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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체 게바라와 카스트로를 추종하는 이들에게, 스탈린주의 열대지역 변종의 실체와 노동계급에 대한 억압을 알리며!

 

“볼리바르 혁명”의 부르주아 민족주의와 노동자계급에 대한 억압

오세철

 

 

 

1. 라틴 아메리카의 좌선회는 부르주아 민족주의이다.

 

흔히 1990년대와 달리 21세기의 10년을 라틴 아메리카의 좌선회로 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2003년 아르헨티나의 페론주의 좌파인 네스토르 키르크너의 대선 승리, 2004년 우르과이 로자스의 대선 승리, 2005년 베네수엘라의 차베스의 대선 승리를 통한 ‘볼리바르 혁명’의 강화, 볼리비아의 모랄레스의 대선 승리, 브라질의 룰라에 이은 노동당의 대선 승리, 칠레의 중도좌파 베케레트의 승리로 라틴 아메리카의 인구 중 4분의 3이 이른바 “좌파” 정권 아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중미의 하이티, 니카라과, 멕시코까지 포함하여 미제국주의에 대한 반대전선이 세워졌다고 평가하고 있다. 과연 그러한가?

 

이러한 변화는 맑스주의 혁명가들에게 몇 가지 당면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첫 째, 지난 수십년간 생활수준이 극도로 저하된 이 지역에서 좌파 정권이 노동계급과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무엇인가? 둘 째, 지난 20년간 미국 헤게모니가 부과했던 신자유주의를 거부할 것인가? 셋 째, 미제국주의에 대한 위협이 될 수 있는가? 넷 째, 자본주의와 그 지배법칙에 ‘급진적’ 도전이 될 수 있는가? 이다.

 

라틴 아메리카는 수십년간 보호주의, 경제적 민족주의, 그리고 좌우의 민중주의적 독재가 노동계급과 대중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고 가난을 극복하는데 실패함으로써 중도우파 정권이 지배해 왔다. 그러나 1990년대에 부르주아권력이 연합한 「워싱턴 컨센서스」가 결국 노동자 대중의 생활수준 향상과 빈곤 퇴치에 실패함으로써 대중투쟁과 파업, 그리고 다양한 사회투쟁이 벌어졌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70년대까지 라틴 아메리카의 민중주의 좌파정권은 수입대체산업, 보호주의, 국유화, 그리고 외국인 투자에 대한 장벽으로 대표되는데, 21세기 좌선회는 이러한 과거로 돌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미국 헤게모니에 어떤 위협이 될 수도 없다.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신자유주의는 아옌데 정부 이후 칠레에 부과된 구체적 경제정책과 연관된 80년대와90년대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아니다. 다시 말해 미국 투자를 촉진시키는 국유 기업의 사유화나 엄격한 재정금융정책의 부과가 아니다. 오늘날 미국 헤게모니의 본질은 IMF가 마련한 표준인 국가의 재정적 “책임”, 자본과 상품을 위한 자유시장에 대한 기본적 책임을 지는 것이다.

 

이처럼 자본주의의 가치법칙은 무자비하다. 라틴 아메리카의 좌파 정부는 가치생산의 제약과 사회적 폭발을 방지할 필요 사이에서 운신할 여지가 적기 때문에 자본주의 지구화의 기본규칙과 규범에 도전할 수 없다. 더구나 민중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투쟁의 역사 속에서 노동자와 대중은 코카를 씹는 것이 배고픔을 달랠 수는 있어도 근본적 문제 해결이 아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신스탈린주의 「Monthly Review」는 볼리비아의 모랄레스 당선을 ‘세계의 역사적 사건’으로 칭송하는 어리석음을 보이고 있다.1) 또한 챠베스는 사회주의와 반(反)양키의 수사학을 넘어서서 자신의 모델을 ‘시장 사회주의’의 하나로 주장하지만 그가 수장으로 있는 남미 자유무역지역(Mercosur)2)는 사실상 반(反)양키를 위장한 자본주의 지구화의 핵심적 요소를 암묵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따라서 한 마디로 라틴 아메리카의 좌선회는 미국자본의 경제 헤게모니에 대한 어떠한 도전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미국의 경제 헤게모니가 아닌 군사·정치적 헤게모니에는 도전할 수 있을까? 미국 자본주의의 경제적 기반과 군사·정치적 기반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라틴 아메리카 좌파 정부의 위협과 도전 역시 실질적이 되지 못하고 수사에 그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수사가 아니라 실질적일지라도 미제국주의와 그 전략적 목적에 대한 반대는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 반대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보기를 들어 히틀러와 스탈린이 미국의 지구적 비재를 반대했어도 세계의 맑스주의 혁명가들은 그들을 지지하지 않았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차베스, 모랄레스, 오르테가 등의 수사가 반미의 경제적이고 군사·외교적 정책의 진정한 주도권을 가지고 변화될지라도 지금의 조건 아래에서는 그러한 정책 전환은 반(反)자본주의적이지도 않고 혁명적이지도 않으며, 좌파 정부의 의제도 아니다. 여전히 미국은 라틴 아메리카의 무역 파트너이며 투자 자본의 가장 큰 원천이다. 반자본주의가 때때로 미제국주의 반대, 볼리바르주의, 민족주의, ‘자유시장’의 거부, 자주경제와 동일시되고 부의 분배 양식의 급진적 변혁과 동일시되지만 자본주의 구조의 혁명적 전복과는 철저히 구분되어야 한다.

 

현재 라틴 아메리카의 좌파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노동계급과 대중에 대한 통제를 유지하는 것뿐이며, 그것은 양키 악마에 맞서는 대중을 동원하여 라틴 왕국을 꿈꾼 부르주아 혁명의 노예주이며 지도자인 시몬 볼리바르를 닮는 것이다. 이는 <연재 4>의 마오주의의 환상과 비슷하다. 늘어나는 실업자와 빈민에게 복지와 공공사업을 통한 시혜는 자본주의의 동전의 양면인 강제노동과 같다. 이것이 라틴 아메리카의 좌선회가 지니는 진정한 의미이며, 오히려 이에 맞서는 라틴 아메리카의 노동계급의 투쟁을 통한 사회주의 혁명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라틴 아메리카의 모든 국가를 다룰 수는 없으므로 부르주아 혁명의 대표적 보기로서 쿠바 혁명과 억압, 그리고 선거 사회주의의 대표적 보기인 베네수엘라의 차베스주의를 검토하려고 한다.

 

 

2. 쿠바, 카스트로, 체 게베라, 그리고 억압

 

1931-33년 임시 대통령 쎄스페데스에 쿠데타를 일으킨 바티스타는 1940년 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되고 1952년 다시 쿠데타로 집권한 뒤, 지방 인민사회당의 지지를 받았다. 쿠바 경제는 급성장했으나 도시와 농촌 사이에 빈부 격차가 벌어졌다. 1958년 하바나에는 성매매 여성이 11,500명에 달했으며 부패가 극심했다.

 

멕시코에서 「7월 26일 운동(M-26)」이라는 게릴라를 결성한 카스트로는 1958년 11월 7일 체 게바라와 함께 하바나로 진군하여 1959년 1월 8일 수도에 입성한다. 5개월 동안 바티스타 지지자 6백여 명이 처형되었는데, 광장에서 로마식 공개 처형으로 이루어져 전체주의적 테러의 양상을 띄었다. 혁명 직후 카스트로는 뉴욕 타임즈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권력에 관심이 없다. 승리 후에 고향 마을로 가서 변호사를 하고 싶다”고 했지만, 1976년까지 대통령령으로 지배했으며 정적에 대한 탄압이 지속되었고, 혁명 동지들을 교체했고, 1976년 소련 모델의 헌법을 제정했다.

 

노동자는 억압받는 또 다른 대상이었다. 1962년 8월 설탕 노조 지도자인 살바도르가 체포되고, 12년 동안 수감되었다. 교육과 예술 분야의 민주인사들에 대한 탄압도 지속되었는데, 1961년9월 17일 131명의 신부가 국외로 추방되었다. 산업부 장관과 중앙은행장을 역임한 체 게바라는 쿠바에 소련 모델을 이식하려 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문화 혁명의 숭앙자였다. 1960년 쿠바에 노동수용소를 창설한 사람은 카스트로가 아니라 체 게바라였으며 ‘새로운 인간’의 숭배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쿠바 청년을 군사화한 기술자였다.3)

 

카스트로 반대 그룹에 대한 조사와 파괴, 게릴라 운동을 해체하고 강제 노동수용소와 감옥을 운영하는 「붉은 게슈타포(DGCI)」가 1959-1962년에 창설되었는데, 천 명의 정보원을 고용하고 있다. 1995년에는 5만의 군인으로 구성된 특수타격부대(DSP)가 창설되었다. 1960년대 억압기간 동안 7천-1만명이 학살되었고, 3만여 명의 정치범이 수용되었다. 1959년 이후 쿠바에는15,000-20,000명의 양심수가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대부분 혁명 당시 혁명군이었거나 반 바티스타 운동을 벌인 학생들이었다. 1986년에는 12,000-15,000명의 정치범이 있었는데, 50개의 지역에 분산 수용되어 있고, 나머지는 50명, 100명, 200명 단위로 자유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1959년부터 1990년대 말까지 10만 이상의 쿠바인이 수요소, 감옥, 자유지역에 수용된 경험이 있으며, 15,000-17,000명이 총살되었다.4)

 

여기서 우리는 쿠바 혁명의 주력부대인 게릴리와 그 지도자인 카스트로와 게바라의 신화를 벗겨볼 필요가 있다. 게릴라 부대의 기본적인 이데올로기는 민족주의이며 그들이 내건 “맑스주의”는 그들이 스스로 “맑스주의자”라고 부른다고 하더라도 반(反)양키저항의 편리한 덮개에 불과하다. 이 게릴라 그룹은 결코 농민 봉기의 표현이 아니었고, 노동계급의 봉기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것은 부르주아지의 한 분파가 다른 분파를 전복하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군사적 표현이었다. 카스트로의 게릴라가 권력을 장악했을 때 어떤 ‘민중봉기’도 없었다. 피착취계급과 빈민은 권력을 쥔 새로운 주인에게 환호할 뿐 주요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바티스타 군대의 약한 저항에 대항하여 게바라는 결단력과 카리스마로 카스트로를 무색하게 할 만큼의 용맹스런 게릴라처럼 보였다. ‘혁명 법정’을 통해 이른바 민중적 정의를 실현하면서 체는 “우리는 총살했고, 아직도 총살시키고 있으며 필요한 한 계속해서 총살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무력에 의해 다른 분파를 제압하는 부르주아지 분파의 전형적인 방법일 뿐이다.5)

 

카스트로 민족주의 정권은 재빨리 자격을 갖춘 ‘공산주의’로 치장했다. 다른 말로 하면 카스트로 정권은 소련이 이끄는 제국주의 진영으로 나아갔다. 주요 군사요원과 민간인이 있고 동구 블록 국가의 비밀 활동이 있는 섬 쿠바의 스탈린주의화는 1962년 미사일 위기로 그 정점에 달했다. 이 과정에서 체 게바라는 ‘사회주의 진영’과의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이들 국가를 방문하는데 여기서 그는 아낌없이 소련을 찬양했다.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 “사상의 자유가 지배하는 곳”, “자유의 모국”이라고. 그는 또한 “모든 사람이 열정에 차 있고 모든 사람이 근무시간을 넘어 일하는‘특별한’ 북한과 마오의 중국”을 찬양하고 이어서 동구의 모든 나라들에 대해서는 “사회주의 국가의 성취가 특별하다. 그들의 삶의 체제, 발전의 체제와 자본주의 국가의 삶과 발전 체제를 비교할 수가 없다”라고 추켜세웠다.6)

 

체 게바라에게서 소련과 그 블록은 ‘사회주의적이고 진보적’인 진영이었고, ‘하나, 둘, 여러개의 베트남을 만들자’는 슬로건은 “국제주의적” 표어가 아니라 러시아 블록에 우호적인 민족주의적 슬로건일 뿐이었으며, 미국에 대한 증오였다. “민족해방”은 인민의 군사적 동원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된 이념적 신비화였다. 노동계급이나 다른 피착취계급 어느 것도 이러한 전쟁으로부터 얻을 것이 없었다. 워싱턴의 비밀활동과 각종 마피아가 통제하는 부패한 바티스타 독재로부터 스탈린주의 블록으로 넘어간 쿠바는 ‘민족해방투쟁’의 비극적인 축약도엿다. ‘사회주의 조국’을 방어하는 국제주의 정도를 벗어난 쿠바의 길은 부르주아 방법인 테러와 국가 자본주의, 다시 말해 자본주의 착취의 가장 잔인하고 전체주의적인 표현을 체계적으로 사용하도록 만들었다.

 

스탈린주의와 다른 변동(마오주의로부터 카스트로주의까지)의 공통적 특징 중의 하나는 대중의 뇌 속에 의식을 ‘주입’하는 지식인이 이끄는 ‘힉명의 주체’를 신화적 빈농으로 만들면서 노동계급을 불신하고 경멸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이비 혁명가들의 저술 속에서 누구도 계급권력기관인 소비에트를 스스로 조직하는 노동계급에 대한 어떠한 참조도 발견할 수 없다.

 

체 게바라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대중은 주장하는 것처럼 양떼처럼 행동하는 … 같은 유형의 요소의 합이 아니다. 지도자들, 기본적으로 피델 카스트로를 주저하지 않고 따르는 것은 옳다.…” 피상적으로 보면 국가에 대한 개인의 복종을 말하는 사람이 옳은 것 같다. 대중은 비길 데 없는 열정과 규율로 정부가 정한 과업을, 경제, 문화, 국방, 스포츠 분야에서 수행한다 … 일반적으로는 주도권은 피델로부터, 혁명적 지도부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그것은 스스로의 것으로 만드는 인민에게 설명된다. (「쿠바에서의 사회주의와 인간」, 1965)

 

쿠바에서 노동계급을 통제하는 주요기관 중의 하나는 놀랍게도 노동조합이다. 쿠바노동조합총연맹(CTC)은 이미 미국식의 노동조합이었으며 “자유시장 자본주의”와 그 부패로 완전히 통합되어 있었다. 쿠바 지도부는 이들은 1960년에 관료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 모형에 기반한 스탈린주의 노동조합으로 재빨리 전환시켰다. 카스트로 정권의 첫 번째 결정은 노동조합이 노동자들에게 규칙을 철저하게 지키게 하는 책임을 지게하고 회사에서 파업금지를 강제하는 것이었다. 노동계급에 대한 이러한 공격은 미제국주의 반대와 ‘쿠바인민의 방어’로 정당화되었다. 쿠바에 있는 미국회사에서 임금 삭감에 대항하는 파업시 이득을 취하기 위해 카스트로 정권의 지도자들은 파업 노동자를 파괴자로 낙인찍었다.

 

게바라는 다른 누구보다 더 과감한 민족주의적이고 스탈린주의적인 지도자들 중 하나일 뿐이지만, 아직도 카스트로주의라는 스탈린주의 반혁명의 열대지역의 변종의 대표이기도 하다.

 

 

3. 베네수엘라 차베스의 부르주아지 전술과 노동계급에 대한 억압

 

2006년 12월 3일에 실시한 선거에서의 압도적 승리는 앞으로 6년 동안 부르주아지의 차베스 당파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정당화할 뿐만 아니라 베네수엘라 부르주아지 전체의 승리를 대표하고 있다. 2005년 의회선거에 참여를 거부한 부르주아지이지만 부르주아지는 자본주의 착취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기본적인 이데올로기 장치인 민주와 선거에 대한 신비화를 강조한다. 차베스는 상대 후보가 조지 부시라는 악마의 볼모라고 주장하면서 대중적 관심을 집중시켰다. 상대 후보가 당선되면 ‘혁명’의 성과를 훼손하고 ‘사회정의’의 정책을 제도화하는 사명7)을 위협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이는 프롤레타리아트와 사회적으로 배제된 대중을 부르주아 당파 사이의 싸움의 덫에 걸려들게 만들었고, 석유 수익을 좌익과 최빈곤층을 위한 민중주의적 정책을 지원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부르주아지의 한 분파인 차베스에게 희망을 걸게 했다. 실제로 차베스주의는 불안정한 관리, 즉 중간 계급 뿐만 아니라 노동자와 최빈곤층을 더 가난하게 하고 하향 평준화하는 평등주의를 의미했다.

 

그러나 차베스주의의 승리는 단지 베네수엘라 부르주아지의 한 분파가 다른 분파에 대해 승리했다는 것이 아니라 ‘볼리바르 사회주의’, 즉 베네수엘라 국경을 뛰어넘어 베네수엘라 부르주아지가 지역 권력으로 재확인되는 국가 경영의 모델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좌파와 극좌파 사이에서 민간 및 군사 분파가 이끄는, 부르주아지의 차베스 분파는 카라카스와 주요 도시 주위의 빈곤 도시와 농촌 지역의 빈곤층을 이루는 사회적으로 배제된 대중, 피착취대중의 지지를 받는 사회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인구층은 2021년까지 그들이 빈곤을 극복할 것이라는 환상을 지니고 있다.

 

차베스주의의 승리에 대한 민중적지지 뒤에는 선동적인 민중주의 전략이 있다. 차베스주의가 “사회주의”로 갈 수 있는 방법을 보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강조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사이에 혼란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적 수준에서 본질적 차이가 있다. 국내적, 국제적 수준의 선전에 따르면 베네수엘라는 2021년(그 해는 구세주 차베스가 초월적 의미를 부여한 해이다)까지 가난을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혹사기의 선전 뒤의 현실은 매우 다르다. 우리는 이러한 연막 뒤에 있는 진정한 가난을 보기 위해 카라카스 동쪽 끝과 서쪽 끝의 가난한 사람들을 보아야 한다. 셀 수 없는 빈민, 그 중 대다수는 거리와 다리 밑, 그리고 (도시에서 사용하는 물이 모이는 거대한 화장실인) Guaire 강가에서 살고 잠을 자는 젊은이들이다. 쥐와 병이 확산된 온 거리에는 쓰레기가 넘쳐나고 이른바 비공식 경제를 이루어 수만의 거리 행상이 넘쳐난다.8)

 

매우 높은 범죄율은 카라카스를 가장 위험한 도시로 만들고 베네수엘라를 콜럼비아를 능가하는 범죄율의 국가로 만들었다. 또한 말라리아, 뎅기열, 영아 사망, 산모 사망 등이 증가해 왔다. 정부는 이러한 빈곤을 숨기려 조치를 취하고(보기를 들어 거리의 어린이와 빈민을 골라내고 창녀를 협박하며 행상을 옮기는 등) 그들을 반대파나 미제국주의의 악의 행위로 비난했지만, 가난의 징표를 숨길 수 없다.

 

노동조합과 협동체의 선전에 따르면 불안정노동자들은 최저임금도 받지 못한다. 특히 공공 부문에서의 단체 협약은 연기되어왔고, 임금 인상은 법령에 따라야 하고, 대부분 사회보장과 관계없으며 늦게 지불되는 상여금의 형식이다. 그리고 “미션”과 기타 정부계획을 통하여 서비스망이 보건, 교육 등의 공식 부문과 함께 만들어졌다. 이들은 정규직 노동자에게 압력을 가하고 노동조건을 침해하고 있다. 불안정 노동, 육아노동, 그리고 임금에 대한 공격은 차베스주의 부르주아지가 주장하는 가장 “반자유주의적”인 것일지라도 부르주아지의 모든 부문에 불가피한 것이다.

 

배제된 대중뿐만 아니라 임금 소득자는 2004-2006년 동안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높은 인플레(2003:11.2%, 2005:14.4%, 2006:17%)를 통해 차베스주의 부르주아지가 수행한 중단없는 공공지출의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 국가의 경제 정책의 결과인 이러한 증가는 전체 인구 특히 빈민의 삶의 조건을 악화시켜왔다. 이들은 식품을 사려고 소득의 70%를 사용하고 있으며 「베네수엘라 중앙은행」에 따르면 이 시기의 누적인플레는 152%였다.9)빈곤의 가속화는 우파이건 좌파이건 정부의 잘못된 관리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프롤레타리아트와 사회전체를 끌고 나가는 정도이다. 그리고 차베스 정부는 “혁명적”인 수사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주의 정권이다.

 

2007년 5월 말에 베네수엘라에서 학생 시위가 벌어졌는데, 차베스는 이를 “제국주의 추종자”, “조국의 반역자”, “부유한 아이들”로 매도했다. 그러나 학생 운동의 주체는 빈민층 출신이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희망이 앞으로 “실현될 수 없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새로운 혁명 세대인 그들은 한 편으로는 실업과 범죄, 버려진 어린이와 어머니, 빈곤에 대한 반대를, 다른 한 편으로는 거짓말, 부도덕, 불관용, 비인간성에 대한 반대를 뚜렷이 밝혔다. 이는 사회주의로 ‘위장한’ 국가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착취’없는 사회를 세울 수 없다는 정확한 문제인식이라고 볼 수 있다.

 

“21세기 사회주의”라고 하는 “베네수엘라 혁명”이 지닌 뜻은 무엇인가. 2004년 베네수엘라의 사회경제 장관의 고문을 했고 2006년 「지금 건설하자, 21세기 사회주의를」이라는 책을 쓴 좌파 연구자 레보위치(Michael A. Lebowitz)는 그의 책에서 차베스가 메자로스(I. Mesáros)의 「자본을 넘어」에 영향을 받았고, 2005년 [세계사회포럼]연설에서 사회주의의 새로운 유형으로 인본주의적 사회주의를 말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인본주의적 사회주의’가 제국주의, 신자유주의, 자본의 논리를 거부하는 논리적 연속성을 띄고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 개념을 공동체, 연대, 사회주의적 도덕으로 정리하면서, 사회주의는 목적이 아니라 인간 잠재성의 충만한 발전의 과정인 체 게바라의 맑스주의라는 것이다. 마치 중앙집권적이고 관료적인 의사결정과정에 대한 대립물이 ‘스탈린주의’를 극복한 새로운 형태의 사회주의인 것처럼 선전하는 것은 맑스주의의 기본 원칙인 국제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와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또한 ‘혁명’도 차베스가 계승하고자 하는 볼리바르 혁명, 즉 집합 생산자에 의한 민주적 의사결정과 미제국주의 반대를 뜻한다면, 그것은 사회주의혁명과 관련 없는 민주혁명, 부르주아 혁명일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국제주의 원칙을 벗어난 어떠한 민족주의 운동도 진정한 사회주의 혁명과 양립할 수 없음을 역사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1960년대는 제3세계주의와 민족해방 신화의 전성기였다. 좌파와 자유주의자는 베트남 전쟁을 미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베트남 인민의 영웅적 투쟁으로, 체 게바라, 카스트로, 벤 벨라 등에 대한 숭배로 나아갔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황금시대’ 자본주의가 위기에 부딪치자, 이러한 신화는 더는 이어지지 않고 그 빛이 바랬다. 경쟁하는 민족국가와 제국주의 블록으로 나누어진 부르주아지는 세계전쟁으로 내몰리고 사회적 부의 생산자인 노동계급은 자신의 생활수준을 방어하는 투쟁, 즉 전쟁을 향한 움직임을 막고 공산주의 혁명의 가능성을 향한 투쟁으로 나아갔다.

 

세계자본의 제국주의 시대에는 어떠한 독립적 자본주의도 나타날 수 없다. 1980년대와 1990년대, 그리고 2000년이 지난 뒤에도 ‘민족해방투쟁’에 대한 환상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지만 두 가지 다른 형태로 이탈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이른바 ‘반세계화 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민중주의의 복원을 통한 ‘미제국주의 반대운동’이다. 그런데 반세계화운동은 ‘자본주의를 오직 하나의 가능한 체제이고 그 개혁이 하나 뿐인 대안이다’와 같은 부르주아지의 이념적 선전을 밑바탕으로 삼고 있다. 미제국주의 반대운동은 반미라고 하는 민족주의 정서와 빈곤화되는 농민과 도시빈민과 노동자의 사회 불만을 밑거름으로 삼은 라틴 아메리카의 민중주의 경향이다. 바로 이러한 두 흐름의 결합이 이른바 ‘차베스주의’이다.

 

‘21세기 사회주의’를 말한 레보위츠도 베네수엘라의 「국가발전계획(2001-2007)」을 신자유주의와는 다른 모델로 여기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동아시아(일본, 한국)의 발전전략과 사람을 결합한 라틴 아메리카식의 신구조주의로 바라보고 있다. 또한 그는 1999년 제정된 헌법에 나온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조항을 보기로 들면서 베네수엘라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제3의 길을 추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베네수엘라는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주변, 즉 주변부 자본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이 나라는 빈민층(비공식부문 노동자)이 인구의 4분의 3을 차지하고 있고, 오직 석유자원 하나에 의존해 경제를 끌고 나가고 있는 특수한 사회이다. 이 나라의 민족부르주아지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석유자본을 밑천으로 삼아 다른 제국주의 국가(미국, 영국, 중국 등)의 부르주아지와 손을 잡고 있지만, 베네수엘라 인민이 처한 빈곤조차 풀지 못하는 무능함을 드러내고 있다. 그럼에도 이 주변부 자본주의의 반미 민족주의 세력은 몇몇 좌파 지식인과 혁명가들의 도움을 받아 전세계에 베네수엘라를 ‘21세기 혁명의 상징’으로 추켜세우면서 ‘사회주의’의 미래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차베스주의야말로 사회주의를 위장한 주변부 자본주의 국가의 민족부르주아 분파의 생존전술일 뿐이다.

 

최근에 이르러 차베스정권은 전투적인 소수의 노동자들의 투쟁이 더욱 공격적이 되자, 이들을 공개적으로 억압하는 정책을 사용하고 있는데, 전략적 산업에서의 파업금지를 법제화하여2,200명을 범법자로 기소함으로써 노동계급의 저항을 범죄화하고 있다.

 

2005년 이후 300여명의 노동운동의 지도자가 살해되었고, 그 이상이 살해위협을 받고 있으며, 상해를 입은 노동자의 숫자는 더욱 늘어나고 있다. 대표적인 보기로 2008년 아라구아주의 전투적 노동조합인 c-cura의 세 명의 지도자는 Colombian Transnational에 맞서는 점거 투쟁에 연대하다가 살해당했다. 또한 2009년 1월 안조아테구이주의 미쓰비시 공장에서는 경찰이 점거 농성 중인 두 명의 노동자를 살해했는데 노동자들의 피가 땅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노동부 장권은 점거가 끝났다고 선언했다. 차베스는 이에 대한 최종책임을 피할 수 없다.10)

 

또한 베네수엘라에는 작업장의 군사화가 시작되었는데, 2009년 10월 군사법의 개정으로 「Bolivarian Militias」가 설치되었고, 이 기구는 국민방위대의 부속기구로 노동자투쟁을 진압하는 억압기구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또한 유가하락 등의 경제침체로 제국주의와의 친선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동자를 더욱 압박하고 있다. 차베스는 노동자의 사회주의 혁명의 필요성을 항상 부정해 왔으며 단지 민족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본가계급의 친차베스 부문과의 동맹에 참여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민중주의적 의제만을 선택하고 있다. 차베스의 전략은 석유 이윤으로 전체 산업발전을 기하고 대중을 빈곤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 재투자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르주아 전략은 아무리 사회주의의 수사를 쓰더라도 계급 협조에 기반 할 수 밖에 없다. 석유가격의 하락과 한발에 의한 전력과 물의 부족은 주요 산업의 생산에 차질을 빚고 있으며, 도시와 농촌 모두에게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따라서 차베스 같은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은 불가피하게 제국주의에 맞서는 투쟁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권력은 노동자와 빈민을 통제와 착취 아래 두는 것을 전제로 하여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기본적 이해는 자본주의 체제와 양립할 수 없고 오직 그들 자신의 권력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차베스는 자본주의와 사유재산을 방어하기 때문에 노동대중을 배반하고 그들의 투쟁을 불구화시킬 것이다.

 

유일한 길은 투쟁을 통하여 차베스주의 이데올로기를 분쇄하는 것이다. 베네수엘라와 모든 세계의 노동자는 혁명 투쟁을 통하여 이러한 부르주아 정권을 타도하는 길 밖에 없다. 그런데 그 곳엔 반제국주의라는 독약이 있다. 영구적인 “양키반대” 수사는 베네수엘라 부르주아지의 제국주의 정책에 대한 노동자의 지지를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차베스주의의 승리로 베네수엘라와 그 지역의 노동계급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공격은 강화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계급적 관점에서 차베스주의를 비판하기 시작한 프롤레타리아적 요소 사이에 일정 정도의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분명히 노동계급의 의식과 전투성에 영향을 미치지만 계급의 소수파 사이에 진행되는 성찰의 과정을 끝내지 않을 것이다. 선거는 계급투쟁을 측정하는 진정한 온도계가 아니다.

 

앞으로 베네수엘라에서 노동계급이 투쟁하지 않는다면 더욱 무정형의 폭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차베스보다 관료들을 비판하면서 폭력적 방식으로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한 배제된 대중(특히 빈민)에 대한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은 노동자 투쟁을 촉발시키고 맑스주의 관점에서 차베스주의의 이데올로기를 파괴하는 것이 더욱 시급하다는 것을 베네수엘라뿐만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 전체가 인식하게 될 것임이 분명하다.

 

 ----------------------------------------------------------------------------------------------------------

 (주)

1) 「Monthly Review」, vol.57, No.9, Feb. 2006, 여기서 이들은 이를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 마오의 ‘대약진 운동’, ‘문화혁명’에 버금간다고 칭송한다.

 

2) 1986년에 설치된 국가 소유 석유 회사의 컨서시움으로 브라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우르과이가 회원국이나 볼리비아와 칠레는 준회원국이다.

 

3) Pascal Fontaine, “쿠바: 열대에서의 끝없는 전체주의”, Stephane Courtois, et al. 「The Black book of Communism: Crimes, Terror, Repression」 Harvard Univ. Press, 1999, 651-2쪽

 

4) 윗 책, 664쪽

 

5) 오세철, 「다시, 혁명을 말한다」, 빛나는 전망, 2010, 167-8쪽

 

6) 윗 책, 169쪽

 

7) 이러한 미션을 통하여 국가는 식품 분배, 교육, 보건, 실업자와 임시 고용인에 대한 보조 등에 책임을 진다. 2003년 이래 여러 가지 미션이 세워졌다. 그 중 상당수는 영구적인 것이 아니었고, 가난한 사람에 대한 관심의 허울에 불과했다.

 

8) 오세철(편저), 「좌익공산주의」, 빛나는 전망, 2008, 397-8쪽

 

9) 윗 책, 399쪽

 

10) LRP, “Venezuela: Support Dwindling for Chávez’s Fake Socialism, Workers’ Revolution is the Answer for Workers and The Poor”, 「Proletarian Revolution」, no.83, Fall 2010, 29-32쪽

 

<출처 :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5&document_srl=1696   국제코뮤니스트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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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risis in the swp

  • 분류
    잡기장
  • 등록일
    2013/01/22 11:35
  • 수정일
    2013/01/23 11:24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 응답 RSS

the crisis in the swp

 

Members of Britain’s Socialist Workers Party are resigning from the party in droves, says duvinrouge. The impetus comes from a sexual assault allegation against a senior member of the party, & allegations that it wasn’t investigated properly. But unpinning this is the discontent due to the lack of party democracy.

 

split

The SWP is a Leninist party & therefore internally organises in a way that is termed democratic-centralism. The basic idea being that the majority decision is decided upon & then there is unity of action led by a central committee. It actual fact it’s a fig-leaf ideology to allow a few to justify their life as professional revolutionaries, dreaming of their place in history, whilst the rank & file members sell the paper to fund this lifestyle. It’s much like parliamentary democracy’s claim to represent the wishes of the people & gives us the illusion of having a say.


Every year at conference the SWP elect the 12 members of the central committee. But they don’t get elected individually. The central committee itself puts forward a ‘slate’ – a list of names, often the same ones – for conference to vote on. Leading up to conference members can opening organise factions which can put forward an alternative slate. Such factions are only allowed to form about 3 months prior to conference. As far as I know the CC slate usually, if not always, wins. The same faces have power year after year, e.g. Alex Callinicos. Unsurprisingly this leads to a ‘them & us’ mentality.

 

This is not the first time that the SWP has faced such a crisis. A major split occurred in 2010 when John Rees & Lindsey German left the party & set up Counterfire after Rees was blamed for the failure of the Respect electoral coalition. This was soon followed by Chris Bambery’s departure & his setting up of the International Socialist Group (Scotland). Despite efforts to improve party democracy many members have not been satisfied. But what most will not accept is that the root of the problem lies in allowing a group of professional revolutionaries, supported financially by the rank & file, to hold almost all the power & make the decisions. It’s the same problem in the trade unions whereby the union bureaucracy sells out its members.

 

If revolutionaries want a communist society where everyone has an equal say, why do they organise in a way that creates a group that is ‘more equal’ than others? They need to recognise their egos & limit the amount of time that anyone can have in a role. Obviously this is limited by the number of members, their skills & their willingness to take on responsibility. But for a group the size of the SWP it doesn’t seem unreasonable to limit the time in a role to two or three years, & preferably doing these roles whilst working like other ordinary members. They should then be prevented for holding any role again for at least five years. All roles should also be voted upon by all members. In otherwords, organise a party as you would organise a communist society. Surely, that’s not too much to ask for?

 


 

<출처 : http://thecommune.co.uk/2013/01/21/the-crisis-in-the-swp/#more-8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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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is it so difficult to struggle, and how can we overcome these difficulties?

  • 분류
    계급투쟁
  • 등록일
    2013/01/03 18:04
  • 수정일
    2013/01/03 18:04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 응답 RSS

Why is it so difficult to struggle, and how can we overcome these difficulties?

 

 

At first sight, everything seems to favour an explosion of working class anger. The crisis is obvious and no one can escape it. Less and people believe that it’s coming to an end despite the daily assertions to the contrary. The whole planet seems to be in a desolate state: wars, barbarism, famine, epidemics, the devastating manipulation of nature and our health in the name of profit.

 

With all this in front of us, it’s hard to imagine that any feeling other than indignation and revolt could seize hold of our minds. It’s difficult to think that workers can still believe in a future under capitalism. And yet the masses have not fully taken the path of struggle. Are we to conclude that the game is up, that the steamroller of the crisis is just too powerful, that there’s no going beyond the demoralisation it has brought with it?

Major difficulties

 

It can’t be denied that the working class today is experiencing major difficulties. There are at least four reasons for this.

 

The first, and by far the most crucial, is quite simply that the proletariat is not conscious of itself, that it has lost its ‘class identity’. Following the fall of the Berlin Wall, the 1990s saw a huge propaganda campaign to convince us that we had witnessed the historic failure of communism. The boldest – and most stupid – commentators even announced ‘the end of history’, and the final triumph of peace and democracy. By amalgamating communism and the rotting carcass of the Stalinist monstrosity, the ruling class sought to discredit in advance any perspective aimed at the overthrow of the capitalist system. Not content with trying to wipe out any prospect of revolutionary change, it went on to portray any kind of working class struggle as no more than a ‘cultural memory’, like dinosaur fossils or the cave-paintings of Lascaux.

 

Above all, the bourgeoisie has insisted over and over again that the working class in its classical form has disappeared from the social and political scene[1]. Sociologists, journalists, politicians and tabloid philosophers peddle the idea that social classes have disappeared, lost in the shapeless magma of the ‘middle classes’. The bourgeoisie has always dreamed of a society where the proletarians see themselves as mere ‘citizens’, divided into a whole series of socio-professional categories – white collar, blue collar, employed, casual, unemployed, etc – who are separated by divergent interests and who can only express themselves politically by trooping one by one into the election booths. And it’s true that the barrage about the disappearance of the working class, pumped ceaselessly from books, papers, TV and internet, has served to prevent many workers from seeing themselves as an integral part of the working class, still less as an independent social force.  

 

In the second place, this loss of class identity makes it extremely difficult for the proletariat to affirm its own struggle and its own historical perspective. In a context where the bourgeoisie itself has no perspective on offer except austerity, every man for himself and a scramble to survive, the ruling class takes advantage of the lack of class consciousness by setting the exploited at each others’ throats, by dividing them and blocking any unified response, by pushing them towards despair.

 

The third factor, a consequence of the first two, is that the brutality of the crisis is tending to paralyse many workers, who fear falling into absolute poverty, fear being unable to feed their families and ending up on the street, isolated and exposed to repression. Even if some of them, with their backs to the wall, have been driven to express their anger openly, like the ‘Indignados’ in Spain, they still don’t tend to see themselves as a class in struggle. Despite the relatively massive character of these movements, this limits their capacity to resist the mystifications and traps created by the ruling class, to re-appropriate the experiences of history, to step back and draw lessons with the necessary depth.

 

There is a fourth important reason to explain the current difficulties of the working class to develop its struggle against the system: the whole arsenal of bourgeois control, whether the openly repressive parts, like the police, or more insidious and much more effective ones like the trade unions. On the last point in particular the working class has still not overcome its fears of struggling outside the domination of the unions, even if less and less workers have deep illusions in the capacity of the unions to defend their interests. And this physical containment is reinforced by an ideological containment which has been more or less mastered by the unions, the media, the intellectuals, the left parties, etc.

 

The key to this ‘mind control’ is without doubt the ideology of democracy. Every significant event is exploited to vaunt its benefits. Democracy is presented as the framework where freedom can flower, all opinions can be expressed, and power is legitimised by the people; where everyone can take initiatives, have access to knowledge and culture. In reality, democracy only offers a national framework for the cultivation of the power of an elite, the power of the bourgeoisie. All the rest is illusion, the illusion that by entering the ballot box you are exercising some kind of power, that the voice of the population can be expressed by voting for its ‘representatives’ in parliament. We should not underestimate the weight of this ideology, just like the shock caused by the collapse of the Stalinist regimes at the end of the 80s, which greatly strengthened the hold of democracy.

 

We should also add the influence of religion to this ideological arsenal. It’s not new, since it has accompanied humanity from its first attempts to make sense of the world around it, and has long been used to legitimate all kinds of hierarchical power. But what’s different about today is the role it plays in diverting the thought of a part of the working class confronted with the need to understand a capitalist system in a state of bankruptcy, in particular by explaining the ‘decadence’ of the current order by showing how far it has strayed from the values elaborated thousands of years ago by religion, especially the monotheistic religions. The strength of religious ideology is that it does away with the extreme complexity of the situation. It offers simple answers, easy to follow solutions. In its fundamentalist forms, it only convinces a minority of the proletariat, but it general it feeds like a parasite on the reflection going on in the class.         

 

And a huge potential

The picture we have painted might sound a bit desperate: faced with a bourgeoisie which knows how to use its ideological weapons, with a system which threatens most of the population with poverty, when it’s not already deep inside it, is there still room to think positively, to find some hope? Is there really a social force that can undertake a radical transformation of society, no less? We can answer this question without hesitation: yes! A hundred times yes!

 

It’s not a question of having blind confidence in the working class, a semi-religious faith in the writings of Karl Marx, or of gambling desperately on a revolution. It’s a matter of taking a certain distance, serenely analysing the situation and going beyond the immediate, trying to understand the real meaning of the present struggles of the class and studying in depth the historic role of the proletariat.

 

In our press we have already argued that since 2003 the working class is in a positive dynamic compared to the retreat it went through after the collapse of the eastern bloc. This analysis has been drawn from a number of more or less significant struggles, but all of them have the characteristic of showing that the working class has been tending to rediscover its historic reflexes, like solidarity, collective discussion, or more simply an enthusiastic response to adversity.

 

We saw these elements at work in struggles like the one against the ‘reform’ of pensions in France in 2003 and 2010, in the struggle against the CPE, again in France, in 2006, but also in a less extensive way in the Britain (the wildcats at Heathrow, the Lindsey refineries), the USA (New York subway), Spain (steelworkers of Vigo), in Egypt, Dubai, China, etc. The Indignados and Occupy movements in particular reflected something more general and ambitious than the struggles in the enterprises. What did we see in the Indignados movement? Workers from all horizons, unemployed, part-time, full-time, coming together to take part in a collective experience and to get a better understanding of what’s at stake in this period. We saw people regaining their enthusiasm simply from being able to discuss freely with others. We saw people talking about alternative experiences and considering their gains and limits. We saw people refusing to be no more than victims of a crisis which they didn’t bring about and which they refuse to pay for. We saw people coming together in spontaneous assemblies, adopting forms of expression‍ that favour reflection and the confrontation of ideas, and which put limits on those who come to disturb or sabotage debate. Finally and above all, the Indignados movement gave rise to an internationalist sentiment, an understanding that everywhere in the world we are subjected to the same crisis and that our struggle crosses all frontiers.

 

Certainly we did not hear many talking explicitly about communism, proletarian revolution, working class and bourgeoisie, civil war, etc. But what these movements did show is above all the exceptional creativity of the working class, its capacity to organise itself, which derive from its inalienable character as an independent social force. The conscious reclaiming of these characteristics is still at the end of a long and tortuous road, but it is undeniably in motion. It will inevitably be accompanied by a process of decantation, reflux, partial discouragement. But it will fuel the thinking of minorities who are placed in the avant-garde of the struggle of the working class on a world scale, and whose development has been visible and quantifiable in the last few years.     

 

Finally, even if the difficulties facing the working class are enormous, nothing in the situation permits the conclusion that the game is up, that the working class will no longer have the strength to engage in massive and then revolutionary struggles. On the contrary, the living expressions are multiplying, and by studying what they really are, not on the surface where only their fragility is obvious, but in depth, then the potential, the promise for the future that they contain can be grasped. Despite their sporadic, dispersed, minority character, we should not forget that the main qualities of a revolutionary are patience and confidence in the working class[2]. This patience and this confidence are based on an understanding of what the working class is, historically speaking: the first class which is both exploited and revolutionary, and has the mission of liberating the whole of humanity from the yoke of exploitation. This is a materialist, historical, long-tern vision. It is this vision which enabled us to write, in 2003 when we were drawing up a balance sheet of our 15th international congress:

 

“As Marx and Engels said, ‘it’s not a question of considering what this or that proletarian, or even the proletariat as a whole, takes to be true today, but of considering what the proletariat is and what it will be led to do historically, in conformity with its being’. Such an approach shows us that, faced with the blows of the capitalist crisis, which will give rise to more and more ferocious attacks on the working class, the latter will be forced to react and to develop its struggle”. http://en.internationalism.org/wr/264_15cong.htm

 

GD, 25.10.12  

 


[1]. This is not to say that there have been no important material changes in the shape of the working class in the last few decades, above all through deindustrialisation and the relocation of traditional industries to the ‘peripheries’ of the system, or that these changes have not added to the difficulties of the working class in maintaining its class identity. We will return to this in another article. 

 

[2]. Lenin would have added a sense of humour!

 

 

 


 

 

 

Submitted by WorldRevolution on November 8,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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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서] 노동자는 정말 하나인가?

  • 분류
    계급투쟁
  • 등록일
    2012/12/31 15:27
  • 수정일
    2012/12/31 15:27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 응답 RSS

[성명서] 노동자는 정말 하나인가?

 

 

1998년 7월 파견법이 시행된 이래 수많은 노동자들은 중간 착취와 주기적 해고라는 불안을 강요당해 왔다. 이에 맞서 현대차 비정규직 동지들은 대량해고와 구속, 손배·가압류 등 정권과 자본의 탄압에도 8년째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악순환을 끊어낼 절호의 기회가 눈 앞에 와 있다.

 

그런데 전국금속노동조합 현대자동차지부(이하 현대차지부)는 12월27일 불법파견 특별교섭 중단과 관련하여 ‘지부장 긴급성명서’를 발표했다.

 

현대차지부는 현대자동차비정규직지회(이하 현대차비지회)에 대해 아래와 같은 말들을 쏟아냈다.

 

‘비지회 조합원들의 교섭 봉쇄로 교섭이 진행되지 못한 것은 유감을 떠나 용납 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비지회의 교섭 봉쇄는 불법파견 정규직화의 열망에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비정규직 불법파견 정규직화 어떠한 논리로도 가로막아선 안 됩니다!’

 

현대차지부에 묻겠다.

 

대법원 판결에 따라 불법파견으로 인정된 모든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는 현대차비지회의 요구를 신규채용으로 둔갑시켜 회사와 합의하려는 행위가 노사대타협인가?

 

당신들의 비민주적이고 오만한 태도에 대해 항의하는 현대차비지회에게 교섭결렬의 책임을 떠넘기고 현대차비지회가 정규직화를 막고 있다고 덤터기 씌우는 것이 노동자연대정신인가?

 

지금 울산에서 노동자는 하나가 아니다.

 

대공장정규직노조의 이기주의와 편의주의에 비정규직노동자들의 눈과 귀와 손과 발이 모두 철저하게 봉쇄당하고 있다.

 

현대차지부가 현대차비지회의 의견을 무시하고 끝끝내 신규채용에 합의한다면 그것은 지난하고 고단했던 불법파견 투쟁의 성과를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드는 역사적 죄악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정규직노조를 쳐다보면서 웃다가 우는 서커스를 이제 멈추자.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연대정신을 가지고 있는 고용형태, 나이, 성별, 국경을 뛰어넘는 모든 노동자들은 이제 한계에 봉착한 낡은 노동조합운동을 넘어서는 새로운 노동자운동의 실물을 스스로 창출할 시기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전체 노동자계급의 수평적 연대를 실현하고 투쟁의 주체가 모든것을 결정하는 노동자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고민이 이 고통속에서 선명하게 꽃피우기를 희망한다.

 

정규직,비정규직,조합원,비조합원을 넘어 비정규직 철폐를 위한 노동자계급의 수평적 연대를 실현하자!

 

투쟁의 주체가 모든것을 결정하고 직접행동하는 노동자민주주의를 실현하자!

 

 

2012년 12월 29일

 

국제코뮤니스트전망 (http://communistleft.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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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혁명과 인터내셔널을 향한 발걸음’ 〘코뮤니스트〙 창간호가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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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백발 사회주의자의 ‘술·학문·예술·혁명’… 고희 맞아 회고록 낸 오세철 교수

  • 분류
    잡기장
  • 등록일
    2012/11/24 12:52
  • 수정일
    2012/11/25 13:50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 응답 RSS

백발 사회주의자의 ‘술·학문·예술·혁명’… 고희 맞아 회고록 낸 오세철 교수

 

 

황경상 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백발의 청년. 그는 자신을 열 살이라고 소개한다. “환갑이 한 바퀴 돌았다는 얘기니까. 그때부터 새로 시작하면 열 살이죠. 요즘 사회주의 운동 하는 세대들도 다 늙었어요. 30대도 찾기 힘들어. 길게 보면 10대와도 어떻게 운동을 할까 싶어서 나이도 열 살이라고 한 겁니다.”

지난 21일 연구실에서 만난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69·사진)는 여전히 주름살을 찾기 어려운 말간 동안에 동그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젊은이도 소화하기 힘든 분홍빛
티셔츠와 짙은 감색의 스키니진을 입은 그는 올해 고희를 맞았다. “집사람이 인터넷 쇼핑에서 만원인가 주고 사준 옷들이오. 양복은 불편해서 주례 설 때만 입어.”

 

 

 

 
 


고희를 맞은 지난 10일, 그는 서울광장 한편에서 2000일 가까이 투쟁을 계속하고 있는 재능교육 노조의 농성장을 찾았다. 그날 열린 문화제에서 오 교수는 자신을 “(9년 전 학교를 그만두고 나온) 예전에는 비정규직 교육노동자였고, 이제는 혁명하는 연극노동자”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그간 예술은 파시즘이나 스탈린, 부르주아의 선전도구로만 쓰였는데 이젠 혁명과 예술이 진정으로 만나는 판을 만들자”고 말했다.

고희를 맞아 내놓은 회고록 <술, 학문, 예술, 혁명의 사중주>(빛나는전망)도 그런 내용이다. 80세쯤 자서전을 쓰겠다는 오 교수의 ‘중간 결산’이다.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인 그는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한 선전·선동단체 ‘사회주의노동자연합’(사노련)을 결성했다는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로 2심까지 유죄 선고를 받았다. 그럼에도 최근 그는 ‘국제꼬뮤니스트전망’이라는 ‘조직’에 다시 참여했다. “피켓 들고 시위한다고 국가보안법은 철폐되지 않습니다. 현장의 노동자들이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떳떳이 얘기하고 다 감옥에 잡혀들어갈 정도가 되어야죠. 악법은 어겨서 깨야 합니다.”

ㆍ“노동자들과 수차례 술자리를 하면, 나를 동지로 인간으로 받아준다”

“오 교수는 술자리에 한 번 딱 들어앉으면 일어나질 않습니다. 사람이 그래야 해요. 술을 먹었다 하면 일어나지 말고, 혁명을 한다 해도 일어나지 말고 그 자리에서 버텨야 합니다.”

지난 17일 연세대에서 열린 오세철 교수의 고희 출판기념회에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은 이렇게 말했다. 오 교수는 “술잔을 잡으면 내려놓지도 말고, 털지도 말고, ‘카-’ 하지도 말고, 찡그리지도 말고, 떼지도 말고”라는 ‘노털카찡떼’ 원칙을 갖고 있다. 술뿐만 아니라, 예술도 학문도 혁명도 “끝까지 놓지 않는다”는 신념으로도 통한다.

“탄압이 무서우면 사회주의 운동을 왜 합니까. 골방에서 하고 말지. 마르크스주의자는 아주 공개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노동자·대중들이 자신의 사상을 깨달을 수 있어야죠. 사노련이 그런 공개 운동의 시작이었어요. 탄압을 한 번 당하면 움츠러드는데 그럴 필요 없어요. 어차피 쟤네들(공안기관)은 경향신문에서 이렇게 써 주지 않아도 우리가 뭘 하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숨는 건 어차피 불가능해요. 잡아가면 또 법정싸움하고, 또 잡혀가야죠.”

 

지난 21일 연세대 교정에서 만난 오 교수는 “술 마시고 늦게 들어가는 일이 잦아서 집사람에게 가장 미안하다”며 “집사람은 교회를 다니는데 지난번 내가 구속됐을 때 집회에 나와 ‘이명박이 믿는 하나님과 내가 믿는 하나님은 다르다’고 할 정도로 나와 생각이 통하기 때문에 그래도 많이 참아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 청탁불문 등 술자리 다섯가지 원칙
학문·예술·혁명에도 똑같이 적용


▲ “주책없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빗속을 뚫고 새벽까지 뛰어다녀”


▲ 민주노총은 자연스럽게 해체될 것
비정규직 중심으로 다시 재편되야


책의 제목도 그렇지만 ‘술’을 빼놓고 오 교수를 얘기할 수 없다. “제목 첫 번째로 술이 들어가니까 나를 술꾼인 줄만 알고, 김수행 교수도 밤낮 술 얘기 좀 안 했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술은 학문·예술·혁명을 엮어주는 동력이라고 생각해요. 술 얘기를 아직 하는 건 여전히 건강하단 소리고, 사람과의 관계와 운동을 계속 한다는 얘깁니다.”

 

오 교수는 책에서 자신의 학문·예술·혁명, 그 속에서 술과 함께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러고는 언급한 사람들에게 ‘오세철을 말한다’는 제목으로 원고를 청탁해 실었다. 찬양일색의 의례적인 글이 실린 건 아니다. 털어놓은 속내를 거르지 않고 모두 담았다. 역사학자 최규진은 노골적으로 흉을 본다. “오 선생님은 주사가 있다. 물론 하찮은 개인사를 늘어놓으며 시간을 축내는 일은 없다. 우리네 삶과 조직을 이야기하시는 것을 무척 좋아하신다. 그래도 그분은 술자리에서 너무 자주 질퍽거리신다. 못내 헤어지기 싫어 사람들을 붙잡고 늘어지기도 하신다.”

술을 마셨다 하면 새벽은 기본이다. 연세대 재학시절부터 학교 농구선수였던 신동파, 하의건 등 대주가와 어깨를 겨뤘다. 한 번에 보통 막걸리 한 말 정도를 마셨다고 한다. 주변에선 오 교수를 ‘알코올중독자’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그는 매일 마시고, 혼자 마시고, 안주를 안 먹는 알코올중독의 요건에 자신은 해당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주변에서 ‘술병이 났다’는 소문이 돌면 100일이든 6개월이든 술을 끊는다. 술만을 위한 술자리도 절대로 만들지 않는다. 강내희 중앙대 교수는 “오 선생의 건배(원 샷) 제안은 악명이 높지만 그의 과음은 경계를 벗어난 술 마시기”라며 “오 선생의 잦은 과음, 그리고 술자리에 동석한 사람들을 향한 그의 ‘원 샷’ 제안은 함께 혁명하자는 외침이 아닐까 싶다”고 말한다.

오 교수는 책에서 “술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있었을까”라고 말한다. “오래전부터 나는 마르크스주의자, 사회주의자를 자임했고, 자연스럽게 투쟁과 혁명의 주체인 노동자들과 만나게 됐다. 만일 내가 술도 못 먹고 거칠고 질펀한 뒤풀이 자리도 못하고 노동자들과의 관계가 이어지지 못했다면 나는 평범한 ‘진보적’인 학자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이 아닌 수차례에 걸친 뒤풀이와 술자리를 같이 하고 더 진솔하고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그 동지들은 먹물의 벽을 깨고 나를 인간으로, 동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우리는 물질인 술로 만나 선입견과 편견, 하찮은 지식과 굴절된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바로 그것이 술의 힘이다.”

오 교수는 술을 마시는데 다섯 가지 원칙이 있다. 맑은 술과 탁한 술, 사람과 안주를 구분하지 않고(청탁불문), 거리와 주제의 멀고 가까움을 묻지 않고(원근불문), 밤낮을 가리지 않고(주야불문), 지위와 위치를 가리지 않으며(고저불문), 삶과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생사불문). 그 원칙은 똑같이 학문·예술·혁명에도 적용된다. 예컨대 학문에 청탁불문의 원칙을 적용해 보자. 그에게 순수·응용 등의 학문분과는 의미가 없다. 오 교수가 경영학과 교수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는 “자본주의의 핵심적 도구학문인 경영학 속에서 내 뜻을 펼쳐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사회심리학과 조직행동론 과목에서 그는 “제대로 된 경영학 이론은 역사·사회·인간에 대한 깊은 인식이 밑바탕이 돼야 한다”고 가르쳤다.

오 교수는 “고희가 된 것이 믿기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오 교수를 보는 사람들이야말로 그 사실을 좀처럼 믿지 못한다. “주책없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다음날 아침까지 술을 마시고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 새벽까지 시청과 동대문을 뛰어다니기도” 했다. 2009년 용산 참사 당시에는 혹한의 설날에 2박3일 동안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철야농성을 했고, 유난히 더웠던 평택 쌍용자동차 점거 파업 현장에 함께하기도 했다. 그 일로 폐렴을 앓아 입원을 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눈빛은 형형하다. 글자를 볼 때도 돋보기를 쓰지 않고, 가는귀가 먹는 일도 없었다. 특별히 하는 운동도 없다. 손호철 서강대 교수는 “오 선배야말로 ‘나이를 먹는다’는 한국말 그대로 나이를 한 살씩 먹어치워 점점 젊어짐이 확실하다”며 “남들이 좌파라고 부르는 나 같은 사람은 극우파로 보일 만큼 발본적 입장에서 실천해 온 열혈전사”라고 말한다.

최근에 오 교수는 연극배우로 데뷔하기도 했다. 백혈병으로 숨진 삼성전자 여성노동자 등의 이야기를 다룬 연극 <반도체 소녀>와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문제 등을 다룬 <시계1>에 출연한 것이다. 그는 영문학자이자 희곡번역가였던 오화섭 연세대 교수(1979년 작고)와 극단 ‘여인소극장’의 대표이자 배우였던 박노경 이화여대 교수(1950년 작고) 사이에서 태어났다. 두 사람은 진보적 연극운동의 동지이기도 했다. 그는 어머니의 극단이 공연한 입센의 <인형의 집>에 아역으로 출연하기도 했고, 고교 3학년 때는 <제17포로수용소>를 학교 무대에 올려 세프튼 역을 맡기도 했다. 오 교수는 “1년 뒤면 명예교수로 학교 강단에 서는 것도 끝나는데 이젠 ‘비정규직 배우노동자’로 남을 것”이라고 말한다.

오 교수는 건강 비결의 하나로 ‘붉은 혁명의 비타민C’를 소개한다. 본래 약을 먹어본 적이 없지만 어느 날 서울대 이왕재 교수가 “비타민C는 위와 장에 좋다”고 하는 말을 듣고는, 술꾼으로서 “무릎을 쳤다”고 한다. 오 교수는 늘 주머니에 빨간색의 비타민C 알약을 갖고 다닌다. 하루 세 끼 여섯 알은 기본이고, 술을 먹는 날은 차수에 따라 두 알씩 추가해서 먹는다. 3차까지 가면 12알을 먹는 셈이다. ‘동지’들의 건강을 우려해 백 명이 넘는 수련회를 가더라도 인원수만큼의 비타민C를 준비해 나눠준다. 의심이 많은 운동권들은 처음에 비타민C를 권하는 오 교수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러나 10년 넘게 비타민C의 ‘생체실험’ 대상이 된 오 교수의 건강상태를 보고는 상당수가 복용 대열에 들어섰다. “사람을 좋아하니까, 술을 먹어도 늘 즐겁게 먹으니 독이 안 돼요. 운동하는 사람들도 너무 스트레스 받으면 건강을 해쳐요. 나는 늘 ‘혁명의 무기를 제대로 간수하라’고 하죠.”

상당수의 사람들은 그가 말하는 ‘혁명’을 공상주의자의 치기쯤으로 흘려 듣는다. 또 다른 쪽에서는 그를 ‘분열주의자’라 비난하기도 한다. 최규진은 그런 비난들을 소개한다. “타협도 없고 유연성도 없다. 입에 달고 사느니 혁명이고, 노동자 투쟁이고, 노동자 혁명당이다. 말하느니 ‘자본주의 붕괴론’이다. 그는 자본주의를 그럴싸하게 고쳐보면 좀 더 나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그러나 오 교수는 그런 말들이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은 탓”이라고 말한다. 그의 신념은 ‘공상’이 아니라 ‘역사’에서 온다. 고희 기념으로 함께 내놓은 <비판적 교양인을 위한 오세철 강의>(빛나는전망)의 2부에서 그는 소련, 중국, 북한을 비롯해 남미의 좌파 정권까지 모두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고 진단한다. “지금까지 있었던 사회주의를 평가하고 뒤집고 정리하지 않으면 그 다음에 어떻게 하자는 얘기를 꺼낼 수 없습니다. 보통사람들은 여전히 그런 나라들을 사회주의라고 이해합니다. 하지만 노동계급을 억압착취하는 자본주의 혹은 국가자본주의였죠. 자칭 사회주의자라는 사람들을 보면 여전히 스탈린주의에 빠져서 소련이나 북한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생각이 다른데 실천이 같아질 수는 없다”는 측면에서 “무엇을 실천할 것인지를 제대로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국제꼬뮤니스트전망’에 참여하면서 계간지 ‘꼬뮤니스트’ 발간 등에 나서는 것도 그런 이유다.

오 교수는 오늘날의 위기는 ‘경제위기’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위기’라고 본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넘어서야 하는데, 역사적으로 자본주의를 점진적으로 바꾸려고 노력해 온 수정주의와 개량주의는 유럽의 지난 100년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듯 모두 “실패했다”고 지적한다. 그가 말하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란 바로 “혁명적 방법의 자본주의 철폐”를 의미한다. “사실 마르크스주의 자체가 혁명적인데 따로 ‘혁명적’이란 말을 붙일 필요는 없죠. 다만 지금까지 여러 다양한 변종 사회주의가 존재했기에 구분하는 겁니다.”

오 교수는 ‘마르크스주의자’와 ‘마르크스연구자’를 구분한다. ‘주의자’는 이론과 실천이 하나되는 사람이다. 그 또한 본래 ‘강단 마르크스주의자’라는 말을 들었다. 1977년 그의 제자 3명이 대강당의 유리창을 깨고 ‘유신철폐’를 외치다 체포된 모습을 보고 부끄러움을 느낀 그는 비로소 학내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그는 6월 항쟁에서 제자였던 이한열의 죽음을 목도하고 완전히 변모한다. 그는 “87년부터 25년의 세월은 나에게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말한다. 2003년 그는 ‘혁명’에 좀 더 매진하기 위해 정년 5년을 앞두고 교수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주변에선 “퇴직금으로 빚을 갚았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오 교수는 미국·유럽 등에서 국제적으로 벌어지는 반자본주의 흐름에 주목한다. “자본주의는 전 세계의 생산을 하나로 편입시킨 체제이므로 한 나라 차원에서 극복이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세계적 흐름에 호응하기에 우리나라는 아직도 바닥을 치지 못했습니다. 제 역할을 못하는 민주노총은 자연스레 해체될 거예요. 과거 전노협(민주노총의 전신)이 싸우면서 만들어졌듯 비정규직 노동자 중심으로 다시 조직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는 대선과정에서도 투쟁을 통해 ‘현장’을 넓게 만들어가면서 대선판 자체를 조롱하는 판을 만들어야 한다고 본다. “투표율이 30~40% 나오면 뭘 가지고 그들이 정당성을 얻겠어요? 누가 뽑히든 우리는 계속 싸운다는 장기적 전망을 줘야 합니다.”

물론 그의 생각과 인생 자체를 모두 “실패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앞서 나가는 게 실패는 아닙니다. 조금 뒤에서 보면 모험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왜 앞서 나가는지를 보면 그건 실패가 아니죠. 저는 조금 더 차근차근 앞으로 나가야 한다는 충고로 받아들입니다. 사실 책에 등장하는 60여 명의 사람들도 고립돼 있다는 생각을 하겠지요. 그들이 이 책을 보면서 ‘아직도 이런 동지들이 함께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며 격려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는 늘 겸손하고 자기 잘못을 인정할 줄 알았던 노동운동가 고 이일재를 “공산주의자가 진정한 민주주의자임을 몸으로 보여줬다”고 평했지만 그야말로 어쨌건 ‘진정한 민주주의자’임은 분명해 보인다. 연극배우 오주환은 ‘막내배우’ 오세철을 이렇게 기억한다. “소극장의 분장실은 두세 명이 앉아 있어도 비좁은 공간이다. 내 기억에 선생님께서는 분장실에 단 한 번도 앉지 않으셨던 것 같다. 어두운 무대 뒤 구석 의자에 그저 묵묵히 앉아계셨다. 행여 다른 배우에게 방해라도 될까봐 작은 자세로 벽에 붙어서 앉아계셨다. 어둡고 좁고 답답한 그 공간에서, 선생님은 늘 특유의 인자하고 밝은 표정으로 앉아계셨다. 그게 내가 아는 오세철 선생님, 바로 그분의 모습이다.”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11232233445&code=96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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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오세철 선생 고희 출판기념회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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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기장
  • 등록일
    2012/11/19 11:29
  • 수정일
    2012/11/19 11:29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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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철 선생 고희 출판기념회] 

『술, 학문, 예술, 혁명의 사중주』

『비판적 교양인을 위한 오세철 강의록』


                

일시 및 장소: 2012. 11. 17(토) 16시 연세대 상경대 상경관 B120호
주최: 연세대 오세철 교수 제자들





 

<출처 : 꼬뮌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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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0] 삶과 투쟁의 현장에서 부치는 해방글터 시노래 문화제 영상

  • 분류
    잡기장
  • 등록일
    2012/11/19 11:27
  • 수정일
    2012/11/19 11:27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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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투쟁의 현장에서 부치는 해방글터 시노래 문화제 영상
 

 

'길 위에서 부르는 해방노래' 

해방글터 노동자시인: 김영철/조선남/배순덕/조성웅/신경현
연대하는 문화노동자: 박준/류금신/우창수/따따따장난감밴드
연대를 위한 노래모임 좋은친구들

발언 : 오세철,   연대시 : 임성용





발언/ 오세철: 혁명과 예술, 유명자: 운동 제대로 하기

 

 

 <출처 : 꼬뮌영상>

 

 

춥고 궂은날씨에 함께 해주신 모든 동지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부산, 울산, 대구 등 멀리서 문화제 전과정을 준비해오신

해방글터 동지들, 우창수, 김은희, 장밴 동지들, 그리고 서울에서 연대해주신 동지들 모두에게 뜨거운 동지적 신뢰를!!!

 

그리고 노동자투쟁과 예술과 혁명이 더욱 가까이 어울어지는 내년을 준비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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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부르는 해방노래

  • 분류
    잡기장
  • 등록일
    2012/11/08 12:47
  • 수정일
    2012/11/08 12:47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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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부르는 해방노래

 

1. 전국노동자대회 전야제에 맞춰 계획한 해방글터 시노래음반 발매가 지연되었습니다. 지금까지 200여명의 동지들이 492만원 가량의 후원을 해주셨습니다 약속을 지키기 못해 후원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사과드립니다.

 

2. 9월 노래 녹음, 10월 수정작업과 자켓디자인 작업을 거쳐 전국노동자전야제 때 맞춰 발매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생계활동과 공연일정 등으로 집중해서 작업해야 할 녹음 일정을 잡기가 쉽지 않았고 계획한 일정들이 지...연되었습니다.

 

3. 지난 10월말 경, 해방글터 동인들과 우창수 동지는 점검회의를 통해 물리적인 시간상 전국노동자대회 전야제 음반 발매는 힘들다고 공유했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환불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비록 음반을 발매하지는 못했지만 이미 계획된 해방글터 시노래문화제를 통해 다시 한 번 기회의 시간을 달라고 호소하기로 했습니다.

 

4. 해방글터, 우창수, 좋은친구들은 시노래 문화제 후 전체 모임을 통해 기간 과정을 점검하고 현실적인 조건들을 고려 해 책임있게 음반발매 계획을 결정할 것입니다.

 

이후 일정과 계획들은 해방글터(http://cafe.naver.com/ptpen), 보내주신 이메일, 패이스북 등을 통해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5. 2012년11월10일/오후 6시/재능농성장/

해방글터 시노래 문화제 [길 위에서 부르는 해방노래]에 동지들을 초대합니다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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