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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장 조화의 달성(16세기 초 :토스카나와 로마) 1

15장. 조화의 달성(16세기 초 : 토스카나와 로마)

 

 

▲ 16세기 거장(천재)들의 탄생의 역사적 배경 ▼

- 16세기, 즉 ‘친퀘첸토(500년대)’(이와 더불어 15세기를 ‘콰트로첸토(400년대)’라고 이탈리아 사람들은 부른다) “시기는 바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미켈란젤로(Michelangelo), 라파엘로(Raffaello), 티치아노(Tiziano), 코레조(Correggio)와 조르조네(Giorgione), 북유럽의 뒤러(Dürer)와 홀바인(Holbein) 등 수많은 거장들의 시대였다.” (287쪽)

- 이러한 거장들이 탄생하게 된 역사적 배경과 조건은 다음과 같다. 먼저 중세 시대가 퇴락해 감에 따라서 신학의 시녀로 있던 여타의 다른 모든 과학(또는 학문)들이 신학으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 다른 한편 범신론의 영향으로 과학과 수학이 발전하게 되었는데, 미술에서도 이러한 과학과 수학의 발전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탈리아에는 미술가들이 원근법의 법칙을 연구하기 위해 수학으로 관심을 돌리고 인체 구조를 탐구하기 위해 해부학에 관심을 갖는 위대한 발견의 시대가 도래했다. 이러한 발견들을 통해서 미술가들의 시야는 넓어졌다.” “그들은 자연의 신비를 탐색하지 않고서는, 또 우주에 감추어진 법칙을 밝히지 않고서는 명성과 영광을 얻을 수 없는 독립적인 거장들이었다.” (287쪽)

- “이러한 변화의 효과는 건축 분야에서 제일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브루넬레스키 시대(p.224) 이래로 건축가는 고전 시대의 지식을 어느 정도 지니고 있어야 했다. 고대 건축의 ‘기둥 양식’에 적용했던 법칙들, 즉 도리아, 이오니아, 코린트 식 기둥과 엔타블레이처의 올바른 비례와 치수를 연구해야 했으며 고대의 유적을 찾아가 측량해야 했다.” (288쪽)

- “이 당시 르네상스 건축가가 진정으로 열망했던 것은 건축의 쓰임새와 상관 없이 비례의 아름다움과 내용의 공간성 및 그 조화 자체가 만들어 내는 장대함만을 위해 건물을 설계하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건물의 실용적인 요구에 집착해서는 성취할 수 없는 완벽한 균형과 균제를 갈망했던 것이다.” (288-9쪽) 그런데 중세에서는 모든 것이 신학의 도구였고, 특히 과학은 일상생활에서의 실용적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신학과 종교를 위한 ‘실용적’ 도구 차원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Bramante : 1444-1514) ▼

- 브라만테는 “전통에 따라 성 베드로가 묻힌 자리에 세워졌던 고색창연한 성 베드로 바실리카를 헐어내고 1506년에 그 자리에 교회 건축의 오랜 전통과 신에게의 봉사라는 목적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방식으로 교회를 짓기로 한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열렬한 옹호자”였다. (289쪽)

- 도판 187(<르네상스 전성기의 예배당 : 템피에토>)의 건축 양식을 보면 중세 고딕 양식에서 거의 탈피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뾰족한 첨탑 양식이 보이지 않고 원과 둥근 곡선 형태의 양식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 : 1435-88) ▼

- 베로키오는 피렌체의 화가이며 조각가이고, 그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스승이다.

- 도판 188-9(<바르톨로메오 콜레오니 기념상>)을 살펴보자. 이 기마상은 “그가 얼마나 꼼꼼하게 말의 해부학을 연구했으며 또 얼마나 명확하게 콜레오니의 얼굴과 목의 근육을 관찰했는가를” 보여 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놀랄 만한 것은 투지만만하게 부대의 선봉장으로 달리는 것 같이 보이는 말 탄 사람의 자세이다.” (291쪽)

 

 

▲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 1452-1519) ▼

- “그(레오나르도)는 그의 선배들이 했던 것처럼 미술가의 임무는 더 철저하게, 그리고 더 열정적으로 더 정확하게 눈에 보이는 세계를 탐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학자들의 책에서 얻는 지식에는 관심이 없었다.” (293쪽)

- “레오나르도는 자기가 읽은 것을 자기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문제에 부딪치게 되면 권위자들에게 의지하지 않고 언제나 그것을 실험으로 해결하였다. 그는 자연에 대해 깊은 호기심을 느꼈고 창의적 정신으로 이 모든 것에 도전했다. 30구 이상의 시체를 해부해서 인체의 비밀을 탐구하기도 했으며(도판 190) 자궁 속에서 태아가 성장하는 신비를 조사한 최초의 사람이기도 했다. 또한 파도와 조류의 법칙을 연구했으며, 곤충들과 새들이 나는 것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데 수년을 보내고 언젠가는 현실화되리라고 확신한 비행기구를 고안하기도 했다. 바위와 구름의 형태, 멀리 있는 물체의 색채에 미치는 대기의 영향, 초목이 성장하는 것을 지배하는 법칙들, 음(音)의 조화 등이 그의 끊임없는 연구의 대상이었고 이것이 그의 예술의 기초가 되었다.” (293-4쪽)

- “그의 글 가운데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레오나르도가 훗날 갈릴레오가 주장했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예견했음을 보여 준다.” (294쪽)

- “그는 그의 미술을 과학적인 토대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그가 사랑하는 회화 예술을 비천한 기술로부터 존경 받는 신사다운 작업으로 변경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294쪽)

 

 

▲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

- 도판 191-2(<최후의 만찬>)를 살펴보자. “이 그림에는 동일한 테마를 다룬 이전의 그림들과 닮은 데가 하나도 없다. 이들 전통적인 그림들에서는 사도들이 식탁에 한 줄로 앉아 있고 유다만이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있으며 예수는 조용히 성찬을 나누어 주고 있다. 이 새로운 그림은 이전의 전통적인 그림들과 아주 다르다. 이 그림에는 드라마가 있고 흥분이 있다.” (296쪽)

- “12사도들은 제스처와 움직임에 의해서 서로 연결되는 세 사람씩 네 무리로 자연스럽게 구별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변화 속에는 너무나 풍부한 질서가 있으며 또한 이 질서 속에는 너무나 다양한 변화가 내재해 있으므로 하나의 움직임과 그것을 받는 움직임 사이의 조화를 이룬 상호 작용을 살펴보려면 끝이 없다(이것은 어쩌면 상품들 사이의 관계와 아주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플라이우올로의 <성 세바스티아누스>(p.263, 도판 171)를 설명할 때 논의했던 문제(즉 인물의 구성 배치 문제)를 돌이켜본다면 구성에 있어서의 레오나르도의 업적을 완전하게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298쪽)

- 로지에더 반 데르 웨이든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p.277, 도판 179)에서 나오는 인물상의 배치와 표정 변화를 계승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고 있다. “로지에르 반 데르 웨이든이나 보티첼리와 같은 화가들이 각기 자기 나름대로 작품 속에서 회복시키려고 했던 그러한 무리 없는 균형과 조화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298쪽)

 

 

▲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 리자> ▼

- “<최후의 만찬>보다 훨씬 더 유명한 레오나르도의 작품을 들자면 그것은 리자(Lisa)라는 이름을 가진 피렌체의 한 부인의 조상인 <모나 리자>(도판 193)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298쪽).

- <모나 리자>에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나타난 인물들의 다양한 변화와 표정이 리자라는 한 인물에 포괄적으로 함축되어 있다. <최후의 만찬>에서 살아 있는 듯한 다양한 표정 변화가 <모나 리자>에서 한 인물의 변화무쌍한 표정 그대로 전이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감탄하게 하는 것은 리자라는 인물이 놀라울 정도로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녀가 실제로 우리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그녀의 마음속에 영혼이 깃들어 있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299-399)

- “레오나르도는 어떻게, 그리고 어떤 수단으로 이런 효과를 낼 수 있는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자연의 위대한 관찰자인 레오나르도는 그 이전의 어느 누구보다도 사람들의 눈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300쪽)

- “그(레오나르도)는 자연을 자연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미술가들에게 또 하나의 새로운 문제, 즉 정확한 소묘를 조화로운 구성에 결합하는 것만큼이나 미묘한 문제를 남겨 놓았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300쪽)

- “이탈리아의 ‘콰트로첸트(1400년대)’ 거장들”, 특히 반 에이크(자연의 모방 ; p.241, 도판 158), 만테냐(정확한 소묘법과 원근법 ; p.258, 도판 169)가 “재현한 자연은(자연이 신과 동급이기 때문에) 장대하고 인상적이면서도 그들의 인물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기보다는 오히려 조각상”이나 “어딘가 딱딱하고 거칠어서 나무로 만든 것 같이 보인다.” (300쪽) 다시 말하자면 인물을 세부적으로, 그리고 그대로 묘사하고 재현하고자 할수록 살아 있는 인물들이 아니라 돌처럼 굳어져 버린 인물들처럼 돼 버리는 난점을 이 거장들은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난점을 말끔하게 해결한 사람이 바로 레오나르도였다.

- 이러한 난점을 해결하는 방식을 곰브리치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화가는 보는 사람에게 무엇인가 상상할 여지를 남겨 두어야 한다. 가령 윤곽을 그처럼 확실하게 그리지 않고 형태를 마치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는 것 같이 약간 희미하게 남겨 두면 이 무미건조하고 딱딱한 인상을 피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레오나르도의 창안으로, 이탈리아 어로 ‘스푸마토(sfumato)’라고 한다. 이것은 하나의 형태가 다른 형태 속으로 뒤섞여 들어가게 만들어 무엇인가 상상할 여지를 남겨 놓는 희미한 윤곽선과 부드러운 색채를 가리킨다.” (300쪽)

- 내가 보기에, 이 스푸마토라는 기법은 세부적인 것의 묘사에 있어서 빛의 밝음과 어두움, 그리고 가까운 곳과 먼 곳의 차이를 드러내는 원근법을 탁월하게 조화시킨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빛이 비치는 밝은 쪽과 가까운 쪽은 명확한 상이 드러나는 반면에, 빛이 비치지 않는 어두운 쪽과 먼 곳은 상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고 확실하지 않은 모호한 그 무엇으로 보인다. 이것을 선의 터치 측면에서 보면 다음과 같지 않을까 싶다. 빛이 비치는 쪽은 가까운 거시에 있는 쪽과 마찬가지로 선을 명확하게 표시하여 그 형태의 경계를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다. 그 반면에 그림자가 드려지는 쪽은 먼 거리에 있는 쪽과 마찬가지로 선을 불명확하게, 희미하게 처리함으로써 형태의 경계를 허물어서 서로 뒤섞여 들어가게 만들 수 있게 된다.

- 이것은 헤르메티시즘을 가장 완벽하게 현실화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헤르메티시즘에 따르면 천상계와 지상계는 ‘명확한’ 존재 사슬 고리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신비로운 형태’의 존재 사슬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 천상계로 갈수록 지상계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또한 천상계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신비의 세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신비의 세계는 지상계로 오게 될 때 다양한 변화를 가진 모습으로 나타난다.

- 이러한 것을 곰브리치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제 <모나 리자>(도판 194)로 다시 돌아가 살펴보면 그 신비스러운 효과의 일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레오나르도가 스푸마토 기법을 아주 세심하게 사용하고 있음을 본다. 얼굴을 그리거나 낙서를 해 본 사람이라면 우리가 표정이라고 부르는 것이 주로 두 가지 요소, 즉 입 가장자리와 눈 가장자리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레오나르도가 부드러운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게 함으로써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남겨 둔 부분들이 바로 입과 눈 부분이다. 모나 리자가 어떤 기분으로 우리를 보고 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녀의 표정은 늘 붙잡을 수가 없다. 물론 이러한 효과를 내게 하는 것은 이러한 모호함뿐만은 아니다. 그 뒤에는 더 많은 것들이 숨어 있다.” (301-2쪽)

- <모나 리자> 전체를 보면 모나 리자와 그 배경 사이에는 원근법적인 요소가 있다. 그런데 이 원근법적인 요소는 만테냐의 원근법하고는 차이가 있다. 왜냐 하면 이 원근법에는 빛의 요소가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모나 리자의 표정이 빛의 요소와 원근법이 결합․통일되어 있듯이 그 배경도 빛이 있는 쪽은 선의 터치를 명확하게 한 반면에 빛이 없는 쪽은 선의 처리가 희미하게 되어 있다.

- 모나 리자 뒤에 있는 풍경을 보면, 그 왼쪽과 오른쪽 모두를 모나리자와 동일한 거리선상에 둔 것이 아니라 동일하지 않는 거리선상에 배치하였다. “왼쪽의 지평선은 오른쪽의 지평선보다 훨씬 낮은 곳에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림의 왼쪽에 초점을 맞추면 오른쪽에 초점을 맞출 때보다 인물이 약간 더 커 보이거나 혹은 몸을 더 세우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 또한 보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서 변하는 것 같이 보인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도 얼굴의 양면이 꼭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302-3쪽)

- 이상의 것들을 종합해 볼 때, “끈질기게 자연을 관찰하는 데 있어서 레오나르도는 어느 선배 못지않게 근실했다. 다만 그는 더 이상 자연의 충실한 노예가 아니었다.” (303쪽) 다시 말하자면 레오나르도는 현실(지상계)에 발을 딛고 서 있으면서도 현실을 넘어서고자(즉 지상계와 천상계를 결합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 “이제 위대한 과학자인 레오나르도는 태초의 형상 제작자들의 꿈과 두려움을 현실로 만들었다.” (303쪽) 이러한 레오나르도의 예술은 철저하게 자연에 대한 실험과 관찰, 분석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학-->도덕-->예술)이라는 칸트의 생각에 상당한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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