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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위해: 쌍꺼풀의 기원(CNN 보도)

"한국여성들 미군에 잘보이려 쌍꺼풀 수술했었다"
[연합뉴스 2005.12.22 08:31:24]

(워싱턴=연합뉴스) 박노황 특파원= 미국의 CNN은 21일 한국에서의 쌍꺼풀 수술붐을 소개하면서 이 수술이 한국전 이후 1950년대 도입됐으며 당시 한국 여성들은 미군 사병들의 마음을 끌기 위해 백인 처럼 보이길 원했었다고 보도했다.

이 방송은 "한국에서의 쌍꺼풀 수술은 마치 미국에서 치열 교정기를 사용하는 것 처럼 흔한 것이며 심지어 한국의 대통령까지 이 수술을 했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CNN은 이어 특히 휴가철 쌍꺼풀 수술이 인기를 끌고 있다면서 많은 환자들이 휴가를 내고 수술을 받고 있으며 부모로 부터 쌍꺼풀 수술을 선물로 받고 있다고 말했다.

CNN은 이어 쌍꺼풀 수술을 하는 아시아 여성들에 대해 민족적 정체성으로 부터 등을 돌리려는 것이라는 비판도 있으나 그것은 불가능한 얘기이며 "성형 수술은 아시아인이건 아니건 개인의 선택"이라고 말했다.

한편 한국에서 처음 쌍꺼풀 수술이 이뤄진 것은 1950년대 보다 20여년 앞선 1930년대로 당시 최초의 미용사였던 오엽주씨가 처음 수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노무현 대통령의 눈꺼풀 수술은 쌍꺼풀을 위한 것이 아니라 윗눈꺼풀이 아래로 처지는 '상안검 이완증'으로 시야가 가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눈꺼풀의 일정부분을 절개, 봉합하는 수술이었다.

nhpar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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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이 움직이는 법

최근 황교수 사건을 두고 언론에 대한 말들이 새삼 많다. 어느 한 두 사람의 잘못이라고 보지는 않지만, 얼른 생각해도 우리 나라 언론이 의제를 만드는 방식은 문제가 적지 않다.  

 

시각을 중시하는 언론 매체는 "그림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한다. 텔레비젼이 대표적이다. 아무리 중요한 의제라도 화면에 비출 것이 없으면 뉴스 시간에 올라올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부정적인 내용 투성이지만 대규모 길거리 시위가 그나마 가끔 화면에 나타나는 것은 그 시각적 효과 떄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여기에 영합하자는 유혹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이른바 "화면 만들기"용 운동이 대표적이다. 고상한(?) 말로는 퍼포먼스라고도 하는데, 알록달록한 행사를 한다든지 동상에 올라간다든지 하는 것이 그것이다. 9시 뉴스에 보도되어야 한다는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볼 때마다 입맛이 쓰다.

 

한국 언론이 움직이는 또 다른 기초는 보도자료이다. 이야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새삼 말할 것도 없다. 여기서 말하고픈 것은 개인이 내는 보도자료 혹은 '자가발전'이다. 이런 자가발전을 식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도저히 기자가 알 수 없을 것 같은 내용이 보도되는 때이다. 어디 '세계적' 인명사전에 실렸다든지, 무슨 학술지에 논문이 게재되었다든지, 정체불명의 상을 받았다는 것 등이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문제는 이런 것들이 개인 동정 난이 아니라 기사 모양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황교수는 이런 한국 언론의 속성을 적절히 활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언론을 이런 식으로 활용하는 것은 그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다. 결국 언론이 나아지는 것이 바른 길이나. 이런 현상들은 한국 언론의 구조적 문제점 - 전문성, 인력 부족, 이념적 편향 - 으로 볼 때 당분간 사라질 것 같지 않다. 그때마다 답답해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러나 한국 언론의 이런 상황에 타협 혹은 야합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사람과 활동이 언론에 맞추고, 그 결과로 사람과 활동이 달라지는 일만큼은 없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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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에 대한...

얼마 전에 좌파라는 정당이 이상한 짓을 하기는 했지만, 일부 자칭 '좌파'들의 애국심(혹은 주의)은 좌파가 본래 지향하는 바와는 서로 어울리기 힘들다.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적 민족주의' 를 편드는 사람도 있으나, 이것도 사실 민족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식민지배의 부정의와 야만성을 반대하는 것이 본래의 내용일 것이다. 민족은 식민지배의 부정의와 야만이 구현되는 질료로서의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터.

 

황교수 사건에 대한 대중과 언론의 반응은 명맥히 애국심 혹은 애국주의와 연결되어 있다. 온 국민이 월드컵이나 올림픽의 성과에 열광하고, 외국에라도 나갈 짝 치면 삼성이나 현대자동차 또는 한류 '열풍'에 친근함과 익숙함을 넘어 '자랑스러워' 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정부나 언론도 어차피 이런 대중적 정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으리라. 그러고 보면 문제를 개별화하는 것은 잘못 짚은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좌파'의 태도는 다른 생각거리이다. 양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일부 자칭 '좌파' 혹은 '진보'가 보수와 같은 목소리를 내는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과연 이를 기묘한 동거상태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한국 일부 '좌파'의 민족주의적 성향 때문? 그도 아니면 혹자의 주장처럼 새로운 이념지형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나는 비교적 간단하게 생각한다. 애국심과 좌파 혹은 진보는 양립할 수 없다. 좌파를 넓게 정의할 수 있다고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어떤 의미로 정의하더라도 좌파는 진보여야 하고, 그 진보는 어렵더라도 바람직한 방향으로 현재를 지양하려는 것이다. 여기에 애국이 낄 자리는 그리 넓어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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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하며

참으로 많은 일들이 개인적인 평화를 깬다. 이해할 수 없는 무모한 열정, 억지, 눈감기 같은 것들이 구분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뒤섞여 있다. 그 때문에 자주 절망할 수밖에 없다. 이런 때에 희망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희망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리고 가능한가?

 

다시 블로그를 시작한다. 스스로의 평화와 안식을 바라며. 그러나 아마도 희망보다는 '옳음'을 더 많이 이야기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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