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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밤이 깊어질수록 바람이 잦아 드네요.

친구 집 앞 가로등이 유일하게 조용히 밤을 밝히고 있는데, 지나가던 바람이 그 옆에 가만 앉아 있답니다. 가로등 옆 잠들어 있는 목련 잎사귀가 행여 깨어날까봐 바람은 더 이상 바람이기를 포기한 것 같네요. 그 맘이 아련하네요. 내 숨소리마저 잦아 들었답니다.

 

대인공포증, 광장공포증....학창시절...

대낮에 운동장 한가운데를 걸어가 본 적이 없었습니다. 나를 쳐다보는 남들의 시선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내 이야기를 아무와도 나누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다락방에서 비오는 밖을 쳐다볼 때가 제일 행복했었습니다...

누가 나를 싫어했던 것도 아니었고, 누가 나를 미워했던 것도 아니었지만...난 늘 외로웠답니다...

 

그게 너무나 싫어서, 다락방에서 혼자 있는 내가 너무 싫어서, 가족을 떠나 먼 곳에서 혼자 공부한다고 나와 있을 때....난 그저 사람이 좋았습니다.

잠시라도, 내 주변에 사람이 없을 땐, 혼자 떨어진 들꽃마냥, 소리죽인 텔레비젼 소리에 의지하곤 했답니다...나는 사람들과 어떻게 소통해야 할 지 몰랐답니다...나에게 필요한 건 명분과 의지가 아니라 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었지요...슬픈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던 게지요...사람들의 관심은 끌었지만, 제가 달라진 건 없었습니다...나의 운동, 나의 표현, 나의 개성...이 모든 건 사람들 속에서 외로운 섬이 되고 싶지 않았던 나의 몸부림이었던 것 같아요...

 

사회에 나와서....난 사람들의 관심이 아니라 내 스스로 분명해지고 싶었어요...사람들의 관심에 내 관심이 집중되다보니....이런 사람에게도 '응', 저런 사람에게도 '응'....내가 위로받고 내가 관심받고 싶어서 내 입장이 분명한 것이 아니라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되어 버리더라구요...그래서 저는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었습니다...누구에게나....

관심이 아니라, 나의 입장을 분명히 가지고 싶다고 생각해서....전 저의 선명성을 분명히 하고 싶었어요....옳고 그름, 맞고 틀림....나에게도, 사람들에게도 그걸 분명히 요구하기 시작했고...그 선에서 나를 판단하고 사람들을 판단하고...그러면서 경계를 짓고.....

인간 해방을 이야기하는 제가 다른 형태로 사람들을 나누고 억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내 활동 영역에서든,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오로지 내가 세상의 중심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다가, 당신을 알게 되었지요....

당신에게 다가가는 그 과정 역시 세상의 중심은 나라고 생각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당신에게 다가갈수록 나를 중심으로 주류와 비주류로 나누었던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배려와 공감이 시혜가 아니라 삶의 조건이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함으로써 받은 징계는, 당신에게 다가감으로써 내가 알게 된 것에 비하면 그저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어야 한다고 늘 생각했었습니다...그러나 그 생각조차 머리에 있었더군요...가슴으로 느끼는 배려와 공감...그것을 스스로의 삶과 운동을 바꾸려는 계기로써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당신의 모습이 제겐 저에 대한 부끄러움이었습니다...

 

그래요....많이 외롭고 힘들었습니다....그래서 무얼 어찌해야 할 지 몰랐습니다...그저 사람들이 나를 모른 척 하지만 않기를 바랬습니다...그럴까봐, 그것이 두려워서, 어찌하든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했습니다...그리고 그 속에서 난 만족했고, 그것이 깨질까봐 전전긍긍했답니다...

 

나에게 현실은 현실이 아니었습니다...그건 잊고 싶은 사실이었을 뿐, 내 머리는 상상과 관념 속에서 현실을 재편하고 있었습니다...지금도 아마 그런 면이 있을 것입니다...그리고 이런 내 모습이, 좋은 말로는 나를 감성적으로 만들었지만, 좋지 않은 말로는 나를 감정적으로 만들었지 않나 싶네요....좋은 말로는 이상주의적이지만 좋지 않은 말로는 관념적인.....

 

당신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제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곁에 있어서는 안될 사람으로, 이 사회에서 소외되는 과정을 경험했습니다...그럴수록 세상에 대해 더 외치고 싶더군요....왜 안되는데? 왜 내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데? 너희들이 나에게 그럴 권리가 있는가? 왜 너희들의 기준에 나를 맞추려 하는가?....그러면서 세상의 관심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관심이 부당하게 느껴지더군요...이 과정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하는 걸 커밍아웃하게 된 근본적 힘이었을 겁니다....

 

이제 내일이면, 아니 오늘이겠군요...오늘이면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이랑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외로움과 공포 속에 보냈던 때가 있었는가 하면,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위해 몸부림치던 때가 있었는가 하면,

관심에 대한 부정이 이분법적 선명성으로-남성중심의 모순으로 가득찬-주몽이 되고자 했던 때가 있었는가 하면,

지금은....

이 모든 걸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모습으로 인정하면서, 나에 대한 배려와 존중, 남에 대한 배려와 공감, 당신에 대한 배려와 공감....이것으로서 내 삶을 만들어 가기 위한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아기마냥 보채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살얼음을 걷듯 마냥 불안한 마음도 있습니다...

처음 혼자 여행할 때마냥 두려운 마음도 있습니다...

 

돈이 없어서 막막하기도 합니다...

여섯 살 난 아이와 무엇부터 해야 할 지 잘 모르기도 합니다...

내가 움직일 수 있는 폭이 좁아진 것이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방 한 칸의 공간과 세상을 어떻게 연결해야 할 지도 걱정입니다....

당신이랑 둘이 나눌 술 잔의 기회가 당분간 쉽지 않음이 맘 아프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켠엔 또 다른 희망과 기대를 갖습니다...

온전한 생활인으로-그전까지는 여성이나 여성의 대리인을 희생시키며 남성의 권력을 맛보았다면-살다 보면, 관념이나 이론이 아니라, 일상에서 좀 더 달라지지 않을까....

그러면, 당신에게 그만큼 좀 더 가까이 가는 것이 아닐까....당신이라는 한 사람과의 관계를 제대로 만드는 것, 말로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관계에서 소중함을 만드는 것에 더 가까이 가는 것이 아닐까...내 아이에게도 좀 더 나은 관계와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내 운동이 그만큼 인간의 얼굴을 하지 않을까....

 

밖에 초생달이 있네요....숱한 밤을 지나면서 보름달이 되겠지요....

분명....아직 전 왔다갔다 한답니다....말이든 행동이든 경계를 넘나들고 있어요...변한 듯 했다가 도로 제자리인 것 같기도 하고, 제자리인 것 같다가도 좀 다른 것 같기도 하고...

 

서툴긴 하지만, 사람들이 좋아지고 있어요...내가 사람들을 좋아하기 시작했어요...

서툴긴 하지만, 사람들의 느낌과 욕망을 이해하고 있어요...그래서 어찌해야 하는 지는 아직 제 욕심이 많지만요....

서툴긴 하지만, 배려와 공감을 조금씩 이해하고 있어요...말이 아니라 침묵으로 이해하는 방법을요...

 

40을 바라보는 나이에 걸음마를 배우는 심정이랍니다....그게 온전히 당신 덕분이라면 부담되시려나요?

 

내일 이사합니다...아이와의 공간만으로, 나만의 공간만으로, 자궁같은 공간 속으로....

예전에 밤이 두려웠지만, 지금은 밤이 밤일 뿐이네요....

 

옆에서 잠든 아이의 숨소리가 고즈넉하네요.....밤이 깊어가는 만큼 사랑을 배웁니다....삶을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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