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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9/19
    우리 우리 자란다, 칭찬 먹고 자란다^^!(5)
    곰탱이
  2. 2006/09/11
    <페미니즘과 계급정치학>-2
    곰탱이
  3. 2006/09/09
    불혹에 대하여...(8)
    곰탱이
  4. 2006/09/07
    선생되기의 필요조건.(3)
    곰탱이
  5. 2006/09/02
    나-모순된 존재(7)
    곰탱이

우리 우리 자란다, 칭찬 먹고 자란다^^!

대학생씩이나 된 아이들에게 자란다는 표현은 격에 맞지 않은 줄 알면서도,

그래서 아이들이 우리들을 초등학생쯤으로 보는 것 아니냐고 티박을 놓을 줄 알면서도,

그냥 자란다는 표현을 쓰고 싶다.

굳이 이 표현을 쓰고자 하는 것은

누구나 죽을 때까지 자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이 조금씩 웃기 시작하고 자신의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건 다른 때 비하면 엄청나게 빨리 일어난 것이라 할 수 있다.

보통 한 달 반 정도 지나야 입을 열기 시작하는데...

이런 것은 아이들의 이름을 잘 외워서 그 이름을 불러주기 때문이리라.

 

사실 이름을 빨리 외울 수 있었던 것은 학생 수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역사철학 수업은 4명, 법대 지정교양 수업인 논리와 작문 수업은 2반인데,

한 반은 29명, 다른 한 반은 6명이다) 고맙게도 아이들이 처음 자신이 앉았던

그 자리에 계속 앉았기 때문이다(내가 그렇게 시킨 게 절대 아니다).

 

그렇게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고 말을 시킬 때 처음에는 수줍어 하다가

지금은 목소리에 힘도 들어가고 자신감이 있어 보이더라.

그러면서 눈망울이 또록또록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노래도 있지만, 그거 정말 사실이다.

그 눈망울을 안 본 사람은 사실 잘 모른다.

보는 사람을 얼마나 설레이게 하는지...

이건 행인 님도 마찬가지일 게다*^^*...(맞지요, 행인 님?^^)

이럴 때 선생이란 직업이 얼마나 축복 받은 직업인지...

 

수업 시간에 아이들과의 대화라는 게 질문하고 대답하는 것이 거의 대부분이지만,

질문에 대답하는 아이들에게 똑바로 쳐다보면서 <잘 했다, 오케이, 굿>을 하면,

아이는 수줍어하면서도 어깨를 으쓱거린다.

(요게 또 점수와 연관되기도 하지만서도 말이다*^^*...>

그런 후에 아이들은 내가 하는 말 중에서 무의식적으로 실수로 한 말들은 칼 같이 잡아낸다.

오늘도 한 건 당하고 왔다!!

(칠판에 뭔가 잘못 썼다가 바로 지적을 당했다!!)   

그런데 하나도 기분 나쁘지 않고 오히려 기분이 좋아서 어깨를 으쓱거릴 정도다.

(선생이 지가 틀려 놓고서도 어깨를 으쓱거리다니, 참으로 한심하지 않은가^^...)

그러면서 교실은 웃음이 넘쳐난다.

得天下英才而敎育之 三樂也라.(孟子 盡心 章 上)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함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

 

이 기세에 기름을 부어야 할 것이다.

그 기름은 이른바 야자!!!

(야자란 야간자율보충학습의 준말이다^^)

야자가 무엇인지 감비 님은 경험을 하셨다.

궁금하신 분은 감비 님께 여쭈어 보세용^^...

 

다음 주 야자가 기대된다.

아이들은 훨씬 더 신랄하고도 비판적으로 나를 교육할 것이다.

아기다리고기다리... 야자...

혹시 참여하시고 싶은 분은 덧글 다시라.

아이들에게 허락을 받도록 최선을 다해 보죠...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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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과 계급정치학>-2

<여성의 임노동은 매우 값싸기 때문에 자본에 유리하다. 여성들의 임금은 여성들이 노동력의 가치 이하로 임금을 지불받고, 노동력의 가치 면에서 남성보다 낮은 상황에 있음을 보여 준다. 여성노동의 이런 면들은 명백히 자본에 유리하다. 왜냐하면 임금 수준을 전체적으로 낮추어 주기 때문이다. 비치는 여성이 자본에 이런 이득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가족의 존재가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39쪽)
<기혼여성 노동자의 경우 국가보험과 사회보장 제도에 의해 남편의 피부양자로 간주되어 여성이 실업 상태에 있을 때 그녀의 재생산 비용은 남편 임금으로부터 충당된다. 그러므로 기혼여성을 고용하는 개별 자본가는 여성의 임노동이란 아내와 어머니라는 주된 역할에 비해 부차적인 것이라는 전제를 이용해서 임금을 매우 낮게 지불하고, 여성이 하나의 노동자로서 자신을 일상적으로 재생산하는 비용조차 충당하지 못하게 한다. 결국 여성들이 재정적으로 남편(혹은 동거인)에게 의존하게끔 만드는 가족구조와 이데올로기가 존재함으로써 여성들은 자신의 노동력 가치보다 낮은 임금을 지불받게 되는 것이다.>(이 역시도 비치의 견해) 
(40쪽)
⇒ 그런데 이러한 비치의 주장이 여성이 남성과 동일한 임금을 받는데 방해가 되는 요인이 가족이기 때문에 (포스트 모더니즘처럼) 가족만을 단순히 해체하고자 하는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공동체(코뮌)를 염두에 두고 주장하는 것인지를 잘 알 수 없다.
(이 책에서 미셀 바렛이 비치를 언급하고 있는 내용으로 봐서) 또한 비치가 단지 여성과 남성의 동일한 임금 체계만을 주장하는 것인지 아닌지도 모호하다. 만일 비치가 여성과 남성의 동일한 임금 체계만을 문제 삼는다면, 그래서 이 문제가 해결된다면,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성의 이중적 억압은 여전히 존재하게 될 것이다. 남성 노동자와 동일한 임금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여성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전히 착취 받는 노동자일 뿐만 아니라 여전히 가사노동을 전담함으로써 자신의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이중적 구조에 끊임없이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성과 남성의 동일 임금 체계는 노동자 계급의 단결을 위해 진일보한 것이지만, 개량적인 측면이 강하다. 만일 정규직, 비정규직을 막론하고 여성과 남성의 동일 임금체계를 노동자 계급의 강력한 투쟁을 통해 자본이 어쩔 수 없이 양보한다고 하더라도, 자본은 자신의 이익을 보존, 유지하고 더 나아가서 더 많은 이익을 내기 위하여 노동 강도를 엄청나게 강화시키거나, 아니면 동일 임금 체계의 영역에서 벗어난 노동자들(하위 주체)의 상대적인 임금 삭감을 하고자 할 것이다.
문제는 여성과 남성의 동일 임금 체계가 아니다(물론 이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여성 노동의 가치가 자본의 가치에 얼마나 기여하는가에 따라서 정해진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여성 노동의 가치가 인간의 가치에 기여한다는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의 기본적인 전략은 노동을 개별화하는 데 있다. 자본은 자기 자신을 보편자(인간 실천 활동의 결과물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실천 활동을 가능하게 만든다고 착각하고 있는 형이상학적?초역사적 보편자)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노동자를 추상적이고 순수한 개별적 개인(예를 들면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개인)으로서의 개별자로 만들고자 하고, 또한 만든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노동자가 인간(인간관계를 맺음으로써 되는 사회적 인간, 즉 유적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자본으로부터 보편성을 부여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인간(개인)은 사회적 인격(사회적으로 인간임을 인정받는 보증서와 같은 것)을 가지지 못한 비인간이 된다. 자본은 바로 자기가 이러한 보편성을 인간에게 부여하는 신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이것을 자본의 물신성이라고 한다).
그런데 왜 자본은 노동자에게 보편성을 부여하려고 하는가? 그것은 노동자가 없으면 자본은 보편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노동자의 노동이 가지고 있는 보편성(이는 자본의 보편성과 완전히 다르다. 이 보편성은 인간 실천 활동(생산 활동, 노동)의 결과물로서의 보편성이며, 절대적 보편성이 아닌 역사적 보편성(상대적 보편성)이며, 과정으로서의 보편성이다)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보편성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동자의 노동의 보편성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다시 말하자면 노동은 보편성과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맑스에 따르면 노동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데 있어서 기본적인 조건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 발전해 온 역사적 산물이다. 그리고 이 역사적인 산물인 노동에는 인간의 사회적 관계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의 노동은 임노동으로 대표되는데, 이 임노동은 그 자체로 노동이 가질 수 있는 보편성을 자기 자신 안에 가지고 있지 못하다. 왜냐하면 노동자의 임노동은 노동자가 순수하고 추상적인 개별적 개인으로서 자본가와 1대1의 계약 관계를 통해 비로소 현실화될 수 있을 뿐이며,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의 임노동은 순수하고 추상적인 개별적 노동자의 노동이 될 수밖에 없으며, 노동의 보편성을 자본으로부터 부여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자의 노동에는 자본에 종속되어 있으면서 자본의 이익에 복무하는 임노동만 있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의 노동에는 임노동 말고 자기 자신을 위해 생활필수품을 소비하면서 자신을 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인간으로서의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의 노동자를 만들어 내는 노동이 있다. 이 노동은 임노동과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철저하게 인간으로서의 자기 자신의 삶을 계획하며 현실화시키고자 하는 노동이다. 바로 이 노동이 인간 유적 존재의 보편성을 현실화시키고 실현시키는 역사적 산물로서의 노동이다.
그런데 이러한 노동은 여성의 노동, 특히 여성의 가사노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이 노동이 인간의 유적 보편성을 실현시킬 수 있는 가치를 지닌 노동이며, 인간의 가치를 실현시킬 수 있는 노동이다. 또한 노동자 계급을 생산하는 노동이며, 계급의식을 형성하며 보편화시킬 수 있는 씨앗을 가지고 있는 노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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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혹에 대하여...

오늘 비가 오고 바람도 좀 불고, 날씨가 쌀쌀해지니까 뭐 마음이 좀 거시기하다.

그러다보니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며칠 전에 선배와 함께 한 술자리에서 불혹에 관해 이야기한 것이 떠올랐다.

불혹이란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40대를 이르는 말이다.

그렇지만 불혹에 관한 이러한 뜻이 적절한 것이 아닐 것 같다는 것이 그 선배와 내가 얻은 공통의 결론이었다.

그 결론인즉슨, 불혹이란 어느 누구도 유혹(?)해 주지 않는다는 의미로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느 누구도 유혹해 주지 않는다는 것,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유혹해 주지 않는다는 것은 유혹해 줄 사람과 별로 인간관계를 맺고 싶지 않다는 말과 같다.

지금 이 시간에도 그 선배는 혼자서 산을 갔다온 후에 혼자서 어디에선가 술을 먹고 있을 것이며, 나는 여기서 이렇게 불질을 하고 있다.

 

40대에는 왜 서로서로가 유혹을 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 40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유혹을 하지 않는 것일까...

너무 일찍 늙어 버려서 쉰 내가 풀풀 나서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어서일까^^...

 

얼핏 생각하기에 그 이유는 이런 것이 아니지 않을까...

오늘날 자본주의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무한한 적대적 경쟁 시대에 살고 있다.

여기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강해야 한다.

1등이 되어야 한다.

남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다.

약육강식의 생존 양식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무의식적으로 이러한 생존 양식을 체화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지...

그러니까 남에게 어쨌거나 약점을 잡히지 말아야 한다. 약하게 보여서는 안 된다.

유혹해 달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일이다.

특히 가부장적 조직에서는 이 정도가 더 심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 놓고 말한다는 것이 점점 힘들지 않는가 생각해 본다.

나이가 들어서도 젊었을 때와 같이 아프다고 말하게 되면, 겉으로야 네가 많이 아프구나

하겠지만 돌아서서는 나잇살 먹어서도 아직 철딱서니가 없다고 소문나기 십상이다.

그러면 은근하게 사람들에게 따 당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 아픔이라는 것이 남의 것이 아니라 곧 자신의 것이고, 자신의 아픔을 잊고자 하는데 그 아픔을 기억하도록 만들어 주는 사람이 싫어서일 것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이 그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그 아픔은 배가 되어 돌아오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러니 자꾸 외로워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특히 권력을 가졌다고, 어느 정도의 사회적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더욱...

 

불혹이란 참으로 외로운 일이다.

이 외로움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까...

내 생각엔 수다를 떨어야 외로움이 해소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침묵은 금이 아니다!!!

침묵은 외로움, 우울증을 낳는 병원균이라 생각한다.

 

지금 그 선배에게 전화해서 수다를 떨어보자.

난 권력을 가지고 있지도, 일정한 사회적 지위도 가지고 있지 않은 소시민이지 않는가*^^*..

지금 책가방을 싼다.

 

불혹은 각성하라! 각성하라! 각성하라!

 

불혹에 대한 투쟁 승리!

 

반 불혹 집회로!

 

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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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되기의 필요조건.

개강을 한 지도 열흘이 지났다.

가을하늘처럼 아이들의 모습도 싱그럽기 그지없다.

아이들 없는 학교는 앙코 없는 찐빵이요, 오아시스 없는 사막이고,

실 없는 바늘이다.

아이들의 싱그러움은 학교를 싱그럽게 만들고 선생을 싱그럽게 만든다.

또한 한 학기 동안 아이들이 푸르고 싱그러워야 

선생도 한 학기 동안 싱그러워질 수 있다.

교육이란 아이들과 선생 모두 서로에게 싱그러운 존재로 만드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아이들과 선생 모두 서로에게 싱그러운 존재가 될 수 있을까?

누가 누구에게 먼저 말을 걸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무래도 사회적으로 권력을 쥔 선생이 먼저 말을 건네야 하는 것이지 싶다.

말을 건넨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말을 건네기 위해서는 선생은 끊임없이 수신(修身)해야 한다.

수신이란 말 그대로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 닦는 것이다.

즉 자신을 잘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선생은 아이들을 만나기 전에 몸과 마음의 상태가 최상의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이 상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수업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이들은 점쟁이보다도 더 잘 선생의 상태를 잘 안다.

그리고 개코보다도 더 정확하게 선생의 냄새를 잘 맡는다.

아이들은 선생의 눈빛이나 옷 입은 상태를 보고서

선생의 몸 상태나 마음의 상태가 어떤지를 직감적으로 알아낸다.

 

만일 선생이 몸과 마음의 상태가 최고조가 아닐 경우

아이들은 선생 말이나 수업에 집중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날 수업은 그걸로 끝이다.

이런 상태가 두서너 번 되풀이되면 한 학기 수업은 말 그대로 망한 것이다.

아이들은 선생이 자신들에게 집중해 주길 바란다.

그런데 선생이 몸과 마음을 최상의 상태로 만들지 못하면

아이들에게 집중을 하지 못하게 된다.

선생의 몸과 마음이 콩밭에 가 있으면 아이들의 몸과 마음도 콩밭에 가기 마련이다.

 

선생이 몸과 마음의 상태를 최상의 상태로 만들어서 자신들에게 집중해 나갈 때

아이들은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

그러면서 선생과 아이들 사이에는 믿음이 쌓여가게 된다.

믿음이 쌓여갈 때 아이들은 공부에 집중하게 되고 자신의 삶에 대한 의식을

가지게 되고 자신의 삶에 대해 집중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푸르고 싱그러워지면서 아주 활발해진다.

그러면 이러한 아이들의 상태가 선생의 몸과 마음의 상태를 더욱더

최선의 상태로 끌어올리는 원동력이 된다.

맑스가 말한 대로 교육자가 교육을 받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이 민주주의이며 이 민주주의를 아이들과 선생 모두 일상화시키게 되는 것이다.

 

선생의 현장 활동이란 다름 아닌 학교에서 아이들과 이러한 민주적 관계를

지속적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 1학기에는 나의 마음이 콩밭에 가 있음으로 해서 아이들의 마음도

콩밭으로 갔고, 그래서 수업은 거의 엉망의 상태가 되었다.

이는 아이들의 강의 평가에 고대로 나타나게 되었다.

거의 꼴찌에 가까운 평가를 받았다.

이것은 고통이었고 슬픔이었으며 나의 삶에 많은 생채기를 남기는 것이었다.

 

이제 이번 학기에는 내 삶에 상처를 남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내 삶에 상처를 남기는 것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내 아이들과

나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상처를 남기는 일이 된다.

자신의 고통을 아이들에게 그리고 나를 아는 모든 사람에게

떠넘기는 어리석고 사악한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가을하늘처럼 푸르고 가을햇살처럼 청명한 2학기를 만들어야지.

 

 

예전에 끄적였던 것이 생각나네요.

그래서 그냥 올려 봅니다,

아이들을 위해, 나를 위해 나를 장작으로 만드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기 위해서^^...

 

# 박남준 시인의 <흰 부추꽃> 노래를 듣고 #  - 2001. 3. 13. 화 -

 

그래도 그때
푸르던 때 있었습니다

 

해와 달 별 서슬 푸르게 차갑던 시절
서툴던 우리 삶 어쩔 줄 몰라
상처 주고 상처 받고 고통 받고 고통 주며
슬픔으로 얼룩지던 밤

 

그렇지만
그 상처 고통 슬픔 옹글옹글 모아
소주 막걸리로 빚어
서로에게 힘과 양식되어
삼십촉 희미한 백열등 희망과 사랑으로
서로 어깨 맞대고 보듬으며
서러운 노래
시리도록 푸르게 불렀던 때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
서투른 삶 더 서툴어지고
옹글옹글 모여 희망과 사랑을 빚었던
그 상처와 고통과 슬픔은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밤거리에서
쓰레기되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다
무심한 발길에 걷어 채이고
행여 묻을세라 청소부가 쓰레기통에 처박고

 

이 상처 고통 슬픔 모아
도끼 만들어
세상을 도끼질하고
나를 베어내어
아궁이 장작불에 던져져
세상 상처 고통 슬픔 빚어
화롯불 따스함 전해 줄 수 있을지
희디흰 재로 뿌려져
푸른 숲이 될 수 있을지

 

그래도
이 세상 도끼질하여
나를 베어 장작 만드는 일
게을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때
푸르던 때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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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모순된 존재

좀전에 연구실에서 강의 준비하면서 책을 읽다가

연구실 밖에 나가 담배 한 대 피우던 참이었다.

(연구실은 내 이름으로 된 연구실이 아니다. 한국학술진흥재단 프로젝트에

선정된 여러 선배들이 학교로부터 배정받은 연구실인데,

이 선배들이 학교에 거의 나오지 않아서 자리 지킴이로 나와서

공부하는 곳이다.)

 

그런데 초등학교 1학년 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재잘거리면서 엄청 모여드는 것이었다.

왜 그런가 봤더니 연구실이 속해 있는 문과대 건물에서 아이들의 한자 능력 검정 시험이 있는 것이었다. 교회 차량에서 내린 아이들은 교회 선생님(?, 요즘은 교회에서도 아이들을 모으기 위해 한자도 가르치는 모양인가?)이 나눠 주는 수험표를 들고 고사장 안으로 하나둘씩 들어가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한자의 뜻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그 능력을 측정한다고 저 난리들인지... 학부모의 교육열(?)이 눈물겹기까지 하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좀더 좋은 곳에 취직을 해서 생존경쟁에 밀리지 않고 먹고살 수 있기를 바라는 부모의 심정이란 오죽할까...

그런데도 한 사람의 교육자로서 안타깝고 씁쓸한 느낌은 어쩔 수가 없다.

이건 사교육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문제를 넘어서서(그렇다고 사교육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저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학교와 집이라는 사회의 모든 영역(아이들에게는 학교와 집은 거의 대부분의 인간 관계를 맺는 곳이 아닌가 한다)에서 자본주의의 세례를 받는다는 것, 그래서 아이들의 미래뿐만 아니라 현재 인간해방, 여성해방, 노동해방 등의 해방을 꿈꾸는 사람들의 미래도 불투명해 보인다는 것이 너무 서글프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또한 서글프고 자괴감이 생기게 만드는 것은 그 아이들이 앞으로 나의 밥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11월에 고3 수능이 끝나면 빛을 갚기 위해 돈을 벌러 이러한 사교육 시장으로 가야 하는 처지다. 사실상 대부분의 시간 강사들이 적게는 기백만 원에서 기천만 원의 빛을 지고 살아서 어쩔 수 없이 사교육 시장으로 나가고 있는 실정이다.

만일 사교육 시장으로 안 나가려면 정규직 교수가 되는 길밖엔 없는데, 이게 낙타 바늘구멍 통과하기보다도 더 어렵다는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규직 노동자가 되는 것만큼이나 말이다.

 

이것이 자본주의 체제 아래 먹고사는 것과 관련해서 나타나는 내 존재의 실존적(?) 모순이 나타나는 형태이다. 비단 나뿐만이 그러랴.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이디서부터 이 모순의 매듭을 풀어야 할 것인가?

 

이 모순을 풀어야 하는 과제가 나의 업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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