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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건국 과정을 그리는 역사소설 <<혁명>>(김탁환 지음, 민음사, 2014) 중 제2권에서 나온 내용 중에서 발췌함(65~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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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소리에 잠을 깼다. 옆집 늙은 황소가 간밤에 죽었다. 늙은 농부는 쓰러진 황소 옆에서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수십 년 정이 들면 사람이 짐승보다 낫다는 말도 있어 참고 넘기려 했다. 점심까지 곡이 이어졌기에 옆집으로 갔다. 방 한 칸, 부엌 한 칸이 전부인 농부는 부엌에서 밥을 짓고 소를 키웠다. 여자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혼인을 했는데 사별한 것인지 아내가 집을 나간 것인지 혹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혼자 살았는지는 그때그때 말이 달았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니 그만 슬픔을 거두라고 권했다. 농부가 울음을 삼키곤 물었다.
"부모 친척의 상(喪)을 제외하고 생명붙이를 위해 하루종일 운 적이 있습니까?"
"없소."
"왜구들이 침탈하여 많은 이들이 죽거나나 끌려갔습니다. 그때 혹시 울지 않았습니까?"
"울지 않았소."
"흉년이 들어 또 마많은 이들이 굶어 죽은 해를 기억하시지지요? 그때 혹시 울지 않았습니까?"
"울지 않았소."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뒤이어 돌리병 때문에 열두 마을의 주민들이 몰살한 적도 있습니다. 그때 혹시 울지 않았습니까?"
"울지 않았소."
"그렇다면 내가 우는 것을 말릴 자격이 없습니다."
"울어 보지 않았다고 어찌 이치를 따지지 못한단 말이오? 울음에 으르지 않더라도 알고 행해야 하는 일이 이 세상엔 가득하오."
"슬픔을 느끼지 않고 이치만 따지기 때문에 백성이 정치가를 믿지 못하는 겁니다. 왜구에게 어느 날 갑자기 죽임을 당하는 일, 흉년이 들로 돌림병이 도는 일, 또 수십 년을 함께 산 황소가 갑자기 숨을 거둔 일, 이 불행들을 어떤 이치로 명쾌하게 설명하시렵니까? 우는 것 외엔 답이 없는 일도 꽤 많습니다."
비로소 그 농부가 땅땅만 갈고 곡식만 시심는 이가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노을이 깔리자, 곡소리가 멈추고 노랫가락이 흘러나왔다. 농부의 선창에 이어 수많은 목소리가 소리를 받았다. 집 안은 물론 마당과 길까지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소 모는 소리>를 부르는 중이었다.
이랴이랴 워디위디 이랴이랴이랴
가자 가자 어서 가자 쉬지 말고 어서 가자.
이 밭 갈아 옥토 삼고 씨앗 심어 길러 보세.
이 곡식을 거둬들여 부모 봉양 다하고서
자식 놈들 입고 먹여 이 한세상 살고 지고
이랴이랴 워디 이래이 쯔쯔쯔쯔 이랴
가자 가자 어서 가자 ㅅ쉬지 말고 어서 가자.
노래가 끝난 후 마을 사람들에게 빠짐없이 고깃국이 나눠졌다. 구경꾼인 내게도 국 사발이 왔다. 새벽에 죽은 황소를 끓여 만든 것이다. 뒤이어 탁주도 한 사발씩 돌았다. 농부에게 물었다.
"종일 곡을 하기에 황소를 양지바른 언덕에 묻겠거니 여겼는데, 마을 사람들 모두 불러들여 함께 노래하며 먹고 마시는 까닭이 무엇이오?"
농부가 한심하다는 듯 헛웃음과 함께 답했다.
"언덕에 묻으면 나만 황소를 기억하지만, 이렇게 나눠 먹고 즐기면 마을 사람 모두 우리 집 황소 덕분에 배를 채운 밤을 잊지 않을 겁니다. 여기선 누구나 이렇게 삽니다."
술이 한 순배 돌 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황소에 얽힌 이야기를 한 토막씩 꺼냈다. 온갖 황소들이 이야기판에 출몰했다. 사냥 나온 황을 구하고 정오품 벼슬을 받은 황소, 늑대 울음을 우는 황소, 발이 여섯 개, 일곱 개, 여덟 개인 황소, 공자님 말씀엔 귀 기울이지만 맹자님 말씀엔 고개 저으며 뒷발을 차 대는 황소, 풀 대신우 흙만 먹는 황소, 10년 동안 황소였다가 죽을 땐 암소로 변한 황소, 반대로 암소였다가 황소로 변한 황소, 하늘을 나는 황소, 바다 밑을 걷는 황소, 말보다 더 빨리 달리는 황소, 뿔로 바위를 부순 황소, 손바닥 하나에 쏙 들어가는 황소, 나라님 계신 궁궐보다 더 거대하게 자란 황소.
농부는 황소에 관한 이야기들을 들으며 함께 웃고 마시고 노래하다가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 모든 황소를 합쳐도 오늘 죽은 황소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농부의 황소는 보름달이 뜨면 긴 울음을 먼저 울었고, 농부가 빈 손으로 나오면 다시 울어 술병을 챙기도록 했으며, 등에 탄 농부가 아무리 빨리 가자 채근해도 그윽한 풍광을 충분히 즐기기 전에는 걸음을 떼지 않았고, 취한 농부가 길을 찾지 못해도 스스로 적당한 때를 택하여 돌아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1000리를 하룻밤에 달리는 명마(名馬)를 칭송하지만, 그 밤 10리밖에 못 가더라도 농부에게 넉넉한 여유와 즐거움을 선물하니 이 황소야말로 명우(名牛)라는 이야기다. 말을 탔다면 놓쳤을 세상의 묘(妙)한 구석을 느린 황소 덕분에 만끽한 셈이다. 농부의 젖은 눈은 순하디순한 황소의 눈을 닮았다. 즐거우면서도 음란하지 않고 슬프면서도 마음 상하지 않는 시집을 읽는 기분이 이와 같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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