 때로는 호흡이 곤란할 때도 있었고, 때로는 부드러웠다. 그날 밤과 그다음 날은 이렇게 지나갔다. 저녁 무렵, 두개골 절개수술이 끝난 후 의사들은 호전되는 것에 주목했다. 그러다가 그의 호흡이 짧아지고 거칠어졌다 … 나는 모든 희망을 걸고 기원했다 … 나는 지쳐서 의자에 쓰러졌다. 나의 예감이, 어쩌면 움직임이 나를 깨웠다. 나는 내 앞에서 흰 코트를 입은 두 명의 의사를 보았다. 나는 이해했다. 레온 다비도비치는 조금 전에 평화롭게 잠들었다. 그는 60세였다.”

 

그에 관한 우리의 입장은, 트로츠키가 1920년대 이후 러시아 안팎에서 혁명의 패배에 직면했을 때 보여준 이론적-정치적 접근 방식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우리는 트로츠키에 대한 보다 광범위한 분석을 위해 조만간 팸플릿(트로츠키, 트로츠키주의, 트로츠키주의자)을 증보판으로 발행할 예정이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저지른 심각하고 때로는 매우 심각한 오류에도(그의 추종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는 그가 암살당하기 6개월 전인 1940년 2월 27일에 썼던 짧은 쪽지 글로 그를 기억하고 싶다. 우리는 자본주의 세상과는 다른,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흔들리지 않는 희망과 끊임없는 투쟁을 그와 함께 공유한다.

 

“의식을 깨친 이래 43년의 생애를 나는 혁명가로 살아왔다. 특히 그중 42년 동안은 맑스주의 기치 아래 투쟁해 왔다. 내가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만 있다면 이런저런 실수를 피하려고 노력할 것은 물론이지만, 내 인생의 큰 줄기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요, 맑스주의자이며, 변증법적 유물론자다. 결국, 나는 화해할 수 없는 무신론자로 죽을 것이다.

 

인류의 코뮤니스트 미래에 대한 내 신념은 조금도 식지 않았으며, 오히려 오늘날 그것은 내 젊은 시절보다 더욱 확고해졌다. 방금 나타샤가 마당을 질러와 창문을 활짝 열어주었기에, 공기가 훨씬 자유롭게 내 방안에 들어오게 됐다. 벽 아래로 빛나는 연초록 잔디밭과 벽 위로는 투명하게 푸른 하늘, 그리고 모든 것을 비추는 햇살이 보인다.

 

인생은 아름다워라!

훗날의 세대들이 모든 악과 억압과 폭력에서 벗어나 삶을 마음껏 향유하게 하자!“

(1940년 2월 27일 , 멕시코 코요아칸에서, 레온 트로츠키)

 

 

2020년 8월 21일

국제코뮤니스트경향(I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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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와 트로츠키주의 : 연대기 (1879-1943)

 

우리의 팸플릿(『트로츠키, 트로츠키주의, 트로츠키주의자』)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방식은 트로츠키를 인간으로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단순히 대인 논증(對人 論證)이 혁명적 역사를 이해하는 방식에 소용없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는 역사는 영웅의 역사라는 부르주아 역사관을 절대 거부하기 때문이다. 트로츠키의 삶(그리고 사실 레닌의 삶)은 개인이 물질적 환경을 넘어설 수 없음을 보여주는 적절한 증거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밝힌 경우는 트로츠키와 노동자 운동 모두를 둘러싼 주요 역사적 사건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 연대기 개요는 우리 논의의 맥락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 1879년 10월 26일. 레브 다비노비치 브론슈타인(Lev Davidovich Bronstein), 안나와 다비드 레온테비치 브론슈타인의 다섯째 아들로 남우크라이나 Yanovka에서 태어났다.

 

 1881년. 러시아 농민 미르를 사회적 단위로 선택한다면 서구 노선을 따르는 산업혁명을 피할 수 있다고 믿는 인민주의자에 의해 차르 알렉산더 2세가 살해됨. 인민주의는 이 시기 러시아 지식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정치적 운동이 된다.

 

 1883년. 플레하노프(George Plekhanov)와 자술리치(Vera Zazulich)와 악셀로드(Pavel Axelrod)는 노동해방(Emancipation of Labour) 그룹인 첫 번째 러시아 맑스주의 조직을 설립한다.

 

 1895년. 레닌과 마르토프(Martov)는 노동계급 해방 투쟁연맹(the League of Struggle for the Emancipation of the Working Class)을 설립했다. 그 지도자들은 즉시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보내진다.

 

 1897년. 남러시아 노동조합이 L.D. 브론슈타인(Bronstein)과 맑스주의를 끌어안고 공장에 리플릿을 뿌리기 시작한 전 나로드니키(Narodniks, 인민주의자)에 의해 설립된다.

 

 1898년. 브론슈타인, 체포되어 여러 감옥을 전전하다. 오데사에서 간수 트로츠키는 그가 후에 알려질 필명에 대한 영감을 준다.

 

 1902년. 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를 쓴다. 이스크라 출간, 트로츠키는 Piero라는 필명으로 글을 쓴다. 트로츠키, 시베리아에서 최초로 탈출한다.

 

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노동당이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 나뉜다. 트로츠키는 멘셰비키 편에 선다.

 

 1904년. 트로츠키, 멘셰비키 분파에서 사임한다.

 

 1905년 1월 22일. 피의 일요일. 노동자들의 평화적 시위에 대한 대량 학살로 혁명의 첫해가 시작된다. 트로츠키는(나탈리아 세도바와 함께) 러시아로 돌아온다. 11월, 트로츠키는 상페테르부르그 소비에트의 두 번째 의장(Khrustalev-Nosar의 체포 후)이 된다. 레닌은 중단 없는 혁명을 주장한 「민주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을 쓴다. 트로츠키는 11월, 혁명이 무너지자 체포된다.

 

 1906년. 감옥에서 영구혁명 이론을 처음으로 진전시킨 「결과와 전망」을 쓴다.

 

 1907년. 시베리아에서의 두 번째 탈출, 빈에 정착, 그곳에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재결합을 설파하는 인쇄물인 프라우다(Pravda)를 편집한다. 레닌은 이 시기에 그를 ‘수다쟁이 트로츠키’ 정도로 묘사한다.

 

 1908년. 제2 인터내셔널의 슈트가르트 대회에서 룩셈부르크, 레닌 등이 제안하여 유럽 전쟁이 일어날 경우 총파업을 요구하는 동의안을 통과시켰다. 보스니아의 위기는 곧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전쟁이 되었다. 독일은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도록 오스트리아를 지원한다.

 

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사회민주주의의 지도자들은 제2 인터내셔널의 해결방안을 무시했고, 그들 각각의 정부를 지원했다. 오직 러시아, 불가리아, 세르비아의 정당들만이 전쟁에 반대했다. 트로츠키는 프랑스로 가서 마르토프의 반전 신문인 Golos(The Voice)와 Kievan Thought와 함께 일하기 전에, 스위스로 가서 「전쟁과 인터내셔널」이라는 전쟁을 비난하는 글을 썼다.

 

 1915년 2월. 트로츠키는 Nashe Slovo에서 멘셰비즘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9월, 11개 국가를 대표하여 온 38명의 사회주의자가 전쟁에 반대하기 위해 찜머발트에서 만난다. 트로츠키는 전쟁에 반대하는 찜머발트 선언을 썼지만,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를 요구하는 레닌의 국제주의자 입장을 지지하는 좌파에 함께하지 않았다.

 

 1916년. 키엔탈 대회는 ‘좌파’와 ‘평화주의자’의 분열을 확인한다. 프랑스 정부는 트로츠키의 출석을 막는다.

 9월. 트로츠키는 프랑스에서 추방되어, 스페인을 거쳐 미국에 도착한다.

 

 1917년 3월. 2월 혁명의 발발에 대한 소식을 듣고, 트로츠키는 러시아로 향했으나, 증기선이 Halifax, Nova Scotia에 정박했고, 그래서 영국은 그를 800 독일인과 함께 전쟁 포로로 억류했다. 찜머발트 대회에 대한 그들을 향한 트로츠키의 연설은 감옥 당국에 의해 중지되었다.

 

 4월. 레닌,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한다. 그의 4월 테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에 줄 것과 새로운 인터내셔널과 볼셰비키에 의한 코뮤니스트 이름을 채택할 것을 요구했다. 많은 볼셰비키 지도자들(트로츠키의 매형 카메네프를 포함하여)은 그것들을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 5월. 트로츠키는 4월 29일 영국에서 석방되어 러시아에 도착한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5월 7일 만났고, 국제혁명의 맥락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러시아의 의제라는 데에 동의한다. 트로츠키는 더는 볼셰비키와 멘셰비키가 다시 합쳐져야 한다고 믿지 않게 된다.

 

 7월. 볼셰비키 슬로건 영향 아래의 크론슈타트 수병, 성급하게 볼셰비키가 임시정부로부터 권력을 이양받도록 힘쓴다. 트로츠키는 사회혁명당(SRs)의 지도자 빅터 체르노프(Victor Chernov)를 분노한 수병들로부터 구해낸다. 임시정부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할 충분한 군인을 소집할 수 있었고, 볼셰비키는 배척되었다. 트로츠키는 그가 레닌을 지지함을 발표했고, 투옥되었다.

 

 8월, 코르닐로프 장군에 의해 시도된 쿠데타는 케렌스키가 그 육군참모총장에 대항한 인민들을 동원하기 위해 재합법화했다.

 

 9월. 트로츠키는 볼셰비키 당 중앙위원회에 선출된다. 9월 23일, 그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의장으로 선출된다.

 

 10월. 트로츠키는 레닌의 케렌스키 정부 전복 요구를 지원한다.

 

 10월 24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군사혁명위원회(원래 코르닐로프와 싸우기 위해 세워진)의 의장으로서 트로츠키는 케렌스키가 노동자 계급에 적대하여 선제 파업을 시도했을 때, 권력의 전복을 조직했다. 트로츠키는 케렌스키의 전복을 선언했을 뿐만 아니라, 25일 그 유명한 멘셰비키와 사회주의 혁명당의 마지막 비문 - 그들이 이제는 그들이 속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한다는 -을 선언했다.

 

 11월.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의 새로운 권력의 본질에 대한 논쟁은 트로츠키가 소비에트의 의장으로서, 새로운 정부의 수장이 되어야 한다는 레닌의 제안을 거절하도록 만든다. 새로운 정부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을 때, 트로츠키는 자본주의적 냄새가 나는 장관(Ministers)이라는 이름 대신 인민위원(People Commissars)이란 이름을 제안했다. 트로츠키는 외무인민위원이 되었다. 외무인민위원으로서, 트로츠키는 그가 단순히 제국주의자 연합국(러시아, 프랑스, 영국) 사이의 비밀스러운 협정을 맺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전쟁이 연합국 측에 대한 정복의 전쟁이기도 하다는 것을 발표하는 협정문을 출간한다. 그러나 그는 독일 제국 최고 사령관과 평화의 본질을 협상하는 임무를 맡았다.

 

 12월. 트로츠키는(카메네프와 요페(Joffe)와 함께) 독일 참모 그룹과 평화협정을 맺기 위해 브레스트-리토프스크(Brest-Litovsk)에 도착한다. 그 위원단은 독일 군인들에게 혁명을 촉구하도록 하는 리플릿을 돌렸다. 그는 레닌이 트로츠키의 전쟁도 평화도 아닌 노선을 지지한다면, 트로츠키는 볼셰비키가 브레스트-리토프스크(Brest-Litovsk)를 승인할 수밖에 없다는 레닌의 인식을 지원할 것이라는 레닌의 제안을 수용한다.

 

 1918년 3월 3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Brest-Litovsk) 조약, 핀란드 소비에트 공화국과 우크라이나의 그 가장 비옥한 토지를 대가로 맺어진다. 이 시기 트로츠키는 사임한다. 그는 이제 전쟁 인민위원이 된다. 그다음 2년 반 동안 그는 적군을 조직한다.

 

 8월 27일. 트로츠키는 백군과의 내전에서 적군을 규합하기 위해 전선과 전선을 오가는 기차에서 묵는 그 유명한 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실제로 2년 동안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트로츠키는 적색테러(Red Terror)에 대한 멘셰비키의 비판에 대한 응답으로 「테러리즘과 코뮤니즘」을 쓴다.

 

 1920년 12월. 이제 소비에트 공화국을 위협하는 300만의 프롤레타리아의 죽음, 배고픔, 무관심으로 인해, ‘전시코뮤니즘’은 대체되어야만 했다. 무엇으로 대체할 것이냐는 논쟁에서 트로츠키는 노동의 군사화를 제안한다.

 

 1921년 1월. 이탈리아 사회주의당은 세라티(Serrati)가 개량주의자들을 추방하지 않자 분열된다.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은 아마데오 보르디가(Amadeo Bordiga)를 지도자로 추대한다.

 

 3월. 10차 당 대회에서, 신경제정책(NEP)이 전시코뮤니즘 대신 채택된다. 노동자 반대파(Workers Opposition)와 같은 분파들은 공식적으로 금지된다. 그것이 끝나기 전에, 크론슈타트 반란은 투하체프스키(Tukhachevsky)에 의한 진압의 비극적 필요성[트로츠키]을 가져왔다.

독일에서 3월 행동의 실패로 포위된 소비에트 공화국의 즉각적인 구원에 대한 희망은 그 끝에 달한다.

 

 1922년 3월. 지노비예프는 코뮤니스트당 서기장으로 스탈린을 추천한다.

 

 1923년 2월. 이탈리아에서 보르디가가 체포된다.

 

 5월. 레닌 첫 뇌졸중. 레닌, 스탈린과 트로츠키를 비판하지만, 스탈린의 제거를 촉구하는 유언을 쓴다.

 

 6월. 코민테른의 세 번째 확대 상임 위원회는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PCd'l)에 새로운, 그러나 혼성 지도력을 구축한다.

 

 

 1924년 1월. 레닌의 죽음. 트로츠키는 스탈린이 그에게 모스크바로 돌아올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고 이야기한 후,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는다.

 

 5월. 그람시, 모스크바의 코민테른에서 2년간의 지도를 받은 후, 이탈리아로 돌아와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코민테른 지부(PCd's)의 지도자 자리를 차지한다.

 

 

 6월. 코민테른 5차 대회는 코뮤니스트당들의 볼셰비키화를 요구한다.

 

 11월. 독일 코뮤니스트당(KPD)은 독일 노동계급을 그 마지막 시기에 패배로 이끌었다. 트로츠키, 「10월의 교훈」 출간한다.

 

 1925년. 트로츠키, 전쟁 인민위원 자리에서 물러난다.

 

 1926년. 영국에서 총파업의 실패. 보르디가, 소련의 방향과 스탈린에게 도전하기 위해 코민테른 모임에 최후로 참석한다.

 

 1927년. 중국 노동계급이 패배한다. 트로츠키는 이제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와 연합 반대파에 함께한다. 세 명 모두 당에서 축출된다.

 

 1928년. 트로츠키 알마아타(Alma Ata)로 보내진다. 스탈린, 소련에서 당과 국가의 총체적 통제권을 장악한다.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의 좌익 분파는 파리, 팡탱(Pantin)에서 공식적으로 재조직된다. 「프로메테오」(Prometeo)가 브뤼셀에서 출간된다.

 

 1929년. 트로츠키, 터키 Prinkipo Island로 망명. 반대파의 기관지인 「Bulletin of the Opposition」의 첫 호가 파리에서 발간된다. 월스트리트에서 공황이 시작된다.

 

 1930년. 보르디가,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에서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명목으로 공식적으로 축출된다.

 

 1933년. 트로츠키 「영구혁명」을 완성한다. 나치즘, 독일에서 권력 장악한다. 트로츠키, 국제 좌익 반대파가 기반을 두고 있는 프랑스로 가는 비자 획득. 이것은, <국제 코뮤니스트 연맹>(볼셰비키-레닌주의)이라는 이름이었다. 트로츠키와의 논쟁 후, 이탈리아 분파는 「빌랑」(Bilan) 출간을 시작한다.

 

 1934년. 레닌그라드에서 Kirov 암살로 소련에서 숙청이 시작된다. ‘프랑스 전환’으로 불리는, 트로츠키가 그의 지지자들에게 프랑스 사회민주주의당에 가입하라고 요구한 사건이 일어난다. 입당주의(Entryism)는 트로츠키주의의 트레이드마크가 된다.

 

 1935년. 트로츠키, 노르웨이로 간다. 「배반당한 혁명」을 출간한다.

 

 1936년. 스페인 내전 발발. 트로츠키, 멕시코에 도착한다.

 

 1937년. 일본, 중국을 침략한다.

 

 1938년. 트로츠키의 아들 레온 세도브, 스탈린의 요원에 의해 파리에서 암살된다. 트로츠키는 「자본주의의 죽음의 고뇌와 제4 인터내셔널의 책무」(「이행기 강령」으로 알려진) 를 쓴다.

제임스 버냄(James Burnham)과 <사회주의노동자당(Socialist Workers' Party)>의 샤흐트만(Max Schachtman)은 트로츠키에게 변질된 노동자 국가 공식을 포기하라고 한다.

 

 1939년. 2차 제국주의 전쟁을 발발시킨 히틀러-스탈린 조약과 폴란드 침공 발발한다.

 

 1940년. 스탈린 요원에 의해 트로츠키가 암살당한다. 제4 인터내셔널은 소련을 심지어 핀란드 침공 이후에도, 변질된 노동자 국가로서 방어하기를 계속한다.

 

 1943년 5월. 스탈린은 미국과 영국과의 제국주의 전시 협정의 일환으로 코민테른을 해산시켰다.

 

 7월. 무솔리니 정권이 붕괴한다. 이탈리아에서 파업의 물결. 이탈리아 좌파, 오노라토 데이먼(Onorato Damen)을 지도자로 하는 그들은 파시스트 이탈리아에서 비밀스럽게 <국제코뮤니스트당>[Battaglia Comunista] 을 결성한다.

 

 11월. 「프로메테오(Prometeo)」 본간 제1호 발간한다.

 

 

<원문 출처>  『트로츠키, 트로츠키주의, 트로츠키주의자』, 국제코뮤니스트경향(ICT),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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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계급전쟁을 조직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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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주의 코뮤니스트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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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주의 코뮤니스트 포럼

2021년 9월 ~ 2022년 2월

 

 

▶ 토론 주제

 

1. 코뮤니스트 좌파와 세계혁명   <발제 ㅣ 오세철>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 최근 논쟁, 자본주의 쇠퇴-해체 문제 등)

 

2. 코뮤니스트 강령과 당 건설    <발제 ㅣ 이형로>
   (코뮤니스트 정치원칙/강령, 선거 강령과 계급의식, 혁명당 건설)

 

3.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투쟁과 국제주의 
   (쿠바, 미얀마 투쟁 등 최근 쟁점, 민족문제와 국제주의 원칙)

 

4. 혁명과 반혁명, 프롤레타리아트 운동의 역사적 교훈
   (파리코뮨 150주년, 크론슈타트 봉기 100주년 교훈 등)

 

5. 코로나19와 자본주의, 노동자계급과 계급투쟁 전망  <종합토론>  
  (코로나 19-자본주의 위기와 노동자계급, 계급투쟁 전망)

 

 

부르주아 선거를 넘어 투쟁!

코로나19 이전의 자본주의가 아닌 야만의 체제 전복!

 


□  9월 말부터 시작합니다.
자세한 일정과 내용은 코로나19 상황을 고려하여 추후 공지하겠습니다.

 

□ 참가문의 : communistleft@gmail.com  

 


주최 : 국제코뮤니스트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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