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성(sex)에 대한 끄적거림...

<여성되기>와 관련된 글을 구상하던 차에, 이러저러하게

생각이 흘러가다가 성(sex)과 관련하여 생각이 멈추면서

이에 대해서 주저리 주저리 생각나는 대로 끄적여 보았다^^...

 

혹시 지적해 주실 것 있으면 지적해 주세용^^...

 

=========================================================

 

# 성과 인간관계, 자유와 평등 #


1. 성-사회적 관계의 토대이자 생산물(결과물).


성, 섹스. 이 주제는 우리가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장 잘 모르는 영역의 주제이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성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자주 이야기하면서도, 성이 무엇인지, 왜 성관계를 하는지, 성관계가 도대체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대체로 술자리 등에서의 음담패설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이는 사람들이 대체로 성을 동물적인 본능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성은 동물적 본능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왠지 인간적이지 않은 꺼림직한 것이고 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을 인간 이하 또는 저질 인간이라는 눈총을 받게 된다.

그러나 성은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고 사회적인 활동이다. 인간은 성을 통해서 사회적 관계의 기초를 만든다. 즉 사회적 관계를 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새롭게 생산한다. 성을 통해서 서로가 서로를 통해서 인간임을 확인하면서 기존의 관계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대를 생산하면서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예를 들면 ‘부부는 서로 닮아간다.’ 서로 닮아간다는 것은 서로의 역사를 이해하고 껴안음으로써 서로의 관계 폭을 넓혀가는 것이다. 서로간의 관계의 폭넓음은 또 다른 이들과의 관계맺음의 폭을 넓혀 준다. ‘연애를 해 본 자가 연애를 더 잘 한다.’

그런데도 왜 성은 동물적 본능의 영역 속에서 억압되어 있는 것일까? 이러한 것이 왜 사회의 일반적인 시각(지배 이데올로기)이 되었을까?

  

2. 성-사회적 관계로부터의 자유이며 동시에 사회적 관계에로의 자유.


우리는 성에 대해 공론화하지 못한다. 성에 대한 공론화는 도덕적 비난뿐만 아니라 법적 처벌까지도 감수해야 한다. 성의 공론화는 이른바 ‘전문가’라는 특권층에게만 한정되어 있으며 대중 일반에게는 금지되어 있다. 도대체 왜 대중 일반에게 성은 이렇게 금기의 영역에 있어야 하는가? 도대체 대중에게 성이 어떤 의미로 다가오길래 금기의 영역으로 남게 되는가?

이러한 문제는 인간의 지배, 피지배 문제, 즉 인간의 서열화, 계급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문제이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구체적 현실화는 평등하지 않고 불평등하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의 성적 욕구는 모두 평등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현실 속에서 성적 욕구의 실현은 결코 평등하지 않고 불평등하다. 인간의 성적 욕구의 실현은 인간의 서열화, 계급화를 통해 서열화되고 계급화된다.  성적 욕구는 인간적인 것과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것으로 이분화된다, 지배계급의 성적 욕구의 실현은 인간적인 것이 되고 피지배계급의 성적 욕구의 실현은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인간의 성, 그리고 그 성과 연관된 욕구는 평등하다. 그런데 도대체 평등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흔히 공산주의 사회를 평등한 사회라고 할 때,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평등’을 산술적인 평등으로 생각하며, 그리하여 결국은 평등을 산술적 의미로만 제한시키게 된다. 1/n이라는 산술적으로 평등한 사회는 이루어질 수 없다. 평등이란 자유를 필연적으로 포함할 수밖에 없다. 즉 평등이란 인간의 ‘자유’로운 관계맺음을 보장해 주는 것이다. 모든 측면에서, 전방위적으로!  그렇지만 그 관계맺음은 끝이 없으며, 하나의 타입이 존재하지 않으며, 시․공간적으로 특이하다. 관계의 무한함, 그 무한함에 따르는 자유로움……. 이러한 관계의 기초가 바로 성이며, 이 욕구 역시 무한하며 자유롭다. 그래서 평등하다.

성적 욕구의 자유와 평등은 인간관계의 자유와 평등, 변화와 발전을 내포하고 있다. 즉 성적 욕구 자체가 변태(metamorphosis)이고 인간관계 자체가 변태이며, 따라서 우리 모두가 변태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낡은 관계로부터 새로운 관계를 꿈꾼다. 그 관계의 기초인 성에서도 새로운 무엇인가를 꿈꾼다. 그래서 바람을 쐬기도 하고 바람을 피우기도 한다. 그 꿈의 원동력은 <상상력>이다. 변태는 상상력이다. 이 상상력을 통하여 성은 낡은 관계로부터 새로운 관계로 변태하는 끊임없는 과정이다.


3. 성의 타입화와 상품화-성 욕구 실현 불평등의 기원.


그런데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변태 자체를 비정상으로 본다. 변태는 서열화, 계급화되어 있는 관계의 질서를 송두리째 파괴해 버린다. 오르가즘은 기존 관계의 파괴이다. 그것도 핵폭탄급 이상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때, 눈에 콩깍지가 씌었을 때, 기존의 세계는 한 순간에 날아가 버린다. 동시에 상상력은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며 사람들은 이 상상을 현실화시키려고 노력한다. 매번의 섹스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섹스는 매번 그 형태와 깊이를 달리한다. 그 속에서 새로운 자기를 발견한다. 인간으로서 새로운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기쁨, 이것이 섹스의 원동력이며, 사랑을 지속시키는 끈끈이이다.

섹스는 단지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변혁시키는 혁명적․실천적 활동이다. 바로 이러한 성의 특성 때문에 지배 계급은 대체로 이 성을 암흑의 저 깊숙한 우리에 가두어두고자 했다. 지배계급은 이러한 길들여지지 않은 동물적인 성을 가축처럼 길들이려고 하였다. 이 길들여진 성이 <인간화된> 성이다. 이 인간화된 성은 <상품화된> 성이다.

상품화된 성은 변혁적인 변태로서의 성의 상상력을, 즉 저항으로서의 성의 상상력을 <타입화>한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상상력을 지배계급과 자본의 이익 방향으로 유도한다. 이러한 자본의 이익 방향이 타입화이다. 이 타입화의 컨셉은 이른바 <섹시함>이다. 그러나 이 섹시함은 구체적으로, 객관적으로 정형화된 타입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자본과 지배계급은 이 섹시함이 기거할 유일한 하나의 장소를 찾는다. 그리고 그것을 객관화시켜 대중들에게 종교처럼 설교한다. <너희가 섹시함을 믿느냐? 이것이 바로 섹시함이니라!> 이제 섹시함의 이데아는 34-24-34의 몸매를 지닌 스타급 연예인으로 왕림하신다. 부처를 믿으면 부처가 되듯이 누구나 위의 숫자에 다가갈수록 섹시함의 이데아가 된다. 이제 섹시함의 이데아는 객관화되고 동시에 수량화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량화는 곧 상품화를 의미한다. 즉 사고파는 것을 뜻한다. 섹시함의 이데아는 돈으로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돈이 없는 자는 섹시함의 이데아에서 타락한 자들이다. 그들에겐 참된 인간다움의 섹시함이 없고, 오로지 동물적 본능으로서의 성적 욕구만이 있을 뿐이다. 섹시함의 이데아 계에서 추락하고 타락한 돈 없는 자들은 자신의 성 욕구가 동물적인 것임을 깨닫고 섹시함의 이데아를 상기시켜 섹시함의 이데아 세계로 돌아가고자 기를 쓰고 몸부림친다. <넌 어떤 타입을 좋아하니?> <김태희 정도?!> 또는 <비 정도?!> 이 타입화는 우리 일상생활에 깊숙이 각인되어 있다. 이 섹시함의 이데아를 돈을 들여 추구하지 않으면 그런 사람은 비정상이거나 모자란 사람이다. 즉 얼짱도 몸짱도 아니면 여자도 아니거나 남자도 아니거나 또는 세상물정 모르는 완전히 바보이거나 불평불만자이다. 이것은 아마도 성 정치학의 측면에서 보자면 배제의 정치학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성의 상상력을 복원하여야 한다. 그래야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대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성의 상상력의 복원은 섹시함의 이데아를 해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이데아, 타입의 절대적 보편성을 깨는 것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노동계급을 포함한 피지배 계급의 주체적인 새로운 수많은 타입들이 생산되어 타입들의 물결이 흘러넘치도록 해야 한다. 우리 모두 변태가 되어야 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