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아줄기세포 연구에 관한 신학적 성찰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1. 미궁: '신학적 지름길'을 선택하지 못하는 이유
배아줄기세포 연구 결과로 지금 우리 사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윤리적 쟁점은 대략 세 가지 정도로 집약된다. 인간생명 기점에 관한 문제, 복제인간의 탄생 가능성 문제, 그리고 난자제공 여성의 인권 문제가 그것이다. 이 쟁점들 가운데 복제인간의 탄생 가능성 문제는 현실적으로 당면한 문제로서보다는 장차 야기될 수 있는 우려의 차원에서 논의되고 있고, 난자제공 여성의 인권 문제는 다른 두 가지 쟁점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 문제의 성격이 덜 복잡하다. 반면 가장 뜨겁게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인간생명의 기점에 관한 문제이다. 인간생명의 기점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배아줄기세포 연구가 인간생명을 도구화하고 있는가 아닌가에 대한 판단이 달라지기 때문에 온통 그 논의가 이 문제에 집중되고 있는 양상이다.
이에 대한 윤리적 문제, 특별히 신학적 윤리 문제를 검토하는 동안 나는 마치 미궁에 빠진 듯한 느낌이었다. 사실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포함한 생명공학에 대한 신학적 판단은 대개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생명의 존엄성,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은 인간생명의 존엄성은 인위적 조작의 대상이 되거나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는 인식은 신학적 논의 안에서는 확고한 하나의 상식처럼 되어 있다. 물론 생명공학의 성과를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실마리로 인식하여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견해가 없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대개의 신학적 논의는 어떤 수준에서든 생명을 인위적으로 다루는 것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데서 일치하고 있으며, 최근 쟁점이 되고 있는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불가 판정을 내리거나 최소한 조심스러운 비판적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와 같은 신학적 논의는 윤리적 쟁점이 되고 있는 배아의 원시선 형성을 기점(수정후 14일 전후)으로 생명이냐 세포덩어리냐 하는 문제에서 처음부터 사실상 예정된 결론을 전제로 하고 있다. 생명공학, 의학, 법학, 윤리학, 신학 등 그 다양한 분야마다 저마다의 가치기준을 따라 인간생명의 기점의 제시하는 입장은 각기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그 가운데서 수정 그 순간부터 인간생명이 시작된다는 생명관을 따르는 신학계의 대체적인 입장은 인간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태도일 수 있다. 설령 차후에 어떤 과학적 성과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명확한 생명의 시작 기점에 관한 기준이 제시된다 하더라도(그래서 신학적 관점이 과학적 판단에서 오류였다는 것이 판명된다 할지라도), 그와 같은 신학적 생명관의 의의 자체는 결코 훼손되지 않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 점에서 신학도로서 생명에 관한 근본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매우 안전한 지름길이다. 어떠한 비윤리성의 혐의에서도 거의 자유로울 수 있는 우월하고도 안전한 지름길이다. 그 안전한 지름길이 있는데도 미궁이라니! 내가 미궁을 헤매고 있는 듯이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가장 우월한 그 신학적 윤리의 입장이 사실상 생명윤리의 무력화를 초래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다. 신학은 근본적 생명관을 완고하게 고수함으로써 인간생명의 존엄성을 주장하는 자기 정당성을 한껏 자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근본적 생명관을 주장함으로써 이미 열린 판도라의 상자를 다시 덮을 수 있을까?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반대하는 신학적 입장은 그것을 만악의 근원으로서 판도라 상자처럼 취급한다. 그러나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직접 수행하는 이들은 그것을 하늘이 내린 선물로 알고 있다. 실제로 이 연구에 참여한 이들은 난치병의 극복이라는 숭고한 생명사랑의 동기를 가지고 있다. 그 연구가 지닐 수 있는 위험성을 충분히 예측하고 제어할 수만 있다면 생명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의 존엄성을 구체적으로 지켜내는 확실한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야말로 모두가 자명하게 만악의 근원으로서 판도라의 상자라고 단정지을 수 있다면 더 이상 논란의 소지는 없다. 반인륜적이고 반생명적인 그 연구를 제지하는 길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만악의 근원일 뿐이라면 구태여 그 연구를 하려고 하는 과학자가 있을까? 비록 여러 가능성 가운데 하나일지라도 그 연구로 얻을 수 있는 확실한 유익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그 연구를 지속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상황에서 근본적 생명관을 고수하는 입장은 그 우월한 윤리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찬성과 반대의 논리 사이에서 제기될 수 있는 다양하고 복잡한 문제들을 간과해버림으로써 인간생명 존엄성을 지키는 구체적인 방법의 문제를 소홀히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신학의 입장에서는 가장 강력하고 적극적인 입장을 개진했다고 자위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연구를 반대하는 신학과 찬성하는 과학 사이에 빈틈이 생길 수밖에 없고 그 빈틈은 신학의 입장에서는 사실상 방치된 영역이 된다. 결과적으로 그 빈틈은 신학적 생명윤리가 지향하는 목적과는 상반되게, 극단적으로 말하면 무방비 상태로 생명공학의 영역이 될 것이다. 그 경우 신학은 무책임의 혐의, 심지어는 위선의 혐의마저도 받을 수 있다. 더욱이 배아줄기세포 연구는 그 연구 성과에 희망을 걸고 있는 수많은 난치병 환자들의 기대를 안고 있다. 분명한 수요자들의 요구가 있다는 것이다. 질병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저버릴 수 없는 상황에서 그 효과적인 길을 찾으려는 노력을 제지하기는 어렵다. 물론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는 성체줄기세포 연구를 통한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보다 더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연구를 예견되는 위험성을 이유로 쉽사리 제어할 수 있을까? 아마도 특정한 과학자 집단 또는 과학자 개인에게는 그 제어가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컨대 황우석 박사와 그 연구팀에 집중적인 윤리적 비판과 제도적 규제를 가해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중단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면 처음 싹을 잘랐기에 그 다음 문제는 해결되는 것일까? 배아줄기세포 연구의 공리적 유용성이 존재하는 한 그 연구 자체를 막을 길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저 살상무기에 지나지 않은 핵폭탄도 사실상 규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인간생명을 살린다는 숭고한 목적을 내세우는 배아줄기세포 연구 그 자체를 막는 것은 더더욱 어려워 보인다. 설령 황우석 박사와 그 연구팀이 연구를 중단한다 하더라도 또 누군가에 의해 그 연구는 지속될 수밖에 없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펼쳐지고 있는 신학적ㆍ윤리적 논의에서는 유감스럽게도 그 논점이 선명하게 부각되고 있지 않지만, 사실 한편에서 끊임없이 지적하고 있듯이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자본의 개입은 충분히 예견되는 상황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보이지 않는 그 어떤 것마저도 상품으로 변화시키는 전능성을 발휘하고 있는 자본이 그 탐스러운 열매를 가만둘 리 없다. 이것은 사실 연구에 참여하는 과학자의 순수한 동기와 의지를 벗어나는 차원이다. 과학자들이 가진 순수한 선의와 달리 생명공학적 성과는 자본과 시장의 논리에 의해 좌우될 공산이 크다. 특별히 근대 자본주의하에서 과학기술의 성과는 예외 없이 그와 같은 궤적을 밟아왔다는 사실은 그와 같은 예측의 확실성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 자본의 전능성은 기필코 그 연구를 진전시킬 것이며 그 연구 성과를 전유하려 할 것이다. 오늘 자본주의 체제는 이미 광범위한 인간 몸뚱어리 시장(장기 시장)을 형성하고 있음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바로 이러한 상황 때문에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대해 신학적 관점에서 근본적인 생명관을 피력하거나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생명윤리를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마치 미궁에 빠진 듯한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런 사연 때문이다. 이제까지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윤리의 신대륙'에 그 첫 발걸음을 내딛는 처지에서 어찌 당황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2. 생명공학을 둘러싼 논의 지형
기왕에 지름길을 택하지 않았으니 조금 더 신중히 여러 길을 검토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포함한 생명공학의 성과와 그 평가에 대한 논의는 여러 갈래로 진행되고 있다. 우리는 여러 입장들이 주장하는 바 핵심적 내용이 무엇이며 또 그것이 갖는 문제는 무엇인지를 생각해봄으로써 우리 사회에서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어떤 대안을 모색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법학자 이상돈은 우리사회에서 생명공학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 하는 가치문제에 대한 주장들의 유형을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한다(이상돈, 『생명공학과 법 - 생명의 공학화와 생명문화의 절차적 재생산』, 아카넷, 2003). 윤리주의, 과학주의, 규범주의, 공리주의가 그것이다. 물론 그의 말대로 이 유형들은 서로 중첩되거나 엇갈릴 수 있으며, 따라서 그 입장의 유형들은 일종의 이념형이라 할 수 있다. 윤리주의는 생명공학을 가장 엄격하게 통제하는 입장인 반면, 과학주의는 생명공학에 가장 많은 자유를 부여하는 입장이다. 이 둘 사이에 규범주의와 공리주의가 위치하는데, 현재 우리 사회에서 규범주의는 윤리주의에 다가서는 입장인 반면 공리주의는 과학주의에 좀더 가까이 다가서는 입장이다. 여기서 그의 연구에 의존하여 그 대별되는 입장의 유형들을 살펴본다. 유형의 분류는 전적으로 이상돈에게 의존하고 있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일정 부분 나의 몫이다.
1) 윤리주의 윤리주의는 생명공학의 위험성을 가장 강력하게 통제하려는 입장으로서 인간의 몸을 형이상학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윤리화하는 관점을 말한다. 개신교의 경우에는 통일된 입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앞서 말한 대로 대체로 일치하는 신학적 관점, 그리고 가톨릭 교회의 공식적 입장이 이에 해당한다. 또한 우리 사회에서는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생명공학에 이의를 제기하는 시민사회단체들의 입장도 대체적으로 이에 해당한다. 종교적 차원에서 신이 부여한 생명의 존엄성을 말하든 자연적 질서를 따름으로써 생명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고 말하든 이 입장은 생명에 대한 인위적 조작 자체를 금기시한다. 이 입장에서는 특별한 경우의 체외수정(시험관아기)이나 장기이식을 제외하고는 대개의 생명공학적 시도를 부정한다. 이러한 입장을 따르면 생명에 대한 인위적 조작은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행위이거나 자연적 질서를 거스르는 행위이다. 여기에서 문제는 생명공학의 남용으로 생명 가치의 위계화 내지는 생명 자체의 경시를 가져오고 나아가서는 신적 질서 내지는 자연적 질서의 와해로 대재난이 야기될 수 있다는 것이다. 흔히 거론되는 '미끄러운 경사길 이론'은 그와 같은 위기의식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수사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내달리는 과학기술의 성과 앞에서 의도하지 않게 사실상 윤리적 공백지대를 허용할 가능성이 많다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그 점은 예컨대 교회가 낙태를 허용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 신자들은 낙태를 행하고 있는 현실에서도 확인된다. 결국 우월한 윤리적 권위를 내세움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실제 생활영역에서 그 윤리적 권위가 무력화되는 양상을 빚어낼 소지가 있다. 이 경우 생명윤리를 내세우는 입장은 생명공학의 발전으로 빚어질 수 있는 위기를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펼치는 호기로 활용할 뿐 사람들이 갈등하는 문제에 대한 실질적인 응답을 주지 못한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도 있다.
2) 과학주의 윤리주의와 정반대로 과학주의는 생명공학에 가장 많은 자유를 부여하는 입장이다. 과학주의는 과학의 발전과 자유의 성장이 함께 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생명공학을 평가하는 태도로서 생명공학의 폐해가 역사적으로 검증되지 않는 한 생명공학을 제재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인간이성의 자연지배라는 이념을 믿고 있는 이러한 과학주의 입장은 생명공학의 모든 시도를 과학의 영역에 맡겨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과학기술 및 그것을 지배하는 인간이성에 대한 거의 맹목적인 신뢰는 이미 역사적으로 그 위험성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나치의 우생학이나 핵무기의 발명은 그 대표적 사례이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도구화된 이성의 위험성을 끊임없이 지적하고 있다. 까닭에 오늘날 천진난만하게 과학주의를 표방하는 사람은 드물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는 적어도 공적 담론의 영역에서 그런 주장을 펼치는 경우를 거의 볼 수 없다. 하지만 오늘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전국민적 열광과 환호 속에는 하나의 이념형으로 과학주의가 사실상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3) 규범주의 규범주의는 윤리주의의 수정된 형태로 대개 국가의 법제화 차원에서 드러나는 태도이다. 기본적으로 규범주의는 윤리주의의 원칙을 준수한다. 예컨대 종교적 윤리주의가 말하는 창조주에 의해 부여된 생명의 존엄성 주장은 세속화된 국가의 규범에서는 자연법적 차원의 생명 연속성 논증으로 변한다(생명의 신성성에서 생명의 자연성으로). 존엄을 누려야 할 주체로서 인간과 태아 그리고 배아 사이에는 생명의 연속성이 있고 따라서 태아나 배아 역시 인간과 동등한 지위를 누려야 한다고 본다. 이와 같이 윤리주의의 기본 전제를 그대로 계승하면서도 실제 구속력 있는 어떤 규범을 제시하려 한다는 점에서 규범주의는 윤리주의와 구별된다. 그래서 '원칙-예외' 구조를 취하여 원칙적으로 정당화할 수 없지만 특정한 경우에 엄격한 제한 조건하에서 생명공학의 시도를 허용한다. 배아연구는 원칙적으로 금지되어야 하지만 중대한 질병의 치료방법을 개발하기 위해 폐기될 운명에 놓인 잉여 냉동배아에 대한 연구를 허용한다든지, 시험관아기도 원칙적으로 금지되어야 하지만 제한된 경우에만 허용하는 식의 입장이다. 이것은 윤리주의가 안고 있는 허점을 보완하는 입장으로서 현실적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전히 윤리주의가 안고 있는 문제를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하고 있다. 예컨대 생명의 연속성 문제는 여전히 자명하지 않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차원에서는 수정이후 생명의 기점에 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지만, 생명의 연속성 논리를 철저화하면 체세포라고 해서 연속성이 없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또한 허용과 제한의 기준을 엄격하게 규정한다고 하지만 그 경계 기준도 분명하지 않기에 모종의 허점이 드러날 수 있다. 예컨대 금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에서 이종간의 착상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인간의 난자에 동물의 체세포 핵을 이식하는 것은 금지된 반면 동물의 난자에 인간의 체세포 핵을 이식하는 것은 허용되고 있다. 이와 같은 예는 앞으로 더 빈발할 수 있다. 이것은 규범주의가 안고 있는 딜레마의 상황을 보여준다.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현실적인 구속력을 갖는 규범을 제시하려는 규범주의의 태도는 진지하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안고 있는 상태다.
4) 공리주의 공리주의는 과학주의에 대한 비판의 화살을 피하기 위하여 두 가지 점에서 수정된 과학주의를 말한다. 공리주의는 과학주의처럼 생명과학기술의 자유 그 자체를 목적화하지 않고 생명공학을 통한 인류복지의 증진을 목적으로 내세운다는 점에서, 그리고 과학을 통한 인류의 진보라는 과학주의적 이상을 유전공학산업을 통한 부의 창출이라는 세계경제적 또는 국민경제적 목적으로 대체한다는 점에서 수정된 과학주의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은 주로 생명공학을 수행하는 연구자들이나 그것을 산업화하려는 집단, 그리고 유전공학산업의 정책적 육성을 표방하는 정부 관료들이 대변하고 있다. 최근 우리가 언론매체들을 통해 접하는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관한 담론, 그리고 압도적인 국민적 열기는 바로 이와 같은 공리주의적 가치판단이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지 확인해주고 있다. 공리적 유용성과 국민경제성에 민족주의적 열풍까지 가세된 오늘 우리 사회의 '황색돌풍' 내지는 '황우석 신드롬'은 가히 폭발적이다. 광장에 나와서 외치지 않을 뿐 또 다른 형태로 마치 2002년 '대~한민국!' 열풍이 재현되고 있는 듯하다. 그러면 이와 같은 공리주의의 입장에 내재된 문제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우선 공리적 유용성에 대한 판단이 경험적이거나 실증적인 것이 아니고 이론적이고 가치론적 성격을 띤다는 점이다. 여전히 가설적일 뿐이라는 이야기다. 배아줄기세포 연구의 경우, 황우석 박사도 밝히고 있다시피 그 목적대로 실용화하기 위해서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여러 난관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과학적으로 기술적으로 그 난관이 극복되기 이전에는 안전하게 난치병 치료라는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고 단언하기 어렵다. 종교가 허망한 환상을 심어주어서는 안 되듯이 과학 역시 섣부른 환상을 심어주어서는 안 된다. 어쨌든 생명공학의 자체 범주 안에서 난관이 해소된 경우라면 문제가 없는 것일까?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바로 난치병을 앓고 그 병의 치료를 간절히 기대하는 구체적인 어떤 사람에게 치료혜택의 기회가 주어질 것인가? 물론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아주 구체적인 많은 사람들이 그 혜택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들 앞에 놓인 또 다른 난관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의료체계와 사회적 관계 안에서 그 난관을 극복하기는 쉽지 않다. 인류복지의 증진이라는 분명한 목적, 그리고 난치병 치료라는 구체적인 목표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과학적 성과가 경제성의 논리에 의해 좌우되는 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그 혜택이 돌아갈 기회가 제한된다. 실제로 그 치료 혜택을 받은 경우는 일종의 전시효과만을 가질 뿐이다. 그러니까 공리주의적 입장이 표방하고 있는 인류복지의 증진 내지는 난치병 치료라는 숭고한 목적과 경제적 효용성이라는 목적은 갈등없이 어울릴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 사실상 배치되고 있다. 이미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다시피 그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두 가지 목적이 배치될 때 현실에서 어떤 목적이 우위를 점하게 되는지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두 말할 것 없이 경제적 효용성 논리가 우위를 점한다. 결과적으로 여기에서 윤리적 지평은 사라지고 만다. 이 점에서 공리주의는 과학주의를 신자유주의와 전략적으로 제휴시키는 입장이라는 지적은 귀담아 들을 만한 가치가 있다.
이상과 같이 살펴본 대로 우리 사회에서 제기되는 모든 입장이 일리를 지니고 있되 또한 동시에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고 할 때 선택 가능한 대안은 무엇일까? 우리 사회에서 생명공학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논의 지형에 관해서 기왕 이상돈에게 톡톡히 신세진 만큼 그가 제시하는 대안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평가하고 넘어가는 것이 도리일 것 같다. 그는 기본적으로 생명공학으로 빚어진 문제의 상황 가운데서 법제적 차원의 대안을 모색하면서 고려해야 할 여러 측면의 문제들을 검토하고 있고 그의 주장은 생명공학의 문제에 개입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이 참고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그가 제시하는 대안의 기본원리는 대화적 모형이다. 각각의 입장을 대변하는 세력들이 힘겨루기 방식으로 절충적인 합의점을 찾는 방식보다는 각기 입장의 변화와 나아가 합의된 규준점의 변화까지도 전제하는 충분한 대화방식을 추구한다고 하겠다. 한편으로 과연 그와 같은 대화적 방식이 실질적으로 얼마만큼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고, 혹시 그렇게 상정하는 대화가 '호리병 안에서의 대화' 내지는 '진공상태에서의 원탁회의'가 되지는 않을지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대화만으로 극복가능하지 않은 사회적 갈등의 요소들이 산재하고 그와 같은 요소들이 생명공학을 둘러싼 문제의 상황에도 개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차적으로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길은 역시 상호간의 충분한 대화라는 점에 이의를 제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덧붙인다면, 사회적 합의를 이루기 위해 대화에 참여하는 주체들이 자신의 입장의 타당성과 문제점을 스스로 충분히 인지하려는 노력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그 주장이 어떤 점에서 타당성이 있는지 어떻게 사회적 공감을 얻어낼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주장이 간과하고 있는 점이 무엇인지, 나아가서는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은폐하고 있는 전제는 없는 것인지 등등을 고려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굳이 생명공학을 둘러싼 논의의 지형을 그려봄으로써 우회로를 택한 것은 그런 형편을 헤아려볼 필요성 때문이었다.
3. 생명의 고통에서 출발하는 생명의 윤리
나에게 맡겨진 과제는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관한 '신학적' 성찰이다. 그런데 앞에서 이미 암시했지만 내가 취하는 신학적 접근은 어떤 형이상학적 가정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그와 같은 형이상학적 가정은 특정한 신념 내지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호소력을 지닐 수 있지만, 그 신념 내지는 신앙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호소력을 지니지 못할 수도 있다. 신학적 입장이 어떤 형이상학적 가정을 전제하지 않고 가능하겠느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지만, 그에 대한 논란은 일단 유보하고 특정한 종교나 신념에 상관없이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데서 하나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중요한 문제의 지점을 선택하려고 한다. 민중신학을 하는 입장에서 내가 선택하는 그 출발지점은 생명의 고통 상황이다. 생명의 고통 상황을 주목하는 것은 생명 존엄성의 가치를 옹호하는 신학적 입장에서도 대단히 중요하고, 특정 종교나 신념에 상관없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생명의 고통 상황을 주목하는 것은 생명의 윤리를 모색하기 위한 논의에 참여하는 나의 입장이다. 생명의 고통 상황을 생명 윤리의 출발점으로 삼을 때 우리는 먼저 그 고통의 다차원성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것을 범주상으로 구별해본다면 개체 생명의 고통, 전체 생명의 고통, 그리고 이와 같은 생물학적 생명의 고통과 구별되는 사회적 생명의 고통으로 나눠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범주상의 구분일 뿐 실제 고통이 일어나는 현상은 서로 얽혀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대개 우리는 고통을 개체의 단위에서 체감한다. 고통의 여러 차원은 사실상 개체 생명의 고통으로 집중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고통을 인식하는 경우 여타 차원에서의 고통은 실감되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오로지 개체의 고통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착각하기 쉽다. 문명이 발전할수록 과연 인간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더 예민해지는 것인지 더 둔감해지는 것인지 의문이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바로는 타자나 그 어떤 대상의 고통을 자신의 이해관계와 직접관련성이 가까울수록 더욱 민감하게 느끼며 반대로 멀수록 둔감하게 느끼거나 아예 전혀 실감하지 못한다. 이런 까닭에 고통에 접근하는 태도 역시 개별적 고통 이외에는 아예 문제삼을 것이 없는 듯이 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개체 생명의 고통과 구별되는 전체 생명의 고통 또한 실재한다. 자연적 재난은 인간적 관점에서 볼 때 재난일 뿐 많은 경우에는 전체 생명이 자신을 지속시켜나가는 방식인 경우도 많지만, 자연 내지는 전체 생명 자체가 병들어 고통받고 있는 증상을 우리는 적지 않게 발견한다. 흔히 말하는 환경오염과 그로 인한 특정한 종의 멸절이나 자연적 순환계 자체의 훼손은 그와 같은 전체 생명의 고통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한 고통이 과연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생각하는 것은 일정 부분 형이상학적인 물음의 의미 또한 내포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상당 부분 이미 경험적 판단의 범위 안에서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을 수도 있다. 실제로 생물학적 생명의 고통은 많은 경우 사회적 생명의 고통과 무관하지 않다. 그 사회적 생명의 고통이란 인간들이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 안에서의 고통을 달리 표현한 것으로서 순전히 개별적 요인을 갖는 고통보다는 사회적 관계의 구조적 성격에서 비롯되는 고통을 말한다. 형이상학적 차원에서의 고통의 원인, 또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어떤 고통의 원인에 대해서는 더 탐구해야 할 과제로 남겨둔다 하더라도 우리는 적어도 사회적 관계의 차원에서 역사적으로 또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고통의 원인에 대해서는 비교적 소상히 밝힐 수 있다.
앞서 말한 생명공학에 관한 우리 사회의 여러 입장들은 이와 같은 고통의 차원과 관련하여 말하면 각기 나름대로 특정한 고통의 차원을 유념하고 있고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윤리주의나 규범주의는 스스로 보호능력이 없는 개체생명(생명공학에 종사하는 이들이 잠재적 생명으로 간주할 뿐인 배아)의 '살해' 행위를 거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생명현상 자체에 대한 인위적 개입으로 전체 생명의 고통이 심각하게 야기될 수 있는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그런데 이 주장은 논증의 차원을 넘어 실질적인 검증의 차원에서는 뭐라 단언하기 어려운 난점을 안고 있다. 그 경고 자체는 충분히 새겨야 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이 주장에 따라 생명공학의 시도 가운데 어떤 것을 허용해야 하고 어떤 것을 제한해야 하는지는 더 깊은 탐구와 성찰의 과제로 남아 있는 셈이다. 순수한 과학주의는 현재 우리 사회의 논의 지형상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입장이기에 여기서 재론하는 것을 생략한다. 공리주의는 너무나도 구체적인 고통의 상황을 유념하고 있다. 황우석 박사는 잠재적인 생명체의 권리보다는 "지금 살아서 고통받고 있는 환자들의 아픔"을 더 절실하게 여기고 있다고 하며, 안규리 박사는 "외국인 노동자 진료처럼 환자들의 아픔을 덜어주는 의사의 마음"으로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숭고한 동기 자체를 의심할 까닭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 연구에 참여하는 개별 과학자들의 개인적 동기를 벗어난 차원에 있다. 그 공리적 유용성을 빌미로 자본이 개입해 들어오는 데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아마도 과학자들은 공리적 유용성과 경제성을 한 묶음으로 보아 그 문제를 지적하는 데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공리적 유용성 곧 수요가 있기에, 그리고 나아가 너무나 수지맞는 시장이 형성될 가능성이 높기에 국가와 자본은 이에 개입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생명공학의 연구 과정과 그 성과의 배분은 거의 의심의 여지없이 경제논리에 좌우되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개별 과학자들의 연구 참여 동기는 의심하지 않지만, 배아줄기세포 연구의 향방은 그렇게 흘러가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미 그렇게 흘러가는 징후들도 적지 않게 있다. 여기에서 불 보듯 뻔히 예측되는 또 다른 고통의 가능성이 제기된다. 분배구조의 불평등성으로 인한 고통이다. 이 고통은 질병 그 자체로 인한 고통보다 더 심각할 수 있다. 그렇지 않겠는가? 의료기술상으로 치료불가라면 아예 체념하겠지만, 분명히 치료가능한데도 그 비용을 마련할 수 없어 치료를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의 고통은 더욱 심하다. 오늘 이미 손쉽게 확인할 수 있는 고통의 현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공리적 유용성을 볼모로 경제적 효용성을 추구하는 데서 빚어지는 고통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것을 현실적으로 중요한 과제로 삼을 수밖에 없다. 생명공학의 진전으로 수없이 많은 쟁점들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무엇보다 시급히 다뤄야 할 문제 가운데 하나로 경제적 효용성의 논리가 빚어내는 고통의 문제를 다룰 수밖에 없다. 근대 자본주의 이래 과학기술이 국가권력과 자본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의 논리를 따르는 과학기술, 생명공학은 인간의 노동력을 상품화하는 차원을 넘어 인간의 몸뚱어리 자체를 상품화하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광범위한 장기 시장이 형성되어 있고, 그 시장은 사회경제적 계급관계에 따라 수요자와 공급자의 관계가 결정되고 있다. 부유한 사람들의 질병치료를 위해 가난한 사람들이 장기를 내어주는 형국이다. 우리 현실에서도 회자되고 있는 이야기를 따르면, 현재 일본인의 인공수정을 위해서 난자를 제공하는 사람들은 우리 나라 여성들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여성을 위해서 난자를 제공하는 사람들은 조선족 여성들이라고 한다. 누군가의 고통 치유를 위해 행해지고 있는 의술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고통을 안겨주는 당황스러운 사태를 만들고 있다. 인간의 모든 신체부위가 그렇게 거래되고 그 거래는 사회경제적 계급의 위계관계 안에서 작동된다. 이 때 장기 공급자는 이미 안고 있는 가난이라는 고통에 더하여 신체적 고통까지 안게 되는 이중의 고통을 겪게 된다. 이 경우 생명공학의 성과로 이루어진 새로운 의술은 인간의 고통을 치료해주는 하늘의 선물이라기보다는 흡혈귀가 되고 만다. 이러한 현실을 생각하는 것은 추상적 생명의 위기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생명의 고통 문제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과연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배아줄기세포 연구 성과가 실용화 단계에 이르면 거대한 난자 시장이 형성될 것이라는 암울한 예측도 나오고 있다. 서두에서 난자 제공 여성의 인권 문제는 상대적으로 덜 복잡하다고 했지만, 그 평가는 제한된 연구용 제공의 경우에만 해당될 뿐이다. 배아줄기세포의 연구의 성과로 난치병 치료가 실용화되는 단계에 이르면 가난한 여성들의 몸의 착취 문제가 심각한 수준으로 제기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당황스러운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서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원천적으로 금지해야 하는 것일까? 나의 일관된 관심은 과학기술 또는 생명공학 성과 그 자체나 그에 종사하고 있는 개별 과학자들의 동기의 범위를 벗어난 차원에서 발생하는 심각한 문제에 대한 우려이다. 개별 생명의 고통을 극복하고자 하는 길이 또 다른 생명의 재앙으로 귀결되는 메커니즘에 대한 우려이다. 그 메커니즘을 문제시하지 않고 연구 그 자체만 놓고 가 불가를 논하는 것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고통의 문제, 뻔히 예측되는 고통의 문제를 비껴 가는 것이다. 결국 현재 의료체계의 변화와 불균등한 경제적 분배구조의 개선 방안에 대한 검토 없이 이루어지는 논의는 어떤 식으로든 무책임한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그 무책임한 결과를 예방하기 위해 우리는 지금 온갖 지혜를 모아야 하고 실제적인 대안을 찾아야 한다.
4. 맺음말
물론 지금 화급한 문제에 대한 대처방안을 마련하는 것으로 우리의 과제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지금 하나의 관점, 배아줄기세포 연구 결과를 둘러싼 논의에서 상대적으로 소홀히 되고 있다고 생각되는 문제의 측면을 부각시켜 말한 것뿐이다. 우리는 문제의 상황을 단순화시켜 이해하기보다는 오히려 실제로 문제의 상황이 매우 복잡하다는 사실을 유념하는 데서 사회적 합의를 이룰 수 있는 대안을 찾을 수 있다. 신학적 입장에서 생명의 윤리를 모색하는 데 우리가 특별히 유념해야 할 사항들도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삶과 죽음에 관해 깊이 성찰하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의 섭리라는 차원에서든 자연적 질서라는 차원에서든 개체 생명의 삶과 죽음은 매우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하나의 과정이다. 그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과정이 어떤 조건에서 고통이 되는 것일까? 받아들일 만한 고통이 있고 극복해야만 하는 고통이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구별되는 것일까? 이와 같은 문제들에 대한 깊은 성찰은 우리에게 또 다른 혜안을 던져 줄 것이다.
<참고문헌> 이상돈, 『생명공학과 법 - 생명의 공학화와 생명문화의 절차적 재생산』, 아카넷, 2003. 이정배, 『종교와 과학의 대화에 근거한 기독교 자연신학』, 대한기독교서회, 2005. 이진우ㆍ이유택ㆍ권의섭ㆍ박미애, 『인간복제에 관한 철학적 성찰 - 독일 슬로터다이크 논쟁을 중심으로』, 문예출판사, 2004. 임종식ㆍ구인회, 『삶과 죽음의 철학 - 생명윤리의 핵심쟁점에 대한 철학적 해부』, 아카넷, 2003. 장회익, 『삶과 온 생명 - 새 과학문화의 모색』, 솔, 1998. 황우석ㆍ최재천ㆍ김병종, 『나의 생명 이야기』, 효형출판사, 2004.
도로테 죌레 지음, 채수일ㆍ최미영 옮김, 『고난』, 한국신학연구소, 1993. 멜빈 코너 지음, 소의영 옮김, 『현대의학의 위기』, 사이언스북스, 2001. 스티븐 제이 굴드 지음, 김동광 옮김, 『인간에 대한 오해』, 사회평론, 2003. 스티븐 제이 굴드 외 지음, 이한음 옮김, 『클론 and 클론-당신도 복제될 수 있다』, 그린비, 1999. 아서 클라인만ㆍ비나 비다스 외 지음, 안종설 옮김,『사회적 고통 - 인간의 고통에 대한 사회학적, 의학적, 문화인류학적 접근』, 그린비, 2002. 앤드류 킴브렐 지음, 김동광ㆍ과학세대 옮김, 『휴먼 보디숍 - 생명의 엔지니어링과 마케팅』, 김영사, 1995. 테이야르 드 샤르댕 지음, 양명수 옮김, 『인간현상』, 한길사, 1997. 페터 슬로터다이크 지음, 이진우ㆍ박미애 옮김,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 한길사, 2004. 프란츠 부케티즈 지음, 박종대 옮김, 『자연의 재앙, 인간』, 시아출판사, 2004.
곽만연, "배아복제에 대한 윤리학적 고찰", KNCC 교회와 사회위원회 <배아줄세포 연구와 기독교윤리 토론회>(2005.6.9) * 이 글은 묘하게도 주요 본론이 임종식, "배아연구", 『삶과 죽음의 철학』과 거의 같은데 글 안에서 별다른 해명은 없다. 김환석, "줄기세포 논쟁 깊게 보기",『한겨레신문』(2005.5.24.) -----, "부자의 과학, 빈자의 과학", 『한겨레신문』(2005.6.8.) -----, "배아의 사회학", 『한겨레신문』(2005.6.28.) 박명철, "생명윤리 - 배아복제를 중심으로", <제7회 장공기념 강연회>(2004.11.4.) 박재현, "인간배아줄기세포 유감(1)", "인간배아복제"(2-4), http://www.sangeun.co.kr/Guest.asp 박충구,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연구에 대한 생명윤리학적 비판", KNCC 교회와 사회위원회 <배아줄세포 연구와 기독교윤리 토론회>(2005.6.9) -----, "'황우석 신드롬'에 박수칠 수 없는 까닭",『복음과 상황』162호(2005.6.15) 장회익-황우석, "생명복제 무한경쟁 옳은가"(대담), | |
최근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