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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식 못한다고? 해답은 안내렌즈삽입술 [제 961 호/2009-07-29]

라식이나 라섹 등 시력교정수술을 하기 위해 안과를 찾는 사람이 10명이라면 실제로 수술이 가능한 사람은 7명 정도다. 나머지는 눈이 너무 나쁘거나 각막이 얇아 수술이 불가능한 경우다. 이들에겐 라식이나 라섹도 그림의 떡인 셈이다.

그런데 이처럼 기존 수술이 불가능한 초고도 근시를 교정할 수 있는 렌즈삽입술이 나와 관심을 모으고 있다. 렌즈삽입술은 각막을 절개해 렌즈를 안구 속에 넣는 방식이다. 안경 렌즈가 빛의 굴절을 조절해 망막에 제대로 된 상이 맺히도록 하는 것처럼 안구 안에 들어간 렌즈가 빛의 굴절을 조절해 망막에 올바른 상이 맺히도록 하는 것이다. 렌즈삽입술은 초고도 근시뿐 아니라 원시나 난시도 교정할 수 있다.

라식이나 라섹 수술은 레이저로 각막을 깎아서 시력을 교정한다. 근시는 오목하게, 원시는 볼록하게 깎는 것이 안경 렌즈와 비슷하다. 눈이 나쁠수록 두꺼운 안경을 쓰는 것처럼 라식이나 라섹 수술을 할 때도 눈이 나쁘면 각막을 깊게 깎아야 한다.

그런데 각막 두께는 보통 500~550μm(마이크로미터, 1μm=1/1000mm)로 한계가 있다. 이보다 두께가 얇거나 시력이 -10디옵터 이하인 초고도 근시 환자는 수술을 받기 어렵다. ‘디옵터’는 안경 렌즈의 오목하고 볼록한 정도를 나타내는 단위인데 숫자(절댓값)가 클수록 도수가 높다. 근시용 오목렌즈는 (-)부호, 원시용 볼록렌즈는 (+)부호를 붙인다.

<안내렌즈삽입술에 사용되는 알티산렌즈>


렌즈삽입술은 각막은 그대로 보존하면서 눈 안에 렌즈를 삽입하기 때문에 초고도 근시와 초고도 원시를 모두 교정할 수 있다. 워낙 얇아서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눈 속에 삽입하는 렌즈도 근시용은 오목하고 원시용은 볼록하다.

난시는 안구가 완벽한 구 모양이 아닐 때 생긴다. 눈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망막의 한 점에 모이지 않고 서로 다른 부위에 상을 맺으면서 결과적으로 상이 겹쳐 보이게 된다. 난시 교정용 안경은 부위별로 굴절률이 다른 렌즈를 이용해서 빛이 망막의 한 점에 모이게 조절한다. 만일 눈 안에 난시교정렌즈를 삽입하면 같은 효과를 볼 수 있다.

렌즈삽입술은 렌즈를 넣는 위치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 째는 홍채지지형 렌즈(알티산/알티플렉스) 삽입술로 각막 위쪽을 3~6㎜ 절개해 각막과 홍채사이 물로 찬 공간에 렌즈를 삽입한다. 특수 집게로 렌즈의 양쪽 고리 같은 부분을 홍채에 밀어 넣는 이 수술은 절개 부위가 커서 별도로 봉합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수술시간은 한쪽 눈에 30분씩, 약 1시간이 걸린다.

둘 째로는 후방유수정체렌즈(ICL) 삽입술이 있다. 동공과 수정체 사이의 유연한 부분에 렌즈를 넣는 방법이다. 각막을 3㎜만 절개해서 렌즈를 넣고, 삽입직전 접어두었던 렌즈를 수정체 앞에서 펴지게 하면 수술은 끝난다. 이 방식은 따로 봉합할 필요가 없어 수술시간과 회복시간이 빠르고 충혈이 적다.

<손끝에 올려둔 ICL(후방유수정체렌즈). 크기가 작고 연조직으로 만들어져 있어 인체에 큰
부담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렌즈삽입술을 할 수 있는 조건은 꽤 까다롭기 때문에 수술 전 철저한 사전검사가 필요하다. 시력이나 안압 같은 기본 검사는 물론 안구의 구조와 각막의 지름, 각막과 수정체 사이 거리(렌즈가 들어갈 공간), 각막내피세포 숫자 등을 정확히 측정해야 한다.

검사결과 안압이 21㎜Hg보다 높으면 녹내장이 의심돼 수술을 할 수 없다. 수술 중 각막내피세포가 손상될 수 있으므로 세포 수가 1㎜당 2000개 이하인 경우에도 수술이 불가능하고, 백내장이나 망막박리 같은 질환이 있어도 마찬가지로 수술을 못한다.

또 동공의 크기 변화가 평균량(5.0~7.0㎜)보다 심하면 렌즈와 동공의 크기 차이가 많이 나 야간에는 불빛이 번져 보일 수 있으므로 수술을 선택할 때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 각막과 수정체 사이 거리는 3㎜이상 확보해야 렌즈를 넣었을 때 안압이 상승하지 않는다.

렌즈삽입술을 무사히 마치더라도 위험 요인은 여전히 남아있다. 가장 큰 우려는 각막내피세포가 손상되는 것이다. 각막의 엔진이라고 불릴 만큼 중요한 각막내피세포는 각막 안의 수분(방수)을 밖으로 내보내 눈을 투명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데, 눈을 심하게 비비면 렌즈가 각막에 닿으면서 내피세포가 손상 될 수 있다. 이 경우 각막 안의 수분이 배출되지 못하고 계속 쌓이면 각막 부종이 된다.

렌즈가 눈 속의 수정체와 닿아 수정체가 뿌옇게 흐려지는 백내장이 생길 수도 있다. 렌즈가 눈 속 방수의 흐름을 방해하면 안압이 상승해 녹내장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때로는 렌즈 크기가 안 맞는 경우도 있는데, 이때는 눈 속 렌즈를 제거하고 약물을 이용해 치료해야한다.

요즘은 안압이 상승해 녹내장을 만드는 것에 대비하기 위해 수술 1~2주 전에 미리 홍채에 방수 순환을 돕기 위해 작은 구멍을 내 두기도 하는데, 이 구멍은 막히자 않고 그대로 남게 되며, 시력에는 아무런 탈이 없다.

라식이나 렌즈삽입술은 모두 수술한 다음 날 원하는 시력(1.0)의 80~90%가 나온다 (각막표면을 깎는 라섹은 라식에 비해 시력회복이 더뎌 수술 후 1~3주가 지나야 0.8~0.9정도의 시력이 회복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라식이나 라섹으로 얻은 교정시력은 퇴행한다. 우리 몸의 자연적인 상처치유반응 때문에 깎인 각막에 다시 살이 차오르기 때문이다.

렌즈삽입술은 각막 표면은 그대로 보존하면서 특수렌즈를 각막 안쪽에 삽입하므로 상처치유반응이 거의 없어서 시력이 반영구적으로 유지된다. 다만 초고도 근시의 경우 수술과 상관없이 평생 근시가 조금씩 진행할 수 있다. 눈이 아주 나쁜 초고도 근시 환자들이 몇 년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안경 도수를 높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렌즈삽입술을 받은 사람이 나이가 들어 노안이 발생하면 그때는 근시가 없는 일반적인 사람들처럼 돋보기를 써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 삽입한 렌즈를 제거하고 노안을 교정하는 수술을 할 수도 있다.

사람들은 나쁜 눈을 치료하기 위해 수많은 과학적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안경과 콘텐트렌즈 등 간접적인 방법은 물론, 외과적 수술을 통한 근원적인 치료방법도 계속해서 발전할 것이다. 하지만 추운 겨울날, 호오~ 입김을 불어가며 닦아 쓰던 안경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사용될 것이다. 수술을 할 것인지, 안경을 쓸 것인지는 전적으로 여러분의 선택에 달려있다.

글 : 이영혜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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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와 낭만. 두 평행선 위를 달리는 최첨단 고속열차 [제 960 호/2009-07-27]

‘기차길옆 오막살이 아기아기 잘도 잔다….’ 누구나 이 동요를 불러봤듯 기차여행에 대한 추억쯤은 다들 한두 개씩 갖고 있다. 학창시절 수학여행, 친구들과의 MT…. 그래서일까 요즈음 기차로 떠나는 테마 여행이 인기다. 기차는 1899년 9월 노량진과 제물포 간 운행을 처음 시작한 이래 서민의 발로, 산업의 동맥으로 많은 변화를 거쳐왔다.

1900년대 초 서울에서 부산까지는 일반 열차로 17시간이 넘게 걸렸지만 지금은 2시간 40분이 걸린다. 경부고속철도가 완공되는 2010년이 되면 2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고 하니 속도의 혁명이라는 표현이 실감난다.

더욱이 순수 국내 기술로 개발한 시속 350km급 한국형고속열차 KTX-Ⅱ가 이르면 올해 말부터 운행될 예정이다. 현재 운행 중인 한국형고속철도(KTX)가 2004년 첫 운행을 시작한 이후 5년 만의 쾌거이다. 이제 우리나라도 일본, 프랑스, 독일에 이어 세계에서 4번째로 시속 350㎞ 이상으로 달리는 초고속열차를 독자적으로 제작, 운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KTX-Ⅱ는 1996~2002년까지 6년간의 연구개발을 통해 핵심부품에서부터 전체 시스템까지 순수 국내 기술로 설계하고 제작했다. 부품수 대비 92%를 국산화했다. 1100kW급 고속 대용량 유도전동기와 디지털제어 기능이 장착돼 있고, 전자석을 이용해 제동을 거는 ‘와전류제동장치’도 달려 있다. 빠르게 달리고 잘 설 수 있는, 가히 세계적으로도 뛰어난 기차라고 할 수 있다.

차체는 알루미늄 압출재로 만들어져 훨씬 가벼워졌다. KTX가 20량 고정편성인데 비해, KTX-Ⅱ는 차량 수를 자유롭게 편성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기존 KTX 열차의 문제로 지적돼온 터널 내 소음과 진동도 대폭 낮췄다. 2002년 시험운전을 시작해 2004년 12월 국내 최고기록인 시속 352.4km를 돌파했고, 총 20만km를 시험 주행하는 동안 단 한 건의 사고도 발생하지 않았다.

오늘날 철도의 속도는 곧 기술력과 산업의 척도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에 속도 향상을 위한 각국의 대결 양상은 가히 전쟁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KTX-Ⅱ의 기술개발 성과를 바탕으로 2007년부터는 또 다른 열차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바로 최고속도 시속 400km를 내는 ‘차세대 고속열차시스템’ 개발이다. 2013년까지 6년간 국내 30여 개의 산학연 기관이 이 연구에 대거 참여한다. 국내외 고속철도 기술개발 동향에 맞춰 고속화와 대용량화, 쾌적성, 안전성 등을 더욱 높일 예정이다.

기존 한국형고속열차, KTX-Ⅱ가 동력집중식인데 비해 새로운 차세대 고속열차는 동력분산식이다. 축당 하중이 가벼워 철도 시설물의 유지비용을 줄일 수 있고, 가속과 감속 성능이 뛰어나 역간 거리가 짧은 한국 실정에서 더욱 유리하다.

<시속 400km의 속력을 내는 차세대 고속열차. 사진 제공 한국철도기술연구원>


KTX와는 전혀 다른 접근방법으로 개발하고 있는 고속열차도 있다. KTX는 전용 궤도를 건설하는 방법이어서 선로와 열차를 모두 바꿔야 했다. 하지만 이 열차는 기존의 열차 선로를 그대로 놓아두고, 열차만 새롭게 만들어 빠른 속력을 얻을 수 있다. 바로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연구개발을 완료하고 시험운행이 한창인 ‘틸팅열차’가 그것이다.

틸팅열차는 틸팅(Tilting)이라는 말 그대로 기울여 달리는 열차를 말한다. 곡선 구간을 주행할 때 차량을 곡선 안쪽으로 기울임으로써 달리면서 생기는 원심력을 감소시키는 원리를 이용한다. 스케이트나 오토바이 선수가 곡선 구간을 달릴 때 몸을 안쪽으로 최대한 기울이는 것과 같은 원리다. 곡선 구간에서도 고속 주행이 가능해 전체 운행 시간을 단축할 수 있기 때문에 이탈리아, 스웨덴 등과 같이 산악 지형이 많은 나라에서 틸팅기술이 발달돼 있다.

우리나라는 선진국보다는 다소 늦은 2001년부터 틸팅열차 연구를 시작했다. 한국철도기술연구원이 중심이 돼 20여 개의 대학, 연구소, 기업들이 모여 2007년 초 6개의 차량으로 연결된 틸팅열차 개발을 완료했다. 그 해 4월부터 현재까지 호남선과 전라선, 충북선, 중앙선 등에서 신뢰성을 높이기 위한 시험을 진행 중이다. 올해 7월 현재 총 주행 거리 10만km를 달성했다.

틸팅열차는 철도 고속화를 위해 새로운 선로를 건설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건설비용 절감과 환경파괴 최소화, 전기 에너지 사용에 따른 친환경성 등의 장점이 있는 철도시스템이다. 한국철도기술연구원에서 개발한 틸팅열차의 설계최고속도는 시속 200km, 운영최고속도는 시속 180km인 준고속 여객열차이다.

<틸팅열차는 곡선구간을 만나면 스스로 열차를 기울여원심력에 대항한다. 사진제공 한국철도연구원>


차체가 탄소 섬유의 복합소재로 제작돼 기존 차체의 무게에 비해 30% 이상 가볍고, 세계 최초로 전체 차체를 일체형 성형 기법으로 제작한 것이 특징이다. 틸팅열차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틸팅대차는 첨단 전기 및 기계식 제어시스템으로 차체의 경사를 조정하며, 조향장치가 부착돼 곡선 구간에서의 탈선을 방지할 수 있다.

위성 신호를 통해 곡선을 자동 감지해 곡선 구간이 나타나면 스스로 차체를 기울인다. 이 때 열차에 전력을 공급받는 장치인 지붕의 집전장치는 안정적인 전력공급을 위해 차체와는 반대로 기울어진다. 차체가 흔들리면서 고속 주행을 하지만 승객들은 거의 느낄 수 없으며, 차량 내 각종 시설물을 고급화하여 쾌적한 승차감과 함께 편의성을 높였다.

틸팅열차는 고속철도가 다니지 않는 지역 시민들이 보다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개발된 열차로 우리나라 철도 네트워크를 더욱 효율적으로 만들 것이다. 또한 디젤연료를 사용하는 노후화된 새마을 열차를 대체하는 열차로도 추진되고 있는데, 이렇게 되면 현재 시속 100~140km에 머물러 있는 일반 철도의 속도를 높여 고속철도와 함께 우리나라 철도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킬 것으로 전망된다.

열차의 고속화로 전국이 1일 생활권을 넘어 반나절 생활권으로 변화되고있다. 아침에 서울을 출발해 낮에는 부산에서 싱싱한 바다 회와 멋진 해운대 풍경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틸팅열차와 함께 그동안 발길이 별로 닺지 않던 내륙지방 여행도 하면 더욱 편리하게 갈 수 있을 것이다.

열차 여행은 금방이라도 아스라한 향수를 일으키며 마음 속 깊이 숨어있는 그리운 추억 하나를 꺼내주는 낭만 철도로 변신할 것이다. 속도와 낭만. 결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두 줄의 평행선으로 함께 달리는 철도의 과학은 우리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고 있다.

글 : 한석윤 한국철도기술연구원 선임연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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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위 작은 바다를 만들어 볼까? [제 959 호/2009-07-24]

애리는 지금 잔뜩 뿔이 나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부모님 때문이다. 방학이 되면 바로 바다에 데려가 주겠노라고, 3월 초부터 새끼손가락 걸고 굳게 약속한 기억은 대체 어디 갔단 말인가. 혹시라도 아빠의 특기 ‘결정적일 때만 건망증’과 엄마의 특기 ‘못 들은 척 딴청하기’가 발동될까봐 생각날 때마다 불러댄 바다바다바다바다 노래도 결국 헛된 노력에 불과했단 말인가. 주말마다 두 분께서 검사하시는 일기장에 또박또박한 글씨로 7월에 바다 가서 할 일들을 꼬박꼬박 적어왔거늘, 시간 낭비 밖에 안 됐단 생각이 든다.

“아까부터 얘기했지? 아빠 회사 사정 때문에 휴가가 미뤄졌다고…. 안 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8월 말까지만 기다리면 되는데 왜 자꾸 화만 내니?”

“몰라! 엄마 바보! 아빠도 바보! 아빠 회사는 바보 곱하기 바보!”

솔직히 말해 그녀도 딸 못지않게 가족 바다 여행을 기대하고 있던 참이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딴 팀원들에게 휴가 다 양보하고 굳이 8월 마지막 주로 휴가를 옮긴 남편을 향한 분노를 쿠션에 냅다 쏟아 붓고 싶은 심정이었다(착한 것도 정도가 있지!). 하지만 이 나이 먹고 11살짜리 딸이랑 똑같은 짓을 하기에는 이성의 힘이 좀 더 강했다.

‘이거 안 달래면 또 석달 열흘 들들 볶일 텐데 어쩌면 좋을까. 아 잠깐, 혹시?’

엄마는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나이스 아이디어에 저도 모르게 손을 맞잡았다. ‘좋은 생각이 났다’ 제스쳐를 취하는 엄마를 본 딸의 눈빛도 순간 반짝였다. 미소가 피어오르는 입꼬리를 차마 내리지 못 하고 애리를 돌아본 엄마는 은근한 목소리로 서두를 깔았다.

“애리야. 너 종이공작 좋아하지?”

“…그게 바다랑 무슨 상관이야!”

“이대로 바다도 못 가고 7월 내내 방학 숙제만 하는 것도 억울하잖아. 그러니까 엄마가 애리 책상 위에 작은 바다를 하나 만들어 줄게.”

“엄마. 접속어 앞 뒤 내용이 안 맞아.”

“말 끊지 말고 계속 들어 봐. 이 바다가 신기한 게 말이지, 아무리 뒤집고 흔들어도 바다는 바다고 하늘은 하늘이거든? 거기다 애리가 만든 배도 하나 척 하니 띄우는 거야. 그럼 더 근사해지겠지? 신기하고 예쁜 바다를 계속 보면서 바다 여행을 계획하는 건 어떨까? 그럼 8월 말 여행이 더 재미있지 않을까?”

“재미있을 것 같…, 으으응, 별로 안 재미있을 것 같은데….”

오, 넘어온다, 아니 이미 반 이상 넘어왔다!

“만약 아빠가 이대로 바다를 완전히 잊어버린 척 하면 어쩔 거야? 그럴 때 작은 바다를 내밀면서 ‘아빠~, 기억하고 계시겠죠?’ 이렇게 한 마디 해 주는 거지. 어때? 어때? 재미있을 거 같지 않아?”

“만들어 줘!”

건망증에는 ‘건망증 완전 대비법’으로 대응한다. 모녀의 손발 짝짝 맞는 플레이는 빠른 재료 준비로 이어졌다. 햇빛 쨍쨍 내리쬐는 대낮에 화학약품상을 돌고 와서도 지치지 않는 애리의 눈동자에 역시 내 유전자 반이 섞인 인재라며 감탄하던 엄마는 피로감을 애써 감추며 실험에 돌입했다.

“우리가 사 온 약품 이름이 뭐라고?”
“메틸렌클로라이드.”
“정답! 메틸렌클로라이드는 세탁소 같은 데서 쓰는 약품이야. 물보다 비중이 크고 기체로 잘 변하는 성질이 있어. 냄새도, 자 봐, 독하지? 그러니까 실험하는 동안 메틸렌클로라이드 냄새를 직접 맡는 건 금지! 또 환기도 잘 시켜야 해.”

“그런데 엄마, 물과 메틸렌클로라이드는 왜 안 섞여?”

물은 화학에서 얘기하는 극성을 갖고 있고 메틸렌클로라이드는 무극성이야. 극성은 극성끼리, 무극성은 무극성끼리 서로 잘 섞이거든. 반대로 극성과 무극성이 만나면 섞이지 않아. 물과 기름도 이렇게 성질이 다르기 때문에 안 섞이는 거지.”

“얼렁뚱땅 넘어가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메틸렌클로라이드 색이 예쁘게 변했으니까 넘어갈게. 이것도 메틸렌클로라이드 성질 때문이야?”

“우리 딸 너무 똑똑한데? 맞아. 우리가 아까 넣은 게 유성펜이잖아. ‘유성’은 기름 성분에 잘 녹는다는 얘기거든. 메틸렌클로라이드도 기름 성분을 잘 녹이는 ‘유기 용매’ 중 하나야. 그래서 유성펜 색소를 빨아 들여서 파랗게 변한 거지. 반대로 수성펜은 물에 잘 녹는단다.”

“엄마가 설명하는 동안 종이배도 다 만들었어. 종이배 밑바닥에 색연필도 칠했고…. 이건 왜 이런 거야?”

색연필도 메틸렌클로라이드와 친한 성질을 갖고 있거든. 핀셋으로 종이배를 집어 넣어봐. 옳지. 어때, 바닥이 메틸렌클로라이드와 딱 붙어 있지?”

“올~, 신기하다~.”

물을 먹은 종이배는 메틸렌클로라이드보다 가볍고 물보다 무거워. 게다가 색연필 때문에 메틸렌클로라이드 표면과 항상 붙어 있거든. 그래서 종이배를 넣은 병을 아무리 흔들고 뒤집어도, 바다는 항상 밑에~ 종이배는 항상 바다 위에~ 살랑살랑 예쁘게 떠다니는 거지.”

전화로 휴가 연기 공지를 때렸을 때 상상했던 분위기와 180도 다른 집안 공기. 훈훈하기 짝이 없는 아내와 딸의 표정에, 애리 아빠는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 한 채 현관에 들어섰다. 딸의 손에서 반짝이는 작은 병과, 병 속의 파란 액체와, 그 위에 뜬 하얀 배와,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의미하는 한 단어를 깨닫기 전까지는.

고지식하게 ‘왜 우리가 바다를 늦게 갈 수밖에 없는가’ 설명을 늘어놓으려는 남편을 재빨리 꼬집은 애리 엄마는 등 뒤에 감추고 있던 커다란 병을 내밀었다. 엉겁결에 자신의 손바닥 크기만한 병을 받아든 아빠는 순간 눈시울을 촉촉하게 적실 수밖에 없었다. 손가락 두 마디만한 종이배에 세 가족의 웃는 얼굴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에.

“애리야. 멋대로 약속 깨서 미안…. 아빠, 휴가 다시 당길까?”
“아빠 일이 더 중요하잖아요. 7월 말에 안 가도 괜찮아요. 대신 약속만 지켜주세요. 책상 위의 바다도 좋지만, 역시 아빠엄마랑 진짜 바다를 보러 가고 싶어요.”

“애, 애리야~!”
“감동적인 장면 깨서 미안한데, 그 병 옆으로 한 번 돌려 볼래 자기야?”

배 뒷면에 새겨진 글귀. ‘이번에도 약속 깨면 10년 동안 용돈 동결’
찰랑이는 작고 푸른 바다 위에,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아빠의 표정이 함께 일렁였다.

 


[실험 Tip]
- 유리병(바이알병)과 메틸렌클로라이드는 각각 과학기구상, 화공약품상에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
- 물과 메틸렌클로라이드 용액을 섞어 쓰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가급적 2개의 스포이드를 따로 쓰는 것이 좋습니다.

글: 김은영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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