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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령 테제(Barbaria)와 우리의 논평

우리는 최근에 혁명 그룹 「바르바리아」(Barbaria)가 공개한 강령 테제를 읽고 토론을 진행했다.1) 테제는 이 그룹의 웹사이트에서 볼 수 있고 또한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있다. 우리는 「바르바리아」 그룹에 비판적 논평을 보내는 것이 유익하리라고 생각했다. 논평은 그 자체로 ‘매우’ 비판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분명 우리는 주요한 계급적 입장을 공유하는 것처럼 보인다(이 강령은 우리가 우리의 ‘정치 강령2)’에서 선언하듯이, 자신들을 ‘계급의 첨병’으로 명백하게 단언하지 않고 있어, 우리는 ‘처럼 보인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접근법과 방법론에서 그리고 거기서 비롯하는 강령적·이론적 틀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도 이 테제는 역사적 유물론, 즉 맑스주의 방법론에 고유한 역사적 차원을 무시하고 있다. 제시된 정치적·계급적 입장은 계급투쟁에 대한 유물론적 이해보다는 혁명적 의지 또는 심지어는 혁명적 감정에 기초하고 있다. 그 결과 우리가 제거하고자 하는 두 가지 주요한 취약성이 등장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아나키즘’이라고 묘사하곤 하는 접근법 그리고 계급투쟁과 혁명적 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이 테제의 핵심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망각은 아닐지라도) 현저한 과소평가이다.
이 그룹 자체는 아니라도 그룹 성원 중 일부는 예전 「국제코뮤니스트그룹」(IGC-GCI)에 영향받은 사람들임을 알고 있다.3) 또한, 우리는 바르바리아 그룹이 창립 이래로 이 경향과 단절하고 좌익 코뮤니즘, 특히 이탈리아 좌익 코뮤니즘을 습득하기 위해 재차 노력해 왔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룹의 웹사이트를 살펴보면, ‘좌파’를 향한 이러한 동력과 그것을 회복하려는 이러한 노력이 아주 명백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힘닿는 데까지 이바지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노력이고 이러한 이론적-정치적 투쟁이다. 이 테제와 우리의 비판을 공개하면 우리 두 그룹과 그들의 상호 해명을 훨씬 뛰어넘는 관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전체 혁명 진영에 이 형제애적인 ‘토론-투쟁’에 참여할 것을 촉구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세계 정당을 건설하기 위한 조건을 가장 잘 마련하는 데 있어 강령적 입장의 대립은 필수적이다. 곧 펼쳐질 역사적 드라마에 직면하여 시간이 부족하기에 더욱 그렇다.
우리는 비판의 형식이나 표현을 내부 토론을 위해 발표했던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따라서 바르바리아의 테제를 그대로 게재하고 주석 형태로, 괄호와 굵은 글씨로, 우리의 비판적 의견을 덧붙였다. 이 방식은 테제별로 각각의 비평을 쉽게 표현하고 설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독자가 자신의 길을 찾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부분적인 답만 제시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으며, 강령 테제 자체와 우리의 비판 양쪽 모두에 대한 종합적인 접근을 어렵게 만들 수 있다는 위험도 있다. 하지만 독자와 활동가들이 이 글을 통해 도움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바르바리아에 의견을 전달한 것도 이러한 형태이다. 테제와 논평의 길이를 고려할 때 한 호에 모두 게재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이 첫 번째 부분에 이어서 「혁명인가 전쟁인가」 다음 호(30호)에 두 번째 부분이 게재될 예정이다.
2024년 11월
코뮤니스트좌파 국제그룹(IGCL)
1. 역사적 유물론
혁명에 대한 열망은 직관적이다. 다양한 형태로 이 체제의 폭력을 경험하고, 일시적으로든 의식적인 결단을 통해서든, 사태의 급진적 변혁에 대한 필요성을 기획해 본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반면에 혁명가로서 행동하는 것은 직관적이지 않다. 이 체제를 종식하는 방법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종식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전도된 것처럼 보이는 사회적 현실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사회의 기능을 해석하는 데 사용하는 방법이 근본적인 이유가 그 때문이다.
역사적 유물론은 생산양식이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 사회의 진화를 이해한다. 다시 말해, 한 사회가 물질적 삶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방식―사회가 사용하는 수단과 구성원들이 그렇게 하기 위해 자신을 조직하는 방식―을 통해서만 그 사회와 그 제도와 그 문화적·종교적·이데올로기적 표현을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요컨대 사회적·역사적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
생산양식이 사회적 총체를 정의한다. 그 내재적 모순이 사회의 역사적 발전을 특징짓는다. 자본주의에서 생산력과 사회적 생산관계의 충돌로 종합된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지 못하는 무능력으로 인해, 상승과 쇠퇴의 곡선을 따르거나 점진적인 방식이 아니라, 파국적인 방식으로 다음 생산 방식인 코뮤니즘이 탄생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갑자기 출현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생산양식으로 전환은 역사적 토대, 즉 그 출현 조건이 사전에 잉태되지 않고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인류 역사상 가장 파괴적이고 소외된 생산 방식인 자본주의는 그럼에도 코뮤니즘의 물질적 토대를 마련한다.
[역사적 유물론에 관한 주장은 그 자체로 환영받을 만하다. 역사적 유물론의 적용은, 방법론적 수준에서 항상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 형이상학의 압력을 받는 모든 코뮤니스트 조직에 영구적인 투쟁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 이 주장은 모든 혁명 그룹에 필수 불가결하다.4]
유감스럽게도 이 테제의 설명은 역사적 유물론의 접근법과 방법에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그것은 “혁명가로서 행동하는 것은 직관적이지 않다”라는 개인의 관점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접근법은 많은 정치적 결과를 초래하며, 무엇보다도 문서 전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둘째이자 가장 중요한 점은, 이 첫 번째 테제에서 사회 세력, 즉 계급에 대해서는, 특히 착취당하며 혁명적인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역사적 유물론에 기반을 둔다고 주장하는 강령 문서는 무엇보다도 “계급투쟁이 역사의 원동력”임을 주장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혁명적 계급이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는 한, 이 테제는 자본주의로부터 코뮤니즘으로 기계적 또는 자동적 이행―비록 “파국적으로”일지라도―의 가능성에 대한 의견 또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는다.
역사적 유물론에 대한 이 테제는 강령적 텍스트로 보기에는 기껏해야 너무 모호하다. 모든 명제를 계급투쟁의 지형에 고정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유물론이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이론임을 확언함으로써, 개인이 아니라 계급이 사회의 근본적 토대라는 관점에서 출발해야 했을 것이다.]
2. 자본주의
자본주의는 계급 사회 중에서 오늘날 지구 곳곳에 존재하는 궁극적인 생산양식이다. 자본주의는 단순한 경제적 착취 체제가 아니며, 인종, 젠더 또는 기술-산업주의와 같은 다른 지배 체제를 수반하거나 그것들과 교차한다. 자본주의는 상품 생산에 기초하여 사회가 모든 측면에서 삶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방식이다. 욕구 충족을 위한 재화의 생산이 아니라 상품 생산이 사회의 목적이라는 것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닌데, 동일한 원리가 작동함으로써 사회적 관계가 사물의 형태를 취하고 생산물의 움직임이 생산자의 움직임과 삶을 결정하는 오토마티즘(automatism)이 유도되기 때문이다. 현실은 전도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상품 물신숭배이다.
자본주의의 국제적 성격은 세계 시장을 놓고 서로 경쟁하는 경쟁국들과 그에 따른 정치-군사적 우위로 표현된다. 다시 말해, 세계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착취한 잉여가치의 더 많은 몫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는 민족 부르주아지들로 표현된다. 다른 투쟁과 마찬가지로 강대국과 약소국이 존재한다. 자본주의의 국제적 차원은 파편화되고, 위계적이지만, 이것이 피억압 국가와 억압하는 국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글로벌 경쟁에서 다른 국가들보다 더 나은 성과를 내는 국가들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지형은 민족주의와 인종주의를 자본주의의 구조적 특징으로 만든다. 또한 모든 국가를 제국주의 국가로 만들고 국가 간의 전쟁을 체제의 필수적이고 영구적인 산물로 만든다.
자본주의는 마지막 계급 사회다. 그리고 이전 사회에 대해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사유재산과 사회 계급의 출현은 가부장적 재생산 구조를 요구했는데, 그 기본 세포는 가족에 있고 거기서는 여성의 신체에 대한 통제가 핵심이다. 계급 사회로서 자본주의는 여전히 가부장적 구조로 되어 있지만, 상업적이고 추상적인 논리―이것은 생산과 재생산,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을 분리하고, 생물학적인 것을 무한한 가치 생산에 걸림돌이 되거나 기껏해야 감당해야 할 비용으로 만든다―에 따라 가부장적 구조를 재생산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을 상품으로 전락시킨 생산양식이 자연환경에 조금이라도 덜 파괴적일 수는 없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생산 능력은 증대되고, 노동력은 더 많이 추방되고, 생산에 더 많은 원자재와 에너지가 필요하게 된다. 간단히 말해, 자본주의의 발전은 사회적 불행(잉여 인구)의 증가와 자연계의 급속한 파괴를 동반하며, 따라서 한 종으로서 우리 존재의 근간을 약화한다.
그 근저에는 가치의 고갈이 있다. 이 체제가 도달한 고도의 사회화와 생산 능력의 발전은 자본주의의 특정 범주(가치, 상품, 임금노동)뿐만 아니라 계급적 생산양식의 중추였던 범주들(사유재산, 가족, 국가)도 역사적으로 쓸모없게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고갈은 새로운 생산양식을 향한 점진적인 쇠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고수하는 데 따른 파국적인 결과를 증폭시킨다. 이는 생산력은 성장을 멈출 수 없으므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즉 점증하는 사회적 생산과 생산물의 사적 전유 사이의 모순―이 점점 더 격렬해지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죽임으로써 죽는 자동 기계이며, 기존의 사회적 관계를 혁명적으로 전복하지 않는 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에 관한 이 두 번째 테제는 실제로 몇 가지 문제를 다소 산만한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테제는 계급 적대감을 글과 방법론의 핵심에 두지 않은 이전 테제의 접근 방식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로 인해 좌파 이데올로기와 그 정치적 입장 중 일부, 특히 페미니즘과 관련된 입장에 양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1) 계급투쟁 원리에 대한 과소평가
첫 문단에서 자본주의가 “계급 사회 중에서 …… 궁극적인 생산 방식”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좌파, 따라서 부르주아적이고 반(反)혁명적인 이데올로기, 특히 페미니즘이나 “교차성(intersectionality: 차별 요소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말하는 용어-옮긴이)”과 자신을 “구별하는데”에 주로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원동력으로서 계급투쟁”이라는 원칙―반복하건대, 불행히도 무시되거나 적어도 과소평가하였다―을 긍정하는 것만으로도, 좌파·반(反)혁명적 교차성 이론과 연결된 “부분적 투쟁”과 여타 “사회운동”에 대해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거부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문제에 대한 좌파적 지형과 틀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 접근법이 탄생했다. 좌파적 지형에 대한 이러한 화해적 접근법은 자본주의의 “가부장적 구조”에 다시 초점을 맞춘 세 번째 문단에 반영되어 있다.
2) 역사적 방법 무시
이 테제들을 전개하기 위한 역사적 준거와 틀이 부재하고 “역사적 유물론”의 특징인 역사적 방법이 부재하기 때문에, 그런 지형이 가능하고, 심지어는 좌파적 입장―가부장제와 인종주의는 자본주의에 “구조적”이라고들 한다―이 부분적으로 침투할 가능성이 있다.
역사적 유물론은 이것이 가족과 가부장제의 근간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설명한다. “오직 피억압 계급, 즉 오늘날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서만 … 고전적 일부일처제의 모든 토대가 제거된다. 여기에는 모든 재산이 완전히 부재한데, 그것의 보호와 상속이 일부일처제와 남성 지배의 기반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남성의 지배를 주장할 아무런 자극도 없다.”5) 가부장제의 잔재, 무엇보다도 성차별 그리고 여성과 동성애에 대한 여타 형태의 차별은 “왕위에 대한 신적 권리에 의한 통치만큼이나 죽은 과거의 반동적인 잔재”이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지적한 것처럼 이러한 잔재는 “인민에게 해로운 강력한 이해관계의 도구”가 되었기 때문에 지속되고 있다.6) 그렇다면 미국에서 트럼프의 선거 유세 때 다시 본 것처럼, 이 잔재들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의해 육성되며, 특히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후진적인 부분에서 널리 육성된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중요한 프롤레타리아 운동이 부재한 상황에서, 이러한 “반동적 후유증”은 노동계급의 가장 후진적인 계층과 개인을 포함하여 여성에 대한 순수한 성차별, 마초주의, 경멸, 심지어 폭력으로까지 악화하며, 무엇보다도 인종주의-반(反)인종주의, 페미니즘-가부장제라는 비(非)계급주의적 대립을 강요하는 지점까지 악화하는데, 이것들은 투쟁을 통해 그리고 투쟁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단결을 방해하고 공격할 수 있을 따름이다.
자본주의에 “구조적”인 것으로 제시된, 인종차별에도 같은 것이 적용된다. 하지만 자본은, 생산 과정에서 그리고 급여 노동자, 프롤레타리아로서, 모든 프롤레타리아를 비슷하게 만들어 피부색, 젠더, 출신 같은 개개인의 고유성을 부정할 정도에 이르게 만든다. 그리고 반(反)인종주의는 어떤가? 부르주아지는 인종주의와 반(反)인종주의 정서를 프롤레타리아 투쟁 발전의 기능이면서 그 발전을 가로막는 기능으로 완벽하게 이용하고 조장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코뮤니스트 강령 문서가 확언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계급투쟁의 원칙과 역사적 유물론의 방법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다.
이 테제의 나머지 부분과 관련하여, 두 번째 문단은 제국주의의 발전을 매우 명료하게 밝히고, 민족 해방 투쟁과 제국주의 전쟁의 부르주아적이고 반혁명적인 특성을 분명하게 선언하는 것 같다. 이 민족 해방 투쟁 문제에 대하여, 만약 이 글에서 드러나는 견해―오늘날 이러한 민족 해방 투쟁이 반혁명적이라는 것―이 실제로 바르바리아 견해라면, 우리는 바르바리아와 같은 편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다시 한번, 역사적 방법의 부재와 주제에 대한 정밀성 부족은 동일한 계급적 입장을 공유한다는 것이 동일한 이해와 동일한 전투적인 접근법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우려를 불러일으킨다. 실제로 특정 조건에서 프롤레타리아가 민족 해방 투쟁을 지원할 수 있었던 시기가 있었고, 전쟁이 제국주의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과는 다르게 프롤레타리아의 입장을 결정할 수 있었던 시기가 있었다. 바르바리아가 이러한 견해를 공유하는지 확신할 수 없다.
그런데 “가치의 고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3. 코뮤니즘
다음 생산 양식인 코뮤니즘은 소련이나 마오주의 중국 또는 카스트로와 게바라의 쿠바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반(反)혁명이 코뮤니즘이라고 제시한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특히 파리 코뮌의 위대한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투쟁―으로 출현한 「코뮤니스트 동맹」과 IWA에서 발전하기 시작했으며 맑스와 엥겔스가 이론적으로 종합한, 혁명적 강령을 직접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반(反)혁명이 혁명의 탈을 쓰고 코뮤니즘이라는 용어를 하나하나 뒤집어 놓는 것보다 지금까지 우리 혁명 운동에 더 나쁜 것은 없었다. 우리는 제2, 제3 인터내셔널 내의 기회주의와 스탈린주의 반(反)혁명에 맞서 물리적·강령적 투쟁을 벌였던, 그리고 세기의 한밤중에서 우리 계급의 다음 혁명적 공격에 필수적인 교훈을 끌어냈던 그러한 동지들을 요구한다. 우리는 특히 이탈리아 코뮤니스트좌파에 관해 이야기하지만, 볼셰비키와 레닌, 로자 룩셈부르크와 독일-네덜란드 좌파의 초기 기여,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중 제4 인터내셔널과 결별한 국제주의자들―나중에 FOR를 설립한 무니스(G. Munis), 그리고 아지스 스티나스(Agis Stinas), 응오반후옛(Ngo Van Xuyet) 등―의 입장도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제시되고 우리가 공유하는, 이제는 원칙이 된, 두 가지 매우 중요한 정치적 입장이 있다. 소련에서 쿠바, 중국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들의 자본주의적 성격, 그리고 제2, 제3 인터내셔널 내에서 좌익 분파의 투쟁에 관한 주장이 그것이다. 이 주장은 코뮤니스트 강령의 강령적 토대를 마련하는 데 있어 기본이며, 혁명적 그룹이 그 정교화에 참여할 뿐 아니라 당을 위한 투쟁과 계급투쟁의 정치적 “지도력”을 위한 투쟁에 참여하는 데 있어서 기본이다.
너무 까다롭게 보일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우리는 동지들의 요구―“그러한 동지들을 요구한다.”―를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이는 좌파의 정치적 흐름에 대한 요구(테제에서는 “언급”으로 축소되었다) 대신에 개인들―그들이 아무리 존경스럽고 칭찬할 만하더라도―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 비판은 첫 번째 테제의 첫 번째 문단에서 우리가 관찰한 것을 다시 언급한다. 유물론적―맑스주의적―이며 코뮤니스트적인 접근법의 출발점은 개인일 수 없다. 혁명적 개인, 즉 조직된 투사들일지라도 안 된다. 출발점은 계급과 그들의 정치적 표현, 프롤테타리아트와 그 혁명적 소수자, 조류, 그룹, 그리고 정당일 수 있을 뿐이다.
“사회적 결론을 도출하고 사회적 청사진을 구성하기 위해, 심지어는 사회를 부정하기 위해 개인 단위에서 출발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가정에서 출발하는 것이다.”7)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코뮤니스트 동맹, 제1 인터내셔널, 제2 인터내셔널, 제3 인터내셔널, 그리고 내부 기회주의에 맞서 싸워 코뮤니스트 강령의 역사적 연속성을 떠안은 모든 좌익 조류와 분파의 “전투를 요구”한다. 투쟁을 요구한다고? 다시 말해, 취해진 입장 자체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입장이 취해진 순간과 상황을 “요구”하는 것이다. 즉, 맑스주의 좌파가 참여한 정치적, 이론적, 조직적 등의 여러 바리케이드나 연속적인 투쟁에서 맑스주의 좌파와 같은 편에 서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도 우리의 역사적 요구와 주장을 확립하기 위해 맑스와 엥겔스를 필두로 한 가장 저명한 투사들을 “언급”할 수도 있다.]
코뮤니즘은 화폐, 상품, 사유재산이 없는 사회이며, 따라서 사회 계급, 가족, 국가가 없는 사회이다. 이러한 범주를 폐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국경이 허물어지고, 구성원들의 다양한 능력에 기초하여 인간의 필요에 따라 생산이 계획되며, 노동의 산물이 구성원들의 필요에 따라 분배되는 세계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가치의 영구적인 증가를 목표로 하기에 생산을 위한 생산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와 달리, 코뮤니즘은 현재와 미래 세대의 인간적 필요를 목표로 하므로 반(反)생산주의적이다. 코뮤니즘으로 전환하는 과정은 생산의 감소와 변형, 그리고 이 체제에서 나타나는 소비의 영구적인 낭비―그 핵심 요소 중 하나는 도시와 시골의 분리이다―를 제거하는 일을 수반한다.
[우리는 여기서 표현된 코뮤니즘에 대한 부인할 수 없는 코뮤니스트 개념―그것은 계급 원칙에 대한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을 공유한다.]
코뮤니즘은 바람직하고 가능할 뿐만 아니라,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시의적절하다. 우리가 갈수록 더 많이 경험하고 있는 사회적·생태적 위기, 즉 가치 고갈의 원인은 바로 인간의 발전이 더는 사유재산과 그 논리적 파생물(상품, 화폐, 임금노동, 사회 계급, 가족, 국가)의 존재를 유지할 수 없다는 고백이다. 일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우리는 가치 없는 돈에 둘러싸여 있으며, 자본가계급은 점점 더 비인간적이 되고, 가족은 영구적인 위기에 처해 있으며, 국가는 내부에서는 민족주의 세력에 의해 그리고 외부에서는 국제 자본의 강압으로해 주권을 도전받고 있다. 자본주의 자체가 자신의 사회적 범주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어떤 생산양식도 무에서 생겨나지 않고, 이전 생산양식의 모순을 기반으로 한다. 코뮤니즘은 한 세기 넘게 가능했지만, 오늘날 그 현실성은 명백하고 엄연하다.
[우리는 민족주의 세력, 즉 “극우” 세력이 국제 자본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주권에 “도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라고 생각한다. 제국주의는 가장 약한 자본주의 국가의 주권조차 가장 강력한 국가의 이익을 위해 약화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의 자유론자 등을 포함한 극우파는 국가를 강화하는 데 관여하고 있으며, 국제 자본, 즉 끊임없이 경쟁하는 자본은 자신의 이익을 방어하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민족 국가가 필요하다. 중국과 러시아와 같은 국가의 경우가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미국과 경제 정책에서 국가의 역할―보기를 들어 바이든의 경제 정책―이나 국가의 지원과 공공 명령 덕분으로만 발전할 수 있었던 일론 머스크(Elon Musk)와 같은 자본가들을 위시하여, 서방의 “자유 시장” 국가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민족주의” 우익을 국가에 도전하는 세력으로 묘사하는 것은 앞으로의 정치적 이해관계, 특히 그들이 집권하게 될 때의 의미를 오해할 위험이 있다.]
4. 세계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제 내부에서 노동자의 권력을 확대하는 더딘 입법 작업을 통해, 부르주아 국가 내부로부터 기존 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협동조합, 생태마을, 불법 점거 시설 등을 건설하는 더딘 사회 활동을 통해, 그 관계가 국가와 나란히 변형될 수도 없다. 자주관리는 “사장이 없으면 착취도 없다”라는 생각으로 자본주의적 착취를 내면화하는 함정이다. 자본주의를 종식할 유일한 방법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권력 기관―계급 의회와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을 수립하고 무기를 들고 부르주아 국가를 파괴하여 프롤레타리아 계급 독재를 확립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의회주의에 대한 계급적 입장을 공유한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계급 “경계선”으로서 그것의 성격이 (자기 관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명시적이지 않다는 사실 이외에도, 그것은 역사적 언급 없이 표시된다.
프롤레타리아 봉기와 “계급 독재”,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입장은, 비록 “권력 기관”에 대한 제시가 정확하지 않더라도, 근본적이다. 왜 노동자평의회를 봉기와 권력의 기관으로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는가?
한편 “권력 기관”으로서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은 프롤레타리아 진영 내에서, 특히 권력 행사에서 당의 역할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어떤 견해를 채택하든, 당이 권력을 행사할 수 있든 없든, 계급 독재가 지구 전체로 확장되지 않는 한, 인터내셔널, 즉 국제적 당이 “권력 기관”이며, 인터내셔널로서 권력을 장악한다고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질문은 심도 있는 논의를 해야 하며, 오늘날에도 필요(요구?)로 한다. 우리는 IGCL 내에서 이 논의를 시작했지만,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했는데, 프롤레타리아 진영 전체가 이 논의에 참여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국제적인 성격을 지닌다. 혁명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하지 않는 한, 어떤 영토에서도 가치를 없앨 수 없다. 다시 말해, 어느 한 나라에서도 사회주의는 없다. 같은 이유로 사회 계급의 존재는 종식될 수 없으며 계급 독재가 필요하다. 봉기가 일어나는 영토 안에서 이 독재는 부르주아 반동과 상업 관계의 발전에 맞서 권위적으로 자신을 강요해야 한다. 이는 첫날부터 노동 시간의 최대한 단축과 배분, 기본 생계 수단의 무상 제공, 생산수단 생산에 대한 투자 중단, 그리고 소비 부분으로 생산수단의 전환을 통해서 시작해야 한다. 외적으로, 퇴보하는 과정에 대한 유일한 안전장치로서 인터내셔널은 반드시 자본주의 세계 전체를 포괄하도록 세계혁명의 확장과 국경 없는 계급 독재의 확장을 추진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 인터내셔널은 각국 정당의 연합이 아니라, 단일한 강령을 지닌 단일한 세계 정당이 되어야 하며, 그 다양한 부문, 특히 프롤레타리아 봉기가 승리한 곳들은 거기에 종속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혁명이 국제적으로 승리를 거둔 후에, 가치를 종식하고 결국 사회 계급을 종식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계급으로 나뉜 사회를 관리하기 위해 탄생한 기관인 국가는 역사의 쓰레기통에 버려지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다시, 코뮤니즘과 이행기에 대한 비전이 분명하게 제시된다. 특히 계급 독재가 설정해야 하는 목표가 제시된다. 우리가 보기에 우선순위는 다음과 같다. 1) 부르주아지에 대한 계급 독재, 2) 혁명의 확장, 3) 프롤레타리아트―생산양식이 전 세계적으로 사라지지 않는 한 피착취계급으로 남아있다―의 생활·노동 조건의 최대 개선, 4) 권력을 장악한 프롤레타리아트가 내전이나 무장 반(反)혁명에 직면할 것임을 인지하고 프롤레타리아의 조건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생산을 계획. 우리는 특히 러시아의 경험을 통해, 다소 고립된 국가나 국가 집단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행사하는 것은, 혁명을 확장하고 부르주아지가 강요할 내전을 치러야 할 필요성과 프롤레타리아의 생활·노동 조건을 방어해야 할 필요성 사이의 모순, 즉 한편으로는 결핍과 전쟁, 심지어 대규모 파괴의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소비를 위한 생산과 다른 한편으로는 프롤레타리아 권력의 방어와 계급 독재 상태 사이의 모순에 직면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는 인터내셔널이 여러 국가 정당의 연합이 아니라 단일한 강령을 지닌 단일한 세계 정당을 기반으로 형성될 수 있다는 견해를 공유한다.]
5. 최소 강령과 최대 강령
코뮤니즘은 우리가 실현해야 할 최소한이다. 1917년에 시작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첫 번째 세계 공격(그 이전에 1848년 혁명과 1871년 혁명이 있었다) 이후, 코뮤니스트 혁명은 전 세계에서 실질적으로 가능했다. 갖가지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요구나 개량주의적 요구가 혁명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인데, 그런 요구는 이미 죽어야 했을 체제를 다시 세우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혁명가들은 그것이 자신들의 최대 강령, 즉 코뮤니스트 투쟁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끝나기를 원하지 않는다며, 이러한 요구를 자신들의 최소 강령의 일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입장―최대 강령, 부르주아적 또는 개량주의적 요구 대 혁명―을 공유한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 이러한 문제에 대해 같은 편에 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제국주의 시대나 자본주의 쇠퇴 시기, 그리고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광범위한 시기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입장들이 제시되는 비역사적 방식은 역사적 유물론에 반하는 것으로 맑스주의적 비전이라기보다는 “아나키스트적” 비전에 해당한다. 실제로 바르바리아는 1848년 유럽의 혁명적 물결과 1917년 러시아혁명이 촉발한 혁명적 물결을 동일시함으로써 코뮤니스트 동맹과 맑스가 취한 정치적 입장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1848년에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렇든 저렇든 민족 자본 자체의 설립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 자체의 출현과 계급투쟁의 발전을 위해 “부르주아 민주주의” 요구에, 자율성을 유지하면서, 참여할 수 있었고 또 참여해야 했다. 당시 아일랜드와 폴란드에 대한 맑스와 엥겔스의 입장은 이 점에서 매우 명확하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추상적이고 비(非)역사적인 접근법은 논증 자체를 약화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계급투쟁에 자신을 새기고 방향을 정하는 바르바리아의 장래의 능력―윤리적 또는 도덕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계급 간 힘의 관계가 변화하는 현실에 따른 전위로서 능력―도 약화한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정의상 새로운 부르주아 국가의 건설을 촉진하고 계급 간의 대립이 아니라 인종이나 민족 간의 대립에 그들의 투쟁 기반을 두어, 프롤레타리아트를 분열시키고, 제국주의 투쟁에서 “그” 부르주아의 이익을 옹호하도록 강요하며, 국제주의를 “국민 사이의 연대”, 즉 저 부르주아에 대한 대외 지원과 혼동하는, 모든 민족 “해방” 운동에 대한 지원에 반대한다.
[동일한 관찰과 비판. 즉, 우리는 입장 자체를 공유하며, 오늘날 이 바리케이드의 같은 편에 서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영원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가치를 지닌 입장이다.]
자본주의 국가의 가장 특징적인 조직 형태인 민주주의의 수호는 언제나 그 국가의 강화를 수반하며, 언제나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에 반(反)한다. 이 민주주의 수호가 의회 참여나 입법 변화를 촉진함으로써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든, 군부나 파시스트 독재에 맞서 “덜 해로운” 방식으로, 간접적으로 이루어지든 마찬가지다. 역사적으로 반(反)파시즘은 프롤레타리아트에 중대한 패배였다. 그것은 파시즘의 손에 맡겨진 국가를 지키기 위해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와 연합하는 것을 의미했으며, 국제주의를 포기하고 새로운 제국주의 전쟁에서 총알받이로 이용되는 것을 의미했다.
[우리는 반(反)혁명의 무기로서 반(反)파시즘이라는 바리케이드의 같은 편에 있다.]
노동조합주의는 작업장의 프롤레타리아 투쟁과 동일하지 않다. 노동조합주의는 노동 요구안에서 전투적 활동을 전문화하는 것으로 구성되는데, 이는 소수의 노동자가 상설기구를 건설하도록 이끈다. 소수의 노동자가 나머지 노동자들에게서 자신을 자율화하고,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면 자신들을 협상 기구―즉 자본과 중재하는 기구―로 건설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는 의미이다. 노동조합을 통해서든 더욱 수평적인 다른 방식을 통해서든, 노동조합주의는 항상 노동자의 당면 이익과 역사적 이해관계를 분리하는 경향을 내포하고 있다. 노동조합은 이러한 분리를 공고히 하는 형태이다. 노동조합의 기능은 노동력의 가치를 자본과 협상하는 것이므로, 노동조합은 자신의 존재 이유인 임금노동에 반대하는 투쟁에는 결코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다. 노동조합이 혁명에 반대한다면, 그것은 노동조합 지도부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되풀이해서 만들어내는 바로 그 활동 때문이다.
[오늘날 … 비(非)프롤레타리아적이고 반(反)혁명적인 조직으로서 노동조합에 관한 한, 의심할 바 없이 우리도 같은 편에 서 있다. 그러나 생디칼리즘에 대한 테제의 비판은 그 자체로 다시 한번 비(非)역사적이다. 그들의 반(反)혁명적 기능이라는 것은 그들의 “자율화”, 그리고 노동력의 협상가들로서, 노동과 자본 사이, 즉 계급 사이의 중재자로서 그들의 기능과 연결되는 것일 터이다. 노동조합과 심지어 생디칼리즘은 그것들이 19세기에 시작될 때부터 프롤레타리아 투쟁과 “모순적”인 것이었을 터이다.
노동조합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맑스와 당시 노동운동 전체가 지녔던 이해와는 완전히 다르다. 맑스는 이렇게 말했다. “노동조합은 사회주의의 학교이다. 노동조합에서 노동자들은 매일 자본에 맞선 투쟁을 직접 눈으로 보기 때문에 사회주의자가 된다.”8) 여기서 노동조합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에 맞서 싸우기 위한 조직으로 간주했다. 바르바리아의 테제와는 반대로, 맑스는 노동조합이 당면 이익과 역사적 이해관계 사이, 나아가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경제적 차원과 정치적 차원 사이의 분리가 아니라 연결을 가능하게 만든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문제의 이면에는 계급투쟁, 특히 프롤레타리아 투쟁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있어서 중요한 차이가 놓여 있다.
“노동계급의 계급투쟁은 경제적 투쟁과 정치적 투쟁이라는 두 가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사회 내에서 자본주의적 착취를 제한함과 동시에 부르주아 사회 자체와 함께 착취의 철폐를 목표로 하는 단 하나의 계급투쟁이 있다.”9)
경제와 정치라는 두 차원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 투쟁의 필수적인 부분이며, 서로를 “강화”한다. 이는 19세기 노동조합 투쟁에서도 이미 사실이었으며, 오늘날에도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이 문제뿐 아니라 노동조합의 “중재”, 즉 계급 간 중재 문제에 대한 이해와 입장은 노동자 투쟁에 대한 혁명적 개입에 중요한 정치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10)
오늘날 노동조합은 더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단일 조직이 아니다.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 계급투쟁의 조건도 역사의 흐름에 따라 발전하고 변화해 왔다. 19세기에 지배적이었던 투쟁 조건에서 노동조합은 노동계급을 위한 진정한 방어와 투쟁의 기관이었다. 일반화된 제국주의 전쟁 때문에 그리고 그 전쟁을 목적으로, 국가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강화되면서 프롤레타리아트와 그 대중 조직의 영구적인 생존과 투쟁의 가능성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점진적으로, 그다음 전쟁 자체 동안에는 잔인하게 억압되었다. 대중 파업의 현상은 기업에 의해 노동조합 투쟁이 점점 더 교착 상태에 빠지고 무력화되는 것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대응이었다. 그리고 제1차 제국주의 세계 전쟁의 필요에서 그리고 그것을 위해 노동조합이 국가기구에 점진적으로 통합되는 것에 대한 대응이었다. 대중 파업, 그 현상, 그 동력 또는 과정은, 오늘날, 2024년에, 전반적으로 전쟁으로 행진해 가고 있으며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더욱 절실한데, 적어도 “효과적”이고자 하는, 즉 가능한 한 유리한 세력 균형을 부르주아지에 강요하기 위하여 확대하고 확장하려고 하는 모든 파업이나 노동자 투쟁은 즉시 금지되고 탄압되기 때문이다.
“중재하는 노동조합”과 “국가의 정치적 기관으로서 노동조합” 사이의 이러한 차이는 노동자들의 투쟁, 그 자체의 역동성, 노동조합이 수행하거나 심지어 요구하는 행동을 이해하는 측면에서, 그리고 투쟁의 경제적 차원과 정치적 차원 사이 관계의 측면에서―예를 들어, 경제적·정치적 요구에 대해 취해야 할 개입과 자세에서― 구체적인 함의를 지닌다. 실제로 혁명가들은 경제적 요구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보니는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 세력에 맞서 투쟁을 이끌고, 최대한 많은 프롤레타리아와 작업장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가장 통일된 요구를 제시하여, 투쟁을 확대하고 일반화하고, 그리하여 가능한 한 유리한 세력 균형을 부르주아지에 강요할 의무가 있다. 경제적 요구의 선택은 투쟁을 분열시키는 것이 아니라 투쟁을 확장하고 통합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시간과 장소에 따라 가능한 한 가장 통일된 요구를 확립하기 위한 투쟁은 노동계급의 환경에서 부르주아 세력에 맞선, 더 넓게는 국가에 맞선 정치적 투쟁이 된다.
“(대중 파업에서) 경제적 요소들을 서로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정치 투쟁이 확산하고 명확해지고 복잡해짐에 따라서, 경제적 투쟁은 수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똑같이 확장되고 조직화하며 휘말린다. 이 둘 사이에는 가장 완전한 상호 작용이 있다.”11)
결과적으로 오늘날 노동조합의 기능은 이른바 중재자로서, 노동력의 가치를 어느 정도 잘 “협상”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노동조합의 역할은, 최소한의 정치적(그리고 이데올로기적) 신뢰성과 유효성을 유지하면서, 자본이 노동력의 가치를 영구적으로 낮추는 데 동참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를 계속 관리하고, 필요하다면 투쟁을 방해하고, 어떤 대중 파업의 동력도 막을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국가의 완벽한 정치 기관으로 이해되어야 하고 비난받아야 한다.]
(다음 호에 계속)
코뮤니스트좌파 국제그룹(IGCL)
「혁명인가 전쟁인가」 29호, 2025년
<주>
2. http://www.igcl.org/Programmatic-theses-Barbaria#nb1
3. https://archivesautonomies.org/spip.php?rubrique440
4. 변증법적 방법은 형이상학적 방법과 반대된다. 형이상학적 방법은 독단적 계시에 기초한 종교적 개념에서 비롯한, 결함이 있는 사고 형성 방식의 끈질긴 유산으로, 사물의 개념을 불변하고, 절대적이며, 영원하고, 어떤 근본 원리로 환원하 수 있으며, 서로 관련 없고, 일종의 독립적인 생명을 지닌 것으로 제시한다. 변증법적 방법에서는 모든 사물이 움직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움직임 속에서 서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사물의 개념, 즉 우리의 무(無) 속에 사물 자체의 반영조차도 서로 연결되고 관련되어 있다. 형이상학은 이율배반, 즉 서로 대립하는 절대적 용어들에 의해 진행된다. 이러한 상반되는 용어들은 결코 섞이거나 서로에게 도달할 수 없으며, 단지 하나의 존재와 다른 하나의 부재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를 긍정하는 것 외에는, 그것들의 연결에서 새로운 어떤 것이 생겨날 수 없다.
5. Friedrich Engels, The Origin of the Family, Private Property and the State, 1884, Marx-Engels, Collective Works, vol. 26.
6. Rosa Luxemburg, Women’s Suffrage and Class Struggle, 1912.
7. The Democratic Principle, Rassegna Comunista, year II, n 18, 28 February 1922.
8. Marx’s interview to the Volkstaat in 1869 republished by La Révolution prolétarienne #26 of1926, translated by us from French.
9. Rosa Luxemburg, Mass Strike, Party and Trade Union, emphasis added by R. Luxemburg (marxists.org).
10. Revolution or War #24 에 실린, 2022년 여름 영국에서 있었던 파업에 대한 ICT와 우리의 논쟁을 볼 것.
11. Rosa Luxemburg, 앞의 책.
<출처>
http://igcl.org/Programmatic-theses-Barba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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