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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는 자본론 08. 자본주의 변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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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는 자본론 08. 자본주의 변천사

 

 

공황은 자본주의 사회의 고질적 불치병이다. 통제되지 않는 자본의 이윤추구의 결과이다.

이런 공황은 10년의 파고로 주기적으로 자본주의를 위협한다. 그러다가 노동자들의 계급 투쟁의 양상에 따라 구조적 위기로 내몰린다. 1873년, 1929년의 공황과 1974년, 79년의 공황이 바로 구조적 위기이다. 또한 2008년의 공황 역시 구조적 위기이다.

 

 

자본주의는 이 세차례의 구조적 위기속에 자신의 모습을 탈바꿈한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부터 1873년 공황 까지의 자본주의를 자유경쟁 산업자본주의 로 구분한다. 이 시기는 프랑스 대혁명, 영국의 명예혁명 등 부르주아 혁명을 통해 왕정을 무력화 시키고, 신분제를 혁파한다. 또한 산업혁명을 통해 기계화에 의한 대량생산체제를 구축, 노동자들의 탈숙련화 시켰고, 숙련노동자를 공장 밖으로 내몰아 실직적으로 노동자들을 자본에 종속, 자본주의를 완성시켰다. 공장제 수공업(매뉴팩춰) 방식의 생산은 숙련된 기술 때문에 노동자들이 형식적으로만 자본에 종속되어 있었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노동자들을 길거리로 내몬 것이다. 이에 저항하기 위해 노동자들은 기계파괴(러다이트)운동을 전개했으나, 패배할 수 밖에 없었다. 러다이트 운동과 관련해서 맑스는 “패배할 수 밖에 없는 투쟁”이라고 규정했다. 이유는 과학기술의 진보를 뒤로 돌리는 반동적인 운동이기 때문이라고 규정한다.

즉 과학기술의 진보는 노동자들이 적극 수용하며, 그 방식은 임금 삭감없는 노동시간 단축, 일자리 나누기 등일 것이다.

 

 

TIP. 하이패스 달아야 돼? 말아야 돼?

최근의 ‘하이패스’ 장착의 경우 논란의 소지가 다분하지만 역시 동일할 것이다. 진보진영에 몸을 담은 이들의 경우 톨게이트 입금원에 대한 고용불안을 이유로 하이패스 장착을 기피한다.

정답일까? 아닐 것이다.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하이패스 장착을 미룬다고 ‘입금노동자의 고용’ 이란 문제의 본질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핵심은 그 입금원에 대한 고용을 노조차원에서 일자리를 나누고, 고용을 보장하는 투쟁을 전개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도로공사노조가 그럴 의지가 없으니까 문제이지만...

 

 

1873년부터 1929년 대공황 까지를 독점자본주의, 제국주의 단계로 구분한다.

1873년 공황으로 자본주의는 새로운 단계로 진입한다. 약육강식의 무제한적 경쟁, 공황을 거치며 자본은 집적과 집중을 통해서 거대해 진다. 이제 수많은 자본이 경쟁을 통해서 평균적으로 획득하는 이윤 대신에 경쟁을 제한/배제하며 평균 이윤율 이상의 이윤(특별잉여가치)을 획득하는 독점자본이 형성된다.

그에 비해 노동력 역시 소수의 자본가 밑에, 소수의 공장으로 집중되어 노동자들의 조직적 저항이 가능해진다.

 

또한 보다 많은 이윤을 위해 산업자본과 은행자본이 융합되므로 거대 금융자본을 형성한다. 이렇게 비대해진 금융자본들은 지배계급 중에서도 이제 한 줌도 안 되는 소수의 유력자들에 의해서 지배받게 된다. 이들은 산업/금융계 뿐 아니라 정치계와 관료집단, 그리고 그를 통해서 국가의 무력까지를 두루 지배하는 금융과두체제로 발전, 제국주의 단계로 발전한다.

이들은 자국내 전반적인 과잉생산과 화폐자본의 과잉축적을 돌파할 새로운 방안을 모색한다.

제국주의 시대, 자본에 영합한 국가권력은 폭력적으로 자본의 이해를 관철시켜낸다. 바로 식민지 침탈이다. 식민지는 과잉된 자본의 새로운 투자처이자, 과잉 생산된 상품을 그 가치 이상으로 팔수 있는 판매처이다. 또한 값비싼 본국의 노동력을 대신할 풍부한 노동력이 널려있다.

또한 과잉자본을 소비할 군수산업이라는 새로운 투자처가 생긴다. 본격적인 식민지 전쟁이 시작된다. 이렇게 제국주의는 제3세계 민중의 피와 땀, 생명을 빨아 먹으며 성장한다.

 

 

선도적으로 제국주의 단계에 오른 영국과 프랑스, 뒤늦게 제국주의 반열에 오른 독일, 이탈리아 등은 이제 식민지를 둘러싸고 치열한 쟁탈전을 벌이고, 결국 이들의 식민지 쟁탈전은 1, 2차 세계대전을 가져온다.

 

 

이런 독점자본주의에 위기가 닥친다.

거대 독점자본과 금융과두제의 지배에까지 이른 자본주의적 생산의 모순이 극대화 됨에 따라 식민지를 둘러싼 경쟁이 심해진다. 한편에서는 상대적 과잉인구(실업자)의 증가로 인해 자국 내 빈곤층으로 전락한 노동자계급은 빈곤과 무지, 질병, 억압, 무권리의 상황속에서 소비층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고, 극단적인 혁명의 길을 선택한다. 식민지 피지배 계급의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도 전면화 된다.

이런 가운데 독점자본의 이윤율이 압박을 받는 상황으로 내몰린다.

 

상품의 생산가격에 의해서도, 상품의 가치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고, 구매자의 욕망과 지불능력에 의해서 규정되는 독점이윤을 위해 독점자본은 카르텔을 형성한다. 이 카르텔은 막대한 설비투자로 인해 과다한 비용이 지출되고, 부문간 경쟁을 차단은 기술의 진보를 가로막는다.

 

독점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전면적 위기가 도래한다.

그 첫 폭발은 1차 세계대전이었다. 후발 자본국인 독일 등은 국내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식민지 쟁탈전을 벌인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각국에서는 노동자계급의 사회주의 혁명이 본격화 되며, 식민지 피지배 민중들의 민족해방투쟁이 일어난다. 1917년 재정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고, 1919년 조선에서 3.1 운동이, 중국에서 5.4 운동이 일어난다.

 

1차 세계대전으로 해소처를 찾았던 전세계 자본주의 국가들은 또다시 보다 높은 이윤을 위해 금융자본화, 주식, 부동산, 심지어 농산물까지 투기를 일상화 한다. 과잉설비 투자로 인해 생산은 과잉되고 있으나, 소비를 할 세력이 없는, 1929년 대공황에 빠지게 된다.

1929년의 대공황은 4년간 진행되었고, 전세계 공업생산의 44%가 줄었고, 미국의 실업자는 1200만명으로 국민의 25%가 실업자였다. 또한 이 사이 세계 무역은 65%가 감소했다.

 

상품은 남아도는데 살 사람이 없는, 밀과 커피등 곡물이 대서양 한가운데 그대로 버려지는, 그럼에도 굶주림에 떠는 수백만의 실업자가 공존하는 이상한 상황에 내몰리게 된다.

 

 

1929년 구조적 위기를 둘러싸고는 계급적으로 성장한 노동자들의 수많은 투쟁이 진행된다.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 프랑스 군과 독인 해군 병사들의 반란, 1918년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서 혁명, 헝가리의 독립혁명 승리, 1919년 아일랜드 게릴라전, 1920년 독일 총파업, 이탈리아 공장점거, 1923년 프랑스 루르 폭동, 1926년 영국 총파업(패배), 1929년 미국 증시폭락, 1931년 스페인 혁명, 1936년 프랑스 스페인 인민전선 승리, 미국 CIO 결성, 1939년 2차 세계대전...

 

 

1929년 구조적 위기속에서 노동자들은 목숨을 걸고 처절하게 투쟁했다. 그 투쟁의 결과 소련에서 사회주의가 들어섰고, 수많은 노동자들이 투쟁했다. 29년의 공황은 노동자들의 투쟁을 더욱 격화시켰고, 이 결과 자본주의 사회는 미국을 중심으로 케인즈식 자본주의와 독일을 중심으로 파시즘식 자본주의로 양분된다.

 

이렇게 1929년 대공황이후부터 1979년 공황까지를 국가독점자본주의, 혹은 케인즈식 자본주의라 부른다.

미국에서는 1933년 루즈벨트가 대통령에 당선된다. 루즈벨트는 경제학자 케인즈의 이론을 받아들여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뉴딜’정책을 도입한다. 뉴딜 정책은 국가가 세금과 국채발행 등을 통해 자본을 형성, 노동자들에게 일정한 양보로 사회복지와 테네시강 개발공사 등 국가기반산업에서 일자리를 창출해주고, 노동3권을 강화시켜 주는 등의 유화책으로 계급 화해를 도모한다. 이렇게 창출된 일자리를 통해 유효소비를 늘려 과잉생산된 상품을 적극적인 국가개입 정책이다. 이 케인즈주의는 전시국가독점자본주의를 거쳐 2차 세계대전이후 서구유럽 자본주의의 지배이데올로기로 성장한다.

 

반면 패전국가였던 독일에서는 실업과 패전에 따른 배상 등으로 극도의 혼란에 빠져있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히틀러는 강력한 자국민에 대한 탄압과 국가주의, 전쟁을 통한 극우 파시즘으로 위기를 돌파하려 한다.

 

이런 가운데 자본주의 사회는 각자 살길을 도모한다. 미국과 북미를 중심으로 한 달러블럭, 영국과 식민지를 중심으로 한 파운드 블럭, 프랑스와 식민지를 중심으로한 프랑 블록 등 보호무역주의로 돌입한다. 식민지를 갖지 못한 독일, 이태리, 일본은 중대한 기로에 설 수 밖에 없다.

 

1939년 5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2차 세계대전은 29년 대공황을 극복하는 계기가 된다. 2차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29년 대공황의 골칫거리였던 과잉생산과 상대적 과잉인구(실업자) 문제를 일거에 해소한다. 전쟁으로 유럽과 아시아의 대부분의 생산시설이 파괴된다. 5,000만명이 사망함에 따라 과잉인구(실업자)가 해소된다.

2차 세계대전의 결과 12개 나라가 사회주의로 전환했고, 제3세계 식민지 국가들은 사회주의 사상에 기반한 민족해방투쟁을 전개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는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사회와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사회로 양분, 격렬한 대립속에 발전한다.

 

미국의 경제는 1-2차 세계대전을 통해 눈부신 성장을 했다. 1917년 미국정부는 군수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전쟁산업국을 신설, 전쟁 물자를 유럽의 전쟁국에 팔아 엄청난 이윤을 챙겼다. 물론 이 대금은 패전했을 경우 종이 쪼가리로 전락할 파운드화나 프랑이 아니라 금이었다. 2차대전 이후 미국은 전세계 금의 70%를 보유하게 된다. 또한 미국은 영국과의 독립전쟁에서 승리했고, 두차례의 세계대전에서 후발주자로 전쟁에 가담, 승리를 거며 쥐었다. 자본주의 사회의 정치, 경제, 군사력 등 최강대국이 탄생했다.

 

 

미국은 사회주의와의 경쟁에서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내보여야 했고, 이를 위해 자본주의 국가들을 자신의 주도하에 성장시켜야 했다. 이를 위해 미국은 미국을 중심으로 자본주의 세계를 재편한다.

선 2차세계대전이 영국과 프랑스 등 식민지를 보유한 제국주의들의 보호무역주의와 무리한 식민지정책에 있었다는 판단속에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경쟁체제의 구축과 민족해방 투쟁에서 사회주의 운동의 분리, 분쇄 전략을 펼친다.

 

우선 전쟁으로 파괴된 서유럽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사회주의 확장을 가로막기 위한 미국의 주도하에 마샬플랜이 기획, 120억 달러에 이르는 경제원조를 하게 된다.

또한 안정적인 세계 금융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외환거래시 미국의 달러를 전세계 기축통화로 하는 고정환율제(1온스=35달러)를 채택하는 IMF(국제통화기금), 사회주의권 확산을 막기 위한 제3세계 국가에 대한 경제원조을 담당 할 IBRD(국제부흥개발은행) 체제를 구축한다. 또한 보호무역주의를 탈피하여 자유무역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GATT(관세와무역에관한일반협정)를 구축함으로써, 소위 브레튼우즈 체제가 완성된다. 이로서 자본주의 사회는 기축통화로서의 미국의 달러와 미국의 정치,경제,군사적 우위를 통한 팍스아메리카나(Pax Amercana. 세계 유일 강대국 미국에 의한 세계평화) 체제가 확립됐다.

 

 

 

전시국가독점자본주의 형태였던 케인즈주의는 전후 자본주의 나라들의 지배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하지만 케인즈주의는 사회주의 우파세력인 사회민주당 세력을 포괄하며 자본주의의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 간다. 일부 산업이지만 잉여가치의 원천인 생산수단을 국가가 소유함으로써 국가가 유효수요를 창출, 자본주의 고유 모순인 과잉생산과 과소소비, 이로 인한 공황을 방지 코저 한다.

국가가 국채발행과 세금 징수를 통해 이윤이 나지 않거나, 막대한 초기비용이 들어가는 석탄, 석유, 철강, 전력, 철도, 전화 등 국가 기간산업을 국유화한다. 이를 통해 사적자본의 이윤추구를 용이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이를 이용하는 대중들에게도 저렴한 사회적 공공서비스를 제공, 소비를 활성화 한다.

또한 주거, 의료, 교육 등에 대한 사회복지 서비스를 제공, 국가가 최소한의 복지를 제공함으로써 체제를 인정하는 효과와 함께, 노동력의 재생산비(사회적 임금을 억제)를 저렴하게 유지해 줄뿐 만 아니 양질의 노동력을 공급해 준다. 이런 노동력을 통해 유효수요를 늘려나간다. 이렇게 전후 자본주의는 1970년대 중반까지 최고의 호황을 누리며 발전을 한다.

 

 

그러나 케인주주의는 노동의 소외를 유발하는 단순반복노동의 포드주의적 생산방식의 한계와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를 제어하지 못했다. 케인즈주의의 유효수요 창출은 그에따른 국채의 발행과 과중한 세금징수가 필연적이었다. 유효수요 창출을 위한 세금 등은 거꾸로 기업의 이윤을 제약, 참을 수 없을 만큼 이윤율이 하락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또한 필연적으로 국가가 돈을 풀어대니 시중의 자금이 항상 넘쳐나는 인플레이션이란 고질적인 병폐를 불러올 수 밖에 없는 한계를 노정했다. 경제가 잘 나갈때는 인플레이션도 문제가 되지 않지만, 반면 74년의 1차 오일쇼크 같은 사태가 왔을 경우는 경기침체 속 물가인상이라는 초유의 스테그플레이션에 직면하게 됐다.

 

 

1960년대 서유럽, 일본 등의 경제 회복으로 인한 과잉생산, 과잉경쟁이 다시 촉발한다. 서유럽과 일본 등은 경제 회복에 따라 미국과 자유경쟁으로 나간다. 유일한 기축통화인 달러를 발행할 수 있는 미국은 사회주의 확산을 막기 위한 대외원조를 위해, 베트남전에 따른 전비 조달을 위해 달러를 발행한다. 이로써 1온스=35달러라는 금태환제가 위협받게 된다. 이 공식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총 금의 보유량과 달러보유량이 같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저런 이유로 달러를 발행한 미국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달러를 보유한 유럽국가들은 달러를 금으로 환전해 줄 것을 요구한다. 달러 투매현상이 일어나고 금의 투기적 매입 사태가 발생한다. '금 가격'의 폭등에 따라 미국은 보유금을 시장에 방출함으로써 '금의 가격'을 '1달러=1/35온스의 금'이라는 '공정가격' 수준으로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한계치에 다다르면서 결국 자유금시장의 달러화 가치 안정정책을 포기하고, '금의 시장가격'은 시장에서 형성되는 대로 방치, 1971년 8월 15일 미국의 닉슨의 "특별성명"을 통한 '금-달러 교환' 정지로 구 IMF를 중심으로 한 브레튼우즈체제는 붕괴한다.

 

 

케인즈주의 하에서 노동자들은 투쟁을 통해 자본진영으로부터 주거, 의료, 교육 등 사회보장제도, 공공부문을 통한 공공서비스 제공, 노사정 사회적 합의주의 등을 쟁취한다. 이는 노동자 계급의 투쟁의 성과물임과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자본-임금노동'이라는 착취관계를 안정화/영속화시키려는 자본의 대응이었다. '사회적 합의주의' 역시 투쟁의 산물이었으나, 이후 노동자계급의 상층부를 관료화 시켜내고, 회유/매수하는 수단으로, 노동자계급의 투쟁력을 무력화시키는 기구로 전락시켰다.

전투성을 상실한 서구유럽의 노동자 계급과 사민주의 정당들은 신자유주의의 물결 앞에 힘없이 무릎을 꿇어 버릴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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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08 15:04 2010/01/08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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