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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과 가난의 축 위에 신학교 세우다

빈곤과 가난의 축 위에 신학교 세우다
[인터뷰]도시빈민 지역에 건축 중인 필리핀아태장신대 이홍정 선교사

전 세계적으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이는 선교 분야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동남아시아와 오세아니아, 태평양을 잇는 필리핀은 지리적 위치나 영어권 문화 등 여러 가지 요건이 충족하는 선교 기반 지역으로, 이미 한국교회에도 많은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풍부한 인적 자원과 영어권 문화, 경제적 효율성으로 선교 요지로 꼽히는 필리핀에 실천중심의 교육선교를 표방하는 필리핀아시아태평양장로회신학대학교(Asis-Pacific Christian College and Seminary)가 건축된다.

▲지난 8월 학교가 일부 건축된 모습. 1차 공사 마감일인 다음해 5월말까지 10억원이 모금되야 하지만 현재 절반 정도만 충당된 상태다.©APCCS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선교지도자들을 길러내는 교육 선교 센터로서의 비전을 가졌지만 학교가 설립되는 지역은 도시빈민쓰레기촌인 빠야따스 접경지역인 이주민집단촌 몬딸반이다.

다른 이들은 최적의 교육 환경을 찾아 학교를 세우는 반면, 필리핀아태장신대는 ‘복음이 인간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이론이 실천으로 적용될 수 있는 낙후된 지역을 학교 부지로 선택했다.

예장통합 기획국장, 아시아기독교교회협의회(CCA) 국장, 세계교회협의회(WCC) 상임위원을 거쳐 현장으로 돌아간 필리핀아태장신대 총장 이홍정 선교사를 만났다.

“꽃향기처럼 바람처럼 전해지는 복음의 향기”

학교가 세워지는 몬딸반 지역은 이주민집단촌으로 저개발 빈곤지역이다. 언뜻 듣기에도 학교 부지로는 부적합한데, 이홍정 선교사는 그 곳에서 지역에 깊이 뿌리 내리는 실천 중심의 신학교육을 꿈꾸고 있다.

▲이홍정 선교사©뉴스미션
이 선교사는 “보편적인 생각으로는 반대를 할 수밖에 없는 곳”이라면서 “하지만 이 학교는 의도적으로 빈곤과 가난의 축을 따라 간 것이고, 거기서 ‘생태적으로 의식화된 기독교인’을 양성하려는 목적이 있어요”라고 말한다.

질병과 내전, 빈부격차 등 여러 가지 이후로 자신의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이 모인 몬딸반 지역을 선한 사람들, 곧 지역 기독교인들과 필리핀아태장신대 학생들이 함께 변화시켜 가는 것, 이것이 이홍정 선교사의 상상력이다.

삶의 자원을 나누고, 나눔의 정의를 실천하면서 지역 주민들의 깨지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는 그런 선한 이웃.

“학교가 건축되면 지역주민들과 호흡하면서 진정한 이웃이 되고 싶어요. 꽃이 향기가 스스로를 선전하지 않아도 흘러가고, 바람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든 이들에게 느껴지는 것처럼 복음의 메시지가 그렇게 흘러갔으면 하는 거예요. 신학교육을 받는 우리의 삶이 꽃과 바람같이 그런 영향을 미치도록 말이죠.”

그가 말하는 실천중심의 교육선교공동체는 다름 아닌 이웃만들기의 과정이다. 학생들이 누군가의 선한 이웃이 될 수 있도록 직접 실천할 수 있는 것. 그래서 4년간의 교육을 마친 후에는 어느 현장에서도 학생 자신부터 선한 이웃이 되어 사역할 수 있도록 말이다.

“생명교육선교 동역자를 찾습니다”

이홍정 선교사가 지역사회와의 호흡을 강조하는 것은 ‘이제는 선교사 중심의 선교 시대가 끝나고, 지역교회가 각 지역의 선교를 책임지는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판단 때문이다.

지역교회의 지도자가 누구냐,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교회의 미래나 정체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지난 5월 기공식 현장. 허리를 숙이고 삽을 든 이가 이홍정 선교사©APCCS

예장통합 기획국장을 거쳐 CCA, WCC 위원 등 세계 에큐메니칼 기구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그가 지난 2006년 10월 후원 모금이 절실한 건축 중인 학교로 돌아온 것도 자신의 경험을 교육 현장에서 실천하기 위함이다.

이 선교사는 “21세기 기독교의 미래는 교육 선교에 달려 있다고 본다”며 “바른 지도자가 세워지면 그 교회가 지속적으로 성장할 것이고, 교회 일치를 도모해 내면서 그야말로 지역사회를 변화시켜내는 변혁적인 복음의 능력을 세워갈 수 있다”고 전했다.

교육의 중요성을 한국교회 성도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이홍정 선교사는 ‘아태일만교육선교운동’으로 동역자들을 찾고 있다.

아태일만교육선교운동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교회와 선교를 위한 일만명 교회 지도자 양육을 목표로 매월 1만명이 1만원에 해당하는 소유와 은사를 나누며 평생을 참가하는 평생교육선교운동이다.

“진정한 성장은 모두가 성장하는 것”

아태지역의 교육 선교 백년대계를 가지고 자원과 열정, 공감대를 모으는 이 운동은 전 지구가 하나의 생명으로 이어져 있다는 정신에서 비롯된다.

내 교회, 한국교회만 생각하면 아태지역의 일반 교회지도자 양성은 아무 의미없는 일에 불과하다. 하지만 전 세계적 차원의 복음과 선교를 위해서는 기꺼이 동참할 가치가 있는 운동이다.

▲필리핀아태장신대 학생들이 사회봉사주간에 지역 교도소를 방문해 함께하는 모습©APCCS

이 선교사는 “모든 교회가 한 몸이고 지체라는 인식을 가지고 서로에게서 배우려 애쓰는 것, 서로 다른 상황에서 존재의 표현은 다르지만,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계교회가 형성된다는 그런 인식을 갖는다면 모든 교회가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전 지구를 하나의 지체라고 생각하면 한국교회만 부흥한 모습은 몸의 일부만 비대해진 기형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각 지체가 균형있게 같이 성장하는 ‘전체의 성장’은 대형교회만 크고 작은교회는 사라지는 한국교회의 현실과, 전 세계적 교회성장의 불균형을 경험하는 세계교회 모두에게 필요한 과제이다.

지역교회에 선한 이웃이 되어 주되, 전 지구적 차원에서 복음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는 생명선교교육공동체를 꿈꾸는 이홍정 선교사의 꿈이 실현되길 바라는 이유는 한국교회, 더 나아가서는 세계교회가 그런 지도자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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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아줄기세포 연구에 관한 신학적 성찰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관한 신학적 성찰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관한 신학적 성찰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1. 미궁: '신학적 지름길'을 선택하지 못하는 이유

배아줄기세포 연구 결과로 지금 우리 사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윤리적 쟁점은 대략 세 가지 정도로 집약된다. 인간생명 기점에 관한 문제, 복제인간의 탄생 가능성 문제, 그리고 난자제공 여성의 인권 문제가 그것이다. 이 쟁점들 가운데 복제인간의 탄생 가능성 문제는  현실적으로 당면한 문제로서보다는 장차 야기될 수 있는 우려의 차원에서 논의되고 있고, 난자제공 여성의 인권 문제는 다른 두 가지 쟁점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 문제의 성격이 덜 복잡하다. 반면 가장 뜨겁게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인간생명의 기점에 관한 문제이다. 인간생명의 기점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배아줄기세포 연구가 인간생명을 도구화하고 있는가 아닌가에 대한 판단이 달라지기 때문에 온통 그 논의가 이 문제에 집중되고 있는 양상이다.

이에 대한 윤리적 문제, 특별히 신학적 윤리 문제를 검토하는 동안 나는 마치 미궁에 빠진 듯한 느낌이었다. 사실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포함한 생명공학에 대한 신학적 판단은 대개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생명의 존엄성,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은 인간생명의 존엄성은 인위적 조작의 대상이 되거나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는 인식은 신학적 논의 안에서는 확고한 하나의 상식처럼 되어 있다. 물론 생명공학의 성과를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실마리로 인식하여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견해가 없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대개의 신학적 논의는 어떤 수준에서든 생명을 인위적으로 다루는 것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데서 일치하고 있으며, 최근 쟁점이 되고 있는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불가 판정을 내리거나 최소한 조심스러운 비판적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와 같은 신학적 논의는 윤리적 쟁점이 되고 있는 배아의 원시선 형성을 기점(수정후 14일 전후)으로 생명이냐 세포덩어리냐 하는 문제에서 처음부터 사실상 예정된 결론을 전제로 하고 있다. 생명공학, 의학, 법학, 윤리학, 신학 등 그 다양한 분야마다 저마다의 가치기준을 따라 인간생명의 기점의 제시하는 입장은 각기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그 가운데서 수정 그 순간부터 인간생명이 시작된다는 생명관을 따르는 신학계의 대체적인 입장은 인간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태도일 수 있다. 설령 차후에 어떤 과학적 성과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명확한 생명의 시작 기점에 관한 기준이 제시된다 하더라도(그래서 신학적 관점이 과학적 판단에서 오류였다는 것이 판명된다 할지라도), 그와 같은 신학적 생명관의 의의 자체는 결코 훼손되지 않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 점에서 신학도로서 생명에 관한 근본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매우 안전한 지름길이다. 어떠한 비윤리성의 혐의에서도 거의 자유로울 수 있는 우월하고도 안전한 지름길이다.
그 안전한 지름길이 있는데도 미궁이라니! 내가 미궁을 헤매고 있는 듯이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가장 우월한 그 신학적 윤리의 입장이 사실상 생명윤리의 무력화를 초래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다. 신학은 근본적 생명관을 완고하게 고수함으로써 인간생명의 존엄성을 주장하는 자기 정당성을 한껏 자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근본적 생명관을 주장함으로써 이미 열린 판도라의 상자를 다시 덮을 수 있을까?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반대하는 신학적 입장은 그것을 만악의 근원으로서 판도라 상자처럼 취급한다. 그러나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직접 수행하는 이들은 그것을 하늘이 내린 선물로 알고 있다. 실제로 이 연구에 참여한 이들은 난치병의 극복이라는 숭고한 생명사랑의 동기를 가지고 있다. 그 연구가 지닐 수 있는 위험성을 충분히 예측하고 제어할 수만 있다면 생명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의 존엄성을 구체적으로 지켜내는 확실한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야말로 모두가 자명하게 만악의 근원으로서 판도라의 상자라고 단정지을 수 있다면 더 이상 논란의 소지는 없다. 반인륜적이고 반생명적인 그 연구를 제지하는 길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만악의 근원일 뿐이라면 구태여 그 연구를 하려고 하는 과학자가 있을까? 비록 여러 가능성 가운데 하나일지라도 그 연구로 얻을 수 있는 확실한 유익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그 연구를 지속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상황에서 근본적 생명관을 고수하는 입장은 그 우월한 윤리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찬성과 반대의 논리 사이에서 제기될 수 있는 다양하고 복잡한 문제들을 간과해버림으로써 인간생명 존엄성을 지키는 구체적인 방법의 문제를 소홀히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신학의 입장에서는 가장 강력하고 적극적인 입장을 개진했다고 자위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연구를 반대하는 신학과 찬성하는 과학 사이에 빈틈이 생길 수밖에 없고 그 빈틈은 신학의 입장에서는 사실상 방치된 영역이 된다. 결과적으로 그 빈틈은 신학적 생명윤리가 지향하는 목적과는 상반되게, 극단적으로 말하면 무방비 상태로 생명공학의 영역이 될 것이다. 그 경우 신학은 무책임의 혐의, 심지어는 위선의 혐의마저도 받을 수 있다.
더욱이 배아줄기세포 연구는 그 연구 성과에 희망을 걸고 있는 수많은 난치병 환자들의 기대를 안고 있다. 분명한 수요자들의 요구가 있다는 것이다. 질병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저버릴 수 없는 상황에서 그 효과적인 길을 찾으려는 노력을 제지하기는 어렵다. 물론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는 성체줄기세포 연구를 통한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보다 더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연구를 예견되는 위험성을 이유로 쉽사리 제어할 수 있을까? 아마도 특정한 과학자 집단 또는 과학자 개인에게는 그 제어가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컨대 황우석 박사와 그 연구팀에 집중적인 윤리적 비판과 제도적 규제를 가해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중단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면 처음 싹을 잘랐기에 그 다음 문제는 해결되는 것일까? 배아줄기세포 연구의 공리적 유용성이 존재하는 한 그 연구 자체를 막을 길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저 살상무기에 지나지 않은 핵폭탄도 사실상 규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인간생명을 살린다는 숭고한 목적을 내세우는 배아줄기세포 연구 그 자체를 막는 것은 더더욱 어려워 보인다. 설령 황우석 박사와 그 연구팀이 연구를 중단한다 하더라도 또 누군가에 의해 그 연구는 지속될 수밖에 없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펼쳐지고 있는 신학적ㆍ윤리적 논의에서는 유감스럽게도 그 논점이 선명하게 부각되고 있지 않지만, 사실 한편에서 끊임없이 지적하고 있듯이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자본의 개입은 충분히 예견되는 상황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보이지 않는 그 어떤 것마저도 상품으로 변화시키는 전능성을 발휘하고 있는 자본이 그 탐스러운 열매를 가만둘 리 없다. 이것은 사실 연구에 참여하는 과학자의 순수한 동기와 의지를 벗어나는 차원이다. 과학자들이 가진 순수한 선의와 달리 생명공학적 성과는 자본과 시장의 논리에 의해 좌우될 공산이 크다. 특별히 근대 자본주의하에서 과학기술의 성과는 예외 없이 그와 같은 궤적을 밟아왔다는 사실은 그와 같은 예측의 확실성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 자본의 전능성은 기필코 그 연구를 진전시킬 것이며 그 연구 성과를 전유하려 할 것이다. 오늘 자본주의 체제는 이미 광범위한 인간 몸뚱어리 시장(장기 시장)을 형성하고 있음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바로 이러한 상황 때문에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대해 신학적 관점에서 근본적인 생명관을 피력하거나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생명윤리를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마치 미궁에 빠진 듯한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런 사연 때문이다. 이제까지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윤리의 신대륙'에 그 첫 발걸음을 내딛는 처지에서 어찌 당황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2. 생명공학을 둘러싼 논의 지형

기왕에 지름길을 택하지 않았으니 조금 더 신중히 여러 길을 검토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포함한 생명공학의 성과와 그 평가에 대한 논의는 여러 갈래로 진행되고 있다. 우리는 여러 입장들이 주장하는 바 핵심적 내용이 무엇이며 또 그것이 갖는 문제는 무엇인지를 생각해봄으로써 우리 사회에서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어떤 대안을 모색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법학자 이상돈은 우리사회에서 생명공학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 하는 가치문제에 대한 주장들의 유형을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한다(이상돈, 『생명공학과 법 - 생명의 공학화와 생명문화의 절차적 재생산』, 아카넷, 2003). 윤리주의, 과학주의, 규범주의, 공리주의가 그것이다. 물론 그의 말대로 이 유형들은 서로 중첩되거나 엇갈릴 수 있으며, 따라서 그 입장의 유형들은 일종의 이념형이라 할 수 있다. 윤리주의는 생명공학을 가장 엄격하게 통제하는 입장인 반면, 과학주의는 생명공학에 가장 많은 자유를 부여하는 입장이다. 이 둘 사이에 규범주의와 공리주의가 위치하는데, 현재 우리 사회에서 규범주의는 윤리주의에 다가서는 입장인 반면 공리주의는 과학주의에 좀더 가까이 다가서는 입장이다. 여기서 그의 연구에 의존하여 그 대별되는 입장의 유형들을 살펴본다. 유형의 분류는 전적으로 이상돈에게 의존하고 있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일정 부분 나의 몫이다.

1) 윤리주의
윤리주의는 생명공학의 위험성을 가장 강력하게 통제하려는 입장으로서 인간의 몸을 형이상학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윤리화하는 관점을 말한다. 개신교의 경우에는 통일된 입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앞서 말한 대로 대체로 일치하는 신학적 관점, 그리고 가톨릭 교회의 공식적 입장이 이에 해당한다. 또한 우리 사회에서는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생명공학에 이의를 제기하는 시민사회단체들의 입장도 대체적으로 이에 해당한다. 종교적 차원에서 신이 부여한 생명의 존엄성을 말하든 자연적 질서를 따름으로써 생명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고 말하든 이 입장은 생명에 대한 인위적 조작 자체를 금기시한다. 이 입장에서는 특별한 경우의 체외수정(시험관아기)이나 장기이식을 제외하고는 대개의 생명공학적 시도를 부정한다. 이러한 입장을 따르면 생명에 대한 인위적 조작은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행위이거나 자연적 질서를 거스르는 행위이다. 여기에서 문제는 생명공학의 남용으로 생명 가치의 위계화 내지는 생명 자체의 경시를 가져오고 나아가서는 신적 질서 내지는 자연적 질서의 와해로 대재난이 야기될 수 있다는 것이다. 흔히 거론되는 '미끄러운 경사길 이론'은 그와 같은 위기의식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수사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내달리는 과학기술의 성과 앞에서 의도하지 않게 사실상 윤리적 공백지대를 허용할 가능성이 많다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그 점은 예컨대 교회가 낙태를 허용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 신자들은 낙태를 행하고 있는 현실에서도 확인된다. 결국 우월한 윤리적 권위를 내세움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실제 생활영역에서 그 윤리적 권위가 무력화되는 양상을 빚어낼 소지가 있다. 이 경우 생명윤리를 내세우는 입장은 생명공학의 발전으로 빚어질 수 있는 위기를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펼치는 호기로 활용할 뿐 사람들이 갈등하는 문제에 대한 실질적인 응답을 주지 못한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도 있다.

2) 과학주의
윤리주의와 정반대로 과학주의는 생명공학에 가장 많은 자유를 부여하는 입장이다. 과학주의는 과학의 발전과 자유의 성장이 함께 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생명공학을 평가하는 태도로서 생명공학의 폐해가 역사적으로 검증되지 않는 한 생명공학을 제재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인간이성의 자연지배라는 이념을 믿고 있는 이러한 과학주의 입장은 생명공학의 모든 시도를 과학의 영역에 맡겨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과학기술 및 그것을 지배하는 인간이성에 대한 거의 맹목적인 신뢰는 이미 역사적으로 그 위험성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나치의 우생학이나 핵무기의 발명은 그 대표적 사례이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도구화된 이성의 위험성을 끊임없이 지적하고 있다. 까닭에 오늘날 천진난만하게 과학주의를 표방하는 사람은 드물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는 적어도 공적 담론의 영역에서 그런 주장을 펼치는 경우를 거의 볼 수 없다. 하지만 오늘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전국민적 열광과 환호 속에는 하나의 이념형으로 과학주의가 사실상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3) 규범주의
규범주의는 윤리주의의 수정된 형태로 대개 국가의 법제화 차원에서 드러나는 태도이다. 기본적으로 규범주의는 윤리주의의 원칙을 준수한다. 예컨대 종교적 윤리주의가 말하는 창조주에 의해 부여된 생명의 존엄성 주장은 세속화된 국가의 규범에서는 자연법적 차원의 생명 연속성 논증으로 변한다(생명의 신성성에서 생명의 자연성으로). 존엄을 누려야 할 주체로서 인간과 태아 그리고 배아 사이에는 생명의 연속성이 있고 따라서 태아나 배아 역시 인간과 동등한 지위를 누려야 한다고 본다. 이와 같이 윤리주의의 기본 전제를 그대로 계승하면서도 실제 구속력 있는 어떤 규범을 제시하려 한다는 점에서 규범주의는 윤리주의와 구별된다. 그래서 '원칙-예외' 구조를 취하여 원칙적으로 정당화할 수 없지만 특정한 경우에 엄격한 제한 조건하에서 생명공학의 시도를 허용한다. 배아연구는 원칙적으로 금지되어야 하지만 중대한 질병의 치료방법을 개발하기 위해 폐기될 운명에 놓인 잉여 냉동배아에 대한 연구를 허용한다든지, 시험관아기도 원칙적으로 금지되어야 하지만 제한된 경우에만 허용하는 식의 입장이다. 이것은 윤리주의가 안고 있는 허점을 보완하는 입장으로서 현실적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전히 윤리주의가 안고 있는 문제를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하고 있다. 예컨대 생명의 연속성 문제는 여전히 자명하지 않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차원에서는 수정이후 생명의 기점에 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지만, 생명의 연속성 논리를 철저화하면 체세포라고 해서 연속성이 없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또한 허용과 제한의 기준을 엄격하게 규정한다고 하지만 그 경계 기준도 분명하지 않기에 모종의 허점이 드러날 수 있다. 예컨대 금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에서 이종간의 착상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인간의 난자에 동물의 체세포 핵을 이식하는 것은 금지된 반면 동물의 난자에 인간의 체세포 핵을 이식하는 것은 허용되고 있다. 이와 같은 예는 앞으로 더 빈발할 수 있다. 이것은 규범주의가 안고 있는 딜레마의 상황을 보여준다.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현실적인 구속력을 갖는 규범을 제시하려는 규범주의의 태도는 진지하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안고 있는 상태다.

4) 공리주의
공리주의는 과학주의에 대한 비판의 화살을 피하기 위하여 두 가지 점에서 수정된 과학주의를 말한다. 공리주의는 과학주의처럼 생명과학기술의 자유 그 자체를 목적화하지 않고 생명공학을 통한 인류복지의 증진을 목적으로 내세운다는 점에서, 그리고 과학을 통한 인류의 진보라는 과학주의적 이상을 유전공학산업을 통한 부의 창출이라는 세계경제적 또는 국민경제적 목적으로 대체한다는 점에서 수정된 과학주의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은 주로 생명공학을 수행하는 연구자들이나 그것을 산업화하려는 집단, 그리고 유전공학산업의 정책적 육성을 표방하는 정부 관료들이 대변하고 있다. 최근 우리가 언론매체들을 통해 접하는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관한 담론, 그리고 압도적인 국민적 열기는 바로 이와 같은 공리주의적 가치판단이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지 확인해주고 있다. 공리적 유용성과 국민경제성에 민족주의적 열풍까지 가세된 오늘 우리 사회의 '황색돌풍' 내지는 '황우석 신드롬'은 가히 폭발적이다. 광장에 나와서 외치지 않을 뿐 또 다른 형태로 마치 2002년 '대~한민국!' 열풍이 재현되고 있는 듯하다.
그러면 이와 같은 공리주의의 입장에 내재된 문제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우선 공리적 유용성에 대한 판단이 경험적이거나 실증적인 것이 아니고 이론적이고 가치론적 성격을 띤다는 점이다. 여전히 가설적일 뿐이라는 이야기다. 배아줄기세포 연구의 경우, 황우석 박사도 밝히고 있다시피 그 목적대로 실용화하기 위해서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여러 난관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과학적으로 기술적으로 그 난관이 극복되기 이전에는 안전하게 난치병 치료라는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고 단언하기 어렵다. 종교가 허망한 환상을 심어주어서는 안 되듯이 과학 역시 섣부른 환상을 심어주어서는 안 된다. 어쨌든 생명공학의 자체 범주 안에서 난관이 해소된 경우라면 문제가 없는 것일까?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바로 난치병을 앓고 그 병의 치료를 간절히 기대하는 구체적인 어떤 사람에게 치료혜택의 기회가 주어질 것인가? 물론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아주 구체적인 많은 사람들이 그 혜택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들 앞에 놓인 또 다른 난관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의료체계와 사회적 관계 안에서 그 난관을 극복하기는 쉽지 않다. 인류복지의 증진이라는 분명한 목적, 그리고 난치병 치료라는 구체적인 목표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과학적 성과가 경제성의 논리에 의해 좌우되는 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그 혜택이 돌아갈 기회가 제한된다. 실제로 그 치료 혜택을 받은 경우는 일종의 전시효과만을 가질 뿐이다. 그러니까 공리주의적 입장이 표방하고 있는 인류복지의 증진 내지는 난치병 치료라는 숭고한 목적과 경제적 효용성이라는 목적은 갈등없이 어울릴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 사실상 배치되고 있다. 이미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다시피 그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두 가지 목적이 배치될 때 현실에서 어떤 목적이 우위를 점하게 되는지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두 말할 것 없이 경제적 효용성 논리가 우위를 점한다. 결과적으로 여기에서 윤리적 지평은 사라지고 만다. 이 점에서 공리주의는 과학주의를 신자유주의와 전략적으로 제휴시키는 입장이라는 지적은 귀담아 들을 만한 가치가 있다.

이상과 같이 살펴본 대로 우리 사회에서 제기되는 모든 입장이 일리를 지니고 있되 또한 동시에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고 할 때 선택 가능한 대안은 무엇일까? 우리 사회에서 생명공학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논의 지형에 관해서 기왕 이상돈에게 톡톡히 신세진 만큼 그가 제시하는 대안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평가하고 넘어가는 것이 도리일 것 같다. 그는 기본적으로 생명공학으로 빚어진 문제의 상황 가운데서 법제적 차원의 대안을 모색하면서 고려해야 할 여러 측면의 문제들을 검토하고 있고 그의 주장은 생명공학의 문제에 개입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이 참고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그가 제시하는 대안의 기본원리는 대화적 모형이다. 각각의 입장을 대변하는 세력들이 힘겨루기 방식으로 절충적인 합의점을 찾는 방식보다는 각기 입장의 변화와 나아가 합의된 규준점의 변화까지도 전제하는 충분한 대화방식을 추구한다고 하겠다.
한편으로 과연 그와 같은 대화적 방식이 실질적으로 얼마만큼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고, 혹시 그렇게 상정하는 대화가 '호리병 안에서의 대화' 내지는 '진공상태에서의 원탁회의'가 되지는 않을지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대화만으로 극복가능하지 않은 사회적 갈등의 요소들이 산재하고 그와 같은 요소들이 생명공학을 둘러싼 문제의 상황에도 개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차적으로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길은 역시 상호간의 충분한 대화라는 점에 이의를 제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덧붙인다면, 사회적 합의를 이루기 위해 대화에 참여하는 주체들이 자신의 입장의 타당성과 문제점을 스스로 충분히 인지하려는 노력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그 주장이 어떤 점에서 타당성이 있는지 어떻게 사회적 공감을 얻어낼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주장이 간과하고 있는 점이 무엇인지, 나아가서는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은폐하고 있는 전제는 없는 것인지 등등을 고려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굳이 생명공학을 둘러싼 논의의 지형을 그려봄으로써 우회로를 택한 것은 그런 형편을 헤아려볼 필요성 때문이었다.  
    

3. 생명의 고통에서 출발하는 생명의 윤리

나에게 맡겨진 과제는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관한 '신학적' 성찰이다. 그런데 앞에서 이미 암시했지만 내가 취하는 신학적 접근은 어떤 형이상학적 가정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그와 같은 형이상학적 가정은 특정한 신념 내지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호소력을 지닐 수 있지만, 그 신념 내지는 신앙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호소력을 지니지 못할 수도 있다. 신학적 입장이 어떤 형이상학적 가정을 전제하지 않고 가능하겠느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지만, 그에 대한 논란은 일단 유보하고 특정한 종교나 신념에 상관없이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데서 하나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중요한 문제의 지점을 선택하려고 한다. 민중신학을 하는 입장에서 내가 선택하는 그 출발지점은 생명의 고통 상황이다. 생명의 고통 상황을 주목하는 것은 생명 존엄성의 가치를 옹호하는 신학적 입장에서도 대단히 중요하고, 특정 종교나 신념에 상관없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생명의 고통 상황을 주목하는 것은 생명의 윤리를 모색하기 위한 논의에 참여하는 나의 입장이다.  
생명의 고통 상황을 생명 윤리의 출발점으로 삼을 때 우리는 먼저 그 고통의 다차원성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것을 범주상으로 구별해본다면 개체 생명의 고통, 전체 생명의 고통, 그리고 이와 같은 생물학적 생명의 고통과 구별되는 사회적 생명의 고통으로 나눠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범주상의 구분일 뿐 실제 고통이 일어나는 현상은 서로 얽혀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대개 우리는 고통을 개체의 단위에서 체감한다. 고통의 여러 차원은 사실상 개체 생명의 고통으로 집중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고통을 인식하는 경우 여타 차원에서의 고통은 실감되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오로지 개체의 고통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착각하기 쉽다. 문명이 발전할수록 과연 인간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더 예민해지는 것인지 더 둔감해지는 것인지 의문이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바로는 타자나 그 어떤 대상의 고통을 자신의 이해관계와 직접관련성이 가까울수록 더욱 민감하게 느끼며 반대로 멀수록 둔감하게 느끼거나 아예 전혀 실감하지 못한다. 이런 까닭에 고통에 접근하는 태도 역시 개별적 고통 이외에는 아예 문제삼을 것이 없는 듯이 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개체 생명의 고통과 구별되는 전체 생명의 고통 또한 실재한다. 자연적 재난은 인간적 관점에서 볼 때 재난일 뿐 많은 경우에는 전체 생명이 자신을 지속시켜나가는 방식인 경우도 많지만, 자연 내지는 전체 생명 자체가 병들어 고통받고 있는 증상을 우리는 적지 않게 발견한다. 흔히 말하는 환경오염과 그로 인한 특정한 종의 멸절이나 자연적 순환계 자체의 훼손은 그와 같은 전체 생명의 고통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한 고통이 과연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생각하는 것은 일정 부분 형이상학적인 물음의 의미 또한 내포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상당 부분 이미 경험적 판단의 범위 안에서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을 수도 있다. 실제로 생물학적 생명의 고통은 많은 경우 사회적 생명의 고통과 무관하지 않다. 그 사회적 생명의 고통이란 인간들이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 안에서의 고통을 달리 표현한 것으로서 순전히 개별적 요인을 갖는 고통보다는 사회적 관계의 구조적 성격에서 비롯되는 고통을 말한다. 형이상학적 차원에서의 고통의 원인, 또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어떤 고통의 원인에 대해서는 더 탐구해야 할 과제로 남겨둔다 하더라도 우리는 적어도 사회적 관계의 차원에서 역사적으로 또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고통의 원인에 대해서는 비교적 소상히 밝힐 수 있다.

앞서 말한 생명공학에 관한 우리 사회의 여러 입장들은 이와 같은 고통의 차원과 관련하여 말하면 각기 나름대로 특정한 고통의 차원을 유념하고 있고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윤리주의나 규범주의는 스스로 보호능력이 없는 개체생명(생명공학에 종사하는 이들이 잠재적 생명으로 간주할 뿐인 배아)의 '살해' 행위를 거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생명현상 자체에 대한 인위적 개입으로 전체 생명의 고통이 심각하게 야기될 수 있는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그런데 이 주장은 논증의 차원을 넘어 실질적인 검증의 차원에서는 뭐라 단언하기 어려운 난점을 안고 있다. 그 경고 자체는 충분히 새겨야 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이 주장에 따라 생명공학의 시도 가운데 어떤 것을 허용해야 하고 어떤 것을 제한해야 하는지는 더 깊은 탐구와 성찰의 과제로 남아 있는 셈이다. 순수한 과학주의는 현재 우리 사회의 논의 지형상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입장이기에 여기서 재론하는 것을 생략한다. 공리주의는 너무나도 구체적인 고통의 상황을 유념하고 있다. 황우석 박사는 잠재적인 생명체의 권리보다는 "지금 살아서 고통받고 있는 환자들의 아픔"을 더 절실하게 여기고 있다고 하며, 안규리 박사는 "외국인 노동자 진료처럼 환자들의 아픔을 덜어주는 의사의 마음"으로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숭고한 동기 자체를 의심할 까닭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 연구에 참여하는 개별 과학자들의 개인적 동기를 벗어난 차원에 있다. 그 공리적 유용성을 빌미로 자본이 개입해 들어오는 데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아마도 과학자들은 공리적 유용성과 경제성을 한 묶음으로 보아 그 문제를 지적하는 데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공리적 유용성 곧 수요가 있기에, 그리고 나아가 너무나 수지맞는 시장이 형성될 가능성이 높기에 국가와 자본은 이에 개입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생명공학의 연구 과정과 그 성과의 배분은 거의 의심의 여지없이 경제논리에 좌우되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개별 과학자들의 연구 참여 동기는 의심하지 않지만, 배아줄기세포 연구의 향방은 그렇게 흘러가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미 그렇게 흘러가는 징후들도 적지 않게 있다. 여기에서 불 보듯 뻔히 예측되는 또 다른 고통의 가능성이 제기된다. 분배구조의 불평등성으로 인한 고통이다. 이 고통은 질병 그 자체로 인한 고통보다 더 심각할 수 있다. 그렇지 않겠는가? 의료기술상으로 치료불가라면 아예 체념하겠지만, 분명히 치료가능한데도 그 비용을 마련할 수 없어 치료를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의 고통은 더욱 심하다. 오늘 이미 손쉽게 확인할 수 있는 고통의 현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공리적 유용성을 볼모로 경제적 효용성을 추구하는 데서 빚어지는 고통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것을 현실적으로 중요한 과제로 삼을 수밖에 없다. 생명공학의 진전으로 수없이 많은 쟁점들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무엇보다 시급히 다뤄야 할 문제 가운데 하나로 경제적 효용성의 논리가 빚어내는 고통의 문제를 다룰 수밖에 없다. 근대 자본주의 이래 과학기술이 국가권력과 자본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의 논리를 따르는 과학기술, 생명공학은 인간의 노동력을 상품화하는 차원을 넘어 인간의 몸뚱어리 자체를 상품화하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광범위한 장기 시장이 형성되어 있고, 그 시장은 사회경제적 계급관계에 따라 수요자와 공급자의 관계가 결정되고 있다. 부유한 사람들의 질병치료를 위해 가난한 사람들이 장기를 내어주는 형국이다. 우리 현실에서도 회자되고 있는 이야기를 따르면, 현재 일본인의 인공수정을 위해서 난자를 제공하는 사람들은 우리 나라 여성들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여성을 위해서 난자를 제공하는 사람들은 조선족 여성들이라고 한다. 누군가의 고통 치유를 위해 행해지고 있는 의술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고통을 안겨주는 당황스러운 사태를 만들고 있다. 인간의 모든 신체부위가 그렇게 거래되고 그 거래는 사회경제적 계급의 위계관계 안에서 작동된다. 이 때 장기 공급자는 이미 안고 있는 가난이라는 고통에 더하여 신체적 고통까지 안게 되는 이중의 고통을 겪게 된다. 이 경우 생명공학의 성과로 이루어진 새로운 의술은 인간의 고통을 치료해주는 하늘의 선물이라기보다는 흡혈귀가 되고 만다. 이러한 현실을 생각하는 것은 추상적 생명의 위기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생명의 고통 문제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과연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배아줄기세포 연구 성과가 실용화 단계에 이르면 거대한 난자 시장이 형성될 것이라는 암울한 예측도 나오고 있다. 서두에서 난자 제공 여성의 인권 문제는 상대적으로 덜 복잡하다고 했지만, 그 평가는 제한된 연구용 제공의 경우에만 해당될 뿐이다. 배아줄기세포의 연구의 성과로 난치병 치료가 실용화되는 단계에 이르면 가난한 여성들의 몸의 착취 문제가 심각한 수준으로 제기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당황스러운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서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원천적으로 금지해야 하는 것일까? 나의 일관된 관심은 과학기술 또는 생명공학 성과 그 자체나 그에 종사하고 있는 개별 과학자들의 동기의 범위를 벗어난 차원에서 발생하는 심각한 문제에 대한 우려이다. 개별 생명의 고통을 극복하고자 하는 길이 또 다른 생명의 재앙으로 귀결되는 메커니즘에 대한 우려이다. 그 메커니즘을 문제시하지 않고 연구 그 자체만 놓고 가 불가를 논하는 것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고통의 문제, 뻔히 예측되는 고통의 문제를 비껴 가는 것이다. 결국 현재 의료체계의 변화와 불균등한 경제적 분배구조의 개선 방안에 대한 검토 없이 이루어지는 논의는 어떤 식으로든 무책임한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그 무책임한 결과를 예방하기 위해 우리는 지금 온갖 지혜를 모아야 하고 실제적인 대안을 찾아야 한다.


4. 맺음말

물론 지금 화급한 문제에 대한 대처방안을 마련하는 것으로 우리의 과제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지금 하나의 관점, 배아줄기세포 연구 결과를 둘러싼 논의에서 상대적으로 소홀히 되고 있다고 생각되는 문제의 측면을 부각시켜 말한 것뿐이다. 우리는 문제의 상황을 단순화시켜 이해하기보다는 오히려 실제로 문제의 상황이 매우 복잡하다는 사실을 유념하는 데서 사회적 합의를 이룰 수 있는 대안을 찾을 수 있다.      
신학적 입장에서 생명의 윤리를 모색하는 데 우리가 특별히 유념해야 할 사항들도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삶과 죽음에 관해 깊이 성찰하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의 섭리라는 차원에서든 자연적 질서라는 차원에서든 개체 생명의 삶과 죽음은 매우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하나의 과정이다. 그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과정이 어떤 조건에서 고통이 되는 것일까? 받아들일 만한 고통이 있고 극복해야만 하는 고통이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구별되는 것일까? 이와 같은 문제들에 대한 깊은 성찰은 우리에게 또 다른 혜안을 던져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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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만연, "배아복제에 대한 윤리학적 고찰", KNCC 교회와 사회위원회 <배아줄세포 연구와 기독교윤리 토론회>(2005.6.9) * 이 글은 묘하게도 주요 본론이 임종식, "배아연구", 『삶과 죽음의 철학』과 거의 같은데 글 안에서 별다른 해명은 없다.
김환석, "줄기세포 논쟁 깊게 보기",『한겨레신문』(2005.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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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우석 신드롬'에 박수칠 수 없는 까닭",『복음과 상황』162호(2005.6.15)
장회익-황우석, "생명복제 무한경쟁 옳은가"(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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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비정규노동자 이해와 대안

 

비정규 노동법 개악 저지와 비정규직 권리보장 입법을 위한

                                                      교회의 비정규노동자 이해와 대안모색

                           장창원목사(다솜교회. 오산노동자문화센터 소장. KNCC인권위원)

 

 

1. 문제의 제기

 

우리 한국교회는 첨단문명과 민주화시대를 살아간다고 자임하면서도 사회의 중요한 핵심과제가 되고 있는 노동자, 농민, 철거민 등 민중들의 기초 생존권 문제들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이해하여 관심 있는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중 비정규직노동자 문제는 생산과 분배의 경제구조는 물론이고 국민들의 문화와 교육을 비롯한 생활전반에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중요한 핵심 사안이다. 비정규직노동자의 실태와 문제점의 해결은 교회와 사회가 함께 대처하고 마련해야할 긴급한 사회문제이다. 신자유주의는 끊임없는 구조조정을 통하여 극소수의 정규직과 다수의 비정규직으로 양분되어 사회의 양극화 현상을 만들어 내고 소수의 부자와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로 나누어 놓았다. 사회적 빈곤의 확대에는 비정규직의 급격한 증가가 원인으로 이는 가족해체는 물론 이웃사랑으로 살아가는 인간적인 따스한 사회상을 허물고 있다. 비정규직은 근로 빈곤층을 형성하고 있으며 항상 불안정 노동에 시달리고 있으며 끊임없이 일하면서도 끊임없이 가난하고 불안정노동 상태에 있다. 비정규직의 문제는 노동문제의 부분적인 문제가 아니라 핵심적인 사회문제로 대두 되고 있다. 예전의 빈곤층 형성은 저학력, 아동, 장애인, 고령자 등으로 노동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계층이었으나 지금의 비정규직은 임금, 고용, 사회복지 혜택에서 차별받음으로 빈곤층으로 전락되고 있다. 기초적인 국민의 생존권 보호의 시급성과 사회갈등해소의 차원으로 한국교회는 이제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삶과 빈곤화 과정의 문제 등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오늘 이 시대의 비정규직 문제는 양극화된 사회 현실에서 반드시 극복해야 할 한국교회가 관심 가져야 할 가장 큰 과제이다.



 2004년 8월 현재 비정규직 규모는 816만명, 전체노동자의 55.9%이고, 갈수록 급증하고 있다. 우리나라 비정규직 가운데는 비자발적 임시직(기간제)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아, 자발적 시간제노동자가 주류인 유럽의 경우와는 대별된다. 비정규직의 핵심적 특징은 일시적․ 임시적 고용이다. 이에 따라 비정규직은 극심한 고용불안을 겪고 있고, 이러한 조건 때문에 차별과 법적 무권리를 감내할 수밖에 없다. 모든 비정규 노동자의 가슴 속에 있는 심정을 한마디로 얘기하면 이런 절규일 것이다. 비정규 노동자는 절대적으로 낮은 임금과 언제 잘릴지 모르는 일자리, 고된 일과 온갖 차별, 인간적 무시로 힘든 삶을 살고 있다. 그러다가 해고되어 이 직장 저 직장 옮겨 다니다가 신용불량자가 되고, 실업자가 되고, 스스로 삶을 포기 할 정도로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리고 있다. 나날이 늘어나는 빈곤층, 빈부격차의 확대로 인한 사회양극화가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제기되고 있지만 그 문제의 핵심에는 바로 저임금, 법적 무권리, 항상적 일자리 불안에 시달리는 우리 780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있다. 비정규직의 증가는 결코 경제현상에 따른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노동자 스스로가 원해서 되었던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비정규직의 증가는 철저한 자본의 이해로서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금융자본의 세계지배 때문이었고, IMF로 상징되는 부도덕한 제국적인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부의 정책 때문이었다. 즉 비정규직은 신자유주의 노동유연화 분할, 통제전략에 따른 값싼 노동력의 구입(초과착취), 노동3권 무력화의 유력한 방안으로 활용되어 왔던 것이다. 이로 인해서 노동자들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남성과 여성, 실업자와 취업자로 분할되었고 노동자의 단결은 가로 막혔다. 정규직 노조가 파업할 때 비정규직 노동자를 대체 투입하여 노동3권을 쉽게 무력화 시켰던 것이다.

 

 

 3.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화 과정

 

정부에서는 이미 90년대 중반부터 신자유주의적 유연화를 시도해왔다. 93년도에도 파견법을 만들려고 해서 전노협이 반대투쟁을 하기도 했다. 김영삼 정권은 ‘노사관계개혁위원회’를 만들어서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등 신자유주의적 유연화전략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97년 말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날치기 통과는 그런 유연화 전략을 도입하는 구체적인 첫 시도였다. 노동운동진영은 96·97 총파업으로 맞섰지만 결국 초국적 자본의 IMF 경제대란의 위기전략으로 금융경제의 신탁통치가 이루어지면서 노동의 유연화와 정리해고제 도입으로 생존에 위협을 느키는 불안한 비정규직화 시대가 시작되었다. 민주노조운동진영에서는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의 여파를 잘 느끼지는 못했다. 현대자동차나 대우자동차에서 상징적인 정리해고가 벌어졌지만 대부분 정리해고라는 극한의 수는 많이 사용되지 않고, 명예퇴직이나 신규채용 중단으로 인원을 줄이고 비정규직을 확대해왔다. 하지만 노동조합이 없는 곳은 달랐다. 대부분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비정규직으로 전환되었다. 강제로 사직서를 쓰고 다음날부터 비정규직으로 그 자리에서 일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에서 비정규직 비율은 정부 통계로도 56%나 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실제로는 70%에 육박할 것이다. 파견법이 26개 업종으로 제한되었지만 자본은 절대로 만족하지 않았다. 자본이 노리는 바는 비정규직을 일반화하는 것이지, 특수한 업종에 일부 비정규직을 허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97년에는 노동의 힘에 밀려서 일부 특수한 업종에 비정규직을 도입하는 것이었지만 원래 목적인 비정규직의 온전한 제도화를 위해 자본은 위법적이건 합법적이건 무조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늘려나갔다. 그러면서 호시탐탐 비정규직에 대한 법을 완전하게 제도화하기 위한 시도를 해왔다. 2000년에 ‘비전형근로자보호대책’이라고 하면서 만들어냈던 법안에서 이미 우리는 자본과 정권의 시도를 읽을 수 있었다. 그 내용은 특수고용 노동자들을 준근로자로 만드는 것, 기간제 노동자들을 사유제한 없이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하는 것, 파견법을 확대하는 것 등이었다. 그것을 법으로 제도화하기 위해 ‘노사정위원회’ 비정규특위를 만들어서 논의를 해왔고 어느 정도의 가닥이 잡힌 이후에는 ‘노사정위원회 안에 ‘특수고용특위’를 만들어서 특수고용 문제에 대해서만 더 구체적으로 연구를 해왔다. 여기에 더 추가된 것이 있다고 한다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투쟁을 계속하는 것으로 보면서 비정규직이라는 존재 조건 자체가 노동조합을 만들기 어려운 조건이기는 하지만 산재보험 등 일정한 양보조치를 하면서도 노동기본권은 확실하게 무력화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들을 더 세분화했다는 것 등이다. 예를 들어 특수고용 노동자들에 대해서 ‘유사근로자성’을 적용하여 노동기본권에서 완전히 배제한다든가, 비정규직 관련한 법안들을 근로기준법상에서가 아니라, 특별법으로 만들어서 근로기준법의 성격 자체를 완전히 무력하게 만드는 등의 방법을 취해왔다. 일예로 화물지입차 기사, 골프장 경기보조원(캐디), 학습지교사, 보험모집인, 텔레마케터 등 이른바 특수고용노동자들은 한 기업에 종속되어 노동의 대가를 받고 있는 실질적인 노동자들이다. 그러나 사용자가 노동법 상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직접 고용하는 형태를 취하지 않고 노동자로 하여금 사업자등록 하게하고, 도급, 위탁 등의 형식으로 노동력을 이용하고 있다. 따라서 비정규직으로서의 고용불안은 물론 아예 근로기준법과 노동관련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특수고용 노동자들에게는 노동조합이 인정되지 않거나, 노동조합이 있더라도 사용자들이 노동조합활동과 단체협약을 부정하는 사례가 빈발하고 있다. 임금, 노동조건의 보호와 단결권(노조결성권), 단체교섭권, 쟁의권 등 노동3권이 부정되어 열악한 노동조건과 사용자의 부당노동행위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4. 시대의 흐름을 바로 잡아야 할 한국교회

 

한국교회는 민주화운동과 사회참여를 통하여 민족의 통일과 세계의 평화를 만드는 운동을 오랫동안 기도하며 실천하여 왔다. 가난한 달동네 사람들과 열악한 노동현장의 노동자들 바닥민중들과 함께 살아가며 그 들이 이 땅의 주인으로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교육하고 조직하여 왔다. 군사독재의 횡포에 맞서 싸운 민주화운동의 정신이 이제 재벌, 자본독재의 경제 구조 속에 압박당하는 민중들을 살리는 운동으로 전환 하여야 한다. 한국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의 갈림길에 중요한 작은 예수의 이정표 역할을 한 고 전태일 열사는 한국교회에서 관심을 갖던 빈민지역 야학에서 자라난 청년이었다. 당시 산업선교는 농민 노동자 빈민을 비롯한 가난한 민중들을 위한 선교의 장을 마련하고 고난을 무릅쓴 열정의 선교와 민중운동에 함께 하여온 민중선교의 전통이 있다. 노동자와 함께 하여온 자랑스러운 한국교회 산업선교의 전통이 90년대 사회의 민주화과정 이후 노동운동의 발전으로 새로운 사회선교운동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경제적 폭력으로 죽어가는 민중들의 비정규직문제를 원인치료 하여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하여야 한다. 세계교회는 폭력극복과 생명살리기 운동을 주제로 정하고 있다. 지금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에서 고통과 희생을 당하는 비정규직노동자를 위하여 교회는 다각적인 대응을 하여야 한다. 한국교회가 아직 근본적인 폭력을 극복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지만 고통분담과 생명 살기기 운동으로 하나씩 하나씩 대처하고 있다. 실업자상담과 일자리창출을 비롯하여 봉사와 나눔의 문화운동, 노숙자지원센터, 쉼터운영, 빈곤층 자녀들을 위한 지역아동센터, 방과후 공부방, 어린이집, 지역문화도서실 등을 운영하며 간접지원을 하고 있다.

 

 

5. 민족의 화해와 자주적 통일의 축제를 맞이하는 교회의 대안모색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은 ‘빈곤’과 ‘차별’과의 싸움이며 우리 사회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는 문제이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중차대한 문제 앞에 직면해 있으며 그 어느 때보다 교회의 역할이 중요해졌고 교회의 대 사회적 책임은 외면할 수 없는 이시대의 선교적 과제로 다가왔다. 한국교회는 여러 가지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는데 지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동일노동에 동일임금을 적용해야 한다.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기간제 노동자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현대판 노예로 불리는 근로자파견법을 폐지하는데 관여해야 한다. 특수고용형태의 노동자를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인정하도록 해야 한다. 불평등한 비정규직이 만연한 불안정한 사회를 극복하는 새로운 세상건설을 위한 대안모색이 절실하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노동의 기본권과 만인이 평등한 기초생활권을 위하여 권력과 자본을 가진 자들이 사람과 사회를 살리는 나눔의 솔선함이 필요하다. 현대사회 빈익빈 부익부의 발달로 인하여 상대적으로 형태를 달리하는 노예제도가 존재하지 않도록 정부는 하나님나라의 경제와 물질관을 기초로 하는 경제와 물질의 폭력적 사용을 극복하고 민족과 사회의 생명을 살리는 정치와 정책이 필요하다. 민주화운동의 세대가 정권을 잡았다고 한다. 한국교회가 정부와 권력에 밀착하여 바른 사회 열린 정치를 구현한다고 한다. 구시대의 부정과 부패를 추방하고 투명한 행정과 복지사회를 구현한다고 한다. 이러한 바탕은 한국교회가 기득권을 포기하고 여러 형태의 차별의 벽으로 소외되고 고통 받는 이웃들과 몸을 맞대며 함께 살아가는 중심이 되어야 한다. 먼저 교회가 비정규직을 비롯한 노동자, 농민, 민중들의 고통과 절규를 듣고 가난과 소수자의 인권까지 받아 안아서 모범적인 고통분담을 해야 한다. 올해는 우리는 민족분단 60여 년간의 남북 냉전의 벽을 허물고 한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성취하기위한 6.15 대단결의 염원으로 온 민족이 통일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자주민족의 평화와 통일의 축제마당에 값진 선물로 노동자, 민중의 고단한 삶속에 쌓여가고 있는 분열과 갈등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 갈라진 민족의 역사적 하나됨의 과정 속에 격어야 할 여러 형태의 투쟁으로 비정규 노동법 개악 저지와 비정규직 권리보장 입법을 위한 정책과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비정규직의 근본문제 해결은 물론이며 외세와 제국적인 세력들의 경제, 군사, 문화의 침탈을 막아 낼 수 있는 교회의 역할이 기대된다.

 (2005년 5월 24일 오산 수청동 철거민들의 목슴건 투쟁의 주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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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公), 하느님 나라의 역사화 또는 하느님 나라의 또 다른 은유

 

공(公), 하느님 나라의 역사화 또는 하느님 나라의 또 다른 은유


최형묵 (본 연구소 운영위원 / 천안살림교회 목사)


1. 민중신학적 사회윤리의 가능성  


윤리적 사고를 하지 않은 이에게서 윤리 사상을 이끌어내는 일이 도대체 가당한 것일까?

안병무는 ‘기존 체제’ 또는 ‘이미 정착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질서로서 윤리 내지는 도덕 관념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도대체 윤리, 도덕이 무엇인가? 그것은 이미 정착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질서가 아닌가? 그러면 누가 이 질서를 만들었는가? 그것은 언제나 강자 즉 지배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윤리는 지배자의 논리로써 피지배자들을 다스리기 위해서 설정된다. 그것을 보다 심화시키면 도덕이 되고, 더 나아가 강제화하면 법이 된다. 그러므로 도덕, 윤리, 법, 그 모든 것이 지배자의 도구가 되어 피지배자에게 무조건적인 순종 또는 복종을 정당화한다.”1)

그러니 바로 그런 의미에서 안병무의 윤리 사상을 운운한다면 처음부터 잘못된 일이 될 것이다.

대가의 사상을 후학들이 계승하는 방법 가운데 가장 흔한 하나의 방법이



  그의 사상을 요리조리 해체 분석하여 재구축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신학의 역사 자체가 그렇다. 성서가 구원론을 말한 바 없는데, 신학자들은 당연하게 성서의 구원론을 말한다. 예수가 교회론을 말한 바 없는데 역시 예수의 교회론을 말하기도 한다. 어쩌면 안병무의 윤리 사상을 말하는 것도 그러한 시도에 해당할 것이다. 장본인은 그저 ‘육담’으로 말한 것뿐인데, 후학들은 그것을 논리로 재구성하여 하나의 논을 만들어낸다. 이를 어쩌나? ‘우리는 성서가 말하는 것만 말한다’는 식의 태도2)를 전제할 것 같으면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한 어떤 해석은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아마도 그런 전제를 가지고 접근하면 안병무의 윤리 사상을 말하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적어도 민중신학자로서 안병무의 사상을 논하는 데서는 그렇다. 안병무는 명백히 탈윤리적 탈도덕적 관점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텍스트란 고정된 것이 아니며 그것은 원래 텍스트의 맥락과 다른 맥락에서 재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언제나 가지고 있다. 이 때 재해석이란 말하여지지 않은 것을 새로 만들어내는 작업이 아니라 이미 말하여진 것을 다른 맥락에서 재조명하는 작업이다. 우리가 안병무의 윤리 사상을 논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전제에서이다. 그런 전제에서 말할 때 안병무의 민중신학 사상은, 우리가 ‘윤리적’이라 말할 만한 발상의 실마리를 분명히 내장하고 있다.

 ‘윤리적’이라? 안병무 사상에서 그 단초가 무엇인지 말하기에 앞서 우리가 사용하는 ‘윤리적’이라는 말의 의미부터 밝혀야겠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그리스도교 신학의 영역에서 사용하고 있는 ‘사회윤리’ 개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때 사회윤리란 인간 실존의 필수불가결한 틀인 사회적 질서 구조의 큰 맥락에서 제반 윤리적 관계를 다루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인간 실존의 모든 관계 속에서 책임적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개인, 집단, 사회 등의 삶을 방해하지 않고 촉진시키는, ‘제도에 의해 매개된 구조적 질서’를 문제 삼는 것이다.3) 물론 이 경우 사회윤리는 그것이 어떤 입장을 대변하는지 그 자체로 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지배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할 수도 있고, 탈지배적인 가치관을 바탕으로 할 수도 있다. 안병무가 지배자의 논리로서 윤리를 배격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안병무의 윤리 사상을 말한다면 당연히 그것은 탈지배적인 가치관을 바탕으로 하는 윤리여야 할 것이다. 예컨대 해방신학에서 말하는 바와 같은 해방의 윤리에 해당하는 셈이다.4)


2. 하느님 나라의 역사화


안병무의 민중신학에서 윤리 사상을 말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거점이 되는 것은 ‘공’(公)이다. 물론 그와 같은 이론적 개념적 장치가 없다고 하여도 안병무의 윤리 사상을 논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사회적 질서 구조의 맥락에서 논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그 근거 삼아 충분히 안병무의 윤리 사상을 논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안병무는 ‘공’ 개념으로 민중신학적 윤리의 확실한 징검다리를 마련해 주었다. 안병무에게서 ‘공’은 돌발적 상상의 소산이 아니다. 1980년대 중후반 어느 순간부터 빈번하게 등장하는 ‘공’ 개념은 당대 민중운동과의 깊은 교감에서 나온 심각한 고심의 결과이다. 민중신학에서 하나의 사회윤리적 거점으로서 ‘공’이 갖는 의의는 다음과 같은 안병무의 주장에서 시사되고 있다.

“나를 그 동안 지배했던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 엄청난 민중사건을 어떻게 소화하느냐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본주의 체제를 ‘국시’라도 되듯이 굳혀가는 마당에서 일어나는 모순과 갈등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그것은 민족통일이라는 민중적 염원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그러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 ‘공’(公)이라는 사상이다. 우리 민중은 ‘공’을 사유화한 것과 싸우고 있다. 그것이 독점 세력과의 투쟁이다. 공을 사유화하는 과정에서 온갖 비리가 발생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온갖 폭압이 자행된다.”5)

자본과 권력이 독점화된 당대의 현실에서 민중적인 염원을 집약한 것이 바로 ‘공’이었다. 그런데 당대 민중들의 염원으로서 ‘공’은 사실 신학적 의미에서 하느님 나라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했다. 민중신학은 “하느님 나라는 곧 민중의 나라”라는 인식을 매우 당연시하고 있지만, 당연시하는 만큼 그 관계가 그렇게 자명한 것은 아니다. 안병무는 그 자명하지 않은 관계를 깊이 유념했던 것 같다. 사실 안병무가 보기에 예수에게서 그의 본질적 메시지였던 하느님 나라는 민중의 나라와 동일시된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 관계가 자명하지 않게 된 데에는 예수 자신에게서 그 양자 관계가 자명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민중사건 안에서 민중과 동일시된 예수에게서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구체상을 구구하게 해명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기에 그 당대 상황에 처하지 못한 후대의 해석자의 입장에서 양자 사이는 여백의 지대로 남게 되었다. 바로 그 대목에서 안병무는 서구 신학의 책임을 묻는다. 서구 신학은 묵시문학과 하느님 나라 표상을 동일선상에 놓고 해석하였고, 동시에 묵시문학을 상대화함으로써 하느님 나라마저 상대화해버렸다고 본다.6) 서구 신학은 그렇게 하느님 나라를 평가절하함으로써 사실상 그것을 제거해버렸다. 그 까닭은 그 하느님 나라가 안락한 삶을 비판하고 깨뜨리기 때문이었다.7) 여기에서 서구 신학은 하느님 나라를 역사 피안으로 돌려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영역으로 삼아버렸다는 것이다. 결국 하느님 나라 때문에 자신의 삶을 위협받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것이 민중들의 염원과 무관한 것이 되어버려 애초 예수에게서 자명했던 그 관계가 불투명해져버렸다.

안병무가 ‘공’을 이야기한 것은 바로 바로 그와 같은 불투명성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사람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던 하느님 나라를 사람들이 ‘알 수 있는’ ‘현재적 언어’로 표현한 것이 바로 ‘공’이었다.8) 그래서 안병무는 하느님 나라를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하느님 나라가 실제로 뭐냐? 그것은 公을 公으로 돌리는 것이다. 사유화하지 않는 것이다. 정치나 경제나 모든 걸 포함해서 사유화함으로써 분열되고 찢겨진 그것을 다시 공으로 돌리는 일은 하느님 나라의 성취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거예요. 하느님 나라를 자꾸 정신화해버려서 피안적이고 관념화된 그런 하느님 나라는 민중의 입장에서는 있을 필요도 없어요.”9)

안병무가 보기에 주기도문은 자명한 하느님 나라의 요체를 집약해주고 있다. 주기도문에서,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하늘의 뜻은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과 빚을 탕감 받는 것으로 구체화되어 있다.10) 그 염원은 매우 물질적이다. 물론 여기서 물질적이란 역사적ㆍ사회적 관계의 차원을 함축한다.11) 그러니까 독점적인 사유화에 기초해 있는 제반 사회적 관계가 ‘공’의 관계로 바뀌는 것이 곧 하느님 나라의 구현이 된다. 한마디로 ‘공’은 하느님 나라의 역사화이다. 그것은 물질과 권력을 본래의 생산자에게 돌림으로써 민주주의적 제도와 공유제를 발전시키고, 나아가 인간과 자연이 공존 공영하는 생태학적 공동체를 발전시키는 전망으로 집약된다. 이러한 전망은 이 세계의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이라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장 기초가 되는 근거에서 비롯된 것이며, 더불어 이 세계를 창조한 하느님이 그 동반자로 일하는 인간을 선택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주권에 대한 분명한 고백에서 비롯된 것이자 동시에 그 하느님의 주권은 민중의 주권으로 구체화한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12)

‘공’(公) 개념으로 하느님 나라를 역사화하고 있는 안병무의 이와 같은 전망은, 앞서 말한 대로 1980년대 민중운동의 시대정신을 공유한데서 비롯되었다. 특별히 매우 급박하게 대안을 요구하였던 당시 민중운동과의 깊은 공감 가운데서 형성되었다. 안병무는 그와 같은 맥락에서 “하느님 나라는 교회라든지, 어떤 사회체제라든지, 어쨌든 기존의 어떤 것과도 동일시될 수는 없지만, 현재 진행되고 있는 싸움 속에서 지금 그 나라를 경험하는 것이고 또 그 싸움 속에서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민중들이 느끼고” 있는 현실을 강조한다. 그런데 “사람은 동적인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어떤 상(像) 즉 스테투스(status)를 원한다”는 점을 주목한다. 그런 안목에서 ‘구체적인 상(像)’이 필요하다고 말한다.13) 이것은 분명히 당대 민중운동의 현실을 직시한 데서 나온 견해이다.

그러나 한편 그것은 비단 1980년대 민중운동의 현실에서만 비롯되는 발상은 아니다. ‘공’으로 표상될 수 있는 제반 사회적 관계의 상이 이미 예수시대 예수 자신과 민중에게서 자명했다는 견해는 그러한 전망이 민중의 원초적 염원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 민중의 염원이란 일종의 가시적 대안의 요구이다. 그것은 ‘제도에 의해 매개된 구조적 질서’의 구체상으로서, 현실의 제반 관계를 지배하는 독점적 사유화를 해체하고 공유화를 지향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민중들의 언어 자체가 곧바로 ‘공’으로 표출된다는 뜻은 아니다. 일용할 양식을 걱정하지 않고 빚진 죄인으로 살지 않기를 바라는 그 염원을 안병무는 ‘공’으로 표현하고 그 밑그림을 그렸다. 이로써 땅의 사람들에게 한동안 범접 불가능해 보였던 하느님 나라는 다시 땅으로 내려왔다. 이제 하느님의 나라는 개념상 ‘공’을 매개로 역사 안에서 그 구체성을 획득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역사 안에 있는 인간들의 행위 규범으로서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3. 하느님 나라의 또 다른 은유


신학적 윤리란 인간이 역사적 시공간에 존재한다는 한계를 승인하는 데서 형성된다.14) 하늘의 계시는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불가불 역사적 시공간 안에 존재하는 인간의 이성을 통해 수용된다. 안병무가 민중이 바라는 바 ‘구체상’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그 표상으로 ‘공’을 제시한 것도 사실 같은 맥락에서다.

그러나 신학적 의미에서 그 인간 유한성의 표현인 윤리가 절대성을 참칭하게 될 때 문제가 발생한다. 바로 그 때 윤리는 안병무가 말했던 대로 ‘지배자의 도구’가 된다.15) 하느님 나라의 역사화 내지는 윤리적 거점으로서 ‘공’은 그와 같은 운명에 처할 수 있는 위험이 없을까? 그 위험성이 있다. 사실은 하느님 나라 자체가 그런 위험성에 노출되어 있다. 그것은 서구신학의 역사에서 단지 부차화되거나 배제되었던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현존하는 교회 또는 지배체제와 동일시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공’의 이념 또한 그와 같이 될 가능성을 다분히 지니고 있다. 실제로 공유제의 이상이 거꾸로 지배이념이 되어 인민을 배반한 근대의 역사를 우리는 알고 있다.

어떻게 그런 전도가 가능한 것일까? 하느님 나라와 마찬가지로 ‘공’ 역시 일종의 공백의 기표다. 사실 공백의 기표는 그것이 충족되지 않을 때 오히려 의미를 지닌다. 이미 기존의 것으로 충족된 현실을 비판하는 근거로서 그것은 제 몫을 다한다. 그러나 그 공백의 기표는 끊임없는 유혹의 소용돌이 가운데 있다. 그 공백을 누군가 전유하러 든다. 기어코 그 공백에는 어떤 대체물이 채워진다. 하느님 나라가 현실의 교회와 동일시되고 지배체제와 동일시된 현상이 그런 것이다. 그래서 안병무는 그것을 독점적 사유화에 저항하는 민중이 그것을 전유하도록 ‘공’으로 설정했다. 공백의 기표를 민중의 입장에서 선점한 셈이다. 그러나 인민의 이름으로 행해진 독재의 역사적 경험은 그것마저 안전한 장치가 되지 못한다는 회의를 제기한다. 그것 역시 다양한 해석, 심지어는 상반된 해석의 가능성을 안고 있는 일종의 또 다른 하느님 나라의 은유인 탓일까?   

우리의 고민은 바로 이 점이다. ‘공’으로 하느님 나라의 구체성을 확보했다고 생각했는데 이중의 난관에 봉착했다. 그 난관은 한편으로는 ‘공’ 역시 그 자체로 구체성을 지니지 않는 일종의 또 다른 하느님 나라의 은유라는 데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역사 안에서의 구체성의 표상인 ‘공’이 절대화될 수 있다는 데 있다. 결국 이 난관을 해명하지 않고서는 신학적 윤리의 거점으로서 ‘공’의 의의는 정당하게 평가하기 어렵다. 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4. 탈/향(脫/向)의 인간사와 ‘공’(公)


사실 안병무의 사상을 단순하게 집약했을 때, ‘공’은 그 자체로 이중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만큼 그 위치가 매우 불안정해 보인다. 민중신학자로서 안병무의 사상적 기저를 읽어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단편 가운데 하나로 나는 “탈-향의 인간사”16)를 주저 없이 꼽겠다. ‘탈’(脫)은 과거와 단절하는 행위이며 자신의 삶을 보장해주는 모든 것을 과감히 버리는 행위다. 그것은 소유에서 탈출하는 것이고 삶의 보장을 내던지는 것이다. ‘향’(向)은 궁극적 목적을 말한다. 그러나 ‘향’은 목적지에 도달한 상태가 아니다. ‘향’은 도상의 존재를 나타낸다. 목적을 가진 나그네의 길, 그것이 ‘향’의 형태이다. 결국 ‘향’은 ‘탈’과 마찬가지로 정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인 삶의 양태를 말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정착자의 윤리’는 설자리가 없다. 서두에 이미 밝혔듯이 안병무가 윤리와 도덕을 배격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 이런 맥락에서 ‘공’은 명백히 궁극적 목적에 해당하는 하느님 나라의 또 다른 은유로서 성격을 지닌다.17) 그러나 한편 ‘공’은 가시적인 상을 요구하는 민중의 염원의 표상으로서 성격을 지닌다. 이미 지적한 대로 안병무가 그와 같은 착상을 할 수밖에 없었던 1980년대의 시대적 ‘압박’ 요인이 있기는 했지만, 그러한 착상이 시대적 요구만이 아니라 민중들의 원초적 염원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껄끄러운 이물질로 치부할 수는 없다.

결국 하느님 나라의 수립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지속되는 동적인 ‘탈향의 길’에서 정적인 관계의 차원 혹은 ‘제도에 의해 매개된 구조적 질서’의 구체상으로서 ‘공’의 의의를 우리가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과제이다. 어쩌면 우리가 ‘난관’이라 불렀던 ‘공’의 이중적 성격 또는 그 위치의 불안정성 자체가 신학적 윤리의 거점으로서는 무척 다행일지 모른다. 한편으로는 구체상을 지향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 구체상의 절대화를 방지하는 모순적 기제를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공’은 한편으로는 이 땅 위에서18) 펼쳐지는 운동의 궁극적 목표이자 동시에 또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야 할 사회적 관계를 지시하는 표상으로서 이중적 성격이 훼손되지 않을 때 신학적 윤리의 거점으로서 진가를 지닌다. 적어도 논리적으로 그 이중적 성격은 팽팽한 긴장을 유지해야만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강조점이 어디에 주어져야 할지는 미리 확정지을 수 없다. 그것은 현실적 조건,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사람의 처지에 따라 결정될 일이다.

이 주제에 접근하는 동안 내내 나의 뇌리를 맴도는 하나의 기억이 있다. 30여 년전 우리 가족의 탈향(脫鄕)의 기억이다. 고향을 등지라고 누가 등을 떠미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것은 명백히 강제적 이탈이었다. 이촌향도(離村向都), 그것은 자발적 선택의 결단이 아니었다. 고향에서 살아갈 근거를 다 잃었기에 불가피하게 선택할 수밖에 없는 길이었다. 그 때 온 가족을 사로잡은 꿈이 무엇이었을까? 빚 없이, 먹고살 것 걱정하지 않고 사는 것이었을 것이다. 막내둥이 나에게는 ‘걱정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는 어른들의 독려가 있었다. 나는 정말 걱정 않고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꿈을 꿨다. 그러나 그렇다고 걱정이 사라질 턱이 없었다. 서울 생활 내내 한 집에서 춘하추동을 살아보는 것이 꿈이 되어버린 소년에게 걱정이 떠날 턱이 없었다. 그만 하자! 자발적 선택으로 순례의 길을 떠나는 이에게는 순례 그 자체가 커다란 기쁨일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내몰려 이리저리 방황해야 하는 이에게는 정착지를 만나는 것이 기쁨이다. 송곳 하나 꼽을 땅이 없는 민중들이 바라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민중의 염원으로서 ‘공’은 그런 성격을 함축하고 있다.

나는 이 ‘공’에서 안병무의 이중성을 본다. 지식인 신학자로서 안병무와 민중의 증언자로서 안병무의 동요와 갈등을 본다. 궁극적 목적으로서 ‘공’의 성격이 지식인적 고민의 표현이었다면 민중의 염원의 구체상으로서 ‘공’의 성격은 민중의 대변자로서 고민의 표현이었다. 그 이중성은 학자로서 불처저성 내지는 모호성을 말한다기보다는 민중적 지식인으로서 진지성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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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평화운동을 위한 제안

 생명과 평화운동을 위한 제안

                              김용복(한국생명학연구원장)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생명이 파괴되고 죽어가는 일이 더욱 더 많아지고 있으며 더욱 더 심해지고 있음을 경험하고 있다. 이것은 생명을 희생시키는 빈곤과 폭력과 전쟁과 생명파괴의 세력이 인류 역사 그 어느 때 보다 심각하게 생명과 평화질서를 위협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속에서 생명은 신음하고 있다.


우주의 생명은 신음하고 있다.


그대는 생명의 신음소리를 듣고있는가?


1. 굶주림은 많은 생명을 앗아가고 있다. 굶주린 어린이들이 아우성을 치고 신음하면서 죽어가고 있다.


로마정상회담에서 시장은 세계의 기아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장담하였다. 시장은 충분한 식량을 생산하여 기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오늘도 세계의 기아의 문제는 해결될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


아프리카, 아시아, 중남미 대륙에서도 죽음의 신음소리가, 아프가니스탄의 굶주린 어린이들에게서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절규가 전 세계에 울려 퍼진다.



 

북한의 어린이들은 굶어 죽어가고 있다. 그들의 신음소리는 남녘에까지 들리고 있지 않은가?


1989년 이래 동구국가들로 받던 원조도 끊어지고 미국의 경제적 봉쇄로 세계와 교역을 할 수 없게 되었으며 남북한 경제협력이 속도를 내지 못하여 북한주민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북한은 자원이 부족할 뿐 아니라 미국, 일본과 같은 강대국의 침공위협에 대비하여 막대한 군비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다.


2. 오늘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군사지배질서는 냉전체제의 해체에도 불구하고 전멸전과 총력전을 실시하고 있다. 전멸전(Omni-cidal Warfare)이란 모든 생명을 전멸할 수 있는 무기와 군사전략을 사용하는 전쟁을 의미한다. 총력전이란 군사적 전쟁 뿐만아니라 경제, 문화, 종교적 차원까지 총체적으로 전쟁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전쟁은 인간생명 뿐 아니라 자연의 생명까지도 전멸할 수 있는 전쟁이다.


코소보의 전장터에서, 아프가니스탄의 전장터에서, 그리고 이라크 전쟁터에서 무수한 어린이들과 여성들의 통곡과 신음이 들려오지 않는가? 미국이 선포한 테러에 대한 전쟁(War on Terror)은 총력전으로서 동남아시아를 비롯하여 전 세계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반 테러 전쟁은 새로운 군사주의를 일으켜 인권을 침해하고 정치적으로 반대의 입장을 가진 사람들을 적으로 간주하여 파괴한다. 미국은 북한, 이라크, 이란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반 테러 전쟁을 전개하고 있다.


남북이 냉전체제의 유산으로 군사적 대립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죽임과 죽음의 대결이다. 우리는 우리 삼천리 강산에 이 무서운 전쟁의 불씨와 탄약고를 안고 살고 있는 것이다. 미국과 일본, 중국과 러시아는 한반도 주변과 동북아의 지정학적 지배를 위하여 군사경쟁과 군비경쟁을 가속화하고 있다.


이라크에서 일어나고 있는 생명의 살상과 희생은 동북아에서도 전개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이곳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훨씬 더 파괴적이고 잔학한 전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은 대량의 살상무기를 동원, 배치하고 있으며 일본과 중국도 군비경쟁, 군사대립을 강화시키고 있는 형편이다.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수백만의 인명과 헤아릴 수 없는 생명이 파괴될 것이다.


3. 오늘 지구화과정 또는 세계화과정이 조성한 시장경제질서는 초국적 기업과 같은 거대한 경제 권세 즉 자본이 무한한 생산을 도모하고 있으며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을 최우선의 가치로 하고 작동하고 있다. 이 지구시장은 투기적 금융투자를 통하여 국가경제를 재정위기에 빠트리고 인민을 가난하게 하며 빈부의 격차를 심화시키며 가난한 사람들의 생명을 위태롭게 한다.


이 지구시장은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식량을 상품화하고 의료를 상품화하며 문화를 상품화하고 있다. 고도로 발달된 생물학적 과학기술을 통하여 생명산업을 일으키고 식량생산 증가를 위한 유전자조작을 감행하고 있으며 유전자조작을 통하여 인간의 의료와 건강을 시장적 서비스로 교화하고 있다. 이것은 지구시장이 생명을 인위적으로 조작하고 왜곡하고 결국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유전자 공학을 통하여 식량을 증산하여 기아문제를 해결하고 의료기술을 발전시켜 인간을 치유한다고 하지만 이는 최종적으로 이윤극대화의 논리에 의하여 좌우된다. 따라서 생명이 위험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산업발전 즉 경제성장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자원이 무차별적으로 탈취되어 자원의 고갈이라는 상황과 생태계의 훼손과 오염에 도달하는 상황에 놓여 있으며, 농산품생산과정에서 토양은 살충제, 제초제 등에 의하여 오염되었고, 유전자공학적 조작에 의하여 생물학적 오염도 심각한 상황에 도달하였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많은 생명체가 파괴되고 왜곡되는 현실을 경험하고 있다.


지구시장은 생산과 분배를 고도의 과학기술주의적 체제로 형성하고 최대의 효율성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은 경제적 민주주의를 도외시 할 뿐 아니라 자연을 객관화, 대상화하여 생태계를 탈취하고 파괴하고 오염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지구시장이 전개시키는 산업사회는 자연자원을 고갈시키고 있으며, 자연환경을 파괴하고 있고, 생명공학으로 생명을 인위적으로 조작하고 있다. 그리고 과학기술질서는 자연과 생명을 정복한다.


과다소유를 통하여 자본을 극대화하고, 과소비를 조장하는 소비주의를 조장하여 가능한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시장화하여 이윤을 극대화한다. 이런 시장질서는 무한경쟁질서이며 이것은 사회적으로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질서를 낳는다.


최근 동북아의 경제권은 지구시장의 자본체제에 의하여 포위되고 침투되고 지배되어 가고 있다.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사회주의 국가들도 세계시장체제에 통합되고 있다. 한반도도 이 지구시장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회적 경제적 희생을 감당하여 왔다. 북한도 이 소용돌이에 끼어 있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과 일본의 경제적 경쟁은 치열하다. 따라서 그 경제적 희생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고 더욱 어려워질 전망이다. 동북아시아의 생명의 희생은 단순한 빈곤과 기아 뿐 아니라 자본의 횡포와 빈부격차의 구조와 근원의 권세들에 의한 지배에 의한 것이다.


4.. 지구시장의 무한경쟁의 소용돌이는 사회적 모순과 갈등을 심화하고, 가속화하고 치열하게 한다. 이 지구시장에서 계급과 계급의 갈등, 여성과 남성의 갈등, 인종간의 갈등, 국가 간의 경쟁과 이해관계의 갈등 등이 심화되어 국가사회 내외로 심각한 폭력적 사태가 조성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회정의가 붕괴되고 사회경제적인 약자, 신체적이고 정신적이고 문화적인 약자는 그 생명의 억압과 위협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갈등과 모순이 심화되고 사회관계가 폭력화되는 상황에서는 생명의 기본조건인 협동과 공생과 화평이 붕괴된다. 모든 생명체의 공동체적 질서가 붕괴되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과 갈등, 폭력의 악순환은 우리 교육체제에서는 경쟁적 시장적 교육으로 나타나고, 사회적으로는 정의의 상실과 연속되는 사회적 폭력으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 한국사회에 사회적 안전이 보장되지 않고 있다.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 위협의 대상이 되어 가는 현실을 경험하고 있다.


5. 생명문화의 파괴는 심각하다. 생명은 문화적, 정신적, 감성적 실체이다. 생명공동체에는 언어가 있고 표현이 있고 배움이 있다. 생명은 느끼고, 말하고, 생각하고 의사소통하고, 지혜를 축적하고 배운다. 생명은 노래하고 즐거워하고 아름다움을 나타낸다. 생명은 슬퍼 울고 신음하며 괴로워하기도 한다. 생명은 시적이다. 생명은 기계가 아니다. 생명은 물질이 아니다. 생명은 단백질이 아니다. 생명은 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


지구시장은 생명이 가진 의식의 세계를 지배하고 감성의 세계를 잠식하고 “식민지화”한다. 시장이 광고나 선전을 통하여 소비주의문화를 주입하고 생명문화의 정체성을 허물고 있다. 생명은 진리의 세계, 가치의 세계, 미의 세계를 가꾸고 있는 데 이를 파괴하고 왜곡하고 흐리게 한다.


우리는 생명의 지혜를 담고 있는 우리민족문화의 정체성과 가치, 우리문화의 맛과 멋, 냄새와 향취를 상실하여 가고 있다. 우리의 젊은이들의 의식과 감성의 세계는 시장의 선전과 소비문화의 식민지가 되어 가고 있다. 문화의 창조를 위한 문화적 주체로서의 정신적 예지와 감성적 예민함은 질식당할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6. 오늘 현대문명과 지구화는 종교적 신앙의 세계를 미신으로, 전 근대적으로, 애매모호한 세계로 치부해버렸다. 생명의 초월적이고 신비로운 차원을 없애 버린 것이다. 생명을 존엄하게 여기지 않는 풍토를 만들었다. 여기에 대항하여 기성종교들은 위협을 느끼고 근본주의적 경향을 띄우고 각기 종교집단들의 생존을 위하여 권력을 쌓고 기존의 정치세력과 무력을 행사하기도

하면서 생명을 파괴하기도 한다. 많은 경우 전쟁과 분쟁이 종교적 성격을 띄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코소보, 아프가니스탄, 이라크의 전쟁들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분쟁 등은 기독교와 이슬람의 종교전쟁의 양상을 띄기도 한다.


생명은 종교적 신비, 초월적 차원을 가지고 있어 생명의 원동력을 형성하여 주는 데 이를 파괴하여 버리거나 왜곡하여 버리고 있다. 특히 종교신앙이 권력과 금권과 제휴하여 이데올로기가 되면 이는 생명의 근본이 되기보다는 생명을 파괴하는 독이 된다. 우리 한국에서도 세속적 태도가 종교신앙을 경시하는 가하면,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들이 금권과 권력에 물들어 가고 있고, 종교적 집단이기주의와 배타주의의 올무에 매여있기도 하다.


7. 인간이 그 생명의 파괴로 말미암아 신음할 뿐 아니라 인간은 생명을 파괴하고 죽이는 악역을 담당하여 왔다. 인간중심주의적인 금권과 권력은 우리 지역, 우리 나라, 우리 대륙, 우리 지구, 우리 우주에 있는 많은 살아있는 생명들을 대상화하고 탈취하고 억압하며 파괴하고 있다. 이 생명들이 고통 속에서 절규하는 통곡과 신음이 들리지 않는가? 벌목되는 나무들, 화학비료와 약품에 희생되는 식물들, 인위적인 조작과 통제의 과학실험의 대상이 되는 미생물들, 무차별 살상되는 동물들. 그들의 신음소리를 듣는가? 이 생명들은 인간생명의 친구들이고 함께 살아야 하는 존재들이데 인간이 적대시하여 희생의 제물이 되고 있다. 이것은 인간중심주의의 생명관과 그 내면에 깔려 있고 제도적으로 이루어진 금권의 탐욕과 권력의 횡포 때문이다. 우주의 생명은 파괴되어 가고 있다. 생명의 많은 종들은 멸망하고 있어 생명의 다양성이 붕괴되고 생명공동체가 파괴되며, 생명들의 내면세포와 유전자까지도 통제되고 조작되고 있다.


우리 남한은 지난 40년 동안 초급속 산업화를 경험하면서 환경이 파괴되고 생명계가 많이 훼손되었다. 이제는 우리 생명의 둥지가 파괴되어도 생명의 위험을 느끼지 못하는 생명불감증까지 심각한 증세로 나타나고 있다. 새만금개발과 부안핵페기장 문제가 단적으로 이런 상황을 보여준다. 우리의 토양은 이미 화학비료와 농약의 포화상태에 이르렀다고 한다. 앞으로 한국의 산업은 생명산업으로 질주한다고 한다. 아직 생명윤리법안도 입법되지 않았고 입법된다고 해도 생명불감증에 걸린 시장과 정치권은 우리의 생명을 안전하게 보호하여 주지 못할 것이다.


동북아시아의 생명권도 커다란 위협을 받고 있다. 일본과 한국은 공해산업을 수출하면서 생명권을 훼손하여 왔다. 이제는 중국산업화가 급진전되면서 동북아시아의 생태생명권은 커다란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만일 동북아시아에 전쟁이 일어나고 핵폭탄이 터질 경우 그것은 동북아 생명의 전멸상황을 가져 올 것이다.


생명과 평화질서의 비전


1. 우리 민족은 삼천리 금수강산을 생명의 동산으로 선물 받았다. 한반도와 동북아의 생명역사 과정에서 많은 생명의 지혜를 축적하여 왔다. 생명의 종교 문화 사상 전통을 일구자. 이 생명의 지혜는 우리 지역공동체 안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 이 지혜가 완전히 잊혀지고 파괴되기 전에 재 발굴하고 가꾸고 창조적으로 발전시켜 새로운 생명의 비전을 가꾸어가자. 우리는 전통적으로 신선도/서방정토/청학동/輔國安民과 廣濟蒼生/생명의 정원과 같은 생명공동체의 비번을 향유하여 왔다. 이것이 삼천리금수강산을 생명의 동산으로 가꾸어 온 지혜들이다. 생명사상의 기초를 다지자는 말이다.


우리는 서구의 생명사상과 근대과학과 생명과학을 변혁하고 융합하고 창조적으로 발전시켜 생명파괴의 근대적 인식론과 시장주의적 횡포를 극복하며 신자유쥬주의체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여야 할 것이다. 생명이 풍성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자유, 기업의 자유 뿐 만아니라 생명의 주체성, 생명의 상생과 공생성의 철학과 사상을 구축하여야 할것이다.


2. 이러한 생명관을 토대로 하여 우리는 생명의 정치경제를 지구시장의 대안으로 제시하여야 할 것이다. 생명의 정치경제는 생명의 주체를 확고히 하는 지역공동체의 사회경제건설에서 출발하여야 할 것이다. 지역의 생명경제는 상생적이며 공생적인 경세제민으로서 모든 생명이 주체로 참여하는 경제이다. 우리 민족사에서도 정약용 선생의 여전제(呂田制)라든지, 두레라든지 하는 민중경제적 지혜를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고 세계적으로 생명경제의 지혜는 풍요롭게 발굴되고 창조적으로 발전되고 있다. 그리하여 민이 중심이 되고 지역생명공동체가 주축이 되는 태평성대의 생명경제를 이룩하여야 할 것이다.


3. 오늘 현대국가는 자유주의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고 신자유주의의 세계경제질서는 국민의 주권을 약화 내지는 와해시키고 있다. 이제 우리는 생명권(生命權)을 위한 정치체제를 창출하여야 한다. 인권과, 사회경제권과, 평화로운 삶을 위한 생명안전권을 포괄하는 생명권정치를 장려하여야 한다. 우리는 생명의 주권을 위하여 지구적 생명권 헌장을 제정하고, 헌법에 생명권을 기본권으로 규정하며 모든 하위의 법과 지방자치의 조례를 생명권에 기초하여 새로 만들고 개정하여야 한다. 이는 세계시장의 금권과 제국의 세력과 정치권력이 국가안보라는 이름으로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와 제도를 제어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이런 생명권정치는 지역생명공동체에서 출발하고 지역생명공동체에서 구축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참여적이고 연대적인 생명권정치는 지역민주주의의 핵심이 되어야 하고 이것은 국가적 차원, 동북아의 차원으로 연대적 확산과 결합이 필요하다. 생명권을 위한 지역생명공동체간의 연대정치는 모든 정치적, 문화적 경계를 초월하는 연대로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4. 전쟁은 가장 파격적으로 평화를 파괴하고 생명을 죽인다. 생명운동은 전쟁을 근절하여야 할 뿐 아니라 모든 군사체제는 생명의 공동안보체제로 전환되어야 하며 모든 군대는 평화군으로 개편되어야 한다. 단순한 군축, 단순한 전쟁근절은 평화를 가져올 수 없다. 더 나아가서 모든 군사 과학기술체제를 해체하여야 한다. 모든 지정학적 사회적 안보 안전체는 국가사회의 안보에서 인간안보, 생명안보체제로 전환되어야 할 것이다.


생명의 상생 공생의 원리에 근거하여 “적대의 논리(Logic of Enmity)를 사랑의 지혜로 교체해야 될 것이다. 이것이 곧 평화를 만드는 자, 원수를 사랑하는 자의 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는 로마제국의 평화(Pax Romana)가 아니다. 미국의 군사적 헤제모니는 지구에 평화를 가져올 수 없다. 사랑과 정의를 기초로 하는 평화가 생명보전의 근원이 되어야한다.


5. 우리는 생명공동체를 위하여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을 위한 사회정책운동을 전개하여야 한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계급 간의 사회관계를 정의롭게 하며, 성적 차별을 위한 가부장제의 철폐, 인종과 문화적 차별을 철폐하는 인종, 문화다원주의 등 기존 사회정책운동을 하여 왔다. 이제는 생명의 상생과 공생을 핵심으로 하는 정의와 평화와 사랑의 사회정책실현운동을 전개하여야 할 것이다. 이 생명사회정책도 지역생명공동체가 주체가 되고 이 지역생명공동체는 자립적이고 자생적이고 자율적어야 한다. 국기기관이나 국제적 연대는 이 지역의 자율성을 제고하는 부가적인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사회정의는 평화를 지향하고 협동과 선린우애의 생명사랑을 바탕으로 하여야 한다. 평화는 생명의 기본조건이며 정의와 사람을 바탕으로 한다. 평화운동 없이 생명운동은 있을 수 없다. 생명운동은 곧 평화(Shalom:온전한 생명과 삶)운동인 것이다.


사랑이 생명운동의 기반인 것은 생명은 서로 사랑하면서 공생하고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고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데서 정의를 기둥으로 하면서 평화의 집과 살림살이를 마련하기 때문이다.


6. 생명은 주체다. 생명은 스스로 태어나고 생명은 스스로 자란다. 생명은 스스로 양육하고 스스로 배우고 교육하며 생명은 지역을 고향으로 삼고 정체성을 구축하며 살림살이를 한다. 생명은 둥지와 복음자리를 고향에 둔다. 생명과 평화를 위한 운동은 생명의식화, 생명감성화를 위한 문화운동, 문화창조운동을 전개하여야 할 것이다. 억압적이고 파괴적인 탐욕과 권력으로부터 해방될 뿐아니라 감성의 식민지화로부터 해방되기 위하여 새로운 차원의 문화운동이 요청된다. 생명존중과 생명감성과 생명의 신비를 체득하는 문화적 창조운동이 필요하다. 생명의 주체성을 체득하고 생명의 창조성을 배우며 생명의 고통과 신음에 예민한 감성적 영적 감성을 개발하여야 한다.


7. 생명은 우주적이다. 지역적 공동체일 뿐 아니라 우주적 공생체이며 인간생명은 모든 생명체와 상생한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전환하여야 할 것이다. 자연을 개관하는 이원론적인 인식론(Homo Sapiens)을 극복하고 자연을 수단으로만 보는 자연관(Homo Faber)를 극복하고 인간은 자연 안에 있고 자연은 인간 안에 있다는 상생의 도를 실천하여야 할 것이다. 과학적 지식과 기술은 생명을 위한 사역으로 전환되어야 할 것이다. 이 상생의 도는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진화론을 극복하고 사회진화론 즉 상생속에서 생명이 진화한다는 새 생명과학의 길을 열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우주를 영적인 생명체로 보는 데서 출발할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이나 각 대륙의 원주민들은 우주생명의 영적 차원을 철저히 경험하면서 살아왔다.


8. 생명과 평화에 대한 신앙과 사상은 궁극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종교신앙에서 찾게 된다. 우리는 기존 종교의 반생명적 껍데기를 벗기고 생명의 원동력을 회복하고 생명의 지혜의 원천을 찾아야 한다. 아시아의 모든 종교는 기본적으로 그리고 원래적으로 생명종교이다. 불교는 탐욕에서 해방되는 생명을, 힌두교는 영원히 순화하는 생명의 원리를, 회회교는 생명의 근원을 정의와 사랑에서, 도교는 생명의 道와 氣에서, 유교는 仁義의 실현인 태평성대에서, 동학은 광제창생의 인내천론에서 그 생명사상과 생명신앙의 기원과 열매를 찾고 있다.


맺는 말


기독교는 하나님을 우주생명 창조주로 믿고 이 생명을 구원하시고 해방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생명의 주로 믿으며 성령을 생명의 원동력으로 믿으면서 생명의 영원함과 풍성함을 추구한다. 기도교신앙은 하나님은 모든 생명과 계약을 맺고 모든 생명들을 생명의 주체로 동역자로 세움을 믿는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을 이 생명과 생명의 정원을 가꾸는 생명의 사역자로 세우셨다. 그래서 생명운동은 기독교복음의 핵심이며 그 열매이다. 기독교신앙공동체는 생명운동체이며 교회는 생명목회, 생명디아코니아, 생명선교를 전개하여야 한다.


기독교는 생명종교로서 기독교 자체를 개혁할 뿐 아니라 생명운동의 현장에서 생명운동의 주인 예수를 만나야 한다. 그리고 모든 생명운동과 신앙적 차원에서, 사상적 차원에서, 문화적 차원이서, 정치경제적, 지정학적 차원에서 연대하고 협동하여야 한다. 생명운동은 상생적이고 공생적이기 때문이다.


예수그리스도는 우주의 생명이며 우주의 평화이시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 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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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과 생명 : oikozoe [oikozoe@kornet.net]

민중과 생명      - 김용복 -

 

韓國生命學硏究院

 

<머리말>

 

민중신학은 성경과 민중학을 연계하면서 민중의 생명을 일으켜세우는 기독적 학문이라고 규명할 수 있다. 우리는 이 글에서 민중신학과 생명신학을 연계하려고 한다. 동시에 민중신학을 민중학과 연계하듯이 생명신학을 생명학과 연계하려고 한다. 지금까지 민중신학과 생명신학을 본격적으로 그리고 유기적으로 연계하는 일은 약간의 진척을 있었지만[1] 앞으로 더 발전할 여지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민중학과 생명학의 연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왜 우리는 민중과 생명을 연계하여야 하는 가? 지금까지 민중신학은 생명의 문제가 민중에 있어서 핵심적이고 포괄적인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집중적으로 다루지 못했다. 그 이유중의 하나는 민중신학이 민중의 사회전기 또는 민중의 사회경제적 차원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민중의 생명과 민중의 공생성(Conviviality)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것을 게을리 하였다. 또 하나의 이유는 생태학이나 생명공학이 민중의 문제를 초점으로 다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민중신학은 생태학적 문제나 생명공학의 문제를 멀리하는 경향이 있다. 민중신학은 생태학과 생명공학의 문제에 대하여 유기적인 접근을 시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여기서 민중과 생명의 유기적인 연계성을 신학적으로 논하고 이를 민중학적, 생명학적 차원에서 총체적인 접근을 제시하려고 한다.

 

민중신학은 역사뿐 만 아니라 우주(거시/미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민중의 이야기를 출발점으로 한다. 이것이 민중신학의 명제이다. 민중은 사회적 역사적 실체일 뿐 아니라 생명적 우주적 실체이다. 생명이 우주적 실체라면 민중은 곧 생명이고 생명의 핵심적 실체이다. 우리는 여기서 민중과 생명을 공히 그리고 연계적으로 논하기 위하여 시공(지정학)의 개념을 소개하려고 한다. 그것은 宇宙의 개념이다. 이 개념은 근대적인 문리학의 개념만이 아니다. 이 개념은 집 즉 생명의 거처로서의 집을 의미한다. 희랍어로는 OIKOS를 말한다. 1) 이 집은 코스모스(Universe)를 의미한다. 이 집은 천지삼라만상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2) 이 집은 또한 지구라는 지정학적 거처를 말한다. 지구위의 모든 생물이 거하는 곳이다. 전통적으로는 이 집을 天下라고 불렀다.  3) 그리고 그다음의 집의 형태는 민족적 차원의 정치경제이다. 4) 이 집의 기초로서 지역마을의 거처를 들 수가 있으며 나아가서 생명공동체의 기반으로서 가족공동체의 공간을 집이라고 할 수 있다. 5) 생명개체의 창원에서 말한다면 몸이 곧 집일 것이다. 생명은 이런 다차원의 집에서 起居(Dwell)한다.

 

위의 지정학적 구분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않고 서로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위 지정학적 구도의 우주적 지평과 지구적 지평, 사회경제적 지평과 지역적 지평은 서로 융합되여 있다. 생명은 바로 이 지정학적 융합 속에 존재하고 그 織組 속에서 산다. 생명은 몸이라는 집, 가정이라는 집, 지역공동체외 민족공동체라는 집, 지구와 우주라는 집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지정학적 구도는 문화와 시대에 따라 각각 다르게 조합된다. 예를 들면 동아시아의 문명에서는 太極의 우주론이 지정학적 구도를 결정하였고 그리스문명에서는 희랍철학이 그 지정학적 구도를 결정하였다. 시대적으로는 농경사회에서는 지역적 자연의 지정학이 지배적이었고 산업사회에서는 현대과학적 지정학이 지배적이었으며 오늘은 <가상세계Virtual World>의 지정학이 지배적일 전망이다.

 

21세기를 맞이하여 지구화의 과정이 전개되어 그 정점에 달하고 있다. 우리는 민중과 생명문제를 취급할 때 이런 지정학적인 조합과 구도를 간과할 수 없다.

 

우리는 우선 성경적으로 민중과 생명을 연계하여 생각하여 보기로 한다.

 

1. 하나님의 지정학과 민중-생명.

 

민중은 땅의 사람들이다. 민중은 땅을 일구어 생명의 정원을 가꾼다. 성경의 창조론은 민중론이다. 창조론은 창세기, 시편, 이사야서 그리고 요한계시록등에서 확연히 들어 나지만 성경전체를 통하여 역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우선 창세기의 창조의 이야기는 <노동하는 인간> 즉 땅을 가꾸는 인간의 창조가 그 절정을 이루고 있음과 동시에 남녀가 한 쌍이 되어 인간생명을 창조하는 가정을 이루고 생명의 정원을 이루어 가꾸어 나가고 경영하는 것이 창조이야기의 핵을 이루고 있다. 이 창조론의 지정학적 배경은 우주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바벨론 제국과 같은 제국적 궤도를 의미한다. 이를 테면 창세기의 창조론은 바벨론 제국의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바벨론 제국은 생명의 질서를 파괴하는 <흑암과 혼돈>세력으로 표상되어 있다. 동시에 인간이 노동의 고역을 하게 된 근원적 요인은 인간이 이세력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는 인식이 내포되어 있다. 여기서 민중과 생명은 바벨론 제국이라는 공동의 지정학적 위치에 공히 처하여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바벨론제국 아래에서 민중의 생명과 삶은 생명의 지정학적 정치경제(OIKONOMIA)에 포함되어 있다는 결론을 가질 수 있다. 민중은 생명과 운명을 같이 하고 있으며 생명은 민중적 운명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신학적으로 민중을 통하여 생명문제를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민중의 생명>이 생명에 대한 이해의 근원적 시점이 된다는 것이다.

 

생명문제를 민중의 생명과 삶을 떠나서 취급한다고 했을 때 생명의 정치경제적 성격을 다룰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의 창조행위는 바벨론제국의 지배에서 민중을 탈출시키는 출애급의 사건을 재현하는 것이요 동시에 생명을 파괴하는 <흑암과 혼돈의 질서>를 극복하고 <생명의 정원>으로서의 창조질서를 실현하는 것이다. 민중의 해방과 생명의 보전은 하나님의 창조행위의 중심에 공히 핵심적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양자를 분리할 수 없다. 그럼으로 생명은 민중적이고 민중은 생명적이다. 민중적 시각 없이 생명은 바르게 이해되지 않고 생명의 지평을 떠나서 민중[2]을 이해 할 수 없다.

 

하나님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과 계약(Covenant with All Living Things)을 맺으셨다[3] 이 계약은 홍수로 인한 재해에 의하여 생명이 위협을 당하는 상황에서 이루어 졌다. 말하자면 치수문명과 연관되어서 이루어 진 계약관계이다. 노아의 홍수는 홍수라는 자연재해는 단순히 자연적인 것이 아니며 이는 인위적인 요인이 개입되었다는 것을 표현하여 준다.  홍수를 다스리기 위하여 인간은 바벨탐으로 상징되는 전체주의적 문명(Despotic Civilization)을 일으켰다. 우선은 홍수를 제압하려는 토목기술을 발전시켰고 민중을 수단화하고 억압하는 노예제도를 만들었으며 신격화된 절대 이데올로기를 근거로 한 전체주의 체제를 이룩하였다. 이것은 홍수에 대비한 인간의 잔존이 명분이었다. 우리는 이것은 잔존 이데올로기(Survival Ideology)라고 부르겠다. 인간의 잔존이라는 이름으로 무슨 일이든지 정당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생명의 잔존을 위하여 생명을 억압하고 파괴하는 문명을 일으킨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치수문명에서의 자연정복의 모티브를 발견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히브리의 신은 민중의 이름으로 그 전제체제를 비판하고 생명을 정의(Covenant)의 법 아래에서 영원히 보전할 것을 약속하는 것이다. 생명과 <생육하고 번성>하는 축복을 보장하는 하나님의 계약과 이 계약을 토대로 한 하나님의 생명의 지정학(Geo-politics of Life)은 바벨탑의 지정학과 대조된다. 여기서 우리는 생명의 잔존이데올로기가 민중을 억압하는 체제로 전개됨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생명계약은 민중해방의 계약임을알 수 있다. 결국 하나님의 생명지정학은 생명과 민중을 공히 축복하고 해방하는 지평인 것이다.

 

이러한 운동은 출애급의 지정학에서도 여실히 들어 난다. 출애급기의 계약법은 안식년의 법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곧 안식일의 계명으로 전개된다. 여기서도 생명의 창조 즉 생명의 지정학과 노예의 해방 즉 민중의 해방은 밀접히 연관된다.[4] 이 출애급의 지정학에서 우리는 출애급의 재앙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즉 히브리노예를 억압하는 대가로서 갖가지 생명파괴의 재앙이 도래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재앙은생명의 질서 창조의질서를 파괴하는 질서 이다. 결국 에집트문명의 지정학은 피라 밑으로 대표되는 치수를 위한 토목기슬을 발전시키고 방대한 노예제도를 이룩하며 바로(Pharaoh)체제라는 절대전제체제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생명지정학은 출애급사건으로 전개되는 데 이는 사회적 안식뿐 아니라 생명의 안식으로 연결된다.

 

희년의 지정학

레위기 25: 땅의 안식

샤론의 지정학: 이사야 11장과 60

메시아의 지정학

결론: 카이로스의 지정학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

하나님의 무소부재

 

2. 민중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민중과 성령의 결합은 민중과 생명의 결합이다.

민중을 위한 말씀(/정의)은 창조의 법이다.

3. 민중의 주체성과 생명의 주체성은 공히 이해된다.

모든 생물의 공생 (conviviality)적 주체의 차원안에 민중공동체적 차원 (동활체=Koinonia)이 연계통합되어 있다. 생명의 주체성은 민중의 주체성의 연속이다.

만물(생명)의 신음과 민중의 신음은 공히 죽임의 세력 때문이다.

공생의 도와 적자생존의 역리가 공존/모순관계에 있다. 이것은 생명계 전체에 공존과 잔존의 질서가 삼투되어 있음을 한다.

4. 우주적 메시아는 민중의 메시아이며 동시에 민중의 메시아이다.

4.1. 창조의 이야기와 신천신지의 이야기의 지정학적 동시성을 논한다. 이 지정학은 생명의 동산과 새 생명의 동산을 위치한다. 창세기 1장과 2장 그리고 요한계시록 21장과 22.

4.2. 도교/유교적 동양적 우주관과 힌두교적 우주관은 생명의 우주적 유기성을 주창하고 있다.

 

5. 민중의 개념의 총합성은 생명의 총합성과 같다.

 

0. 지정학 민중과 생명체는 처참하다: 히로시마원자탄의 예

1.정치경제: 잔존의 질서/ 산업화와 시장화

2.식품계 : 기아/식품오염

3.의료계 :의료의 시장화/유전자 공학상품

4.사회계: 초국적 기업체의 신 다윈주의/무한경쟁적 적자생존론

5. 정치계: 지구제국주의억압

6.문화계 : 문화의 상품화와 정체성의 위기, 가치관의 와해, 미적 감성의 혼선과 피폐

7.종교계 : 종교적 근본주의:달릿의 메타포어

8.생태계 : 생태계의 파괴와 공해

 

 

6. 생명의 축제 (요한계시록21장 처음)

 

생명의 영이 가득찬다.

생명의 빛은 죽음의 그림자를 거둔다. 이것이 생명의 지정학이다.

살아있는 것은 아름답다.

삶은 영원한 가치가 있다.

생명의 꽃이 핀다.

생명은 우주의 샬롬 위에 번성한다.

모든 살아있는 것이 참여한다.

생명의 정치경제는 정의롭고 풍요롭다.

생명의 축제는 삼라만상이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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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남동등 여러 민중신학자들이 이 문제를 취급하였다. 해방신학에서도 생태학적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특히 Eco-feminism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런 신학들이나 신학자들 학자들은 억압을 극복하는 문제와 생명문제를 연계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2] 여기서 우리는 한국말로 생명과 삶이 구분되어있음을 감지한다. 그러나 생명은 삶을 사는 실체임으로 서로 구분할 수 없다. 영어로 LIFE는 양자를 공히 표현한다. 따라서 우리는 생명과 삶을 다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3] 창세기 9 11-12. 모든 살아있는 것과의 계약

 

[4] 출애급기 21 1-11, 20 11절의 안식년의 법과 안식일의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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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도 달릿선교사편지

인도를 향한 3초 기도가 힘이 되지요.

"하나님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시 122:1)"

할렐루야!
어느덧 해가 바뀌고 벌써 30도가 오르내립니다.

이곳 인도를 향하여 후원하시고 기도하시며 함께 하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소식을 전하고자합니다.컴퓨터 고장으로 피시방을 이용하여 짧은 글을 보냅니다.

1.40일 간의 기도와 지역조사를 마치고서
이곳 뱅글로의 많은 사람들이 모여사는 공장지역(서울의 영등포)을 40일간 매일아침(6-9시)찾아가서 기도하며 지역을 돌아보았습니다. 비자문제로 스리랑카를 다녀온 뒤인 2004년 12월 13일부터 2005년 1월 29일 까지의 일요일과 성탄절,신정을 제외한 40일이었습니다. 그 동안에 하나님의 동행하심과 함께 청년 1명이 함께 그의 스쿠더로 동행하였습니다. 그 지역의 주민들이 하루빨리 예배를 드리며 교회를 세워달라고 하고 있지만 ,여러가지가 부족함을 이유로 시기를 미루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때로는 천막슬럼집에서 자기도 하였고,새로운 희망을 찾는 그 주민들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2.파송후원교회의 결정


하나님의 명령대로 움직이던 모세와 요셉처럼 사역하고 싶습니다.

여러 사랑의 마음을 담아 기도하고 후원하시는 분들과 함께 하고자 특별히 '전주시온성교회(황세형목사)'가 올 해 창립 30주년을 맞아 파송후원을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특별히 선교에 열정을 가진 전주시온성교회의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남인도교단과의 선교협력을 위한 편지건이 해결되면 봄에 전주시온성교회에서 총회의 파송예배를 드릴 예정입니다.

 

3.최근 인도의 상황.

 

 지난 해 12월 26일  쯔나미의 영향으로 1만5천여명이 죽었다고 합니다.여건상 가지 못했지만 인도정부가 신속히 움직이고 많은 엔지오의 활약으로 좋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곳 뱅글로에서는 지난 달 미국의 부흥사인 베니힌의 치유집회로 2백만의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힌두교의 방해로 버스 300여대의 유리창이 부서지고 승용차가 불탔지만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발길을 다 막을 수 는 없었답니다.

 

 약 1주 전에는 뭄바이 부근의 힌두사원에서 가스가 폭발하여 순례자등 340여명이 죽었습니다.

크고 작은 죽음들과 달릿천민들의 '땅'과 평들을 구하는 목소리들이 데칸 헤럴드 신문에 실리곤 합니다.

 

4.사역을 위한 준비의 시기?

 

건강과 언어와 능력이 아직 미흡합니다. -요구는 많지만 속도를 늦추고 있습니다.

 

가정도 아직 들 정비되었습니다.특히 아이들의 학업문제가 쉽지 않습니다.

비자문제와 3개언어를 쓰는 현지학교의 상황때문에 아직도 알아보며 쉬고 있습니다.

 

여건상 짧은 글로 마무리합니다. 사진도 동봉하지 못했습니다.좀더 소식을 잘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이글을 읽는 분들과 속한 가정과 공동체(직장,단체등)와 교회 위에 넘치는 주의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합니다.

 1.한국을 향한 기도.

    혈육/개인-단체후원자/후원교회/생명평등평화통일의 헌신자들/남북한의 종합적인 발전 등.

 

 2.인도를 향한 기도.

   나와 가족 / 인도동역자들/ 한국인 동역자들/ 인도의 많은 피해자들 /인도의 지배자들 등

 

                  07, 02 , 2005

                  뱅글로에서

 

                이희운/황은영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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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의 노동자선교 나아갈 방향 (초안)

 

한국 교회의 노동자선교 나아갈 방향 (초안)


                                          오산노동자문화센터 노동목사  장 창원



1.  서로에게 가진 것을 고르게 나누어준다면 부족함이 없을 세상이다.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내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 곳곳의 지역사회 노동자의 삶의 현장가운데 서있는 한국교회가 역사와 사회로부터 칭찬받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특히 분단조국의 통일시대를 맞이하는 교회는 남,북 노동자가 함께할 수 있는 대안을 갖는 노동선교를 해야 한다.


- IMF 경제대란이후 합의된 노사정합의기구는 자본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여 실업자, 비정규직을 양산하였으며 노동자들에게는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모는 역할을 하였다. 한국교회 산업선교는 그동안  노동자, 민중과 함께하여왔다. 오늘 한국교회는 질곡에 빠진 노동자들의 외침과 미국과의 군사적인 대결 구조로 물질적인 고통을 받고 있는 북한 노동자들의 외침을 들어야 한다.


- 즉 우리는 불안정한 노동사회의 현실을 바로 인식하고 올바른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1) 교회는 우리의 이웃들(노동자)에게 하나님의 정의, 평화, 창조, 질서보존의 기쁜 소식을 주어야 한다. 오늘도 억울하게 죽어가는 이웃들(자연, 사회, 국가, 세계)을 살리는 생명살리기운동에 앞장서야 한다.


- 첨단 과학문명의 이기가 전쟁과 혼란의 세계를 만들고 있는 이 시대, 교회가 노동선교의 바른 역할과 자세를 제시함으로 분단 조국의 화해, 평화 통일을 앞당겨 실현하는 길이다.



2. 예수교회의 올 바른 기도와 제시를 실천함이



 필요하다.  

        "도둑은 양을 훔쳐다가 죽여서 없애려고 오지만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케 하려고 왔다"(요한 10장 7- 10절)


  - 세계는 신자유주의 자본 중심의 금융, 군수산업 경제정책으로 자연 환경을 파괴하며 빈곤과 전쟁으로 평등, 평화를 깨는 사건으로 인류는 죽음과 파멸의 환경을 맞이하고 있다.


 - 세계교회는 90년대 “하나님의 정의. 평화. 창조. 질서보존”을 기도와 실천의 주제로 내세우며 활동하였고 냉전질서의 마지막 대립점인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모두가 기도하였다.

 - WCC는 2000년대 “폭력극복과 생명 살리기” 주제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미국의 전쟁과 침략적인 정책을 반대하고  “아래로부터의 또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는 세계사회포럼”을 초기부터 참여하여, 2005년 지금 브라질 사회포럼2)에서는 신학과 신앙의 시대적인 고백을 주도하고 있다.



3. 시대의 어려움을 지고 가는 사람들이 함께 만드는 평화세상을 그린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한국교회는 자주독립정신의 순교적 신앙전통을 가지고 전쟁과 분단의 폐허 속에 기적으로 화해와 평화의 교회를 이루었다. 이를 위하여 교육구국, 독재타도, 민주화운동, 분단된 민족의 통일에 헌신적으로 참여하였다.


- 최근 IMF 경제위기속에 나눔과 섬김의 정신으로 복지사회를 위한 선언적인 활동들을 하고 있다. “ 자원봉사자 교회가 최고”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 서민들이 기쁘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아름다운 세상, 이 땅의 하나님나라 만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무거운 짐진 자는 누구인가? 비정규직노동자, 실업자, 빈민, 철거민, 목회자이다. 한국교회 선교 120년 험난한 민족의 역사 속에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발전한 한국교회는 물신적이고 허례허식적인 거품 신앙을 멀리하고 경건, 절제의 성숙한 교회의 일치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 지금도 교회는 최소한의 가치기준인 자유, 평등권과 노동기본권, 민주화, 통일운동에 헌신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한부정부패추방과 왜곡된 역사바로세우기, 불평등한 경제극복, 희망사회로 복지사회건설의 현장선교에 교회는 계속 참여하고 있다.


4. 큰 흐름의 역사 속에 풀뿌리 바닥의 노동자, 민중들과 함께하는 아름다운 교회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           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심이라˝  -눅 4:18-19


- 가난하고 병든 자들과 함께하는 말씀을 동력으로 산업선교와 민중교회가 어려운 이웃의 삶속에 함께 한 민중선교는 세계교회의 모델로 알려지고 있다.


- 살아있는 예언자들의 실천적인 선교전통을 바탕으로 교회가 교파와 종파를 넘어서서 전국교회가 전문화된 지역사회, 노동선교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안내하여 사회의 지탄받는 교회를 넘어선 칭찬받는 교회되어야 한다.


- 한국교회는 노동사회의 최소한의 기준인 근로기준법을 지키며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권과 노동권을 살리고 더 낮은 곳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이웃들과 늘 함께 해야 한다


5. 경제전쟁, 군사전쟁으로 죽음으로 내몰린 노동자를 살리는 생명살림의 노동선교

   사람아 주께서 선하심이 무엇임을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내게 구하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 ( 6: 6- 9 )

                  “공의를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넘치게 하리라” 아모스(5:24)



한국교회의 노동선교방향 탐색을 위한 단상  


첫째, 신학적인 노동선교 의미 해석을 하여 이론적인 바탕을 마련해야 한다. 이는 과학문명의 발달로 변화된 세계화의 이념 혼란에 기독교의 대안제시가 필요하다. 초국적 자본의 신자유주의 횡포적인 시대 상황 속에 변함없는 진리의 인식을 정확하게 하는 것이다. 


둘째, 화해평화통일의 신앙고백적 노동선교 방향정립을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포도원 일꾼의 평등한 보상 일용할 양식.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말씀의 해석과 예수께서 노동(목수일)하면서 십자가의 길을 제시,  태초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일하여 세상을 창조하시니라.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말씀으로 살아라3)  산업선교와 민중교회의 현장선교 정리와 확산으로  인간의 평등을 기초로 한 과학의 발전과 문명의 이기를 노동자와 근로자의 차이점과 노동자성을 인정하기 위한 신앙의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셋째, 기독교의 노동선교활동은 과학의 시대정신으로 부서진 인간을 치료해야한다. 작업장감시 카메라의 비인간성, 컴퓨터의 발달과 노동, 비인간화 기계화된 인간상, 교회가 하나됨의 선행실현은 노동자의 하나요 민족의 하나됨이다. 삶의 경건과 절제를 생활화하고 물질의 나눔과 봉사의 정신으로 노사의 빈부격차, 노노갈등, 빈부격차해소를 위한 교회의 실천사업연구는 화해하는 사회를 제시하는 실천 활동이다.


결국 세계교회는 폭력을 극복하고 생명을 살리기 위한 반전평화운동에 노동자 민중과 연대하여 평화운동 역량을 강화하고 있다. 유엔과 ILO등이 정하는 최소한의 노동인권을 신장하며, 전쟁과 핵무기의 위협에 맞서 항구적인 세계평화를 실현한다. 근로기본권을 지키려는 한국교회가 노동자와 함께 함으로 평화, 인권운동의 사회적 모범으로 타의 귀감이 되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노동선교 실천사업들을 안내


- 교회가 비정규직이 당하고 있는 여러 가지 차별을 막을 수 있는 방안들을 제시하고 노동현장의 어려운 문제들에 대한 관심과 대처하는 기구를 신설하여 인간의 기본권 활동인 노동조합이 교회 내, 외에서 활성화를 할 수 있도록 한다4)


- 교회는 기독교의 올바른 노동관을 정립하고 만인제사장, 천직, 노동의 의미와 중요성을 재정립해야 한다. 교회는 ‘근로자’가 아닌 ‘노동자’의 실체를 인정하고 교회를 개방하여 비정규직 노동자를 비롯한 노동자들의 영혼과 육체가 쉴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 노동자들의 노동 상담과 생활, 건강 등 총체적인 인생 상담을 할 수 있는 전문선교기관을 양성하고 운영한다. 그 전문성은 산재병원에서 환자를 맡듯이 어려운 노동현장의 문제를 가지고 교회에서 편안하게 머물면서 문제를 해결하도록 한다. 실업자가 힘을 얻고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는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고 기독교적인 기업이 모범으로 일자리 창출의 본을 보인다.


- 교회내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남녀평등 실현 등 모든 형태의 차별을 철폐하고 안전하고 쾌적한 노동환경을 만드는 일에 구체적이며 모범적으로 해야 한다. (생활임금 확보, 고용안정 보장, 노동시간 단축, 산업재해 추방, 모성보호 확대 등의 )


- 상시적으로 활력 있는 노동사회를 위한 노동자학교(교회학교)나 노인대학 같은 과정을 만든다. 이상적인 교회는 의견소통구조가 민주적이듯 노, 사, 정, 사회단체(여성, 환경, 운동단체들)가 참여 할 수 있는 희망의 대안을 민주적으로 제시한다.


- 사회적인 노동의 중점적 과제를 교회가 관심을 갖고 함께 대안을 제시한다. 그러나 사회적 합의(희망포럼)가 노동자들의 일방적인 희생으로 이루어지지 않도록 균형을 잡는다.5)


- 노동 3권, 노동시간, 노동교류와 연대를 촉진하도록 하는 중계자 역할(노동현장연결)을 하여 종교의 자유처럼 노동자의 경영참가, 정치세력화, 사회적 합의, 사상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를 만들어 비정규직, 미조직 노동자의 조직화 등 조직역량을 확대 강화하고 산업별 공동교섭, 공동투쟁 체제를 확립하여 산업별 노동조합을 건설하고 전체 노동조합운동을 통일한다.


- 노동기본권을 완전하게 실현하여 공동결정에 기초한 경영참가를 확대하고 노동현장의 비민주적 요소를 척결하고 현안 과제인 일자리나누기 / 교역자 사례 생활비 평준화/ 교회의 노동선교 역할분담 네트웤/ 노동자 세계평화운동의 소통과 연대를 통하여 노동자예수교회 만들기  / 연합교회로 하나 되기  / 연구하고 증진한다.


-교회는 독점자본의 횡포- 다국적기업의 기본적인 기준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개발의 폭력들을 극복하기 위한6) 규제에 참여하여 중소기업과 농업을 보호하며, 사회보장, 주택, 교육, 의료, 세제, 재정, 물가, 금융, 토지, 환경, 교통 등과 관련한 정책과 제도를 개발한다.


   현 노동사회의 기본과제와 노동교회의 동참 7)


 1.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운동의 역사와 전통을 계승하고 이를 발전시킨다.

 2.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이 보장되는 참된 민주사회를 건설한다.

 3.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인정하고 제민주세력과의 연대를 강화한다.

 4.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시위, 사상의 자유 등 민주적 제권리를 쟁취한다.

 5. 민족의 자주성을 확립하고 분단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실현한다.

 6. 산업별 공동교섭, 공동투쟁 체제를 확립하고 산업별 노동조합을 건설한다.

 7. 미조직 노동자를 조직하고 전체 노동조합운동을 지원하고 통일하도록 한다.

 8. 권력과 자본의 노동탄압을 분쇄하고 교사, 공무원, 노동자의 단결권 등 노동기본권을 완전 쟁취하도록 지원한다.

 9. 자본의 합리화 전략에 따른 노동통제와 노동 강도 강화를 저지한다.

10. 공동결정에 기초한 경영참가를 확대하고 노동현장의 비민주적 요소를 척결한다.

11. 생활임금과 주 40시간 노동제를 쟁취하고 유급휴일, 유급휴가를 확대한다.

12. 남녀, 직종, 학력, 기업, 국적간 차별을 철폐하고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쟁취한다.

13. 해고와 실업을 방지하고 완전고용과 고용안정을 쟁취한다.

14. 산업재해와 직업병을 추방하고 쾌적하고 안전한 작업환경을 쟁취한다.

15. 남녀평등을 실현하고 모성보호를 확대하여 여성의 평생일터를 쟁취한다.

16. 사회보장제도와 주택, 교육, 의료제도를 개혁하여 전국민의 인간다운 삶을 쟁취한다.

17. 국내외 독점자본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중소기업과 농업을 보호 육성한다.

18. 세제, 재정, 물가, 금융, 토지, 환경, 교통 등과 관련한 제도와 정책을 개혁한다.

19. 퇴폐적인 문화를 척결하고 건강한 민족문화를 확립한다.

20. 전세계 노동자와 연대를 강화하고 전쟁과 핵무기 위협에 맞서 세계평화를 실현한다.















(참고자료 1)

세계 장로교회, '신자유주의 반대'를 선언하다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경제구조로" 

              박성원 신학박사.           월간 “말” 편집부 인터뷰

“우리는 가난한 자와 연약한 자 그리고 모든 피조물이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도록 제외시켜 그들과 계약 맺으신 하나님께 도전하는 현 세계의 경제질서를 거부한다. 그것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든 절대적 계획경제든 마찬가지다. 우리는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뒤엎고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통치에 적대적 행위를 하는 모든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제국을 거부한다.”


“우리는 신자유주의적 세계 시장의 광포한 소비주의와 경쟁적 탐욕, 이기적 속성의 문화를 거부한다. 우리는 또 어떤 구조를 가졌든 자신 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고 스스로 주장하는 체제를 거부한다."


"우리는 이미 수백만의 생명을 앗아가고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의 많은 부분을 파멸로 이끈, 규제받지 않는 부의 축적과 무한 성장을 거부한다.”

“우리는 수익을 인간 앞에 두고 모든 피조물을 더불어 돌보지 않는 경제체제와 이념을 거부한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을 사유화하는 경제체제와 이념을 거부한다. 우리는 이런 이념을 복음의 이름으로 지지하는 것을 거부한다. 또 이런 이념에 대한 맹종을 정당화하는 가르침을 거부한다."


전 세계 개혁교회를 대표하는 세계개혁교회연맹(World Alliance of Reformed Churches)은 2004년 7월 30일부터 8월 12일까지 아프리카 가나의 수도 아크라에서 열린 제24차 총회에서 위와 같은 신앙고백의 언어로 '신자유주의 경제세계화'에 반대했다. 이를 '아크라 고백신앙'이라고 부른다.


세계 장로교,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다


한국에서는 장로교회란 이름으로 알려진 개혁교회(Reformed Church)는 16세기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주도한 존 칼빈의 신학노선을 따르는 기독교 전통인데, 칼빈은 소위 '자본주의'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그 후예들이 자본주의의 가장 열악한 형태인 신자유주의적 글로벌 자본주의에 대해 정면으로 “아니”라고 고백한 것이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125년이 넘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전통을 가진 세계개혁교회연맹은 1980년대 말 동구권이 무너지고 난 뒤 세계갈등의 틀이 냉전시대의 정치와 이념에서 경제로 바뀔 것이란 예상을 하고 이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제1차 걸프전 직후인 1992년부터 '신앙과 경제'란 주제로 일련의 연구를 시작한 세계개혁교회연맹은 1995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가진 협의회를 시작으로 각 대륙을 순회하면서 각 지역의 경제현실에 대한 분석에 착수했다.


이중 1995년 아프리카 잠비아 키트웨에서 가진 아프리카 회의에서 참석자들은 “아프리카는 세계경제에서 완전히 제외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아프리카 지역은 세계경제지도와 G8의 세계경제계획에서 이미 사망 선고된 지역으로 선포되었다”고 진단했다. 그리고 전 세계 개혁교회가 신자유주의 경제세계화에 대해 '고백신앙'을 선포하도록 건의했다.


'고백신앙'이란 당대의 조직적 불의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행동중 가장 강도가 높은 대응이다. 어떤 불의를 용납하면 자신들의 신앙 자체가 위협받을 것으로 간주될 때 발동하는 '긴급 행위'인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교회가 '고백신앙'으로 대응한 여러 사례가 있는 데 그중 하나가 바로 유명한 '바르멘 선언'이다. 히틀러가 등장해 자신이 아리안족을 위한 메시아란 암시를 주기 시작했을 때 소수의 독일교회가 이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정면도전으로 여기고 '고백신앙'으로 대응했던 것이다.


또한 남아프리카에서 인종분리 정책으로 백인들이 아프리카인들과 유색인종들의 정치사회적 권리를 조직적으로 박탈하고 제외했을 때 교회는 '벨하 신앙고백'으로 대응했다.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성찬식을 함께 나눌 수 없게 하는 인종분리 정책은 복음과 정면으로 위배되므로 신앙적 차원에서 저항하고 거부한다는 것이었다.

고백신앙의 전통


이런 경험은 우리 나라에도 있다. 일제식민강점 시기가 말기에 달했을 때 일제는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일제는 이를 특별히 기독교회에 집요하게 강요했는데 찬송이나 성경에서 천황에 도전하는 모든 개념의 사용을 제한하고 일본신사를 강제로 참배하게 했으며 특히 예배전엔 동방요배를 강요했던 것이다. 이때 소수의 목회자와 신자들은 일제의 강요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으로 판단, 순교적 각오로 이를 거부하는 고백신앙의 행동을 했다.


이번 세계개혁교회연맹이 채택한 '아크라 고백신앙'은 바로 이런 바르멘 선언이나 벨하 신앙고백의 정신으로 전개된 것이다.


세계개혁교회연맹 총회는 다음과 같이 이번 고백의 신앙적 배경을 밝혔다.

“개혁전통과 시대의 징조가 가리키는데 따라 세계 경제정의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 및 그리스도인으로서 온전한 제자됨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우리는 만약 우리가 신자유주의 경제세계화의 현 구조에 대해 침묵하고 행동하기를 거절한다면 우리 신앙의 온전함이 위태롭게 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하나님 앞과 서로의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한다.”


그렇다면 세계개혁교회연맹이 신자유주의적 경제세계화에 대해 이렇게 신앙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던 긴급현실은 무엇인가. 무엇이 세계개혁교회연맹으로 하여금 신자유주의적 경제세계화에 대해 고백적으로 대응하게 했는가.


우선 아크라 신앙고백은 '이 시대의 징조가 생명 자체를 위협하는 심각한 상황'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하나님의 피조물이 계속해서 속박 속에서 탄식하며 구원을 갈망하고 있음을 듣고 있다”(로마서 8장 22절)는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우리는 지금 전 세계의 고통받는 민중과 상처받는 피조물 세계의 탄식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으며 “세계민중의 고통과 생태계에 가해진 상처가 중첩되는 극적 현실을 보고 있다”고 고백의 전제상황을 설정했다.


그리고 “생명에 대한 엄청난 위협의 근본원인은 무엇보다도 정치적 권력과 군사력의 비호 아래 전개되는 불의한 경제구조의 산물임이 분명하다”며 '현 세계의 부끄러운 상황'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전 세계 1퍼센트의 부자들에 속하는 연간 수입이 가난한 자 57%의 연간수업과 맞먹는다. 하루에 빈곤 및 영양실조와 관련해 죽는 사람의 수가 매년 2만4천명에 이르고 있으며 가난한 나라의 외채는 끊임없이 원금을 갚아나가는 상황 속에서도 계속 증가하고 있다. 여성과 어린이들이 빈곤층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하루에 1달러 이하의 생계비로 살아가야 하는 절대 빈곤속에서도 세계인구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우상 숭배'


이어서 아크라 신앙고백은 경제 세계화로 인한 생태계 파괴를 심각하게 지적했다.

"부국들의 무한 경제성장 정책과 다국적 기업의 이윤추구 극대화 지향이 생태계를 약탈하고 환경을 심각하게 손상시켰다. 1989년엔 하루에 한 종(種)의 생물이 사라졌으나, 2000년에는 시간 당 한 종(種)이 사라지고 있다. 황폐화의 결과로 기후변화, 어족의 고갈, 벌목, 토지의 부식, 물의 오염 등이 나타나고 있다. 공동체는 파괴되고, 살림살이는 불가능하게 되었으며, 해안지역과 태평양 섬들은 침수될 위협을 받고 있다. 폭풍이 날로 증가하고 있으며 고농도의 방사능 방출이 건강과 생태계를 위협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생명의 구조와 문화적 지식이 경제적 이윤추구를 위해 특허화되고 있다”며 생태계의 상업화를 고발한다.


아크라 고백은 이 위기의 주범은 바로 신자유주의 경제세계화라고 분명히 밝히고, 오늘의 위기가 신자유주의 경제세계화의 진행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다고 단언한다. 고백이 밝힌 바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다음과 같은 신념을 바탕으로 진행된다고 한다.


■무한경쟁, 소비주의, 무한경제성장, 부의 무제한 축적이 전 세계를 위해 제일 좋은 방안이다.

■사유재산권은 사회적 의무를 가지지 않는다.

■자본투기, 시장의 자유화와 탈규제화, 공기업과 국가자원의 민영화, 규제없는 외국자본의 투기와 수입, 낮은 세율, 통제받지 않는 자본의 자유이동 등이 모든 사람의 부를 성취하게 할 것이다.

■사회적 의무, 가난한자와 사회적 약자의 보호, 노조, 사람들의 관계성 등은 경제성장과 자본축적의 과정에 부수적이다.


특히 아크라 고백은 “신자유주의는 가난한 자와 자연으로부터 끊임없는 희생을 강요하며 이것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강변하는 이념”이라고 규정한다. 또 “이것은 경제가 생명위에 주권을 행사하고 우상숭배에 이르게 하는 절대충성을 강요하면서 부와 번영의 창조가 세상의 구원의 길이라고 주장하는 거짓 약속”이라며 그 허구성과 사기성을 폭로했다.


아크라 고백은 이 신자유주의 경제세계화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또 이런 이념의 프로젝트는 누구의 비호아래 전개되는지를 명쾌하고 밝히고 있다. 아크라 고백은 "힘없고 고통 받는 자들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려는 진리와 정의의 구도자” 시각으로 분석할 때 “현 세계의 질서(혹은 무질서)는 '제국'의 극도로 복잡하고 비도덕적인 경제구조에 기인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제국'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제국이란 강대국이 자기들의 이익을 보호하고 방어하기 위하여 구성한 지배구조의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군사적 권력의 총체적 집합을 의미한다.”


고전적 자유주의 경제에서 국가는 시장경쟁에서 사유재산과 계약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했다. 그 후 국가는 노동운동의 투쟁을 통해 시장을 규제하고 국민의 복지를 위해 봉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자본의 이동이 초국화하면서 신자유주의가 국가의 복지기능을 해체하면서 시장을 세계화했다. 이에 따라 시장을 보호하는 정치적·법적 기구들도 세계화되었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정부는 국제금융기관들(국제통화기금, 세계무역기구)과 함께 정칟경제·군사적 협조를 하면서 자본가들의 이윤을 더욱 증대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아크라 고백은 “경제세계화와 지정학이 신자유주의의 지원으로 결합해 오늘의 경제위기를 극도로 심화시키고 있다”며 “이것이 바로 가진 자들의 이익을 보호하고 방어하는 현재의 세계체제”라고 단정하고 있다.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경제구조로


"예수는 하나님과 맘몬(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누가복음 16장 13절)고 하셨다. 이 말씀을 근거로 세계개혁교회연맹은 다음과 같이 신앙고백의 동기를 밝힌다.


“성서적으로 볼 때 가난한 자를 희생시켜 이루는 부의 축적 구조는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못하다. 이 같은 구조는 인간의 고통(예방할 수 있는)을 가중시키는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맘몬에 해당한다.”


아크라 고백은 세계교회에 심각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이번 고백의 과정에서 줄곳 주저하면서 고백에 참여하기를 꺼렸던 유럽 및 미국 교회들도 현재는 아크라 고백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에 분주하다. 남미, 아프리카 등 남반부 교회는 지구적 경제정의 투쟁에 중요한 신학적 근거가 된다고 판단하며 흥분하고 있다. 이번 고백으로 세계신학의 축이 서구에서 제3세계 교회로 전환되기도 했다.


혹자는 경제는 경제인들의 영역으로, 영적인 문제를 다루어야 할 교회가 경제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현상을 못마땅하게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경제의 어원은 성경에서 나온 것이다. 성서의 경제는 ‘집안 살림’이란 뜻인 ‘Oikos’ 에 규범이란 말인 ‘Nomus’가 연결되어 나온 개념이다. 이 두 단어가 결합된 것이 ‘오이코노미아’(Oikonomia)인데 ‘하나님의 집안 살림살이 법칙’이란 뜻이다. 이 ‘Oikos’ 란 말에서 경제를 가리키는 영어인 'Economy'와 생태계를 의미하는 'Ecology'가 나왔다. 에큐메니컬(교회통합운동)의 정신인 '오이쿠메네'(Oikumene, 지구상에 거주하는 모든 생명공동체)란 용어도 ‘오이코노미아’에서 나온 것이다. 경제란 것은 이처럼 영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 경제가 인간의 손에 들려지면서 인간의 탐욕의 수단이 되고 있는 셈이다. 바로 이 때문에 경제는 신앙과 관련된다는 것이 세계개혁교회연맹의 인식이며 이 때문에 경제를 윤리나 도덕이 아닌 신앙의 문제로 보려는 것이다.

종교에서는 경제를 윤리나 도덕의 문제로 보면 남의 가난이 남의 문제로 보이지만 고백의 문제로 보면 이웃의 가난은 곧 나의 문제가 된다. 바로 이 신앙의 발로가 이 사회를 사랑하는 교회의 사랑의 동기가 되어야 한다. 한국교회에도 이 같은 깊은 신앙고백적 행동이 있기를 기대 한다.

        

( 참고자료 2 )

[브라질 현장]세계화에 맞서는 새로운 해방신학 모색

                  21일 제1차 세계해방신학포럼 개막 ,    엄기호(getoutof) 기자


제1차 세계해방신학포럼 개막-세계화에 맞선 해방신학의 재정립 시도


1월 21일 10시 브라질 포루투 알레그레에서 제1차 세계해방신학포럼(World Forum on Theology and Liberation, 이하 포럼)이 '다른 가능한 세상을 위한 신학'(Theology for Another Possible World)을 슬로건으로 개막했다.


포럼은 세계사회포럼의 성공과 성장에 고무되어 지난 2003년 대회 때 세계적으로 저명한 해방신학자인 레오나르도 보프가 주창한 지 2년만에 그 결실을 맺어, 2005년 세계사회포럼 사전 포럼의 형태로 열리게 되었다.


포럼은 교황청 인준 리오 그란드 도 술 가톨릭대학(Pontificia Universidade Catolica do Rio Grande do Sul)에서 브라질교회협의회, 브라질성공회, 라틴아메리카가톨릭수도자연합회 등이 주최하며, 레오나르도 보프, 스리랑카의 티사 발리수리아, 한국의 정현경 등 전 세계에서 300여명의 진보적 신학자들이 모여 해방신학의 과제와 미래를 토론하게 된다.


개막식에서 조직위원회는 포럼은 세계사회포럼의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정신에 전적으로 공감하였다. 특히 종교가 갈등과 전쟁의 원인이거나 정당화의 수단이어서는 안 되며, 억압받는 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야 하며,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제국의 출현에 맞는 해방신학의 재정립을 위한 출발점으로 포럼으로 자리매김하였다.


특히 라틴아메리카 가톨릭수도자연합은 축하 메시지에서 '우리가 맞서야 할 드래곤은 크지 않으며, 희망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고 역설하며 이런 희망과 해방의 운동들과 함께 하는 해방신학으로 나아가자고 호소하였다.


이어 21일 첫날은 각 대륙의 진보? 신학의 상황에 대한 보고가 이어졌다. 먼저 아시아의 진보신학에 대한 보고에서는 한국의 민중신학과 인도의 불가촉천민신학 등 아시아의 진보적 신학은 억압받는 이들의 토착적 신학으로 출발하였다는 특색을 가진다는 점이 부각되었다. 이어 유럽과 아프리카 등의 상황이 보고되었다.


특히 흥미를 끈 것은 미국의 진보신학의 상황에 대한 보고였다. 시카고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고 있는 드와이트(Dwight Hpkins)는 미국의 신학은 신보수주의 신학, 자유주의신학, 예언자적 신학 등으로 나누어진다고 지적하였다. 특히 부시의 재선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신보수주의 신학은 개별적인 신학이라고 하기보다는 일종의 집단적 운동 형태를 띠고 있다고 분석하였다.


신보수주의 신학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은 미국은 하느님이 세운 나라라는 것에 대한 확신, 미국은 그저 다른 나라보다 더 나은 것이 아니라 최선이라는 것에 대한 확신, 미국이 결심한 것은 즉각적으로 실행되어야 한다는 확신, 이에 반대하는 것은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확신으로 뭉쳐 있는 신학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는 이런 점에서 신보수주의자들이 전혀 자선도 하지 않는 몰인정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해라며, 신보수주의신학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가진 문제점은 자선을 하지 않는다거나 자비롭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자선과 자비를 추구하는 방식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나 국가에 대해서 무자비하다는 점이라고 지적하였다.


이에 맞선 신학으로서의 자유주의 신학은 개인의 자유에 대해 절대적으로 신봉하며, 그것을 신장시키는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특히 자유와 관련하여 미국이 신에 의해 만들어졌고 상대적으로 우월한 국가라는 미국의 이미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신보수주의와 맥락을 같이 한다.


이에 더하여 자유주의 신학은 재산권을 개인의 자유에서 핵심적인 자유 중의 하나로 여김으로써 가난과 빈곤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취약하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그는 미국 진보신학의 미래를 작지만 지구적으로 네트워킹하며 경험과 언어를 공유하고 있는 예언자적 신학에서 찾고 있다.


1월 22일, 포럼의 둘째 날 오전은 현재 세계상황에 대한 점검으로 시작하였다. 포르투갈의 저명한 사회학자 보아벤투라(Voaventura de Sousa Santos)는 기조발제에서 세상은 현실과 기대 사이의 간극으로 존재한다고 규정하였다. 사람들은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오늘이라는 현실을 바라보고, 그 현실을 바꾸며 살아간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이후 현실과 기대는 역전되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오늘은 좋지 않으며 내일은 더 나쁘다!(Today is bad, but Tommorrow is worse!)'는 공감을 가지고 있다. 이 속에서 다른 세상은 전혀 가능하지 않다. 복지국가의 붕괴와 함께 사회적 협약은 개인적 협약으로 바뀌었으며, 사회적 안전망은 붕괴하고, 민주주의와 인권은 위기에 직면하였다. 민주주의는 이제 선거라는 일종의 정치적 의례로 전락하였고 삶과 유리되었다.


노동조건과 협약에서 국가는 후퇴하였고, 시장에 의해 사회는 파시즘적 상황에 떨어졌다. 국가는 사회적 시민권을 기반으로 구성되었지만, 국가는 사회에서의 시민권을 더 이상 방어하지도, 기반하지도 않는다. 결론적으로 그는 현재 사회를 정치적 민주주의와 사회적 파시즘으로 규정하였다.


이어 그는 현재 지구는 단일 문화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으며, 이것에 대항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하였다. 그가 말하는 단일 문화란 생산성의 문화, 단선적 진화의 문화, 위계화의 문화, 공학적 지식의 문화 등이 지구적으로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세계를 우월한 것과 열등한 것을 끊임없이 가르고, 생산적인 것과 비생산적인 것을 가르며, 열등하고 비생산적인 것을 침묵하게 한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부재의 영역이 생긴다. 그는 그의 사회학을 부재의 사회학으로 명명하며, 그의 사회학은 새로운 사회적 포용을 위한 인권과 민주주의의 급진화를 지향한다고 이야기하였다. 즉 부재된 것의 인권과 민주주의로 새로운 연대와 생태(ecology)의 지구로 새로운 세계는 가능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제1차 세계해방신학포럼은 1월 25일까지 5일간의 일정으로 전개되며 '또 다른 세상을 위한 하느님', '또 다른 세상을 위한 종교', '또 다른 세상을 향한 신학'이라는 세부주제를 가지고 진행된다. 한편 한국에서는 천주교평신도들의 신학연구운동단체인 우리신학연구소에서 소장 박영대와 연구위원 엄기호(팍스 로마나 동아시아 담당, 가 참석하고 있다.


"미국 신보수주의신학의 수장은 부시 대통령"

                                       미국의 진보적 신학자 드와이트 인터뷰


-지난 미국대선에서 신보수주의 신학이 끼친 영향은 어느 정도였는가?

“당연히 신보수주의 신학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부시를 지지하였다. 그것도 지지하는 정도가 아니라 교회에서 투표에 관한 교육을 하고, 투표를 독려하고 조직하고 현수막을 거는 등 거의 군대와도 같은 방식으로 움직였다. 사실 신보수주의 신학 운동은 거의 군대나 다름없다. 이에 반해 자유주의 신학 진영은 ‘모든 사람은 말할 자유가 있다.’고 나이브하게 이야기하며 적극적으로 이에 대처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보다 더 느슨하고, 덜 조직적이다.”


-신보수주의 신학은 신학이라고 하기 보다는 운동이라고 당신은 이야기한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사실 다른 모든 신학처럼 신보수주의 신학에도 뚜렷하게 자기 선을 드러내는 신학자가 있다. 그러나 내가 신보수주의 신학을 어떤 학문적 실천이라고 하기보다는 운동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첫 번째로 신보수주의신학은 많은 신학교와, 신학대학, 그리고 교회를 가로지르면서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두 번째로 신보수주의 신학은 학문적이라기보다는 대중적인 측면이 아주 강하다. 이런 점에서 신보수주의 신학의 진정한 대표는 신학자가 아니라 부시라고 말할 수 있다. 이번에 부시의 취임연설을 들었는가? 전부가 다 하느님과 신앙과 종교에 대한 이야기이다. 대통령 취임식 연설라고 볼 수 없을 정도이다. 이런 점에서 신보수주의 신학은 신학이라기보다는 운동적 성격을 더 강하게 띈다.“


-체계적이지 않은데도 신보수주의신학이 이처럼 대중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가장 크게는 신보수주의신학이 대단히 애국적이라는 점이다. 발제에서도 말한 것처럼 신보수주의 신학은 미국이 하느님의 뜻에 의해 만들어진 최선의 국가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미국의 시민이 된다는 것은 곧 하느님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자부심과 자긍심의 고취가 대중들을 열광시킨다. 최선의 국가의 시민이고, 가장 강력한 국가의 국민임을 신보수주의신학은 계속 고취시키고 있으며, 실제 미국인들은 그렇게 느낀다.


따라서 이들은 세계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위치와 임무를 신보수주의 신학과 부시가 제대로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반해 자유주의 신학은 아주 나이브하다. 개인적이며. 물론 자유주의신학이 공헌한 바가 있다. 특히 개인의 자유, 여성과 흑인과 이주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해서 자유주의 신학은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시스템 자체가 문제시되면 자유주의 신학 역시 신보수주의신학과 다르지 않다. 그들 역시 미국의 경제적, 정치적 시스템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이 최선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들이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불린다.“


-북한의 경우에도 탈북자들을 위한다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선교사들이다. 북한에 대한 이런 접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원래 그들이 하는 일이 그렇다. 미국은 백악관과 언론과 교회와 자본이 일종의 동맹체를 구성하고 있다. 맨 먼저 교회가 나서서 인도주의적 도움이라는 이름으로 선교에 나선다. 그것이 파견지 국가의 정부에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정부가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비난을 하기 시작하고, 언론이 이를 받아 적는다.


언론은 계속해서 북한이 인권탄압국이며, 독재적인 공산주의 국가이며, 그래서 미국에 의해 붕괴되어야하는 곳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문제는 북한이 독재적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라거나 언론을 탄압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주장의 배후에는 미국의 말을 듣지 않는 북한은 붕괴되어야하고, 절대적 선인 미국식의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체제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결국 그들의 비난과 비판의 요점은 북한이 인권탄압국이고 독재적인 공산주의 국가라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선'인 미국의 지시와 모델을 북한이 따르지 않는다는데 있다.“


-한국의 보수적 그리스도교에서는 국가보안법 수호를 위한 시위에서 미국 국기를 흔든 적도 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눈이 동그래지며) 한국에서? (그렇다) 오 마이 갓.”


-어떻게 해서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나?

나는 사실 교회에서 태어나고 교회에서 자랐다. 청년기가 되었을 때 나는 사실 교회를 떠났다. 교회보다는 사회운동이 흑인의 정의를 위해서 더 확실하게 싸울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가운데 흑인 신학을 만났고 다시 교회로, 아니 신앙으로 돌아왔다.


왜냐하면 흑인신학을 통해서 나는 나의 그리스도인 됨과 흑인으로서의 자긍심과 사회정의라는 세 가지 모두를 다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신학을 예언자적 신학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한국의 민중 신학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한국의 민중 신학은 요즘 과거처럼 그렇게 활동적이지 못하다.) 정말인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흑인 신학은 신학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예언자적 교회를 통해서 운동으로 존재하고 있다. 비록 예언자적 교회는 숫자나 규모에서도 아주 적지만 흑인 신학은 교회에 근거하고 교회를 통해서 운동하기 때문에 여전히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나는 아주 낙관주의적이다. “


-이런 상황에서 낙관적이라니 놀랍다. 그 근거가 무엇인가?

사실 미국이 미국식의 파시즘적 상황이 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나를 낙관적으로 만든다. 왜냐하면 부시와 신보수주의가 파시즘으로 갈 정도로 그렇게 절박하다는 것이다. 절박하지 않다면 왜 파시즘적 체계로 이행하겠는가? 경제며 사회적 안전망이며, 국민적 결속이며 모든 것이 끝장났다.


그러니 더욱 부시와 신보수주의자들은 더 절망적이지 않을 수 없고 절박해지는 것이다. 물론 나는 이 상황이 기쁘지는 않다. 그러나 나는 낙관적일 수 있다. (상황이 기쁘지는 않지만, 낙관적이라니 그것이 당신이 당신의 신학을 예언자적이라고 말하는 아주 상징적인 표현인 것 같다.) (웃으며) 그런가? 그렇다. 모든 사회적 안전망이 붕괴하여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보면서 행복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낙관적일 수 있다. 맞다. 그래서 나는 내 신학을 예언자적이라고 이야기한다.“



( 참고자료 3 )

김정란. 상지대 교수, “극우 기독교인에게 고함 - "예수도 '국가보안법' 희생자"


당신들은 '불온한 반항자' 예수의 친구가 아니다.


나는 예수쟁이이다. 왜 “크리스찬”이라고 말하지 않고 우정 이런 식의 약간은 자기비하적인 용어를 사용하는지 헤아려주었으면 좋겠다. 한국 기독교는 너무나 가진 자들의 편에 서게 되었다는 생각, 따라서 진실로 예수라고 하는 한 팔레스타인의 지독한 주변인이었던 기독교의 창시자의 정신으로부터 너무나 멀어졌다는 생각이 나로 하여금 이렇게 주변성을 자기 정체성 안에 통합해 넣는 용어를 일부러 사용하게 만드는 것이다. 스스로를 비천한 자리에 가져다 놓을 줄 모르는 자는 크리스찬이 아니다.


나는 교회 안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스스로의 결단에 의거하여 자신을 옭죄던 봉건성을 기독교라는 각성의 형식으로 극복했던 1세대 기독교도의 아들이다. 내 아버지는 대한민국 최대의 교회 중 하나인 영락교회를 창건하신 열 분 장로님 중의 한 분이시다. 그뿐이 아니다. 집안에는 순교자도 한 분 계시고, 어머니 쪽으로도 내 가족이 기독교와 가지는 관계는 그 연원이 깊고 특별하다. 나는 청소년기의 대부분을 영락 교회 뜨락에서 보냈다. 교회는 나의 영혼의 깊은 터였다. 요컨대 나는 기독교의 딸이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내가 여전히 예수쟁이라고 생각한다. 그 말은 내가 예수를 깊이 사랑하고 나의 어리석음과 죄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나의 진정한 구원자로 여기고 따른다는 의미이다. 교회 뜨락에서 보낸 유년이 지나간 후, 갈등은 내 영혼 깊은 곳에서 신음처럼 치고 올라왔다. 나의 내면에서는 비참한 사회의 현실에 진정으로 눈을 주지 않는 대형교회의 무책임한 복음주의에 대한 불만이 서서히 싹터 올랐다. 그러나 부모님은 당신들이 전생애를 투입해 넣은 교회를 떠나지 못하셨다. 정치 문제로 이따금 당회장 목사님과 충돌하곤 하시던 내 아버지는 결과적으로는 복음주의에 소극적으로 안주하셨다. 당신이 당회를 그만두시는 정도에서 소극적으로 저항하시고 말았던 것이다. 딸은 당신의 갈등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딸은 아버지가 당신의 정신 안에 설정하신 울타리 너머로 아버지가 전해주시는 종교의 메시지를 알아차렸다. 딸은 아버지의 울타리 너머로 아주 넓은 지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덕택에 딸의 기독교적 이상은 명확한 비전을 확립하고 형성되었다. 아버지는 그것을 아셨던 것 같다. 딸이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느 지점에서 기독교의 울타리를 벗어나기 시작하고 있는지 모두 이해하셨던 것 같다. 종교문제를 둘러싼 어머니와의 충돌은 늘 거칠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사도 바오로의 성경구절을 적은 조그만 종이쪽지를 울고 있는 내 책상 위에 아무 말 없이 올려놓고 나가시고는 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렇게 내 안에 형성된 기독교적 이상은 결코 지금 한국 기독교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 아니다. 예수 대신 미국을 섬기는 크리스찬이라니, 수많은 죄없는 젊은이들을 체제의 유지를 위해 감옥에 보내고 고문하고 죽이는 데 사용되던 악법을 폐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극우단체와 한 몸이 되어 시청 앞에 나와서 울고불고 법석을 떠는 크리스찬이라니. 사랑이 아니라 증오에 의거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구하는 자가 크리스찬이라니. 그들은 나에게 이미 크리스찬이 아니다. 그들은 사제계급의 사주를 받아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아우성쳐댔던 어리석은 유태의 군중과 다르지 않다.


극우 기독교인들이여, 대답하라. 대체 예수가 누구였던가. 예수는, 비유적으로 말하면, 바로 당신들이 그토록 증오하는 “빨갱이”였다. 무슨 말이냐고? 예수는 기존의 질서에 전격적으로 반기를 들었던 불온하기 짝이 없는 반항자였다. 그는 당대의 국가보안법 위반자였다. 예수는 국가보안법 때문에 희생되었다. 그는 종교적 의미에서는 당대의 지배계급이었던 유태의 사제들이 설정해놓은 율법의, 그리고 정치적 의미에서는 로마의 위정자들이 지정해놓은 법의 울타리를 파괴한 자였다. 그리고 그 때문에 잡혀 죽었다.


그는 인간이 인간인 바가 체제와 제도에 의거하여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신과 막바로 맺는 관계 안에서 구성된다는 것을 가르쳤다. 나는 그가 “나는 신의 아들”이라고 말했을 때, 그가 가르치려고 했던 것은 바로 인간 각자가 “신의 아들”이라는 메시지였다고 생각한다. 그는 본질적 층위에서 전격적으로 제도가 설정한 존재의 개념에 저항할 것을 가르쳤다. 그는 바깥에서 인간을 규정하는 외적 관념과 싸울 것을 명령했다.


그는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서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깊은 부름 외의 그 무엇에게도 귀기울이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는 자신을 찾아와 “아들”이라고 부르는 마리아를 향해 “누가 당신의 아들이냐?”라고 되물었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선지자”라고 “엘리야”라고 부르는 제자들의 명명을 거부하고 “인간의 아들”이라고 명확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선언한다. 그러나 그 정체성은 “신의 아들”이라는 정체성과 충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선언은, 인간 각자가 인간 각자의 자리를 떠나지 않으면서도 깊은 내면의 부름과의 관계 안에서 “신의 아들”로 격상될 것을 주문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간의 아들의 자리에서 신의 아들이 되어야 하는 자들이다.


예수는 사제계급과 정치가들이 그어준 존재의 금 안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는 안식일을 조롱했다. 그에게 존재의 가치는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세상의 왕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에게 존재의 가치를 분양해주는 자는 세속의 제일인자인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우주의 왕, 우주인 바로 그분, 존재의 무한 허공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부자들과 권력자들과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 그는 문둥이들, 병자들, 창녀들, 세리들, 가난한 어부들과 함께 지냈다.


그는 세상의 거지들과 함께 지냈고, 그 거지들이 유태의 사제들과 로마의 고위 정치인들만큼, 어쩌면 그들보다 더 높은 존재의 가치를 가진 자라는 것을 일깨워주었기 때문에, 체제의 종교적/세속적 울타리를 부수고 존재의 이상을 가르쳤기 때문에, 힘센 부자 사제들과 정치 권력자들의 손에 잡혀 죽었다. 부자들과 독재자를 위해 기도하고, 신도들로 하여금 세상에서 복을 받기 위해 진정한 천국을 잊게 만들고, 그들을 형이상학적으로 협박하여 일년에 수십억씩 긁어모아 제 배를 기름지게 하는 대형교회 목사들은 예수의 친구가 아니다.


예수는 국가보안법의 희생자였다. 그는 체제가 허용하지 않은 사상을 지닌 죄로 죽었다. 예수는 당대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혁명적인 사상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상범으로 잡혀 죽었다. 부활의 도그마는, 나에게는, 예수가 육체적으로 부활했다는 의미보다는, 체제가, 국가보안법이 무서워 웅크리고 있던 비겁한 제자들이 스스로 몸을 일으켜 예수의 길을 따라가는 결단을 내린 전격적인 신앙의 내면화가 이루어진 영적인 기적으로 여겨진다. 예수를 따르던 자들이 스스로 예수가 되기로 한 사건, 인간의, 제도의 아들 딸들이었던 자들이 신의 아들 딸이 되기 위해 몸을 일으킨 것이 나에게는 부활의 기적이다.


이 해석은 예수의 육체적인 부활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제자들은 어느 날 정말로 부활한 예수의 비전을 보았을 것이다. 사람의 인식이 지극한 경지에 다다를 때, 상징은 진실로 육화된 모습으로 한 인간의 내면 안에서 현현한다. 나는 예수의 에피파니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신비 경험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내면적 혁명을 이끌어내었기 때문에 의미를 가진다. 진정으로 제자들이 세상을 향해 떠나기 시작했던 일은 오순절, 즉 성령이 바람처럼 임하여 제자들의 혀를 강타했던 언어의 도래와 함께 일어났다. 따라서 오순절의 기적은 제자들 각자가 내면 깊은 곳에서 자신의 언어를 발견한 사건이다. 그날 제자들은 예수의 말을 자신의 말로 내면화하면서 스스로 비겁한 겁쟁이의 위상을 극복하고 진정으로 부활했던 것이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면 적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예수가 살아 돌아온다면, 무엇이라고 말할까? 본디오 빌라도의 법정에 잡혀간 예수는 “네가 왕이냐?”라고 묻는 로마 총독에게 “그것은 네 말이다”라고 응수한다. 그리고 예수는 침묵한다. 채찍질을 당하면서 능멸과 조롱을 당하면서 예수는 그 혹독한 심문 동안 내내 입을 열지 않았다. 예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네가 너의 진정한 말을 발견하지 못하는 한, 너는 나의 존재 원리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따라서 나는 너를 너의 무지 안에 던져놓는다고. 깨달음은 네가 너의 진정한 언어를 발견하지 못하는 한, 결코 너를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시청 앞에 모여서 세상의 왕인 미국대통령을 향해 찬가를 불러대는 크리스찬들, 인공기를 태우며 사상이 다르다는 한 가지 이유로 동족을 증오하며 어떤 야만적 트랜스 상태에 빠져드는 소위 예수의 신도들을 향해 예수는 다시 그렇게 말할 것 같다.


(참고자료 4)

"신앙공동체는 노동자 권리 더 보장해야" 

하종강 소장, "신앙을 이유로 노조 막는 건 반대"

                                           양정지건 nunmul25@newsnjoy.co.kr


 

교회 노조 설립에 대한 의견을 듣기 위해 하종강 소장(한울노동문제연구소)을 서초동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계속되는 노동자 교육과 각종 원고로 시간을 내기 힘든 상황에서 어렵게 잡은 약속이었다. 대화는 한 시간 정도 이어졌는데, 하 소장은 시종일관 교회 안에 노조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했다. 노조가 교회의 부패를 막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내놓았다. 그는 대화 시작에 앞서, 자신이 가진 신앙 배경을 설명했다. 자신이 단순히 노동운동가가 아니라 교회 노조 문제에 대해 발언할 수 있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나도 기독교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싶다. 내가 하는 말이 노동운동만 하던 사람이 하는 편협한 생각이라는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다. 나도 기독교에 천착했던 시기가 있었고 비록 날라리지만 영동감리교회의 집사다. 사춘기 시절 하나님께 서원 기도를 하기도 했다. 그래서 연구소 직원들에게도 말하지 않고 감신대신대원 시험을 봤는데 다행히 떨어졌다. 만약 붙었다면 인생 최대의 고민을 했을 것이다. 시험을 보고 떨어졌으니 이제는 하나님 만나도 할 말은 있다. 그만큼 기독교는 나에게 중요한 화두였다.


신앙공동체여서 노조가 불가하다는 주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신앙공동체라는 이유로 사람들의 권리가 침해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이유로 노동자들의 권리가 침해당할까봐 헌법에 노동자의 권리를 명시한 것이다. 다른 법도 아닌 헌법 33조에 노동자의 권리를 신성한 것으로 인정한 것이 그 이유에서다. 하나님을 앞세워 교인들을 바보로 만드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신앙공동체라는 것이 노동자들의 권리를 침해할 이유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신앙공동체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권리를 더 보장해야 하는 것이다.


최초의 신앙공동체 모습이 무엇인지 기억해야 한다. 기독교는 출애굽부터 시작되었다. 최초로 기록된 성경은 다 알다시피 출애굽기이다. 애굽에서 수 백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다가 거기서 탈출하면서 기독교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노예들이 노예 해방에서 승리하면서 자기 역사를 기록한 것이 성경의 시작이다. 가나안에서 만든 공동체 이름이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의미의 '이스라엘'이었다. 왜 그런 이름이 지어졌겠나. 인간이 인간을 다스리는 사회를 수 백년 간 피눈물을 흘리며 겪었으니 다시는 그런 사회가 되지 않기 위해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지은 것이다.


이스라엘은 인간이 다른 인간의 권리를 빼앗는 것을 막기 위해 여러 가지 제도를 만들었다. 예를 들어 열 두 지파가 모여 재산을 분배하면서 제사장직을 맡은 레위인에게는 한 푼의 재산도 주지 않았다. 종교는 힘이기 때문에 종교를 가진 사람이 재산까지 가지면 또 하나의 특권층이 생기기 때문이다. 신앙공동체 원칙에 충실하려면 교회 목사님들은 재산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보라, 얼마나 많은 대형교회 목사님들이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고, 그 교회에서 일하는 수많은 다른 직원들에 비해 얼마나 고임금을 받는가. 비성경적이고 비기독교적인 것이다. 신앙공동체를 내세우며 노동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발상은 철저하게 비기독교적인 것이다.


교회 안에 노조가 생기면 갈등 요소가 늘어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노조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도록 한번이라도 교육받은 일이 있는지 생각해 봐야한다. 우리 나라는 어떤 제도권 교육에서도 노조와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교육하지 않는다. 2년 전 비행기 조종사들의 파업을 모든 국민이 다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당시 언론에서 이들이 연봉 1억이 넘는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이들 중 연봉 1억이 넘는 사람은 10% 정도였다. 국민들은 고연봉의 사람들이 파업을 해 항공대란으로 겪었다고 알고 있지만 왜 이들이 파업을 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이것이 우리 사회를 유지해온 교육 시스템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노동 문제를 올바로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


국민들은 노조를 수십 년 동안 권력과 자본을 가진 사람들이 훈련시키는 관점으로 보아왔다. 그러나 다른 나라는 노동자의 권리와 노조에 대해 다 가르친다. 우리 나라 국민의 대부분은 노동자이거나 그 가족이다. 국민의 대부분이 노동자인 사회에서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가르치지 않고 다만 노조가 우리 사회에 해롭다는 것만 가르칠 뿐이다.


헌법이 보장한 노동3권이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이다. 단결권은 노동자가 자신의 유익을 위해 조직을 만들 권리이고 혼자가 아니라 단체로 사용자와 교섭할 권리가 단체교섭권이다. 단체행동권은 그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기업에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끼치고 시민들에게 불편을 주면서 파업할 권리이다. 이는 헌법이 보장한 신성한 권리이다. 사실, 얼마나 살벌한 권리인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타인에게 손해를 끼칠 권리이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타인을 불행하게 만들 수도 있는 권리를 왜 헌법에 보장했는지 생각해 보라. 왜 이런 권리를 전세계 대부분의 국가가 신성한 권리로 인정하겠는가? 이런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한 일이 있는가?


노조를 부정하는 시각이 교회에서는 한층 더 강한 것 같다. 이유가 무엇일까.


노조에 대한 몰이해와 교회의 보수적 성격이 결합해 문제를 한층 어렵게 몰아가는 것 같다. 성모병원을 보라. 200일 넘도록 노동자가 파업을 하는 동안, 한 번도 교섭이 되지 않았다. 신부·수녀님들은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사람들이니 우선 업무에 복귀하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다른 병원은 교섭이 이루어지는 데 가톨릭이 운영하는 병원에서 교섭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노조에 대한 몰이해가 보수적인 신앙과 결합하면서 상승 효과를 가져온 것이다.


병원 노동자들이 하도 답답해서 로마로 갔었다. 교황청의 담당자는 물론 유럽의 담당자와 인사들이 한결 같이 한 말이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자기 사회에서는 지금까지 노조와 가톨릭이 적대적인 관계가 된 적이 없었는데, 가톨릭은 언제나 약자의 편이었는데, 한국 사회에서는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이해하지 못했다. 신부·수녀님들이 노동자들을 고발해서 잡혀가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노동자에 대한 왜곡된 교육을 받은 사람 중에 당연히 성직자도 포함되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는 편향된 기독교가 들어왔다. 기독교를 노예에서 출발한 종교로 보는 관점이 있고 이를 애써 무시하는 전통이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을 잘 보면 예수님은 편파적으로 노동자를 사랑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식민지와 분단을 겪으며 굳어진 노동자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와 기독교의 보수 정서가 결합하여 더욱 천박해진 것이다.


교회 안의 노조를 사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설득할 방법이 있다면.


쉽지 않다. 노동자 역시 노조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볼 것을 강요당하는 사회에서 살았다. 노동자가 자신들의 싸움을 먹고 살기 위한 치사한 싸움이 아니라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올바른 싸움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교인들에게는 더 오래 걸릴 것이다.


안식일을 보라. 남종이나 여종뿐만 아니라 주인에게도 쉬라고 명령하고 있다. 주인이 쉬어야 하인들도 쉴 수 있기 때문이다. 악덕기업주들의 공통점이 무언 줄 아는가. 자신의 헌신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대우 그룹의 김우중 회장을 보라. 그 사람이 한국 경제에 얼마나 큰 해악을 끼쳤는지는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뭐라고 말했나. 자신이 대우 그룹 전체에서 가장 적게 자고 열심히 일한다고 강조했다. 식사도 승용차에 한다고 했다. 김우중 식사법을 개발했을 정도로 열심히 살았다고 말했다. 나도 열심히 일하니 너희도 그렇게 하라는 논리다. 이런 일을 막기 위해 성경은 안식일에 반드시 주인이 쉬라고 한 것이다. 이런 의미를 신앙 생활을 통해 익혀야 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이 엿새 동안 창조하시고 쉬셔서 안식일에 쉰다고만 가르치는 것은 사기이다. 목사님들이 공부를 해야 한다. 기독교에 대해 제대로 공부하면 노동자의 권리를 이해하게 된다. 희년 제도를 왜 두었겠는가. 철저하게 노동자 권리를 보호하는 종교가 기독교였다.


교회 노조는 고용주가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책임을 회피하려는 핑계다. 정부가 모든 결정권을 가지는 공기업 문제에 대해 정부가 책임을 지지 않는 논리와 비슷한 것이다. 공기업에서, 정부가 결정하지 않으면 사장은 아무 것도 결정하지 못한다. 노동자들은 정부 책임자가 나와서 협상할 것을 요구한다. 많은 경우, 정부 책임자가 나오지 않는다. 사용자가 누구인지는 아주 명백하다. 그 사람을 채용하고 내보낼 수 있는 권한을 행사하는 사람이 사용자인 것이다. 그 사람이 교섭에 나서면 되는 것이다. 노동자 권리를 회피하자고 하면 수많은 이유를 댈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비겁한 것이다.


줄 타는 광대가 있다고 치자. 남사당패의 광대는 보통 손에 부채를 들고 줄에 오른다. 부채는 언제나 몸이 기우는 반대 방향으로 펼쳐진다. 그래야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이 사람이 몸이 기울어지는 쪽으로 부채를 펼치면 바로 떨어질 것이다. 엄정·객관·합리를 유지하며 중립을 지키겠다는 사람은 바로 떨어진다. 교회 내에서 지위가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 중에 누구의 목소리가 더 큰가? 누구의 주장이 더 잘 관철되는가? 교회에서 지위가 낮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교회 운영에 지장이 될 정도로 지나치게 크다면 교회에서 힘있는 사람 방향으로 부채를 펼쳐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에서 목회자들의 목소리와 권한이 지나치게 크다면 부채를 어느 방향으로 펴야겠는가?


사람들이 이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이익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교회에서 힘없는 사람들의 편을 드는 것이 한 푼이라도 이익이 된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선교 사업을 유지하려면 힘있는 교회로부터 돈을 받아야하므로 그들에게 맞서는 행위를 절대 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대로 선택을 한 것뿐이다. 경제적인 작은 유익 앞에 수십 년 쌓아온 이성이 쉽게 무너지는 것이다.


숲을 보면 키가 큰 나무도 있고 작은 나무도 있다. 키가 큰 나무는 아무리 인격이 훌륭하고 착해도 작은 나무의 햇볕을 가리게 되어 있다. 이는 인격·지식·교양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가 결정하는 것이다. 교회 내에 힘있는 목사들과 힘없는 일꾼들의 대립구도가 이와 같다. 키 작은 나무가 죽지 않고 살려면 자기 키를 키우든지 큰 나무의 가지를 걷어내야 한다. 키 작은 나무는 인격과 교양이 낮아도 숲의 구조가 평등한 방향으로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교회 목사님들은 교회 직원보다 일반적으로 더 많이 배운 사람이고 세련되고 매너도 훌륭하고 교양도 많고 문화적 소양도 높다. 낮은 직급의 일꾼들은 모든 면에서 뒤진다. 목사는 숲 속의 키 큰 나무다. 우리 사회와 교회는 이 구조를 그대로 둔 체, 키 작은 나무를 계속 인격적·신앙적으로 훈련해서 숲에 적응하도록 만드는 것만 가르쳤다. 긍정적 사고방식과 행복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자아발견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수 천년 인류 역사는 숲의 구조가 평등해지는 방향으로 변해왔다. 가끔 후퇴는 했지만 진행 방향은 바뀌지 않았다. 교회 역시 이런 상황인데 누구 편을 들어야겠는가? 공정하고 중립적인 입장은 비겁한 짓이다. 바늘만큼이라도 옳은 편을 들어야 한다.


교회 안에서는 노조가 아닌 새로운 방식의 갈등 해결 방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있다.


그럼 소유의 문제를 교회에서 먼저 해결하라. 교회를 보라. 하루에 수천만 원을 버는 부자와 한 달에 50만 원을 버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소유의 문제를 그대로 둔 체, 똑같이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한다. 이런 부분에 대해 아무런 고민도 없다. 먼저 소유의 문제를 해결하면 노조 문제를 다르게 해결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세계 어느 나라도 노조에 대한 권리를 말하면서 '단 이 조항은 신앙공동체에는 적용하지 않는다'라고 한 나라가 없다. 신앙공동체에 다른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옳다면 법에 포함이 되었을 것이다. 모든 노동자는 노동기본권을 가지는 것이다.


교회 노조가 교회 개혁을 촉발할 수 있을까.


그것이 노조의 본질이다. 전교조가 10년 동안 교사 처우 개선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참교육과 민주화 문제를 말했다. 공무원이 노조를 만들었지만 아직 처우 개선 문제를 말하지 않는다. 공직 사회의 부정·부패 추방을 주장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어떤 곳에 문제가 있어서 이를 고발하는 사람은 혼자만 손해를 보고 해직되었다. 속된 말로 그런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선 정의로운 공무원만 개피를 보고 끝난 것이다. 그러나 노조가 결성되면 이를 해결할 수 있다. 앞으로 교회 부패를 도저히 보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이 모여서 노조를 만들어 교회에 대항하게 될 것이다. 조직의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하는 방법을 노조가 제공하는 것이다. 노조가 300년 역사 동안 수행한 역할이다.


신기하게도 노동자들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지라도 그 행동이 불의에 맞서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래서 노동자의 권리를 신성한 것으로 정한 것이다. 어느 나라도 '자신의 개인적인 유익이 아닌 공적인 유익을 위해 노동 3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단서를 가진 나라는 없다.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의 이익을 위해 권리를 사용하면 이것이 사회의 공익이 되기 때문이다. 교회에도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목회자들이 직원들에게 존경을 받는다면 노조가 덜 만들어질 것이다. 교회에 노조가 생길 수밖에 없게 된 상황을 반성하는 것이 먼저다. 


노조 간부가 귀족화되는 문제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존재한다.


노조가 가진 역기능이 있다. 그러나 역기능은 순기능에 비해 무시해도 적을 정도로 작다. 우리사회는 수십 년 동안 역기능만을 세뇌 당한 사회였다. 노조가 그렇게 나쁘다면, 그렇게 노조를 혐오하는 힘 있는 사람들이 법과 제도를 만듦에도 불구하고 왜 노조를 인정했겠는가? 노조를 불법으로 하지 못하는 이유는 노조가 우리 사회에 미치는 유익이 크기 때문이다.


교회 직원들이 지역노조를 만들 때 여러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큰 교회가 작은 교회를 지원하는 일이 생길 것이다. 노조는 본래가 산별 노조이고 지역 노조이다. 기업별 노조는 한국만의 특수한 현상이다. 필리핀과 우리 나라만 가진 기형적인 구조다. 지역 노조를 만들어도 교섭을 하면서 충분히 조정이 된다. 재정 여유가 있는 교회에서 가난한 교회를 지원하고 교회공동체에 복지의 개념이 들어올 것이다. 큰 교회로서는 반대할 것이다. 교회 노조를 반대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논리를 개발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 노조는 대세이므로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교회에 노조가 안 된다는 것은 한국에서나 통하는 아주 무식한 말이다. 교회 부교역자들에게도 언젠가는 노조 설립 움직임이 생길 것이다. 부교역자는 버스를 타고 다니고 담임목사는 벤츠를 타는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목회자는 가장 가난한 사람이어야 한다. 내가 목회의 길을 선택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가 지금보다 훨씬 가난하게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은 노동자 수준으로는 살아도 된다. 그러나 목회자는 굉장히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 왜 레위인에게 재산을 주지 않았겠는가? 하나님 권위를 등에 업은 사람이 재산까지 가지면 반드시 부패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사회의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사기다. 모든 권력은 부패한다는 가정을 갖는 것이 부패를 막는 길이다.


권위를 가진 사람은 자칫 타락할 수 있으므로 이를 막는 제도를 가진 사회는 더 깨끗해질 수 있다. 교회 노동자들이 작게나마 그런 역할을 할 것이다. 불이익을 감수하고 하지 않아도 되는 고생을 하는 노동자들에 의해 교회가 변할 것이다. 이런 움직임을 교회는 일반 사기업체와 똑같이 막을 것이다. 구사대와 보수적인 교인들을 동원할 지도 모른다. 노조가 생기면 교회 돈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게 된다. 이는 교회에서 이권을 누리던 사람들에게 엄청난 불이익이다. 앞으로 교회의 추악한 모습을 많이 보게 될 것이다.


2003년 04월 08일


(참고자료 5)

 노동부의 노동정책

동북아 경제 중심국가의 도약을 뒷받침 할 수 있도록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겠습니다.


* 대화와 타협을 기초로 하는 상생의 노사관계를 구축하겠습니다.

-노사관계법 . 제도계선의 선진화 추진

-노사정환 대화체제 구축

-합리적 의식. 관계형성 및 노사자치주의 확립


* 적극적 고용정책과 생애에 걸친 직업능력개발체제구축으로

  고용안정과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확보하겠습니다.


- 활력있는 노사관계

- 일자리창출

- 평생직업능력개발체제 구축

- 최약개층별 고용추진

- 고용일정 서비스 선진화

* 참여형 근로복지 및 근로계층간 격차완화를 통해

  더불어 사는 균형 사회구현에 힘쓰겠습니다.

- 근로자 삶의 질적 향상

- 근로복지 확충, 고용평등사회 구현

- 노동보험확충내실화

- 근로계층간 격차완화

참고자료 6)

  "지율 스님, 우리는 순교자를 원하지 않습니다"

세계해방신학포럼 참관기 (2) 해방신학의 거목 레오나르도 보프

                                            엄기호(getoutof) 기자 

  

레오나르도 보프는 경이의 낮은 탄성을 내쉬었다. 움푹 패인 그의 눈은 안타까움과 존경으로 더 깊어졌다. 전세계 그리스도교 사회운동가에게 절대적인 영향과 영감을 주었던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의 거장 레오나르도 보프는 인터뷰 도중에 나온 지율 스님의 90일간의 단식 이야기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는 생태신학으로 더욱 확장되고 깊어진 해방신학의 실천적 동반자를 지구 반대편에서 찾은 것에 기꺼워하면서, 동시에 지율 스님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에 안타까워 했다. 그리고는 즉석에서 지율 스님의 단식 중단을 호소하는 연대의 메시지를 적었다. 아래는 그 메시지의 전문이다.


보프의 친필 메세지


   지율 자매에게.


나는 모든 생명을 지키기 위한 당신의 희생에 함께 합니다. 나는 당신의 윤리적, 영성적 결단에 존경을 표합니다. 당신은 한국 정부와 한국의 시민들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사랑과 연대의 좋은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당신의 단식투쟁은 이미 모든 종류의 생명을 존경하게 하며 자연에 대해 깨닫게 하는 거대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것은 이미 엄청난 수확입니다. 우리는 순교자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당신과 같은 사람들이 우리와 사람들을 돕기 위해 더 우리와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당신은 살아야합니다. 제발, 저를 포함하여 당신을 향해 부르짖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주세요. 단식을 중단해 주세요. 나의 기도와, 나의 사랑을 당신의 삶에 보냅니다.


레오나르도 보프


보프가 그의 메시지 마지막에 쓴 사랑(Cariuho)라는 단어는 포르투갈어에서 어머니가 자식에게 갖는 그런 사랑을 말한다. 영어의 케어(care)와 러브(love)가 포함된 사랑이라고 한다. 사랑을 뜻하는 10개가 넘는 포르투갈어 중에서 그가 이 단어를 택한 것은 지율에 대한 존경과 안타까움을 담은 특별한 의미라고 통역자는 이야기해주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그리스도교의 사회정의와 평화에 대한 믿음에 이끌려 사회운동에 나선 이들에게 레오나르도 보프는 지울 수 없는 거목이다.


그는 70년대에서 80년대까지 해방신학 담론을 주도해 마침내 교황청의 경고와 함께 침묵할 것을 명령받았던 살아있는 ‘해방신학’이다. 그러나 결국 제도 교회에 절망한 그는 바닥 공동체에 희망을 걸고 사제복을 벗어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떠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억압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영성의 해방 신학자이다. 70년대 경제적, 정치적으로 억압받는 사람에 대한 신학으로 출발한 해방신학은 80년대와 90년대를 거치면서 그동안 언급조차 되지 않던 사회적 약자인 여성, 소수부족, 원주민, HIV/AIDS 감염인들, 동성애자 등과 조우하며 그 해방의 의미와 외연을 확장하였다.


그리고 90년대 중반 이후, 레오나르도 보프는 해방신학을 넘어 생태신학을 주창하며 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었다. 그런 그에게 지구 반대편에 있지만 지율 스님은 같은 지구에 살고 있는, 같은 영성을 나눈 도반(道伴)이다.


보프는 인터뷰에서 지율 스님의 희생을 예수의 삶에 비교하였다. 예수 역시 사람들의 고통에 연대하기 위하여 단죄되고 처벌받았다. 보프는 지율 스님의 단식 투쟁을 위대한 불교의 전통에서 발견되는 희생이자 신비이며 마하트마 간디에게로 이어지는 무저항, 비폭력 전통의 영성이라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그는 인터뷰에서, 또 지율 스님에게 보내는 연대의 메시지에서 이제 그만 단식을 중단해줄 것을 간곡히 호소하였다.

다음은 레오나르도 보프와 나눈 대화 전문이다.


- 당신은 이 해방신학포럼을 제안한 사람 중의 한명이다. 이 포럼을 제안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라틴아메리카와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의 해방신학자들은 과거에 3-4년마다 한번씩 모여서 서로 성과를 이야기는 전통이 있었다. 그러나 1984년 바티칸에 의해서 해방신학이 비난을 받은 이후 이 전통은 이어지지 못하였다.

바티칸은 재정적 지원을 하지 못하도록 지원단체들에 압력을 가하였고, 주교들은 감히 해방신학모임을 주선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우리 해방신학자들의 네트워크는 붕괴하였다.


그런데 세계사회포럼은 교회의 통제에서 벗어나서 우리 해방신학자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세계사회포럼의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정신은 사실 해방신학의 정신과 아주 흡사하다. 빈곤 문제에 대한 관심, 국제적인 정의, 토지개혁과 토지에 대한 질문 등. 이 모든 것은 해방신학의 주제기도 하다. 따라서 세계사회포럼과 함께 이 해방신학포럼을 기획하게 되었다."


- 현재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의 상황은 어떠한가? 브라질 바닥공동체와 같은 해방신학 운동의 상황도 같이 이야기해달라.

"사실 해방신학은 빈곤에 반대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을 주장하는 모든 교회들의 대단히 정상적인 신학이다. 또한 인권과 소수부족과 여성과 어린이와 기타 소수자들과 함께 하는 모든 교회 안의 사회 사목자들의 정상적인 신학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해방신학은 그들이 참고하고 빛을 얻는 신학이다.


해방신학은 브라질 바닥공동체(주:브라질의 바닥공동체는 브라질 민중들이 삶과 신앙을 일치시키는 자율적인 공동체다)의 중요한 네트워크를 구성한다. 브라질에 10만개의 바닥공동체가 존재한다. 또 해방신학은 성서와 자신의 삶을 연결하려고 하는 백만이 넘는 '성서 모임'의 중추다. 지극히 일상적이고, 일상에서 살아 있는 신학이 해방신학이다."


- 80년대까지의 해방신학이 가진 문제점은 무엇인가? 계승해야 할 것과 검토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말해달라.

"70년대에서 80년대 초반까지의 해방신학은 주로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착취받는 이들에 대한 것이었다. 80년대와 90년대에 해방신학은 ‘가난’의 다양한 모습을 발견하였다. 원주민들, 흑인들, 가부장제에 의해서 착취당하는 여성들, 모든 차별의 희생자들, HIV/AIDS에 영향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 등등.


이 모든 빈곤은 각각의 특별한 억압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각각의 특별한 해방을 요구한다. 따라서 해방신학은 이런 각각의 특별한 해방을 다루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파울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교육학)을 만났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 그들을 해방하는 방법을 찾고 개발해야한다. 어떻게 해방하고, 어떤 방향을 택하는 것은 우리 해방신학자들의 역할이 아니라 억압받는 사람들의 몫이다. 그리고 나는 생태의 문제로 넘어왔다. 개인적으로 나는 나를 생태-해방 신학자로 규정한다."


- 당신이 생태-해방신학으로 관심을 옮기게 된 계기에 대해서 소개해 달라. 특별히 해방신학은 그동안 억압받는 ‘사람’에 대해서 주로 이야기를 해 왔는데, 당신은 발제문에서도 ‘인류 전체’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 비슷한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 사람을 착취하고, 자연을 착취하고 지구를 착취하고. 현재의 시스템은 가능한 모든 자원을 착취하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 타자에 대한 어떠한 고려와 존중도 없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전세계에 부과되고 있는 현재의 착취의 방식은 사회적으로 생태적으로 엄청난 비용을 감당해야 한다.


마실 물이 위기에 처해 있다. 2억이 넘는 사람들이 마실 물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 하루 아침에 석유와 다른 에너지는 고갈될 것이다. 생태 시스템은 그 내재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자연뿐만 아니라 전체 인간과 인간성에 대한 폭력이다. 우리는 절대 자원을 끊임없이 축적할 수 없다.


사실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심각한 어려움을 직면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생태 문제는 더 이상 가난한 사람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라 현실의 문제다. 따라서 인본주의 전통과 종교 모두에서 생태문제는 커다란 염려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것은 당연히 신학적인 도전이다. 미래가 가능하도록 인류를 다시 교육하기 위한 요소들을 다시 찾고 소개해야 한다."


- 어떤 사람들은 생태라는 말을 실재가 아닌 메타포로 사용한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실 환경과 환경보호를 이야기하는 사람과 생태주의자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생태주의의 첫 단계는 물론 위기에 처한 종을 보호하고 푸른 지구를 보존하는 것이다. 둘째 단계는 단지 자연뿐만 아니라 전체 생태 시스템을 위하여 살아있는 모든 것을 보살피는 것이다.


이것은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인문학의 문제다. 사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이다. 진화도 열린 진화로 이해를 하는 새로운 접근이다. 삶은 진화의 순간이다. 또 진화는 삶의 순간이다. 혼란은 생성적이며, 삶을 더 정교하고 공들여 다듬는다.


생태주의는 이런 통일적인 비전이다. 지구는 내재적인 관계들로 구성된 하나의 커다란 시스템이다. 모든 것은 연결되고 서로 의존하며 엮여있다. 인류는 이런 살아있는 과정의 결과이다. 우리는 삶의 공동체를 이야기한다. 이것은 '지구헌장'에 잘 나타나있다. 여기에는 생태와 윤리와 영성이 분리되지 않고 서로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 그렇다면 운동방식에 대해서도 새로이 제기하는 것이 있는가? 생태주의적 운동방식, 혹은 페다고지로 제안할 것이 있는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새로운 페다고지가 아니라 자연과 삶과 생명을 존중하는 다른 태도, 새로운 비전이다. 사실 우리는 정치적, 상징적, 공학적 폭력, 그리고 지배로 점철되어 있는 과거의 패턴을 버려야 한다. 폭력대신, 우리는 다양성 속에서의 친교, 소통 그리고 시너지에 강조점을 두어야 한다.


이런 것은 위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같이 살아가며, 같이 찾아야 한다. 핵심적인 것은 배려, 공동책임 그리고 연민이다. 이런 맥락에서 페다고지를 생각하자.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 시작하고 바꾸어야만 하는 것으로써 핵심적인 것은 대화다. 그리고 협상이며 교류며 나눔이다.


이런 점에서 페다고지는 우리와 공동의 집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연민이다. 사실 공동의 집을 이야기하지만, 모두가 이 공동의 집에 있지 못하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마실 물을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 땅에서 쫓겨난 사람들, 이들은 공동의 집안에 있지 않다. 포용과 공동의 집을 이야기하는 것은 배제된 사람들, 주변화된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것이어야 한다. 생태주의는 우리 모두가 이런 공동의 집에서 살고 있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파울로 프레이리 연구소는 생태학교를 만들었다. 글자에만 눈을 뜨는 것이 아니라, 생태에 대해서도 눈을 뜨게 하는 학교다. 어린이를 위한 학교가 아니라, 어떤 단체나 행정기관 그리고 회사에서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곳이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생태적으로 문맹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장 큰 생태학적 죄를 범하고 있다."


- 한국에서 지금 한 불교 스님이 천성산 터널 개발에 반대하며 90일 정도 단식을 하고 있다. 이 천성산은 도롱뇽과 같은 작은 생물들의 서식처다. 90일이 넘게 단식을 하면서, 그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고, 지금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천주교 신부와 수녀, 평신도 그리고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그의 단식 중단을 호소하고 있다. 한국 정부에 대해서도 터널 공사를 중단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의 단식에 대해 연대의 메시지를 보내달라.


"나는 이 스님이 간디가 걸었던 정치적 영성적 길의 비폭력적이고 연민에 기초한 위대한 전통에 기반하고 있다고 믿는다. 삶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는 것. 불교의 신비로운 전통에는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려는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열반에 들기를 거부한 보살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의 이런 희생적인 태도는 예수의 그것과 무척 닮았다.


예수는 고통받는 사람들과 연대하기 위하여 처벌받고 죽임을 당했다. 이것은 같은 희생적인 태도다. 나는 이것을 그의 영성과 문화적 맥락에서 선택된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 그러나 그녀의 희생이 공허하게 끝나서는 안 된다. 이것이 내가 그가 단식을 중단하기를 호소하는 이유다. 삶으로 돌아와 달라. 벌써 지율의 단식은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단식을 그만두기를 간청한다."


한편 세계해방신학포럼에 참석한 많은 이들도 지율 스님의 마음에 연대와 지지를 표하며 단식 중단을 호소하였다.

프랑스 카리타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앙투왕 손탁 신부는 놀라움과 안타까움을 표하며 이렇게 말했다.


"사람의 몸은 50일 이상 단식을 하면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치명적인 상태가 된다고 들었다. 그런데 무엇이 그로 하여금 90일 단식을 가능하게 하는지 그녀의 마음과 영성이 놀랍고 존경스럽기만 하다. 그러나 단식을 그만두는 것이 그뿐만 아니라, 그의 뜻에 따르는 사람들을 위한 길이기도 하다. 단식을 그만두고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생명을 위해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


해방신학포럼 참석자들의 지율에 대한 지지와 연대는 이번 세계해방신학대회의 정신이기도 하다.

 해방신학포럼 이모저모 

둘째, 셋째 날로 접어들며 포럼은 생태와 소수자들에 대한 이야기로 열기가 뜨거웠다.


둘째 날(1월 22일) 오후 ‘새로운 유토피아를 위한 신학’이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레오나르도 보프와 함께 발제를 한 뉴욕 유니온 신학대학의 정현경 교수는 "유토피아는 내일이 아니라 오늘에, 저기가 아니라 여기에, 먼 곳이 아니라 우리의 몸속에서 이미 존재하고 만들어지는 것"이라며 소수 부족, 동성애자 등의 공동체에서 생성되고 살아있는 에코페미니즘의 영성을 소개하였다.


셋째 날(1월 23일)의 전체 기조 발제는 페미니즘 신학이었다. 기조발제자는 하느님의 모습은 성서에서도 하나의 모습이 아니라, 때로는 바람으로, 때로는 소리로, 때로는 불길로 나타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다양함은 하느님의 이미지지만, 동시에 사람들의 신성함에 대한 다양한 경험의 다양한 이미지라고 이야기하였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여성·소수부족·성적 소수자를 비롯해 모든 사회적 약자들의 신성함에 대한 경험이다.


이를 통해 신성함에 대한 남성적 경험과 이미지를 벗겨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약자들의 신성함에 대한 경험과 이미지는 자연에 대한 존경으로 가득 차 있다.


뒤이은 소수부족들과 인도 불가촉천민, 여성신학자의 증언과 발제는 소수자들이 얼마나 자연과 함께 공존하며 그들의 영성을 보존하고 키워왔는지를 보여주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결과 인도의 불가촉천민들과 라틴 아메리카의 소수부족은 초국적 기업에 물과 땅을 빼앗겼다. 물과 땅은 상품화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에게 물과 땅은 상품이 아니라 영성의 근원이며, 영성 그 자체라고 강조하였다. 땅과 물을 되찾기 위한 투쟁은 물과 땅의 영성을 자신들의 몸으로 각성하고 공동체로 회복하는 과정이었다고 증언하였다.


자연과 자연 안에 살아가는 모든 것과 그 하나하나의 신성함에 대한 존경은 그들에게는 더 풍부하게 하느님을 만나는 과정이며 그 만남을 언어화하는 것이 그들의 신학이다.


지율의 단식은 땅과 물을 향한 여성과 소수부족과 불가촉천민들의 싸움과 맥을 같이 한다. 언어와 공간을 넘어,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한 존경과 연대의 여정에서 해방신학포럼의 참가자들은 말한다.

"지율을 살려주세요.  천성산을 살려주세요." / 엄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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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 기독교인에게 고함 - &quot;예수도 '국가보안법' 희생자&quot;

극우 기독교인에게 고함 - "예수도 '국가보안법' 희생자"

당신들은 '불온한 반항자' 예수의 친구가 아니다.

나는 예수쟁이이다. 왜 “크리스찬”이라고 말하지 않고 우정 이런 식의 약간은 자기비하적인 용어를 사용하는지 헤아려주었으면 좋겠다. 한국 기독교는 너무나 가진 자들의 편에 서게 되었다는 생각, 따라서 진실로 예수라고 하는 한 팔레스타인의 지독한 주변인이었던 기독교의 창시자의 정신으로부터 너무나 멀어졌다는 생각이 나로 하여금 이렇게 주변성을 자기 정체성 안에 통합해 넣는 용어를 일부러 사용하게 만드는 것이다. 스스로를 비천한 자리에 가져다 놓을 줄 모르는 자는 크리스찬이 아니다.

나는 교회 안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스스로의 결단에 의거하여 자신을 옭죄던 봉건성을 기독교라는 각성의 형식으로 극복했던 1세대 기독교도의 아들이다. 내 아버지는 대한민국 최대의 교회 중 하나인 영락교회를 창건하신 열 분 장로님 중의 한 분이시다. 그뿐이 아니다. 집안에는 순교자도 한 분 계시고, 어머니 쪽으로도 내 가족이 기독교와 가지는 관계는 그 연원이 깊고 특별하다. 나는 청소년기의 대부분을


영락 교회 뜨락에서 보냈다. 교회는 나의 영혼의 깊은 터였다. 요컨대 나는 기독교의 딸이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내가 여전히 예수쟁이라고 생각한다. 그 말은 내가 예수를 깊이 사랑하고 나의 어리석음과 죄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나의 진정한 구원자로 여기고 따른다는 의미이다. 교회 뜨락에서 보낸 유년이 지나간 후, 갈등은 내 영혼 깊은 곳에서 신음처럼 치고 올라왔다. 나의 내면에서는 비참한 사회의 현실에 진정으로 눈을 주지 않는 대형교회의 무책임한 복음주의에 대한 불만이 서서히 싹터 올랐다. 그러나 부모님은 당신들이 전생애를 투입해 넣은 교회를 떠나지 못하셨다. 정치 문제로 이따금 당회장 목사님과 충돌하곤 하시던 내 아버지는 결과적으로는 복음주의에 소극적으로 안주하셨다. 당신이 당회를 그만두시는 정도에서 소극적으로 저항하시고 말았던 것이다. 딸은 당신의 갈등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딸은 아버지가 당신의 정신 안에 설정하신 울타리 너머로 아버지가 전해주시는 종교의 메시지를 알아차렸다. 딸은 아버지의 울타리 너머로 아주 넓은 지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덕택에 딸의 기독교적 이상은 명확한 비전을 확립하고 형성되었다. 아버지는 그것을 아셨던 것같다. 딸이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느 지점에서 기독교의 울타리를 벗어나기 시작하고 있는지 모두 이해하셨던 것 같다. 종교문제를 둘러싼 어머니와의 충돌은 늘 거칠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사도 바오로의 성경구절을 적은 조그만 종이쪽지를 울고 있는 내 책상 위에 아무 말 없이 올려놓고 나가시고는 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렇게 내 안에 형성된 기독교적 이상은 결코 지금 한국 기독교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 아니다. 예수 대신 미국을 섬기는 크리스찬이라니, 수많은 죄없는 젊은이들을 체제의 유지를 위해 감옥에 보내고 고문하고 죽이는 데 사용되던 악법을 폐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극우단체와 한 몸이 되어 시청 앞에 나와서 울고불고 법석을 떠는 크리스찬이라니. 사랑이 아니라 증오에 의거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구하는 자가 크리스찬이라니. 그들은 나에게 이미 크리스찬이 아니다. 그들은 사제계급의 사주를 받아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아우성쳐댔던 어리석은 유태의 군중과 다르지 않다.

극우 기독교인들이여, 대답하라. 대체 예수가 누구였던가. 예수는, 비유적으로 말하면, 바로 당신들이 그토록 증오하는 “빨갱이”였다. 무슨 말이냐고? 예수는 기존의 질서에 전격적으로 반기를 들었던 불온하기 짝이 없는 반항자였다. 그는 당대의 국가보안법 위반자였다. 예수는 국가보안법 때문에 희생되었다. 그는 종교적 의미에서는 당대의 지배계급이었던 유태의 사제들이 설정해놓은 율법의, 그리고 정치적 의미에서는 로마의 위정자들이 지정해놓은 법의 울타리를 파괴한 자였다. 그리고 그 때문에 잡혀 죽었다.

그는 인간이 인간인 바가 체제와 제도에 의거하여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신과 막바로 맺는 관계 안에서 구성된다는 것을 가르쳤다. 나는 그가 “나는 신의 아들”이라고 말했을 때, 그가 가르치려고 했던 것은 바로 인간 각자가 “신의 아들”이라는 메시지였다고 생각한다. 그는 본질적 층위에서 전격적으로 제도가 설정한 존재의 개념에 저항할 것을 가르쳤다. 그는 바깥에서 인간을 규정하는 외적 관념과 싸울 것을 명령했다.

그는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서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깊은 부름 외의 그 무엇에게도 귀기울이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는 자신을 찾아와 “아들”이라고 부르는 마리아를 향해 “누가 당신의 아들이냐?”라고 되물었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선지자”라고 “엘리야”라고 부르는 제자들의 명명을 거부하고 “인간의 아들”이라고 명확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선언한다. 그러나 그 정체성은 “신의 아들”이라는 정체성과 충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선언은, 인간 각자가 인간 각자의 자리를 떠나지 않으면서도 깊은 내면의 부름과의 관계 안에서 “신의 아들”로 격상될 것을 주문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간의 아들의 자리에서 신의 아들이 되어야 하는 자들이다.

예수는 사제계급과 정치가들이 그어준 존재의 금 안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는 안식일을 조롱했다. 그에게 존재의 가치는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세상의 왕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에게 존재의 가치를 분양해주는 자는 세속의 제일인자인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우주의 왕, 우주인 바로 그분, 존재의 무한 허공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부자들과 권력자들과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 그는 문둥이들, 병자들, 창녀들, 세리들, 가난한 어부들과 함께 지냈다.

그는 세상의 거지들과 함께 지냈고, 그 거지들이 유태의 사제들과 로마의 고위 정치인들만큼, 어쩌면 그들보다 더 높은 존재의 가치를 가진 자라는 것을 일깨워주었기 때문에, 체제의 종교적/세속적 울타리를 부수고 존재의 이상을 가르쳤기 때문에, 힘센 부자 사제들과 정치 권력자들의 손에 잡혀 죽었다. 부자들과 독재자를 위해 기도하고, 신도들로 하여금 세상에서 복을 받기 위해 진정한 천국을 잊게 만들고, 그들을 형이상학적으로 협박하여 일년에 수십억씩 긁어모아 제 배를 기름지게 하는 대형교회 목사들은 예수의 친구가 아니다.

예수는 국가보안법의 희생자였다. 그는 체제가 허용하지 않은 사상을 지닌 죄로 죽었다. 예수는 당대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혁명적인 사상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상범으로 잡혀 죽었다. 부활의 도그마는, 나에게는, 예수가 육체적으로 부활했다는 의미보다는, 체제가, 국가보안법이 무서워 웅크리고 있던 비겁한 제자들이 스스로 몸을 일으켜 예수의 길을 따라가는 결단을 내린 전격적인 신앙의 내면화가 이루어진 영적인 기적으로 여겨진다. 예수를 따르던 자들이 스스로 예수가 되기로 한 사건, 인간의, 제도의 아들 딸들이었던 자들이 신의 아들 딸이 되기 위해 몸을 일으킨 것이 나에게는 부활의 기적이다.

이 해석은 예수의 육체적인 부활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제자들은 어느 날 정말로 부활한 예수의 비전을 보았을 것이다. 사람의 인식이 지극한 경지에 다다를 때, 상징은 진실로 육화된 모습으로 한 인간의 내면 안에서 현현한다. 나는 예수의 에피파니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신비 경험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내면적 혁명을 이끌어내었기 때문에 의미를 가진다. 진정으로 제자들이 세상을 향해 떠나기 시작했던 일은 오순절, 즉 성령이 바람처럼 임하여 제자들의 혀를 강타했던 언어의 도래와 함께 일어났다. 따라서 오순절의 기적은 제자들 각자가 내면 깊은 곳에서 자신의 언어를 발견한 사건이다. 그날 제자들은 예수의 말을 자신의 말로 내면화하면서 스스로 비겁한 겁쟁이의 위상을 극복하고 진정으로 부활했던 것이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면 적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예수가 살아 돌아온다면, 무엇이라고 말할까? 본디오 빌라도의 법정에 잡혀간 예수는 “네가 왕이냐?”라고 묻는 로마 총독에게 “그것은 네 말이다”라고 응수한다. 그리고 예수는 침묵한다. 채찍질을 당하면서 능멸과 조롱을 당하면서 예수는 그 혹독한 심문 동안 내내 입을 열지 않았다. 예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네가 너의 진정한 말을 발견하지 못하는 한, 너는 나의 존재 원리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따라서 나는 너를 너의 무지 안에 던져놓는다고. 깨달음은 네가 너의 진정한 언어를 발견하지 못하는 한, 결코 너를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시청 앞에 모여서 세상의 왕인 미국대통령을 향해 찬가를 불러대는 크리스찬들, 인공기를 태우며 사상이 다르다는 한 가지 이유로 동족을 증오하며 어떤 야만적 트랜스 상태에 빠져드는 소위 예수의 신도들을 향해 예수는 다시 그렇게 말할 것 같다.

“그것은 네 말이다.”

ⓒ 데일리서프라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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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선민의식&quot;과 &quot;로마 패권주의&quot; 사이

"선민의식"과 "로마 패권주의" 사이

                                                                   美 정체성모순 뒤 ‘예수의 탈정치화’ 있었다

‘예수와 제국’ 번역출간 화제

                                                                                엄주엽기자 ejyeob@munhwa.com 

“미국의 보수적인 크리스천들은 예수의 반제국주의적 하나님의 나라를 포기하고 제국주의의 폭력적 지배를 선택함으로써, 로마제국처럼 신세계 무질서를 초래했다.”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의 패권적 노선. 그 배경에는 미국인들이 스스로 ‘성서적 백성’이라고 자부하지만 탈정치화되고 왜곡된 예수의 생애에 대한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는 주장을 담은 ‘예수와 제국’(리처드 호슬리 지음·한국기독교연구소)이 번역출간됐다.

 

조지 W 부시정권의 재신임으로 미국의 보수적 개신교 교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출간된 이 책은 역사적 예수연구의 세계적 대가로 평가받는 리처드 호슬리(매사추세츠대 종교학 교수)가 9·11 테러와 미국의 이라크 침공 등을 지켜본 뒤 지난해에 펴냈다.



책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뉴잉글랜드에 처음 정착한 이래 자신들은 성서적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다. 미국혁명도 새로운 출애굽(a new exodus), 즉 조지 3세라는 새로운 파라오로부터 탈출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반면에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로마(Rome)로 인식하는 또 다른 측면도 있다. 자신들이 고대 로마를 모방해 공화국(Republic)을 건설했고, 원로원을 흉내내 상원(Senate)을 만들었다. 소비에트 붕괴 이후 초강대국 미국은 로마의 역사적 정체성과 비슷하다.

그러나 약소민족의 자유를 찾아 출애굽을 행한 성서적 백성과 제국주의 로마와 동일시하는 정체성은 자기모순을 갖는다. 그 모순은 오랫동안 예수와 그의 생애로부터 정치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나아가 로마에 대해서도 탈정치화해온 역사적·신학적 전통 때문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지혜의 교사’로 자리잡은 탈정치화된 예수는 종교를 정치와 경제로부터 분리해낸 서구의 오랜 전통에 첫번째 원인이 있다. 즉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던 유대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선 정치경제적 요소를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단지 예수를 뿌리 뽑힌 민중에게 히피족과 같은 대안적 생활방식을 가르친 견유학파(犬儒學派)의 한 지도자로 보려고 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또 ▲개인을 사회적 관계로부터 독립시키는 개인주의의 만연 ▲특히 현대종교학자들이 예수 생존시 문화전통을 무시해버린 자료의 통제된 선택 등을 예수의 탈정치화 원인으로 꼽는다.

 

저자는 “예수가 직면했던 상황은 로마인들의 제국적 질서에 맞선 유대민중의 노골적인 반란이 이어졌다”며 “이같은 사실을 무시한채 예수의 선교를 이해하는 것은, 오늘날 아랍인들의 폭넓은 불만과 테러조직과 같은 다양한 운동을 알지 못한채 중동지역의 이슬람 갱신운동을 이해하려는 것과 같다”고 주장한다. 이같은 잘못된 인식이 미국의 제국주의적 노선을 정당화하는 미국민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엄주엽기자 ejyeob@
기사 게재 일자 2004/11/24  
 


한기연 (2004-11-25 17:39:20)

제민일보 신간안내 2004/11/19

●예수와 제국:하느님 나라와 신세계 무질서(리처드 호슬리 지음·김준우
옮김)=9.11테러와 미국이 제국주의에 대한 신학적 반성으로서 예수가 가르
친 하느님 나라가 로마제국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을 선포한 반제국주의 공
동체 운동임을 규명한 예언자적 예수 연구서. 저자는 최근의 탈정치화된 예
수 연구의 오류들이 비판을 통해 예수가 반제국주의 운동의 지도였다고 결
론짓는다. 한국기독교연구소·1만2000원.   
 
 
한기연 (2004-11-26 00:08:47)

광주타임즈 신간안내 2004/11/22

▲예수와 제국(리처드 호슬리/ 한국기독교연구소刊/ 1만2천원)
9.11 테러의 원인이 된 미국 제국주의를 로마제국의 폭력성에 비유하며 신학적인 반성을 시도한 책.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예수의 반제국주의 운동에서 제국을 뒷받침하는 종교로 전락했는지 밝힌다. 상황적 접근방식을 통해 예수운동이 로마제국의 통치에 대한 저항운동들 속에서 어떻게 자리매김 했는지를 자세하게 소개하고, 로마제국의 통치가 팔레스타인 사회에 미친 영향 등을 분석한다.   
 
 
한기연 (2005-01-06 16:35:34)

예수와 제국
[매일신문 2004.11.26 14:45:23]

 

“예수는 반제국주의 지도자였다”예수와 제국/ 리처드 호슬리 지음·김준우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펴냄마이클 무어 감독이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화씨 9/11''은 미국 내에서는 물론 한국 등 전세계 곳곳에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키며 반(反) 부시 연대 결성에 큰 몫을 담당했다. 부시의 독선주의에 맞서 칸 영화제는 올해 마이클 무어에게 황금종려상의 영예를 안겨 주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대통령 선거에서 합리주의자로 알려진 캐리 대신 다시 부시를 선택함으로써 세계인의 눈총을 사고 있다. 이 책은 ''화씨 9/11''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는 일종의 신학적 반성서다.

 

메사추세츠대학 종교학과 교수인 저자는 예수 연구의 세계적인 대가 중 한 사람. 사회정치적 관점에서 역사적 예수와 하느님의 나라를 해석해 왔던 저자는 9/11 테러 사건 이후 발표한 이 책을 통해 로마제국의 폭력성에 비추어 9/11 테러의 원인이 된 아메리카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그는 부시 미 대통령이 거짓말에 근거하여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략했다는 사실이 의회 보고서를 통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선거와 상하원 선거에서 대다수의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이 부시와 공화당을 지지한 것은 로마제국에 맞서 대안적 공동체로서 하느님 나라를 가르친 예수를 왜곡하고 반 제국주의적인 예수 운동을 배반한 결과라고 말한다. 미국의 보수적인 크리스천들은 반제국주의적 하느님 나라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 폭력적 지배를 선택함으로써 로마제국처럼 무질서와 저항을 초래했다는 것.

 

저자는 최근의 탈정치화된 예수 연구의 오류들을 비판하고 복음서 전승들에 대한 상관적, 상황적 접근방식을 통해 예수 운동이 당시 로마제국 통치에 대한 저항운동들 속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하는지를 밝히고 있다. 로마제국 통치가 팔레스타인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예수는 로마제국의 학살과 착취로 인한 공동체 해체에 맞서 어떤 선교활동들을 펼쳤는지 분석하고, 로마의 제국적 질서에 대한 대안적 질서로서 하느님의 나라를 어떻게 실행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이를 통해 저자는 “예수가 반제국주의 운동의 지도자였다”고 결론 짓는다.

 

로마제국과 오늘날 미국을 비교하면서 미국의 전횡에 비판도 가하고 있다. 미국이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을 앞세워 저개발국들에게 개발과 현대화를 강요, 전지구적 자본주의 체제를 확장시키며 세계 통제의 해게모니를 장악한 것은 로마제국이 정복 민족에게 조공을 부과한 뒤 그 것을 지불할 수 있도록 생산에 박차를 가한 것과 같으며 최근 미국에 대한 저항은 로마제국 통치에 맞선 대항 운동과 유사하다는 것. 로마제국 통치에 맞서서 단호하게 대항했던 유다와 갈릴래아 농민운동과 1970년대와 1980년대 니카라과와 엘살바도르 농민운동은 역사적 연장선상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 어떻게 미국의 정체성이 로마제국의 정체성으로 변화되었는지 살펴보고 있다. 청교도들이 뉴잉글랜드에 정착할 당시 공동체와 교회가 분리되지 않았는데 미국 헌법이 탄생하면서 교회가 국가로부터 분리돼 교회보다는 국가가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하느님이 선택하신 백성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요소가 ''로마는 정복한 세계에 구원과 문명을 가져다 주었다''는 믿음이 되어 미국 속에 각인돼 로마제국의 전철을 밟고 있다며 크리스 천들의 책임을 묻고 있다. 이경달기자 saran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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