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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물로 만드는 녹색 석유… 미래 융합기술 [제 934 호/2009-06-29]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군함은 부족한 군사 자금을 보충하기 위해 금이 달라붙는 물질(이온교환 수지)을 개발해 커다란 배 뒤에 붙이고 다녔다. 이렇게 확보한 금의 양이 많지 않았지만, 어쨌든 독일군은 단순한 아이디어로 짭짤한 수익을 얻었다.

자원 대란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가 많지만, 이미 사람들은 기발한 상상력 하나로 다양한 자원을 만들어 내고 있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소금물을 전기분해하면 양극(+)에선 염산, 음극(-)에선 양잿물이 생긴다. 그렇다면 이번엔 소금물에서 물을 증발시켜 완전히 제거하고, 남아 있는 소금만 녹여 전기분해하면 어떻게 될까? 양극에서 염소가스가 나오고, 음극에서 나트륨이 생성된다. 아이디어 하나로 흔한 소금물 하나에서 4가지 자원을 얻어내는 셈이다. 이런 물질은 모두 산업현장에서 많이 활용되고 있는데, 일례로 금속 나트륨은 원자력발전소의 냉각 시스템에 쓰인다.

그러나 21세기 과학, 산업계의 승자가 되기 위해선 이렇게 단순한 상상력과 아이디어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최근 새로운 시도의 하나로 융합기술이 대두되고 있다. 융합기술이란 IT, BT, NT 등 신기술을 상승적으로 결합해 가까운 미래에 인간 활동에 큰 영향을 미치는,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한 기술체계를 의미한다.

이러한 융합기술을 발굴하기 위한 아이디어는 확장하기에 따라서 무궁무진하게 퍼져나갈 수 있다.

간단한 예로, 원자력발전소에서 버려지는 방대한 열 에너지도 융합기술의 소재가 될 수 있다. 국내에서는 이 에너지를 그대로 바다에 버리고 있는데, 이런 에너지를 체계적으로 모아 관리한다면 해양소재의 정제나 생산에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다. 해양산업과 원자력산업의 융합인 셈이다.

원자력 발전소에서 버리는 열을 활용한다면 바다 농장(해양 바이오 플랜트)을 구축하는 것도 가능하다. 적정한 열에너지와 무기염류만 보충되면 바다에 사는 해조류와 녹조류는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여름철 남해에서 수온이 올라가면 대규모 적조현상이 발생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이를 이용하면 해조류나 녹조류를 배양하면서 수억 톤 규모의 해양발효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고, 여기서 수소가스나 비타민, 항생제 같은 의약품의 원료를 생산할 수도 있다.

이런 융합기술은 산업현장에서도 이미 활용되고 있다. 섬유나 종이, 도료 등에 쓰이는 ‘아크릴아마이드’란 물질은 과거엔 주로 석유를 원료로 만들었다. 그러나 요즘은 이 같은 화학공법에서 바이오공법으로 생산방법이 바뀌고 있다. 이미 이웃 일본에서도 바이오공법 중 하나인 효소공법만을 이용하여 아크릴아마이드를 생산하는데 성공했다. 여기서 말하는 효소공법이란 미생물이 갖고 있는 효소를 이용해 아크릴아마이드를 만드는 기술이다.

이렇듯 바이오기술로 석유 화학제품을 대체 생산하는 방안도 모색되고 있는데 이는 석유 화학제품의 원료인 석유가 고갈된 이후를 대비하기 위해서다. 천연석유가 아닌 원료를 활용하여 석유화학제품을 생산하는 기술은 비산유국가인 우리가 꼭 가야할 방향이기도 하다. 실제로 바닷물 속에서 건진 녹조류 등을 이용해 종이를 만들거나, 혹은 바이오에탄올 등을 만드는 방법도 연구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반드시 고민해야 하는 전통과학 기술이 있다. 김치나 요구르트를 만드는데 쓰이는 발효기술이다. 발효기술이란 미생물이 유기물(탄소를 가지고 있는 물질)을 완전히 분해시키지 못하고 다른 종류의 유기물(바이오매스)을 만들어 내는 과정을 말한다.

효모를 통해 탄수화물에서 에탄올을 만들어 내는 것을 그 예라 할 수 있으며, 사람들은 먼 옛날부터 이 원리를 이용해 막걸리나 맥주를 만들어 왔다. 과거에는 에탄올이 석유화학제품이었는데, 발효기술을 산업적으로 활용하기 전에는 에탄올을 얻으려면 석유를 정제, 가공해야 했기 때문이다.


<다양한 유기물질을 발효시켜 에탄올을 얻는 기술이 개발되고 있다.
사진은 우뭇가사리로 만든 바이오에탄올. 사진 제공 한국생산기술연구원>


미생물을 이용해 탄수화물로 알코올을 만드는 발효과정은 화학산업을 대체할 수 있는 충분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 알코올을 조금 더 가공하면 에틸렌가스, 벤젠 등 다양한 산업소재도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이 1970년대 말부터 제안된 이 대체기술은 최근 유전공학과 결합돼 이제 알코올보다 훨씬 부가가치가 높은 생산물까지 만들어낼 수 있는 단계까지 와 있다.

이미 세계 화학 산업계는 화학제품의 원료를 석유 대신 바이오매스로 생산하기 위해 발효기술을 포함한 바이오산업과 융합하려는 시도를 시작했다. 더 나아가 산업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는 미생물의 유전체 정보를 해독하고, 특정 산업소재를 생산하는 미생물을 개발하고 있다. 또한 극한 환경에서 사는 미생물의 몸속에 있는 독특한 효소를 활용해 새로운 식품소재나 의약품을 효소공학 기술로 생산하고 있다.

융합기술이 과학기술계의 새로운 흐름으로 떠오르고 있다. 새로운 융복합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지만 아이디어만 있다면 과학기술 간의 융합이 그렇게 어려운 것만은 아니다. 필요한 것은 용기와 자신감이다. 우리만이 시도해볼 수 있는 새로운 산업형태는 어떤 것들이 있을지 고민할 때다. 이런 것이 진정한 녹색성장이 아닐까?

글: 이대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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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개념 검색엔진 울프럼알파, 구글에 도전장 [제 932 호/2009-06-24]

인터넷 검색엔진 시장의 절대 강자는 단연 구글(Google)이다. 미국의 닐슨 온라인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인터넷에서 검색 100건 중 64건을 구글을 통해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장조사기관 콤스코어는 전 세계 검색엔진 시장에서 지난 4월 구글의 점유율이 무려 81.4%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서비스를 시작한 지 불과 10년만의 일이다.

1998년 구글은 검색엔진의 새로운 세대를 열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당시 야후가 인터넷에서 디렉터리 검색 엔진을 주도하고 있었다. 사람이 좋은 사이트를 선별하여 정리하는 이 방식은 정보량이 많아지면서 관리하는데 한계에 다다랐다. 또한 알타비스타처럼 키워드 매칭(keyword matching)을 기반으로 자동화된 검색엔진이 등장했지만 사용자들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키워드만 일치하면 무작위로 펼쳐놓는 수 백 페이지의 쓰레기 검색 결과(Junk results) 때문이었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를 절묘하게 파고든 것이 구글이었다. 당시 스탠포드 대학원생인 래리 페이지(Larry Page)와 세르게이 브린(Sergey Brin) 두 사람은 사용자가 원하는 내용과 가장 근접한 결과부터 보여주는 검색엔진을 생각해 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웹 페이지를 생산해내는 사람들과 사용자들이 웹 페이지에 접근하는 행태를 분석해 자동으로 랭킹이 계산되는 구조를 만들어 냈다. 해당 페이지의 중요도는 다른 웹페이지에서 해당 페이지를 가리키는 인바운드 링크(inbound link)의 수로 결정되었다. 이는 중요한 논문일수록 인용하는 횟수가 높다는 원리를 응용한 것이다. 이들의 아이디어는 적중했다.

구글은 야후의 디렉터리 엔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많은 데이터들을 검색했다. 하지만 자동화된 랭킹을 부여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용자들은 불과 1~2페이지 안에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찾았다. 사람들은 환호했고, 탁월한 검색 알고리즘에 대규모 투자가 이어졌다. 기업을 공개하고 서버에 대한 엄청난 투자가 이뤄지면서 ‘인공지능에 의한 단순 웹 검색으로는 구글을 따라갈 서비스가 나오기가 힘들다’는 평판을 얻었다. 일단 끌어오는 웹페이지의 수가 다르니 게임이 될 리가 없었다.

그런데 지난달 서비스를 시작한 검색엔진 울프럼알파(www.wolframalpha.com)는 색다른 검색 서비스로 눈길을 끌고 있다. 이 검색엔진은 스티븐 울프럼(Stephen Wolfram· 50) 박사가 개발했다는 이유로 서비스 시작 전부터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그는 이미 16세 때 입자 물리학에 대한 논문을 썼고, 17세 때 옥스퍼드에 입학해 물리학 분야의 세계적인 논문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또한 20세 때 미국 캘리포니아 공과대학(Caltech)에서 박사학위와 함께 교수로 임용되어 천재로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손을 거처 탄생한 검색엔진은 구글과는 전혀 다른 접근방식을 택하고 있다. 구글이 수집한 정보들을 나열하는 방식이라면, 울프럼알파는 정보를 재분석한 지능형 답변을 제공한다. 즉 창에 검색어를 넣었을 때 구글은 답이 있을 법한 관련 사이트를 수 만개 검색한 다음 이를 중요도 순서로 나열해 준다. 반면 울프럼알파는 수집해 놓은 방대한 정보를 활용해 자신이 직접 간략한 형태의 답을 만들어 제공한다.

예를 들어 ‘서울의 날씨’을 검색창에 넣으면 구글은 날씨 정보를 제공하는 다양한 웹사이트들을 나열한다. 반면 울프럼알파는 기온, 풍속, 기상 조건 등을 일목요연한 표로 보여줄 뿐만 아니라, 과거의 날씨를 그래프로 만들어 시각적으로 제공하기까지 한다. 울프램 박사가 자신의 검색엔진에 대해 “전통적 검색엔진이 아니라 연산능력을 갖춘 지식엔진”이라고 자평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로 울프럼알파는 천재 물리학자의 작품답게 복잡한 수학 계산과 통계, 차트처리에서 탁월한 역량을 자랑한다. 구글 검색에서 ‘$250 + 15%’는 별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지만, 울프럼알파에서는 250달러와 이의 15%인 37.5달러를 합한 287.5달러를 표시해 준다. ‘250 USD + 100,000KRW’만 입력해도 합을 414,800원으로 한국 원화로 환산하여 알려줄 수 있는 것도 울프럼알파만이 갖고 있는 강점이다. 검색창에 20inch(인치)를 치면 feet, cm, mm, m 등 다른 단위로 변환된 값은 물론 폭, 너비, 전자기 복사 파장 등과 비교했을 때의 값도 함께 검색되는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울프럼 알파에서 250달러와 10만원을 더한 결과. 원화와 달러는 물론 엔화, 유로화, 위완화와
홍콩달러 등 다양한 화폐 단위로 환산한 값을 보여준다.>

이는 울프럼 박사가 1988년 선보인 매스매티카(Mathematica)에 기반을 둔 검색엔진이기 때문이다. 수학, 물리학과 관련해서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소프트웨어의 하나인 매스매티가는 약간의 과장을 섞자면 수학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처리해 주는 소프트웨어라고 할 수 있다.

매스매티카는 수치계산(numerical computation), 기호계산(symbolic calculation), 그래픽 처리(graphical operation) 등의 연산이 가능하다. 특히 기호 계산은 가장 큰 강점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매스매티카는 우리가 연필로 종이 위에 계산하는 것과 같은 결과(가령 분수식의 약분, 인수분해와 부정적분 등)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번에 서비스를 시작한 울프럼알파는 이런 매스매티카의 프로그래밍을 대중화한 것이다. 실제로 울프럼알파는 직접 답변을 제공하기 위해 세계에서 44번째로 빠른 슈퍼컴퓨터를 비롯해 많은 컴퓨터를 돌리고 있다.

그렇다면 울프럼알파가 구글의 검색분야에서의 절대적인 지위를 위협할 수 있을까? 전문가들의 평가는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새로운 개념의 검색엔진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약점도 많다. 우선 울프럼알파는 검색 결과로 가는 길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검색한 결과를 재구성해 보여주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반응 속도가 느리다. 드라마 속 등장인물 등을 검색하면 검색 결과를 내놓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또 아직까지 다국어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것도 단점으로 꼽힌다.

게다가 구글의 반격이 만만치 않다. 실제로 구글은 최근 검색 결과에 관련 도표를 제공하고, 많은 양의 결과를 특정 범위를 지정해 볼 수 있는 서치 옵션 기능을 더하는 등 서비스를 보강하고 있다.

지난 10년간 끊임없이 진화발전하면서 사용자들의 호감을 얻어온 구글의 평판은 울프럼알파가 넘기 힘든 장벽이 될 것이지만, 울프럼알파의 서비스로 인해 검색엔진 서비스에 새로운 바람이 일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한국의 포털사이트 운영회사들은 이런 변화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글 : 유상연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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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혁명의 첨병, 분자 나노현미경 탄생 이야기 [제 923 호/2009-06-03]

“우리 이렇게 살 바엔 차라리…, 헤어져.”
가슴이 철렁했다. 드라마의 한 장면이나 인기 연예인 부부의 파경 소식이 아니다. 박사과정을 마친 후 부푼 가슴으로 시작했던 스위스 연방공대(ETH Zurich)에서 박사후연구원 과정에 들어갔을 때의 일이다. 화학과 물리를 합친 ‘나노분광학’을 전공한 덕분에 유난히도 힘들고 길었던 박사과정 내내 묵묵히 뒷바라지를 해왔던 아내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이야.

1990년대 후반 아내에게서 이런 폭탄선언을 들었을 당시 필자는 6개월째 집에도 제대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던 신세였다. 실험실에서 ‘나노라만’ 신호를 얻는데 매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구공과 당구공이 서로 부딪히면 충돌 전후의 에너지가 변하지 않는다. 물리학에서는 이를 ‘탄성충돌’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당구공과 진흙공이 충돌하면 진흙공에 에너지의 일부가 흡수돼 충돌 전후의 에너지가 서로 차이가 난다. 이를 ‘비탄성충돌’이라고 한다.

생체물질에 레이저를 쏘면 내부에서 생체분자와 레이저의 광자가 부딪히는 비탄성충돌이 일어난다. 이때 생체분자는 진흙공, 광자는 당구공에 해당하는데 충돌 후 생체분자가 레이저의 에너지 일부를 흡수한다. 생체분자의 구조에 따라 충돌 전후의 레이저 에너지가 조금 달라지는데 이 차이를 측정하면 광자가 어떤 생체분자와 부딪혔는지 알 수 있다. 광자와 생체분자의 충돌 전후 에너지 차이가 바로 ‘라만신호’다. 즉 라만신호는 몸 안에 있는 생체분자를 자세하게 분석하는데 쓰인다.

분석할 생체물질의 크기가 마이크로미터(1㎛=100만분의 1m) 수준이면 일반적인 원자현미경으로도 얼마든지 라만신호를 측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마이크로라만’ 신호만으로는 생체현상 연구에 한계가 있다.

생체물질을 분석할 수 있는 분해능이 나노미터(1nm=10억분의 1m) 크기 정도로 작아야 생체분자가 몸속에서 이루고 있는 화학결합이 무엇이며 얼마나 센지 등을 알아낼 수 있다. 나노반도체나 차세대휴대폰 동영상 장치의 걸림돌이 될 수 있는 나노 불순물을 분석할 때도 마찬가지다.

나노라만 신호를 분석하려면 결국 직접 필요한 장치를 개발해야 했다. 말은 쉽지만 나노라만 신호라는 게 형광 같은 다른 분광 신호의 100만분의 일도 안 될 정도로 아주 미약하다. 세포에 레이저를 쪼면서 나노라만 이미지 한 장을 얻는 데 무려 9시간까지 걸리곤 했다. 그렇다고 성급한 마음에 레이저를 너무 강하게 쪼면 마치 라식수술 할 때처럼 세포가 벗겨지거나 더 심하면 까맣게 타버리기도 했다.

게다가 나노라만 신호를 분석하려면 세포를 중간에 두고 위에 있는 원자현미경의 탐침과 아래에 있는 레이저의 초점을 서로 1나노미터 정도로 아주 정확히 맞춰야만 한다. 그런데 레이저의 초점 크기가 약 200나노미터 내외로 워낙 작아서 이것을 10나노미터도 채 되지 않는 원자현미경 탐침 끝부분의 중심과 잘 맞아 떨어지게 하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마치 양궁경기에서 화살촉 끝부분을 과녁의 정중앙에 정확하게 맞히는 것과 같다.

어쩌다 정확하게 맞춰도 실험실 내부의 온도나 습도, 소음, 진동 등 주변 환경 변화에 따라 다시 어긋나 버리기 일쑤였다. 게다가 당시 우리 실험실이 취리히 시가전차가 지나가는 철로 바로 옆 지하실에 있었다. 그나마 시가전차가 끊길 즈음인 자정부터 아침까지가 그래도 신호가 어느 정도 나오는 때라 어쩔 수 없이 밤새도록 실험실에 앉아 있곤 했다.

당시 아내도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둘째 아이 육아 스트레스에다 대부분의 이웃들이 영어를 못하고 독일어를 사용하는 예상치 못했던 언어장벽을 겪고 있었다. 달력 사진에서 보던 것과는 달리 멀쩡한 사람도 우울하게 만드는 침울하고 긴 스위스의 겨울 날씨, 저녁 8시 이후에는 설거지도 못하고 쥐죽은 듯 조용해야 하는 스위스식 주거규칙, 어쩌다 해먹는 한국음식 냄새를 윗집에서 못 견뎌하는 등 너무나 다른 문화 충격들을 혼자서 감당하고 있을 때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내에게서 그런 말이 나올 만도 했다.

‘궁하면 통한다’ 했던가. 발등에 떨어진 가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루 빨리 연구를 마무리 지어야만 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좀 더 빨리 나노라만 신호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고안한 것이 바로 세계 최초의 ‘분자 나노현미경(MINE, Molecular Integration Nanoscope)’이다.

분자 나노경은 탐침 끝부분과 레이저 초점을 컴퓨터로 정확히 맞출 수 있고, 은나노 탐침을 써서 미세한 나노라만 신호도 획기적으로 증강시킬 수 있는 차세대 융합 장비다. 생체분자의 물리적인 3차원 나노 형상뿐 아니라 분자화학적 분광 정보까지도 얻을 수 있다. 분자 나노경의 등장으로 과학자들은 이제 눈으로 볼 수 없는 미세한 나노 세계의 다양한 분자화학적 현상들을 선명한 컬러로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글쓴이가 분자 나노경(MINE)을 관찰하고 있는 모습. 미세한 생체분자의 신호를 포착해 분자
화학적 3차원 영상을 얻을 수 있다. 사진제공 한국화학연구원>

앞으로 분자 나노경은 알츠하이머병이나 백혈병 같은 난치성 질환의 근본 원인이 되는 유전체 또는 단백체의 병리현상 연구, 암세포를 죽일 수 있는 바이오의약품 개발에 활용될 전망이다.

보통 10년 이상 걸리던 글리벡 같은 신약개발 기간을 크게 단축시키고, 많게는 2조원까지 소요되는 천문학적인 신약개발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데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 현미경(왼쪽)과 분자 나노경(MINE)으로 본 유방암 세포. MINE으로 찍은 사진은
선명한 컬러로 나타나며 20nm 크기의 미세 구조까지 구분할 수 있다. 사진제공 한국화학연구원>

이제는 희미한 옛 추억이 됐지만 아내의 그 때 그 한 마디가 당시에는 분자 나노경을 개발해야만 했던 절박한 동기가 됐다. 현재는 분자 나노경에 이어 수 펨토초(1펨토초=10조분의 1초) 안에 일어나는 생체물질의 변화까지 볼 수 있는 성능을 연구 중이다. 또한, HD급 디스플레이소자에 대한 나노분석 기능 등을 결합해 새로운 첨단 나노 검사장비를 개발하는 일에 몰두 하고 있다.

이 같은 기술이 보편화 되면 난치병 환자들은 더 빠르고 저렴하게 신약을 투여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다급한 마음에 만들어 낸 신기술이 의학 발전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니, 과학은 언제나 한치 앞을 알 수 없다. 그래서 과학이란 학문은 더 재미있는지도 모른다.

글 : 서영덕 한국화학연구원 융합바이오센터 분자고등검지그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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