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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론과 경험론의 대결(삼봉과 동자의 대결)

조선 건국 과정을 그리는 역사소설 <<혁명>>(김탁환 지음,  민음사, 2014) 중 제2권에서 나온 내용 중에서 발췌함(35~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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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가 한차례 지나간 뒤 무지개가 떴다. 마루에 앉아 구경하는 내 곁으로 동자가 슬금슬금 엉덩이를 밀며 다가왔다. 오늘은 또 무엇이 궁금한 걸까, 내색 않고 기다렸다. 

"왕성 사람들은 모두 나리처럼 지냅니까요?" 

동자는 태어나서 영주를 벗어난 적이 없다. 이 나라 도읍지가 북쪽인지 남쪽인지도 몰랐다. 영주를 돌아다니기에도 시간이 부족할 나이였다. 왕성에서 벼슬을 살다가 내려왔다는 중늙은이가 서책 읽고 문장 쓰고 산책하며 지내는 모습을 보면서, 문득 그곳 생활이 궁금해진 듯했다. 

"아니다. 서생은 글을 읽고 쓰지만, 장사꾼은 물건을 팔고 장인은 옷이며 가구며 농기구를 만들지." 

동자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입니다요. 난 또 우린 열심히 농사짓는데, 왕성 사람들은 놀고먹는가 싶었네요." 

"넌 내가 놀고먹는 것 같으냐?" 

"나라에 큰 죄를 짓고 유배 오셨단 소릴 듣긴 했는데, 아무리 봐도 벌 받으시는 것 같진 않네요. 옥에 갇히지도 않고 곤장을 맞지도 않고. 오히려 가끔 관아에 가셔서 술 대접, 밥 대접을 받고 오시지 않습니까? 그런 게 벌이라면 저도 달게 받겠습니다요." 

귀양의 힘겨움, 왕성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나날의 답답함을 어찌 동자가 알랴. 

"가끔 밤늦도록 잠도 자지 않고 끼적이시는 거 압니다.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종이를 찢거나 물로 씻어 버리시더군요. 찢거나 씻을 글을 왜 저렇듯 낑낑대며 여러 번 고쳐 쓰는지 솔직히 답답했어요." 

계속 놀림을 당하긴 싫었다. 

"나도 일한다." 

"무슨 일 하십니까요?" 

"이 마음에 들어 있는 나라를 문장으로 옮기지." 

"또 그 마음속 나라 타령이십니까. 나리의 나라는 무척 작은가 봅니다. 마음에 쏙 들어갈 만큼. 나리의 나라는 무척 만들기 쉬운가 봅니다. 문장으로 옮겨 간직할 만큼." 

당돌한 지적이다. 

"왜 그리 여기느냐?" 

"나라를 문장으로 옮기는 건 고민해 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저 언덕 무지개를 말로 담기 어렵다는 것쯤은 압지요." 

동자의 시선을 따라 잠시 무지개를 쳐다보았다. 

"나리는 저 녀석이 몇 가지 색깔로 보이십니까요?" 
"다섯 가지! 그래서 오색 무지개 아니냐?" 

"저는 볼 때마다 달라지던데요. 어떤 날은 다섯인데 어떤 날은 일곱이고, 또 어떤 날은 팍 줄어 셋이고. 무지개의 크기나 길이도 알쏭달쏭합지요. 여기서 보면 언덕 이쪽에서 저쪽까지만 걸친 듯한데, 막 달려가면 무지개가 점점 크고 길어지다가 어느 순간 사라지고 말더라고요. 무지개 보면 재수가 좋다며 춤추는 이도 있고, 무지개 보면 불행이 찾아든다고 아예 고갤 숙이고 걷는 이도 있지요. 아직 저 무지개를 만졌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부드럽다 축축하다 딱딱하다 말들은 많지만. 전부 추측일 뿐이에요. 무지개 하나만 놓고 따져도 이러한데 나라를 문장으로 옮기려면 얼마나 복잡할까요. 나라를 마음에 넣기도 어려운 일, 넣어둔 나라를 꺼내 문장으로 옮기기도 어려운 일! 나리는 왜 이토록 어려운 일을 하십니까. 그냥 편히 뒹굴뒹굴 지내면 누가 야단이라도 칩니까" 

집을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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