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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7/23
    [펌-수필] 아버지의 뒷모습
    민서네..

[펌-수필] 아버지의 뒷모습

얼마 전 참으로 오랜만에 대중 목욕탕에 간 적이 있다.

 

사람 죽이는 이넘의 허리 땜에 찬 물 뜨거운 물을  번갈아가며 오갔다.

 

탕 속에 앉아 있자니.. 정말 얼마나 오랜만에 대중목욕탕에 왔는지 싶더군..

 

한 20년 된 거 같기도 하고.. 아마 아버지 돌아가시고 처음이지 싶다. 두 아들 거느리고 목욕탕에 다니시던 아버지.. 어렸을 적에는 두 녀석 모두의 때를 밀어주신다고 힘들기만 했던 목욕탕 가기였지만, 아버지께는 두 아들 데리고 목욕탕 가는 것이 여간 뿌듯한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버지 돌아가신지 십 년..

 

내게 아버지는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을까..

호통치고 꾸짖던 모습..

가출한 아들 녀석 데리려 오셨을 때의 그 어처구니 없어 하시던 모습..

당신께서도 더 오래 살고 싶으시다고 병석에서 간절히 아들 눈을 올려다보시던 모습..

자존심과 오기로 똘똘 뭉쳐 결코 지기 싫어하시던 모습..

 

내 기억 속의 아버지의 첫 모습은 뭘까.. 아마도 너 댓 살 시절 코를 다치고 놀라 달려나오시던 모습이 아닌가 싶다. 그 때의 아버지 나이를 훌쩍 넘어 나도 한 딸의 아버지가 되어 있는데..

 

남들은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라고들 말한다. 하긴 우리 아버지도 당신 아버님, 즉 할아버지를 제일 존경한다고 말씀하셨지..

 

근데.. 내겐 좀 어색하다..

 

많이 사랑하고 보고싶고 의지하고 싶기는 했지만.. 제일 존경하는 분은 아니었지 싶다. 이 말 들으시면 아버지가 서운해 하실려나...

 

존경을 표하기에는 아버지의 인간적인 모습을 너무 많이 봐버린 탓이 아닐까 싶다..

 

존경하는 사람이라면... 범상치 않은 위인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깊이 뿌리박고 있는 때문이겠지..

 

아버지 생각 하면서.. 불현듯 떠올랐던 옛 수필을 옮겨온다..

 

어렸을 적.. 아마도 70년대 중후반 아니었나 싶다. 나와 나이 차이가 크게는 나지 않는 작은 외삼촌 학교 교과서를 떠들어 보다가 발견한 수필이었지... 교과 과정이 바뀌었는지.. 내가 공부할 때는 교과서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까맣게 잊고 있다가 이번에 찾아보고 옮겨온다.. 

 

아 그 아버지의 뒷모습...

 

내게 떠오르는 아버지의 뒷모습은 목욕탕에서 혼자 묵묵히 때를 밀고 있는 그 뒷모습이 아닌가 한다.

 

 

 

 

【 아버지의 뒷모습 】


주쯔칭(朱自淸) / 허세욱 옮김

 

 

 벌써 2년이 넘도록 아버지를 뵙지 못했다. 지금도 가슴을 허비는 것은 내 아버지의 그 뒷모습이다.

 그해 겨울, 별안간 내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데다가 내 아버지마저 실직하셨으니, 우리 집의 불행은 겹으로 닥친 셈이었다. 나는 북경(北京)에서 부음을 받고, 아버지와 함께 집에 가려고, 그때 아버지가 계시던 서주(徐州)로 갔다. 서주 집은 살림이 엉망인 체 지저분했다. 생전에 단정하셨던 할머니 생각이 왈칵 덤벼와 눈물이 비오듯 쏟아졌다. 상고(喪故)와 실직을 함께 당하신 아버지께서 그런 경황 중에서도 침착하게 말씀을 하셨다.

 "기왕 당한 일을 어찌하겠니? 또, 산 입에 설마 풀칠이야 못 할라고?"

 우리 부자(父子)가 집에 돌아가, 팔 것은 팔고 잡힐 것은 잡혀서 빚을 갚았지만, 할머니 장례로 진 빚은 고스란히 남았다.

 할머니와의 사별과 아버지의 실직은 참으로 우리의 앞길을 참담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헛간 같은 집에 그냥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아버지께선 남경(南京)으로 가 직업을 구하셔야 했고, 나는 북경으로 가 학업을 계속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남경으로 갔다. 남경에서는 친구의 만류로 하루를 쉬었고, 이튿날 오전에 포구(浦口)로 건너가 오후에 북경행 기차를 타기로 했다.

 그때, 아버지께선 볼일로 해서 역에 나오지 않기로 하셨다. 그 대신, 여관에 있는 잘 아는 심부름꾼더러 나를 배웅하도록 당부하셨다. 그것도 서너 번씩이나 신신당부하셨다. 그러나 막상 내가 떠날 무렵이 되자, 도저히 안심이 안 되시는지 자꾸만 머뭇거리셨다. 사실 그때 내 나이 스물이나 되었고, 또 북경에도 벌써 두어 차례나 왕래했던 터라, 아버지께서 그토록 염려하실 것은 없었다. 그런데도 아버지께선 볼일을 제쳐놓으시고 친히 나를 배웅하기로 결정하셨다. 몇 번이나, 그러실 것 없다고 사뢰어도 "아니야, 그까짓 놈들이 무얼 해!" 하시면 따라 나오셨던 것이다.

 우리는 강을 건너서 역으로 들어갔다. 내가 차표를 사는 동안, 아버지께선 짐을 지키고 계셨다. 짐이 많아서 역부에게 돈푼이라도 주면서 옮겨야 했다. 역부들과 한바탕 흥정을 벌이셨다. 그런데 닳아빠지 그네들과 흥정을 하시는 아버지 말씀이 시원스럽지 못해 내가 참견을 했다. 결국, 아버지의 고집대로 흥정이 떨어지자 역부들은 짐을 실었고, 나는 기차에 올랐다. 아버지는 찻간까지 따라 오르시더니 차창 쪽으로 자리를 잡고 나는 그 위에다 아버지게서 사주신 자주색 외투를 깔았다. 아버지는 나더러 도중에 짐을 조심하고 감기 안 들게 주의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또 판매원을 붙들고 나를 잘 보살펴 달라고 연신 허리를 굽히며 당부하셨다. 나는 속으로 세상 물정에 어두우신 아버지의 순박하심을 비웃었다. 그들은 겨우 돈이난 아는 사람들, 왜 그렇게 쓸데없는 부탁을 하실까? 그리고 한편으로는, 나도 나이 스물인데 설마 내 일 하나 처리하지 못할까 하는 생각도 했다.

 "아버지, 인제 들어가셔요."

 아버지는 창 밖을 지켜보며 무슨 생각에 잠기시더니, "얘! 귤이나 몇 개 사올 테니, 여기 가만히 앉아 있거라" 하고 말씀하셨다.

 플랫폼 저쪽 울타리 밖으로 장수 서넛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저쪽 플랫폼으로 가려면 철로를 건너야 했다. 그런데 그리로 가려면, 이쪽 플랫폼을 뛰어내려서 저쪽 플랫폼의 벽을 기어올라야 했다. 그것은 뚱뚱하신 아버지로선 여간 힘드신 일이 아니었다. 마땅히 내가 가야 할 걸 한사코 당신이 가시겠다고 하시니, 어쩔 수 없었다.

 까만 천으로 된 둥근 모자를 쓰시고, 까만 괘자에 진한 쪽빛 무명 두루마기를 입으신 아버지께선, 좀 기우뚱하셨지만, 조심스럽게 허리를 굽히고 플랫폼을 내려가셨다. 그러나 철로를 건너고 저쪽 플랫폼의 벽을 기어오르실 때의 모습은 여간 힘들어 보이는 게 아니었다. 아버지께서 두 손을 플랫폼 위 시멘트 바닥에 붙이고, 두 다리를 비비적거리며 위쪽으로 발버둥쳐 올라가시다가 순간적으로 왼편으로 기우뚱하실 때 아, 이 아들의 손엔 땀이 흥건했다.

 나는 그때, 아버지의 뒷모습을 본 것이다. 나도 모르게 뺨을 적시는 뜨거운 것이 있었다. 나는 얼른 그것을 닦았다. 아버지께 들킬까봐, 그리고 남이 볼까봐 두려웠다.

 내가 다시 창 밖으로 눈길을 돌렸을 때 아버지께선 빨간 귤울 한아름 안고 이쪽으로 오고 계셨다. 이번에는 먼저 귤을 홈 위에 놓고, 조심조심 플랫폼을 기어 내려와서, 다시 그 귤을 안고 철로를 건너오셨다. 이만큼 오셨을 때 묻은 흙을 툭툭 털면서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곧 밖으로 나가시면서, "나, 이만 간다. 도착하면 곧 편지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승강구를 내려 몇 걸음 옮기시더니만 다시 뒤를 돌아보시며, "들어가라. 아무도 없는데......" 하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뒷모습이 인파에 묻히자, 나는 자리로 돌아왔다. 눈물은 또 한번 쏟아졌다.

 요 몇 년 동안, 우리 부자는 각각 타향에서 동분서주해봤지만, 집안은 갈수록 기울어갔다. 젊었을 적에는 살림을 일으키려고 혼자 타관 하늘을 떠돌며 일도 많이 저지르셨지만, 노경에 들어 이렇게 참담하게 되실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또, 당신은 쓸쓸한 만년이 주는 괴로움을 어떻게 견디셨을까? 그래서 사소한 집안 일에 지나친 분노를 토하시기도 하였다. 물론 나에게도 지난날처럼 인자하시기만 하진 않으셨다. 그러나, 뵙지 못한 2년 동안, 아버지께선 나의 지난 잘못은 모두 잊으시고 오히려 나와 내 아이들 걱정만 하셨다. 어느 날인가, 나는 북경에서 아버지의 편지를 받은 일이 있었다.

 "늙은 몸이지만, 그런 대로 지낸다. 다만, 어깻죽지가 무거워 젓가락을 들거나 붓을 잡기에 불편하구나. 아마 갈 날도 멀지 않은 모양이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왈칵 솟은 나의 눈물 방울엔, 마괘자에 그 쪽빛 두루마기를 입으신 아버지의 뒷모습이 굴절되고 있었다. 아, 다시 뵐 날은........

(1925년 10월 북경에서)

 

 

 

朱自淸 - 강소성(江蘇省) 동해현(東海縣) 출생으로 북경(北京)대학 철학과를 졸업하여 중학교 교사를 하다 청화(淸華)대학 중국문학과 교수를 지냈다. 유명한 작가이자 학자였던 주자청은 중국신문학 운동의 격변기에 등단하여 1948년 작고하기까지 역사의 격변기를 살다 갔다.

대표작으로 <아버지의 뒷모습> <달밤의 연못> <여인> <봄> <야경에 노젓는 소리 들리는 진회하> <아하> 등이 있다.

 

 



背影

朱自淸

 

 

我与父亲不相见已有二年余了,我最不能忘记的是他的背影。 


那年冬天,祖母死了,父亲的差使也交卸了,正是祸不单行的日子,我从北京到徐州,打算跟着父亲奔丧回家。到徐州见着父亲,看见满院狼籍的东西,又想起祖母,不禁簌簌地流下眼泪。父亲说,“事已如此,不必难过,好在天无绝人之路!” 


回家变卖典质,父亲还了亏空;又借钱办了丧事。这些日子,家中光景很是惨淡, 一半为了丧事,一半为了父亲赋闲。丧事完毕,父亲要到南京谋事,我也要回到北京念书,我们便同行。


到南京时,有朋友约去游逛,勾留了一日;第二日上午便须渡江到浦口,下午上车北去。父亲因为事忙,本已说定不送我,叫旅馆里一个熟识的茶房陪我同去。他再三嘱咐茶房,甚是仔细。但他终于不放心,怕茶房不妥贴;颇踌躇了一会。其实我那 年已二十岁,北京已来往过两三次,是没有甚么要紧的了。他踌躇了一会,终于决定 还是自己送我去。我两三回劝他不必去;他只说,“不要紧,他们去不好!”


我们过了江,进了车站。我买票,他忙着照看行李。行李太多了,得向脚夫行些小费,才可过去。他便又忙着和他们讲价钱。我那时真是聪明过分,总觉他说话不大漂亮,非自己插嘴不可。但他终于讲定了价钱;就送我上车。他给我拣定了靠车门的 一张椅子;我将他给我做的紫毛大衣铺好坐位。他嘱我路上小心,夜里要警醒些,不要受凉。又嘱托茶房好好照应我。我心里暗笑他的迂;他们只认得钱,托他们直是白托!而且我这样大年纪的人,难道还不能料理自己么?唉,我现在想想,那时真是太聪明了。


我说道,“爸爸,你走吧。”他往车外看了看,说,“我买几个桔子去。你就在 此地,不要走动。”我看那边月台的栅栏外有几个卖东西的等着顾客。走到那边月台, 须穿过铁道,须跳下去又爬上去。父亲是一个胖子,走过去自然要费事些。我本来要去的,他不肯,只好让他去。我看见他戴着黑布小帽,穿着黑布大马褂,深青布棉袍, 蹒跚地走到铁道边,慢慢探身下去,尚不大难。可是他穿过铁道,要爬上那边月台,就不容易了。他用两手攀着上面,两脚再向上缩;他肥胖的身子向左微倾,显出努力 的样子。这时我看见他的背影,我的泪很快地流下来了。


我赶紧拭干了泪,怕他看见,也怕别人看见。我再向外看时,他已抱了朱红的桔子往回走了。过铁道时,他先将桔 子散放在地上,自己慢慢爬下,再抱起桔子走。到这边时,我赶紧去搀他。他和我走到车上,将桔子一股脑儿放在我的皮大衣上。于是扑扑衣上的泥土,心里很轻松似的, 过一会说,“我走了,到那边来信!”我望着他走出去。他走了几步,回过头看见我,说,“进去吧,里边没人。”等他的背影混入来来往往的人里,再找不着了,我便进来坐下,我的眼泪又来了。


近几年来,父亲和我都是东奔西走,家中光景是一日不如一日。他少年出外谋生,独立支持,做了许多大事。哪知老境却如此颓唐!他触目伤怀,自然情不能自已。情郁于中,自然要发之于外;家庭琐屑便往往触他之怒。他待我渐渐不同往日。但最近两年不见,他终于忘却我的不好,只是惦记着我,惦记着我的儿子。我北来后,他写了一封信给我,信中说道,“我身体平安,惟膀子疼痛利害,举箸提笔,诸多不便,大约大去之期不远矣。”我读到此处,在晶莹的泪光中,又看见那肥胖的,青布棉袍,黑布马褂的北影。唉!我不知何时再能与他相见! 


1925年10月在北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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