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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7/30
    2007/07/30
    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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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규항 - 떠남
    이스

2007/07/30

이 시간에 피시방에 있는 스스로의 모습이 새롭기 그지 없지만, 여하튼 피시방에 와 있다. 그리고 양 옆에서 각자 즐거이 게임에 몰두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랜드 파업에 연대하고 있는 동지들은 지금쯤 찬바람(사실 더운 바람이겠지만)에 노숙을 결의하고, 실천하고 있겠지. 물론 투쟁 하나, 실천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태도가 그다지 올바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지금, 좀 부끄럽긴 하다는 이야기이다.

 

논다. 논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놀이라는 것은 그것으로 즐거움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즐거움 그 자체로 정신이 정화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일명 카타르시스라는 것이 그것 아니던가? 그리고 카타르시스의 정체는, 다름 아닌 무아다. 자기 자신을 잊는 것이다. 그 자신을 잊고 대상이 될 수 있는 여러 가지 가치에 몰입하면서 자신의 욕망의 형태를 정화시켜나가는 것을 카타르시스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지금 질문에 부딪힌다. 나는 도대체 무엇으로 그 카타르시스, 진짜 즐거움을 찾고 있는가?

 

양 옆에 있는 사람들은 게임으로 카타르시스를 찾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그렇다, 이것은 게임에 몰두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아닌 진이라는 메카닉이 되고 짐이 됨으로써, 자기 자신에게서 탈각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서 탈각한 결과 그 열정이 그대로 투사되고, 그 효과로 그 자신에게 남아 있는 욕망의 찌꺼기들을 카타르시스 시켜내는 결과를 낳는 것일까? 과거 5~6년 전 게임을 열심히 해 본 적이 있었지만, 아마도 그렇게까지 카타르시스를 경험했을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지금 나에게 논다는 것이 무엇일까? 술을 마시건, 노래를 부르건, 무엇을 하건 간에 논다는 것은 사실 나 자신에게 비생산적인 행위로 간주되어 왔다. 그 비생산적인 행위라는 것은 스스로를 변화발전 시키는 가치를 생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라면, 오지 않은 미래와 이데아를 설정하는 식의 관념을 실천한다는 것은 궤변이겠지만, 적어도 어떠한 지향점은 가지고 그 자신의 변혁과 세계의 변혁을 고민할 터이다. 속칭 지금의 나에게 논다는 어떠한 행위들 자체는 혁명가로서의 나 자신을 만드는 것이 아닌 것이기에 나에게 그다지 커다란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것일게다.

 

반면, 작아지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점점 작아지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나 역시도 하나의 대중일 터이고, 지금 옆에 앉아서 게임을 즐기는 이들 역시 한 명의 대중일 터이다. 하다면 이 대중들의 작은 취향 하나 마저 나는 맞추지 못하고 있는 꼴이 된다. 이게 대중활동가의 자세냐고 묻는다면 글쎄, 그럴까?

 

이래저래 복잡하기 짝없는 인증절차에 신경질이 난 나머지 게임을 해 보려다가도 때려쳤지만, 그래도 그런 건 참고 했어야 할까?

 

여하튼 난 지금 이렇게 재미없는 글이나 적고 있는 것이고, 딱히 몰입하고 있는 형세는 아니어 보인다.

 

조만간 접고 나가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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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항 - 떠남

떠남
 

“그리고 예수가 갈릴리 호숫가를 지나가다가 보니, 시몬과 시몬의 형제 안드레아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었다. 그들은 어부들이었다. 예수는 그들에게 "내 뒤를 따르시오. 당신들이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소" 하고 말했다. 그러자 즉시 그들은 그물을 버려두고 그를 따랐다.”


성서에서 예수가 첫 제자를 구하는 장면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장면이 예수의 신비능력을 드러내는 장면이라고도 하지만 예수와 두 사람이 전혀 알지 못하던 사이라고 적혀있진 않다. 말하자면 이 장면은 마치 영화처럼 앞의 여러 장면이 생략되어 있다.


세례요한이 체포되고 예수는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시몬(베드로)과 안드레아 형제는 예수가 고심 끝에 고른 첫 동지들이다. 갈릴리의 수많은 청년들 가운데 유력한 메시아 감으로 지목되던 예수에게서 선택된 두 사람은 얼마나 기쁘고 벅찼을까. 그러나 막상 예수와 함께 떠나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장 식구들 먹고사는 일이 막막해지는데다 밝은 미래가 보장되기는커녕 십중팔구 헤롯 안티파스의 졸개나 로마군에 잡혀 죽임을 당하기 십상인 캄캄한 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약속했던 날 예수가 다가오자 “그물을 버려두고” 떠난다.


온갖 영상 미디어에서 쏟아지는 초인적인 영웅담에 익숙한 우리에게 그들의 선택은 그리 대수롭지 않게 느껴질 수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그 장면을 소파에 기대앉아 맥주를 홀짝거리며 구경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지금 그런 선택의 순간이 온다면 우리 가운데 몇이나 떠날 수 있을까? 우리가 비루한 일상을 박차고 이상과 삶을 일치시키는 초인적인 영웅담을 즐기는 이유는 실은 우리가 그 비루한 일상의 노예로 살기 때문이다. 인문주의니 예술이니 영성이니 온갖 고급한 정신의 액세서리들을 주렁주렁 달고 사는 우리가 가진 삶의 철학이란 실은 두어 가지다. ‘어차피 자본주의 사회인데’ ‘맞는 이야기지만 현실적이지 않아서’


그래서 우리는 살아있는 시체와 같고 세상은 거대한 공동묘지와 같다. 떠남이란 단지 공간이나 시간의 이동이 아니다. 떠남이 그런 거라면 머리 길게 묶고 일 년에 절반은 인도나 히말라야에 머물며 떠남에 관한 책들(싸구려 명상서적들)을 써서 통장잔고를 늘이는 사람이야말로, 욕망과 집착으로 범벅이 된 삶에서 도리 없이 쌓여진 스트레스를 이따금 사람의 흔적이 없는 곳으로 훌쩍 떠나서 날려버리고 다시 주식과 부동산 시세와 아이 시험 성적 따위를 뼈대로 하는 욕망과 집착의 일상으로 돌아오는 사람이야말로 떠남의 본질에 접근한 사람일 것이다.


그건 떠남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가장 추악한 형태의 집착일 뿐이다. 떠남은 크고 무거운 게 아니다. 한없이 사소해진 우리 삶만큼이나 작은 떠남의 선택들이 우리 일상에 깔려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새 때론 하루에도 몇 번씩 떠남에 대해 선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개의 우리는 우리가 고수하는 예의 삶의 두어 가지 철학에 의지하여 떠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로 차고 넘치는 세상에서 가짜 떠남, 떠나지 않기 위한 떠남, 떠남 장사꾼들은 고상하게 취급되는 반면 진짜 떠나는 사람들은 아주 쉽게 비웃음과 경멸의 대상이 된다. 살아있는 시체들은 떠나는 사람들을 거리낌 없이 어리석은, 비현실적인, 인생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 말하는 것이다.


그런 곤란과 모멸의 아수라장을 뚫고 떠날 때 우리는 비로소 얼굴에 빛을 내며 고백하게 된다. ‘그렇게 결정하고 나니까 마음이 얼마나 편한지 몰라.’ 우리는 떠남에서 작은 열반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살아있는 시체들로 가득한 거대한 공동묘지는 떠나는 사람들에 의해서 조금씩 달라진다. 떠남은 나를 잃는 게 아니다. 떠남은 우리의 정신과 영혼의 더께들, 우리를 살아있는 시체로 만드는 온갖 부질없는 집착과 욕망, 기득권, 물질적 소유 따위들에서 본디 나를 살려내는 일이다. 떠남은 실은 돌아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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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간만에 김규항 씨의 글이 심금을 울렸다.

 

나도, 떠나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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