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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만에, 근데 또 3년이라는군

또 그들이 당선되었다.

그들이 또 민주노총 3년을 꾸려간다고 한다.

가슴이 너무 답답하고 화가난다. 눈물도 날 거 같다. 

민주노조의 깃발은 정녕 어디로 갈까.

 

뇌물을 받아 먹어 중도사퇴해도, 성폭행으로 중도사퇴해도,

기필코 다시 권력의 중심을 놓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그들,

조직의 명이라면 그 누구라도

당선시키고야 마는 그들,

그들의 조직이 권력의 중심에서 독야청청할때,

민주노총이란 조직은

물먹은 종이호랑이처럼 녹아내리고 있었다.

민주노조의 깃발은 찢기고 해어져 민주라는 말도 더이상 보이지 않는 듯 하다.

 

그저 막막하다.

일도 손에 안잡히고, 잠도 오지 않는다.

괜시리 짜증만 나고..

그래서 일 년 만에 블로그를 다시 찾긴 했는데..

 

뭘 어떻게 하여야 하나.

힘들수록 원칙대로?

하긴 뭐 다른 수가 있겠어..

 

가버린 세월을 탓하지 마라, 지나간 청춘일랑 욕하지 마라

아직도 태양은 우리의 머리 위에 빛나고 있다.

부딪혀 깨어지는 파도와 같이.. 

 

그래 뭐 또 여전히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만나고,

하나 하나 투쟁 이어 나가고.

(내가 그리 해왔다는 것은 아니지만 말야.. )

 

운동 ..

하루이틀 할 거 아니고

일 이 년 할 거 아니고

한 두 세대 할 것도 아니잖나.

 

어쨌거나..

민주노총에 대한 판단,  노조운동에 대한 판단..

새로운 큰 기획에 대한 판단이 필요한 시점이 점점 다가오고 있는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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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날씨, 집회, 여러 생각들..

넘 추운 날이었지..

새벽에 강원도 속초를 출발해서 서울로 오는데, 고속도로 노견에 세워진 온도계는 영하 15.7도를 가리키고 있더군.

휴우~ 바람은 또 어찌나 불어대던지..

눈도 뜨기 힘들고,

맨살이 타들어가는 듯 하더군..


그렇게 서울에 도착하니 집회 직전이라..

꽤나 무장을 갖춘다고 갖추고 여의도로 나갔는데..

찬 바람은 여전히 온몸을 훑고 있더군.


연사들의 발언은 겉도는 듯 하고, 집중도 잘 되지 않대..

내년도 투쟁을 보는 거 같더군.


경제위기는 심화되고

사람들은 각자 혼자서들 힘들어하다가, 혼자서들 삶과 싸우다가 지쳐가겠지.

복수노조/전임자임금지급금지 관련한 노동법 개악도 코 앞인데..

우리는 예의 그 총력투쟁과 개악 저지를 외치겠지만,

그렇게 사람들을 모으고 여의도에서 집회를 하겠지만,

쌀쌀한 날씨, 관성화된 투쟁, 사람들은 구호 외치다, 욕하다 그렇게 돌아가겠지.


시간은 그렇게 가고, 우리는 또 2010년을 맞이할거야.

물 뎁혀지는 솥단지 속의 개구리처럼

우리는 추운 바깥 날씨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죽어가겠지.


비정규 최임법 개악은 2008 투쟁의 마무리가 아니라,

2009 투쟁의 전초전인데..


비정규, 최임법 개악, 전교조 공격, 공기업 선진화와 경영효율화, 구조조정, 정리해고, 노동법 개악....

노동자의 삶과 권리에 대한 전면적 공격이 시작되고 있는데..

각각의 고립된 이슈들에 대한 고립된 싸움을 하나씩 벌이며,

우린 그렇게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각각의 집회를 하고 헤어지겠지.

오늘 집회로 세상이 좀 바뀌었을까... 자문하며..

오그라들 듯 웅크린 채 집회는 끝나고..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으로 향했어.


비정규직 권리선언 결의대회와 촛불문화제였는데..

추우니 허리가 아우성을 질러댔다.

잔뜩 오그라든 혈관, 연골, 근육이 신경을 눌러댄다더군.


결국 끝까지 못붙어있고

권리선언 열한번째 현수막이 펼쳐지는 것을 보고 일어나 나왔지.

얼마나 미안하던지..


그리고 나서 얼마 안되어 전경이 문화제를 침탈했다더군.


http://www.newscham.net/news/trackback.php?board=news&id=44766


박준의 앵콜곡 깃발가를 힘차게 팔뚝질하며 부르다가 괜스리 비감해지고 눈물이 핑 돌더군..

그 노래를 처음 들은게 언제였던가..

아마 15년 전이었지..

한총련 1기 출범식을 한다고,

학내 좌단위들 진보시대개척단 꾸려 움직이고... 이 때 율동곡이 깃발가였지...

참 힘찬 곡이었어..

아 그런데 어젠 갑작스레 눈물이 나더라고.

지난 15년이 주욱 생각나고. 그 노래를 함께 부르던 녀석들도 생각나고..


"투쟁 속에 피어나는 꽃 해방이라 약속하마...

끝내 우리가 움켜쥘 해방의 깃발이여.."


갑자기 왜 이리 허허롭게 들리던지... 

걍 눈물이 핑 돌더라구...


아휴 근데.. 추울때는 눈물 흘리면 안되겠어 정말...


나이가 드는건지.. 약해지는건지..

최근 눈물이 늘었어.

얼마전 참세상에서 미포조선 이홍우 동지 투신 기사를 보며..

절로 눈물이 나더군...

"왜 이렇게 살아야 되는건데"

절규하는 노동자의 분노가, 그 신산스러움이 그대로 느껴졌어.

사무실에서 누가 볼새라 고개 푹 숙이고 훌쩍였지..


2010년에도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2009년에 우리는 싸울 수 있을까..
이 싸움을 만들어가야 되는데..
상층에 엎어져 있다가 투덜거리기만 하는 관료가 되어버리는 거 아닐까..


내년에는 또 민주노총 위원장 직선제까지 있는데..
2009년 투쟁 제대로 하지 않으면, 이제 끝인거 같은데..


루치오 바카론지 하는 작자의 말이 아니더라도..
직선제는 결국 포퓰리즘의 팽배, 조합주의의 전면화로 이어지지 않을까 싶어..


좌파가 실수해서 직선제가 조직내 민주주의를 가져다 줄거라는 순진한 분석과 요구를 했다고 하는데..
난 뭐 실수까지는 아니라고 봐..


우리 민주노조 역사에서,
직선제는 경험적으로 조직내 민주주의의 관철과 노조 민주화에 적극적 역할을 했었지.


문제는 직선제의 여부가 아니라 살아있는 현장의 역동성이었어.


좌파가 비난받아야 한다면,
조직적으로 직선제를 요구해서가 아니라,
직선제 실시를 결정한 후로 현장의 역동성을 살려내기 위한 조직적인 실천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해..


직선제..
걍 조합원들이 한 표 찍으면 되는 것이 아니지 않겠어..
행정적 절차와 과정을 만들어내면 다 되는 것도 아니지 않겠어..

예의 그 관성화된 좌빨 표현처럼..
선거는 정치적 선동과 폭로의 장이니 어쩌니 하면서
좌파 후보 출마시켜서 선거 때 현장만 돌아다니면 되는 것도 아니지 않겠어..


직선제가 남한 민주노조운동에서 중요한 긍정적 역할을 했던 때처럼..
현장의 역동성을 살려내기 위한 투쟁을 준비하고 조직해야 되지 않을까..


투쟁으로 현장을 재조직화(?.. 헐..)하지 않으면..
2010년 후 민주노조운동은 참 이상한 모습으로 존재하게 될 거 같어...


그 투쟁이 2009년인데...
그 2009년 투쟁이 비정규법 개악, 최임법 개악 저지로부터 시작하는데...
우리는 그대로 관성화된 집회 한 번으로..
의무방어전처럼 천막 농성으로..
그렇게 때우려는 거 아니야?


2009년
심화되는 경제 위기...


권리 찾기.. 권리 지키기..
비정규직 노동자의 권리선언처럼...


권리의 보편화,
공세적 권리 쟁취 투쟁이 필요하지 않을까..


권리선언의 문구가 생각나는군...
좀 더 다듬었으면 좋겠어..


"경제 공황 자본위기 노동자 서민 책임전가 반대!"
"노동자에게 권리를! 사용자에게 더 많은 책임을"


오늘 나눠준 유인물 중 어디 꺼였나?
"이MB의 대한민국은 부자천국 서민지옥!"


어쨋거나...


비정규법 개악, 최임 개악, 전교조 파괴 책동, 공공부문 경영효율화와 선진화, 복수노조/전임자전임자임금지급 금지, 필수유지업무, 구조조정과 정리해고,


여기에 특수고용 노동자 노동자성 인정, 비정규노동자 노동기본권, 이주노조 합법화, 손배가압류 철폐, 업방 남용 금지, 산별교섭 제도화, 단협 구속력 강화 등등...


고립 파편화된 노동권 투쟁, 생존권 투쟁을 한데 묶는 총노동 차원의 전선 구축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이 투쟁을 통해 다시금 대오를 추스르고 주체를 일으켜 세우는...


이 투쟁을 통해 현장의 재조직화를 준비하고 제대로 된, 투쟁하는 직선제 속의 민주주의를..


그런 투쟁을 조직해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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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준 동지를 생각하며

김준 동지가 결국 운명했다.

 

암으로 투병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문병 가야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부고를 듣게 되었다.

 

"노동조합 활동가는 반드시 낮은 곳으로 임해야 한다"는 김준 동지의 말이 떠오른다.

 

벌써 7년 전이다.

PSI 행사를 마치고 집에 오는 길, 술이나 한잔 하고 가자며 붙드는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한참을 잔을 기울였었다. 취한 듯한 그의 말 속에 계속 되풀이되는 한 마디, "낮은 곳으로 임해야 한다"는...  낮은 곳의 노동자와 민중과 함께 하지 않으면, 노조는 썩고, 노조 활동가는 관료가 될 수밖에 없으리라는..

 

벌써 산별 연맹 단위에서만 8년째를 맞는다. 상층 단위에 처음 들어가 만났던 사람들 중에 김준 동지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냐. 그러나 과연 나는 지금 관료가 아닌걸까? 과연 내가 몸담은 상층은 부패하지 않고 살아있는가?

 

문상 마치고 돌아오는 길, 초상 사진 속의 그 맑게 웃고 있는 김준 동지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고 왔다.

 

강 모처럼 뇌물을 받아야 썩는게 아니다, 비리에 손을 적셔야 썩는게 아니다.

낮은 곳으로 임하지 않는한 노조는 썩는다.

 

어려운 현실을 운운하며 현재에 안주할 때,

투쟁하고 부딪히며 현장을 조직하지 못하고 손쉬운 접근에만 매몰될 때,

빼앗기는 자신의 권리를 싸워 되찾으려 하지 않고 타협과 현실의 안온함에 젖을 때,

다수 정규직 조합원들의 뜻이 그러함을 강변하며 노조는 원래 그런 조직이라 애써 변명할 때,

서민들의 고단한 일상으로부터 조직된 대오로서의 노조의 역할을 찾아내지 못할 때,

고인 물처럼 우린 썩는다.

 

2009년, 우리는 기로에 서게 될 것 같다.

 

심각해져가는 경제 위기, 복수노조 허용과 교섭창구 단일화,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 비정규법 개악, 민주노총 직선제 도입....

 

선택이 눈 앞에 있다.

 

싸우느냐 박제가 되느냐..

 

싸워서 패배할 지언정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씨앗은 뿌려야 하지 않을까 싶다.

 

김준 동지를 보내며..

 

다시 그의 말을 되새긴다.

낮은 곳으로 임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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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수필] 아버지의 뒷모습

얼마 전 참으로 오랜만에 대중 목욕탕에 간 적이 있다.

 

사람 죽이는 이넘의 허리 땜에 찬 물 뜨거운 물을  번갈아가며 오갔다.

 

탕 속에 앉아 있자니.. 정말 얼마나 오랜만에 대중목욕탕에 왔는지 싶더군..

 

한 20년 된 거 같기도 하고.. 아마 아버지 돌아가시고 처음이지 싶다. 두 아들 거느리고 목욕탕에 다니시던 아버지.. 어렸을 적에는 두 녀석 모두의 때를 밀어주신다고 힘들기만 했던 목욕탕 가기였지만, 아버지께는 두 아들 데리고 목욕탕 가는 것이 여간 뿌듯한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버지 돌아가신지 십 년..

 

내게 아버지는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을까..

호통치고 꾸짖던 모습..

가출한 아들 녀석 데리려 오셨을 때의 그 어처구니 없어 하시던 모습..

당신께서도 더 오래 살고 싶으시다고 병석에서 간절히 아들 눈을 올려다보시던 모습..

자존심과 오기로 똘똘 뭉쳐 결코 지기 싫어하시던 모습..

 

내 기억 속의 아버지의 첫 모습은 뭘까.. 아마도 너 댓 살 시절 코를 다치고 놀라 달려나오시던 모습이 아닌가 싶다. 그 때의 아버지 나이를 훌쩍 넘어 나도 한 딸의 아버지가 되어 있는데..

 

남들은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라고들 말한다. 하긴 우리 아버지도 당신 아버님, 즉 할아버지를 제일 존경한다고 말씀하셨지..

 

근데.. 내겐 좀 어색하다..

 

많이 사랑하고 보고싶고 의지하고 싶기는 했지만.. 제일 존경하는 분은 아니었지 싶다. 이 말 들으시면 아버지가 서운해 하실려나...

 

존경을 표하기에는 아버지의 인간적인 모습을 너무 많이 봐버린 탓이 아닐까 싶다..

 

존경하는 사람이라면... 범상치 않은 위인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깊이 뿌리박고 있는 때문이겠지..

 

아버지 생각 하면서.. 불현듯 떠올랐던 옛 수필을 옮겨온다..

 

어렸을 적.. 아마도 70년대 중후반 아니었나 싶다. 나와 나이 차이가 크게는 나지 않는 작은 외삼촌 학교 교과서를 떠들어 보다가 발견한 수필이었지... 교과 과정이 바뀌었는지.. 내가 공부할 때는 교과서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까맣게 잊고 있다가 이번에 찾아보고 옮겨온다.. 

 

아 그 아버지의 뒷모습...

 

내게 떠오르는 아버지의 뒷모습은 목욕탕에서 혼자 묵묵히 때를 밀고 있는 그 뒷모습이 아닌가 한다.

 

 

 

 

【 아버지의 뒷모습 】


주쯔칭(朱自淸) / 허세욱 옮김

 

 

 벌써 2년이 넘도록 아버지를 뵙지 못했다. 지금도 가슴을 허비는 것은 내 아버지의 그 뒷모습이다.

 그해 겨울, 별안간 내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데다가 내 아버지마저 실직하셨으니, 우리 집의 불행은 겹으로 닥친 셈이었다. 나는 북경(北京)에서 부음을 받고, 아버지와 함께 집에 가려고, 그때 아버지가 계시던 서주(徐州)로 갔다. 서주 집은 살림이 엉망인 체 지저분했다. 생전에 단정하셨던 할머니 생각이 왈칵 덤벼와 눈물이 비오듯 쏟아졌다. 상고(喪故)와 실직을 함께 당하신 아버지께서 그런 경황 중에서도 침착하게 말씀을 하셨다.

 "기왕 당한 일을 어찌하겠니? 또, 산 입에 설마 풀칠이야 못 할라고?"

 우리 부자(父子)가 집에 돌아가, 팔 것은 팔고 잡힐 것은 잡혀서 빚을 갚았지만, 할머니 장례로 진 빚은 고스란히 남았다.

 할머니와의 사별과 아버지의 실직은 참으로 우리의 앞길을 참담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헛간 같은 집에 그냥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아버지께선 남경(南京)으로 가 직업을 구하셔야 했고, 나는 북경으로 가 학업을 계속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남경으로 갔다. 남경에서는 친구의 만류로 하루를 쉬었고, 이튿날 오전에 포구(浦口)로 건너가 오후에 북경행 기차를 타기로 했다.

 그때, 아버지께선 볼일로 해서 역에 나오지 않기로 하셨다. 그 대신, 여관에 있는 잘 아는 심부름꾼더러 나를 배웅하도록 당부하셨다. 그것도 서너 번씩이나 신신당부하셨다. 그러나 막상 내가 떠날 무렵이 되자, 도저히 안심이 안 되시는지 자꾸만 머뭇거리셨다. 사실 그때 내 나이 스물이나 되었고, 또 북경에도 벌써 두어 차례나 왕래했던 터라, 아버지께서 그토록 염려하실 것은 없었다. 그런데도 아버지께선 볼일을 제쳐놓으시고 친히 나를 배웅하기로 결정하셨다. 몇 번이나, 그러실 것 없다고 사뢰어도 "아니야, 그까짓 놈들이 무얼 해!" 하시면 따라 나오셨던 것이다.

 우리는 강을 건너서 역으로 들어갔다. 내가 차표를 사는 동안, 아버지께선 짐을 지키고 계셨다. 짐이 많아서 역부에게 돈푼이라도 주면서 옮겨야 했다. 역부들과 한바탕 흥정을 벌이셨다. 그런데 닳아빠지 그네들과 흥정을 하시는 아버지 말씀이 시원스럽지 못해 내가 참견을 했다. 결국, 아버지의 고집대로 흥정이 떨어지자 역부들은 짐을 실었고, 나는 기차에 올랐다. 아버지는 찻간까지 따라 오르시더니 차창 쪽으로 자리를 잡고 나는 그 위에다 아버지게서 사주신 자주색 외투를 깔았다. 아버지는 나더러 도중에 짐을 조심하고 감기 안 들게 주의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또 판매원을 붙들고 나를 잘 보살펴 달라고 연신 허리를 굽히며 당부하셨다. 나는 속으로 세상 물정에 어두우신 아버지의 순박하심을 비웃었다. 그들은 겨우 돈이난 아는 사람들, 왜 그렇게 쓸데없는 부탁을 하실까? 그리고 한편으로는, 나도 나이 스물인데 설마 내 일 하나 처리하지 못할까 하는 생각도 했다.

 "아버지, 인제 들어가셔요."

 아버지는 창 밖을 지켜보며 무슨 생각에 잠기시더니, "얘! 귤이나 몇 개 사올 테니, 여기 가만히 앉아 있거라" 하고 말씀하셨다.

 플랫폼 저쪽 울타리 밖으로 장수 서넛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저쪽 플랫폼으로 가려면 철로를 건너야 했다. 그런데 그리로 가려면, 이쪽 플랫폼을 뛰어내려서 저쪽 플랫폼의 벽을 기어올라야 했다. 그것은 뚱뚱하신 아버지로선 여간 힘드신 일이 아니었다. 마땅히 내가 가야 할 걸 한사코 당신이 가시겠다고 하시니, 어쩔 수 없었다.

 까만 천으로 된 둥근 모자를 쓰시고, 까만 괘자에 진한 쪽빛 무명 두루마기를 입으신 아버지께선, 좀 기우뚱하셨지만, 조심스럽게 허리를 굽히고 플랫폼을 내려가셨다. 그러나 철로를 건너고 저쪽 플랫폼의 벽을 기어오르실 때의 모습은 여간 힘들어 보이는 게 아니었다. 아버지께서 두 손을 플랫폼 위 시멘트 바닥에 붙이고, 두 다리를 비비적거리며 위쪽으로 발버둥쳐 올라가시다가 순간적으로 왼편으로 기우뚱하실 때 아, 이 아들의 손엔 땀이 흥건했다.

 나는 그때, 아버지의 뒷모습을 본 것이다. 나도 모르게 뺨을 적시는 뜨거운 것이 있었다. 나는 얼른 그것을 닦았다. 아버지께 들킬까봐, 그리고 남이 볼까봐 두려웠다.

 내가 다시 창 밖으로 눈길을 돌렸을 때 아버지께선 빨간 귤울 한아름 안고 이쪽으로 오고 계셨다. 이번에는 먼저 귤을 홈 위에 놓고, 조심조심 플랫폼을 기어 내려와서, 다시 그 귤을 안고 철로를 건너오셨다. 이만큼 오셨을 때 묻은 흙을 툭툭 털면서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곧 밖으로 나가시면서, "나, 이만 간다. 도착하면 곧 편지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승강구를 내려 몇 걸음 옮기시더니만 다시 뒤를 돌아보시며, "들어가라. 아무도 없는데......" 하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뒷모습이 인파에 묻히자, 나는 자리로 돌아왔다. 눈물은 또 한번 쏟아졌다.

 요 몇 년 동안, 우리 부자는 각각 타향에서 동분서주해봤지만, 집안은 갈수록 기울어갔다. 젊었을 적에는 살림을 일으키려고 혼자 타관 하늘을 떠돌며 일도 많이 저지르셨지만, 노경에 들어 이렇게 참담하게 되실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또, 당신은 쓸쓸한 만년이 주는 괴로움을 어떻게 견디셨을까? 그래서 사소한 집안 일에 지나친 분노를 토하시기도 하였다. 물론 나에게도 지난날처럼 인자하시기만 하진 않으셨다. 그러나, 뵙지 못한 2년 동안, 아버지께선 나의 지난 잘못은 모두 잊으시고 오히려 나와 내 아이들 걱정만 하셨다. 어느 날인가, 나는 북경에서 아버지의 편지를 받은 일이 있었다.

 "늙은 몸이지만, 그런 대로 지낸다. 다만, 어깻죽지가 무거워 젓가락을 들거나 붓을 잡기에 불편하구나. 아마 갈 날도 멀지 않은 모양이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왈칵 솟은 나의 눈물 방울엔, 마괘자에 그 쪽빛 두루마기를 입으신 아버지의 뒷모습이 굴절되고 있었다. 아, 다시 뵐 날은........

(1925년 10월 북경에서)

 

 

 

朱自淸 - 강소성(江蘇省) 동해현(東海縣) 출생으로 북경(北京)대학 철학과를 졸업하여 중학교 교사를 하다 청화(淸華)대학 중국문학과 교수를 지냈다. 유명한 작가이자 학자였던 주자청은 중국신문학 운동의 격변기에 등단하여 1948년 작고하기까지 역사의 격변기를 살다 갔다.

대표작으로 <아버지의 뒷모습> <달밤의 연못> <여인> <봄> <야경에 노젓는 소리 들리는 진회하> <아하> 등이 있다.

 

 



背影

朱自淸

 

 

我与父亲不相见已有二年余了,我最不能忘记的是他的背影。 


那年冬天,祖母死了,父亲的差使也交卸了,正是祸不单行的日子,我从北京到徐州,打算跟着父亲奔丧回家。到徐州见着父亲,看见满院狼籍的东西,又想起祖母,不禁簌簌地流下眼泪。父亲说,“事已如此,不必难过,好在天无绝人之路!” 


回家变卖典质,父亲还了亏空;又借钱办了丧事。这些日子,家中光景很是惨淡, 一半为了丧事,一半为了父亲赋闲。丧事完毕,父亲要到南京谋事,我也要回到北京念书,我们便同行。


到南京时,有朋友约去游逛,勾留了一日;第二日上午便须渡江到浦口,下午上车北去。父亲因为事忙,本已说定不送我,叫旅馆里一个熟识的茶房陪我同去。他再三嘱咐茶房,甚是仔细。但他终于不放心,怕茶房不妥贴;颇踌躇了一会。其实我那 年已二十岁,北京已来往过两三次,是没有甚么要紧的了。他踌躇了一会,终于决定 还是自己送我去。我两三回劝他不必去;他只说,“不要紧,他们去不好!”


我们过了江,进了车站。我买票,他忙着照看行李。行李太多了,得向脚夫行些小费,才可过去。他便又忙着和他们讲价钱。我那时真是聪明过分,总觉他说话不大漂亮,非自己插嘴不可。但他终于讲定了价钱;就送我上车。他给我拣定了靠车门的 一张椅子;我将他给我做的紫毛大衣铺好坐位。他嘱我路上小心,夜里要警醒些,不要受凉。又嘱托茶房好好照应我。我心里暗笑他的迂;他们只认得钱,托他们直是白托!而且我这样大年纪的人,难道还不能料理自己么?唉,我现在想想,那时真是太聪明了。


我说道,“爸爸,你走吧。”他往车外看了看,说,“我买几个桔子去。你就在 此地,不要走动。”我看那边月台的栅栏外有几个卖东西的等着顾客。走到那边月台, 须穿过铁道,须跳下去又爬上去。父亲是一个胖子,走过去自然要费事些。我本来要去的,他不肯,只好让他去。我看见他戴着黑布小帽,穿着黑布大马褂,深青布棉袍, 蹒跚地走到铁道边,慢慢探身下去,尚不大难。可是他穿过铁道,要爬上那边月台,就不容易了。他用两手攀着上面,两脚再向上缩;他肥胖的身子向左微倾,显出努力 的样子。这时我看见他的背影,我的泪很快地流下来了。


我赶紧拭干了泪,怕他看见,也怕别人看见。我再向外看时,他已抱了朱红的桔子往回走了。过铁道时,他先将桔 子散放在地上,自己慢慢爬下,再抱起桔子走。到这边时,我赶紧去搀他。他和我走到车上,将桔子一股脑儿放在我的皮大衣上。于是扑扑衣上的泥土,心里很轻松似的, 过一会说,“我走了,到那边来信!”我望着他走出去。他走了几步,回过头看见我,说,“进去吧,里边没人。”等他的背影混入来来往往的人里,再找不着了,我便进来坐下,我的眼泪又来了。


近几年来,父亲和我都是东奔西走,家中光景是一日不如一日。他少年出外谋生,独立支持,做了许多大事。哪知老境却如此颓唐!他触目伤怀,自然情不能自已。情郁于中,自然要发之于外;家庭琐屑便往往触他之怒。他待我渐渐不同往日。但最近两年不见,他终于忘却我的不好,只是惦记着我,惦记着我的儿子。我北来后,他写了一封信给我,信中说道,“我身体平安,惟膀子疼痛利害,举箸提笔,诸多不便,大约大去之期不远矣。”我读到此处,在晶莹的泪光中,又看见那肥胖的,青布棉袍,黑布马褂的北影。唉!我不知何时再能与他相见! 


1925年10月在北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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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공항에서 벌어진 불법체류자 추방 저지 행동...

 

6월 8일부터 15일까지 파리랑 제네바랑 다녀왔습니다.

필수유지업무 관련 ILO에 제소장을 제출하는 공공운수연맹 동지들과 함께였지요.

일정 잘 진행하고, 14일 파리 샤를드골 공항에서 중국항공을 타고 베이징을 경유 인천으로 들어오는 길이었습니다. 공항 체크인 카운터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연맹의 김건*동지가 입고 있는 프랑스 연대.단결.민주(SUD) 노조 옷(9일 SUD 방문시 선물받은 것)을 본 웬 프랑스 청년이 반갑게 말을 걸어오는 겁니다.


“니네들 여기 조합원이냐? 나도 조합원이다. 혹시 **시 **분 발 중국가는 비행기 타냐?”

“응 우리 SUD 조합원은 아니고 자매조직이랄 수 있는 한국의 민주노총 조합원들이다.”


우야뜬 무지 반가워하며, 긴급하게 우리에게 행동 참여 요청을 하는 겁니다.

24살 된 중국계 불법체류자가 프랑스 정부에 의해 가족을 내버려둔 채 추방되는 위기에 처해 있고, 바로 우리가 타는 비행기를 타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어쨌거나 이 비행기로 불법체류자가 추방되는 것을 막아야 되는데... 연대가 필요하다는 것이죠.


이 친구 주문 사항은 일단 비행기 타서, 기장이나 승무원들에게 강제추방되는 불법체류자와 함께 비행할 수 없음을 밝히고 자리에 앉지 말고 서있으라는 것입니다. 승객이 서있으면 비행기는 출발하지 못한다는 것이죠...

다른 프랑스인 승객들도 동조할 것이니 함께 해달라고...


동행한 연맹 사람들과 논의를 했죠... 민주노총이라 밝힌 마당에, SUD랑 친하다고 밝힌 마당에, 거기다 제 가슴에는 그날 따라, 단속 추방 반대! No Crackdown, Migrants Trade Union 버튼이 생생히 달려 있었는데..... 못하겠다 할 수는 없죠. 당연히 그러마고 했고.....


비행기 탈 시간은 다가오고... 우리도 비행기에서 강제로 밀려나거나, 기장의 명에 따라 비행기 한 구석에 포박되어 있을 수도 있다... 연행되거든, 한국인임을 밝히고, 통역과 변호사를 불러달라는 요구만 하고 묵비하자.. 등등... 굳은 결의와 함께... 비행기에 탔습니다.


탑승자 중 우리가 거의 마지막이었습니다.

웬걸... 비행기 안은 조용.. 일어서 있는 사람이 드문드문 있었지만 항의의 뜻으로 일어서 있는지는 확실치 않아 보였습니다.

어쨌거나 우리 자리에 가자 마자, 승무원에게, 이 비행기에 강제로 추방되는 사람이 타고 있느냐 묻고, 우리는 강제 추방되는 사람과 한 비행기에 탈 수 없다고 의견을 밝히고 서있었습니다. 다른 승무원이 오고, 객실장인 듯한 사람도 오고... 우리 입장은 그대로였죠...


이윽고, 프랑스 경찰이 왔습니다.

그 사람은 자유다.. 중국 영토 안에서는 그 사람은 자유다. 문제 없다. 프랑스 영토 안에서만 우리 통제에 있을 뿐이다...

너 그 사람이랑 비행기 같이 타기 싫으면 내려라.. 운운...

니네들 이렇게 소란피우면 프랑스 법에 따라 5일 이상 구금할 수도 있다 운운...


약간 빈정거리는 듯 하더군요.


우린 반문했죠. 그 사람이 분명 자유 의지로 비행기 탔냐? 그 사람 추방되는 거 아니냐. 강제로 비행기 탄 사람이랑 같이 비행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린 내릴 수 없다. 왜 내리냐. 우린 정당한 티켓을 사서 탔고, 난 이 비행기로 집에 가고 싶다....


비행기 안은 술렁 술렁.....


일부 중국인들은 한국인이 웬 행패냐... 운운(분위기가 그런 듯.) 이 비행기는 한국 비행기가 아니고 중국 비행기다 니들이 뭔데 이러냐.... 백인 유럽인도 일부 니들이 왜 다른 승객 권리를 침해하냐 운운...


그러나 다수는 우리 편이었던 듯...


기자로 보이는 백인 여성이 프랑스 경찰에 강력 항의(짐작만 했죠.. 불어라 통...)..


한국인 운운하며 우리를 공격하는 중국 할아버지 한테도, 다른 젊은 중국인들이 강력히 항의하고.....


이 와중에도 5분이면 다 끝나니 빨리 앉으라는 승무원의 요구가 있었죠. 우리는 거부했습니다. 5분이면, 서있겠다. 앉은 다음에 경찰들이 안내리면 다시 서기도 난감해지는 상황이 되겠죠.


결국 출발 시간을 40분이나 넘겨 기장(으로 보이는 듯한)이 프랑스 경찰들에 다가가, 내려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결국 프랑스 경찰들 눈치보다가 뒷문으로 다 내렸습니다.


순간 터져나오는 박수... 우린 경찰이 다 내리고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하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불법체류자 강제 추방 문제는 유럽에서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몇 년 전에도 아프리카계 여성 한 사람이 강제추방 과정에서 사망하기도 했지요.


그런데.. 프랑스 경찰이 중국항공을 왜 선택했을까. 보통 이런 일은 국적 항공기를 사용하는게 일반적인데... 아마도 프랑스 경찰이 너무 쉽게 생각한 거 아닐까 싶습니다. 프랑스국적기였다면 우리는 바로 끌려나갔을 수도 있죠. 중국국적기는 프랑스 경찰의 통제가 미치지 않고, 기장이 권한을 갖죠...


어쨋거나, 우리 행동은 성공했고... 그 불법체류자는 다행히 우리 비행기에서는 내렸는데...

어떻게 되었을지....


덕분에 한 시간 이상 늦게 출발한 비행기... 우리는 베이징에서 갈아타는 비행기를 놓쳤습니다. 인천공항에는 예정 시간보다 7시간 이상 늦게 도착했지요.


이상... 일종의 무용담이었습니다. 잘했죠?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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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대선 전: 노동자 정치세력화? 진보정당? 타협의 산물로서의 이 글..

2007 대선을 바라보는 공무원노동자의 생각

 

 

2007년 대통령 선거, 노동자 민중의 삶은 더 나아질까?

 

대통령 선거가 20여일 앞이란다. 언론은 다투어 각 후보들의 동정을 쏟아놓고 있다. 그런데, 의외로 이번 대선에 대한 서민들의 관심은 그리 높지 않다. 연일 무협지처럼 펼쳐지는 대선 판을 흥미를 갖고 지켜보기에는 서민들의 삶이 너무 폭폭한 까닭이다. 한미FTA, 연금개혁과 구조조정, 노동기본권 악화와 비정규직 확산, 사회양극화 심화, 지난 10년의 소위 개혁세력의 성적표이다. 김대중, 노무현에 이르는 이 10년의 세월이 서민들에게 남긴 것은 소위 개혁 세력에 대한 불신이며, 보수 정치판에 대한 환멸, 정치에 대한 냉소가 아닐까 한다. 이러한 환멸이 서민들의 정치 무관심을 불러온 것은 아닐까?

 

그러나 보니 누가 대통령이 될까라는 원초적 관심은 있을지 몰라도, 누구를 대통령으로 뽑아야 될 지라는 생각은 그리 주요한 관심사가 아니다. 나아가 이 대선이 우리네 삶을 개선시켜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그야말로 순진한 생각으로 치부되기 일쑤다.

 

지난 10년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라고는 총칼로 권력을 찬탈하던 시대는 지났으되, 정치가 서민들과는 동떨어진 것이라는, 가진 자들끼리 서로 나눠 먹는 게 정치라는 ‘상식’이다. 이번 대선 역시 보수 정치판의 권력 이동, 지배계급 내의 권력 재편이라는 세간의 평을 넘어서지 못할 것 같다.

 

 

정치란 무엇일까?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으로 세워진 이래, 대한민국의 정치는 민주적이지도, 공화적이지도 않았다. 한 줌의 정치권력자들이 정치를 농단하고, 그것이 정치인 양 행세했다. 1987년 이후 민주화가 진전되었다고는 하나, 정치로부터 서민들이 배제되는 것은 여전했다. 서민들의 정치 참여는 그저 때가 되면 선거에서 표를 찍는 것, 그리고 정치에 대한 왜곡된 상 속에서 보수 정치인의 역정에 자신을 투영하는 것뿐이었다.

 

정치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이 땅의 민중으로서, 우리 삶의 전반에 대한 개선을 요구하고 실현시킬 수 있는 권리의 행사이다. 이러한 정치를 우리 곁에서 멀리 떨어진 고급한 어떤 것, 혹은 역으로 더러운 어떤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 지금까지의 우리 정치의 역사였다.

 

정치는 정치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이 땅 평범한 민중들의 권리이며, 의무이다. 우리의 현실은 민중을 정치로부터 배제시키고 있으며, 언론을 통해 알게 되는 보수 정치인들의 이합집산, 그리고 그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부정과 비리는 정치를 우리의 일상과는 떨어진 먼 나라 이야기로 만들고 있다. 별 차이도 없어 보이는 보수 정치인들의 이전투구는 정치에 대한 냉소를 낳을 뿐이었던 것이다.

 

 

노동자계급은 무엇을 할 것인가?

 

이러한 ‘정치’ 판, 대선 판에서 노동자계급의 역할은 무엇일까? 뭘 하면 대선이 끝나고 노동자 민중의 삶이 조금이라도 더 나아질까?

 

수구세력의 집권을 저지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지도 모른다. 87년 이래 한국사회가 쌓아올린 절차적 민주주의의 성과도, 한반도로부터 냉전의 그늘을 벗겨내려는 노력도 한낱 물거품이 되어서는 안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중대한 오류가 있다. 우리가 잃을지도 모르는 성과들이 소위 개혁 세력의 집권이 가져온 성과라는 것을 부지불식간에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87년을 가져온, 민주화와 성장을 가져온 노동자계급의, 민중의 투쟁을 스스로 부인하는 것이다. 민중의 성장과 노동자계급의 전진이 가져온 ‘정치’ 판의 부차적 효과가 사실 소위 개혁 세력의 지난 10년의 집권이었다. 이 전진이 수구 세력의 집권으로 하루 아침에 무위로 돌아가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문제는 이러한 민중의 성장과 노동자계급의 전진의 성과를 어떻게 하면 온전히 우리 것으로 만드느냐이다. 노동자 대통령이 상당한 표를 얻으면 나아질까? 일하는 사람들의 대통령이 뽑히면 나아질까? 역시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앞서 말한 듯이 정치가 우리 것이 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다. 그럼 정치를 우리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뭘 할까? 이번 대선에 표를 잘 찍으면 되나? 더욱 많은 표를 조직하면 되나? 아무래도 이걸로는 2% 부족하다. 또한 문제는 이 2%가 100%를 못되게 하는 결정적인 2%라는 것이다. 어쩌면 이 한계는 노동자계급 정치세력화의 구체적인 한 현현이 대의민주주의 속의 진보정당일 수밖에 없다는 것으로부터 이미 노정된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정치를 우리 삶과 유리된 어떤 것으로 놓고 정치세력화를 별도의 목표로 상정한 것으로부터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이에 대해서는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노동자 대통령의 득표와 당선을 우리 것으로 만들기 위한 이번 대선 판에서의 우리의 계획을 이야기해보자.

 

 

일하는 사람들의 대통령, 노동자 대통령은 누구인가?

 

우리는 비정규직노동자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던 모씨가 지난 5년 간 한 일을 알고 있다. 비정규직노동자는 이제 전체 노동인구의 50%를 훌쩍 넘고 있다. 이랜드에서, 코스콤에서, 광주시청에서, 송파구청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는 그저 부품일 뿐이었고, 경영 효율을 높이고 이윤을 더 뽑을 수 있게 하는 도구였을 뿐이다. 이번 대선, 노동자계급의 선택은 누구일까?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바꾸겠다고 약속하는 사람, 모든 노동자에게 단체협약이 적용되도록 만들겠다는 사람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노동조합이, 노동자들이 너무 강경하고 경직되어 있어서 특권층화되었다고, 그래서 외국자본도 들어오지 않고 경제성장이 정체된다던 이들이 지난 5년 간 한 일이 무엇이었던가? 노동자라면 누구나 누려야할 노동3권을 부정하고, 노동조합을 탄압하여, 과연 서민의 삶이 나아졌는가? 이제 이것을 아는 노동자라면, 자신의 권리를 보장해주고, 평등하게 노동할 권리를 옹호하는 사람에게 표를 찍지 않겠는가?

 

한미FTA를 앞세우고, 투자자의 권리와 기업할 수 있는 자유를 목놓아 외치던 이들이 이제 또 무엇을 꾸미고 있나? 물도, 전기도 모두 팔아치워 이익을 내는 상품으로 만들겠다는 것 아닌가? 의료도, 교육도 이제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따로 받아야 하는 세상이 저들이 꿈꾸는 세계화된 대한민국 아닌가? 노동자라면, 결코 이들에게 표를 줄 수는 없을 것이다. 빈부격차 없는, 누구나 복지 혜택을 누리는 사회, 배우고 싶은 사람 맘대로 배울 수 있고, 아픈 사람 얼마든지 맘 편하게 치료받을 수 있는 사회, 노동자라면 그 사회를 약속하는 사람이 대통령 되기를 원할 수밖에 없다.

 

냉전이 여전히 독기를 뿜어내고 있는 한반도에도 이제 평화 정착, 전쟁 상태 종식의 기운이 무르익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 북부가 남한 초국적자본의 이윤 추구와 시장 확장 전략 속에 일방적으로 편입될 수는 없다. 또한 미국의 세계전략 속의 주사위도 아니다. 전쟁의 종식과 평화의 정착, 나아가 통일 한반도는 정치적 거래와 지정학적 전략의 소산일 수 없다. 평화로운 통일 한반도를 우리 손으로 만들겠다는 공약을 내는 대통령 후보가 노동자의 선택이 될 것이다.

 

 

공무원노동자의 정치적 기본권

 

2004년 공무원노조는 민주노동당 지지와 공무원노동자의 정치적 자유를 선언한 바 있다. 헌법으로 보장된 모든 국민의 정치적 기본권이지만, 현행 제반 법령은 공무원노동자의 정치적 기본권을 제한하고 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의 삶은 우리가 결정하고 스스로 운영해나가는 것, 정치의 기본이자, 민주주의의 출발이다. 그러나 왜곡된 이 땅 정치와 민주주의는 민중의, 노동자의 정치 참여를 구조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노동자들의 투쟁을 통해 일정 부분 정치 참여의 통로를 열어놓았지만, 여전히 많은 질곡들이 노동자의 정치 참여를 막고 있는 것이다. 노동조합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노동기본권의 행사로부터 배제된 비정규노동자는 정치 참여의 기회마저 봉쇄당하고 있으며, 단지 공무원노동자라는 이유로, 교원이라는 이유로, 협동조합 혹은 공사 등에 근무한다는 이유로 노동자로서 제한적이나마 보장받는 정치적 기본권을 부정당하고 있는 것이다.

 

영국에서도, 프랑스와 독일에서도, 정당 가입과 정치활동의 제한은 없다. 심지어 미국 공무원노조는 조직적인 특정후보 지지 캠페인을 벌이기도 한다. 일본 역시 공무원의 정당 가입과 활동은 전혀 문제시되지 않는다. 국제노동기구(ILO)에서도 한국정부에게 “공무원노조특별법 제4조, 공무원의 노동조합의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조항과 관련하여, 노동조합이 그 어떤 정치활동도 하지 못하게 일반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결사의 자유 원칙과 양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공직선거법을 필두로, 국가공무원법, 지방공무원법, 정치자금법, 정당법, 국회법, 지방자치법 상의 수많은 독소조항들. 공무원의 정치적 기본권을 옥죄는 이러한 구시대의 유물은 이제 과거 속으로 보내야 한다. ‘정치’를 정치이게 만드는 그 첫 출발은 정치적 기본권의 보장이 될 것이다. 정치를 노동자 민중의 손에 되돌려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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