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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5/09/21
    메모 11.
    곰탱이
  2. 2015/09/05
    메모 10.
    곰탱이
  3. 2015/09/05
    메모 9.
    곰탱이

메모 11.

~** 메모 11 **

- “예를 들어 주자학은 천을 초월자로 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태극(공)으로 보지만, 이는 별로 모순하는 것이 아니다. 가령 주자학에서 천이라는 개념이 사용되고 있다고 해도, 사실 그것은 태극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서로 변환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천이 인격적으로 표상된다고 해도, 그것은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태극이다. 이리하여 주자학에서 태극에 이르는 길, 즉 수양으로서 ‘명경지수(明鏡止水)’의 경지에 도달하는 일은, 동시에 ‘천명’을 인식하는 일인 것이다. 자기 내부의 ‘이’와 세계의 ‘이’는 이렇게 상호 변환 가능한 관계에 있다.” (같은 책, 242쪽)

- “진사이가 비판하는 것은 바로 이 초월=내재라는 사고이다. 초월=내재라는 것은 결국 내재적인 입장이다. 따라서 그것은 ‘마음’이나 의식에서 출발하게 된다. 사상가들은 진사이나 소라이가 ‘천’의 초월성을 강조했음을 중시하고 있다. 그러나 천의 초월성은 주자학에서도 이야기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초월=내재와 같은 ‘내부’에서 출발하는 일, 또는 ‘마음’으로부터 출발하는 것, 즉 고립된 개인의 ‘의식’에서 출발하는 것을 거절하는 일인 것이다.” (같은 책, 242쪽)

- “진사이가 공자만을 성인으로 본 것은, 공자가 초월적인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흔해빠진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어디에나 있는 인간의 초월성을, 또는 타자의 타자성을 발견했던 것이다. 또 그가 『논어』에서 발견한 것은 ‘심원’한 언어나 초월적인 의미가 아니라 ‘평명(平明)’한 언어의 심원함과 초월성(외재성)인 것이다.” (같은 책 243쪽)

- “하지만 그(진사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마음’을 감각이나 성리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만인에게 공통된 ‘마음’ 따위는 없다는 사실이다. 달리 말해 개개인이 서로 타자라는 것이다.” (같은 책, 244쪽)

- “주자학에서 각 개인은 이른바 초월론적 자기(훗설)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 ‘성(性)’이 다양하다고 할 때, 진사이는 그러한 초월론적 자기를 해체하는 것이다. [……] 이와 똑같이 진사이에게 주자학은 타자와의 관계(윤리적 영역)를 지적으로 처리하는 것으로 비치고 있다. 그것이 아무리 도덕을 과시해도, 본질적으로는 ‘격물치지’, 즉 ‘지에 도달하는’ 일이 과제인 것이다. [……] 그리고 이 동정을 ‘타고난 것’이라고 말할 때, 진사이는 ‘성선설’이나 ‘생득설(生得說)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 영역이 지에 의해 기초 부여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뿐이다.” (같은 책 246~247쪽)

- “인간의 본래적인 동일성, 진리나 완전한 해방에 도달할 가능성이라는 이념은, 오히려 타자에 대한 ‘잔인 각박’으로 전화한다. 만인이 동일하므로, 진리에 도달한 자는 진리에 도달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 당연히 절대적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주자학만의 문제는 아니다. 진사이의 숙(塾)에 권력관계가 없는 것은, 진사이가 ‘가르치고-배우는’ 관계를 거부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 반대이다. 이 관계 없이 인간의 보편적인 동일성 등이 있을 수 없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사이는 일반적인 타자에게 강의할 수 있는 교의 같은 것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또 그의 주석에 완결 따위는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같은 책 250~1쪽)

- “그 어떤 언어도, 문화도, 종교도 형식적·구조론적으로 등가라고 보는 견해는 결코 서양 중심주의를 전복시키지 않는다. “이 민족중심주의는 역으로 자기는 반=민족중심주의라고 생각하는, 해방적 진보주의의 민족중심주의인 것이다.”” (같은 책 2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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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10.

~** 메모 10 **


- 단독성은 개별성과 구분되는 것이다.
단독성은 어떤 특정한 공동체(경험론적인(즉 동의라는 행위를 통한) 사회계약론에 의해 구성된 일반적인 것)에 속할 수 없는, 이 공동체 내부에 있지만 외부에 있는 것, 즉 물 자체로서의 타자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 개별성은 어떤 특정한 공동체의 부분으로서 속해 있는 것, 또는 속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서의 타자(공동체에 단지 대립한다는 의미의 타자, 즉 공동체에 의해 지양되어야만 하는 타자)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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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9.

~** 메모 9 **


- “히코하치의 신분은, 역시 다른 조건과 결부되어 있기는 했지만, 눈앞의 봉건적 신분 질서 관계를 명백하게 초과하여 부정하는 곳까지 그를 ‘개(個)’로서 밀어붙였다.” “주어진 신분 질서 안에 매몰되어 있는 한, 거기에서 ‘개’는 나타나지 않는다. ‘개’는 이 질서와의 마찰, 충돌을 통해 나타난다.” (<<유머로서의 유물론>>, 202쪽)

- “나카노 시게하루가 ‘개’를 ‘신분 질서와의 마찰, 충돌’ 안에서 보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쿠라하라 코레히토처럼 ‘개’를 계급 안에 종속시키는 것도 아니며, 히라노 켄처럼 ‘개’를 집단과 마주 세우는 것도 아니다.” (같은 책, 202쪽)

- “요컨대 나카노가 말하는 ‘개’는 집단에 맞서는 ‘개’라든지, 자기의식으로서의 ‘개’와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관계를 은폐하는 것일 뿐이다. ‘실재로서의 개’는 물론 실재가 아니다. 그것은 관계의 갈등·알력·투쟁으로만 존재한다. ‘개’를 내세우는 것은 관계이지 ‘근대적 자기의식’이 아니다.” (같은 책 203쪽)

- “‘개’는 어딘가 일정한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네덜란드에 망명하고 있던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개’이지만, 프랑스에 받아들여진 그것은 이미 ‘근대적 자의식’일 뿐이다. 이러한 ‘차이’를 보지 않는다면, 근대의 비판이나 근대의 초극이라는 공소한 말을 가지고 놀게 된다. 맑스에 대해서도 똑같다. ‘집단과 개’, ‘지식인과 대중’, ‘서양과 일본’ 등의 대립 개념은 끊임없이 변용되는 다수적(多數的)인 여러 관계의 알력과 관계해서만 ‘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숨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사회적인 다수성을 이원적 대립으로 바꾸며, 역사적인 것을 비역사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것’을 내면화하고 소거해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관계를 지워버릴 수 없으며, 그 관계에서 탄생되는 ‘개’를 전혀 지울 수 없다.” (같은 책, 2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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