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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의 노동가치론에 대한 비판 4.

두 가지 사물이 서로 동일하게 되고 이 동일함이 우연적인 것도 아니고 자의적 결정에 따른 결과물도 아니라면, 이 두 가지 사물은 어떤 모종의 것과 관련하여 동등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자면 두 가지 사물이 동등하다는 것과 관련하여, 두 가지 사물을 동등하게 만드는 (또는 떠맡는) 양이 주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넘어서 이 두 가지 사물이 특정한 양적 비율 속에서 동등해진다면, 이 두 사물은 양적으로 규정된 질과 관련하여 동등할 수밖에 없다. 맑스에 관한 특정한 논쟁점은 그가 어떤 공통적인 질의 현존을 추론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가 어떤 방식(이 어떤 방식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으로 이런 공통적인 질을 상품 자체에 옮겨 놓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중에 맑스는 어떤 공통적인 “실체”에 관해 말한다.

 

맑스는 여전히 자신의 교환등식에 시선들 두면서 이제 이 제3의 것에 대해 좀더 상세한 규정을 내리고 있다. 맑스의 논의는 세 단계로 완수된다. 우선 그는 이러한 인위적인(gesuchte) 질에 대해서는 상품 몸체의 어떠한 자연적 속성도 문제가 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자연적 속성이 오로지 상품의 사용가치와만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 그렇지만 모든 사용가치가 그에 상응하는 양으로 존재할 수 있는 한에서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확립한다. 상품의 사용가치를 추상하여 나타난 교환관계의 특성을 묘사할 수도 있는 맑스의 이러한 확립에 반대하는 의견이, 즉 개별적인 상품 소유자가 자신의 교환하고자 하는 상품의 사용가치에 대해 아주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의견이 바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상품 소유자의 동기는 문제가 되지 않고 오히려 교환관계 자체가 문제가 된다. 맑스는 (『자본』 1권-옮긴이 삽입) 2장의 교환과정에 대한 고찰에서 상품 소유자의 (사용가치에 대한-옮긴이 삽입) 관심을 다루게 된다.

 

두 번째 단계에서 맑스는 사용가치에 대한 추상이 이루어지고 난 후에도 상품들에게 여전히 오로지 노동생산물일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속성이 남아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지금까지 맑스는 일반적으로 상품에 관해 말하고 있다. 맑스는 자신이 오로지 노동생산물의 상품형태만을 고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이런 것 때문에 맑스가 이 점에 관해 아무런 해명도 없이 “약삭빠른 변증법적 능숙함”으로 “교환가치를 가지고 있는 물건”의 본질적인 부분을, 즉 자신의 고찰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는 (대략 경작되지 않은 토지와 같은) 비-노동생산물을 취하고 있다는 뵘-바베르크의 비난은 전적으로 부당한 것이 아니다(B?hm-Bawerk 1896, S.84). 『자본』에서 맑스가 이러한 반박에 대하여 대답을 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에서 단순한 자연력들의 교환가치에 대한 해명을 지대에 관한 장에서 하였다는 점에서는 대답을 하였다(Ⅱ.2/139; 13/48).

 

세 번째 단계에서 맑스는 노동의 생산물이 상품이라는 노동의 특성을 규정하고 있다. 상품 몸체에서 노동생산물이게끔 하는 속성이 고찰되지만, 동시에 그 노동생산물의 사용가치가 추상된다면(도외시된다면), 상품은 더 이상 특정한 사용가치를 생산해 내는 특정한 구체적 노동의 생산물로서 파악되지 못한다. 따라서 상품은 여전히 노동 일반의 생산물로서만 간주된다. 서로 다른 구체적인 노동들은 따라서 “동일한 인간 노동, 즉 추상적 인간 노동으로 환원”된다(23/52). 추상적 인간 노동은 교환되는 상품들의 “공통적인 사회적 실체”(ebd.)이다. 상품들의 “가치”는 이러한 실체의 결정체이다.

 

 

방금 전에 언급한 맑스의 일련의 주장들은 비판가들에 의하여 일상적으로 노동가치론을 증명하려는 시도로서 파악된다. 이때 노동가치론에서는 상품의 교환 비율이 그 상품의 생산에 지출된 노동시간에 의하여 규정된다는 진술이 자명한 것으로 나타난다. 비판가는 맑스가 시장에서 일어나는 수백만의 교환행위 중에서 하나의 교환행위를 끄집어내어 고찰한 다음 교환에서 노동량의 동등함이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확립한다고 간주한다. 맑스가 『자본』 3권에서 교환 비율을 (더 이상 가치들의 교환이 아니라 생산가격들의 교환이라고) 다르게 규정하기 때문에, 뵘-바베르크는 맑스 이론 안에서 하나의 근본적인 모순이 확립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 한에서 맑스는 동일한 경험적 내용에 관한 두 가지 모순된 진술을 하고 있다.

 

 

좀더 새로운 저작들 속에서 이러한 모순 테제들은 결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이 젊은 저자들은 맑스가 제1장에서 결코 자본주의 경제에서의 실제적인 교환 비율에 관한 어떤 직접적인 경험적 진술도 하지 않으려 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상품과 화폐」 절은 특정한 모델(이 모델이 “단순” 상품생산이건 또는 서로 다른 자본의 동등한 가치구성에서의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이건 간에 말이다)에 관한 진술로서 파악된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모델에 대한 노동가치론의 타당성은, 뵘-바베르크가 이미 자본주의의 경험적 지식에 관한 것을 자세히 여러 번 보여 주었던 것(교환은 결코 어떤 “공통적인 제3의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배제방식”이 부적절하다 등)과 같은 유사한 논박을 통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사태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맑스의 문제 제기(die Marxsche Problemstellung)를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맑스는 상품을 다소간이라도 여러 측면에서 분석할 가치가 있지만 우연적으로 발견된 경험적 지식의 대상(Objekt)으로 고찰하지 않는다. 자신의 텍스트에 대한 코멘트를 서술하고 있는 「바그너에 대한 방주(부수적인 주석)」에서 맑스는 자신의 출발점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내가 출발하는 곳은 상품이 현재 사회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가장 단순한 사회적 형태이고, 이것은 ‘상품’이다.” (19/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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