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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와 평생을 함께 한 유전학자, 바바라 매클린톡 [제 973 호/2009-08-26]

1920년대 미국 코넬대 인근 어느 미장원에서 미용사와 “긴 머리가 좋으냐, 짧은 머리가 좋으냐”를 놓고 장시간 철학적 토론을 나눈 끝에 자기 머리를 바짝 올려 짧게 깎아달라는 여학생이 있었다. 다음날 교정은 발칵 뒤집어 졌다. “여자 머리가 저게 무슨 꼴이냐”고 여기저기서 수군거리고 난리가 났다.

게다가 다른 여학생들은 모두 치렁치렁한 긴 치마를 입고 다녔는데, 농과대학에 다니던 그 여학생만은 야외실습 때 치마를 바지로 수선해 고쳐 입고 다녔다. 옥수수 밭에서 일할 때마다 긴 치마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이 여학생이 1983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한 바바라 매클린톡이다.

매클린톡은 언제나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조금 앞서서 했을 뿐인데 당시 사람들에게는 인정받지 못했다. 마치 그녀가 과학계에서 이룩한 업적에 대한 주변 과학자들의 냉담한 반응과 비슷했다. 왜 그녀의 이야기는 한동안 무시 받고 미친 소리로까지 취급받은 것일까?

1960년대 말까지 과학자들 사이에는 유전자가 생명의 비밀을 간직한 열쇠라는 점에 모두들 동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전자의 배열 방식에 대해 그녀와 대다수 과학자들은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옥수수 세포 속 유전자 가운데 원래 자리를 이탈해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튀는 유전자(jumping genes)’를 발견했다.

당시 과학자들은 유전자가 차곡차곡 쌓인 벽돌처럼 늘 제자리를 지키는 것으로 믿었다. 생명체의 정보는 언제나 DNA에서 RNA를 거쳐 단백질로 흘러가므로 DNA에서 비롯된 정보는 결코 바뀌지 않는다는 얘기다.

고정된 자리를 지키던 유전자가 갑자기 대열을 이탈해 다른 자리로, 심지어 개별 염색체들 사이로 이리저리 옮겨간다는 매클린톡의 주장은 상식 밖의 발상이었다. 더욱이 매클린톡은 이런 유전자를 스위치에 비교해 다른 유전자의 활동을 끄고 켠다고 설명했다. 유전자를 끄고 켜는 조정능력 때문에 유전자가 다른 염색체로 이동한다는 것이다.

1951년 매클린톡은 유전학 심포지엄에서 자신이 발견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지만 참석자들은 침묵과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1953년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DNA 구조를 밝히면서 유전정보는 DNA에서 일방적으로 전달된다는 중앙통제론이 확고히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그녀의 연구 성과는 계속 폄하될 수밖에 없었다.

매클린톡은 많은 학자들이 자신의 연구결과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매우 놀랐고 크게 실망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연구결과를 학술지에 논문으로 발표하는 것을 포기했다. 설상가상으로 그녀가 도달한 결론의 배경을 충분히 이해하려면 이 분야의 해박한 지식이 필요했지만 옥수수 유전학에 대한 관심이 희박해지면서 관련 연구자도 점차 줄어들었다.

그러나 매클린톡은 ‘생명의 느낌’에 충실한 과학자로서, 평생을 옥수수 유전연구에만 몰두했다. “싹이 나올 때부터 그 식물을 바라보잖아요? 그러면 나는 그걸 혼자 버려두고 싶지가 않았어요. 싹이 나서 자라는 과정을 빠짐없이 관찰해야만 나는 정말로 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내가 밭에다 심은 옥수수는 모두 그랬어요. 정말로 친밀하고 지극한 감정이 생겼어요. 식물들과 그렇게 깊은 관계를 맺는 게 나에게는 큰 기쁨이었지요.”
<바바라 맥클린 톡>

그 뒤 1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전혀 엉뚱한 곳에서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박테리아의 게놈에서 일부 유전자가 튀어나오는 현상이 관찰된 것이다. 이 별난 유전자의 활동은 틀림없이 매클린톡이 관찰한 유전자의 조정능력을 암시했다. 기존의 중앙통제론으로 복잡한 생명현상을 설명할 수 없음이 확인된 것이다.

동물에서도 유전자의 일부가 옮겨 다니는 현상이 관측됐다. 쥐의 혈액 가운데 항체를 만드는 DNA는 무수히 다양한 형식으로 유전자가 재배열된다는 점이 밝혀졌다. 항체의 생김새가 다양한 까닭은 유전자의 무한한 재배열 덕분이었던 것이다.

나아가 암의 발생도 염색체의 구조가 바뀐 결과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인체의 면역계가 수많은 종류의 항체를 만드는 것도 유전자가 뒤섞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현재 각종 질병 치료에 매클린톡이 발견한 튀는 유전자 개념이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어느덧 황당한 여자가 꾸며낸 헛소리로 치부되던 유전자의 자리바꿈 현상은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는 확실한 이론으로 정립됐다. 점차 매클린톡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커지면서 은둔자로서의 그녀의 삶은 깨지기 시작했다.

1978년 미국 브랜다이스대는 “매우 훌륭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매클린톡 박사는 단 한 번도 공식적인 인정을 받거나 명예를 얻은 적이 없었다”며 그녀에게 로젠스틸상을 수여했다. 또 1979년에는 미국 록펠러대와 하버드대에서 각각 그녀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헌정했다.

마침내 1983년 10월 10일, 스웨덴 한림원에서 그해 노벨생리의학상을 바바라 매클린톡에게 수여하기로 결정했다는 방송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노벨상 역사상 여성 단독 수상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그녀의 연구실에는 전화벨이 하루 종일 울렸다. 하지만 그녀는 라디오를 끄고 여느 날과 다름없이 산책을 하며 떨어져 있는 호두열매를 주웠다.

오히려 유명인사가 되는 바람에 차분히 자신의 일을 할 수 없게 됐다고 속상해 했다는 매클린톡은 노벨상 수상식에서도 그녀다움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평소 입었던 푸른 작업복과 낡은 구두차림으로 들어섰던 것. 평생 독신이었지만 누구보다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자부하는 여든 한 살의 할머니는 다음과 같이 노벨상 수상 소감을 밝혔다.

“나 같은 사람이 노벨상을 받는 것은 참 불공평한 일입니다. 옥수수를 연구하는 동안 나는 모든 기쁨을 누렸습니다. 아주 어려운 문제였지만 옥수수가 해답을 알려준 덕분에 이미 충분한 보상을 받았거든요.”

글:서금영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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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도 길이 있다! [제 972 호/2009-08-24]

“산 위에서 부는 사람 시원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땅 밑에 불이라도 지핀 양 열기가 후끈후끈 올라오는 여름. 내 몸에 수분이 이렇게 많았나 싶을 정도로 땀이 온 몸에서 흘러내릴 때면 어린 시절 부르던 노래 속의 산바람이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다. 특히 도시에서는 시원한 바람 한 점이 더 아쉽다. 여기저기 우후죽순 서서 바람을 막고 있는 건물 때문에 시원한 바람을 만나기가 훨씬 더 어려운 탓이다.

도시에 바람이 통하지 않으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 에어컨 실외기나 자동차에서 나온 열기가 도시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고 그대로 쌓여 도시가 주변 지역보다 뜨거워진다. 이른바 열섬 현상이다. 열섬 현상으로 도시가 더워지면 사람들은 냉방을 위해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고 그만큼 도시는 더 뜨거워지는 악순환이 생긴다.

도시는 스스로 시원한 바람을 만들기도 어려운 구조다. 도시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콘크리트는 낮 동안에 달구어졌다가 밤에 천천히 열을 내뿜는다. 밤이 되어도 도무지 시원해지지 않는 이유다. 게다가 흙과 달리 물을 머금지 못하기 때문에 물이 증발하면서 생기는 냉각 효과도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도시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는 건 열기만이 아니다. 빽빽하게 놓인 아파트나 고층 건물은 바람의 방향을 바꾸거나 속도가 느려지게 한다. 상공을 지나가던 바람도 고층 건물에 부딪히면 아래로 방향이 바뀌면서 건물 사이에서 소용돌이를 이룬다. 그 결과 굴뚝이나 자동차에서 나온 오염물질도 바람을 타고 넓은 공간으로 퍼지거나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그대로 쌓인다.

바람은 건물 사이의 좁은 공간을 통과하면서 속도가 빨라져 돌풍으로 변한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생긴 돌풍을 ‘빌딩풍’이라고 한다. 빌딩풍은 길은 걷는 사람에게 불편을 줄 뿐만 아니라 지붕을 날려 버리거나 간판을 떨어뜨리기도 한다. 심할 경우 빌딩풍은 태풍과 맞먹는 초속 십 수 미터의 속도로 불기도 한다. 실제로 지난 한 해 동안 서울 강남 지역에서는 태풍급에 해당하는 빌딩풍이 수십 차례나 불었다.

그래서 요즘에는 도시의 바람길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도시나 건물의 설계 단계부터 바람이 통할 수 있는 길을 염두에 두는 것이다. 바람길을 뚫어 도시를 식히려면 먼저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시 주변에 녹지 공간을 충분히 확보해야 한다. 동시에 도시와 녹지 사이의 경계에는 대단위 아파트 단지나 높은 건물을 짓지 말아야 한다. 산 위에서 내려오는 바람을 막기 때문이다.

도시를 설계할 때는 지형과 풍향을 고려해 바람을 많이 끌어들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은 위치나 지형, 계절에 따라 모두 다르고 시시각각으로 변하기 때문에 어떤 풍향에 맞춰 설계할지 정해야 한다. 보통 1년 정도의 오랜 기간 동안 바람의 방향을 측정한 뒤 가장 많이 부는 방향을 ‘주풍’으로 보고 이에 맞춰 설계한다.

<서울의 전경. 바람이 복잡한 빌딩숲과 고층건물 등에 부딪치면 빌딩풍, 열섬현상 등 부작용이
발생한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예를 들어, 서울의 경우 주풍이 서풍이다. 서쪽을 제외한 북, 동, 남쪽이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서쪽에서 들어온 바람은 한강을 따라 서울 도심으로 들어온다. 그 뒤 중랑천과 같은 하천을 따라 서울의 북동부까지 신선한 공기를 나른다.

외부의 바람을 도시 안으로 깊숙이 끌어들이려면 건물을 짓거나 도로를 낼 때 주풍을 최대한 덜 가로막도록 지어야 한다. 하천과 더불어 도시의 주요 바람길인 도로는 가급적 풍향과 평행하게 만드는 게 좋다. 도로는 폭이 넓을수록 바람이 먼 곳까지 잘 통한다. 반대로 도로가 좁고 구불구불하거나 도로 양 옆으로 높은 건물이 늘어서 있다면 오염물질이 넓게 퍼지기 어렵다.

그러나 도시 외부의 시원한 공기를 끌어들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바람이 도심의 대기오염물질을 싣고 도시 외곽의 주거 지역으로 흐른다면 주거 지역의 공기는 오히려 나빠질 수 있다. 한강을 따라 흐르다 중랑천 북쪽으로 올라온 공기가 서울 북동쪽의 산지에서 내려오는 찬바람과 만나면 더 이상 흐르지 못하고 정체되는 것이다. 따라서 도시의 바람길을 제대로 뚫으려면 그 지역의 공기가 어디로 얼마나 흐르는지 정량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국지적인 규모에서 바람길을 확보하는 일도 중요하다. 건물의 긴 쪽이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과 수직이 아니라 수평이 되게 건물을 짓는다면 바람이 막히는 정도도 줄어든다. 여러 동의 아파트 단지를 설계할 때도 바람이 들어와서 나가는 경로를 고려해야 한다.

이때는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가 제창한 ‘필로티 구조’도 대안이 될 수 있는데, 건물 전체 또는 일부를 벽체가 없이 기둥만으로 만들어 지상에서 들어 올리는 건축양식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바람의 길을 고려하기 보다는 다세대주택이나 빌라주택 등에서 주차장을 만들 때 흔히 사용되고 있다.

도심 내에서 찬공기를 만들 수 있다면 바람길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된다. 녹지나 하천은 머금고 있던 물이 증발하면서 온도를 떨어뜨리는 냉각 효과가 탁월하다. 도시 안에 녹지와 물이 흐르는 곳을 많이 만들어 주면 산에서 찬바람이 생기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다. 산에서 만들어진 찬 공기를 도심 깊숙이 끌어들이기 위해 도시 안에 녹지로 길을 만들 수도 있다.

자연의 시원한 바람은 도시의 열섬 현상과 대기 오염을 완화시킨다. 무엇보다도 이마에 흐르는 땀을 식혀 주는 한 줄기 바람은 도시에서 잊혀진 자연을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뻥 뚫린 바람길을 통해 들어온 맑고 시원한 공기가 도시와 자연을 이어 주기를 기대해 본다.

 
   
KISTI NDSL(과학기술정보통합서비스) 지식링크


○관련 논문 정보
단독주택지 경관개선을 위한 도시설계지침개발에 관한 연구 [바로가기]
환경심리.행태 연구의 가능성과 한계성 [바로가기]
수치지도를 이용한 3차원 도시공간모델 소프트웨어 개발에 관한 연구 [바로가기]

○관련 특허 정보
아파트용 환기구 덕트 챔버(한국등록특허) [바로가기]
천정 덕트용 에어 뎀퍼(한국등록특허) [바로가기]
열섬현상 완화용 도로포장 구조물(한국등록특허) [바로가기]

○해외 동향분석 자료
일본, 도시 열섬 대책, COOL CUBE 프로젝트 계획 - 2009년 [바로가기]
미국, 공기흐름을 통한 건물의 에너지 절감 방안 개발 - 2005년 [바로가기]
일본, 슈퍼컴퓨터로 도시형 기상재해 메커니즘 해명- 2006년 [바로가기]


 
 


글 : 고호관 동아사이언스 과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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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마술사, 사라지는 벽을 보여주마 [제 971 호/2009-08-21]

갓 태어난 첫 아들을 품에 안은 그 순간부터, 짠돌 씨는 결심한 것이 있었다. 아이에게 다양한 체험을 시켜주되, 나이에 걸맞지 않은 볼거리는 절대 금지하리라. 아이가 원하는 삶을 인정하되, 상식과 도덕을 어기는 짓은 절대 용서하지 않으리라. 딸이 태어났을 때 여기에 하나가 더 붙었다. 이 아이는 깨끗하고 맑고 순수하게 키우리라 재차 맹세했다. 아내인 초보주부 김 씨는 짠돌 씨의 그런 맹세를 보며 ‘혼자 무슨 광고 찍느냐’며 어이없어 했지만.

그리고 약 10년. 짠돌 씨 나름대로 잘 해왔다. 첫째 막신이는 나이에 비해 어른스럽고 의젓하게 성장했고, 둘째 막희는 가끔 사고를 치기는 했지만 무엇이든 쑥쑥 흡수하는 지적 능력을 타고나 부모를 기쁘게 했다. 짠돌 씨는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 한 맹세를 지켜온 10년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어제까지는.

“아빠! 마술해 줘, 마술!”
“막희야~. 아까부터 얘기했잖아. 아빠는 마술 못 해….”
“싫어! 마술 보여 줘~! 아니면 어제 그 마술사 다시 보러 가자~! 막희 마술 좋단 말이야!”

다양한 체험을 시켜준다는 항목을 어기지는 않았다. 나이에 걸맞지 않는 짓을 허용한 것도 아니다. 지극히 상식적이고 도덕적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딸은 아직 순수하고 맑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주말에 가족과 함께 놀이공원에 간 게 무에 그리 큰 잘못이란 말인가.

“거 봐. 내가 얘기했지? 막희에게 마술쇼 보여주면 안 될 거라고.”
“아들아, 네 직언을 받아들이지 못 한 내가 바보였다…만. 이 상황에 그 말을 들어도 전혀 위로가 안 되는구나.”

놀이공원 특설무대에서 펼쳐지는 마술쇼를 막희와 함께 관람한 것이 뼈아픈 실책이었다.
마음에 드는 걸 발견하면 질려서 내버릴 때까지 그것만 파고드는 딸래미가 마술쇼를 보자마자 마술에 푹 빠져버린 것이다. 아내와 막신이가 말릴 때 들었어야 하는데…. 마술을 다시 보여달라고 칭얼거리다가 결국 소리 내며 울기 시작한 막희를 멍하니 보며 짠돌 씨는 속으로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간단한 동전 마술도 제대로 못 하는 자신의 손재주를 저주하며.

“으이그…. 내 이럴 줄 알았지. 하여튼 감당할 수도 없는 사고부터 치고 보는 건 부녀간에 똑같아.”
“아니 그게 아니라…. 헉, 그건 뭐야?”
“뭐긴 뭐야, 마술 도구지. 거치적거리니 일단 비켜 봐.”
“우와, 엄마! 마술해 주는 거야?”
“이건 비밀인데, 엄마는 사실 마술사거든~. 멋진 마술을 보여줄 테니까 대신 막희 울음 뚝! 알았지?”
“응!”

엄마는 막신이에게 종이를 접어 상자를 만들라고 시켰다. 다 만들어진 상자에는 막희가 편광필름을 붙이도록 했다. 두 아이들의 손재주에 감탄하던 (우리 애들 다 컸구나!) 짠돌 씨.

옆에 서서 마술준비를 들여다보던 있는 짠돌 씨는 다 만들어진 상자 안을 들여다보고 갸우뚱한 표정을 짓는다. “아무것도 없는데?”

하지만 엄마 앞에 앉아 있는 아이들은 상자 안쪽으로 새롭게 벽이 생긴 것을 볼 수 있다.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가짜 벽이. 이 ‘마술 같은 현상’에 눈만 껌뻑거리던 짠돌 씨.

아내는 의기양양 진짜 마술사 같은 표정과 연기실력을 과시하며 볼펜 하나를 집어 든다. (아이들이 보기엔) 분명히 존재하는 벽을 아무런 문제없이 슬쩍 뚫고 나오는 볼펜.
곧 박수 소리가 쏟아진다. 짠돌 씨는 초보주부 김 씨의 재주에 입까지 떠억 벌렸다. 나랑 연애할 때도 그런 ‘고혹적’인 표정은 안 지었잖아 당신!

“와아! 엄마 멋져! 진짜 마술사 같아~!”
“어머 얘는~. 아까 얘기했잖아. 엄마 진짜 마술사 맞다고.”
“여보, 이 벽은 대체 왜 생긴 거야? 거기다 내 쪽에서 보면 왜 안 보여?”

“안해도 될 말을……. 쯧, 뭐, 됐고. 이건 편광의 마술이야.”
“엄마. 편광이 뭐야?”

“빛은 사실 파도처럼 진동하면서 직진하고 있어. 그 진동이 우리 눈에 안 보일 뿐이지. 그리고 진동은 여러 방향으로 이뤄진단다. 그런데 빛이 특수한 물체를 만나거나 반사되면 한 방향으로만 진동하게 돼. 이걸 ‘편광’이라고 하지. 편광필름은 빛을 강제적으로 한 쪽으로만 진동시키도록 하는 역할을 하지.”

“웅, 잘 모르겠어.”
“쉽게 설명해 볼까? 막희랑 막신이 나란히 서 봐. 사이에 아빠가 통과할 틈을 남기고. 옳지. 자기는 막희랑 막신 사이를 걸어서 통과해. 오케이~. 이번에는 누워서 구르면서 틈으로 가 봐. 애들 다리에 세게 안 부딪히게 조심하고.”

“이 좋은 일요일 오후에 내가 대체 무슨 짓을….” 식은땀과 함께 미소를 삐질삐질 흘리던 짠돌 씨는 속도를 조절해가며 옆으로 굴렀다. 당연히 아직 가늘고 짧은 두 쌍의 다리에 어깨와 허리가 걸려 더 이상 구르질 못한다.

“아. 편광필름이란게 지금 아빠처럼 ‘서 있을 때’만 통과시켜 주는 물건이라는 거죠?”
“그래. 빛도 마찬가지겠군. 편광필름을 갖다 대면 틈에 맞는 진동만 통과하는 거지.”
“응, 자기 말대로야. 이론에는 그런대로 강하네? 만약 이런 필름 두개를 직각으로 갖다 대면 어떻게 될까?”
“세로 틈을 통과한 세로 진동이 가로 틈은 못 빠져 나가니까…. 앗! 그래서 아까 필름 두 장을 겹쳤을 때 시커멓게 보인 거구나. 빛이 아예 통과를 못 해서.”
“정답! 이런 틈을 ‘편광축’ 이라고 해. 편광 되는 방향을 지시하는 축이지. 아까 나는 필름 두 장의 편광축이 수직을 이루게 상자에 붙였어. 그럼 그 부분은 빛이 완전히 차단돼서 어둡게 보이거든. 없던 벽이 눈에 보이는건 그 때문이야.”

다시 한 번 상자에 넣은 볼펜을 이리저리 흔들어 보는 아내, 상자의 위아래 빈공간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는 막신, 엄마의 ‘마술’에 연신 박수를 치며 즐거워 하는 막희. 엄마의 활약에 자신이 있을 공간이 사라진 짠돌씨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쓴웃음을 짓는다. 문득 시선을 돌린 초보주부 김 씨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한숨 쉬며 손을 까닥였다.

“자기도 이리 와. 같이 보고 얘기해요. 신기하지 않아?”
“으응, 확실히 신기해. 마술도 척척, 설명도 척척! 자기 진짜 멋지다~.”
“칭찬해도 아무 것도 안 나오네요. 작은 애보다 커다란 애가 더 속을 썩이니 어쩌면 좋을꼬.”
“커다란 애? 엄마.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아니 너 말고, 네 옆에 있는 저 덩치 큰 ‘애’. 너희들보다 저 큰 애가 손이 더 간단다.”

엄마의 말뜻을 알아들고 자지러지게 웃는 막신과 막희. 자신 덕분(?)에 즐거워하는 가족들을 보며 짠돌 씨는 다시 한 번 쓴웃음을 지었다. 절대, 두 번 다시 마술쇼 같은 것을 아이들에게 보여주지 않으리라 새삼 다짐하면서.



[실험TIP]
- 편광필름은 과학 상품 전문 상점에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
- 편광필름을 붙일 때는 필름의 방향에 주의하세요. 겹친 부분이 검게 보이도록 방향을 조절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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