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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헤셀의 두 책 「분노하라!」,「참여하라!」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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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기장
  • 등록일
    2011/09/14 08:30
  • 수정일
    2011/09/18 10:41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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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헤셀의 두 책  「분노하라!」,「참여하라!」에 대하여

 

 

 

  분노하기, 그래  자본주의 착취에 대해서!

 

   작가이자 서정시인 그리고 프랑스외교관인 스테판 헤셀의 글들, 「분노하라!」,「참여하라!」는 진정한 베스트셀러들이다.  지금 벌써 이 글들은 세계의 불의에 대해 고민하는 모든 사람들의 참조점이 되었다. 최근에 스페인전역으로 멀리 퍼져나간 (그리고 그정도는 아니라도 다른 유럽나라들에서 볼 수 있었던) 사회적 분노의 운동은 심지어 스스로를 분노한 사람들이라고 부르며 헤셀의 첫번째 책과 분명하게 관련지었다[1]

 

「분노하라!」는 대략 30쪽분량의 글이다. 여러 언어들로 번역되었고 되도록이면 많은 보급을 위한 터무니없이 싼 값으로 전세계적으로 수백만부가 팔려나갔다. 그 책의 출판은 처음부터 매우 성공적이었다. 아주 당연한 이유로, 왜냐하면 책제목 자체가 이미 이 세계의 야만성에 대항한 절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억압당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점점 더 확산되는, 그리고 점점 더 참을 수 없고 적대적으로 보여지는 세계 전역에서의 가난과 전쟁이 초래하는 공포가 촉발한 그러한 감정에 딱 들어맞는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의 아랍의 봄과 분노한 사람들운동이 이를 증명한다.

 

 

  스테판 헤셀은 어떤 사회를 꿈꾸는가?

 

   현재 93살인 스페판 헤셀은 이 부정의한 세상에 대한 자신의 분노를 표현할 만한 정력을 여전히 갖고 있다.  이렇게 볼때는 오직 경의와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의  시각으로 볼 때 우리는 어떤 사회를 위해 투쟁해야 할것인가라는 문제가 논의될 필요가 있다.

 

   그의 책 초입부터 이미 스테판 헤셀은 2차 세계대전 종결시 국민저항의회(CNR)[2]의 경제강령작성의 계기가 된 그 원칙과 가치들을 옹호한다. 이 방침들이 아직도 여전히 현실성을 갖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헤셀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당연히 지난 65년동안 사정이 달라졌다. 오늘날 우리는 레지스탕스 시대의 도전들과 똑같은 도전들 앞에 서있지 않다. 그당시 우리들이 제안한 강령은 오늘날 그 형태로는 더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이점을 눈 감아버려서도 안된다. 그러나 우리가 그당시 따랐던 가치들은 동일하고 우리는 그것들을 계속 존중해야한다. 그것은 바로 공화국과 민주주의의 가치이다. 각각의 정부들은 이러한 가치를 놓고 평가될 수 있다. 국민저항의회의 강령에서 특정한 비젼이 제시되었고 이 비젼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윤의 독재와 돈의 독재에 맞서는 것, 한편에는 극도의 가난과 다른 한편에는 오만한 부가 나란히 존재하는 것에 분노하는 것, 경제적으로 봉건적 상태를 탈피하는 것,  진정으로 독립적인 언론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 모든 형태의 사회적 안전을 보장하는 것  우리가 그당시 지향했던 일련의 가치들와 성취들, 이 모두가 오늘날 위협당하고 있다. 최근에 결정된 많은 대책들이 레지스탕스시대의 내 동지들을 경악시키는데, 그것들은 우리의 기본적인 가치들을 겨냥하기 때문이다.  내생각에,  사람들은 특히 젊은이들이 분노해야 한다. 그리고 저항해야 한다!"[3].     그러나 누가 이러한 상황에 책임이 있는가? "이는 오직, 레지스탕스가 맞서 싸웠던 금권력이 지금 그 어느때보다 막대하고 불손하며 이기적이고 국가 최고위층까지 스며들어 자체의 이익옹호자들을 갖고 있기에 가능해 보인다. 그 사이 사유화된 은행들은 그들의 배당금과 매니저들의 넘쳐나는 수입만 생각하지 공익에는 관심이 없다. 빈부의 차이는 갈수록 커져가고 돈과 영향력을 향한 노력은 점점 더 많은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4] 헤셀에 따르면, 민주주의가 지도자들의 행동을 이끌어야 한다는데,  금융계나 은행가들의 이기주의와는 반대로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들의 이익을 더 염려하기 때문이란다: "우리는 그들에게 말한다: '그것을 포착하고 분노하라!'라고. 정치, 경제의 책임자들, 지식인들 그리고 사회 전체는 양보해서는 안되며, 평호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현재 금융시장의 국제적 독재의 영향을 받아서는 안된다."[5]  그러니까 이것이 공중의 극도로 성스러운 이해라는 것이다. 정치가, 경제지도자와 노동자, 실업자, 학생, 퇴직자, 비정규직을 결합하는 것이... 바꿔 말하자면, 스테판 헤셀의 민주주의는 하나의 신화이다. 그것은 착취자와 피착취자가 마치 기적처럼 같은 눈높이로 만나는 상태를 그럴듯하게 그려낸다, 그들이 소위 동일한 권리와 의무를 가지며 금융시장의 독재에 대항해 국민들로서 동일한 민주주의적 이해를 옹호하는 그런 상태를.  그러면 그 모든 것은 어디로 이끄는가?

 

   "오늘날 고민하고, 글을 쓰고 민주적으로 정부들의 선거에 참가함으로써 우리는 사정을 현명하게 ...간단히 말해서 장기적인 시야를 가지고 이끌어가길 바랄 수 있다."[6] 그러면 그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는 어느 쪽을 지지해야 하는가?  "나는 나자신을 여전히 사회주의자로, 즉 내가 이 개념을 파악하는 바대로, 사회적 불평등을 의식하고 있는 사회주의자로  본다. 하지만 사회주의자들은 자극들을 받아야 한다. 용감한, 필요하다면 '건방진' 좌파가 나타나서 비중을 가지면서 국민의 자유라는 비젼을 주장하기를 나는 바란다. 녹색당이 의회에 진출해서 환경보호 사상이 진전을 이루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7] 결국 헤셀의 견해로 볼때 우리의 분노는 우리 모두가 이미 잘 알고 있는 구호, 즉 우리는 투표하러 가야 한다를 받아들이는 것을 초래한다. 우리는 국민저항의회(CNR)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그리고, 극좌파, 반국제화주의자, 노동조합주의자들 등등, 즉 자본의 전반적인 이해를 충심으로 옹호하는 당과 조직등 각양각색의 모든 사람들을 포괄하는 새로운 대안적인 강령(또 다른 저작으로서 곧 간행될)에 찬성해야 한단다. 다행히도, 헤셀이 특히 대상으로 했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수많은 젊은이들은 이 모든 좌파성향의 언설에 귀기울이지 않았고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나라에서 사회주의적 정부들이 하는 짓을 볼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가졌었다. 그들은 사회주의 정당들이 어떤 혹심한 긴축정책들을 펼수 있는지를, 게다가 이 정책들이 완전히 민주주의적 방식으로 결정되는 것을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이는 그리스에도 해당된다). 그리고 그들은 민주주의적 사회주의 사파테로정부의 민주적 경찰의 곤봉도 경험해보았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헤셀은 계속해서 이 정당들을 지지할 것을 주장하고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그로부터 젊은 세대들에게 있어서 어떤 임무들이 생겨나는가? 우리는 그들이 지배자들을 신임하거나 불신함에 있어서 기반하고 있는 그 가치들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가치들이다. 이러한 가치들의 도움으로 결정권자들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있다."[8]  어떤 영향력을 이 젊은 세대가 그들에게 그렇게 많은 비참을 강요하는 민주적 국가들에 행사할 수있는가?  아마 눈밖에 난 장관 한명쯤을 대체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다음은? 그것을 통해 진정으로 무엇이 바뀌겠는가? 아무것도 아니다! 모든 나라에서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집권하고 있는 것이 우파정부든 좌파정부든 (아니면 남아메리카에서처럼 극좌파정부든) 상관없이, 생존조건의 전반적 인 악화에 직면한 국민 대다수와 경제의 파산을 모면하기 위해 엄격한 긴축정책을 펴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국가기구사이의 골은 점점 더 깊어만 가고 있다. 어떤 다른 길도 없다. 국가의 민주주의적 가면뒤에 자본의 독재가 항상 도사리고 있다.

   

자본주의를 손대지는 말것!

 

   "나의 세대는 세계혁명이라는 생각에 대해 단단한 알레르기를 갖고 있다. 약간은, 우리가 그것과 함께 태어났기 때문이다. 나는 러시아혁명의 해, 1917년에 태어났고, 그 해는 내 인격의 한 특징이다. 나는 우리가 폭력적 혁명적 행동들을 통해서는 기성제도권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그렇게는 역사를 추진할 수 없다는 느낌을, 부당할지도 모르지만,  갖게 되었다."[9]  약간 나중에 헤셀은 계속해서, „ 모든 사회들 속에는 고삐풀린 채 나타날 수 있는 잠재된 폭력이 존재한다. 식민지해방투쟁때가 그러한 경우이다. 폭동들, 예를 들어 노동자폭동들은 아직도 가능함을 의식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경제적 국제화의 진전을 놓고 볼 때 가능성이 적다. 제르미날이라는 장르는 약간 낡은 것이 되어버렸다.“[10]

 

   그러니까 헤셀이 젊은 세대에게 하는 호소는 다음과 같다. 세계혁명이니 계급투쟁이니 하는생각을 머리에서 지워버려라! 이 모든 것은 과거사에 속한다. 오히려 체제의 기능방식을 개선하도록 노력하라. 어떻게? 여기서 헤셀은 천재적이고 혁신적인 제안, 모든 좌파정당들이 백년도 더 되는 동안 해온 그 제안을 내놓는다. 즉, 세계의 강대국들이 함께 모인 경제회의 및 사회회의, 일종의 전세계조정위원회의 창립을 제안한다. 세계에서 이 전세계적 조정위원회가, 위기 방지를 위해 그리고 이윤욕과 권력욕에 사로잡힌 모든 거대 금융기관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 경제규제를 목표로 추구할 것이라 한다. UN의 전신인 국가연맹이 1차대전후 공식적으로 거의 동일한 설립이유로 창립되었음을 상기해 보자.  그 설립이유는 상이한 국가들의 이해를 서로 화해시키는 국제기구의 도움으로 전쟁재발을 방지하자는 것이었다. 그 결과는? 2차 세계대전과  1950년이래 전 세계에서 단 14일간의 평화. 사실상 세계는 서로 경쟁하는 국가들로 조각나있고 그들은 서로간에 무자비한 통상전쟁을 끊임없이 그리고 필요시에는 무기를 들고 치르고 있다.  이 모든 조정하는 세계기구들”(세계통상기구, 국제통화기금, UN, NATO등)은  그 안에서 국가들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강탈적인 기구들일 뿐이다.  그러나 이점을 스테판 헤셀은 결코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하나의 새로운 체제의 필요성, 국제적인 혁명의 필요성을 시인해야만 할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젊은이들이 이러한 착취체제 자체를 과격하게 문제시하게 되도록 이끌 출구를 제시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보낸다.  대신에 그는 각국이 새로운 사회- 및 경제안전보장회의 내에서 새로운 정책을 펼치도록 각각의 국가에 압력을 행사하도록 젊은이들을 고무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국가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시민사회의 대대적인 개입, 국민의 광범위한 동원이면 충분하단다. 이러한 참여는 젊은이들이 NGO들와 이런류의 다른 단체들에 대거 참여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는데,  이는 많은 도전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치뤄야할 많은 투쟁들, 즉 환경, 사회, 반인종차별, 평화 및 연대적인 경제를 위한 투쟁등이 존재하기 때문이라 한다.  실제로 헤셀은 우리에게 낡은 똑같은 개량주의적 뒤범벅을 제공한다. 직접 잘 고른 재료들(국민의 시민참여, 지적인 선거참여 등등)을 가지고 자본주의는 자신이기를 즉 착취체제이기를 멈출 수 있고 더 인간적이고 사회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개량이냐 혁명이냐?

 

   "역사는 이러한 도전의 댓가인 일련의 연이은 격렬한 요동들로 이루어져 있다. 사회사는 전진하고 결국에, 인간이 완전한 자유를 획득한 후, 우리는 완성된 민주국가에 도달한다라고 헤셀은 그의 글, „분노하라!"에서 우리에게 말한다. 인류가 큰 도전 앞에 서있다는 것은, 그래서 이 모든 문제들의 해답을 찾아야하고 그렇지 않으면 사라질 것이라는 말은 맞다. 이 문제의 중심에는 사회변혁의 필요성이 놓여있다. 하지만 어떤 변혁? 자본주의는 개량될 수 있는가? 아니면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해 파괴되어야 하는가?

 

   자본주의를 개량하려 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이를 행하려는 것은 자본주의의 규칙과 법칙들에, 인류를 비참함과 전쟁과 무질서와 야만에 빠져들게 하는 자본주의의 모순들에 굴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체제는 착취체제인데, 착취가 인간적으로 구성될 수 있는가? 수백만의 노동자들을 댓가로 이윤을 만들어냄으로써 한 계급에게 가능한한 많은 부의 축적을 가능케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 그러한 체제가 인간적으로 될 수 있는가? 그리고 자본가들 사이에 경쟁이 첨예화되면 노동자계급이 대대적인 실업,  비정규적고용상황의 확대, 노동현장에서의 무제한적인 착취, 임금인하와 같이 댓가를 치르게 되는 그러한 체제가. 동시에, 인간들이 기본요구를 충족시키고 계급없는, 즉 불평등이 없는, 전쟁의 야만이 없는 사회를 민족국가들과 국경을 폐지함으로써 건설할 수 있을 모든 물질적 수단은 존재한다. 오직 노동자계급만이 그러한 사회의 전망을 실현할 수있다. 이 맹아는 물론 분노한 사람들운동 속에 이미 존재한다. 즉, 서로 돕고, 서로 나누며 연대감과 헌신을 나타내고, 함께함으로써 즐거운 것등등. 스페인에서 관찰될 수 있는 이 인상적인 운동은 짚단의 불같은 일시적 흥분이 아니다. 그것은 전세계 도처에서 앞으로 일어날 투쟁들을 알린다. 노동자계급이 점점 더 대대적으로 나서서 다른 피압박 계층들을 함께 합류시킬 투쟁들을. 이 투쟁들은 비인간적인 자본주의 체제에 대항해 점점 더 분명하게 나설 것이다. 그러한 투쟁들로부터,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더 커다란 의식이 생겨날 것이다.

 

Antoine. 2011년 7월 2일  (ICC)

 

    

 

 


 

[1]스테판 헤셀은 스페인에서 상당히 유명하다. 적어도 프랑스에서만큼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스페인에 살고 있고 스페인의 작가이자 특히 지금 진정한 민주주의를의 창시자이기도 한 경제학자 호세 루이 삼페드로와 친구로 지낸다. 호세 루이 삼페드로는 헤셀의 캠페인에서 영감을 얻은 팜플렛을 간행했고 또 「분노하라!」의 스페인어판에 서문을 썼다.

[2]CNR은 스테판 헤셀에게 있어서 역사적인 준거점이고 뒤따라야할 모범이다. 우리는 나중에 이점에 대해 언급하고 싶다.

[3]Indignez-Vous!(분노하라!) , 15쪽

[4]같은 책, 11쪽

[5]같은 책, 12쪽

[6]Engagez-Vous(참여하라)!,  16쪽

[7]위과 같은 책 43쪽과 44쪽

[8]Engagez-Vous(참여하라)!, 22쪽

[9]같은 책, 20쪽

[10]같은 책,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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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와 한국 사회주의(전체)운동에 대한 회고

  • 분류
    잡기장
  • 등록일
    2011/09/12 15:06
  • 수정일
    2011/09/12 15:06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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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와 한국 사회주의(전체)운동에 대한 회고1)

                                                                                                                          -오세철

 

 

 

                                -1990년대 이후-

 

 

이 글은 필자가 20여 년간 몸담아 왔던 사회주의 정치운동의 경험에 기초하여 역사를 되돌아보는 글이다. 회고의 역사에 대한 평가에는 마르크스주의의 원칙이 요구된다. 마르크스주의는 유사한 공산주의적 사상과 구별되는 과학적 사회주의 또는 코뮤니즘이다. 마르크스주의의 또 하나의 원칙은 지배계급과 소부르주아지로부터 오는 이데올로기, 즉 종파주의, 개인주의, 기회주의, 모험주의와의 투쟁이다.

 

첫째, 1990년대 초반의 사회주의 정치운동을 NL, PD, ND 사이의 논쟁으로 살펴보면 그 당시 우리 사회 이론진영과 실천진영이 국제주의적 마르크스주의와 너무 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러시아 혁명에 배타적으로 의존한 역사해석으로 폭넓은 역사인식이 부족한 점,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본질 분석과 함께 세계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점이다.

 

둘째, 1990년대 중반의 국제 사회주의운동을 평가하면, 실천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운동이 국제주의 경향과 만났다는 점이다. 이 세력은 스탈린주의, 마오주의, 김일성주의를 같은 것으로 보았으며 혁명당이 아닌 진보정당 건설을 격렬하게 비판했다.

 

셋째, 2004년 이후 혁명적 사회주의운동을 살펴보면, 이 세력은 1997년 IMF 관리 체제 아래에서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의 경험과 그 위기의 한국 자본주의에의 관철을 통해 보다 근본적인 세계 자본주의 쇠퇴의 과정을 살펴보게 되고 역사유물론과 방법론으로서의 변증유물론의 원칙을 부여잡게 된다.

 

넷째,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미래는 쇠퇴하는 자본주의의 객관적 인식과 더불어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노동계급의 투쟁이라는 주체적 조건에 달려 있다. 이를 위해 세계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단결과 연대를 통한 세계 혁명당의 건설과 소비에트 건설을 향한 노동계급의 자발적 투쟁이 요구된다.

 

 

 

1. 들어가며

 

소련 붕괴 이후 한국의 사회주의(정치)운동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이를 마르크스주의의 역사관으로 다시 정립하는 작업은 마르크스주의 역사 연구자뿐만 아니라 혁명적 사회주의자의 몫이다. 이 글은 그러한 책임 있는 연구 성과물이 아니다. 단지 이 글은 지금까지 내가 몸담아 왔던 사회주의 정치운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면서 역사를 거꾸로 뒤돌아보는 회고의 글임을 밝힌다.

 

역사에 대해서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정치적 입장과 원칙 위에서 나름대로 해석하고 평가한 것이기 때문에 이 글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진다. 1990년, 2004년, 그리고 2006년 내가 쓴 글을 차례로 인용하면서 시작하려 한다.

 

“마르크스가 오래전에 관념론과 교조주의 그리고 모험주의, 기회주의와 끝까지 싸우며 비판했던 것처럼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유물론의 올바른 정립을 이루어야 한다. …… 이른바 ‘개혁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회의의 늪에서 빠져나와 교조주의의 고집과 우경화의 변질을 준엄하게 꾸짖으면서 관념론, 수정주의, 모험주의, 소시민적 혁명주의와 싸워야 한다. ……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원칙인 이론과 실천의 통일, 혁명적 사유와 행동의 통일을 굳건히 견지하면서 과학적 사회주의의 빛나는 전통성을 훼손시키지 말아야 할 것이다”(오세철, 1990: 16-19).

 

“20여 년간 사회주의 정치운동에 몸담아 오면서 내가 끊임없이 문제제기 하고 비판했던 것은 사상의 동요와 변질이었다. 이런 사상적 동요가 현장과 대중조직뿐만 아니라 정치조직과 사회운동조직에서도 확산됐고 전체 운동을 합법 개량주의의 늪으로 빠지게 한 요인이 됐다. 전 세계적인 신자유주의(체제, 이념, 정책을 모두 포함한)의 위력은 동북아를 포함한 한반도에도 어김없이 전면적으로 관철되고 있으며, 한국의 대중운동과 정치운동 또한 신자유주의에 포섭되고 있는 실정이다. 사회적 합의주의의 틀 속에서 현장에 기반을 둔 대중투쟁을 포기하고 교섭주의로 나아가는 민주노총과 억압받는 현장에 기반을 둔 혁명적 사회주의정치를 포기하고 사회개량적 선거정치로 급속하게 전화된 민주노동당이 혁명적 사회운동 영역을 시민운동으로 재편하면서 신자유주의의 이중대로 나아갈 개연성이 크다. 이는 오랫동안 혁명적 운동의 전통이 뿌리내린 유럽의 경우에도 벌어지고 있는 보편적 경향이며 제3세계의 경우에는 오히려 신자유주의로의 포섭 속도가 더욱 빠르게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오세철, 2004).

 

“우리는 지금까지 세계 여러 곳에서 정기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 대회(모임)가 열리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강단의 추상적 논의나 자본주의의 좌파에 속하는 정치적 세력들의 연대를 위한 행사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자본주의 데카당스 시대의 객관적이고 주체적 조건이 야만과 전쟁을 넘어서서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더욱더 깊이 인식하고 있다. 한국의 노동계급은 현장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고 혁명적 정치세력은 전망을 분명하게 열어젖히지 못하고 있지만 과거 혁명운동이 국제주의의 원칙을 저버리면서 참담한 패배를 경험했던 역사를 뿌리로부터 반성하면서 우리는 하나의 현장,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을 넘어서는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단결을 이루어내야만 한다. 이번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 국제대회는 한국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세계의 좌익공산주의자들과의 소중한 만남과 토론의 마당이며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진영 내의 입장과 노선 차이를 드러내고 소통하는 첫 번째 경험이 될 것이다. 대회의 주제를 이론, 실천, 전망으로 구분하고 이를 꿰뚫는 인식의 지평을 넓혀 나가는 것이 이번 대회의 주요 목표이다. 우리는 이번 국제대회를 시작으로 세계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세력이 연대하고 단결하여 세계혁명을 향한 힘을 축적하고 세계의 프롤레타리아트와 함께 그 역사적 과업을 완수하기를 바란다”(오세철, 2006).

 

그 당시 전술당으로서의 ‘민중당’ 건설에 인텔리가 집단적으로 참여했지만 당내 민주주의에 대한 문제제기와 소련 붕괴로 인한 사상 동요에 항의하여, 인텔리 그룹과 젊은 활동가 그룹이 탈당하게 되고 그 이후 나는 마르크스주의의 원칙을 견지하면서 사회주의 정치운동을 계속해 오고 있다. 위의 인용문은 그러한 일관성을 표현하는 보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사회주의 운동세력이 지녀왔던 한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2. 역사적 평가에 필요한 마르크스주의의 원칙

 

1980년대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해를 지금의 시점에서 뒤돌아보면 얼마나 단편적이고 피상적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마르크스엥겔스의 전집이 일부 번역된 것도 1990년대에 들어서였고 1987년 이후 레닌전집의 일부가 번역되어 나왔다. 이른바 ‘마르크스-레닌주의’로 통칭되는 스탈린주의를 마르크스주의와 동일시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그 당시의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광주민중항쟁을 겪으면서 민족주의적 볼셰비즘에 대한 친화적 경향이 더욱 커졌으며 군사 파시즘의 한국과 짜르 체제의 러시아 상황을 비교하면서 혁명적 정세를 해석하려는 경향도 정서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일본 번역서를 통한 독해, 주체사상의 도입들이 이러한 척박한 이론풍토에 가세하면서 마르크스주의는 스탈린주의의 교리로 채색된 채로 교조화됐다.

 

‘과학적 사회주의’로 부르는 마르크스주의는 유사한 공산주의적 사상과 구별하기 위해 쓰였다. 초기 기독교, 스팔타쿠스 노예반란, 영국 농민봉기와 같은 초기 공산주의 사상은 돌아갈 수 없는 잃어버린 공동체를 찾으려는 복고적이고 신비주의적 요소를 지닌 사상이었고 16세기 독일 뮌처(Mu¨nzer)가 이끄는 재세례파(Anabaptist) 운동으로부터 영국 내전의 윈스탄리(Winstanley)와 디거스 (Diggers)로 그리고 프랑스 혁명의 바뵈프와 ‘평등인의 음모’(Conspiracy of the Equals) 같이 종교적이고 계시적 관점에서 착취적 사회질서로부터의 인간해방의 능력을 강조하는 운동, 그리고 산업자본주의의 공포를 비판한 오웬, 생시몽, 푸리에의 사상은 자본주의에 의한 역사적 진보와 과학적 세계관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부상에 근거한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와 구별된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의식이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나오고 공산주의 전위는 이 과정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50년 후 카우츠키가 “외부로부터” 노동계급에게 주입되는 공산주의 의식을 가진 사회 인텔리켄챠라는 테제에 대한 반박이었음을 웅변적으로 말하고 있다. 또한 『1844년 경제철학수고』는 자유로운 사회에서의 인간 활동의 본질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는데 이 글이 헤겔의 철학체계의 주요 개념인 소외를 다루었기 때문에 “마르크스 이전”의 글로 여겨졌지만 마르크스의 초기 저작과 『자본론』같은 후기 저작 사이에는 근본적인 연속성이 있으며 그 후『요강』에서도 이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마르크스가 말한 공산주의를 요약할 필요가 있다.1)

 

첫째 밑으로의 “평등화”라는 의미와는 반대로 “역사의 수수께끼가 풀리는” 인류의 거대한 진보이다. 둘째, 특히 화폐와 자본의 지배하에 있는 생산이 인류를 끊임없이 경쟁하는 원자로 갈라놓는다면 공산주의는 인간의 사회적 본성을 회복하게 해서 노동의 만족이 타인의 욕구를 위해 이루어지게 한다. 셋째, 분업이 개인 수준에서 극복되는 것은 생산자가 더 이상 단일한 활동형식(육체노동이건 정신노동이건)에 매이게 하지 않고 정신적·육체적·예술적·지적 활동이 결합되는 전인적 인간이 된다. 넷째, 빈곤과 강제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은 세계에 대한 새로운 경험, “모든 감각의 해방”의 길을 열어 놓는다. 인간은 더 이상 자연에 반대하는 원자화된 자아가 아니라 자연과 통일된 새로운 의식을 경험한다.

 

마르크스주의 원칙은 1차 인터내셔널에서의 논쟁과 고타강령비판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1차 인터내셔널에서의 논쟁은 첫째, 부르주아 개혁주의자에 대항하는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의 원칙과 부르주아 민족주의자에 대항하는 계급 자율성의 원칙이고 둘째, 반정치적 입장과 무정부주의자의 연방적 편견에 대항하는 프롤레타리아 정치와 집권조직의 방어이다. 이 두 가지 원칙은 사회주의 정치운동을 평가하는 기본이 된다. 1875년 ‘독일사회주의노동당’은 라쌀레의 국가숭배주의와 베벨과 리프크네히트 같은 마르크스주의 분파의 타협의 산물인데, 마르크스는 『고타강령비판』에서 혁명과 공산주의 문제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첫째, 당면한 개혁과 장기적 공산주의 목표를 혼합시킨 강령을 비판하고, 둘째, 사회민주주의를 민주적 개혁의 계급당으로 만든 경향을 반대하여 당의 계급적 성격을 분명히 했으며, 셋째, 교육받은 엘리트로서의 당의 대체주의적 사고를 반대함으로써 부르주아 편견의 척결을 주장했고, 넷째, 개혁을 통해 사회주의로 이끄는 “인민국가” 개념에 대한 환상에 반대했으며, 다섯째, “공평한 분배”를 요구하는 강령에 반대하면서 교환과 가치법칙의 폐지를 요구했다.

 

마르크스주의의 또 하나의 원칙은 지배계급과 소부르주아지로부터 오는 이데올로기와의 투쟁이다. 그러한 이데올로기는 종파주의, 개인주의, 기회주의 그리고 모험주의 등이다. 종파주의는 조직에 대한 소부르주아 개념의 전형적인 표현으로서 자신을 “세계의 유일한 하나”로 보고 프롤레타리아 조직의 다른 조직을 경쟁자나 적으로 보고 논쟁을 회피하는 경향이다. 개인주의는 역사주체를 개인으로 인식하고 투쟁을 모든 사람에 대한 개인투쟁으로 본다. 소부르주아지거나 프롤레타리아 조직에 새롭게 프롤레타리아화된 요소인 농민, 장인, 인텔리, 학생의 경향이다. 또한 기회주의는 역사적 미래가 없다는 인내심 부족으로부터 나타나며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두 계급 사이의 입장과 이해를 조화시키려는 경향이다. 끝으로 모험주의는 비타협과 급진화라는 이름 아래에서 어느 때나 부르주아지에 대한 공격이 가능하다고 보고 투쟁조건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결정적”인 투쟁에 돌입한다고 하는 경향이다. 따라서 실패할 투쟁으로부터 노동계급을 방어하려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마르크스주의의 흐름을 기회주의로, 심지어 반동적이라고 낙인찍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실제로 이러한 경향은 기회주의와 같은 소부르주아 조급성 때문에 기회주의로 수렴된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와의 투쟁의 보기는 다음과 같다. ① ‘국제노동자협회’ 내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벌인 바쿠닌에 대한 투쟁, ② 1860년대와 1870년대의 라쌀레의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투쟁, ③ 19세기 말 베른슈타인류의 수정주의와 개량주의에 대한 투쟁, ④ 멘셰비즘에 대한 투쟁, ⑤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카우츠키와 중도주의에 대한 투쟁, ⑥ 코민테른의 퇴행과 1920년대와 1930년대 공산당(스탈린주의)에 대한 투쟁, 그리고 ⑦ 1930년대 트로츠키주의의 퇴행에 대한 투쟁이 여기에 속한다.

 

 

3. 1990년대 초반의 사회주의(정치)운동에 대한 평가

 

1989년부터 1991년 중반까지 사회구성체를 둘러싼 논쟁은 주로 ≪현실과 과학≫과 ≪우리사상≫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현실과 과학≫은 PD를 대변한 반면 ≪우리사상≫은 ND를 대변했다. ≪현실과 과학≫은 연구자 중심의 집단이었지만 ‘노동계급’ 그룹과 관련이 있었고, 이들 그룹은 ‘인민노련’ 및 ‘삼민’과 통합하고 그 주력인 인민노련은 민중당의 다수파로서 그 이후 합법개량주의의 주도 세력이 된다. ≪우리사상≫은 ‘사노맹’의 기관지 역할을 했다(사노맹도 민중당에 개입했다). ≪현실과 과학≫은 소련공산당 제26차 당대회(1981년)와 제27차 당대회(1986년)의 논쟁을 검토하면서 27차 당대회에서의 종속국독자론의 기각을 평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역사발전의 보편성으로서의 세계사 또는 그 합법칙적 발전으로서의 현대에 대한 설명에 불과하다. 이제 역사발전의 특수성 또는 그 합법칙적 발전의 차별화, 즉 유형론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우리가 신식국독자론이라 부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의 보편성과 특수성의 변증법적 통일을 가리킨다”(윤소영, 1999: 172).

 

그리고 제4집에서는 “그 동안 우리는 한국판 쁘띠부르주아 민족주의인 주체 사상과의 사상·이론을 투쟁을 통해 노동계급의 관점에 입각한 변혁의 과학적 전망을 모색해왔다. 그 결과물로서 우리는 (적어도 2집 이후로는) 신식국독자/반제반독점PDR론의 ‘세계’를 나름대로 제시하기에 이르렀다”(≪현실과 과학≫ 제4호, 1989: 8). 여기서 이 그룹이 비판한 식민지반봉건사회/반제반봉건NLPDR론 은 마르크스주의와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 뒤의 논쟁의 초점이 NDR론 쪽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현실과 과학≫이 ND 그룹을 비판하는 강도는 점점 커진다.

 

“이정로 씨는 불행히도 자신이 하고 있는 말이 제2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자들(카우츠키, 플레하노프, 심지어는 트로츠키)의 그것과 동일하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말과 실천은 마르크스주의 과학으로부터의 일탈이라는 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다”(이창휘, 1989: 11).

 

“우리는 다시 한 번 ‘이론적 청산주의’나 경험주의와 일선을 분명히 그어두지 않으면 안 된다. 소위 ‘계급투쟁적 관점’에 의한 비판이 그 하나이다. 이러한 좌익 비판가들은 우리의 이론적 탐구에 대해 ‘계급투쟁적 관점’이 결여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실제로는 진지한 이론적 탐구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을 혁명적 공문구로 덮어두는 것에 다름 아니다”(≪현실과 과학≫ 제6호, 1990: 7).

 

“페레스트로이카를 계기로 준동하고 있는 비당파적 조류의 본질이 민중의 민주주의적 열망을 수단화하고 그 결과로서 민중의 투쟁을 자유주의 세력의 부수물로 전락시키는 데 있음을 최근의 양상에서 확인됐던 터이다”(≪현실과 과학≫ 제9호, 1991: 6).

 

이에 대해 ND 그룹의 본격적 대응은 ≪우리사상≫ 창간호(1991년 5월)에 잘 드러나 있다. 창간사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노동해방’ 사상은 본래 물질적 힘과 실질적 투쟁을 지향하는 혁명적 사상으로 태어났다. …… 미약한 사상적 조직적 수준에서 엄청난 희생을 치르며 시작한 남한의 혁명운동은 80년대를 거치며 실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반제투쟁, 반파쇼투쟁, 통일투쟁의 각 영역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이루었으며 무엇보다도 혁명운동의 주체로서 노동자 계급과 근로민중이 자유민주주의 부르주아세력과 구별되는 독자적 정치세력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 그 간의 과정에서 이론 수준은 극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사회구성체론, 혁명론, 국가론, 계급론 등 남한 혁명의 전략과 전술 등 혁명운동의 전반에 이르는 이론적 기초가 폭넓게 형성되고 있다”(≪우리사상≫ 창간호, 1991: 창간사).

 

이들 그룹은 남한을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로 규정하면서 자신들의 이론적 기초를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부르고 있다. PDR론을 비판하면서 PD의 독점강화 종속심화 테제의 한계를 비판하고 북한과의 연대를 통한 민족민주혁명을 주장한다.

 

“PD파의 ‘좌’편향적, 경제주의적 변혁이론을 비판하기 위하여 …… 이 속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남한 당면 변혁은 ‘노동해방변혁 단계’와 질적으로 구분되는 ‘민주주의 변혁단계’라고 규정한다”(≪우리사상≫ 창간호, 1991: 104).

 

이들 그룹의 당시 소련과 북한에 대한 인식은 눈여겨볼 만하다.

 

“신연방안의 국민투표에서의 통과를 통해 고르바초프로 대변되고 있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와의 중립적 세력연합’이 부르주아적 개혁세력으로부터의 승리를 거두면서 가시화됐다”(≪우리사상≫ 창간호, 1991: 104).

 

“중국, 쿠바, 북한은 굳건한 반제 사회주의혁명의 기지이자 프롤레타리아적 개혁의 전형으로서 전 세계 노동자 계급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우리사상≫ 창간호, 1991: 36).

 

“북한이 최근 거두고 있는 ‘통일운동의 진전과 새로운 동북아 질서의 구축’의 측면에서의 중대한 성과를 통해 입증되고 있다. …… 이러한 성과는 북한이 부르주아적 개혁·개방 압력으로부터 사회주의적 혁명운동을 굳건히 수호하고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앞당길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다”(≪우리사상≫ 창간호, 1991: 39-40).

 

이 시기의 논쟁을 돌이켜보면 그 당시 우리 사회 이론진영과 실천진영이 국제주의적 마르크스주의와 너무 떨어져 있었음을 실감할 수 있다. 몇 가지로 정리해 보자.

 

첫째, 세계혁명에 대한 폭넓은 역사인식이 부족하여 러시아 혁명의 영향력이 우리나라 사회주의운동에 깊이 침윤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1930년대부터 코민테른 영향 아래 종속되어 있던 과거로부터 한국 전쟁으로 인한 분단, 자생적 사회주의운동의 고사로부터 기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역사적으로 축적되지 않은 사회주의운동의 사상과 이론 그리고 올바른 실천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지는 PD와 ND의 입론이 여전히 그 당시 소련 공산당의 논쟁이나 아니면 레닌과 스탈린 저술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대한 역사적 접근이나 마르크스주의의 전통과 원칙을 지키려했던 유럽 공산주의운동의 역사와 사상가에 대한 인용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혁명이 성공한 러시아를 본보기로 보면서 실패한 유럽 혁명을 뒤돌아보지 않는 배타적 정서도 한몫을 했다고 본다.

 

둘째로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본질 분석과 함께 세계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여전히 분석수준이 일국적 수준에 머물고 있었고 이는 민족주의적 색조와 함께 스탈린주의의 일국사회주의론에 함몰되어 있었다. 자본주의 쇠퇴가 세계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전개되면서 전쟁과 파시즘으로 이어지는 세계 역사에 대한 역사 유물론적 해석과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주체를 올바르게 인식하는 변증 유물론적 해석을 총체적으로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혁명과 반혁명의 소용돌이를 구분할 수 없게 한 것이다.

 

이론적 기반을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부르는 것은 기본적으로 반혁명의 스탈린주의를 교조로 삼은 결과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원칙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양진영 테제도 소련을 사회주의의 중심으로 보고 세계 부르주아지와 투쟁하는 세력으로 규정하여 동맹·연대 세력으로 수용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잉여노동을 점유하고 국가자본의 축적이라는 특수한 기능을 수행하는 계급으로서의 “사회주의 국가”는 낡은 부르주아지에 불과하다. 국가와 그 관료조직에 의한 자본주의적 생산의 집중화와 계획화는 소유의 폐지를 향한 진전이 아니라 착취강화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할 수 없었다.

 

ND의 소련과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인식은 이를 극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으며 북한에 대한 인식은 이러한 규정의 극치에 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현실과 과학≫ 역시 소련 등의 국가에 대한 입장을 드러내지 않지만 여전히 사회주의 국가로서의 신뢰를 보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ND와 차이가 있다면 2단계혁명론을 부정하면서 민중민주혁명론을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어쨌든 이들 세력은 탄압으로 소멸됐거나 스스로 합법개량주의로 전환됐다. 서로 종파주의, 기회주의 또는 모험주의로 비판하여도 이는 원래의 의미와 다른 의도로 사용됐다. 요약하면 이 당시 논쟁은 소련의 몰락이라는 중대한 역사적 경험을 경과하면서도 소련 등 “사회주의” 국가의 본질, 세계 자본주의의 데카당스의 특성에 대한 깊은 이해에 기반을 두지 않은 남한 사회에서의 혁명론, 조직론에 매달리면서 마르크스주의의 국제주의와 분리됐다. 한국사회성격 분석이나 일국혁명론은 여전히 소련과 북한이라는 스탈린주의의 틀 속에 갇힐 수밖에 없었고 마르크스주의와의 올바른 만남을 단절시켰다.

 

 

4. 1990년대 중반 국제 사회주의운동에 대한 평가

 

스탈린주의를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미화시킨 스탈린의 영향력으로부터 해방되기는 쉽지 않았다. 소련 같은 국가자본주의의 몰락을 목격하고 그것이 사회주의 모델로 보았던 수많은 활동가들은 푯대를 잃고 방황하거나 좌절했으며 소부르주아의 본성으로 돌아가거나 부르주아지에 투항했다. 일부 연구자들은 마르크스의 원전을 찾아 읽고 마르크스주의의 원칙으로 돌아가려는 학습을 시작했고 일부는 재빠르게 포스트류의 담론으로 간판을 바꾸었다. 여전히 스탈린주의를 고수하려는 세력은 스스로를 ‘레닌주의자’로 부르고 레닌의 저작에 다시 빠져들었고 그렇지 않은 반스탈린주의의 경향은 급속하게 트로츠키를 읽고 트로츠키주의의 경향들에 다가가기 시작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실천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운동이 국제주의적 경향과 만났다는 사실이다. 국제사회주의자 그룹(IS)의 기관지 ≪사회주의 노동자≫는 제2호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992년 “우리의 입장”에서 그들은 사상적 전통을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룩셈부르크, 트로츠키, 그람시로 규정하면서 “≪사회주의 노동자≫와 ≪국제사회주의≫를 만드는 편집부는 마르크스와 레닌과 룩셈부르크의 국제사회주의 사상을 ‘일국사회의론’으로 뒤집어버린 스탈린에 반대해 트로츠키와 그람시가 그것을 옹호했을 뿐 아니라 더욱 발전시켰다고 믿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다”(≪사회주의 노동자≫ 제2호, 1992: 103)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이들은 국제주의적 입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우리는 다른 나라 노동자 계급과의 연대를 지지한다. 우리는 한 나라의 노동자와 다른 나라의 노동자를 분열시키는 민족주의에 반대한다. 우리는 제국주의-동서방 모두의-에 반대한다. 우리는 모든 피억압 민족의 민족자결권을 옹호한다. 우리는 피억압 민족의 반제 민족해방투쟁을 지지한다. …… 사회주의 혁명은 생존하려면 확산되어야 하며 사회주의는 한 나라에서는 건설될 수 없다. 북한,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 국가이다. 우리는 여성의 진정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평등을 지지한다”(≪사회주의 노동자≫ 제2호, 1992: 110).

 

여기서 트로츠키주의의 역사를 거론할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소련을 포함한 중국과 북한을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한 것이다. 물론 “퇴행한 노동자 국가”로 보는 제4인터내셔널 계열의 입장보다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음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IS의 국가자본주의론을 상세하게 검토할 필요는 없다.2) 특기할 것은 이들이 룩셈부르크를 레닌과 함께 거론한 것, 그람시를 전통의 반열에 올려놓았다는 사실이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해방투쟁에 대한 적극 지지를 표시함으로써 국제주의의 원칙과의 모순을 드려내고 있다. 그런데 이들 그룹은 2~3년 후에 내부논쟁 끝에 분리된다. 혁명적 진영임을 자임하는 그룹은 나머지 경향을 기회주의적 진영으로 규정하고 남한의 멘셰비키로 부르고 있다. 이들 문건은 1994년 11월 29일 『현 단계 남한 운동에서 국제사회주의의 두 가지 전술과 두 가지 조직노선』(당 창건을 위해 투쟁하는 국제사회주의자들)로 나타난다. 이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남한 국제사회주의는 이제 그 전사(前史)를 마감할 시점을 맞고 있다. …… 전사 시기는 국제사회주의가 남한 운동에서 스탈린주의에 대한 사상적 대안으로 떠오르고 정착된 시기였다. 이 시기에 국제사회주의는 스탈린주의에 반대하여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거머쥐어야 할 유일한 이념적 대안이었다. 이른바 ‘현존 사회주의’가 국가자본주의에 지나지 않음을 밝히면서 ‘노동자 계급의 자기해방으로서의 사회주의’ 사상을 정력적으로 옹호해 낸 것은 무엇보다도 이 시기 국제사회주의자들의 훌륭한 업적이었다. 현 단계 남한 운동에서 노동계급 전위당 건설을 사회주의자의 최우선적 임무로 인식하며, 그것을 위한 당면 실천의 중심 고리로의 전국적 정치선동의 조직화를 핵심적 투쟁방향으로 제기하는 하나의 경향과, 전체 노동계급 운동의 이익과 분리된 별개의 이익을 내세우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모든 이론들을 고안해내면서 오직 종파의 양적 성장을 ‘사회주의자의 임무’로 내세워 추수주의로 기꺼이 나아가고 있는 다른 한 경향, 국제사회주의 내의 이 두 경향이 이제 완전한 형태를 취하면서 각자 자신의 진정한 이름으로 싸울 수 있게 됐다. 그것은 국제사회주 의 내의 투쟁하는 두 진영, 혁명적 진영과 기회주의적 진영이다”.

 

이 두 세력이 분화되기 전 표면적인 공통점은 그 당시 좌익 세력을 스탈린주의 세력으로 규정했다. 스탈린주의, 마오주의 그리고 김일성주의를 같이 보았으며 혁명당이 아닌 진보정당 건설을 격렬하게 비판했다. 즉 그 당시 좌익들이 노동자 계급의 자기해방을 부정하고 일국사회주의의 신봉자들이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1990년대 초 벌어진 PD와 ND에 대한 논쟁을 벌인 사노맹과 인민노련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런데 혁명주의 노선을 자임하는 그룹은 1995년 ≪노동해방의 불꽃≫ 창간호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주요 단락을 인용하기로 한다.

 

“현 남한 사회에 미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과 과제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의 과제라고 지목되어 온 것들, 즉 농업문제의 해결-전 자본주의적 착취양식의 제거, 토지 소유의 해체의 의미에서-와 민족해방, 그리고 민주공화정 따위는 더 이상 남한에서 혁명의 과제가 아니다”(≪노동해방의 불꽃≫ 창간호, 1995: 26).

 

“≪사회주의 노동자≫와 ≪사회주의 평론≫을 내고 있는 국제사회주의자들 (IS)은 전형적인 남한의 멘셰비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강령적 문건 90년대 중반 남한에서 사회주의자들의 행동지침.을 통해 러시아의 멘셰비키가 그랬던 것처럼 ‘과정으로서의 조직(당 건설)’과 ‘과정으로서의 전술’ 이론을 체계화하고 최근에는 자본주의적 통일을 호소하면서 멘셰비키와 똑같은 기회주의적 실천으로 나아갔다”(≪노동해방의 불꽃≫ 창간호, 1995: 27).

 

“국제사회의자들(IS)은 자신들의 기관지 ≪노동자 연대≫와 ≪사회주의 평론≫에서 ≪노동해방의 불꽃≫을 발행하는 ‘당 창건을 위해 투쟁하는 국제사회주의자들’과 ‘노동자 계급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사회주의자들’(노해투사)을 ‘순수주의’, ‘초좌익주의’로 비난했다. 이유는 두 그룹이 민족통일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문제는 IS가 자신들의 추수주의적 전술관에 바탕을 둔 ‘전술변화’를 통해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를 저버리고 민족주의로 경도되어 노동계급의 이익을 저버리고 있다는 것이다”(≪노동해방의 불꽃≫ 창간호, 1995: 83).

 

“남한에서 사회주의자들이 건설할 당은 선전주의 ‘당’과는 다른 전투조직으로서, 공장세포를 통해 ‘노동자 대중의 일상적 요구 투쟁에서 선두에 섬으로써 대중을 노동자 권력을 위한 투쟁으로 안내하는’ 전략노선을 지향한다. …… 공장위원회, 직장위원회 같은 소비에트형 조직에 기반을 두어 대중의 부분적인 요구 투쟁을 주도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위한 투쟁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코민테른 초기의 전략노선은 남한 사회주의자들에 의해서도 마땅히 추구되어야 한다”(≪노동해방의 불꽃≫ 창간호, 1995: 73).

 

IS 내부 투쟁이 전술과 조직노선에 맞추어지면서 전개됐지만 핵심적 쟁점은 다시 스탈린주의에 대한 원천적 문제제기가 되어 코민테른 초기의 소비에트 전략노선에 입각한 코민테른 7차의 민중통일전선전략에 대한 비판으로 한 단계 상승했다는 점이다. 이는 결국 북한에 대한 태도와 연결되고 당 건설 투쟁의 현안으로 귀결된다. 위의 논쟁에서 어느 그룹이 마르크스주의의 원칙에 충실했는가를 평가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트로츠키주의가 지닌 문제, 보기를 들어 사민주의와 연대한 통일전선전략 그리고 반파시즘 전선, 사민당 내의 입당전술 등이 결국 핵심적 쟁점이 될 수밖에 없다. ‘불꽃’ 그룹이 IS와 분리한 원칙이 올바른 방향임에는 틀림없으나 국제 공산주의운동의 역사를 트로츠키주의로 협소화하고 그에 대한 원칙적인 비판적 평가로 나아가지 않았다는 점은 논쟁의 지점을 역시 일국적 관점으로 끌어내렸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이어서 논쟁은 조직노선으로 이어져 ‘신질서’ 그룹과 ‘불꽃’ 그룹 사이에, 그리고 ‘노동해방의 길’과 ‘선진노동자의 길’(‘노동해방의 불꽃’의 연속성) 사이에서 계속된다. ‘신질서’와의 논쟁은 전위당 노선과 평의회공산주의 노선 사이의 대립으로, ‘노동해방의 길’과의 논쟁은 소비에트 노선과 “집단적 지식인의 결합체로서의 사회주의 조직” 노선으로 대립한다.

 

‘신질서’는 전위당 노선을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과거 전위당 건투운동, 혹은 전위당 노선이 갖고 있는 오류는 분명하게 비판되어야 한다. 특히 물질성 이론에 기초한 ‘밖으로부터의 주입’ 사상은, 엘리트주의를 구조화시켰으며 계급대중과의 결합을 일방적인 관계로 협소화시켰고 정치선동을 정치폭로 정도로 격하시켰다. …… 우리는 과거의 전략노선을 국가주의적 관점에 입각한 단일 당봉기 전략, 그 구체태인 통일전선전략이라고 규정했으며(NDR, NLPDR, AMCPDR 등이 여기에 속한다) 대안으로 소비에트 이행전략을 주장한 바 있다. 소비에트 이행전략은 통일전선보다 계급조직인 공장 세포와 소비에트형 노동자 투쟁조직에 조직적 무게중심을 설정하고 전선운동은 이것을 지지, 엄호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토대로 해서만 존립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신질서≫ 2호, 1995: 161).

 

‘신질서’의 반당적 경향을 비판하는 ‘맥박’(노동해방의 불꽃)은 ‘신질서’의 “소비에트형 전략”을 혁명 전략이 아닌 무당파적 지식인들이 벌이는 변혁론 논쟁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응수하고 있다.

 

“‘신질서’는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의 구현체 그 자체인 레닌주의/볼셰비즘을 괴이하게도 그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와 대립시키고 있다. 그 때문에 ‘신질서’의 ‘소비에트 전략’은 레닌주의 당에 반대하는 절대 자유주의 종파들의 평의회공산주의 노선과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전위당 건설에 반대하여 일상적 상황에서 평의회를 건설하려는 평의회공산주의는 초좌익적 대리주의 실천을 조장해왔다. …… 실제로 ‘신질서’는 볼셰비즘을 ‘단일당 봉기전략, 단절적 이행전략’으로 오해함으로써 볼셰비즘에 대한 시민운동론자들의 상투적 왜곡에 가세하고 있다”(≪노동해방의 불꽃≫, 1996: 62-63).

 

그런데 ≪노동해방의 길≫은 원칙상의 초좌익과 실천상의 대중추수주의의 기묘한 결합이 트로츠키 진영의 기본특징이라고 비판하면서 ≪불꽃≫ 그룹을 평가하고 있다.

 

“≪불꽃≫ 그룹이 민주노조운동을 소비에트운동, 또는 소비에트의 맹아로 평가하자마자 그것의 필연적 귀결은 그들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 아마 로자 룩셈부르크의 ..대중파업론..일 것이다 ― 소비에트는 혁명적 시기에만 등장할 수 있다는 자명한 진리 때문에 남한의 현 시기를 혁명적 시기로 규정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노동해방의 길≫, 1996: 27).

 

“레닌의 볼셰비키의 유형의 정당의 진정한 위대함은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를 노동자 계급의 규율 잡힌 조직운동과 결합시킬 수 있었다는 데 있다. …… 로자 룩셈부르크, 트로츠키, 그람시 같은 혁명적 사회주의운동의 위대한 지도자들은 선진 노동자들과 결합된 규율 잡힌 조직운동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는 점에서 러시아의 레닌과 구별된다”(≪노동해방의 길≫, 1996: 153).

 

“현재 남한의 사회주의운동과 사회주의 조직은 인텔리겐치아 출신과 노동계급 출신의 사회주의자들의 단결된 노력과 상호침투 없이는 결코 발전할 수 없다. 남한 사회주의운동이 수백 명의 인텔리겐치아 출신의 집단적 지식인과 노동계급 출신의 집단적 지식인을 가지게 될 때 남한 사회주의자들은 이렇게 선언할 것이다. ‘이제 남한에서 사회주의 정당은 이미 형성되고 있다’”(≪노동해방의 길≫, 1996: 202).

 

이에 대해 ≪선진노동자의 길≫로 이름을 바꾼 ≪불꽃≫ 그룹은 IMF를 겪고 난 정세에서 계속해서 노동자평의회(소비에트) 노선을 주장한다. “그러나 어떻게 서로 다른 요구들과 서로 다른 형태의 투쟁들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민주노총 또는 산별노조를 통해? …… 전국연합 또는 IMF 범국민운동본부를 통해 …… 이 문제에 대해 역사는 대답을 내린 지 이미 오래다. 즉, 노동자평의회(소비에트)를 통해서 이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 노동자 계급의 모든 정치적 조류들이 가장 폭넓은 민주주의 기초 위에서 노동자평의 회의 지도력을 놓고 투쟁할 수 있다. 따라서 노동자평의회의 슬로건은 과도기 요구체계의 최정점을 이룬다”(≪선진노동자의 길≫, 1998: 38-39).

 

이들 사이의 논쟁은 마르크스주의 혁명 전략에 대한 핵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볼셰비키 대 멘셰비키, 혁명주의 대 기회주의의 대립구도를 넘어선다. 그것은 소비에트와 당의 관계이다. 혁명적 정세에 대한 인식 그리고 소비에트 혁명 전략을 ‘초좌익’으로 규정하는 것은 상대적 의미로 사용된다.

 

이 문제는 결론과 전망에서 다루어질 문제이지만 당을 부정하는 평의회노선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비판이 중요하다. 좌익공산주의와 평의회공산주의, 그리고 평의회주의 사이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고 모두 당을 부정한다고 보는 부정확한 규정이 이루어지면서 당과 평의회의 변증법적 통일을 향한 수준 높은 논쟁으로 진전시키지 못함을 볼 수 있다.

 

평의회주의는 평의회공산주의운동에서 1930년대 이론화되기 시작한 오류의 극한적 표현이며 퇴행이다. 평의회주의는 러시아 혁명, 프롤레타리아독재, 당, 집권화에 대해서 부르주아지가 수천 번 주장하고 무정부주의자가 반복해서 주장한 입장에 “마르크스주의적 형식”을 입히려는 공개적인 기회주의적 시도이다. 평의회주의의 본질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International Review, 2004: 19-24).

 

첫째, 평의회주의가 일국사회주의라는 스탈린주의적 입장에 반대 하지만 프롤레타리아트가 세계 혁명을 기다리지 않고 임노동과 상품을 폐절하기 시작했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무정부주의의 낡은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둘째, 국제주의에 반대하여 1926~1927년에 스탈린주의는 ‘일국사회주의’를 주장하는데 트로츠키와 좌익공산주의의 모든 경향은 이러한 입장을 반역으로 보았으며 이탈리아 좌파잡지 ≪빌란(Bilan)≫은 코민테른의 죽음으로 보았다. 이점에서 무정부주의의 논리는 스탈린주의와 기본적으로 같다. 반집권화가 ‘일국사회주의’의 정식화를 싫어하는 것 같지만 ‘자율’과 ‘자주관리’의 기반 위에 ‘한 마을’과 ‘한 공장’에서의 사회주의를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민주적’ 외양과 ‘대중 주도권의 존중’을 하는 것 같지만 자본주의적 착취와 부르주아국가의 방어라는 스탈린주의와 동일한 방향으로 이끈다.

 

셋째, 평의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추진은 공산주의적 경제조치의 채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21세기 초 세계시장을 완성했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기지의 권력 장악은 ‘해방구’를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은 자본주의의 가치법칙에 완전히 종속되어 나갈 것이기 때문에 여전히 적에게 속해 있다. 공산주의를 위한 투쟁의 목적은 새로운 착취의 형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착취를 폐절하는 것이다.

 

넷째, 평의회주의의 러시아 혁명에 대한 대차대조표(≪빌란≫)는 이렇다. 즉 정치의 물신화와 ‘머나먼 혁명’의 희망 대신에 공장에서 노동자통제의 즉각적 조치 그리고 임노동과 상품교환의 폐지를 채택하여 ‘관료주의’를 만들지 않고 혁명이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평의회공산주의를 유혹하고 주물화시킨 주장이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 전통으로부터 벗어나면서 무정부주의와 경제주의에 연결된다. 이러한 평의회주의의 정식화는 프루동에 이어 아나코생디칼리즘과 혁명적 생디칼리즘으로 이어졌으며 1917~1923년 오스트로-마르크 스주의로, 그람시의 공장평의회 이름으로, 그리고 오토 륄레와 AAUD(Allgemeine Arbeiter Union Deutschlands, 독일노동자총연맹)의 이론가로 이어졌다. 러시아의 콜론타이, 1936년 스페인에서의 무정부주의도 여기에 속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노동계급을 단순한 경제적 사회적 범주로 보고 역사적 계급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5. 혁명적 맑스주의자(사회주의자) 모임, 사노련, 사노위 

  

2005년 7월「혁명적 맑스주의자 (사회주의자)모임」을 제안하면서 모임의 목적과 사업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첫째, 이 모임은 세계코뮤니스트 운동의 국제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한국의 혁명적 맑스주의자(사회주의자)의 모임이며 혁명당 건설에 동의하는 활동가들의 모임이다.

 

둘째, 이 모임은 맑스주의 틀 안에서 토론과 논쟁을 위한 모임이며 혁명적 맑스주의(사회주의)이론을 계승 발전시키고 코뮤니즘의 사상, 역사, 전략, 전술을 연구하는 모임이다.

 

셋째, 이 모임은 다음 몇 가지 공동사업을 수행한다.

 

1) 국제 코뮤니스트 세력과의 국제연대 및 교류

2) 혁명적 맑스주의자(사회주의자) 대회 개최 (실천운동으로서)

3) 기관지 발행 (5년 장기 기획을 통한 토론회와 단행본 출간)

4) 월례토론회

 

이 모임의 성과를 바탕으로 사회주의 혁명당 건설을 위한 연합체 건설이 제안되었고 2008년 2월23일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이 결성되었다. 준비과정에서 미래의 혁명당 강령의 기초가 될 수 있는 「우리의 입장」이 작성되었고, 이행요구를 담아내는 「대중행동강령」이 제출되었다.「사회주의노동자연합(이사 사노련)」의 결성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몇 몇 혁명적 그룹들이 함께 하지 않았지만 30년 한국사회주의 운동의 역사에서 굳건하게 혁명적 맑스주의 원칙을 지키며 실천해온 서클들이 짧지 않은 토론과 준비를 거쳐 혁명당 건설을 위한 첫걸음 디뎠다는 점이다.

 

둘째,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자본과 국가의 탄압이 상존함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공개적이고 대중적인 사회주의 운동을 펼쳐나가는 실천을 함으로써 당 건설 운동이 혁명적 사회주의자들만의 과제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본연의 임무임을 인식시키게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창립한지 6개월 만에 공안기관의 전면적 탄압을 당하고 재판 투쟁을 하면서 더욱 사회주의 운동과 혁명당 건설의 의미가 공개적이며 대중적으로 선전, 선동된 것도 중요한 성과라고 볼 수 있다.

 

셋째,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의 창립 전에 네 개의 서클은 스스로 해소되었고, 단일 조직으로 구성된 것도 의미 있는 진전이었으며, 끊임없이 「사노련」에 참여하지 않은 혁명그룹에게 운동 강령 연구모임을 제안한 것도 실효를 거두지는 못하였으나, 「사노련」을 보통명사로서의 운동으로 펼쳐나가려고 하는 적극적 자세였다. 이른바「사노위」의 제안과 공동토론회의 개최는「사노련」의 결성의미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활동이었다.

 

2010년 5월9일 「사노위」의 결성이 지닌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사노련 결성이후 “사회주의노동자 당”이라는 용어가 일반화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동안 중도주의 세력으로 규정했던 「노동자의힘」과「해방연대」가 사회주의 노동자당 건설을 위한 독자적인 행보를 시작한 것은 그 그룹의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노련은 <사회주의노동자 당>이라는 공통의 당명을 배제할 수 없었고, 최소한도의 정치적 원칙으로라도 혁명당 건설을 위한 공동의 실천을 대중적으로 검증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또한 사노련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기도 했다. 따라서 대중적 제안을 통한 「사노위」 건설은 원래 <사노련>의 단독 제안에 대한 대중적인 책임인 동시에 혁명당 건설을 한걸음 내딛는 필연적이고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둘째, 이 과정에서 이른바 사노련의 다수파는 <현장분회>를 둘러싼 논쟁을 조직 사상으로 확대하면서 「사노위」로의  참여를 「사노련」이라는 형식을 고수하게 되고 「사노위」 건설에 참여한 세력은 이들을 「사노위 이탈파」로 규정하였다. 「사노련」 고수파는 「노건투」로 전환되고, 2011년 2월 「사노련」 1심 재판이후 「사노련」은 해산한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별도의 평가가 필요하지만 결국 「사노련」 고수파는 사노련 이전의 서클주의로 되돌아가는 경로를 택함으로써 혁명당 건설 경로에 대한 현장주의적 대기주의 관점을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셋째, 강령, 조직, 전술의 통일을 목표로 한 1년 공동실천의 한시적 조직인 사노위는 혁명당 건설을 위해 거쳐야 할 필연적 과정이었고, 그 공동실천에 대한 대중적, 공개적 평가는 사노위 성원들 모두 책임이었다. 사노위 1년 평가에 대해서는 이미 제출된 평가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다만 앞으로의 당 건설 경로와 관련하여 강령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의 문제라는 논리는 언제나 조직 분리의 함정을 안고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6. 마무리하며

 

 

세계자본주의 체제와 계급투쟁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총체적 위기가 쇠퇴기의 마지막 단계인 해체단계에 들어섰음은 인류의 파멸이라는 보다 넓은 관점에서 확인될 수 있다. 잉여가치의 생산과 실현에서 이윤율 하락과 시장포화로 임계점에 다다랐음은 이미 자본주의에 대한 맑스주의 분석으로 확인된 것이지만 지금은 야만으로서의 자본주의와 문명으로서의 사회주의(공산주의)의 선택에 기로에 서 있음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첫째, 자본주의 체제는 임금노예도 먹여 살릴 수 없는 체제로 나아가고 있다. 세계에서 매일 굶주림으로 10만 명이 죽어가고 있고 10세 미만 어린이는 매 5초마다 죽는다. 8억 4천 2백만 명이 만성적인 영양실조로 고통 받고 있으며 60억 인구 중 20억이 식품비 인상으로 매일매일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하고 있다.

 

둘째,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는 경제번영의 환상을 유지할 수 없는 체제이다. 인도와 중국의 경제기적은 환상임이 드러났으며 중국에서는 2008년 상반기에 2천만 명이 해고되었고 6만 7천개의 회사가 파산했다.

 

셋째, 생태적 재앙이 예상되고 있다. 지구의 온난화를 보면 지구의 평균온도는 1896년 이래 0.6% 증가했고, 20세기는 북반구에서 지난 천년동안 그 이전보다 가장 심각한 온난화를 보이고 있다. 눈 덮인 지역도 1960년 말 이래 10% 감소했으며, 북극빙하의 두께는 40% 감소했다. 평균해수면은 20세기 동안 10~20% 상승했는데 이러한 해수면 상승은 지난 3천년보다 10배 증가한 것이다. 또한 90년 동안 지구에 대한 약탈은 남벌, 토양침식, 오염(공기, 수질), 화학방사물질의 살포, 동식물의 파괴, 전염병의 폭발 등으로 나타나 생태적 재앙은 종합적이고 지구적 형태로 구성되어 예측할 수 없다.

 

이는 사회주의(공산주의)의 물질적 기초마저도 파괴하고 있는 것이어서 지구와 인간을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한다는 근본적 한계를 안고 있다. 여기에 자본주의적 인간형의 재생산은 사회주의적 인간을 형성시키는데 지속적 장애물로 남아 있어서 객체와 주체를 모두 파괴당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억압과 착취에 맞선 계급투쟁의 역사는 항상적이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제1인터내셔널은 상승기 자본주의의 능력 때문에, 제2인터내셔널은 혁명주의의 포기와 민족주의 때문에 그리고 코민테른은 사회주의 혁명을 포기한 스탈린주의의 반혁명 때문에 실패했다. 특히 1930년대 이후의 반혁명세력은 (국가)자본주의의 본질을 호도하면서 ‘사회주의’를 참칭하였고 결국 세계자본주의체제를 유지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양 진영의 대립을 위장하면서 세계의 노동자계급을 억압, 착취해왔다.

 

더구나 1989년 동쪽 블록과 스탈린 체제의 몰락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명백한 승리”, “계급투쟁의 종말” 그리고 심지어 노동계급 자체의 종말이라고 떠드는 부르주아지의 캠페인은 프롤레타리아트를 그 의식과 전투성 수준에서 심각하게 후퇴하도록 만들었다.

 

 1990년대 동안 노동계급은 투쟁을 전적으로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시기의 투쟁의 기관이었던 노동조합에 대적할 폭이나 의식 그리고 능력을 지니지 못했다. 2003년까지는 그렇지 못했지만 1989년 이래 프롤레타리아트가 다시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에서의 연금에 대한 공격에 대한 반대투쟁이 전기가 되었다. 노동자의 투쟁은 대부분 중심국가에 영향을 주었는데 미국(2005년 보잉과 뉴욕교통), 독일(2004년 다임러와 오펠, 2006년 봄 의사, 2007년 봄 독일 텔레콤), 영국(2005년 8월 런던공항), 프랑스(2006년 CPE 반대투쟁)가 있고 주변부 국가들로는 두바이(2006년 봄 건설노동자), 방글라데시 (2006년 봄 방식노동자), 이집트(2007년 봄, 방직노동자), 이집트(2007년 봄, 방직운수 및 기타 노동자)의 투쟁이 있다.

 

 2006년 이후 2008년까지 벌어진 세계의 계급투쟁은 이집트, 두바이, 알제리아, 베네주엘라, 페루, 터키, 그리스, 핀랜드, 불가리아, 헝가리, 러시아, 이태리,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 등 전 세계로 확대되고 있으며 2009년부터 심화되는 대공황과 자본주의의 위기에 맞선 노동계급의 투쟁은 수세적으로 시작되지만 처절한 공세로 전환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계급투쟁의 새로운 조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 40년의 위기와 노동계급의 생활조건에 대한 공격, 특히 실업과 불안정 노동의 증가는 미래가 좋아질 것이라는 환상을 날려버렸다.

 

둘째, 점점 야만의 형식을 취하는 군사갈등의 영구화뿐만 아니라 환경파괴에 대한 가시적 위협은 사회적 근본변혁의 필요성을 불러일으킨다. ‘반자본 운동’과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슬로건은 근본변혁을 빗나가게 하려는 부르주아지가 숨긴 항체다.

 

셋째, 스탈린주의와 20년 전 그 몰락이후의 캠페인이 만든 외상은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지고 있다. 지금 노동의 삶을 시작하는 새로운 세대는 “공산주의의 죽음”에 대한 거대한 캠페인이 벌어졌을 때 어린이였다.

그런데 40년 동안 세계자본주의는 엄청난 부채를 짊어짐으로써 재앙을 피해왔다. 자본주의에서 부채는 마약중독자에게 마약이나 다름없다. 그 마약을 소련 같은 (국가)자본주의가 사용했건 미국 같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사용했건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 부채의 결과는 지불 가능한 시장을 찾지 못하고 결국 전 세계 노동자의 피와 땀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것은 또한 전 세계 노동자의 가난, 제국주의 전쟁 그리고 생태적 재앙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자본주의는 끝나가고 있는가? 그렇다. 그것은 갑작스런 파멸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서서히 끝나는 마지막 단계, 체계적 몰락의 단계이다. 우리는 150년 전의 ‘전쟁인가 혁명인가’의 화두를 진지하게 꺼내들고 다시 한 번 ‘야만인가 사회주의인가’를 말하는 역사적, 문명적 인식과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과 혁명적 실천을 준비해야 한다. 이는 혁명적 맑스주의 원칙에 올바르게 전 사회주의자들의 통일과 단결을 의미한다. 화폐, 상품, 시장, 임노동, 교환가치를 기반으로 하는 자본주의를 넘어서서 자유로운 개인의 연합이 살아 숨 쉬는 노동해방 사회건설을!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세계적 차원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은 광범위하게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을 넘어서서 자본주의 철폐와 사회주의 혁명 그리고 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물질적 필요성으로 요구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구체적 특수성을 인정하더라도 세계자본주의의 총체적 위기와 노동계급의 필연적 투쟁은 불가피하다. 투쟁의 지연은 폭발 잠재력의 임계점 차이일 뿐이다. 경쟁과 효율성이라는 가치에 법칙에 예속되어 파편화되었던 예비 노동자 대학생들의 등록금 인하 투쟁은 바로 그 실현이 자본주의 모순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묻고 체제를 송두리째 엎지 않으면 해결될 수 없음을 깨닫게 한다.

 

1, 2년 사이 선거주의, 의회주의, 개량주의가 혁명적 투쟁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작동하겠지만 혁명세력은 더더욱 스스로를 무장하여 준비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그것을 위한 공산주의자의 유일한 길은 공산주의자 조직인 혁명당을 건설하는 것이다.

 

2005년 이후 혁명당 건설을 위한 과정은 바로 그 과정의 일부이다. 혁명적 맑스주의자 모임, 사노련, 사노위, 그리고 혁명당 추진모임은 이를 위한 구체적 발현태이다.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객관적 정세가 혁명당 건설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세계 맑스주의(공산주의)운동의 역사, 계급투쟁의 역사, 자본주의에 대한 과학적 분석 그리고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어제와 오늘에 기반하여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하나, 사노위 해산선언-동의자모임을 중심으로 <공산주의노동자당>건설 추진을 위한 준비모임을 결성한다. 이 모임 밖의 공산주의자들과 소통 망을 구성하기 위한 기획과 공동사업을 제안한다.

 

  둘, 강령은 중요한 무기이다. 가장 근본적인 맑스주의 원칙인 역사유물론에 입각한 현대 자본주의 분석, 러시아 혁명 이후 존재했던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들”에 대한 과학적 분석과 평가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이해, 전 세계 계급투쟁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분석과 이해는 혁명당을 만들어 갈 공산주의자들의 필수적인 조건이다. 이를 위한 연구, 토론, 매체, 교육에 대한 종합적 기획사업이 요구된다.

 

  셋, 노동자평의회로 나아가는 프롤레타리아의 조직화 양식에 대한 구체적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정규직뿐만 아니라 비정규직 형태로 존재하는 노동자 집단에 평의회적 조직 형식의 구축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사회주의자 연대조직 건설 등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넷,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건설하려는 공동의 노력은 세계 혁명주의 그룹과의 소통, 공동대회, 공동실천을 통해 모색하는 <국제연대위원회>를 특화시킨다.

 

다섯, 미래의 공산주의자를 양성할 목적으로 하는 정치학교 개설을 포함한 사업을 담당할 <청소년 위원회>를 특화시킨다.

 

주)

1)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에 대한 객관적 평가는 보다 체계적인 연구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고 여전히 글 쓴 사람의 입장이 전제된 주관적 평가나 단상이 오히려 토론을 위한 자료가 될 수 있다. 나는 몇 년 전 이런 글을 써서 『다시, 혁명을 말한다』 (빛나는 전망,2009)에 “마르크스주의와 한국 사회주의(정치)운동에 대한 회고”로 실은 바 있다.  이 글 이상의 글을 짧은 시간에 준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기서는 2005년 이후 「혁명적 맑스주의자 모임」이후 현재까지에 대한 평가를 정리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정도로 보완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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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노동자≫, 12호. 1990년 12월. 민중당 노동자위원회

≪현실과 과학≫, 3호(1989. 4), 4호(1989. 9), 6호(1990. 7), 9호(1991. 3).

≪우리사상≫, 창간호(1991. 5).

≪사회주의 노동자≫, 2호(1992. 9).

≪노동해방의 불꽃≫, 창간호(1995).

≪신질서≫, 2(1995. 11).

≪맥박≫, (1996).

≪노동해방의 길≫, (1996. 5).

≪선진노동자의 길≫, (1998. 8).

International Review 1st Quarter 2004, 1st Quarter 2006, ICC

국제대회준비위원회 2006.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 국제대회 자료집』, (2006. 10).

사회주의정치연합. 2006.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 국제대회를 열며』

오세철. 1990.『개혁사회주의에 대한 환상과 회의와 좌절을 넘어서』≪노동자≫, 12호.

민중당 노동자위원회.

오세철. 2004.『사회주의와 노동자 정치』, 박종철 출판사.

윤소영. 1999.『한국 사회성격논쟁에서도 ‘페레스토로이카’가 임박 했는가?』≪현실과

과학≫, 제3호. 1999. 4.

이창휘. 1989. 『PDR론의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 ≪현실과 과학≫ 4호. 1989. 9.

 

* 각주

 

1) “공산주의는 근사한 사상이 아니라 물질적 필요성이다”(International Review, 2006:

10-19).

2) 여기서는 좌익공산주의 그룹의 국가자본주의론을 소개한다. “국가자본주의로의 경향은 전 세계의 모든 곳에서 나타나고 쇠퇴[자본주의]의 제반작용들이 가장 폭력적으로 나타나는 그러한 곳에서 가속되거나 가장 격렬하게 분출된다. …… 정치적 및 사회적 영역에 있어서 국가자본주의로의 경향은 파시즘이나 스탈린주의 같은 극도의 전체주의적 형식들 속에서이든 또는 민주주의 가면 아래 은폐된 형식들 속에서이든, 국가기구와 특히 그 집행력이 사회 생활의 모든 영역들에 현재하며 체계적이고 점점 더 막강해지는 통제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을 통해 표현된다”(ICC 강령,1976)

3) 그람시도 각국의 공산당들의 볼셰비즘화를 주창한 스탈린주의적 중도주의에 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4) 여기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 모임’을 제안하는데 ‘다함께’를 제외한 것은 입당전술에 대한 비판적 입장 때문이었고 ‘노동자의 힘’은 활동가 조직론에 머무르고 중도주의적 입장으로 보았기 때문이며, 혁명당 전략을 배제하는 다른 그룹들에게도 제안하지 않았다.

5) 여기서 편의상 A B C 그룹으로 표현되는 그룹은 당건투, 노동해방연대, 울산노동자배움터를 의미하지만 조직연대 모임이 아닌 개인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조직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

6)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 국제대회 자료집. http://spri.jinbo.net 공개자료실 8번.

7)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 국제대회 자료집. “혁명 전략 : 혁명역량의 국제적인 재편이 프롤레타리아 혁명 승리의 전제조건이다.”

8)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 국제대회에 대한 사회주의정치연합의 토론 결과 요약

사회주의정치연합(이하 SPA)은 국제대회가 끝난 후 ICC의 대표단과 IP 대표단과의 토론을 통해 국제대회의 대차대조표를 제시하면서 극동에서 처음 열린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특히 좌익공산주의자들)의 만남과 소통 그리고 주요 원칙과 쟁점들에 대한 토론과 공감대 형성을 높이 평가하고 이러한 노력이 계속 이어지기를 희망했다.

자본주의 데카당스에 대하여

1. 우리는 공산주의 좌파 내부에서의 자본주의 데카당스에 관한 논쟁을 자세히 검토했다. 그 구체적 비교분석은 SPA가 발표한 텍스트 『자본주의 데카당스에 관한 논쟁에 대하여』에 잘 나타나 있다.

데카당스 자본주의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투쟁 

1. ICC가 1980년에 쓴 텍스트에 대해 우리는 원칙적으로 동의한다. 특히 이 글은 상승기 자본주의와 데카당스 자본주의를 구분하고 민족국가, 자본주의의 새로운 편제 단위들의 발달, 전쟁, 위기, 계급투쟁, 혁명조직의 역할의 기본 특성을 비교하고 있는데 지나치게 도식화하는 시도 같지만 자본주의 보편의 특성을 상승기와 데카당스로 구분하여 근본 변화를 살피는 거시적 틀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지침이 될 수 있다.

세계혁명당 건설에 대하여

1. 미래의 혁명당 본질에 대해 ICC가 서울 ‘국제대회’에서 발표한 텍스트 “혁명 전략-혁명역량의 국제적인 재편이 프롤레타리아 혁명 승리의 전제조건이다”에서 밝힌 원칙에 우리는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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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노위 실패와 무기로서의 강령

  • 분류
    잡기장
  • 등록일
    2011/09/12 15:02
  • 수정일
    2011/09/12 15:02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 응답 RSS

사노위 실패와 무기로서의 강령

- 이형로

 

 

 

 

사노위는 사회주의노동자당 건설이라는 시대적, 정세적 과제를 부여안고, 당 건설의 첫 단계라 할 수 있는 사회주의노동자당 건설 추진위를 목표로, 1년간의 공동정치활동을 통해 ‘강령상의 통일’을 이룰 것을 목표로 하여 공동실천위원회라는 형식을 갖고 출발하였다.

 

이렇게 출발한 사노위는 “공공연한 사회주의 정치운동과 당 건설운동의 전면화”를 출범정신으로 하여, 당 건설 추진위로의 전환조건으로 1)강령, 전술, 조직의 통일과 2)선진노동자에 대한 실천적 권위확보를 내세운다. 그러나 “선진 노동자에 대한 실천적 권위확보” 문제는 객관적인 근거와 기준을 정하기가 어렵고, 계급의식이 아직 낮은 문제 등이 있어 실질적으로 추진위 전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현실적으로 사노위 안에서 중요한 과제는 강령통일과 조직 활동 문제였다.

 

그 동안 각자의 써클과 활동 공간(사노준, 사노련, 노투련과 개별 활동가)에서 서로 다른 운동 노선과 문화를 기반으로 활동했던 사회주의 활동가들이, 1년이라는 특별하고 한시적인 기간을 정해두고 이론과 실천, 운동과 투쟁의 경험 등 모든 면을 사노위라는 그릇에 녹여내면서, 가장 혁명적인 원칙과 실천의 무기를 창출해내기 위해 사노위 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이러한 시도는 여전히 의미 있는 일이었고, 혁명당 건설 운동의 흐름에서 주체역량의 상황과 객관적 정세를 고려했을 때 적절한 운동노선이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노위는 가장 혁명적인 원칙을 가진 강령으로의 통일도, 자본가 권력에 실질적인 위협이 될 만한 강력한 실천력을 가진 당 조직도 창출을 못한 채, 공동실천 자체의 한계로 인해 당 추진위 단계로 상승하지 못하고 해산을 맞게 된다.

 

그렇다면 왜 사노위는 강령통일에 실패했고, 당 조직구조를 창출하지 못했는가? 공동실천 자체의 한계는 무엇이었나? 

 

이 글은 강령과 조직은 하나의 유기체라는 입장을 분명히 하며, 강령통일 이전에 조직문제로 파열구가 나기 시작한 공동실천 활동이 왜 강령투쟁 과정에서 더 악화되어 결국 해산에 이르렀나를 살펴보고, 무기로서의 강령은 곧 실천의 지침이라는 교훈을 다시 한 번 환기시키고자 한다.

 

 

 

1. 강령 건설의 원칙과 혁명당 건설

 

사노위에서 건설하려는 당과 강령은 어떤 것이었나? 

 

노동자계급의 당이라면 기본적으로 다수의 노동자를 기반으로 하는 당이어야 한다. 하지만 당의 정치적 성격은 당이 어느 계급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당이 채택하고 있는 강령으로 판단해야 한다. 즉, 당의 성격은 당의 이름이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당에서 내건 강령과 실천의 내용이 규정해 준다. 민주노동당이 노동자당을 이름으로 내걸지만 온전한 노동자계급의 정당이 아니듯이,1) 사회당이 사회주의자 당을 내걸지만 전형적인 사민주의 정당이듯이, 사노위에서 건설할 당은 이름만 사회주의노동자당이 아니라 강령과 조직 모두에서 실제 사회주의 혁명정당, 노동자계급 혁명정당이었다.

 

사노위가 혁명정당을 건설하려 한다면 사노위가 만들려는 강령은 당연히 사회주의 혁명 강령이다. 사회주의 혁명 강령은 역사와 생산과 권력의 주체인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위해 자본주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철폐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실현시키려는 강령이다. 프롤레타리아계급에 대한 착취체제인 자본주의체제의 본질과 현 쇠퇴기의 본질을 밝혀내고, 사회주의 혁명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도출해내고, 프롤레타리아 독재-공산주의 사회로의 이행 등 혁명의 전 과정에 대한 혁명적 원칙을 정립하는 강령이다. 그리하여 혁명의 주체인 노동자계급에게 사회주의 혁명, 세계혁명의 전망을 제시하여 현실의 계급투쟁에서 자본가계급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무기로서의 역할을 하는 강령이다.

 

하지만 사노위 1년의 공동실천 과정에서 구성원의 다수는 사회주의 혁명정당이 아닌 이름 그대로 사회주의노동자 정당이라는 사회주의 좌파당 정도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 점은 3인안 강령에 대부분 반영되었는데, 평화적 이행까지 포함한 수권전략(혁명의 주체인 노동자계급의 물리력을 바탕으로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노동자계급의 독재를 수립하는 전략이 아닌)과 자본주의 쇠퇴 불인정, 가짜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불분명한 입장, 부문운동의 병렬적 조합으로서 주체형성 전략 등을 내세움으로써 계급투쟁에서의 전략 부재를 드러냈다.

 

3인안은 결과적으로 강령이 사회주의 혁명에 있어 필수적인 무기가 되고, 직접적인 사회주의 정치활동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 현실에서는 반자본주의 운동, 반신자유주의 투쟁 정도로 후퇴하고, 조합주의 또는 전투적 조합주의에 안주한 가운데 공허하게 사회주의와 사회주의 현장 활동만을 외치는 것 이상이 아닌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것은 결국 사노위의 성원들이 강령을 실천의 지침으로 생각하지 않고 정치적으로 동의만하면 되는 것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사노위의 강령은 누구를 향한 강령이어야 했고, 3인안 강령은 누구를 향했기에 실천의 무기가 되지 못했나?

 

누구를 향한 강령이었나?

 

사노위의 강령은 사회주의 혁명당의 강령이기에, 혁명의 주체인 노동자계급을 위한 강령이어야 하며, 노동자계급에게 공개적으로 제출해야 하는 강령이다. 혁명 강령은 노동자계급의 혁명적인 부위인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건설될 강령이다. 또한 계급투쟁의 역사와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성과를 온전히 계승하고, 현실의 계급투쟁과 혁명적 실천을 통해 끊임없이 발전하면서 건설되어야 할 강령이다.

 

그런데, 사노위는 강령토론의 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을 향한 공개적이고 외향적인 토론 보다는 내부토론과 내부통일에 우선을 두었기 때문에, 노동자계급과의 상호작용과 검증과정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강령토론 과정에서 나타난 강령적 차이와 쟁점에 대한 첨예한 대립들은 찻잔속의 태풍에 그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조직 활동과 당 건설 경로에서 강령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조건들에 강령이 이용당하는 참담한 결과마저 초래했다. 1년간의 공동실천 과정에서 강령통일을 못 이루어 당연하게 조직을 해산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조직봉합과 조직보존 논리가 다수를 점해 사노위를 계속 유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사태는 애초에 강령을 만들 때 노동자계급에게 제출하는 강령을 만든 것이 아니라, 당 건설의 초기 주체들인 사노위 성원들만을 염두 해 둔 것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것은 현실로 나타났고, 사노위 강령토론의 목적은 노동자계급이 아닌 사노위안에서 다수의 지지를 얻는 것으로 전락하였다.

 

그렇다면 과연 사노위의 다수는 노동자계급의 어느 부위를 표현해주고 대표하고 있었을까? 사회주의 전통의 어느 지점을 계승하고 있었을까?

 

결과적인 이야기이지만, 사노위의 다수는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부위를 표현해 주는 것이 아니라 조합주의와 전투적 조합주의를 대표하고 있었다. 그것은 현실운동의 직접적 반영이었다. 또한 정치사상적으로는 자본주의와 적대하는 사회주의 혁명전통을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사민주의 정도와 대당 하는 좌파 급진주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래서 이것이 예상되었다면 사노위는 강령 조직의 통일2)을 통한 당 추진위 건설이 아니라 처음부터 강령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혁명당 노선과 사회주의 좌파당 노선으로 분화될 것을 상정하고, 내부의 통일이 아닌 노동자계급 지향적이고 외향적인 강령투쟁을 통해 두 개의 당, 또는 강령투쟁에 승리한 세력만이 당 건설을 추진하는 경로를 채택했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노위 과정 자체는 객관적 정세와 주체들의 상황을 반영하여 선택한 역사적 산물이었다. 따라서 주체의 상태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바로 그 주체의 상태를 진전시켜낼 수 있는 역동적 과정을 창출해 내고자 했던 것이다. 최소한 그럴 수 있는 조건은 존재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작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시작에서부터 제대로 했는가 하는 것이다.

 

먼저 처음부터 강령통일이라는 조건을 내걸 때, 단순히 사노위 성원 다수가 선호하는 강령을 채택하는 것이 아니라, 강령토론과 공동실천을 통해 혁명적 실천을 담보하는 강령만이 당 추진위의 강령이 될 수 있다는 원칙을 세웠어야 했다. 그랬다면 강령과 조직노선이 분리되지 않고 한 가지로 인식되어 강령투쟁과 함께 실천력을 높이려는 노력들이 동시에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

 

혁명당과 혁명 강령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계급 스스로의 일이고, 자신들의 연대와 자신들의 의식으로서만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려는 생각은 노동자계급의 의식 중 혁명적 계급의식이다. 혁명적 계급의식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라는 과거의 낡은 사상과 현실의 지배적인 관념들을 극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낡은 사상들을 실질적으로 극복한다는 것은 의식개조나 정신적 깨달음이 아니라 낡은 경제적 모순들을 물질적으로 극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곧 자본주의 모순을 물질적으로 극복하는 일이며, 노동자계급의 혁명을 통해서만 극복이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혁명적 계급의식은 자본주의를 물질적으로 극복하려는 의식이며, 혁명을 가능케 하는 계급의식이다.

 

그런데 이러한 계급의식은 혁명시기가 아닌 일상시기에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지배로 인해 쉽게 깨질 수 있고 일시적이며 결국 소멸해버리기 때문에, 혁명적 계급의식은 노동자계급의 모든 역사적·이론적인 성과들을 온전히 담아내는 강령을 가진 조직인 혁명 정당과 같은 물질적 토대를 갖춰야 한다. 노동자계급의 혁명당은 계급의식의 정치적 표현이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노동자계급의 혁명투쟁에 필수불가결하다. 혁명당은 전체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이라는 강령을 방어하면서 조직된, 노동자계급 가운데 정치적으로 가장 앞선 부분을 포함한다. 그래서 혁명당은 늘 프롤레타리아의 소수일 것이지만, 혁명당이 방어하는 공산주의 강령은 전체 노동자계급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다.

 

따라서 강령은 당을 구성하는 소수의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 전체에게 제출되어야 한다. 이 원칙을 지키지 않는 강령은 결국 노동자계급 스스로의 힘으로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무기로서의 강령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을 수동화 시키고, 노동자계급에게 명령하고, 노동자계급을 지배하는 강령일 수밖에 없다. 앞서 말했듯이 사노위의 일부 강령은 일차적으로는 사노위 성원들을 위한 강령이었다. 그래서 노동자계급에 의한 검증, 승인과는 무관하게 자신들의 조직통일을 위해 인위적으로 강령통일을 시도하는 지경에 이르고야 말았다. 이러한 강령이 노동자계급을 수동화 시킬 가능성은 불을 보듯 뻔하다.

 

강령이 전체 노동자계급에 의해서 수행되는 강령이 되고, 자본주의를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무기가 되려면 어떤 강령이어야 하는가?

 

혁명 강령은 사회와 노동자계급 투쟁의 궁극적 목적을 이론적으로 진술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들에 선행하여 실제 발생한 것에 대한 세세하고 구체적인 분석이아. 그리고 그 분석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상황을 낳게 한 그 당시의 물질적인 특성들과 반드시 결부시켜 해명되어야 한다. 그래서 혁명 강령에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해방이라는 목적과 사회주의 혁명의 이론을 반드시 담아내야 한다. 또한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과 노동자계급의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을 그 물질적 토대로부터 분석하여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전망과 투쟁의 무기들을 제시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해방은 궁극적으로는 공산주의 사회의 실현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그 과정에는 반드시 이행기가 필요하다. 이행기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표현된다. 사회주의 혁명이론은 바로 이행기 사회인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창출하기 위한 혁명이론이다. 혁명이론은 자본주의의 타도와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으로부터 시작하여, 노동자계급의 직접권력인 노동자평의회가 전 사회를 지배하면서 자본주의 잔재를 일소하고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하기까지 견지해야 할 원칙과 과정에 대해 수미일관하게 밝힐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일관된 강령의 목적과 이론이 없이 여러 이론들의 조합을 통해 자신들만의 특별한 혁명이론을 만들려는 시도는 결국 강령을 전체 노동자계급의 것이 아닌 소수 정치세력의 전유물로 만든다. 특히 한국과 같이 혁명운동의 단절과 정치사상적 토대가 빈약한 지역에서 건설 할 혁명이론과 강령은 더더욱 혁명운동의 세계적 흐름 속에서의 보편성과 일반성을 가져야만 한다.

 

그런데 3인안은 한국사회의 특수성에 대부분 기반을 두고 있다. 3인안은 강령건설의 원칙과 자신들이 계승하고 있는 혁명적 전통을 밝히지 않음으로 인해, 현재 세계 사회주의 혁명운동진영에서의 위치와, 자신들의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적 위치를 알 수 없게 하였다. 이것은 그들의 정치사상이 여러 이론들을 인위적으로 조합하여 그들만의 검증되지 않은 독자적 혁명이론을 만들어냈다는 근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혁명이론은 전 세계 노동자계급에게 보편적이어야 하고 국제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국제적 흐름에 조응해야 한다.

 

결국 이런 문제점들이 3인안의 강령 내용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명시’를 생략3)하고, ‘소련의 사회성격 규정을 유보’하고, 노동자평의회 권력이라는 계급투쟁의 위대한 성과물과 구체적 실체를 ‘대체권력이라는 추상으로 후퇴’시키고, 노동자계급의 국가권력 장악을 위한 집단적 계급행동 동력과 무장력 획득이라는 좀 과격하고 불편하지만 필수적인 강령적 요소를 ‘계급의 주체형성’, ‘경제-정치-사회-일상 삶의 전 영역에서 대체권력을 형성하기 위한 투쟁과 도전’이라는 듣기 좋은 공문구로 바꾸어 놓는 결과를 만들었다.

 

혁명가 조직과 사노위

 

혁명가들의 조직인 혁명당은 처음에는 노동자계급 안의 혁명적인 인자들만을 포함시키는데, 계급투쟁이 전면화 되고 계급의식이 혁명 강령에 가까워질수록 당은 소수의 혁명당이 아닌 프롤레타리아 혁명당으로 확장된다. 그런데 혁명적인 인자들의 소속척도는 사회학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라서, 당의 강령에 동의하고 그것을 옹호하고 실천할 태세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혁명당에는 사회학적으로 노동자계급에 속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출신계급과의 단절을 통해서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이해관계와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지식인 등의 개인들도 속할 수 있는 것이다.

 

불행히도 사노위에서는 1년이라는 공동실천 기간 동안 강령통일을 이루어내지 못해 강령을 채택할 수 없었고, 그 때문에 회원들이 강령을 옹호하고 실천할 태세를 갖추었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런데 강령 초초안 제출이전에 이미 강령보다 낮은 단계인, 조직의 결정사항과 정치방침 조차도 실천하지 않거나 거부하는 회원들과 운동의 흐름들이 나타났다. 조직문제는 강령이전에 사회주의자로서의 태세 문제를 확인해 주었다. 그래서 이후의 강령토론과 강령투쟁은 조직노선 투쟁의 기반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직노선 투쟁은 길었으나 강령투쟁은 짧았다. 강령과 실천은 분리되었고, 조직문제는 과잉되어 강령을 뒤로 물러서게 했다. 결국 1년이라는 시한의 문제로 강령은 조직분리의 결정적 근거가 되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남은 세력들은 서로 이질적인 강령을 통합하여 조직문제를 덮어버리고 공생의 길을 가고 있다.  

 

위와 같이 사노위의 조직노선 투쟁의 본질은 가입원서 정도의 멤버쉽 확인 문제가 아니라, 혁명당 구성원으로서의 자격 즉, 강령에 동의하는 사회주의자인지 아닌지, 강령을 옹호하고 실천할 태세를 갖춘 사회주의 활동가(혁명가)인지 아닌지를 명확히 하는 투쟁이었다. 이것은 정치적으로는 사노위를 혁명가조직과 당적 조직으로 만들고자 했던 혁명당 건설노선과, 사노위에만 한정된 공동실천을 통해 정치조직 간의 형식적 통합과 낮은 단계의 강령통일로 단일조직 건설을 목표로 했던 노선과의 피할 수 없는 충돌이었다.

 

 

2. 5인안 강령의 탄생과 쟁점

 

정치노선으로 구성된 강령기초위원회

 

사노위는 계급투쟁과 사회주의 운동의 한국적 상황과 사노위 구성원들의 객관적 조건들에 근거하여 공동실천단계-당 추진위 -당 건설이라는 경로를 상정했다. 그리고 사노위안에는 사회주의 혁명당과 거리가 먼, 사민주의, 스탈린주의, 민족주의자들은 배제한 상태에서, 한국 사회주의 운동내의 대부분 경향들이 다양한 정치노선과 써클 구도 속(일부 써클 불 참여)에서 함께 하였다. 즉, 사노위가 써클 구도에서는 다수를 포함하지 못했지만, 정치경향 속에서는 가장 풍부한 다수의 경향을 참여시키며, 당 건설 운동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그래서 강령기초위원회를 처음 구성할 때는 사노위내 양대 정파였던 사노준과 사노련의 정치적 안배가 작용했으나, 강령실무위원까지 포함하는 강령기초위원회 구성을 마무리한 단계에서는 더 이상 사노준 대 사노련의 써클 구도가 아니라, 적어도 4개 이상의 정치적 입장을 명확히 갖고 있는 정치 사상적 결집체4)의 내용과 형식을 갖게 된다.

 

강령기초위원회 초기과정에서 강령 초초안 마련을 위해 강령의 체계와 구성, 작성방법 등을 결정했던 당시에는 독자적인 강령제출이 가능한 정치노선이라면 어느 입장이라도 각자의 강령 초초안을 제출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사노위가 더 이상 써클 간의 연합이거나 정치적 노선이 없이 공동실천만을 하는 조직이 아니라, 명확한 정치적 입장을 갖는 조직을 추구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강령 건설 또한 정치사상적 노선을 중심으로 내, 외부 토론과 대중적 검증과정을 거쳐 공개적이고 공식적으로 건설되어야 한다는 것을 공유했다.

 

당시의 이런 상황을 감안할 때 강령 초초안이 적어도 4개 이상으로 제출될 것이 예상되었다. 그리고 여러 개의 초초안이 제출되더라도 토론과정에서 각각의 초초안 내용을 기초로 하여 공통의 지반과 차이점을 확인하고, 쟁점사항은 토론을 심화시켜 공개적인 검증과정을 통한다면 강령통일을 이룰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공통의 지반과 차이점이 명확해질수록 강령통일은 사노위 구성원 전체의 일이 되고, 실천적 검증의 몫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건설할 강령은 조직원 숫자의 다수의 경향이 아닌, 정치 사상적 원칙의 명료함과 실천에서의 무기가 되는 강령만이 당 추진위의 강령으로 채택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직문제로 탄생한 5인안 강령

 

하지만 강령 초초안 작성을 막 시작하려던 시점에 사노위에서는 당 추진위 건설 과정에서 강령만큼이나 중요한 조직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소위 ‘가입원서 사건’이라는 웃지 못 할 사건이었는데, 당시에는 아직 사노위 전체의 문제나 중앙위의 문제로까지 확대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서울지역위원회에서는 가입원서 거부자(정확히 규정하자면 가입원서 작성과 반대에 대한 행동 자체를 거부하고 정치조직의 민주집중제 원리를 공식적으로 부정한 자)에 대한 징계 안이 상정되었다. 물론 가입원서를 둘러싼 여러 문제들 중 가입원서 작성이라는 형식문제와 집행과정에서의 소통부족은 문제를 더욱 부정적인 쪽으로 확산시키는 원인으로 작용 했다. 하지만 처음의 문제는 가입원서 작성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가입원서 거부흐름을 반조직적으로 촉발시킨 중앙상근자의 태도와 그를 비호하는 세력에 있었다. 왜냐하면 그 문제는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정치토론을 통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정치조직으로서는 당연한 멤버쉽 확인 문제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을 확산시킨 것은 써클주의 운동에서 나오는 온정주의 흐름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문제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거나 묵인하는 사노준 출신의 3인을 제외한 강령위원 8인은 긴급회합을 갖는다. 이 자리에서는 강령문제 이전에 정치조직의 기본이 되는 조직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그 어떠한 강령토론이나 강령채택 과정에서도 결국 다수파의 논리와 써클주의 정치가 작용하여, 조직보존을 위한 야합이나 실천적 의미가 없는 강령 채택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그 후 1인은 독자강령 제출을 위해 그 모임에서 빠지고 나머지 7인은 조직문제에 대한 공유, 강령 원칙의 큰 틀에서의 동의를 기반으로 공동의 강령 초초안을 제출하기로 결정한다. 이것이 5인안이 탄생한 일차적 배경이다. 그리고 이러한 써클주의에 대한 우려는 2차, 3차 총회와 서울 지역위 임시총회, 강령토론의 과정에서 그대로 드러났고, 사노위 실패와 분리의 결정적 원인을 제공 하게 된다.

 

5인안 강령의 원칙

 

5인안은 강령 초초안을 작성하면서, 노동자계급에게 제출할 혁명 강령에서 고수해야할 원칙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것이 중요했고, 이것으로부터 강령 작성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첫째, 혁명 강령에서는 자본주의의 근본모순을 명확히 규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서로 연결된 역사적이고 일반화된 모순과 그것에서 파생한 특수한 모순들의 고리를 찾아내어 구분하고 총체적으로 판단하여, 계급투쟁의 동학, 사회주의 혁명의 주체를 올바르게 인식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원칙이었다.

 

둘째, 스탈린주의를 포함한 역사적 그리고 현존하는 사회주의를 참칭하는 국가자본주의, 기형적 사회 등 모든 반 노동자계급적 억압·착취체제를 사회주의로 인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노동자계급의 힘으로 타도해야 할 체제로 인식하는 것이었다.

 

셋째, 공산주의 사회로의 이행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필연성을 인정하며, 사회주의 혁명은 혁명당과 노동자계급의 의식적이고 조직화된 집단행동에 기반 해야 하며, 부르주아 계급의 폭력과 반혁명 책동에 대해 노동자계급의 무장력(계급폭력)으로 맞서야 하며, 부르주아 권력의 타도에서 무장봉기전술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넷째, 단계론을 거부하고, 혁명의 첫 단계에서부터 부르주아 권력의 즉각적 타도와 모든 국가기구의 파괴와 노동자평의회 권력을 확립하는 것을 경로로 명시하는 것이었다.

 

다섯째, 세계혁명과 혁명적 인터내셔널의 건설을 노동자국제주의의 당면 실천목표로 설정하는 것이었다.

 

여섯째, 위의 원칙에 입각한 노동자계급 권력 장악을 위한 이행요구(강령) 실천을 원칙으로 하는 것이었다.

 

위와 같은 강령의 원칙들은 이미 강령 초초안의 내용을 대부분 규정해주고 있었다. 따라서 강령 초초안 작성과 강령토론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는 강령의 원칙에 대한 동의였다. 강령문구와 전체 내용에 대한 동의는 1년이라는 짧은 기간에는 가능하지도 않고, 강제로 설득해서도 안 되는 문제였기 때문에, 토론과 실천을 통해 검증 받아야 할 앞으로의 과제로 상정했다. 그래서 원칙들에 대한 근거 제시와 세부적인 내용상의 불명료함 해소는 반드시 국제적인 흐름과 한국적 상황을 연계하여 풀어나간다는 원칙하에, 많은 부분을 앞으로의 과제로 남겨둔 채 강령 초초안을 제출하게 된다.

 

3인안 강령과의 사상적 차이

 

앞으로 사노위 잔류파의 통합강령이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3차 총회와 강령초안 토론을 거치면서 최종적으로 확인된 3인안과 5인안 강령초안의 사상적 차이는 다음과 같다.

 

첫째, 소련 사회의 성격 규정문제에서 3인안이 소련, 중국, 북한 등을 가짜 사회주의가 아닌 모종의 사회주의 국가로 규정하는 것은 과거의 역사적 사회주의에 대한 인식의 차이 정도가 아니었다. 이것은 앞으로 건설할 사회주의 국가의 상에 관한 문제이고, 여전히 3인안이 스탈린주의적 잔재와 노동자국가에 대한 환상(당과 관료가 주도하는 국유화, 계획경제에 대한 잘못된 환상)을 버리지 못해 나타나는 사상적 혼란스러움이기 때문에 결코 타협할 수 없는 문제였다. 우리는 소련사회에 대해 국가자본주의라고 규정하면서, 가치법칙과 계급투쟁의 고려를 통해 소련사회를 분석하려 노력하고 있다. 여기에는 맑스주의 혁명적 전통에 따라 이행기 문제를 판단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물론 아직까지 명료하지 못한 측면들은 앞서 말했듯이 앞으로의 과제로 남아 있다. 하지만, 혁명 강령의 정체성을 나타내주는 이행기 문제를 퇴보한 노동자국가론이나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실패한 모종의 노동자국가로 판단하는 사상들은 우리와는 현실 투쟁에서부터 적대적5) 일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해 적당한 타협이나 강령상의 이견 병기로 넘어가려는 행위는 정치적 야합일 뿐 역사와 노동자계급에게 정직하지 못한 태도이다.

 

소련과 북한, 중국, 그리고 쿠바와 베네수엘라 같은 국가자본주의 착취체제에 대해 명확한 입장이 없거나 그들을 동의해주는 세력들은 결코 노동자국제주의를 온전히 지켜낼 수 없으며, 혁명적 인터내셔널의 건설에서도 당연히 제외될 수밖에 없다. 그들이 강령에서 가짜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하지 않아도 현실의 실천운동에서 큰 문제가 없으니 함께 하자고 하는 것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기만이자, 강령과 실천을 분리하는 작태이다. 카스트로, 차베스를 묵인하면서 쿠바나 베네수엘라에서 활동 중인 혁명적 공산주의 세력과 연대할 수 없으며, 중국의 국유화 된 산업 체제를 보호하자는 입장을 갖고 있는 한 중국노동자들의 정부와 노조의 극악한 탄압을 넘어선 자립적 투쟁에 대해 지지할 수 없다.     

 

둘째, 자본주의 쇠퇴 규정의 문제는 현재 자본주의 체제의 끝 모를 위기의 본질을 밝혀내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삶의 문제이고, 계급투쟁의 주체들이 처해있는 객관적 조건과 전망에 대한 문제이다. 이것은 결국 노동자계급 미래의 문제, 혁명의 문제이다. 3인안처럼 자본주의의 상승기/쇠퇴기 개념 없이 단순한 주기적 위기론, 공황론 정도로 자본주의 위기상황을 판단한다면, 쇠락해가는 자본주의의 야만성과 반동성, 기생성과 부후성의 근원을 밝혀낼 수 없다. 더욱이 이것을 혁명적으로 극복할 대안(이행 프로그램)을 그 물적 토대로부터 도출해낼 수 없다. 또한 쇠퇴하는 자본주의 하에서 자본의 위기전가 상황을 맞이하여 생존권의 위협과 급격한 생활수준의 하락에 직면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생존조건이 계급의식과 조직의 상태를 어떻게 움직이는지 분석할 수 없다. 낡아서 소멸하는 운동과 새롭게 창출되는 계급운동의 실체를 파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분출되고 꺼져버리는 계급투쟁 속에서 혁명적 전망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자본주의 쇠퇴 개념을 무시한 채 이들이 제시한 전망이라는 것은 고작 과거운동의 혁신이나 계급의 재조직화(주체형성)라는 구태의연하고 앙상한 실천적 전망이었다.

 

게다가 이들은 자본주의 쇠퇴개념에 대한 반정립에 치중한 나머지, 자본주의 쇠퇴의 시작 (1914년, 1979년대, 1998년 이후 등)이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에 대한 문제제기나, 쇠퇴의 여러 근거에 대한 연관성 부족에 대한 비판을 넘어, 자본주의 쇠퇴 개념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최근 경제학자들6)과 자본가들까지 자주 사용하고 있는‘자본주의 쇠퇴’라는 개념을 계속 부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것은 모든 것을 ‘자본주의 위기’라는 말로 치환시키게 되어, 사회주의 혁명의 물적 토대를 스스로 부정한다는 오해를 사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공산주의 혁명은 세계적이어야 하고, 세계적이지 않으면 그 성공을 보장할 수 없다. 또한 세계혁명은 새로운 인터내셔널 즉 세계혁명당이 건설되어야 실현 가능하다. 세계혁명과 세계혁명당 건설의 관점에서 강령은 세계적으로 통일된 강령이 필요하며, 이것은 처음에는 맑스주의 전통을 계승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과 혁명적 계급투쟁을 벌이고 있는 전투적 노동자계급들을 포괄할 수 있는 기준강령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이 기준강령에는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혁명적 원칙들이 담겨있어야 한다. 일국의 특수성을 반영한 국가별 지역별 당이 존재하는 한, 처음에는 각 당의 강령이 별개로 존재하겠지만 세계혁명당의 강령과 조직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일국 혁명당의 강령과 조직은 세계혁명당의 기준강령과 통일되어야 하며 세계혁명당의 건설에 복무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원칙에서 벗어나 불분명한 자신들만의 사상과 경험으로 일국의 강령을 독자적으로 만들려는 시도들은 세계혁명의 관점을 가질 수 없으며, 노동자국제주의와도 거리가 멀다.  3인안은 강령토론의 과정에서 인터내셔널의 관점이 아닌 일국의 독자적 강령과 당 건설을 상정하고 있음을 드러냈고, 이것은 일국 당들의 연합형태를 인터내셔널로 규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맑스주의를 계승한다고 하면서도 자신들이 계승하는 정치노선을 밝히지 못한 채 정체불명의 혼합된 노선과 다른 노선에 대한 반정립으로 일관해 왔기 때문에 맞이한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것은 사노위 내에서의 연방주의적 조직관을 인터내셔널 건설에까지 적용한 정체불명의 사상적 표현에 다름 아니었다.

 

강령토론의 원칙과 실천적 강령채택의 실패

 

우리는 강령을 토론하고 비판할 때 원칙과 사상적 근거를 중심으로 토론을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계급투쟁의 위대한 역사와 혁명적 사회주의 사상의 집약인 강령의 문구들은 그 만큼 함축적이고 최선의 원칙만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선 강령을 건설하는데 있어 고수한 원칙과 역사적 전통을 밝혀내고, 그것으로부터 작성된 강령의 내용과 현실운동에의 적용 등을 토론하는 것으로 강령토론이 진행되어야 했다.  

 

혁명적 사회주의 원칙과 전통에 동의 한다는 것은 바로 강령의 원칙에 동의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강령토론은 강령의 사상적 근원을 밝히고 현실 적용에서의 원칙을 토론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그런데 사노위에서의 강령토론은 원칙의 토론이 아닌 강령의 문구나 주제별 토론이 되고 말았다. 실천의 적용에 대한 토론이 아니라 현재의 운동에 대한 유용성에 대한 토론이었다. 

 

다시 강조하지만 강령은 절대불변의 진리가 아니라서 그 원칙의 동의에서부터 시작하여 실천의 무기로 작용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강령의 문구 하나하나는 계급투쟁의 발전과 함께 끊임없이 검증되고 창조되어야 할 과제이지 진리의 담지서가 아니다. 실천을 강제하는 것은 강령의 명료한 원칙과 그에 입각한 풍부한 전술과 지침이지, 강령의 친절함과 좋은 글귀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노위 강령토론 5개월은 강령의 사상적 원칙에 충실한 토론도, 각 쟁점의 해소를 위한 심화토론도, 현실 운동의 무기가 될 수 있는 실천적 토론도 되지 않은 채, 그저 일정을 채우기 급급하거나 사상적으로 전혀 다른 강령 안을 조직보존을 위한 여러 가지 압력으로 통일시키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당시의 사노위 조직 상태는 단일 강령이 만들어지고 강령이 채택된다하더라도, 회원들의 강령적 실천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강령도 당 건설도 앙상한 형식만이 남을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강령의 채택은 강령의 내용에 대한 동의만이 아니라 강령을 실천적으로 결의하고 강령에 입각해 활동할 진정한 당원의 자격을 부여하는 채택이어야 했다. 강령과 규약을 승인하는 순간, 현재의 사노위보다 2~3배 이상의 정치의식 상승과 활동력이 필요할 것이며 강령적 실천과 규약 준수가 조직의 모든 규율을 담보해주는 것이어야 했다. 왜냐하면 사노위가 8개월을 넘어서면서는 출범초기에 보여준 회원들의 활동력과 결합도는 현저히 떨어져 있었고,  그나마 남아있던 이질적인 조직문화 사이의 건강함 긴장감도 서로에 대한 불신과 불만으로 바뀌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조직을 살리는 길은 오직 강령의 실천적 채택 뿐 이었다.

 

하지만 다수파는 상당한 고통과 출혈이 따르겠지만 당 건설을 위해 감내해야만 하는 강령의 실천적 채택(복수의 안이 나올 경우 각자의 강령 안을 실천적으로 승인하는 것)이라는 정도를 걸은 것이 아니라, 강령의 인위적 통일을 통한 형식적 채택과 조직보존에 중심을 두면서 우리들 자신과 노동자계급에게 약속한 당 건설 경로를 아무렇지 않게 바꾸어 버렸다.

 

다수파는 처음부터 실천적 강령의 채택이나 조직의 질적 전환을 통한 당 추진위 건설은 염두 해 두지 않았거나 중도에 포기한 것이 확실하다. 그래서 강령 초초안 작성이전 가입 원서 건을 필두로 하여 연쇄적으로 조직문제가 발생했을 때 적극적으로 문제해결을 위해 나서거나 희생을 감수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책임을 방기한 채 무마하거나 통합하려고만 했던 것이다. 이런 태도는 사상적 불명료함과 부분적 실천의 나열과 조직과 투쟁에서의 연방주의적 사고들로 이루어진 3인안 강령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났다.

 

3. 결론

 

강력한 정치조직은 합력의 정치, 통합지도부의 건설이 아닌 강령적 통일, 강령적 행동일치에 있다. 강령의 수준을 낮추어 통일을 꾀하는 것은 혁명적 전통과 현실의 혁명적 사회주의운동을 져버리는 일이다. 그런데 사노위 다수파는 조직유지를 위해 강령의 원칙, 강령토론의 원칙, 강령채택의 원칙, 혁명당 건설의 원칙 모두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오로지 조직유지와 형식적 당 추진위 전환을 위해 혁명적 사회주의 진영을 배제7)시켰다.

 

결국 그들이 간과한 가장 큰 오류는 당과 강령은 하나이고 유기체와도 같다는 사실을 부정한 것이다. 이 점을 무시하고 강령의 인위적, 기술적 통합을 시도한 것은 강령과 실천을 분리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존재했던 모든 혁명당 조직에서 강령은 실천의 지침이자, 당원들과 노동자계급에게 무기로 인식되어왔다.

 

강령에 사회주의혁명이 목표로 설정되어있다면 그 강령을 옹호하는 모든 당원들은 현실운동에서 실제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운동을 해야 한다. 조합주의, 관료주의 운동을 넘어서는 운동을 강령에서 제시하고 있다면 반드시 조합주의와 관료주의를 타도하고 새로운 운동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강령에 입각한 활동인 것이다. 이런 태세와 이런 조직구조가 갖추어지지 않은 조직은 사회주의자 조직도, 혁명가조직도 아니며, 더욱이 노동자계급의 당이라는 이름을 절대 붙여서는 안 될 후진적 정치 써클일 뿐이다.

 

혁명당 건설은 바로 이러한 강령과 조직이 하나로 결합하는 조직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자, 강령이 노동자계급과 상호작용하며 계급투쟁의 무기가 되는 과정이다.

 

혁명당 건설은 결코 먼 곳에 있지 않다. 계급의 앞선 부위 ,혁명적 부분이라 자임하는 우리가 먼저 강령을 건설하고 강령에 입각한 활동을 통해 혁명당의 조직체계를 하나하나 튼튼하게 세워나간다면, 그것이 노동자계급에 깊이 뿌리 내린다면, 당은 노동자계급에게 바쳐져 노동자계급의 당이 될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부르주아 계급에게 실질적 위협이 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당이 되는 일은 우리의 명확한 정치적 입장과 전망이 정세의 고양과 결부된 대대적인 계급투쟁과 만날 때이다. 혁명을 향한 모든 행동은 프롤레타리아 혁명당의 강령과 그것을 행동에 옮길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혁명적 계급의식에 달려있다.

 

쇠락해가는 자본주의, 야만이냐 혁명이냐의 시대, 노동자계급의 시대적 필요에 부응하는 혁명당 건설에 즉각 착수하자!

 

노동자계급에겐 무기가 되고 자본가계급에겐 실질적 위협이 되는 공산주의 혁명 강령을 건설하자!

 

 

각주)

1) 민주노동당은 최근의 ‘사회주의 가치 삭제’라는 강령개정을 통해 사회주의적인 요소도 제거했지만, 원래부터 사회주의 혁명정당과는 거리가 먼 정치적으로는 좌파민족주의, 사민주의 정당이었다.

2) 사노위는 당 건설 추진위 조건으로 강령, 전술, 조직상의 통일을 내걸었다. 하지만 전술은 강령의 원칙에 복무하는 것이기 때문에 강령통일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공동전술에 불과하다.

3) 초초안 단계에서 생략되어 있던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은, 초안단계에서는 내용이 관철된 것이 아니라 형식상의 외삽 형태로 포함되었다.

4) 강령기초위원회는 강령기초위원과 강령실무위원으로 구성되었는데 총 11명이었다. 강령위원회 구성은 사노준 출신 3명, 사노련 출신 3명,개별 활동가 5명으로 이루어 졌는데, 두 써클 소속이 아닌 5명은 레닌주의, 좌익공산주의, 트로츠키주의, IBT(트로츠키주의 일부) 등 다양한 정치 노선을 갖는 개인들로 구성되었다. 따라서 다함께(전지윤, 사노위 실패가 좌파에게 보여 주는 것, <마르크스21>, 10호, 2011년 여름)에서 규정한 사노련파 대 사노준파의 구도는 강령기초위원회에서는 이미 존재하지 않은 것이다.

 

5) 사노위 신문에서는 리비아 사태를 두고 이미 두 가지의 적대적 경향이 동등하게 게재되었다. 이것이 자국 상황이라면 둘의 입장은 피할 수 없는 적대적인 입장인데도 같은 조직을 유지한다는 것은 부르주아 정치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여기서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세계혁명과 인터내셔널의 건설이라는 관점에서 서로 적대적인 입장이 자기 일이 아니라서 자국중심으로 아무렇지 않게 동거를 하면서도 인터내셔널을 외친다는 것은 인터내셔널조차 희화화 시키는 일이다.

 

6) 맑스주의 경제학자인 김수행 교수조차도 자본주의 쇠퇴라는 용어를 직설적으로 사용한다. <경향신문> (2011년 5월24일) 김수행 칼럼 -쇠퇴하는 자본주의에서 “이제 자본주의는 빈부격차와 계급대립의 심화, 국제협력의 붕괴, 제국주의에 대한 제3세계 인민의 저항, 민주주의의 약화 등으로 쇠퇴하지 않을 수 없다.” 고 주장했다. "

7) 혁명적 사회주의 진영(사노위 내 의견그룹)은 사노위의 해산을 선언했으므로 사노위 출범정신을 지켰고, 잔류파들은 해산을 받아들이지 않고 사노위를 유지시켰으므로, 사노위의 공과 실에서 혁명적 사회주의 진영을 배제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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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주의 우파에게 1

사용자 삽입 이미지 1. 오늘날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분파가 수십여개로 많은것은, 트로츠키주의의 중요 구성요소 자체에 모순이 많기 때문이다.  트로츠키주의의 불모지였던 한국같은 짧은 역사를 가진 곳에서 조차,  그들은 5개 이상의 경향으로 존재하고 있다.

 

사노위와 노동자혁명당 같은 당 지향적 조직간의 일부 트로츠키 경향 사이에서도 리비아 사태를 두고 서로간에 적대적인 경향(카다피의 무조건적 방어 주장과,  제국주의 물리력을 빌려서라도 카다피를  우선 타도해야 한다는 주장)을 드러내는 것은 트로츠키주의의 치명적 한계가 역사적으로 극복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끊임없이 계승될 것임을 보여준다.

 

 

2. 그리고  이들의 우파가 분파와 그룹을 형성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실제로는 부르주아 정치기구의 좌익을 의미한다. 이들이 말로는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외쳐대면서도, 타도해야 할 대상인 부르주아 정치기구(그것이 노동자 당이건, 사회민주주의 당이건)에 입당전술을 펼치면서 기생하고 있는 현실은 노동자계급의 자립성에 치명적 장애물이다. (물론 혁명적 트로츠키주의자들 안에서도 일부는 여전히 명백한 사상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다수파에 기생한 운동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노동자계급의 자립화를 위한  조직적 전망과 장기적 계급투쟁에의 결합이 아니라, 이들의 시시때때로 변하며 임기 응변적인 반정립운동은 노동자계급뿐 아니라 사회주의자들까지도 스스로 자신들을 조직하는 자기조직화의 기본을 잃어버리게 했다.  과거 스탈린주의가 없었더라면 트로츠키 이후의 트로츠키주의가 성립 가능했을지 여전히 의문인 것은, 한국의 현실운동에서도 그들이 벌이는 다른 운동에 대한 반정립운동의 형태로  수시로 목격되고 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해방을 대표하지 않고 새로운 지배자가 될 국가자본주의자들이나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질서를 대표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회민주주의나 스탈린주의당(그것의 변종들 -김일성주의등 포함하여)의 좌익으로 기능하며, 이 당들이 혁명적인 정치적 입장으로 부터 공격을 받지 않도록 보호하며, 무엇보다 중요하게 이 당들이 노동자계급의 눈에 진실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다함께가 개입한 민노당은 다함께에 의해 혁명적으로 진화했거나,  노동자당원들의 의식이 진전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명백하게 퇴보했거나,  정치적으로 적대적인 세력들과 한지붕아래 동거함으로 인해 김일성주의 같은 반혁명적 조류들을   혁명세력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는 결과만을 초래하였다.

 

 

3.프롤레타리아트는 오직 지도력이 부족할 뿐이라는 트로츠키의 선언을 맹종함으로써, 그들은 혁명 정당의 부활을 위한 실제조건을 깨닫는 데 실패한다. 이 조건은 프롤레타리아트 대중의 투쟁과, 당 강령의 명확화에 대한 객관적 필요 속에 있다. 이러한 기초적인 조건들을 인지할 수 없었기에,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이미 취한 혁명적 교훈의 길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 추적하지 않고서는 , 그들의 역사적 궁지에서 탈출할 수 없다.

 

그래서 어렵더라도, 고통스럽더라도, 다시 트로츠키를 외우고, 맹종할것이 아니라,  트로츠키 근본으로 돌아가서 잘못된 점을 시정하고, 폐기하고,  절반이상을 버리고 도려내서  그 노선의 10%만 남더라도 혁명적인 전통만 계승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맑스주의 정통으로 가는 길이자,  혁명적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함께,  부르주아 이데롤로기에 조종당하지 않고 스탈린주의에 목졸림 당하지 않은 새롭게  소생하는 젊은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새로운 혁명적 인터내셔널을 건설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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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좌익 공산주의 : 「노동자 그룹」의 선언(강령) 2

러시아 좌익 공산주의 : 러시아 공산당의 「노동자 그룹」의 선언(강령)(2)

국제 평론 2010년 11월 143호, 국제공산주의흐름(ICC)

 

 

 

 우리는 「선언(강령)」의 첫 번째 부분을 국제 평론 지난 호에 실었다. 되짚어보면 「러시아 공산당의 노동자 그룹」은 이 강령을 작성했고, 제3 인터내셔널의 당과 러시아에서의 소비에트 권력의 기회주의적 타락에 대한 반응으로 출현한 좌익 세력들로 구성된, 소위 좌익 공산주의의 일부를 형성했다.

 

 아래 게재된 이 문서의 앞으로의 두 장은 기회주의적인 통일 전선 정책과 노동자 정부 슬로건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하고 있다. 이러한 비판을 역사적 맥락 속에 위치지음으로써, 강령은 역사적인 시기의 변화를 이해하려는 시도로 읽어야 한다. 새로운 시대는 반동적일 뿐인 부르주아지의 여러 분파들과의 동맹 정책을 무효화하고 헛된 것으로 만들었다. 이와 유사하게, 반역자로 드러난 사회 민주주의와 같은 조직들과의 동맹들도 프롤레타리아트를 약화시키는 것일 뿐이었다. 나아가 「강령」은 새로운 시대에서 개혁을 위한 투쟁은 더 이상 화두가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엄청난 역사적 변화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일어났기 때문에 그 변화가 정확하게 무엇이었는지 그런 혁명가들조차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관점을 갖추기 힘들었다. 이것은 「노동자 그룹」도 마찬가지여서, 개혁을 위한 투쟁과 자본의 영구적인 잠식에 직면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방어적 경제 투쟁을 구분하지 못했다. 이들은 방어적 경제 투쟁을 거부하지 않았지만, 정치적‧경제적 투쟁이 전부를 형성한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연대 없이 권력을 쟁취하는 것만이 프롤레타리아트를 그 사슬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이라 믿었다.

 마지막으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가해진 언론의 자유에 대한 제한에 직면하여, 내전이 끝난 후에도 「강령」은 지도자에게 “당신은 어떻게 사회 경제의 엄청난 조직화 문제를 프롤레타리아트 없이 해결할 수 있는가?”라고 물을 때, 굳건하고 명확하게 답하고 있다.

 

 

 

● 사회주의 통일 전선

 

 이 문제의 본질적인 내용을 보기 전에, 지노비예프 동지의 통일 전선에 대한 테제가 러시아에서 토론되고, 받아들여진 상황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1921년 12월 19-21일에, RCP(러시아 공산당)의 12차 당대회가 있었고, 이 때 통일 전선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 때까지 이 문제에 대해 언론에 발표되거나 당 모임에서 토론이 된 적은 없었다. 그러나 당대회에서, 발표된 테제에 대해 조잡한 공격은 있었으나 곧 잠잠해졌고, 당대회는 즉시 거수로 이 테제를 승인하게 되었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 우리가 이러한 배경들을 떠올리는 이유는 누군가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다음과 같은 사실들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고자 하기 때문이다. 첫 째, 통일 전선 전술은 매우 서둘러, 거의 “군대처럼” 이뤄졌다는 점, 둘 째, 러시아에서 이것은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수행되어졌다는 점이다.

 

 볼셰비키는 코민테른1) 내에서 이 전술의 발기인이었다. 그들은 외국 동지들에게 우리 러시아 혁명이 성공했고, 그것은 통일 전선 때문임을 명확히 했다. 또한 통일 전선은 러시아 안에 모든 혁명 전 시기의 경험들과, 특히 볼셰비키의 멘셰비키에 맞선 투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구축되어 있었다고 설득했다.

 다른 나라에서 온 동지들은 단순히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승리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들도 그들의 부르주아지에게 승리하길 원했다. 이제 그들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통일 전선 전술 탓으로 승리했다고 납득했다. 그들은 러시아 혁명의 역사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레닌 동지가 이 단순한 이야기를 믿어버린 이들을 심각하게 비난했지만, 그는 누구도 그가 이러한 특별한 단어에 붙들려 있기를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러시아 혁명의 경험으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한 때 볼셰비키는 독재에 반대하는 진보적인 운동을 지지했다.

 “a)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짜리즘에 대항하여 부르주아지가 혁명적이든, 단지 반대파일 뿐이든 그들을 지지해야 한다.

 

 b) 그러므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러시아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의식의 성장을 반길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 편,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 앞에 부르주아 해방 운동의 제한적이고 부적절한 성격이 스스로 드러날 때마다 그 정체를 밝혀야만 한다.” (「러시아 사회 민주주의 노동당」 2차 당대회 결의문, ‘자유주의자에 대한 태도’, 1903년 8월)

 

 1905년 4월 열린 3차 당대회 결의문은 동지들에게 두 가지 지점을 지적하며 권고했다.

 

 1) 노동자들에게, 많은 지주층과 제조업자들로 대표되는 온건 자유주의자들부터 “해방 연합(Emancipation Union)”과 다양한 자유주의 전문직 그룹들로 알려진 급진적 경향들에 이르기까지 부르주아 민주주의 경향이, 뉘앙스에도 불구하고, 반혁명적, 반 프롤레타리아 본질을 갖고 있음을 설명할 것.

 

 2) 노동자 운동을 되돌리려는 일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시도에 저항해 싸우고, 프롤레타리아트와 그 다양한 그룹의 이름으로 이야기할 것. 1898년 이후 사회 민주주의는 부르주아지와의 “통일 전선”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이 통일 전선은 세 가지 단계가 있다.

 첫 째, 1901년, 사회 민주주의는 현재 정권에 반대하는 모든 “진보적인 운동들”을 지지했다.

 둘 째, 1903년, 그들은 “부르주아 운동의 한계”를 넘어설 필요를 인식했다.

 셋 째, 1905년 4월, 그들은 “동지들로 하여금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경향의 반혁명적, 반 프롤레타리아적 본질과 그 영향력을 비판”하고 그들의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영향에 대해 정력적으로 싸웠다.

 

 부르주아지를 지원하는 것이 어떤 형태가 되었든, 1905년 이전 특정 시기 볼셰비키가 부르주아지와 통일 전선을 형성했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러시아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오늘날 부르주아지와 통일 전선하는 “혁명가”를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가?

 

 1905년 9월, “Boulyguine 두마”의 문제를 토론하기 위해 소집된 회의에서, 대회는 이 두마의 부르주아지에 대한 태도를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정의했다. “인민의 대표라는 이러한 환상으로, 독재는 노동 운동이 지쳐감에 따라 성장하고 질서를 열망한 부르주아지의 많은 요소들을 부추겼다. 그들의 이해와 지원을 약속하면서, 독재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운동을 박살내려 했다.”

 

 볼셰비키가 1906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자당」(RSDLP) 통일 대회에서 제안한 결의안은 볼셰비키 정책 변화의 비밀을 드러내 준다. 부르주아지를 지원하던 정책이 부르주아지에 대한 투쟁 정책으로 변화한 것이다. “거대한 자본가와 지주들의 계급들이 독재에 대해 반대하다가 혁명을 파괴하기 위해 얼마나 재빨리 독재와 연합하게 되었는지 볼 수 있다.” “민주주의 혁명 시기의 노동자 계급의 주요 임무는 그 혁명의 완수”였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이 혁명의 완수를 원하는 당과의 “통일 전선”을 형성해야만 했다. 이러한 이유로 볼셰비키는 카데츠의 우익과 했던 협정을 폐기하고, 그 좌익인 「사회주의 혁명가당」, 「인민 사회주의자들」과 「트루도빅스」(Trudoviks)와의 협정을 맺었다. 이에 따라 민주주의 혁명의 지속적인 진전을 위한 투쟁에서 “사회주의 통일 전선”이 형성되었다.

 

 이 시기 볼계비키의 전술은 옳았는가? 10월 혁명의 적극적인 투사들 사이에 이러한 전술의 시비에 대해 논쟁하는 이들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러므로 1906년에서 1917년까지 볼셰비키가 「제헌 의회」를 소집하기 위한 「임시 혁명 정부」의 형성으로 완수된 민주주의 혁명의 지속적인 진행을 위한 투쟁에서 “사회주의 통일 전선”을 옹호했다고 본다.

 

 아무도 이 혁명이 프롤레타리아적이거나 사회주의적이라고 생각하지도,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였음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는 사회주의 혁명가당, 멘셰비키, 인민주의자들과 트루도빅스들과 실질적으로 단결하면서 “사회주의 통일 전선” 전술을 제안하고, 그에 따랐다.

 

 우리는 민주주의 혁명을 위해 투쟁해야 하는가, 아니면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투쟁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볼셰비키의 전술은 무엇이었는가? 소비에트 권력을 위한 투쟁도 “사회주의 통일 전선”을 필요로 하는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회주의 혁명가당」을 “모호한 사회주의 표현을 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분파”로 여긴다. 그것은 혁명 동안, 지금까지 그들의 활동을 통해 확인되어 왔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분파로서, 이 당은 사회주의 혁명, 사회주의을 위한 투쟁에서 실질적인 임무를 떠맡을 수 없었다. 대신에 그들은 “모호한 사회주의적”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이 투쟁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되돌리려 했다. 만일 그러하다면 (그리고 그들은 그러했다) 봉기한 프롤레타리아를 승리로 이끌 전략은 사회주의 통일 전선일 리가 없다. 오히려 부르주아지 분파와 그들의 혼란스런 사회주의 용어들을 상관하지 않는 피튀기는 전투만이 승리로 이끌 전략일 것이다. 오직 이러한 전투만이 승리를 가져올 것이며, 승리는 반드시 그런 방식으로 이뤄져야만 할 것이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승리했다. 사회주의 혁명가당, 인민주의자들과 멘셰비키들과의 동맹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에 맞서 싸움으로써 승리했다.

 

 10월이 다가왔을 때 볼셰비키는 사회주의 혁명가당2), 멘셰비키3)의 사회주의적 수사들로부터 노동자 대중을 해방시킴으로써 사회주의 혁명가당과 멘셰비키와의 분리에 성공했다. 그리고 부르주아지 분파와의 통일 전선으로 취급하기 힘든 이러한 분리로부터 그들은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러시아의 경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무엇인가?

 1) 특정 역사적 순간, 부르주아지와의 통일 전선은 1905년 이전의 러시아에 존재했던 상황과 유사한 조건의 지역에서 형성될 수 있다.

 2) 1906년과 1917년 사이의 러시아와 다소 유사한 상황의 나라들에서는 부르주아지와의 통일 전선을 포기하고 “사회주의 통일 전선” 전술을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프롤레타리아 권력을 위한 직접적인 투쟁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사회주의 통일 전선” 전술을 폐기하고,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모호한 사회주의적 용어를 쓰는 부르주아 분파”- 그 당시로서는 제2 인터내셔널의 모든 정당들이 해당될 것이다 -가 결정적인 순간 자본주의 체제를 방어하기 위해 무장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세계 자본주의 착취를 전복하려는 목적을 가진 모든 혁명적 인자들의 단결을 위해서는, 그들이 「독일 공산주의 노동자당」(KAPD), 「네덜란드 공산주의 노동자당」과 「제4 인터내셔널」4)에 속한 다른 정당들과의 동맹이 필수적이다. 모든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들은 그들을 투옥했던 모든 세력들- 제2 인터내셔널의 정당들, 제2 1/2 인터내셔널5)과 그들의 “모호한 사회주의적 용어”- 로부터 스스로 분리할 필요가 있다.  세계 혁명의 승리는 부르주아의 사회주의 캐리커쳐로부터의 원칙적인 분리와 그들에 대항하는 멈추지 않는 투쟁 없이는 불가능하다. 기회주의자들과 사회주의-쇼비니스트들은 부르주아지의 하인들로서, 결과적으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적들을 지휘했는데, 특히 오늘날, 자본가들과 연결되어, 그들의 나라에서, 해외에서 무장한 억압자가 되었다. (볼셰비키의 강령과 비교해 보라) 이것이 코민테른의 최고 위원회의 테제에 의해 지지된 사회주의 통일 전선 전술의 진실이다. 실제로는 기회주의적 전술이었던 것이다. 자국과 다른 나라들에서 행해진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무장 억압을 수행한 적들과의 합동 전술은 러시아 혁명의 경험에 명백히 대립되는 것이었다.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깃발 아래 남아있기 위해, 우리는 부르주아지와 그 사회주의자 하인들에 대항하는 “통일 전선”을 형성해야 한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사회주의 통일 전선” 전술은 프롤레타리아 투쟁이 부르주아지에 의해 지원되는 독재에 대항하여 일어날 때, 부르주아 민주 혁명을 목표로 할 때 그 혁명적인 가치를 갖고 있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도 반대하는 독재에 대해 싸울 때, 부르주아지와의 “통일 전선” 전술을 따라야 한다.

 

 코민테른이 모든 국가들의 공산당에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사회주의 통일 전선을 쓸 것을 요구한 것은 각 나라의 조건에 상응하도록 해결책을 내놓는 현실적 임무를 방해하고, 의심할 바 없이 프롤레타리아트의 모든 혁명적 운동들에 해를 끼쳤다.

 

 

●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집행위원회의 테제에 대하여

 

 이 테제는 프라우다(Pravda)에 게재되었는데, “이론가들”이 “사회주의 통일 전선”의 아이디어를 단 두 단어의 표현으로 이해했음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통일 전선”. 1917년 러시아에서는 모든 나라들에서, 특히 샤이데만, 노스케를 비롯한 사회적 배신자들이 얼마나 “인기 있었는지” 모든 이들이 안다. 볼셰비키의 당원들은 거의 경험이 없었기에, 모든 곳에서 외쳤다. “이 노동자 계급의 배신자들아! 우리는 너희들을 전신주에 목 매달 것이다. 너희들은 모든 나라들의 노동자들을 수장시켜 죽인 그 피의 욕조에 책임을 져야 한다. 너희들은 로자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를 암살했다. 베를린의 거리에서, 너희들의 폭력적인 행동 덕에 착취와 자본주의 억압에 반대에 일어난 노동자들의 붉은 피가 흐른다. 너희들은 베르사유 평화의 저자들이지만 그것을 매번 배신함으로써, 너희들은 국제 프롤레타리아 운동에 셀 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

 

 우리는 공산주의 노동자들에게 “사회주의 통일 전선”을 제안하는 것이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고 덧붙인다. 그것은 노스케, 샤이데만, 반데벨드, 브란팅 등과의 연합전선을 이야기한다. 그러한 통일 전선은 일방적으로든 다른 방식으로든 위장될 것이며, 이것이 앞으로 일어날 일 들이다. 테제는 단순히 “사회주의 통일 전선”으로 명명되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의 통일 전선에 대한, 그리고 제2 인터내셔널에 속한 노동자들, 「2와 1/2 인터내셔널」과 암스테르담, 유사하게 아나키스트와 생디칼리스트 조직에 속한 노동자들에 대한 태도에 대한 테제”라고 이름 붙여졌다. 왜 이렇게 장황한가? 여러분은 오래지 않은 시간 전에 우리를 제2 인터내셔널의 장례식에 초대한 지노비예프 동지가 이제는 우리를 제2 인터내셔널과의 결혼 축하연에 초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왜 그렇게 장황한 제목을 달아야 했는가 그 이유이다. 사실 이 테제는 노동자와의 협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2 인터내셔널과 2와 1/2 인터내셔널의 정당들과의 협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노동자들은 해외에 나가 본 적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중앙 위원회에 앉아있는 반데벨데, 브란팅, 샤이데만, 노스케 등에 의해 대표되는 당들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협정이 이뤄지는 것은 그들과 함께이다. 누가 세 개의 인터내셔널의 대회를 위해 베를린에 가겠는가? 공산주의 인터네셔널은 진심에서 우러나는 신뢰를 누구에게 줘야 하는가? 벨스(Wels)파에게, 반데벨테(Vandervelde) 파에게 

 

 그러나 KAPD와 협정을 맺으려 시도한 적이 있던가? 지노비예프 동지가 대부분의 훌륭한 프롤레타리아적 인물들이 있다고 인정한 그곳과? 없다. 그리고 KAPD는 아직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 쟁취를 위해 싸우고 있다.

 

 지노비예프 동지의 이 테제의 목적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과 제2 인터내셔널의 혼합이 아니라고 확인했던 것은 사실이다. 제2 인터내셔널에 대해, 그는 조직적 자율성의 필요를 일깨워준다. “제2 인터내셔널과 2 1/2 인터내셔널과 이러저러한 협정들을 맺은 각 공산당의 위치는 절대적 자율성과 총체적 독립성이 설명해준다.” 공산주의자들은 실천에 있어서 자기 규율을 스스로 강제하지만, 그들은 노동자 조직의 정치에 대한 예외없는 권리와 가능성을 - 실천의 전후에, 가능하다면 실천하는 가운데 - 유지해야 한다. “자본주의 전선에 대항하는 실천적인 행동에서의 모든 노동자 조직의 최고 수위의 단결”이라는 슬로건을 지지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입장을 방어하는 것을 포기할 수 없다.(1921년 러시아 공산당 대회에서 제출된 코민테른 중앙위원회의 테제를 보라)

 

 1906년 이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자당」에서는 위의 코민테른의 테제에서 인용된, 가능한 최대한의 자율성을 갖고 있는 두 분파가 있었다.

 

 협상에서의 규율, 당 내 활동에서의 판단의 자율성은 공식적으로 RCP의 규정에 인정되어 있었다. 다수가 정한 것은 해야만 하며, 개인은 비판의 권리만을 행사할 수 있을 뿐이었다. 명령된 것은 해야만 하지만, 그것이 세계 혁명에 해를 끼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에 대해 분노했다면, 실천 이전에, 와중에, 그리고 이후에 자유롭게 그 분노를 표현할 수 있었다. 이것은 자율적 행동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Vandervelde가 베르사유 조약에 사인하고, 스스로 타협했을 때와 같다)

 

 이러한 같은 테제들에서, 집행위원회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대신하는 것임이 분명한 노동자 정부의 슬로건을 제안했다. 노동자의 정부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당의 정수인 중앙 위원회로 구성된 정부이다. 이러한 테제의 이상적인 실현은 사회주의자인 에버트(Ebert)가 대통령인, 그의 승인과 함께 정부가 형성된 독일에서 일어났다. 이 공식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공산주의자들은 스웨덴의 브란팅과 독일의 에버트와 같은 사회주의자 수상, 대통령을 지지하는 투표를 해야만 한다.

 

 코민테른의 의장, 지노비예프 동지는 사회민주당의 중앙위원회, 에버트, 노스케, 샤이데만을 만나 주먹을 쥐고 외쳤다. “노동 계급의 배신자, 변절자!” 그들은 친절하게 미소 짓고 그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당신들은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자인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를 살해했다. 우린 당신을 교수대에 목매달 것이다.” 그들은 그를 향해 더욱 친절하게 미소 지으며 더욱 고개를 숙였다.

 

 지노비예프 동지는 그들에게 통일 전선을 제시하고,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노동자 정부를 구성할 것을 제안한다. 그러므로 그는 교수대를 수상의 자리와 바꾸어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노스케, 에버트, 샤이데만, 등등은 노동자 집회에 가서 코민테른이 자신들을 사면했으며, 교수대 대신 수상 자리를 제안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조건은 공산주의자들이 수상을 인정하는 것이다 [...]6) 그들은 모든 노동 계급에게 공산주의자들은 사회주의의 실현의 가능성이 오직 자신들과의 단결에 있지, 그들과의 대결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덧붙인다. 이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우리를 예전에 교수형에 처해 무덤에 묻었다. 이제 그들은 우리에게 왔다. 우리는, 선의로 그들을 용서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우리를 용서했기 때문이다. 상호 사면인 셈이다.

 

 코민테른은 제2인터내셔널에 그 정치적 성실함의 증거를 보여주었고, 정치적 열등함의 증거를 받았다. 실제 이 변화의 기원은 무엇인가? 지노비예프 동지는 어떻게 에버트, 샤이데만, 노스케에게 교수대 대신 수상 자리를 권할 수 있는가? 얼마 전에 그들은 제2 인터내셔널의 장송곡을 불렀는데, 이제 그들은 삶에 키스를 한다. 왜 그는 그런 노래를 부르는가? 우리는 정말 그 부활을 보고 그 주장을 들어야 하는가?

 

 지노비예프의 테제는 이러한 질문에 효과적으로 대답한다. “세계 경제 위기는 더더욱 첨예해지고, 실업은 늘어만 간다. 자본은 공세로 나아가고, 교묘하게 작전행동을 하고 있다. 노동계급의 조건은 손상되었다.” 그러므로 계급 전쟁은 피할 수 없고, 노동 계급은 더욱 왼쪽으로 나아갈 것이다. 개량주의적 환상은 파괴되었다. 더 많은 노동자들이 공산주의 전위의 용기를 제대로 평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로부터 샤이데만과의 통일 전선은 구성되어야 한다. 극악무도한! 결론은 전제와 일관되지 않다!

 

 우리는 지노비예프가 그의 테제에서 통일 전선을 방어하기 위해 내세웠던 주장들에 대해 좀 더 근본적인 것들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객관적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지노비예프 동지는 놀라운 발견을 했다. “우리는 단결을 위한 노동 계급의 투쟁을 안다. 샤이데만과의 통일 전선을 통하지 않고서 어떻게 단결할 수 있는가?” 자신의 계급의 이해와 세계 혁명에 대해 생소하지 않은, 모든 의식 있는 노동자들은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이다. 노동 계급은 “통일 전선”을 주장할 필요가 생겼을 때에만 단결을 위해 투쟁하는가? 노동 계급이 정치 투쟁에 발을 디뎠을 때부터 노동자와 함께 한 이라면 누구나 모든 노동자를 괴롭히는 의심을 알고 있다. 왜 멘셰비키, 사회주의 혁명가당, 볼셰비키, Trudoviks(인민주의자) 들은 서로 싸우는가? 모두가 민중을 위하고 있으면서도.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서로 싸우게 하는가? 모든 노동자들은 스스로 독립적인 계급으로서 조직화해야 하고, 그 외 모든 계급들에 대해 반대해야 한다. 우리의 쁘띠 부르주아적 편견들은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 그것은 진실이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사회주의 혁명에 대해 호의적인 상황에 있는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우리는 노동 계급이 국제적 멘셰비키와 사회주의 혁명가당에 대항하는 무장 투쟁을 준비하도록 해야 한다. 이 경우, 확실히 러시아 혁명의 경험이 고려되어야 한다. 세계 노동 계급은 제2 인터내셔널과 2와 1/2 인터내셔널의 사회주의자들이 반혁명의 선두에 있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사회주의의 배신자들과의 통일 전선에 대한 선전들은 어떤 뉘앙스에 상관없이 그들도 역시 사회주의를 위해 부르주아지와 싸우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오직 공개적이고 용기있는, 내전을 옹호하고 노동계급에 의한 정치 권력의 획득을 옹호하는 선전들만이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관심을 끌 수 있다.

 

 노동 계급이 그 자신의 물질적 법적 권리를 파업과 의회를 통해 개량할 수 있는 시기는 이미 지났다. 이것은 밝혀져야 한다. 가장 시급한 투쟁은 권력 투쟁이다. 우리는 우리의 선전을 통해, 많은 경우 파업을 자극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노동자의 조건을 개선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아직 옛날 개량주의적 환상을 넘어서지 못하고 스스로를 약화시키는 투쟁을 하고 있다. 우리는 노동자와 파업 동안 연대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이러한 운동은 노동자들을 노예 상태, 착취와 갈증의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노동자의 굳은 살 박힌 손으로 권력을 쟁취하는 것 뿐이다.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니다. 지노비예프 동지의 연대 결정은 통일 전선 전술을 정당화 했다. 우리는 “사회 혁명의 시대”라는 관념을 이해하는 데 익숙하다. 그것은 현재, 사회 혁명이 시대의 화두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실제로, “사회 혁명의 시대는 장기적 관점에서 혁명 과정의 일부”라는 것을 보여줬다. 지노비예프는 우리가 현실에 발을 딛고 노동 대중을 끌어들이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멘셰비키와 사회주의 혁명가당과 1903년에서 1917년까지 다른 방식으로 단결함으로써 대중들을 설득했고,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우리의 승리로 끝맺었다. 이것이 왜 그가 에버트, 샤이데만, 씨에(Cie)를 극복하라고 하며 그들과 싸우지 말고 단결하라고 주장하는 이유다.

 

 우리는 사회 혁명의 기간이 장기든 단기든, 그 기간이 어느 정도든 여기서 논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논쟁은 천사의 성별에 대한 수도사들의 논쟁이나 대머리가 되려면 몇 개의 머리카락이 없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회 혁명의 시대”라는 개념을 정의하고자 한다.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먼저 물질적 생산력이 발전하여 소유권과 양립할 수 없게 된 상태이다. 사회 혁명이 필연적인 것이 되는 물질적 조건이 있는가? 그렇다. 무엇이 부족한가? 주체, 인적 조건이 부족하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 계급은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 당장 이러한 혁명의 필요를 실현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 이미 이를 이뤄낸 선진 노동자들, 다시 말해 전위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경종을 울려야 한다.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공장 폐쇄, 파업, 급박한 전쟁, 생활조건의 추락 등) 내전을 옹호하는 선전을 통해 전투를 요구하고, 이러한 즉각적 투쟁에 대해 노동 계급을 준비시키고 조직해야 한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승리했다고, 그것이 멘셰비키와 사회주의 혁명가당과 단결했기 때문이라고 누가 이야기할 수 있는가? 그것은 넌센스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멘셰비키와 사회주의 혁명가당에 대항하는 치열한 싸움을 통해 부르주아지와 지주들에게 승리했다.

 

 통일 전선 전술의 필요에 대해서 트로츠키는 그의 연설에서 우리는 승리했지만 우리가 어떻게 승리했는지 분석해야만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우리는 멘셰비키와 사회주의 혁명가당과 통일 전선을 통해 진군했지만, 그것은 우리와 멘셰비키, 그리고 사회주의 혁명가당이 같은 위원회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만약 통일 전선 전술이 같은 기관에 앉아있는 것이라면, 강제 노동의 우두머리들과 죄인들 또한 통일 전선에 포함된다. 그들은 모두 감옥에 있다.

 

 우리 공산당은 의회에 앉아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이 모든 대표들과 함께 통일 전선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동지는 전 세계의 공산주의자에게, 다소 의심스런, 볼계비키, 멘셰비키, 그리고 사회주의 혁명가당의 소위 통일 전선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 볼셰비키가 1917년 8월 「사회 혁명적 케렌스키」가 소환한 “전-의회”나 사회주의자에 의해 주도된 임시 정부(유용한 교훈이었던)에 참가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밝혀야만 한다.

 

 우리는 볼셰비키가 부르주아지와 통일 전선을 꾸렸던 시기에 대해 언급했다. 그러나 이것은 언제인가? 1905년 전이다. 그렇다. 볼셰비키는 사회주의자들과의 통일 전선을 옹호했다. 이것은 언제인가? 1917년 전이다. 1917년, 노동계급의 권력을 위해 싸울 때, 볼셰비키는 사회주의 혁명가당 좌익에서부터 모든 종류의 아나키스트에 이르기까지 모든 혁명적 집단과 함께 무기를 들고 소위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통일 전선을 형성한 멘셰비키와 사회주의 혁명가당,  그리고 부르주아지와 지주들과 싸웠다. 1917년,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있는, “사회 혁명의 시대” 최전선에 나섰다. 1917년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 전술은 뒤이은 나날들의 교훈을 설명해 준다. 부르주아지 분파들, 사회주의 혁명가당, 그리고 멘셰비키의의 격렬한 저항에 권력을 쟁취한 노동 계급은 직면하게 된 것이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계급을 단결시키는 것은 이 전술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아직 “개량주의적 환상을 제거”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이 전술은 제2인터내셔널이나 2와 1/2 인터내셔널과의 통일 전선이 아니라 그들과의 전쟁일 것이다. 이것이 세계 사회 혁명의 슬로건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쥔(노동자 민주주의) 국가에서의 통일 전선에 대한 문제

 

 이미 사회주의의 공격으로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 계급이 된 모든 나라들에서는 각 시기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물론 각각의 다른 나라들에서 혁명 과정의 모든 단계에 유효한 전략을 개발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같은 단계에 대한 정책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의 (그렇게 오래지 않은) 투쟁의 역사를 기억해 본다면, 적과의 싸움에 있어서 우리는 매우 다른 과정들을 겪어왔음을 알 수 있다.

 

 1906년과 그 후 몇 년동안은, “세 개의 기둥”이 있었다. 8시간 노동, 토지의 소유, 그리고 민주 공화국이 그것이다. 이러한 세 기둥은 언론과 집회, 파업,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를 포함하고 있었다.

 

 1917년 2월에는 어떠했는가? “독재 정치는 끝났다! 제헌 의회 만세!” 이것이 볼셰비키의 외침이었다.

 

 그러나 4-5월, 모든 것이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집회, 언론의 자유는 있었지만 토지의 소유는 그대로였고, 노동자들은 권력을 잡지 못했다. 그래서 볼셰비키는 다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을 걸었다.

 

 이 시기, 우리의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한 부르주아지의 시도들은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언론, 집회, 결사, 파업, 양심의 자유 만세! 토지를 몰수하라! 생산의 노동자 통제! 평화! 빵! 자유! 내전 만세!”

 

 그리고 10월의 승리. 노동 계급이 권력을 잡았다. 국가 억압의 오랜 작동원리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해방의 새로운 작동원리가 노동자, 군인 대표 평의회 속에 구조화되었다.

 

 이 시기에 와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언론, 결사의 자유는 주장되어야 했던 것일가? 군국주의자부터 멘셰비키, 사회주의 혁명가당이 내전을 지지하도록 허락해 줄 수 있지 않았을까? 무엇보다도, 지배계급으로서 내전을 옹호하는 동지들에게 언론의 자유를 줄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아니다!

 

 프롤레타리아 권력에 반대하는 어떤 내전에 대한 조직된 선전도 착취자, 억압자를 불러들일 수 있는 반혁명적 행위였다. 선전이 더욱 “사회주의”적일수록, 더욱 해악적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같은 프롤레타리아 가족의 이러한 선전들에 대한 가장 엄격하고 무자비한 제거”가 진행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착취자들의 저항을 억압할 수 있고, 스스로 조직하여 유일하게 권력을 쥐며, 모든 자본주의 정부들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국가를 건설한 프롤레타리아트가 나타났다. 이들에게 부여된 새로운 임무는 다음과 같았다. 국가 경제를 조직하고 가능한 한 많은 물질을 창조하는 것. 그리고 이 임무는 권력의 쟁취와 착취자들의 억압 만큼이나 엄청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권려의 쟁취와 착취자에 대한 억압은 그것 자체로 목적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로의 길은, 자본주의보다, 한 계급에 의한 다른 계급의 지배와 억압 하에서보다 더 나은 삶과 자유로의 길은 그것 자체로 목표였다.

 

 이전의 억압자들을 제거하기 위한 조직의 형태와 실천의 수단들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접근이 필요했다.

 우리가 자원이 부족하다는 관점에서, 제국주의 전쟁과 내전으로 인한 끔찍한 황폐를 경험하고 있다는 점에서 노동 계급과 동맹 그룹들에게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주의 사회의 매력적인 힘들을 보여주기 위해 물품을 창조하는 임무가 우리에게 부과되었다. 더 이상 부르주아지, 경찰과 다른 기생충이 없을 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가 주인이 되고 자유로우며, 모든 가치, 모든 상품, 모든 노동이 자본주의 아래에서의 가난한 자, 억압받는 자, 그리고 굴욕받던 자의 삶을 개선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이것을 보여주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것은 굶주림의 왕국이 아니며 오히려 전에 없던 풍요의 왕국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것이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남겨진 임무이며, 선행된 것들을 능가해야할 임무이다.

 

 그렇다. 첫 번째 두 임무, 권력을 쟁취하고 억압자들의 저항을 제거했다는 점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앞선 이들을 뛰어넘었고(이것은 지주와 부르주아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들의 강한 오를 설명한다) 그것은 위대한 일이지만 세 번째 목표보다는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오늘날, 모든 노동자들은 질문해야 한다. 왜 이 모든 것을 해야 하는가? 이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그토록 많은 피를 흘려야 했는가? 끝없는 고통을 겪어야 했는가? 이 문제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 우리 운명을 누가 결정하는가? 어떤 조직이 그것을 할 것인가?

 

 최고의 구세주는 없다.

 

 신도, 카이사르도, 호민관도 아니다.

 

 생산자, 우리 스스로를 구원하라!

 

 공통의 구권을 선포하라!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단결된 의지를 대표하는 조직이 필요하다. 우리는 부르주아지로부터 빼앗은 (국유화된), 그에 속한 거대한 계층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업이 속한 산업 조직 뿐만 아니라 노동자 대표의 평의회도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평의회는 무엇인가? 그들은 노동자 대표의 평의회, 다시 말해 “농장과 공장에서의 국가 권력의 핵심”을 조금이라도 닮았는가? 그들은 단결된 의지를 표현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평의회를 닮기는 했는가? 지금의 평의회는 그 의미와 산업 기반을 잃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압제자에 대한 저항과 그들의 파괴를 향한 목표에의 관심을 동원했던 오랜 내전은 연기되고 모든 다른 업무들을 제거하고 - 프롤레타리아트가 눈치채기도 전에 - 그 조직, 평의회를 변화시켰다. 공장의 노동자 대표의 평의회는 죽었다. 노동자 대표 평의회 만세!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도 보편적으로 이와 같지 않은가?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해 언론의 자유에 대해 격렬한 내전과 노예 감독자의 봉기 때와 유사한 태도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권력을 차지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스스로를 끔찍한 적으로부터 방어할 수 있게 되어, 이제 그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 스스로 엄청난 생산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조직하고 생산과 전체 나라를 지도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고 있지 않은가?

 

 부르주아지는 확실히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그 누가 권력을 방어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언론의 자유를, 자신의 피를 흘리지 않고 논할 것인가?

 

 우리에게 언론의 자유는 무엇인가? 신인가 미신인가?

 

 우리는 우리를 위한 우상을 만들지 않는다.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아니다.

 

 우리는 누구 앞에서도 복종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진정한 민주주의, 절대적인 자유, 물적 숭배나 우상,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따위는 없다.

 

 민주주의는 전에도 그러했고 미래에도 모든 나라의 반혁명, 부르주아지, 지주, 성직자, 사회주의 혁명가당, 그리고 멘셰비키 등을 의미하는 미신이 될 수 없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그들의 계급적 목표를 달성하는 유일한 수단일 뿐이다.

 

 1917년 이전, 모든 시민의 언론의 자유는 우리의 진보적인 요구였다. 1917년에는, 우리는 이러한 자유를 쟁취하여 프롤레타리아트와 그를 따르는 지식인들과 농민들의 조직화와 선전에 썼다. 부르주아지를 이길 수 있는 조직을 만든 후, 우리 프롤레타리아트는 전쟁으로 나아가 권력을 쟁취했다. 부르주아지가 언론의 자유를 우리를 반대하는 내전을 일으키는데 쓰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적 계급 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일부와 그를 따르는 이들에게도 러시아의 부르주아지의 저항이 완전히 무너질 때까지 언론의 자유를 주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다수 노동자의 지원으로, 우리는 부르주아지의 저항을 분쇄했다. 이제 우리는 우리 프롤레타리아에게 말하도록 허락할 수 있지 않은가?

 

 1917년 이전과 1917년의 언론의 자유, 그리고 1918년에서 20년까지의 것과 1921년에서 1922년까지의 문제에 대한 우리 당의 태도는 필요하다.

 

 그러나 소비에트 권력의 적들이 이 자유를 소비에트를 전복시키기 위해 사용할 수 있지 않은가? 아마도 이 자유는 독일, 프랑스, 영국 등에서 이들이 혁명 과정의 같은 단계에 있다면 유용하고 필수적일 것이다. 왜냐하면 노동계급은 있지만 농민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전쟁과 경제적 재앙으로부터 살아남은 소수의 프롤레타리아가 춥고 배고픈 채로 피흘리며 지쳐 있다. 여기서는 그 자유가 소비에트 권력을 전복시키는 길의 첨단으로 몰고 가기는 힘들지 않을까? 프롤레타리아트에 더해 러시아에는 부유함과는 거리가 먼 대다수의 농민들이 간신히 삶을 연명하고 있다. 이 농민들에게 언론의 자유가 반혁명 군대를 형성하는데 쓰이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없다. 우리가 노동자들을 농민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조금이라도 먹이기라도 하면 우리는 그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길은 없다. 이것이 마음이 올바른 공산주의자들의 추론이다.

 

 우리들은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어떻게 프롤레타리아트 없이 사회 경제의 조직화라는 엄청난 임무를 해결할 것인가? 당신은 언제나 예, 아멘이라고 이야기하는 신의 어린양인 프롤레타리아트와 함께 이 문제를 해결하길 원하는가? 그럴 필요가 있는가?

 

 “당신들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조용히 있어라. 저항하지도, 생각하지도 마라. 왜냐하면 우리가 노동자와 농민들 중에서 용기 있는 이들에게 권력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당신들이 믿을 수 없는 방식으로 쓰도록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다보면 당신은 어느날 갑자기 사회주의 천국에 있을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이야기하는 것은 개인, 영웅에 대한 믿음을 의미하지 계급에 대한 믿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회색 대중과 그들의 평범한 생각들(적어도 지도자들은 그렇게 생각한다)은 우리의 영웅들, 공산주의 공무원들이 공산주의 천국을 건설하는데 필요한 재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웅을 믿지 않으며 모든 프롤레타리아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호소한다. 노동자의 해방은 노동자 자신의 몫이다.

 

 그렇다. 우리 프롤레타리아트는 지치고, 배고프고, 춥고, 기진맥진해 있다. 그러나 우리 앞에 있는 문제는 어떤 계급도, 어떤 특수한 그룹도 우리를 대신해 풀어줄 수 없는 문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이를 해결해야 한다. 당신이 우리들에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임무를 지식인들, 공산주의 지식인들이 풀어줄 것이라고 보여줄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 프롤레타리아트의 운명을 당신에게 맡기는 데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보여줄 수 없다. 이런 이유로 프롤레타리아트가 지쳤고, 따라서 그 무엇을 알 필요도, 결정할 필요도 없다는 주장은 절대 옳지 않다.

 

 만약 1918년에서 20년까지 러시아의 상황이 달랐다면, 우리의 이 문제에 대한 태도 또한 달랐을 것이다.

 

 올바른 마음의 공산주의자 동지인 당신이 부르주아지의 얼굴을 후려갈기고 싶다면, 좋다. 그러나 문제는 손을 드는 것은 당신이고, 그들의 갈비뼈를 부수고 한 바가지의 피를 쏟아내도록 하는 것은 우리 프롤레타리아라는 것이다.

 

 러시아에서, 공산주의자 노동자 계급은 존재하지 않는다. 볼셰비키, 아나키스트, 사회주의 혁명가당, 그리고 다른 이들(이러한 당에는 속하지 않지만 그들의 기원을 여기서 찾을 수 있는 이들) 속에 노동 계급이 있을 뿐이다. 어떻게 그들을 공산주의에 연결시키는가? 부르주아 “카데츠”(헌정 민주주의자들), 교수들, 변호사들, 의사들과의 협상은 없다. 그들에게는 한 가지 처방이 있을 뿐이다. 몽둥이. 그러나 노동 계급은 전혀 다르다. 우리는 그들을 협박할 것이 아니라 영향을 주고 지적으로 이끌어야 한다. 폭력으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법과 행진의 진로를 명확히 함으로써.

 

 그렇다. 법은 법이지만 모두를 위한 법은 아니다. 마지막 당대회의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의 투쟁에 대한 논쟁에서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에는 180개의 부르주아지 출판사가 있었고, 지노비예프의 선언에 따라, 이들과 폭력적인 방법이 아니라 90% 열린 이데올로기적 설득력으로 싸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어떻게 우리를 “설득”할 수 있는가? 지노비예프는 우리 중 일부를 설득하려하는지 안다. 부르주아지가 누리는 자유의 10분의 1만이라도 가질 수 있다면!

 

 노동자 동지들이여, 당신을 무엇을 생각하는가? 전혀 나쁘지 않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므로 1906년에서 1917년까지 첫 번째 전술, 1917년 10월까지 두 번째, 1917년 10월에서 1920년 후반까지 세 번째, 그리고 1921년 초부터 네 번째... [...]

 

 

각주

1) 편집자 주 ; 코민테른. 제3인터내셔널의 러시아 이름이다.

 

2) 편집자 주 ; 사회적 혁명가당 좌익. 이들은 소비에트에 우호적이었고, 사회주의 혁명가당으로부터 1917년 9월, 분리되어 나왔다.

 

3) 1917년 10월 25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110명의 멘셰비키 대표들은 소수였고(673명 중), 10월 혁명의 비준의 순간, “볼셰비키 쿠데타”라며 이를 비난하며 자리를 떠났다.

 

4) 편집자 주 ; KAI(공산주의 노동자 인터내셔널)는 1922년에서 24년동안, KAPD의 제안에 의해 설립되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제4 인터내셔널과 혼돈하지 않길 바란다.

 

5) 편집자 주 ; 사회주의 당 국제 연합(the International Union of Socialist parties)의 별명은 제2와 1/2 인터내셔널이었다. “왜냐하면 제2 인터내셔널과 제3 인터내셔널 사이에 자신을 위치 지었기 때문이다.” 레닌의 글, ‘베를린에서의 제3 인터내셔널의 대표들’이 수록된 알프레드 로즈머(Alfred Rosmer)의 책, 「레닌의 모스크바」(Lenin’s Moscow)에서 이러한 재편성에 대한 비판을 보라(Pluto Press, 1971).

 

6) 편집자 주 ; 여기, 그리고 이 글의 다른 곳에서 [...]은 우리가 번역하지 못한 짧은 문구들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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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좌익 공산주의 : 「노동자 그룹」의 선언(강령) 1

러시아의 좌익 공산주의: 러시아 공산당의 「노동자 그룹」의 선언(강령)(1)

「국제평론」 2010년 8월 142호, 국제공산주의흐름(ICC)

 

 

 

 

 우리는 여기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노동자 그룹」의 선언(강령)을 펴낸다. 이들은 가장 유명한 지도자들 중 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종종 “미아스니코프(Miasnikov) 그룹”(미주1을 보라)으로 불린다. 이 그룹은 소위 좌익 공산주의1)의 일부로, 그들은 한 편으로 러시아의 다른 그룹들과 기반을 공유하며, 또 다른 한 편으로 세계, 특히 유럽의 다른 그룹들과 기반을 공유한다. 이 경향은 그들의 기원을 제3인터내셔널의 당과 러시아의 소비에트 권력의 기회주의적 타락에 대한 반응에서도 찾는다. 그들은 좌익 경향 속에서의 프롤레타리아적 대응을 대표하며, 과거 제2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의 발전에 직면했던 이들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

 

● 우리의 서론

 

 1918년 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2) 안에서부터 좌익 분파가 등장했는데, 이는 볼셰비키의 정치3)에 대한 의견차이의 표현이었다. 이것은 그 자체로 볼셰비키주의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의 증거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노동계급의 생생한 표현이었으며, 노동계급은 그 자신의 실천에 대해 급진적이고 지속적인 비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이기 때문이다. 볼셰비키는 혁명적 분파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냈다. 이에 저항하는 당 내부의 타락한 목소리가 제시될 때마다, 볼셰비키주의의 원래의 강령에 대한 배신을 비판하기 위해 당 내부에서 분파들이 생기거나 해체되었다. 스탈린주의가 당을 무덤에 파묻고 나서야 이러한 분파들의 끊임없는 발생은 멈췄다. 러시아 좌익 공산주의는 모두 볼셰비키였다. 볼셰비키주의의 본질을 부수는 이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칭송하며, 좌익 공산주의를 비난하고, 박해하고, 그리고 몰살시키려 할 때에도, 좌익 공산주의는 혁명의 영웅적 시기의 볼셰비키주의의 연속성을 방어했다.

 

 레닌이 그의 정치적 삶으로부터 물러난 것은 볼셰비키의 공개적 위기를 촉진한 한 요소였다. 한 편에서는 스탈린과 지노비예프, 카멘예프에 의한 “삼두 정치”의 형성 과정에서 관료적 분파가 당 내에서의 권력을 확고히 했다. 이 연합의 주요 유대는 트로츠키를 고립시키려는 의도였기 때문에 불안정했다. 트로츠키는 그 동안 상당한 우유부단함에도 불구하고 당 내에서 공공연히 반대파 입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볼셰비키 정권은 경제와 사회에서 새로운 어려움에 직면했다. 1923년 여름, 신경제정책(NEP)의 도입에 의한 “시장 경제”의 명백한 첫 번째 위기가 전체 경제의 균형을 위협했다. NEP가 1921년의 위기로 귀결된 전시 공산주의의 과도한 국가 집중을 되돌리기 위해 소개된 것이었던 것만큼, 이제는 경제의 자유화가 러시아를 자본주의 생산의 좀 더 고전적인 위기에 노출시켰음이 명백해졌다.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과 “보통”의 자본주의 국가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은 임금 삭감, 해고 정책과 같은 정부의 대응은 이미 궁핍해질 대로 궁핍해져 있던 노동계급의 상황을 악화시켰다. 1923년 8-9월, 동시적인 파업의 발발은 주요 산업 중심지에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현상 유지에 관심이 있었던 삼두체제는 NEP를 러시아에서 사회주의로 가는 왕도로 보기 시작했다. 이 관점은 특히 부하린에 의해 이론화되었는데, 부하린은 당의 극좌에서 우익으로 전향했으며, 스탈린 이전에 “사회주의” 시장 경제의 발전에 의한 “달팽이 걸음”으로 일국 사회주의가 가능하다는 이론을 내세웠다. 다른 한 편, 트로츠키는 국가의 경제적 위기에 대해 더 강화된 국가 집중과 계획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의 지도적인 그룹 안에서부터 나온 첫 번째 명확한 발언은 「46인의 강령」이었다. 이 강령은 Poliburo(정치국)에 1923년 10월 제출된 것이다. 「46」은 트로츠키와 가까웠던 피아타코브(Piatakov), 프레오브라진스키(Preobrazhinsky)와 같은 인물들과 사프라노브(Sapranov), 스밀노프(V Smirnov), 그리고 오신스키(Ossinski)와 같은 민주 집중 그룹의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문서에 트로츠키의 서명이 없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분파의 일부로 여겨지는 것을 두려워한 까닭(분파는 1921년 이후 금지되었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중앙 위원회에 보낸 공개적인 편지는 1923년 11월 프라우다에, 그리고 그의 팸플릿 「새 길」(New Course)에도 실렸고, 이것은 46과 비슷한 관심을 표현하고 있었으며 그를 반대파의 중요인물로 명백히 위치짓게 해 주었다. 

 

 「46인의 강령」은 최초에는 정권이 직면한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대응이었다. 이 강령은 지배적인 계층의 실용주의적 경향과 NEP를 불변의 원칙으로 끌어 올리려는 경향에 대한 반대로서 더욱 강력한 국가 계획을 위한 몽둥이 역할을 맡았다. 이것은 우리가 앞으로 보겠지만, 트로츠키를 둘러싼 좌익 반대파가 견지한 주제였지, 그 힘이 아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이 당의 내적 생명을 질식시키는 것에 대해 제기한 긴급한 경고였다.4)

 

 동시에, 강령은 “병적인” 반대파로 불리는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었다. 물론 강령은 그 단어를 당 내 위기의 표현으로 보았지만 말이다.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던 미아스니코프와 보그다노프의 「노동자의 진실」(Workers' Truth) 주위의 노동자 그룹의 경향에 대한 것이었다. 곧 트로츠키도 비슷한 관점을 취했다. 그들의 분석이 너무 극단적이라거나, 동시에 당의 병적인 상태의 표현이라고 바라보는 관점을 거부한 것이다. 트로츠키는 이러한 그룹들을 제거하기 위해 억압적인 방법으로 협력하는 것에 대해서도 내켜하지 않았다.

 

 사실 이런 그룹들이 “병적인” 현상들로 해체될 리는 없다. 「노동자의 진실」 그룹이 패배주의, 심지어 멘셰비즘으로 나아가는 특정 경향을 표현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독일 좌파와 네덜란드 좌파 내에서의 대부분의 경향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러시아에서의 국가 자본주의의 부흥에 대한 통찰은 10월 혁명을 다소 진보적인 부르주아 혁명으로 바라보며 그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경향에 의해 약화되었다.5)

 

 이것은 미아스니코프, 쿠즈네쵸프(Kuznetsov), 그리고 모이셰프(Moiseev)와 같은 오랜 볼셰비키들에 의해 지도되는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의 「노동자 그룹」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 이 그룹은 13차 볼셰비키 총회 직후 1923년 4-5월에 그 선언(강령)을 배포함으로써 처음으로 두드러지게 되었다. 이 문서를 검토하는 것은 그 그룹의 진지함, 그 정치적인 깊이와 전망을 확인하는 일이다.

 

 이 문서에 결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국제 혁명의 후퇴, 그 귀결로서 노동 계급에 의한 방어적인 투쟁의 필요를 깨닫지 못한 “공격의 이론(theory of the offensive)”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것은 1921년을 후퇴로 보지만 그로부터 많은 기회주의적인 결론들을 이끌어 낸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분석의 동전의 뒷면이다. 더욱이, 이 선언(강령)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시대에서 더 이상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없는 임금 상승을 위한 투쟁을 요구하는 잘못된 관점을 채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서의 강점은 그 약점을 압도한다.

 

 첫 째, 우선 단호한 국제주의다. 「콜론타이의 노동자 반대 그룹」과는 반대로 그 분석에 러시아 지역주의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강령의 전체 서론 부분은 국제적인 상황을 다루고 있으며 세계 혁명의 지연에 따른 러시아 혁명의 어려움을 언급하며, 러시아 혁명의 구원은 오직 세계 혁명의 부활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그 자신을 국제 프롤레타리아 세계 군대의 군인으로, 그의 계급 조직을 이 군대의 연대(regiment)로 보도록 배웠다. 10월 혁명의 운명에 대해 염려스런 질문을 제기할 때마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러시아 국경 너머의, 혁명의 조건이 무르익었지만 아직 혁명이 발발하지 않은 곳을 응시한다.”

 

 둘 째, 이 강령은 「통일 전선」과 「노동자 정부」의 슬로건이라는 기회주의적 정책에 대해 맹렬히 비판한다. 우리는 여기서도 깊은 국제주의를 확인할 수 있는데, 무엇보다 이것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정치에 대한 비판이기 때문이다. 그룹의 입장은 분파주의도 아니고 - 다른 공산주의 조직들(독일의 KPD와 KAPD과 같은) 사이의 혁명적 통일의 필요를 긍정한다 -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 사회민주주의 배신자들과의 연합을 요구하면서, 볼셰비키가 러시아 혁명에서 통일 전선 전술을 사용한 것처럼 그 방법을 계승했다는 겉치례의 논의에도 반대한다. “봉기한 프롤레타리아를 승리로 이끄는 전술은 통일 전선이 아니다. 오히려 이 부르주아 분파와 그들의 혼란을 야기하는 용어에 반대하는 유혈낭자하고 타협하지 않는 싸움만이 승리로 이끌 수 있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는 사회주의 혁명가들, 인민주의자들, 그리고 멘셰비키와의 연합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 반대하는 투쟁을 통해 이뤄진다. 통일 전선 전술을 폐기하고,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이 부르주아 분파 - 이 시기에는 제2인터내셔널의 정당들이다 - 가 결정적인 순간에 자본주의 체제를 방어하기 위해 무기를 들 것이라는 경고를 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셋 째, 소비에트가 직면한 위험에 대한 해석이 강점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자본주의 과두정치로 교체”하려는 위협이 그 위험으로 지적된다. 강령은 관료 엘리트의 증가와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공민권 박탈이라는 현실을 보여주며, 공장 위원회와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비에트를 복구시켜 경제와 국가의 지도력을 접수할 것을 요구한다.6) 「노동자 그룹」에게 있어서는 노동자의 민주주의의 부활은 관료주의의 부흥에 반격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고, 「노동자의 점검」(Workers' Inspection)을 통해 흔듦으로서 새로운 전진이 있다는 레닌의 생각을 관료주의적 수단을 통해 관료주의를 통제하려는 시도일 뿐이라는 점에서 명백히 거부한 것이었다.

 

 넷 째, 강령은 막중한 책임을 표현하고 있다. KAPD는 독일의 베를린에서 1924년 발표한 「강령」에 대해 비판적 주석을 덧붙이는데, 이는 러시아 혁명과 코민테른의 죽음에 대한 독일 좌파의 성급한 판단을 표현한다. 이에 반해 「노동자의 그룹」은 러시아에서의 반혁명이 명백히 승리했다거나 코민테른의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고 성급하게 주장하지 않는다. 1923년의 “커즌 위기(Curzon crisis)”는 영국이 러시아에 전쟁 선포를 한 것이었는데, 이 동안 「노동자의 그룹」의 구성원들은 전쟁에서 소비에트 공화국을 방어하는데 헌신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에게서는 10월 혁명과 볼셰비키의 경험으로부터 단절했다는 어떤 단서도 발견할 수 없다. 사실 그 자신의 역할에 대한 앞서 언급한 의견은 이탈리아 망명 좌파에 의해 상술된 좌익 분파의 견해와 매우 닮아있다. 이 강령은 독립적으로, 심지어 비밀스럽게 스스로를 조직해야 할 필요를 인식하고 있으나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의 노동자 그룹」이라는 그 이름과 그 강령의 내용은 모두 그 스스로를 볼셰비키 당의 강령과 규칙의 연속선상에 위치 짓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강령은 당 내의 모든 건강한 구성원들, 리더부 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진실」, 「노동자 반대파」, 그리고 「민주 집중파」와 같은 다른 반대 그룹에게서도 그룹을 재편성하고 당과 혁명의 재건을 위한 단호한 투쟁을 수행하자고 호소한다. 그리고 많은 측면에서 이것은 “46”이라는 당내 주도적인 분파가 그 자신에 의해 “우선적으로” 폐지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현실적이다.

 요약하자면, 「노동자 그룹」의 프로젝트 안에 어떠한 병적인 것은 없다. 그리고 이 「노동자 그룹」은 계급에 어떤 영향력도 갖지 못하는 분파 따위가 아니다. 이들은 모스크바에서의 그 구성원이 약 200명에 달하고, 관료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편을 일관적으로 지지했다. 따라서 1923년 여름과 가을에 걸친 비공인파업(wildcat strikes)에서도 적극적인 정치적 개입을 추구했다. 사실 당 기구가 이들을 최대로 억압하려 했던 데에는 당 내의 평당원들 사이에서 그룹의 정치적인 영향력이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미아스니코프가 예견했듯이, “그가 탈출하려는 동안” 자신을 암살하려는 시도까지도 있었다. 미아스니코프는 살아남았고, 투옥된 뒤 추방되었지만, 외국에서 20년동안 혁명 활동을 계속 했다. 러시아 안에서의 「그룹」은 대대적 체포에 의해 다소 절룩거렸고, 그것은 20년대 후반 감옥에 갇힌 안테 실리가(Ante Ciliga)가 다룬 소중한 글 「러시아의 수수께끼」(Russian Enigma)에서 반대파에 대해 설명한 것에서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으며 “극좌” 반대파 운동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최초의 억압은 진실로 불길한 사건이었다. 이것은 공산주의 그룹이 볼셰비키 정권 아래에서 직접적인 국가 폭력에 고통받았다는 첫 번째 공공연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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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공산당 노동자 그룹 선언(강령)

Manifesto of the Workers' Group of the Russian Communist Party

 

● 서문

 

 자기 계급의 고통과 고뇌, 그리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거대한 투쟁에 대해 무관심할 수 없는 모든 의식 있는 노동자는 우리의 혁명 발전의 모든 단계에서 적어도 한 번 이상 그 운명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한다. 각각의 노동자들은 자신의 운명이 세계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운명에 깊히 연관되어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상업의 발전은 문명화된 세계의 국가들 사이의 깊은 관계를 만든다”, “프롤레타리아의 운동은 국제적이어야 하며 이미 그렇게 되고 있다”는 옛 사회민주주의의 강령을 아직도 읽고 있다.

 러시아 노동자는 스스로를 국제 프롤레타리아 세계 군대의 병사로, 그의 계급 조직을 이 군대의 연대 조직으로 여기도록 배운다. 10월 혁명의 운명에 대한 염려스런 질문을 제기할 때마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러시아 국경 너머의, 혁명이 무르익었지만 아직 발발하지 않은 곳을 응시한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는 혁명이 현재 주어진 시점에서 일어나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불평하거나 또는 그의 머리를 숙여서는 안된다. 반대로, 프롤레타리아는 이러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혁명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러시아 노동자가 그 자신의 나라를 보았을 때, 그는 노동계급이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하였고, NEP(신경제정책)의 가장 힘든 시련을 떠안았지만, 그들 앞에 NEP의 잘 사육된 영웅들이 서 있음을 본다. 그들의 상황과 자신의 상황을 비교하며, 러시아 노동자는 동요하여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우리는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윽고 가장 쓰디쓴 생각에 이른다. 노동자는 제국주의 전쟁과 내전의 모든 무게를 어깨에 지고 왔다. 노동자는 러시아의 신문에서 이 투쟁에서 피를 흘린 영웅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그는 빵과 물로 궁핍하게 살아간다. 다른 한 편 타인들, 그리고 자신의 무기를 내려놓은 노동자들의 고통과 비참함으로 자신의 배를 채우는 이들은 사치와 호화스러움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대체 어딜 향해 가고 있으며, 어떻게 될 것인가? 정말로 “신경제정책”이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의 착취」로 변해버렸는가? 이러한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이 현장의 노동자에게 제기되었을 때, 그는 과거와 현재를 이을 연결을 찾아 어떻게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이해하기 위해 뒤를 돌아본다. 그러나 이러한 쓰디쓰고 교훈적 경험들 속에서, 노동자는 복잡하게 얽혀 풀리지 않는 역사적 사건들의 그물망 속의 자신의 존재를 발견한다.

 우리는 우리의 힘이 닿는 한 사실을 이해하는 것을 돕고 싶고, 가능하다면 그에게 승리를 향한 길을 보여주고 싶다. 우리는 신성하거나 오류가 없는 마법사나 예언자인 척 하려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우리는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에 대해 가장 날카로운 비판과 필요한 정정을 요구한다.

 

● 세계의 공산주의자 동지들에게!

 

 현재 선진국과 특히 그 중에서 자본주의가 발달한 나라의 생산력은 이 국가들의 프롤레타리아 운동이 굳은 살 가득한 손에 권력을 쥐기 위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한 공산주의 혁명이 되도록 하고 있다. 인류는 끊임없는 부르주아 민족 전쟁에 관계되어 야만에 삼켜지고 그 자신의 피 웅덩이에 빠져 죽거나,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여 권력을 획득하고,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 계급 사이, 인간 사이, 국가 사이의 전쟁을 완전히 끝장내어, 노동과 번영의, 평화의 깃발을 심는, 둘 중 하나의 미래를 맞이할 것이다.

 군비 경쟁,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 등의 항공 함대의 신속한 강화는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혹독한 전쟁 발발의 가능성을 높이고 있으며,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 전쟁으로 죽을 것이다. 마을, 공장, 기업, 그리고 모든 노동자들이 힘겨운 노동을 통해 창조한 모든 부가 파괴될 것이다.

 부르주아지를 전복시키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다. 각 나라에서 더 빨리 부르주아지를 물리칠수록 세계 프롤레타리아트는 더 빨리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실현시킬 것이다.

 착취와 억압, 그리고 전쟁을 끝내기 위해 프롤레타리아트는 임금을 높이거나 노동 시간을 줄이기 위한 투쟁을 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투쟁은 과거에는 필요했다. 그러나 오늘날 투쟁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부르주아지와 가지각색의 모든 유형의 억압자들은 모든 나라의 「사회주의자들」에 대해 지극히 만족해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를 그 본질적인 임무인 부르주아지와 그 착취 정권에 대항하는 투쟁으로부터 떨어뜨려놓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들」은 복종과 폭력에 대해 최소한의 저항조차 보여주지 않은 채 사소한 요구들만을 제안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들은 특정 순간, 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직면했을 때 부르주아지의 유일한 구원자가 된다. 노동자 대중은 그 억압자들이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면 의심스런 눈초리로 바라본다. 그러나 만약 같은 일이 그들의 이해에 맞는 것처럼, 사회주의 용어로 치장되어 제시된다면, 노동 계급은 그 언어에 현혹되어, 배신자들을 신뢰하고 그 힘을 쓸데없는 싸움에 낭비한다. 그러므로 부르주아지나 「사회주의자들」이나, 과거에도 그랬고 미래에도 별로 다른 놈들이 아니다.

 공산주의자 전위는 무엇보다도 먼저 투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계급 동지들의 머릿속에서 모든 지독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제거하고 프롤레타리아 의식을 획득하도록 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 모든 부르주아 찌꺼기들을 태워버리는 것은, 프롤레타리아의 모든 문제와 노동을 공유할 때 가능하다. 지금까지 부르주아지와 한 패거리인 이들을 따라왔던 프롤레타리아트가 투쟁하고, 파업하기 시작할 때, 외부에 서서 그들을 경멸적으로 비난해서는 안된다. 반대로, 그들과 함께 그들의 투쟁 속에 있으면서, 이 투쟁이 오직 부르주아지만을 살찌울 뿐이라고 끊임없이 설명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진실된 말을 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정직한 혁명의 신발을 더럽히는 의미가 될지라도 때로는 똥 무더기 위에 서야만 할 때(선거에 입후보한다든가)도 있는 것이다.

 확실히, 모든 것은 각 나라의 힘의 균형에 달려 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는 선거에 나가거나 파업에 참여할 것 없이, 바로 전투에 돌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나라의 사정이 똑같지는 않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공감을 얻기 위한 모든 방법을 그대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모든 근본적인 원칙을 양보하고 망각하거나 포기하는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거부해야한다. 왜냐하면 지금 당장의 성공에 대한 관심이 진짜 해법을 포기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며, 우리를 대중들을 지도할 수 없도록 하고, 그럼으로써 그들을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따라하면서 끝나게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신뢰를 얻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 의해 끌려 다니게 된다.

 우리는 움직이지 않은 채 남들을 기다려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혁명은 모든 나라에서 동시에 발발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우유부단함을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미성숙함의 탓으로 돌리거나 다음과 같이 말하며 변명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혁명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게다가 매우 강하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우리와 함께 행동하지 않은데도 우리가 우리의 부르주아지를 전복시킨다면, 그 후에는 어떻게 되겠는가?”

 독일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와 그에 봉사하는 이들을 모두 쫓아내 버렸다고 가정해 보자.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부르주아지와 사회적 배신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분노로부터 멀리 도망쳐 프랑스나 벨기에로 도망칠 것이고, 푸앵카레와 그 동료들에게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원한을 풀어달라고 간청할 것이다. 그들은 프랑스에게 「베르사유」 조약을 존중할 것을 약속하며, 그들에게 라인 지방과 루르 지방을 주겠다고 제안할 수도 있다. 그것은 그들이 러시아 부르주아지나 그 사회민주주의 동맹들이 했었고, 또 미래에 반복할 행동을 똑같이 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당연히 푸앵카레는 독일을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구원하고, 동시에 소비에트 러시아를 전 세계의 도둑들로부터 구원하는 그런 사업을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다. 푸앵카레와 그 동료들에게는 불행히도 군대를 구성한 노동자 농민들은 그 사업이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에 반대해 독일 부르주아지와 그 동맹자들을 돕는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자마자, 자신의 총구를 주인들, 다시 말해 푸앵카레를 향해 돌릴 것이다. 푸앵카레는 자기 자신과 프랑스 부르주아지를 지키기 위해 그의 군대를 부를 것이고, 불쌍한 독일 부르주아지와 그 사회주의 동맹들을 그들의 운명에 내버려 둘 것이다. 이것은 독일 프롤레타리아트가 베르사유 조약을 깬다고 해도 그럴 것이다. 푸앵카레는 「라인」과 「루르」로부터 추격을 받아, 인민의 자기 결정권 원칙에 입각하여 합병이나 배상금 없는 평화를 공포할 것이다. 푸앵카레에게 「쿠노」와 파시스트를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 평의회에 의해 운영되는 독일은 등이 휘도록 열심히 일할 것이다. 당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면, 당신을 같은 곳을 빙글빙글 돌지 말고 그것을 써야 한다.

 

 독일 혁명을 위협하는 다른 위험도 있다. 그것은 세력의 분산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세계 혁명의 이해에 따르면, 모든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는 단결해야만 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가 노동계급의 적에 대한 결정적인 단절과 무자비한 전투 없이 상상할 수 없다면, 그것은 자신의 나라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운동을 군사적으로 억압했던 제2 인터내셔널의 사회적 배신자들에게 이와 같은 승리는 공산주의 혁명의 목표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가진 모든 세력들에 참가하지 않고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것과 같다. 이것이 왜 우리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의 노동자 그룹」이 조직적으로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제3 인터내셔널에 속한 다른 정당들 사이에서 진실된 혁명적 공산주의 프롤레타리아들에게 마지막 결정적인 전투를 위해 힘을 모으라고 호소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제3 인터내셔널의 정당들 모두에게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인터내셔널에 가입되지 않았지만 공동의 목적을 추구하는 특정 정당들에게도 전투와 승리를 위해 통일 전선을 구성하자고 호소하기 위해, 「제4 공산주의 노동자 인터내셔널」1)의 정당들에 대한 우리의 소신을 밝혔다. 

 

 첫 번째 단계가 가까워졌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공산주의의 원칙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조직에 기반하여 부르주아지와 열심히 그들을 비호해 온 모든 종류의 추종자들과 그 아류들(사회주의 혁명가당, 멘셰비키 등)을 끌어내렸다. 그리고 독일 프롤레타리아보다 훨씬 약함에도 불구하고 세계 부르주아지들이 이끌어온 모든 공격들, 부르주아지와 지주들, 그리고 러시아의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고무된 모든 공격들을 물리쳤다.

 

 이제 서유럽의 노동자들이 자신의 힘을 모아 권력 투쟁을 시작할 때이다. 소비에트 러시아, 10월 혁명, 그리고 세계 혁명을 위협하는 것으로부터 눈을 감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현재 소련은 매우 힘든 시기이다. 엄청난 결핍과 그 무게에 직면해 있으며, 그것들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와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에게 치명적이 될 것이다. 이러한 결핍은 러시아 노동자 계급과 세계 노동자 운동의 약함으로부터 비롯된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는 한 쪽에서는 NEP의 관료주의적 퇴보 경향, 다른 한 쪽에서는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를 내외부에서 위협하는 경향에 대해 아직 맞서지 못하고 있다.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직접적으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10월 혁명의 승리가 모든 위협으로부터 방어되는 데에 관심이 있다. 러시아와 같은 나라가 세계 공산주의 혁명의 기지로서 존재하는 것이 이미 승리를 보증함을 의미하며, 결과적으로 국제 프롤레타리아 군대 - 모든 국가의 공산주의자들 - 의 전위는 소비에트 러시아와 공산주의 프롤레타리아의 군대(볼셰비키)가 겪은 결핍과 고통에 대해 여전히 침묵하는 대다수의 프롤레타리아를 대표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의견을 단호하게 표현해야 한다.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의 노동자 그룹」은 러시아의 상황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으며, 이 작업을 시작하려 한다.

 

 우리 공산주의 프롤레타리아는, 우리가 소비에트 러시아와 공산주의에 반대해서 이야기한 것들을 악용할 사회적 배신자들과 악당들이 있다는 이유로 우리의 잘못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공포는 전혀 근거가 없다. 우리의 적이 공개되어 있든, 숨겨져 있든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멍에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려 하는 우리들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들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재앙을 일으키는 주체로 언제나 그대로 존재한다. 이로부터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가? 우리는 그들이 있다는 이유로 우리의 문제와 잘못에 대해 침묵하고 논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뿌리 뽑을 조치도 취하지 않아야만 하는가? 우리가 스스로 사회적 배신자들이 테러를 저지르도록 버려둔다면, 우리가 계속 침묵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대로 간다면 우리가 기억하는 10월 혁명이 더 이상 승리가 아니게 될 것이다. 이는 사회적 배신자들에게는 매우 유익한 일이 될 것이며, 국제적 프롤레타리아 공산주의 운동에게는 죽음의 일격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의 노동자 그룹」이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노동계급의 이해에 따라 시작하려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사회적 배신자들의 의견에 직면하여 공포에 떠는 일이 없이, 인터내셔널과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총체성에 대해 결정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국제적 운동과 러시아 운동의 약점으로 그 실패가 설명될 수 있음을 보았다. 다른 나라들의 프롤레타리아트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도움은 그들 나라에서의 혁명이나 적어도 하나 둘의 선진국에서의 혁명이다.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은 러시아 노동자 계급이 10월 혁명의 승리로부터 차지한 위치를, 다른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가 봉기하여 그들의 적을 패배시키는 시점까지 보존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을 것이다.

 

 러시아 노동 계급은 제국주의 전쟁, 내전과 기근으로 약해져 강력하지 않다. 그러나 지금 위협이 되는 위험들에 대해서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기반으로 적확하게 투쟁을 준비할 수 있다. 이 경험은 그들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며, 다른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도움으로 그것을 계승할 것이다.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의 노동자 그룹」은 러시아 전역에서 경고하고 호소해 왔다. 러시아 공산당에서 프롤레타리아의 편에서 생각하는 모든 이들은 함께 모여 투쟁을 시작하고 있다. 우리는 10월 혁명의 승리가 직면할 운명에 대해 분명 의식적인 프롤레타리아에 앞서 깨달을 것이다. 투쟁은 어렵다. 우리의 활동은 지하활동에 제한되어 있으며, 우리는 비공개적으로 움직인다. 우리의 「선언」은 러시아에서 출간될 수 없다. 우리는 비합법적으로 선언을 복사하고 유포한다. 우리 그룹에 속한다고 의심이 되는 동지들은 당과 조합에서 제명되며, 체포되고 추방되며 해체된다.

 

 러시아 공산당 12차 당대회에서, 지노비예프 동지는 당과 소비에트 관료의 승인 아래 노동계급으로부터의 비판을 질식시키는 새로운 규칙을 공표했다. “러시아 공산당의 리더십에 대한 모든 비판은, 좌우를 막론하고 멘셰비키주의다.”(12차 대회에서의 그의 연설을 참고하라) 그것은 만약 리더십이 공산주의 노동자나 프롤레타리아에게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누군가 비판하기 시작하면, 그는 당과 노동조합에서 배제되어 GPU(체카)에게 넘겨질 것임을 의미했다. 러시아 공산당의 중앙 위원회는 그 스스로를 로마의 교황처럼 절대 오류가 있을 수 없는 존재로 여기기 때문에 어떤 비판도 원하지 않는다. 우리의 걱정들, 러시아 노동자들이 10월 혁명의 승리가 직면할 운명에 대해 걱정하는 모든 것들은 반혁명으로 선언된다. 우리, 「러시아 공산당의 노동자 그룹」은 모든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앞에서 소련이 국제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가장 위대한 성과 중 하나라고 선언한다. 우리가 소비에트 권력이, 프롤레타리아 권력이, 그리고 러시아 노동계급의 10월의 승리가 자본주의 과두제로 변형되고 있다는 위협에 대해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모든 힘을 다해 소비에트의 권력을 되돌리려는 시도들을 막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들이 소비에트 권력이라는 이름아래 우리를 체포하고 감옥에 가두더라도 그렇게 할 것이다. 러시아 공산당의 지도 그룹이 우리의 10월 혁명에 대한 고려가 불법이고 반혁명적이라고 선언한다면, 모든 국가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들과 제3 인터내셔널에 충실한 동지들은 동지들이 알고 있는 우리의 「선언」에 기초하여 스스로 결정적인 의견을 표현할 수 있다. 동지들, 10월 혁명을 위협하는 이 모든 위험들에 대해 걱정하는 모든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가 동지를 보고 있다. 동지가 회의에서 우리의 강령에 대해 논쟁하길 바라고 동지의 대표가 제3 인터내셔널의 5차 당대회에서 당내 분파에 대해, 러시아 공산당의 정책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동지들, 우리의 선언을 토론하고 혁명을 만들어라. 이해하라 동지들, 이것은 당신이 완전하고 늘 고통받는 러시아의 노동자 계급이 10월 혁명의 성과를 보존하는 것을 돕는 것임을. 우리의 10월 혁명은 세계 혁명의 일부이다.

 

노동 동지들에게!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10월 혁명의 승리 만세!

 

세계 혁명 만세!

 

***

미주1 : 선언의 앞 두 파트는 “프롤레타리아 계급 투쟁의 성격”, “계급 투쟁의 변증법”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여기 공포하지 않기로 했다. 물론 우리의 책에는 포함되어 있다. 그것들은 마르크스가 1848년 공산주의 선언에서 명시적으로 선언했던 것처럼 역사의 관점과, 계급투쟁의 역할을 상기시킨다. 우리에게는 그 당시 「노동자 그룹」이 세계 프롤레타리아가 직면한 역사적 시기에 대해 한 분석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으로 곧바로 가는 것이 더 좋을 것처럼 보인다.

 

러시아 혁명에서의 사울과 바울

 

 의식 있는 노동자들은 혁명을 통해 어떻게 다른 계급들이 “기적적으로” 사울에서 바울로 변화하는지 보았다. 그것은 평화의 선동가에서 내전의 선동가로, 그 역으로의 변화이기도 하다. 최근 15-20년의 사건들을 기억하는 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변화를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다.

 

 부르주아지, 지주, 성직자, 사회주의 혁명가당과 멘셰비키를 보라. 성직자들과 지주들 사이에서 누가 1917년 이전의 내전을 지지했는가? 아무도 아니다. 보편적 평화와 은총(state of grace)을 지지하는 모든 이들은 인민들이 내전을 지지 선전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쳐넣고 쏴 죽이고 목매달아 죽였다. 10월 이후에는? 누가 그만한 열정으로 내전을 지지 옹호 했는가? 똑같은 기독교의 독실한 아이들이었다. 성직자, 지주, 그리고 공무원들.

 

 「헌정 민주주의자들」(Constitutional Democrats)로 대표되는 부르주아지는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내전의 전사들이 아니었던가? 비보르크의 폭동을 기억하라. 임시 정부의 최고 행정관이었던 밀류코프는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우리은 우리 손에 붉은 깃발을 쥐었다. 이 붉은 깃발은 오직 우리의 시체를 밟고서만이 빼앗아 갈 수 있을 것이다.” 진실이다. 그는 두마 앞에서는 매우 다른 이야기를 했다. “이 붉은 깃발은 우리의 눈에 거슬린다.” 그러나 우리는 1905년 이전에는 부르주아지가 내전에 호의적이었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그리고 1917년, “평화, 평화, 사회의 모든 계급의 연합 : 이것이 국가의 구원이다!”고 악의를 갖고 공표했던 임시정부 깃발 아래에서 이야기했던 것은 바로 부르주아지, 카데츠였다. 그러나 10월 이후에는 어떠했는가? 오늘날 누가 광신도와 같이 계속해서 부르짖는가?: “소비에트를 무너뜨려라. 볼셰비키, 전쟁, 내전을 그만둬라! 이것이 국가의 구원이다!” 이들이 지금 갈채를 받고 있는 똑같은 선량한 주인들과 “혁명적” 코훌쩍이들이다.

 

 사회주의 혁명가당은 어떤가? 그들은 한때 플레베(Plehve),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Grand Duke Serge Alexandrovich), 보그다노비치(Bogdanovich)와 구 정권의 기둥들을 암살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러한 폭력적 혁명가들은 1917년 임시 정부 아래에서 연합과 시민 평화를 요구하지 않았던가? 그렇다. 그들은 요구했다! 10월 이후에는? 그들은 여전히 평화를 사랑했나? 그렇지 않다! 그들은 다시 폭력의 인간으로, 그러나 이번에는 반동적으로, 레닌에 반대하여 그러했다. 그들은 이제 내전을 외친다.

 

 멘셰비키들은? 그들은 1908년 이전에는 무장 봉기의 옹호자들이었으며, 1908년에서 1917년까지는 8시간 노동, 토지의 징발, 민주 공화국의 옹호자로서 독재에 저항하여 단체를 조직할 권리와 합법적인 투쟁을 쟁취하기 위한 일종의 “계급 연합”에 함께 했었다. 그들은 독재정권의 전복에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전쟁 동안에는 그렇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애국자들이었고, 심지어 “국제주의자”이기까지 했다. 1917년 10월 이전, 그들은 시민 평화를 지지했다. 그러나 10월 이후, 군국주의자들, 카데츠와 사회주의 혁명가당처럼 내전을 옹호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우리 러시아에만 국한된 현상인가? 아니다. 중세 봉건주의를 전복하기 전 영국, 프랑스, 독일 부르주아지 등은 내전을 옹호하고 이끌었다. 봉건주의가 먼지가 되고, 부르주아지가 권력을 잡은 후, 그들은 시민 평화의 옹호자가 되었으며, 특히 전력을 다해서 싸웠던, 새롭게 권력을 쟁취하고자 등장한 노동계급에 대해서 그러했다.

 

 이제 어디 부르주아지가 내전에 호의적인지 보라. 어디에도 없다! 모든 곳에서, 소비에트 러시아를 제외하고서는 평화와 사랑을 선전한다. 이러한 태도가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취하는 순간 어떻게 될 것인가? 그들은 그대로 시민 평화의 옹호자로 남아 있을 것인가? 그들은 평화와 단합을 요구할 것인가? 아니다. 그들은 곧 내전을 옹호하는 폭력적인 선동가가 될 것이며, 그 전쟁을 끝까지 수행할 것이다.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여, 우리들은 여전히 이 법칙의 예외인가?

 

 전혀 아니다.

 

 또 다시 1917년으로 돌아간다면, 우리의 노동자 평의회의 대표자들은 내전의 핵심이 되었을까? 그랬다. 그들은 나아가 권력을 잡았다. 그들은 부르주아지, 지주, 성직자와 그 외 평의회에 적대적인 이들에게 함께 봉기하기를 원했을까? 아니다. 그들은 부르주아지와 그 크고 작은 모든 동맹들이 저항없이 복종하길 바랬을까? 그렇다. 그들은 그것을 원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그러므로 권력을 쥐기 전에 내전을 옹호했고, 그 승리 이후에 내전이 아니라 시민 평화를 옹호했다.

 

 이 모든 변혁에서 역사적인 관성이 충분히 있었음은 진실이다. 군국주의자들에서 멘셰비키들, 사회주의 혁명가당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들이 소비에트 권력에 대항해 내전을 지휘하던 시기에조차 그것은 “시민 평화”의 슬로건 아래 있었다. 사실 프롤레타리아트는 평화를 원했다. 그러나 다시 전쟁을 외칠 수 밖에 없었다. 1921년, 러시아 공산당의 중앙 위원회의 순환 중 하나에서도 이러한 불가해한 상황을 엿볼 수 있었다. 내전에 대한 슬로건은 심지어 1921년에도 강한 혁명적 정신의 지표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관점을 흔들지 못하는 단지 역사적인 경우임을 알 수 있다.

 

 만약 최근의 러시아에서, 10월 혁명에 의해 쟁취한 프롤레타리아 권력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시민 평화를 옹호한다면, 모든 솔직한 프롤레타리아들은 유혈낭자하고, 폭력적인, 세계 부르주아에 저항하는 시민 전쟁의 슬로건 아래 굳게 단결해야만 할 것이다.

 

 노동 계급은 실제로 부르주아 국가에서의 착취 계층이 요구하는 시민 - 보편적 평화, 은총이 얼마나 병적인지 보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약 내일 이 부르주아 국가의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잡게 되면, 지주에서부터 제2, 2 1/2 인터내셔널에 이르기까지 모든 오늘날의 평화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트에 저항하는 내전을 일으킬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전력을 다해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모든 국가에서의 유혈낭자하고 무자비한 내전을 요구해야 한다. 우리는 바람을 일으킬 것이다. 태풍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가 승리하여 권력을 잡은 모든 곳에는 더욱 더 많은 힘을 가지고 시민적, 보편적 평화, 은총을 선전할 것이다. 

 

 모든 나라의 지주들, 멘셰비키들, 사회주의 혁명가당은 자본주의 억압이 지배하는 모든 곳에서 시민 평화를 옹호하고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차지한 모든 곳에서 더욱 잔인하고 유혈낭자한 내전을 옹호할 것이다.

 

오늘날의 주요한 책무

 

 모든 나라들에서의 생산력의 발전은 자본주의가 스스로 그 생산력을 파괴하는 요소가 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세계대전과 뒤따른 모든 사건들, 베르사유 조약, 배상금 문제, 제노바, 헤이그, 로잔, 파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프랑스에 의한 루르 점령, 대규모 실업에 더해 끝나지 않는 파업의 물결은 자본주의 착취의 마지막 시간이 도달했고, 징발자였던 자들이 이제 몰수당해야 할 때가 왔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인 임무는 자본주의가 던져놓은 야만으로부터 인류를 구하는 것이다. 이 임무는 임금 상승, 8시간 노동, 부분적인 양보 등 자본주의가 선사해 줄 수 있는 것들로는 성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스스로를 결정적인 권력 투쟁을 목표로 하도록 조직화해야 한다.

 

 그러는 동안,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물질적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을 옹호하는 선전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생활 수준에 진정한 개선이 있을 것이라는 환상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는 악의적인 선전이다.

 

 선진 노동자들은 파업에 참여해야 하고, 상황이 허락하는 한 지도해야 한다. 그들은 이 길을 따라가면 생활 조건을 개선할 수 있다고 믿는 프롤레타리아 대중에게 실질적인 요구를 제안해야 한다. 이러한 태도는 프롤레타리아 사이에서 그들의 영향력을 높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확고히 이야기해야 한다. 이것은 구원을 위한 길, 노동계급의 삶의 조건을 증진시킬 수 있는 길이 아님을. 이 모든 자본에 대한 분쟁을 지지하는 결정적인 투쟁에 대한 관점으로 프롤레타리아를 조직할 수 있다면, 이것이 거부될 리가 없다. 권력을 차지하지 못한다면 생존의 조건을 변화시키는 것이 불가능한 것임을 설명하는 것보다 이 운동의 우두머리가 되어 용감하고 단정적이며, 실질적이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이해할만한 요구를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모든 파업, 모든 싸움이 정치적인 권력을 차지하고, 착취자들을 몰수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함을 증명하는 교훈이 될 것이다.

 

 여기 모든 나라에서 온 공산주의자들은 의회에 대해 같은 태도를 취해야 한다. 국회의원은 입법 과정을 통해 긍정적인 일을 해보려 할 것이 아니라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이러한 의회가 파괴될 수 있도록 선전하고 작업한다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

 

 이와 비슷하게, 임금, 시간에 대한 파업의 필요가 있는 곳에, 우리는 반드시 참여해야 하지만 노동자들의 경제적 조건이 진정으로 개선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가서는 안된다. 대신 우리는 이러한 환상을 깨부셔야 하고 각 투쟁을 마지막 투쟁을 위해 프롤레타리아트의 군대를 조직하기 위한 의식화의 준비로써 이용해야 한다. 한때는 8시간 노동 요구가 혁명적이었지만, 사회주의 혁명이 현안이 된 모든 나라들에서 그 요구는 더 이상 혁명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제 통일 전선에 대한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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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국제 평론에 게재될 선언의 나머지 부분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 사회주의 통일 전선

○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잡은 국가(노동자 민주주의)에서의 통일 전선에 대한 의문

○ 민족 문제

○ 신 경제 정책(NEP)

○ 신경제정책과 농촌

○ 신경제정책과 정치

○ 신경제정책과 산업 관리

 

 미주

1. 가브리엘 미아스니코프(Gabriel Miasnikov)는 우랄 출신의 노동자로 1921년 볼셰비키 당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 때는 결정적인 10차 당대회 직후로, 그는 “군국주의자들부터 아나키스트들까지 모두 포함하는 언론의 자유”(Carr, 「The Interregnum」에서 인용)를 요구했다. 레닌이 이러한 주장을 단념시키기 위해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굽히지 않았고, 결국 1922년 초기 당으로부터 축출되었다. 1923년 3월, 그는 다른 동지들과 함께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의 노동자 그룹」 창설에 동참했으며, 그들은 RCP 12차 대회에 배포된 이 「선언」을 출간했다. 그룹은 당 내에서, 비당원 노동자들 사이에서 비합법 활동을 시작했고, 1923년 여름 파업의 물결 속에서 대중 파업을 요구하고 본질적으로 방어적인 계급 운동을 정치화하려고 시도하면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파업에서의 그들의 활동은 GPU가 그들을 실질적인 위협으로 인식하도록 하는데 충분했다. 주도적인 동지들의 체포가 잇따랐고, 이는 그룹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축소된 규모로 1930년 초반까지 그들의 지하 활동을 수행했다. 그 이후 미아스니코프의 인생사는 다음과 같다. ; 1923년에서 1927년까지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감옥이나 지하 활동을 위한 망명 생활로 보냈다. 1927년 러시아에서 탈출한 그는 페르시아, 터키로 도망 다녔고, 그곳에서 역시 수감생활을 하다가 결국 1930년 프랑스에 정착했다. 이 시기동안 그는 여전히 러시아에서의 그의 그룹을 조직하려 했다. 전쟁 후, 그는 스탈린에게 그가 소련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원했다. 그가 그의 나라로 돌아간 날 이후 그에 대한 소식은 없다. 왜냐하면 군사 법정에 의한 비밀 심판으로 인해 그는 1945년 11월 16일, 모스크바의 감옥에서 총살당했기 때문이다.

 

(주)

1) 우리의 글 “좌익 공산주의와 맑스주의의 연속성”을 보라.

   http://en.internationalism.org/the-communist-left

2) ICC는 이미 영어와 러시아어로 「러시아 공산주의 좌파」 소책자를 발간했다. 이 책은 러시아에서의 좌익 공산주의의 상이한 표현에 대한 연구에 기여한다. 현재 프랑스어 판이 준비중이다. 영어 판은 「노동자 그룹」의 강령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 당시 새로운 완벽한 강령이 러시아에서 발견되었다. 오늘 우리가 펴내는 판은 원래 프랑스 어로 쓰여진 가장 최신의 것이며 미래의 프랑스어 개정판에 포함될 것이다.

3) 「국제평론」 8, 9호에 실린 우리의 글 “러시아의 좌익 공산주의”와 「러시아 공산주의 좌파」를 읽을 것.

4) “중앙 위원회의 이런저런 결정에 대해 만족하지 못한 당의 구성원들은, 그들의 마음속에 이런저런 의심을 품었고, 개인적으로 이런저런 오류, 불규칙성, 무질서들을 기록해 두었지만, 그것을 당의 회의에서 밖으로 꺼내어 말하기를 두려워했으며, 그것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현재 지방 위원회와 RCP의 중앙 위원회의 구성원을 추천하고 선택하는 것은 당도 아니고, 그 대중도 아니다. 반대로, 당의 서기 위계는 전에 없을 정도로 엄청난 정도로 집행 위원회(executive assemblies)가 될 회의와 총회의 구성원들을 전에 없을 정도로 뽑았다... 새로 만들어진 자리는 정권이 당 내의 분파의 독재라는 것으로 설명이 된다. 분파적 정권은 폐지되어야 하며, 우선 첫째로 그것을 만든 이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 그것은 동지적인 통일과 당내 민주주의에 의해 대체되어야 한다.”

5) 「국제평론」 8, 9호의 “러시아의 좌익 공산주의” 참조.

 

6) 그러나 선언(강령)은 또한 노동조합이 경제를 관리하는 중앙집중적 기관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방어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노동자 반대파」의 옛날 입장은 1921년 미아스니코프가 비판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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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행기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위하여] 프롤레타리아 행정의 몇 가지 요소(2)

[이행기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위하여]

프롤레타리아 행정의 몇 가지 요소(2)

미첼, 「빌랑」 38호. 1936년 12월 - 1937년 1월 「국제평론」134호, 2008. 가을. 25-28쪽

 

 

 

 우리 견해에 따르면 당과 대중과의 관계를 조건지우는 경제 행정의 몇 가지 규범과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강화하는 기초를 검토하는 문제가 남아있다.

 

 어떠한 생산체제도 확대 재생산 기초, 즉, 부의 축적 위에서만 발전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 유형은 외부적 형식과  표명으로보다는 그 사회적 내용, 생산의 동기, 즉, 계급관계로 표현된다. 역사의 진화 속에서 내부적이고 외부적 두 가지 과정은 항상적 모순 속에 있다. 자본주의 발전은 생산력의 진보가 그 반대인 프롤레타리아트의 물질적 조건의 퇴행을 발생시키고 있음을 보여주었는데, 그것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사이, 그리고 생산과 소비 사이의 모순으로 표현되는 현상이다. 우리는 이미 자본주의 체제가 본질적으로 진보적이지 않고, 필연적으로 축적과 경쟁으로 박차가 가해진다는 것을 보았다. 맑스는 이러한 대조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생산력의 발전은 노동계급의 잉여노동을 증가시킨다는 점에서, 그러나 물질생산에 필요한 시간을 감소시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일한 중요성을 지닌다.”(자본, 10장)

 

 잉여노동이 불가피하다는, 모든 사회 유형에서 검증된 관찰로부터 시작하여, 문제는 잉여노동의 소유와 파괴 양식, 총잉여노동과 그 기간, 이 총잉여노동과 총노동 사이의 관계, 그리고 그 축적의 리듬에 집중되어있다. 그리고 즉각적으로 우리는 맑스의 다른 언급을 제시할 수 있다. “사회의 진정한 부와 재생산과정의 지속적 확대의 가능성은 잉여노동의 기간에 담겨 있지 않고 생산성과 이 생산성이 작동하도록 하는 유리한 조건에 달려있다”(자본, 14장). 그리고 맑스는 “자유의 영역”의 출현을 위한 기본조건은 노동일의 감소라고 덧붙인다.

 

 이러한 고려사항들은 프롤레타리아 경제의 진화에서 각인되어야 하는 경향을 이해하게 한다. 이는 또한 생산력의 성장을 “사회주의”의 절대적 증거로 보는 개념을 거부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개념은 중도주의 뿐만 아니라 트로츠키도 방어한 개념이다. “자유주의는 소비에트 체제의 엄청난 진보, 즉 사회주의의 헤아릴 수 없는 이점의 구체적 증거들을 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사회주의에 의해 쫓겨난 계급들의 경제학자들은 세계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산업 발전의 리듬에 대해 완전한 침묵으로 넘기고 있다”(계급투쟁, 1930년, 6월). (Lutte de classes, June 1930)

 

 우리는 이 장의 서두에서 “리듬”의 문제가 트로츠키와 그의 반대파의 선입견의 중심에 있음을 지적했다. 이는 자본주의 아래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빈곤에 덧붙여 그 리듬을 가속화하지 않고 생산의 “동기”를 수정하는 것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사명에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국제적 규모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전제할 때, “리듬”의 요인에 집착할 이유가 없다. 현재 소련에서 일어나는 생산의 리듬은 가장 선진된 자본주의 기술이 세계 사회주의 경제에 가져올 공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소비를 향한 생산의 재지향

 

 최초의 경제 과업으로서 소비의 필요에 맞추기 위한 생산 동기의 변화 필요성을 우리가 제기할 때 우리는 분명히 혁명의 즉각적 결과가 아닌 과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우리가 보인 바와 같이 이행기의 경제는 어떠한 경제적 자동주의도 발생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부르주아 권리”의 생존은 착취의 사회적 관계의 존재를 의미하고 노동력은 아직도 어느정도 상품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조합 조직을 통한 당면한 요구를 위한 노동자 투쟁으로 고무된 당 정치는 구체적으로 자본주의가 극단으로 발전시킨 노동과 노동력 사이의 모순을 구체적으로 극복해야 한다. 다른 말로 자본축적을 위한 노동력의 자본주의적 사용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경제적 강화를 촉진시키는, 순수하게 사회적 목적을 위한 노동력의 “프롤레타리아적” 사용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생산의 조직에서 프롤레타리아 국가는 문제가 되는 경제를 지배하는 구체적 물질적 조건에 대해, 그들의 요구에 상응하는 생산의 세부 조직을 발전시키면서 무엇보다 대중의 요구에 의해 고무되어야 한다.

 

 정련화된 경제 강령이 세계 사회주의 경제를 건설하는 틀 안에 있고 국제 계급투쟁과 연결되어 있다면, 프롤레타리아 국가는 소비를 발전시키는 과업에 한정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그 강령이 직간접으로 “민족 사회주의”의 형식을 목적으로 하는 “자동적” 성격을 취한다면, 잉여노동의 증가하는 부분은 미래에 국제 분업에서 정당화될 수 없는 기업의 건설에 흡수될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기업들은 불가피하게 건설되는 “사회주의 사회”를 방어하는 수단을 생산하는데 복무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소련에서 벌어졌음을 살펴볼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물질적 상황의 개선은 첫째로 노동 생산성에 달려 있고, 이는 또한 생산력의 기술적 수준과 축적에 달려 있음은 확실하다. 둘째로, 그것은 노동 과정 내의 조직과 규율에 상응하는 노동의 산출물과 연결되어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 존재하는 기본 요소는 축적의 구체적 결과가 축적 “그 자체”를 위해 인간의 목적지로부터 이탈했다는 특성에 있다. 노동 생산성은 소비의 대상으로 전환되지 않고 자본으로 전환된다.

 

 문제가 소비 확대를 목표로 한 정책을 주창하며 해결될 수 없음을 숨기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그러나 당신은 그것을 인정함으로써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노동자의 한 세대, 몇 세대를 희생시키면서 공업화와 성장의 가속화를 밀고 나가는 것에 반대하는 주요 방향타이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희생을 중도주의1)는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역사적 이해에 부응하는 것처럼 보이는 목적(러시아의 실재는 전혀 그렇지 않음을 보여주었지만)이라도 “희생된” 프롤레타리아트는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진정한 힘을 구성할 수 없다. 민족국가적 목표의 최면 아래에서 세계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멀어져 갈 뿐이다.

 

 우리가 발전시킨 국제주의적 고려를 기반으로 논의를 계속하자면 우리는 역사적 관점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경제적 임무가 근본적임을 (우리가 추상으로 빠지길 원하지 않는 한) 증명해야 한다. 계급투쟁의 지구적 영역에 대한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역할을 올바르게 보여준 「빌랑」의 동지들은 그 문제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주장함으로써 유별나게 제한하고 있다. “경제적이고 군사적인 영역2)은 착취계급에게는 본질적이지만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활동에서는 보조적 문제, 세부적 문제일 뿐이다”(「빌랑」, 612쪽). 우리는 다시 강조한다. 강령이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세계 정치에 의해 결정되고 제한되지만 이것이 확립되고 나서야 프롤레타리아트는 소비라는 가공할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는데 지나친 조심과 에너지를 쏟을 수 없다. 그 소비의 문제는 아직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에서 단순한 요인”으로서 그 역할을 조건화시킨다.

 

 우리 견해로는 「빌랑」의 동지들이 다음과 같이 선언함으로써 “사회주의 건설”을 향한 관리의 형식과 이행기 경제의 사회주의적 관리 사이의 구별을 하지 못하는 또다른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3) “주어진 국가와 국제적 계급투쟁에서 경제의 사회주의적 관리의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과는 다르게, 우리는 그러한 사회주의적 관리가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으로 사회주의적이지는 않지만 노동자의 삶의 조건을 향상시키고 자본주의 생산과정을 구체적으로 전복시키려는 목적을 가진 정책이다. 이행기에는 계급은 존재하지만 필요에 기반한 생산을 향한 새로운 경제적 경로를 발전시키는 것이 완벽하게 가능하다.

 

 그러나 생산의 동기유발이 올바른 정책을 채택하는 것에만 달려있지 않다는 사실은 남는다. 그러나 무엇보다 경제에 대한 압력을 행사하고 그 요구에 대한 생산기구를 적응시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직에 동기유발이 달려있는 것은 사실이다. 나아가 생활조건의 개선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노동과정의 더 나은 조직을 통한, 총 사회적 노동, 생산량의 증가의 결과이든, 또는 강력한 생산수단의 사용의 덕으로 노동 생산성의 증가를 통한 결과이든 간에, 생산능력의 발전의 결과인 것이다.

 

사회노동에 관하여, 노동자수가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노동력 사용의 길이강도에 의해 주어진다고 우리는 말했다. 이 두 요인은 더 큰 생산성의 결과로서의 노동력의 저하된 가치에 연관되는데, 그것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해 부과된 착취율을 결정한다.

 

 자본주의 정책과 달리, 생산력을 증진시키는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정책은, 자본주의 형식에서 절대적 잉여가치를 구성하는 사회적 노동의 강도의 길이로부터 나오는 잉여노동에 기반할 수 없다. 반대로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존재와 일치하는 노동의 리듬과 기간과 연결되어야 한다. 이 영역에서 사용가능한 총 노동을 증가시킬 가능성이 급속하게 없어지더라도, 그것은 낭비되는 사회활동의 제거에 대한 합리적 노동의 조직화에 기반해야 한다.

 

 이러한 조건에서 “프롤레타리아” 축적은 그 본질적 원천을 높은 기술수준을 통한 활용가능한 노동에서 찾아야 한다.

 이는 노동생산성의 증가가 다음의 대안을 제기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동일한 총생산물(또는 사용가치)이 소비된 총 노동력의 감소를 결정하거나, 그 총량이 고정되어 있다면(또는 심지어 그것이 기술 발전 수준에 따라 감소하더라도) 분배되는 생산물의 양은 증가할 것이다. 그러나 두 가지 경우에, 상대적 잉여노동(엄격하게 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에 상대적인)은 더 큰 소비에 완벽하게 조응하며 진정한 임금 인상에 조응하지, 자본주의에서처럼 가공적이지 않다.

 생산원가에 대한 경쟁보다 자본주의 관리를 넘어선 프롤레타리아 관리의 우월성은 이러한 생산성의 새로운 사용에 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에 기반하여 프롤레타리아트는 우리가 이미 지적한 형태로 불가피하게 패배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영구적 방식에서(그리고 더 이상 문화적 위기를 통해서 뿐만이 아닌) 사용가치가 교환가치에 맞서게 되는 쇠퇴의 위기 속으로 자본주의를 몰아넣는 것은 노동생산성의 발전이다. 부르주아지는 생산의 무한함에 의해 극복되지만 만족되지 않은 엄청난 요구에 의해 자멸하게 된다.

 

 이행기에서 노동생산성은 “각각의 필요에 따른” 공식에 상응하기에는 갈 길이 멀지만 그것을 인간의 목적을 위해 충분하게 사용할 가능성은 사회적 문제의 모든 것을 뒤집는다. 맑스는 이미 그것이 이론적 최대치에 미치지 못하지만 노동생산성의 증가는 자본주의의 기본이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혁명 이후, 프롤레타리아 정책이 기술 발전을 자본의 이해에 따라 유용하는 자본주의적 방식인, 임금을 노동력의 가치로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생산력 발전에 기반하여 이러한 가치 이상으로 더욱 상승시킨다는 전제 하에, 생산물과 그 가치 사이의 자본주의적 적대를 줄이고 억누르는 것이 가능해 질 것이다.

 

 기술 발전을 동반한 기본적 축적의 필요성을 전제로 하면, 상대적 잉여 노동의 일부는 직접 노동자에게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축적의 리듬과 축적의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측정의 문제로 나타나지만 어떤 자의적인 요소도 프롤레타리아트의 경제적 과업을 규정하는 원칙적 기반 위에서 배제될 것이다.

 

 

축적 리듬의 결정

 

 더구나 축적률의 결정은 네덜란드 국제주의자들의 견해(그들의 저작 116쪽)에서와 같이 경제적 집권주의에 근거하지, 그들 기업의 생산자의 결정에 근거하지 않음을 말할 나위도 없다. 또한 그들은 이러한 해법의 실천적 가치를 인식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 후 즉각적으로 결론을 내기 때문이다. “축적율은 개별 기업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겨질 수 없고 의무적 규범에 대한 결정은 기업 평의회 총회의 몫이다”. 이러한 정식화는 일종의 위장된 중앙집권주의처럼 보인다.

 

 만일 우리가 이를 러시아에서 일어난 것에 적용한다면, 프롤레타리아트의 착취의 억압이 생산수단의 집산화로부터 직접 나온다고 주장하는 중도주의의 거짓말을 명확하게 볼 수 있다. 소련의 경제적 과정은 아무리 전혀 다른 기반으로부터 시작되더라도,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동일한 출구를 향해 나아가며 끝나는, 자본주의 경제의 경제적 과정과 같다. 두 가지 모두 노동 계급으로 되돌아가지 않는 잉여가치의 증가하는 추출에 기반하여 펼쳐졌다. 소련에서는 사회적 측면이나 생산관계에서가 아니지만 노동과정이 내용적으로 자본주의적이다. “스타카노비즘”의 형식을 취한 노동의 강화를 통해 획득된, 절대적 잉여가치를 증가시키는 추동이 있었다. 노동자의 물질적 조건은 어떤 방식으로든 기술적 개선이나 생산력 발전과 연결되지 않고, 어떤 경우에도 사회의 재산분배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상대적 참여는 증가하지 않고 감소했다. 이는 가장 번영한 시기에도 자본주의 체제가 항상 발생시키는 현상이다. 우리는 노동자에게 가는 절대적 몫의 실질적 성장이 있는 정도를 확립할 요소를 결여하고 있다.

 

 더구나 소련은 가장 계급의식적인 양질의 노동자에 대한 자격 없는 노동자(농민의 엄청난 보유로부터 오는)를 대체하는 임금삭감의 정책을 실천한다.

 

 이러한 엄청난 잉여가치의 양이 어떻게 응결되는지의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상당 부분이 관료적 “계급”에게 간다는 쉬운 대답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설명은 집합적 재산으로 남아있는 거대한 생산 기구의 존재에 의해 그릇됨이 입증되었고, 그에 비하면 소고기, 자동차와 관료의 휴양처가 아주 작은 수치임을 알고 있지 않은가? 조사뿐만 아니라 공식 통계는 생산수단의 생산(기구, 건물, 공공사업 등)과 “관료주의”와 노동자, 농민 대중을 위한 소비재 사이의 엄청난 불비례가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관료주의가 경제를 결정하고 잉여가치를 전유하는 계급임이 사실이었다면, 잉여가치가 사유재산이 아닌 집합적 부로 상당부분 전환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러한 모순은 이러한 부가 소련 공동체 내에 남아있지만 분배되는 방식에서 그 반대가 되는지를 발견함으로써 설명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비슷한 현상을 자본주의 사회에서 볼 수 있다. 잉여가치의 주요 부분이 자본가의 호주머니에 들어가지 않고 법적 견해로 오직 사유재산인 상품의 형식으로 축적되고 있음을 주목하자. 그 차이는 소련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엄밀히 말해 자본주의 성격을 취하지 않는데 있다. 이 두 가지 진화의 과정은 서로 다른 기원으로부터 출발한다. 소련에서는 이것이 경제적 적대로부터 나오지 않지만, 정치적 적대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와 국제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분열로부터 나온다. 그것도 “민족 사회주의” 방어라는 깃발 아래에서, 그리고 세계 자본주의의 기제로서 통합이라는 깃발 아래에서 발전했다. 대조적으로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진화는 부르주아 경제의 쇠퇴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두 가지 사회적 발전은 전쟁 경제의 건설이라는 공통의 목적으로 귀결된다. (소련 지도자들은 세계에서 가장 견고한 전쟁기계를 만든 것을 자랑한다.) 우리가 볼 때 이는 “러시아 수수께끼”에 대한 대답이다. 이는 10월 혁명의 패배가 왜 러시아 내의 계급 관계의 전복으로부터 오지 않고 국제적 전쟁에서 왔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세계 혁명보다 제국주의 전쟁을 향한 계급투쟁의 진로를 지향한 정책을 검토해 보자.

 

 

전쟁 경제를 위해 봉사한 러시아 노동자의 착취

 

 이미 우리가 말한 바와 같이 몇몇 동지들에게는 러시아 혁명이 프롤레타리아적이지 않았고, 그 반동적 진화 과정은 문화적으로 후진적인 (계급의식의 수준에서는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였지만)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수행되었다는 사실에 의해, 또한 후진국을 떠맡을 수밖에 없었던 사실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우리는 맑스가 파리 꼬뮨에 대해 언급한 것을 인용하면서 이러한 숙명주의적 태도를 반대하는데 우리 스스로를 한정하고자 한다. 파리 꼬뮨이 권력 장악을 통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미성숙을 나타냈지만, 맑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엄청난 중요성을 보았고 그것으로부터 1917년 볼셰비키를 고무시킨 구체적 교훈을 이끌어냈다. 러시아 혁명에 대해 같은 방식으로 작용하지만 우리는 미래 혁명이 10월 혁명의 복사판일 것이라는 것을 이 혁명으로부터 이끌어내지는 않는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레닌이 “러시아 혁명의 국제적 가치”(「좌익 공산주의」)에 대해 말할 때의 의미를 상기하는, 10월 혁명의 기본적 특성이 이들 혁명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맑스주의자는 역사를 “반복”하지 않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론적 무기를 벼리고, 그 과오를 피하면서 마침내 부르주아지에 대한 승리를 하기 위해 역사를 해석한다. 결정적 승리를 하게 한 위치에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를 놓은 조건들을 찾는 것은 역사유물론의 건설에 새로운 주춧돌을 추가하면서 맑스주의 조사 방법에 모든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첫 번째 혁명적 파고의 후퇴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일시적 고립을 가져온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에 소련의 진화의 결정적 원인을 찾아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연이은 사건들을 만든 해석에서, 그리고 이로부터 도출된 자본주의의 진화에 대한 그릇된 전망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자본주의의 “안정화”의 개념은 자연스럽게 “일국 사회주의론”을 발생시켰고 이어서 소련의 “방어” 정책을 가져왔다.

 

 구체적 목적으로서의 세계 혁명이 배후로 사라진 반면, 국제 프롤레타리아트는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도구, 즉 제국주의 공격에 대항하여 그 국가를 방어하는 세력이 되었다. 부하린이 1925년에 세계 혁명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는 세계 혁명이 개입에 맞서고 새로운 전쟁에 맞서는 유일한 보증이므로 그 중요성이 있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처럼 “개입에 맞서는 보증”의 이론을 펼쳤는데, 코민테른은 그것을 더 이상 세계 혁명의 이해가 아닌 소련의 특수한 이해의 표현으로 받아들였다. “보증”은 더 이상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와 연결되어 추구되지 않았고, 프롤레타리아 국가와 자본주의 국가 사이의 관계의 성격과 내용으로 수정되었다. 세계 프롤레타리아트는 “민족 사회주의”의 방어를 위한 지지의 지점으로만 남았다.

 

 「신경제정책」에 관하여 우리는 그것이 특히 농민 사이에 자본주의적 야망의 상당한 재연을 가져왔지만, 불가피한 퇴행을 위한 특수한 영역을 제공했다고 보지 않는다. 그리고 「중도주의」아래에서 레닌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본 빈농(smychka)과의 동맹은 목표가 되었고 동시에 중농과 쿨락과의 연대가 만들어졌다.

 

 「빌랑」의 동지들의 견해와 반대로 우리는 러시아의 경제적 진화를 세계 혁명의 경로로부터 분리하는 정책을 레닌이 「신경제정책」에서 주장했다는 선언으로부터 유추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반대로 레닌에게 「신경제정책」은 국제 계급투쟁이 복원될 때 까지의 일시적 유예의 정책이었고, “붙들기” 정책이었다. “우리가 수년간 지속된 정책을 채택할 때, 우리는 국제 혁명, 그 발전의 신속성과 조건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잠시도 잊지 않는다”. 그에게 그것은 독재가 무너지지 않고 자본주의 세력에게 양보하는 일종의 경제적 균형을 다시 세우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회주의 경제의 기초를 건설하는 목적과 적과의 계급 협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같은 의미로 레닌이 출처가 의심스러운 문서에 기반하여 “일국 사회주의”의 주창자였다고 말하는 것도 옳지 않다.

 

 반면에 “트로츠키주의” 러시아 반대파는 핵심 투쟁이 자본주의 국가들과 소비에트 국가 사이의 투쟁이라는 견해를 높이 사고 있다. 1927년에 소련에 대항하는 제국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보았고, 동시에 코민테른은 중국 혁명의 분쇄를 관장하면서, 노동자들을 계급 위치로부터 찢어내고 그들을 소련 방어의 전선에 내몰았다. 이에 기초하여 반대파는 전쟁을 위한 “사회주의 기지”로 소련을 준비하는데 관여한다. 이러한 입장은 이론적으로 전쟁 경제(5개년 계획)를 건설하기 위하여 러시아 노동자들의 착취를 인정함을 의미한다. 동시에 그것은 “경제를 준비하지만” 예산 등은 전쟁에 대한 입장으로 극대화하면서 소련이 “전쟁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평화를 위한 투쟁”에 대한 모호한 입장을 발표한다. 그리고 공업화의 문제는 방어에 필요한 기술적 차원을 보증하는데 결정적이라고 말한다.(반대파 입장)

 

 이어 트로츠키는 그의 「영구 혁명」에서 대중의 생활 표준을 높이지만 공업화 체제를 가능한 빠른 속도로 진행할 것을 말한다. 우리는 “외부 위협”이 소련에 맞서는 성전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세계 제국주의 전선으로의 통합으로부터 옴을 알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공업화가 프롤레타리아트의 더 나은 존재를 보증하지 않고 제국주의 전쟁을 준비하는 목적을 가진 가장 공포스런 착취임을 알고 있다.

 

 다음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주의 건설”에 그 기초를 두지 않고 국제적 내전의 연장에 기반한다는 전제하에, 문화적 미성숙과 경제적 부족함과 독립적으로 승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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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행기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위하여] 프롤레타리아 행정의 몇 가지 요소(1)

[이행기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위하여]

프롤레타리아 행정의 몇 가지 요소(1)

미첼, 「빌랑」37호 1936년 11-12월[「국제평론」 132호, 2008년 봄 호]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은 한 치의 의심 없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혁명은 위로부터 밑에까지 자본주의국가를 파괴했고 부르주아 지배를 처음으로 완전하게 이룩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대체했기 때문이다. (파리 꼬뮨은 단지 이러한 독재를 위한 전제조건을 만들었을 뿐이다.1)) 맑스주의자가 이를 진보적 경험(그 후의 반혁명에도 불구하고)으로, 프롤레타리아와 인류 전체의 해방으로 이끈 길로의 한 걸음으로 분석해야 하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물질적, 정치적 조건

 

 이 거대한 사건이 쌓은 상당량의 자료로부터 미래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분명한 지향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우리 연구의 상태를 전제할 때 아직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특정한 이론적 의미, 역사적 실재로부터의 특정한 맑스주의 영역과의 대면은 계급없는 사회를 건설하려는 시도가 제기한 복잡한 문제가 부르주아 사회의 보편성과 그 법칙 그리고 국제계급 투쟁의 지배에 기초한 일련의 원칙에 긴밀하게 연결되어야만 한다는 기본적 결론에 도달하게 할 가능성이 있다.

 

 나아가 첫 번째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기대와 반대로 가장 부유한 나라, 물질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가장 발전한 나라, 사회주의를 위해 “무르익은” 나라에서 일어나지 않고 자본주의의 반봉건 후진지역에서 일어났다.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혁명의 최선의 조건은 물질적 부족이 사회갈등을 다루는 지배계층의 능력부족에 상응하는 상황과 함께 간다는 두 번째 결론에 도달한다. 다른 말로 정치적 요인은 물질적 요인을 압도했다. 새로운 사회의 출현에 필요한 조건에 대한 맑스의 테제와 모순되는 것과 달리 이러한 긍정은 이 연구의 첫 번째 장애서 우리가 이 요인에 따르는 중요한 의미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첫 번째 결론으로부터의 추론인 세 번째 결론은 공산주의의 서장으로서의 사회주의 건설 이라는 본질적으로 국제적인 문제는 하나의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틀 안에서 해결될 수 없지만 세계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패배에 근거하여 적어도 부르주아 지배의 중심인 선진국에서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국가의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자신의 지배를 수립한 후 특정한 경제적 과업을 수행할 뿐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지만, 사회주의 건설은 “가난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가 세계 혁명의 발전 과정 속에 통합될 때 엄청난 의미를 지닌다할지라도 가장 강력한 자본주의 국가들의 파괴 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 다른 말로 그 자신의 경제에 관하여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의 과업은 국제적 계급투쟁의 필요에 종속된다.

 

 모든 진정한 맑스주의자들이 “일국 사회주의” 이론을 거부했지만 러시아 혁명에 대한 대부분의 비판은 정치적 기준보다 경제적이고 문화적 기준을 보면서, 그리고 어떤 종류의 한 국가의 사회주의의 불가능성이 부여하는 논리적 결론에 도달하는 것을 잊어버리면서, 사회주의의 건설의 양식에 본질적으로 초점을 맞추었다.

 

 이는 핵심적인 문제이다.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트의 첫 번째 실천적 경험이 아직 사회주의라는 의미를 둘러싸고 있는 안개를 흐트러뜨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러시아 혁명의 본질적 교훈은 분명하다. 우리가 우선 경제를 이야기하고 있더라도 러시아 혁명은 경제 건설 강령에 대한 매우 엄격한 한계가 있는, 잠정적으로 고립된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역사적 필요성을 지닌 가장 악화된 형식이다.

 

 

세력의 지구적 균형은 사회주의 건설의 리듬과 양식을 결정한다.

 

 “일국 사회주의”의 거부는 모든 생산영역을 포괄하고, 가장 변화하는 도구에 부응하여 통합 경제를 건설하여 다른 비슷한 경제에 병치시켜 세계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생산 발전을 향한 경제를 지향하는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문제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기껏해야 그것은 특수한 기능을 가지고 미래의 공산주의 사회로 통합될 수 있는 각각의 국민경제를 발전시키는, 세계 혁명의 승리 이후의 문제이다. (자본주의는 국제 분업을 통하여 매우 불완전한 방식으로 이를 실현했던 것이 사실이다.) 혁명 운동의 지체라는 덜 유리한 전망과 함께(1921년 러시아 상황) 그것은 전 세계 계급투쟁의 리듬에 프롤레타리아 경제의 과정을 적응시키는 문제이지만,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새로운 혁명적 봉기를 준거틀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지배를 강화한다는 의미에서만 그러하다.

 

 트로츠키는 프롤레타리아 목적이 통합 사회주의의 실현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세계 사회주의 경제의 요소를 준비하는 것으로 명확하게 말했지만 위와 같은 기본적 노선을 자주 놓쳤다.

 

 사실 소비에트 경제 발전의 분석에서 트로츠키는 경제가 자본주의 세계시장에 의존한다는 올바른 전제로부터 시작하지만, 그는 이 문제를 프롤레타리아 국가와 세계 자본주의 사이의 경제적 수준에서의 “대결”인 것처럼 접근하고 있다.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보다 더 많이, 더 좋은 상품을 생산할 때 그 우월성이 증명되는 것이 맞지만, 그러한 역사적 증명은 프롤레타리아 경제와 세계 자본주의 경제 사이의 충돌의 결과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 사이의 치열한 투쟁 이후 세계 경제에서 일어난 기나긴 과정 후에야 이루어질 수 있다. 왜냐하면 경제적 경쟁의 기반 위에서 프롤레타리아 국가는 생산의 사회적 내용의 변혁을 가로막는 노동착취라는 자본주의 방식에 불가피하게 종속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사회주의의 우월성은 노동 생산성의 무한정한 확장의 결과로서의 더욱 “싸게” 생산하는 능력에 있다고 볼 수 없고, 생산과 소비 사이의 자본주의 모순의 소멸을 통해서만 그 우월성을 나타내야 한다.

 

 우리가 보기에 트로츠키는 분명히 “세계 자본과의 경제적 경주”같은 기준으로부터 출발함으로써 중도주의의 이론적 무기를 내세웠다. 즉 “결정적 요인으로서 발전의 유혹”, “발전율 사이의 비교”, “전쟁 전 수준의 기준” 등등 모두는 “자본주의 국가를 따라잡기”에 대한 중도주의 슬로건을 빼다 닮았다. 이는 중도주의 정책의 직접적 결과이지만, 러시아 노동자 참상 위에서 이루어진 기괴한 공업화가 왜 러시아의 “트로츠키주의” 반대파의 “타고난” 자식인지의 이유이다. 이러한 트로츠키의 입장은 국제적 혁명 투쟁의 후퇴 이후 자본주의의 진화를 추적한 전망의 결과이다. 따라서 신경제정책(NEP)이후 진화한 소비에트 경제에 대한 그의 모든 분석은 국제적 정치 요인으로부터 고의로 발췌하고 있다. “가능한 한 많이 그들의 순간적 접점 속에서 모든 요인들을 고려하면서 당면 시기의 실제적 해법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전체시기를 위한 발전의 관점에서 볼 때,”두드러진“ 요소, 다시말해 무엇보다 정치적 요소를 분리시키는 것이 필요 하다.”(자본주의를 향하느냐 아니면 사회주의를 향하느냐?) 이처럼 임의적인 분석 방법은 자연스럽게 소비에트 경제를 계급세력의 세계적 균형의 진화의 함수로 보기보다는 “그들 스스로의” 관리의 문제를 검토하게 만든다.

 

 NEP 이후 레닌이 “누가 이길 것인가”라고 제기한 문제는 그가 애초에 놓았던 정치적 영역으로부터 엄격한 경제적 영역으로 바뀌어졌다. 강조점은 판매가격을 낮춤으로써 세계 시장 가격에 맞출 필요성에 두어졌다.(실제로는 노동의 지불부분, 즉 임금의 삭감으로 나타났다.) 프롤레타리아 국가는 피할 수 없는 악으로서의 노동력 착취로 스스로를 제한하지 말아야 하고, 반대로 자본주의 내용을 담는 이러한 요소를 경제과정의 결정적 요소로 만드는 고도의 착취수준을 제재하는 정책을 채택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전투로 볼 때, 사회주의 경제(즉 소련)의 생산물로 세계 시장에서 자본주의 생산을 “능가하는” 전쟁을 상상하는 그 순간부터, 일국 사회주의의 생각대로 되돌아간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한 관점으로 세계 부르주아지는 자본주의 생산 체제의 미래에 대해 편안하게 확신할 수 있음이 명백하다.

 여기에 우리는 러시아 혁명의 중요한 두 단계에 대한 이론적이고 역사적 의미를 찾으려 한다. 하나는 “전시 공산주의”이고 두 번째는 신경제정책이다. 전시 공산주의는 내전이라는 극단적 사회적 긴장에 해당되고, 신경제정책은 무장투쟁의 종료와 세계 혁명의 퇴조 상황에 해당된다.

 

 

 

전시 공산주의와 신경제정책

 

 상황적 국면에도 불구하고 이 두 가지 사회적 현상이 문제가 되는 국가들의 자본주의적 발전의 수준과 함께 강도와 리듬을 지키면서 다른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 다시 나타날 것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검토는 더더욱 필요할 것 같다. 그러므로 이행기에 이들의 정확한 위상을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

 

 러시아 유형의 “전시 공산주의”는 “정상적”인 프롤레타리아 행정의 특징은 아니다. 그것은 미리 확립된 강령의 산물이 아니었고 무장한 계급투쟁의 항거할 수 없는 압력이 부여한 정치적 필요였다. 이론은 부르주아지를 정치적으로 분쇄할 필요성에 잠정적으로 양보해야 했다. 이는 경제가 정치에 복속되어야하는 이유였지만 생산과 교역의 몰락을 희생하면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실제로는 “전시 공산주의” 정책은 점점 더 혁명을 위한 강령에서 볼셰비키가 발전시킨 이론적 전제와 충돌했는데 그것은 강령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경제적 이유”(노동자 통제, 은행의 국유화, 국가 자본주의)의 성과라는 매우 절제된 성격이 부르주아지가 무장저항을 일으키도록 고무시켰기 때문이었다. 노동자들은 국유화의 법령이 단순히 성문화한 몰수를 대대적으로 가속시키면서 대응했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이 수준에서 승리할 수 없음을 예상하면서 이러한 경제적 “급진주의”에 대해 경종을 울렸다. 실제로 1921년 봄, 볼셰비키는 노동자가 패배한 것이 아니라 무력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하려는 의도하지 안은 시도가 실패했음을 인식해야 했다. “전시 공산주의”는 본질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기근을 피하고 투사들은 먹이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경제적 기구의 강제 동원이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진정한 사회주의적 내용이 없는 평등한 소비의 “공산주의”였다. 농업 잉여물을 징발하는 방법은 현저한 생산 감소를 가져올 뿐이었고, 임금 상승은 노동 생산성의 하락을 가져왔으며 이러한 상황이 부여한 권위주의적이고 관료적 중앙집권주의는 합리적 중앙집중주의의 진정한 불구화였다. 교환의 질식(암시장의 성행이 수반한)과 화폐의 실질적 소멸(현물 지급과 자유 용역)이라는 면에서 보면, 이는 내전의 산물이었고, 실질적 경제생활의 몰락이었다. 그 조치들은 역사적 조건을 고려한 프롤레타리아 행정의 수단이 아니었다. 요약하면,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전시 공산주의”의 의미를 심각하게 변경시키지 못했을지라도 발전의 특정단계를 고도로 발전된 국가에서의 승리한 혁명이 “뛰어넘게” 함으로써 상당하게 약화시켰던 경제적 궁핍화를 통하여 계급의 적을 분쇄하는 대가를 치렀다.

 

 맑스주의자는 내전이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 장악에 선행하든, 수반하든, 뒤따라오든 간에 경제 수준을 잠정적으로 떨어뜨릴 것임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수준이 제국주의 전쟁 동안 얼마나 많이 떨어질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진국에서 유기적으로 약한 부르주아지의 급속한 정치적 박탈은, 이 부르주아지가 아직 넓은 사회적 계층으로부터 힘을 끌어 모을 능력을 가졌다면 (러시아에서는 문화수준이 낮고 정치적 경험이 없는 광범위한 농민이 있었다.) 새로운 권력을 해체할 목적인 장기간의 투쟁이 뒤따른다. 동시에 부르주아지가 정치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강력한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프롤레타리아 승리는 치열하고 폭력적이며 물질적으로 참담한 내전이라는 다소 긴 시기가 선행되기 보다는 바로 뒤따를 것이 가능하다. (반면, 혁명 이후의 “전시 공산주의”의 단계는 그런 나라들에서 상당히 일시적일 수 있다.)

 

 절대적 관점에서 볼 때, 특히 “전시 공산주의”에 대한 잔인한 반대에 놓인 「신경제정책」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자유” 시장, “자유” 소생산, 그리고 화폐로의 회귀를 통한 자본주의로의 심각한 후퇴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러한 “후퇴”는 우리가 그 뒤에 있는 실제적 경제 조건을 검토하면 진정한 기반 위에서 이루어졌다. 다른 말로 「신경제정책」(그 두드러진 국면, 구체적으로는 러시아적 요소와 독립적인)은 이행 경제의 진화를 위한 “정상적” 조건의 재확립으로 보아야 한다. 내전의 불가항력 이후에 따라온 「신경제정책」이 그를 넘어서서 잘 나아갔을 지라도, 그것은 러시아에게는 볼셰비키의 초기의 강령으로의 회귀였다.

 

 요약하면 「신경제정책」은 그 상황적 요인과 분리할 때, 어떤 다른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가야할 경제 행정의 형식이다.

 프롤레타리아 행정의 가능성이 모든 자본주의적 범주와 형식의 사전 철폐(맑스주의가 아닌 관념론으로부터 도출된 생각)에 달려있지 않다고 하는 사람들, 그리고 반대로 이러한 프롤레타리아 행정이 부르주아 예속의 특정한 표현의 불가피하지만 잠시 동안 생존을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에게 부여된 결론이다.

 

 러시아에서 자본주의로부터 공산주의로의 역사적 조건에 걸맞는 경제 정책의 추구가 국제 혁명의 하강과 기근과 노동자․ 농민의 총체적 탈진에 의한 내적 곤궁의 시기로부터 나온, 가장 중압적이고 위협적인 사회 환경 속에서 이루어졌음은 사실이다. 이는 이러한 특수한 역사적 특성이 러시아의 「신경제정책」의 보편적 중요성을 가리게 한 이유이다.

 

 사건의 압력 아래에서 「신경제정책」은 효과적으로 방어했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유지하는 필수조건임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복종의 결과가 아니었다. 즉 그것은 부르주아지와의 어떠한 정치적 타협도 포함하지 않았지만 경제의 진보적 진화를 위한 출발점을 배우려는 단순한 경제적 후퇴였다. 실제로 계급 전쟁은 무장투쟁의 영역으로부터 경제 투쟁의 영역으로 스스로를 위치지음으로써, 덜 잔인하고 더욱 함정에 빠지지만 가공할 다른 형식으로 취함으로써, 전체가 약화될 운명에 놓이지 않았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본질적인 것은 국제 투쟁의 변화와 연관되면서 스스로를 끊임없이 강화하는 것이다. 이행기의 보편적 수용에서 「신경제정책」은 이행 경제 그 자체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견고한 계급 노선 위에서 유지되지 않을 정도로, 자본주의적 적의 도구를 만들었다. 결정적으로 남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활동이다. 오로지 이러한 기반 위에서 우리는 소비에트 국가의 진화를 분석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문제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경제 강령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경제 강령에 부과된 역사적 한계에 있어서 근본적인 요점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 째, 자본주의에 의해 이미 “사회화”된 생산수단과 교환의 집산화. 둘 째, 결정적으로 중요한 경제적 무기로서 프롤레타리아 국가에 의한 대외 무역의 독점화. 셋 째, 경제의 구조적 특성과 전 세계 사회주의 분업에서 요청되지만 경제 사회적 수준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물질적 지위를 강화시키는 구체적 기능에 기초한, 생산력의 생산과 분배를 위한 계획. 넷 째, 해외무역의 독점에 기초하고, 생산수단과 부족한 소비의 대상을 획득할 목적으로 하며, 세계 시장의 압력에 저항할 수 있고 그 시장 속에 프롤레타리아 경제를 통합하려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지침과 함께, 기본적 생산계획에 종속되어야 하는, 세계 자본주의 시장과의 연계를 위한 계획이 그것이다.

 

 이러한 강령의 진보와 실현은 어느 정도 생산력 발전의 수준과 노동자 대중의 문화적 수준에 달려 있지만, 본질적 문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힘, 그 권력의 견고함, 국내 및 국제 수준의 세력 균형이다. 일정하게 상호 침투하는 물질적, 문화적, 정치적 요인 사이의 어떠한 단절이 결코 없더라도 그렇다. 그러나 우리가 되풀이 말하지만, 보기를 들어 사회적 부의 몰수 양식을 다룰 때, 집산화가 자본주의 확립을 위해 봉건적 재산의 폐절이 있었던 것처럼 사회주의 확립을 위해 필요한 법적수단이지만, 그것은 자동적으로 생산의 변혁을 가져오지 않는다. 엥겔스는 집단 재산 소유를 사회적 만능약으로 보는 경향에 반대하여 우리에게 경계하도록 한 바 있다.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그러나 주식 회사로의 전화도, 국가 소유로의 전화도, 생산력의 자본으로서의 성질을 지양하지 못한다. 주식 회사의 경우에 이것은 손바닥 위에 있는 것처럼 명백하다. 그리고 현대 국가 역시 부르주아 사회가 노동자나 개별 자본가의 침해로부터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의 일반적인 외적 조건들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 낸 조직일 뿐이다. 그 형태가 어떠하건 간에 현대 국가는 본질적으로 자본가들의 기관, 자본가들의 국가, 관념상의 총자본가이다. 현대 국가가 생산력들을 더 많이 자기의 소유로 떠맡으면 떠맡을수록, 그것은 더욱더 현실적 총자본가로 되며, 국민들을 더욱더 착취하게 된다. 노동자들은 여전히 임금 노동자로, 프롤레타리아로 남는다. 자본 관계는 폐기되기는커녕 오히려 정점으로 치닫는다. 그러나 정점에서 그 자본 관계는 전도된다. 생산력들의 국가 소유가 충돌의 해결책은 아니지만, 해결의 형식적 수단, 해결의 칼자루는 그 안에 숨겨져 있다.”(반위링론)임을 그는 보여주었다. 덧붙여 그는 사회세력을 모든 사람의 의지에 종속시키고 생산수단을 “전제적 주인으로부터 온순한 하인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생산력에 작용하는 사회 세력의 본질기능을 이해하는데 그 해법이 있다고 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권력만이 이러한 집합적 의지를 결정하고 재산의 사회적 성격이 변환되어 그 계급적 성격을 잃게 되는 것을 보증하는 것은 분명하다.

 

 집산화의 법적 효과는 후진적 경제 구조에 의해 제한받고 이는 정치적 요인이 더욱 결정적이게 만든다.

 

 러시아에서는 새로운 자본주의 축적과 위험한 계급 분화로 이끌 수 있는 엄청나게 많은 요인들이 있었다. 프롤레타리아트만이 프롤레타리아 투쟁을 위해 국가를 장악하게 한 유일한 정책, 즉 매우 강력한 계급 정책을 통해 이를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농업 문제와 함께 소규모 산업 문제는, 자본주의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남긴 무거운 유산, 법령으로 제거될 수 없는 유산으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한 핵심 쟁점을 구성한다. 모든 자본주의 국가(영국을 제외하고)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제기된 중심 문제는 상품의 소생산자와 소농에 반대하는 화해할 수 없는 투쟁이며 이 사회 계층을 폭력으로 몰수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이 투쟁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사실 생산의 몰수는 이미 “사회화”된 기업에 관련하여 경제적으로 실현되지만, 프롤레타리아트가 낮은 원가로 더 많이 생산할 수 없고 시장 수단을 통한 통제 밖에 없는 개별 기업의 경우는 아니다. 이것이 개별 노동과 집합 노동 사이의 이행의 초점이다. 나아가 “사회주의”, 자본주의, 또는 전(前)자본주의라는 유일하게 경쟁에만 바탕을 두고 진화하는, 반대되는 사회관계에 기초한 순수한 생산 유형의 병렬체로, 프롤레타리아 경제를 추상적 방식으로 관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집단화되는 것은 사회주의적이 되고 소부르주아와 농업 부문은 불가피하게 “사회주의”의 층으로 들어온다고 하는 것은 부하린으로부터 나온 중도주의의 테제이다. 그러나 실제로 생산의 각 영역은 다소간 자본주의의 기원의 흔적이 있고, 병렬이 아니라 계급 투쟁의 압력 아래에서 서로 싸우고, 내전시기보다 덜 잔인하더라도 매우 치열한 방식으로 발전하는, 모순된 요소들의 상호 침투이다. 이 싸움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스스로 집합화된 산업을 기반으로 이미 정치적으로 극복된 자본주의의 모든 사회․ 경제적 세력을 완전히 폐지할 때까지 통제하는 목적을 지녀야 한다. 그러나 토지와 생산수단을 국유화했기 때문에 부르주아 기구의 활동에 대한 넘을 수 없는 장벽을 세웠고 믿는 결정적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모든 과정은 변증법적으로 계속되며 프롤레타리아트는 스스로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 강화하는 조건 위에서 계급 없는 사회를 향해 그 과정을 나아가게 할 수 있을 뿐이다.

 

 

농업 문제

 

 농업 문제는 분명히 혁명 이후 제기된 프롤레타리아트와 소부르주아지 사이의 관계라는 복잡한 문제의 본질적 요소 중의 하나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우리가 권력을 잡은 가장 유리한 조건 아래인 서구에서라 할지라도, 우리가 이러한 거대한 과업의 수천의 복잡한 어려움이라는 최악으로부터 벗어나기 전,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매우 올바르게 지적했다.

 

 이는 그 기본적인 노선에서조차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현안이 아니다. 우리는 근본적인 요소인 토지의 완전한 국유화와 농업과 산업의 융합을 제기하는 정도로 제한하려 한다.

 

 첫 번째(완전한 국유화)는 대규모 생산수단의 집산화와 함께 권력 장악 이후 즉각 수행될 수 있는 완벽하게 실현가능한 법적 조치이다. 반면 두 번째(농업과 산업의 융합)는 세계적 사회주의 조직의 결과로서, 경제를 통한 과정의 산물이다. 이 둘은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국유화가 농업과 산업의 융합을 조건지우며 결과적으로 농업의 사회화로 나아가는, 시간적으로 교차할 수 있을 뿐인 행위이다. 토지의 국유화나 토지의 사적 소유의 철폐는 그 자체로는 사회주의적 조치가 아니다. 사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부르주아적이며 부르주아 민주 혁명의 마지막 행위이다.

 

 토지의 평등한 향유와 함께 혁명의 가장 극단적인 혁명 단계를 구성하지만, 레닌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자본주의 관점에서 가장 완벽한 기초이며 동시에 사회주의로의 도정을 위한 가장 충분한 기초인 농업체이다.” 볼셰비키의 농업 강령에 대한 로자 룩셈부르크의 비판(「러시아 혁명」)의 약점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점들이다. 첫 째, 그녀는 “농민에 의한 토지의 즉각적 장악과 분배”가 사회주의 사회와 공통점이 전혀 없지만(우리는 이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불가피한 이행단계를 나타냄을 인식하지 않았다. 물론 그녀는 이것이 “대규모 토지 소유권을 분쇄하고 농민과 혁명 정부를 즉각적으로 묶는 두 가지 다른 목표를 달성하는 가장 짧고, 단순하며 명확한 공식이었다”고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정부를 강화하는, 정치적 수단으로 그것은 훌륭한 전술적 조치였다”고 인정하지만. 두 번째로 그녀는 「사회주의 혁명당」으로부터 볼셰비키가 취한 “농민에게 토지를”이라는 구호가 토지의 사적 소유라는 통합적 억압의 기초 위에서 적용되었음을 명확하게 하지 않았다. 반면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것을 대토지 소유로부터 수많은 소규모 개별 농민 소유로서의 경로로 보았다. 토지 분할이 대규모 기술적으로 발전된 착취로 확장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이 전체로서의 농업 경제의 주요 요소가 아니었음을 인정해야 했지만, 실제로 그것은 “소브코제스”(sovkezes)의 구조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룩셈부르크가 그 자신의 농업 강령을 도출하는데 분명히 더 나아간 조치로 연결되었던 토지의 통합적 몰수에 대해서 아무 말 없었다는 것을 내친걸음에 말하도록 하자. 그녀는 다만 대규모나 중규모 토지의 국유만을 예측했을 뿐이다.

 

 마지막 세 번째로, 룩셈부르크는 토지 분할이 사라지지 않고 “농민 사이의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을 증가시키고 계급 적대를 촉진시킬 것이다”는 사실을 비난함으로써 토지 분할의 부정적 측면(필요악)을 드러내는데 스스로를 가두었다. 물론 농촌에서는 프롤레타리아 권력이 농촌 프롤레타리아와 반(半)프롤레타리아 농민을 끌어냄으로써 스스로를 강화시키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영향력을 확장하고 농촌에서의 그 승리를 보증하는 사회적 전제를 형성한 계급투쟁의 발전이 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의심할 여지없이 농업 문제의 이러한 정치적 국면과, 정치적 지배와 대규모 공업의 소유에 기반한 프롤레타리아트가 수행하는 기본적 역할을 과소평가 했다.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가 극도로 복잡한 상황에 부딪쳤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소농의 극도의 분산 때문에 국유화의 효과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우리는 토지의 집단화가 반드시 그에 부속된 생산 수단의 국유로 나아가지 않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러시아에서 92%가 농민의 사적 소유로 남았고, 8%만이 생산 수단의 국유화가 되었다. 반대로 산업에서는 철도의 97%, 중공업의 99%를 포함하여 생산력의 89%가 집단화되었다. (1925년 상황)

 농업 기구가 전체 장비의 3분의 1에 불과했지만, 엄청난 농민 대중을 전제로 할 때 자본주의 관계의 발전을 위한 유리한 기반을 형성했다. 그리고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발전을 유지하고 재흡수하는 중심적 방법은 대규모 공업화된 농업의 조직화 뿐이었음은 명백하다. 그러나 이는 공업화의 보편적 문제에 종속되었고, 이어서 선진국의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의 원조라는 문제에 종속되었다. 죽느냐 아니면 소농에게 도구와 소비재를 공급하느냐라는 곤경에 빠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트는 가능한 한 농업 생산과 공업 생산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려 했지만, 이는 국제 혁명 투쟁에 연결시킨다는 전망을 가지고 도시와 농촌에서 계급투쟁에 모든 노력을 경주했다. 집단적 생산을 만들려는 전제조건으로 소규모 생산을 제거하려고도 했지만, 농민 자본가에 맞서는 투쟁을 하기 위해 소농과 동맹을 맺었다. 그것은 분명히 농촌 마을에 관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부여된 모순적 과업이었다.

 

 레닌에게 이러한 동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다른 부분이 일어날 때까지 프롤레타리아트를 방어할 수 있었다. 그것은 농민에 대한 복종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러나 농민의 독자적 정책을 발전시켜 그들을 집합적 노동의 과정으로 끌어들일 수 없는 무능력과 경제․ 사회적 상황 때문에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농민의 소부르주아적 주저를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전제조건이었다. 소생산자를 “폐지”시키는 것은 그들을 폭력적으로 분쇄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지만, 레닌이 1918년에 말한 것처럼 “토지의 평등한 향유가 소생산자가 관련된 한 가장 높은 이상으로까지 끌어올린 자본주의이기 때문에 “이상적” 자본주의를 향한 진전을 돕는 것이고, 농민은 그들 스스로 이 테제의 결함을 느끼고 집합적 경작을 넘어설 필요를 깨달아야 한다.” 3년 동안의 끔찍한 내전 기간 동안 실험적 방법이 러시아 농민에게 “사회주의” 의식을 가져다주지 못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백군에 맞서 프롤레타리아트가 그들의 토지를 방어하도록 농민이 도왔다면, 이는 그들의 경제적 궁핍의 대가였고, 프롤레타리아 국가에 의한 치명적인 징발이었다.

 

 그리고 「신경제정책」은 보다 정상적인 경험의 영역을 재구축하고, “자유와 자본주의”를 되찾았지만, 이는 무엇보다 물품세로 “쿨락이 그 전에 밀어붙일 수 없었던 곳까지 밀어붙일 수 있다”고 레닌이 말하도록 한, 농업 자본가의 편을 든, 거대한 몸값이었다. 경제기구(국가 조직과 당)에 대한 재생하는 부르주아지로부터의 압력에 저항할 수 없었던 중도주의의 지도력 아래에서, 중농은 스스로를 부유하게 하고 빈농과 프롤레타리아트와 단절하도록 고무되었다. 완벽한 논리적인 우연의 일치가 일어났다. 프롤레타리아 봉기 10년 후 부르주아 요소를 향한 세력 균형의 이동은 그 실현이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예치치 못한 착취 수준에 의존한, 5개년 계획의 도입과 맞아떨어졌다.

 

 러시아 혁명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 사이의 관계라는 복잡한 문제를 풀려고 했다. 그 실패는 오토 바우어나 카우츠키 아류가 주장한 바와 같이 부르주아 혁명 만이 의제에 올라 있는 상황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고, 경제적, 정치적 승리를 보증할 수 있었던 역사적 경험에 근거한 행정의 원칙으로 볼셰비키가 스스로를 무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농업 문제의 중요성을 드러냈기 때문에 러시아 혁명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획득에 공헌했다. 이 문제에 대한 코민테른 2차 대회의 테제가 더 이상 온전하게 유지될 수 없었고, 특히 “농민에게 토지를”이라는 구호가 재검토되어야하고 그 의미에서 제한적임을 덧붙여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파리 코뮨에 대한 맑스의 저작에 영감을 얻고 그 후 레닌이 발전시킨 것에서 맑스주의자는 사회 진화의 필요하고 진보적 형식으로서의 중앙집권주의와 부르주아 국가의 억압적 중앙집권주의 사이의 명확한 구분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첫 번째 중앙집권주의에 기초했지만, 두 번째의 부르주아 국가의 중앙집권주의의 파괴를 위해 싸웠다. 그들이 과학적으로 무정부주의의 이데올로기를 반박했던 유물론적 입장에 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러시아 혁명은 죽어 묻혔던 것처럼 보였던 이러한 논쟁 속으로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경제적․ 사회적 중앙집권주의가 폐지되지 않고 노동 대중에 의한 “자주적 결정”의 테제로 대체되었다는 사실에서 소련의 반혁명적 진화의 기원을 보는 수많은 비판들이 있다. 이는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의식이 이행기를 훌쩍 넘어서야 했다는 것을 요구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동시에 가치, 시장, 임금 차이, 기타 자본주의의 흔적에 대한 즉각적 억압에 대한 요구가 있다. 다른 말로, 절대적으로 서로 적대적인 중앙집권주의의 두 가지 의미 사이의 혼돈이 있고, 이행기를 항해하는 방식으로 정교하든 하지 않든 간에 “권위주의”에 반대하는 전형적인 무정부주의로의 회귀가 있다. 권위의 원칙에 자율성의 원칙으로 반대하는 것은 추상이다. 1873년 엥겔스가 말한 것처럼 역사적 진화와 생산의 과정에 연결된 두 가지 매우 상대적 용어가 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경제적․ 정치적 중앙집권주의

 

 원시 공산주의로부터 제국주의적 자본주의로 가다가, 문명화된 공산주의로 “되돌아가는” 진화에 근거해서, 자본주의적 “카르텔주의”와 “트러스트화”는 원시적인 사회적 자율성을 밀쳐버리고, 권위가 지속되지만 “생산조건이 그것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한” 엄격한 한계를 유지하는 체제에 의해 준비될지라도 실제로는 “무정부적인” 조직형식인 “사물의 관리”를 위한 기초를 놓는다(엥겔스). 본질적인 것은 유토피아적 방식으로 단계를 뛰어넘으려거나, 이름만 바꿈으로서 집권주의의 본질과 권위의 원칙을 바꿀 수 있다고 믿어 보려는 것이 아니다. 보기를 들어 네덜란드 국제주의자들은 이러한 분석이 예상하는 사회적 실재와 이론적 편의에 근거한 분석을 피하지 않았다. (앞에 인용한 그들의 연구를 참조할 것)

 

 러시아 경험에 있어서 중앙집권주의에 의한 그들의 비판은 경제에 대한 관료적 독재를 발생시킨 “전시 공산주의” 시기에만 유독 관련시킨 사실에 의해 “더 쉽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우리가 알기로는 그 뒤의 신경제정책은 폭넓은 경제적 “분권주의”를 선호했다는 사실이다. 볼셰비키가 “최고 경제위원회”로 시장을 대체하여 시장을 억압하기를 원했고 (우리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알고 있다) 따라서 그들이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배하는 독재로 전환시킨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은 논쟁거리다. 따라서 네덜란드 동지들에게는 내전의 필요성의 결과로서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극도로 집권화되고 단순화된 경제적, 정치적 기구를 부과해야 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적 계급을 근절시켰지만 독재의 통제력을 상실했다고 보였다. 불행하게도 네덜란드 동지들은 우리에게는 근본적인 이 문제의 정치적 측면을 이해하는데 시간을 쏟지 않았던 것이다.

 

 동시에 집권주의 문제에 대한 변증법적 분석을 거부하고 뛰어넘음으로써 그들은 말의 의미를 바꾸는 것으로 끝나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본 것은 실천적 문제를 해결한다는 관점에서 하나의 관심일 뿐인 이행기가 아니라, 공산주의의 높은 단계였기 때문이다. “경제생활의 모든 흐름이 흐르지만 생산을 지시하거나 사회적 생산물의 분배를 결정할 권리가 없는 경제적 중심에 기초한 일반적 사회회계”에 대해 말하는 것은 쉽다. 그리고 그들은 “자유롭고 동등한 생산자들의 연합에서 경제생활의 통제는 인물이나 기구로부터 나오지 않고 경제생활의 실질적 경로의 공적인 등록으로부터 나온다. 이는 생산이 재생산에 의해 통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덧붙인다. 다른 말로 “경제생활은 평균 사회적 노동시간을 통해 스스로 통제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식화로는 프롤레타리아 행정의 문제에 대한 해법은 전혀 진전이 없다.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제기된 시급한 문제는 공산주의 사회를 규제하는 메카니즘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곳으로 이끄는 길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동지들이 즉각적 해법, 즉 억압적 형식만 취할 수 있는 경제적 또는 정치적 집권주의가 아니라 “일반 경제법칙”을 통해 생산을 조정하는 기업 조직에게 관리를 이전하는 것을 제안한 것은 사실이다. 그들에게 착취의 폐지(따라서 계급의 폐지)는 사회 행정에의 대중의 끊임없는 참여와 성장을 포함하는 긴 역사적 과정을 통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생산 수단과 생산물을 처분할 수 있는 기업 위원회의 권리를 포함한다는 전제 하에, 생산 수단의 집단화를 통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 자신의 모순을 포함하는 정식화라는 사실은 별개로 해도, 사회 집단 사이의 제한적이고 분산된 집단화(주주들의 사회는 집단화의 부분적 형식이다)로 통합적 집단화(특정인이 아닌 모든 사람의 재산)를 반대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것은 단순히 부르주아지의 몰수라는 또 하나의 법적 해결에 대한 법적 해결(기업의 처분권)로 대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부르주아지의 몰수는 단순히 사회 변혁의 초기 조건이며 (완전한 집단화가 즉각적으로 실현가능하지 않더라도) 계급투쟁은 혁명 전이라도 프롤레타리아트가 결정적 방향타를 쥐게하는 정치적 기반 위에서 계속될 것이다.

 

 네덜란드 국제주의자들의 분석은 틀림없이 맑스주의로부터 벗어나 있다.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트는 계급이 사라질 때까지, 즉, 세계 자본주의가 사라질 때까지 국가의 “천벌”을 견디도록 강제된다는 기본적 현실을 고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필요성을 고려한다는 것은 국가 기능이 아직 잠정적으로 집권화와 혼합되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의 억압기구의 파괴 이후에 일어나고 노동대중의 문화수준의 발전과 책임지는 능력과 반드시 반대되지는 않으면서도 그렇다. 역사적, 정치적 조건의 실질적 맥락에서 이러한 발전에 대한 해법을 찾는 대신에, 네덜란드 국제주의자들은 유토피아적이고 퇴행적인, “부르주아 권리”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 공식화에서 찾으려 했다. 더 나아가 전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 행정의 복잡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문화적”으로 준비될 수 없다면(그리고 이러한 실재는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프롤레타리아트 뿐만 아니라 가장 선진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적용된다) 공장과 생산의 “처분권”의 정확한 사용은 무엇인가?

 

 러시아 노동자는 효과적으로 공장을 그들 수중에 넣었고, 관리할 수 없었다. 이것이 자본가들을 몰수하고 권력을 잡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들이 서구 자본주의를 배울 때까지 그리고 영국 노동자나 독일 노동자의 문화를 습득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1917년의 러시아 노동자보다 서구 노동자가 프롤레타리아 행정이라는 거대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자질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서구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폐해 많은 분위기에서 제기된 모든 문제를, 특히 공산주의의 높은 단계에서만 온전하게 나타나는 문제를 “스스로” 풀 수 있는 “통합적” 사회의식을 발전시킬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사회의식을 집중시키는 것은 당이었고, 당은 오직 경험에 의해서만 그럴 수 있었다.) 다른 말로 (당은 완전히 효과적인 해결책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혁명 전 뿐만 아니라 혁명 후(무엇보다 후)에 사회 투쟁의 불꽃 속에서 해법을 정교하게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당은 프롤레타리아트에 반대하지 않고 이러한 거대한 과업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부분이 된다. 왜냐하면 대중의 능동적이고 자라나는 협력 없이는 적들의 먹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모두의 행정”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초석이다. 그러나 역사는 구체적인 대안을 제기한다. “오늘날의 그들, 예속 없이, 상사 없이, 회계 없이는 할 수 없는 그들과 함께” 사회주의 혁명을 할 것인가 아니면 혁명은 없을 것이다. (레닌, 「국가와 혁명」)

 

 

 

맑스주의 분석에서 이행기와 국가의 이중성

 

 이행기 국가를 다루는 장에서 우리는 이미 국가가 사회의 계급 분화에 기원하고 있음을 상기시킨 바 있다. 원시 공산주의에서는 국가가 없었다. 국가는 계급 착취를 일으키는 주체와 함께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국가가 존재하는 한 그 구체적인 특성을 보존하고 기본적 성격을 바꿀 수 없다. 다시 말해 억압적이고 강제적이며 부패하는 유기체로서의 국가이기를 멈출 수 없다. 역사적 과정에서 변화하는 것은 국가의 기능이다. 노예 주인의 도구가 되는 대신 봉건 지주, 그리고 부르주아지의 도구가 되었다. 국가는 지배계급의 특권을 보존하는 완벽한 도구이다. 이것은 자신의 국가에 의해 위협받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착취 계급의 부상과 함께 사회에서 발전하는 새로운 특권에 의해 위협받는다. 뒤따르는 정치혁명은 이미 진행된 경제 구조의 변혁의 법적 결과였고 낡은 계급을 지배하는 새로운 착취 형식의 승리였다. 이것은 옛 체제 내에서 세워지고 공고화된 물질적 조건의 기반 위에서 새로운 혁명 계급이 그 자신의 생산 양식을 조직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국가에 대한 부끄러움이나 불신의 기반 없이 적응하고 완전하게 하려했던 이유이다. 세계적 규모에서 지배하기 위해 역사에서 최초이며, 그 국가가 역사에서 세워진 모든 억압 수단의 가장 압축적 형식인 부르주아 계급에게는 더욱 그렇다. 부르주아지와 국가 사이에는 적대가 없고, 밀접하고 파괴 불가능한 연결이 존재한다. 이러한 연대는 국경에 제지되지 않는다. 그 뿌리가 국제 자본주의 체제에 있기 때문에 국경도 넘는다.

 

 대조적으로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창설로 지배 계급과 국가 사이의 역사적 관계는 수정된다. 부르주아 국가의 파괴 위에 세운 프롤레타리아 국가는 아직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 도구임은 진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배는 물질적 기반이 부르주아 사회 안에 놓였던 사회적 특권의 보존을 목표로 하지 않고 모든 특권의 파괴를 목표로 한다. 새로운 국가는 소수를 지배하는 다수라는 새로운 지배 관계, 즉 새로운 법적 관계(집합적 소유)를 표현한다. 반면에 새로운 국가는 자본주의 사회의 환경의 영향 아래 남아 있기 때문에 (혁명에서의 동시성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아직 “부르주아 권리”의 대표이다. 이는 아직 사회 경제적 과정에서 뿐만 아니라 수백만의 프롤레타리아 수중에 있다. 여기에 이행기 국가의 이중성이 드러난다. 한편으로는 착취 계급에 맞서는 무기로서 그 “강력한” 측면을 드러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착취체제를 공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착취를 폐절하는 유기체로서 “약한” 측면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새로운 국가는 본질적으로, 정의 그대로 자본주의 특권을 끌어내는 축의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부르주아지와 자본주의 국가 사이에 어떠한 적대도 없지만, 프롤레타리아트와 이행기 국가 사이에는 적대가 생겨나는 이유다.

 

 이러한 역사적 문제는 이행기 국가가 매우 쉽게 국제 계급투쟁에서 반혁명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부정적 효과가 있다. 확립된 사회계급이 수정되지 않는다면 이행기 국가가 프롤레타리아 성격을 유지할 때라도 그렇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국가의 활동에 대해 필수불가결한 통제를 행사하고 자신의 구체적 이해를 방어해야하는 당의 계급정치와 대중조직(노동조합, 평의회 등)이라는 경계하는 존재를 통해 잠재적 모순의 발전에 맞서 버틸 수 있다. 이러한 조직들은 그들을 발생시킨 필요성, 다시 말해 오직 계급투쟁이 사라질 때에만 함께 사라질 수 있다. 이러한 개념은 전적으로 맑스주의의 가르침에 따라 고무된다. 왜냐하면 이행기 국가 내의 프롤레타리아 “해독제”의 의미는 이미 우리가 지적한 대로 맑스와 엥겔스 뿐만 아니라 레닌이 방어했던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조직들의 능동적 존재는 노동자에 봉사하는 프롤레타리아 국가를 유지하고 노동자에 적대로 되돌리는 것을 막는 조건이다.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모순적 이중성을 부정하는 것은 이행기의 역사적 의미를 왜곡하는 것이다.

 

 반면에 몇몇 동지들은 이 시기에 노동자 조직과 국가 사이에는 오직 동일시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기를 들어 헤놀트(Hennault)동지의 “러시아 국가의 본질과 진화”, 「빌랑」, 1121쪽) 네덜란드의 국제주의자들은 이보다 더 나아가고 있다. “노동시간은 사회적 생산물의 분배의 척도이고 모든 분배는 모든 ”정치“의 밖에 있다. 노동조합은 공산주의에서 어떤 기능도 없으며 삶의 조건의 개량을 위한 투쟁은 끝이 날 것이다.”(그들의 글, 115쪽)

 

 중도주의 또한 소비에트 국가가 노동자 국가이기 때문에 노동자가 제기한 어떠한 요구도 “그들의” 국가에 대한 적대의 행위가 될 수 있고, 국가기제에 노동조합과 공장위원회가 전적으로 종속되는 것을 정당화하는 개념으로부터 출발한다.

 

 앞에서의 고려지점에 근거해서 소비에트 국가가 프롤레타리아트에 적대하더라도 프롤레타리아 성격을 유지했다고 우리가 말한다면, 실재와 전혀 공통점도 없고 소련의 방어를 거부하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를 거부하는 미묘한 구별점인가? 아니다. 이러한 명제는 무엇보다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역사유물론의 견해로부터 정당화되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 우리가 프롤레타리아트와 국가 사이의 동일성을 거부하고 국가의 성격과 기능 사이의 어떠한 혼동도 없어야 한다고 말한다는 사실에 의해 러시아 혁명의 진화에 대해 우리가 도출한 결론이 그 전제에서 손상되지 않기 때문이다.

 

 소비에트 국가가 더 이상 프롤레타리아 국가가 아니면 무엇인가? 이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자본주의 국가임을 보이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관료국가라고 말하고 러시아 국가가 역사에서 원천적으로 지배계급이고 새로운 생산양식과 착취와 연결된다고 발견한 것이 더 나은 것인가? 사실 그러한 설명은 맑스주의 유물론에 등을 돌리게 된다.

 

 관료제가 어떤 사회체제의 기능에서도 필수불가결한 도구였지만, 그 스스로 착취계급으로 변환된 사회 계층은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사회 내에 막강한 관료제의 수많은 사례들이 있지만, 개인으로서를 제외하면 생산에 작용하는 계급들과 혼합되지는 않았다. 「자본」에서 맑스는 인도의 식민화를 검토하면서, 관료제가 「동인도회사」의 외양으로 나타났음을 보였고, 동인도회사는 생산이 아닌 유통과의 경제적 연관을 가졌는데, 실질적으로 정치권력을 도시 자본주의의 편에서 행사했다고 말하고 있다.

 

 맑스주의는 계급에 대한 과학적 정의를 내리고 있다. 우리가 그것을 견지한다면 러시아 관료주의가 계급도 아니고 지배계급보다 못한 것인데,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바깥의 생산에 대한 어떠한 특수한 권리도 가지지 않고, 러시아에서의 집산화가 그 기본에서 아직 존재한다는 주어진 상황에서 그렇다. 러시아 관료주의가 사회적 노동의 상당부문을 소비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적 기생의 유형이지 계급 착취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러시아에서 사회관계가 노동자에 대한 거대한 착취를 나타내지만, 이는 집단이나 개인의 재산권의 행사로부터 나오지 않고 전체적인 경제·정치적 과정으로부터 나오고, 관료주의가 원인이 아니라 단지 표현이며, 우리 견해로는 이차적인 현상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진화는 무엇보다 러시아 내에서 뿐만 아니라 국제적 수준에서 적 세력의 추동력을 봉쇄할 수 없음을, 스스로 보여준 중도주의 정책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러시아의 사회적 문맥의 독창성은 전례없는 역사적 상황에서 놓여있는데, 그것은 자본주의 세게 내에서의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존재였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착취는 국가기구에 대한, 그리고 당 기구, 이어서 당 정치에 대한 비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압력의 비중에 따라 성장한다.

 

 이러한 착취가 노동자로부터 약탈한 잉여노동으로부터 사는 관료적 계급의 존재를 통해서 이루어짐을 설명할 필요가 없지만, 그것이 대중 속에서 정치적·교육적 역할을 지속하기 보다는 스스로 국가에 통합되는 당에 대한 적들의 영향력을 통해서임을 설명할 필요는 있다. 트로츠키는 (「레닌 이후의 제3인터내셔널」에서) 더욱더 당에 가해지는 압력의 계급적 성격과 부르주아 지식인, 소부르주아지, 쿨락, 그리고 당 관료주의로부터 가해지는 이러한 압력 사이의 연결고리에 주목했으며, 이러한 모든 세력을 통해 작동하는 세계 부르주아지의 압력도 중시하고 있다. 이것이 관료주의의 뿌리와 정치적 타락의 세균이 당과 국가의 상호침투의 사회 현상 뿐만 아니라 유리하지 않은 국제적 상황에서 추구되는 이유이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권력을 최고로 끌어올린 “전시공산주의”나, 프롤레타리아 경제를 위한 타협이나 정상적인 체제의 표현이었던 「신경제정책」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수바린(Souvarine)은 그의 책 「볼셰비즘에 대한 개관」("Apercu sur le bolshevisme")에서 당이 전체 국가기구 위에서 기계같은 철권을 휘둘렀다고 주장하면서 당과 국가 사이의 진정한 관계를 역전시켰다. 그는 러시아 혁명을 매우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어떠한 미리 계획된 의도와 기획 없이, 보편적 문화 결핍, 지친 대중의 무관심, 그리고 혼란을 극복하려는 볼셰비키의 노력이라는 3중 효과를 통해, 수혜자들이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 체제의 변혁”(245쪽)이라고.

 

 그러나 만일 혁명가들이 맑스주의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숙명주의, 즉 물질적 조건의 “미성숙”과 대중의 문화적 무능력으로부터 도출된 숙명주의에 빠지는 것을 피할 수 있다면, 그리고 러시아 혁명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아니었다는 결론을 거부한다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역사적, 객관적 조건이 그 당시 존재했고, 지금도 세계적 규모에서 존재하는데, 이는 맑스주의 관점으로부터 문제를 제기하는 유일한 타당한 기준이다.) 그들은 정치적 요소인 당, 즉 역사적 필요성의 수준에서 필수불가결한 도구인 당이라는 중심적 쟁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들은 또한 혁명에서 당 권위의 유일하게 가능한 형식은 독재적 형식임을 결론내려야 한다. 문제의 핵심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당 독재 사이의 되돌릴 수 없는 적대의 유형을 제기함으로써 다시 쓸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혁명 스스로에게 등을 돌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시 반복하고자 한다.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한 나라이든 식민지처럼 후진된 나라든 간에 당의 독재는 이행기의 불가피한 표현임을. 맑스주의자의 기본적 임무는 러시아 혁명의 거대한 경험에 기초해서 이러한 독재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 속에서 유지될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을 구체적으로 검토하는 것, 다시 말해 프롤레타리아 권력이 어떻게 세계 혁명으로 나아갈 수 있고 나아가야 하는지를 검토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숙명주의자들”은 이러한 문제를 다루려 하지 않았다. 이 문제에 대한 해법에 조그만 진전이라도 없다면, 문제의 엄청난 복잡성 속에서 연약한 혁명적 핵심의 고통스런 고립이라는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제기된 본질적 문제는 당과 계급투쟁 사이의 관계이며 이러한 맥락 안에서 당의 조직화 양식과 그 내적 삶의 문제가 있다.

 

 「빌랑」의 동지들이 당의 두 가지 활동에 대한 그들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옳다. 그들은 혁명 준비의 기본으로서 (볼셰비키당 역사가 보여주듯이) 당대의 분파투쟁과 대중조직 내의 투쟁을 강조했다. 문제는 이러한 활동 형식이 혁명 후 사라지는가, 급진적으로 변혁되는가를 아는 것이다. 그 상황은 계급투쟁이 최소한도로 약화되지는 않지만 다른 형식으로 발전하는 상황이다. 분명한 것은 어떠한 조직 방법이나 공식이라도 경향과 분파의 성장을 통해 당내에서의 반향으로부터 계급투쟁을 막을 수 없다는 점이다.

 

 중도주의의 “단일주의(monolithism)” 같은 러시아의 트로츠키 반대파의 “모든 것을 희생한 통일”은 역사적 실재에 정면으로 대들었다. 반대로 분파의 인식은 매우 변증법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한 긍정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적절한 맥락에서 문제를 제기할 뿐이다. 「빌랑」의 동지들은 몇몇 보석같은 문구가 해법이 되지 않는다는데 동의하고 있다. 아직 더 검토해야 할 것은 분파투쟁과 그에 따른 강령 사이의 적대가 어떻게 동질적인 지도력과 혁명 규율과 조화를 이룰 것인가이다. 같은 방식으로 노동조합조직 내의 분파의 자유가 프롤레타리아트의 단일당과 어떻게 일치시킬 수 있는가를 우리는 바라보아야 한다. 미래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대답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계속)             

 

 <번역 -LCG Oh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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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공산주의자 선언 - 고타 강령 비판 by ICT

1875년 공산주의자 선언 - 고타 강령 비판

 

「혁명적 전망」, 2005, 37호, 국제공산주의경향

 

 

 우리는 여기 한 명의 지지자가 마르크스의 1875년 고타강령 비판을 검토한 글을 게재한다. 이 글은 임노동을 자본주의의 근간으로 보는 마르크스의 비판을 보면서, 그렇다면 공산주의에서의 노동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이른바 비인간적인, 자유가 없는, 소외된 노동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에서부터 더 나은 세상의 가능성, “삶에 대한 선언으로서의, 따라서 삶의 향유로서의 노동”에 대한 지적에 이르는 마르크스의 방법을 묘사한다. 여기서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라는 악이 존재하는 한 계속 남아있을 마르크스의 업적의 지속적인 힘의 비밀을 발견한다. 오늘날까지 존재하는 마르크스의 업적의 타당성은 러시아 블록 붕괴 이후 그 타당성을 상실했다고 믿었던 자본주의 계급을 초조하게 하고 당황하게 한다.

 

비판

 마르크스는 그의 작업이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투쟁하는 데 쓰일 이론적 무기고를 만드는 작업의 일부라고 본 혁명가였다. 고타 강령 비판이 쓰여졌을 당시 공개가 금지되었던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고타 강령은 1875년 5월, 「독일사회민주당」 창당의 기반으로 승인되었다. 마르크스의 비판은 이후로 16년 후, 그가 죽은 지 8년만인 1891년에야 출간되었다. 이것은 그 다음 세기 동안 그의 저작과 사상의 일부가 왜곡되고 은폐되는 서막에 불과했다. 이 짧은 글은 「제2인터내셔널의 사회민주주의」와 스탈린주의의 영향 아래에서 널리 유포된 마르크스에 대한 해석에 대해 논박한다. 원래의 것과 완전히 대립될 때까지 왜곡된 마르크스의 두 가지 주요 개념은 공산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의 본질과 공산주의 사회 그 자체이다. 사회민주주의, 스탈린주의와 트로츠키주의로 알려진 “비판적인 스탈린주의”, 마오주의와 각각의 추종자들은 모두 공산주의에서의 노동을 국가를 위한 임노동으로, 공산주의 자체는 국가 자본주의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개념들은 마르크스가 공산주의의 본질적인 성격이라고 보았던 삶과 인간성의 성취로서의 노동,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로서의 공산주의와 직접적으로 대립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고타 강령 비판」에 첨부된 편지에서 “…우리의 입장은 모두 강령의 원칙과 별개이며, 전혀 다른 것이다”고 쓰고 있다. “나의 임무는 당을 타락시키는 강령에 대해 외교적인 침묵으로라도 승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반대하는 것이다.” 고타 강령의 저자는 바로 그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였다! 리프크네히트와 새로운 당의 지도자들에게는 단결은 강령 자체의 세부항목보다 더 중요한 것이었다. 창당 대회에서 강령의 오류를 수정하고자 했으나 실패한 아우구스트 베벨은 1910년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런던의 두 늙은이들과 동의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가 재치있는 계획, 숙련된 전술로 보았던 것들을 그들은 나약함과 무책임한 순종으로 여겼다. 궁극적으로, 통합의 사실만이 중요한 지점이었다.”

 

 「비판」은 「공산주의자 선언」처럼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같은 목적을 갖고 쓰여졌다. 그것은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에 대한 명쾌하고 직접적인 언급이다. 그의 삶의 막바지에 「고타 강령」의 맹목적인 국가주의적 교의를 파괴하기 위해 쓰여졌기 때문에, 「비판」은 다음과 같은 요약된 논의를 담고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본질적인 요소, 그것에 반하는 것으로서의 생산양식의 혁명적인 변형, 그리고 「자본」에서 마르크스가 존재하는 사회적 질서를 극복하도록 운명지어진,  강조체로 쓰여진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의 대략적인 묘사1)가 그것이다.

 

 「고타 강령」은 “노동은 부와 모든 문화의 원천이다”라는 주장으로 시작한다. 마르크스는 아니라고 말한다. “노동은 모든 부의 원천이 아니다. 자연 또한 사용가치의 원천이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그 자신만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몇몇 통찰 중 하나를 방어한다. 상품의 두 가지 본질, 사용가치(왜 우리가 대상을 원하는가)와 교환가치(그 대상은 시장에서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가) 사이의 구분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생산 체계의 바로 뿌리에서부터 생산의 목적 사이의 충돌이 있음을 밝혀준다.2) 부는 사물의 축적으로 존재하지만 동시에 가치의 덩어리로서도 존재한다: 발전된 자본주의에서 가치는 화폐나 화폐가치로 실현된다.

 

 자연은 인간의 “비유기적인 삶”이며,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다. 노동은 자연 없이, 감각적인 외부 세계 없이는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다. (그룬트뤼세)

 

 노동이 사용가치, 즉 물질적 부를 창조하는 한, 부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 사용가치는 언제나 자연적인 토대를 갖는다. 노동은 인간의 자연적 조건, 다시말해 사회적 형태와 독립적인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적 교환 조건이다. (정치경제학 비판)

 

 인간과 자연의 물질적 교환의 조건은, 인간 존재의 영속적인 자연적 조건이며, 따라서 그 모든 사회적 형식에 평등하게 공통적이라기 보다는, 이러한 존재의 모든 형식과 독립적이다. (「자본」, 1권)

 

 마르크스의 관심은 가치(사물의 집합이라기보다 원장에 기재된 숫자의 집합)로서의 부는 부의 독특하고 근대적인 개념이라는 데 있다. 가치는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사회 체제의 창조물이며, 그것은 “공평한 분배”만을 요구할 뿐인 「독일노동당」이 완전히 잃어버린 지점이다. 이것은 우리가 「사회민주주의」와 자유주의적 근대 운동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똑같은 자본주의와의 타협이다.

 

 마르크스는 상품의 두 가지 성격에 대해 폭로하면서 「자본」을 시작한다. 왜 우리 사회에서 상품은 두 가지 형식, 유용한 상품과 가치있는 상품의 형식을 가지는가? 이것은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결코 대답할 수 없었던 주요한 두 개의 질문 중 하나였다. 다른 하나는 ‘어떻게 자본주의가 발생했는가’이다. 상품에는 두 가지 형식의 부가 있다는 것이 풀기 어려운 문제라는 것은 자본주의가 자연적 질서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직면한 이 새로운 사회적 게임은 생산 체계의 뿌리에서 비롯된 몇 가지 종류의 문제 위에 성립한다.

 

 10년 전, 마르크스는 “그 자신의 즉각적인 사용을 위해 물건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자는 생산물을 만들지만 상품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상품을 생산”하는 것은 “노동 뿐만 아니라 사회적 노동”이라고 주장한다(임금, 가격, 그리고 이윤). 또한, 마르크스에게 상품을 생산하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다. 이러한 유형의 노동은 사회적 노동인데, 왜냐하면

1. 이 노동은 노동의 사회적 분업에 종속되어 있다.

2. 이 노동은 사회적으로 결정된 평균 노동(시간)이다.

3. 이 노동은 특정 사회의 필요를 충족시키도록 되어있다.

 

 생산자들은 상품의 교환을 통해 사회적으로 관계를 맺는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노동의 특별한 성격을 강조한다.

 

 교환가치를 결정하는 노동의 조건은 노동의 사회적 결정요인 또는 사회적 노동의 결정요인이지만 특정한 방식으로 …사회적이다. [이 상황에서는] 개개인이 스스로를 위해 노동하고 특수 노동이 그 반대인 추상적인 일반 노동[과] 그 형식, 사회적 노동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교환의 한계라는 조건 속에서만 드러나는 특수한 사회적 성격이다.(정치경제학 비판)

 

 

공산주의 사회에서의 노동

 

 자본주의가 끝난 이후의 노동은 어떤 모습일까? 마르크스는 그 사회에서의 노동은 단순한 삶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삶의 “첫 번째 필요”가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모든 노동 분업이 폐지되는 것은 아니다. 폐지되어야만 하는 노동의 분업은 인간을 그 “노예화시키는 복종” 상태로 몰아넣는 분업이다. 1844년 마르크스는 두 종류의 노동을 구분했다.

 

 첫 번째 노동은 “인간 존재로서 생산하는” 사회로, 생산수단으로서의 사적 소유가 없는 상황에서의 것이다. 여기서 노동은 “자유로운 삶의 표현이며, 따라서 삶의 향유”이며 여기서 삶은 “자신의 특수성이 지지되는 삶”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노동은 “진실된, 적극적인 재산”이다.

 

 두 번째 노동은 사적 소유 아래에 있는 노동이며 “삶의 소외”이다. “그것은 … 필요의 충족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자신의 외부에 있는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따라서 그것은 “강제 노동이며 …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 다른 이의 것이다.” 이러한 노동은 “자기 소외”이다.

 

 그러므로 소외된 노동자는 … 생산물과 생산을 소유하고서, 생산하지 않는 자들에 의한 지배를 만들어낸다. 노동자와 노동의 관계는 자본가의 노동과의 관계를 만들어낸다. … 그러므로 사적 소유는 소외된 노동의 생산물, 결과, 필연적인 귀결이다.

 우리가 정치경제학에서 소외된 삶, 소외된 노동의 개념을 이끌어낸 것은 사적 소유의 운동의 결과였다는 것은 옳다. 그러나 이 개념의 분석은, 사적소유가 소외된 노동의 이유, 원인으로 보인다고 해도, 오히려 그 결과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후에, 이 관계는 상호적인 것이 된다. 그러므로 소유는 소외된 노동을 만들어낼 수 없다. 노동이 소유의 형태로 전유될 수 있게 되기 전에, 노동은 우선 소외된 노동의 형식이여야만 한다. 그러므로 인간과 사물의 소유 관계는 좀 더 근본적인 인간 사이의 사회적 관계를 표현한다. 사적 소유의 법적인 형태는 소외된 노동의 사회적 관계를 전제한다.3)

 

 시몬 클라크(Simon Clarke)는 이를 잘 설명한다:

 

 사람들 사이의 상호 필요의 본질적인 사회적 관계는 사물 사이의 관계라는 소외된 형태로 나타나며, 타인에 대한 나의 사회적 의존은 나의 사물에 대한 의존이라는 소외된 형태로 나타난다. 교환의 확장과 노동의 분업과 함께, 노동의 활동은 소외된 활동이 되는데, 이것은 노동자가 생산한 것이 노동자의 필요와 아무런 고유의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그/그녀가 특정한 형태의 활동을 할 필요나, 특정한 생산물 또는 타인의 그 생산물에 대한 필요의 인식에 반응해서 특정한 대상을 생산하지 않는다. 노동자는 단순히 다른 생산물에 대한 생산물의 교환을 위해 생산하며, 살기 위해 생산한다. 그러므로 생산물은 무차별한 사물로써 노동을 지배한다.4)

 

 [여기서] 나의 개성은 내 활동을 내가 증오하고 나에게 고통인 만큼 나에게 소외된다. 활동은 나의 내적 필요가 아니라 외적 필요에 의해서만 부과된 활동의 외형일 뿐이다. (Paris Notebooks)

 

 1년 후, 마르크스는 노동자의 활동이 “그 자신의 인간적 삶의 자유로운 표현”이 아니라, “소외된 그의 권력을 자본에 팔아넘기는 것”이라는 것을 목격한 마르크스는 “[이] 노동은 사적 소유에 의해 조건 지어지고 다시 사적소유를 만드는, 자유롭지 못하고, 비인간적이며, 반사회적인 활동”이라고 쓰고, 그 후 “사적 소유의 폐지는 [소외된] 노동의 철폐로써 인식될 때 현실이 된다”(신성가족)고 썼다. “개인적 차원에서 자연을 전유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모든 생산은 한정된 사회적 형식에 의해 조정된다.”(정치경제학 비판) 이제 노동의 사회적 차원을 고려해 보자. 이제 질문은 노동 과정이 “노예 관리자의 무자비한 채찍 아래 작동하는지, 아니면 자본가의 걱정스런 시선 아래 작동하는지”와 연관되게 된다.5)

 

 이 두 가지 형식의 노동은 계급 사회에서 작동하는 지배적인 노동의 형식이다. 계급 사회에 걸쳐, 노동은, 전(前)자본주의의 “인격적 의존” 아래 직접적으로 강제된 노동이든, 또는 자본주의 상품 사회에서의 “물질적인 의존” 아래 소외된 노동이든, 개인에게 강제된 활동이었다.(그룬트뤼세) 그런 노동은 노동자를 “노동하는 동물”(잉여가치 이론)으로 환원시켰다. 노동의 분업은 지금까지 무의식적인 것이었다. “인간 존재 자체의 활동이 인간 존재를 낯선 것, 반대 권력이 되도록 지배한다”(독일 이데올로기). 이 노동의 형식은 공산주의 사회에 존재하게 될 인간 존재의 “자유로운 개성”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아담 스미스의 관념에 따르면 노동은 “자유의 희생”이었고, 마르크스는 노동은 “노예제, 농노제, 그리고 임금 노동의 역사적인 형식”이며 언제나 “불쾌한, 외부로부터 강제된” 것이었다. 노동은 아직 “노동이 매력적이고 개인의 자기-실현을 위한 것으로 여겨지는 주관적이고 객관적인 조건”을 창조하지 못했다. 노동은 노동이 외부로부터 부과되지 않을 때, “자유의 활동”, 자기-실현, 실제로 “진실된 자유”로 여겨질 수 있다(그룬트뤼세). 마르크스가 「고타 강령 비판」 전에 그의 저작들에서 노동의 분업과 노동 자체의 “철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노동자에게 강제된 다른 형식의 노동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다. 이것이 철폐되어야 하는 형태의 노동이다. 노동은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에서는 “자기 (긍정) 활동”으로 변형되어, 삶의 수단일 뿐만 아니라 삶의 “주요한 필요”를 충족시키는 수단이 된다.

 

 임노동

 

 마르크스는 「고타강령」의 임금에 대한 제한적인 개념을 공격하면서 자본주의의 진정한 본질을 드러냈다. 마르크스는 두 가지 지점을 지적한다. 첫 번째는 “임금의 철칙”이다. 고타 강령은 임금은 언제나 생존 수준에 머무를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엥겔스가 주장하길 “마르크스가 [나로부터] 선택하고, 라쌀레가 우리에게 빌려간”, 1840년대의 마르크스의 입장이었다. 마르크스는 이 입장을 포기한다. 대신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노동자의 필요는 상대적이고, “도덕적이고 역사적인 요소”를 포함한다고 강조한다. 유사하게, 마르크스는 미출간된 「Resultate」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노예의 최저임금은 일정한 정도, 그의 노동과 독립적으로 나타난다. 자유로운 노동자에게, 그의 노동력의 가치와 상응하는 평균 임금의 가치는 그 자신의 노동과 독립적인 물리적 필요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한계에 의해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다. 모든 상품들의 가치처럼 이 가치는 계급에게 다소 일정한 평균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당면한 현실에서는 그 최소보다 항상 높거나 항상 낮은 수준의 임금을 받는 개별 노동자는 없다.

 

마르크스에게는 실질적인 임금이론이 없다. 그러나 그는 자본주의 아래에서의 노동자들의 “절대적 빈곤”에 대해 이야기한다. 임노동은 노동자의 “절대적 가난”을 의미한다. 「고타 강령 비판」에서 마르크스는 “노동력[은] … 가난하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객관적인 부로부터의 총체적인 배제라는 의미에서 절대적 가난이다.”

 

 마르크스가 임금에 대해 이야기한 두 번째 지점은 부르주아 정치 경제학과의 근본적인 차이를 명백히 보여준다.

 

 마르크스는 임금은 노동의 가격이나 가치로 드러나지만, 그것은 임금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노동력의 가치나 가격의 감춰진 형식이다. 맑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 존재한 임금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개념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비판은 한꺼번에 폐기되었다. 그것은 임노동자가 그 생존을 위해 일하는 것이 허락되었고, 그가 자본가를 위해 특정 시간동안 무상으로 일하는 한에서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모든 자본주의 생산체계는 노동시간의 연장이나 생산력의 발전, 노동강도의 강화를 통한 부불노동의 기간 연장을 중심으로 순환한다. 그리고 임노동 체계는 노예 체계이며, 실제로 이 노예제는 노동자가 더 높은 임금을 받든, 더 낮은 임금을 받든, 사회적 생산력이 발전하는 정도와 같은 정도로 더욱 심각해진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자본」 1권에 쓴 것(가치의 변형에 대하여: 노동력의 가격이 임금으로)을 다시 이야기한다. 그는 자본 1권에서 노동력의 가치와 가격 사이의 구분을 보여주었다. 그는 세계 역사가 임금의 비밀을 풀기위해서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으며, 이는 마르크스 자신의 성취라고 덧붙였다. 이것이 그가 「고타 강령」이 그의 결론으로부터 타락한 것에 대해 분노한 이유다. “그리고 우리 당에서 이러한 이해가 더더욱 기반을 획득한 후, 어떤 이들은 라쌀레가 임금이 무엇이었는지 알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라쌀레의 교의로 돌아갔다.” 임금은 보상과 다르다! 로마 군대의 군인들은 돈을 정기적으로 받고 소금과 같은 추가적인 혜택을 받았고, 따라서 그것은 봉급(salary)이었다. 그들은 자본을 위해 일하지 않았기 때문에 임금(wage)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본에 대한 임노동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오늘날 변호사 회사로부터 봉급(salary)을 받는 동업자도 아니었다.

 

 임노동자는 그의 삶을 위해서 노동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다. …그것은 특정 시간을 자본가를 위해 무상으로 일하는 한 그러하다.

 

 자본과 임금은 거울 개념이다. 물론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공장은 규범적인 사회적 조직화의 형식이다. 병원과 학교는 공장이 운영되는 것과 같이 운영된다. 공장의 지불 체계인 임금은 규범적인 것이 되어, 임노동의 진정한 본질을 가린다. 무엇보다도, 임노동을 생산하는 상품은 추상적인 사회적 노동이다.:

 

개별 노동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사회적 노동으로 오직 그 소외를 통해서만 스스로를 드러내야 한다.6)

 

 「고타 강령 비판」에서 마르크스는 “혁명적 변혁의 시대”의 끝에, 계급들과 더불어 국가 자체를 끝장낼 것을 요구한다. 「프랑스 내전」에서 마르크스는 주장한다:

 

꼬뮨은 근대적 국가 권력을 파괴하였는데, 중세 꼬뮨의 재생산으로 잘못 여겨져 왔다; [그것은] 작은 국가들의 연방으로 쪼개려는 시도로 착각되어 왔다; 국가 권력에 적대하는 꼬뮨의 반대는 과도한 중앙집권화에 저항하는 고대 투쟁의 과장된 형태로 잘못 여겨져 왔다.

 그 진정한 비밀은 이것이었다: 그것은 노동자 계급 정부였고, 착취 계급에 반대한 투쟁의 산물이었고 … 노동의 경제적 해방을 이루어내는데서 마침내 발견한 정치형식이었다. 생산자의 정치적인 지배는 그의 사회적 노예제도의 영속화와 함께 공존할 수 없다. 꼬뮨은 그러므로 계급들, 따라서 계급 지배의 존재가 기반한 경제적 기초를 제거하는 지렛대로 작동해야 한다. 노동이 해방되면, 모든 인간은 노동자가 되며, 그리고 생산적인 노동은 계급 특성이 되는 것을 멈출 것이다.

 ... 꼬뮨은 다수가 소수의 부를 위해 일하게 하는 계급 특성을 철폐하려고 했다. 꼬뮨은 착취자들을 착취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꼬뮨은 생산, 토지, 그리고 자본의 수단, 다시 말해 이제 주요하게 노예화와 노동력 착취의 수단을 자유롭고 연합된 노동의 단순한 도구로 변형시킴으로써 개인 소유를 진실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공산주의, “불가능한” 공산주의이다!7)

 

이것은 새로운 사회의 시작이 될 수 있었다. 이것은 앞으로 전진할 가능성이었으며, 부르주아 지배의 실질적인 대안이었다. 그 대안은 직접적으로 선출되고 소환 가능한 대표들로 구성된 평의회 시스템을 통한 노동자 자신의 직접적인 정부였다.

 

 물론, 꼬뮨은 프랑스 국가의 손에 유혈낭자하게 패배함에 따라 이뤄지지 못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분배의 영역에 “부르주아 권리”가 얼마나 남아있든, 그것을 집행할 국가가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았다. 마르크스는 구성원에게 노동 교환권 뿐만 아니라 생산의 분야들 사이에서 사회적 총 노동시간을 분배하는 사회를 그렸다. 그는 파리 꼬뮨의 초기에 그것을 보았기 때문에 이를 그의 시각이 되었다. 중요한 점은, 자본주의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사회의 통제로부터의 개인의 분리 위에 건설된다. 그들은 생산수단을 장악함으로써 지배하며, 따라서 노동자 계급을 창조한다. 개별 소유자가 마이크로소프트, 씨티뱅크, Land Securities나 영국 정부로 불리든 간에, 그들은 사회적 잉여(소외된 노동)를 획득하기 위해 존재한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종종 잘못 이해된다. 코르쉬(Korsch)조차 다음과 같이 썼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현재와 미래의 ‘사회’와 (현재와 미래의) ‘국가’ 사이의 진정한 이론적이고 실질적 관계를 근본적으로 명확화했다.8)

 

 앞으로 나아갈 유일한 길은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 제도의 폐지이다. 그것은 국가(민주적 노동자 조직에 의해 대체될 것이다), 그리고 임노동과 자본(협동조합과 사회적으로 지시되는 노동을 위해)

 

(번역 LCG Kim)l

 

 

1) Paresh Chattopadhyay: 해방의 선언: 마르크스의 ‘미주’ 125년 이후,

   http://libcom.org/library/manifesto-emancipation-paresh-chattopadhyay

2) Scott Meikel: 마르크스는 경제학자였는가?

3) Collected Works, Volume 3, p.271-2, 274-5, 278, 279, 270-80.

4) Clarke, S. (1991): 「Marx, Marginalism and Modern Socilogy: From Adam Smith to Max Weber」. London: Palgrave Macmillan.

5) 1962a: 198-99

6) 칼 마르크스, 「잉여가치 이론」, 2권, London 1969, 504쪽

7) http://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71/civil-war-france/index.htm

8) Karl Korsch: Marxism and Philosophy,

   http://http://www.marxists.org/archive/korsch/1923/marxism-philosophy.htm

 


 

The Communist Manifesto of 1875 - The Critique of the Gotha Programme

 

We are publishing below a text written by one of our sympathisers examining Marx’s critique of the Gotha programme of 1875. The text looks at Marx’s critique of wage labour, which forms the basis of capitalism, and gives his insights into what labour will be like under communism. The text illustrates Marx’s method which is to proceed from a ruthless criticism of what exists, namely inhuman, unfree, alienated labour and points to the possibility of a better world, “labour as the manifestation of life and therefore enjoyment of life.” In this we see the secret of the continuing power of Marx’s work which will endure as long as the evils of capitalist society. The relevance of Marx’s work to today both worries and baffles the capitalist class who thought his relevance had been destroyed by the collapse of the Russian bloc.

 

 

The Critique

 

Marx was a revolutionary who saw his work as forming part of the theoretical arsenal which could be used in the struggle to build a better world. It is significant that the critique of the Gotha Programme was suppressed at the time it was written. The Gotha Programme was accepted as the basis of the creation of the German Social Democratic Party in May 1875. Marx’s criticisms were only published 16 years later in 1891, eight years after his death. This was a prelude to the distortion and suppression of sections of his writings and thought which followed in the next century. The present short text refutes interpretations of Marx which were given widespread currency under firstly, the Social Democracy of the Second International, and secondly, under Stalinism. Two key elements which have been distorted until they are totally contrary to Marx’s own conception are the nature of labour under communist society, and communist society itself. Social democracy, together with Stalinism and “critical Stalinism” namely Trotskyism, Maoism and their respective camp followers, see labour under communism as wage labour for the state. Communism itself, they see as state capitalism. Such notions stand in direct contradiction to labour as fulfilment of life and humanity and communism as a free union of individuals which Marx saw as the essential characteristics of communism.”… our position is altogether remote from the said programme of principle and we have nothing to do with it” Marx wrote in a letter accompanying his Critique of the Gotha Programme. Marx continued “It is my duty not to give recognition, even by diplomatic silence, to what in my opinion is a thoroughly objectionable programme that demoralises the Party”. The author of the Gotha Programme was a certain Wilhelm Liebknecht! To Liebknecht and the leaders of the new party, unity was considered to be more important than the details of the Programme itself. August Bebel, who tried and failed to correct some of the program’s errors at the foundation congress, wrote in his 1910 memoirs: “It was no easy task to agree with the two old men in London. What we saw as clever calculation, adept tactics, they saw as weakness and irresponsible complaisance; ultimately, the fact of the unification was the main point.”

 

The Critique is not as well-known as The Communist Manifesto, but it has the same purpose. It is a clear and direct statement of Marx’s communism. Written near the end of his life in order to demolish the state-doting doctrines of the Gotha Programme, it contains a condensed discussion of…

 

the essential elements of the capitalist mode of production, its revolutionary transformation into its opposite and a rough portrayal, in a few bold strokes, of what Marx had called in Capital the “union of free individuals” destined to succeed the existing social order. (1)

 

 

The Gotha Programme begins with the claim that “Labour is the source of wealth and all culture”. No, says Marx, “Labour is not the source of all wealth. Nature is just as much the source of use values”. Here Marx defends one of the few insights that he claimed to be his very own, the two-fold nature of the commodity, the distinction between use value (why we want an article) and exchange value (what an article is worth on the market). These reveal that there is a conflict about the purpose of production at the very root of the production system. (2) Wealth exists as an accumulation of things, but also as a mass of value: in developed capitalism, of course, value is realised in money or money’s worth.

 

Nature is the “non-organic life” of the human and the human as “a part of nature.” The labourer can create nothing without nature, without the sensuous external world.

 

(Grundrisse)

 

-

 

It is false to say that labour in so far as it creates use values, that is material wealth, is the unique source of the latter… The use value always has a natural substratum. Labour is the natural condition of the human, the condition of material exchange between human and nature, independent of all social forms.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

 

the global condition of material exchange between the human and nature, an everlasting natural condition of human existence and thus independent of all forms of this existence, rather equally common to all its social forms.

 

(Capital, Volume I)

 

Marx’s concern is that wealth as value (a set of numbers in a ledger rather than a set of things) is a distinct and modern conception of wealth. Value is the creation of new social system of capitalism, a point entirely lost to the German Workers’ Party which just demanded “a fair distribution”. This is the same compromise with capitalism we see in Social Democracy and in liberal modern movements.

 

Marx begins Capital with this revelation of the two-fold nature of the commodity. Why do commodity goods in our society have two forms, useful goods and valuable goods? This is one of the two key questions the classical economists never asked. The other is ‘How did capitalism arise?’ To see that it is a puzzle that there are two forms of wealth in the commodity is to see that capitalism is not the natural order. This new social game we are forced to play stands on some kind of problem at the root of the production system.

 

Ten years earlier, Marx argued that “a man who produces an article for his own immediate use, consumes it himself, creates a product but not a commodity,” and that “to produce a commodity” it is “not only Labour but Social Labour” that is relevant (_Wages, Price and Profi_t). Also, according to Marx it is not labour as such but “socially necessary labour (time) ” that produces commodities. This type of labour is social labour because it is:

 

1.subordinated to the social division of labour;

2.it is socially determined average labour (time), and

3.it is destined to satisfy certain social wants.

Producers enter into social contact through the exchange of commodities. Marx stresses the specific character of this labour.

 

The conditions of labour positing exchange value are social determinants of labour or determinants of social labour, but social… in a particular way. This is a specific kind of sociality. [It is a situation in which] each one labours for oneself and the particular labour has to appear as it’s opposite, abstract general labour, [and] in this form, social labour. [It has this] specific social character only within the limits of exchange.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Labour in communist society

 

What will labour be like after capitalism has ended? Marx stresses that labour in that society would not simply be a means of life but would itself become life’s “first need.” Not every division of labour would be abolished. What must be abolished is the division of labour which puts individuals under its “enslaving subordination”. In 1844 Marx distinguished between two types of labour.

 

The first is labour in the absence of private property in the means of production where “we produce as human beings.” Here labour is a “free manifestation of life and therefore enjoyment of life,” where the “particularity of my life is affirmed.” Here labour is “true, active property.”

 

The second is labour carried on under private property, the “alienation of life”. “It is… not the satisfaction of a need; it is merely a means to satisfy needs external to it”. It is, therefore, “forced labour… not his own, but someone else’s”. This is labour as “self-estrangement”.

 

Thus through estranged labour man… creates the domination of the person who does not produce over production and over the product… The relationship of the worker to labour creates the relation to it of the capitalist… Private property is thus the product, the result, the necessary consequence, of alienated labour.

True, it is as a result of the movement of private property that we have obtained the concept of alienated labour (of alienated life) in political economy. But analysis of this concept shows that though private property appears to be the reason, the cause of alienated labour, it is rather its consequence… Later this relationship becomes reciprocal. Thus property cannot create alienated labour. Before labour can be appropriated in the form of property it must first take the form of alienated labour. Thus the proprietorial relation between a person and a thing expresses a more fundamental social relation between people. The legal form of private property presupposes the social relation of alienated labour. (3)

 

 

Simon Clarke explains this well:

 

the essential social relationship between people, their mutual need for one another, appears in the alienated form of a relation between things and my social dependence on the other person appears in the alienated form of my dependence on things. With the extension of exchange and the division of labour the activity of labour becomes an alienated activity, for the thing that the labourer produces has no inherent connection with the needs of the labourer: the labourer does not produce the particular object because it responds either to his or her need to engage in a particular form of activity, or to a need for that particular product, or to a recognition of the need of another for that product. The labourer produces simply in order to exchange the product for another product, in order to earn a living. Thus the product as an indifferent thing comes to dominate labour. (4)

 

 

[Here] my individuality is to such an extent alienated that this activity is hated by me and is a torment. It is only an appearance of activity imposed only by an external necessity and not by an inner need.

 

(Paris Notebooks)

 

One year later, Marx observes that the labourer’s activity is not “a free manifestation of his human life,” it is rather a “bartering away, an alienation of his powers to capital.” Marx writes that “[this] labour is an unfree, inhuman, unsocial activity conditioned by and creating private property” and then adds that “the abolition of private property only becomes a reality if it is conceived as the abolition of [alienated] labour” (The Holy Family). All production, considered as “appropriation of nature from the side of the individual… is mediated by definite social forms”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Now consider labour’s social dimension. The question becomes relevant re whether the labour process operates “under the brutal lash of the slave supervision or the anxious eye of the capitalist”. (5)

 

These two forms of labour are the dominant types of labour that has operated in class societies. Throughout class society labour has been an activity forced on the individual — either as directly forced labour under “personal dependence” as in pre-capitalism or as alienated labour under “material dependence” in commodity capitalist society (Grundrisse). Such labour has reduced the labourer into a “labouring animal” (Theories of Surplus Value). The division of labour so far has been involuntary. The “human being’s own activity dominates the human being as an alien, opposite power” (German Ideology). This form of labour is quite different from the human being’s “free individuality” as it will exist in communism. Referring to Adam Smith’s idea of labour being a “sacrifice of freedom” Marx says that labour “in its historical forms of slavery, serfdom and wage labour” always appears “repulsive, forced from outside”. “Labour has not yet created the “subjective and objective conditions in which labour would be attractive and self-realising for the individual”. Labour can be seen as an “activity of freedom”, as self-realizing and indeed as “real freedom” when labour is not imposed from outside (Grundrisse). When Marx speaks of the “abolition” of the division of labour and labour itself in his writings prior to The Critique of the Gotha Programme, it is with reference to the different forms of labour which are forced upon the worker. This is the type of labour which has to be abolished. Labour, transformed into a “self (affirming) activity” becomes not only a means of life but also life’s “prime need” in the higher phase of communism.

 

 

Wage labour

 

Marx exposes the true nature of capitalism in his attack on the Gotha Programme’s limited conception of the wage. Marx makes two points. The first concerns the “iron law of wages”. The Programme claims that wages will always remain at subsistence level. This was Marx’s position in the 1840s, about which Engels claimed, “Marx had adopted it [from me] and Lassalle had borrowed it from us.” Marx abandoned this position. Instead, Marx emphasised in Capital that the needs of the labourer were relative, and included “a moral and historical element”. Similarly, in the unpublished Resultate Marx wrote:

 

The minimum wage of the slave appears as a constant magnitude, independent of his labour. For the free labourer this value of his labour power and the corresponding average wage are not predestined by the limits determined by his sheer physical needs, independently of his own labour. It is here like the value of all commodities, a more or less constant average for the class; but it does not exist in this immediate reality for the individual labourer whose wage may stay above or below this minimum.

 

 

Marx has no subsistence theory of wages, but he does speak of the “absolute impoverishment” of the labourers under capitalism. Wage labour signifies the “absolute poverty” of the labourer. In The Critique of the Gotha Programme Marx says “labour power [is]… absolute poverty not as penury but as total exclusion from the objective wealth”.

 

The second point that Marx makes on the wage clearly shows his fundamental difference with bourgeois political economy.

 

Marx argues that the wage is not what it appears to be, the value or price of labour. It is a masked form of the value or price of labour power. “Thereby,” writes Marx,

 

the whole hitherto existing bourgeois conception of wage as well as the criticism directed against it was once and for all thrown overboard and it was clearly shown that the wage labourer is permitted to work for his living, that is to live in so far as he works gratis a certain time for the capitalist; that the whole capitalist system of production revolves around the prolongation of this unpaid labour through the extension of the working day or through the development of productivity, intensity of labour etc. and that the system of wage labour is a system of slavery and, indeed, a slavery which becomes more severe to the same extent as the social productive powers develop, whether the labourer receives a higher or a lower wage.

 

 

Marx restates here what he had written in Capital, Volume I (“On the transformation of value, the price of labour power into wages”). There he had shown the distinction between the value and price of labour power. He added there that it had taken a long time for the world history to decipher the secret of wage, which was Marx’s own achievement. This is why he is so angry that the Gotha Programme backslides from his result: “And after this understanding has gained more and more ground in our party, some return to Lassalle’s dogma although they must have known that Lassalle did not know what wages were”. Wages are not the same as remuneration! Roman army soldiers were given regular money payments and additional benefits, such as salt (hence salary.) They did not earn a wage as they did not work for capital. They were not wage workers for capital. Neither is a partner in a contemporary solicitors’ firm who receives a salary.

 

The wage labourer is permitted to work for his living… in so far as he works gratis a certain time for the capitalist.

 

 

Capital and wages are mirror concepts. Of course, in advanced capitalism the factory is the form of social organisation that has become normative. Hospitals and schools are run just as thought they were factories. The pay arrangement of the factory, wages, has become normative, too, hiding the real nature of wage labour. Above all, commodity producing wage labour is abstract social labour:

 

individual labour must present itself as abstract, general social labour only through its alienation. (6)

 

 

In The Critique of the Gotha Programme, Marx demands the end of the state itself along with the classes at the end of the “revolutionary transformation period”. In The Civil War in France, Marx argued:

 

[The] Commune, which breaks with the modern state power, has been mistaken for a reproduction of the medieval Communes; [it] has been mistaken for an attempt to break up into the federation of small states; the antagonism of the Commune against the state power has been mistaken for an exaggerated form of the ancient struggle against over-centralization.

Its true secret was this: It was essentially a working class government, the product of the struggle of the producing against the appropriating class, the political form at last discovered under which to work out the economical emancipation of labour… The political rule of the producer cannot co-exist with the perpetuation of his social slavery. The Commune was therefore to serve as a lever for uprooting the economical foundation upon which rests the existence of classes, and therefore of class rule. With labour emancipated, every man becomes a working man, and productive labour ceases to be a class attribute.

… the Commune intended to abolish that class property which makes the labour of the many the wealth of the few. It aimed at the expropriation of the expropriators. It wanted to make individual property a truth by transforming the means of production, land, and capital, now chiefly the means of enslaving and exploiting labour, into mere instruments of free and associated labour. But this is communism, “impossible” communism! (7)

 

 

This might have been the beginning of the new society. This was the possibility of a way forward, a practical alternative to bourgeois rule. That alternative was direct government by workers themselves through a system of councils composed of directly elected and recallable delegates.

 

Of course, it was not as the Commune crashed to a bloody defeat at the hands of the French state. But Marx could see that, whatever “bourgeois right” remains in the sphere of distribution, it did not require a state to enforce it. Marx envisaged society itself distributing not only the labour tokens among its members, but also the total social labour time among the branches of production. That became his vision because that is what he saw beginning in Paris. The point is, what is capitalism? It is built on the separation of individuals from society’s control. They can then dominate it by seizing the means of production, thus creating the class of workers. Whether the individual owners are called Microsoft, Citibank, LandSecurities or the British Government, they are there to seize the social surplus (alienated labour).

 

Marx’s communism is often misunderstood. Even Korsch wrote:

 

Marx here fundamentally clarifies the real theoretical and practical relationship between the present and future ‘society’ and the (present and future) ‘State’. (8)

 

 

The only way forward is the abolition of the key institutions of capitalist society: the state (to be replaced by democratic workers bodies) and wage labour and capital (by co-operative and socially directed labour).

 

―R

(1) Paresh Chattopadhyay: A Manifesto of Emancipation: Marx’s ‘Marginal Notes’ 125 Years Later .

 

(2) Scott Meikle: Was Marx an Economist? .

 

(3) Collected Works, Volume 3, pp271-2, 273, 274-5, 278, 279, 279-80.

 

(4) Clarke, S. (1991): Marx, Marginalism and Modern Sociology: From Adam Smith to Max Weber, London: Palgrave Macmillan.

 

(5) 1962a: 198-99.

 

(6) K Marx, Theories of Surplus Value, Volume 2, London 1969, p504.

 

(7) marxists.org .

 

(8) Karl Korsch: Marxism and Philosophy, marxists.org .

 

 

<출처>   Revolutionary Perspectives #37  2005-11-01

 

http://www.leftcom.org/en/articles/2005-11-01/the-communist-manifesto-of-1875-the-critique-of-the-gotha-program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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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훈 단지 사건과 노동조합의 독자성

  • 분류
    잡기장
  • 등록일
    2011/08/22 11:02
  • 수정일
    2011/08/22 11:02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 응답 RSS

이경훈 단지 사건과 노동조합의 독자성

 

[16일 오후 현대차 울산공장 본관 잔디밭에서 열린 조합원보고대회에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이경훈 지부장이 연설도중 "함께 가겠다…조합원 여러분에게 단지(斷指)로 맹세하겠다"는 말과 함께 자신의 왼손 새끼손가락 일부를 절단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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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훈의 단지 사건은 주간연속2교대제, 타임오프, 비정규직 철폐 등 계급적 현안 문제에 대한 조합원들과 노동자계급에 대한 협박 - "입을 다물라" -임과 동시에 집행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내부 권력투쟁의 일환이다.

 

미국의 국가부채와 유럽국가들의 부도위기, 세계대공황은 자본가들로 하여금 개량의 떡고물을 줄 수 없는, 타협의 여지가 없는 계급투쟁의 공간으로 내몰고 있다. 자동차산업 재편과 자본의 통제권을 장악하기 위한 투쟁에서 현대자본은 더욱 더 계급적으로 단호하다.

 

"독점자본주의는 시간이 갈수록 노동조합의 독자성을 허용할 생각이 없다. 그래서 독점자본은 자신으로부터 떡고물을 받아먹는 개량주의 관료와 노동귀족에게 이렇게 요구한다. 노동자들이 보는 앞에서 나를 위한 정치경찰이 되어라, 이러한 요구가 거부될 경우 독점자본은 노동관료집단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파시스트들로 채운다. 그런데 장기적으로 보면 제국주의 하수인이 되려는 노력을 아무리 해도 노동귀족은 결국 제국주의의 눈 밖에 날수밖에 없다"(트로츠키, [노동조합투쟁론], 풀무질, p.30)

 

노동조합허가제인 타임오프와 자동차산업재편과 자본의 현장통제권을 강화하기 위한 주간연속2교대제는 제조업 노동자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계급적 현안문제이다.

 

현대자본은 노동조합의 파업권을 완전히 무력화시키고 노동강도강화, 전환배치 자유화, 비정규직 대량해고를 통해 노동유연화를 완성시키고 자본의 현장통제권을 장악하려고 하고 있다.

 

이는 곧 자동차산업 노동자들을 노예노동으로, 생존의 벼랑으로 내몰게 될 것이며 정규직 노동자들의 자유로운 해고의 문을 활짝 열어놓게 될 것이다.

 

제조업 생산라인에 수백명, 수천명의 간접고용 노동자들이 자유롭게 투입될 수 있는 유연화의 완성을 위해 이명박 정부와 자본가들은 이미 직업안정법을 개악했고 파견법을 재개악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대자본은 이경훈에게 자본가의 개가 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모양새 좋게 노사상생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고 있지 않다.

 

이경훈은 조합원들의 투표를 통해 선출된 합법적인 집행권력이고 조합원들의 운명이 걸려 있는 현안문제를 자본가들의 입맛대로 막 퍼 줄 수 없는 조건이다. 현대차노조 조합원들이 아무리 보수화됐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생존이 걸린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 결과들에 주목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에게도 명분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현대자본은 이경훈 뿐만 아니라 다양하게 자신의 파트너를 물색하고 선을 넣고 있다. 이경훈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개가 될 수 있는 자들은 다양하고도 많다. 어용세력 내부의 권력투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이경훈의 단지 사건은 조합원들 내부의 불만을 통제하고 어용세력과 제조직들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손가락 자를 용기가 없는 놈들은 꼬리를 내려라, 회사는 내가 통 크게 결단할 수 있도록 개량의 떡고물을 던져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계급투쟁의 무장해제, 자본가계급에 대한 적극적인 협력, 그리고 이 배신의 댓가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권력투쟁의 산물이 이경훈의 단지사건이다.

 

이경훈의 단지 사건은 노사상생, 노사협력, 노사정 협약의 모델이 이미 과거지사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회사와 노조의 통합. 이것이 이명박 정부의 노동조합 정책이고 더욱 강화되고 있다.  

 

현시기 노조의 독자성 문제는  노동자계급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주요한 문제다. 이미 대공장 정규직 남성 중심의 민주노총운동은 이미 부르주아지배질서의 일부분이 됐다. 아래로부터의 계급투쟁을 통제 파괴한 기초 위에 세워진 개량화되고 관료화된 민주노총운동은 자본가계급에 대한 협력, 부르주아 지배질서의 유지와 연장 이상의 의미를 담기 힘들다.

 

따라서 노조의 독자성 문제는 개량화되고 관료화된 민주노총운동에 맞서 아래로부터의 계급투쟁일 수밖에 없으며 자본가계급이 노동운동 내에 도입된 수직적인 신분제도를 뿌리로부터 파괴할 수 있는 수평적인 연대(조합주의,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투쟁일 수밖에 없다. 이는 민주노조운동의 초창기의 성격이었던 자주성,  민주성, 계급성, 연대성, 전투성을 복원하는 것, 영국의 직장위원회 운동, 이탈리아의 공장평의회운동 등 공장위원회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고 이는 개량이 아니라 혁명의 문제, 국가권력을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다. 공황기 노조의 독자성 문제는 노조가 혁명의 지렛대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만 온전하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  

 

이경훈의 단지 사건은 또 다른 측면에서 이경훈과 집행권력을 다투는 제조직에게도 경고의 메시지를 분명하게 던지고 있다.

 

즉 이경훈처럼 손가락을 자를 수 있는 용기가 없다면 집행권력을 잡을 생각을 말라는 것이다. 이는 다른 말로 입으로, 문자로 내거는 슬로건으로는 더이상 이경훈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고 이경훈과 다를 바 없는 현대자본의 파트너일 뿐이라는 것을 드러내 줄 뿐이다. 참으로 비참한 현실이다.

 

이경훈의 단지 사건은 타임오프 분쇄, 주간연속2교대제, 비정규직 철폐를 위한 독자적인 실천투쟁, 집행권력과 대당하는 비공인 현장파업을 요구하고 있다. 이경훈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승부수를 던졌다.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여전히 혁명적 주체는 새롭게 조직되고 재구성돼야 한다. 

 

-조성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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