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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움에 대하여..

허균의 혁명 과정을 그리는 역사소설 <<허균, 최후의 19일>>(김탁환 지음,  민음사, 2009) 중 상권의 내용 중에서 발췌함(160~1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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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허균의 아들)에게 부치노라. 

이제 너도 이 아비가 처한 상황을 알겠구나. 의금부의 관원들이 널 잡아들이기 위해 혈안이라고 하니, 무사한지 걱정이 앞선다. 네가 보고 들은 것들을 믿지 마라. 이 아비에 관한 그 어떤 소문도 진실이 아니며, 숭례문의 흉격을 둘러싼 그 어떤 논의도 사실이 아니다. 확실한 건 이 아비에 관해 떠드는 자들은 심심풀이로 그 짓을 한다는 게고, 아비는 이 일에 목숨을 걸었다는 것이다. 왜 그따위 일에 목숨을 걸었느냐고 따지는 너의 얼굴이 떠오르는구나. 네 나이 이제 겨우 열세 살이니, 역모의 주동자인 아비를 받아들이기 힘들 게다. 기정승을 탄핵했다고 집을 나간 네가 아니더냐? 

그래서 이렇게 매일, 하루에도 서너 차례 붓을 드는 건지도 모르겠구나. 이런다고 네가 날 완전히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다만 지금 이 좁은 공간에서 널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것뿐이구나. 이 서찰은 나를 이해시키기 위한 글이면서 동시에 널 이해하기 위한 글이라는 생각이 든다. 

홀로 앉아 물끄러미 네 안을 들여다본 적이 있느냐? 타인에게 들키지 않은 너의 너다움을 본 적이 있느냐? 그 너다움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집을 떠난 적이 있느냐?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달아나지 못하고 결국 되돌아와서 너다움과 다시 대면했을 때의 심정을 너는 아느냐? 이 아비는 사십오 년 동안이나 도망치고 도망치고 또 도망쳤었다. 이건 내가 아니라고, 나의 탈을 쓴 괴물이라고 부인하며 팔도를 떠돌았던 게다. 그리고 오 년 동안, 나는 철저하게 나의 나다움을 들여다보며, 오직 그 나다움을 버팀목으로 지내 왔다. 꼭 한 번은 이 나다움을 향한 시선을 세상 밖으로 드러내고 싶다. 그것이 반백 년, 이 아비의 삶을 나 자신에게 납득시키는 유일한 길이니까. 그 길의 끝에서 아비는 지금 의금옥에 갇혀 있는 게다. 

사람들은 지금의 나를 괴물답다고 평하한다. 마지막으로 인간답게 말하고 움직인 순간들의 나를 그들은 마치 원숭이 보듯 한다. 너도 나를 원숭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이건 네게 던질 물음이 아니구나. 원숭이면 어떻고 원숭이가 아니면 또 어떻겠느냐. 

아비의 마지막 거사가 성공하지 않을 수도 있다. 점점 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는 것을 느낀다.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죽는 것 역시 중요한 법이다. 다행히 이곳에서는 죽음을 준비하는 나를 방해하지 않고 내버려두고 있다. 거사가 성공하면 할 일들은 이미 준비를 끝내 놓았다. 이십 년이 넘도록 구상하고 살핀 일들이므로 구태여 이곳에서 다시 되새김질을 할 필요도 없다. 허나 죽음은 다르다. 지금까지 나는 죽음을 준비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런데 지금 죽음은 삶만큼이나 내 코앞에 확 다가와 있다. 나는 이제 죽음의 얼굴을, 냄새를, 걸음걸이를 생각한다. 죽음 앞에서도 낯설지 않은 웃음을 웃고 싶다. 

이 아비는 네가 마음에 걸린다. 거사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너의 인생은 이 일로 인해 완전히 달라질 게다. 네가 그런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는 걸 아비도 알지만, 이제 너도 운명이라는 놈의 버릇없음을 인정해 주기 바란다. 

처음에는 아비의 인생을 찬찬히 반추할 생각이었으나 그만 두는 편이 낫겠다. 아비의 인생은 아비의 인생이고, 너는 또 너만의 인생을 걸어가야 하니까. 아비는 네가 부끄러워하지 말기를 바랄 뿐이다. 너도 인생을 살다보면 참으로 고마운 이들을 많이 만날 게다. 훌륭한 스승, 따뜻한 이웃, 믿음직한 벗, 아내 그리고 자식들....... 그들에게 최선을 다하도록 해라. 그들을 위해서라면 너의 모든 것을 주고서도 아깝지 않아야 한다. 네 인생의 주인이 너 자신이라고 착각하지 마라. 너의 인생은 네가 만난 사람들, 네가 읽은 책들, 네가 본 사물들과 풍광들과 함께 만들어 가는 게다. 그리고 너 역시 그들의 삶에 개입하는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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