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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나 새우를 삶으면 왜 붉어질까? [제 840 호/2008-11-21]

“삼촌, 재미있는 얘기 좀 해주세요.”
“우리 과학이가 심심하구나. 어디 보자, 무슨 얘기를 해줄까? 과학이, 오늘 점심으로 꽃게탕 먹었지? 꽃게 이야기해줄까?”
“꽃게 이야기요? 좋아요.”
“그럼 이제 시작한다. 잘 들어보렴.”


서해 앞 모랫바닥에는 꽃게들의 나라가 있었어. 꽃게들은 모래에 몸을 묻고 있다가 밤이 되면 먹이를 잡으러 나오곤 했어. 겨울이면 깊은 바다로 여행을 떠나 겨울잠을 잤지. 꽃게들이 사는 모랫바닥은 사람들이 사는 육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어. 인간들은 꽃게를 무척 좋아했기 때문에 해마다 더 많이 꽃게를 잡으러 왔지만, 꽃게들은 여전히 봄이 되면 육지 가까이 왔어.

꽃게 나라에는 철없는 꽃게 공주가 있었단다. 꽃게들은 어려서부터 인간을 가까이하지 않도록 철저하게 교육을 받아 왔어. 인간에게 잡히면 어떻게 되는지를 배우고, 잡히지 않는 방법도 배웠지. 하지만 꽃게 공주는 수업시간이 너무 지루했어.

“여러분, 우리 꽃게들은 무슨 색깔이지요?”

과학선생님이 질문을 던졌지. 꽃게 학생들은 저마다 자기 몸을 돌아봤지만, 누구도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지. 꽃게들은 뭐라 딱 꼬집어서 말하기 어려운 색깔을 하고 있었거든.

“우리 꽃게들은 어둡고 조금 칙칙한 색깔을 하고 있어요. 암컷은 어두운 갈색이고 수컷은 초록빛을 띤 갈색이죠. 갈색이라고 해도 회색에 가까운 탁한 색깔입니다. 우리 몸의 색깔은 한가지 색깔로 부를 수 없을 만큼 오묘하고, 저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정말 아름답지 않습니까? 이 색을 잃어버리면 우리 꽃게의 생명은 끝나는 겁니다. 부디 이 색깔을 자랑스럽게 여겨주세요.”

꽃게 공주는 자기 몸 색깔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 조개처럼 희거나 먼 바다의 산호초처럼 붉은색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꽃게 공주는 과학선생님이 하는 말은 귀담아듣지 않았어.

“학생 여러분, 혹시 빨간색 꽃게를 보신 적이 있나요?”

빨간색 꽃게? 꽃게 공주의 귀가 번쩍했어.

‘나도 빨간 꽃게가 되고 싶어!’

“여러분이 빨간색 꽃게를 본 일이 없는 건 정말 다행입니다. 빨간색 꽃게를 본다는 건 정말 슬픈 일이니까요. 그건 우리 꽃게들에게 죽음을 의미합니다. 우리 몸속에는 아스타산틴이라는 색소가 있어요. 우리와 같은 갑각류나 어패류가 적외선의 악영향으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해 갖고 있는 색소지요. 이 색소는 단백질과 결합해 있을 때는 청록색을 띠지만 분리되면 붉은색으로 변합니다. 단백질이 분리된다는 건, 우리를 삶거나 구웠다는 얘기죠. 70℃ 이상이 되면 단백질과 아스타산틴 색소의 결합이 끊어집니다. 인간들은 우리 몸이 붉게 변하면 군침을 흘리며 덤벼들죠. 그들은 붉은색을 보면 식욕이 돋는다고 합니다.”

꽃게 친구들은 두려움에 떨었어. 우리를 삶거나 구워 먹는다고? 우리가 죽은 걸 보면서 군침을 흘린다고? 여기저기서 아우성이었지. 하지만 불행하게도 꽃게 공주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어. 예쁜 빨간색이 된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느라 정신이 없었거든.

“특히 암컷 꽃게들은 주의해야 해요. 6월 암컷의 맛을 최고로 치기 때문에, 우리 꽃게 암컷들은 항상 몰살의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수업을 마친 꽃게들은 어떻게든 인간에게 잡히는 것을 피해야겠다는 결심으로 집으로 돌아갔어. 하지만 꽃게 공주는 반대로 빨간색이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지.

‘한번이라도 아름다운 빨간색 몸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꽃게 공주는 인간의 그물에 잡혔다가 가까스로 그물을 뚫고 살아 돌아온 늙은 꽃게를 만나러 갔어.

“나도 붉게 변한 꽃게를 본 적은 없다. 하지만 붉게 변한 새우는 본 일이 있지. 인간에게 잡혀서 붉게 변하는 건 우리 게만이 아니다. 새우도 바닷가재도 우리와 같이 아스타산틴이 몸에 있어, 뜨거운 열로 가열하면 붉어진단다. 연어나 숭어 같은 물고기의 살색도 같은 성분 때문에 붉지. 그래, 그 색은 한번 보면 잊을 수가 없어. 물론 아름답단다. 하지만 죽으면 그것으로 끝인데, 아름다운 게 무슨 소용이겠니. 내가 인간의 그물에 그대로 잡혀갔다면 너를 만나서 지금 이런 얘길 해줄 수도 없을 게 아니니.”

꽃게 공주는 죽는다는 게 실감 나지 않았어. 빨간색으로 변하면 어떨까? 호기심을 멈출 수 없었지. 그래서 오늘도 꽃게 공주는 인간들이 사는 곳 가까운 모랫바닥에서 인간들을 지켜보고 있단다.


“삼촌, 그럼 내가 오늘 먹은 꽃게가 그 꽃게 공주일지도 모르겠네요. 어쩐지 슬퍼요.”
“이런, 과학이가 심각해졌구나. 꽃게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꽃게는 너무 맛이 있잖니. 게다가 몸에도 좋단다. 꽃게에 많은 타우린은 혈압을 정상적으로 유지해주는 역할을 해. 또 인슐린 분비를 촉진하기 때문에 당뇨병 치료에도 좋단다. 꽃게가 멸종될 정도로 마구 잡아서는 안 되겠지만, 적당량을 고마운 마음으로 먹는 것은 괜찮아.”

“삼촌, 그런데 색깔이 변하면 게의 성분도 달라지는 게 아닌가요?”

“기특한 질문이구나. 신기하게도 껍질이 붉은색으로 변한다고 새우나 게의 영양성분이 달라지지 않는단다. 먹음직스러운 색으로 변하면서 성분도 그대로니까 인간에겐 참 고마운 일이지. 그런데 말이야. 이 아스타산틴 색소는 항산화 능력이 굉장히 뛰어나단다. 비타민 E보다 550배에서 많게는 1천 배의 항산화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 그래서 건강 보조제나 화장품 등의 성분으로도 사용되지. 아까 아스타산틴은 붉은색을 띤다고 했지? 그런 특징 때문에 색소로도 사용되고 있어. 양식어류의 색상이 더 붉게 보이도록 사료에 첨가하기도 하고, 합성 아스타산틴은 관상용 물고기의 색상보조제로 쓰이기도 해. 합성 아스타산틴은 천연과는 성분이 달라 먹을 수는 없단다.”

“우와, 꽃게 등껍질 색깔 하나에도 정말 많은 과학적인 지식이 담겨 있네요. 앞으로는 꽃게를 먹을 때마다 삼촌 얘기가 생각날 것 같아요. 삼촌, 고마워요.”

글 : 이소영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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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자객의 고민 [제 839 호/2008-11-19]

대낮부터 주막에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한 젊은이가 목에는 깁스를 하고 술타령을 벌이고 있다. 게다가 연거푸 한숨을 내쉬는 통에 옆자리에서 점심 요기를 하고 있던 목수는 꽤 거슬리기도 하고 또한 내심 호기심이 발동한다. 목수는 슬그머니 옆자리로 가서 술을 권하며 넌지시 물어보았다.

“젊은이가 무슨 근심이 그리도 많누?”
불쾌한 얼굴을 한 젊은이의 신세타령이 기막히다.
“저는 청나라와 왜 나라에서 유학을 하고 얼마 전에 일 때문에 귀국했거든요.”
“오호라! 그렇다면 부귀영화는 떼놓은 당상일터, 한데 무슨 한숨이 그리도 길어? 젊은이.”

“그게 말씀입죠. 제가 이 분야에서는 일류란 말씀입니다. 스카우트를 받은 몸이에요. 그런데… 어제저녁 일을 그르치고 말았습니다. 이제 앞날이 막막하기만 합니다.”
“그러니 일은 쉬엄쉬엄 해야지, 야근을 하다가 실수를 했나 보군 그래. 도대체 무슨 문제기에 그리도 절망한단 말인가?”

“모두가 바로 지붕과 온돌 때문입니다.”
“자네 직업도 목수(건축가)인가 보군 그려. 그렇지 한국의 지붕 곡선은 청나라와 왜의 지붕 선과는 사뭇 다르지. 암, 다르고말고. 게다가 온돌문화는 우리나라 밖에 없는 것이니 생소 했구먼. 그거야 자연스레 익숙해질 텐데 무엇에 그리 낙심하는가.”

젊은이는 목수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신세 한탄을 한다.
“얼마 전 저녁에 전 거사를 치르기 위해 지붕에 올라갔지요. 지붕에 귀를 대고 방안 사람들의 이야기를 엿들으려 해도 말소리가 안 들리는 거예요. 정말 낭패가 아닐 수 없었죠. 그래서 나의 솜씨만 믿고 지붕을 뚫고 무작정 안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아뿔싸! 청나라와 왜 나라에서는 통했는데 우리나라 지붕 속에는 흙과 나무토막이 잔뜩 들어가 있어 발목만 부러졌지요. 절치부심! 어제저녁 다시 그 집을 찾아가서 이번엔 방바닥을 뚫고 들어갈 작정이었지만…. 오호 통재라. 오호 애재라. 온돌바닥에 그만 머리를 부딪쳐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답니다.”

“아… 혹시…. 그… 마을에 붙어있던 자객을 찾는다는 방이….”

어느 유학파 자객의 한탄이 안타깝기도 하지만 한국에서 활동하려면 아마도 한국 전통건축을 좀 더 이해하고 적응을 해야 할 것 같다. 한국, 중국, 일본 동양 3국의 전통건축은 목구조라는 측면에서는 같다. 그러나 한국 전통건축은 중국과 일본과 달리 못을 사용치 않고, 맞춤이나 이음 방식으로 건축하며, 이러한 목가구가 주춧돌 위에 얹힌 형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건축물에 발생하는 여러 가지 외력은 지붕의 하중으로 견딘다. 또한 우리의 지붕 속은 중국과 일본의 지붕처럼 가볍지 않다. 지붕 속에는 적심이라는 나무토막들과 보토라는 흙으로 채워져 있다. 이는 물론 지붕의 하중을 더해 구조적 안정을 괴할 뿐 아니라 지붕의 아름다운 선을 연출하는 기법이기도 하다.

중국 전통건축은 넓은 땅과 다양한 기후에 따라 양식이 몇 가지로 나뉜다. 북부지역은 차고 건조한 대륙성 기후, 남부지역은 비가 많이 오는 해안성 기후이기 때문에 북쪽보다 남쪽지역에서 많은 수목을 조달할 수 있었다. 북부지역에서는 부족한 목재 대신 벽돌이나 흙을 벽체에 쌓는 구조가 발달하였다. 반면 남부지역에서는 강한 햇빛을 막기 위해 높은 벽체를 만들고, 비가 많이 와서 나무 위에 집을 짓는 형식이 발달하였다.

일본의 전통건축은 역사적으로 보면 중국건축의 영향을 받았으나 점차 구별되기 시작하여 중국의 건물은 의자를 사용하는 생활방식이, 일본의 건물은 바닥에 앉는 생활방식이 건축양식에 반영되었다. 일본의 전통적인 가옥은 낮고 넓게 짓는 것이 특징이고 지진이 일어날 경우를 대비하여 유연성이 있는 목재나 흙, 종이를 주로 사용하였다. 일본가옥의 또 다른 특징은 다양한 지붕스타일을 꼽을 수 있다. 이것은 지역 또는 거주자의 직업에 따라 갈대, 대나무, 기와, 돌, 알루미늄 등으로 만들어진다.





반면 이러한 우리의 목구조 방식은 위에서 아래로 작용하는 힘에는 강하지만, 아래로부터 위로 작용하는 힘에는 속수무책이다. 못을 사용하지 않고 지붕을 주춧돌 위에 얹는 방식을 써서 지붕이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남대문 방화사건 때 화재진압의 어려움 중 하나가 바로 구조적 문제이기도 했다. 즉, 소방수의 수압과 같은 강력한 힘이 아래에서 지붕을 향해 발사되면 고정되지 않은 지붕으로 인해 건물의 구조가 전체적으로 흔들린다.

온돌문화 또한 동양 3국 중 우리만의 특색으로 방바닥 밑에 넓적한 돌을 깐 뒤 아궁이에서 불을 때워 돌을 달구는 우리의 전통적인 난방형태다. 가끔 중국 무협영화 등에서 자객이 마루를 뚫고 나오는 장면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마도 불가능한 장면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영화에서는 자객이나 귀신 등이 당당히 문을 열고 들어올 수밖에 없다.

글 : 이재인 박사(어린이건축교실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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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반지의 무게 [제 838 호/2008-11-17]

학창시절 화학을 배운 사람들은 “칼카나마알아철니주납구수은백금”으로 이어지는 이온화 경향을 기억할 것이다. 이 암호 같은 글귀는 각기 칼륨(K), 칼슘(Ca), 나트륨(Na), 마그네슘(Mg), 알루미늄(Al), 아연(Zn), 철(Fe), 니켈(Ni), 주석(Sn), 납(Pb), 구리(Cu), 수은(Hg), 은(Ag), 백금(Pt), 금(Au)을 의미하는데, 앞쪽에 위치한 금속일수록 이온화 경향이 크기 때문에 쉽게 산화된다.

그런데 이 중에서 금(gold)은 이온화 경향에서 가장 뒤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것은 곧 금이 쉽게 산화되지 않고 용액에도 잘 녹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때문에 금은 예로부터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대표적인 귀금속으로 인류역사에서 항상 귀한 대접을 받았다.

세계 각국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금의 용도는 무엇일까? 아마도 결혼반지 아닐까? 우리나라에서는 결혼반지로 다이아몬드 반지를 많이 선호하지만 서구에서 다이아몬드 반지는 결혼이 아닌 약혼반지로 통용된다. 서구인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별다른 장식이 없는 심플한 금반지를 결혼 선물로 교환한다. 다이아몬드 반지가 결혼이 아닌 약혼반지로 통용되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다이아몬드 반지는 르네상스 초기에 베네치아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당시 유럽 최고의 무역국가였던 베네치아에는 뛰어난 보석 세공사들이 많았다. 그러나 베네치아에서도 물론 다이아몬드 반지는 고가에 살 수 있는 귀중품이었다. 그래서 유럽의 귀족과 부자들은 베네치아에서 만들어진 비싼 다이아몬드 반지를 약혼식 때 신부에게 줌으로써 신부의 몸값을 지불한 셈으로 쳤다고 한다. 알고 보면 다이아몬드 반지에는 별로 유쾌하지 않은 유래가 숨어 있는 셈이다. 다이아몬드 반지가 탄생한 해양도시 베네치아에서는 베네치아와 바다의 상징적인 결혼식이 매년 열리는데, 이때 베네치아 시장이 바다에 던지는 결혼반지 역시 다이아몬드 반지가 아닌 금반지라고 한다.

아무튼 결혼식장에서 신랑 신부의 손가락에 끼워지는 금반지는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의 맹세를 대변한다. 이는 금이라는 금속이 변하지 않는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사랑이 영속할 것이라는 믿음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흔히 알고 있는 지식과는 달리, 금은 다이아몬드보다 더 강한 셈이다. 다이아몬드는 불 속에 넣으면 연소되어 이산화탄소로 변한다. 그러나 금은 비록 불에 녹아 형태는 변하지만 그 물리적, 화학적 성질은 변하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도 금은 다이아몬드보다 결혼에 더 어울리는 귀금속인 듯싶다. 그렇다면 금은 과연 영속적일까?

오스트리아 빈 공대의 연구원인 게오르그 슈타인하우저 박사는 결혼을 하면서 1년간 자신의 금반지가 얼마나 닳을지를 알아보겠다는 다소 엉뚱한 결심을 했다. 슈타인하우저 박사는 결혼 후 매주 목요일마다 자신의 금반지를 초음파 세척기를 사용하여 깨끗이 세척한 후에 정밀한 저울을 사용하여 질량을 측정했다. 그가 끼고 있는 5.58387 그램짜리 18캐럿 금반지는 매주 약 0.12mg씩 닳고 있었다. 결혼한 지 1년 후에 슈타인하우저 박사의 금반지는 6.15mg 줄어들었다. 대략 0.11% 정도 줄어든 셈이니, 결혼 50주년인 금혼식 무렵에는 결혼식 때 주고받은 금반지의 1/20 이상이 닳아 없어진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 계산은 물론 결혼 후 계속 금반지를 빼지 않고 끼고 있다는 가정하에서다. 아무튼 이 비율로 계속 닳는다면 금반지도 900년 후에는 완전히 닳아 없어질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렇게나 오래 결혼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 부부는 지구 상에 없을 테니, 이 정도면 금이 변하지 않는 귀금속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신랑 신부가 조금 더 변화무쌍한 환경에서 일한다고 하면 이야기가 약간 달라진다. 힘든 노동을 지속적으로 하는 경우에는 금반지의 닳는 속도가 더 빨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모래 해변에서 놀다 온 후에 박사의 금반지는 0.23mg, 정원 일을 한 후에는 0.22mg이 닳았다. 스키를 타고 온 후에는 0.20mg, 록 콘서트장에서 열심히 박수를 친 주에는 0.17mg이 닳았다고 한다. 이에 비해 독감에 걸려 침대에 누워 있었던 주에는 반지가 거의 닳지 않았다고 하니, 결혼반지를 오래 보존하기 위해서는 일을 하지 않거나, 아니면 자주 앓아누워야 하는 것일까?

조금 더 상상력을 발휘해 보자. 인구 170만인 빈에 약 30만 커플이 있고, 이 중 약 60%가 18캐럿 금반지를 끼고 다닌다면 1년에 2.2kg이 닳고 금액으로는 약 6만 달러가 없어지는 셈이다. 비슷한 공식을 우리나라에 적용하면 매년 61kg의 금반지가 닳아 없어지고 약 1,640,000 달러가 사라진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 재미난 연구결과는 학술지인 골드 불루틴(Gold Bulletin)에 발표되었고, 미국화학회 소식지에도 요약 소개되었다. 슈타인하우저 박사는 지금은 6개월에 한 번씩 결혼반지의 무게를 재고 있다고 한다. 그는 이를 자신의 결혼생활 내내 지속할 생각이고, 과학자로서의 경력을 마감하는 마지막 논문으로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앞서 말한 것처럼 산화되지 않는 성질, 즉 잘 부식되지 않는 성질 때문에 고대 이후 금은 장신구 외에 화폐로도 많이 사용되었다. 유명한 투탕카멘의 데스마스크처럼 왕이 죽은 후, 부장품을 만드는데도 금이 사용되었다. 또한 CD 등의 데이터 저장 층에 금을 사용하면 저장의 신뢰도를 증진시켜 준다.

잘 부식되지 않는 성질 외에도 금은 전기와 열을 잘 전달하는 성질이 있어서 전자부품에서 빠질 수 없는 재료다. 매년 수백 톤의 금이 TV, 휴대전화, 컴퓨터, 반도체 등의 제작에 쓰인다. IT 강국 코리아는 금의 희생(?)을 통해 이룩된 셈이다.

금은 얇게 실이나 막 형태로 가공하기 쉬운 특성을 가지는데, 이를 이용하여 유리창을 아주 얇은 금박으로 코팅하면 빛은 투과되지만 열은 반사하는 성질을 갖는다. 그래서 항공기 조종석의 창을 얇은 금으로 코팅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불투명한 금박을 우주선의 취약부분에 코팅하면 우주공간에 존재하는 산소 라티칼이나 강렬한 방사선으로부터 우주선을 보호해주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이렇게 다양한 쓰임새가 있는 금이 가장 많이 보관되어 있는 곳은 반도체나 우주선, 여인의 손가락이 아니다. 전 세계의 금 중 상당량은 가공되지 않고 금괴 형태로 은행의 금고에 쌓여 있다. 또, 금 자신은 잘 부식되지 않는 ‘깨끗한’ 금속이지만 금을 채굴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환경파괴가 너무 커서 채금산업은 ‘세계에서 가장 더러운 산업’으로 손꼽힌다. 특히 아프리카의 빈곤국가들이 채금산업으로 인해 대규모의 하천 오염과 열대우림 파괴라는 피해를 입고 있으며 수천 명의 어린이들이 고단한 채굴작업에 동원되고 있다는 사실은 금이라는 귀금속이 갖고 있는 가장 큰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글 : 이식 박사(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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