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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 20주년

 

6월항쟁 이후 20년,

어디까지 왔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계간 『창작과비평』 편집인

 



 



6월항쟁 이후 20년,

어디까지 왔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계간 『창작과비평』 편집인




I. 6월항쟁과 87년체제


1987년 6월의 전국적인 봉기는 전두환 정권의 폭압정치를 끝장내고 한국 현대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 배경에는 물론 1960년의 4․19혁명이 있고 1979년의 부마항쟁이 있으며 80년 5월의 광주민주항쟁이 있다. 하지만 5․16이나 5․17 같은 결정적인 반전이 없이 20년을 이어온 민주화의 과정에 시동을 걸었다는 점에서 6월항쟁은 확실히 새로운 차원의 성취였다. 동시에 오늘의 한국사회에는 1987년 6월 이후 형성된 이른바 ‘87년체제’가 이제 한계점에 달했고 새로운 타개책이 필요하다는 위기의식이 퍼져 있다.

그러한 모색의 일환으로 6월항쟁을 통해 형식적․절차적 민주주의 내지 정치적 민주주의는 달성했으나 경제․사회 면에서의 실질적 민주주의는 여전히 부실하거나 심지어 후퇴했다는 진단이 나오기도 한다. 이는 진실의 일면을 짚어내고 있지만 그런 식의 이분법에는 경계해야 마땅한 면도 많다. 정치적 민주화 자체가 새로운 헌법과 대통령 직선 등의 기틀이 마련된 뒤에도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정권을 거쳐 노무현 정부에 이르는 고비고비마다 힘겹게 확장되어왔거니와, 비록 군부 쿠데타에 의한 역전 가능성은 거의 사라졌지만 ‘불가역적 달성’이라 보기에는 아직 이르다. 게다가 87년 7-8월의 노동자대투쟁이 민중복지의 개선인 동시에 절차적 민주주의의 진전이기도 했듯이, 민주화의 진행을 ‘형식’과 ‘실질’로 가르는 것도 편의상의 구별에 불과하다.

이러한 구분법의 배경에는 6월항쟁의 진정한 목표가 한국사회에서 민중민주주의 또는 사회주의-아니면 최소한 사회민주주의라도-를 건설하는 일이었다는 전제가 깔려 있기 쉽다. 그런 전제로 보면 6․29선언이야말로 민중항쟁의 완전한 목표달성을 가로막은 ‘속이구’ 선언이요, 이후의 20년은 민주주의의 모양새만 얻고 알맹이를 놓친 좌절의 역사가 되고 만다. 내가 보기에 이는 한국의 현실에 대한 매우 일면적인 해석이다. 그 일면성을 넘어서는 일 또한 6월항쟁 20주년을 맞은 우리들의 중요과제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한다.

아무튼 6월항쟁과 직후의 일련의 사건들이 만들어낸 정치․경제․사회적 질서를 ‘1987년체제’라 부를 때, 그것이 이전보다 한결 개선된 질서이긴 하지만 수많은 일시적 타협을 담은 불안정한 체제이며 오늘날 거의 그 한계점에 도달한 체제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물론 1997년 경제위기와 IMF 구제금융사태를 계기로 ‘97년체제’에 의해 이미 대체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런가 하면 한미FTA협상의 강행 타결로 87년체제가 2007년에 드디어 최종적으로 무너졌다는 진단도 있고, 일부 ‘뉴라이트’ 논객들은 올해 대통령선거에서 ‘친북좌파’ 정권을 종식시키는 좀 다른 의미의 ‘2007년체제’를 출범시켜야 한다고 벼르기도 한다. 아무튼 87년체제가 여전히 건재하며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찾아보기 힘들다.



II. 87년체제를 넘어서기 위해


87년체제를 넘어서려는 구상은 87년체제라는 것이 무엇의 하위범주인지, 다시말해 어떤 더 큰 체제의 일부이며 어떤 더 포괄적인 시대구분 속에 자리잡고 있는지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진다. 예컨대 앞서 말한 97년체제론을 포함해서, 6월항쟁 이후의 정치적 민주화가 신자유주의의 득세를 수반하는 실질적 민주화 실패의 역사라고 보는 관점은 최근 20년의 한국사회를 1980년대 초에 시작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신자유주의 국면’을 중심으로 파악하는 발상이다.

한국사회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일부로 존재함은 엄연한 사실이며 따라서 신자유주의라는 세계적 대세가 6월항쟁 이후의 역사에 커다란 규정력을 행사해온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정확히 얼마만큼의 규정력을 어떤 식으로 행사했는지, 또 이에 대한 한국사회의 가장 적절한 대응책이 무엇인지를 밝히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좀더 정밀한 이해가 필요하거니와, 그것이 한국사회에 작용하는 구체적인 방식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도 정확한 분석이 요구된다.

나 자신은 그 어느 하나에 관해서도 충분한 연구가 없지만, 신자유주의에 대한 나의 기본적인 이해는 그것이 실은 ‘구’자유주의(내지 자유민주주의)보다 더욱 오래된 초기 자유주의로 회귀하려는 시도인바, 초기 자유주의가 그나마 힘겨운 역정을 거쳐 민주주의 및 복지사회와 일정한 결합을 성취했던 것을 20세기 종반의 자본주의가 축적의 위기를 맞으면서 되물리고 시장만능의 논리로 회귀하는 움직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신자유주의는 초기 자본주의가 지녔던 봉건질서타파라든가 건강한 개인주의 창달 같은 진보성마저 상실한 채 현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불평등질서를 고착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그것이 과연 ‘자유주의’인지조차 의심스러운 이데올로기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신자유주의의 영향은 때와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 한국의 경우 신자유주의 득세의 결정적인 계기가 1997년의 구제금융사태였지만, 그 후과 중에는 당시의 한국사회가 절실히 필요로 하던 자유주의 또는 민주주의 개혁을 추동하는 내용도 없지 않았다. 관치금융의 타파가 그 두드러진 사례며, 크게 볼 때 1998년에 여야간 정권교체가 일어나고 김대중 정부 초기의 각종 정치개혁이 수행되는 과정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 봤자 자유주의 정치의 확산과 자본주의 제도의 정착에 기여한 것뿐이라는 반론도 가능하지만, 이런 반론이라면 ‘신자유주의’라는 개념 속에 온갖 것을 쓸어담기보다 자유주의 자체, 또는 자본주의 자체를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설득력있는 단기․중기․장기적 대응책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87년체제의 구체적 성격을 밝히는 데 긴요한 것이 세계적인 시각만은 아니다. 한국이 분단국가인 이상 한반도적 시각이 동시에 필요한 것이다. 6월항쟁 10주년을 기념하는 학술대회에서도 나는 “6월항쟁을 단지 남한의 역사 속에서 보는 대신 남북한을 아우르는 분단체제 속의 사건으로 파악하고 평가할 것을 제의”(「6월민주항쟁의 역사적 의의와 10주년의 의미」, 『흔들리는 분단체제』, 창작과비평사 1998, 212면)한 바 있는데, 국토가 처음 분단된 것은 1945이었고 남북에 단독정권이 수립된 것은 48년이지만 분단이 일종의 체제적 성격을 띨 만큼 굳어진 것은 한국전쟁이 교착상태로 끝난 1953년 이후라고 말할 수 있다. 그 후 4․19와 5월 광주 등 수많은 도전을 견뎌낸 분단체제는 6월항쟁으로도 종식되지 않았으며, 그런 의미에서 87년체제는 53년체제의 한 아(亞)체제 내지 하위범주인 셈이다.

그러나 한반도 분단체제의 큰 버팀목이던 남한의 군사독재가 무너짐으로써 분단체제는 동요기로 접어들었다. 뒤이은 동서냉전 종식으로 지구 차원의 종요로운 버팀목도 잃어버렸다. 그리고 2000년 6월의 남북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으로 드디어 53년체제를 넘어설 전망이 열린 것이다.

이런 간략한 요약에도 드러나듯이 87년체제에 대해 한반도적 시각을 갖는다는 것이 결코 남한 내부의 변화나 세계사적 사건을 배제하고 남북관계만을 부각시키는 ‘분단환원론’이 아니다. 87년체제라는 표현 자체가 한국사회의 내부요인을 중시하는 명명법으로서, 민주화의 지속이라든가 새로운 발전모델의 모색, 신자유주의의 수용 또는 배격 등 국내 현안들을 주요 내용으로 삼고 있다. 다만 이런 국내 현안의 해결조차 분단체제의 자장(磁場) 안에서 벌어지게 마련이고 실제로 53년체제 아래서도 줄곧 이어져온 민간의 통일운동이나 87년체제에 힘입어 전개된 노태우 정권의 북방정책 같은 정부측의 남북대결 완화노력이 모두 민주화의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음을 망각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인 것이다.

그러므로 분단체제론에서 2000년의 획기성을 인정하는 것도 이른바 민족해방론 또는 자주통일우선론의 시각과는 거리가 있다. 2000년을 기점으로 삼는 ‘6․15시대’는 1953년 이후 처음으로 남북이 공유할 수 있게 된 시대구분이라는 점에서 분명히 획기적이지만 그것이 남북 각기의 사회현실로 구체화된 내용은 아직 제한적이다. 물론 순전히 선언적․관념적인 수준에만 머문 것은 아니고 일상생활에도 적잖은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남쪽에 국한해서 말하더라도 6․15가 53년체제를 청산하지 못했음은 물론 87년체제를 끝냈다고 보기조차 힘들다.

남한 주민들에게 미친 직접적인 영향으로만 본다면 97년의 IMF사태가 훨씬 위력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신자유주의 지배하의 ‘97년체제’ 성립으로 해석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87년체제의 진보성에 대한 과대평가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엄연히 53년체제의 일부로서 분단체제의 여러 문제점을 그대로 안고 있는데다 때로는 87년 이전보다 더욱 무모하게 ‘선진국진입’과 ‘흡수통일’의 꿈에 들떠 있던 한국사회의 모습이 97년의 경제위기에서 극적으로 드러난 점이 간과되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 IMF사태로 87년체제의 긍정적 동력이 완전히 소진되었다는 진단 또한 지나친 단순화다. 좀더 원만한 평가를 위해서는 역시 한반도적 시각에서의 접근이 요구되는데, 이때 1987년과 1997년 그리고 2000년의 관계는 훨씬 복잡하면서 어떤 일관된 그림을 제시한다. 87년은 남한 민주화의 결정적인 전환점이며 한반도분단체제 동요기의 시작이지만, 87년체제의 헌법과 정당정치 및 대부분의 사회운동이 ‘분단체제 극복’을 뚜렷한 시대적 과제로 설정하고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이에 따른 온갖 문제들이 누적된 끝에 남녘에서는 97년의 구제금융사태가 발생했고 이것이 식량난 등 북녘의 위기와 겹쳐 분단체제의 흔들림이 본격화했다. 이때 나온 6․15공동선언은 범한반도적 위기상황의 직접적인 산물인 동시에 남북 각자가 현상고수나 대외종속보다 상호간의 화해․협력 및 점진적 통합에서 새로운 활로를 찾고자 한 능동성과 저력의 산물이기도 했다.

나는 분단체제가 2000년을 분기점으로 ‘동요기’에서 ‘해체기’로 들어섰다고 주장한 바 있지만(『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 창비 2006, 6면), 한반도 전체를 분석단위로 삼는 시대구분과 그 절반만을 대상으로 하는 시대구분이 일치할 필요는 없다. 따라서 남한의 87년체제가 2000년 이후에도 지속되고 있다는 판단은 ‘분단체제 해체기’ 설정과 모순되지 않는다. 다만 분단체제가 제대로 해체되어 더 나은 체제로 이행하려면 한계점에 다다른 87년체제를 극복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한반도 평화체제 성립을 위한 국제적 여건이 그 어느 때보다 유리해졌고 국내에서는 87년체제의 말기현상이 날로 두드러져가는 6월항쟁 20주년의 현시점이야말로 새로운 시대를 향한 결정적인 발걸음을 내디딜 계제가 아닐 수 없다.



III. 2007년 한국의 선택


2007년은 마침 한국에서 대통령선거가 있는 해이기도 하다. 올해가 결정적인 분기점이 될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한국의 보수진영에서도 금년 대선이 단순한 정권탈환을 넘어 한반도의 운명을 가르는 선택의 갈림길이라는 주장이 나오곤 한다. 1987년 이래의 방황의 시간, 그 중에서도 ‘친북좌파’ 세력의 10년 집권을 드디어 청산하고 새로운 ‘선진화’ 체제를 출범시키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건대 대선에서 보수야당이 집권한다고 해서 87년체제가 극복될 것 같지는 않다. 이른바 뉴라이트의 논객들이나 야당 내 수구인사들의 강경발언에도 불구하고 87년 이래의 정치적 민주화 과정을 근본적으로 되돌려놓거나 6․15공동선언을 폐기할 수 있으라고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87년체제가 새로운 체제로 이행하지 못한 채 ‘나쁜 교착상태’가 연장되면서 그 말기현상이 더욱 심해질 개연성은 충분하다. 이는 특정 정당의 집권을 무작정 배격하는 정파적 주장이 아니다. 53년체제--더구나 1987년 이전의 53년체제--에 대한 비판의식이 희박하고 민주개혁정권 시기를 ‘잃어버린 10년’으로 간주하는 세력의 주도 아래 집권하는 한, 그 정당이 어느 당이건 87년체제의 어려움은 가중되리라는 판단일 따름이다. 아니, 개혁성과 참여민주주의를 자랑삼던 정권 스스로가 보수층의 지지를 업은 한미FTA 강행으로 일종의 ‘대연정’을 구성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리라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에 필요한 노선을 나는 ‘변혁적 중도주의’로 규정하고 있다(『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 30-31, 58-60면 참조). 명시적으로 그 표현을 쓴 것은 최근의 일이지만, 실은 6월항쟁 이후에 새로운 단계가 열리면서 급진운동권의 양대 산맥을 이룬 ‘민족해방’과 ‘민중혁명’ 노선들이나 변혁의 전망을 결한 온건개혁노선들이 모두 시대의 요구에 부응할 수 없음이 분명해졌다. 분단정권의 폭압통치 기간에는 자주평화통일의 원칙 또는 평등사회의 원칙을 주창하고 시민의 정치적 권리를 확보하는 것만으로도 분단체제를 흔드는 효력을 지녔었다. 그러나 군부독재가 끝나고 좀더 실질적인 작업의 공간이 열린 상황에서는 분단체제변혁이라는 목표를 확실히 간직하면서 그 실현을 위해 다양한 세력들의 다양한 문제의식을 수렴하는 중도적 노선이 필요해진 것이다.

20년 가까운 세월이 더 흐른 오늘의 한국에서 그런 의미로 변혁적이면서 중도적인 노선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졌다. 87년체제가 기본적으로 53년체제의 일부로서 그 문제점 중 많은 것이 분단체제 자체의 대내적 억압성과 대외적 취약성에서 오는 이상, 분단체제변혁이라는 큰 구도 속에서 수행되지 않는 어떠한 87년체제 극복노력도 정곡을 찌르기 어렵게 되어 있다. 53년체제 속에 안주하려는 보수적 논리는 더 말할 나위없고, 분단체제의 규정력을 과소평가하는 ‘반신자유주의’ 논리나 분단극복을 최우선과제로 내걸지만 분단현실의 체제적 성격에 둔감한 ‘반미자주통 일’ 노선도 미흡하기는 마찬가지다.

실제로 한국의 진보적 개혁세력은 한미FTA 협상과정을 비판하는 운동에서 꽤나 광범위한 연대를 형성했었다. ‘자주’ 또는 ‘평등’을 이유로 원칙적인 반대입장을 취한 세력과 더불어 협상의 진행방식과 일부 내용에 반대한 인사들이 졸속타결을 저지하려는 움직임에 동참했던 것이다. 결과는 알다시피 미국의 통산촉진법 시한에 맞춘 4월초 타결을 저지하지 못하고 실패했다.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가 오히려 강행 추진에 앞장섰기 때문이고, 2006년 10월 북의 핵실험으로 저지운동의 기세가 일시적으로 꺾인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운동 자체가 각기 속내가 다른 세력들의 다분히 전술적인 연대에 머물렀기 때문에 대다수 국민을 설득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는 점도 인정해야 옳다.

협상이 타결되면서 지금은 전술적 연대마저 다분히 손상된 형국이다. 신중론을 펼치던 세력 중 일부가 졸속협상의 결과를 거부해야 한다는 반대론으로 옮겨갔지만, 다른 일부는 비준의 불가피성에 체념하면서 그나마 이만큼 해냈으니 최선의 사후대책을 강구하자는 자세로 전환하고 있다. 반면에 일체의 자유무역협정, 적어도 미국과의 모든 FTA를 배격해온 쪽에서는 협상타결에 분노하면서도 국내의 정치지형이 한미FTA 찬성과 반대의 두 진영으로 확연히 갈라지는 것을 반기는 기색이 없지 않다.

 문제는 이런 구도가 87년체제 극복을 위해 과연 바람직하냐는 것이다. 이 구도가 가져올 급진적 진보진영의 세력확장이 그 나름의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나, 자기쇄신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 보수야당의 손쉬운 승리와 단순한 양적 확대에 만족하는 급진 정파들의 존재로 87년체제의 내리막길이 더욱 길어지고 고달파질 위험도 크다. 한미FTA 협상타결로 어중간한 ‘중도개혁’ 세력의 입지가 축소된 지금이야말로 변혁적 중도주의 노선에 충실한--‘변혁적’이라는 꾸밈말이 선거과정에서 필요할지는 물론 별개문제로 치고--진보적 개혁세력의 재결집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한미FTA라는 분열요인에 시달리는 진보적 개혁세력이 이런 통합을 이룩할 수 있을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협상의 졸속타결 저지를 위해 연대했듯이 협정의 국회비준 과정에서 졸속과 그 밖의 온갖 비민주적 행태를 막기 위한 연대는 가능하고도 필요한 것이며, 협상내용과 향후 전망에 대한 철저하고 책임있는 검증을 통해 다수대중이 공감할 수 있는 행동에 합의하는 일도 불가능하지는 않으리라 본다. 다만 이번에야말로 단순한 전술적 연대를 넘어 87년체제에 대한 통찰과 그 실질적인 극복방안을 갖고 대중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IV. ‘한반도식 통일’과 ‘제3당사자’의 역할


‘변혁적 중도주의’가 현실적 대안일 수 있는 것은 한반도의 독특한 현실 때문이다. 한반도는 아직껏 분단상태에 있다는 점에서도 특이하지만 그 재통합의 과정이 국토통일의 어떠한 선례와도 다른 성격이라는 점에서 그야말로 미증유(未曾有)의 현실이다. 한마디로 이곳에서는 베트남식 무력통일이 불가능함은 물론, 평화적인 통일도 독일 또는 예멘과 달리 점진적․단계적으로나 가능한 상황인데, 실제로 6․15공동선언을 통해 남북의 정상이 그 점에 이미 합의해놓은 상태인 것이다.

이러한 합의는 당국간의 관계에 그치지 않는 엄청난 파급효과를 지닌다. 폭력적으로든 평화적으로든 통일이 일거에 달성될 경우 평범한 시민들의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참여는 제한될 수밖에 없다. 반면에, 점진적이며 단계적인 통일과정은 시민참여의 공간을 열어준다. 그리고 한국처럼 시민사회가 이런 공간을 활용할 의지와 능력을 갖춘 경우에는 통일과정의 중간단계들을 언제 어떤 내용으로 채워갈지에 대한 시민들의 발언권은 계속 증대하게 마련이고, 끝내는 시민참여의 영역이 한반도 전역으로 확대되는 일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남녘의 (민간기업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시민사회가 남북관계에서 두 당국과 함께 ‘제3의 당사자’로 기능해야 함을 주장해왔다. 아직은 나머지 두 당사자에 비해 미약하기 짝이 없고, 한국의 시민사회가 ‘제3당사자’로서의 자기인식이나 긍지도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북미관계가 개선되고 남북교류가 활성화할수록 시민참여의 확대가 불가피한데, 여기서는 ‘제3당사자’의 역할이 결정적일 수 있는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해보기로 한다.

하나는 북핵문제 해결의 과정에서다. 이 글을 쓰는 4월말 현재 BDA은행과 관련된 금융제재 문제가 여전히 안 풀렸고 2․13합의의 1단계 이행조치도 완수되지 못했다. 그렇긴 하지만 제2단계의 ‘불능화’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성사되리라는 전망이 우세한데, 마지막 제3단계의 완전한 ‘폐기’(dismantlement)가 이행될지에 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도 적지 않다. 물론 “한반도 비핵화는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라는 북측의 강력한 원칙표명이 있고 미국도 ‘폐기’에 미달한 상태에서 충분한 반대급부를 제시하지 않을 터이므로 제3단계 역시 언젠가는 실현되리라는 희망을 버릴 필요는 없다.

문제는 응분의 보상을 하지 않은 채 적당히 제어된 ‘저강도 북핵위기’를 유지하는 것이 차라리 이롭겠다는 미국측의 계산과 핵무기 보유보다 더 확실한 체제유지수단은 없다는 북측의 계산이 맞아떨어질 경우다. 이는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상이지만,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 때 남쪽 당국이 이를 돌파할 실력이나 강한 의지를 지닐지는 의문이다. 한반도 비핵화가 북측 주석의 유훈일 뿐 아니라 생활하는 남북 민중의 최대 현안임을 내세우는 민간사회의 개입이 필수적이 되는 경우다.

‘제3당사자’의 특별한 몫이 요구될 또 한가지 상황은 핵문제가 순조롭게 풀리면서 북미관계가 정상화되고 남북교류가 대폭 활성화될 때이다. 반드시 수구세력의 강경논리가 아니더라도 이런 상황이 북의 체제에 대한 위협을 내포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분단국가는 그 본질상 불안정한 체제인데, 현재의 남북간 세력균형으로 보면 심각한 위협을 느끼는 쪽은 북측이다. 중국 또는 베트남식 개혁․개방이 분단체제 아래서 순조로울 개연성은 낮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고 쌍방이 영구분립에 합의하거나 빨리 통일을 해버림으로써 분단국가의 불안정성을 해소하는 일도 불가능한 것이 한반도의 현실이다. 바로 그래서 나온 것이 통일을 하기는 하되 서두르지 않고 ‘연합제’ 또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에 해당하는 중간단계를 거쳐간다는 6․15공동선언의 합의였다. 그런데 이 합의를 실천에 옮기는 일을 당국자들에게만 맡겨서는 성사되기 어려우리라 본다. 두 개의 주권국가를 존속시키는 연합제조차 북측의 체제유지에 대한 충분한 보장은 될 수 없는데다가, 남북을 막론하고 정치권력의 속성은 상대를 압도하는 통일이 아니면 현상유지를 원하지 약간의 권한이라도 연합기구에 넘겨주기를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북 민중의 생활상의 욕구에 부응하는 화해․협력과 재통합의 과정을 계속하면서 그 위험요인들을 관리할 최소한의 장치는 여전히 필요하다. 유일한 해답은 국가연합--또는 ‘Commonwealth’로 번역해도 좋을 낮은 단계의 연방제--이라고 할 때, 이를 위한 연구와 주장을 적극적으로 해나갈 세력은 지금으로서는 ‘제3당사자’뿐이며, 남북간 각계각층의 다양한 접촉과 연결망의 형성을 통해 국가연합 건설의 토대를 만들어가는 작업도 이 ‘제3당사자’의 대대적인 참여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끝으로 해외동포들의 몫을 간략히 거론함으로써 결론에 대신하고자 한다. 87년체제 아래서, 특히 2000년 6월 이후로, 한국 내에서의 민간통일운동 공간이 확장되고 남북간 직접교류가 확대됨으로써 반독재투쟁과 민족화해를 해외의 헌신적 활동가들에 의존하던 비중은 한결 줄어들었다. 더욱이나 국가연합(또는 낮은 단계의 연방) 건설이 중대 현안으로 떠오르게 되면, 연합은 남북간의 연합이지 남․북․해외의 3자연합이 아니므로 해외동포사회가 똑같은 비중으로 기여하기는 어렵다. 어느 재일  통일운동가의 말대로 “해외동포도 다같이 통일의 주인이지만 주도는 남북이 할 수밖에 없는” 형국인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상황이 6․15시대의 남녘에서 그렇듯이 해외에서도 다수대중이 폭넓고 다채롭게 참여할 길을 열어준다. 초인적인 자기희생을 각오하지 않은 평범한 동포들이 각자 자기 사는 곳에서의 삶에 충실하면서, 한반도 주민들이 갖지 못한 경험과 경륜 및 현지에서의 영향력을 한반도의 통일과정에 보태줄 수 있는 것이다. 세계의 초강대국이자 뛰어난 인재들로 가득한 미국의 동포사회라면 더욱이나  그렇다. 이런 공헌을 통해 남북연합 건설을 포함한 한반도식 통일의 내용이 더욱 풍부해짐은 물론, 전지구적 한민족 네트워크의 형성 또한 더욱 뜻깊은 작업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미래의 인류문명이 좀더 공정하고 다양한 세상을 이루는 데도 무시 못할 공헌을 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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