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10/12

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0/12/31
    19장. 발전하는 시각 세계 (2)
    곰탱이
  2. 2010/12/28
    19장. 발전하는 시각 세계 (1)
    곰탱이
  3. 2010/12/28
    10 겨울방학 서양 미술사 스터디 예비 모임^^
    곰탱이

19장. 발전하는 시각 세계 (2)

▲ 귀도 레니(Guido Reni : 1575-1642) ▼

- “로마에서 자기의 독자적인 양식을 발전시킨 많은 이탈리아 거장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마도 귀도 레니일 것이다.” (393-4쪽)

- 레니는 “카라치 파에 입문”했다. “한때는 그의 명성이 라파엘로와 비등할 정도로 높았는데 도판 253(<오로라(새벽의 여신), p. 394)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394쪽)

- “사실 레니는 사람들이 자신의 그림을 보고 그가 모방하고자 했던 위대한 화가 라파엘로를 생각하게 되기를 원했다. 현대의 비평가들이 레니의 업적을 별로 높게 평가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394쪽)

- 그러나 “레니가 그의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아름다움을 실현하기 위해서 취한 방법, 즉 비속하고 추하며 그의 고상한 이상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은 무엇이든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현실보다 더 완벽하고 이상적인 형태를 추구하는 그의 노력”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395쪽)

- “고전 시대의 조각상들에 의해 설정된 기준에 따라서 자연을 이상화하고 ‘미화하는’ 방침을 공식화한 사람들은 카라치와 레니, 그리고 그레니의 추종자들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떤 정해진 방법 같은 것에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는 고전 미술과 분명하게 구별하는 의미에서 신고전주의적(neo-classical), 또는 ‘아카데믹한(academic)’ 방침이라 부른다.”(395쪽)

 

▲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 : 1594-1665) ▼

- “‘아카데믹한’ 거장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인 “프랑스 화가 니콜라스 푸생”은 “로마를 제2의 고향으로 삼고” 살면서 “정열적으로 고전 시대의 조각상들을 연구했는데, 그것들의 아름다움을 통해 순수하고 장엄했던 고대 도시들에 대한 자신의 시각을 전달하고자 했다. 도판 254(<아르카이에도 나는 있다>, p. 395)는 이러한 부단한 노력의 결과로서 생겨난 유명한 작품들 가운데 하나이다.” (395쪽)

- “명문에는 라틴어로 다음과 같이 써 있다.”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ET IN ARCADIA EGO).” “나(EGO), 즉 죽음은 목가적인 이상향인 아르카디아에도 의연히 군림한다는 뜻이다.” (396쪽) 그런데 죽음을 대하는 이들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하고 단순해 보인다(물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경외심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 표정을 바깥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로마인들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대한 깊은 성찰만이 “죽음의 공포가 말끔히 가신 조용한 휴식의 이러한 회고적인 정경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396쪽)

 

▲ 클로드 로랭(Claude Lorrain : 1600-82) ▼

- 푸생과 “동일한 회고적인 아름다운 분위기를 그린 작품으로 유명해진” 화가는 “클로드 로랭”이다. (396쪽)

- 도판 255(<아폴론에게 제물을 바치는 풍경>, p. 396)를 보자. 여기서 “그는 화면 전체의 장면을 현실과 다르게 보이는 금빛 광선이나 은빛 대기 속에 이 모든 것들을 무르녹아 들어가게 묘사했다.” (397쪽)

- “자연의 숭고한 아름다움에 처음으로 사람들의 눈을 뜨게 만든 화가는 바로 클로드 로랭”이었다. (397쪽)

 

▲ 페터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 1577-1640) ▼

- 루벤스는 “푸생과 클로드보다는 한 세대 위였고 귀도 레니와는 비슷한 연배였다.” (397쪽)

- 루벤스는 “어떤 ‘운동’이나 유파에 가입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의 본질적인 신념, 즉 화가의 임무는 자기 주위의 세계를 그리며,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그림으로써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화가 자신이 사물의 생동감 넘치는 다양한 아름다움을 즐긴 대로 느끼게 해 주는 일이라는 신념이 흔들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397쪽)

- “이러한 접근 방법으로 보면 카라바조의 예술이나 카라치의 예술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397쪽)

- “그는 이탈리아로부터 교회와 궁전을 장식하기 위한 거대한 화면을 선호하는 취향을 플랑드르에 도입했는데, 이것은 당시의 고관대작들과 군주들의 취향에 잘 들어맞았다. 그는 거대한 화면 속에 인물들을 배치하고 전체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빛과 색채를 구사하는 기술을 공부했다. 도판 256(<성인들의 경배를 받고 있는 성모와 아기 예수>, p. 399)은 안트웨르펜의 한 교회당의 주 제단을 장식할 그림의 습작으로 그가 이탈리아 선배 화가들의 작품을 얼마나 잘 연구했으며 또 그들의 이념을 얼마나 대담하게 발전시켰는지를 보여준다.” (398쪽)

- “이 그림에는” “<윌튼 두폭화>(pp. 216-7, 도판 143), 벨리니의 <성모>(p. 327, 도판 208) 또는 티치아노의 <페사로의 성모>(p. 330, 도판 210)” 등의 “그림에서보다도 더 많은 움직임과 빛, 그리고 훨씬 공간감이 넘치고 있으며 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다.” (398쪽)

 

▲ 페터 파울 루벤스의 <아이의 얼굴>(도판 257, p. 400) ▼

- “마술사와 같은 그의 솜씨는 모든 것을 생기발랄하게 하고, 강력하고 유쾌하게 살아 숨 쉬는 곳으로 만들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그의 완벽한 기량은 그의 간단한 소묘 작품(p. 26, 도판 1<아들 니콜라스의 초상>)이나 재미 삼아 그린 그림들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400쪽)

- “도판 257은 작은 소녀의 얼굴인데 아마도 루벤스의 딸인 것 같다. 이것은 구도상의 복잡한 기교도 없으며 화려한 의상이나 흘러내리는 빛도 없는 단순한 소녀의 정면 초상일 뿐이다. 그런데도 이 그림은 살아 있는 사람처럼 숨을 쉬고 맥박이 고동치고 있는 듯하다.” (400쪽)

- “루벤스가 어떻게 해서 이 생기발랄한 생명력의 인상을 만들어 냈는지” 하는 것은 “아마도 입술의 물기를 암시하고 또 얼굴과 머리카락을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데 사용한 대담하고 섬세한 빛의 효과와 분명히 관계가 있을 듯싶다.” (400쪽)

 

▲ 페터 파울 루벤스의 <자화상>(도판 258, p. 401) ▼

- 이 시기 “네덜란드 자체도 스페인의 ‘가톨릭’ 지배에 저항한 신교 국가인 홀란트와 스페인과의 동맹 하에서 안트웨르펜의 지배를 받는 가톨릭교의 플랑드르로 양분되어 있었다. 이 가톨릭 진영의 화가로서 루벤스는 독자적인 지위에 올라섰다.” (402쪽)

- “귀족임을 암시하는 검(劍)을 차고 있는 그의 자화상(도판 258)은 그가 자신의” 이러한 독자적인 “지위를 얼마나 의식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402쪽)

 

▲ 페터 파울 루벤스의 <평화의 축복에 대한 알레고리>(도판 259, p. 402) ▼

- 루벤스의 “손을 통해서 고전적인 우화와 우의적인 이야기들이 그의 딸의 초상처럼 실감나게 살아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402쪽)

- “우의화는 보통 다소 따분하고 추상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루벤스의 시대에는 그것이 사상을 표현하는 편리한 하나의 수단이 되었다.” (402-3쪽)

- “도판 259가 그런 그림의 하나인데 이것은 루벤스가 스페인과의 화평을 설득하고자 영국 국왕 찰스 1세에게 선물로 가져왔던 것이라고 한다. 이 그림은 평화와 축복을 전쟁의 공포와 대조시키고 있다.” (403쪽)

- “이 그림의 풍부한 세부 묘사와 생생한 대조들, 빛나는 색채에 몰입되어 보게 되면 이러한 구상들이 루벤스에게 있어서는 맥 빠진 추상으로서가 아니라 박진감 넘치는 현실로 생각되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403쪽)

- 그러므로 “고전적인 아름다움의 ‘이상화’된 형태가 그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런 형태들은 그와는 거리가 멀고 추상적인 것이었다. 그가 그린 남자와 여자들은 그가 실제로 보고 좋아했던 살아 있는 사람들이었다.” (403쪽)

 

▲ 안토니오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 : 1599-1641) ▼

- 안토니오 반 다이크는 “루벤스의 유명한 제자와 조수들 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푸생과 클로드 로랭의 세대에 속했다.” (405쪽)

- 안토니 반 다이크의 “기질과 분위기는 그의 스승과 대단히 달랐다.” “그의 그림에는 힘이 없고 다소 우울한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바로 이러한 자질 때문에 제노바의 근엄한 귀족들과 찰스 1세와 그의 왕당파 당원들이 그의 그림에 마음이 끌렸는지도 모른다.” (405쪽)

- “오늘날 거만한 귀족적인 태도나 궁정적인 세련미를 숭상하던 당시의 영국 사회에 관한 그림의 기록을 갖게 된 것은 반 다이크 덕분이라 할 수 있다.” (405쪽)

- “사냥을 하던 중에 방금 말에서 내린 찰스 1세의 초상화(도판 261, <영국 국왕 찰스 1세>, p. 404)는 역사 속에 영원히 남고자 원했던 스튜어트 왕조의 한 군주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서의 찰스 1세는 비할 데 없이 우아하고 확고한 권위와 높은 교양을 지닌 인물이며, 예술의 후원자이자 신으로부터 왕권을 부여받은 자로서 타고난 위엄을 강조하기 위해 권력의 다른 외형적인 장식이 필요치 않았던 한 남자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405쪽)

- “루벤스의 생명력이 넘쳐흐르는 건장하고 힘찬 인물들 못지 않게 인간에 대한 우리들의 시각 세계를 풍부하게 해 주는 명문 출신다운 귀족적인 품위와 신사적인 유유자적한 태도(도판 262, <존 경과 버너드 스튜어트 경>, p. 405)의 이상을 그림 속에 구체화시킨 사람”은 바로 반 다이크였다. (406쪽)

 

▲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 : 1599-1660) ▼

- “루벤스는 스페인을 여러 번 여행하던 중에 젊은 화가를 만났는데 그 젊은 화가는” “마드리드의 펠리페 4세의 궁전”의 궁정화가였던 디에고 벨라스케스였다. (406쪽)

- 벨라스케스는 “카라바조의” “‘자연주의’의 방침을 흡수하여 전통에 구애받지 않고 자연을 냉정하게 관찰하는 데 그의 예술을 바쳤다.” (406쪽)

- “도판 263(<세비야의 물장수>, p. 406)은 그의 초기 작품의 하나로 세비야 거리에서 물을 팔고 있는 한 노인을 그린 것이다. 이것은 네덜란드 화가들이 그들의 재주를 과시하기 위해서 고안해 낸 그런 유형의 ‘풍속화’이지만, 카라바조의 <의심하는 성 토마>(도판 252)와 같이 강렬하고 예리한 통찰력으로 그려졌다.” (406-7쪽)

- “지치고 주름살 투성이 얼굴에 누더기 망토를 걸친 노인과 둥근 모양의 큼직한 토기 항아리, 유약을 바른 단지의 표면과 투명한 유리잔에 어른거리는 빛 등 모든 것이 너무나 실감나게 그려져 있어서 그 물건들을 마치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407쪽)

 

▲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도판 264, p. 407) ▼

- 펠리페 4세의 궁정화가로서 “그의 주요 임무는 왕과 왕족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의 “위신을 내세우며 딱딱하고 어울리지 않게 옷을 입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벨라스케스는 마치 마술을 부린 것처럼 이들의 초상화들을 사상 유례 없는 가장 매혹적인 그림들로 바꾸어 놓았다.” (408쪽)

-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카라바조의 수법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버렸다.” (408쪽)

- “그는 루벤스와 티치아노의 필법을 연구했으나 자연에 접근하는 그의 방식에는 ‘남에게서 빌어온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도판 264는” “티치아노가 그린 <교황 바오로 3세>(p. 335, 도판 214)보다 백 년여 뒤인 1649-50년에 로마에서 그린 것이다.” (408쪽)

- “티치아노가 라파엘로의 그림(p. 322, 도판 206, <교황 레오 10세와 두 추기경>)에서 자극을 받았던 것처럼 벨라스케스는 티치아노가 그린 <교황 바오로 3세>에 대해서 도전 의식을 가졌을 것이다.” (408쪽)

- “그러나 붓을 가지고 물질의 광택을 표현하는 방법이나 교황의 표정을 포착한 붓질의 정확성에 있어서 티치아노의 수법을 완전히 터득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것이 실물을 묘사한 그림이며 잘 베껴낸 공식 같은 그림은 아님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408쪽)

 

▲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시녀들) Las Meninas>(도판 266, p. 409) ▼

- “사실 벨라스케스의 원숙한 작품들은 붓놀림의 효과와 색채의 섬세한 조화에 대단히 많이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도판만 가지고는 원화가 어떠한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의 작품들 중에서 특히 그런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라스 메니나스>라고 알려진 높이가 3미터에 이르는 대작(도판 266)이다.” (408쪽)

- “이 그림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을 알 수 없으나 나는 카메라가 발명되기 이미 오래 전에 벨라스케스는 현실의 한 순간을 화면에 담았다고 상상하고 싶다.” (410쪽)

 

▲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스페인의 펠리페 프로스페로 왕자>(도판 267, p. 410) ▼

- 벨라스케스는 카메라가 한 순간의 현실을 가감 없이 포착하듯 현실을 그림으로 전환시키는 데만 멈추지 않았다. 도판 267도 “얼핏 보아서는 인상에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것”처럼 보이는 초상 사진처럼 보일지 모른다. (411쪽)

- 그러나 그의 그림에는 일반 사진처럼 포착된 사물의 세세한 측면을 묘사하기보다는 그 사물을 사물이게끔 하는 ‘인상’(또는 일반자)을 묘사하려는 특징이 잘 드러난다.

- “붉은 의자 위에 앉아 있는 강아지와 같은 작은 모티프조차도 그야말로 기적과 같은 탁월한 솜씨를 드러내 보인다. 얀 반 에이크가 그린 <아르놀피니의 약혼>(도판 160, p. 243)에 나오는 작은 개와 비교해” 보자. (411쪽)

- “반 에이크는 작은 개의 곱슬곱슬한 털 하나 하나를 묘사하는 데 온 정성을 쏟고 있는 반면에, 그로부터 이백 년 뒤의 벨라스케스는 개의 특징적인 인상만을 포착하려고 노력했다.” (411쪽)

- “레오나르도처럼,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한층 꼭 필요한 것만을 묘사하고 보는 사람에게 상상할 여지를 남겨 놓고 있다. 비록 그는 털을 하나도 그리지 않았지만 그의 작은 개는 사실상 반 에이크의 개보다 훨씬 더 털이 북실북실하고 자연스럽게 보인다.” (411쪽)

- “19세기의 파리에서 인상주의 창시자들이 과거의 어느 다른 화가들보다도 벨라스케스를 존경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효과 때문이었다.” (411쪽)

 

▲ 19장의 소결론 ▼

- “자연을 새로운 눈으로 보고 관찰하며 색채와 빛의 새로운 조화를 끊임없이 발견하고 그것을 누리는 것이 화가의 기본적인 과제가 되었다. 유럽의 가톨릭 진영에 살던 위대한 미술가들이나 정치적 장벽의 또 다른 쪽인 신교도의 네덜란드에 살던 위대한 미술가들이나 이 점은 모두 같았으며 이러한 새로운 임무에 그들의 열정을 쏟았다.” (411쪽)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19장. 발전하는 시각 세계 (1)

19장. 발전하는 시각 세계(17세기 전반기 : 가톨릭 교회권의 유럽)

 

▲ 바로크 양식의 등장과 특성 ▼

- “르네상스를 뒤이은 양식을 보통 바로크(Baroque)라고 부른다.” (387쪽)

- 원래 바로크라는 말은 포르투갈어나 에스파냐어에서 <비뚤어진 모양의 진주>를 뜻하는 <바로코(baroco)>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며, 처음에는 곡선을 많이 사용한 장식 과잉의 이 양식을 <불규칙한> <그로테스크한>이라는 부정적이거나 모멸적인 의미로 사용하였다.

- 좀 더 세분화해서 말하자면 바로크는 매너리즘과 로코코 사이의 17세기 문화 전반의 양식을 지칭하며 이는 처음으로 이탈리아가 중심이 되어 시작되었다. 바로크는 <매너리즘>(17세기 비평가들이 16세기 말의 미술가들을 비난하는 데 사용했던 가식과 천박한 모방이라는 본래의 의미 ; 선배들이 사용했던 부조화를 종종 모방했다는 의미)과 <로코코>(결벽증적인 단편성 추구)와는 다르게 전체에 종속되는 부분들의 조화를 통한 균형을 강조하였다.

- 바로크는 프랑스의 고딕양식(즉 중세 고딕양식)이 국제적 성격으로 발전하였던 것처럼 범 유럽적 문화 현상이었다. 그러나 국가나 각 지방 특유의 문화권에 따라 서로 상이하게 나타난다. 즉 하나의 공통분모를 갖기엔 너무 방대하고 다양한 예술 경향이었던 것이다.

- 바로크는 크게 두 종류로 나타나게 된다. 즉 가톨릭적 바로크와 부르주아․프로테스탄트적 바로크로 나뉜다.

- 가톨릭적 바로크는 카라바조의 자연주의로부터 루벤스, 베르니니의 예술에서 나타난다. 부르주아․프로테스탄트적 바로크는 렘브란트와 얀 반 호이엔(Van Goyen, Jan)의 예술에서 나타난다.

- 전자는 감각주의적이고 기념비적, 장식적인 반면 후자는 이보다 더 엄격하고 더 형식을 존중하는 ‘고전주의적’ 양식으로 나타난다. 전자는 14세기 옥캄의 중세 경험론에 기인한 바 크다.

- 가톨릭적 바로크는 로마를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려는 로마 교황의 진흥책에서 발단되었으므로 반종교개혁의 유력한 수단이 되어 여러 가톨릭 국가에서는 종래의 종교 그림이나 조각상을 새롭게 하여 종교 미술에 신선한 입김을 불어넣었다.

- 이렇게 해서 나타난 가톨릭적 바로크 미술의 특징은 비고전적, 동적, 남성적, 불규칙적인 성격과 심한 과장성이다(그러나 19세기 중엽의 독일 미술사가들에 의해 바로크란 용어에서 <변칙․이상․기묘함>이라는 부정적 평가는 제거되었다).

- 동시에 가톨릭적 바로크는 귀족들의 표현 수단이기도 하여 화려 호사한 의식을 과시하고 장식하는 구실을 다하였다.

- 이런 화려하고 호사스러운 장식을 바탕으로 한 가톨릭적 바로크 미술은 르네상스 미술에 비해 감동이 넘치는 극적 표현을 특색으로 한다.

- 결론적으로 바로크 미술의 성격은 3가지로 정의될 수 있다.

⑴ 자연주의적 추세를 부활시킨 카라바조는 예술의 원천으로 관념보다 자연의 관찰을 강조했다-가톨릭적 바로크.

⑵ 전성기의 르네상스 고전기와 로마 고대 풍습으로의 복귀였다-부르주아․프로테스탄트적 바로크.

⑶ 필수적이며 가장 지속적인 요소로 베네치아 특히 티치아노의 전통이다. 이러한 전통과 코레조의 예술에서 이탈리아 바로크의 색깔과 빛의 풍요로움이 비롯된다-가톨릭적 바로크.

▲ 자코모 델라 포르타(Giacomo della Porta : 1541?-1602) ▼

- 도판 250(<로마의 일 제수 교회>, p.389)을 보자. 이 교회 건물은 지금으로 보면 별로 대단해 보이지 않지만 세워질 당시인 1575년에는 “대단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388쪽) 왜냐하면 이 건물은 “유럽 전역에 걸친 종교개혁에 대항해서 싸우려는 드높은 기대를 걸고 새롭게 설립된 예수회(Jesuits) 교단의 교회”였기 때문이다. (388쪽)

- 이 교회 건물은 이전 중세 시대의 교회 건물들과 비교해 볼 때, 훨씬 더 장식적이고 현란하면서도 나름대로 규칙성을 부여함으로써 교회의 권위를 잃지 않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먼저 이 교회 건물이 중세 시대의 교회 건물들과 비교해 볼 때 훨씬 더 장식적이고 현란한 것은 “이 건물이 고전기 건축의 여러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388쪽)

- 일단 “원주가 틀을 이루고 양 쪽에 작은 현관을 거느리고 있는 중앙의 대현관은” “고대 로마의 개선문(<티베리우스 황제의 개선문>, 도판 74, p.119) 형식을 상기시켜 준다.” (388쪽)

- 또한 “원주(오히려 반원주나 벽기둥에 가깝다)가 아키트레이브를 받치고 있고 그 위로 높은 ‘아티카(attica)’가 있으며 이번에 이것은 또 위층을 지탱하고 있다.” (388쪽)

- 그러나 이전 중세 시대의 교회 건물, 즉 “브루넬레스키의 <파치 예배당>(도판 147, p.226)”, “브라만테가 설계한 <템피에토>(도판 187, p.290)”, “심지어 산소비노의 <산 마르코 교회 도서관>(도판 207, p.326)” (389쪽)과 비교해서 훨씬 더 현란하고 장식적인 이유는 앞서 이야기한 “고전적인 요소들을 하나의 패턴으로 융합시킨 방법을” 볼 때 “로마나 그리스, 심지어 르네상스 건축법까지도 도외시하고” (388쪽) 있기 때문이다.

- 이렇게 도외시하는 특징들은 크게 2가지로 나타낼 수 있다. ⑴ “마치 전체 구조를 보다 호화스럽고 다채롭고 또한 장엄해 보이게 하려는 듯 기둥이나 반기둥이 모두 이중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388-9쪽) ⑵ “이 건축가가 단조로운 중복을 피하고 이중 틀에 의해서 강조된 대현관이 있는 중심부에 초점을 주기 위해 각 부분들을 세심하게 배치한 점이다”(예를 들어 각 현관 문 위에 장식된 부조상은 삼위일체의 형식을 띰으로써 양쪽 작은 현관문의 의미를 잘 드러내고 있다). (389쪽)

- 그런데 ⑵의 특징인 ‘세심한 배치’는 “모든 부분이 전체적인 효과를 이루기 위해 존재”하도록 이루어져 있으며 “모두 하나의 커다랗고 복잡한 형태 속에 융합되어 있다.” (389쪽) “이 건축가가 아래층과 위층을 조화 있게 연결”시키기 위해 “고전 시대의 건축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일종의 소용돌이 형태를 사용했다” (389쪽)는 점을 예로 들 수 있다.

- “사실상 순수한 고전적 전통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바로크 건축가들에게 퍼부었던 비난의 대부분은 바로 이러한 곡선과 소용돌이 무늬 때문이었다.” (389쪽)

- 그러나 이 무늬를 빼면 이 교회 건물은 ‘기계적’으로 분할되어 버릴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 무늬는 그 자체로 보면 이상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건물 전체에 건축가가 의도했던 그런 일관성과 통일성을 부여하고 있다.” (390쪽)

 

▲ 17세기 회화의 특성 ▼

- “매너리즘의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 회화가 그 이전 시대의 거장들의 양식보다 더 풍부한 가능성을 지닌 양식으로 발전하게 된 과정은 여러 모로 바로크 건축의 발달사와 비슷하다.” (390쪽)

- “우리는 틴토레토(도판 236, 237 ; pp.369, 370)와 엘 그레코(도판 238, 239 ; pp.372, 373)의 위대한 작품들 속에서 17세기 회화”의 “새로운 이념들”, 즉 “빛과 색의 강조라든가 단순한 균형을 무시하고 보다 복잡한 구도를 선호한다든가 하는 것”들이 “성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390쪽)

- 그렇지만 “17세기 회화는 매너리즘 화가들의 양식을 단순하게 지속시킨 것만이” 아니라 “거기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고서 논쟁을 벌였다.

- (그런데 “미술 세계에서의” “논쟁 자체는” 16세기에 처음 일어난 것이었는데, “16세기에는 회화가 조각보다 나은 예술이냐 또는 구도가 색채보다 더 중요하냐 아니면 그 반대인가 하는 식의 문제로 논쟁을 벌였다(예컨대 피렌체 사람들은 구도를 중시했고 베네치아 사람들은 색채를 높이 평가했다).” (390쪽))

- 17세기 논쟁의 쟁점은 다음의 2가지 흐름 사이의 대립과 관련된 것이었다. 즉 한편으로 라파엘로의 단순하고 이상적인 아름다움, 즉 고전주의적인 아름다움의 추구, 다른 한편으로는 추한 것이라 할지라도 추한 그대로의 진실, 즉 본 그대로의 진실 추구였다.

- 이러한 쟁점에 서 있던 두 화가가 있었는데, 그들은 전자와 관련해서는 <안니발레 카라치>, 후자와 관련해서는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조>였다.

 

▲ 안니발레 카라치(Annibale Carracci : 1560-1609) - 이탈리아 볼로냐 출신 ▼

- “매너리즘에 진력이” 났다. (390쪽)

- “안니발레 카라치는 베네치아 파, 특히 코레조 파의 미술을 배운 화가 집안의 일원이었다. 그는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그가 대단히 존경했던 라파엘로의 작품 세계에 매료되었다. 그는 매너리즘 화가들이 의도적으로 거부했던 라파엘로의 단순성과 아름다움을 다시 회복시키고자 했다.” (390쪽)

- “당시 그가 속해 있던 로마의 집단이 부르짖은 구호는 고전적인 아름다움의 양성이었다. 우리는 그러한 그의 의도를 죽은 그리스도의 시체를 보며 슬퍼하는 성모를 묘사한 제단화(도판 251, <그리스도를 애도하는 성모>, p.351)에서 찾아볼 수 있다.” (390-1쪽)

- 그뤼네발트가 그린 고통으로 심하게 일그러진 예수(도판 224,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p.351)와 비교해보면 안니발레 카라치는 보는 사람에게 죽음의 공포와 아픔의 고통을 상기시키지 않으려고 아주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91쪽)

- “이 그림 자체는 초기 르네상스 화가의 그림처럼 구도가 단순하고 조화롭다.” 그러나 “이 그림은 르네상스 회화라고 착각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구세주의 몸 위에서 아른거리는 빛의 묘사 방식이라든가 우리의 감정에 호소하는 표현 방식은 르네상스 양식과는 아주 다른, 말하자면 바로크적이다.” (391쪽)

 

▲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da Caravaggio : 1573-1610) - 밀라노 근처 출신 ▼

- “그의 작품은 카라치와는 전혀 달랐다. 카라바조”는 “추한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진실, 즉 그가 본 그대로의 진실이었다.” (392쪽)

- “그는 고전적인 규범을 좋아하지 않았고 또 ‘이상적인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신통치 않게 생각했다. 그는 인습을 타파하고 미술에 대해 아주 새롭게 생각하고 싶어 했다.” 비평가들은 “그를 ‘자연주의자(naturalist)’라고 비난했다.” (392쪽)

- “성 토마를 묘사한 그의 작품(도판 252, <의심하는 토마>, p.392)을 살펴보자.”(393쪽) 이 그림에서는 “카라바조의 ‘자연주의’,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그것을 추하다고 생각하든 아름답다고 생각하든지 간에 자연을 충실하게 묘사하려는 그의 의도”가 잘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393쪽)

- 이러한 “그의 의도는 아마도 아름다움에 중점을 두는 카라치의 태도보다 더 돈독한 신앙심에서 우러나온 것 같다.” (393쪽) 그의 신앙심은 성경 이야기(“네 손가락으로 내선을 만져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복음 20장 27절)(393쪽에서 재인용))에 충실한 것에 기초하고 있는 것 같으며, 이러한 충실함은 성경의 인물들을 아름답게 묘사하기보다는 그 당시에 성경의 인물들, 즉 성인들이 겪었을 고초와 풍상을 그대로 그려내는 것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 이러한 그의 자연주의는 그림에서 성 토마가 예수를 의심하면서 자기 손가락을 예수의 옆구리 상처에 집어넣는 장면, 그리고 성인들의 모습이 풍상을 다 겪은 노동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 카라바조의 자연주의를 곰브리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위대한 예술가였던 그는 그 전의 조토(도판 135, <그리스도를 애도함>, p. 203)와 뒤러(도판 222, <예수 탄생>, p. 347)처럼,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마치 그의 이웃집에서 일어난 듯이 그 자신의 눈앞에 그려보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는 이 오래된 성경의 등장인물들을 보다 진실되고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393쪽)

- “심지어 그가 명암을 다루는 방법도 그의 이러한 효과를 이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빛은 인체를 우아하고 부드럽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깊은 어둠과의 대조를 생겨나게 하는 눈부시도록 번쩍이는 거센 빛이다. 그러나 그 빛은 이 이상한 장면 전체를 조금도 타협하지 않고 정직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393쪽)

- “안니발레 카라치와 카라바조는 19세기의 유행에서 배제되었으나 20세기에 들어 다시금 그들의 진가를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당시에 회화에 불어 넣어준 자극과 영향은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393쪽)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10 겨울방학 서양 미술사 스터디 예비 모임^^

서양 미술사를 겨울방학 때 같이 공부하기로 했는데,

예비모임2011년 1월 11일 화요일 늦은 5시

 

학생회관 1층 식당에서 하고자 합니다.^^

 

교재는 <서양 미술사>(E. H. 곰브리치 지음, 백승길, 이종숭 옮김, 예경, 2009)이고요,

진도는 19장 [발전하는 시각 세계]부터 하고자 합니다.

같이 공부하실 분은 밑에 덧글을 달아주시고 연락처를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변동 사항이 생길 경우 바로 연락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