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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기구 만들어 하늘을 날아 볼까? [제 843 호/2008-11-28]

기구 체험장에 열기구를 타러 온 양과장네 가족.
열기구가 지상으로부터 20여 미터 올라오자 정여사를 뺀 양과장과 현민이, 채원이는 멋진 광경에 탄성을 질렀다.

“아빠~ 정말 정말 멋져요. 이런 열기구를 매일 매일 타고 다녔으면 좋겠어요.”
“하하, 우리는 재미있는데 엄마는 그렇지 못한 것 같구나!”

짧은 열기구 체험이 끝나자 못내 서운한 현민이가 양과장에게 말했다.

“아빠, 열기구 정말 재미있어요. 그런데 열기구는 누가 처음 만든 거예요? 집에서도 만들 수 있을까요?”
“하하! 현민이가 열기구의 매력에 흠뻑 빠졌나 보네? 그럼 열기구는 집에 가서 만들어 보기로 하고 열기구에 대해 잠시 이야기해 줄게.”

“열기구에 대한 최초의 역사적 기록은 1783년 프랑스 리옹에서란다. 당시 몽골피에 형제는 지름 약 10.5m 기낭에 짚을 태워 공기를 데운 후 약 300m까지 상승했다고 해.”
“와~ 그럼 몽골피에 형제는 처음 기구를 타고 아주 기뻐했겠네요.”

“아냐, 몽골피에 형제는 열기구 실험에 최초로 성공한 사람이지 실제로 그 열기구에 탄 것은 아니었단다. 열기구에 최초로 탑승해 성공한 사람은 1783년 11월 12일 프랑스의 P.로지라는 사람으로 파리 근교에서 종이로 만든 열기구로 약 25분간 비행한 것이 처음이란다.”

“에게… 겨우 25분이요? 우리가 탄 기구는 한참 오래 있었잖아요.”
“그래. 그런데 그 당시에는 뜨거운 공기를 담는 기낭을 종이로 만들었고 공기를 데우는 것도 짚이나 나무를 태워 했기 때문에 계속 뜨거운 공기를 만들 수가 없었어. 그래서 그렇게 오래 날 수가 없었단다.”
“그러면 언제부터 우리가 보는 열기구가 등장한 거였어요?”

“사실 몽골피에 형제의 열기구 실험 성공 이후 열기구는 많은 과학자에게 영감을 줘 몽골피에 형제가 열기구 실험에 성공한 같은 해 12월 1일 프랑스 물리학자였던 쟈크 샤를이 공기 대신 수소 가스를 기낭에 채워 장시간 비행을 성공한 이후 본격적인 기구 시대를 열었단다.”

“아~ 그렇구나. 그러면, 아빠! 열기구는 어떤 원리로 날 수 있는 거예요?”
“어, 그건 아주 간단해. 차가운 공기에 열을 가하면 공기 속의 분자들이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부피가 증가하게 된단다. 그리고 밀도는 질량/부피이기 때문에 부피가 증가하게 되면 동일 질량에서 당연히 밀도도 작아지게 되지. 즉 기낭 안의 공기 밀도와 기낭 밖의 공기 밀도가 달라지는 거야. 기낭 밖의 공기 밀도는 조밀하고 기낭 안의 공기 밀도는 느슨하기 때문에 여기서 부력이 발생해 공중으로 뜨게 되는 거란다.”

“그러니까…. 꽉 찬 공기들이 좀 느슨한 공기들을 위로 밀어올린다는 말인 거네요.”
“그렇지. 그러면 우리 이 열기구를 만들어 보면서 한번 확인해 볼까?”
“네~ 좋아요!”

[실험방법]
준비물 : 큰 비닐봉지, 가는 철사, 알코올, 솜, 라이터, 펜치, 스카치테이프
         (열기구가 충분한 부력을 가질 수 있도록 비닐봉지는 중 대형 크기의 봉지를 구하고 철사는 최대한 열기구가 가볍게 하기 위해 되도록 가는 철사가 좋다)

[실험순서]
1. 비닐봉지의 윗부분에 공기가 새지 않도록 스카치테이프로 밀봉한다.
2. 비닐봉지 밑부분에 철사로 둥글게 테두리를 만든다.
3. 둥근 테두리에 십자로 철사를 고정하되 약간 밑으로 쳐지게 한다.
4. 십자가 교차한 곳에 철사로 알코올 묻힌 솜을 고정한다.
5. 비닐봉지 윗부분을 손으로 잡고서 솜에 불을 붙인다.
6. 비닐봉지가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면 잡은 손을 살며시 놓아본다.

[실험 Tip]
- 기낭 속에 공기를 많이 가열할수록 상승하려는 힘은 더욱 커진다.
- 불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화재에 주의한다.

글 : 양길식 과학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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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사 최대의 미스터리 - 과연 페르마는 알고 있었을까? [제 842 호/2008-11-26]

‘아마추어이면서 전문가를 가지고 논 사람’, ‘그의 업적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것이 없는 일반인들조차도 주저 없이 최고의 수학자로 꼽을 수 있는 사람’, ‘수많은 수학 천재들에게 좌절의 아픔을 맛보게 한 사람’, ‘쓸모없는 일에 많은 사람들의 정력을 낭비하게 한 사람’은 과연 누굴까?

피에르 드 페르마(1601~1665)는 1601년 프랑스 서부의 보몽 드 로마뉴에서 가죽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30세 때 지방의회의 의원직을 얻어 가족들의 희망대로 공무원 생활을 하였다. 페르마가 살았던 17세기 프랑스는 소설 삼총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기 때문에 페르마는 정치적 음모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매우 청렴하고 성실하게 공무를 수행했다고 전해진다. 즉 페르마는 정치적 야심을 포기하고 자신의 열정을 혼자서 취미 생활하는데 모두 쏟아 부었다. 그의 취미는 다름 아닌 수학 연구였다.

오늘날 관점으로 본다면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당시 수학은 별 볼일 없는 과목이었다. 갈릴레이조차 수학교수의 박봉으로 생활이 어려워 개인 과외를 해야 했을 정도였다. 이러한 수학의 암흑기에 페르마는 정식 수학 교육을 받지도 못했으며, 그에게 유일한 스승은 오로지 디오판투스의 <아리스메티카(Arithmetica)>라는 수학책이 전부였던 것이다.

또한 파스칼과 메르센 신부를 제외하고는 당시 유명한 수학자들과 특별한 교류도 없었지만 페르마는 수학사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페르마는 자신의 업적을 출판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의 아들이 사후에 자료를 모아 세상에 내놓게 된다. 이는 자신의 책을 보고 쏟아질 많은 수학자들의 질문을 받는 것이 귀찮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페르마는 오로지 즐거워서 수학을 공부했을 뿐 명예를 얻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페르마는 수학을 전공한 수학자들보다 더 많은 업적을 남기며 ‘아마추어 수학의 왕자’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페르마의 업적은 미적분학에서부터 확률론과 해석기하학, 정수론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있다. 흔히 미분법은 뉴턴, 적분법은 라이프니츠가 창시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페르마는 이들보다 앞서 이미 미적분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미분법의 개념이 고대 그리스에서 이미 시작되기는 했지만 곡선에 접선을 그리는 문제와 함수의 극대 극소값을 구하는 방법에 대한 페르마의 연구가 바로 뉴턴의 미분법으로 이어진 것이다. 즉 페르마는 lim(E→0){f(x+E)-f(x)}/E라는 식을 통해 극대와 극소값을 구하는 방법을 논하고 있는데, 이는 오늘날 고등학교 수학시간에 배우는 미분법과 그 원리가 같다. 사실 뉴턴도 자신의 논문에서 페르마의 연구에서 착상을 얻어 미분법을 완성했다고 분명히 밝혔지만, 뉴턴의 명성에 가려 이러한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직교좌표계가 데카르트 좌표계로 불리기도 하는 것은 데카르트가 해석기하학을 발명해 냈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해석기하학은 기하학에 대수학을 접목시킨(또는 대수학에 기하학을 접목시켰다고 생각해도 된다) 획기적인 방법으로 이를 통해 수학은 또 한 단계 발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즉 유클리드 이후 별다른 발전이 없었던 기하학이 새롭게 도약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좌표계를 도입한 해석기하학의 등장 덕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페르마의 원고에 따르면 그는 데카르트보다 먼저 해석기하학을 발명했으며, 페르마의 좌표계가 데카르트의 것보다 훨씬 오늘날의 좌표계에 가까운 것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학의 한 분야인 확률론은 페르마가 파스칼과 함께 편지를 주고받으며 탄생시켰다고 한다. 17세기 유럽에는 주사위 놀이를 사교 문화의 하나로 즐기는 사람이 많았다. 그중 한 사람이었던 슈발리에 드 메레라는 도박사가 친구였던 파스칼에게 주사위 도박에 관한 질문을 했다. 즉 주사위 도박을 하다가 중단했을 때 상금은 어떻게 배분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파스칼은 친구인 페르마에게 편지를 썼고 서로 만나지도 않았지만 두 사람은 편지를 통해 현대 수학의 큰 축인 확률론을 탄생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업적만 해도 놀라운데, 페르마를 정말 유명하게 만든 것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로 알려진 실용적인 측면이라고는 찾기 어려운 정수론에 관한 연구였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는 ‘2보다 큰 정수 n에 대하여 x^n+y^n=z^n을 만족하는 양의 정수 x, y, z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이 정리에 대하여 페르마는 ‘나는 놀라운 방법으로 이 정리를 증명하였지만, 여백이 부족하여 증명은 생략한다.’라고 <아리스메티카> 여백에 낙서처럼 메모를 남겼다. 페르마의 정리들은 이런 식으로 책의 여백에 대충 적혀져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대부분 증명은 빠져 있었다. 이후 페르마의 정리들은 모두 증명이 되었고, 마지막으로 남았던 것이 바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또는 페르마의 대정리였던 것이다.

스위스의 수학자 오일러는 n이 3인 경우와 4인 경우에 대해 증명하는 데 성공했지만 일반적인 증명에는 실패했다. 200년 동안 겨우 몇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는 증명에 전혀 진전이 없자 19세기 초 프랑스 과학아카데미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푸는 사람에게 3,000프랑의 상금과 메달을 수여하겠다고 했다. 이에 당시 최고의 수학자였던 독일의 가우스에게 사람들이 이 문제에 도전해 볼 것을 권유했지만 그는 이 문제를 풀 수 없는 문제로 단정하고 도전하지 않았다. 재미있는 것은 가우스는 이 정리를 풀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가우스의 복소수에 대한 연구가 풀이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컴퓨터가 등장하면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옳다는 것은 점점 더 명확해졌지만 누구도 모든 자연수에 대해 증명해 내지는 못했다. 모두가 포기하고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을 즈음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는 1997년 영국의 수학자 앤드류 와일즈(1953~)에 의해 풀리게 된다. 와일즈는 10살 때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접하고 이를 풀어야 하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와일즈는 20세기 초 독일의 볼프스켈이 내건 10만 마르크 상금의 주인공이 되었다. 와일즈가 증명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꾸준한 노력과 천재성도 있었지만 페르마 이후 수학의 많은 발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은 정말로 페르마가 마지막 정리를 증명했는지 의심하기도 한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는 풀렸지만 페르마가 증명했는지는 영원히 미스터리로 남을 것이다.

글 : 최원석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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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 1,500장이 동전 하나에! [제 841 호/2008-11-24]

어느 날 우연히 다락방이나 창고를 뒤지다 아주 어렸을 때 책상 한켠을 차지했던 오르골을 발견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태엽을 감아 예쁘게 흘러나오는 오르골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돌아가는 오르골 위의 천사와 함께 잠시 아름다웠던 유년시절로 돌아가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오르골은 표면에 볼록하게 튀어나온 작은 돌기들을 가지고 있는 금속원통이 천천히 회전하면서 돌기들이 빗살처럼 생긴 쇠건반을 튕겨 소리를 낸다. 금속원통 표면에 새겨진 돌기들의 상대적 위치와 간격은 흘러나오는 멜로디를 결정하게 되고 원통의 회전속도는 멜로디의 박자를 결정하게 된다. 오르골이 재생하는 음정 하나하나가 반도체 메모리의 한 비트(bit)와는 다소 거리가 멀긴 하지만, 금속원통의 평평한 부분과 볼록하게 튀어나온 부분을 각각 논리상태 "0"과 "1"에 해당한다 볼 수 있다.

PC에서 사용되는 D램의 경우 전자를 담는 그릇인 커패시터가 전자로 채워졌느냐 또는 비워져 있느냐에 따라 각각 "1"과 "0"으로 논리상태가 결정된다. 데이터의 기록은 커패시터의 입구를 열고 닫는 스위치 역할을 하는 트랜지스터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전자를 채우기 위해 전류를 공급하면 "1"이라는 정보가 기록된다. 비슷한 방식으로 트랜지스터를 통해 기록된 정보를 커패시터에서 읽어들일 수 있다. 만약 증폭회로에서 전류를 감지하게 되면 커패시터에 전자가 채워져 있었음을 의미하게 되므로 "1"이라는 정보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고, 감지하지 못하면 "0"이라는 정보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D램의 경우 커패시터에 저장된 정보 "1"을 읽어들일 때 커패시터를 채우고 있던 전자가 사라지게 되므로, 데이터를 읽어들이는 과정은 소거과정에 해당한다. 따라서, 저장된 정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읽기과정을 수행 직후 커패시터에 전자를 다시 채워주는 과정이 수행되어야만 한다. 더욱이, D램을 구성하고 있는 커패시터는 전자를 담아두는 완벽한 그릇 역할을 하지 못한다. 컵에 담아놓은 물이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증발되어 사라지듯, D램 커패시터에 담겨 있는 전자들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모두 사라져 버려 메모리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D램의 경우 데이터가 사라지기 전에 65밀리 초 주기로 리프레쉬(refresh)라는 과정을 통해 커패시터에 전자를 공급하는 다시 쓰기 작업을 수행해주어야 한다. 이 리프레쉬 과정으로 인해 D램의 경우 전력소모가 크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전원을 꺼버리면 D램에 기록된 모든 정보가 없어지는 휘발성 메모리라는 취약점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1비트(bit)의 정보는 커패시터, 트랜지스터 그리고 이들을 연결하는 도선으로 구성된 하나의 데이터 저장소에 기록된다. 주어진 면적에 이러한 데이터 저장소를 얼마나 집적시킬 수 있는가가 메모리의 용량을 결정한다. 따라서 더욱 큰 용량의 메모리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커패시터, 트랜지스터 및 배선의 크기를 작고 미세하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하지만, D램을 구성하는 커패시터의 크기가 작아질수록 커패시터를 채우고 있는 전하의 누출은 더욱 심각해지게 되어 집적도를 증가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리프래쉬 주기도 더욱 짧아져야 되므로 전력소모가 커지게 된다.

플래시(Flash) 메모리는 휘발성 메모리인 D램과 달리 전원이 꺼지더라도 기록된 정보가 사라지지 않아 USB 메모리, MP3 플레이어, 디지털 카메라, 휴대전화에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플래시 메모리의 경우 데이터 저장소의 설계가 복잡하고, 신뢰성 있는 읽기/쓰기 반복 회수가 10만 회 정도로 제한적이며, 구동전압이 12V로 높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어 차세대 반도체 메모리로서 이상적이지 못하다.

최근 D램, 플래시 메모리 등 기존 데이터 저장매체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한 일환으로 새로운 반도체 메모리를 개발하려는 움직임이 경쟁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저제조비용, 고용량, 비휘발성, 저전력소모, 빠른 작동속도, 많은 읽기/쓰기 반복 횟수, 극한 환경에 대한 내구성은 차세대 메모리가 갖추어야 할 조건들이다. 주목을 받고 있는 비휘발성 메모리로는 M램(Magnetoresistive Random Access Memory), P램(Phase-change Random Access Memory), 그리고 Fe램(Ferroelectric Random Access Memory)이 있다. 이들 메모리는 D램의 커패시터를 다른 것으로 대체한다는 점에서 구조적인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M램은 D램의 커패시터를 자기터널접합(magnetic tunnel junction)이 대체한다. 자기터널접합은 두 개의 강자성체 판이 부도체 판으로 분리된 샌드위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두 강자성체 판 중 하나는 영구자석처럼 극성이 한 방향으로 고정되어 있으며, 다른 강자성체 판의 극성은 트랜지스터를 통해 흘려주는 전류의 방향에 따라 유발되는 자기장에 의해 그 극성이 바뀌도록 되어 있다. 이때 자기터널효과로 인하여 극성방향에 따라 데이터 저장소의 전기저항이 바뀌는데, 두 강자성체 판이 동일한 극성(→/→)을 가지면 낮은 저항값을, 서로 다른 극성(→/←)을 가지면 높은 저항값을 갖는다. 기록된 정보는 낮은 저항값의 경우 "0", 높은 저항값의 경우 "1"의 논리상태로 저항값을 측정함으로써 읽어들일 수 있다. M램의 경우, 정보는 자석의 극성형태로 데이터 저장소에 저장되기 때문에 전원이 제거되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P램은 D램의 커패시터를 상변환 물질이 대체한다. 상변환 물질은 RW-CD/DVD와 같이 우리에게 친숙한 광디스크에 사용되는 물질과 비슷하여, 높은 온도에서는 저항이 낮은 결정성을 가지며, 낮은 온도에서는 저항이 높은 비정질 상태를 유지한다. 상변환 물질의 저항이 높고 낮음에 따라 각각 "0"과 "1"의 논리상태로 인식함으로써 데이터 저장소에 정보를 저장할 수 있다.

Fe램은 D램의 커패시터에 페로일렉트릭이라 부르는 강유전 물질이 사용된다. 전극을 통하여 강유전체의 양단에 전위를 가하면 편극의 방향을 "up(↑)" 또는 "down(↓)"의 상태로 바꿀 수 있으며, 바뀐 성질은 전위를 제거하더라도 그대로 유지된다. 편극방향이 "up(↑)"과 "down(↓)"인 상태를 각각 "1"과 "0"으로 인식하는 형태로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다. Fe램은 기존 컴퓨터에 사용되는 D램 급의 고속동작 기능, 플래시 메모리보다 천만 배 이상의 데이터 읽기/쓰기 반복 횟수, 낮은 구동전압, 그리고 전원이 꺼져도 기록된 데이터가 지워지지 않는 플래시 메모리의 장점을 고루 갖추어 MRAM, PRAM과 더불어 고성능, 저전력 소모의 차세대 비휘발성 메모리로 관심을 받았었다. Fe램은 M램이나 P램보다 생산 면에서 유리한 장점이 있다. 하지만 D램과 마찬가지로 데이터 저장밀도를 높이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커패시터의 소형화에 따른 기술적인 어려움이 있어 비교적 낮은 용량의 메모리를 요구하는 이동통신 단말기, 스마트카드 등에 제한적으로 이용되어 왔다.

이런 가운데 최근 한국표준과학연구원-포항공대-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의 공동연구진에 의해 동전만 한 크기에 CD 1,500장 이상의 정보를 저장할 수 있는 테라비트급 Fe램 구현을 위한 커패시터 소형화 기술은 관심을 끌 만하다. 연구진은 나노미터 크기의 구멍이 벌집 모양으로 배열되어 있는 다공성 산화알루미늄을 마스크로 이용하여 금속-강유전체-금속의 적층구조를 갖는 나노커패시터를 나노점 형태로 대면적의 기판 위에 세계최초로 구현하였다. 아울러 개발된 비연속적 나노점 형태의 커패시터가 박막형태의 커패시터보다 산란장 없이 전기장을 집중시켜 효율적인 데이터 저장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종래의 이온빔식각이나 리소그라피 공정을 이용하면 커패시터의 소형화가 가능하지만, 공정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점과 공정과정 중 발생하는 강유전체의 격자손상에 의한 메모리소자의 신뢰성 저하 문제가 있었다. 연구진이 개발한 이번 기술은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기술은 테라비트급 초고용량 Fe램 메모리소자 구현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했지만, 상용화를 위해서는 각 나노커패시터로의 배선 등 앞으로 극복해야 할 기술적 과제들이 남아있다. 하지만, 머지않아 차세대 비휘발성 메모리 반도체는 부팅시간 없이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 오르골의 은은한 느낌마저 전해주는 MP3 플레이어, 향상된 성능의 디지털카메라 등으로 일상에서 우리와 함께할 것이다.

글 : 이우 박사(한국표준과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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