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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로서의 시장주의

이명박 정부에서 시장과 경쟁이 더욱 위세를 떨칠 것이 확실하다. 모든 것을 시장과 경쟁에 맡기면 어떻게 되는지는 별로 관심이 없고, 오로지 한 길이다.

 

무조건 적인 시장과 경쟁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다. 차분하게 설명하고 증거를 들이대면 시장주의자를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시장주의는 이미 종교요 신앙의 차원으로 접어들었다. 그것도 근본주의 종파의 모습을 띠고 있다.   

 

근본주의 종파의 신앙 양태가 무엇인가. 모든 교조와 극단이 그러하듯 다음과 같은 특성을 보인다.

① 철저한 적대 관계의 설정 (적=세속, 사탄, 다른 종교...) 

② 경전의 절대성 

③ 다양성, 다원성과 상대주의 거부

④ 곧 현실에서 이루어질 천국

⑤ 새로운 가치와 발견에 대한 배타성

 

여기에다 요즘의 시장주의를 대입해 보면 놀랍도록 일치한다. 그래서, 시장주의는 설득의 대상이 아니다. '개종'이면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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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욕보다 무서운 것

흔히 권력욕, 명예욕, 재물욕이 무섭다고 한다. 종교에서는 오래 전부터 식욕, 수면욕, 성욕 같은 것이 극복(?)의 대상이었으나, 이건 본능에 가깝다는 점에서 논외로 하기로 하고... 그런데 권력, 명예, 재물에 대한 욕심을 뜯어보면 의외로 '인정'에 대한 욕구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나를 인정해 달라"는 것이다. 나의 무엇을? 능력있다, 똑똑하다, 열심이다. 헌신적이다, 사람이 됐다... 등등 여러 가지이다. 예를 들어 무슨 일을 했는데 3만원을 받은 것과 10만원을 받은 것 사이에는 차이가 많다. 당장 그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말할 것도 없지만, 꼭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도 이런 차이는 중요하다. 왜? 3만원과 10만원은 나를 어떻게 "인정"하느냐의 차이를 반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10만원은 3만원에 비하여 남이 나를 더 인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능력이든 재주든 헌신성이든 말이다. 상대성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인정은 의미이자 보람일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인정에 대한 욕구는 무섭다. 아예 노골적으로 권력이나 재물을 탐하는 것에 비하여 더 교묘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인정에 대한 욕구가 칭찬의 대상이 될 만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경우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이거, 이제 내려 놓아야 한다. 훌훌... 지나치면 모든 것을 파괴한다. 스스로와 다른 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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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는 정권을 잡았다는 생각으로...

새해가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결심을 하기에는 아직도 추스려야 할 것이 많다. 시간이 한참 걸릴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제대로 된 평가와 반성이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데에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새해에는 정권을 잡았다는 생각으로 살아야 되겠다는 결심을 한다. 정권을 잡는다는 것은 곧 국가를 운영한다는 것을 뜻한다. 국가 운영의 핵심은 "매일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장기적인 비전이나 철학, 이념적 입장이 기초가 되지만, 국가 운영을 다른 어떤 행위에서 명확하게 구별 짓는 것은 매일 벌어지는 대중의 일상과 생활의 문제를 해결하고 관리한다는 데에 있다.

 

따라서 매일의 문제에 대한 파악, 해결책, 나아가 대안이 없으면 그건 부족하다. 국가 운영을 담당해 봐야, 시장에, 신자유주의에, 기존의 질서에 붙들릴 뿐이다. 그래서 새해에는 바로, 지금, 국가 운영을 담당한다는 생각으로 공부하고 궁리해 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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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의 실패=진보의 기회?

현재로 봐서 이명박 정부의 실패는 명확해 보인다. 때 지난 처방으로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리 만무하다. 경제성장도, 취업도, 삶의 질 향상도 가능하지 않다. 대운하는 더욱 터무니 없다.

 

짧게 보더라도 IMF 위기 이후 한국 사회의 발전 전망은 그 이전과 전혀 다르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 나아가 보수세력, 더 나아가 대중은 이를 전혀 인식하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것이 지나가야 하는 길이라면, 어쩌랴.  

 

문제는 보수나 수구가 아니다. 진보가 스스로를 보는 눈이다. 보수의 실패가 새로운 기회를 보장한다고 생각한다면, 아서라, 말아라. 단언컨대, 이명박 정권, 혹은 보수 수구세력의 실패가 진보의 성장을 보장하지 않는다. 보수가 진보보다 더 나을 것이 없기 때문에, 다시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꿈깨라'이다.

 

보수의 '실패'를 쉽게 볼 일이 아니다. 왜? 근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실패하지 않는다.  모든 근본주의가 그렇듯, 근본주의의 실패는 '더욱 근본으로'를 만들어 낸다. 간단하고 명료하다.

 

이명박 정권이 실패한다고 치자. 그 다음에 예비되어 있는 것은 '더 근본적인' 시장이다. '철저하게 시장을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했다'라는 것이 보수의 예비된 다음 단계이다.

 

보수의 실패가 진보의 기회를 보장하지 않는다. N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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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진보'인가

진보란 무릇 무엇인가. 학술적 정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진보인지, 다른 사람이 진보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가 질문이다.

 

진보적인 가치가 옳다고 믿는다?

의견이나 말이 진보적이다?

친하거나 호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주로 진보적이라고 분류되는 사람이다?

읽는 신문이나 자주 드나드는 인터넷 사이트가 진보적이다?

투표를 통해 누구 혹은 어떤 집단(정당 포함)를 지지한다?

생활 속에서 진보적인 가치를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진보적인 단체나 조직에서 활동한다?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믿고 있는 것 이외에, 오늘 내가 진보적이라는 다른 증거가 과연 있기는 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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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택의 합리성

대선이 끝났다. 꿈쩍도 하지 않았던 지지율 분포는 어떤 개인에 대한 호오를 넘어 이 시대에 대한 절망을 불러 일으킨다. 도대체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러나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이 현상은 성찰의 기회이기도 하다.

 

아니나 다를까. 언론의 해석은 노무현 정권에 대한, 혹은 개혁 정부에 대한 응징투표라는 것이 대세이다. 그럴지 모른다. 그러나 과연 무엇을 응징하는 것인가. 실체는 명확하지 않다.  

 

무지막지해 보이는 즉자적인 대중의 선택이 보기에 따라서는 혹 가장 합리적이 아닐까?  사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유신헌법의 찬성률은 100%에 가까왔고 독재정권에 대한 평가는 절망적으로 후했다. 선거에서는 지연, 학연, 혈연과 같은 일차적인 연고가 강하게 작용했다는 평가도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들을 모두 몽매한 대중의 오도된 인식의 결과라고 치부하기에는 미심쩍다. 달리 선택의 다른 기준이 없는 이런 선택이 '합리적'인 것은 아닐까. 나에게 이득이 될 가능성(!)이 더 많다는 점에서 말이다.

 

도무지 아무 선택의 기준, 즉 우열을 가릴 수단이 없는 경우에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선택의 방법은? 애당초 이념, 정책, 실천력, 도덕성 그 무엇도 내 힘으로 판단할 수 없을 때, 아니 아예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별 관심이 없을 때 무엇이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가. 심지어 판단기준이 있는 경우라도 실제 그것을 적용해 검증할 기회가 없다면?

 

어줍잖지만, 이것을 주류 경제학 식으로 한번 생각해 보자. 선거를 시장에서의 거래라고 생각하고 후보를 선택하는 것이 물건(예를 들어 중고차)을 사는 것과 같은 행위라고 보잔 말이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후보에 대해 아는 것은 사려는 중고차에 대해 아는 것보다 많지 않다. 정보가 부족한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유일한 방법은 선택 대상이 보내오는 신호(signal)를 판단의 근거로 삼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물건인 경우 가격이나 브랜드가 신호가 될 수 있다. 비싸면 좋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삼성 컴퓨터가 고장이 잘 안날 것이라고 기대하는 식이다. 중고차를 고를 때 현대 소나타, 기아 프라이드 하듯이 현대건설의 CEO, 서울시장 같은 브랜드를 보고 고르는 것을 비합리적 행위라고 할 수 있을까.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판단하기 위해서는 비용(시간, 노력 등)이 들기 때문에, 이런 방식의 판단이 비용을 줄이기 위한 가장 합리적, 효율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축적된 사회적, 정치적 신뢰는 선거에서 아주 중요한 신호가 될 수 있다. OO당에 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괜찮아. 그동안 해온 꼴로 보면 그래도 OO당이 좀 낫겠지. 본래 그 놈들이 그렇지 뭐, 그래도 이런 공약은 믿음이 가....이런 종류들이다.

 

우리는, 그리고 그들은, 그동안 무슨 신호를 보내고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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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가 필요하다(2)

노무현 정권이 신자유주의에 투항했다고 하는 사람이 많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를 대표하는 사건은 한미 FTA를 꼽을 수 있다. 왼쪽 깜박이로 우회전한다는 이야기도 비슷하다. 이런 평가에 대해 약간의 논란이야 있겠지만 동감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아주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그리 틀린 소리는 아니리라.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라 보태서 물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왜?'라는 질문이다. 이런 질문에 본래 그가 그랬다든가, 참모들이 어땠다는가, 관료들에게 포섭되었다든가 하는 식으로 답하면 지나치게 안이하다. 어울리지 않게 개인 차원에서 사회변화를 해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면 왜일까. 좀 더 탐구가 필요하지만, 나는 사회적으로 축적된 '공부'가 없었던 것이 이유라고 생각한다. 사회 또는 세력 차원에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역량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의미이다. 기존의 패러다임(이 경우 신자유주의)을 넘지 못하면 거기에 굴복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여기에서 기존 패러다임을 극복한다는 것이 개인 차원에서 논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리고 총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확실하다. 사회적으로, 집단적으로, 하나의 세력으로, 새로운 패러다임과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고 이것이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래서 참으로 어려운 공부가 더 많이 필요하다. 그 공부가 성과를 내지 못하면, 어떤 정권에서도 새로운 사회를 여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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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가 필요하다

최근 10년을 무엇이라고 정의하든, 그 전 정권과 다른 것은 확실하다. 이제 또 다른 정권이 들어설 것으로 보인다. 역시 지난 10년과는 성격을 달리할 것이다. 그래서 냉정하게 지난 10년을 평가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 중에 우선 생각나는 중요한 것 하나... (이것은 새로운 앞날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지난 10년을 현실에서 볼라치면, 의도에 관계없이 새로운 사회에 대한 실천적 구상과 프로그램, 그리고 그것을 만들어 나갈 능력이 턱없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총론은 물론이고, 각론도 부실하긴 마찬가지다. 그 결과는 아이디어, 프로그램, 전략을 막론하고 기존 패러다임에 굴복하는 것 이외에는 없다. 이건 이념과 철학이 문제였다는 식의 판정과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특히 기억해야 할 것. 이러한 능력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축적된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 전체의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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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유행한다는....분포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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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경쟁이 좋은 점

시장에서의 무한 경쟁이 일세를 풍미하고 있다. 일찍이 이건희의 "메기와 미꾸라지" 논리부터 최근의 입시제도에 이르기까지, 때로는 생활 가까이에서 때로는 거창한 이념으로 경쟁 논리는 숭배와 찬양의 대상이 된지 오래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경쟁 논리가 대단히 정서적이고 선동적이라는 점이다. 경쟁을 찬양하는 목소리는 압도적이지만, 왜 경쟁이 좋은지, 과연 더 나은 결과(그것이 어떤 결과든)를 낳는지에 대한 근거는 거의 없다. 어떤 분야든 경쟁이 무엇을 만들었다는 식의 일화와 예화, 성공담은 차고 넘친다. 예를 들어 국내에서의 치열한 경쟁이 양궁이나 쇼트트랙 강국을 만들었다는 식이다. 휴대폰과 반도체의 성공신화에도 이런 논리가 동원된다.

 

하지만 전체를 두고 보면 일반화의 근거는 박약하다. 국내의 치열한 경쟁으로 치면 쇼트트랙이나 양궁 못지 않게 축구, 야구, 테니스가 더 할텐데 이건 왜 국제 수준이 못되는지 답하지 못한다. 산업으로 쳐도 식당이나 옷가게의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가. 그러나 이런 분야가 경쟁 때문에 무엇을 이루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유감스럽게도 경쟁이 치열하다고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닌 듯 싶다. 경쟁이 곧 성공이자 성취라는 논리는 필요하면 동원되는 제 논에 물대기식 주장일 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근거가 확고하지 않은데도 경쟁 논리가 득세하는 이유는 사실 다른 곳에 있다. 다름 아니라 경쟁 논리가 자본주의 사회를 안정화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는 것이 경쟁이 찬양되는 진정한 이유이다. 경쟁은 필연적으로 패배자를 낳는다. 그러나 다른 패배(예를 들어 전쟁에서 패한 국가)와 달리 시장에서의 패배는 철저하게 개인의 책임이자 개인 능력의 결과로 해석된다. 

 

개인에게는 고통을 안기고 사회적으로는 불안의 원천이 될 수 있는 패배가 개인 하나하나의 책임으로 자리가 매겨지는 것이다. 시장경쟁에서의 패배는 개인의 책임과 무능력, 불성실로 해석되고 당사자에게는 내면화된다. 외부의 시각에다 그것을 내면화한 당사자가 문제제기를 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게다가 제 탓을 해야 하는 개인들은 다 흩어져 있다. 비유하자면, 전사자는 많이 생겼는데 곳곳에 흩어져서 서로 보이지도 않는다. 문제가 심각하고 경쟁이 격렬하더라도 누구도 문제제기를 하거나 판을 바꾸자거나 룰을 고치자고 하기 어렵다.  어떤 사회적 불안요인도 생기지 않고, 그래서 자본주의 질서는 흔들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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