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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쿠니 참배는 일본의 새로운 국가 건설 전략" | ||
[이영채의 일본사회운동](4) - 일본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 ||
이영채 / 2005년10월18일 18시23분 | ||
고이즈미 총리가 17일 빗속에 다시 야스쿠니를 참배하였다. 5년 연속 참배이며, 선거 승리의 기분이 남아있는지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고이즈미가 야스쿠니를 참배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새로운 것도 아니고 언제나 하고 있는 일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한국의 일반시민들 의식 속에 당연한 것처럼 자리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치권은 한일정상회담을 연기 운운하는 등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런 불만의 표현이 일본의 현재의 방향성을 정확히 판단하고 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야스쿠니에 가는가 가지 않는가라기 보다는 야스쿠니 라는 곳이 어떤 곳이고, 야스쿠니는 무엇을 해왔고, 또 야스쿠니는 왜 아직도 문제를 가지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국립추모시설로 대체하라, 전범A급을 분리하라 라는 말 등은 야스쿠니신사의 근본적인 문제해결과는 거리가 멀다. 야스쿠니는 메이지 천황제가 존재할 때부터 존재해왔고, 전후 일본이 패망 이후에도 천황제는 상징천황으로 야스쿠니는 정교분리의 기만적인 원칙으로 그대로 유지해왔다. 이는 전후 일본의 역사인식이 왜 이중적인 역사관이 되었는가를 이해하게 해 준다. 야스쿠니는 쉽게 말하면, 국가를 위해 죽은 영혼들을 기리는 곳이다. 메이지국가 이후 천황제가 등장하여 천황을 위해 죽은 영혼들을 초혼제라고 하여 제례를 지어왔으며, 천황과 야스쿠니는 이것을 [국체]라는 이름으로 유지해왔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의 가미가제특공대들이 천황을 위하여 유서를 남기고 죽은 것은 이들의 죽음이 미국의 침략을 막기 위한 것도 아니고, 자신의 죽음이 전쟁을 멈추게 할 것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죽은 것도 아니다. 그들이 죽은 것은 전쟁과 평화와는 거리가 먼 천황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에 의미가 있었다. 북한식으로 말하자면 [수령결사옹위정신][총폭정신]이다. 일부 크리스챤들이 야스쿠니에서 자신들의 아들이나 남편의 합사를 분리해 줄 것을 요청하지만, 야스쿠니는 그것을 거부한다. 헌법재판소도 야스쿠니의 합사원칙에서 보는 한에서는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판결을 한다. 왜냐하면 야스쿠니는 국가를 위해서 죽은 영혼을 제사지내는 곳이고, 죽은 병사는 강제적으로 자동적으로 야스쿠니에 합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택권이 없다. 합사될 선택권도 분사시킬 선택권도 가족에게 없다. 만약 한 병사의 영혼을 분사시킨다는 것은 야스쿠니 전체의 존재방식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다. 야스쿠니에는 조선인이지만 일본인으로서 싸운 사람들, 또는 조선인이지만 일본인 전범으로서 사형을 당한 영혼들이 있다. 이들은 야스쿠니에 있는 한 후손들은 친일파의 불명예를 떨쳐버릴 수 없으며, 유가족들은 야스쿠니에서 분사시켜줄 것을 줄기차게 요구하지만, 야스쿠니의 입장에서는 이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이유가 되었던 단 하나의 영혼의 분사는 야스쿠니의 기본이념을 해치고 야스쿠니 만이 아니라 소위 [국체]라는 것을 붕괴시키기 때문이다. 일본이 패전에 직면하여 천황제와 야스쿠니를 남기기 위하여 연합군과 수많은 협상을 한 이유는 바로 이 [국체]를 보존하기 위함이었다. 천황제와 야스쿠니는 동전의 양면처럼 존재한다. 이는 천황제의 폐지없이 야스쿠니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천황을 위해서 죽은 병사들, 또는 자신이 정말로 천황을 위해서 죽었다고 볼 수 없는 증명되지 않은 수많은 영혼들까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천황을 위해서 죽은 영혼으로 인정되어 야스쿠니에 합사되어있다. 유가족 중에서 자신의 형은 동생은 남편은 절대 천황를 위해서 죽을 사람이 아니다 라고 분사를 요구한다. 이들을 평화유가족회라고한다. 하지만 이들의 영혼의 구원은 일본의 [국체]개념으로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오히려 천황을 위해서 죽은 영혼들이 있기에, 전후 헌법에 명시된 정교분리원칙으로 야스쿠니는 일반종교단체가 되었으나 천황은 이곳을 전범들이 합사되기 전까지 정기적으로 방문하였다. 자신을 위해서 죽은 병사들의 혼을 제사지내는 곳에 천황이 없는 것은 야스쿠니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범이 합사된 이후 지금은 아시아 국가의 반발을 고려하여 천황이 방문하지 않고 있지만, 단지 중단되어있을 뿐이다. 천황의 가족들은 매년 봄과 가을 대제에 참여하고있다. [황족이 내리는 곳]이라는 푯말이 야스쿠니에는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다. 이처럼 천황은 참배를 못하더라도 야스쿠니 입장에서는 일본의 총리의 공식참배는 최소한 필요하였다. 일본총리를 야스쿠니 참배를 시키기 위하여 일본의 우익들은 끊임없는 노력을 하였고, 특히 보수우파를 대표하여 마침내 나카소네가 공식적으로 참배를 하였다. 하지만, 그는 한번의 방문으로 아시아 각국으로 부터 격한 반발을 샀다. 나카소네는 야스쿠니라는 곳을 일본인의 맥락속에서 이해하고 방문했지만, 아시아 각국에서 그렇게까지 분노할 줄을 몰랐다. 역사공부를 했다. 그랬더니 야스쿠니는 아시아 각 국에서는 침략전쟁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고 그는 다시는 방문하지 않았다. 역사인식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된 것이다. 하지만, 고이즈미는 그것과는 달랐다. 그는 역사인식에서는 야스쿠니를 방문하지 않았다. 수상이 되기전에 한번도 야스쿠니를 방문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것을 반영한다. 그런데 왜 고이즈미는 수상이 되고나서 야스쿠니를 매년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제 야스쿠니는 역사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의 새로운 국가건설을 위한 하나의 전략적인 측면에서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일본의 새로운 국가건설 전략이라는 것은 간단히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는 전쟁에 참여하고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론, 말이 보통국가이지 침략국가를 의미한다. 둘째는 글로발리즘의 세계적 흐름에 뛰어들 수 있는 전통적인 상업적 리더국가론이다. 최근의 유행하는 말을 붙이자면 신자유주의 국가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전자는 현재 일본에서 유사법안, 자위대파병법안 등과 관련되어있다. 보통국가의 시대라는 것은 자위대가 헌법에 [자위군]으로 이름이 명시되고, 미국이 원하는 전쟁에 영국처럼 자유롭게 집단자위권이라는 이름으로 참여할 수 있는 시대를 의미한다. 말이 집단자위권이지 선제공격을 하는 미국의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침략국가의 권력을 갖는 일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국가가 전쟁을 하게되면 필요하는 것이 몇가지 있다. 1)공교육장에서 전쟁에 대한 지지, 동원, 피난처의 역할을 해주는 것이다. 2)지방자치단체에서 전쟁참여의 물류유통수단을 제공하는 것이다. 3)죽은 병사들을 묻을 수 있는 국가적 시설이 필요하다. 1)을 위해서 보수우익은 소위 [교육기본법]을 개정하고있다. 국기/국가를 제정하였으며, 이를 각 교육현장에 강요하고있다. 일교조가 있어서 이것들을 저지당했던 우익들은 일교조를 약화시키고, 이들을 해고하면서 교육현장에서 이런 교육기본법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하나둘씩 제거해왔다. 2)를 위해서 일본은 지방자치법과 노동법을 개정하고 있다. 항공노조, 항운노조, 지자체의 공무원들은 전쟁물자운송에 협력하지 않으면 처벌을 받게된다. 3)을 위해서 야스쿠니신사를 국가적 시설로 다시 바로 세우고자 한다. 역사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적 전략의 가장 필요한 시설로 야스쿠니를 다시 등장시킬 필요가 있으며, 수상이 이곳을 참배하는 것은 일반인들에게 [국체]로서의 야스쿠니를 각인시키는 것이다. 인기가 있는 고이즈미가 야스쿠니에 가는 것은 [감개무량]할 뿐이다. 특히 유사법안으로 혹시 이라크 등 지에서 죽을지도 모르는 일본 병사들을 야스쿠니에 묻지 않으면 야스쿠니는 다시 존재의미가 없어진다. 이들이 서두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둘째는 고이즈미는 신자유주의자라는 것이다. 그는 정확히 말하자면 극우도 아니고 친미주의자도아니다. 고이즈미는 명확히 민영화노선을 추진하는 신자유주의자이다. 그는 한국에서의 구조조정이라는 말대신 [구조개혁]이라는 단어를 쓴다. 구조조정과 구조개혁은 의미가 너무나 다르다. 우정민영화는 내용적으로 반민중적이고 반개혁적인 조치이지만, 고이즈미는 [우정 민영화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그것도 [국민투표]권이 없는 국민들에게 국민투표라고 주장하였다. 개혁인가 반개혁인가. 단순한 질문에 실제 다수의 국민들은 민영화반대의 투표행위를 하였다. 하지만, 소선거구제에서 실제 당선자수는 고이즈미측이 일방적으로 많았다. 소선구제도의 모순이지만, 그는 이런 선거제도를 전략적으로 잘 이용한 것이다. 각 선거구마다 20만표를 가지고 있는 공명당을 껴안으면서 각 지역에서 대부분 4-5만 표차로 자민당후보가 당선되것이다. 부시, 고이즈미, 노무현...이들의 공통점은 선거에서 살아남았다, 말을 단순하게 한다(대통령 못해 먹겠다), 진정한 개혁보다는 선거전술에 능하다는 것이다. 선거의 결과는 다수의 침묵을 낳고 말았다. 진보적인 양심의 침묵의 나선이 최고의 바닥을 향해 치닫고 있는 것이 일본의 현실이다. 고이즈미가 친미주의만을 내세운다면 국제연합에 적극적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다. 미일동맹조약만을 유지하면 되는 것이다. 미국의 영향력이 약해져가는 국제연합에 들어갈 필요가 없다. 하지만 고이즈미는 국제연합에 들어가서 일본의 국가주의를 인정받고 싶어한다. 쉽게 말하면 야스쿠니를 들고 안전보장이사회의 일원이 되겠다는 것이다. 미국은 미국이 원하는 전쟁에 참여만 해주는 일본이라면 국제연합의 이사가 되는 것에, 야스쿠니를 갖는 것에, 헌법9조를 폐기하는 것에 전혀 반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조건들이 안 갖추어져 일본이 미국의 전쟁에 대한 지원이 안되고, 아시아에서 일본이 미국과 멀어지는 이유라면, 미국은 일본이 원하는 모든 것들을 지원해 줄 태세가 되어있다. 일본이 국제연합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글로발리즘시대의 신자유주의자로서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갖겠다는 것이다. 일본이 지지하는 것은 미패권주의가 아닌 일본의 영향력의 확대이다. 이것이 일본이 주장하는 국제연합개혁론의 본질이다. 현재 일본의 보수우익은 새로운 전략으로 나서고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터 전략이 없는 일본의 극우보수주의자들이 국가적 전략을 갖게 되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의 보수우익의 전략적인 기획이 시작된 것은 94년 무라야마 사회당정권과의 연합정권으로 등장했을 때이다. 93년 호소카와정권의 신당의 바람속에서 자민당은 55년 이후 처음으로 야당으로 전락하였고, 일본의 소위 55년체제가 붕괴하였다. 언론은 연일 호소카와를 추켜세웠으며 자민당은 참패하였다. 하지만 자민당은 야당으로서는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40년간 단 한 번도 야당의 경험이 없는 당으로서는 당연하였다. 결국 자민당은 당 해체의 위기에 직면하였고, 결국 사회당을 선택해서 당수를 주면서까지 다시 정권에 복귀하였다. 일본의 아시아에 대한 침략전쟁을 인정하고, 종군위안부에게 사죄를 하였던 호소카와 내각을 사회당이 자민당과 손을 잡고 타도한 것이다. 사회당의 이때의 뼈아픈 전략적 실패는 이후 일본의 전후 모든 운동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자민당의 우익들은 이렇게 살아남은 천재일우의 기회를 반면교사로 삼아 두 번 다시는 권력을 뺏기지 않겠다는 각성을 하였다. 94년 이들에게는 새로운 전략이 필요했다. 자민당은 먼저 전후 50년 역사를 총괄하는 팀을 만들었고, 이들은 [자학적인] 좌파의 역사관에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보수의 역사관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이들의 역사의 총괄은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들 필요성을 느꼈고,현재 문제되고 있는 새로운 역사교과서 팀이 당시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교육현장의 일교조를 철저히 박살낼 전략이 필요하였으며, 일본국가의 국체를 근본적으로 지켜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한나라당이 [구국운동을 하겠다]라는 말이 이해가 간다. 이들은 야스쿠니를 다시 세우기 시작하였다. 야스쿠니를 참배하는 국회의원의 모임이 만들어졌다. 언론을 근본적으로 해체할 필요가 있었다. 이들은 진보적인 저널리스트들을 다 지방으로 보내버리거나 주요 포스트에서 해고시켰다. 다시는 권력을 빼앗기지 않기 위한 우익의 전략은 자민당 내부에서도 내부의 온건 보수파들을 잘라내는 역할을 하였다. 결국 덜 온건파인 모리파를 중심으로 전통 보수파들을 다 내몰았다. 또한 모리보다 더 효과가 있는 고이즈미를 등용시켰다. 우정민영화를 통해 전통적인 보수들은 다 백기를 들었다. 이제 신자유주의자와 극우만세력만이 자민당에 남아있고, 이들이 새로운 일본의 신세력들로 등장하고 있다. 만화영화 건담의 [뉴타이프]인것이다. 전후 50년 사회운동의 도덕성과 역사성을 망각한 사회당의 권력욕이 전후 일본의 모든 민주주의의 축적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이당수가 남은 [도이의 아이들]을 모아 다시 사민당을 만들었지만 이미 세상은 이들을 외면하였다. 한번의 선택의 실패가 일본의 운명을 좌우한 것이다. 한국에 잘 알려진 와다하루키 선생은 이 사회당 전략론에 참여한 일원이었지만, 그는 이러한 역사인식의 패배를 아직껏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는 그 기간에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운동의 역사가 그의 편이 아니었던지, 그의 운동의 역사가 잘못되었던지 둘중의 하나인것 같다. 정당의 전략적 선택의 방식에 있어서 일본사회당의 경험은 한국의 열린우리당과 민노당에게도 남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고이즈미를 좀더 전략적으로 보는 눈이 필요하다. 역사적 감정만 가지고 일본을 접근하는 것은 이제 진보운동의 정세분석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일본의 보수우익이 이러한 전략적인 행보를 하는 상황속에서 한일민중연대와 진보적인 시민연대는 어느 시기 어느 때보다 중요하고 필요해졌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극우성에 관심을 갖고 일본내의 진보적 사회단체의 생존과 저항의 몸부림을 모른 채 해서는 안 된다. 70년대, 80년대 일본의 사회운동은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희생을 하며 연대해왔다. 이제 우리가 그 빚을 돌려줄 시대가 되지 않았는가 싶다. |
카마타 사토시가 본 산리즈카 내각 결정 40년 | ||||||||||||||
[카마타 사토시의 산리즈카 40년](1) - 농민 고이즈미 히데마사 씨 | ||||||||||||||
이영채/카마타 사토시(작가) / 2006년07월11일 16시32분 | ||||||||||||||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 투쟁이 한참이다. 국민의 국가라는 기구가 농민의 생존권인 땅을 일방적으로 빼앗고 군사기지를 만드는 국가정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토지를 빼앗긴 농민, 지원하는 활동가들의 투쟁은 무엇을 지향해야 할까. 평택의 미군기지 확장과 강제적인 토지 수용은 국가의 중요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일방적으로 나리타 공항건설을 강행한 일본의 국가정책과 유사한 점이 많다. 산리즈카의 농민들은 농업을 지속하는 것이 공항건설의 완성을 막는다는 신념으로 40년에 걸쳐서 다양한 유기농법과 시민네트워크를 형성해 오고 있다. 내각 결정 이후 40년 후의 현재의 산리즈카를 고찰하는 일본사회운동의 르뽀라이터 카마타 사토시 씨의 경험을 통해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 투쟁의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는 장이 되었으면 한다. 이 기획은 6회에 걸쳐 연재한다. - 역자 연재를 시작하며 정부가 선을 그은 [나리타공항부지] 내에는 지금까지 민가가 있고 사람이 살고 있으며, 밭을 경작하고, 가축을 키우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비정상 상태를 언론은 보도하려고 하지 않는다. 국가정책 실패의 전형적인 예임에도 불구하고.
공권력에 의존하여 공항이 강제 건설되고, 비행기의 이착륙이 계속되고, 하늘에서부터 땅을 찢을 듯한 소음이 지축을 뒤흔들어도 예전과 전혀 변함없는 것은 농민의 살아있는 생활이다. 인간이 생활하고 있는 이 곳을 이 나라의 관료들은 주민들과 단 한마디 상의도 없이 자기들 마음대로 [공항으로 사용한다]고 [결정](1966년7월, 내각결정)하였다. 인간의 생활 등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비정하고 냉혹한 결정이었다. 마치 식민지의 개척자들과 같은 [민주주의 국가]의 정치가들이었지만, 40년이 지난 지금 방향을 잃고 허둥대고 있는 것은 오히려 [민주주의 국가]이다. [긴급한 국가적 사업] 등을 운운하며 농민의 생활을 위협하며 내쫓으려고 했던 [신도쿄국제공항] 건설 사업은, 40년에 걸친 저항에 직면하여 지금까지 완성되지 못하고 있다. 한때 대규모 전투경찰을 동원한 공항공단은 [강제수용]이라는 명분으로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는 주민들의 생활을 빼았았지만, [국가적 폭력]을 강행한 악명 높은 [공항공단]도 지금은 국가공적기관에서 떨어져나와 [나리타 국제공항회사]라는 일개 민간기업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땅에 살고있는 인간들인 농민과 완전히 대등한 관계에 있는 것이다. 민가의 코앞까지 아무렇지 않게 활주로를 건설하고, 인간의 존엄을 무시하고 있는 민간기업은 민사소송의 대상이다. 생활침해, 인격권의 부정, 소음범죄, 매일매일의 정신적 압박 등 공항공단은 이러한 것들을 즉시 중지하고 사죄를 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이 회사는 2002년 월드컵 개최를 명목으로 아직 완성되어 있지 않은 활주로를 [잠정활주로]라는 미사여구를 붙여 건설을 추진하였고, 활주로의 맨 끝에 주민이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운영하였다. 우리들은 [잠정활주로라고 한다면 그 기간이 종료한 후에 즉시 활주로를 제거한다라는 약속이 성립한다]라고 주장한다. 원래 [긴급한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된 공항이기에 공항자체가 [잠정공항]이었다. 관료와 정치가들은 틈만 나면 [국가백년의 대계] 운운하지만, 결국 그러한 장엄한 설명도 없이 그들은 도둑고양이와 같은 비열한 수단을 사용하였다. 남쪽 확장이 저지되자 잠정활주로를 북쪽으로 더 확장하려는 이번 계획도 지금까지 공항공단이 사용한 위계적인 방식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다시 사용하고 있다. 공항회사의 사장이 예전의 운유성 차관이었기에 이런 방식은 몸에 배었는지도 모르지만 더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이런 방식을 기정사실화하면서 뻔뻔하게 확대하려는 움직임이다. 우리들이 산리즈카 투쟁에 관여해 온 것은 국가의 말도 안 되는 불합리한 정책에 대한 농민들의 분노와 저항에 공감하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그러한 분노가 땅과 함께 존재한다면 이들 중 남아있는 최후의 한사람까지 지원하는 것이, 이 운동에 관여해 온 우리들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앉아서 농성을 하면 쓰레기가 잘 보인다 すわりこむことは ごみの低さに ちかづくことだ 농성을 한다는 것은 쓰레기의 위치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일본반정치시집(日本反政治詩集)](무카이다카시,1973)에 수록되어 있는 마츠우라 히데마사의 짧은 시이다. 33년전에 비폭력 저항운동 속에서 쓰여진 것이다. 그 연장선으로 그는 산리즈카에 왔고, 이후 이곳에 이주하여 아내 미요 씨와 함께 [빈농]이라고 불리는 고이즈미 요네 씨의 양자가 되었다. 그 이후, 공항에 둘러싸인 [토호부락]에서 농민으로서 살고 있다. 젊은 시절의 투철한 이 시에는 그의 냉철한 시선이 느껴진다. [마츠우라 히데마사]는 자신의 시를 배반하지 않고 산리즈카에서 지금까지 농성을 하고 있다. 토호, 헤타, 요코보리 마을 등 두꺼운 콘크리트의 활주로에도 부서지지 않고 지금껏 어떻게든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이들 부락에는 예전과 같은 아늑한 정취의 안정된 집들은 볼 수 없다. 비행기의 소음 때문 만은 아니다. 풍경이 전혀 달라져서 예전의 기억을 살릴 수 가 없다. 전혀 다른 풍경에 불안함마저 감돈다. 미로를 밟고 있는 것만 같다. 사람이 살지 않으면 나무와 풀도 함께 기력을 잃어버린다. 고촌 특유의 밀집한 수풀, 풍요로운 들판, 파란 싹이 돋아있는 논, 울창한 대나무 숲 등은 불도우저로 파헤쳐졌고, 콘크리트의 벽과 철조망이 둘러쳐진 폭력적인 풍경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풍경의 한 가운데 가차없이 쇠파이프가 박아지고 이어진 철판의 연결망이 병풍처럼 풍경을 차단하는 곳이 있다. 누군가로부터 방어를 하기 위한 것이지만, 철판의 일부가 떨어져나간 좁은 폭의 길을 따라 들어간 곳에 돌연 등장한 것이 토호신사였다. 예전 웅장한 산림을 형성하고 시원한 그늘을 만들고 있던 신사의 바로 옆까지 활주로와 유도로가 뻗어나와 신사는 완전히 공항에 포위되어 있다. 부락사람들의 공유재산으로 봄과 가을에 마을 축제가 열리고, 언제나 농업을 하는 경건한 마음을 유지하면서, 아이들에게는 절호의 놀이터였던 이 곳 신사였다. 하지만, 주변의 큰 나무들은 공항회사가 항공운행의 장애라고 주민들과의 상의도 없이 한그루도 남기지 않고 무단으로 베어버렸다. 신을 경멸하는 행위이다. 신사 입구의 토리이문과 제사단은 몸통 채 짤려 무참하게도 벌거숭이가 되어버렸다. 경내에는 직사광선이 내리쬐고, 풀들은 다 말라서 죽어버린 이상한 공간이 되었다. 천벌받을 공항회사의 악행이 그대로 천하에 드러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러한 무참한 행위를 태연하게 할 수 있을까. 신사는 활주로의 연장을 저지하기 위한 것처럼 바로 남쪽에 있지만, 그 주변에는 고이즈미 씨, 시마무라 씨, 히노케 씨, 시토 씨, 하기하라 씨, 이시이 씨의 집과 밭이 펼쳐져 있다. 이외에도 락쿄(염교)공장과 공동출하장 등이 여기저기 만들어져있고, 어떻게든 매입되지 않고 근근히 생활하고 있다. 이것이 내각결정 40년 후의 현실이다. 이처럼 무자비한 공항건설은 들은 적도 없다.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경우이지만, 이러한 모습은 정치가들이 주민의 의사를 무시한 일방적인 결정으로 [부지예정지]의 주민들을 분노시킨 결과이다. 농민이 지렁이가 되다 고이즈미 씨는 주변의 토미사토쵸의 새롭게 구입한 밭의 작업장에 있었다. 마침 점심시간이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밭 한가운데 놓여있는 나무 테이블에 둘러앉아 사 온 도시락을 풀었다. 고이즈미 씨는 호박된장국을 만들어 주었는데, 막 딴 호박이어서 매우 달고 맛이 있었다. 특히 [산숙의 야채찌게]는 일품이었다. 술과 간장을 냄비에 넣고, 산숙을 넣어 약한 불로 조금씩 끓인다고 했는데 향기롭고 혀끝을 쏘는게 일품이었다.
[40년이라면 스무 살의 자식이 60살이 됩니다. 최초는 10년 정도로 공항이 완성될 예정이었지만 이것이 아직까지도 완성되지 못하고 있는데, 말하자면 실패한 정책입니다. 하지만 정부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50년 걸려서라도 하겠다고 하는 것은 자기 하고싶은 대로 마음대로 하겠다는 것이지요. 더욱이 40년간 이곳에 있던 사람에게 더욱 압력을 가하고 있어요. 이것은 더더욱 용서할 수 없어요] 예전부터 별로 말수가 없던 고이즈미 씨이다. 89년에 [백성이야기]라는 책을 냈다. 그리고 15년이 지나서는 [지렁이 이야기]를 출판하였다. 이 책의 말미에는 [백성이 지렁이가 되었다]라고 쓰여있다. 떨어진 낙엽들을 모아서 그속에 숨어서 살던 시대가 있었다고 한다. [수정 개항]이라고 불리면서 잠정적으로 공항이 [개항]된 것은 78년 5월. 그 이후 우리들의 이곳 방문도 뜸해졌다. 처음에는 [나리타공항]을 거부하고 오사카 공항에서 해외에 나가기도 했지만, 오랫동안 지속되지는 않았다. 지금은 조금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나리타에서 비행기를 탄다. 왠지 친구의 머리를 짓밟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 말이다. 고이즈미 씨도 그 친구 중 한사람이었다. 고이즈미 씨와 이야기를 하면서 의외였던 것은 [나는 응원자이지, 당사자가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나와 고이즈미 씨는 청년행동대의 멤버로서 함께 만난 적이 많았기에 항상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느꼈는데, 그런 말을 듣고 보니 고이즈미 씨도 지원을 하러 온 사람중의 한 명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35년간이나 살면서도 아직까지 자신을 [응원자]라고 말한다. 스스럼없는 순수한 분이다. 당시 고이즈미 요네(고이즈미 히데마사의 양아버지) 씨는 강제행정집행으로 자택에서 끌어내어졌다. 도깨비처럼 휘날리는 머리카락의 모습으로 싸우는 유명한 사진이 남겨져 있다. 양자인 히데마시시도 역시 가처분으로 토지를 빼앗겼다. 이 두 사람의 토지를 강탈한 것은 산리즈카 투쟁을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청년행동대의 이야기를 했을 때, 오키나와의 킨만의 CTS반대투쟁에 관여한 청년에 대해서 고이즈미 씨가 말했다. 나도 만난 적이 있었지만 오키나와의 경제적 자립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던 그 청년은 반대운동 후에 귤의 한 종류인 탕깡을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그 탕깡을 일년에 한 번씩 나도 받고 있는데 예전의 청년행동대(지금은 벌써 60살이 넘었지만) 등 30명에게 지금까지도 보내고 있다. [탕깡을 보내고 한 번 만나서 돈을 수수하는 것 뿐이지만, 그래도 대충의 상황은 다 알아요. 여러 가지 회고를 서로 이야기하는 것은 앞으로도 몇 년 후가 되겠지요. 70정도 되었을 때] 라며 그는 웃는다. 관료의 무책임과 [싸우는 야채] [내륙의 토지에 거대한 공항을 만들려고 했는데 토지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아무데나 만들지 않고, 좀더 환경에 맞는 공항을 만들 때까지 이 공항을 이렇게 한다 등등 정부의 청사진이 있다면 지금의 이런 압력도 그때까지다 라고 이해할 수 있다. 당장 부숴라 라고도 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은 채 관료들은 이 하늘 어딘가에서 발 쭉뻗고 생활하고 있다. 무책임이다. 고이즈미 씨는 우리들을 밖으로 불러서 퇴비장으로 안내하였다. 작업장 앞은 잘 정돈되어있고, 반대편의 수풀까지 밭이 이어져 있었다. 넓은 밭을 조망하고 있으면 여유로운 기분에 젖어든다. 바로 앞에는 5미터, 10미터의 넓이로 땅을 높여 세운 것처럼 낙엽의 퇴비가 쌓여있다. 이외에도 지붕으로 썼던 억새풀을 발효시킨 퇴비와, 낙엽에 쌀껍집을 섞은 퇴비 등이 작은 산처럼 쌓여있다. 그 위에 덮어씌운 감자 등을 넣은 종이 봉포를 들어서 안을 털어보니 지렁이가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떨어져 나온다. 검은 미세한 알들이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퇴비를 손으로 부스면서 냄새를 맡아보면 어렴풋이 숲의 냄새가 술술 흘러나온다. 고이즈미 씨는 먹을 수 있어요 라면서 싱글벙글 미소를 띄운다. 오래된 국화주를 저장하고 있는 술창고처럼, 년대별 와인의 향기처럼 퇴비의 향기에 심취된 채 우리들은 고이즈미 씨의 뒤를 따라 걸었다. 73년에 양자가 되어서 토호부락에서 생활을 시작하였을 때, 퇴비 만들기는 일시 중지상태였다. 당시 밭의 구석구석에는 호리코시 씨, 시마무라 씨, 야나카와 씨 등이 만든 퇴비가 조금씩 남아 있었다. 그것을 보고 고이즈미 씨도 자신이 만들어 보기로 하였다. 북해도의 개척부락에서 부친이 만들고 있던 퇴비는 끈적끈적해서 좀처럼 깨끗하게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산리즈카에서 시작한 퇴비 만들기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산리즈카의 농업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이 공항반대 투쟁을 지속시킨다 라는 토론이 시작되고 있었다. [미생물농법회]가 결성되고, 거기에서 만들어진 야채가 [원팩]운동으로 도시에 사는 운동지원자들에게 직송되었다. 우리 집도 시작단계부터의 [회원]이다. 그 이후 가족의 건강은 산리즈카의 유기야채에 의해서 유지되어 왔다. 20년간 유기재배를 한 후 고이즈미 씨는 97년부터 [순환농업]을 시작하였다. 이것에 대해서 고이즈미 씨는 이렇게 쓰고 있다. [지금부터 8년 전 좀더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농업, 수입곡물이나 수입비료에 의존하지 않는 순환형의 유기농업의 길을 추구하면서, 나의 농법을 대폭 수정하였다. 그때까지 사용하고 있던 유기질비료의 사용을 그만두고, 동시에 다이옥신 발생원의 하나가 되고 있던 농업용 비닐재료, 폴리필름 자재의 사용도 그만두었다. 그리고 시행착오의 끝에 도달한 것이 현재의 낙엽과 벼껍질로 야채를 재배하는 방식이다. 여기까지 이르기에는 화학물질 과민증의 어느 사람과 만나게 된 것이 큰 영향을 미치었다. 그 사람이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야산감자, 야성의 멧돼지고기 등으로, 즉 생산자가 결코 농약 등을 사용하지 않아도 퇴비나 유기비료 안에는 화학물질이 혼합되어 있었던 것이다](헤럴드아사히, 06년2월9일) 야채를 생산하는 흙을 먹을 수 있을 정도가 되어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질문이 시작되었다. 고이즈미 씨의 야채는 당근, 배추, 무우, 양파 등 모두 싱싱하고 그 속에 어떤 힘이 감돌고 있는 것처럼 신선함을 느낄 수 있다. 현재 약 200세대와 계약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나는 이것을 보고 간만에 [싸우는 야채]라는 말을 생각했다. 이것이야말로 산리즈카 투쟁이 만들어낸 새로운 슬로건이었던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출처] - '노동정보' 698호. 2006년 7월 1일 [번역] - 이영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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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 반대, 위선을 거부하는 투쟁 | ||||||||||||||
[이영채의 일본사회운동](6) - 야나가와 히데오 씨에게 듣는다 | ||||||||||||||
이영채/카마타 사토시(작가) / 2006년07월11일 16시39분 | ||||||||||||||
오랫만에 산리즈카를 방문한 것은 '내각결정'후 40년이 지났음에도 아직 농민과 주민이 직면하고 있는 '잠정공항'의 실태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방문 직후인 7월 상순, '공항공단', 아니 '공항회사'가 '잠정B활주로'의 남쪽으로의 확장을 중지하고, 북쪽으로 퇴각(방향전환)하는 '시설변경허가신청'을 국도교통성에 제출한다는 신문보도가 있었다. 40년 전에 세운 사업계획이 아직까지 완성되지 못한 것은, 말하자면 시효가 끝났다고 할 수 있는데 <아사히신문>(6월26일)조차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공항회사는)2009년 말의 운영개시에 맞추기 위해서는 더 이상 신청을 지연시켜서는 안된다고 판단하고 있다. 국도교통성은 올 가을에는 허가할 것으로 보인다" 당국은 자기마음대로 '운용개시'의 일정을 결정해, 게다가 "지연시켜서는 안된다"라고까지 말한다. 이들은 한결같이 '긴급한 국가사업'이라고 협박이지만,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서, 이전 호에도 쓴 것처럼 공항건설도 단순한 '민간사업'에 지나지 않는다. 주민의 생활과 회사의 사업은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의 관계가 아니고 완전히 동등한 관계에 서로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사히 신문의 기자는 "국도교통성은 올 가을에는 허가할 예정이다"라고까지 쓰고 있다. 아직 신청도 하지 않은 단계인데, 왜 먼저 앞서서 '허가할 예정이다'라고까지 자기판단을 넣어 기사를 쓸 수 있는 것일까. 이들이 선점을 장악하겠다는 것인가. 감독청이 전혀 기능을 하지 못하고, 공단회사의 눈치를 보는 '허수아비행정국'이라면 그것은 유착임에 틀림없고, 천인공노할 스캔들이기도 하다. 신문이 관청이나 공단회사의 주관적인 요구를 그대로 불어대는 나팔에 불과하다면, 이것 또한 어용신문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이런 행정부, 기업, 언론간의 삼위일체의 타협이야말로 지금까지 계속되어 오고 있는 '나리타 공항'건설의 핵심적인 부정이다. 게다가, 6월28일, 치바지방재판소는 '공항계획부지'내에 있는 공유지의 매각을 결정하는 판결을 하였다. 이것은 재판소도 역시 어용기관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어찌 이런 것들을 보고 이 나라가 법치국가라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아직까지 싸우고 있다 야나가와 히데오(58) 씨의 아버지는 초기반대동맹의 부위원장이었다. 또한, 작은 체구에도 명랑하고 어디에 있어도 눈에 띄는 어머니 하츠에 씨는 '야나가와의 엄니'라고 불리었던 매우 유명한 분이셨다. 4형제 중 장남인 히데오 씨는 '야나'라고 불리며 청년행동대의 중심멤버였고, 체포경력도 가장 많다. 야나가와 씨의 방 안의 벽에는 시바야마쵸의 '슈쿠'부락을 개척하였다,라는 할아버지의 초상화가 걸려있었다. 아버지 시게루 씨는 52세로, 제1차 강제행정집행 전에 돌아가셨다고한다. 이런 이야기를 시작으로 마침내 '신동맹'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의 이야기에 의하면 당시의 실력투쟁(폭력투쟁)은 청년행동대와 지원그룹만에 의해 주도되어진 것은 아니었다 한다. 아버지 세대들이 먼저 남녀불문하고 몸을 던져 싸웠고,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체포되어 있었다. 강제행정집행이 있었을때, 필자는 당시 공해지역, 롯까쇼마을(핵폐기물지역) 등을 돌아다니고 있었기때문에 산리즈카에는 없었다. 필자가 온 이후부터도 체포자는 상당수 있었다. 남녀노소 구별없이 대나무죽창을 들고 기동대에 돌진하였고, 일본의 사회운동중에서 그렇게 많은 체포자를 낳은 싸움은 거의 드물다. 우리들은 토무라 잇사쿠 씨를 시작으로 아키바 데츠, 이시이 다케시, 이와자와 요시이, 아카와 켄 씨 등 낯익은 이들의 죽음을 하나둘씩 손으로 꼽았다. 물론 이들만이 아니라, 동맹원이외에도 청년행동대나 지원자중에서 자살한 사람, 기동대와의 격한 충돌 속에서 살해당한 히가시야마 카오루, 큐슈에 돌아가 사망한 마에다 토시히코, 간암으로 타계한 다카기 진자부로, 후쿠다 카츠히코씨 등도 빼놓을 수 없었다. 당일 필자와 함께 방문한 하야시 코지, 나카사토 히데아키 씨 등도 지원자로서 현지에서 생활했던 사람들이다. 전국의 수많은 노동자, 농민, 시민, 학생등이 자신의 삶의 존재의 의미를 걸면서 이 산리즈카 투쟁에 참가해 왔다. 이 투쟁은 50년대의 반기지투쟁, 60년대의 미츠이미이케 투쟁과 함께 일본의 중요한 저항운동의 하나인데,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울 정도이다.
야나가와 씨에게 있어 산리즈카투쟁은 무엇인가 라며 정면으로 물어보았다. "참으로 시간이 많이 흘렀네요.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아직도 투쟁중이라고 할까요(웃음). 보통사람들은 빨리 끝내버려라, 평온하게 살아가자, 다들 개인이라면 개인이고, 반대동맹이라는 조직도 더 이상은 존재하지 않지 않은가,라고들 말해요" 반대동맹의 한 파벌이었던 '아츠타'파는 해산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상적인 움직임은 거의 없다. 모두가 개인화되었다고 해도, 산리즈카와 시바야마쵸에 남아서, 반대동맹의 경험을 가지고 의식적으로 아직껏 살고있는 사람들도 몇몇은 남아있다.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앞만 보고가는 경우가 있어요. 자신이 한번 결정하면 뒤로 돌아갈 수가 없어요. 지기싫어하는 집안이라서 그런지, 아직까지 그런 고집을 버리지 못했어요. 거기다가 과거의 것을 후회하기는 더욱 싫구요"라며 빙그레 웃는다. 그의 말은 어디 정착할 섬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의 특유의 반어법이기도 하다. 옛날에는 민첩한 소년의 이미지였던 야나가와씨는, 지금은 거의 백발이 되어있다(젊었을때부터, 새치가 많았다는 인상은 있었지만). 생각하면서 이야기하는 것이 그의 특징이다. "과거의 것들을, 현재에 적용하려면 확실히 과거의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겠지만, 별로 생각나는 것이 없어요" 작년여름, 28년전 '나리타공항'의 관제탑을 점거하고 개항을 저지한 죄로 각각 10년(최고는 12년)의 옥중생활을 보낸 피고16인(다른 한 명은 자살함)에게, 국가는 일인당 300만엔의 '손해배상금'을 청구해 왔다. 시효직전이었고, 또한 요즘같은 무금리시대에 5퍼센트의 금리(총액의 절반이상)까지 포함하여 가산한 금액이었다. 이것에 대해서 전국적인 모금활동을 시작하였고, 결국 전액을 모아서 청산할 수 있었다. 이런 전국적인 지지들이 지금까지 산리즈카 투쟁이 높은 열의속에 지탱되고 있는 원동력이다. 최전선에서 싸운 사람이 버림을 받는다면, 운동진영의 도덕성을 문제시해야 하며, 게다가 그들의 뒤를 이어 싸우는 사람들은 거의 나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 같은 지원자는 자신의 결의에 의해서 지원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사자가 극소수가 되더라도 지원해야 한다. 하지만, 야나가와씨처럼, 그곳에 살고 있는 당사자가 역으로 지원자들을 지원하기도 한다. 산리즈카투쟁은 지원하는 사람도 투쟁하는 사람도 자기결정에 기반하여 개인자격으로 참가한 운동이었다. 그것은 대기업 처럼 입사와 함께 이미 존재하는 노조에 가입하여 신분이 보장되는 조직적인 운동(지금은 이런 보장도 되지 못하는 수준에 이르렀지만)과는 달랐다. 나리타공항 건설이 비판을 받아 마땅한 것은 건설을 계획한 정부와 그 땅에 살고 있는 인간이 전혀 대등한 관계로 인식되지 않았고, 권력을 가진자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용지결정'이라는 형태로 일방적으로 통고하고, 기동대를 투입한 폭력에 의해서 그 첫발을 내딛었다는 것이다. 죽은자 만이 아니라 부상자도 셀 수 없이 많다. 더 이상의 확대는 용서할 수 없다 당국과 공항공단이 자기들 마음대로 결정한 '개항일'은, 관제탑점거라는 반대파의 공격으로 2개월간 연기되었다. 그후, 정부는 운수장관과 정부차관을 파견하여, 공개장소에서의 사죄, "수용법은 철회하고, 2기공사는 대등한 입장에서 협의한 후 시작하겠다"라고 확약을 하였다. 이후 93년9월부터 약1년간, 12번에 걸쳐서 운수성, 공항공단, 반대동맹(아츠타파), 학자 등에 의한 '원탁회의'가 열렸다. 이 원탁회의는 정부의 사죄를 전제로 해서 산리즈카 지역을 어떻게 재건할 것인가를 토론하는 것이었다. 66년에 공항건설계획이 발표되고 난 후 25년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정부와 농민이 '대등한 입장'에서 협의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공항문제'의 본질적 내용을 토론하자라는 야나가와씨 등의 제안에 의해 시작된 '원탁회의'는, 반대투쟁을 전면에 내건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내부에서 '배반행위'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야나가와 씨 등은 실력투쟁을 능가하는 적극적인 정치교섭으로 나섰던 것이다. 제1회의 회의에서 반대동맹측은 다음과 같이 제안하였다. 1) "잘못을 저지른 측이 자신의 생각을 버리지않고, 피해를 입은 측에게 양보를 강요하는 것은 사회통념상 용서할 수 없다" 2) "(운수성.공단은) 과거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인정할 것인가, 그리고 앞으로 공항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것은 당사자 책임의 문제이다" 3) "원탁회의에 있어서 최대의 과제는 원래의 BC활주로부지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이다" 4) "(원탁회의) 참가자는 학습에 의해 인식을 높이고, 공통의 가치관인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지역재건의 로드맵을 명확하게 하는 장으로 만들어야 한다" 주되게는 '다음 세대에게 전달하는 해결의 방식'이었다. 정부측이 '사죄'를 어떠한 방식으로 표현할 것인가 등을 야나가와 씨 등이 당국에 추궁하였는데, 공항공단측은 협의를 하면서, 뒤로는 지금까지의 연장선으로서 '확장을 위한 새로운 방법'을 찾고 있었다. 야나가와씨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들은 공항은 고도경제성장이 낳은 대규모개발의 대표 선수격이었기 때문에, 이것의 역사적인 총괄을 확실하게 하자라고 제안하였다. 또한 이것이야말로 나리타문제의 진정한 해결이다 라며 노선확대의 입장을 비판하였다" 원탁회의에 제출된 문서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확실히 농업은 자연을 관리하려고하는 기술의 체계이다. 자연계에서 밭이나 논을 구획화하여, 벼와 보리만을 기르고, 다른 작물을 잡초로서 배제하고, 작물의 성장을 비료나 물의 도입으로 조정하려고 하기때문이다. 그러나 공업처럼 자연을 파괴하여 성립하는 산업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산림이나 강, 동물이나 식물과 함께 자연속의 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겸허한 인식을 할때, 처음으로 훌륭한 작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공항이 여러가지 생명체나 풍경을 일방적으로 부수어가는 모습에 깊은 우려를 갖지 않을 수 없었다. 2기 공사만이 아니라 주변에는 아직까지도 호텔공사 등에 의해서 산림이 깎이고, 지하수의 흐름이 변동되어 동물들이 생식지를 잃고 매일 매일 쫓겨나고 있다" 공항건설은 농업과 농가를 부순것만이 아니고, 지역의 물흐름의 체계를 바꾸었고, 자연과 동물의 유기적 관계를 끊어버렸다. 따라서 더 이상의 확대는 용서할 수 없다라고 한다. 그런데, 원탁회의에 참가한 경제학자들은 공항문제를 농업문제로는 생각하지 않았다라고 야나카와 씨는 비판한다. 그들은 정부가 몇 억엔인가를 내고, 어딘가에 몇 백평을 준비하여 새로운 컴뮤니티를 만들어 주는 생각뿐이었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더해서 둘로 나누려는 방법이예요. 타협하려는 것이지요. 그러한 방법으로 공항문제는 해결되지 않아요. 우리들의 주장은 지금까지의 대규모개발의 반성점에 서야하고, 공항은 거대한 규모가 아니라 작은 규모여도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큰 규모의 공항을 만든다는 아직도 그런 판에 박힌 생각을 정부는 기정사실화하고 있지만, 야나가와 씨 등은 더 이상은 이 지역에 부하를 걸지 않는게 해결책이다라는 것이다. 양자는 완전히 대등한 관계에 있다는 인식을 받아들인다면, 지금의 공항은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의 확대는 하지않는다, 이것이 잘못을 사죄하는 내용이어야 하지 않는가라는 주장이다. 희생을 또다시 주민에게만 강요하는 해결책은 너무나도 일방적이지 않은가 라는 주장은 '공생'과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다. 원탁회의에 제출한 문서의 3)에 적혀있는 "원래의 BC활주로부지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라는 주장은 4천미터의 A활주로는 인정하지만, BC2개의 활주로는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양심적인 학자'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그 '동등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야나가와 씨는 이렇게 말한다. "논리로서는 우리들의 입장을 잘 이해하지만, 현실은 다르다고 언제나 말한다. 하물며 동맹내부에도 나라님이 사과를 했기 때문에 문제가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요구하는 것은 오히려 이쪽의 실례다 라는 반응조차도 존재한다" 정부가 공항의 위치결정이 일방적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사죄를 하고, 이후 농업이나 농업자의 문제에 대해서는 원조하겠다라고 말하면, 그것에 동요하는 움직임도 내부에는 존재한다. 그러나, 과거청산의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다라는 게 야나가와 씨의 주장이다. "우리들은 '세상바꾸기'라고 말하며 운동을 했기때문에, 앞으로의 것을 문제시하고 있다. 그것을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 등의 토론이 없는 상황에서 동맹내부에서부터 의견의 차이가 대두했다"라고 그는 말한다. "3.26까지 내란상태가 이어졌다. 그것도 그때까지 뿐이었고, 이후에는 완전히 비무장 상태가 되어버렸다" 반대운동은 3.26관제탑점거투쟁에서 진력이 다해 버렸다. 그 이후를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는 자기비판이기도 하다. 그런 평가를 들으면 이쪽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 우리들은 소위 학자, 문화인을 중심으로 응원단(공항폐쇄 요구선언의 모임)을 만들었는데, 운동의 폭을 넓힐려고는 하였지만, 운동의 질을 향상시키려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확실히 우리들은 산리즈카투쟁속에서 지지자의 폭은 넓혔고, 각지의 주민운동이나 시민운동과의 연결을 만들었다. 운동의 형태도 '공항폐쇄론'의 책이나 팜플렛을 만들고, 집회를 열기도 하였지만, 당시 반대운동의 틀을 넘지는 못했다. 투쟁의 선전에는 기여하였지만, 실제로 '공항폐쇄론'을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 우자와 히로부미 씨를 집회에 부른적도 있었지만 그때뿐이었다.
야나가와 씨가 말하는 것처럼, 3.26관제탑점거까지의 고양을 만들어 내는 데는 우리들도 함께 하였지만, 이후 정부와의 교섭은 야나카와씨 등이 담당하였고, 그 연장선에서 우자와씨, 수미야 미키오씨 등이 조금 관여하였다. 그러나, 우리들의 '선언모임'은 원탁회의에는 관여하지 않았고, 새로운 국면을 열기위한 싸움에도 어떤 기여를 하지 못했다. 단지 반대운동의 수준을 넘지 못했던 것이다. '응원단'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결국 투쟁을 자기자신의 문제로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즉, 지금 생각하면, 투쟁중에도 '원탁회의'를 여는 대담성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후 이러한 방법은 '요시노강 하구보존투쟁(역자 : 도쿠시마현에서 댐공사에 반대하며 에도시대의 하구시설을 보호하려는 운동)'을 둘러싼 운동에 적용되고 있다. 야나가와 씨가 살고있는 마을에서 공항은 더이상 확대할 필요가 없다 라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자기 혼자밖에 없다고 한다. 그는 No라고 명확히 말하는 사람이 없기때문에, 전부 Yes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한다. 그것은 반대운동이 표면화되지 못하고 전멸해버린 아오모리현의 롯까쇼무라(핵폐기물 재가동지역)의 현 상황과 동일하다. 공항을 확대하고, 비행기를 대형화하고, 화물과 인간을 대량으로 그곳에 싣는다. 소수의 희생자는 고려되지 않는 즉, 진정한 사회라고 할 수 없는 사회 - 공항반대투쟁은 원래 이러한 위선사회를 거부하기 위한 투쟁이었다고 그는 지금도 확신하고 있다. 돌아갈 시간이 되었을때 야나가와씨의 부인인 야스꼬 씨가 밭에서 돌아왔다. 그녀와는 '피스보트'에 함께 탄적이 있다. 그때 이후의 재회였다. (다음호에 계속) 기사제공 - 노동정보 699호(2006년7월15일) 번역 - 이영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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