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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로 봐서 이명박 정부의 실패는 명확해 보인다. 때 지난 처방으로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리 만무하다. 경제성장도, 취업도, 삶의 질 향상도 가능하지 않다. 대운하는 더욱 터무니 없다.
짧게 보더라도 IMF 위기 이후 한국 사회의 발전 전망은 그 이전과 전혀 다르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 나아가 보수세력, 더 나아가 대중은 이를 전혀 인식하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것이 지나가야 하는 길이라면, 어쩌랴.
문제는 보수나 수구가 아니다. 진보가 스스로를 보는 눈이다. 보수의 실패가 새로운 기회를 보장한다고 생각한다면, 아서라, 말아라. 단언컨대, 이명박 정권, 혹은 보수 수구세력의 실패가 진보의 성장을 보장하지 않는다. 보수가 진보보다 더 나을 것이 없기 때문에, 다시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꿈깨라'이다.
보수의 '실패'를 쉽게 볼 일이 아니다. 왜? 근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실패하지 않는다. 모든 근본주의가 그렇듯, 근본주의의 실패는 '더욱 근본으로'를 만들어 낸다. 간단하고 명료하다.
이명박 정권이 실패한다고 치자. 그 다음에 예비되어 있는 것은 '더 근본적인' 시장이다. '철저하게 시장을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했다'라는 것이 보수의 예비된 다음 단계이다.
보수의 실패가 진보의 기회를 보장하지 않는다. Never....
진보란 무릇 무엇인가. 학술적 정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진보인지, 다른 사람이 진보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가 질문이다.
진보적인 가치가 옳다고 믿는다?
의견이나 말이 진보적이다?
친하거나 호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주로 진보적이라고 분류되는 사람이다?
읽는 신문이나 자주 드나드는 인터넷 사이트가 진보적이다?
투표를 통해 누구 혹은 어떤 집단(정당 포함)를 지지한다?
생활 속에서 진보적인 가치를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진보적인 단체나 조직에서 활동한다?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믿고 있는 것 이외에, 오늘 내가 진보적이라는 다른 증거가 과연 있기는 한가?
대선이 끝났다. 꿈쩍도 하지 않았던 지지율 분포는 어떤 개인에 대한 호오를 넘어 이 시대에 대한 절망을 불러 일으킨다. 도대체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러나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이 현상은 성찰의 기회이기도 하다.
아니나 다를까. 언론의 해석은 노무현 정권에 대한, 혹은 개혁 정부에 대한 응징투표라는 것이 대세이다. 그럴지 모른다. 그러나 과연 무엇을 응징하는 것인가. 실체는 명확하지 않다.
무지막지해 보이는 즉자적인 대중의 선택이 보기에 따라서는 혹 가장 합리적이 아닐까? 사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유신헌법의 찬성률은 100%에 가까왔고 독재정권에 대한 평가는 절망적으로 후했다. 선거에서는 지연, 학연, 혈연과 같은 일차적인 연고가 강하게 작용했다는 평가도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들을 모두 몽매한 대중의 오도된 인식의 결과라고 치부하기에는 미심쩍다. 달리 선택의 다른 기준이 없는 이런 선택이 '합리적'인 것은 아닐까. 나에게 이득이 될 가능성(!)이 더 많다는 점에서 말이다.
도무지 아무 선택의 기준, 즉 우열을 가릴 수단이 없는 경우에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선택의 방법은? 애당초 이념, 정책, 실천력, 도덕성 그 무엇도 내 힘으로 판단할 수 없을 때, 아니 아예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별 관심이 없을 때 무엇이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가. 심지어 판단기준이 있는 경우라도 실제 그것을 적용해 검증할 기회가 없다면?
어줍잖지만, 이것을 주류 경제학 식으로 한번 생각해 보자. 선거를 시장에서의 거래라고 생각하고 후보를 선택하는 것이 물건(예를 들어 중고차)을 사는 것과 같은 행위라고 보잔 말이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후보에 대해 아는 것은 사려는 중고차에 대해 아는 것보다 많지 않다. 정보가 부족한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유일한 방법은 선택 대상이 보내오는 신호(signal)를 판단의 근거로 삼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물건인 경우 가격이나 브랜드가 신호가 될 수 있다. 비싸면 좋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삼성 컴퓨터가 고장이 잘 안날 것이라고 기대하는 식이다. 중고차를 고를 때 현대 소나타, 기아 프라이드 하듯이 현대건설의 CEO, 서울시장 같은 브랜드를 보고 고르는 것을 비합리적 행위라고 할 수 있을까.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판단하기 위해서는 비용(시간, 노력 등)이 들기 때문에, 이런 방식의 판단이 비용을 줄이기 위한 가장 합리적, 효율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축적된 사회적, 정치적 신뢰는 선거에서 아주 중요한 신호가 될 수 있다. OO당에 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괜찮아. 그동안 해온 꼴로 보면 그래도 OO당이 좀 낫겠지. 본래 그 놈들이 그렇지 뭐, 그래도 이런 공약은 믿음이 가....이런 종류들이다.
우리는, 그리고 그들은, 그동안 무슨 신호를 보내고 있었던 것일까.
노무현 정권이 신자유주의에 투항했다고 하는 사람이 많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를 대표하는 사건은 한미 FTA를 꼽을 수 있다. 왼쪽 깜박이로 우회전한다는 이야기도 비슷하다. 이런 평가에 대해 약간의 논란이야 있겠지만 동감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아주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그리 틀린 소리는 아니리라.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라 보태서 물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왜?'라는 질문이다. 이런 질문에 본래 그가 그랬다든가, 참모들이 어땠다는가, 관료들에게 포섭되었다든가 하는 식으로 답하면 지나치게 안이하다. 어울리지 않게 개인 차원에서 사회변화를 해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면 왜일까. 좀 더 탐구가 필요하지만, 나는 사회적으로 축적된 '공부'가 없었던 것이 이유라고 생각한다. 사회 또는 세력 차원에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역량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의미이다. 기존의 패러다임(이 경우 신자유주의)을 넘지 못하면 거기에 굴복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여기에서 기존 패러다임을 극복한다는 것이 개인 차원에서 논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리고 총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확실하다. 사회적으로, 집단적으로, 하나의 세력으로, 새로운 패러다임과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고 이것이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래서 참으로 어려운 공부가 더 많이 필요하다. 그 공부가 성과를 내지 못하면, 어떤 정권에서도 새로운 사회를 여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최근 10년을 무엇이라고 정의하든, 그 전 정권과 다른 것은 확실하다. 이제 또 다른 정권이 들어설 것으로 보인다. 역시 지난 10년과는 성격을 달리할 것이다. 그래서 냉정하게 지난 10년을 평가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 중에 우선 생각나는 중요한 것 하나... (이것은 새로운 앞날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지난 10년을 현실에서 볼라치면, 의도에 관계없이 새로운 사회에 대한 실천적 구상과 프로그램, 그리고 그것을 만들어 나갈 능력이 턱없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총론은 물론이고, 각론도 부실하긴 마찬가지다. 그 결과는 아이디어, 프로그램, 전략을 막론하고 기존 패러다임에 굴복하는 것 이외에는 없다. 이건 이념과 철학이 문제였다는 식의 판정과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특히 기억해야 할 것. 이러한 능력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축적된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 전체의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
시장에서의 무한 경쟁이 일세를 풍미하고 있다. 일찍이 이건희의 "메기와 미꾸라지" 논리부터 최근의 입시제도에 이르기까지, 때로는 생활 가까이에서 때로는 거창한 이념으로 경쟁 논리는 숭배와 찬양의 대상이 된지 오래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경쟁 논리가 대단히 정서적이고 선동적이라는 점이다. 경쟁을 찬양하는 목소리는 압도적이지만, 왜 경쟁이 좋은지, 과연 더 나은 결과(그것이 어떤 결과든)를 낳는지에 대한 근거는 거의 없다. 어떤 분야든 경쟁이 무엇을 만들었다는 식의 일화와 예화, 성공담은 차고 넘친다. 예를 들어 국내에서의 치열한 경쟁이 양궁이나 쇼트트랙 강국을 만들었다는 식이다. 휴대폰과 반도체의 성공신화에도 이런 논리가 동원된다.
하지만 전체를 두고 보면 일반화의 근거는 박약하다. 국내의 치열한 경쟁으로 치면 쇼트트랙이나 양궁 못지 않게 축구, 야구, 테니스가 더 할텐데 이건 왜 국제 수준이 못되는지 답하지 못한다. 산업으로 쳐도 식당이나 옷가게의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가. 그러나 이런 분야가 경쟁 때문에 무엇을 이루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유감스럽게도 경쟁이 치열하다고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닌 듯 싶다. 경쟁이 곧 성공이자 성취라는 논리는 필요하면 동원되는 제 논에 물대기식 주장일 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근거가 확고하지 않은데도 경쟁 논리가 득세하는 이유는 사실 다른 곳에 있다. 다름 아니라 경쟁 논리가 자본주의 사회를 안정화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는 것이 경쟁이 찬양되는 진정한 이유이다. 경쟁은 필연적으로 패배자를 낳는다. 그러나 다른 패배(예를 들어 전쟁에서 패한 국가)와 달리 시장에서의 패배는 철저하게 개인의 책임이자 개인 능력의 결과로 해석된다.
개인에게는 고통을 안기고 사회적으로는 불안의 원천이 될 수 있는 패배가 개인 하나하나의 책임으로 자리가 매겨지는 것이다. 시장경쟁에서의 패배는 개인의 책임과 무능력, 불성실로 해석되고 당사자에게는 내면화된다. 외부의 시각에다 그것을 내면화한 당사자가 문제제기를 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게다가 제 탓을 해야 하는 개인들은 다 흩어져 있다. 비유하자면, 전사자는 많이 생겼는데 곳곳에 흩어져서 서로 보이지도 않는다. 문제가 심각하고 경쟁이 격렬하더라도 누구도 문제제기를 하거나 판을 바꾸자거나 룰을 고치자고 하기 어렵다. 어떤 사회적 불안요인도 생기지 않고, 그래서 자본주의 질서는 흔들림이 없다.
한국노총은 본래 그랬다, 원래 수구꼴통이었다는 식의 해석은 부질없다. 그것보다는 존재와 의식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존재는 노동자이면서 파업에는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들, 경제적 약자가 오히려 이명박과 이회창을 지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런 유난스러운 한국적(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현상에 대해서는 좀 더 탐구가 필요할 것 같다. 역사적, 사회심리적 분석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은 우선, 한국노총의 이명박 지지가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를 사로잡고 있는 이 심각한 괴리를 어찌할 것인가가 더 고민이다.
척박한 기부문화를 탓하지 말라. 회원의식이 없다거나 진성...가 없다고 말할 것도 아니다. 더더구나 이기적인 소시민 문화 때문에 무엇이 안된다고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
기부(넓은 의미에서)를 못하는 이유는 돈이 아까와서가 아니다. 그 돈이 어떻게 쓰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많고 적고를 떠나, 그게 제대로 쓰인다는 확신만 있다면 전혀 고민하지 않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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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눈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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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박의 실패는 바로 파시즘,극우시대..부가 정보
m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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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정확하십니다..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