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미플루를 통해 본 수요-공급 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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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기장
  • 등록일
    2009/10/05 16:23
  • 수정일
    2009/10/05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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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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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고] 신종플루, 대유행이 공포가 되는 이유 (2)

홍지 (이윤을 넘어선 의약품 공동행동)  / 참세상 2009년10월04일 23시21분

신종인플루엔자(신종 플루) 확산을 우려해, 추석 기간 귀성 인구까지 줄었다고 한다. 보건복지가족부와 질병관리본부는 연휴 기간 신종 플루 확산 방지를 위한 다양한 대국민 홍보 작업을 벌이고 있다. 특히 방역 마스크와 손 세정제, 손수건의 구비 여부는 이제 ‘에티켓’의 문제라고까지 말한다. 최근에는 신종 플루 바이러스를 제거하는 공기청정기 광고가 언론에 대서특필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질병에 걸렸을 때 가장 신속하고 중요한 해결책은 ‘치료제’이다. 하지만, 치료제를 확보하는 것은 개인의 노력이 제아무리 가상해도, 정부뿐만 아니라 시장조차 해결해 줄 수 없는 문제이다. 무슨 이유에서일까? 

 

20:80의 법칙에 따라 배분되는 의약품

 

▲  의약품 시장과 인구 비교 (MSF, 2001)
이탈리아의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Vilfredo Pareto)는 19세기 영국의 부(富)와 소득 유형을 연구한 결과 전체 인구의 20%가 전체 부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부의 불균형 현상을 발견한다. 파레토의 ‘20대 80의 법칙’은 의약품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의약품의 82.4%는 전 세계 인구의 19.3%가 소비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북미와 유럽 그리고 일본에서 살고 있다. 다시 말해, 인구의 80%가 살고 있는 아프리카와 남미 대륙, 그리고 아시아의 대다수 국가는 제약회사가 매력을 느끼는 ‘시장’이 아니다. 

 

스위스계 다국적 제약회사인 로슈(Roche)가 전 세계적으로 독점 생산하는 신종 플루 치료제 ‘타미플루(Tamiflu)’ 역시 이 냉혹한 질서에 따라 나눠지고 있다. 조류독감 발병 이후 2005년부터 세계보건기구(WHO)가 권고한 ‘인구의 20%가 복용할 수 있는 분량’을 채우려면, 단순한 셈법을 따라도 전 세계적으로 약 12억 명 분의 타미플루가 필요하다. 그러나 당시 로슈(Roche)의 연간 타미플루 생산량은 3천만 명 분뿐이었으며, 세계적으로 타미플루를 비축한 국가는 40여개 국에 불과했다. 조류독감(AI)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2005년부터 이 질병의 ‘대유행(pandemic)’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어 수요가 폭등하였고, 타미플루 가격은 60달러까지 치솟게 되었다. 게다가 로슈가 공장을 완전 가동해도 10년이 걸려야 WHO의 권장량에 맞출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왔다. 이에 WHO를 비롯하여 다수의 국가에서 타미플루의 ‘강제실시(Compulsory License)’ 발동을 검토한다.

 

공급량 통제 그리고 버림받는 시장

 

강제실시란 특허권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특허 받은 발명을 타인이 실시할 수 있게 한 제도이다. 물론, 특허권자에 대한 보상이 있고, 특허권자의 권리가 소멸되거나 정지되지 않는다. ‘실시’란 특허발명의 이용, 즉 생산, 판매 등을 총칭하는 말이다. 특허법의 목적이 특허권자에 대한 보호와 함께 사회 공공의 이익을 천명하고 있기에, 강제실시는 특허제도의 필수적인 장치이다. 세계무역기구(WTO)의 무역관련지적재산권협정(TRIPs) 제31조, 그리고 우리나라 특허법 제106조와 107조에서도 강제실시를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로슈는 2005년 10월 13일 타미플루의 특허가 만료하는 2016년까지 타미플루에 대한 특허를 제3자가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발표하였다. 대신, 타미플루의 공동생산자를 모집하여 비난 여론을 무마하고자 하였다. 신성불가침의 권한인 ‘공급량 통제’를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로슈의 공동생산 제안에 세계적으로 150여개 제약회사들의 신청이 빗발쳤다. 우리나라에서도 10여 개 제약회사들이 신청하여 현재 유한양행이 타미플루 생산 공정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다. 

 

4년이 지난 지금 타미플루의 수요와 공급의 간극은 더욱 커진 상황이다. 특히 지난 6월 11일 WHO가 신종 플루의 ‘세계적 대유행’을 선포한 이후, 타미플루를 비롯한 항바이러스제 확보 문제는 각국에서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현재 로슈의 타미플루 연간 생산능력은 최대 4억명 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선진국들이 타미플루를 경쟁적으로 확보하면서 개발도상국과 제3세계 국가들의 수요까지 감당할 분량은 사실 상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폭등한 수요에 맞춰 로슈가 생산량을 늘릴 의사가 없음은 분명해 보인다. 개발도상국과 제3세계 국가의 환자들은 로슈에게 버려도 그만인 혹은 존재감이 없는 ‘시장’이기 때문이다. 

 

▲  국가별 항바이러스제 비축량 비교 (EU, 2007)

버림받은 한국 정부의 강제실시 검토 발언

 

한국 역시 지난 8월 21일 전까지는 신종 플루 치료제를 생산하는 다국적 제약회사들에게 버림받은 시장이었다. 8월 15일 신종 플루 감염으로 인한 최초의 사망자가 나오자, 국내에서도 타미플루 수요가 폭등하게 되었다. 신종 플루가 확산일로에 놓이고, 치료제에 대한 처방전 발행이 증가하는 상황에서도 정부는 8월 21일 항바이러스제 사용 지침을 바꾸어 오히려 예방적 목적의 사용을 대폭 제한했다. 이는 영국 정부가 항바이러스제를 예방적 목적뿐만 아니라 지역적 확산의 차단목적으로 사용 범위를 넓혔던 것과 대조적이다. 영국과 한국 정부의 이러한 정책 차이는 무엇보다 치료제 비축량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국내에 항바이러스제가 부족하다는 지적은 이미 2005년부터 제기되었다. 그러나 8월 24일까지도 국내에 비축된 항바이러스제 분량은 인구의 4% 복용량에 불과한 190만 명 분 뿐이었다. 때문에 국내의 시민단체와 환자단체들은 치료제의 안정적인 공급을 위해 수차례에 걸쳐 강제실시 발동을 요구했다. 이에 전재희 장관은 지난 8월 21일 WHO의 주최로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신종 플루 관련 국제 심포지엄에서 “치료제가 부족해지면 강제실시권을 발동해 국내에서 복제약을 대량 생산토록 허용하겠다.”라고 밝힌다. 이에 국내 제약회사 5~6곳에서 앞 다투어 타미플루의 생산 가능성을 밝혔으며, 복제약의 샘플까지 공개한 제약회사도 있었다.

 

그러나 전재희 장관의 발언은 불과 닷새 만에 번복된다. 8월 25일 한 간담회에 참석한 전재희 장관은 “타미플루 특허정지 조치는 국제적인 신뢰가 걸려있는 문제”라며 “현 단계에서는 아직 논의하고 있지 않다.”라고 말한다. 일주일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일어난 입장 변화의 배경에는 치료제를 공급하는 다국적 제약회사의 입장 변화가 있었다. 

 

21일 전재희 장관의 강제실시 검토 발언은 전 세계적으로 보도되었다. 이전까지 한국에는 연내에 치료제 공급이 불가함을 밝혔던 제약회사는 전 장관의 발언이 나온 직후, 내년 2월 쯤에나 공급할 계획이었던 500만 명 분의 치료제를 연내에 공급할 의사를 밝혔다. 이에 정부는 강제실시 발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 담긴 구매 의향서를 로슈와 글라소스미스클라인(GlaxoSmithkline)에 보내게 된다. 그리하여 정부는 강제실시 검토 발언 닷새 만에 180도 뒤바뀐 발표를 하게 된 것이다. 이는 모두 9월 8일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열린 토론회에 참석한 질병관리본부의 관계자가 밝힌 내용이다. 

 

수요-공급 곡선 위의 ‘제노사이드(genocide)’

 

‘강제실시 발동 검토’라는 복지부 장관의 말 한 마디로 한국 정부는 다국적 제약회사에 대한 협상력을 높혀, 항바이러스제의 연내 추가 확보가 가능하게 되었다. 질병관리본부 관계자 역시 “당초 로슈는 공급시기에 대해 명확한 답변을 주지 않았으나 전재희 복지부장관이 강제실시를 언급한 이후 곧바로 신속한 공급 의지를 피력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전재희 장관의 발언 번복 이후, 복지부와 몇몇 국회의원들이 강제실시와 관련되어 쏟아내는 이야기들은 이러한 사실 관계를 왜곡시키고 은폐하고 있다. 복지부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강제실시는 “공산주의 국가에서나 하는 일”이라고 표현했으며, 한 국회의원은 “저개발국가나 쓸 수 있는 충격적이고도 원시적인 방법”이라고 일컬었다. 

 

다국적 제약회사들로부터 상처받은 자존심을 다시 추스른 기쁨을 이해하더라도 몰상식하기 그지없는 발언이다. 실제로 남반구의 최빈국, 그리고 저개발국가에서 의약품의 공급을 위해, 약값을 낮추기 위해 강제실시 발동이 검토된 적은 많으나, 다국적 제약회사들 그리고 북미와 유럽 국가들의 압력에 의해 번번이 좌절되었다. 하지만, 공정거래 활성화를 위해서, 또는 의약품 가격 인하를 위해서 등 다양한 목적으로 전 세계에서 강제실시를 가장 발동하는 나라가 미국과 캐나다라는 사실은 아이러니 그 자체이다. 

 

강제실시를 발동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돈이 있어 약을 구입할 수도, 생산할 수도 없는 저개발국가에서는 지금 신종 플루가 아니더라도 에이즈, 결핵, 말라리아에 의해 매년 수백만 명이 사망하고 있다. 이 모든 질병을 치료할 약이 없는 것이 아님에도, 세계 인구의 80%를 점하는 그들은 약이 없어 죽는다. 그들의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어떤 치료제는 세계 의약품 시장의 80%를 점하고 있는 20%의 인구를 위해 제모 크림으로 변신한 경우도 있다. 충격적이고 원시적인 것은 도대체 무엇이며, 또 누구인지 반문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신종 플루 대유행 이후 대두된 공포증의 배경에는 한 사회의 공적 기능이 자본보다 무력한 현실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그 한가운데 제약회사의 한정 없는 이윤 추구가 벌이는 참극이 존재한다. 치료제 부족 사태, 그리고 불균형을 넘어 파국에 가까운 국가 간 치료제 비축 경쟁이 벌어졌다. 이는 제약회사의 생산 능력의 문제라기보다는 수요-공급 곡선 위에서 벌어지는 ‘대학살(genocide)’이라 봐도 무방하다. 

 

20대 80의 법칙을 설명한 파레토는 또 하나의 유명한 경제학 용어를 만들었다. 자원의 가장 바람직한 배분 상태를 일컫는 ‘파레토 최적(Pareto Optimum)’의 개념으로, 다른 어느 누구의 상태도 불리하게 하는 일 없이 한 개인의 상태를 유리하게 하는 일은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것이라는 가치 판단에 기초한 개념이다. 80의 생명을 담보로 한 의약품의 배분 법칙은 자본주의 시장이 추구하는 ‘최적’의 개념에서도 한참 동떨어져 보인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질서를 용인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지 의아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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