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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창설
국제공산주의흐름1)
2009년에 기념해야 할 수많은 기념일 가운데 매체와 역사가들이 짧게 언급하고 그 의미를 의도적으로 왜곡하면서 제대로 다루지 않는 기념일이 있다. 1919년 3월 열린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하 코민테른)>의 창립대회가 그것이다.
코민테른 창설의 기념은 계급투쟁이 오늘날 위기로 고통받는 자본주의의 현실이며, 프롤레타리아트가 착취받는 계급일 뿐 아니라 혁명계급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이는 부르주아지 자체의 종말을 예고하고 있다는 점을 2009년의 부르주아지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1. 1919년 국제적인 혁명물결
코민테른의 창설은 전체 자본가계급과 그들의 열광적 하수인들에게는 불쾌한 기억을 일깨우고 있다. 특히 그들에게는 국제적인 혁명 물결의 솟구치고 피할 수 없는 조류에 직면한 1차 세계대전 말의 공포를 상기시키고 있다. 그것은 1917년 10월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 참호에서의 반란, 독일에서 빌헬름 황제의 퇴위와 노동계급의 반란과 폭동에 직면한 휴전 서명, 그리고 독일 노동자들의 봉기, 러시아 노선에 따른 바바리아와 헝가리에서의 노동자평의회 공화국 건설, 영국과 이탈리아에서 노동 대중 사이의 파업,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적대적 개입을 거부한 몇몇 영국 군대뿐만 아니라 프랑스 함대와 군대의 반란 등이었다.
그 당시 영국 정부의 수상인 로이드 죠지는 만일 그가 러시아 정복을 돕기 위해 천 명의 영국 군대를 파견한다면 그 군대는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만약 영국의 군사점령이 볼셰비키에 맞서 이루어진다면 영국은 볼셰비키가 되고 런던에 소비에트가 건설될 것이라고 1919년 1월 선언했다. 그것은 러시아 노동자평의회 권력에 대한 국제 부르주아지의 경악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었다.
“유럽 전체는 혁명정신으로 가득 찼다. 노동자들 사이에는 전쟁 조건에 반대하는 불만감뿐만 아니라 분노와 반항감이 깊이 쌓여 있다. 정치적·사회경제적 측면에서 모든 기존 질서에 대해 유럽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모든 인민대중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E. H. 카의 「볼셰비키 혁명」 3권, 135쪽에서 인용)
우리는 오늘날 코민테른의 창설이 1917년으로부터 적어도 1923년 말까지, 유럽으로부터 아시아(중국)로, 그리고 캐나다(위니페그)와 미국(시애틀)의 ‘신’세계로부터 라틴아메리카에 이르는 전 세계의 혁명물결에서 정점이었다고 알고 있다. 이러한 혁명 물결은 세계를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의 분할로 이끈 1차 세계대전, 4년간의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응답이었다. 1914년 전쟁이 꿀꺽 삼킨 제2인터내셔널 사회민주주의의 당들과 개별 투사들이 제국주의 전쟁에 대해 취한 태도는 그들이 혁명과 코민테른을 맞아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를 결정했다.
“코민테른은 각기 다른 나라들의 제국주의 부르주아지가 2천만 명을 희생시킨 1914~18년의 제국주의 전쟁이 끝난 후 만들어졌다. ‘제국주의 전쟁을 기억하라’ 이 말은 코민테른이 모든 남성 노동자와 모든 여성 노동자에게 한 첫 번째 말이다. 그들이 어디에 살건 어떤 언어로 말하든지 그들에게 한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존재하기 때문에 한줌의 제국주의자들이 4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각기 다른 나라들의 노동자들이 서로의 목을 베도록 강제했다는 점을 기억하라. 부르주아지의 전쟁이 유럽과 전 세계에서 가장 가공할 기근과 가장 소름끼치는 참상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을 기억하라. 자본주의를 전복하지 않고는 이러한 강도 같은 전쟁의 반복이 가능할 뿐 아니라 불가피함을 기억하라” (2차 대회에서 채택한 코민테른의 문건, 제인 데그라스, 「코민테른 1919-43: 문헌집」)
2. 코민테른의 제2인터내셔널과의 연속성
(1) 제2인터내셔널과 제국주의 전쟁
1848년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칼 맑스는 “노동자는 조국이 없다”라고 자본주의에 맞서는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의 근본적 원칙 하나를 정립했다. 이 원칙은 노동자들이 민족 국가의 문제에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반대로 민족문제와 그들의 역사적 투쟁의 하나의 기능으로서 민족 전쟁의 문제에 대해 노동자의 입장과 태도를 규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전쟁의 문제와 프롤레타리아트의 태도는 제1인터내셔널(1864~73)과 제2인터내셔널(1889~1914)에서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19세기 동안 프롤레타리아트는 특히 러시아 짜르 체제와 같은 봉건적이고 군주적 반동에 맞서는 민족해방 전쟁에 무관심할 수 없었다.
제2인터내셔널 내에서 레닌과 로자 룩셈부르크는 선두에 서서 20세기 벽두에 발생한 자본주의의 시기 변화를 인식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정점에 다다랐으며 전 지구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제 레닌이 말한 것처럼 “자본주의의 가장 높은 단계인 제국주의”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다가올 유럽전쟁은 식민지의 분할과 그 영향력을 둘러싼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의 제국주의 세계 전쟁일 것이었다. 날이 갈수록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원칙을 저버렸던 기회주의 진영에 맞서서, 이러한 새로운 상황에서 인터내셔널과 프롤레타리아트가 무장하는 전투로 이끈 것은 제2인터내셔널의 좌익이었다. 이 투쟁의 중대한 순간에 러시아 1905년 대중파업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이끌어낸 로자 룩셈부르크가 제국주의 전쟁을 대중파업과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연결시킨 1907년 슈투트가르트의 인터내셔널 대회가 있었다.
“나는 이 문제[러시아에서의 대중파업과 전쟁(편집자)]에 대해서 우리가 위대한 러시아 혁명[1905년(편집자)]의 교훈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것을 여러 동지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을 러시아와 폴란드 대표들의 이름으로 말하라고 요청받았습니다. … 러시아 혁명은 전쟁의 결과로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그 전쟁을 끝내려고 일어났습니다. 혁명이 없었다면 짜르 체제는 의심할 여지없이 전쟁을 지속시켰을 것입니다.” (로자 룩셈부르크, BD 울프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에서 인용)
좌파는 룩셈부르크와 레닌이 제출한 대회의 중대한 수정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래도 전쟁이 일어난다면, 사회주의자들은 가능한 한 빨리 그 전쟁을 끝내고 전쟁이 촉발시킨 경제적·정치적 위기를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인민에게 일깨우고, 그럼으로써 자본주의 지배의 몰락을 서두를 의무가 있다.” (코민테른 1차 대회에서 채택한 「사회주의 경향들과 그들의 베른대회에 대한 결의문」에서 인용)
1912년 제2인터의 바젤 대회는 유럽에서 점증하는 제국주의 전쟁의 위협에 맞서는 위와 같은 입장을 다시 확인했다.
“프랑스-프러시아 전쟁이 코뮌의 혁명적 반란을 탄생시켰고, 러일전쟁이 러시아에서 혁명세력을 움직였다는 것을 부르주아 정부들이 잊지 않게 하자. 노동자계급의 눈으로 볼 때, 자본가들의 이익, 왕조의 경쟁, 그리고 외교 협정의 남발을 위해 노동자계급이 스스로를 학살하는 것은 범죄다.” (앞 글)
(2) 제2인터내셔널의 배반과 죽음
1914년 8월 4일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기회주의 때문에 구멍이 숭숭 뚫리고 애국주의 홍수와 전쟁열에 쓸려 제2인터는 깨어져 부끄럽게 목숨을 다했다. 주요 당들은 (특히 누구보다 기회주의자들 수중에 있었던 프랑스와 독일 사민당과 영국의 노동당은) ‘조국방어’와 ‘외세침략’에 맞서기 위한 부르주아지와의 ‘신성한 동맹’을 요구하며 전쟁채권에 찬성표를 던졌다. 프랑스에서는 계급투쟁을 포기하면서 장관직을 보상으로 받기까지 했다. 그들은 “맑스주의의 황제”라고 불렸던 카우츠키가 계급투쟁은 “평화 시기”에만 가능하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불가능하다고 선언하면서 전쟁과 계급투쟁을 구분했을 때, “중도주의”(인터내셔널의 좌파와 우파 사이의 중간)로부터 이론적 지원을 받았다.
“계급의식이 있는 노동자들은 인터내셔널 붕괴에 대해 슈투트가르트와 바젤에서 열린 인터내셔널 대회의 발언들과 결의문들 속에 담긴 가장 거룩한 선언들, 그리고 그들의 신념을 공식 사민당들의 다수가 명백하게 배신한 것으로 이해한다.” (레닌, 「제2인터내셔널의 몰락」)
소수의 당들만이 이러한 폭풍 속에서 우뚝 섰다. 특히 이탈리아,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고 러시아의 당들이 그랬다. 다른 곳에서는 고립된 혁명가들과 혁명 그룹이 있었는데, 로자 룩셈부르크와 호르터와 판네쿡 주위의 네덜란드 “트리뷴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 계급투쟁에 충실했으며 재조직화를 시도했다.
제2인터내셔널의 죽음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심대한 패배였다. 이는 그들이 참호 속에서 피를 흘리게 했다. 수많은 혁명적 노동자들이 살육당했다.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그들의 국제 조직을 잃어버렸다. 그것은 재건해야 했다.
“제2인터는 기회주의에 패배해 죽었다. 기회주의자를 타도하자. 변절자뿐 아니라 기회주의로부터 해방된 제3 인터내셔널 만세!” (레닌,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정세와 임무」, 1914. 1. 10)
(3) 찌머발트와 키엔탈 대회: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건설을 향한 발걸음
1915년 9월 “국제사회주의자들의 찌머발트 대회”가 열렸다. 이어서 스위스의 키엔탈에서 1916년 4월 2차 대회가 열렸다. 전쟁과 억압이라는 어려운 조건에도 불구하고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를 포함한 11개국의 대표들이 참여했다. 찌머발트 대회는 전쟁을 제국주의 전쟁으로 인식했다. 대회의 다수파는 ‘거룩한 동맹’의 진영으로 넘어갔거나 그들과 분리되어 관망하는 사민당들의 기회주의 우파를 비난하기를 거부했다. 이러한 중도주의 다수파는 “평화”라는 표어를 방어하는 평화주의자였다.
볼셰비키 분파의 대표인 레닌과 지노비예프의 주도 아래 통일된 “찌머발트 좌파”는 분립의 필요성과 제3인터내셔널의 건설을 주창했다. 평화주의에 맞서 그들은 “혁명적 행동이 없는 평화 투쟁은 공허하고 기만적인 문구”(레닌)라고 선언하고,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자”는 슬로건으로 중도주의를 반대했다. “이 슬로건은 구체적으로 슈투트가르트와 바젤대회의 결의문으로 나타난다.”(레닌)
이들 대회를 통해 <좌파>는 힘을 얻었지만, 다른 대표들을 깨닫게 할 수 없어 소수파로 남았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이었다.
“두 번째 찌머발트 대회(키엔탈)는 의심할 여지없이 한 걸음 진전이다. (…) 그러면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앞으로 우리는 우리의 결의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제3인터내셔널을 위한 투쟁을 지속해야 한다. 찌머발트와 키엔탈 대회는 우리의 길이 올바르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지노비예프, 1916. 10. 6)
지노비예프가 1918년 3월에 말했듯이, 각기 다른 나라 좌파 사이의 회의와 그들 사이의 공동투쟁을 통해 “형성 중인 제3인터내셔널의 첫 번째 핵”을 만들 수 있었다.
(4) 프롤레타리아트가 슈투트가르트와 바젤 대회의 결의문을 수행하다
1917년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유럽 전역에 혁명적 물결을 열어 젖혔다. 프롤레타리아의 위협은 제국주의 대학살이 종지부를 찍었다는 점을 국제 부르주아지에게 확인시켰다. 레닌의 슬로건은 현실이 되었다. 러시아 그리고 국제 프롤레타리아트가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시켰다. 이처럼 프롤레타리아트는 유명한 슈투트가르트 결의를 적용함으로써 제2인터내셔널 좌파의 명예를 드높였다.
1차 세계대전은 사회민주당의 의회주의적 우파를 부르주아지 진영으로 결정적으로 몰아넣었다. 혁명적 물결은 중도주의의 평화주의자들이 부르주아지에 맞서 싸우도록 했지만 그들의 다수는 특히 카우츠키 같은 지도자들은 부르주아지 진영으로 뛰어들었다. 더 이상 인터내셔널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회민주주의로부터 분리된 분리파들이 만든 새로운 당들은 “공산주의”당이라는 이름을 채택하기 시작했다.
혁명적 물결은 고무되었으며 프롤레타리아트의 세계당, 제3인터내셔널의 건설을 요구했다.
(5) 코민테른의 건설 : 제2인터내셔널의 정치와 원칙과의 연속성
코민테른[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라는 이름을 채택한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이미 죽은 제2인터내셔널 당들의 우파로부터 조직적으로 분리하는 것을 기반으로 1919년 3월에 건설되었다. 그러나 제2인터내셔널의 원칙과 그 공헌을 거부하지 않았다.
“이에 생명을 다한 공식적 사회주의당들의 냉담, 거짓 그리고 부패를 쓸어버리면서,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제3인터내셔널에서 하나가 되어 바베프로부터 칼 리프크네히트, 그리고 로자 룩셈부르크로 기다랗게 이어지는 혁명 세대들의 영웅적 노력과 순교의 직접적 계승자라고 우리를 생각한다.
제1인터내셔널이 발전의 미래 경로를 미리 비추고 그 도정을 가리켰다면, 그리고 제2인터내셔널이 수백만의 노동자들을 모으고 조직했다면, 제3인터내셔널은 열린 대중행동의 인터내셔널이고 혁명적 실현의 인터내셔널이며, 행위[실천]의 인터내셔널이다.” (코민테른의 선언)
코민테른의 기반을 이룬 흐름, 분파, 전통 그리고 입장은 제2인터내셔널의 좌파가 발전시키고 방어한 것들이었다.
“1차 대전 이전에 프롤레타리아트가 발전시킨 제2인터내셔널이라는 역사적 대열로부터 선발해 재편한 그룹을 통해서만, 제국주의 전쟁에 맞서는 프롤레타리아 투쟁을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음을 우리의 경험은 증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그룹만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선진적 강령을 만들 수 있고 그래서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기초를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빌랑������(공산주의 좌파의 이탈리아 분파의 이론지), 1936년 8월, 34호, 1128쪽)
레닌, 로자 룩셈부르크, 안톤 판네쿡 같은 개인은 물론이고 볼셰비키,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좌파 같은 사회민주당들의 그룹과 분파를 보더라도, 제2인터내셔널과 찌머발트의 좌파와 제3인터내셔널의 좌파 사이에는 정치적이고 유기적인 연속성이 있다. 코민테른의 첫 번째 대회는 제2인터내셔널의 부분이었던 러시아 공산주의당(볼셰비키)(이전의 러시아 노동자 사회민주주의당(볼셰비키))과 독일 공산주의당(이전의 스파르타쿠스)의 주도로 소집되었다. 볼셰비키는 찌머발트 좌파의 주도 세력이었다. 찌머발트 좌파는 제2인터내셔널과 제3인터내셔널 사이의 진정한 유기적·정치적 연결고리였는데, 그들은 제2인터내셔널의 좌익으로서 과거에 벌였던 투쟁을 평가하면서 그 시대의 요구를 다음과 같이 정립했다.
“찌머발트와 키엔탈 대회는 제국주의 살육에 항의하기 위해, 결의가 있는 모든 프롤레타리아 세력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통일시키는 것이 필요했던 상황에서 열린 매우 중요한 대회였다. (…) 찌머발트 그룹은 자기 전성기를 가졌다. 찌머발트에 모인 진실로 혁명적인 세력은 모두 더 전진해 코민테른에 합류한다.” (찌머발트 대회 참가자 선언)
우리는 두 인터내셔널 사이의 연속성을 강력히 주장한다. 우리가 계통적 측면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코민테른은 느닷없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 강령과 정치적 원칙도 마찬가지다. 두 인터내셔널 사이의 역사적 연결고리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역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무정부주의에 굴복하는 것이다. 또한 코민테른을 단지 노동자 대중의 혁명운동의 산물로만 바라보는 것이다.
이러한 연속성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코민테른이 왜 그리고 어떻게 제2인터내셔널과 결별했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슈투트가르트 결의에 표현된 두 인터내셔널 사이의 연속성이 있지만, 두 인터내셔널 사이에는 단절도 있기 때문이다. 그 단절은 코민테른의 정치 강령 속에, 그 정치적 입장에, 그리고 “세계 공산주의당”으로서의 조직적이고 전투적인 실천 속에 구체화되었다. 사실 단절은 물리적인 유혈 탄압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것은 제2인터내셔널의 성원인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참여한 케렌스키 정부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와 볼셰비키를 억압하고, 독일에서는 노스케-샤이드만 사민주의 정부가 프롤레타리아트와 공산주의당을 억압해서 단절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연속성 속의 단절”을 인식하지 않으면, 1920년대의 코민테른의 퇴행, 그리고 그 내부의 투쟁, 그리고 1930년대 ‘이탈리아’, ‘독일’ 및 ‘네덜란드’ 공산주의 좌파의 외부투쟁 및 그들 세력의 배제를 이해할 수 없다. 오늘날 공산주의 그룹들과 그들이 방어하는 입장은 이런 좌파들이 공산주의 원칙을 지키고, 코민테른 및 1917~23년의 혁명적 물결을 비판적으로 재평가했던 그들의 노력의 산물이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유산인 제2인터내셔널의 유산을 인식하지 않으면, 코민테른의 기반, 오늘날까지 중요한 몇몇 기반의 타당성, 1930년대 공산주의 좌파의 공헌을 이해할 수 없다. 다른 말로 그것은 오늘날 혁명적 입장을 지속적으로, 확신과 결단을 가지고 방어할 수 없음을 뜻한다.
3. 코민테른의 제2인터내셔널과의 단절
(1) 코민테른의 정치 강령
1919년 1월 말 트로츠키는 코민테른 창립대회의 초대장을 썼다. 그 대회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이 채택할 정치 강령의 원칙을 결정했다. 사실 이 편지는 제안된 ‘코민테른 강령’이고 그를 잘 요약하고 있다. 그것은 두 개의 주요 공산주의당들의 강령에 기초하고 있다.
“우리 의견으로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여기서 강령으로 제시되었고, 독일 스파르타쿠스 동맹과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의 강령에 기초해서 구성된 다음의 제안들에 기초해야만 한다.” (데그라스, 앞글)
사실 스파르타쿠스 동맹은 1918년 12월 29일 독일 공산주의당이 창설된 이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1919년 1월 베를린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끔찍한 탄압기 동안에, 사민주의 세력이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를 죽여 독일 공산주의당은 두 명의 주요 지도자를 잃었다. 이처럼 바로 창립 순간에 코민테른은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와 함께 첫 번째 패배의 고통을 겪었다. 창립 두 달 전 코민테른은 그의 명성, 힘 그리고 이론적 능력에서 레닌과 트로츠키에 필적할 두 명의 지도자를 잃었다. 지난 세기 말 그녀의 저작에서 코민테른의 정치 강령의 기초가 될 핵심들을 가장 많이 발전시킨 사람은 로자 룩셈부르크였다.
(2) 돌이킬 수 없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쇠퇴
로자 룩셈부르크에게는 1914년 전쟁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쇠퇴기를 열어 놓았다는 점이 명백했다. 제국주의 살육 이후 이러한 입장은 더 이상 논쟁의 여지가 없었다.
“오늘날 인류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혼돈 속에서 멸망하느냐 아니면 사회주의에서 구원을 발견하느냐” (독일 공산주의당 창립대회에서 강령에 대한 연설)
이러한 입장은 코민테른에서 강력하게 재확인되었다.
“1. 현 시대는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을 지닌 자본주의가 파괴되지 않는다면, 그와 함께 유럽 문명의 전체를 끌어내릴, 전체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몰락과 해체의 시대이다.” (「초청장」, 데그라스, 앞글)
“새로운 시대가 태어난다! 자본주의 소멸과 내부 해체의 시대가! 프롤레타리아트의 공산주의 혁명의 시대가!” (코민테른 강령, 앞글)
(3) 자본주의 쇠퇴 시대의 정치적 함의
코민테른의 지형 위에 서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본주의의 쇠퇴는 삶의 조건과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에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보기를 들어 카우츠키와 같은 중도주의 평화주의의 사상과는 반대로 전쟁의 끝은 전쟁 전 시기의 삶과 강령으로 회귀하는 걸 의미할 수 없었다. 이는 죽은 제2인터내셔널과 코민테른 사이의 단절의 한 지점이었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세계대전은 세상의 전환점이다. (…) 우리의 투쟁을 위한 조건과 우리들 자신은 세계대전으로 발본적으로 변화되었다.” (룩셈부르크, 「유니우스 팜플렛」으로 알려진 「사회민주주의의 위기」, 1915)
제국주의 전쟁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쇠퇴기가 열렸다는 것은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삶과 투쟁의 새로운 조건을 의미했다. 1905년 러시아 대중파업, 그리고 노동대중 단일 조직의 새로운 형태인 소비에트가 최초로 등장한 것이 자본주의 쇠퇴기의 개막을 예고했다. 룩셈부르크(「대중파업, 당 그리고 노동조합」, 1906)와 트로츠키(1905년 그의 책)는 이러한 대중운동의 본질적 교훈을 끌어냈다. 룩셈부르크와 함께 모든 좌파는 제2인터내셔널 내에서 대중파업에 대한 논쟁을 이끌었으며 노동조합과 사민당 지도부의 기회주의에 맞서서 그리고 사회주의로의 평화적이고 점진적 진화라는 그들의 전망에 맞서서 정치 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 사민주의적 실천과 결별하면서 코민테른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기본적인 투쟁방법은 자본의 정치권력에 맞서 공개적인 무장투쟁으로 나아가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중행동이다” (「초청장」, 데그라스, 윗글)
(4) 혁명과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
노동대중의 행동은 부르주아 국가와의 충돌로 나아간다. 코민테른의 가장 소중한 공헌은 국가에 대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태도에 대한 것이다. 사민주의의 “개량주의”와 결별하고 파리코뮨과 1905년 러시아 그리고 무엇보다 자본주의 국가를 파괴하고 노동자 평의회로 권력을 행사한 1917년 10월 혁명의 역사적 경험의 교훈과 맑스주의 방법을 새롭게 함으로써, 코민테른은 스스로 명쾌하게 그리고 어떠한 모호함도 없이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 노동자 평의회 안에 조직된 노동대중의 독재를 선언했다.
“2.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는 지금 즉각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다. 국가권력의 장악은 부르주아지의 국가기구의 파괴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권력기구의 조직을 의미한다.
3. 이러한 새로운 권력기구는 노동계급의 독재를 구현해야 하고 몇몇 곳에서는 농촌의 반(半)프롤레타리아트, 빈민의 독재를 구현해야 한다. (…) 소비에트 및 그와 비슷한 기구의 권력을 통해 그 구체적 형식을 확인할 수 있다.
4.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자본의 즉각적 전유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의 폐지와 국가 재산으로의 전환을 위한 지렛대여야 한다.” (윗글)
이 문제는 레닌이 제안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테제”를 채택했던 창립대회에서 본질적인 문제였다.
(5)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에 대한 테제
이 테제는 민주주의와 독재 사이의 그릇된 대립을 비난하면서 시작한다.
“어떤 문명화된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추상 속의 민주주의’는 없다. 오직 부르주아 민주주의만 있을 뿐이다” (윗글)
파리코뮌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독재적 성격을 드러냈다. 자본주의에서 ‘순수한’ 민주주의를 방어하는 것은 사실 기껏해야 자본의 독재의 형식인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방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집회의 자유나 출판의 자유는 노동자들에게 무엇인가?
“‘출판의 자유’는 ‘순수 민주주의’의 또 다른 대표적 슬로건이다. 여기에서도 또 가장 좋은 인쇄소와 막대한 종이더미를 자본가가 장악하고 있는 한, 또 자본이 신문·잡지에 대한 권력을 유지하고 있는 한, 그리고 이 권력은 세계에서, 예를 들어 미국처럼 민주주의와 공화제도가 발전하면 할수록, 더욱 더 명확하게, 더욱 더 첨예하게, 더욱 더 냉소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런 조건이 계속되는 한 이 자유가 기만이라는 것을 … 노동자는 알고 있다. 노동자를 위한,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참된 평등과 진정한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우선 먼저 문필가를 고용하거나 출판소를 사들이거나 신문을 매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자본으로부터 박탈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본의 멍에를 뒤집어버리고, 착취자를 타도하고 그들의 반항을 분쇄할 필요가 있다.” (「테제」, 윗글)
전쟁과 혁명을 경험한 후 카우츠키주의자들이 한 것처럼 순수한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방어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서는 범죄라고 「테제」는 계속 말하고 있다. 각기 다른 제국주의와 소수 자본가들의 이해 때문에 수백만의 인민이 참호에서 학살당했고 ‘부르주아지의 군사독재’는 민주적이건 아니건 간에 모든 나라에 세워졌다. 사민주의 정부가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를 체포하고 투옥한 것처럼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그들을 학살했다.
“이러한 사태 하에서는 프롤레타리아의 독재가 착취자를 압도하고, 그들의 저항을 극복하는 수단으로서 완전히 정당할 뿐만 아니라, 전쟁을 일으켰고 지금도 새로운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부르주아 독재에 대한 유일한 방위수단으로서 노동대중 전체에게 절대로 필요하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다른 계급의 독재 사이의 근본적 차이는 (…) 이를 포함한다. 즉 (…)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는 착취자 즉 주민 중에서 극소수인 대지주와 자본가의 반항을 무력으로 억누르는 것이다. (…)
사실, 이미 실제로 창출되어 있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여러 형태, 즉 러시아 소비에트권력, 독일의 노동자평의회, 직장위원회, 이와 유사한 다른 나라의 또 다른 소비에트적 제도, 이 모두는 다름 아닌 노동자계급, 즉 주민 대다수에게 민주적 권리와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한다. 그것은 가장 민주적인 부르주아 공화국조차 전혀 보장할 수 없었던 또 그와 유사한 것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민주적 권리와 자유가 실제로 가능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윗글)
오직 세계적 차원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만이 자본주의를 파괴하고, 계급을 폐지하며 공산주의로 가는 길을 보증할 수 있다.
“국가권력의 폐지는 맑스를 포함해서 모든 사회주의자들의 목표다. 이러한 목표가 달성되지 않으면 자유와 평등의 진정한 민주주의는 달성될 수 없다. 그러나 오직 소비에트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만이 실제로 이 목표로 나아가게 한다. 왜냐하면 노동인민의 대중조직을 국가행정에 지속적이고 제한 없이 참여하게 함으로써 어떤 종류의 국가도 완전히 소멸시킬 준비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윗글)
국가의 문제는 혁명적 물결이 유럽을 휩쓸고 모든 나라의 부르주아지가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서 내전을 벌일 때, 그리고 자본과 노동,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적대감이 극에 달할 때 중요한 문제였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와 혁명의 확장, 즉 소비에트 권력을 유럽에 국제적으로 확장할 필요성은 혁명가들에게 구체적으로 제기되었다. 그것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국가와 혁명적 물결의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그에 맞설 것인가의 문제였다. ‘[프롤레타리아 독재]편에 선다는 것’은 코민테른에 가입해 사회민주주의와는 체계적으로 정치적으로 단절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맞선다는 것’은 부르주아 국가를 방어하고 결정적으로 반혁명 진영을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둘 사이에서 머뭇거렸던 중도주의 흐름에게는 그것이 단절과 소멸을 뜻했다. 혁명 시기는 ‘중도 기반’의 멍청한 정책을 가질 어떤 틈도 남겨두지 않았다.
4. 오늘과 내일 : 코민테른의 과업을 지속하기
1914~18년 전쟁이 결정적으로 보여준 시기 변화는 제2인터내셔널과 제3인터내셔널 사이의 단절을 결정짓는다. 우리는 이를 국가의 문제에서 살펴보았다. 자본주의의 쇠퇴, 그것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삶과 투쟁 조건에 미친 결과는 일련의 새로운 문제를 제기했다. 즉, 아직도 선거 참여와 의회의 활용이 가능한가, 노동자평의회가 출현했는데도, 자본가들과 ‘성스런 동맹’에 참여했던 노동조합이 아직도 노동계급의 조직인가, 제국주의 전쟁의 시대에 민족해방투쟁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가 그런 문제들이었다.
코민테른은 이러한 새로운 문제에 응답할 수 없었다. 그것은 1917년 10월 혁명 1년여 뒤, 그리고 베를린 프롤레타리아트가 겪은 첫 번째 패배로부터 두 달 뒤에 창설되었다. 그 뒤를 이은 여러 해 동안 국제 혁명의 물결은 패배하고 쇠퇴했으며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점점 고립되었다. 이러한 고립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의 퇴행에서 결정적 요인이었다. 이러한 사태들 때문에 코민테른은 기회주의의 성장에 저항할 수 없었다. 반대로 코민테른은 죽었다.
코민테른을 평가할 때, 우리는 그것이 <국제공산주의당>이었다고 명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것의 실질적 퇴행 때문에 그것을 부르주아 조직으로만 보려는 사람은 그걸 제대로 평가할 수 없고, 그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끌어낼 수도 없다. 트로츠키주의는 초기 4차 대회를 계승해야 한다고 무비판적으로 주장한다. 창립대회가 제2인터내셔널과 단절했던 지점들에서, 그 후속 대회는 퇴행했다는 점을 그들은 결코 보지 못했다. 1차 대회는 사회민주주의로부터 분리했다. 그런데 3차 대회는 그에 반대해 ‘통일전선’ 속에서 사회민주주의와 함께 할 것을 제안했다. 사회민주주의가 부르주아 진영으로 결정적으로 넘어갔다는 것을 인식한 후인데도, 코민테른은 3차대회에서 사회민주주의를 부활시켰다. 사민주의당과의 동맹정책은 1930년대에 트로츠키주의가 ‘입당주의’ 정책을 채택하게 했다. 입당주의란 곧 코민테른 1차 대회의 원칙을 정면으로 무시하면서, 사민주의당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레닌이 말한 것처럼 이러한 동맹 또는 항복의 정책은 스페인 내전에서 부르주아 공화 정부를 지지하고, 찌머발트와 인터내셔널을 배신하고 제국주의 2차 세계대전에 참여하는 반혁명으로 트로츠키 흐름을 빠져들게 만들었다.
이미 1920년대에 코민테른 내부에서 이러한 퇴행에 맞서 투쟁하려는 새로운 좌파가 만들어졌다. 그들은 특히 이탈리아, 네덜란드 그리고 독일 좌파였다. 1920년대 동안 배제된 이러한 좌익 분파들은 코민테른과 혁명적 물결을 비판적으로 재평가함으로써 죽어가는 코민테른과 ‘미래의 당’ 사이에서 연속성을 보증할 정치투쟁을 지속했다. 1930년대에 공산주의 좌파의 이탈리아 분파의 잡지가 「빌랑(Bilan)」(“평가”)이었다는 것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인터내셔널의 원칙과 연속성을 갖고, 이들 그룹들은 제2인터내셔널과 단절하는 데에서 나타난 약점을 비판했다. 1930년대 동안의 반혁명과 2차 제국주의 전쟁의 암흑기 속에서 그들이 펼쳤던 이름 없는 노력 덕분에 오늘날 공산주의 그룹들이 부활해서 존재할 수 있게 됐다. 그들은 코민테른과 조직적 연속성을 지니지 않지만 정치적 연속성은 지니고 있다. 이들 그룹들이 만들어내고 방어한 입장들은 자본주의 쇠퇴의 새로운 시기를 맞아 코민테른 안에서 제기된 문제들에 답을 주고 있다.
따라서 ‘공산주의 좌파 분파들’이 이루어낸 비판적 재평가의 기초 위에서 코민테른은 오늘날 살아 있고, 미래의 <세계공산주의당>에서 살아있게 될 것이다.
오늘날 점증하는 착취와 가난에 직면해 프롤레타리아트는 다음과 같은 <찌머발트 좌파>의 입장과 동일한 입장을 채택해야 한다.
경제 전쟁에서 부르주아지와는 어떠한 신성한 동맹도 없다!
민족 경제를 구하기 위한 어떤 희생도 반대한다!
계급투쟁 만세!
경제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라!
경제적 파국, 사회적 해체 그리고 제국주의 전쟁의 전망에 직면해 1919년에서와 같이 오늘날도 역사적 대안은 똑같다. 그것은 자본주의 파괴와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수립인가 아니면 인간성의 파괴인가, 사회주의인가 아니면 야만인가다.
미래는 공산주의의 것이다.
<번역 : 오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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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란을 관심있게 지켜봤던 사람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몇년전 이란에서 벌어진 반정부시위가 떠올라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이란과 이집트, 둘 다 그 지역의 맹주들이고 시위대 다수가 학생들을 포함한 젊은 세대이고 뚜렷한 지도부 없이 트위터 등을 이용해 결집한 다중들이고 마땅한 대안세력이 없다는 점 등이 유사하지만 이란의 아마디네자드는 반미, 이집트의 무바라크는 친미라는 점만 다르죠. 그런데 당시 이란 시위대는 중산층 기반에 친미, 친서구성향이라는 평가가 많았습니다. 이란도 심각한 경제위기에다 대학생들이 졸업을 해도 하루 10달러도 못버는 택시기사같은 일 외에는 할게 별로 없어 우리나라와 같은 외국으로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많은데도요. 그만큼 젊은이들이 지치고 미래가 없기 때문에 정권교체를 간절히 바랬을테고요.그런데 사실 이번 이집트 항쟁도 해외 자파언론에서는 중산층이 주도한 시위고 여기에 하층민까지 가세하면 불길이 더욱 크게 번질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습니다. 사실 중산층이란 애매한 집단인데 소득수준으로 상류층과 하류층 중간이라는 것, 그 사회를 유지하지만 붕괴시킬 수도 있는 파워를 가진 집단이라는 것 외에는 더 이상 말해주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글도 그렇지만 늘 해외에서 대규모의 반정부시위가 일어났을 때 중산층 기반의 운동이라고 해서 폄하한다거나 노동계급 기반의 운동이라고 해서 급진적일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봅니다. 중산층 vs 노동계급의 도식도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것 같고, 사회마다 중산층에 노동계급이 많을 수도 있고 노동계급이 중산층 성향일 수도 있고, 중산층은 체제유지를 바라는 세력이고 노동계급은 체제변화를 원하거나 주도할 수 있는 세력이라고 단정지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제가 궁금한 것은 지도부가 없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어떤 계급에 속하는지 조사를 한 것인지 아니면 몇가지 정황에 기대어 추측을 한것인지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글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보통 해외에서 일어난 급변상황에 대해서는 좀더 심층분석이 필요한게 아닌가 하는 우려에서입니다. 실제로 이란에서 있었던 반정부 시위에는 노동계급이 아무런 액션을 취하지 않았다, 하지만 노동계급이 반정부시위대에 동조하지 않았다고 해서 반정부시위대의 요구가 비현실적이고 반동적인 것은 아니죠, 그런데 이집트에서는 총파업의 움직임이 보인다, 이거 외에는 중산층 vs 노동계급에 기반한 항쟁이라고 볼 수 있는 근거는 저로서는 딱히 보이질 않네요.
자유로운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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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수많은 외국좌파의 문건중 단지 짧고 간결한 호소문에 가까운 글입니다.말씀하신대로 이번 프롤레타리아 투쟁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들을 담아내는것이 아니라, 그것의 전제하에 국제연대의 메시지를 전하려했던 것이지요. 제국주의문제, 계급투쟁의 주체, 지도부문제는 명확한 관점을 가진 상세한 글들이 많이 나와있고 지금도 생산중에 있으나, 번역능력과 시간이 좀 부족하네요.
시간나는대로 정리하여 올리도록하지요.
중산층이야기는 부르주아민주주의 한계(환상)와 연관되어있기 때문에 강조를 한것이고, 실업자, 학생들을 프롤레타리아계급 진영으로 판단한다는것에 강조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블루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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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습니다. 다른 글들을 더 기대해보도록 하죠. 그런데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한계 혹은 환상에 대해서도 저는 님과 약간의 견해차가 있는 것 같아 말씀드리겠습니다. 민주주의라는 것을 인민의 의지가 관철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민주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국가는 없다고 보는 것이 좋겠지만 적어도 의회민주주의 혹은 정당체제를 민주주의 정도로 축소하자면 우리 역시 그것의 한계를 뼈저리게 실감하면서도 또 한편에서는 그것마저 아직도 서구에 비해 성취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의 이집트 상황을 보면 마치 우리의 박정희 시대가 생각이 나는데, 아무리 일본에서 자민당이 장기집권을 했다해도 서구에서 30년 독재란 생각하기 어렵죠, 중동에서 친미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은 대단히 의미있는 일입니다. 우리도 박정희 때는 박정희가 퇴진을 원했던 사람들이 학생, 지식인을 비롯한 당시로서는 중산층이 더 많았겠죠. 독일, 프랑스와 같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중산층과 제3세계의 중산층은 엄연히 다른 것이며 그들의 요구가 매우 소박하고 우리가 보기에는 투쟁 다음이 걱정될 정도로 갑갑한 것이 엄연한 사실이지만 우리는 커녕 미국 민중들도 엄두를 못내고 있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한계나 환상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봅니다. 지금 이집트 투쟁도 2008년부터 산발적으로 계속되어 왔던 것이 이번에 터진 것으로 보여지는데 실제로 이란 투쟁 당시 이집트 활동가들이 이란에서 젊은이들의 움직임에 대해 상당히 고무되었고 자신감을 얻었으며 아마 투쟁전술 또한 많이 배웠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지나친 낙관주의는 좋은 것이 아니지만 우리의 관점으로 혹은 지나치게 계급적 관점으로 우리와는 다른 상화에 처해있는 사람들의 투쟁을 예단하는 것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다음 글 기대하겠습니다. 저도 여건이 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