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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미술사 - 13장 전통과 혁신 1

13장. 전통과 혁신Ⅰ(15세기 후반 : 이탈리아)

 

 

▲ 15세기 여러 ‘회화 유파’ 발생의 역사적 목적 ▼

 

- 중세시대에는 게르만 족의 유럽 통일을 통해 단일한 거대 제국이 탄생했다. 이러한 단일한 거대 제국을 통일시키는 지배적인 이념이 바로 중세 가톨릭(또는 중세 기독교)이었다. 이러한 지배 이념은 미술, 건축, 조각 등의 예술 분야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미술, 건축, 조각 등의 예술은 독자적인 영역을 가지고 활동한 것이 아니라 과학을 비롯한 여타의 학문처럼 종교적 지배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곰브리치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미술”은 “성경의 이야기를 감동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 데에만 사용”되었다. (247쪽)

 

- 다른 한편, 거대 단일 제국 하에서는 각 지역 또는 각 민족(nation : 이때에는 아직까지 민족이라는 개념이 탄생하지 않았다. 이 개념은 근대에 이르러서야 생겨나게 되었다)의 특이성이 강조될 수 없었다. 이 특이성이 강조될 경우 거대 단일 제국은 분열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통일성> 또는 <단일성>, <동일성>이 강조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동일성, 단일성이 미술에 있어서 <고딕 국제 양식>(p.215 참조)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 그러나 중세 말기에 오게 되면 절대 왕정의 왕권 강화(국왕의 권력 강화)되었고, 이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부르주아가 성장하였으며, 이러한 성장으로 인해 도시 공국(도시 국가)이 출현하게 되었다.

 

- 이러한 출현은 곧 고딕 국제 양식을 서서히 쇠퇴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도시 공국을 중심으로 지역적, 민족적 특색이 강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이는 미술가들로 하여금 길드(gild)를 조직하게끔 만들었고, 이러한 길드는 곧 하나의 ‘회화 유파’(248쪽 참조)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하여 “15세기의 그림은 그림 자체만 보아도 그것이 피렌체의 것인지 또는 시에나인지, 디종 또는 브뤼주, 퀼른 또는 비엔나의 것인지를 식별할 수”있게 되었다. (248쪽)

 

 

▲ 피렌체의 건축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 : 1404-1472) ▼

 

- 알베르티는 브루넬레스키와 도나텔로, 마사초를 이은 다음 세대의 건축가이다.

 

- 15세기 이탈리아와 북유럽 미술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 이탈리아 - 천상계와 지상계의 상호통일성

* 북유럽 - 건축에서는 <단순성>, 회화에서는 <구체적인 세부적 묘사>

이 둘은 모두 신플라톤주의 또는 헤르메티시즘의 두 측면을 각각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 알베르티는 바로 이탈리아 미술을 계승하고 있다.

 

- 도판 162(<르네상스 교회 : 만토바의 성 안드레아 대성당>)를 살펴보자. 알베르티는 직선과 원의 형태가 거의 분리되어 있는 고딕 양식을 지붕에서 직선과 원의 형태의 조화와 통일을 추구해 돔(dome) 형식을 추구했던 브루넬레스키를 이어받아 지붕의 돔 구조를 이어 받고 있다. 브루넬레스키가 설계한 <피렌체 대성당의 돔>(도판 146)과 비교해 보자.

 

- 도판 163(<피렌체의 루첼라이 대저택>을 살펴보자. 이 저택은 부유한 상인 소유의 집이다. 그 이전까지의 건물들의 소유는 모두 공동체의 소유였다. 즉 모두 공공건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체가 서서히 해체되기 시작하면서 개인의 중요시되고, 그에 따라 사적 소유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 사적 소유의 한 형태가 이 대저택이다.

 

- 이 저택 역시도 벽기둥 사이를 부드러운 곡선 형태의 아치로 배치하고 있는데 부드러운 곡선의 형태는 또한 돔 구조와 아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이 대저택의 창문들(p.189, 도판 125)을 비교해 보기만 해도 예기치 않은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알베르티는 소위 ‘야만적인’ 첨형 아치를 부드럽게 만들고 또 고전적인 기둥 양식의 요소들을 재래의 인습적인 형식 안에 채택함으로써 단지 고딕 식 설계 방식을 고전적 형식으로 ‘번안했을’ 뿐이었다.” (250쪽)

 

- “새로운 것과 낡은 것, 고딕 전통과 근대적인 양식 사이의 절충은 15세기 중엽의 많은 거장들의 특징이었다.” (250쪽)

 

 

▲ 피렌체의 조각가 로렌초 기베르티(Lorenzo Ghiberti : 1378-1455) ▼

 

- “새로운 업적과 재래의 전통을 조화시키는 데에 성공한 피렌체의 거장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는

도나텔로와 같은 세대의 조각가인 로벤초 기베르티를 들 수 있다.” (250쪽)

 

- 도판 164(<세례 받는 그리스도>)를 살펴보자. 먼저 이 부조는 도타텔로가 만든 부조 <헤롯 왕의 잔치>(p.232, 도판 152)에서처럼 원근법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다. 또한 “이 장면의 구성이 12세기 리에주의 유명한 놋쇠 주물공의 배치 방식과 많이 다르지 않다.(p.179, 도판 118)” (251쪽) 그런 점에서 중세의 전통적인 것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 그러나 먼저, 구원의 천사들이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왔다는 점이다. 도판 118(<놋쇠 세례반>)에서 천사는 요단강에서 예수를 기다리다가 세례를 해주는 두 사람 위에, 즉 천상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이 부조에서는 세례를 하는 세례 요한과 수평의 위치(세례 요한의 반대편)에 있다.

 

- 또한 기베르티도 도나텔로처럼 이 부조에서 “각 인물상에 특징을 주어 그들이 행한 역할을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251쪽)

 

- 이처럼 “기베르티”는 “당대의 새로운 발견들을 이용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고딕 미술의 이념에 충실”했다. (252쪽)

 

 

▲ 피렌체 부근 피에솔레(Fiesole)의 위대한 화가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 1387-1455) ▼

 

- 기베르티처럼 “안젤리코도 주로 종교 미술의 전통적인 이념을 표현하기 위하여 마사초의 새로운 방법을 응용했다.” (252쪽)

 

- 도판 165(<수태고지>)를 살펴보자. 이 그림은 원근법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천장의 모습을 둥근 곡선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의 인물들은 “거의 운동감이 없으며 실재의 단단한 인체를 암시해 주는 요소도 보이지 않는다.” (252쪽)

 

 

▲ 피렌체 화가 파올로 우첼로(Paolo Uccello : 1397-1475) ▼

 

- 도판 166(<산로마노의 대승>)을 살펴보자. 일단 이 그림은 원근법을 사용한 입체감을 통해 현실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말들이나 인물들은 조각된 회전목마나 인형들처럼 보인다. 이런 점은 이 그림을 매우 중세풍으로 보이게 한다.

 

- 그러나 이러한 중세풍을 해소시키는 것은 바로 그가 심취해 있는 원근법(도판 167 참조)이다. 이러한 원근법은 우첼로의 그림이 대단히 수학적이고 기하학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즉 인물상들의 배치나, “심지어 땅에 흩어져 있는 부러진 창들까지도 하나의 ‘소실점’을 향해 배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254쪽)

 

- 이러한 우첼로의 원근법은 “관찰을 통해 얻은 세부들을 점차 더해주고, 또한 가장 사소한 음영에 이르기까지 사물의 세세한 면을 그대로 묘사함으로써 국제 양식의 형식들을 변화”시킨 북유럽의 얀 반 에이크와는 “정반대의 접근 방법”으로 입체적인 현실묘사를 하고자 했던 방법이다. (255쪽)

 

 

▲ 베노초 고촐리(Benozzo Gozzoli : 1421경-97) ▼

 

- 고촐리는 그의 스승인 프라 안젤리코와는 화풍이 대단히 다르다.

 

- 도판 168(<베들레헴을 향해 가는 동방박사들>)을 살펴보자. 고촐리는 그의 스승 안젤리코와는 다르게 성경의 일화를 성스럽고 단순하게 그린 것이 아니라 화려하고 매혹과 환락의 동화처럼 그리고자 함으로써 당시의 생생하고 유쾌한 생활상을 묘사하고자 하였다. 이 그림 또한 원근법에 충실하다.

 

 

▲ 북부 이탈리아의 위대한 화가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 : 1431-1506) ▼

 

- “그(만테냐)가 현실성이라고 부른 기준은 조토의 시대보다 훨씬 더 정확한 것이 되어 있었다. 조토의 경우 중요했던 것은 이야기의 내면적 의미, 즉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남자와 여자는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행동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즉 성경의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어떻게 하면 성스럽고 아름답게 그려 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반면 만테냐는 외부적인 형태에도 관심을 가졌다.” 즉 어떤 “광경이 실제로 벌어졌을 장면을 그대로 재구성하려는” 노력을 했다는 것이다. (256쪽)

 

- 도판 169(<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성 야고보>)를 살펴보자. 이 그림은 만테냐의 현실성을 충분히 반영한 그림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성을 충분히 드러내기 위하여 원근법을 사용하고 있다.

 

- 도판 169의 그림은 도판 168의 고촐리의 그림과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다. 고촐리의 인물들은 화려하지만 표정들이 거의 동일하고 생동감이 없는 반면에, 만테냐의 인물들은 매우 “조각적이고 인상적이다.” 또한 원근법을 통해서 만테냐는 그의 인물들을 “단단하고 형체가 있는 존재들처럼 서 있고 움직이는 것처럼” 묘사하였다. (259쪽)

 

 

▲ 남부 이탈리아의 위대한 화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cesca : 1416?-92) ▼

 

- 피에로는 만테냐의 비슷한 점을, 고촐리와는 전혀 다른 점을 가지고 있다. 물론 만테냐와 고촐리처럼 원근법을 사용한다는 공통점이 있기는 하다.

 

- 도판 170(<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꿈>)을 보자. 이 그림에서 피에로는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을 구사하고 있다. 그것은 곧 <빛의 처리>이다. 피에로는 이 빛을 통하여 <현실성>을 훨씬 더 잘 드러내고 있다. “이 그림에서 빛은 인물들의 형상을 이루는 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깊이의 환영을 만들어 내는 원근법과 대등한 중요성을 지닌다.” (260쪽) 이러한 점에서 곰브리치는 “마사초의 후계자 중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피에로를 꼽는”다. (260쪽)

 

 

▲ 미술에 대한 새로운 관념이 만들어 낸 새로운 문제점 ▼

 

- 중세 시대는 대단히 수직적이고 위계적이며 빈 공간을 허용하지 않던 2차원적인 평면적 시대였다. 왜냐하면 신의 세계(이데아 계)가 기하학적으로 2차원적인 단순한 삼각형의 구조를 가진 세계였고, 인간 세계의 현실계도 이러한 신의 세계를 본 떠 만든 세계이고 그 세계를 지향하는 세계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세의 현실은 평면적이고 인물상들 역시 평면적인 삼각형 구도로 배치하면 되었다. 또한 정확하고 세세한 소묘 역시 알 필요가 없었는데, 이 또한 신의 세계가 가장 단순한 세계였기 때문이다.

 

- 그러나 “현실 세계를 거울과 같이 반영하는 그림을 그리는 새로운 관념이 채택되자마자 인물들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그 이전처럼 용이하지 않았다.” (260쪽) 왜냐하면 중세 신분제 사회가 서서히 붕괴되면서 상인, 과학자 등이 ‘부각’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해진 신분제에서 벗어나 자유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 “이러한 문제는 거대한 제단화나 그와 비슷한 작업에 직면했을 때 특히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왜냐하면 이런 그림들은 멀리 떨어져서 보여지며 또 교회 건축의 전체적인 구조와 어울려야 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미술가들은 성경의 이야기를 분명하고 인상적인 윤곽으로 신자들에게 보여 주어야 했다.” (260쪽) 한마디로 말하면 중세의 시대적 이념과 붕괴되어 가는 중세의 시대상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의 문제였다.

 

 

▲ 15세기 후반 피렌체 미술가 안토니오 폴라이우올로(Antonio Pollaiuolo : 1432?-98) ▼

 

- 폴라이우올로는 “이 새로운 문제, 즉 소묘에 있어서도 정확하며 구성에 있어서도 조화로운 그림을 그리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한 방법을 보여 주고 있다.” (262쪽) 그는 “정확한 규칙을 써서 이러한 문제를” “최초”로 “해결하려 했던” 사람이다.

 

- 이러한 그의 시도는 도판 171(<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순교>)에 잘 나타나 있다. 폴라이우올로는 이러한 규칙을 플라톤의 이데아 계의 구조로 나타낸 것 같다. 성 세바스티아누스가 원뿔 형태의 꼭짓점에 위체해 있다. (평면적인 형태로 봤을 때 이는 플라톤의 선의 이데아의 위치에 해당한다). 그리고 성 세바스티아누스에게 활을 쏘는 사람들은 원뿔의 원을 형성하는 위치에 있는데 각기 대립적인 쌍의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이는 플라톤의 이데아들의 특성과 구조를 잘 나타내고 있다 할 수 있다).

 

- 그리고 원근법을 사용하여 인물들의 입체감을 보여 주고 있다.

 

- 그러나 이 그림은 뭔가 조화롭지 못하고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준다. 즉 “폴라이우올로는 그가 성취하려고 시도했던 것을 거의 성공시키지 못하고 있다.” (262쪽) 왜냐하면 이러한 규칙(플라톤의 이데아 구조)은 중세적인 것인데, 이 중세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으로서 이 그림의 배경에 있는 “토스카냐의 풍경” (262쪽)과 제대로 조화를 이루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배경에 있는 토스카냐의 풍경을 원근법으로 이용하여 훌륭히 묘사하고 있지만, 그 주제와 배경은 사실상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순교가 집행되고 있는 전경의 언덕과 배경의 풍경을 연결시키는 것은 하나도 없다” (262쪽)

 

 

▲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 1446-1510) ▼

 

- 보티첼리 역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한 15세기 후반의 피렌체 화가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262쪽)

 

-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나타난 것이 도판 172(<비너스의 탄생>)이다. 이 그림은 그리스와 로마 신화에 근거한 것인데, 이 신화의 주요 원리는 <다(多)의 공존>이다. 신들 사이의 위계질서 없이도 잘 공존하는 방식을 중세 신분제가 붕괴해 가고 있는 시점에서 앞으로 따라야 할 그 당시 사람들의 공존 방식이었을 것이다. 이런 공존 방식은 미술에서 인물상의 배치의 기준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 그러나 보티첼리의 인물 묘사는 “덜 딴딴해 보이”고 그럼으로써 “폴라이우올로나 마사초의 인물처럼” 해부학적 지식에 따라 “정확하게 그려지지 않았다.” (264쪽)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우아한 운동감이나 선율적인 선들은 기베르티나 프라 안젤리코의 고딕 전통, 또는 앞에서 우리가 부드러운 육체의 곡선과 섬세한 옷주름의 흐름을 언급한 바 있는 시모네 마르티니의 <수태고지>(p.213, 도판 141)나 프랑스 금세공사의 작품(p.210, 도판 139)과 같은 14세기의 미술을 상기시켜 준다.”(264쪽) 다시 말하자면 인물 묘사의 측면에서는 중세의 전통을 벗어나고 있지 못함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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