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하다.
"도둑은 양을 훔쳐다가 죽여서 없애려고 오지만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케 하려고 왔다"(요한 10장 7- 10절)
- 세계는 신자유주의 자본 중심의 금융, 군수산업 경제정책으로 자연 환경을 파괴하며 빈곤과 전쟁으로 평등, 평화를 깨는 사건으로 인류는 죽음과 파멸의 환경을 맞이하고 있다.
- 세계교회는 90년대 “하나님의 정의. 평화. 창조. 질서보존”을 기도와 실천의 주제로 내세우며 활동하였고 냉전질서의 마지막 대립점인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모두가 기도하였다.
- WCC는 2000년대 “폭력극복과 생명 살리기” 주제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미국의 전쟁과 침략적인 정책을 반대하고 “아래로부터의 또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는 세계사회포럼”을 초기부터 참여하여, 2005년 지금 브라질 사회포럼2)에서는 신학과 신앙의 시대적인 고백을 주도하고 있다.
3. 시대의 어려움을 지고 가는 사람들이 함께 만드는 평화세상을 그린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한국교회는 자주독립정신의 순교적 신앙전통을 가지고 전쟁과 분단의 폐허 속에 기적으로 화해와 평화의 교회를 이루었다. 이를 위하여 교육구국, 독재타도, 민주화운동, 분단된 민족의 통일에 헌신적으로 참여하였다.
- 최근 IMF 경제위기속에 나눔과 섬김의 정신으로 복지사회를 위한 선언적인 활동들을 하고 있다. “ 자원봉사자 교회가 최고”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 서민들이 기쁘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아름다운 세상, 이 땅의 하나님나라 만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무거운 짐진 자는 누구인가? 비정규직노동자, 실업자, 빈민, 철거민, 목회자이다. 한국교회 선교 120년 험난한 민족의 역사 속에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발전한 한국교회는 물신적이고 허례허식적인 거품 신앙을 멀리하고 경건, 절제의 성숙한 교회의 일치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 지금도 교회는 최소한의 가치기준인 자유, 평등권과 노동기본권, 민주화, 통일운동에 헌신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한부정부패추방과 왜곡된 역사바로세우기, 불평등한 경제극복, 희망사회로 복지사회건설의 현장선교에 교회는 계속 참여하고 있다.
4. 큰 흐름의 역사 속에 풀뿌리 바닥의 노동자, 민중들과 함께하는 아름다운 교회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 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심이라˝ -눅 4:18-19
- 가난하고 병든 자들과 함께하는 말씀을 동력으로 산업선교와 민중교회가 어려운 이웃의 삶속에 함께 한 민중선교는 세계교회의 모델로 알려지고 있다.
- 살아있는 예언자들의 실천적인 선교전통을 바탕으로 교회가 교파와 종파를 넘어서서 전국교회가 전문화된 지역사회, 노동선교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안내하여 사회의 지탄받는 교회를 넘어선 칭찬받는 교회되어야 한다.
- 한국교회는 노동사회의 최소한의 기준인 근로기준법을 지키며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권과 노동권을 살리고 더 낮은 곳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이웃들과 늘 함께 해야 한다
5. 경제전쟁, 군사전쟁으로 죽음으로 내몰린 노동자를 살리는 생명살림의 노동선교
사람아 주께서 선하심이 무엇임을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내게 구하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 ( 6: 6- 9 )
“공의를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넘치게 하리라” 아모스(5:24)
한국교회의 노동선교방향 탐색을 위한 단상
첫째, 신학적인 노동선교 의미 해석을 하여 이론적인 바탕을 마련해야 한다. 이는 과학문명의 발달로 변화된 세계화의 이념 혼란에 기독교의 대안제시가 필요하다. 초국적 자본의 신자유주의 횡포적인 시대 상황 속에 변함없는 진리의 인식을 정확하게 하는 것이다.
둘째, 화해평화통일의 신앙고백적 노동선교 방향정립을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포도원 일꾼의 평등한 보상 일용할 양식.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말씀의 해석과 예수께서 노동(목수일)하면서 십자가의 길을 제시, 태초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일하여 세상을 창조하시니라.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말씀으로 살아라3) 산업선교와 민중교회의 현장선교 정리와 확산으로 인간의 평등을 기초로 한 과학의 발전과 문명의 이기를 노동자와 근로자의 차이점과 노동자성을 인정하기 위한 신앙의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셋째, 기독교의 노동선교활동은 과학의 시대정신으로 부서진 인간을 치료해야한다. 작업장감시 카메라의 비인간성, 컴퓨터의 발달과 노동, 비인간화 기계화된 인간상, 교회가 하나됨의 선행실현은 노동자의 하나요 민족의 하나됨이다. 삶의 경건과 절제를 생활화하고 물질의 나눔과 봉사의 정신으로 노사의 빈부격차, 노노갈등, 빈부격차해소를 위한 교회의 실천사업연구는 화해하는 사회를 제시하는 실천 활동이다.
결국 세계교회는 폭력을 극복하고 생명을 살리기 위한 반전평화운동에 노동자 민중과 연대하여 평화운동 역량을 강화하고 있다. 유엔과 ILO등이 정하는 최소한의 노동인권을 신장하며, 전쟁과 핵무기의 위협에 맞서 항구적인 세계평화를 실현한다. 근로기본권을 지키려는 한국교회가 노동자와 함께 함으로 평화, 인권운동의 사회적 모범으로 타의 귀감이 되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노동선교 실천사업들을 안내
- 교회가 비정규직이 당하고 있는 여러 가지 차별을 막을 수 있는 방안들을 제시하고 노동현장의 어려운 문제들에 대한 관심과 대처하는 기구를 신설하여 인간의 기본권 활동인 노동조합이 교회 내, 외에서 활성화를 할 수 있도록 한다4)
- 교회는 기독교의 올바른 노동관을 정립하고 만인제사장, 천직, 노동의 의미와 중요성을 재정립해야 한다. 교회는 ‘근로자’가 아닌 ‘노동자’의 실체를 인정하고 교회를 개방하여 비정규직 노동자를 비롯한 노동자들의 영혼과 육체가 쉴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 노동자들의 노동 상담과 생활, 건강 등 총체적인 인생 상담을 할 수 있는 전문선교기관을 양성하고 운영한다. 그 전문성은 산재병원에서 환자를 맡듯이 어려운 노동현장의 문제를 가지고 교회에서 편안하게 머물면서 문제를 해결하도록 한다. 실업자가 힘을 얻고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는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고 기독교적인 기업이 모범으로 일자리 창출의 본을 보인다.
- 교회내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남녀평등 실현 등 모든 형태의 차별을 철폐하고 안전하고 쾌적한 노동환경을 만드는 일에 구체적이며 모범적으로 해야 한다. (생활임금 확보, 고용안정 보장, 노동시간 단축, 산업재해 추방, 모성보호 확대 등의 )
- 상시적으로 활력 있는 노동사회를 위한 노동자학교(교회학교)나 노인대학 같은 과정을 만든다. 이상적인 교회는 의견소통구조가 민주적이듯 노, 사, 정, 사회단체(여성, 환경, 운동단체들)가 참여 할 수 있는 희망의 대안을 민주적으로 제시한다.
- 사회적인 노동의 중점적 과제를 교회가 관심을 갖고 함께 대안을 제시한다. 그러나 사회적 합의(희망포럼)가 노동자들의 일방적인 희생으로 이루어지지 않도록 균형을 잡는다.5)
- 노동 3권, 노동시간, 노동교류와 연대를 촉진하도록 하는 중계자 역할(노동현장연결)을 하여 종교의 자유처럼 노동자의 경영참가, 정치세력화, 사회적 합의, 사상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를 만들어 비정규직, 미조직 노동자의 조직화 등 조직역량을 확대 강화하고 산업별 공동교섭, 공동투쟁 체제를 확립하여 산업별 노동조합을 건설하고 전체 노동조합운동을 통일한다.
- 노동기본권을 완전하게 실현하여 공동결정에 기초한 경영참가를 확대하고 노동현장의 비민주적 요소를 척결하고 현안 과제인 일자리나누기 / 교역자 사례 생활비 평준화/ 교회의 노동선교 역할분담 네트웤/ 노동자 세계평화운동의 소통과 연대를 통하여 노동자예수교회 만들기 / 연합교회로 하나 되기 / 연구하고 증진한다.
-교회는 독점자본의 횡포- 다국적기업의 기본적인 기준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개발의 폭력들을 극복하기 위한6) 규제에 참여하여 중소기업과 농업을 보호하며, 사회보장, 주택, 교육, 의료, 세제, 재정, 물가, 금융, 토지, 환경, 교통 등과 관련한 정책과 제도를 개발한다.
현 노동사회의 기본과제와 노동교회의 동참 7)
1.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운동의 역사와 전통을 계승하고 이를 발전시킨다.
2.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이 보장되는 참된 민주사회를 건설한다.
3.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인정하고 제민주세력과의 연대를 강화한다.
4.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시위, 사상의 자유 등 민주적 제권리를 쟁취한다.
5. 민족의 자주성을 확립하고 분단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실현한다.
6. 산업별 공동교섭, 공동투쟁 체제를 확립하고 산업별 노동조합을 건설한다.
7. 미조직 노동자를 조직하고 전체 노동조합운동을 지원하고 통일하도록 한다.
8. 권력과 자본의 노동탄압을 분쇄하고 교사, 공무원, 노동자의 단결권 등 노동기본권을 완전 쟁취하도록 지원한다.
9. 자본의 합리화 전략에 따른 노동통제와 노동 강도 강화를 저지한다.
10. 공동결정에 기초한 경영참가를 확대하고 노동현장의 비민주적 요소를 척결한다.
11. 생활임금과 주 40시간 노동제를 쟁취하고 유급휴일, 유급휴가를 확대한다.
12. 남녀, 직종, 학력, 기업, 국적간 차별을 철폐하고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쟁취한다.
13. 해고와 실업을 방지하고 완전고용과 고용안정을 쟁취한다.
14. 산업재해와 직업병을 추방하고 쾌적하고 안전한 작업환경을 쟁취한다.
15. 남녀평등을 실현하고 모성보호를 확대하여 여성의 평생일터를 쟁취한다.
16. 사회보장제도와 주택, 교육, 의료제도를 개혁하여 전국민의 인간다운 삶을 쟁취한다.
17. 국내외 독점자본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중소기업과 농업을 보호 육성한다.
18. 세제, 재정, 물가, 금융, 토지, 환경, 교통 등과 관련한 제도와 정책을 개혁한다.
19. 퇴폐적인 문화를 척결하고 건강한 민족문화를 확립한다.
20. 전세계 노동자와 연대를 강화하고 전쟁과 핵무기 위협에 맞서 세계평화를 실현한다.
(참고자료 1)
세계 장로교회, '신자유주의 반대'를 선언하다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경제구조로"
박성원 신학박사. 월간 “말” 편집부 인터뷰
“우리는 가난한 자와 연약한 자 그리고 모든 피조물이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도록 제외시켜 그들과 계약 맺으신 하나님께 도전하는 현 세계의 경제질서를 거부한다. 그것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든 절대적 계획경제든 마찬가지다. 우리는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뒤엎고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통치에 적대적 행위를 하는 모든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제국을 거부한다.”
“우리는 신자유주의적 세계 시장의 광포한 소비주의와 경쟁적 탐욕, 이기적 속성의 문화를 거부한다. 우리는 또 어떤 구조를 가졌든 자신 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고 스스로 주장하는 체제를 거부한다."
"우리는 이미 수백만의 생명을 앗아가고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의 많은 부분을 파멸로 이끈, 규제받지 않는 부의 축적과 무한 성장을 거부한다.”
“우리는 수익을 인간 앞에 두고 모든 피조물을 더불어 돌보지 않는 경제체제와 이념을 거부한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을 사유화하는 경제체제와 이념을 거부한다. 우리는 이런 이념을 복음의 이름으로 지지하는 것을 거부한다. 또 이런 이념에 대한 맹종을 정당화하는 가르침을 거부한다."
전 세계 개혁교회를 대표하는 세계개혁교회연맹(World Alliance of Reformed Churches)은 2004년 7월 30일부터 8월 12일까지 아프리카 가나의 수도 아크라에서 열린 제24차 총회에서 위와 같은 신앙고백의 언어로 '신자유주의 경제세계화'에 반대했다. 이를 '아크라 고백신앙'이라고 부른다.
세계 장로교,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다
한국에서는 장로교회란 이름으로 알려진 개혁교회(Reformed Church)는 16세기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주도한 존 칼빈의 신학노선을 따르는 기독교 전통인데, 칼빈은 소위 '자본주의'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그 후예들이 자본주의의 가장 열악한 형태인 신자유주의적 글로벌 자본주의에 대해 정면으로 “아니”라고 고백한 것이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125년이 넘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전통을 가진 세계개혁교회연맹은 1980년대 말 동구권이 무너지고 난 뒤 세계갈등의 틀이 냉전시대의 정치와 이념에서 경제로 바뀔 것이란 예상을 하고 이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제1차 걸프전 직후인 1992년부터 '신앙과 경제'란 주제로 일련의 연구를 시작한 세계개혁교회연맹은 1995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가진 협의회를 시작으로 각 대륙을 순회하면서 각 지역의 경제현실에 대한 분석에 착수했다.
이중 1995년 아프리카 잠비아 키트웨에서 가진 아프리카 회의에서 참석자들은 “아프리카는 세계경제에서 완전히 제외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아프리카 지역은 세계경제지도와 G8의 세계경제계획에서 이미 사망 선고된 지역으로 선포되었다”고 진단했다. 그리고 전 세계 개혁교회가 신자유주의 경제세계화에 대해 '고백신앙'을 선포하도록 건의했다.
'고백신앙'이란 당대의 조직적 불의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행동중 가장 강도가 높은 대응이다. 어떤 불의를 용납하면 자신들의 신앙 자체가 위협받을 것으로 간주될 때 발동하는 '긴급 행위'인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교회가 '고백신앙'으로 대응한 여러 사례가 있는 데 그중 하나가 바로 유명한 '바르멘 선언'이다. 히틀러가 등장해 자신이 아리안족을 위한 메시아란 암시를 주기 시작했을 때 소수의 독일교회가 이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정면도전으로 여기고 '고백신앙'으로 대응했던 것이다.
또한 남아프리카에서 인종분리 정책으로 백인들이 아프리카인들과 유색인종들의 정치사회적 권리를 조직적으로 박탈하고 제외했을 때 교회는 '벨하 신앙고백'으로 대응했다.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성찬식을 함께 나눌 수 없게 하는 인종분리 정책은 복음과 정면으로 위배되므로 신앙적 차원에서 저항하고 거부한다는 것이었다.
고백신앙의 전통
이런 경험은 우리 나라에도 있다. 일제식민강점 시기가 말기에 달했을 때 일제는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일제는 이를 특별히 기독교회에 집요하게 강요했는데 찬송이나 성경에서 천황에 도전하는 모든 개념의 사용을 제한하고 일본신사를 강제로 참배하게 했으며 특히 예배전엔 동방요배를 강요했던 것이다. 이때 소수의 목회자와 신자들은 일제의 강요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으로 판단, 순교적 각오로 이를 거부하는 고백신앙의 행동을 했다.
이번 세계개혁교회연맹이 채택한 '아크라 고백신앙'은 바로 이런 바르멘 선언이나 벨하 신앙고백의 정신으로 전개된 것이다.
세계개혁교회연맹 총회는 다음과 같이 이번 고백의 신앙적 배경을 밝혔다.
“개혁전통과 시대의 징조가 가리키는데 따라 세계 경제정의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 및 그리스도인으로서 온전한 제자됨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우리는 만약 우리가 신자유주의 경제세계화의 현 구조에 대해 침묵하고 행동하기를 거절한다면 우리 신앙의 온전함이 위태롭게 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하나님 앞과 서로의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한다.”
그렇다면 세계개혁교회연맹이 신자유주의적 경제세계화에 대해 이렇게 신앙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던 긴급현실은 무엇인가. 무엇이 세계개혁교회연맹으로 하여금 신자유주의적 경제세계화에 대해 고백적으로 대응하게 했는가.
우선 아크라 신앙고백은 '이 시대의 징조가 생명 자체를 위협하는 심각한 상황'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하나님의 피조물이 계속해서 속박 속에서 탄식하며 구원을 갈망하고 있음을 듣고 있다”(로마서 8장 22절)는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우리는 지금 전 세계의 고통받는 민중과 상처받는 피조물 세계의 탄식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으며 “세계민중의 고통과 생태계에 가해진 상처가 중첩되는 극적 현실을 보고 있다”고 고백의 전제상황을 설정했다.
그리고 “생명에 대한 엄청난 위협의 근본원인은 무엇보다도 정치적 권력과 군사력의 비호 아래 전개되는 불의한 경제구조의 산물임이 분명하다”며 '현 세계의 부끄러운 상황'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전 세계 1퍼센트의 부자들에 속하는 연간 수입이 가난한 자 57%의 연간수업과 맞먹는다. 하루에 빈곤 및 영양실조와 관련해 죽는 사람의 수가 매년 2만4천명에 이르고 있으며 가난한 나라의 외채는 끊임없이 원금을 갚아나가는 상황 속에서도 계속 증가하고 있다. 여성과 어린이들이 빈곤층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하루에 1달러 이하의 생계비로 살아가야 하는 절대 빈곤속에서도 세계인구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우상 숭배'
이어서 아크라 신앙고백은 경제 세계화로 인한 생태계 파괴를 심각하게 지적했다.
"부국들의 무한 경제성장 정책과 다국적 기업의 이윤추구 극대화 지향이 생태계를 약탈하고 환경을 심각하게 손상시켰다. 1989년엔 하루에 한 종(種)의 생물이 사라졌으나, 2000년에는 시간 당 한 종(種)이 사라지고 있다. 황폐화의 결과로 기후변화, 어족의 고갈, 벌목, 토지의 부식, 물의 오염 등이 나타나고 있다. 공동체는 파괴되고, 살림살이는 불가능하게 되었으며, 해안지역과 태평양 섬들은 침수될 위협을 받고 있다. 폭풍이 날로 증가하고 있으며 고농도의 방사능 방출이 건강과 생태계를 위협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생명의 구조와 문화적 지식이 경제적 이윤추구를 위해 특허화되고 있다”며 생태계의 상업화를 고발한다.
아크라 고백은 이 위기의 주범은 바로 신자유주의 경제세계화라고 분명히 밝히고, 오늘의 위기가 신자유주의 경제세계화의 진행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다고 단언한다. 고백이 밝힌 바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다음과 같은 신념을 바탕으로 진행된다고 한다.
■무한경쟁, 소비주의, 무한경제성장, 부의 무제한 축적이 전 세계를 위해 제일 좋은 방안이다.
■사유재산권은 사회적 의무를 가지지 않는다.
■자본투기, 시장의 자유화와 탈규제화, 공기업과 국가자원의 민영화, 규제없는 외국자본의 투기와 수입, 낮은 세율, 통제받지 않는 자본의 자유이동 등이 모든 사람의 부를 성취하게 할 것이다.
■사회적 의무, 가난한자와 사회적 약자의 보호, 노조, 사람들의 관계성 등은 경제성장과 자본축적의 과정에 부수적이다.
특히 아크라 고백은 “신자유주의는 가난한 자와 자연으로부터 끊임없는 희생을 강요하며 이것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강변하는 이념”이라고 규정한다. 또 “이것은 경제가 생명위에 주권을 행사하고 우상숭배에 이르게 하는 절대충성을 강요하면서 부와 번영의 창조가 세상의 구원의 길이라고 주장하는 거짓 약속”이라며 그 허구성과 사기성을 폭로했다.
아크라 고백은 이 신자유주의 경제세계화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또 이런 이념의 프로젝트는 누구의 비호아래 전개되는지를 명쾌하고 밝히고 있다. 아크라 고백은 "힘없고 고통 받는 자들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려는 진리와 정의의 구도자” 시각으로 분석할 때 “현 세계의 질서(혹은 무질서)는 '제국'의 극도로 복잡하고 비도덕적인 경제구조에 기인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제국'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제국이란 강대국이 자기들의 이익을 보호하고 방어하기 위하여 구성한 지배구조의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군사적 권력의 총체적 집합을 의미한다.”
고전적 자유주의 경제에서 국가는 시장경쟁에서 사유재산과 계약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했다. 그 후 국가는 노동운동의 투쟁을 통해 시장을 규제하고 국민의 복지를 위해 봉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자본의 이동이 초국화하면서 신자유주의가 국가의 복지기능을 해체하면서 시장을 세계화했다. 이에 따라 시장을 보호하는 정치적·법적 기구들도 세계화되었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정부는 국제금융기관들(국제통화기금, 세계무역기구)과 함께 정칟경제·군사적 협조를 하면서 자본가들의 이윤을 더욱 증대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아크라 고백은 “경제세계화와 지정학이 신자유주의의 지원으로 결합해 오늘의 경제위기를 극도로 심화시키고 있다”며 “이것이 바로 가진 자들의 이익을 보호하고 방어하는 현재의 세계체제”라고 단정하고 있다.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경제구조로
"예수는 하나님과 맘몬(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누가복음 16장 13절)고 하셨다. 이 말씀을 근거로 세계개혁교회연맹은 다음과 같이 신앙고백의 동기를 밝힌다.
“성서적으로 볼 때 가난한 자를 희생시켜 이루는 부의 축적 구조는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못하다. 이 같은 구조는 인간의 고통(예방할 수 있는)을 가중시키는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맘몬에 해당한다.”
아크라 고백은 세계교회에 심각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이번 고백의 과정에서 줄곳 주저하면서 고백에 참여하기를 꺼렸던 유럽 및 미국 교회들도 현재는 아크라 고백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에 분주하다. 남미, 아프리카 등 남반부 교회는 지구적 경제정의 투쟁에 중요한 신학적 근거가 된다고 판단하며 흥분하고 있다. 이번 고백으로 세계신학의 축이 서구에서 제3세계 교회로 전환되기도 했다.
혹자는 경제는 경제인들의 영역으로, 영적인 문제를 다루어야 할 교회가 경제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현상을 못마땅하게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경제의 어원은 성경에서 나온 것이다. 성서의 경제는 ‘집안 살림’이란 뜻인 ‘Oikos’ 에 규범이란 말인 ‘Nomus’가 연결되어 나온 개념이다. 이 두 단어가 결합된 것이 ‘오이코노미아’(Oikonomia)인데 ‘하나님의 집안 살림살이 법칙’이란 뜻이다. 이 ‘Oikos’ 란 말에서 경제를 가리키는 영어인 'Economy'와 생태계를 의미하는 'Ecology'가 나왔다. 에큐메니컬(교회통합운동)의 정신인 '오이쿠메네'(Oikumene, 지구상에 거주하는 모든 생명공동체)란 용어도 ‘오이코노미아’에서 나온 것이다. 경제란 것은 이처럼 영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 경제가 인간의 손에 들려지면서 인간의 탐욕의 수단이 되고 있는 셈이다. 바로 이 때문에 경제는 신앙과 관련된다는 것이 세계개혁교회연맹의 인식이며 이 때문에 경제를 윤리나 도덕이 아닌 신앙의 문제로 보려는 것이다.
종교에서는 경제를 윤리나 도덕의 문제로 보면 남의 가난이 남의 문제로 보이지만 고백의 문제로 보면 이웃의 가난은 곧 나의 문제가 된다. 바로 이 신앙의 발로가 이 사회를 사랑하는 교회의 사랑의 동기가 되어야 한다. 한국교회에도 이 같은 깊은 신앙고백적 행동이 있기를 기대 한다.
( 참고자료 2 )
[브라질 현장]세계화에 맞서는 새로운 해방신학 모색
21일 제1차 세계해방신학포럼 개막 , 엄기호(getoutof) 기자
제1차 세계해방신학포럼 개막-세계화에 맞선 해방신학의 재정립 시도
1월 21일 10시 브라질 포루투 알레그레에서 제1차 세계해방신학포럼(World Forum on Theology and Liberation, 이하 포럼)이 '다른 가능한 세상을 위한 신학'(Theology for Another Possible World)을 슬로건으로 개막했다.
포럼은 세계사회포럼의 성공과 성장에 고무되어 지난 2003년 대회 때 세계적으로 저명한 해방신학자인 레오나르도 보프가 주창한 지 2년만에 그 결실을 맺어, 2005년 세계사회포럼 사전 포럼의 형태로 열리게 되었다.
포럼은 교황청 인준 리오 그란드 도 술 가톨릭대학(Pontificia Universidade Catolica do Rio Grande do Sul)에서 브라질교회협의회, 브라질성공회, 라틴아메리카가톨릭수도자연합회 등이 주최하며, 레오나르도 보프, 스리랑카의 티사 발리수리아, 한국의 정현경 등 전 세계에서 300여명의 진보적 신학자들이 모여 해방신학의 과제와 미래를 토론하게 된다.
개막식에서 조직위원회는 포럼은 세계사회포럼의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정신에 전적으로 공감하였다. 특히 종교가 갈등과 전쟁의 원인이거나 정당화의 수단이어서는 안 되며, 억압받는 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야 하며,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제국의 출현에 맞는 해방신학의 재정립을 위한 출발점으로 포럼으로 자리매김하였다.
특히 라틴아메리카 가톨릭수도자연합은 축하 메시지에서 '우리가 맞서야 할 드래곤은 크지 않으며, 희망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고 역설하며 이런 희망과 해방의 운동들과 함께 하는 해방신학으로 나아가자고 호소하였다.
이어 21일 첫날은 각 대륙의 진보? 신학의 상황에 대한 보고가 이어졌다. 먼저 아시아의 진보신학에 대한 보고에서는 한국의 민중신학과 인도의 불가촉천민신학 등 아시아의 진보적 신학은 억압받는 이들의 토착적 신학으로 출발하였다는 특색을 가진다는 점이 부각되었다. 이어 유럽과 아프리카 등의 상황이 보고되었다.
특히 흥미를 끈 것은 미국의 진보신학의 상황에 대한 보고였다. 시카고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고 있는 드와이트(Dwight Hpkins)는 미국의 신학은 신보수주의 신학, 자유주의신학, 예언자적 신학 등으로 나누어진다고 지적하였다. 특히 부시의 재선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신보수주의 신학은 개별적인 신학이라고 하기보다는 일종의 집단적 운동 형태를 띠고 있다고 분석하였다.
신보수주의 신학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은 미국은 하느님이 세운 나라라는 것에 대한 확신, 미국은 그저 다른 나라보다 더 나은 것이 아니라 최선이라는 것에 대한 확신, 미국이 결심한 것은 즉각적으로 실행되어야 한다는 확신, 이에 반대하는 것은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확신으로 뭉쳐 있는 신학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는 이런 점에서 신보수주의자들이 전혀 자선도 하지 않는 몰인정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해라며, 신보수주의신학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가진 문제점은 자선을 하지 않는다거나 자비롭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자선과 자비를 추구하는 방식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나 국가에 대해서 무자비하다는 점이라고 지적하였다.
이에 맞선 신학으로서의 자유주의 신학은 개인의 자유에 대해 절대적으로 신봉하며, 그것을 신장시키는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특히 자유와 관련하여 미국이 신에 의해 만들어졌고 상대적으로 우월한 국가라는 미국의 이미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신보수주의와 맥락을 같이 한다.
이에 더하여 자유주의 신학은 재산권을 개인의 자유에서 핵심적인 자유 중의 하나로 여김으로써 가난과 빈곤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취약하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그는 미국 진보신학의 미래를 작지만 지구적으로 네트워킹하며 경험과 언어를 공유하고 있는 예언자적 신학에서 찾고 있다.
1월 22일, 포럼의 둘째 날 오전은 현재 세계상황에 대한 점검으로 시작하였다. 포르투갈의 저명한 사회학자 보아벤투라(Voaventura de Sousa Santos)는 기조발제에서 세상은 현실과 기대 사이의 간극으로 존재한다고 규정하였다. 사람들은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오늘이라는 현실을 바라보고, 그 현실을 바꾸며 살아간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이후 현실과 기대는 역전되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오늘은 좋지 않으며 내일은 더 나쁘다!(Today is bad, but Tommorrow is worse!)'는 공감을 가지고 있다. 이 속에서 다른 세상은 전혀 가능하지 않다. 복지국가의 붕괴와 함께 사회적 협약은 개인적 협약으로 바뀌었으며, 사회적 안전망은 붕괴하고, 민주주의와 인권은 위기에 직면하였다. 민주주의는 이제 선거라는 일종의 정치적 의례로 전락하였고 삶과 유리되었다.
노동조건과 협약에서 국가는 후퇴하였고, 시장에 의해 사회는 파시즘적 상황에 떨어졌다. 국가는 사회적 시민권을 기반으로 구성되었지만, 국가는 사회에서의 시민권을 더 이상 방어하지도, 기반하지도 않는다. 결론적으로 그는 현재 사회를 정치적 민주주의와 사회적 파시즘으로 규정하였다.
이어 그는 현재 지구는 단일 문화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으며, 이것에 대항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하였다. 그가 말하는 단일 문화란 생산성의 문화, 단선적 진화의 문화, 위계화의 문화, 공학적 지식의 문화 등이 지구적으로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세계를 우월한 것과 열등한 것을 끊임없이 가르고, 생산적인 것과 비생산적인 것을 가르며, 열등하고 비생산적인 것을 침묵하게 한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부재의 영역이 생긴다. 그는 그의 사회학을 부재의 사회학으로 명명하며, 그의 사회학은 새로운 사회적 포용을 위한 인권과 민주주의의 급진화를 지향한다고 이야기하였다. 즉 부재된 것의 인권과 민주주의로 새로운 연대와 생태(ecology)의 지구로 새로운 세계는 가능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제1차 세계해방신학포럼은 1월 25일까지 5일간의 일정으로 전개되며 '또 다른 세상을 위한 하느님', '또 다른 세상을 위한 종교', '또 다른 세상을 향한 신학'이라는 세부주제를 가지고 진행된다. 한편 한국에서는 천주교평신도들의 신학연구운동단체인 우리신학연구소에서 소장 박영대와 연구위원 엄기호(팍스 로마나 동아시아 담당, 가 참석하고 있다.
"미국 신보수주의신학의 수장은 부시 대통령"
미국의 진보적 신학자 드와이트 인터뷰
-지난 미국대선에서 신보수주의 신학이 끼친 영향은 어느 정도였는가?
“당연히 신보수주의 신학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부시를 지지하였다. 그것도 지지하는 정도가 아니라 교회에서 투표에 관한 교육을 하고, 투표를 독려하고 조직하고 현수막을 거는 등 거의 군대와도 같은 방식으로 움직였다. 사실 신보수주의 신학 운동은 거의 군대나 다름없다. 이에 반해 자유주의 신학 진영은 ‘모든 사람은 말할 자유가 있다.’고 나이브하게 이야기하며 적극적으로 이에 대처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보다 더 느슨하고, 덜 조직적이다.”
-신보수주의 신학은 신학이라고 하기 보다는 운동이라고 당신은 이야기한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사실 다른 모든 신학처럼 신보수주의 신학에도 뚜렷하게 자기 선을 드러내는 신학자가 있다. 그러나 내가 신보수주의 신학을 어떤 학문적 실천이라고 하기보다는 운동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첫 번째로 신보수주의신학은 많은 신학교와, 신학대학, 그리고 교회를 가로지르면서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두 번째로 신보수주의 신학은 학문적이라기보다는 대중적인 측면이 아주 강하다. 이런 점에서 신보수주의 신학의 진정한 대표는 신학자가 아니라 부시라고 말할 수 있다. 이번에 부시의 취임연설을 들었는가? 전부가 다 하느님과 신앙과 종교에 대한 이야기이다. 대통령 취임식 연설라고 볼 수 없을 정도이다. 이런 점에서 신보수주의 신학은 신학이라기보다는 운동적 성격을 더 강하게 띈다.“
-체계적이지 않은데도 신보수주의신학이 이처럼 대중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가장 크게는 신보수주의신학이 대단히 애국적이라는 점이다. 발제에서도 말한 것처럼 신보수주의 신학은 미국이 하느님의 뜻에 의해 만들어진 최선의 국가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미국의 시민이 된다는 것은 곧 하느님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자부심과 자긍심의 고취가 대중들을 열광시킨다. 최선의 국가의 시민이고, 가장 강력한 국가의 국민임을 신보수주의신학은 계속 고취시키고 있으며, 실제 미국인들은 그렇게 느낀다.
따라서 이들은 세계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위치와 임무를 신보수주의 신학과 부시가 제대로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반해 자유주의 신학은 아주 나이브하다. 개인적이며. 물론 자유주의신학이 공헌한 바가 있다. 특히 개인의 자유, 여성과 흑인과 이주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해서 자유주의 신학은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시스템 자체가 문제시되면 자유주의 신학 역시 신보수주의신학과 다르지 않다. 그들 역시 미국의 경제적, 정치적 시스템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이 최선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들이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불린다.“
-북한의 경우에도 탈북자들을 위한다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선교사들이다. 북한에 대한 이런 접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원래 그들이 하는 일이 그렇다. 미국은 백악관과 언론과 교회와 자본이 일종의 동맹체를 구성하고 있다. 맨 먼저 교회가 나서서 인도주의적 도움이라는 이름으로 선교에 나선다. 그것이 파견지 국가의 정부에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정부가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비난을 하기 시작하고, 언론이 이를 받아 적는다.
언론은 계속해서 북한이 인권탄압국이며, 독재적인 공산주의 국가이며, 그래서 미국에 의해 붕괴되어야하는 곳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문제는 북한이 독재적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라거나 언론을 탄압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주장의 배후에는 미국의 말을 듣지 않는 북한은 붕괴되어야하고, 절대적 선인 미국식의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체제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결국 그들의 비난과 비판의 요점은 북한이 인권탄압국이고 독재적인 공산주의 국가라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선'인 미국의 지시와 모델을 북한이 따르지 않는다는데 있다.“
-한국의 보수적 그리스도교에서는 국가보안법 수호를 위한 시위에서 미국 국기를 흔든 적도 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눈이 동그래지며) 한국에서? (그렇다) 오 마이 갓.”
-어떻게 해서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나?
나는 사실 교회에서 태어나고 교회에서 자랐다. 청년기가 되었을 때 나는 사실 교회를 떠났다. 교회보다는 사회운동이 흑인의 정의를 위해서 더 확실하게 싸울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가운데 흑인 신학을 만났고 다시 교회로, 아니 신앙으로 돌아왔다.
왜냐하면 흑인신학을 통해서 나는 나의 그리스도인 됨과 흑인으로서의 자긍심과 사회정의라는 세 가지 모두를 다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신학을 예언자적 신학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한국의 민중 신학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한국의 민중 신학은 요즘 과거처럼 그렇게 활동적이지 못하다.) 정말인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흑인 신학은 신학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예언자적 교회를 통해서 운동으로 존재하고 있다. 비록 예언자적 교회는 숫자나 규모에서도 아주 적지만 흑인 신학은 교회에 근거하고 교회를 통해서 운동하기 때문에 여전히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나는 아주 낙관주의적이다. “
-이런 상황에서 낙관적이라니 놀랍다. 그 근거가 무엇인가?
사실 미국이 미국식의 파시즘적 상황이 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나를 낙관적으로 만든다. 왜냐하면 부시와 신보수주의가 파시즘으로 갈 정도로 그렇게 절박하다는 것이다. 절박하지 않다면 왜 파시즘적 체계로 이행하겠는가? 경제며 사회적 안전망이며, 국민적 결속이며 모든 것이 끝장났다.
그러니 더욱 부시와 신보수주의자들은 더 절망적이지 않을 수 없고 절박해지는 것이다. 물론 나는 이 상황이 기쁘지는 않다. 그러나 나는 낙관적일 수 있다. (상황이 기쁘지는 않지만, 낙관적이라니 그것이 당신이 당신의 신학을 예언자적이라고 말하는 아주 상징적인 표현인 것 같다.) (웃으며) 그런가? 그렇다. 모든 사회적 안전망이 붕괴하여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보면서 행복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낙관적일 수 있다. 맞다. 그래서 나는 내 신학을 예언자적이라고 이야기한다.“
( 참고자료 3 )
김정란. 상지대 교수, “극우 기독교인에게 고함 - "예수도 '국가보안법' 희생자"
당신들은 '불온한 반항자' 예수의 친구가 아니다.
나는 예수쟁이이다. 왜 “크리스찬”이라고 말하지 않고 우정 이런 식의 약간은 자기비하적인 용어를 사용하는지 헤아려주었으면 좋겠다. 한국 기독교는 너무나 가진 자들의 편에 서게 되었다는 생각, 따라서 진실로 예수라고 하는 한 팔레스타인의 지독한 주변인이었던 기독교의 창시자의 정신으로부터 너무나 멀어졌다는 생각이 나로 하여금 이렇게 주변성을 자기 정체성 안에 통합해 넣는 용어를 일부러 사용하게 만드는 것이다. 스스로를 비천한 자리에 가져다 놓을 줄 모르는 자는 크리스찬이 아니다.
나는 교회 안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스스로의 결단에 의거하여 자신을 옭죄던 봉건성을 기독교라는 각성의 형식으로 극복했던 1세대 기독교도의 아들이다. 내 아버지는 대한민국 최대의 교회 중 하나인 영락교회를 창건하신 열 분 장로님 중의 한 분이시다. 그뿐이 아니다. 집안에는 순교자도 한 분 계시고, 어머니 쪽으로도 내 가족이 기독교와 가지는 관계는 그 연원이 깊고 특별하다. 나는 청소년기의 대부분을 영락 교회 뜨락에서 보냈다. 교회는 나의 영혼의 깊은 터였다. 요컨대 나는 기독교의 딸이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내가 여전히 예수쟁이라고 생각한다. 그 말은 내가 예수를 깊이 사랑하고 나의 어리석음과 죄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나의 진정한 구원자로 여기고 따른다는 의미이다. 교회 뜨락에서 보낸 유년이 지나간 후, 갈등은 내 영혼 깊은 곳에서 신음처럼 치고 올라왔다. 나의 내면에서는 비참한 사회의 현실에 진정으로 눈을 주지 않는 대형교회의 무책임한 복음주의에 대한 불만이 서서히 싹터 올랐다. 그러나 부모님은 당신들이 전생애를 투입해 넣은 교회를 떠나지 못하셨다. 정치 문제로 이따금 당회장 목사님과 충돌하곤 하시던 내 아버지는 결과적으로는 복음주의에 소극적으로 안주하셨다. 당신이 당회를 그만두시는 정도에서 소극적으로 저항하시고 말았던 것이다. 딸은 당신의 갈등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딸은 아버지가 당신의 정신 안에 설정하신 울타리 너머로 아버지가 전해주시는 종교의 메시지를 알아차렸다. 딸은 아버지의 울타리 너머로 아주 넓은 지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덕택에 딸의 기독교적 이상은 명확한 비전을 확립하고 형성되었다. 아버지는 그것을 아셨던 것 같다. 딸이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느 지점에서 기독교의 울타리를 벗어나기 시작하고 있는지 모두 이해하셨던 것 같다. 종교문제를 둘러싼 어머니와의 충돌은 늘 거칠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사도 바오로의 성경구절을 적은 조그만 종이쪽지를 울고 있는 내 책상 위에 아무 말 없이 올려놓고 나가시고는 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렇게 내 안에 형성된 기독교적 이상은 결코 지금 한국 기독교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 아니다. 예수 대신 미국을 섬기는 크리스찬이라니, 수많은 죄없는 젊은이들을 체제의 유지를 위해 감옥에 보내고 고문하고 죽이는 데 사용되던 악법을 폐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극우단체와 한 몸이 되어 시청 앞에 나와서 울고불고 법석을 떠는 크리스찬이라니. 사랑이 아니라 증오에 의거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구하는 자가 크리스찬이라니. 그들은 나에게 이미 크리스찬이 아니다. 그들은 사제계급의 사주를 받아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아우성쳐댔던 어리석은 유태의 군중과 다르지 않다.
극우 기독교인들이여, 대답하라. 대체 예수가 누구였던가. 예수는, 비유적으로 말하면, 바로 당신들이 그토록 증오하는 “빨갱이”였다. 무슨 말이냐고? 예수는 기존의 질서에 전격적으로 반기를 들었던 불온하기 짝이 없는 반항자였다. 그는 당대의 국가보안법 위반자였다. 예수는 국가보안법 때문에 희생되었다. 그는 종교적 의미에서는 당대의 지배계급이었던 유태의 사제들이 설정해놓은 율법의, 그리고 정치적 의미에서는 로마의 위정자들이 지정해놓은 법의 울타리를 파괴한 자였다. 그리고 그 때문에 잡혀 죽었다.
그는 인간이 인간인 바가 체제와 제도에 의거하여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신과 막바로 맺는 관계 안에서 구성된다는 것을 가르쳤다. 나는 그가 “나는 신의 아들”이라고 말했을 때, 그가 가르치려고 했던 것은 바로 인간 각자가 “신의 아들”이라는 메시지였다고 생각한다. 그는 본질적 층위에서 전격적으로 제도가 설정한 존재의 개념에 저항할 것을 가르쳤다. 그는 바깥에서 인간을 규정하는 외적 관념과 싸울 것을 명령했다.
그는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서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깊은 부름 외의 그 무엇에게도 귀기울이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는 자신을 찾아와 “아들”이라고 부르는 마리아를 향해 “누가 당신의 아들이냐?”라고 되물었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선지자”라고 “엘리야”라고 부르는 제자들의 명명을 거부하고 “인간의 아들”이라고 명확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선언한다. 그러나 그 정체성은 “신의 아들”이라는 정체성과 충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선언은, 인간 각자가 인간 각자의 자리를 떠나지 않으면서도 깊은 내면의 부름과의 관계 안에서 “신의 아들”로 격상될 것을 주문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간의 아들의 자리에서 신의 아들이 되어야 하는 자들이다.
예수는 사제계급과 정치가들이 그어준 존재의 금 안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는 안식일을 조롱했다. 그에게 존재의 가치는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세상의 왕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에게 존재의 가치를 분양해주는 자는 세속의 제일인자인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우주의 왕, 우주인 바로 그분, 존재의 무한 허공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부자들과 권력자들과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 그는 문둥이들, 병자들, 창녀들, 세리들, 가난한 어부들과 함께 지냈다.
그는 세상의 거지들과 함께 지냈고, 그 거지들이 유태의 사제들과 로마의 고위 정치인들만큼, 어쩌면 그들보다 더 높은 존재의 가치를 가진 자라는 것을 일깨워주었기 때문에, 체제의 종교적/세속적 울타리를 부수고 존재의 이상을 가르쳤기 때문에, 힘센 부자 사제들과 정치 권력자들의 손에 잡혀 죽었다. 부자들과 독재자를 위해 기도하고, 신도들로 하여금 세상에서 복을 받기 위해 진정한 천국을 잊게 만들고, 그들을 형이상학적으로 협박하여 일년에 수십억씩 긁어모아 제 배를 기름지게 하는 대형교회 목사들은 예수의 친구가 아니다.
예수는 국가보안법의 희생자였다. 그는 체제가 허용하지 않은 사상을 지닌 죄로 죽었다. 예수는 당대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혁명적인 사상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상범으로 잡혀 죽었다. 부활의 도그마는, 나에게는, 예수가 육체적으로 부활했다는 의미보다는, 체제가, 국가보안법이 무서워 웅크리고 있던 비겁한 제자들이 스스로 몸을 일으켜 예수의 길을 따라가는 결단을 내린 전격적인 신앙의 내면화가 이루어진 영적인 기적으로 여겨진다. 예수를 따르던 자들이 스스로 예수가 되기로 한 사건, 인간의, 제도의 아들 딸들이었던 자들이 신의 아들 딸이 되기 위해 몸을 일으킨 것이 나에게는 부활의 기적이다.
이 해석은 예수의 육체적인 부활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제자들은 어느 날 정말로 부활한 예수의 비전을 보았을 것이다. 사람의 인식이 지극한 경지에 다다를 때, 상징은 진실로 육화된 모습으로 한 인간의 내면 안에서 현현한다. 나는 예수의 에피파니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신비 경험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내면적 혁명을 이끌어내었기 때문에 의미를 가진다. 진정으로 제자들이 세상을 향해 떠나기 시작했던 일은 오순절, 즉 성령이 바람처럼 임하여 제자들의 혀를 강타했던 언어의 도래와 함께 일어났다. 따라서 오순절의 기적은 제자들 각자가 내면 깊은 곳에서 자신의 언어를 발견한 사건이다. 그날 제자들은 예수의 말을 자신의 말로 내면화하면서 스스로 비겁한 겁쟁이의 위상을 극복하고 진정으로 부활했던 것이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면 적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예수가 살아 돌아온다면, 무엇이라고 말할까? 본디오 빌라도의 법정에 잡혀간 예수는 “네가 왕이냐?”라고 묻는 로마 총독에게 “그것은 네 말이다”라고 응수한다. 그리고 예수는 침묵한다. 채찍질을 당하면서 능멸과 조롱을 당하면서 예수는 그 혹독한 심문 동안 내내 입을 열지 않았다. 예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네가 너의 진정한 말을 발견하지 못하는 한, 너는 나의 존재 원리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따라서 나는 너를 너의 무지 안에 던져놓는다고. 깨달음은 네가 너의 진정한 언어를 발견하지 못하는 한, 결코 너를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시청 앞에 모여서 세상의 왕인 미국대통령을 향해 찬가를 불러대는 크리스찬들, 인공기를 태우며 사상이 다르다는 한 가지 이유로 동족을 증오하며 어떤 야만적 트랜스 상태에 빠져드는 소위 예수의 신도들을 향해 예수는 다시 그렇게 말할 것 같다.
(참고자료 4)
"신앙공동체는 노동자 권리 더 보장해야"
하종강 소장, "신앙을 이유로 노조 막는 건 반대"
양정지건 nunmul25@newsnjoy.co.kr
교회 노조 설립에 대한 의견을 듣기 위해 하종강 소장(한울노동문제연구소)을 서초동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계속되는 노동자 교육과 각종 원고로 시간을 내기 힘든 상황에서 어렵게 잡은 약속이었다. 대화는 한 시간 정도 이어졌는데, 하 소장은 시종일관 교회 안에 노조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했다. 노조가 교회의 부패를 막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내놓았다. 그는 대화 시작에 앞서, 자신이 가진 신앙 배경을 설명했다. 자신이 단순히 노동운동가가 아니라 교회 노조 문제에 대해 발언할 수 있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나도 기독교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싶다. 내가 하는 말이 노동운동만 하던 사람이 하는 편협한 생각이라는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다. 나도 기독교에 천착했던 시기가 있었고 비록 날라리지만 영동감리교회의 집사다. 사춘기 시절 하나님께 서원 기도를 하기도 했다. 그래서 연구소 직원들에게도 말하지 않고 감신대신대원 시험을 봤는데 다행히 떨어졌다. 만약 붙었다면 인생 최대의 고민을 했을 것이다. 시험을 보고 떨어졌으니 이제는 하나님 만나도 할 말은 있다. 그만큼 기독교는 나에게 중요한 화두였다.
신앙공동체여서 노조가 불가하다는 주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신앙공동체라는 이유로 사람들의 권리가 침해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이유로 노동자들의 권리가 침해당할까봐 헌법에 노동자의 권리를 명시한 것이다. 다른 법도 아닌 헌법 33조에 노동자의 권리를 신성한 것으로 인정한 것이 그 이유에서다. 하나님을 앞세워 교인들을 바보로 만드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신앙공동체라는 것이 노동자들의 권리를 침해할 이유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신앙공동체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권리를 더 보장해야 하는 것이다.
최초의 신앙공동체 모습이 무엇인지 기억해야 한다. 기독교는 출애굽부터 시작되었다. 최초로 기록된 성경은 다 알다시피 출애굽기이다. 애굽에서 수 백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다가 거기서 탈출하면서 기독교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노예들이 노예 해방에서 승리하면서 자기 역사를 기록한 것이 성경의 시작이다. 가나안에서 만든 공동체 이름이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의미의 '이스라엘'이었다. 왜 그런 이름이 지어졌겠나. 인간이 인간을 다스리는 사회를 수 백년 간 피눈물을 흘리며 겪었으니 다시는 그런 사회가 되지 않기 위해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지은 것이다.
이스라엘은 인간이 다른 인간의 권리를 빼앗는 것을 막기 위해 여러 가지 제도를 만들었다. 예를 들어 열 두 지파가 모여 재산을 분배하면서 제사장직을 맡은 레위인에게는 한 푼의 재산도 주지 않았다. 종교는 힘이기 때문에 종교를 가진 사람이 재산까지 가지면 또 하나의 특권층이 생기기 때문이다. 신앙공동체 원칙에 충실하려면 교회 목사님들은 재산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보라, 얼마나 많은 대형교회 목사님들이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고, 그 교회에서 일하는 수많은 다른 직원들에 비해 얼마나 고임금을 받는가. 비성경적이고 비기독교적인 것이다. 신앙공동체를 내세우며 노동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발상은 철저하게 비기독교적인 것이다.
교회 안에 노조가 생기면 갈등 요소가 늘어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노조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도록 한번이라도 교육받은 일이 있는지 생각해 봐야한다. 우리 나라는 어떤 제도권 교육에서도 노조와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교육하지 않는다. 2년 전 비행기 조종사들의 파업을 모든 국민이 다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당시 언론에서 이들이 연봉 1억이 넘는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이들 중 연봉 1억이 넘는 사람은 10% 정도였다. 국민들은 고연봉의 사람들이 파업을 해 항공대란으로 겪었다고 알고 있지만 왜 이들이 파업을 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이것이 우리 사회를 유지해온 교육 시스템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노동 문제를 올바로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
국민들은 노조를 수십 년 동안 권력과 자본을 가진 사람들이 훈련시키는 관점으로 보아왔다. 그러나 다른 나라는 노동자의 권리와 노조에 대해 다 가르친다. 우리 나라 국민의 대부분은 노동자이거나 그 가족이다. 국민의 대부분이 노동자인 사회에서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가르치지 않고 다만 노조가 우리 사회에 해롭다는 것만 가르칠 뿐이다.
헌법이 보장한 노동3권이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이다. 단결권은 노동자가 자신의 유익을 위해 조직을 만들 권리이고 혼자가 아니라 단체로 사용자와 교섭할 권리가 단체교섭권이다. 단체행동권은 그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기업에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끼치고 시민들에게 불편을 주면서 파업할 권리이다. 이는 헌법이 보장한 신성한 권리이다. 사실, 얼마나 살벌한 권리인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타인에게 손해를 끼칠 권리이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타인을 불행하게 만들 수도 있는 권리를 왜 헌법에 보장했는지 생각해 보라. 왜 이런 권리를 전세계 대부분의 국가가 신성한 권리로 인정하겠는가? 이런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한 일이 있는가?
노조를 부정하는 시각이 교회에서는 한층 더 강한 것 같다. 이유가 무엇일까.
노조에 대한 몰이해와 교회의 보수적 성격이 결합해 문제를 한층 어렵게 몰아가는 것 같다. 성모병원을 보라. 200일 넘도록 노동자가 파업을 하는 동안, 한 번도 교섭이 되지 않았다. 신부·수녀님들은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사람들이니 우선 업무에 복귀하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다른 병원은 교섭이 이루어지는 데 가톨릭이 운영하는 병원에서 교섭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노조에 대한 몰이해가 보수적인 신앙과 결합하면서 상승 효과를 가져온 것이다.
병원 노동자들이 하도 답답해서 로마로 갔었다. 교황청의 담당자는 물론 유럽의 담당자와 인사들이 한결 같이 한 말이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자기 사회에서는 지금까지 노조와 가톨릭이 적대적인 관계가 된 적이 없었는데, 가톨릭은 언제나 약자의 편이었는데, 한국 사회에서는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이해하지 못했다. 신부·수녀님들이 노동자들을 고발해서 잡혀가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노동자에 대한 왜곡된 교육을 받은 사람 중에 당연히 성직자도 포함되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는 편향된 기독교가 들어왔다. 기독교를 노예에서 출발한 종교로 보는 관점이 있고 이를 애써 무시하는 전통이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을 잘 보면 예수님은 편파적으로 노동자를 사랑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식민지와 분단을 겪으며 굳어진 노동자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와 기독교의 보수 정서가 결합하여 더욱 천박해진 것이다.
교회 안의 노조를 사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설득할 방법이 있다면.
쉽지 않다. 노동자 역시 노조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볼 것을 강요당하는 사회에서 살았다. 노동자가 자신들의 싸움을 먹고 살기 위한 치사한 싸움이 아니라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올바른 싸움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교인들에게는 더 오래 걸릴 것이다.
안식일을 보라. 남종이나 여종뿐만 아니라 주인에게도 쉬라고 명령하고 있다. 주인이 쉬어야 하인들도 쉴 수 있기 때문이다. 악덕기업주들의 공통점이 무언 줄 아는가. 자신의 헌신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대우 그룹의 김우중 회장을 보라. 그 사람이 한국 경제에 얼마나 큰 해악을 끼쳤는지는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뭐라고 말했나. 자신이 대우 그룹 전체에서 가장 적게 자고 열심히 일한다고 강조했다. 식사도 승용차에 한다고 했다. 김우중 식사법을 개발했을 정도로 열심히 살았다고 말했다. 나도 열심히 일하니 너희도 그렇게 하라는 논리다. 이런 일을 막기 위해 성경은 안식일에 반드시 주인이 쉬라고 한 것이다. 이런 의미를 신앙 생활을 통해 익혀야 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이 엿새 동안 창조하시고 쉬셔서 안식일에 쉰다고만 가르치는 것은 사기이다. 목사님들이 공부를 해야 한다. 기독교에 대해 제대로 공부하면 노동자의 권리를 이해하게 된다. 희년 제도를 왜 두었겠는가. 철저하게 노동자 권리를 보호하는 종교가 기독교였다.
교회 노조는 고용주가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책임을 회피하려는 핑계다. 정부가 모든 결정권을 가지는 공기업 문제에 대해 정부가 책임을 지지 않는 논리와 비슷한 것이다. 공기업에서, 정부가 결정하지 않으면 사장은 아무 것도 결정하지 못한다. 노동자들은 정부 책임자가 나와서 협상할 것을 요구한다. 많은 경우, 정부 책임자가 나오지 않는다. 사용자가 누구인지는 아주 명백하다. 그 사람을 채용하고 내보낼 수 있는 권한을 행사하는 사람이 사용자인 것이다. 그 사람이 교섭에 나서면 되는 것이다. 노동자 권리를 회피하자고 하면 수많은 이유를 댈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비겁한 것이다.
줄 타는 광대가 있다고 치자. 남사당패의 광대는 보통 손에 부채를 들고 줄에 오른다. 부채는 언제나 몸이 기우는 반대 방향으로 펼쳐진다. 그래야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이 사람이 몸이 기울어지는 쪽으로 부채를 펼치면 바로 떨어질 것이다. 엄정·객관·합리를 유지하며 중립을 지키겠다는 사람은 바로 떨어진다. 교회 내에서 지위가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 중에 누구의 목소리가 더 큰가? 누구의 주장이 더 잘 관철되는가? 교회에서 지위가 낮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교회 운영에 지장이 될 정도로 지나치게 크다면 교회에서 힘있는 사람 방향으로 부채를 펼쳐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에서 목회자들의 목소리와 권한이 지나치게 크다면 부채를 어느 방향으로 펴야겠는가?
사람들이 이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이익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교회에서 힘없는 사람들의 편을 드는 것이 한 푼이라도 이익이 된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선교 사업을 유지하려면 힘있는 교회로부터 돈을 받아야하므로 그들에게 맞서는 행위를 절대 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대로 선택을 한 것뿐이다. 경제적인 작은 유익 앞에 수십 년 쌓아온 이성이 쉽게 무너지는 것이다.
숲을 보면 키가 큰 나무도 있고 작은 나무도 있다. 키가 큰 나무는 아무리 인격이 훌륭하고 착해도 작은 나무의 햇볕을 가리게 되어 있다. 이는 인격·지식·교양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가 결정하는 것이다. 교회 내에 힘있는 목사들과 힘없는 일꾼들의 대립구도가 이와 같다. 키 작은 나무가 죽지 않고 살려면 자기 키를 키우든지 큰 나무의 가지를 걷어내야 한다. 키 작은 나무는 인격과 교양이 낮아도 숲의 구조가 평등한 방향으로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교회 목사님들은 교회 직원보다 일반적으로 더 많이 배운 사람이고 세련되고 매너도 훌륭하고 교양도 많고 문화적 소양도 높다. 낮은 직급의 일꾼들은 모든 면에서 뒤진다. 목사는 숲 속의 키 큰 나무다. 우리 사회와 교회는 이 구조를 그대로 둔 체, 키 작은 나무를 계속 인격적·신앙적으로 훈련해서 숲에 적응하도록 만드는 것만 가르쳤다. 긍정적 사고방식과 행복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자아발견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수 천년 인류 역사는 숲의 구조가 평등해지는 방향으로 변해왔다. 가끔 후퇴는 했지만 진행 방향은 바뀌지 않았다. 교회 역시 이런 상황인데 누구 편을 들어야겠는가? 공정하고 중립적인 입장은 비겁한 짓이다. 바늘만큼이라도 옳은 편을 들어야 한다.
교회 안에서는 노조가 아닌 새로운 방식의 갈등 해결 방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있다.
그럼 소유의 문제를 교회에서 먼저 해결하라. 교회를 보라. 하루에 수천만 원을 버는 부자와 한 달에 50만 원을 버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소유의 문제를 그대로 둔 체, 똑같이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한다. 이런 부분에 대해 아무런 고민도 없다. 먼저 소유의 문제를 해결하면 노조 문제를 다르게 해결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세계 어느 나라도 노조에 대한 권리를 말하면서 '단 이 조항은 신앙공동체에는 적용하지 않는다'라고 한 나라가 없다. 신앙공동체에 다른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옳다면 법에 포함이 되었을 것이다. 모든 노동자는 노동기본권을 가지는 것이다.
교회 노조가 교회 개혁을 촉발할 수 있을까.
그것이 노조의 본질이다. 전교조가 10년 동안 교사 처우 개선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참교육과 민주화 문제를 말했다. 공무원이 노조를 만들었지만 아직 처우 개선 문제를 말하지 않는다. 공직 사회의 부정·부패 추방을 주장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어떤 곳에 문제가 있어서 이를 고발하는 사람은 혼자만 손해를 보고 해직되었다. 속된 말로 그런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선 정의로운 공무원만 개피를 보고 끝난 것이다. 그러나 노조가 결성되면 이를 해결할 수 있다. 앞으로 교회 부패를 도저히 보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이 모여서 노조를 만들어 교회에 대항하게 될 것이다. 조직의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하는 방법을 노조가 제공하는 것이다. 노조가 300년 역사 동안 수행한 역할이다.
신기하게도 노동자들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지라도 그 행동이 불의에 맞서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래서 노동자의 권리를 신성한 것으로 정한 것이다. 어느 나라도 '자신의 개인적인 유익이 아닌 공적인 유익을 위해 노동 3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단서를 가진 나라는 없다.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의 이익을 위해 권리를 사용하면 이것이 사회의 공익이 되기 때문이다. 교회에도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목회자들이 직원들에게 존경을 받는다면 노조가 덜 만들어질 것이다. 교회에 노조가 생길 수밖에 없게 된 상황을 반성하는 것이 먼저다.
노조 간부가 귀족화되는 문제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존재한다.
노조가 가진 역기능이 있다. 그러나 역기능은 순기능에 비해 무시해도 적을 정도로 작다. 우리사회는 수십 년 동안 역기능만을 세뇌 당한 사회였다. 노조가 그렇게 나쁘다면, 그렇게 노조를 혐오하는 힘 있는 사람들이 법과 제도를 만듦에도 불구하고 왜 노조를 인정했겠는가? 노조를 불법으로 하지 못하는 이유는 노조가 우리 사회에 미치는 유익이 크기 때문이다.
교회 직원들이 지역노조를 만들 때 여러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큰 교회가 작은 교회를 지원하는 일이 생길 것이다. 노조는 본래가 산별 노조이고 지역 노조이다. 기업별 노조는 한국만의 특수한 현상이다. 필리핀과 우리 나라만 가진 기형적인 구조다. 지역 노조를 만들어도 교섭을 하면서 충분히 조정이 된다. 재정 여유가 있는 교회에서 가난한 교회를 지원하고 교회공동체에 복지의 개념이 들어올 것이다. 큰 교회로서는 반대할 것이다. 교회 노조를 반대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논리를 개발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 노조는 대세이므로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교회에 노조가 안 된다는 것은 한국에서나 통하는 아주 무식한 말이다. 교회 부교역자들에게도 언젠가는 노조 설립 움직임이 생길 것이다. 부교역자는 버스를 타고 다니고 담임목사는 벤츠를 타는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목회자는 가장 가난한 사람이어야 한다. 내가 목회의 길을 선택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가 지금보다 훨씬 가난하게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은 노동자 수준으로는 살아도 된다. 그러나 목회자는 굉장히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 왜 레위인에게 재산을 주지 않았겠는가? 하나님 권위를 등에 업은 사람이 재산까지 가지면 반드시 부패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사회의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사기다. 모든 권력은 부패한다는 가정을 갖는 것이 부패를 막는 길이다.
권위를 가진 사람은 자칫 타락할 수 있으므로 이를 막는 제도를 가진 사회는 더 깨끗해질 수 있다. 교회 노동자들이 작게나마 그런 역할을 할 것이다. 불이익을 감수하고 하지 않아도 되는 고생을 하는 노동자들에 의해 교회가 변할 것이다. 이런 움직임을 교회는 일반 사기업체와 똑같이 막을 것이다. 구사대와 보수적인 교인들을 동원할 지도 모른다. 노조가 생기면 교회 돈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게 된다. 이는 교회에서 이권을 누리던 사람들에게 엄청난 불이익이다. 앞으로 교회의 추악한 모습을 많이 보게 될 것이다.
2003년 04월 08일
(참고자료 5)
노동부의 노동정책
동북아 경제 중심국가의 도약을 뒷받침 할 수 있도록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겠습니다.
* 대화와 타협을 기초로 하는 상생의 노사관계를 구축하겠습니다.
-노사관계법 . 제도계선의 선진화 추진
-노사정환 대화체제 구축
-합리적 의식. 관계형성 및 노사자치주의 확립
* 적극적 고용정책과 생애에 걸친 직업능력개발체제구축으로
고용안정과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확보하겠습니다.
- 활력있는 노사관계
- 일자리창출
- 평생직업능력개발체제 구축
- 최약개층별 고용추진
- 고용일정 서비스 선진화
* 참여형 근로복지 및 근로계층간 격차완화를 통해
더불어 사는 균형 사회구현에 힘쓰겠습니다.
- 근로자 삶의 질적 향상
- 근로복지 확충, 고용평등사회 구현
- 노동보험확충내실화
- 근로계층간 격차완화
참고자료 6)
"지율 스님, 우리는 순교자를 원하지 않습니다"
세계해방신학포럼 참관기 (2) 해방신학의 거목 레오나르도 보프
엄기호(getoutof) 기자
레오나르도 보프는 경이의 낮은 탄성을 내쉬었다. 움푹 패인 그의 눈은 안타까움과 존경으로 더 깊어졌다. 전세계 그리스도교 사회운동가에게 절대적인 영향과 영감을 주었던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의 거장 레오나르도 보프는 인터뷰 도중에 나온 지율 스님의 90일간의 단식 이야기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는 생태신학으로 더욱 확장되고 깊어진 해방신학의 실천적 동반자를 지구 반대편에서 찾은 것에 기꺼워하면서, 동시에 지율 스님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에 안타까워 했다. 그리고는 즉석에서 지율 스님의 단식 중단을 호소하는 연대의 메시지를 적었다. 아래는 그 메시지의 전문이다.
보프의 친필 메세지
지율 자매에게.
나는 모든 생명을 지키기 위한 당신의 희생에 함께 합니다. 나는 당신의 윤리적, 영성적 결단에 존경을 표합니다. 당신은 한국 정부와 한국의 시민들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사랑과 연대의 좋은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당신의 단식투쟁은 이미 모든 종류의 생명을 존경하게 하며 자연에 대해 깨닫게 하는 거대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것은 이미 엄청난 수확입니다. 우리는 순교자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당신과 같은 사람들이 우리와 사람들을 돕기 위해 더 우리와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당신은 살아야합니다. 제발, 저를 포함하여 당신을 향해 부르짖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주세요. 단식을 중단해 주세요. 나의 기도와, 나의 사랑을 당신의 삶에 보냅니다.
레오나르도 보프
보프가 그의 메시지 마지막에 쓴 사랑(Cariuho)라는 단어는 포르투갈어에서 어머니가 자식에게 갖는 그런 사랑을 말한다. 영어의 케어(care)와 러브(love)가 포함된 사랑이라고 한다. 사랑을 뜻하는 10개가 넘는 포르투갈어 중에서 그가 이 단어를 택한 것은 지율에 대한 존경과 안타까움을 담은 특별한 의미라고 통역자는 이야기해주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그리스도교의 사회정의와 평화에 대한 믿음에 이끌려 사회운동에 나선 이들에게 레오나르도 보프는 지울 수 없는 거목이다.
그는 70년대에서 80년대까지 해방신학 담론을 주도해 마침내 교황청의 경고와 함께 침묵할 것을 명령받았던 살아있는 ‘해방신학’이다. 그러나 결국 제도 교회에 절망한 그는 바닥 공동체에 희망을 걸고 사제복을 벗어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떠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억압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영성의 해방 신학자이다. 70년대 경제적, 정치적으로 억압받는 사람에 대한 신학으로 출발한 해방신학은 80년대와 90년대를 거치면서 그동안 언급조차 되지 않던 사회적 약자인 여성, 소수부족, 원주민, HIV/AIDS 감염인들, 동성애자 등과 조우하며 그 해방의 의미와 외연을 확장하였다.
그리고 90년대 중반 이후, 레오나르도 보프는 해방신학을 넘어 생태신학을 주창하며 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었다. 그런 그에게 지구 반대편에 있지만 지율 스님은 같은 지구에 살고 있는, 같은 영성을 나눈 도반(道伴)이다.
보프는 인터뷰에서 지율 스님의 희생을 예수의 삶에 비교하였다. 예수 역시 사람들의 고통에 연대하기 위하여 단죄되고 처벌받았다. 보프는 지율 스님의 단식 투쟁을 위대한 불교의 전통에서 발견되는 희생이자 신비이며 마하트마 간디에게로 이어지는 무저항, 비폭력 전통의 영성이라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그는 인터뷰에서, 또 지율 스님에게 보내는 연대의 메시지에서 이제 그만 단식을 중단해줄 것을 간곡히 호소하였다.
다음은 레오나르도 보프와 나눈 대화 전문이다.
- 당신은 이 해방신학포럼을 제안한 사람 중의 한명이다. 이 포럼을 제안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라틴아메리카와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의 해방신학자들은 과거에 3-4년마다 한번씩 모여서 서로 성과를 이야기는 전통이 있었다. 그러나 1984년 바티칸에 의해서 해방신학이 비난을 받은 이후 이 전통은 이어지지 못하였다.
바티칸은 재정적 지원을 하지 못하도록 지원단체들에 압력을 가하였고, 주교들은 감히 해방신학모임을 주선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우리 해방신학자들의 네트워크는 붕괴하였다.
그런데 세계사회포럼은 교회의 통제에서 벗어나서 우리 해방신학자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세계사회포럼의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정신은 사실 해방신학의 정신과 아주 흡사하다. 빈곤 문제에 대한 관심, 국제적인 정의, 토지개혁과 토지에 대한 질문 등. 이 모든 것은 해방신학의 주제기도 하다. 따라서 세계사회포럼과 함께 이 해방신학포럼을 기획하게 되었다."
- 현재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의 상황은 어떠한가? 브라질 바닥공동체와 같은 해방신학 운동의 상황도 같이 이야기해달라.
"사실 해방신학은 빈곤에 반대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을 주장하는 모든 교회들의 대단히 정상적인 신학이다. 또한 인권과 소수부족과 여성과 어린이와 기타 소수자들과 함께 하는 모든 교회 안의 사회 사목자들의 정상적인 신학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해방신학은 그들이 참고하고 빛을 얻는 신학이다.
해방신학은 브라질 바닥공동체(주:브라질의 바닥공동체는 브라질 민중들이 삶과 신앙을 일치시키는 자율적인 공동체다)의 중요한 네트워크를 구성한다. 브라질에 10만개의 바닥공동체가 존재한다. 또 해방신학은 성서와 자신의 삶을 연결하려고 하는 백만이 넘는 '성서 모임'의 중추다. 지극히 일상적이고, 일상에서 살아 있는 신학이 해방신학이다."
- 80년대까지의 해방신학이 가진 문제점은 무엇인가? 계승해야 할 것과 검토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말해달라.
"70년대에서 80년대 초반까지의 해방신학은 주로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착취받는 이들에 대한 것이었다. 80년대와 90년대에 해방신학은 ‘가난’의 다양한 모습을 발견하였다. 원주민들, 흑인들, 가부장제에 의해서 착취당하는 여성들, 모든 차별의 희생자들, HIV/AIDS에 영향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 등등.
이 모든 빈곤은 각각의 특별한 억압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각각의 특별한 해방을 요구한다. 따라서 해방신학은 이런 각각의 특별한 해방을 다루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파울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교육학)을 만났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 그들을 해방하는 방법을 찾고 개발해야한다. 어떻게 해방하고, 어떤 방향을 택하는 것은 우리 해방신학자들의 역할이 아니라 억압받는 사람들의 몫이다. 그리고 나는 생태의 문제로 넘어왔다. 개인적으로 나는 나를 생태-해방 신학자로 규정한다."
- 당신이 생태-해방신학으로 관심을 옮기게 된 계기에 대해서 소개해 달라. 특별히 해방신학은 그동안 억압받는 ‘사람’에 대해서 주로 이야기를 해 왔는데, 당신은 발제문에서도 ‘인류 전체’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 비슷한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 사람을 착취하고, 자연을 착취하고 지구를 착취하고. 현재의 시스템은 가능한 모든 자원을 착취하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 타자에 대한 어떠한 고려와 존중도 없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전세계에 부과되고 있는 현재의 착취의 방식은 사회적으로 생태적으로 엄청난 비용을 감당해야 한다.
마실 물이 위기에 처해 있다. 2억이 넘는 사람들이 마실 물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 하루 아침에 석유와 다른 에너지는 고갈될 것이다. 생태 시스템은 그 내재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자연뿐만 아니라 전체 인간과 인간성에 대한 폭력이다. 우리는 절대 자원을 끊임없이 축적할 수 없다.
사실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심각한 어려움을 직면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생태 문제는 더 이상 가난한 사람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라 현실의 문제다. 따라서 인본주의 전통과 종교 모두에서 생태문제는 커다란 염려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것은 당연히 신학적인 도전이다. 미래가 가능하도록 인류를 다시 교육하기 위한 요소들을 다시 찾고 소개해야 한다."
- 어떤 사람들은 생태라는 말을 실재가 아닌 메타포로 사용한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실 환경과 환경보호를 이야기하는 사람과 생태주의자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생태주의의 첫 단계는 물론 위기에 처한 종을 보호하고 푸른 지구를 보존하는 것이다. 둘째 단계는 단지 자연뿐만 아니라 전체 생태 시스템을 위하여 살아있는 모든 것을 보살피는 것이다.
이것은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인문학의 문제다. 사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이다. 진화도 열린 진화로 이해를 하는 새로운 접근이다. 삶은 진화의 순간이다. 또 진화는 삶의 순간이다. 혼란은 생성적이며, 삶을 더 정교하고 공들여 다듬는다.
생태주의는 이런 통일적인 비전이다. 지구는 내재적인 관계들로 구성된 하나의 커다란 시스템이다. 모든 것은 연결되고 서로 의존하며 엮여있다. 인류는 이런 살아있는 과정의 결과이다. 우리는 삶의 공동체를 이야기한다. 이것은 '지구헌장'에 잘 나타나있다. 여기에는 생태와 윤리와 영성이 분리되지 않고 서로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 그렇다면 운동방식에 대해서도 새로이 제기하는 것이 있는가? 생태주의적 운동방식, 혹은 페다고지로 제안할 것이 있는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새로운 페다고지가 아니라 자연과 삶과 생명을 존중하는 다른 태도, 새로운 비전이다. 사실 우리는 정치적, 상징적, 공학적 폭력, 그리고 지배로 점철되어 있는 과거의 패턴을 버려야 한다. 폭력대신, 우리는 다양성 속에서의 친교, 소통 그리고 시너지에 강조점을 두어야 한다.
이런 것은 위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같이 살아가며, 같이 찾아야 한다. 핵심적인 것은 배려, 공동책임 그리고 연민이다. 이런 맥락에서 페다고지를 생각하자.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 시작하고 바꾸어야만 하는 것으로써 핵심적인 것은 대화다. 그리고 협상이며 교류며 나눔이다.
이런 점에서 페다고지는 우리와 공동의 집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연민이다. 사실 공동의 집을 이야기하지만, 모두가 이 공동의 집에 있지 못하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마실 물을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 땅에서 쫓겨난 사람들, 이들은 공동의 집안에 있지 않다. 포용과 공동의 집을 이야기하는 것은 배제된 사람들, 주변화된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것이어야 한다. 생태주의는 우리 모두가 이런 공동의 집에서 살고 있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파울로 프레이리 연구소는 생태학교를 만들었다. 글자에만 눈을 뜨는 것이 아니라, 생태에 대해서도 눈을 뜨게 하는 학교다. 어린이를 위한 학교가 아니라, 어떤 단체나 행정기관 그리고 회사에서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곳이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생태적으로 문맹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장 큰 생태학적 죄를 범하고 있다."
- 한국에서 지금 한 불교 스님이 천성산 터널 개발에 반대하며 90일 정도 단식을 하고 있다. 이 천성산은 도롱뇽과 같은 작은 생물들의 서식처다. 90일이 넘게 단식을 하면서, 그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고, 지금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천주교 신부와 수녀, 평신도 그리고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그의 단식 중단을 호소하고 있다. 한국 정부에 대해서도 터널 공사를 중단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의 단식에 대해 연대의 메시지를 보내달라.
"나는 이 스님이 간디가 걸었던 정치적 영성적 길의 비폭력적이고 연민에 기초한 위대한 전통에 기반하고 있다고 믿는다. 삶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는 것. 불교의 신비로운 전통에는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려는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열반에 들기를 거부한 보살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의 이런 희생적인 태도는 예수의 그것과 무척 닮았다.
예수는 고통받는 사람들과 연대하기 위하여 처벌받고 죽임을 당했다. 이것은 같은 희생적인 태도다. 나는 이것을 그의 영성과 문화적 맥락에서 선택된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 그러나 그녀의 희생이 공허하게 끝나서는 안 된다. 이것이 내가 그가 단식을 중단하기를 호소하는 이유다. 삶으로 돌아와 달라. 벌써 지율의 단식은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단식을 그만두기를 간청한다."
한편 세계해방신학포럼에 참석한 많은 이들도 지율 스님의 마음에 연대와 지지를 표하며 단식 중단을 호소하였다.
프랑스 카리타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앙투왕 손탁 신부는 놀라움과 안타까움을 표하며 이렇게 말했다.
"사람의 몸은 50일 이상 단식을 하면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치명적인 상태가 된다고 들었다. 그런데 무엇이 그로 하여금 90일 단식을 가능하게 하는지 그녀의 마음과 영성이 놀랍고 존경스럽기만 하다. 그러나 단식을 그만두는 것이 그뿐만 아니라, 그의 뜻에 따르는 사람들을 위한 길이기도 하다. 단식을 그만두고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생명을 위해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
해방신학포럼 참석자들의 지율에 대한 지지와 연대는 이번 세계해방신학대회의 정신이기도 하다.
해방신학포럼 이모저모
둘째, 셋째 날로 접어들며 포럼은 생태와 소수자들에 대한 이야기로 열기가 뜨거웠다.
둘째 날(1월 22일) 오후 ‘새로운 유토피아를 위한 신학’이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레오나르도 보프와 함께 발제를 한 뉴욕 유니온 신학대학의 정현경 교수는 "유토피아는 내일이 아니라 오늘에, 저기가 아니라 여기에, 먼 곳이 아니라 우리의 몸속에서 이미 존재하고 만들어지는 것"이라며 소수 부족, 동성애자 등의 공동체에서 생성되고 살아있는 에코페미니즘의 영성을 소개하였다.
셋째 날(1월 23일)의 전체 기조 발제는 페미니즘 신학이었다. 기조발제자는 하느님의 모습은 성서에서도 하나의 모습이 아니라, 때로는 바람으로, 때로는 소리로, 때로는 불길로 나타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다양함은 하느님의 이미지지만, 동시에 사람들의 신성함에 대한 다양한 경험의 다양한 이미지라고 이야기하였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여성·소수부족·성적 소수자를 비롯해 모든 사회적 약자들의 신성함에 대한 경험이다.
이를 통해 신성함에 대한 남성적 경험과 이미지를 벗겨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약자들의 신성함에 대한 경험과 이미지는 자연에 대한 존경으로 가득 차 있다.
뒤이은 소수부족들과 인도 불가촉천민, 여성신학자의 증언과 발제는 소수자들이 얼마나 자연과 함께 공존하며 그들의 영성을 보존하고 키워왔는지를 보여주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결과 인도의 불가촉천민들과 라틴 아메리카의 소수부족은 초국적 기업에 물과 땅을 빼앗겼다. 물과 땅은 상품화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에게 물과 땅은 상품이 아니라 영성의 근원이며, 영성 그 자체라고 강조하였다. 땅과 물을 되찾기 위한 투쟁은 물과 땅의 영성을 자신들의 몸으로 각성하고 공동체로 회복하는 과정이었다고 증언하였다.
자연과 자연 안에 살아가는 모든 것과 그 하나하나의 신성함에 대한 존경은 그들에게는 더 풍부하게 하느님을 만나는 과정이며 그 만남을 언어화하는 것이 그들의 신학이다.
지율의 단식은 땅과 물을 향한 여성과 소수부족과 불가촉천민들의 싸움과 맥을 같이 한다. 언어와 공간을 넘어,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한 존경과 연대의 여정에서 해방신학포럼의 참가자들은 말한다.
"지율을 살려주세요. 천성산을 살려주세요." / 엄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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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란 교수가 데일리 서프에 올렸던 글이군요. 이 글 보면서 저는 참 착잡함을 느꼈습니다. 김정란 교수, 이렇게 뛰어난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왜 노무현에겐 항상 어린 양이 될까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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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들의 민주화운동에 참여함이 대단했지요. 민중신학이 잠자는것도 그런연휴가 있습니다.기독교인의 정치의식의 한계인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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