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이 불투명에 가까운 ‘감청의 투명화’

  • 분류
    잡기장
  • 등록일
    2009/09/06 17:04
  • 수정일
    2009/09/06 17:04
  • 글쓴이
    진보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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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불투명에 가까운 ‘감청의 투명화’ [한겨레21 2009.09.04 제776호]
 
[표지이야기] 통비법 개정안은 모든 통신수단에 대한 완벽한 감청 길 열어…
국정원은 외국인 감청 명목으로 직접 장비 운영 허용
 
 
 
 
       
 
 
<타인의 삶>이라는 독일 영화가 있다. 주인공은 옛 동독의 비밀경찰이다. 그는 사상이 불온한 것으로 의심스러운 예술가 부부를 ‘공무로서’ 감청하는데, 그가 감청 대상에 깊이 공감하게 된 나머지 그들의 삶에 개입한다는 것이 영화의 줄거리다. 영화는 재미있었지만, 비밀경찰과 감청은 참으로 끔찍했다. 비밀경찰은 정권과 체제의 안정을 위해 사상 감시를 업으로 한다는 점에서 ‘정치경찰’ 혹은 ‘사상경찰’로 불리기도 한다. 감청은 기본적으로 행위보다는 생각과 말을 감시하는 기법이다. 그래서 비밀경찰의 주요 업무가 감청이었을 것이다.

 

 
 
» 영화 〈타인의 삶〉에서 다른 사람의 통신을 감청하고 있는 정보요원의 모습.
 
 
 

감청의 98.5%를 국정원에서

 

우리 현실에서도 감청이 일반 범죄수사와 관련해 사용되는 경우는 극히 미미하다. 감청은 주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자를 대상으로 이루어지며, 감청 통계에서도 최대 집행기관은 국가정보원으로 나타난다. 방송통신위원회에 따르면, 2008년에는 전체 9004건의 감청 가운데 8867건, 무려 98.5%를 국가정보원이 집행했다.

국가안보를 위해 정보기관의 감청은 빼놓을 수 없는 업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국가정보원은 비밀경찰과 다르다. 현행 국가정보원법에 권한과 업무를 명확히 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에 권력이 통제되지 않는 정보기관은 법 위의 법, 무시무시한 비밀경찰과 다를 바 없어진다.

국가정보원의 감청 권력이 제대로 통제되고 있는가? ‘삼성 X파일’ 사건에서 보듯 현행 통신비밀보호법은 정보기관의 불법 감청을 통제하는 데 무력했다. 불법 감청이 드러난 뒤 사후적인 수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X파일이 나라를 발칵 뒤집었던 것이 2005년 7월인데, 그 이후 통신비밀보호법의 감청 관련 규정들은 개정된 적이 없다. 똑같은 일이 또다시 발생해도 말릴 재간이 없다.
핵심적인 문제 중 하나는 ‘영장주의’의 예외 조항이다. 통신비밀보호법은 수사기관이 감청할 때 원칙적으로 법원의 허가를 받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정보원의 외국인 감청은 예외로 두었다. 테러범이 있을지 모르니 외국인 감청 정도는 정보기관이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할까? 하지만 외국인에 대해 내국인과 차별해 마음대로 감청한다는 것은 국제 인권 기준에 비추어 바람직하지 않다. 더욱 큰 문제는 국가정보원의 감청 대상이 정말 외국인인지 아닌지, 감청이 꼭 필요해서 하는 것인지 아닌지, 대한민국 어느 누구도 모른다는 것이다. 법원도, 국회도 모른다. 감청하기 전에 대통령 승인을 받도록 되어 있지만 급하면 나중에 받아도 된다. 감청을 36시간 이내에 끝내면 아예 승인을 안 받아도 된다. 정보기관은 감청보고서를 국회에 제출할 수도 있지만 안 해도 된다. 국가정보원의 핵심 감청 기능에 대해 사전적으로든 사후적으로든 제대로 된 검증 시스템이 없는 것이다.

현재 국회에서 논의 중인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은 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것으로 전망된다. ‘휴대전화 감청법’으로 널리 알려진 이한성 한나라당 의원의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은 모든 통신사업자에게 감청설비 구비를 의무화했다. 따라서 개정안이 통과되면, 휴대전화 통화내용에 대한 감청도 시작된다. (휴대전화 내용 감청은 CAS나 R2 등의 장비를 통해 기술적으로 가능한 것으로 드러났으나, 현재 정보기관들은 공식적으로 이를 실시하지 않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앞으로 선보일 새로운 통신수단까지도 모두 통신사업자의 감청장비를 통해 감청할 수 있게 된다. 이제까지 수사·정보기관이 직접 감청장비에 신경쓰면서 겪어온 번거로움과 수고를 덜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 1월 이 법률안에 대한 ‘의견표명’에서 “이는 통신서비스 기술을 감청에 적합하게 개발하도록 강제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라며 “휴대전화는 물론 인터넷 전화, 화상전화, 인터넷 메신저, 인터넷 채팅 등 사실상 모든 통신수단에 대한 합법적 감청이 가능해질 수 있다”고 반대한 바 있다.

 
 
»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의 주요 내용과 예상 문제점
 
 
 

법무부는 이 개정안의 주요한 명목으로 ‘감청의 투명화’를 든다. 앞으로 수사기관이 통신사업자의 감청설비를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감청하도록 의무화하겠다는 것이다. 즉, 수사기관은 직접 감청 장비를 운용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국가정보원은 예외로 뒀다. 국정원이 외국인을 감청하는 경우 직접 감청 장비를 운영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위에서 보았듯이 외국인 감청은 통신비밀보호법에서도 가장 불투명한 영역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불투명한 기관이 통신비밀보호법의 가장 불투명한 부분에서 가장 불투명한 감청을 집행하겠다는 것이다. CAS나 R2, 아니 더 지독한 감청장비가 다시 등장하지 말란 법이 없다.

개정안은 또 전기통신사업자에게 통신사실 확인자료(로그인·착발신 내역 등)를 1년 동안 반드시 보관하도록 새로이 강제한다. 앞으로 일어날지 모르는 범죄 수사를 위해서다. 이 경우에도 심각한 프라이버시 침해가 우려된다.

 

‘통신의 비밀’은 기본권

 

헌법 정신대로라면 감청은 ‘최소한’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통신의 비밀’은 우리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국민의 기본권이기 때문이다. 수사 목적을 위해서 ‘예외적으로’ 이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지만, 법률에 따라 최소한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우리 통신비밀보호법도 “다른 방법으로는 그 범죄의 실행을 저지하거나 범인의 체포 또는 증거의 수집이 어려운 경우에 한하여” 감청을 허용한다.

그런데 현행 통신비밀보호법이나 개정안이나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결정적으로 부실하다. 감청 통제는 국가정보원의 감청 권력을 제어하는 데 핵심을 두어야 한다. 공식적인 수치만으로도 98.5%를 집행하는 기관에 예외를 두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국가정보원은 특별한 관리 대상이 되어야 한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등장하는 ‘빅브러더’는 강압에 의한 독재권력이었다. 이 소설에서는 고문과 같은 물리적 폭력도 등장하지만, ‘감시’야말로 감시하는 사람도, 감시당하는 사람도 인간다움을 잃게 만드는 힘이었다. 감시당하지 않는 순간에도 감시당할지 모른다는 생각만으로 위축 효과를 갖는다. 그래서 감시는, 가장 반민주적이고 비인간적인 통치 기법이다. 우리 통신비밀보호법은 빅브러더와 얼마나 멀리 있는가.

 

장여경 진보네트워크센터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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