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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8/24
    [코뮤니스트 13호] 경제에 대한 국가 개입 환상 : 영원한 반(反)노동계급 무기인 개혁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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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3호] 경제에 대한 국가 개입 환상 : 영원한 반(反)노동계급 무기인 개혁주의

경제에 대한 국가 개입 환상 : 영원한 반(反)노동계급 무기인 개혁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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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구조에 대한 각각의 새로운 충격으로 그 위기는 더욱더 심화한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인한 생산과 유통의 혼란은 기존 시스템의 어려움을 더 어렵게 할 뿐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노동계급은 국가 개입이 계급과 관계없이 일반적으로 그들의 조건과 "공동체"에 가져올 이로운 효과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다. 자본의 좌파에 속하는 여러 정치 집단에 따르면, 경제 붕괴를 막기 위해 유럽연합(EU)과 세계 각국이 대규모로 유동성을 공급한 것은, 국제 코뮤니스트들이 수십 년 동안 주장해 온 것과는 달리, 자본주의 체제 내에 여전히 노동계급이 현재의 역사적 시기에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킬 여지가 있는 증거라고 이야기한다. 위기 원인을 분석한다는 측면에서 우리 가까이에 있지만, 더 나아가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통해 자본주의 국가가 자본주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맑스주의 경제학자 마이클 로버츠도 바로 그런 사람이다. 세계 자본주의 위기에 대해서 그는 자신의 블로그에서 EU와 유로존의 상황을 충족시키기 위해 중국식의 오래된 국가 자본주의와 다름없는 경제 요리법을 생각해낸다. 지난 4월 코비드-19 비상사태가 한창일 때 그의 블로그에 올라온 글(유로의 코로나 위기 : thenextrecession.wordpress.com)은 로버츠의 비전을 특히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글에서 로버츠는 이탈리아와 같은 EU 회원국들의 심각한 어려움을 언급했다. 그는 결국 다른 국가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의 경우 유로존 재무장관 정상회담에서 채택된 경제 지원책이 비참한 이탈리아 자본주의를 되살리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유럽중앙은행(ECB)의 공적 채무 매입을 통해 이탈리아 국가가 실업자를 위한 일시적 노동 계획을 지원하고 채권시장에서 저비용의 자금을 조달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은 이탈리아 자본주의를 위해서 마지막 결전을 미뤘을 뿐이다. 그러나 이전에 국가 개입을 결정적인 요인으로 폐기했던 로버츠가 같은 글에서 투자 계획을 위한 EU 예산 증액과 대기업 과세의 조화를 완성하는 마셜 플랜의 실행을 제안하는 것을 보면 이러한 난국에 대한 로버츠의 대응은 모순적이다. 로버츠를 비유하자면, 자본 흐름에 아주 낮은 세금을 부과하는 유로존 국가들에만 이익이 되는 최저의 공통분모를 위한 경쟁이다. 요컨대, 그와 같은 로버츠와 다른 사람들의 관점은, 자본주의적 위기에 대한 그의 분석을 공유하지 않지만, EU 경제의 불균형을 바로잡고 나아가서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유로존을 살아남게 하기 위해서 분명히 "개혁"을 목표로 하고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로버츠가 주창하는 이러한 국가 개입주의는 마치 EU와 유로존 개별국가의 더 많은 자본 투자가 자본주의 생산 방식의 본질을 바꾸거나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것처럼, 이윤율 하락 경향의 법칙을 극복할 수 있는 것처럼, 계급 없는 사회로 전환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우리에게 교활하게 그리고 터무니없이 선전하고 있다. 이 법칙은 맑스에 의해 확인되었고, 2007~2008년에 발생한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으로서 그 타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로버츠 자신에 의해 종종 신중하게 분석된다. 그러나 사실 맑스는 코뮤니스트 혁명가이면서 정치경제 평론가였고, 단순히 사회주의를 "국민"의 각성과 자본주의의 부흥으로 보는 마이클 로버츠 같은 학구적 맑스주의자가 아니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정치경제가 자본주의와 함께 태어나 과학적으로 연구될 수 있고, 연구되어야 하는 규율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로버츠와 그의 친구들이 자본주의, 상품, 국가, 그리고 유럽연합과 같은 초국가적 기구와 "사회주의"를 상상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코뮤니즘은 경제에서 국가 개입의 강력한 신봉자와 함께하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구제를 열심히 하는 여러 개혁론자에게서, 경제 또는 자본주의 계급의 역할을 담당하는 국가가 아닌, 현재 상황을 폐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진정한 운동(1)이라고 아마도 말할 것이다.

 

맑스 「자본」 제1권의 한 구절에서 단일 자본가 또는 자본가 연합의 독점 형성이 사회 자본의 집중과 중앙집중화 과정의 극단적인 결과로 제안된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2) 이것은 자본가 연합이 사회적 자본을 독점하는 것은 그 자체가 자본가 국가일 수 있고, 집단적 자본가나 기업가의 역할을 맡을 수 있다는 것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엥겔스는 「반 뒤링」에서 집단 자본가로서의 국가의 역할에 관해 썼다. 그는 자본주의 발전 수준 자체가 자본가 착취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가 개입을 해야 하여 현대 자본주의 국가가 결국 직접적인 자본주의 사회를 이런 식으로 이끌어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반 뒤링」에서 엥겔스의 주장을 모든 자본주의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특히 제국주의 시대에 이것은 모든 곳에서 국유화 또는 경제 전반에 대한 국가 개입의 증가가 특징지어져 왔다.

 

실제로 지난 50년 동안 이윤율 하락으로 매우 심각한 구조적 위기에 직면한 자본주의 국가도 신자유주의 단계로 간주하는 경제 지원 대책에 의존해 왔으며, 또한 국가에 의해 직접적으로 통제되는 특정 기업이나 기업집단의 민영화와 분배를 진행해 왔다. 비록 이러한 국가 개입의 형태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30년의 그것과 조금 다르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중요한 개입을 보았다. 특히, 국가 개입은 공공 부채를 늘려서 수익성이 없는 기업과 은행의 "구제"로부터 노동 시장의 구조 개혁이라 불리는, 연구와 개발로 만들어진 투자뿐만이 아니라 자본의 요구에 더욱 더 호응하는 노동계급의 착취 방법, 그리고 그 가치보다 낮은 노동력의 가치를 낮추는 방법까지 다양했다. 소부르주아 선거 고객의 충성심을 보장하고 "사회 평화"를 확보하기 위해 그리고 상품에 대한 "수요"를 지원하기 위해 국가가 제공한 돈의 홍수도 잊지 말아야 한다.(3)

 

자본주의 국가는 그들이 자본주의의 일반적인 이익을 해친다면 프롤레타리아트 사회의 조건을 결코 "개선"한 적이 없다. 반대로, 자본주의 국가는 이른바 말하는 노동 시장의 "개혁"을 통해 노동력 가치 이하의 임금 감소를 촉진하는 것 외에도 사회 서비스, 보건 및 연금(즉, 간접 임금과 지연 임금)을 대폭 삭감하여 코로나19 바이러스에 연계된 전염병의 확산에 매우 적합한 조건을 만들었다. 이윤율 하락에 따른 구조적 위기 등으로 복지제도를 무참히 축소해 온 자본주의 국가 스스로 공동체 전체에 이익을 줄 수 있는 조처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사실 임금노동자들의 상태는 대유행의 확산을 막기 위해 정부가 강요해 온 생산 중단과 한계로 인해 악화하였다.

 

게다가, 이윤 때문에 헐떡이는 경제에 대해 자본주의 국가가 지원하는 부문에 대해 대가를 지불한 것은 항상 프롤레타리아트였다. 노동자가 자본주의를 먹여 살리는 잉여 가치의 원천인 노동계급은 이번에도 생활과 노동조건이 악화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국가 “자선”에 대한 법안이 해결되는 방식이 이러하다. 일부 개혁주의자들이 기대하는 자선은 "사회주의"나 일반적으로 더 정의로운 사회의 건설로 나아가게 할 것이라고 희망하는 것이다. 사실, 공채와 사채는 자본주의 운영 메커니즘이 실패할 때 단지 잃어버리게 될 미래의 재화 생산에 대한 도박에 지나지 않는다. 심지어 마이클 로버츠도 지난 6월 유로존 재무장관 회의에서 채택된 조치가 위기를 종식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부채가 늘어나게 되리라는 것을 인정했다.(4)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프롤레타리아트 해방의 관점에서 볼 때, 한편으로, 개혁주의가 조장하는 환상에 의해 나타나는 피해는 단지 일상 투쟁에서 계급 투쟁을 훼손하는 것만은 아니다.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그러한 신뢰는 노동계급의 자주적인 정치 조직을 약화시키고, 그로 인해 세계혁명을 통한 프롤레타리아트 해방의 전망을 약화시킨다. 이는 자본주의 국가의 혁명적 전복과 노동자평의회 건설을 통해서만 실현할 수 있다.

 

반면에, "공동체"의 추정되는 복지를 가장한 국가의 개입은 심각한 체제 위기나 노동계급에 기반을 두고 세워진 경제 부흥의 단계에서 자본주의를 안정시키는 데에 매우 효과적인 것으로 입증되었다. 그것은 사회 평화를 유지하고 제국주의 간 충돌의 기반을 마련하는데 자본주의 국가 언론과 선전 공세가 제대로 봉사하였으며, 이것은 반드시 "후방"에 대한 지원을 해야 할 것이다.

 

마침내, 만약 맑스와 엥겔스(5) 시대에 어떠한 환상이 이해될 수 있다면, 이것들은 이제 위험하고 시대착오적이다. 1세기 이상 우리는 자본주의 제국주의 시대에 자본주의 국가의 개입주의가 어떻게 해서 강력한 반혁명 무기로 제공되어 왔는지를 보아왔다. 게다가, 그들의 시대에도, 맑스와 엥겔스는 페르디난드 라살레와 그의 초기 독일 사회민주주의 추종자들처럼 사회주의가 갑자기 그리고 설명할 수 없이 일하는 "사람들"의 통제 속에 있는 자본주의 국가를 통해 성취될 수 있다고 믿었던 사회주의 운동의 지지자들을 거칠게 비난했다.(6) 맑스가 「고타 강령 비판」에서 썼듯이, 민주주의 국가 초당파(7)를 믿는 노동계급은 자신의 혁명적 과업과 노동계급 내에서 이러한 신념의 확산에 도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8) 이것은 우리가 아직도 경험하고 있는 반혁명 단계의 깊이와 계급에 뿌리를 내리는 혁명 정당을 건설해야 할 절대적인 필요성을 확인시켜 준다.

 

2020년 11월 21일

Gracchi

 국제코뮤니스트경향(ICT)

 

<주>

 

(1) 「독일 이데올로기」를 보시오.

 

(2) 분명히, 그것은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와 함께 두말할 것도 없는 순전히 교훈적인 가설이었다.

 

(3) 게다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일반적인 수동성.

 

(4) 그는 그가 바라던 새로운 마샬 플랜이 이윤율 하락으로부터 자본주의를 어떻게 치유할 수 있는지 전혀 설명하지 않았다. 이것은 로버츠의 “해결책”이 국가 자본주의(즉, “공공 소유”가 가치법칙 자체를 없앨 수 있다는 생각)를 요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Weekly Worker의 Modern Monetary Theory (MMT)에 대한 기사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MMT 지지자들이 맑스주의적인 정책 결론, 즉 공공 소유와 생산 계획을 통한 생산적 부문의 전용과 경제 가치의 법칙을 억제하거나 종료하는 '지배적인 수위'로 이동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무제한 자금 창출을 통한 정부 지출 정책은 실패할 것이다.”  (weeklyworker.co.uk)

 

MMT에 대한 우리의 비판은 leftcom.org를 참조하시오.

 

(5) 무엇보다도 맑스와 엥겔스는 항상 자본가들이 단지 전형적인 "더블 브레스트 재킷을 입은 제철소 사장"이 아니라고 말했다. 자본의 좌파는 생산 수단의 소유권이 어떤 형태를 취하든 자본-임금노동 관계가 착취 시스템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항상 무시해 왔다.

 

(6) 그들은 「반 뒤링」에 의해서 입증된 바와 같이 노동운동 내의 이러한 종류의 논쟁에 익숙했다.

 

(7) 번역자 주 – 공정한, 초당파

 

(8) 역자 주 – 두 가지 이상의 내용을 비교할 때 서로 다른 상황을 고려하기 위해 변경이 필요하지만, 기본 사항은 동일하게 유지된다고 말할 때 사용된다.

 

 

 

 

<원문 출처>

http://www.leftcom.org/en/articles/2020-12-07/the-illusion-of-state-intervention-in-the-economy-the-eternal-anti-working-cl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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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교훈 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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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들은 선거에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선거와 의회제도는 사멸해가는 자본주의 문명에 속할 뿐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의회와 내각은 그 자본주의 문명과 함께 사라질 겁니다.

 

우리는 노동자평의회 건설과 코뮤니즘을 위해 투쟁해야 합니다.

 

실비아 팽크허스트, 「노동자 전함」, 1922년

 

 

나는 현 사회 체제의 완전하고 최종적인 전복과 사회주의 연방의 즉각적인 수립을 지지합니다.

 

나는 모든 부르주아 선거 운동과 개혁 공약을 거부합니다.

 

노동자들은 선거가 아니라 자기 권력을 위해, 자본주의 국가와 의회 제도를 파괴하기 위해 현장과 거리에서 투쟁해야 합니다.

 

새로운 정치, 새로운 사회 체제인 코뮤니즘으로 나아가기 위해 투쟁해야 합니다.

 

가이 알드레드, 「노동자계급 유권자들에게」, 19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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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교훈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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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 원칙으로부터 우리는 민주주의적 질서가 오랫동안 발전해 온 나라들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위한 선동은 선거와 부르주아 기관에서 보이콧을 확대하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선거 활동에 막대한 중요성을 부여하는 실천은 이중적인 위험이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활동이라는 인상을 주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당의 모든 힘을 빨아들여 당의 다른 모든 부분을 마비시킵니다. 

선거 활동을 수행하는 당 조직은 혁명에 필요한 합법적 혹은 비합법적 활동에 맞는 조직의 성격과 뚜렷이 다른 매우 특수한 기술적 성격을 발전시킵니다. 당은 유권자들을 준비하고 동원하는 것에만 관심을 쏟는 여러 선거위원회로 쪼개집니다.

언론, 결사의 자유 등과 같은 방식으로 선거를 활용할 수는 없습니다. 언론, 결사의 자유 등을 활용하는 것은 행동 방식 문제입니다. 선거 캠페인과 의회 연단을 활용하는 것은 부르주아 기관 문제입니다. 부르주아 기관은 노동자 소비에트 같은 프롤레타리아 기관으로 대체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혁명 이후에 언론, 선전 등의 활용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기구를 분쇄하고 그 자리에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세우기 위해 투쟁하고 있습니다. 

“선거와 의회 연단에서도 선전을 수행할 수 있다.”라고들 합니다. 저는 거기에 약간의 유치한 주장으로 답하고 싶습니다. 선거와 의회 연단에서 발언은 언론에 실리게 됩니다. 그 언론이 부르주아 신문이라면 모든 것이 왜곡될 것입니다. 그 언론이 우리 편 신문이라면 나중에 어차피 인쇄되어 나올 내용을 연단에서 발언하는 것은 시간 낭비입니다.

착취자에서 피착취자로 권력 이전은 그 뒤로 대의제 기구 변화를 가져옵니다. 부르주아 의회주의는 소비에트 체제로 대체되어야 합니다. 혁명적인 직접 행동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계급투쟁을 은폐하는 민주주의라는 낡은 가면을 찢어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의회주의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며, 이 관점은 혁명적 맑스주의의 방법에 완전히 부합합니다.


"코뮤니스트당이 의회주의(선거주의)적 실천에 완전히 다른 성격을 부여하고자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은 시지프스의 노고처럼 힘만 허비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코뮤니스트 혁명 대의는 바로 착취자들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항하는 직접 행동을 요구합니다."


아마데오 보르디가, 「의회주의에 대한 테제」, 19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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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교훈 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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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코뮤니스트들은 지도자가 되기 위해 의회로 들어갈 겁니다. (노동자들을 제국주의 전쟁으로 내몰았던) 노동조합과 노동자 정당들은 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해 다시 지지받게 될 겁니다. 

코뮤니즘을 위해 건설하는 당 대신, 관성적으로 정당들을 조직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 애국주의자들 및 부르주아 분자들과의 의회주의적 타협이 다시금 등장할 것이며, 그로 인해 결국 서유럽에서 모든 혁명은 점진적인 과정이 될 것입니다. 

연설의 자유는 억압당할 것이고, 훌륭한 코뮤니스트들은 모두 추방당하게 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제2 인터내셔널에서 발생했던 모든 관행이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기회주의야말로 우리의 가장 큰 적이기 때문입니다. 동지가 얘기했던 것처럼 우리 대열 외부에서뿐 아니라, 내부에서도 그렇기 때문입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신과 힘을 황폐화하는 기회주의가 다시 섞여 들어오는 것은 좌익이 너무 급진적으로 되는 것보다 수천 배 더 나쁠 것입니다.

 

헤르만 호르터, 「레닌동지에게 보내는 공개편지」, 19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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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2호] 공동전선 비판과 혁명조직의 역할

공동전선 비판과 혁명조직의 역할

- 다시 꺼내든 낡은 당 건설 노선 비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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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주변에는 항상 자신들이 노동자계급을 대변하거나 지도하는 세력이라 자임하는 정파와 파벌이 득세하고 있다. 여기에는 소수이지만, 노동자계급의 해방과 사회주의를 실천한다는 세력도 일부 포함된다. 그들은 항상 "노동자계급이 역사와 혁명의 주체이고... 부르주아 국가를 전복하고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장악하여 사회 전체를 통제해야만 노동해방에 이를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이 노동자계급 권력 장악을 위한 투쟁과 권력 장악 이후까지 일관되게 노동자계급을 권력과 투쟁의 주체로 세우는지, 아니면 반대로 노동자계급을 대리하거나 이용하는 역할을 하는지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별히 한국에는 사회주의/혁명 세력을 자임하면서 반(反)자본주의, 사회변혁, 노동해방, 사회주의자 등을 내걸고 노동자 운동에서 이른바 좌파 블록을 형성한 세력이 존재한다. 이들이 좌파 블록으로 모인 것은 한국의 노동운동 내부에서 온갖 폐해를 끼치며 기득권을 누려온 다수파 운동(이른바 자민통으로 지칭되는 민족주의 세력)에 대한 반사작용이기도 하지만, 엄밀히 보면 여전히 자기 운동의 최종목표와 노선을 명확히 하지 못한 운동의 퇴보에 있다. 이들은 자본주의 쇠퇴기 위기 상황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개량/개혁을 넘어선 혁명적 이행전략을 가진 것처럼 포장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 투쟁에서는 사회주의와 무관한 실천만을 하면서도 급진적 구호나 그럴듯한 전술로 조합주의/노동자주의/선거주의 실천을 가리고 있다. 이른바 ‘좌파’의 정체성은 단지 다수파 운동과의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한 혁명적 기질과 줄서기로 드러낼 뿐이다.

 

이들 좌파 중 다수는 혁명적 이행전략인 노동자(평의회) 권력 창출이라는 전략적 과제를 현실에서 혁명적 조직과 실천을 통해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시시때때로 전술을 바꾸면서 전략적 과제를 혼란에 빠트리는 운동을 하고 있다. 즉, 계급이 처해있는 현실에서 출발하면서도 장기적 전망에서 현실의 장벽을 넘기 위한 실천을 통해, 주체들의 혁명적 계급의식 획득과 자기 조직화라는 전략적 목표로 꾸준히 나아가지 않고, 단기적이고 정파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전술을 바꾸는 것이다. 공동전선의 일종인 좌파 블록이 정치노선과 전략적 목표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대부분 우파에 대한 상대적 반(反)정립으로 형성되는 경향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더욱이 이들이 개량주의 세력을 대중적으로 폭로하기 위해 사용한다는 입당 전술, 노동자 공동전선은 개량주의 세력에게 노동자성을 부여하고 혁명 세력과 함께한다는 환상을 유포 시켜, 오히려 개량주의자들의 본질을 가려주고 입지를 강화해주는 역할을 해왔다. 이러한 동맹은 자신들이 다수파를 장악하지 않는 한 이들과 함께하는 내내 개량주의 노선을 묵인하게 된다. 그것이 아니라면 깨고 나와 모든 것을 무효화시킬 수밖에 없다. 결국, 개량주의 세력들과 동맹을 맺는 것을 옹호하는 전술의 결말은 노동자들이 그것으로부터의 단절하는 시간을 지연할 뿐이다. 더욱이 이러한 전술의 남발로 인한 이합집산과 분열의 반복은 노동자 대중에게 정치 운동의 신뢰를 잃게 할 뿐 아니라, 현장 투쟁에서 단결을 실질적으로 저해하는 요인이 된다.

 

이들은 자신들이 계급의 전위역할을 해야 한다는 착각과 대중을 지도해야 한다는 자만에 빠져, 온갖 현장 투쟁에 개입하면서 투쟁의 목표와 원칙을 훼손하거나 계급의식과 자기조직화를 자신들에게 맞춰 인위적으로 재단해 왔다. 계급의식과 계급투쟁 발전에 목표를 두지 않고, 자기 정파(그룹)의 이해관계에 따라 당면 정세에 조급하게 개입하는 운동이, 장기적 전망이나 운동의 본질에 접근하는 투쟁을 계획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계급의 전위란 자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전위는 계급투쟁 과정에서 계급의 가장 의식적이고 전투적인 부분을 조직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하여, 매우 길고 힘든 계급의식 발전 과정에서 (계급투쟁의 퇴조-상승의 모든 기간에) 운동의 최종목표를 명확히 하고 (코뮤니스트) 혁명 강령을 투쟁하는 노동자계급이 받아들이고 스스로 방어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혁명적 소수의 신뢰와 영향력이 노동자계급 안에 깊이 뿌리 내려 주요한 투쟁의 중심에 설 때 비로소 계급의 전위로서 역할을 할 수 있을 뿐이다. 하늘에서 떨어진 전위(혁명조직)가 노동자계급을 혁명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 안에 혁명적 부분(의식)이 존재하기 때문에 전위가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혁명당(조직)은 적대하는 계급과의 투쟁이 있는 곳에서만 존재할 수 있고, 계급 안에서 모든 투쟁에 함께하면서 혁명강령을 방어하는 집단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여전히 노동자계급 주위에서 전위 역할을 한다는 세력들은, 계급투쟁 개입을 노동자 투쟁을 대리하거나 자신들이 투쟁의 배후 역할을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들은 ‘공동전선’이라는 외피를 쓰고 상층중심의 공동전선(투쟁), 입당 전술, 노동자 후보/선거연합, 계급연합, 노동자정부 등의 혼란스러운 전술을 남발하고 있다. 이러한 공동전선은 계급의식을 발전시키기는커녕 공동전선의 상대에 따라 강령의 수준을 낮추고 전술의 원칙을 바꿔가면서 계급의식을 혼란에 빠트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아직 노동자의 절대다수가 부르주아의 책략에 눈을 감는 상태에서, 혁명조직의 책무는 혁명의 최종목표를 보다 명료하고 직접적으로 노동자들에게 알려 행동을 촉진하는 일이지, 자신의 정치를 부르주아 대중 정치의 수준으로 낮추는 것이 아니다.

 

당 건설 경로에서도 철저한 강령 원칙과 실천적 검증에 따른 혁명적 사회주의/코뮤니스트 세력의 재구성을 통해 당 건설의 기반을 마련하고, 동시에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새로운 주체와 코뮤니스트 노동자가 계급투쟁 속에서 직접 만나 혁명적 주체를 형성하고 자기 조직화를 이루는 것이 기본적인 전제조건이다.

 

그런데 이들은 강령적 실천과 혁명적 주체의 자기 조직화라는 본질을 망각한 채, 조급한 정세 대응에만 매달리거나, 자기 조직 유지와 양적 확산만을 위해 강령원칙을 폐기하면서 당 건설 운동을 지속해서 후퇴시켜왔다.

 

이제는 그것의 만회를 위해, ‘(사회주의/좌파 대선후보를 통한 당 건설’이라는 낡고 악취 나는 전술을 슬그머니 들고나오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것은 정치 노선이 불분명한 (오랜 전통의?) 의회주의 제도권 소수 정당과 (사회주의 혁명 노선을 포기한) 비제도권 소수 정당이 추진 중인 사회주의 대중정당 흐름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들 중 한 축은 9년 전에 선거주의 세력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다른 한 축에서는 준비되지 않은 위로부터의 대선 투쟁(후보전술)을 통해 그리고 실패한 진보정당 운동과 야권연대에 대한 반(反)정립 운동을 통해 투쟁 동력과 당 건설 주체를 확보하여 당 건설을 할 수 있다는 거짓을 유포했다. 결국, 공동전선을 통한 단계론적 계급정당 건설 노선이 선거 전술과 혼합되어 타락하는 운동 세력의 유력한 생존전략이 되었었다. 그리고 9년이 지난 지금, 제대로 된 반성과 성찰도 없이 이들은 더욱 우경화하여 ‘사회주의 좌파 후보’ 간판을 내걸고 부르주아 제도권 정당으로 향하는 최악의 생존 전략을 채택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과정에서 실현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도 없다. 이제라도 사회주의당 건설 운동을 포기하고 부르주아 정치의 좌익으로 전향했다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노동자들에 대한 신의며, 운동의 미래를 위해 바람직하다.

 

이들이 향하고 있는 제도권 정당에 대한 비판은 아래의 인용문으로 대신한다.

 

"민주주의 공화국은 자본주의를 보호하는 가능한 최고의 정치적인 외피이다. ... 자본은 ... 그 권력을 매우 공고하게 확립하는데, 부르주아-민주주의 공화국에서 어떤 사람이나 제도, 또는 어떤 정당의 변화도 이를 흔들 수 없다."(레닌, 「국가와 혁명」)

 

"민주주의" 선거는 부르주아지 손에 있는 권력을 합법화하는 기만적인 정치 무대이다. 실제로 부르주아지는 이른바 "공공의 의견"을 매스미디어부터 시작하여 학교, 종교 제도로 모양 짓는 도구들을 통제한다. 이 ‘민주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계급은 아무것도 아니다. 모든 제도적 결정은 자본가들의 경제적 필요와 양립 가능한 것이어야만 한다. 따라서 국가의 관리자들은 지배계급의 대표들이다.

 

이러한 제도들을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자본가들의 착취에서 자신을 해방할 수 있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완전히 환상이며, 이 제도들이 진실로 부르주아지가 경제적 권력을 휘두르기 위해 보유한 가장 훌륭한 정치적인 수단인 한 그러하다.

 

다양한 제도권 정당들은 지배하는 자와 그 반대에 있는 자들 사이에서 기만적인 게임을 수행한다. ‘당’끼리 대립 뒤에는 종종 부르주아지의 서로 다른 분파 간의 권력 투쟁이 있을 뿐이거나, 더 단순하게는 더 안락한 제도권 의석에 앉으려는 서로 다른 정치인들 간의 무의미한 경쟁이 있을 뿐이다.

 

본질적으로, 어떤 제도권 정당도 이 체제의 경제적, 사회적 기반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최선의 경우에도 정당은 관리에 있어서 환상에 불과한 차이를 제안할 뿐이다: 보다 인간적인, 공정한, 더욱 ‘민주적인’ 얼굴의 자본주의 등. 의회에 의석을 차지하고 있거나 그러고 싶어 하는 자칭 코뮤니스트 정당들 또한 진정한 혁명적 강령을 보유하고 있지도 않을뿐더러, 그들은 노동자 투쟁을 위한 제도적인 경로라는 환상만을 확산시킬 뿐이며, 대부분 언제나 (이른바 ‘급진 좌파’ 정당과 마찬가지라도) 지역 기관들에서 다른 부르주아 정당과 협력한다.

 

따라서 우리의 약속은 선거에서 대중 투표를 목표로, 제도권 내에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정당의 건설이 아니다. 우리가 건설하고자 하는 당은 국제적이고 국제주의적인,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정치적 기준점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급정당이다.”

(‘우리는 모든 제도권 정당에 반대한다’ 「국제코뮤니스트경향」)

 

 

 

 

 

자본주의 착취체제가 지속하는 한 계급투쟁에 진공상태는 없으며, 오히려 계급투쟁과 혁명적 계급의식을 담아낼 그릇이 부족할 뿐이다. 계급투쟁과 계급의식의 발전 없이 혁명당 건설은 불가능하다. 계급투쟁의 깊이는 당 건설의 주체를 담보해주고, 계급의식의 발전은 강령으로 표현된다. 당 건설의 주체와 강령을 포기한 당 건설이야말로 진공상태에서의 당 건설과 같다. 더욱이 진공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진흙탕(부르주아 선거판)에 빠져버리는 것은, 그동안 진공상태에서 운동을 해왔다고 고백하는 것과 다름없다.

 

혁명의 승리는 계급의식이 혁명 강령에 근접했을 때 현실화한다. 이때 당과 계급은 차이는 가장 가까워지며, 비로소 프롤레타리아 혁명정당, 프롤레타리아 대중정당으로 현실화한다. 따라서 계급의식이 정체되어 있거나 혼란스러운 일상시기에 대중정당을 건설하겠다는 것은 혁명과는 거리가 먼 개량주의 당을 만들겠다는 의미이다. 또한, 강령에 입각하지 않은 노동조합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활동가 당을 만들겠다는 발상은 계급의 일을 대신하거나 관료적으로 관리하는 대리주의 당으로 향하게 된다.

 

자본주의 아래서 노동자들이 일상적 투쟁의 과정에서 얻게 된 계급의식은 혁명적 의식으로 진전될 수도 있지만, 투쟁의 시기가 지나면 다시 후퇴할 수도 있기에, 노동자계급에는 계급의 모든 역사적·이론적인 성과와 경험을 온전히 담아내는 강령을 가진 혁명당이 필요하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에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얻게 하고, 미래의 혁명적 투쟁을 준비할 수 있게 하는 것이 혁명당의 과업이다. 혁명가/코뮤니스트는 계급의식을 발전시키고 일반화하는 일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또한, 혁명가들의 개입은 노동자계급이 자신들의 정치적 전망을 설정하고 혁명적 무장을 준비하는 데 필수적이다.

 

 

코뮤니스트 혁명이 모든 투쟁의 순간에 구체적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코로나19 팬데믹에도 불구하고 세계 곳곳에서 프롤레타리아트 저항과 계급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에 혁명가들은 전 세계 노동자계급의 단결과 통일을 위해 반드시 혁명당을 건설해야 한다. 이것은 세계혁명을 위해 세계적 수준에서 개입하여 전 세계의 혁명진영을 재규합하는 혁명적 인터내셔널 건설의 과정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건설할 당은 선거가 아닌 계급전쟁을 실천하는 정당, 부르주아 제도권 내에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정당이 아닌 자본주의 체제 전복을 위해 부르주아 정치로부터 철저하게 독립한 계급 정당이다. 자본주의 쇠퇴기, 끝 모를 위기의 시기, 노동자계급에 필요한 당은 국제적이고 국제주의적인,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과 코뮤니스트 혁명의 정치적 기준점 역할을 할 수 있는 코뮤니스트 노동자당임을 명심하자.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이형로

 

 

<편집자 주>

이 글은 「코뮤니스트」 창간호에 실렸던 글이다. ‘공동전선’, ‘당 건설’에 대한 문제의식은 현재의 정세에서도 여전히 유효하기에 보완하여 다시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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